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1권, 인조 7년 1629년 8월

싸라리리 2025. 12. 26.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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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계축

상이 모화관(慕華館)에서 열무(閱武)하고 여섯 가지 기예를 시험하였는데, 먼저 기추(騎芻)·마재(馬才)·격구(擊毬) 등 세 가지 기예를 시험하고 날이 저물자 환궁하였다. 다음날 좌의정 김류(金瑬)에게 명하여 시험을 끝내도록 하였다. 상이 도감의 병기가 잘 정비되고 기차가 선명한 것을 보고 대장 신경진(申景禛)에게 숙마(熟馬) 1필을 내려 포장(褒奬)하도록 명하였다.

 

평안 감사 김시양(金時讓)이 치계하기를,
"금년 농사를 보건대 남관(南關)은 대풍이 들었습니다만, 의주(義州)는 파종이 아주 늦은데다가 풍재(風災)까지 겹쳐 논에 모내기한 곳마저 전혀 이삭이 패지 않아 추수할 가망이 없습니다. 조적(糶糴)과 관련된 곡식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해조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호조가 아뢰기를,
"남쪽에서 운반해 간 종자가 혹 바다를 건너 갈 때 바닷물이 젖어 본래부터 싹이 나지 못할 걱정이 있긴 했습니다만, 일단 싹이 난 뒤 이삭이 패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히 그럴 리가 없으니, 다시 이삭이 패었는지의 여부를 살펴 보고 이어서 계문하게 한 뒤에 조처를 취했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남북의 토질(土質)이 같지 않으니, 호남에서 생산된 종자가 혹 관서(關西) 지방에서 이삭이 패지 않을 수도 있는 이치이다. 그런데 고지식한 사람처럼 변통을 하지 못한다면 백성의 원망이 없지 않을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340면
【분류】농업-농작(農作) / 과학-천기(天氣) / 재정-전세(田稅) / 역사-편사(編史)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남북의 토질(土質)이 같지 않으니, 호남에서 생산된 종자가 혹 관서(關西) 지방에서 이삭이 패지 않을 수도 있는 이치이다. 그런데 고지식한 사람처럼 변통을 하지 못한다면 백성의 원망이 없지 않을 것이다.

 

8월 2일 갑인

평안 감사 김시양이 치계하여 청천(淸川) 이북에 옮겨 진휼한 곡식은 창곡(倉穀)의 예대로 받아들이되 두 배로 거두기로 된 것 가운데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면제해 줄 것을 청하니,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독수(督帥)가 보내 온 자게(咨揭)에 대해 회답하는 게문(揭文)을 관례에 따라 보내 사례해야 하겠습니다만, 전권을 위임한 차사(差使)를 파견하여 문안하는 거조를 취하지 않는다면, 자못 우리의 성신(誠信)하고 간곡한 정성을 표하는 뜻이 아닐 듯합니다. 뭇 의논을 들어 보건대 ‘일을 이해하고 전대(專對)할 능력이 있는 인물을 가려 보내 한편으로는 문안하고 한편으로는 일에 따라 대응케 하면서, 우리 나라가 결딴난 상태이므로 아무리 힘을 다해 협력하고 싶어도 자연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점을 남김없이 알리도록 하는 것이 현 사태를 대처하는 합당한 길인 듯하다.’고 합니다. 벼슬의 고하를 막론하고 그런 인물을 엄선하여 차송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장인(匠人)과 여정(餘丁)들에 대해서는 모두 군적(軍籍)에 기입된 대로 포목을 징수할 뿐인데, 수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도망치고 죽은 자들이 점점 많아져 민간에 포목을 대신 내도록 침해를 끼치는 걱정이 있으니, 연신(筵臣)이 관원을 파견해 조사하기를 계청한 것은 그 뜻이 범연치 않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 소요가 염려스러울 뿐만이 아니라 필시 관리들이 농간을 부리는 폐단이 있을 것이니, 각 고을로 하여금 도망한 자와 사망한 자를 조사하여 계속 치보(馳報)하게 한 뒤에 그 보고한 내용에 따라 면제해 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3일 을묘

자전과 중전이 인경궁(仁慶宮)에서 경덕궁(慶德宮)으로 환어(還御)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일찍이 연신(筵臣)이 아뢴 것에 따라, 진휼청(賑恤廳)에 남아 있는 목면(木綿)을 가지고 포로로 잡혀 있는 사람들의 몸값을 배상하고 귀환시킬 것을 허락하셨으니, 이것이야말로 왕자(王者)의 인정(仁政)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을 시행할 때에는 뒤따르는 폐단을 생각해야만 하니, 이 일에는 세 가지 난처한 점이 있습니다.
1천 동(同)이나 되는 목면을 아무리 나눠 운반해 들여 보낸다 하더라도 수량이 너무 엄청나 짐수레가 길에 가득 찰 것으로, 그것을 오랑캐의 뜰에까지 수송해 들여 보낼 경우 독수(督帥)가 듣고서 의심하는 마음을 낼 것이니, 이것이 첫 번째 곤란한 점입니다.
관에서 포물(布物)을 지급하여 포로의 숫자대로 계산해서 배상금을 바치고 돌아오게 할 경우, 큰 이익이 걸려 있다고 생각하게 하여 오랑캐의 욕심을 더욱 부채질할 것이고, 따라서 앞으로 포로로 붙잡아 두고 값을 요구해 오는 폐단이 더욱 증대될 것이 분명하니, 이것이 두 번째 곤란한 점입니다.
만약 오랑캐들이 귀환시키기 위해 관에서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것을 알면 그 자들이 필시 농간을 부려 값을 올릴 것이고, 그렇다고 포로의 족속에게 나누어 주어 직접 몸값을 갚고 돌아오게 하면 혹 중간에 속일 폐단이 있으니, 이것이 세 번째 곤란한 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뒷날 난처하게 될 걱정이 있을 듯하니, 우선 앞으로 사태가 전개되는 것을 살펴 다시 의논해서 처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옛날 당 태종(唐太宗)은 제군(諸軍)에 포로로 잡힌 고구려 백성들에 대해 이산이 된 것을 애달프게 여기고 전포(錢布)를 내주며 풀어 주게 하였거늘, 더구나 우리 백성이 오랑캐의 소굴에 빠져 있는데 말해 무엇하겠는가, 계사에서 세 가지 불편한 점을 이야기한 것을 참으로 소견이 있는 것이나, 포목을 가벼운 재화로 바꾸고 글을 보내 속(贖)바치기를 청하면 이목(耳目)이 번다하지 않을 것도 같고 적자(赤子)들 역시 고향에 살아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니, 다시 의논하여 조처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하다. 옛말에 한마디 말로 나라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고 하였는데, 성상의 이 말씀이야말로 여기에 가깝다 하겠다.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340면
【분류】외교-야(野) / 재정-국용(國用) / 정론-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 역사-편사(編史)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하다. 옛말에 한마디 말로 나라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고 하였는데, 성상의 이 말씀이야말로 여기에 가깝다 하겠다.

