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0권, 인조 7년 1629년 6월

싸라리리 2025. 12. 26.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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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갑인

비국이 아뢰기를,
"신들이 최명길의 차자를 가져다 그 내용을 보았는데 사실 의견이 있었습니다. 현방이 지금 빈번이 약조를 내세워 말하고 있으나, 우리는 다만 해묵은 일이어서 소급하여 지급할 수 없다는 말만 하고 있으니 그가 불평한 마음을 가질 것은 당연합니다. 접위관으로 하여금 준비가 되는 대로 주겠다는 뜻으로 타이르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대신 및 비국 당상관, 삼사(三司)의 장관을 불러 논의하게 하였다. 좌의정 김류가 아뢰기를,
"바깥에서는 그 때문에 틈이 생길까 우려들을 하고 있는데 그 우려가 지나친 것이라 치더라도 후일에 만약 그 일로 국왕 사신이 나오게 된다면 그 비용이 미수조를 주는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들의 뜻이 모두 그러한가?"
하자, 우의정 이정구(李廷龜)가 아뢰기를,
"그들이 공갈한다고 준다면 안 될 일이지만 지금 뭇 논의의 귀추는 만약 성상께서 특별히 준다는 뜻으로 왜사에게 유시를 내리시면 좋을 것 같다고 하는 의견들입니다."
하니, 상이 한참만에 이르기를,
"당초에는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뭇 논의가 그렇다면 허락하는 것도 괜찮겠다."
하였다. 대사헌 김상헌이 아뢰기를,
"현방이 말한 요동 평정이니 조공을 바치겠느니 하는 일들이 다 변방 정세와 관계된 것들이기에 중국에다 아뢰어 알리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지금 만약 우리 나라 변신들이 그러한 말을 들었다고 가정한다면 문서가 없다고 하여 조정에다 알리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임진년 때의 일과는 다르다. 사리에 가깝지도 않은 말로 인해 사건을 크게 벌려 중국 조정에 알렸다가 중국 조정에서 만약 참으로 그런 것으로 믿는다면 매우 타당치 못한 일이다."
하였다. 다음날 비국이 의논드리기를,
"현방의 말은 믿을 만한 근거가 없으므로 주문을 따로 보낼 것까지는 없으니, 그뜻을 약간 변무주 내용에다 첨가만 하고 이어 변무주 내용을 병부와 예부 및 모문룡(毛文龍)과 원숭환(袁崇煥) 두 원수에게 자문을 보내 알리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호조 참판 최명길이 상차하기를,
"세상일은 크고 작고를 막론하고 사실대로 하여 숨김이 없으면 그것을 보는 자도 미심쩍은 마음이 확 풀리지만 단서만 약간 보이면 반드시 의혹을 사게 마련입니다. 우리와 일본과는 물 하나 사이를 두고 있으므로 사신들이 서로 통래하고 있지만 중국과는 1만 리나 떨어져 있는데다 와전된 말을 자주 들어 본디부터 의심을 품고 있는 터인데, 지금 만약 앞뒤의 곡절은 다 빼버리고 황당무계한 말만을 들어 불쑥 알리고 나면 사실이 분명하지 못하여 그것을 들은 자가 더욱 놀라게 되어 우리가 변무하려던 것까지 헛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신이 삼가 계사에 대한 비답을 보았는데 거기에 ‘지난번’이라는 표현이 어정쩡하여 고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하교가 계셨습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성상의 하교는 참으로 뭇 신하들이 미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자문(咨文)이나 상주(上奏)의 내용에 무엇을 진달할 때에는 반드시 달과 날짜를 표기하여 그 일의 시작과 끝을 분명히 밝히는 이유는 상세하게 하여 거짓을 막기 위한 것인데, 어떻게 일정한 격식을 버리고 어정쩡한 말을 써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날과 달을 표기하면 경략(經略)의 주문이 객사(客使)가 오기 전에 있게 되고 그렇다고 날과 달을 표기하지 않는다면 이는 또 도무지 말이 안 되기 때문에 매우 불편한 입장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변무와 왜인 정세는 본디 두 가지 사건이므로 사실 그대로 두 가지 사건으로 따로따로 나누어 처리해야 사실에 입각되어서 후일 난처한 걱정을 면할 수 있게 되어 