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0권, 인조 7년 1629년 5월

싸라리리 2025. 12. 26.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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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을유

일식이 있었다.

 

장만(張晩)의 말로 인하여 억울한 옥을 다시 심리하였다.

 

5월 2일 병술

상이 하교하였다.
"예로부터 어진 정치란 환과 고독(鰥寡孤獨)을 우선적으로 돕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더구나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의 고아(孤兒)와 과처(寡妻)이겠는가. 지금 마음을 다해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고 있으면서 그들만 돌보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흠이 되는 일이다. 해조로 하여금 추수할 때까지 그들에게 매월 양료(粮料)를 주어 급한 처지를 돌보게 하라."

 

주강에 자정전 월랑에서 《서전》을 강하였다. 한재 때문에 정전을 피한 것이다.

 

5월 3일 정해

동지사 겸 성절사 송극인(宋克訒), 서장관 신열도(申悅道) 등이 조서와 칙서를 받들고 연경(燕京)으로부터 돌아왔다. 봉천승운황제(奉天承運皇帝)의 조서에,
"짐이 제왕의 자리를 이어받아 만방을 거느리고 다스리게 되자,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것들이 모두 경사로 여겨 추대하고 있다. 더구나 그대는 삼한(三韓) 번방으로서 평소부터 성교(聲敎)가 미더운 곳이 아니던가. 기자(箕子)의 팔조목(八條目)을 잘 지켜 옛날부터 예의의 나라로 일컬어 왔는데, 화봉인(華封人)의 삼축(三祝)015)  처럼 빌어 주어 과연 다남(多男)의 복을 받았다. 가상한 그대의 성의야말로 기쁨과 복을 함께 누릴 것이다. 이에 짐은 하늘의 돌보심과 조상의 남기신 복을 받아 금년 2월 4일에 첫아들을 낳았으니, 황후 주씨(周氏)의 소생이다. 장추(長秋)016)  에 서기가 넘치고 함하(函夏)017)  에 은총이 미치도다. 별이 빛나고 바다가 반짝이듯 맏아들 얻은 기쁨을 중국 천지에 두루 알리고, 해가 비치고 달이 비추듯 환호(渙號)를 외지의 나라들까지 골고루 내리기 위해 은악(誾渥)을 반포하여 덕음(德音)을 선포하노라. 짐은 바야흐로 먼 나라까지 생각하고 있는데 그대 지금도 번직(蕃職)을 정성껏 지키고 있으니, 신명한 숭산(嵩山)이 진산이 되어 영원히 왕도(王圖)의 맹약이 지켜질 것이며, 압록강 물결이 맑아 대대로 중국의 물줄기를 조종으로 삼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조서를 특별히 내리는 것이니 그대 공경히 받을지어다."
하였고, 또 칙서에,
"짐이 큰 자리를 이어받고 황태자가 탄생 되었기에 넓은 은총이 해내 곳곳에 널리 젖어들기를 바라는 것이다. 생각건대 왕은 대대로 이어온 동국의 번신으로서 직책 수행과 조공을 바치는 데 있어 정성과 공순한 태도가 오래도록 드러났으니, 그 공로에 상응한 포상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건대 다사한 나머지 또 사신을 보내면 많은 비용을 낼까 염려되어, 이에 조서를 그대의 신하에게 주어 가져가게 하면서 아울러 왕과 왕비에게 채폐(綵幣)와 문금(文錦)을 내리는 것이니, 왕은 이것을 경건히 받아 짐이 그대에게 후히 대우하고 그대의 마음을 알아 준다는 뜻을 사방에 알리라. 그런 뜻에서 칙유한다."
하였다. 다음날 상이 왕세자로 하여금 백관을 거느리고 진하례(陳賀禮)를 행하도록 하고, 이어 국중에 교서를 반포하였는데, 교서에,
"하늘이 성인을 사랑하시고 돌보셔서 국조를 이을 맏아들을 주셨고, 황제는 또 번국을 사랑하고 복되게 하기 위하여 윤음을 내리셨다. 이는 실로 사해가 함께 기뻐해야 할 일이며 만백성 모두가 경사로 여겨야 할 일이다. 생각건대 하늘의 큰 명이 우리 황조(皇朝)에 집결되었다. 그리하여 성자 신손이 대를 이어 역수(曆數)가 1억 년에 이를 것이며 하늘과 땅이 덮고 싣고 있듯이 팔방이 골고루 화육(化育)될 것이다. 마침 보위를 이어받아 빛나게 임어하신 후 곧 교매(郊禖)018)  의 밝은 응험을 받았다. 종묘 제사를 맡을 사자를 두셨으니 이는 선왕의 음덕을 힘입은 것이며, 앞으로도 많은 자손이 번연하여 경사와 은택이 온 누리에 미칠 것이다. 이 작은 나라가 병들어 있는 것을 깊이 진념하시어 조공과 축복의 번거로움을 거듭되게 않으시려고, 모든 것을 옛 법도에 의거하여 많은 물건을 내려주시고 조서와 칙서를 선포하여 그냥 배신 편에 부쳐 보내셨기에, 5월 3일 정해일에 친히 백관을 거느리고 교외로 나아가 조칙을 맞았다. 조칙을 개봉하여 읽어 보니 전에 없던 총애와 은악이었으니, 먼 곳이든지 가까운 곳이든지 모두 함께 기뻐해야 할 일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 그 뇌우(雷雨)의 은택에 젖어 이 색다른 은혜를 드러내야 할 것이므로, 이달 4일 새벽 이전의 잡범에 대하여는 죽을 죄라도 모두 사면하고, 백관들에게는 각기 1등의 자급을 가자할 것이며 더 이상 가자를 못할 자에게는 그의 친속에게 대신 가자하도록 하라. 아, 훌륭한 한 사람을 얻음으로써 아름답고 흡족한 기반이 영원히 잡혔고 오복(五福)을 거두어 널리 베풀었으니 빛나는 아름다움을 함께 누리자."
하였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황태자가 탄생하여 밝은 조서를 내리셨으니 이는 바로 천하의 큰 경사입니다. 황조(皇朝)가 우리 나라의 피폐한 상황을 염려하여 조서를 배신 편에 그냥 부치자는 논의가 있었지마는 사신으로서는 다만 다소곳이 조정의 처분만을 기다렸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동지사 송극인은 폐단을 더는 일만 중한 것인 줄 알고 국가 체면에 손상이 가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다방면으로 주선하여 조칙을 받아 돌아옴으로써 2백 년 동안 황제께서 경사를 반포하던 예를 하루아침에 무색해지게 만들었으니, 동지사 송극인과 서장관 신열도를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봉안역(奉安驛)에 딸린 전답 1결을 정숙 옹주(貞淑翁主) 집에다 절급(折給)하여 제전(祭田)으로 하도록 하였다고 하는데 그 일이 물론 친한 이에게 친히 대해 주는 뜻에서 나온 것이겠으나 국가에서 역을 설치하고 거기에 전답을 둔 법이 지극히 엄중하여 사사로운 일로 공(公)을 엄폐할 수는 결코 없는 일입니다. 빨리 본 역으로 되돌려주도록 명하시어 금석(金石)과 같은 법을 중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누차 아뢰자 따랐다. 당초에 이귀(李貴)가 병조 판서로 있으면서 그 불가함을 말하였기 때문에 대간이 논한 것이다.

