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일 을유
상이 하교하였다.
"정치의 요체는 인재를 얻는 데 있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방법으로는 검약을 숭상하는 것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모두 제 방법을 잃는다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 나갈 것인가. 내가 보잘것없는 자질로 조종(祖宗)의 위령에 힘입어 신민(臣民)의 윗자리에 있게 되었으므로 밤낮으로 근심하고 삼가며 기필코 태평 시대를 이루려 하고 있으나 매사가 뜻대로 되지 않아 날이 갈수록 더욱 위태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인재를 등용하는 길은 점점 좁아져 가기만 하고 사치 풍조는 줄어들지 않고 있으며, 서로들 뒤질세라 경박하게 세도가에나 드나들며 좋은 직책을 얻기에만 분주하고 같이 공경하는 자세로 협력해 나가는 정신이 어떤 것인지조차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심지어는 자리를 비우고 노니는 것을 고상한 풍치로 알고 열심히 직무를 수행하는 것을 속되고 비루하게 여기는가 하면, 자주 옮겨 다니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한 자리에 오래 근무하는 것을 구차스럽게 여기기까지 한다. 이 모두가 나 자신이 제대로 법도를 세워 다스리지 못해서 빚어진 결과이다. 그렇긴 하나 이 폐단을 고쳐 나가지 않을 경우 언제 위태롭게 되어 망할지 모르는 형편이므로 한밤중에 이런 생각을 하노라면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아, 어진이를 진출시키고 부적격자를 물리치는 것은 재상이 수행해야 할 직책이다. 그리고 아무런 전제 조건 없이 어진이를 발탁하고 그릇에 따라 임용하는 것은 어찌 양전(兩銓)031) 의 책임이 아니며, 공의(公議)에 입각하여 사치 풍조를 금단하고 백성으로 하여금 두려워 복종하게 하는 것은 헌부가 해야 할 일이 아니던가. 착실히 직무를 수행할 자를 등용한다면 어찌 나랏일이 해이해질까 걱정할 것이 있겠으며, 붕당을 짓는 자들을 배척하여 축출한다면 인심이 화합하지 않을까 무엇을 근심할 것이 있겠는가.
모든 일을 온당하게 처리해 나가면 하늘의 노여움도 돌릴 수 있을 것이니 아무리 어두운 임금이라 하더라도 가까이 있는 신하들이 훌륭하게 처리하면 될 것이다. 하늘의 일을 사람이 대신하고 있는데 어찌 그저 먹고 마시기나 하며 세월을 보낼 수 있을 것이며, 국가의 재정은 한도가 있는 법인데 어떻게 형식적인 일이나 숭상하며 함부로 낭비할 수 있겠는가. 현재 나라의 형세가 마치 기우는 해와 같아 점점 뒷걸음질만 칠 뿐 발전하지 못하고 있으니, 내 마음이 안타까와 탄식만 나온다. 생각건대 우리 경상(卿相)들은 모두가 훌륭한 준걸들이니 팔짱만 끼고 보지 말고 더욱더 심각하게 생각하라."
충청도 면천(沔川) 등 지역에 조수(潮水)가 넘쳐 언전(堰田)이 물에 잠기어 벼가 모두 손상을 입었다.
원 경략(袁經略)032) 이 관하(管下)의 부총(副摠) 서부주(徐敷奏)를 보내 섬 안의 무리를 위안하고 군병을 점검하였다.
이조 판서 김상용(金尙容)이 상차하여 체직을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형(銓衡)을 맡는 장관의 임무는 지극히 중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학덕과 인망이 모두 갖춰져 사류(士類)에게 추중(推重)받는 자를 가려 제수하지 않고 신처럼 용렬한 자를 오랫동안 그 자리에 두어 어진이의 등용되는 길을 막게 하였으니, 인심이 불만족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야 본디 논하고 말 여지도 없다 하겠습니다. 더구나 지금 나라의 형세가 누란(累卵)의 위기보다도 심각한데, 쇠퇴해지고 어려운 이 상황을 일으켜 구제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인재를 어떻게 등용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늘은 한 세대의 일을 충분히 감당해 낼 만큼의 인재를 당대에 배출시키는 법이니, 옛날부터 나라를 다스린 사람치고 다른 세대에서 인재를 꾸어 온 적이 있었습니까. 반드시 인재를 북돋아 길러주고 사랑하고 아끼는 자세로써 그들의 단점은 버리고 장점만을 취하여 현인과 재능 있는 자들이 모두 진출하여 각기 마음 속에 품은 뜻을 펼치게 해 준 뒤에야 나랏일을 해 나갈 수 있고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험삼아 오늘날의 기상을 살펴 보건대, 행실보다 말이 앞서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풍조는 점점 사라져가고 남의 흠집을 어떻게 해서든 드러내려고 하는 작태가 날로 만연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온 세상을 뒤져 보아도 완전한 사람은 거의 없는 법입니다. 그리하여 신이 사람을 등용할 때에 걸핏하면 어긋나게 되어 제목(除目)이 한 번 나오기만 하면 온갖 비방이 한 몸에 집중되는 형편이니, 나랏일에 보탬이 되지 못하면서 그대로 직위를 차지하고 있기가 형세상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적임자인 낭료(郞僚)를 얻으면 이런 폐단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경은 유의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평안 감사 및 모 도독(毛都督)의 접반사가 치계하였다.
"원 경략(袁經略)이 진 중군(陳中軍)에게 패(牌)를 보내 임시로 군무를 살피도록 하고 유해(劉海)에게 그를 보좌하도록 하였습니다. 서 부총(徐副摠)이 나온 뒤에는 모문룡(毛文龍)이 신임하며 친하게 지냈던 장관들을 바꿔 배치하는 조치가 있게 되리라고 합니다."
상이 하교하였다.
"진 중군에게 글을 보내 모장(毛將)이 주벌(誅罰)된 곡절을 물어 보는 동시에 ‘중군이 그 무리를 대신 이끌게 된 것은 우리 나라에 다행한 일이어서 온 나라 사람들이 기대해 마지 않고 있다.’는 등의 말로 잘 문장을 다듬어 보내도록 하라. 유해에게도 글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라."
7월 3일 병술
황해도 수안(遂安) 등지에 6월 20일에 폭우가 내려 산비탈이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전답이 모두 매몰되었다.
비국이 아뢰기를,
"모장이 죽음을 당해 사태가 크게 변했는데, 영원(寧遠)에서 보내는 장관(將官)이 머지 않아 도착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만약 모장이 하던 것과는 정반대로 제도(諸島)의 둔병(屯兵)을 모두 철수하고 다른 곳으로 진(鎭)을 옮긴다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마는, 그렇게 하지 않고 군병을 그대로 머물려 두면서 연락하며 제어할 계책을 삼고자 한다면 우리 나라에서 입게 되는 폐해는 여전히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원수(袁帥)가 대대적인 조치를 취할 준비를 마치고 나면 반드시 우리 나라의 사정을 알아보려 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사신이 영원을 지나게 될 때에 그로 하여금 상세히 정문(呈文)하게 하면서 또 진술하게 하기를 ‘모장이 전부터 섬 안에서 군대를 장악하고 있으면서 직접 재물을 긁어들여 우리 나라가 감당할 수 없는 폐해를 끼쳤다. 그리고 위로 조정을 속이면서 허다한 금전과 양곡을 낭비하여 천하를 피폐하게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 나라의 피해가 가장 심각하였다. 이제 독수(督帥)가 영단을 내려 천하를 위해 엄청난 폐해를 제거해 주었으므로 해외의 창생들이 모두 눈을 비비고 쳐다보면서 독수를 위해 경하해 마지않는 바이다.’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가 필시 즐겨 듣고는 이것을 가지고 우리 나라가 폐단을 진술하는 기초 자료로 삼을 것입니다. 그러니 승문원으로 하여금 다시 글을 지어 그의 공업(功業)을 찬양하게 하여 앞으로 그의 환심을 살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금 주문(奏文)을 올려 변무(辨誣)하는 일은 처음부터 옛날 정응태(丁應泰)033) 당시의 일처럼 대단히 심각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왜정(倭情)에 대한 한 조목을 당초 번거롭게 거론하고 싶지 않았습니다마는, 모진(毛鎭)에서 먼저 발설할 걱정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첨가해 넣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장이 죽음을 당하고 원 독수(袁督帥)의 기세가 매우 치성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변무하는 주문 가운데 그와 저촉되는 내용이 없다 할지라도 저들이 상본(上本)하는 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입장을 변명하는 거조가 있게 된다면, 인정으로 헤아려 볼 때 그가 언짢게 생각하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꼭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우선은 이 일을 중지하고 사태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이 타당할 듯 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왜노(倭奴)와 친근하게 지낸다.’는 등의 말을 감수(甘受)한 채 변명하지 않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인 듯싶다. 다시 의논하여 처치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김상용(金尙容)이 또 상차하여 체직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7월 4일 정해
함경도에 우박이 쏟아지고 큰 물이 졌다.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 및 삼사(三司)의 장관을 자정전(資政殿)에서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모두 변무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니, 영의정 오윤겸(吳允謙)이 아뢰기를,
"혹시 경략(經略)이 노여워할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경략의 본래 의도가 우리 나라를 함정에 빠뜨려 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으니, 변무한다고 한들 그가 어찌 노여워할 리가 있겠는가."
하니, 오윤겸이 아뢰기를,
"신 역시 그가 우리 나라를 함정에 빠뜨려 해치려고 해서가 아니라 등주(登州)의 길을 빌릴 목적에서 그런 주장을 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변무하여 아뢰는 일은 긴급하지 않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만약 한 마디라도 우리의 입장을 밝히는 말을 하지 않는다면 경략일지라도 반드시 우리 나라에 혹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것이다."
하니, 우의정 이정구(李廷龜)가 아뢰기를,
"경략이 모장(毛將)을 처치하고 난 뒤에 어떤 내용으로 제본(題本)을 올릴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사신이 들어갈 때 혹 정문(呈文)이라도 하여 그의 의중을 살핀 다음에 거기에 맞춰 변무하여도 안 될 것이 없을 듯싶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매사가 어떻게 말을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 만약 경략이 우리 나라를 모함하여 얽어넣었다고 지칭한다면 그가 필시 노여워하겠지만, 만약 ‘중간에 사실과 다른 말을 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한 것이다.’고 한다면 그가 어찌 더욱 화를 낼 리가 있겠는가. 한편으로는 중국 조정에 주문(奏文)하고 한편으로는 경략에게 이자(移咨)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좌참찬 정경세(鄭經世)가 아뢰기를,
"경략이 당초 주문했던 것은 우리 나라 때문이 아니라 모장(毛將)을 얽어 넣으려는 계획에서 나온 것이니, 지금 바로 변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당당한 중국으로서 장수 하나를 주살(誅殺)하는 것이 무슨 어려운 일이기에, 계교를 써서 불러들인 뒤 비밀리에 모의하여 죽일 것까지 있겠는가."
하니, 정경세가 아뢰기를,
"모장이 조우(趙佑)를 마음대로 죽인 것만 가지고도 주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많은 군사를 장악하고 멀리 해외에 나가 있으니, 어떻게 권모(權謀)를 쓰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즘 사태가 진전되는 상황은 과거와 다르니 접반사를 가려 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어진이를 진출시키고 부적격자를 물리치면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니, 경들은 유념하라."
하니, 좌의정 김류가 아뢰기를,
"신처럼 형편없는 사람이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서 문서를 봉행할 따름이니, 어떻게 감히 상의 분부를 만분의 일이나마 감당해 내겠습니까."
하고, 김상용(金尙容)이 아뢰기를,
"신처럼 용렬하고 비루한 자는 일찍 물러났어야 마땅한 일인데, 재삼 체직을 청했어도 아직까지 윤허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신의 집에 직접 패문(牌文)을 보내 부르셨으므로 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사직하지 말라. 오늘 이후로는 낭관(郞官)을 반드시 공정한 인물로 가려 뽑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김상용이 아뢰기를,
"지금 있는 낭관들이 어찌 적임자가 아니겠습니까."