온당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종전에 의논하여 정했던 대로 주문에다 첨입을 하면 말뜻이 조리가 맞아 군더더기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말을 만들면서 그 속에도 또 조공을 바치겠다고 한 말, 문사(文士) 얻기를 청해 온 말까지 더 보탠다면 우리로서는 사실을 숨긴 일이 없으므로 도독(都督)이 모함을 하려고 해도 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따로 자문과 주문을 만드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니 타당한 일은 아닐지라도 종전에 의논했던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예조가 대마도에 답한 서계에,
"사행 편에 주신 글월을 받고서 국도(國都)에 돌아가신 후 건강이 좋으시다는 것을 자세히 알고 매우 위안이 되었소. 애당초 약조를 정할 때 사행이 오면 국경에 이르러 서계를 전하고 서울까지 오는 것은 허락을 않키로 하여 변동없이 몇 십 년이나 준행하였소. 그런데 이번에 온 사행은 아뢰어야 될 말이 있다고 상경하기를 간청했기 때문에 특별한 하교를 내려 파격적으로 올라오도록 한 것이니, 귀도에서도 이에 대하여 반드시 감격하리라 생각하오.
온 사행이 전한 몇 건 내용에 대하여는 그 가부와 따를 것인지의 여부를 모두 상량 확정하여 그에게 분명하게 말하여 주었으니, 귀도에 돌아가면 당연히 자세한 말이 있을 것이므로 여기서는 더 말하지 않겠소. 다만 주어 오던 공무목(公貿木)에 있어서는 그전에 재감한 것은 반드시 무슨 뜻이 있어서였을 것이고,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서 가벼이 논의할 수 없는 문제이나, 조정에서는 귀도가 마음을 다해 정성을 바치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그 성의가 가상하므로 기유년 약조에 준하여 그대로 지급하기로 허락하였소. 그리고 정사년 미수조에 있어서는, 그것이 벌써 12년 전의 일로서 해조가 전례에 의거하여 허락하지 말 것을 굳이 청하였는데도, 성상께서 이번 사행이 더위를 무릅쓰고 멀리 와서 귀도의 딱한 사정으로 애써 말하는 그 정상을 특별히 생각하시어 차마 준엄하게 거절을 못하시고 그대로 주기로 한 것이니, 똑같은 사랑으로 똑같이 보아주시는 그 은혜야말로 지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오.
세견선(歲遣船)에 있어서는, 번번이 해를 물렸다가 뒤늦게 보낸 바람에 자꾸 기한이 넘어 그 폐단이 점점 불어나 자못 불편하였소. 그러니 지금부터는 약속을 다시 정하여 만약 그 해에 연고가 있어서 오지 못한 선척을 다음해까지 보내오면 소급하여 줄 수도 있지만 만약 그 기한이 또 지나간 뒤에는 결코 허용할 리가 없을 것이니, 그 뜻을 분명히 알아 어김없이 지켜 주었으면 매우 다행이겠소."
하고, 또 별도로 현방에게 부친 글이 있었는데, 그 내용에,
"일본과 폐방(弊邦)이 군대를 쉬게 하고 화호를 다져 함께 태평을 누려온 지 지금 삼세(三世)가 되었소. 귀도는 우리의 남쪽 변경과 가장 가까운 섬으로서 거짓 없는 정성을 바쳐 조금도 잘못이 없었기에 조정으로서도 언제나 사랑을 주고 가상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오. 이번에도 방장로(方長老)가 멀리 거센 파도를 타고 건너와 귀국의 뜻을 전하였는데 그 충절과 그 근면이 더욱더 가상하였소. 여러 가지 문답한 일에 있어서는 모두 장로가 입으로 전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장황한 말을 피하겠소마는, 이른바 요동 평정과 조공의 길을 트겠다고 한 그 문제만은 말하지 않을 수 없소.
지난 정묘년에 미친 오랑캐들이 잠시 서쪽 변경을 시끄럽게 하였으나 얼마 후에 모두 평정되었고, 그들이 화호를 청하기에 우리가 그를 허락하여 지금은 나라안이 편안해져서 개 한마리 짖는 시끄러움도 없으므로 귀국까지 걱정을 끼칠 일은 없게 되었소. 그리고 황조(皇朝)를 위하여 오랑캐를 쳐 요동을 평정하겠다고 한 말은 그럴싸하오. 그러나 그까짓 하찮은 추물들이야 황조 자력으로도 토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험한 바다를 건너고 또 남의 나라 수천 리를 지나서 남과 싸움을 한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소. 황조에서 만약 이 말을 갑자기 듣는다면 틀림없이 의심할 것이므로 폐방의 입장으로도 감히 알릴 수 없는 일일뿐만 아니라 귀국으로서도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것이오."
하였다.