 

병조 판서 이귀가 차자를 올려 장유(張維)의 무죄에 대해 아뢰기를,
"나만갑(羅萬甲)이 죄를 받은 그 다음날 신이 성문 밖에 나가 보니, 만갑의 노모가 울부짖으면서 같이 적소(謫所)에 따라가고 싶지만 사람과 말이 준비되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만갑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모친이 뒤따라 갈 때 내가 노복과 말을 도와주겠다.’ 하였는데, 잠시 후 장유가 마침 왔기에 신이 그런 말을 하였더니, 장유가 말하기를 ‘나도 말 한 필을 빌려 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장유가 진소(陳疏)한 것은 그날 아침 이전의 일이었고 나와서 만갑을 만나 본 것은 오후에 있었던 일이니, 진소할 때에는 만갑의 모친이 뒤따라 갈 계책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장유는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경연에서 참혹하고 애달픈 정상에 대해서 대략 진달하였는데, 어찌 이 말이 거꾸로 장유에게 해를 끼치게 될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장유의 말을 살펴보면, 말을 빌려 준 것 외에도 정직하지 못한 일이 있다. 경이 공평하게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홍문관도 차자를 올려 장유는 죄가 없다는 것을 아뢰면서 외직에 보임하지 말 것을 청하니, 상이 듣지 않았다.

 

8월 4일 병진

수원부(水原府)의 장관(將官)을 대상으로 시재(試才)하여 최만득(崔晩得) 등 24인을 입격(入格)시키고 우등자는 직급을 올려 주고 나머지는 활과 말을 차등 있게 내렸다.

 

상이 하교하였다.
"요즘 들어 누기(漏器)가 정밀하게 못해 시각이 항상 착오가 나는데도 관상감은 보통으로 보아 그냥 놔둔 채 전혀 검칙하지 않고 있으니, 지극히 잘못되었다. 당해 관원을 추고하라."

 

교리 최유해(崔有海)를 원 독수(袁督帥)의 문안관(問安官)으로 삼았는데, 병조 판서 이귀(李貴)가 차자를 올려 진달하기를,
"원 경략(袁經略)을 문안하는 일은 사체가 매우 중하니, 당하관을 차송해서는 안됩니다."
하니, 상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전대(專對)를 잘하느냐의 여부는 그 사람됨에 달려 있지 관직의 높낮이에는 상관이 없습니다. 왜사(倭使)의 집대관을 선위사(宣慰使)로 호칭하는 것은, 저쪽에서 국왕의 사신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상 우리가 당상관을 보내면 사체가 과중하게 될 것이고 또 그냥 당하관을 보내면서 사(使)라는 칭호를 붙이지 않으면 저쪽에서 필시 혐의를 삼을 것이기 때문에 사의 호칭을 붙이는 것이니, 이것을 인용하여 예로 삼을 수 없을 듯합니다.
우리 나라의 지역 안에 들어와 중국 조정의 장관(將官)에 대해서는 그 아문(衙門)의 고하에 따라 접대하는 신하도 그 고하를 맞춰야 하니, 이번 재자관(齎咨官)의 경우는 빈접관(儐接官)의 임무와 비교하여 동일할 수 없습니다. 또 중국 조정의 아문에 대해서는 문안을 목적으로 왕래한 예가 한 번도 없으니, 이번 또한 재자관으로 호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문(咨文)도 없었는데, 재자관으로 칭한다면 타당하지 못할 듯하다. 다시 의논하라."
하였다.

 

8월 6일 무오

병조 판서 이귀가 다시 차자를 올려 삼공과 육경 중에서 중신을 원 경략에게 파견할 것을 청하고, 또 보내온 자문(咨文)에 고려(高麗)라고 잘못 칭했으니 회답해서는 안 된다고 아뢰었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회자(回咨)할 성격이 못됩니다. 그쪽에서 고려라는 두 자를 쓴 것이 타당치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자문의 내용을 살펴 보건대 나라에 통유(通諭)할 목적으로 취한 행동인 듯합니다. 그리고 그쪽에서 일단 국왕에게 보낸다고 하지 않은 이상 이자(移咨)하는 형식에 어긋나니, 우리도 대략 그런 내용으로 게첩(揭帖)의 형식을 빌어 언급하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차송관(差送官)에 대한 문제는 이렇습니다. 예전에 군문(軍門)이 밀운(密雲)에 주재하고 있을 당시 정엽(鄭曄)과 이춘원(李春元) 등이 모두 5품관으로서 자문을 갖고 왕래하였고, 과거 양 경략(楊經略)이 광녕(廣寧)에 부(府)를 개설했을 때에도 남이웅(南以雄)이 전 정언으로서 차송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전례(前例)라 할 것입니다. 전대(專對)를 잘하는 것은 관직의 높낮이와는 상관이 없고 그저 적임자만 얻으면 되니, 그 차송관은 오직 상대방과 우리의 형세를 잘 살펴 어떻게 수응(酬應)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대마도주(對馬島主) 평의성(平義成) 및 현방(玄方)이 예조에 서한을 보내어 오래도록 폐쇄된 길을 열어 준 것과 차관(差官)을 경성에까지 불러들였다가 귀한시킨 일에 대해 사의를 표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오랑캐를 대하는 도리는 비록 다스리지 않는 것이 바로 다스리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반드시 엄연히 의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줘야지, 조금이라도 오랑캐가 버릇없이 굴도록 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런데 이번의 경우 현방과 지광(智廣)이 아무리 국사(國使)라고 칭했어도 실제로는 국서(國書)가 없었으니 도주(島主)가 보낸 일개 차왜(差倭)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의 가짜 칭호를 믿고 속임수에 떨어진 채 송영(送迎)하고 대접하는 것을 국사에 맞추어 함으로써 저 교활환 적들로 하여금 우리 나라에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몰래 엿보게 하였다. 그리고 통공(通貢)하자는 그들의 청도 기교를 부려 우리의 행동을 시험해 보려고 한 것인데, 묘당에서는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했다. 아, 개탄할 일이다.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341면
【분류】외교-왜(倭) / 교통-수운(水運) / 역사-편사(編史)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오랑캐를 대하는 도리는 비록 다스리지 않는 것이 바로 다스리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반드시 엄연히 의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줘야지, 조금이라도 오랑캐가 버릇없이 굴도록 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런데 이번의 경우 현방과 지광(智廣)이 아무리 국사(國使)라고 칭했어도 실제로는 국서(國書)가 없었으니 도주(島主)가 보낸 일개 차왜(差倭)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의 가짜 칭호를 믿고 속임수에 떨어진 채 송영(送迎)하고 대접하는 것을 국사에 맞추어 함으로써 저 교활환 적들로 하여금 우리 나라에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몰래 엿보게 하였다. 그리고 통공(通貢)하자는 그들의 청도 기교를 부려 우리의 행동을 시험해 보려고 한 것인데, 묘당에서는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했다. 아, 개탄할 일이다.

 

최연(崔衍) 등 10인을 겸춘추(兼春秋)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국가에서 춘추(春秋)054)  의 관원을 둔 것이 어찌 진정 이렇게 하려고 해서였겠는가. 내외관을 막론하고 모두 이 직무를 행하게 되어 있으니, 내직은 날마다 일을 기록하고 외관은 1개월 단위로 중요한 일을 정리해 기록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정치의 득실을 상고하고 민생의 휴척(休戚)을 살필 수 있게 함은 물론, 여항(閭巷)에 나도는 가요 중에서도 풍교(風敎)와 관련된 것은 모조리 채집하여 기록함으로써 태사(太史)가 혹 빠뜨리는 것을 보충하게 하였던 것인데, 중세 이후로 폐지하고 실시하지 않은 채 그저 서관(庶官)들의 형식적인 직함으로 전락되고 말았으니, 탄식을 금할 수 없다.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341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사법-법제(法制)


[註 054] 춘추(春秋) : 역사 기술하는 것을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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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국가에서 춘추(春秋)054)  의 관원을 둔 것이 어찌 진정 이렇게 하려고 해서였겠는가. 내외관을 막론하고 모두 이 직무를 행하게 되어 있으니, 내직은 날마다 일을 기록하고 외관은 1개월 단위로 중요한 일을 정리해 기록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정치의 득실을 상고하고 민생의 휴척(休戚)을 살필 수 있게 함은 물론, 여항(閭巷)에 나도는 가요 중에서도 풍교(風敎)와 관련된 것은 모조리 채집하여 기록함으로써 태사(太史)가 혹 빠뜨리는 것을 보충하게 하였던 것인데, 중세 이후로 폐지하고 실시하지 않은 채 그저 서관(庶官)들의 형식적인 직함으로 전락되고 말았으니, 탄식을 금할 수 없다.