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국외자(局外者)의 입장에서 말을 하는 것은 다른 관원의 직무 사항을 간섭하는 것이 될 듯도 싶습니다만, 감히 진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부터 당하관을 청환(淸宦)에 의망(擬望)하는 것이 낭관의 손에서 나오긴 하였습니다만, 요즘 듣건대 대소 관직을 의망할 때에 전조(銓曹)의 판서들이 임의대로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렇게까지 된 것은 필시 의론을 좋아하는 부박한 무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니, 먼저 안정(安靜)된 사람을 등용하고 출세에 급급한 부박한 무리를 물리친다면 잘 될 것입니다. 이것은 전상(銓相)이 해야 할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람이 안정되고 부박한 것은 조정에서 어떻게 취사(取捨)하느냐에 달려 있다. 만약 안정된 사람을 쓴다면 부박한 무리 또한 그 습성이 변화할 것이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안정된 사람과 부박한 무리를 알아보는 것은 본디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만 인정에 구애되기도 하고 시론(時論)에 얽매이기도 하여 마음대로 취사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인과 악인을 분별하는 일은 대신과 양전(兩銓)034) 의 책임이다. 만약 부박한 사람이 있을 경우 물리쳐야 할 것이다. 어찌 시론에 구애받아서야 되겠는가."
하자, 이귀(李貴)가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하나의 ‘공(公)’ 자에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정(私情)만 따라 사람을 등용할 때에 사적으로 진퇴시키니, 어긋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인물을 진퇴시키는 것은 김류의 책임입니다. 만약 부박하고 불초한 사람이 있으면 누가 부박하고 누가 불초한지 분명히 말해야지, 어찌 이처럼 모호하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정에 만약 붕당을 지어 함부로 시비를 논하는 일이 있으면 대신이 미리 막아야 할 것이다. 요즈음 들어 조정의 분위기가 아름답지 못해 아랫사람이 위를 능멸하는 풍조가 생기고 있다. 군상(君上)의 행동에 잘못된 점이 있다면 간해야 하겠지만 반드시 꼬치꼬치 따지며 대들려고 하니, 도대체 이 무슨 습관인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흔들리지 않고 정도를 지키는 자도 있고 명예를 좋아하는 자도 있습니다마는, 군상의 잘못을 제대로 말하는 것이야말로 성대(聖代)에나 볼 수 있는 일입니다. 그들의 말이 혹 중도에 지나치더라도 상께서는 널리 포용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진정 언로(言路)가 막히어 망한 경우도 있지만 아랫사람이 위를 능멸하여 위태롭게 된 경우도 있었다."
하였다.
7월 5일 무자
개정(開政)035) 하기 앞서 상이 이비(吏批)에 하교하기를,
"본조의 낭청(郞廳) 전부를 차출(差出)하라."
하였다. 이비가 이소한(李昭漢)·조경(趙絅)·나만갑(羅萬甲)을 의망(擬望)하니, 상이 다시 의망하도록 명하였다. 이비가 아뢰기를,
"본조의 낭관(郞官)은 전부터 인망(人望)에 부합될 만한 당대의 명류(名流)를 의논하여 천거한 다음에 차례로 의망하여 차출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최근 들어 낭관들이 모두 유고(有故) 상태로서 정랑 이행원(李行遠)만 있는데, 지금 차출하라는 하교를 받들고 전일에 천거된 자들로 의망하여 입계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의망하라는 하교를 받들고 신들이 이모저모로 헤아려 보건대, 이 세 사람 외에는 의망할 만한 자가 있다 하더라도 갑자기 의망에 채워 넣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앞서 의망한 세 사람을 처치하기도 곤란하니, 앞서 의망한 외에 추가하여 의망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비가 다시 이소한·이경증(李景曾)·오전(吳竱)·한흥일(韓興一)을 의망하니, 상이 노하여 이르기를,
"일단 고쳐서 의망하도록 하였으면 다른 사람으로 의망에 채워 넣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수망(首望)을 앞서 의망한 자로 하여 태연히 써서 들였으니, 지극히 놀랍다. 해당 당상을 추고하고 낭청은 파직하라."
하였다. 이비가 마침내 정사(政事)를 파하고 나갔다.
7월 7일 경인
상이 이비에게 하교하였다.
"이미 체직된 낭관들이 추천한 사람을 꼭 다시 등용할 것 없다. 이번에는 파격적으로 전에 천거된 자들을 등용하지 말고 공정한 인사를 택하여 의망하도록 하라."
상이 주강에 자정전(資政殿)에서 《서전(書傳)》을 강하였다. 이조 판서 김상용(金尙容)이 나아가 아뢰기를,
"전일의 정사(政事)에서 전조(銓曹)의 낭관을 고쳐 의망하라는 하교가 계셨으니 새로운 인물을 가려 삼망(三望)을 했어야 마땅한데, 전에 의망한 자로 의망에 채워넣었으니, 이것은 모두 신의 죄입니다. 그런데 낭관은 그 일로 파직을 당하였는데 신만 죄를 면했으니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조의 잘못된 풍조가 모두 낭관 때문이라고 하기에 벌을 내린 것이다."
하였다. 김상용이 아뢰기를,
"청요직(淸要職) 당하관을 의망할 때 반드시 낭관이 추천한 자를 쓰도록 한 이유는, 낭관들은 그들과 한 시대의 동류(同流)가 되는 까닭에 반드시 익숙하게 알 것이고 따라서 반드시 정밀하게 가려내리라는 것 때문입니다. 신 역시 젊었을 때에 본조의 낭관으로 있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자세히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일찍이 이 자리를 거쳐 간 자로서 자급(資級)이 4품으로 올랐거나 공론에 죄를 얻은 자가 아닌 이상 주의(注擬)할 때에 감히 제쳐둘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의 경우도 이소한(李昭漢)이 이 직임의 경력이 있기 때문에 의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신들이 함께 의논한 것이니 실로 낭관의 죄가 아닙니다. 그리고 인재는 일조 일석에 배양할 수 없는 것이므로 반드시 청요직에 이력을 쌓아 인망이 흡족하게 여기게 된 뒤에야 의망하는 것이니, 또한 낭관 혼자서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잘못된 풍조를 고치려고 이렇게 한 것이다. 예전에는 인심이 공평했기 때문에 인망에 부합되는 자를 택하여 썼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부박한 무리들이 자기 편 친구들을 끌어들여 꼭 그들을 모조리 등용시키고야 만다. 이것이 내가 꼭 당상으로 하여금 주의(注擬)하게 하려는 이유이다."
하였다. 김상용이 아뢰기를,
"이미 체직된 낭관이 추천한 사람들이라고 하여 모두 버려둔다면 다른 인재를 어디에서 찾아 오겠습니까. 조경(趙絅)·나만갑(羅萬甲)·이경증(李景曾)·오전(吳竱)은 바로 낭관이 추천한 사람들이고, 한흥일(韓興一)의 경우는 신들이 의망한 사람입니다. 지금 만약 의망할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들로 갑자기 구차하게 충원한다면, 물의가 놀랍게 여길 뿐만이 아니라 그들도 또한 감히 행공(行公)하지 못할 것입니다.
계사년에는 신흠(申欽)이 정랑이고 소신과 이정구(李廷龜)가 좌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은 마침 호우(湖右)에서 자식의 결혼식을 치르게 되었는데 조정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감히 말미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아무 말없이 혼자 다녀 왔고, 신흠은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으로 나가 있었으며, 이정구마저 내우(內憂)036) 를 당한 상태였습니다. 이때 대사헌 심희수(沈喜壽)가 제멋대로 출입했다는 이유로 신을 탄핵하였으므로 본조에는 남은 낭청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선묘(宣廟)께서 모두 차출하라고 특명을 내리자 판서 김응남(金應南)이 황시(黃是)를 정랑으로, 박이장(朴以章)을 좌랑으로 임명했는데, 혼란스러운 때라 이 사람들이 할 수 없이 행공(行公)하였으나 사람들의 조소를 면치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소를 하는 것이야말로 부박한 자들이나 하는 행위이다. 전랑(銓郞)이라는 직책은 곧 국가의 공기(公器)이다."
하였다. 김상용이 아뢰기를,
"소신은 견문이 고루하여 감히 혼자서 처리할 수 없으니, 물러가 대신과 상의하여 하겠습니다."
하였다.
7월 11일 갑오
상이 조강에 자정전(資政殿)에서 《서전》을 강하였다. 영사 김류가 아뢰기를,
"지난번 이조의 낭관이 추천한 자들을 쓰지 말도록 하신 것은 아마도 상께서 낭관이 멋대로 구는 폐단을 제거하시려고 한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추천된 자들을 모두 버려둔다면 인재가 또한 모자라게 될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 부적합한 자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모두 버릴 수야 있겠습니까."
하고, 동지경연사 정경세(鄭經世)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직제학 이하의 청요직 의망을 꼭 낭관과 의논해서 추천하게 한 것은, 대체로 낭관이 연소한 사람들과 동기생 격이 되므로 그 인물의 현부(賢否)에 대해서 모두 잘 알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인심은 같지 않고 예와 지금은 상황이 다른 법이다. 옛적에는 낭관을 공정한 인물로 임명했기 때문에 추천된 자들도 모두 공정한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부박한 사람들이 낭관이 되었기 때문에 또한 부박한 무리만 추천하고 있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최근 들어 조정에 불화가 일어날 조짐이 있다고 들은 듯하여 염려스럽습니다. 김세렴(金世濂)은 유희발(柳希發)의 사위이면서도 혼조(昏朝) 때에 다른 입장을 견지하였으니, 그 지조가 가상합니다. 그리고 재능도 있었으므로 신이 전조(銓曹)에 있을 때 그의 사람됨을 보고 애지 중지하였습니다. 지난해 난리가 일어났을 때 김세렴이 조모의 상을 당하여 아버지 대신 복을 입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얼토당토 않는 말로 그를 비난하고 상복을 벗은 후에도 청직(淸職)에 의망하지 않았으니, 정말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런 말이 누구의 입에서 나왔다고 하던가?"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지금 만약 그 사람을 적발해 내어 벌을 준다면 소요스럽게 될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일 이조 판서가 차자를 올리면서 ‘행실보다 말이 앞서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풍조는 점점 사라지고 어떻게 해서든 남의 잘못을 들추어 내려는 분위기가 날로 만연되고 있다.’고 한 것은 필시 이런 따위의 일을 가리켜 말한 것일 것이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김상용(金尙容) 역시 화평론(和平論)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연소한 무리들로부터 크게 실망을 받고 있다 합니다. 나만갑(羅萬甲)은 위인이 부박하여 걸핏하면 많은 말을 하고 나서는데, 이런 사람이 어떻게 전랑(銓郞)에 적합하겠습니까. 나만갑을 쓰고 김세렴을 내친다면 사람을 등용하는 데 있어 무엇이 이보다 더 불공정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나만갑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필시 부박한 무리들이 서로 선동하여 하는 짓일 것이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요즘 듣건대, 나만갑이 전판(銓判)037) 을 비방하기 때문에 전판도 그 자리를 불안하게 여기고 있다 합니다."
하니, 정경세가 아뢰기를,
"신이 나만갑의 사람됨을 보건대, 기(氣)가 지나친 듯하기는 하나 사려가 깊고 식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에 대해서 신은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나만갑은 사람됨이 매우 어리석습니다. 그런데 상께서 그를 다시 발탁하여 등용하신 뒤로 그의 우기(愚氣)가 더해져 제반 조정의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 마치 자기 혼자 담당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동안의 허물을 고쳤으려니 생각하고 발탁해서 등용했는데, 아직까지도 잘못을 고치지 않았단 말인가. 그리고 김세렴의 일에 대해서 경이 맨 먼저 말하였으니, 그렇게 말을 조작하여 물리친 사람의 성명을 분명히 말하도록 하라."
