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임오
옥당이 차자를 올려 장령 신달도(申達道), 대사헌 홍서봉(洪瑞鳳), 지평 오달승(吳達升) 등의 출사(出仕)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병조 판서 이귀(李貴)가 지난번 등대(登對)했던 날 개인적으로 분한 것 때문에 좌의정 김류(金瑬)에 대해 할 소리 못할 소리 없이 모욕을 가했으므로 보고 듣는 자마다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뭇 의논이 그를 비난하자 그때는 다시 차자를 올려 진달하면서 일반적인 이야기였다고 둘러대었는데, 이는 우롱하고 기만하는 결과에 스스로 떨어진다는 것도 모르는 행위입니다. 조정이 존엄해지지 못하는 것으로 그 무엇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대신이 존엄해지면 조정도 존엄해지고 대신이 경시되면 조정도 경시되는 법이니, 이것이 중용(中庸)에 나오는 9경(經) 가운데 ‘대신을 공경해야 한다.’는 조목이 제일의(弟一義)가 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귀가 상신(相臣)에게 탑전에서 모욕을 가했을 때, 전하께서는 의당 준엄하게 책망하시어 그로 하여금 상신에게 모욕을 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조정을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셨어야 합니다. 그랬다면 이귀도 자신을 단속하게 되고 조정도 존엄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천하의 일은 한 집안의 개인적인 일이 아닙니다. 설사 이귀가 김류에게 좋지 않는 감정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응당 그 심기를 누구러뜨리고 좋은 말로 따지면서, 시비와 곡직을 이야기하기만 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화나는 김에 조금도 거리낌없이 모욕을 가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상께서는 이귀가 모욕을 가한 것이나 김류가 스스로 논열(論列)한 것에 대해 일체 가타부타하지 않으시고 다투지 말라고만 분부하시면서 마치 개인적인 싸움을 말리는 것처럼 하셨습니다. 나라 사람들이 전하고 사필(史筆)로 쓸 때에 오늘날 조정을 과연 어떻다 하겠습니까. 대신을 모욕하고 체면을 손상시킨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요즘 들어 교화(敎化)가 밝지 못해 인심이 순화되지 못한 탓으로 시역(弑逆)의 변고가 일어나지 않는 해가 없으니, 어찌 크게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면천(沔川)에서 어미를 시해한 변고가 의심할 여지없이 밝혀졌으니 그 수령을 파직시키고 읍호를 강등하는 법규를 당사자가 경폐(徑斃)064) 했다고 하여 적용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법전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병조 판서 이귀가 모함할 의도을 갖고 말을 했다면 파직만 하는 것은 또한 헐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 이야기한 것은 아무 뜻없이 나온 것인 듯하니, 이렇게까지 논죄할 필요는 없다. 면천의 일은 이미 참작하여 처리한 것이니, 또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경상 감사 홍방(洪霶)과 통제사 구굉(具宏)이 좌석 배치를 놓고 다투다가 해결을 보지 못하자 마침내 조정에 품달하였는데, 조정이 옛 관례에 따라 감사는 동벽(東壁)에 통제사는 서벽에 앉게 하였다.
황해도 안악군(安岳郡)의 잠상(潛商) 죄인 전송산(田松山)이 바칠 은화(銀貨)로 미곡 3백 석을 무역하여 안주(安州)에 수송하고 본 은화는 도로 관에 납부하여 속죄(贖罪)하기를 원하니, 조정이 허락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맹자가 말하기를 "위아래가 서로 이익을 다투면 국가가 위태로워진다."고 하였다. 밀무역하는 무리들이 죽을 곳에 스스로 들어가는 줄도 모른 채 국법을 범하는 것은 아래에서 이익을 다투는 행위이다. 지금 전송산이 이미 법망에 걸려든 마당에 수백 석의 미곡 때문에 그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은 실로 위에서 이익을 다투기 때문으로서, 끝내는 이익이 중하고 법은 가벼운 결과가 되어 사람마다 요행을 바라게 되었으니, 금하는 자가 사실은 그런 길을 열어 준 것이라 하겠다.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344면
【분류】사법-재판(裁判)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역사-편사(編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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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맹자가 말하기를 "위아래가 서로 이익을 다투면 국가가 위태로워진다."고 하였다. 밀무역하는 무리들이 죽을 곳에 스스로 들어가는 줄도 모른 채 국법을 범하는 것은 아래에서 이익을 다투는 행위이다. 지금 전송산이 이미 법망에 걸려든 마당에 수백 석의 미곡 때문에 그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은 실로 위에서 이익을 다투기 때문으로서, 끝내는 이익이 중하고 법은 가벼운 결과가 되어 사람마다 요행을 바라게 되었으니, 금하는 자가 사실은 그런 길을 열어 준 것이라 하겠다.