 

평안도 희천군(熙川郡)에 우박이 크게 내렸다.

 

예조가 아뢰기를,
"평소 경회루(慶會樓)의 못에다 비를 빌면 금방 응험이 있다고 하여 지금 기우제를 올리려고 하는데, 근래 오래도록 묵어 더러워졌습니다. 한성부로 하여금 수리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5월 5일 기축

경기 관내에 가뭄이 심하였다. 하얀 벌레가 벼 줄기를 갉아먹고 또 검은 벌레가 벼 싹을 거의 다 먹어치웠다.

 

왜사 평지광이 종자 8명을 거느리고 대궐 아래서 숙배하니, 상이 중사로 하여금 빈청에서 술을 대접하게 하였다.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가 차자를 올리기를,
"이번에 온 왜사가 이미 국왕의 사신이라고 칭한 이상 국서가 없을 리가 만무합니다. 그러므로 신의 생각은 필시 의성(義成)이 그 이름을 빌어 자기 신분을 높이려고 한 말일 것이므로 그 말을 믿고 일정한 격식을 경솔히 무너뜨려 우리에게 전에 없던 폐단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지금 해조가 아뢴 내용을 보니 그들이 말한 일들이 꽤 근거가 있는 듯하고, 또 관백이 청한 것이 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는 분명히 관백의 지휘을 받고 우리 나라를 엿보러 온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찾는 것 중에는 오랑캐들의 활과 칼 그리고 말안장 등이 있었다니, 이는 저들의 기계 성능이 어떠한가를 알아보기 위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들을 대하는 방법을 종전처럼 소홀히 보아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더구나 오늘의 사세는 평소와 달라 태산처럼 무겁게 여겨질 만한 형세는 없고 좌우에서 침노하는 걱정만 있는데, 무엇을 믿고 객사를 가볍게 보아 그들로 하여금 감정을 품게 할 것입니까. 그들의 하는 말이 하나는 이웃 나라 응원을 오겠다는 것이고, 하나는 황조에 충성을 바치겠다는 것으로, 뜻은 꼭 그렇지 않을지라도 말인즉 근거가 있니 우리가 대의명분을 내세워 물리치더라도 별도로 사의를 표하는 것이 옳을 듯싶습니다. 지금 금국에서 온 차사는 정전(正殿)에서 대우하고 금백(金帛)까지 주는 것이 당연한 정의가 있어서겠습니까. 이 역시 시기의 경중에 따라 부득이해서 한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사를 대할 때의 임시변통이 호사를 대할 때와 달라야 할 까닭이 뭐가 있겠습니까. 지금 저들이 청하고 있는 것이 승(僧)과 악(樂)과 문(文)인데, 불교 문제에 있어서는 일찍이 유정(惟政)이 왕래했던 일도 있었으니 지금 당장 허락한다고 하여도 이는 오랑캐로 오랑캐를 대하는 도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한 명의 중을 보내 주기로 허락하고 이 기회에 그들의 정세까지 염탐하여 오게 한다면 사리에 아무런 해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현방이 국서는 없을지라도 스스로 관백의 명령을 받고 왔다고 했기 때문에 예조가 연향할 때도 추장의 사신으로 대우하지 않았던 것이니, 그럴 바에야 애당초 사실대로 말하기를 ‘처음에는 국서가 없었기 때문에 도주의 차사로 생각했던 것인데 지금 네 말을 듣고서야 비로서 관백이 시켜서 온 것임을 알았다.’ 하고서 예우를 조금 더해주고 접대도 좀 후하게 했어야 옳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갈 때는 한 번 불러 접견하시어 저와 이를 똑같이 대하고 있다는 성인의 큰 덕화를 알도록 하소서."
하였다. 이에 대하여 비국이 복계하기를,
"차자 내용이 임시 변통의 방법을 깊이 있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중 한 명을 보내주는 일도 무방할 듯합니다. 다만 현방이 돌아갈 때 함께 보내려고 하면 기일 안에 보내지 못할까 염려되니, 후일 천천히 논의하여 들여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6일 경인