 

양릉군(陽陵君) 허적(許𥛚)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조정에서 신을 이토록까지 배격하니 황공하고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마는,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날이 갈수록 더욱 북받쳐 오르기에 다시 한 말씀을 올리어 신의 죄를 더욱 무겁게 하고자 하니,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굽어살펴 주소서.
신은 삼가 듣건대 전하께서 신의 소(疏)를 해조에 내려 의논해서 아뢰게 하였다 하니 이것은 신의 말을 옳다고 여기신 것이고, 해조가 곧이어 방계(防啓)를 하자 전하께서도 의논한 대로 시행하게 하셨다 하니 이것은 신의 말을 그르게 여기신 것입니다. 옳고 그름이 뒤섞인 채 시행되고서도 제대로 그 국가가 보전된 예는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일반 정사를 처리할 때에도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법인데, 더구나 인륜(人倫)의 대절(大節)에 관계되는 이번 일의 경우이겠습니까.
처음에 신의 소를 해조에 내리신 것은 부모를 추존(追尊)해야 한다고 여기신 것이고, 그 뒤에 해조가 의논한 대로 시행하라고 하신 것은 부모를 추존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신 것이며, 마지막에 저의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시키라는 양사(兩司)의 논을 윤허하지 않으신 것은 부모를 혹 추존할 수도 있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나를 낳아주고 나를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는 하늘처럼 끝이 없는 것인데, 오늘은 존숭해야 된다고 하고 내일은 존숭해선 안 된다고 하고 또 그 다음날은 혹 존숭할 수도 있다고 하시는 셈이니, 사람의 자식이 되어서 어버이를 사랑하는 도리는 본래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고, 백성 위에 군림하는 임금이 되어서 아랫사람을 대하는 도리 또한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인류의 대절에 대해서 오히려 이런 식으로 하시는데, 더구나 일반 정사에 있어서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옳고 그름이 뒤섞여 시행하는 것이 오늘날과 같이 심한 때가 없었는데, 이러고서도 국가를 보존하기를 바라신다 말입니까? 저 옛날의 성인인 우(禹)·탕(湯)·무왕(武王) 같은 분은 대위(大位)에 오르자 마자 곤(鯀)·명(冥)·문왕(文王)을 추존하였습니다. 이는 대체로 임금이 된 뒤 한 시각이라도 부모를 신자(臣子)의 반열에 놔둘 수 없었기 때문이니, 이렇게 함으로써 나와 부모간에 개재되어 있는 인륜이 오늘은 밝아지는 듯하다가 내일은 또 어두워지고 그 다음날에는 다시 밝아질 듯하는 상황입니다. 이렇듯 일정치 않게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다가는 장차 그 불씨마저 꺼져버리고 말 것이니, 신은 삼가 전하를 위해 애통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신은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이제야 성상께서 마음에 두고 계시는 바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 융통성 없이 꽉 막힌 잘못된 의논은 대체로 세상에서 추중(推重)을 받는 인물에게서 시작된 것인데 대신과 대각(臺閣)이 바람에 쏠리듯 찬동하였기 때문에 전하 역시 억지로 따르시고, 신들이 논하는 것은 모두가 세상에서 경시되는 인물에게서 나온 것인데 신과 같은 경우는 더욱 천시받는 자이기 때문에 아무리 끓임없이 호소하여도 전하께서 의심하여 사람의 비중에 따라 결정되고, 하늘이 준 성효(誠孝)를 말미암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아, 전하의 타고나신 성효가 어쩌다가 이렇게 어두워졌단 말입니까. 이것은 대체로 감동하는 것이 깊지 않고 결단하는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처음 보위에 오르셔서는 종통(宗統)이 단절되는 것을 안타까워하여도 차마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삼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다가 한번 태묘(太廟)에 들어가셔서는 고비(考妣)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송구스럽게 여겨 차마 소목(昭穆)의 차서를 폐하지 못하셨으며 사실(私室)에 가셔서는 부모의 위치가 낮게 된 점에 대해 통곡하여 차마 인신(人臣)의 반열에 두지 못하셨습니다. 하늘이 준 성효의 마음을 격발시켜 와전시킨 오류 투성이의 주장을 내치신다면 감동하는 것이 깊고 결단하는 의지가 충분히 발휘될 것이니, 그 누가 감히 이를 막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전후에 걸쳐 양사가 올린 계사를 상고하시어 속히 신에게 찬출(竄黜)하는 형전(刑典)을 내리소서."
사신은 논한다.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해야 될 일만 하면 되는 것이니,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에 있어서도 위로 군상(君上)으로부터 아래로 대부·사(士)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각각 행해야 할 예가 있는 것이니만큼 조금이라도 가감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대원군(大院君)의 추숭(追崇)은 그 시비와 당부(當否)를 고례(古禮)를 참고해서 묘당에서 이미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그런데 저 허적은 일개 형편없는 무식자로서 감히 맞소를 올리면서 성효를 틈이 벌어지게 하고 있다. 아, 허적이 예를 안다면 누가 예를 모르겠는가. 그를 간사한 자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341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왕실-종사(宗社) / 역사-편사(編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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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해야 될 일만 하면 되는 것이니,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에 있어서도 위로 군상(君上)으로부터 아래로 대부·사(士)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각각 행해야 할 예가 있는 것이니만큼 조금이라도 가감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대원군(大院君)의 추숭(追崇)은 그 시비와 당부(當否)를 고례(古禮)를 참고해서 묘당에서 이미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그런데 저 허적은 일개 형편없는 무식자로서 감히 맞소를 올리면서 성효를 틈이 벌어지게 하고 있다. 아, 허적이 예를 안다면 누가 예를 모르겠는가. 그를 간사한 자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8월 7일 기미