 

6월 2일 을묘

함경도 종성(鍾城) 지방에는 윤 4월에 우박이 크게 내렸고 온성(穩城)지방에는 5월에 우박이 내렸으며, 전라도 임피(臨陂)·함열(咸悅)·금산(錦山)·진산(珍山) 등지에는 누리가 있었다고 감사가 아뢰었다.

 

능마아청(能麽兒廳)이 교습생 중 우등자 14명을 뽑아 아뢰면서, 이들에게 시상하여 권면할 것을 청하니, 각각 아마(兒馬) 1필씩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심집(沈諿)을 형조 판서로 특별히 임명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가뭄으로 인하여 저자를 옮기면 도리어 민원을 부를 것이니, 해조로 하여금 참작하여 변통하도록 하라."
하니, 예조가 아뢰기를,
"근년 이래 처음으로 흡족한 비가 내려 혹 추절(秋節) 이전에 복시(復市)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달 7일부터 시작하여 저자를 옮기고 남문을 닫고 북을 치지 말게 했던 일과 정전(正殿)을 피하고 감선(減膳)했던 일을 모두 원상 회복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이르기를,
"과인이 부덕하여 이러한 한재가 있었으니 지금 비록 비가 내렸다고 하여도 아직도 염려되는 일이 많다. 그중에서 피전·감선과 북을 치지 말게 했던 일 등은 쉽게 원상 회복을 하여서는 안 될 일이다."
하였다.