조종조에서 궁술(弓術)을 권장하던 규례에 따라 가선 대부(嘉善大夫) 이하의 관원들로 하여금 간혹 궁술을 시험하게 할 것을 병조가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지경연 이귀가 아뢰기를,
"농업과 잠업은 나라의 대본이므로 잠시라도 폐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나라 뽕밭으로는 율도(栗島)보다 잘 되는 데가 없는데 지금은 전혀 뽕나무를 심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사부(士夫)들이 값을 주었다고 하면서 그 토지를 점유하여 사전(私田)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명년 봄부터는 뽕나무를 많이 심고 경작을 못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매우 옳다. 그렇게 시행하도록 하라. 사부들이 그것을 점유하여 사전으로 만들고 있다니, 매우 한심한 일이다. 해당 관원은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려우니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신이 ‘당(黨)’에 대해서 차자를 올렸더니 상께서 이는 비록 주자(朱子)의 말일지라도 나는 듣기 싫다고 하교하셨는데, 아마도 사관이 그 말을 이미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임금은 한마디 말이라도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고 보면 신은 상의 그 하교가 타당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주자가 한 말은 틀림없이 당을 비호하려고 한 말은 아닐 것이다마는 나의 생각에는 주자가 실언한 것으로 여긴다. 신하는 마땅히 임금이 옳은 길로 가도록 인도할 뿐이다. 임금을 끌어들여 당을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그것은 아마도 성현의 말이 아닌 것 같다."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선조 대왕께서도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당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교하셨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시독관 권도(權濤) 등에게 이르기를,
"주자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권도가 아뢰기를,
"주자의 본뜻은 그렇지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옛날의 붕당은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지금의 붕당은 군자·소인의 구별이 없이 마치 세업(世業)이나 되는 양 자기 집안 대대로 전해온 논의만을 서로 전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요(堯)는 고요(皐陶)와 당을 하였고, 탕(湯)은 이윤(伊尹)과 당을 하여 지치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소신의 말은 모두 공(公)에서 나온 말인데, 상께서는 번번이 편당으로 의심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자가 처신을 하는 데 있어서 만약 어진 임금을 만난다면 자기 도를 행하는 것이 옳겠지만 만약 자기 재능을 펼 수가 없으면 물러가 전야에서 밭갈이 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니, 주자의 말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임금을 끌어들여 당을 만들려는 뜻을 가진 사람치고 군자가 될 수가 있겠는가?"
하자, 권도가 아뢰기를,
"그때는 어진이와 군자를 당을 하는 사람으로 지목하여 도를 행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그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였고, 이귀가 아뢰기를,
"지금 조정에서는 어떤 사람을 논하고 싶어도 상께서 자기와 의견을 달리한 자를 공박한다고 하실까 염려스럽고, 또 모인을 천거하고 싶어도 상께서 그의 당에 붙었다고 생각하실까 염려스럽기 때문에 할 말을 다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예조가 왜사에게 연향례를 행하려고 하자, 현방이 《해동기(海東記)》와 《오례의(五禮儀)》의 등본을 내보이며 말하기를,
"예조에서 할 연향은 이미 행하였고 지금은 정 1품의 관원이 연향을 주관하는 것과 승지(承旨)가 임금이 하사한 술을 전하는 절차가 남아 있는데, 오늘 연향은 전례를 알 수 없으므로 우리들은 참석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평상시에는 도주가 특별히 보낸 사신이거나 추장들의 사신이 나오면 사건의 중요성이나 차인(差人)의 경중에 따라 혹은 국왕이 접견할 때도 있었고 혹은 대신이 연향을 주관할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들도 사실 중대한 문제를 가지고 왔는데, 모두 옛 규약과는 동떨어진 대우를 하고 있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였다. 예조가, 현방 등이 은연중 국왕의 사자로 자처하고 있는데 전산(畠山) 이하 제전(諸殿)에서 보낸 사신들에게 모두 한차례씩 접견하는 규식이 있으니 묘당에서 참작하여 처리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 하교하기를,
"접견 문제는 이미 결정된 사항이니 다시 거론할 것이 없다."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저들이 번번이 관백의 말이라고 하면서 국왕 사신으로 자처하고 1품관이 나와 연향을 주관해 주기를 희망하고 있는데, 지금 만약 해조가 연향을 주관하는 것으로만 끝나고 말면 저들이 틀림없이 실망을 할 것입니다. 1품관이 연향을 주관하게 하여 멀리서 온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7일 신묘