하자, 김류가 아뢰기를,
"김세렴이 상복을 벗은 뒤에도 청직(淸職)에 의망되지 않기에 신이 괴이하게 여겨 정랑 김육(金堉)에게 물어 보니, 상례(喪禮)에 죄를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상과 경이 전조(銓曹)의 판서로 있었을 때에는 상당히 사람을 공정하게 썼는데, 오늘날 이렇게 불공정하게 하였는데도 내가 전혀 알지 못했다."
하니, 정경세가 아뢰기를,
"신은 김세렴과 색목(色目)이 같기 때문에 신이 이런 말을 하면 세상에서 필시 불공정하게 여길 것입니다마는 그래도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김세렴은 사람됨이 단정하고 온화하니 참으로 배운 선비입니다. 지난번 전주(全州)에 있었을 때 상례에 죄를 얻었다고 유포된 설은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이른바 ‘역마(驛馬)를 타고 상(喪)에 달려 갔다.’고 조작된 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당시 타고 갈 것이 없어 어떻게 할 줄을 모르던 차에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마침내 역마를 내주어 타고 가게 하였다.’는 설이 그것인데, 이 행동이 아무리 황급한 난리 속에 어쩔 수 없어 한 소치라 하더라도 의리로 본다면 타지 않았어야 옳습니다. 요즘에 와서 다시는 청직에 의망할 수 없다는 주장을 김육이 동관(同官)에게 내놓았는데, 그 뒤에 그 말이 근거가 없어 물의가 분분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동관이 김육에게 허물을 돌렸는데, 김육은 전날 잘못 전해 들었다고 답하였다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근래 성비(聖批)를 보건대 평안치 못한 기색이 많이 엿보입니다. ‘자식 많은 것이 불행이다.’고 말씀하시는가 하면 ‘조정의 신하들에게 압제를 받고 있다.’고 분부를 내리시기까지 하시니, 어찌하여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대간의 말을 채택하지도 않으신 데다가 미안한 분부까지 내리시니, 삼가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그리고 천재(天災)와 지변(地變)이 날마다 발생해 이미 한심하기 짝이 없는 터인데, 듣자니 공청도(公淸道) 면천(沔川) 지역에서 교생(校生)이 어미를 시해하였다고 합니다. 자기 부모를 시해하는 변고가 이렇듯 자주 일어나니 더욱 한심스럽습니다.
전일 이정구(李廷龜)가 《소학(小學)》을 반포하기를 계청하였는데, 그 뜻은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그저 인출(印出)만 하고 권하여 강하게 하지 않는다면 인출해도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역(弑逆)의 변고가 해마다 거듭 발생하니 참으로 한심스럽다. 《소학》을 권하여 강하게 하라는 말이 매우 옳으니,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고, 대신들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하니, 김류가 종종걸음으로 나아 왔다. 상이 이르기를,
"현인을 진출시키고 사특한 자를 물리치는 것은 대신의 책임이다. 나만갑 등의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모든 일은 반드시 형적이 뚜렷이 드러난 뒤에야 처치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은 그 조짐이 보이기는 하나 실제로 분명히 드러난 형적은 없으니, 만약 중벌로 다스리면 진정시키는 도리가 아닌 듯싶습니다. 외직(外職)에 보임(補任)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죄를 범한 것이 가볍지 않은데 만약 약하게 벌한다면 어찌 두려워 조심할 리가 있겠는가. 부박한 무리들이 붕당을 만들어 나라를 그르치기까지 하였다면 그 죄가 어찌 외직에 보임하는 정도에서 그쳐서야 되겠는가."
하니, 정경세가 아뢰기를,
"6년 정도 외직에 보임하면 그 사람이 필시 과오를 뉘우치고 자책할 것이니,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꾼 뒤에 거두어 쓰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죄가 같은데 벌을 다르게 내리면 안 된다. 그 무리를 적발해 내어 똑같이 벌을 주어야만 불균등한 폐단이 없게 될 것이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일 만들기 좋아하는 부박한 무리가 점점 혼탁하게 만들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도록 하였더라도 일단 드러난 형적이 없으니, 어떻게 적발해 내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물러가 여러 대신과 상의하여 아뢰라."
하였다.
7월 12일 을미
북도(北道)의 국경 너머에 사는 호인(胡人) 자노(者老) 등 50여 기(騎)가 남토 부락(濫土部落)의 상호(商胡)를 습격하여 재산을 탈취해 가지고 돌아갔다.
상이 나만갑(羅萬甲)을 멀리 유배보내고 김육(金堉)을 나국하라고 특명을 내렸다. 영상 오윤겸(吳允謙), 우상 이정구(李廷龜)가 아뢰기를,
"나만갑의 사람됨에 대해서는 신들이 친구의 자제로 자주 대해 왔기 때문에 그의 본래 품성이 착하고 사려가 깊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관원이 되고 나서는 자신의 직무를 온전히 수행하려고 원망하는 소리를 들어도 회피하지 않았는데, 조금 우직한 점은 있는 듯해도 뛰어난 점이 상당히 많았으므로 신들은 조만간 그가 공(功)을 이룰 수 있는 인물로 등용되리라 여겨 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시론(時論)을 주장하며 모든 일을 독단한다는 말에 있어서는 그가 하찮은 소관(小官)의 신분으로서 아무리 해보려고 한들 그 누가 기꺼이 그의 말을 채용하려 하겠습니까. 대개 연소한 사람이 혹 신중하지 못한 나머지 시비를 함부로 논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형적이 드러나지 않았을 경우 그것만 가지고 죄안(罪案)을 삼기는 어렵습니다. 동료 대신이 연중(筵中)에서 진달하면서 ‘형적이 아직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견책을 가한다면 사체를 손상시키는 점이 있을 듯하니, 잠시 외직에 보임하여 그로 하여금 스스로 반성케 해야 한다.’고 한 것 또한 이런 뜻에서 한 것입니다. 지금 만약 언어상에 실수가 있었다고 하여 갑자기 꾸짖어 벌을 내린다면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는 동시에 청명한 조정에서 행할 아름다운 일도 못 될 듯싶습니다.
김세렴의 일에 대해서는 그 곡절을 잘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비평하는 의논이 있었다면 잠시 청망(淸望)을 못하도록 한 것도 안 될 것이 없는 일이고, 그러다가 바로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경우 예전대로 거두어 쓰는 것 역시 무방한 일입니다. 김육이 처음에 스스로 그 의논을 내놓았다가 뒤에 끝내 버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 역시 전후에 걸쳐 들은 것이 달랐기 때문에 나온 것이니, 그렇게 큰 죄를 지은 것은 아닐 듯싶습니다. 진정하고 억제하여 서로 협력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의 급선무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알았다고 답하였다. 인하여 정원에 하교하기를,
"붕당으로 인한 피해를 그냥 놔두면 나라를 망치고야 말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저번에 옥당이 자기와 다른 자를 공박한 사건을 인하여 외직에 보임하는 벌을 약간 시행했었다. 그러나 그 뒤에 과거의 잘못을 씻어주고 다시 청요직(淸要職)에 두었으니, 이야말로 과거의 심술을 고쳐먹고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방도를 생각해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 나만갑 등은 개전(改悛)의 정을 보이지 않고 시론을 전적으로 주도하면서 시비(是非)의 통색(通塞)을 자기 뜻대로 하여 전관(銓官)으로 하여금 손발을 제대로 놀리지 못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한심스럽다. 이 일은 필시 거간(巨奸)이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서 나만갑 한 사람이 독자적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닐 듯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 사람의 범죄 사실이 먼저 드러났으니, 우선 관직을 삭탈하고 멀리 유배보내도록 하라.
그리고 김육은 전랑(銓郞)의 신분으로서 공도(公道)는 염두에도 두지 않은 채 죄목을 얽어 만들어 자기와 다른 자들을 배척하면서 어리숙한 사람들만 항상 청요직에 의망했으니, 이 자 또한 군상(君上)을 업신여기고 거리낌없이 행동한 자이다. 그의 방자하게 군 정상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으니, 나국하여 정죄(定罪)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김육은 원정(原情)한 뒤에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였다.
7월 13일 병신
간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보건대, 어제 비망기로 나만갑(羅萬甲)의 죄를 논하신 것이 매우 준엄하시어 신들은 너무도 황공한 나머지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임금이 벌을 내리실 때에는 중도를 얻는 것이 귀중하니, 혹시라도 경중에 차질이 있으면 인정이 불안하게 여길 것이고 억울한 일도 반드시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나만갑의 사람됨에 대해서는 신들도 일찍이 알고 있습니다. 출신(出身)하고 난 뒤로부터 항상 격탁 양청(激濁揚淸)038) 할 뜻을 가지고 있었으며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바로 그가 평소에 자임하던 바였습니다. 다만 그의 품성이 우직하여 말하는 사이에 지나친 점이 있어서 인물의 장점과 단점을 논하고 시비를 함부로 이야기하는 잘못이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적으로 하는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논의를 주장하여 인물의 통색을 자기 뜻대로 하여 전관으로 하여금 손을 대지 못하게 하였다는 데에 있어서는 어찌 이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가 일개 미미한 관원으로서 아무리 이런 일을 해보려고 한들 누가 기꺼이 그의 논의와 지휘를 받아 그가 제멋대로 행동할 발판을 마련해 주려고 하겠습니까. 성명께서 위에 계시고 공의(公議)가 아래에 있는 이상 조금이라도 사적으로 속이는 일을 저지르더라도 도피할 수 없는 상황인데, 어떻게 그 사이에서 엄청난 재앙의 씨앗을 키울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폐단을 지나치게 염려하신 나머지 너무 중한 벌을 내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아직 형적이 드러나지도 않은 죄를 가지고 문득 변방에 유배보내는 형벌을 내리셨으니, 그가 억울하게 여기는 것은 말할 것조차도 없지만 성스러운 시대에 걸맞는 아름다운 일은 결코 못 됩니다. 한 번 더 생각하시어 나만갑을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만갑의 일로 이렇게 번거롭게 논하다니 부당하기 짝이 없다. 다시는 번거롭게 소요를 일으키지 말라."
하였다. 헌부 역시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좌의정 김류가 차자를 올려 나만갑을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유배보내는 형벌은 곧 조정을 어지럽힌 사람에게 시행하는 것인데, 나만갑의 경우는 경박하게 굴며 일 만들어내기를 좋아한 자취는 있으나 현재 조정을 어지럽힌 일은 없습니다. 지금 만약 갑자기 중률(重律)을 가한다면, 전하께서 조정을 안정시키려다가 도리어 불안정하게 하는 결과를 빚을 것이고, 성스러운 조정의 아름다운 일도 아닙니다."
영의정 오윤겸(吳允謙), 우의정 이정구(李廷龜)가 빈청(賓廳)에 나아가 아뢰기를,
"어제 삼가 문의하시는 분부를 받들고 감히 구구한 생각으로 천청(天聽)을 번독케 했습니다. 그러나 표현이 부족하고 정성이 모자라 상으로부터 채택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멀리 유배보내고 잡아들여 국문하라는 명까지 있게 되었으므로, 놀랍고 부끄러운 나머지 몸둘 바를 모르겠기에 감히 와서 대죄합니다.
이어 생각건대, 신들이 형편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대신의 반열에 끼어 있으니 조정을 진정시키고 부박한 무리를 억제하는 것은 곧 신들의 직분입니다. 참으로 붕당을 지어 제멋대로 행동하는 자가 있다면 어찌 깊이 미워하여 통렬히 잘라버릴 생각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신들이 늙고 병들어 정신이 혼미하기는 하나 그런 일이 있었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어제 경연에서 아뢴 내용을 보건대, 그것 역시 ‘다만 그런 징조만 보일 뿐 자취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니 갑자기 중벌을 내려서는 안 된다. 잠시 외직에 보임시켜 스스로 반성케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들도 그런 뜻으로 복계(覆啓)했던 것입니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신들이 어찌 한두 명의 소신(小臣)을 감싸주려다가 스스로 상을 기망하는 죄에 빠질 리가 있겠습니까. 옛날부터 언어를 문제삼아 사람을 죄주고서 인심을 복종시킨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대체로 언어는 형체가 없어 자취가 있는 행동과는 같지 않으므로 참으로 말의 경중을 잘 살피지 않고 바로 중한 형벌을 가할 경우 그 말류의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성상께서 이 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까?