 

사은사 이흘(李忔), 동지사 윤안국(尹安國)이 치계하기를,
"신들 일행이 배로 대동강에서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육로로는 평양에서 증산(甑山)까지가 겨우 80리인데 수로는 대동강에서 석다산(石多山)까지 가려면 수로가 얕아 걸리는 곳이 많을 뿐만 아니라 혹 8, 9일이 걸려야 갈 수 있다고 하니 배를 석다산에서 탔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그 후 감사 김시양(金時讓)이 본도 부마(夫馬)의 폐단에 관하여 치계하면서, 사신들은 육로를 따라 곧바로 석다산까지 가고 종사원과 방물(方物)은 수로를 이용하여 석다산에서 합류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6월 8일 신유

병조 판서 이귀가 상소하기를,
"신이 전일에 주자(朱子)의 본뜻대로 탑전에서 사유를 밝힌 바 있고 또 차자 1통을 써 주자의 본서(本書)와 함께 올렸는데, 삼가 성상께서 비답하신 것을 보고 더욱 불안한 바가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분명히 밝히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성상의 비답에 ‘무리를 할 뿐이지 당(黨)은 않는다는 것이 공자의 격언이다. 주자는 대현인인데 공자가 말한 뜻을 어찌 모르고서 감히 임금을 끌어들여 당을 하라고 시상(時相)에게 권면을 했겠는가.’ 하셨습니다. 그 당시 선류(善類)들이 비록 조정에 가득차 있었으나 한탁주(韓侂胄) 무리들이 그 사이에 끼어 있어 장차 선류들을 모함할 조짐이 있었는데도, 유정(留正)이 재상 지위에 있는 몸으로서 붕당으로 지목받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현(賢)과 사(邪)를 구별하여 선류들을 구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몸소 당이 되는 것을 꺼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임금을 끌어들여 당을 하는 것도 싫어하지 않겠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 ‘당(黨)’이라는 글자는 바로 단장 취의(斷章取義)를 한 것으로 당시의 임금과 재상으로 하여금 선류들과 덕을 함께 하고 마음을 함께 하여 세상을 구제하기 바랐던 뜻인 것이지 어디 공자가 말한 ‘당을 않는다.’는 당을 말한 것이겠습니까. 전하께서 당이라는 말이 너무나 싫었기 때문에 주자의 말도 폐단이 없지는 않다고 하신 것이지만, 신은 후인들이 혹 성상의 하교에 대한 본의는 알지 못하고 전하께서 성현의 말씀을 쉽게 여겼다고 할까 염려스럽습니다."
하였으나, 상이 그에 대한 답을 하지 않았다.

 

6월 9일 임술

사헌부가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전 감사 김시양의 장계를 보았더니 동래(東萊)의 공무목(公貿木)이 축난 양이 무려 1천 5백여 동이나 된다고 하였습니다. 도신(道臣)이 이미 조정 분부에 의하여 상밀한 조사를 마치고 계문하였는데도 지금까지 엄밀히 조사하여 추징하라는 명령이 전혀 없으니 이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닙니까. 바라건대 전후 수령들을 잡아들여 국문한 후 숫자대로 모두 징납하여 동래에다 바치게 하고 죽고 없는 자도 《대전속록(大典續錄)》의 ‘물허면징(勿許免徵)’ 조항에 의거하여 모두 율에 따라 죄를 내리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혼조(昏朝) 때의 일이 거의 다 그 모양인데 지금 와서 유독 그 죄만을 다스린다는 것은 타당치 않은 것 같다."
하였다. 그후에 감사가 다시 조사하여 결과를 알리고 대신이 ‘비록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이라도 마땅히 대각의 논의대로 시행해야 한다.’고 복계하였으나, 상이 이르기를,
"이미 죽은 사람에게 추징한다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한 일이다."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궁가 전결(田結)에 관한 면세 규정이 원래 법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선왕조에서 일시적으로 정했던 규례에 불과한 것이고 보면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다고 하여 그것을 없애고 고쳐 보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성상의 하교에 이르신 바 내수전(內需田) 종류라고 하신 것은 무엇을 말씀한 것입니까? 내수전이 아닌 바에야 어떻게 내수전 종류라는 명목으로 내수전과 똑같이 조세를 면제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삼가 듣건대 둘째 대군(大君)과 셋째 대군이 아직 나이가 어리다 하니 모든 동정 하나하나와 거조 하나하나를 한결같이 올바르게 보여 주어 훌륭하게 성취되기를 바라야 할 것이지, 어찌하여 미리부터 생각지 않으셔도 될 일을 생각하여 그들에게 이해 문제를 보여 주시면서 살피시지 않으십니까. 신들로서는 깊이 우려되는 바입니다. 바라건대 어려워하지 마시고 서둘러 유음(兪音)을 내리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다음날 하교하기를,
"과인이 불행히도 자식이 많아 조정 신하들이 싫어하고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게 되어 마음이 매우 부끄럽다. 대간이 말한 두 대군 집의 전결 면세 건에 관하여서는 해조로 하여금 빨리 혁파하여 그들의 마음을 쾌하게 만들어 주게 하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성상의 하교를 받고 서로 돌아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간원이 논한 것은 사실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당연히 그를 포용하고 쾌히 승락을 내리셔야 할 것인데, 도리어 그와 같은 하교를 내리셔서 불평의 기운을 너무 드러내 보이시니, 이는 마음을 비워 상대를 받아들이는 도량에 있어 크게 부족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들이 감히 죽기를 무릅쓰고 봉환(封還)을 하는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당연히 거행해야 할 일을 이렇게 봉환하다니 자못 부당한 일이다. 서둘러 분부를 내리라."
하였다. 정원이 재차 그 내용으로 아뢰자, 상이 맨 끝의 그들을 쾌하게 하라고 한 말을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로 바꾸었다.