왜사가 경서(經書)와 《통감(通鑑)》·《목은집(牧隱集)》 등의 서책을 요구하니, 상이 주라고 명하였다.

 

강원도 안협(安峽)에 새알만한 큰 우박이 내렸다.

 

5월 8일 임진

조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대사헌 이홍주(李弘胄)가 아뢰기를,
"상께서 비록 감손(減損)을 많이 하여도 수령들이 여전히 거두어들이고 있다고 하니 백성들이 어떻게 혜택을 입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감손하고 또 감손한다 하여도 간사한 관리들의 도둑질거리만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하였다. 영사 이정구(李廷龜)가 아뢰기를,
"수령을 자주 바꾸는 것이 지금 큰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혹 공무 집행 과정의 사소한 실수로 파출까지 한다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니 앞으로는 수령을 자주 바꾸지 말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매우 옳다. 만약 죄를 범한 자가 있으면 곤장을 치고 바꾸지는 말도록 해야겠다."
하자, 정구가 아뢰기를,
"수령이라면 모두가 사대부인데 어떻게 곤장을 쳐가면서 백성을 다스리게 할 수 있겠습니까. 조정에서 신하 대우하는 도리가 그래서는 옳지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졌으니 꼭 벌을 주어야 경계하고 조심할 것이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옛 임금들은 이러한 재이(災異)를 당하면 반드시 백성이 고통에 얼마나 시달리는가를 살피고 인재를 들어 썼는데, 오늘날은 인재가 얼마나 침체되었으며, 백성들 부역은 얼마나 번거로운가."
하자, 정구가 아뢰기를,
"비록 한재가 아니더라도 현직 중에서나 미천한 사람 중에서 인재를 발굴하는 일은 진실로 성세(聖世)의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외방에서 마구 거두어들이면 서울에 사는 백성들은 살길이 열리는데, 지금은 서울이나 외방이나 모두 원망들이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하니, 지경연 장유(張維)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 시대의 병통에 딱 맞는 말씀입니다. 반정 이후로 서울 백성으로서 모리를 하는 자들이 전과 같이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원망하는데, 그것들은 간사한 백성으로서 돌볼 것도 없는 것들이지만 외방 백성들은 각양각색의 작미(作米) 등 부역 때문에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작미하는 일이야 종전부터 있었던 일이지 오늘 시작된 일은 아니다."
하였다.

 

이조가 아뢰기를,
"역적 임경사(任慶思) 등이 살던 삭령(朔寧)·광주(廣州)·김포(金浦)·통진(通津) 등의 고을은 당연히 읍호(邑號)를 강등해야겠으나, 광주와 김포는 침원(寢園)이 있는 곳이어서 강등하기가 미안하니 종전 예대로 수령만을 파직시키고, 삭령은 강등하고 통진은 혁파하소서."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그까짓 조무래기 역적들 때문에 고을을 혁파하고 수령을 파직시킨다는 것은 자못 타당치 못한 일이다. 모두 혁파하지 말아 백성들의 폐단을 없애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신들이 감선(減膳)의 하교를 받고 날로 드시는 어선(御膳)의 물목을 조사해 보았더니 갑자일 감선 이후로 거의 모양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다 지금 또 감선을 하면 거의 드실 것이 없게 되므로 신들이 아무리 헤아려 보아도 다시 더 감선할 물건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재해를 만난 임금이면 입맛 갖추어 먹지 않는 것이 예로부터 있었던 예법인 것이다. 그중 감해야 할 물건이면 몽땅 제감하여 유명무실의 결과가 되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평지광 등에게 연향을 베풀자 지광이 도주의 서계와 진상 물품을 올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묻자 지광 등이 서두에 요동 평정 문제, 조공길 문제 및 만송원(萬松院)과 유방원(流芳院)을 똑같이 대우한다는 것은 타당치 못하다는 뜻을 말하고, 다음으로 또 도주가 이미 강호(江戶)에다 집터를 받아 내년이면 그곳에다 집을 짓고 자기 가권을 볼모로 보낼 것이라고 하였다.