상이 주강에 자정전(資政殿)에서 《서전》을 강하였다. 상이 원 군문(袁軍門)의 일로 자문을 구하니, 동경연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원 군문의 자게(咨揭)에 대해서는 묘당(廟當)에서 헤아려 처리하겠습니다마는, 소위 자문(咨文)이란 것은 공가(公家)의 문서이고 게첩(揭帖)은 사간(私簡)입니다. 대아문(大衙門)에서 자문을 보냈는데 우리 쪽에서 게첩으로 답할 경우, 신은 그것이 체면에 어떠할지 감히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자문 끝 부분에 ‘그대의 국왕’ 이라는 말이 있지 않았던가?"
하니, 특진관 남이공(南以恭)이 아뢰기를,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나에게 보낸 자문이 아니라 묘당에 통지한 글이니, 자문으로 답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남이공이 아뢰기를,
"대신의 소견도 그러합니다. 그 글을 보면 ‘이상의 내용을 고려국(高麗國)에 자(咨)한다.’고 했을 뿐 왕(王)이라는 글자는 없으니, 전적으로 상에게 자문을 띄운 것은 아닐 듯싶습니다. 그러나 홍서봉의 말도 소견이 있긴 합니다. 대신의 뜻은 자문을 보내고 싶어하나 말을 만들기를 난처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우리 나라에 산재해 있는 중국인이 많은 만큼 쇄환해 보낸다는 내용으로 자문을 작성하면 어떨까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쇄환할 중국 군사가 한 명도 없는데 거짓말로 핑계댄다면 성신(誠信)이 부족한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 별도로 자문을 만드는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남이공이 아뢰기를,
"이귀(李貴)는 대신이나 중신(重臣)을 보내고 싶어 하는데, 묘당에서는 안 될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꼭 중신을 보내야 하겠는가. 설령 중신을 보낸다 하더라도 군대 출동시기를 어떻게 미리 알겠는가."
하였다. 남이공이 아뢰기를,
"저쪽의 정세를 탐지하는 것은 관직의 고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양서(兩西)에는 중국인이 매우 많으니 차관(差官)이 돌아가기 전에 속히 모아 집결시키게 하고, 인하여 이런 내용을 가지고 따로 자문을 만들었다고 칭하면 일이 매우 순하게 풀리고 모양이 좋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한다면 이자(移咨)를 해도 근거가 없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홍서봉이 아뢰기를,
"나만갑(羅萬甲)이 진중하지 못한 탓으로 말을 가려서 하지 못했는데, 상신(相臣)이 건백(建白)한 것은 조용하게 되지 못할 단서가 될까 우려한 나머지 외직에 보임시켜 진정시키려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찬출(竄黜)까지 하는 것이 어찌 상신의 뜻이었겠습니까. 더구나 장유(張維)의 경우는 좌천까지 당했으므로 인심이 더욱 답답해 합니다. 나만갑의 지나친 행동에 대해서는 장유도 알고 있었습니다만, 조정에서 너무 지나치게 조처를 취하는 것을 우려했을 따름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유는 바로 이조 판서 김상용(金尙容)의 사위이다. 그가 올린 차자 내용 중에는 ‘신은 전장(銓長)과 한 집안 식구이니, 만약 어떤 일이 있었다면 어찌 모를 리가 있었겠습니까.’라는 구절이 있다. 나만갑이 전장을 동요시켰던 말을 몰랐던 것처럼 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요즈음 조정의 의논을 보건대 군상(君上)이 그르다고 하는 사람은 군하(群下)가 꼭 옳다고 하고, 위의 뜻을 따르는 자는 사람 같지도 않은 자로 지목하고 있다. 군상에게 진정 큰 잘못이 없다면 그대로 따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였다. 홍서봉이 아뢰기를,
"군상에게 아름다운 일이 있으면 받들어 따르기에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거역하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지나친 거조가 있을 때에는 간쟁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만갑에게 붕당을 조성하는 자취가 현저히 나타났기 때문에 김류(金瑬)가 그 풍조를 개혁하려 한 것이니, 어찌 그를 나무랄 수 있겠는가. 전일 경연에서 어떤 이가 말하기를 ‘나만갑은 열 번을 쫓겨나도 그 마음을 쉽게 바꾸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나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8월 8일 경신

상이 숭정문(崇政門)에 거둥하여 종실(宗室) 및 문무관의 무재(武才)를 시험하였는데, 둘씩 짝을 지어 나아가 활을 쏘았다. 이를 마친 다음에 포수(砲手)의 대오를 나눈 뒤 먼저 검법(劍法)의 시범을 보고 방패(防牌)·언월도(偃月刀)·권법(拳法)의 순으로 각각 재주를 발휘하게 하였다. 수석을 차지한 종실 귀흥도정(龜興都正) 이섬(李睒)과 문신 유여항(柳汝恒), 무신 박심(朴深)에게 모두 가자(加資)할 것을 명하고, 나머지 사람에게도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진 부총(陳副摠)이 도중(島中)에 고시(告示)하고 제도(諸島)에 잠입한 우리 나라 사람을 쇄환(刷還)하여 보내었다.

 

우리 나라 통관(通官)이, 모문룡(毛文龍)의 참장(參將) 곡승은(曲承恩)이 우리 나라에 폐를 끼친 정상을 낱낱이 진술함에 따라, 서 부총(徐副摠)이 진(陳)·유(劉) 두 장수에게 알려 그 죄를 바로잡도록 하였다.

 

원 경략(袁經略)이 이자(移咨)하였다.
"병부(兵部)의 자문(咨文)에 ‘본부가 받든 성유에 이르기를 「짐은 동쪽의 일에 관한 한 독수(督帥) 원숭환(袁崇煥)에게 맡겨 방비를 굳건히 하고 강토를 넓히며 기각의 형세를 취하여 제어하는 등 곤외(閫外)에 관한 일체의 군기(軍機)를 편의대로 처리하도록 그에게 일임하였다. 그런데 도수(島帥) 모문룡(毛文龍)은 멀리 군대를 해상에 두고 진(鎭)을 설치한 지 몇 년이 경과했는데, 걸핏하면 견제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실제로 조사해 본 결과 전혀 그런 사실이 없었다. 항복한 적을 죽여 승첩했다는 보고를 올리는 등 조정을 속이는가 하면 기갑(器甲)과 군량·마초 등을 요구하여 군국(軍國)의 비용을 허비하였다. 여러 차례 진을 옮기라는 명지(明旨)를 받고도 방자하고 거만하게 못 들은 체하였으며, 항복을 받았다고 위서(僞書)를 만들어 주문(奏文)까지 하였는데 글 내용이 교만하고 패악스러웠다. 게다가 멋대로 강퍅하게 굴면서 기세를 더욱 부리는가 하면 날뛰는 그의 행동을 탄핵했어도 절제(節制)를 받지 않았다. 급기야 최근에 이르러서는 오랑캐와 중국 군대 다수를 부오(部伍)로 편성한 뒤 배를 띄워 등주(登州)까지 진격해서는 큰 소리를 치며 군량을 요구하는 한편 대대적인 행동을 취하여 발호하였으니, 반역을 도모하는 그의 자취가 현저히 드러났다 할 것이다. 이에 원숭환이 위기상황을 목격하고 자신이 직접 그를 정형(正刑)에 처한 뒤 그의 죄상(罪狀)을 12개 조목으로 나누어 주문을 올렸는데, 그의 죄는 사형에 처해 마땅한 것이었다. 대장(大將)을 사형에 처하려면 먼저 보고하는 것이 원래 행군(行軍)하는 기율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 경우는 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계책을 결행한 것으로서 일의 기미로 보아 갑자기 도모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었다. 법제에 맞지 않는 일을 행했다고 생각하여 소(疏)를 올리고 대죄하고 있는 원숭환에게는 이미 명륜(明綸)을 받들었으니만큼 안심하고 일을 수행케 하고, 사후 적절히 처리해야 할 일체의 일은 도장(道將)에게 위임하여 요리케 하라. 그리고 이 일과 관련하여 우선 크게 방(榜)을 써서 게시하여 동강(東江) 각도(各島)를 효유하라. 원악(元惡)을 이미 정형(正刑)에 처한 이상 아직 드러나지 않은 패역스러운 행위에 대해서는 우선 관대한 의논에 따르도록 하고, 섬에 있거나 호적에 기재되어 있는 일가붙이는 자제들도 모두 놓아주어 그의 집을 편안케 하라. 성씨를 바꾼 자들은 조사하여 원래대로 복귀하도록 하는 동시에 그와 친하게 지내며 같이 일을 했던 여러 사람들도 용서해 주도록 하라.
장령(將領)들에게는 재주를 헤아려 임무를 부여하여 말끔히 씻고 새롭게 되도록 하는 한편, 군사의 대오도 맑게 정비하여 양식을 지급함으로써 배고파 고달프게 만들지 말도록 하라. 오래도록 갇혀 고통스러운 생활을 해온 자로서 제명(除名)되기를 원하는 자는 들어주고, 요동(遼東) 백성 가운데 장정들에게는 대오를 편성하여 양식을 지급해 줄 것이며, 고향에 돌아가는 노약자에게 물자를 대주어 건너오도록 편의를 도모하라. 조선과는 서로 긴밀히 도와야 할 처지에 있으니 역시 이자하여 알리도록 하고, 그 나머지 병장(兵將)의 부서(部署)나 영오(營伍)의 구획(區畫) 등 완전히 처리하지 못한 사무는 모두 독수(督帥)의 지휘를 받아 기틀을 살펴 조치하도록 하라. 전에 듣건대, 모문룡이 뇌물을 써서 교유를 넓혀 중외(中外)가 호응하여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인심을 의혹케 했다 하는데, 이제 그의 사적(事跡)이 뚜렷이 밝혀졌으니 모든 의혹을 풀렸을 것이다. 서울에 숨어 있는 그의 잔당을 몰아내 체포함은 물론 군중(軍中)과 도중(島中)을 엄히 단속하여 한결같이 신명(申明)토록 하라. 해부(該部)는 즉시 관원을 차송해 독수와 도장 등 관원에게 전해줌으로써 통지하고 고유(告諭)케 하라.」 하였습니다. 본부에서는 이 성유를 공경히 준행하는 동시에, 조선국에 이문(移文)하니 일체 성유에 따라 시행하기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8월 9일 신유