 

사복시가 아뢰기를,
"제주(濟州)의 3개 읍 수령이 감목(監牧)을 겸직하는 것이 전례인데, 지난 경신년025)                  부터 본 사복시에도 전최(殿最)를 행하는 규정이 있었던 것을 계해년026)                   이후로 폐지하고 실시를 하지 않아 3개 읍의 마정(馬政)이 이대로 가다간 잘 되어질 날이 없겠습니다. 무진년의 마적(馬籍)을 상고해 보면 본주와 정의(旌義)는 모두 정수(定數) 미만이고 대정(大靜)에 있어서는 암말 4백 53필에서 새끼 번식은 겨우 79필이고 고실(故失)된 것도 73필이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암말 4백 필에서 1년간 번식된 수는 6필에 불과한 꼴입니다. 바라건대 해당 감목관을 추고하고 말가죽을 본 사복시로 실어 보내게 하여 참으로 말이 죽었는지의 여부를 참고하는 데 자료가 되게 하소서."
하니, 잡아들여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6월 11일 갑자

부제학 조익(趙翼) 등이 상차하기를,
"신들이 삼가 지난날 병조 판서 이귀(李貴)의 차자에 답하신 것을 보았더니 거기에 이르시기를 ‘무리를 할 뿐이지 당은 않는다는 것은 공자의 격언이고 할팽(割烹)으로 탕(湯)에 접근했던 것은 이윤(伊尹)의 단점이었으니, 이렇게 본다면 주자의 말도 폐단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대체로 군자가 처신하는 데 있어서 시기를 만나면 자기의 도(道)를 펴보고 만나지 못하면 들에 가 밭을 갈 뿐이지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마음을 갖는다면 이는 곧 천리(天理)가 아닌 것이다.’ 하셨고, 그후 두 번째 차자에 답하시기를 ‘옛성현의 좋은 말씀과 지극한 논리가 많기도 하지마는 그중에서 폐단이 없는 것들을 골라 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신들로서는 전하께서 전현(前賢)이 말한 의미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시지도 않고 무작정 폐단이 있다고 속단하신 것이 아닐까 염려스럽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사리를 살피는 데 있어서 소략할 뿐만 아니라 성현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실수를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들이 우선 ‘당(黨)’자에 대한 뜻을 말하고 이어 주자의 취지에 관하여 언급할까 합니다. 대체로 ‘당’자의 뜻은 본디 같은 부류를 일컫는 말로서 예를 들자면 향당(鄕黨)·모당(母黨)·처당(妻黨)과 같은 뜻이고 꼭 사당(私黨)이라는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옛사람들은 또 자기네들끼리 서로 붙어 작당하는 무리들을 일러 당이라고도 하였는데, 예를 들자면 진사패(陳司敗)가 말한 ‘군자는 당을 않는다.’는 것이나, 공자가 말씀한 ‘무리를 할 뿐이지 당은 않는다.’고 한 것들이 그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사는 데 있어서 서로 맞는 자가 있기 마련인데, 그들이 각기 자기 무리들끼리 합하고 있습니다. 군자가 군자와 합하면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의리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서로 도와 자기의 수양을 하고 조정에 서게 되면 마음을 합하여 세상을 도우며, 소인이 소인과 합하면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이욕이기 때문에 서로 엉기어 돕는다는 것은 일의 옳고 그르고는 돌아보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이끗만을 도모하는 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들이 군자를 일러 붕(朋)이라고 하였는데 그는 공(公)이었기 때문이고, 소인을 일러 당이라고 하였는데 그는 사(私)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하들이 사당을 한다면 이는 국가의 큰 해독이며 임금이 아주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에, 참소하는 사람이 군자를 모함하려면 반드시 당을 한다고 지목하여 임금을 격동시켜 성내게 하여 일망타진의 간계를 썼던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전한(前漢) 때 소망지(蕭望之)·유경생(劉更生)027)   등을 당으로 지목하고 후한(後漢) 때 이응(李膺)·두밀(杜密)을 당으로 지목한 것이나 송의 원우(元祐)028)   때 도학(道學)을 위학(僞學)으로 지목하였던 것들이 바로 그것으로, 공자가 말한 ‘무리를 할 뿐이지 당은 않는다.’는 것과는 그 뜻이 본디 다릅니다. 임금이 군자의 당을 참으로 신임하여 참소하는 사람이나 사특한 무리들의 이간질에 말려들지 않고 그들의 포부를 마음껏 펴게 한다면 자연히 잘 다스려지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주자 당시는 간사하고 음흉한 무리들이 조정 안에 서로 얽히어 있는데다 이끗을 즐기는 사대부들이 앞을 다투어 그들에게 붙어 선류를 가리켜 당을 한다고 하였는데, 그때 유정이 재상으로서 현과 사를 구별하여 진퇴시키지는 못하고 도리어 군소들에게 미움을 살까 두려워서 선류가 당을 꾸미고 있다고 걱정을 하는 정도였기에, 주자가 군자의 당은 미워할 당이 아니라는 것을 심도 있게 말하고자 하여 ‘군자가 당을 하는 것을 미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그들의 당이 되는 것을 꺼리지 않으며, 나 자신이 그들의 당이 되는 것을 꺼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임금까지 끌어들여 당을 하는 것도 꺼려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거기에 대해 어느 점이 의심이 있어서 폐단이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군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일이 폐단이 있는 것이라면 충(忠)과 사(邪)가 함께 쓰여야 비로소 지당하여 폐단이 없다는 것입니까? 어진 자와 간사한 자가 섞여 있으면 언제나 간사한 자가 이기고 정직한 자는 지게 되어 결국은 군자는 모두 떠나고 소인이 가득할 수 밖에 없는데, 이 어찌 위태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성상의 하교에 할팽으로 탕에게 접근을 꾀했던 것은 이윤의 단점이었다고 하셨는데, 이윤의 할팽에 대하여는 맹자(孟子)가 이미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힌 바 있습니다. 그 말은 바로 그 당시 야비한 사람들의 무식한 말이지 이윤이 참으로 그러한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세상일을 자기가 꼭 맡으려고 했던 이윤의 사상이 공자와는 좀 다르긴 합니다마는, 그가 맡으려고 했던 일은 바로 천하의 일이었지 어디 자기 일신에 관한 계책에서였습니까. 더구나 주자에 있어서는 일생을 염퇴(恬退)로 일관하여 제수의 명이 있을 때마다 간곡히 사양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더러는 해를 넘기면서까지 받지 않기도 하여 그가 벼슬한 날짜가 겨우 46일에 불과하였으니, 어찌 전야에서 밭갈기가 싫어서 그러한 말을 하였겠습니까. 성현의 마음은 천지와 만물을 자기 자신과 똑같이 여기고 있고 보면, 그렇게 깊이 세상을 걱정하고 그렇게 급히 세상을 구제하기 위하여 서둘렀던 것이 어떻게 천리(天理)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지금 말하고 있는 ‘당’은 그와는 달라 한쪽이 모두 군자인 것도 아니고 다른 한쪽이 모두 소인인 것도 아닙니다. ‘당’마다 선한 사람도 있고 선하지 못한 사람도 있으므로 만약 어느 한쪽에다 모든 것을 일임하고 다른 한쪽은 몽땅 버린다면 이는 큰 잘못입니다. 이귀가 인용한 주자의 말도 임금이 현자를 임용하는 방법을 범연히 논한 말이면 옳지만, 만약 오늘의 당을 두고 한쪽을 택하고 한쪽은 버리기 위한 것이라면 주자의 말에 대하여 미진한 점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만약 오늘에 적용하면 온당치 못한 것이 됩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들의 말이 옳다. 나는 식견이 부족하여 더러 의심나는 곳이 없지 않으므로 앞으로 마땅히 논난(論難)해야겠다."
하였다.

 

6월 12일 을축

이홍주(李弘胄)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6월 15일 무진

숭정전(崇政殿)에서 유생들을 고강(考講)하고 입격자에게는 각각 일분(一分)을 하사하였다.

 

6월 16일 기사

교동(喬桐)에 큰 바람이 불고 해일이 있었다고 감사가 아뢰었다.

 

옥당이 아뢰기를,
"본관의 서적이 두 번 난리를 겪은 후로 모두 산실되어 남아 있는 것이 없고 비록 조금 수습된 것이 있긴 하지만 권질(卷帙)이 미비합니다. 지금부터 사신이 부경할 때마다 꼭 필요한 서책을 사오도록 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17일 경오

전라도 남원(南原) 등 15개 읍이 큰 비로 인하여 관청이나 민가가 많이 떠내려갔다고 감사가 아뢰었다.

 

6월 18일 신미

유성이 삼태성(三台星) 아래에서 나와 서북방으로 들어갔다.