 

5월 9일 계사

모문룡(毛文龍)의 참장(參將) 곡승은(曲承恩)이 1천여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가도에서 이산(理山) 등지로 가 주민들을 상대로 노략질을 하여 강변 일대가 시끄러웠다.

 

5월 12일 병신

상이 사직단에서 비를 빌었다. 상이 초헌례(初獻禮)를 행하고 왕세자가 아헌(亞獻), 영의정 오윤겸이 종헌(終獻)을 하였는데, 제가 끝나자 비가 조금 내렸다.

 

우의정 이정구가 경연에서 아뢰기를,
"북교(北郊)의 제사를 종전에는 매우 극진히 받들어 왔었는데 근래 와서는 홀만하기 그지없어 심지어는 향합(香盒)이 없이 향로(香爐) 뚜껑에다 향을 담고, 폐비(幣篚)가 없어 폐백을 사기(沙器)에다 올리고, 술잔도 없어 술을 사기 종자에다 붓고 있으니 너무나 놀랄 일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특별히 검칙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고서야 신(神)이 올 리가 있겠는가. 해관을 추고하고 다시 정하게 갖추게 하라."
하니, 예조가 아뢰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여러 차례 변란을 겪고 나니 물력(物力)이 남아난 게 없어 자성(粢盛)과 희생(犧牲)도 모두 격식대로 갖출 수가 없습니다. 봉상시(奉常寺)만 하여도 제기(祭器)가 갖추어 있지 않다고 본조에 보고하여 왔기에 해당 각 관아에 공문을 발송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으레 있는 것이 없어 손이 미치지 못한다는 말로 우선 당장 핑계만 대고 있습니다. 지금 이 북교의 제기 역시 이와 같이 모양이 말이 아니니 참으로 너무나 놀랄 일입니다. 지금부터 봉상시와 각 능소에서 보고해 온 제기에 대하여는 해당 관아에서 서둘러 정비하게 하고 전생서(典牲署)에서도 희생 사육에 더 많은 힘을 써 사전(祀典)을 소중히 여기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3일 정유

조경(趙絅)·조석윤(趙錫胤)·박의(朴漪) 등을 선발하여 독서당(讀書堂) 사가 독서(賜暇讀書)하게 하였다.

 

예조가 아뢰었다.
"왜인 접대에 관한 등록(謄錄)이 난리통에 산실되었기에 일찍이 경상도에 그 사실을 공문으로 알려 그 감영 내의 문서를 수송하도록 하였는데, 지금 감사 홍방(洪霶)이 보고해 온 것을 보니 다만 접대하는 사례와 선척(船隻)의 대·중·소에 따른 수치, 그리고 바다를 건너는 동안의 양료(粮料)를 얼마 준다는 내용만 기록되어 있고, 공무 및 진상에 대한 가목(價木)의 다과 등은 모두 기록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신 등이 천계(天啓)019) 5년020)  의 동래 부사 장계를 가져다 보았더니, 공무목(公貿木)은 병진년021)  에 수를 감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정간(井間)에 기록되기는 계축년022)  부터 모두 감소되어 있었습니다. 너무 의아스러워 그때의 왜학 훈도(倭學訓導) 강우성(康遇聖)을 불러 물어보았더니 그가 계축년에 차임(差任)이 되었다가 을묘년에 갈려 왔는데 그 자신이 강정(講定)하여 계축년조를 감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5월 14일 무술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상이 묻기를,
"공무역(公貿易)을 감제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고 하는데, 뭇 논의들은 그것을 다시 여는 데 대하여 의견들이 어떻던가?"
하니, 특진관 이경직(李景稷)이 아뢰기를,
"공무역 감제는 이미 오래되었는데 동래부에 소장되어 있는 문서도 분명치가 않아 반드시 강직하고 총명한 낭청을 보내 정확히 내용을 조사하게 하여야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대개는 큰 배는 절반, 중간 배는 3분의 2를 감제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기유년 약조(約條)도 없는가?"
하니, 경직이 아뢰기를,
"기유년023)  에 약조한 책은 있으나 거기에는 정해진 수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초의 약조를 말할 것 같으면 제 1선(船)은 1백 50동(同), 제 2선, 제 3선은 1백 31동이었다가 그 후 19동을 더 주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동래부의 문서가 그렇게 분명치 않다니 만약 청렴치 못한 관리라도 있으면 그가 비록 도둑질을 자행하더라도 조정에서나 감사가 어떻게 알겠는가."
하니, 경직이 아뢰기를,
"혼조(昏朝) 때에 탐관오리들이 문서를 흐리게 작성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조 낭관 중 강직하고 총명한 자를 내려보내 1년 치 급여분과 미수된 것을 자세히 밝히도록 하고 또 백성의 전결도 그 다소를 살펴오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이어 경직에게 이르기를,
"대마도의 크기가 강화도와 비교하여 어떻던가?"
하니, 경직이 아뢰기를,
"크기는 강화도와 같은데 모두가 산골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구는 얼마나 사는가?"
하니, 경직이 아뢰기를,
"그곳에 8개의 읍이 있고 부중(府中)에는 3백, 4백 호의 인가가 있으며 수도는 애탕산(愛蕩山) 밑에 있는데 12통로와 24루(樓)가 마치 바둑판 모양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거리에는 사람이 가득하고 칼과 창 등이 숲처럼 줄지어 있으며, 게다가 또 10리에 달하는 견고한 성이 있고 군대들이 쇠몽둥이를 들고 성문 밖에 꿇어앉아 있으며 청마루 안에는 수백 명의 장관(將官)들이 있습니다."
하였다.