유성이 벽성(壁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헌부가 아뢰기를,
"양릉군(陽陵君) 허적(許𥛚)이 전후에 걸쳐 소장을 올리며 망령되이 예제(禮制)를 논했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그 행동에 대해 깊이 증오하였는데, 당시 양사가 번갈아 논하며 죄를 청했던 것은 그가 망령되이 논한 것을 배척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대간이 논한 소장에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다시 이렇게 야유하며 멋대로 굴고 있으니, 그 정상이 너무나도 통분스럽다 하겠습니다. 신들이 그의 원소(元疏)를 가져다 보건대, 장황하게 채운 것이 군부(君父)를 욕되게 하고 조정을 위협하여 제어하려는 내용이 아닌 것이 없었으니, 신자(臣子)로서 차마 똑바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신하된 자가 이렇듯 패악하고 교만한 죄를 지었고 보면, 유배 보내는 형전(刑典)을 시행하는 것만도 말감(末減)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멀리 유배보내도록 명하소서."
하고, 간원도 아뢰었으나 상이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제주(濟州)에 표류한 중국인 10명이 서울에 도착하였는데, 상이 예빈시(禮賓寺)에 명하여 궤향(饋餉)을 풍성하게 해주도록 하고, 마침내 사람을 차송(差送)하여 그들을 중국에 단속해서 데리고 가게 하였다. 중국인 황여성(黃汝誠) 등이 이때 말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쌀과 포목 등의 물건을 싣고 가도(椵島)로 향해 가는 길이었는데, 황하(黃河)의 소구(小口)를 빠져나와 소해양(小海洋)에 이르렀을 때 밤에 광풍(狂風)을 만나 길을 잃은 채 표류하다 어떤 곳에 도착했습니다. 물을 길으려 해안에 올라가 물어 보고서야 귀국의 정의(旌義) 지역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상륙할 즈음에 또 광풍이 갑자기 일어나 본선(本船)이 떠내려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추신사(秋信使) 박난영(朴蘭英)이 오랑캐 지역에서 돌아올 때 호차(胡差) 아지호(阿之胡)와 중남(仲男)과 종호(從胡) 9명이 같이 왔다. 서 부총(徐副摠)이 같이 온 호차를 베려 했는데, 진(陳)·유(劉) 두 장수가 말하기를,
"호차를 죽인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고, 또 조선 사람이 섞여 있으니 옥석(玉石)이 구분되지 않은 채 모두 타버릴 위험이 없지 않다."
하면서 극력 만류하자, 이에 그쳤다. 섬 안에 노약자를 거의 모두 등주(登州)로 실어 들였다.

 

8월 10일 임술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가 경기에 순찰을 나가 군사를 점검하였다.

 

8월 12일 갑자

강원도 삼척(三陟)·울진(蔚珍)·간성(杆城)·고성(高城) 등 고을에 크게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 벼가 떠내려 갔다.

 

8월 13일 을축

유성이 규성(奎星) 아래에서 나와 벽성(壁星) 아래로 들어갔다.

 

도적이 용인현(龍仁縣)에 있는 충의위(忠義尉) 이순(李舜)의 집에 들어가 금오(金吾)055)  에서 역적을 체포하러 왔다고 둘러댄 뒤 이순 및 처와 딸을 묶어 가면서 집의 물건을 노략질해 갔다. 이순과 처는 중도에 내버린 채 두 딸만 싣고 달아났는데, 광주(廣州)의 사노(私奴) 갑생(甲生)의 집에 숨어 있는 것을 이순이 뒤쫓아가 체포하여 알리니, 포도청이 장살(杖殺)하였다.

 

제주(濟州)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유리(流離)하여 육지의 고을에 옮겨 사는 관계로 세 고을의 군액(軍額)이 감소되자, 비국이 도민(島民)의 출입을 엄금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8월 16일 무진

상이 장차 사묘(私廟)에 친제(親祭)를 거행하려 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시제(時祭)를 한 실(室)에서 홀로 행할 수 없으니, 지난해 부묘제(附廟祭)를 거행할 때의 예에 의거하여 행하라."
하니, 예조가 아뢰기를,
"지난해 부묘제를 지낼 때, 인빈(仁嬪)과 함께 제사지낼 수 없다는 뜻으로 아뢰었더니, 일체 《오례의(五禮儀)》에 의거하여 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래서 부표(付標)하여 들였었는데, 그 당시 대간이 ‘신품(申稟)을 하지 않아 전하로 하여금 끝내 근거없는 예를 행하도록 하였다.’는 이유로 비난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록 전적으로 친제하는 것이 미안하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더라도, 을축년에 친제 지내실 때의 의주(儀註)를 살펴 보더라도 인빈을 함께 제사지냈다는 글귀는 보이지 않습니다. 제례(祭禮)는 지극히 중한 것이니,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행 판중추부사 윤방(尹昉), 영상 오윤겸(吳允謙), 좌상 김류(金瑬), 우상 이정구(李廷龜) 등이 의논드리기를,
"시향(時享)할 때의 예는 봉사(奉祀)하는 사람이 주헌(主獻)이 되어야 하니, 전하께서 시사(時祀)를 사묘(私廟)에서 행하시는 것은 합당하지 못할 듯합니다. 그러나 서리와 이슬이 벌써 내려 성상의 마음이 애달플 것이니, 특별히 별제(別祭)를 거행하여 추모의 정을 펴는 것은 의리상 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인빈(仁嬪)은 한 묘(廟)에 함께 계시니 별제라고 칭하면서 같이 전례(奠禮)를 거행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시제(時祭)라고 일컫는다면 사묘에 대해서도 주헌이 될 수 없는데, 더구나 인빈의 경우이겠습니까."
하였다. 예조가 또 말하기를,
"시제와 별제가 그 이름은 다르지만 추모의 정성을 나타내는 것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으니, 의주(儀註) 중에 별제를 부표하여 인빈에게도 함께 전례를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8월 17일 기사