그리고 비망기에 ‘거간(巨奸)이 주도하고 있다.’는 말씀이 있었는데, 이는 온 조정을 의심하신 것입니다. 성명의 시대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사람마다 위태롭게 여겨 두려움에 떠는 나머지 기상이 저하될까 참으로 염려스러우니, 이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뭇 신하의 심정을 굽어 살피시어 조금 위엄을 거두심으로써 신하들이 화목하고 조정이 진정되도록 하소서. 그러면 다행스럽기 그지 없겠습니다."
하니, 상이 즉시 인견할 것을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만갑 등에게는 중벌로 다스려야 마땅할 듯한데, 대신의 소견은 그렇지 않으니 무엇 때문인가?"
하니, 오윤겸이 아뢰기를,
"만약 나만갑이 제멋대로 권한을 휘두른 일이 있었다면, 신들이 비록 노쇠하여 사람들과 접할 기회가 드물었기는 하지만 어찌 듣지 못했겠습니까. 신은 그의 부형과 절친했기 때문에 신 역시 그의 본성이 선(善)을 좋아하기는 하나 언어를 지리하고 번거롭게 하는 병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병조 낭관으로 있으면서 일이 생기면 혼자 떠맡고 사람들이 원망하는 것은 아랑곳하지도 않았는데, 신들은 그가 하는 일을 보고 중요한 자리에 쓸 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문벌이나 인망으로 보더라도 어찌 전랑(銓郞)에 부적합할 리가 있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이발(李潑)이 정권을 휘두를 적에 당시 인물을 통색(通塞)하는 권한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나만갑은 그가 권한을 행사하고 싶어 하더라도 누가 그의 말대로 따라주겠습니까. 좌상이 아뢴 것도 그의 언어가 신중치 못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하고, 이정구가 아뢰기를,
"신하된 몸으로 조정의 권한을 제멋대로 행사했으면 중하게 그 죄를 다스리는 것이 참으로 마땅합니다. 그러나 나만갑은 기(氣)가 드세어 언어가 단정치 못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가 어떻게 인물의 취사를 결정하며 조정의 시비를 주도할 수 있겠습니까. 경연에서 나온 이른바 ‘전판(銓判)을 동요시켰다.’는 주장은, 곧 나만갑이 전판의 조카를 보고 ‘너의 숙부는 전혀 시론(時論)을 알지 못하는데 너라도 왜 알려주지 않느냐.’라고 한 것을 이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언 때문에 갑자기 먼 변방으로 유배보낸다면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상과 좌상이 이조 판서로 있었을 때에는 한 가지 재주나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거두어 등용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사람을 쓰는 것이 공정치 못해 재주와 인망이 있어도 쓰지 않고 어떤 때는 흠이 있는 사람도 등용하기 때문에 내가 늘 온당치 않게 생각했다. 지난번 이조 판서의 차자를 보건대 ‘행실보다 말이 앞서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풍조는 점점 사라지고 어떻게 해서라도 남의 흠을 들춰내려는 분위기가 날로 만연되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 역시 이런 따위의 일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대체로 나만갑은 하찮은 사람으로 인망도 대수롭지 않으니 권력을 장악해서 제멋대로 휘두를 수는 없다 하더라도, 사람을 임용할 즈음에 자기와 맞지 않는 사람은 비난하여 배척하는 반면 자기와 맞는 자는 추켜올려 영예롭게 하는 등 시비를 뒤섞어 혼란되게 하였으니, 그 죄가 크다. 어찌 언어상의 실수이니 가벼운 벌을 적용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정구가 아뢰기를,
"상이 분부하신 내용은 신이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에 이미 외직에 보임했는데도 그가 마음을 바꿔 허물을 고치지 않으니 정말 가증스럽다. 붕당을 나눠 조정의 정사를 멋대로 농락하는 짓들은 모두 남몰래 자신의 힘을 길러 세력을 확장하는 데에서 연유한 것이니, 추적할 만한 무슨 자취가 있겠는가."
하니, 오윤겸이 아뢰기를,
"멀리 유배보내라는 명이 한 번 떨어지자 뭇 사람들이 모두 온당치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만약 벌을 내린 것이 뭇사람들의 마음에 합치되었다면 어찌 이토록까지 탄식하며 애석해 하겠습니까. 좌상이 말씀드린 것 역시 억제시키려는 의도에서였을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붕당을 나누어 자기 당류를 심는 사람들은 반드시 중한 율로 다스린 다음에야 진정시킬 수 있으니, 이번 경우는 외직에 보임할 죄가 아니다. 대체로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을 보면 관직이 높고 낮은 것과는 상관이 없다. 예전에 김효원(金孝元)은 관직이 낮았어도 조정의 논의를 좌우했다고 한다."
하니, 오윤겸이 아뢰기를,
"신도 포의(布衣) 시절에 김효원에 대한 일을 대략 들었습니다. 당시는 낭관(郞官)이 멋대로 하는 폐단이 특히 심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이야 나만갑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조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역시 어렵지 않은가. 아무런 하자가 없는 사람도 자기와 입장이 다르면 서로 비방하며 배척하여 그 몸을 둘 곳이 없게 한 뒤에야 그만두는 실정이다. 김육(金堉)의 일도 지극히 한심스럽다. 전에 일단 말을 꺼냈다가 나중에는 다시 꼬리를 감추어 이토록까지 멋대로 인물을 진출시키고 물리치다니, 김효원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니, 오윤겸이 아뢰기를,
"당초에 김육이 그런 이야기를 풍문으로 듣고 전파했습니다마는 나중에 그 말이 사실과 달랐기 때문에 돌이켜 청로(淸路)에 진출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니, 이는 앞뒤로 들은 것이 각각 달랐기 때문입니다. 신들이 생각하기에는 그 사이에 의식적으로 행동한 것은 없다고 여겨집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나만갑의 죄를 생각할 때 멀리 유배보내는 것도 오히려 가볍게 느껴진다. 그러나 잠시 대신이 아뢴 대로 따라 중도 부처(中道付處)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오윤겸이 아뢰기를,
"멀리 유배보내는 것이나 중도 부처하는 것 모두 불가합니다. 대략 외직에 보임하는 벌을 내리시면 물정이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만갑이 우두머리가 아닌데 혼자서만 벌을 받았기 때문에 대신이 이렇게 아뢰는 것인가? 요즈음 조정이 혼란스럽게 된 것은 모두 이런 사람들의 행동 때문이다."
하고, 또 탄식하며 이르기를,
"옛날부터 재주를 속에 간직한 자는 반드시 명성이 있게 마련이었으니, 이는 그의 절행(節行)이 남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어찌하여 인재가 없단 말인가. 인재가 있는데도 내가 미처 듣지 못한 것인가?"
하니, 이정구가 아뢰기를,
"사람을 아는 것이 무척 어렵지만 사람을 등용하는 일도 어렵습니다. 크게 간사한 자는 충성스러운 듯하고 큰 거짓말쟁이는 믿음성이 있어 보이며, 정상적인 궤도를 지켜 나가는 자에 대해서는 속되고 비루하다고 비평하고 세상의 일을 담당하려는 기상이 있는 자에 대해서는 일 만들기를 좋아한다는 평판이 따라 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외방에 등용되지 않고 은거하는 자가 없는가?"
하니, 오윤겸이 아뢰기를,
"조정에서 추천한 자 외에는 듣지 못했습니다. 장현광(張顯光)이라는 인물이 산림에 은거하면서 시종 흠없이 지내고 있는데 돈후하고 근신(謹信)하기로는 이만한 자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7월 14일 정유
부제학 조익(趙翼)이 차자를 올려 나만갑과 김육을 신구(伸救)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 김상용(金尙容)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어리숙한 사람을 항상 청직(淸職)에 의망한 죄는 신이 김육과 다름이 없습니다. 신을 사패(司敗)039) 에 내려 김육과 같은 죄를 받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것은 경의 과실이 아니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주강에 자정전에서 《서전》을 강하였다. 시독관 이경증(李景曾)이 아뢰기를,
"근래 상께서는 일을 대하실 즈음에 광대하고 광명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대간이 아뢴 것 중에 면세(免稅)와 같이 심상한 일들에 대해서도 윤허하여 따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나만갑(羅萬甲)의 일에 대해 양사가 모두 발론하고 대신이 재계(再啓)까지 하였는데, 대신이 어찌 나만갑을 감싸주려고 그랬겠습니까. 신들도 한 번 차자를 올려 말씀드릴까 했습니다만, 양사와 대신의 청을 꼭 따르시리라고 여겼기 때문에 감히 하지 못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쾌히 공론을 따르소서."
하고, 검토관 최유해(崔有海)가 아뢰기를,
"김세렴(金世濂)의 일에 대해서는 신 역시 그때 남중(南中)에 같이 갔었기 때문에 그 곡절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이른바 방 안에서 조문을 받았다는 것이나 역마를 타고 상을 치르러 갔다는 것 등은 모두 황급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나온 행동이었고 이를 사람이 혹 비난한 것은 또한 예법(禮法)의 측면에서 김세렴을 책망한 것이었습니다. 옛사람 중에 진(晋)나라의 진수(陳壽)는 상중에 하녀로 하여금 옆에서 환약을 만들게 하다가 비난을 면치 못하였는데, 지금 세렴에 대해 의아하게 여기는 자들도 딴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본관(本館)의 서적은 여러 차례 변란을 겪으면서 거의 모두 흩어져 없어졌는데, 현재 남아 있는 책도 완질(完帙)이 없습니다. 그리고 세종조에 간행된 《치평요람(治平要覽)》 같은 책이야말로 세종께서 몇 년 동안이나 깊이 공력을 들여 완성한 서적으로 법으로 삼고 경계해야 할 옛날의 일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국의 보문각(寶文閣)처럼 각(閣)에 잘 보관해야 할텐데, 본관에는 이 책도 현재 없는 상태입니다. 또 이황(李滉)의 집에서 가져온 책들도 반이나 없어져 원래 1백 50권이었는데 지금은 70권 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인출(印出)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빠진 책을 정서(淨書)하게 하여 모자라는 분량을 보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책을 간행하는 것이 합당하겠다만 현재의 물력(物力)으로 볼 때 그것까지 할 겨를이 없다. 미비된 책은 우선 정서하여 보관해 두어 뒷날 간행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토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7월 15일 무술
좌의정 김류가 ‘나만갑이 벌을 받음에 따라 조정의 논의가 시끄럽게 되었으므로 스스로 마음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정사(呈辭)하고는 마침내 병을 핑계대고 들어가니, 상이 승지를 보내 돈유(敦諭)하였다.
"현인을 진출시키고 사특한 자를 물리치는 것은 대신의 직책이요, 선인을 표창하고 악인에게 벌을 내리는 것은 임금의 책임이다. 임금과 대신이 된 신분으로서 부박한 사람 하나 쫓아내지 못한대서야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 나가겠는가. 옛말에 이르기를 ‘불이 처음 붙을 때 꺼버리지 않으면 나중에 들판을 태우고 만다.’고 하였는데, 더구나 처음 불붙는 정도가 아닌 상황임에랴. 그리고 나만갑은 원래 어리석으면서 음험한 인물인데 본래는 착한 사람이라고 말들 하니, 이것 또한 이상한 일이다. 경은 부디 사직하지 말고 우두머리를 적발하여 완전히 뿌리를 뽑도록 하라."