 

6월 19일 임신

양릉군(陽陵君) 허적(許𥛚)이 상소하기를,
"신이 작년에 종묘의 삭제(朔祭) 헌관으로 각실(各室)의 축문 내용을 보았더니 황고조(皇高祖)·황증조(皇曾祖)·황조(皇祖)는 있었으나 황고(皇考)는 없기에 섬뜩하였습니다. 사당에 고비(考妣)의 위패가 없으면 이는 부모가 없는 것입니다.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자식으로서 부모 없는 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임금만이 부모가 없는 변을 당하게 만들다니 이 무슨 일입니까. 자신은 임금이면서 고비의 위치를 바로잡아 종묘에 모시지 않는다면 이는 신하 서열로 대우하는 것이니 세상에 이러한 이치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우리 나라 유생들은 모두 공자를 배우고 정자·주자를 본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정자·주자는 복왕(濮王)의 문제를 가지고 흔들림 없이 항론(抗論)하여 옛 예문(禮文)의 잘못된 부분을 고증하여 새로 정립하고 역대 잘못 처리된 일을 바로잡아 후세의 전칙(典則)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성상께서 왕위에 올라 대원군(大院君)이 미처 대원군으로 추존되지 않은 상황을 갑자기 당하자, 우리의 처지와 다르다는 점은 살피지도 않고 대뜸 그것을 전례로 삼아 백부나 숙부로 칭해야 한다고 하고 있으니, 이는 성상의 일과 복왕의 일이 전혀 비슷하지도 않다는 것을 모르고 한 것입니다. 영종(英宗)으로 말하면 인종(仁宗)이 아버지로서 종묘에 아버지의 위패가 그대로 있었으므로 그에 대한 정자·주자의 논리가 옳은 것이었고, 선조(宣祖)께서도 그것을 본받아 덕흥(德興)을 대원군으로 호칭한 것이 옳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성상께서는 달리 이어진 곳도 없이 종묘에는 아버지 위패가 빠져 있는데, 정원군(定遠君)029)                  을 사친(私親)으로 지목하여 사실(私室)에다 위패를 모셔야 되겠습니까.
잘못 보고 잘못 인용한 저들이야 나무랄 것도 없습니다마는 성스럽고 명철하시고 효성이 지극한 우리 임금께서 무엇을 어떻게 가려야 할 것인지 살펴보시지도 않고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신은 이 문제에 대하여 확실한 소신을 가지고 조금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마음과 이러한 논리를 가지고 어떻게 감히 저렇게 준엄한 논리 속에서 버틸 수가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신의 이 마음을 굽어 살피시어 뼈나 고향에다 묻도록 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소문을 보고 경의 뜻을 충분히 알았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빨리 올라와 나에게 실망을 주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조정의 의논이 이미 정해져서 어느 누구도 이의가 없는 이 시점에서 허적이 다시 그 문제를 제기하여 꼭 현란시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상소문 중의 말뜻을 보건대 모두 종전의 상소 속에 나왔던 것들이므로 본조로서는 다시 논의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일을 논하는 자가 허적뿐이 아닌데도 지금 이의를 하는 사람이 없다는 등의 말을 앞세워 상대의 입을 막고 상대를 배척하려고 하고 있으니 매우 이상한 일이다. 다시는 그렇게 거리낌없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
하였다.

 

6월 20일 계유

유성이 벽성(璧星) 위에서 나타나 실성(室星) 아래로 들어갔다.

 

김류가 서북면 수령 차출을 해조에서 하도록 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치 않았다. 이보다 앞서 서북면 수령은 체부(體府)에서 후보자 추천을 하는 것이 이미 규례가 되어 있었는데, 병조 판서 이귀(李貴)가 도목 정사(都目政事) 때 출사 일수를 계산하여 승천(陞遷)을 하는 즈음에 많은 구애가 있다는 말을 하였기 때문에 김류가 화를 내었는데 이에 사양한 것이다.

 