예조로 하여금 《소학(小學)》·《오륜가(五倫歌)》·《격몽요결(擊蒙要訣)》 등의 서적을 간행하여 중외에 반포하게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병인년에 식년시(式年試)를 치른 이후로 은사(恩賜)로 분수(分數)056)  를 얻은 자가 22인인데, 한성시(漢城試) 양소(兩所)의 원액(元額)을 계산해 보면 제술(製述)에 참여할 수 있는 자가 1소(所)당 9인밖에 되지 않아 3년에 한 번 치르는 성대한 과거가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신들이 병인년에 본조에서 올린 계사(啓辭)를 가져다 보건대, 그때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어서 2분(分) 이상을 얻은 자는 회시(會試)에 직부(直赴)하도록 할 것을 계청하자, 대신에게 의논하여 품재(稟裁) 받도록 하시어, 좌상 윤방(尹昉)의 의논에 따라 회시에 직부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번의 경우도 은사로 분수를 얻은 자 가운데 2분 이상을 받은 자는 병인년의 예대로 똑같이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8월 18일 경오

장령 신달도(申達道)가 아뢰었다.
"전일 경연에서 병조 판서 이귀(李貴)가 좌의정 김류(金瑬)에 대해 못할 말없이 모욕을 가하면서 이이첨(李爾瞻)에게 비유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김류에게 과연 이이첨과 같은 죄가 있다면 이귀의 말이 옳으니, 김류가 어찌 감히 하루라도 정승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이귀가 무함하는 말을 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대신을 무함한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김류와 이귀는 다 같이 거사를 일으켜 반정(反正)한 공이 있으니, 종묘 사직을 재건한 공훈은 똑같다 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일단 김류를 정승의 지위에 올려 놓은 이상, 이귀가 어찌 감히 공훈이 있다고 하여 교만하고 방자하게 굴면서 이토록 상신(相臣)을 무함하고 조정을 능멸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옛날 노(魯)나라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정치하는 법을 묻자 공자는 대신을 공경하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공자의 말이 어찌 우연히 나온 것이겠습니까. 대신은 모든 책임을 혼자 지는 자로서 임금 바로 아래에 처하여 백관의 위에 자리잡고 있으니, 인주(人主)가 그를 의지하여 정치를 펴 나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의 임금은 적임자를 얻어 정승 자리에 앉혀 돈독하게 믿고 일을 전담케 하였습니다. 따라서 소신(小臣)이 이간할 틈이 없고 참언(讒言)이 들어올 수가 없었기 때문에 조정이 존엄해지고 치화(治化)가 달성되었던 것입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대신이 경시를 받고도 어지러워져 망하지 않은 나라는 없습니다.
이번에 이귀는 너무도 모욕적인 행동을 취했고 김류는 말할 수 없는 무함을 당했으니, 조정이 존엄하지 못하게 된 것이 이보다 클 수가 없습니다. 국가의 형세가 시들해진 채 진작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신이 언관의 직책을 맡고 있기에 즉시 규핵(糾劾)하려 했으나, 동료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이렇게 지체하게 되었으니, 신이 너무나도 직책을 수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직을 파척하도록 명하소서."

 

집의 조방직(趙邦直)이 아뢰었다.
"오늘 본부(本府)가 개좌(開坐)했을 때 장령 신달도가 석상(席上)에서 발언하며 병조 판서 이귀가 대신을 모욕한 일을 논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생각하기를, ‘대신은 존중해야 하니 과연 모욕한 일이 있다면 일에 따라 바로 잡는 것이 안 될 것은 없다. 그러나 경연에서 한 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한 데다가 이귀가 올린 차자의 내용을 보니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한 것일 뿐 조금도 상신(相臣)을 침해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하였다. 억지로 상신에게 모욕을 가했다는 죄를 적용하였다가 만약 실상(實狀)이 없으면 그 또한 할 말이 있게 될 것이니, 대관(臺官)이 일을 논하는 체통에 비추어 볼 때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조정을 존엄하게 하려는 뜻이 도리어 소요를 일으키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일인 만큼 꼭 문제를 제기할 필요 없다.’고 여겼습니다. 이에 서로 상의하였을 뿐 조금도 난색을 표하며 다른 의견을 낸 적이 없는데, 뜻밖에도 이를 이유로 동료가 인피(引避)하였습니다. 신의 무기력하여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 죄가 드러났으니, 신의 직을 체척하도록 명하소서"

 

8월 19일 신미

대사헌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며칠 전 장령 신달도가 신에게 와서 말하기를 ‘이귀가 탑전(榻前)에서 상신(相臣)에게 모욕을 가하면서 차례로 간흉(奸兇)을 거론하여 비유하였다. 상신에게 조금이라도 이와 비슷한 자취가 있다면 어찌 한 시각이라도 그대로 재상의 자리에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모함에 빠뜨린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믿어야 될 것은 나라의 기강 밖에 없으니, 이귀를 탄핵하려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대신은 군상(君上)도 공경스럽게 대하는 터인데 어떤 사람이 이렇게까지 모욕을 가했다면 조정이 이로 인해 존엄해지지 못할 것이니, 장령이 탄핵하려 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이귀는 본래 말을 가리지 않고 하는 사람인데 지금은 노망까지 들었으니, 화가 나서 마구 쏟아내는 말 중에 관등(官等)을 무시하는 내용이 있다 하더라도 그다지 책망할 거리가 못 된다. 그리고 요즘 조정의 분위기가 좋지 못하니 조용하게 진정시켜야 할 텐데, 이런 논계를 하면 자칫 소요스럽게 될 염려가 있다. 헤아려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헌부가 개좌(開坐)했을 때 신달도가 다시 전의 주장을 내놓기에 신달도가 4시 전의 내용으로 거듭 말했는데, 지금 그가 피혐한 내용을 보건대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 아직까지 어려워하며 지체하기만 하고 관사(官邪)를 바로잡지 못했다.’ 하였습니다. 이는 모두가 신이 장관으로 있으면서 무기력하여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 탓이니, 신의 직을 갈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옛날 조(趙)나라의 인상여(藺相如)가 진(秦)나라 왕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염파(廉頗)에게 허리를 굽힌 것은 나라를 위해서였다. 지금 이 두 사람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면 염파와 인상여에게 죄인이 될 뿐만 아니라 이이첨(李爾瞻)이나 박홍구(朴弘耉)의 여당(餘黨)에게도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이니, 세상에 어찌 이토록 수치스러운 일이 있겠는가.
오늘날 진실로 붕당을 나누어 조정을 혼란케 할 조짐이 있다면 대신이나 중신을 막론하고 모두 유배를 보낸다 하더라도 안 될 것이 없다. 그러나 전일 병조 판서가 한 말은 그저 지나가는 말에서 나온 것이고 또 시기한 흔적도 없었는데, 신달도가 그것을 진정으로 여긴 것은 지나쳤다 하겠다. 경은 잘못한 것이 없으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이귀가 상신에게 모욕을 가했다는 말이 외간에 상세히 전해지지 않았으나, 허다한 사설 모두가 꼭 지나가는 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상도(常道)에 입각하여 자기 견해를 고수하면서 관사(官邪)를 규찰하고 조정의 권위를 높이려고 한 것이야말로 본디 대신(臺臣)의 직절(直截)한 기풍에 맞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또 서로 사실을 확실히 알아 본 뒤에 의논해서 처리하자고 한 것은 조금도 어렵게 여겨 지체시킨 것이 아닌 것으로 논사(論事)하는 체통에 위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분격한 나머지 관직의 차서를 무시한 말을 한 것에 대해 깊이 책망하려 하지 않고 소요스러운 폐단이 있게 될까 염려한 것도 잘 생각하여 처리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서 진정시키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들 피혐할 만한 이유가 없으니, 신달도·조방직·홍서봉의 출사를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병조 판서 이귀가 여러 차례 차자를 올려 원 독수(袁督帥)에게 중신을 파견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답하지 않았다.