 

어영청(御營廳)이 아뢰기를,
"전일 인대할 때 제조(提調) 이서(李曙)로 하여금 어영군(御營軍)의 신역(身役) 유무를 조사하여 8개 번(番)으로 나누어 정하게 하였습니다. 그 중의 공천(公賤)은 이름을 기록하고 역을 면제시켰으며, 여정(餘丁)과 장인(匠人)의 경우는 신포(身布) 수납을 면제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밖의 무학(武學)·별시위·충찬위·충익위·충장위·신선(新選)·악생(樂生)·의생(醫生)·일수(日守)·봉군(烽軍)·제원(諸員)·역리(驛吏)·향리(鄕吏)·응사(鷹師)·보인(保人) 등은 모두가 무군사(撫軍司)와 체부(體府)가 모집하여 이속시킨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그들 원역(元役)이 그리 긴한 것이 아니고 대신 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우선은 본역을 면제시켰습니다. 다만 포보(砲保)와 기보(騎保)·보보(步保)들은 모두 재능이 출중하고 처음부터 배속을 받아 종군한 자들로서 버리자면 그들 재능이 아깝고 대신 정하자니 한량(閑良)을 얻기가 쉽지 않으므로 대신 정하기 전에 종전에 계하받은 대로 우선 번차(番次)를 면제해 주는 것이 옳겠습니다. 다만 염려스러운 것은 정군(正軍)에게는 2, 3명의 보인(保人)이 있지만 이들은 모두 보인이 없고, 또 그 중에는 사천(私賤)으로서 역(役)을 이중으로 하는 자도 있는데 번차에 있어서는 정군과 똑같기 때문에 지탱을 못할 것이 뻔한 일이니, 부득이 양향(粮餉)을 지급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중에서 조군(漕軍)·수군(水軍)의 보인과 역졸(驛卒)은 줄이고 악생(樂生) 이하 향리(鄕吏) 이상은 재능이 월등한 자 외에는 모두 대신 정하라."
하였다.

 

5월 15일 기해

사헌부가 아뢰기를,
"전결에 대한 면세 규정은 일정한 법규가 있어 결코 법규 이외의 면세로 끝없는 폐단을 열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지난해 선혜청에서 왕자와 공주의 전결에 대하여 면세를 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뜻으로 사유를 갖추어 아뢴 바 있고 간원에서도 그것을 논계(論啓)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신들이 삼가 듣기에 안산(安山)·양성(陽城)·음죽(陰竹) 등지의 전결에 있어서 혹은 이대군(二大君) 방(房)에서 사들인 것이라 하고 혹은 정명 공주(貞明公主) 방에서 절수받은 것이라 하여 모두 면세를 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 법을 어긴 일로서 이것을 시발로 하여 후일 일어날 폐단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법전에 따라 시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면세와 복호(復戶)와는 다른 것이다. 이 문제를 번거롭게 논할 것 없다."
하고는, 이어 정원에 하교하기를,
"헌부가 아뢴 내용 중 이른바 면세에 일정한 법규가 있다고 한 것은 어느 법을 가리켜 한 말이며 간원이 윤허를 받았다는 것은 무슨 일을 가리켜 한 말인가? 일단 면세라고 한다면 급복(給復)의 뜻은 아닌 것 같다. 법에 의하여 면세를 해야 한다고 한 말은 사실 근거가 없으며, 나로서는 법문(法文)을 잘 모르겠다. 간원에서 아뢴 말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겠다. 승지가 살펴 아뢰라."
하니, 승지 서경우(徐景雨)가 아뢰기를,
"법전에는 다만 관둔전(官屯田)·마전(馬田)·원전(院田)·진부전(津夫田)·빙부전(氷夫田)·수릉군전(守陵軍田)·국행수륙전(國行水陸田) 및 제향공상제사채전(祭享供上諸司菜田)·내수사전(內需司田)·혜민서종약전(惠民署種藥田) 등이 모두 조세가 없다고 되어 있고 그밖에는 면세처가 없는데 사헌부가 말한 일정한 법규가 있다고 한 것은 아마 그것을 지칭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작년 여름에 간원이 선혜청(宣惠廳) 공사대로 복호 주는 일을 허락하시지 말도록 논계하여 윤허를 받은 바 있는데, 그때 본청의 공사는 안성·양성의 전결에 대한 면세를 위주로 한 것이었으니, 틀림없이 이것을 지칭한 것입니다. 전결에 있어서는 그것을 ‘면세’라고 하고 가호(家戶)에 있어서는 그것을 ‘급복(給復)’이라고 하는 것으로, 사실은 그것이 두 가지인데, 근래 와서는 전결 급복이 항용으로 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계사 중에서 한 말도 혹 여기에서 나온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면세에 있어 한결같이 법전에 의하여 해야 한다고 한 말은 아마 법전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면세를 허락치 말아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계사에 쓰인 말이 부실한 것 같기에 물어본 것이다."
하였다.