6월 21일 갑술

병조가 아뢰기를,
"녹체아(祿遞兒)의 자리가 평상시에 비하여 적은데 그 대상자는 많으니 반드시 별체아(別遞兒)를 떼어낸 다음에야 차례대로 녹직에 부칠 수가 있겠습니다."
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헌부가 장악원(掌樂院)의 악공(樂工)들에게 베를 징수[徵布]하는 폐단에 관하여 밝히면서 의논드리기를,
"설립 당시에는 정해진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 악공과 봉족(奉足)의 수를 해마다 늘려 정하였기 때문에 없는 고을이 없습니다. 혹은 가포(價布)라는 이름으로, 혹은 궐포(闕布)라고 하여 기한 전에 그 베를 징수하여 쓰고 있으며, 거기에다 월리(月利)를 붙여 많을 경우 30여 필에 달하고 있는데, 세상에 한 사람이 베 30필을 내고도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 역(役)이 정해지면 온 가족이 도피하기 때문에 수령들이 부득이 그들의 이름만을 상급 관아에 보고하고는 가포는 민결(民結)에서 징수하여 그 폐단이 이미 고질이 되어 있습니다. 바라건대 해조로 하여금 1년에 꼭 필요한 악공의 수는 얼마이며 꼭 지급해야 할 가포는 그 수가 얼마인가를 헤아리고 또 고을이 큰가 작은가도 참작하여 나누어 정하게 하소서."
하니, 제조(提調) 이귀 등이 아뢰기를,
"삼가 악공의 수를 상고해 보니 원수(元數)와 보수(補數)를 합하여 모두 8백 37명인데 갑진년030)  에 와서 상정(詳定)을 고쳐 4백 27명으로 되었고, 악생(樂生)의 수는 3백 97명인데 역시 상정을 고쳐 1백 44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 각기 봉족 2명씩을 붙여 주고 그들의 전결에 대하여 세금을 면해 주면서 서울에 올라와 음악(音樂)을 배우고 익히게 하였는데, 그것은 상당한 뜻이 있어서 한 일이었습니다. 악공들은 모두 입역(立役)을 해야 했고 베를 징수하는 규정 같은 것은 애당초 없었는데, 그들이 모두 내심 싫어서 올라오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보통 때 교습시킬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제향 때나 거둥 때면 언제나 수가 차지 않아 부득이 값을 주고 고용해야 했기 때문에 월리를 계산하여 갚으라고 할 수 밖에 없었고 또 제향이나 거둥 또는 매월 삭일의 도회(都會) 때에 전혀 출사하지 않은 악공에 대해서는 단속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빠진 자에게 벌을 주었던 것 또한 부득이한 일이었습니다. 만약에 지방의 악공을 불러들여 자리를 채우게도 못한 데다 빠진 자까지 베를 징수하지도 않는다면 현재 있는 자들도 틀림없이 흩어져 가버릴 것이니 정말 염려스럽습니다.
대개 꼭 필요한 수를 말하면 종묘의 제향 때마다 드는 악공으로 등가(登歌)가 20명, 헌가(軒架)가 22명, 문무(文舞)와 독(纛)이 합하여 38명, 무무(武舞)가 36명이고, 영녕전(永寧殿)에는 등가 20명, 헌가 22명, 문무와 독을 합하여 38명, 무무 36명 및 보조 25명이며, 친제(親祭) 때는 궁전 뜰에 헌가가 40명, 전부(前部) 40명, 후부(後部) 40명으로 이를 합계하면 3백 77명이고, 악생에 있어서는 사직(社稷)·각 산천(山川)·석전(釋奠) 등 10차례 제향에서 매 제향 때마다 차비(差備)의 수가 단상(壇上)에 22명, 단하(壇下)에 20명, 문무와 독을 합하여 38명, 무무 36명, 보조 12명으로 모두 합하여 1백 28명입니다. 그런데 악공이 현재 출사하고 있는 자는 1백 7명 뿐이고 출사 않는 자가 2백 37명이며, 도망갔거나 죽고 없어 충원이 안 된 수가 31명, 양서(兩西)의 탕척해 버린 수가 53명이고, 악생의 경우는 현재 출사하고 있는 자는 62명 뿐이고 출사하지 않는 자가 54명, 도망갔거나 죽고 없어 충원 안 된 수가 17명, 양서의 탕척해 버린 수가 11명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출사하지 않고 있는 무리들을 다 불러 쓴다고 하여도 원수에는 오히려 차지 못하기에 그때그때 고용하여 겨우 모양을 이루고 있는 실정이므로 이에 대해서 다시 논의하기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포에 대하여 모든 면을 참작하여 정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 폐단을 바로잡는 방법이기는 하나, 다만 염려되는 것은 출사하지 않은 자에게 가포만을 정하여 받는다면 지금부터 지방의 악공들이 다시는 올라오지 않을 것이고 현재 출사하고 있는 자 역시 원래는 외지 사람들이기에 틀림없이 앞을 다투어 가포만 바치고 가버릴 것입니다. 그리 되면 음악을 익히는 일이 전폐되어 종묘의 제향에 차질이 있지나 않을까 염려됩니다. 지금 이것을 바꾸는 중대한 일은 본원이 감히 독단으로 단안을 내릴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예조로 하여금 자세히 헤아려 규정을 정하게 하소서."
하니, 예조가 복계하기를,
"사세가 그러하다면 대신들과 논의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대신과 삼사(三司)가 함께 의논드리기를,
"지난날 상정 때 이미 모두를 참작했던 것인데 거기에 탕척한 수와 도망가고 죽어 없어진 수를 계산하면 현재 쓰기에도 오히려 부족한 실정이므로 거기에서 다시 더 재감할 수는 결코 없는 일이며, 궐원에 대하여 징수하는 규정 역시 부득이하여 둔 제도이므로 달리 논의할 일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장악원이 또 아뢰기를,
"악공·악생을 좌우방(左右坊)으로 나누어 태묘(太廟) 제향 때는 우방에서 주관을 하고, 사직·문묘(文廟)와 각단(各壇)의 제향 때는 좌방에서 주관을 하고 있는데, 악공으로 현재 출사하고 있는 자가 1백 명 미만이어서 제항 때마다 고용을 하고 있으므로 음악이나 무도(舞蹈)에 있어서 그것이 무슨 일인지조차도 알지 못하는 실정이니, 얼마나 한심스런 일입니까. 악공으로서 출사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당연히 각도에서 기간 내에 책임지고 보내도록 해야 할 것이고 현재 출사자에 대해서도 법대로 복(復)과 보(保)를 주어 생업에 도움이 되게 하여 음악 익히는 일에만 전념하도록 하면 그들도 흩어지려는 마음이 없을 것이고 제향 때 고용을 해야 하는 걱정도 없을 것입니다.
대개 악생이라면 원래 양민(良民)들 중에서 뽑아 정하는데 임진 왜란 이전에는 으레 서울 사람을 뽑아서 쓰고 제향이 없을 때는 자기 집에 물러가 있게 하였으므로 그 일이 그렇게 견디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난리 후로 흩어진 도민(都民)들이 모이지 않아서 궐원이 된 악생을 채울 길이 없었으므로 부득이 각 지방에다 나누어 배정하였으나 군(郡)이나 현(縣)에서 배정된 수를 채워내기 어려워서 절반은 실속 없는 형식만 되어 버리고 말아 현재 출사하고 있는 수가 50명도 채 안 되는 실정입니다. 그러니 지방 악생으로서 출사하지 않은 자에게 서울의 보병(步兵) 또는 호패 여정(號牌餘丁)으로 바꾸어 정하면 피차 모두가 편리할 것이며 제향 때 일수(佾數)에 있어서도 모양을 갖출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웃이나 겨레붙이들에게 가포를 징수하는 폐단도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5일 무인