 

8월 20일 임신

유성이 왕량성(王良星) 위에서 나와 좌기성(左旗星) 아래로 들어갔다.

 

영상과 우상이 아뢰기를,
"좌상 김류(金瑬)가 체찰사의 임무를 맡아 양서(兩西)의 군민(軍民)을 순무(巡撫)할 목적으로 탑전(榻前)에서 직접 진달드리고 날짜를 잡아 떠날 예정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대신이 외방에 나가는 것은 사체상 매우 중대한 일일 뿐만 아니라, 현재의 상황이 전일과는 판이하게 달라 호차(胡差)의 행차와 마침 서로 마주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소한 동정도 자세히 살피지 않는 것이 없을텐데 더구나 이런 상신(相臣)의 거조를 모를 리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바야흐로 잔뜩 의심을 품고 오는 터에 만약 대신이 나가 순무하며 군대를 점검한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면 필시 의아해 할 것이니, 그들이 우리를 못믿어 의심하는 마음만 더욱 부추길 것이 뻔합니다. 국가의 운명과 관계가 있는 일로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 체신(體臣)의 행차는 적당한 때가 못 되니, 정지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숭정전(崇政殿)에서 호차를 접견하였는데, 중남(仲男)이 의자에 앉는 것을 처음으로 허락하였다.

 

8월 23일 을해

우참찬 김상헌(金尙憲)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이 병든 몸으로 사실(私室)에 엎드려 있다가 삼가 들으니, 상께서 금(金)나라의 차인(差人)을 불러서 보실 때에 중남(仲男)에게 의자에 앉도록 허락하셨다 하기에, 경악을 금치 못하여 처음에 말이 잘못 전해진 것이려니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비국의 계사(啓辭)를 보건대 ‘중남은 금수이니 그에게 사람의 도리를 요구할 수 없다. 더구마 한(汗)이 이 자로 말미암아 박난영(朴蘭英)에게 정중히 대해 주었다 하니, 그와 다투어 노여움을 촉발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처음부터 허락해 주는 것이 낫다.’ 하였습니다. 신은 어리석어서 임기 응변에 능통하지 못하나 묘당의 의도가 무엇인지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상께서 이웃 나라의 사신을 불러 보시는 그 예야말로 대단히 중한 것이니, 어설프게 절목을 강구해 정함으로써 상대편 사람들이 능멸하도록 꼬투리를 만들어 주어 우리 나라에 무궁한 수치를 끼치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중남이 금수로 자처하면서 금수 같은 짓을 자행한다면 우리가 그를 금수로 대하며 책망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한(汗)이 말하는 것이나 그가 바라는 것이 모두 예모의 존비(尊卑)에 관계되는 것이고 보면, 이것이 과연 금수로 자처하는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속으로는 두려워하여 감히 그의 지시를 거역하지 못하면서 겉으로만 큰소리를 치며 금수로 대우한다고 이야기한다면, 진실로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될 일이라 하겠습니까? 아무리 오랑캐와 중남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우리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우리 나라가 그들의 말에 순종하는 것을 오랑캐가 알아 차리고 더욱 능멸하는 마음을 키워 매번 우리가 행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와서 요구할 경우에도 그들을 금수로 대우해야 한다고 하면서 반드시 거역하지 않고 들어 줄 것입니까?
적국을 대하는 도리에는 들어 줄 수 있는 것이 있고 들어 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세폐(歲幣)를 증감한다거나 관시(關市)를 허락하는 여부에 관한 일이라면 시대 상황에 따라서 억지로 들어 줄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제(齊)나라의 밭이랑을 모두 동쪽으로 내게 한 일057)  이나 노(魯)나라에게 백뢰(百牢)로 대접하게 한 일058)  이나 추(鄒)나라에게 배빈북향(倍殯北向)토록 한 일059)   등이라면 어떻게 들어 줄 수 있겠습니까. 군대가 성 아래에까지 쳐들어와 그 일에 존망이 달리게 되었다 하더라도 차라리 자결할 각오로 결사적으로 싸울 뿐 허례로 가볍게 승락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모든 일을 미연에 방지하는 목적은 마지막 결과를 염려해서이고, 일이 사소할 때 꺾어버리는 것은 그 요구가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옛날 남송(南宋) 때에 국세가 부진하여 오랑캐의 요구를 감히 거역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 끝없이 땅을 떼어 주다가 필경에는 재배(再拜)하기에 이르렀고 끝없이 재배하다 보니 마침내 신하라는 말을 해야 될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천고에 한이 되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송나라 신하들 중에 어찌 존주(尊主)하는 마음을 가진 자가 한 사람도 없었겠습니까. 다만 처음에 굳세게 맞서 싸우지 못하다 보니 점점 그들의 말대로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고, 또 이런 식으로 오래 행하다 보니 그 때는 그저 그러려니 하며 수치심을 느끼지도 못하게 된 것이니, 거울로 삼아야 할 역사적 사실로서 후세 사람들이 경계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병력이 대적하고 있는 이웃 나라들보다 크게 낫다고 할 수 없는데도 이렇게 유지하여 보존해 온 것은 예의와 명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구구하게나마 스스로 지켜 온 것마저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면, 아무리 창름(倉廩)·부고(府庫)와 궁실·백관이 볼 만하다 하더라도 나라가 없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호전(胡銓)060)  이 이야기한 바 ‘싸우지 않고도 기운이 저절로 소멸되었다.’고 한 경우와 불행하게도 비슷하게 될 것이니, 신은 통탄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중남이 이미 전하의 앞 자리에 앉아 손님의 예로 대접받은 이상 이제 동해 바다의 물을 다 퍼서도 그 부끄러움을 씻기에는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묘당에서 이렇게 의논하게 된 까닭은 우리에게 자강(自强)할 방법이 없는 터에 막강한 오랑캐의 노여움을 촉발시키는 것은 온당한 계책이 못 된다고 여겼기 때문으로서, 그저 할 말은 속에다 넣어둔 채 고분고분하게 따르는 것이 일시적으로나마 나라를 보존시키는 길이라고 여겨서였을 것입니다. 반정한 이후로 모든 일이 잘못되기만 하여 이제 어떻게 해 볼 수 없게 된 것만도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데, 전하께서 또 편당을 짓지나 않나 하는 악감정을 품으시고 온 조정의 신하를 의심하시므로 상하간에 정의(情義)가 막혀 통하지 못하고 시비가 분명히 가려지지 않은 채 점점 구할 수 없는 병처럼 고질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 점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스스로 돌아 보시어 통렬하게 자신을 맹세하지 않으십니까. 만세토록 이어 갈 기업을 중흥하려면 반드시 오늘부터 시작해야 할 텐데 어찌하여 천리의 땅덩어리를 가지시고도 남을 두려워한단 말입니까. 만약 혹시라도 그런 의지는 없이 그저 할 말을 못한 채 고분고분 따르는 것으로 나라를 보전하는 훌륭한 계책을 삼으신다면 국세는 점점 오랑캐의 영역 안으로 빠져들고 말 것으로, 중남을 예우한 것 정도는 정말 아무 일도 아니게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 보고 마음속 깊이 가상하게 여긴다. 차자의 내용은 명심하겠다."
하였다.