7월 16일 기해
홍서봉(洪瑞鳳)을 대사헌으로, 전식(全湜)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자정전에서 《서전》을 강하였다. 상이 병조 판서 이귀(李貴)에게 이르기를,
"경은 원훈(元勳)인 동시에 중신(重臣)이니 나라 안의 사습(士習)과 조정에서 일어나는 일을 필시 잘 알 것이다. 지금 모두들 나만갑이 무죄라고 하는데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니, 이귀가 아뢰기를,
"나만갑에게 병통이 없지는 않지만 기절(氣節)만은 가상했기 때문에 소신이 원수(元帥)에게 추천하려고도 하였습니다. 전일 좌상이 아뢴 것은 그 내용이 너무 지나쳤습니다. 신이 듣건대, 김경징(金慶徵)040) 이 나만갑에게 묻기를 ‘너는 어찌하여 이 찬성 댁에는 자주 가면서 우리 집에는 오지 않느냐?’ 하니, 나만갑이 대답하기를 ‘이 찬성께서는 나를 아들처럼 대해 주시어 모든 시비에 관한 문제를 들어주지 않는 것이 없으시지만, 너희 집에서는 나를 서리배로 취급하기 때문에 내가 가지 않는 것이다.’ 하였답니다. 그런데 좌상은 성격이 온순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말을 듣고 너무 심하게 의심한 나머지 항상 외직에 보임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전랑(銓郞)이 오랫동안 판서의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 판서 김상용도 이 때문에 노소간에 파벌을 벌이는가 의심하여 노서(老西)·소서(少西)의 제목까지 있었습니다. 나만갑이 이를 듣고 김광혁(金光爀)041) 에게 가서 말하기를 ‘정사(政事)를 담당하는 부서에서 당상과 낭청이 틈이 벌어져서는 안 되니 너의 숙부인 판서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하였는데, 광혁이 이 말을 전해주자 상용이 연소한 무리들이 자기에 대해 논의를 한다고 더욱 의심하고는 차자를 올리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좌상은 들은 것을 가지고 말씀드렸고 영상과 우상은 직접 본 것을 가지고 말씀드렸으니, 본 것과 들은 것이 자연 다른 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상께서 ‘나만갑은 어리석고 음험한 인물인데 말하는 자들은 본성이 선한 사람이라고 하니, 이 점이야말로 대단히 이상한 일이다.’ 하시고 또 ‘반드시 거간(巨奸)이 있어서 그럴 것이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삼공이 자리를 불안하게 여기고 있는데, 거간은 바로 신을 가리키는 듯싶습니다. 대개 훈신(勳臣) 중에서는 단 한 사람만이 좌상의 집에 왕래할 뿐, 다른 사람은 볼 수가 없습니다. 정승의 지위에 있는 자라면 가능한 한 포용하고 진정시키는 행동을 보여줘야 할텐데, 좌상은 사람들의 말에 동요되어 제대로 남을 포용하지 못하니 잘못되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나만갑의 죄에 대해 양 대신이 이미 짐작해서 논계했으니, 이는 실로 그를 두둔하려는 뜻에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이렇게 되자 훈신들도 모두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만갑의 권세가 중하다고 하겠다. 나만갑 한 사람을 죄주었다고 해서 훈신들이 모두 두려워한단 말인가."
하였다.
7월 18일 신축
경기 지역의 수원(水原)·남양(南陽)·교동(喬桐) 등지에 해일(海溢)이 일어나고, 인천(仁川)·진위(振威)·이천(利川) 등지에는 풍재(風災)가 발생해 곡식이 피해를 입었으며, 광주(廣州)에는 황충(蝗虫)이 온 들판을 덮었다.
좌의정 김류가 차자를 올려 사직하면서 아뢰기를,
"신은 시의(時議)의 기휘(忌諱)에 거듭 저촉되어 뭇 노여움이 한 몸에 집중되고 있으므로 송구스러운 마음에 숨을 죽이고 엄한 견책이 내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승지까지 보내시어 부드러운 말로 간절하게 유시하시니, 성은이 깊어질수록 신의 죄는 무거워지기만 합니다.
신이 대략 듣건대, 어제 경연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만갑(羅萬甲)이 신 부자(父子)의 집에 출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여운 감정을 품은 나머지 시기를 틈타 모함하려고 했다.’고 하고는 신에 대해 헤아릴 수 없는 온갖 악담을 낭자하게 늘어놓았다 합니다. 신은 이 말을 듣고 몸이 오싹해질 정도로 놀란 나머지 바로 땅이라도 뚫고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신은 본래 고립 무원의 처지로서 성명(聖明) 밖에는 믿을 곳이 없는데, 나만갑을 칭찬하는 소리는 날마다 천청(天聽)에 들어가는 반면 소신의 위급하고 절박한 정상은 아뢸 길이 없습니다. 아무리 심장을 갈라 스스로 해명하고 머리를 베어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저 원통함을 간직한 채 참으며 아무 말없이 목숨이 끝나는 날만을 기다려야 할 처지가 되었으니, 신의 정상이 정말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성명께서는 속히 신의 죄를 다스려 인심을 진정시키고 언자(言者)를 통쾌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런 말에 대해서 서로들 굳이 따질 필요가 없다. 경은 마음을 안정시키고 속히 나와 행공(行公)하라."
하고, 이어 사관(史官)을 보내 타일렀다.
영의정 오윤겸(吳允謙), 우의정 이정구(李廷龜) 또한 ‘같이 나만갑의 일을 의논하여 외직에 보임시키기만을 청하였는데 윤허는 내리지 않고 오히려 중한 형벌을 가하였으니 감히 태연하게 행공(行公)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차자를 올려 체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경들은 부디 마음을 안정시키고 사직하지 말라. 속히 나와서 행공하라."
7월 21일 갑진
특별히 대제학 장유(張維)를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삼았다. 그 전에 장유가 차자를 올려 나만갑을 신구(伸救)하였는데, 차자의 말 가운데에 ‘어미와 영결(永訣)하게 되었다.’는 등의 말이 있었으므로 상이 장유가 만갑의 당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그러던 중에 장유가 그의 말[馬]을 빌려주어 만갑으로 하여금 어미를 모시고 가게 하였다는 말을 듣게 되자, 상이 노여워하며 이르기를, "그의 차자 내용을 보면 ‘그의 어미와 영결하게 되었다.’고 말을 하였는데 또 말을 빌려주어 그 어미를 태우고 가게 했으니, 이는 임금에게 거짓으로 고한 것이다." 하고, 마침내 이렇게 제수하는 명이 있게 된 것이다. 대체로 태학사(太學士)를 고을의 수령으로 내보내는 일은 과거에 없었던 일이므로, 명이 내려지자 조야(朝野)가 모두 경악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장유는 염정(恬靜)한 인물로서 본래 경망스러운 거동이 없었는데 더구나 군부(君父)를 기망하면서 동류(同類)를 곡진히 감싸주겠는가. 어미와 영결하게 되었다고 한 말은 정리상 그의 절박한 상황을 거론함으로써 상을 감동시켜 깨닫게 해드리기 위한 기대에서였다. 그리고 그 모자(母子)가 서로 떨어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자신의 말을 빌려주어 급한 처지를 구제해 준 것은 같은 조정의 동료로서 서로 돌보아주는 의리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 이것을 가지고 죄안(罪案)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8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337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사법-행형(行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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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장유는 염정(恬靜)한 인물로서 본래 경망스러운 거동이 없었는데 더구나 군부(君父)를 기망하면서 동류(同類)를 곡진히 감싸주겠는가. 어미와 영결하게 되었다고 한 말은 정리상 그의 절박한 상황을 거론함으로써 상을 감동시켜 깨닫게 해드리기 위한 기대에서였다. 그리고 그 모자(母子)가 서로 떨어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자신의 말을 빌려주어 급한 처지를 구제해 준 것은 같은 조정의 동료로서 서로 돌보아주는 의리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 이것을 가지고 죄안(罪案)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종부시(宗簿寺)가 아뢰기를,
"선원록(璿源錄)을 금년 4월부터 작업을 시작해서 이제 완료했습니다. 보첩(寶牒)도 별건(別件)으로 등사해서 선원록과 함께 오대산(五臺山) 및 태백산(太白山)에 나누어 보관해야 하겠는데, 본시(本寺)에는 원래 초책(草冊)이 없고 단지 정안(正案) 1건(件)이 강화(江華)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본시 낭청에게 말을 주어 내려보내 등사해 오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런데 사고(史庫)는 지극히 중한 곳이어서 해사 관원이 감히 독자적으로 열고 닫을 수 있는 성질이 못 되니, 춘추관 관원도 함께 보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7월 22일 을사
경상도 산음(山陰) 등 10여 고을에 지난 5월 물 퍼붓 듯 비가 내리고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부러지고 기왓장이 모두 날아갔으며 논밭이 내[川]가 되었다.
병조 참판 최명길(崔鳴吉)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어제 정목(政目)042) 을 보건대, 대제학 장유(張維)가 특지(特旨)로 외직에 보임되었는데, 신들은 이에 대해 세도(世道)를 위해 장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유의 사람됨을 보면 이 시대에 적합하게 쓰일 재용(才用)이 없는 것 같지만 그의 문장과 절행(節行)이야말로 유림 가운데 으뜸이라 할 것입니다. 마침 성상의 시대를 만나 경상(卿相)의 지위에 올라 문형(文衡)의 책임을 담당하게 되었으니, 그의 지위와 명망이 매우 높아졌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를 끝까지 잘 쓰지 못하고 거꾸로 풍토병이 만연되어 있는 남쪽 변방 고을로 내치고 말았습니다. 장유는 평소 병이 많은 체질이라서 번잡스러운 업무를 감당해내지 못하는데, 임금을 멀리 떠나 관리의 일에 신경을 쓰고 시달리다 보면 뒷날 살아 돌아올지도 정말 기약하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신은 장유와 어렸을 때부터 친구로 지내왔는데 이름이 친구이지 사실은 형제나 다름이 없습니다. 따라서 출처(出處)와 거취(去就)에 있어 도리상 차이가 있을 수 없으니, 장유에게 진정 죄가 있다면 신만 홀로 면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데 저번 정사(政事)에서 신은 서전(西銓)043) 에 제수된 반면 장유는 남쪽 고을로 쫓겨나고 말았으니, 과감히 발언을 하고 침묵을 지켰던 두 사람 사이의 잠시 동안의 차이 때문에 영광과 전락의 길이 판이하게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신 혼자만 무슨 면목으로 아무 말없이 반열에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삼가 천지 부모께서는 신의 정상을 살피시어 신의 직명을 깎아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이 사직하는 것은 무턱대고 하는 행동인 듯하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영의정 오윤겸, 우의정 이정구가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장유(張維)를 특별히 나주 목사(羅州牧使)에 임명하신 데 대해 신은 인재가 애석하게 되었다는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장유의 문장과 재학(才學)은 당대의 제일이므로 아침 저녁으로 경연에서 모시면서 항상 고문(顧問)에 대비할 것으로 생각하였었는데, 뜻밖에 멀리 외방에 보임하라는 명이 갑자기 내려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현재 재직 중인 태학사(太學士)를 강등시켜 백리의 고을에 보임한 일은 과거에 한 번도 없었던 일입니다. 더구나 요즘 들어서는 사대(事大)하고 교린(交隣)하는 외교문서가 모두 그의 손에서 작성되는데, 그것은 사기(事機)를 잘 파악하여 분명하고 시원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과 같이 어려운 때엔 외교적으로 변론하고 응수하는 사명(辭命)이 중대하니, 신들이 구구하게 아뢰는 뜻은 단지 정체(政體)상으로 온당치 못한 점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들이 그가 올린 차자의 내용과 병조 판서가 아뢴 것을 살펴보면 그의 잘못을 알게 될 것이다."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높은 관작과 낮은 관작은 원래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것이지만 내직과 외직 역시 경중에 있어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제 신풍군(新豊君) 장유를 특별히 나주 목사에 제수한다는 제목(題目)이 내려지자 조야가 모두 놀라고 있습니다. 장유는 맹부(盟府)에 훈신(勳臣)으로 책봉되어 있고 문형(文衡)044) 의 소임을 맡는 등 일반 신하들보다 훨씬 성상의 알아줌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나기 힘든 성상의 은덕에 감격한 나머지 알고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말하면 속마음을 완전히 털어놓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이것이 장유가 평소 지니고 있던 자세였습니다.