양사가 아뢰기를,
"양릉군 허적(許𥛚)은 원래 괴상하고 망녕된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일찍이 사묘(私廟)의 상사 때에 적은 감히 요사스런 논의를 제기한 바 있고, 또 상께서 친히 제사지내던 날에도 예도를 괴란시키고자 획책하다가 물의를 크게 일으켜, 번갈아 상소를 올려 죄를 청하였으나 때마침 변란을 당하여 유배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당치도 않은 말을 들고 나와 성상의 마음을 떠보고 사람들의 귀를 현란시키고 있으니 그의 조정을 가벼이 여기고 공론을 무시한 죄를 준엄하게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의 관작을 삭탈하고 도성밖으로 내쫓으라 명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6월 29일 임오

진휼청이 아뢰기를,
"보리가 익은 후에는 당연히 진구(賑救)의 일을 정지해야겠으나, 다만 기민들이 오직 본청의 미음만으로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처지여서 하루아침에 갑자기 끊어 버리면 어디로 가서 먹을 곳이 없다고 애타게 호소하여 마지않기에 매인당 피곡(皮穀) 3두(斗)씩을 주어 돌려보내면서 초두의 구급용으로 이용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어 신들이 각도에서 모은 미곡과 포목의 수를 조사해 보았더니 그 수가 적지 않은데, 그것을 지금 해조로 넘겨준다면 경비가 군색할 때 틀림없이 그것을 이용하여 소모시킬 폐단이 없지 않으며, 설령 후일에 흉년을 만나 백성을 구휼하거나 군사를 동원하여 쓸 일이 생겼을 경우 이미 써버린 물건을 다시 모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남아 있는 잡물(雜物) 중에 포목 미납분에 있어서는 계속 보내오도록 독려하고, 미곡은 각 고을에다 그대로 둔 채 낱낱이 그 수를 계산하여 ‘진휼청 미곡’이라는 이름으로 색목(色目)을 구별한 후 평상시에는 환자곡으로 나누어주어 개색(改色)하고 재해를 당하면 진구용으로 쓰도록 하며, 또 이미 올려온 것 중에서 아직 남아 있는 미포와 잡물은 그 모두를 탁지(度支)로 넘겨 주되, 만약 출납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비국에 문서를 보내 알린 후에 출납하도록 하여 다른 곳에는 조금도 쓰지 못하게 하여 후일 백성을 구휼하거나 불시에 군사를 동원할 때 드는 비용에 대비하도록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직 올려오지 아니한 미포는 안주(安州)로 들여보내 군량으로 보태 쓰도록 하고 기민들을 돌려보낼 때도 포목을 적당히 주어 그들의 몸을 가리는 데 쓰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30일 계미

김시양(金時讓)이 치계하였다.
"6월 5일에 도독 모문룡(毛文龍)이 영원위(寧遠衛)에 가 경략 원숭환(袁崇煥)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쌍도(雙島)에 도착했을 때, 경략이 전별연을 열어 그를 접대하다가 갑자기 성지(聖旨)와 영전(令箭)을 소매 속에서 꺼내 보이고는 좌우를 명하여 도독을 끌고 나가 목을 베었고, 허감군(許鑑軍)이란 자가 경략의 차관(差官)으로 가도(椵島)에 와 군병들을 위안 점검하자 섬 안의 장졸들이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 곡을 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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