 

상이 예관(禮官)을 별도로 보내 왜사 현방 등에 대하여 그들이 묵고 있는 곳에서 잔치를 베풀게 하였다. 현방이 말하기를,
"소승은 현소(玄蘇)의 제자로서 선사가 세상을 뜬 후 그의 도서(圖書)를 물려받았으니 국가로부터 받은 은혜가 많습니다. 다만 산인(山人)으로서 두 나라 사이에 처해 있는데 내가 만약 도서를 받지 않았다면 모든 일을 주선하는 데 있어 혐의가 자연 없을 것이기에 사실은 그 도서를 다시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다만 동래부와 감사가 그것을 막고 허락을 않을 염려가 있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미리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하니, 예조 당상이 답하기를,
"현소가 공로가 있다 하여 조정에서 특별히 그에게 도서를 주었던 것인데 그가 죽은 후 장로(長老)에게 전수되었다면 장로로서는 그것을 사양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오."
하니, 현방이 말하기를,
"소승은 본래 박다주(博多州)의 사람으로서 대마도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는 없으니 이번에 돌아가면 곧 돌려드릴 것입니다."
하였다. 당상관이 또 공무목에 대하여 약조대로 특별히 허락한다는 뜻을 전하니 현방 등이 하직을 고하면서 사의를 표하였다.

 

왜사가 재신(宰臣)에게 예단을 보내오면서 성명을 쓰지 않고 사호(私號)만을 써왔다. 이에 대하여 상이 역관으로 하여금 그들의 무례한 실수를 따지게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만송원(萬松院)·유방원(流芳院)은 당연히 차등을 두어야 한다는 청은 그것이 비록 그럴 수도 있는 일이겠으나 조흥(調興)이 아무런 불평없이 차등 있는 대우를 받으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사년024)   치의 1년 미수가 6백 동(同)에 달하고 있는데 본국 재력으로 그것을 준비하기란 어려운 형세입니다. 더구나 조흥으로 말하면 7년씩이나 미수가 있는데 그중 4년 치는 비록 탕감을 하였으나, 지금 만약 그 길을 열어 놓으면 조흥이 틀림없이 계속 청하게 될 것이어서 그 두 문제에 대하여는 가벼이 논의할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별지(別紙)에 써달라는 청에 대하여는 이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또 뭇 논의들은 모두 주장하기를 ‘정사년 미수 건은 당연히 주어야 할 물건으로 그들의 큰 욕심이 바로 거기에 있으니 지금 당장은 허락을 않는다 하더라도 그냥 말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합니다. 조흥의 3년 치 미수 6백 동에 대하여도 이미 허락한 바 있는데 의성(義成)에게만 달리할 수는 없는 일이니 목화 몇백 동을 아끼려다가 사신이 다시 나오는 걱정이 있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금 쾌히 허락하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그리고 재력이 부족하면 해마다 조금씩 주어 수를 채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정사년 미수 건은 허락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하였다.

 

5월 21일 을사

현방 등이 정사년 미수조를 허락하지 않는다 하여 회답 서계도 기다리지 않고 관(館)의 대문을 때려 부수고 걸어서 나가려고 하자, 역관들이 타일러 말렸다.