 

8월 25일 정축

순천군(順川郡)에 지진이 일어났다.

 

8월 27일 기묘

상이 낮에 자정전에서 《서전》을 강하였다. 지경연 김상용(金尙容)이 아뢰기를,
"우공(禹貢)편을 보건대, ‘모든 토지를 3등급으로 나누어 나라의 부세(賦稅)제도를 확립한다.’고 하였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급선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양전(量田)061)  제도를 폐지하여 공물과 부역이 불균등하게 되었습니다. 성인의 천하를 다스리는 법은 반드시 경계(經界)를 바르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으니, 그런 뒤에 분전(分田)이나 제록(制祿) 등의 일은 자연히 해결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경계부터가 바르지 못하니, 양전법을 시행해야만 합니다."
하고, 검토관 한흥일(韓興一)이 아뢰기를,
"반드시 기강을 먼저 확립시켜야만 양전을 시행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행하긴 행해야 한다. 그러나 옳은 방법을 찾지 못하면 오히려 불균등하게 될 것이니, 우선은 서서히 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상용(金尙容)이 아뢰기를,
"원 군문(袁軍門)에게 보낼 문안관(問安官)으로 최유해(崔有海)를 정했는데, 이귀(李貴)가 자주 차자를 올려 중신을 보낼 것을 청했고 또 자신이 가겠다고 청하였으므로 최유해가 아직까지 출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게(咨揭)를 보내는 일이 이토록 지연되고 있는데, 혹한기가 이미 박두해 해로(海路)로 통과하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속히 보내야만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떤 인물이냐에 달렸을 뿐 관직의 높낮이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였다. 특진관 최명길(崔鳴吉)이 아뢰기를,
"신이 경략(經略)이 보낸 자문(咨文)의 의도를 살펴 보건대 적을 공격할 계책을 세우자는 것이고, 이자(移咨)한 내용도 단지 섬의 군대를 철수시킨다고 우리에게 통보한 것일 뿐입니다. 저쪽에서 일반적인 말로 우리에게 통보해 온 이상, 우리 나라도 적을 잊지 않고 있다는 뜻만 보여주면 될 것입니다. 신이 우리 나라에서 작성한 답서를 가져다 보건대, 말을 하는 가운데 ‘시기에 맞춰 군대를 일으키겠다.’고 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 있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천천히 저쪽의 정세를 살펴 보면서 전투를 돕겠다는 뜻을 다시 거론하였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런 말들을 어떻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중국 조정에서 군대를 일으켜 무리를 동원한다면 우리가 어찌 감히 힘껏 도와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대의(大義)와 연관되는 문제이다."
하였다.

 

평안 감사 김시양(金時讓)이 치계하기를,
"본도에 개간한 곳이 약간 있기는 하나 쑥대와 억새풀만이 무성할 뿐 소득은 얼마 안 되니, 지난해의 예에 따라 답험(踏驗)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함경 감사 윤의립(尹毅立)이 치계하기를,
"북도는 우박의 피해를 혹독하게 입었고 남관(南關)은 수재와 한재가 겹쳐 앞으로 백성을 구제할 방책이 없으니, 도사(都事)로 하여금 참작하여 급재(給災)062)  하게 하소서. 그리고 올해 영동(嶺東) 아홉 고을의 전세(田稅)를 예전의 예에 따라 본도의 군향(軍餉)으로 하여 원산창(元山倉)에 실어들이게 함으로써 내년 진휼할 자본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28일 경진

장령 신달도(申達道)가 이귀(李貴)를 논핵하였는데, 지평 오달승(吳達升)이 따르지 않자 신달도가 재차 피혐하니, 오달승이 아뢰었다.
"삼가 장령 신달도가 인피한 계사를 보건대 병조 판서 이귀가 대신에게 모욕을 가한 죄를 논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생각하기를 ‘대신은 임금이 존경하고 백관이 우러러 보는 인물이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모욕을 가한 일이 있다면 체면과 관련이 있으니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언관이 일을 논할 때에는 상세하게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 경연 석상에서 나온 이야기를 직접 듣지 못하였다. 게다가 이귀가 차자를 올려서 실은 직접 배척한 것이 아니었음을 해명했고, 상께서도 일반적인 이야기였다고 분부를 내리셨다. 그렇다면 오늘날 억지로 죄목을 뒤집어 씌운다는 것은 타당하지 못할 듯하다. 그리고 이미 지나간 일을 꼭 제기하여 소요스럽게 될 단서를 열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 나름대로는 이렇게 생각했던 것인데, 신달도가 인피하기까지 하였으니, 어떻게 감히 자리에 그대로 있겠습니까. 체차하소서."

 

8월 29일 신사

대사헌 홍서봉(洪瑞鳳)이 재차 피혐하면서 아뢰었다.
"이귀의 죄를 청해야 한다는 의논이 한두 번 나온 것이 아니었지만 신이 따르지 않았던 것은 이귀에게 논할 만한 잘못이 없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한때의 시비에 대해서는 본디 공론(公論)이 있게 마련이지만 조용한 가운데 진정시키는 것도 임기응변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서로 버틴 채 해결을 보지 못한 지 며칠이 경과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장령 신달도가 자리에 나온 뒤에 신에게 찾아와서 말하기를 ‘저번의 일에 대해서 논하지 않으면 조정이 존엄해지지 못한다.’ 하면서 매우 간절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즉시 그와 상의하여 계초(啓草)를 작성한 뒤에 동료에게 통간(通簡)했더니, 지평 오달승이 대답하기를 ‘경연에서 나온 이야기를 상세히 알 수 없는데 억지로 죄명을 덮어씌우려 하는 것은 타당치 못한 일인 듯하다.’ 하였습니다.
대개 방 안에서 남몰래 이야기를 해도 사지(四知)063)  의 증거가 있게 마련인데, 경연을 열어 인접(引接)했던 그 자리가 과연 어떤 자리였습니까. 어찌 다만 열개의 눈이 보고 열개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엄엄한 자리 정도였겠습니까. 그때의 이야기를 외부 인사들이 모두 전하고 있는데 오달승만이 듣지 못했다니 이것은 도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입니까. 그가 ‘죄명을 억지로 덮어씌운다.’고 하는 것은, 원래는 그런 사실이 없는데 협박하여 죄를 얽어 만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신이 많은 말로 변론할 여유가 없습니다마는, 일단 배척을 당한 이상 그대로 자리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체척을 명하소서."

 

승지 심액(沈詻)이 아뢰기를,
"대군(大君)의 상(喪)이 아직 상(殤)에 해당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체가 중대한 만큼 장례에 관한 일을 귀후서(歸厚署)에만 전담시킬 수는 없습니다. 예조 낭관 1원(員)으로 하여금 주관케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당시 대군은 태어난 지 한 달도 못되어 죽었다.

 

묘당이 관서(關西) 여러 고을에 공명첩(空名帖)을 더 발급하여 내년 봄 둔전(屯田)할 때에 농우(農牛)를 살 자금으로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일렀다.
"공명첩을 남용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니, 더 발급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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