이번에 나만갑(羅萬甲)의 일에 대해서 대신들은 미리 조짐을 방지하고자 단지 외직에 보임시킬 것만을 청하였는데, 형적이 아직 드러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갑자기 멀리 유배보내라는 명이 내려졌으므로 형벌이 정당치 못해 인심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신(重臣)이 아뢴 소장에 대해서도 비답조차 내리지 않으신 채 끝내 도중에 묵살하고 말았으니 중신을 대우하는 도리에 있어서도 이미 모양이 아니게 되었는데, 거꾸로 천 리나 떨어진 남쪽 고을로 좌천시키라는 명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장유가 올린 차자가 아직 내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그가 문장을 작성했는지 알 수 없지만, 요컨대 그가 아뢰고 싶었던 뜻은 우리 임금을 허물이 없도록 인도하여 결과적으로 국가의 조치가 중정(中正)하게 되도록 하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어찌 조금이라도 사의(私意)가 개재되어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 것이겠습니까. 장유를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고, 헌부도 아뢰었으나, 상이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7월 23일 병오
상이 주강에 자정전에서 《서전》을 강하였다. 특진관 이서(李曙)가 아뢰기를,
"속오군(束伍軍)을 충원시키기 어려운 폐단은 실로 각 고을의 향소(鄕所)·향교(鄕校)·서원(書院)·사마소(司馬所) 때문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곳에 투속(投屬)하는 한정(閑丁)이 매우 많은데, 많은 경우에는 거의 5백, 6백 명에 이르고 아전 중에도 그 중에 끼어 있는 자가 많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수령이 얼마나 잘 조처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였다. 이귀(李貴)가 아뢰기를,
"방백과 수령이라도 제대로 금하지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원의 폐단이 이렇게까지 심한가?"
하였다. 상이 이서에게 이르기를,
"기내(畿內)의 군사를 경이 이미 오래도록 조련해 왔는데 내가 직접 사열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서도 국가에 일이 많아 아직까지 하지 못했다. 지금 농한기에 사열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이서가 아뢰기를,
"신이 조련해 온 지 이제 5년이 됩니다. 상께서 직접 사열하시고 싶으면 10월 보름쯤이 좋을 것입니다. 다만 군대 병력이 거의 1만 8천 명에 이르니, 모화관(慕華館)에서 실시하면 공간이 좁을까 신은 염려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꺼번에 집결시키면 해가 짧은 때에 형세상 모두 사열하기 어려울 것이니, 병력을 3등분한 뒤 그 중 하나만 사열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수원(水原)의 병력 2천 명을 먼저 올라오도록 하라."
하니, 이서가 아뢰기를,
"사열받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지금은 오행진법(五行陣法)을 폐지하고 척계광법(戚繼光法)만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척계광법을 쓸 경우 반드시 군영을 연결시켜야 하는데, 그러면 상께서 그 우열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시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소신이 어제 상께서 영상과 우상의 차자에 답하신 것을 보니, 신에 대해 언급하셨으므로 신은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다시 소를 올려 아뢰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의 사태는 애당초 그렇게 중요한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점점 발전하여 조정이 시끄럽게 되었습니다. 신이 그 연유를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박정(朴炡)은 연소한 무리 중에서도 가장 우직한 자입니다. 지난해 김경징(金慶徵)045) 이 사람을 죽였는데 박정이 이를 듣고 좌상에게 가서 말하기를 ‘내일 그대 아들을 논박하겠다.’ 하고, 다음날 과연 논박하면서 조희일(趙希逸)과 남이공(南以恭)도 논박하였습니다. 그런데 좌상이 남이공도 장차 논박을 받으리라는 말을 듣고 박정을 협박하며 논박하지 못하게 하였지만 박정이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때에 나만갑(羅萬甲) 역시 죄를 받았는데, 이것은 그가 편당을 좋아하여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좌상은 양쪽 편에서 서로 꾸며대는 말을 지나치게 믿은 나머지 정말 분당(分黨)의 조짐이 있는 것인가 하고 의심을 한 것입니다. 나만갑은 기필코 동료들을 조화시키려고 한 사람인데, 만약 만갑이 죄가 있다면 그것은 실로 박정에게서 유래된 것입니다. 대체로 이 일은 한 번 웃어 넘기면 될 일인데, 좌상이 서로 꾸며대는 어떤 말을 듣고 이렇게까지 나만갑을 의심하는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이귀가 또 아뢰기를,
"나만갑은 김광혁(金光爀) 등과 가장 사이좋게 지내는데 어찌 붕당을 나누어 서로 헐뜯는 일이 있겠습니까."
하고, 시강관 김광현(金光炫)이 아뢰기를,
"나만갑이 전장(銓長)을 【즉 광현의 아비 상용이다. 】동요시켰다는 말은 사실 얼토당토 않은 말입니다. 신의 아비가 얼마 전에 비국에 갔을 때, 삼공이 묻기를 ‘요즘 들어 인물을 채용하는 길이 좁아진 듯한데, 어째서인가?’ 하고, 이어 남이공과 이경직(李景稷)을 거론하면서 말하기를 ‘대신도 사람을 천거하고 싶으면 이 두 사람을 부디 채용하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뒤에 신의 아비가 남이공과 이경직을 대간에 의망(擬望)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만갑이 김광혁에게 말하기를 ‘대야(大爺)께서 전장으로 있으면서 물의(物議)를 몰라서야 되겠는가.’ 하고, 인하여 신의 자(字)를 거론하면서 말하기를 ‘아무개는 어찌하여 이런 뜻을 어른에게 품달하지 않는 것인가?’ 하였습니다. 광혁이 이 말을 신의 아비에게 전하자 신의 아비 역시 이를 옳게 여겨 다시는 이 두 사람을 청직(淸職)에 의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뒤 비국에서 회좌(會坐)할 때에 삼공이 묻기를 ‘어찌하여 다시 의망하지 않는가?’ 하자, 신의 아비가 ‘물의가 그르게 여긴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삼공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어찌하여 한두 사람도 추천할 수 없단 말인가.’ 하였는데, 김류가 그대로 탑전에서 ‘전장이 자기 소신대로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다.’는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뒤에 나만갑이 옥당에서 입직할 때에 신에게 와서 말하기를 ‘내가 그대에게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지난번에 한 말은 실로 나의 성의에서 나온 것인데, 좌상이 동요시킨다고 말을 하니, 부디 이 뜻을 어른에게 전해 주도록 하라.’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내가 어찌 그대를 믿지 못하겠는가.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대는 동요되지 말라.’ 하였습니다.
대개 나만갑의 기질이 부박하고 말이 경솔한 탓에 빚어진 일일 뿐인데, 낭관의 일을 가지고 만갑을 지적하기까지 한다면 더욱 무리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신의 아비가 인혐한 것은 실로 김세렴(金世濂)의 일 때문이었습니다."
하고, 이귀가 아뢰기를,
"신이 유배 중에 듣건대 ‘이경직이 이이첨(李爾瞻)의 집에서 대론(大論)에 참여했기 때문에 박자흥(朴自興)이 다음날 이경직을 마관(馬官)으로 축출했는데, 그 뒤에 박자흥 역시 이경직이 실제로 참여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만갑은 이경직의 실상을 알지 못한 채 이 사실을 그대로 말하였던 것입니다. 과거 윤원형(尹元衡)이 국권을 마음대로 휘두를 때에도 청망(淸望)하는 일만은 간여하지 못하였고, 이이(李珥)와 같은 현자도 지평 한 사람도 의망하지 못했습니다. 당하관을 청망하는 것은 낭관이 주도하는 것입니다. 만약 대관(大官)이 천거하여 임명하는 것과 전랑(銓郞)이 청망하는 것이 모두 시임 재상의 손에서 나오게 되면, 권세가 지극히 중하게 되니 또 하나의 이이첨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고, 이어 장유를 외직에 보임한 것은 타당하지 못하고 김육(金堉)의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시킨 것은 지나친 처사라고 아뢰었으나, 상은 끝내 답하지 않았다.
7월 24일 정미
좌의정 김류가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사장(辭章)을 올릴 때마다 죄는 갑절로 불어나기만 하는데, 성상께서는 넓은 도량으로 포용하시어 극진히 보살펴 주시면서 승지를 두 번이나 보내 속히 나오라고 유시해 주시기까지 하니, 황공스럽고 감격에 겨워 눈물이 저절로 흐릅니다. 그러나 군상(君上)을 속이고 업신여겼다는 것이나 사감(私感)을 품고 사람을 모함했다는 것이나 권세를 멋대로 농락하고 위복(威福)의 권한을 마음대로 행사했다는 것 등은 모두가 인신(人臣)의 죄 중에서도 가장 크고 악독한 것들인데, 이귀는 전후 계사에 이루 말할 수 없이 낭자하게 늘어 놓으면서 점차 심하게 신을 논박하더니, 마지막에 가서는 신을 윤원형이나 이이첨으로까지 지목하였습니다. 이 어찌 신하된 자로서 차마 들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신은 이미 청실(請室)046) 에 나아가 죽기를 청하지도 못하였고, 또 감히 한 마디라도 토해내어 스스로 논열하지도 못한 채 당초 진정시키려던 계획이 거꾸로 탄핵받게 되고 말았으니, 망극한 목숨은 이제 빠져나갈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더욱 마음 아프게 생각되는 점이 있습니다. 신과 이귀가 결의(結義)하던 날부터 이귀와 신은 한 몸이어서 일이 불행하게 되면 함께 혈육(血肉)이 될 것이고 일이 성공하면 같이 복을 누리게 될 처지였으니, 그때에 어찌 조금이라도 서로를 해칠 뜻이 있었겠습니까. 신이 형편없는 탓으로 사태가 이 지경에까지 발전되었으니, 모두가 신 스스로 불러들인 일인데 누구를 원망하고 허물하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동사(東史)를 보건대, 어떤 사람 둘이 같이 길을 가다가 금덩어리를 얻게 되었는데, 그것을 강에 던지면서 말하기를 ‘서로 아끼는 마음이 이 금덩어리 때문에 혹시라도 변할까 두렵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의 일도 이 이야기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니, 신은 한편으로 부끄러워지면서 한편으로 서글퍼집니다.
이제 혹시라도 성상께서 마음을 바꾸시어 막다른 처지에 놓인 신의 사정을 굽어 살피시고 모든 것을 없었던 것으로 여기시어 선조의 고향에 가서 뼈를 묻을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신은 죽어도 죽지 않는 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신을 유사(有司)에게 내리시어 신의 죄를 분명히 바로잡게 하고 동사(東肆)에서 처형시킨다면 신은 죽어도 죽지 않은 몸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병조 판서가 한 말은 일반적으로 논한 것일 뿐이니, 경은 개의치 말고 속히 나와 공무를 집행하여 나의 지극한 기대에 부응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김류와 이귀는 반정의 공을 함께 이룩했는데도 취향은 달랐다. 붕당의 폐단을 고치려는 것이 김류의 뜻이었다면 한 파의 사람들만 채용하려 했던 것은 이귀의 주장이었다. 김류 편에서 나온 자들은 모두 김류를 명예 좋아하는 자라고 비평하였고 이귀 편으로 들어간 자는 모두 이귀를 선을 좋아한다고 여겼는데, 시비가 분분해져 소요와 다툼이 일어났다. 그러나 김류가 이귀를 헐뜯는 것은 적었던 반면 이귀가 김류를 비방한 것은 많았다. 김류가 비록 고집스러워 융통성은 없었지만 명예를 바란다는 비평은 사실과 맞지 않고, 이귀가 박잡(駁雜)한 면은 있어도 선을 좋아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장점이었다. 모두 군자였지만 끝내는 서로가 의심하고 시새워하게 되고 말았다. 이귀의 사람됨은 명망이나 실제가 본디 가벼웠는데, 애석한 점은 김류의 마음가짐이 넓지 못했다는 것이라 하겠다.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338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역사-전사(前史) / 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註 046] 청실(請室) : 죄 있는 관리를 가두는 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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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김류와 이귀는 반정의 공을 함께 이룩했는데도 취향은 달랐다. 붕당의 폐단을 고치려는 것이 김류의 뜻이었다면 한 파의 사람들만 채용하려 했던 것은 이귀의 주장이었다. 김류 편에서 나온 자들은 모두 김류를 명예 좋아하는 자라고 비평하였고 이귀 편으로 들어간 자는 모두 이귀를 선을 좋아한다고 여겼는데, 시비가 분분해져 소요와 다툼이 일어났다. 그러나 김류가 이귀를 헐뜯는 것은 적었던 반면 이귀가 김류를 비방한 것은 많았다. 김류가 비록 고집스러워 융통성은 없었지만 명예를 바란다는 비평은 사실과 맞지 않고, 이귀가 박잡(駁雜)한 면은 있어도 선을 좋아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장점이었다. 모두 군자였지만 끝내는 서로가 의심하고 시새워하게 되고 말았다. 이귀의 사람됨은 명망이나 실제가 본디 가벼웠는데, 애석한 점은 김류의 마음가짐이 넓지 못했다는 것이라 하겠다.