 

비국이 아뢰기를,
"삼가 동지사가 가지고 온 예부(禮部)의 자문을 보건대, 조공길 문제에 있어서는 이미 성지(聖旨)를 받은 이상 다시 논의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만 그 제본(題本) 내용에, 왜인과 화친을 한다느니 오랑캐에게 정성을 바친다느니 하는 말까지 있으므로 주문(奏文)을 올려 사실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신의 행차를 1차만 하라는 허락은 비록 황제의 각별한 배려로 내려진 조치이지마는, 만약 군기(軍機)와 관계가 있는 늦출 수 없는 일이라면 1차에 한하라는 명령에 구애받을 수 없다는 뜻까지 변무주(辯誣奏)에다 첨입을 하고, 사신 명칭은 사은사 겸 진주사로 호칭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23일 정미

양사(兩司)가 궁가(宮家)에 대한 면세를 논계한 일로 모두 인피(引避)하였는데, 상의 비답이 너무 준엄했기 때문이었다. 옥당이 차자를 올려 처치하기를,
"궁가에 대한 면세는 원래 선왕의 성법(成法)이 아니며, 헌부가 논계한 것도 실로 한때 공론에 의하여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는 당연히 그것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널리 시행하여 고질적인 폐단을 개혁하고 부역의 균등을 기해야 하실 것인데도 근거가 없으며 사정을 살피지 않았다는 하교만을 계속 내려 법을 집행하는 관원으로 하여금 희망이 없이 풀이 꺾이게 하셨으니, 이는 아마도 대성인으로서 상대를 포용하고 그의 의견을 충분히 받아들이는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장령 권집(權潗)과 대사간 정백창(鄭百昌) 등을 모두 나와 일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26일 경술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지경연 김상용(金尙容)이 나와 아뢰기를,
"신이 전조(銓曹)에 있으면서 근래 수령들을 제수할 때에 반드시 추천받은 자로 한 것은 혹 인재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였는데 다만, 일이 불편한 점이 있습니다. 예로부터 당상관은 천거를 거쳐서 기용한 적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이미 당상관이 되었으면 이력도 많을 뿐 아니라 조정에서도 그의 사람됨됨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가선(嘉善) 이하는 모두 천거에 의해서만 제수하고 있으니, 자못 타당치가 못합니다. 또 문무관은 그들이 이미 출신(出身)인 이상 비록 천거가 없더라도 수령이야 될 수 없겠습니까. 대신으로 하여금 다시 상량하여 조처를 취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제 겨우 그 법을 만들어 놓고 다시 고친다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대신들과 논의해 보라."
하였다. 대신들이 의논드리기를,
"수령을 천거에 의하여 제수하는 법이 바로 조종조에서 쓰던 구례이기는 하나 그 천거된 사람은 음관(蔭官)뿐이었으니, 문무관 모두를 천거에 의하여 한다면 이는 조종조의 천거법 본의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만약에 인물의 현부(賢否)나 지망(地望)이 어떠한가도 묻지 않고 일률적으로 천거의 유무만을 가지고 결정한다면, 이는 대간·시종을 역임했던 자가 도리어 수령 후보에도 미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니, 국가 정치 체제가 그리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구나 직질이 당상인 자로서 일찍이 정직(正職)을 역임했다면 이는 더욱 남의 추천을 기다려 등용할 수 없는 일입니다. 대체로 수령을 신중히 뽑는 책임은 전적으로 전관(銓官)에게 있는 것으로 전관이 대공 지정(大公至正)한 방법으로 쓸 만한 인재를 가려 뽑으면 그것이 바로 천거인 것이니, 지금부터 문무관은 모두 추천으로 후보자를 정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계사의 내용이 옳다. 다만 천거가 끝나기도 전에 또 시행하지 못하게 하면 이는 애들 장난과 같은 일이니 서서히 논의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 그 중 당상관에 있어서는 추천을 받아 의망한다는 것이 과연 타당하지 못한 점이 있으니, 그에 있어서는 추천 유무에 관계없이 가려 등용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진휼청이 아뢰기를,
"양맥(兩麥)이 익은 후면 구휼하는 일을 멈추어야겠지만 기민들 중에 너무나 곤궁한 자는 비록 보리를 수확한다 하더라도 자활의 길이 없을 것이니 계속 구휼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호조 참판 최명길(崔鳴吉)이 상차하기를,
"현방의 큰 욕구는 오로지 정사년 미수조에 있는 것이니 접위관으로 하여금 힘닿는대로 준비하여 주겠다는 뜻으로 타일러서 그가 감사함을 알도록 하게 하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도 알맞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성균관이 아뢰기를,
"난 이후 서책들이 거의 산실되어 심지어 사서(四書)·오경(五經)까지도 완질(完帙)이 없으므로 거재 유생(居齋儒生)들이 강독과 열람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부경 사신이 가게 되면 본관에서 약간의 책값을 마련하여 역관들에게 나누어 맡겨 그들로 하여금 사오도록 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28일 임자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5월 29일 계축

특별히 김상헌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상이 평소에 상헌이 의젓한 풍모를 혼자 가지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이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윤순지(尹順之)를 예조 정랑으로 특별히 임명하였는데 순지는 윤훤(尹暄)의 아들이다. 상이 비록 법을 지키기 위하여 훤의 사형을 면해 주지는 않았으나 그가 죽었을 때 관곽(棺槨)을 주어 장사하게 하였고, 지금 와서 또 이 명령이 있었는데, 순지가 진정을 하고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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