이조가 아뢰기를,
"우의정 이정구(李廷龜)가 탑전에서 아뢰었던 대로 요즘 들어 거재(居齋)하는 유생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관관(館官)의 경우 대사성은 인망을 기준으로 엄선하여 오래도록 그 직위에 있지만, 사예(司藝)나 직강(直講) 같은 자리는 간혹 시종(侍從)을 차출하였다가 얼마 안 있어 다른 곳으로 옮겨 버리니, 권과(勸課)의 효과를 내도록 요구할 시간적 여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변통하여 사예와 직강같은 경우는 여러 관사(官司)에서 각 1원(員)씩 명관(名官)으로 엄선하여 겸대(兼帶)케 하고, 대간이나 시종으로 옮겨 가더라도 겸대한 것만큼은 바꾸지 않도록 하여 오래도록 그 책임을 맡아 교도하는 데 오로지 마음을 쓰도록 한다면, 아마도 보탬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해조가 감히 멋대로 결정할 수 없기에 여러 대신에게 의논했더니, 모두들 동의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그러나 성균관의 직책을 겸대하는 법은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7월 25일 무신
최혜길(崔惠吉)과 윤계(尹棨)를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상이 낭관이 추천한 인물은 채용하지 못하도록 특명을 내렸기 때문에 낭관의 추천에 들지 않은 자로 의망한 것이다. 낭관의 추천이 비록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낭관의 권한은 여전하였다.
7월 26일 기유
진계성(陳繼盛)이 우리 나라의 사시(私市)를 금하였다.
면천(沔川)의 교생(校生) 이계남(李繼男)이 염병에 걸려 열이 극도로 치솟은 나머지 귀신들이 눈 앞에 보이자 꾸짖으며 낫을 휘두르다가 그 어미의 좌측 젖가슴 부위를 잘못 찔러 어미가 죽고 계남 역시 발광하다가 죽었다. 도신(道臣)이 이 사실을 보고하니, 어사(御史) 김남중(金南重)을 보내 사실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상황을 갖추어 아뢰었다.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였는데, 모두 아뢰기를,
"이계남이 어미를 시해한 것은 염병에 걸려 미친 나머지 잘못 찔러 죽게 한 것으로 그의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계남이 만약 살아 있다면 고의적인 범행이든 우발적인 범행이든 간에 유사가 법대로 처리하면 그만이겠습니다만, 지금은 그도 미친병 때문에 죽었으니 다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읍호(邑號)를 강등시키고, 수령을 파직시키고, 그의 가족을 노비로 삼고, 그의 집을 헐어 못으로 만드는 등의 법률은 시역(弑逆) 죄인이 승복하여 정형(正刑)에 처해진 뒤에 시행하는 것이니, 똑같은 예로 적용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공청도(公淸道)의 천안(天安)·신창(新昌) 등 지역에 해일(海溢)이 일어나고 큰바람이 불어 벼가 모두 상했다. 청주(淸州) 지역에는 큰 바람이 불어 곡식이 손상되었다.
평안 감사 김시양(金時讓)이 치계하였다.
"본도에 옮겨 와 종자곡(種子穀)으로 나누어 준 것은 의당 갑절로 받아내고, 먹을 식량을 나누어 준 것과 본 고을에서 분배해 준 것은 수적(收糴)하는 예에 따라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거두어들이지 못한 것은 모조리 탕감해 주고 올해 나누어 준 곡식만 모두 받아들이기로 한다면, 백성들은 아랫사람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국가의 은혜를 입을 것이고 국가 역시 명령이 시행되지 않는 걱정을 안 해도 될 것이며 신빙성이 없는 장부를 근거로 징수하는 폐단도 없게 될 것입니다."
7월 27일 경술
자전이 인경궁(仁慶宮) 안의 초정(椒井)에서 목욕하였는데, 상이 승지를 보내 문안하였다.
행 판중추부사 윤방(尹昉)이 차자를 올리기를,
"장유(張維)가 조정에서 떠난 것이야말로 성세(聖世)의 흠이라 할 것입니다. 상신(相臣)이 아뢰고 대간이 간쟁했어도 성상의 뜻을 돌리지 못했으니, 신처럼 이미 늙은 자는 한 마디 말참견을 할 주제도 못됩니다.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장유가 무슨 말로 차자를 올렸기에 성명께서 이토록 장유를 심하게 대하신단 말입니까. 만약 장유가 당파를 조성해 권력을 행사했거나 은혜를 저버리고 나라를 배반했다면 벌을 주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지 않고 차자에 나오는 한 마디가 서로 걸맞지 않다는 이유로 이렇게 멀리 내쫓는 조처를 취하신 것이라면, 신하를 대하시는 성명의 도리에 있어 잘못된 점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신은 장유와 연배가 아니기 때문에 평소 익숙하게 알고 지내는 사이가 아니기는 합니다. 그러나 반정(反正)한 뒤로 난리로 인해 공주(公州)·강화(江華)에서 서로 주선하면서 그의 사람됨을 살펴 보았는데, 편법을 쓰지 않고 원리 원칙대로 행동했으며 나라에 충성하려는 일념만 지니고 있는데다 고사(古事)를 익힌 힘이 있어 문학적 재질이 이 세상에서 그 짝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성명께서 그를 발탁하여 전형(銓衡)과 문형(文衡)의 책임을 맡기셨으므로 항상 보통 사람은 미칠 수가 없는 대성인의 사람을 알아보는 밝으심에 대해 탄복했었는데, 끝까지 책임지우지 않고 이런 거조가 있게 되었으니, 신은 삼가 조정을 위해 애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현재 변경의 사태는 가라앉지 않고 민생은 안정되지 못했으며, 선비들의 마음은 불안에 젖어 있어 공경하며 협력하는 풍조는 볼 기약이 없습니다. 이렇듯 중외(中外)가 위태롭기만 하여 하나도 믿을 것이 없는 때에 훌륭한 인재가 도성을 떠나게 되자 조야(朝野)가 실망하고 있으니, 이는 국가의 복이 아닐 듯싶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조금이라도 관용을 베풀어 주소서.
이어 기억하건대, 신이 반정 초기에 경연에 입시하여 ‘임금은 극(極)을 세워야 한다.[建極]’는 뜻을 첫번째로 아뢰면서 홍범(洪範) 구주(九疇)의 몇 마디 말을 발췌하여 주달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성명께서는 황당 무계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전편(全篇)을 잘 써서 올리도록 하여 보고 반성하는 자료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뒤 세월이 많이 흐르고 변란을 두 차례나 겪으면서 온갖 정사를 처리하시느라 필시 성명께서는 미처 자세히 살펴보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대체로 극이라는 말은 지극하다는 의미와 동시에 표준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는 용어이니, 중앙에 위치하여 사방의 모범이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일단 극이 세워지고 보면 모든 사람들이 도(道)와 의(義)를 준수하게 되고 이 극에 집중되어 공평 정직하고 편당짓지 않을 것이니, 붕당을 지어 아첨하는 무리들은 자연히 그 사이에서 용납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신하들이 화목하지 못하고 붕당의 폐단이 제거되지 못할까 염려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살펴 보건대, 성명께서는 어떤 일을 처리하기 전에 당파를 싫어해 제거하려는 선입관을 갖고 계십니다. 따라서 텅 빈 거울처럼 허심 탄회한 마음을 가지시고 저울대처럼 공평 무사한 태도를 지니셔야 한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약간 집착하는 점이 있어 정령(政令)이 이토록까지 전도되게 된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성명께서 극을 세우는 도리에 미진한 점이 있으신 듯하기에 전에 아뢰었던 것을 다시 간절하게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조정을 높이 받들지 않으며 속이고 은폐하는 풍조가 이루어지면 나라꼴이 말이 아닐 것이기에 약간 가벼운 벌을 베푼 것이니 지나친 행동이라고 할 수 없다. 차자의 끝부분에 아뢴 내용에 대해서는 내가 불민하지만 마음에 새기도록 하겠다."
하였다.
7월 28일 신해
밤에 유성이 천강성(天罡星)047) 에서 나와 천시원(天市垣)으로 들어갔다.
상이 인경궁(仁慶宮)에 친히 나아가 자전에게 문안드렸다.
원 경략(袁經略)이 이첩(移帖)하였다.
"흠명 출진 행변 독수 계 요 천진 등 래 등처 군무 병부 상서 겸 도찰원 우부도어사(欽命出鎭行邊督帥薊遼天津登萊等處軍務兵部尙書兼都察院右副都御史) 원숭환(袁崇煥)은 조선 국왕에서 첩문(帖文)을 보냅니다.
지난해 황제 폐하에게 주문(奏文)을 올리는 일과 관련, 영광스럽게도 국왕께서 변변치 못한 본관을 잊지 않으시고 대도(大道)를 일러주시며 국휼(國恤)에 대해 잊지 않고 정성껏 교시해 주셨으니, 혈기를 가진 자로서 잊지 못할 바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시 요동 지역에 나오게 되었으니 국왕과는 숙연(夙緣)이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전해 오는 국왕의 소식을 들으면 마치 서로 얼굴을 대하는 듯 설레이기만 합니다. 되돌아 보건대 동이(東夷)048) 가 제멋대로 포학한 행동을 저지르면서도 우리 중원(中原)의 봉시(封豕)049) 는 그냥 놔둔 채 국왕의 강토만 잠식해 왔습니다. 병인050) ·정묘년의 전역(戰役)에서 노추(老酋)가 스스로 멸망을 불러들이고 노추(奴雛)가 두 번이나 넋이 빠질 정도로 혼이 나긴 했지만 동쪽의 산하에서는 여전히 머무르고 있으니, 이 점이 바로 내가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면서 잠 자고 밥 먹을 겨를도 없이 애태웠던 이유인 것입니다.
그런데 황천(皇天)께서 이를 애달프게 여겨주지 않으시고 희종 황제(憙宗皇帝)를 앗아갔는가 하면, 나 역시 먼저 참소로 인해 돌아가는 비운을 맞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위신이 손상되어 떨쳐지지 못했으므로 내가 정말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는데, 아마 국왕께서도 같은 심정으로 슬퍼해 주셨을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이제 천자께서 천고에 뛰어난 신성(神聖)함과 영무(英武)한 자질을 지니시고 중흥에 뜻을 깊이 두시어 이 조무라기 오랑캐들을 섬멸해 버리려고 하시는데, 불초 본관이 그 길을 안다고 여기시어 특별히 조칙을 내려 시골 가운데에서 불러 세우셨습니다. 내가 요동땅을 잊지 못하는만큼 어찌 국왕의 밝은 덕을 감히 잊을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행인(行人)051) 이 왕래하노라면 바닷길이 아득하기만 할 것이고 게다가 탐욕스럽고 패려한 도수(島帥) 때문에 거듭 사신의 여정이 고달파질 것이기에 공도(貢道)를 서령(西寧)으로 개정할 것을 특별히 청하여 내가 마초(馬草)를 공급하여 국왕의 풍유(風猷)를 접할 수 있게끔 하였습니다.
나는 전쟁을 준비하는 일에 관련되는 것이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몇 년 동안 정신을 쏟아오면서 하동(河東)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대체로 군사 작전은 기세로써 제압하고 기틀을 보아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평소 기세를 쌓아두었다가 잠깐 사이에 기틀을 보아 결정을 내리는 것이므로, 한 순간의 결정을 위해 1백 년 동안 축적하는 것입니다. 국왕께서도 스스로 힘을 축적하시어 기틀을 보아 결판을 낼 준비를 하시면 다행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도 활집을 단단히 잡아 매고 국왕과 함께 동서로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어 바다와 육지로 병진(竝進)하면서 앞 뒤에서 합동 공격을 펼치겠습니다. 그리하여 다행히 하늘에 계신 영령의 도움을 받게 되면 한 번 북을 쳐서 중조(中朝)의 12년에 걸쳐 쌓인 분노를 씻고 국왕의 나라 역시 금성 탕지(金城湯池)의 형세를 다시 이룩할 수 있을 것인데, 국왕께서는 이러한 뜻이 없으십니까?
모수(毛帥)는 절도(絶島)에 수년 동안 있으면서 실로 국왕 덕택으로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계획성이 없는 무인(武人)이라서 탐욕스럽기만 하여 도둑떼를 길러내며 국왕의 나라에 무리한 요구를 함으로써 우리 나라에 수치를 끼치고 있습니다. 이에 황상께서 만리 밖을 밝게 내다보시고 나에게 상방검(尙方劍)을 빌려주시어 군중(軍中)에 나아가 그를 주벌토록 하셨습니다. 이는 대체로 섬에 있는 수만 명의 목숨을 보전케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멀리 있는 속국의 화란을 해소시켜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니, 밝으신 천자의 깊으신 의도라 하겠습니다.
군대를 해도(海島)에 머물려 두고 멀리 국왕의 나라를 바라보기만 하면서 찾아뵐 수 없는 처지이기에 사자 한 명을 하집사(下執事)에게 보낼까도 생각했습니다만, 또 종자(從者)에게 공급하는 일로 번거로움을 끼쳐드릴까 염려되었습니다. 편지만 제대로 통하게 되면 서로 다른 곳에 있어도 마음이 같아질 것이니, 오직 국왕께서는 더욱 힘써 충성스럽고 곧은 마음을 다하시어 단숨에 이 적을 멸하심으로써 왕의 공적을 마무리짓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빛나고 빛나는 황령(皇靈)께서도 실로 아름답게 여기는 동시에 이를 힘입게 될 것입니다."
원 경략이 또 이자(移咨)하였다.
"성조(聖朝)에서 매우 후하게 관심을 베풀어 주었는데도 난수(亂帥)052) 는 패역한 행동을 하여 복주(伏誅)를 재촉하였으므로 삼가 황위(皇威)를 선포하고 함께 동녘을 평정할 것을 맹세하는 일에 대해 자문(咨文)을 띄웁니다.
살펴보건대, 본부원(本部院)이 명을 받들어 정벌하는 일을 전담하면서 날마다 오랑캐 평정할 일을 강구해 왔습니다만, 우리 내부의 적도 아직 조용히 만들지 못한 터에 어떻게 오랑캐를 진압시킬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귀국이 우리 중국 조정을 공경하며 따른 지 거의 2백여 년이 되어갑니다. 그런데 지난 기미년053) 의 전역(戰役) 때에는 우리도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임했습니다마는 귀국 역시 잇따른 내변(內變)이 있어 패전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선제(先帝)께서 모문룡의 청으로 인하여 특별히 귀국의 왕을 봉하는 조처를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무리 폐조(廢朝)를 엎고 새로이 반정한 데 따른 전범(典範)이라 하더라도 모문룡으로서는 생색을 낼 일이 아니라 당연히 명확하게 보고해야 할 사항이었습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성명(聖明)께서 먼 나라를 자애롭게 대해주시는 인덕(仁德)을 지니셨기에, 변방의 제후국이 조근(朝勤)하는 예절을 삼가 따르게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당치도 않은 얕은 재주와 작은 그릇밖에 안되는 모문룡이 해도(海島)를 근거로 거드름을 피우면서 ‘내가 최고다.’라고 하는가 하면, 이젠 용무가 없다는 듯이 국법을 집어 던지면서 ‘누가 나를 어떻게 하랴.’ 하고 나온 것입니다. 그에게 밑빠진 독에 물 퍼붓 듯 향궤(餉饋)를 공급해 주었습니다만, 그가 실제로 견제한 일이 뭐가 있었습니까. 개진(開鎭)했다고 하는 10년 동안 요동땅을 한 치라도 회복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고, 한결같이 임금을 속이면서 그가 보여준 것이라곤 그저 많은 관원을 자신의 사유물화한 사실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자녀를 사로잡고 금백(金帛)을 약탈하여 대낮에 국중(國中)에서 강도질을 하는 한편, 항복해 온 오랑캐를 죽이고 난민(亂民)을 살육한 것으로 날마다 사마(司馬)에게 공을 보고해 왔습니다. 그리고는 끝없이 으시대고 요구하면서 동노(東奴)를 큰 이익 챙길 좋은 보물덩이로 삼고, 아무 때고 토색질하고자 조선땅에 외부(外府)를 설치했습니다. 이는 조정만 무시할 뿐 아니라 속국에게까지 화가 미칠까 염려되었습니다. 이미 요지 부동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으니, 어찌 반역자의 주벌을 늦출 수 있었겠습니까.
본부원은 천토(天討)의 명을 봉행하여 장차 난세를 종식시키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 보건대, 필부로 하여금 거만스레 행동하게 하면서 그냥 놔두고 죄를 묻지 않는다면, 어떻게 조정을 높이고 사이(四夷)에게 위엄을 떨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두렵고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황명(皇命)을 청하여 동쪽으로 순시나와 해변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모문룡의 죄를 묻게 된 것입니다. 금년 6월 5일 군대를 쌍도(雙島)에 주둔시키고 여러 장수와 관리들을 집결시킨 뒤, 모문룡이 참형(斬刑)을 받아야 할 대죄(大罪) 12개 조목을 뜰에서 열거하였습니다. 그리고 무리에게 의견을 물으니, 모두들 죽어 마땅하다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군전(軍前)에서 효시하였습니다. 이는 우리 조정의 난수(亂帥)를 제거한 것일 뿐 아니라 귀국의 화도 동시에 진정시킨 것입니다.
피도(皮島)는 원래 중국땅이 아닙니다. 그래서 동강(東江)에 주둔시킨 한 부대에 영을 내려 서쪽으로 이동해서 진격할 계획을 세우도록 하고, 그전처럼 징수하고 토색질하여 귀국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귀국에서도 해사(該司)에 통지하여 각각 강역을 안정시키고 군민(軍民)의 마음을 안온케 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만약 그전처럼 중국 군대가 국경을 넘어 소요를 일으키는 일이 있을 경우 즉시 보고만 해주면 바로 다스려 경계시키겠습니다. 또 공도(貢道)의 경우 바다로 운행하게 되어 있어 실로 사자를 번거롭게 하기에 본부원이 이 점을 매우 염려하여 의논한 결과, 모든 조공을 한 번으로 통일하고 영원(寧遠)의 길로 바꾸도록 하는 동시에 사자 한 사람을 보내 우리의 소식을 통하도록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동의 옛길을 택한 것은 귀국이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것입니다.
황상께서는 천부적으로 신무(神武)한 자질을 지니시고 변방의 계책에 관심을 쏟으시니, 필시 변방의 관리들이 일에 태만한 것을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본부원 역시 몸을 기꺼이 나라에 바쳐 기필코 오랑캐를 평정할 각오가 되어 있으니, 일을 미지근하게 수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사마(士馬)가 이미 배불리 먹고 사기가 충천하니 일을 이룰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귀국 역시 요즘 한가한 때를 이용해서 속히 군비를 정돈하고 우리와 연합하여 잃은 땅을 수복하도록 하십시오. 《시경(詩經)》에 ‘내 그대와 옷을 함께함은 어찌 그대의 옷 없음 때문이리오. 혹시라도 국가가 위급하면 창을 잡고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네.’ 하지 않았습니까.
모문룡은 오랑캐나 마찬가지로 귀국에게는 고질적인 병폐였습니다. 과거 모문룡은 귀국이 은밀히 오랑캐와 내통하며 때때로 도와준다고 보고해 왔습니다. 그러나 본부원은 귀국이 평소에 의리에 따라 우리를 순종했으니 필시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황상께서도 만리 밖을 내다보시는 명철한 안목으로 흉포한 자의 말을 옳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아, 선인에게 복을 주고 악인에게 화를 내리는 것이야말로 어김없는 천도(天道)이고, 원수를 갚고 부끄러움을 씻는 것이야말로 또한 당연히 행해야 할 인사(人事)입니다. 우리 황상의 덕은 너르고 너르시어 멀리 외따로 떨어져 있다 하여 버리지 않으시니, 그대의 국왕께서 충성스럽고 공경하는 마음을 대대로 밝히시면 후손에 이르기까지 왕업(王業)을 향유하게 되실 것입니다. 본부는 거듭 집사(執事)에게 바라는 바입니다."
7월 29일 임자
나만갑(羅萬甲)을 해주(海州)에 유배하였다. 처음에 나만갑은 아산(牙山)에 유배되었는데, 상이 이르기를, "중죄인을 서울과 가까운 곳에 유배시킬 수는 없다." 하여, 지역을 바꿔 유배한 것이다.
좌의정 김류가 차자를 올리기를,
"용서받기 어려운 죄와 씻기 어려운 부끄러움을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만 마음 속에 있는 구구한 생각을 성상께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만갑은 그저 일개 부박하고 일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일 뿐, 실제로 조정을 혼란케 하거나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른 증거는 없으니, 잠시 가벼운 처벌을 내려 불안정하게 할 단서를 막는 것이 중도에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중한 형률을 적용해 중도(中道)에 정배(定配)한 것은 타당성을 잃은 거조로서 인심이 의혹하고 있으니, 이것만도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이 못 된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장유(張維)를 강등시켜 나주(羅州)에 제수한 것은 더욱 천만 뜻밖의 일로서 제목(題目)이 한 번 내려지자 보고 듣는 이가 모두 경악하고 군정(群情)이 흉흉해지면서 모두들 ‘성명의 시대에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하고 있으니, 신은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장유의 문학과 능력에 대해서는 세상이 중히 여기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대신과 중신이 이미 진달하고 대간도 벌써 논했으며 성명께서도 이미 통촉하고 계실 것이니, 신이 감히 다시 번거롭게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바른말로 고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그의 죄안(罪案)을 삼는 것은 그의 본정(本情)과 어긋나는 것인 듯합니다. 장유가 소장을 올린 것은 나만갑을 유배보내도록 한 다음날에 있었던 일인데, 급박한 사태가 발생한 그 때에 무슨 겨를이 있어 그의 어미를 모시고 가게 할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그리고 말[馬]을 주기로 한 약속은 나만갑을 중도 부처(中道付處)한 뒤에 있었으니, 앞뒤가 같지 않다는 것은 구태여 변별하지 않아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이치를 따져 보아 이 두 사람에게 내린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장유가 정직하지 못한 말을 한 것이 이번 뿐만이 아니다. 말감(末減)하여 벌을 내린 것이니 안 될 것이 없다."
하였다.
진계성(陳繼盛)과 유해(劉海) 등이 독수(督帥)로부터 분할해서 통솔하라는 명을 받고 임시로 도중(島中)을 살피게 되었다. 그런데 진계성은 성격이 본래 선량한 데다가 그의 딸이 모문룡(毛文龍)의 첩이었던 관계로 두려워 위축된 나머지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반면 유해는 이런 시기를 이용해 방자하게 굴었기 때문에 도중의 권위가 모두 유해에게 귀속되었다. 모문룡이 죽은 뒤 도중이 위구스럽게 느낀 나머지 거의 변이 일어날 상황이었는데 본디 재능이 많고 권세까지 장악한 유해 덕분에 진정되었다. 그래서 유해 스스로 우리 나라에 은덕을 끼쳤다고 생각하여 너무 무리하게 보답해 주기를 바랐으므로 항상 불만스러운 기색을 나타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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