9월 2일 계미
대마도주(對馬島主) 평의성(平義成) 및 평조흥(平調興)·현방(玄方) 등에게 새로 새긴 도서(圖書)를 각각 1부씩 차왜(差倭) 평지우(平智友)를 통해 부쳐 보내려 하였는데, 평지우가 사양하기를,
"장로(長老)가 상경했을 때 요청한 공무목(公貿木) 및 미수(未收)된 연첩(年牒)을 준급(準給)받는 일에 대해 아직 허락을 받지 못했는데, 어찌 감히 도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서계(書契)만 가지고 돌아갔다.
호차(胡差)가 왕래할 때 우마(牛馬) 및 병기 등 물품을 사사로이 판 자를 잠상율(潛商律)로 논했다.
경기 지역의 호패를 찬 남정(男丁) 8만 8천 7백 14명 가운데 속오군(束伍軍)은 1만 5천 2백 35명이고 강도(江都)의 속오군은 2천 6백 81명이라고 총융사 이서(李曙)가 검열하여 보고하였다.
9월 3일 갑신
병조 판서 이귀가 차자를 올리기를,
"원 군문(袁軍門)에 중신을 파견하되 사(使)의 호칭을 붙이소서. 그리고 대마도에 역관 1인을 파견하여 그들의 형세를 염탐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비국에 의논하게 하였다. 비국이 복계(覆啓)하기를,
"이귀가 사의 칭호로 바꾸려 하는 것은 필시 의견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봉명(奉命)하는 사람이 3품일 경우에는 사의 칭호를 붙이는 것이 관례이니, 지금 재자관(賚咨官)을 재자사로 고친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역관 한 사람을 대마도에 들여 보내는 일은 전에 성상의 분부에 따라 이미 결정하였으니, 시행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4일 을유
전 첨지 우극준(禹克俊)이 상소하여 사처(私處)에 시장을 개설하는 폐단을 금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해조가 감사로 하여금 엄금하게 할 것을 복계하니, 상이 따랐다. 그러나 방백과 수령이 제대로 봉행하지 못하여 곳곳에서 사적으로 시장을 개설하는 일이 끝내 금해지지 않았다.
9월 5일 병술
유성이 천랑성(天狼星) 아래에서 나와 천절성(天節星) 위로 들어갔다.
상이 하교하기를,
"시관(試官)은 일찍 궐하에 모여 대기하는 것이 예이다. 그런데 오늘 초시(初試) 시관들은 패(牌)를 발급받은 뒤 저녁 늦게야 도착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병을 핑계로 오지 않는 자도 있었으니, 모두 파직하라."
하여 사인(舍人) 윤황(尹煌) 등이 파직되었다. 당시 황태자가 탄생했기 때문에 별시(別試)를 거행한 것이었다.
9월 6일 정해
재자사(賚咨使) 최유해(崔有海)가 사조(辭朝)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원 독수(袁督帥)에게 회첩(回帖)하였다.
"지난해 그윽이 듣건대 황상(皇上)께서 간택하시어 두 차례나 병무를 총괄하는 소임을 맡기셨는데 문무(文武)의 법도가 실로 기대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하니, 진실로 천하가 같이 기뻐하고 함께 의지하게 될 바로서 불곡(不穀)에게는 특히 더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다만 소방(小邦)이 불행하게도 육지에는 시랑(豺狼)이 막아서고 있는 근심이 있고 바다에는 경악(鯨鱷)이 해독을 부리는 걱정이 있어, 한 명의 사신이라도 보내어 짧은 서신이나마 전하지도 못한 채 풍모를 사모하여 마음을 치달려 보낼 뿐 정말 꿈속에서만 생각을 수고로이 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영광스럽게도 6월 10일에 서신 및 공자(公咨)를 받게 되었습니다. 피도(皮島)에서 전해 온 글의 봉투를 열고 종이를 펼쳐 드니 온통 은근한 뜻으로 충만되어 있었는데, 산하(山河)가 남의 땅이 된 데 대한 탄식이 절실했고 기운을 배양하여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는 깨우침이 간절하였으니, 정신으로 감응해 통하여 한 집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건대 용렬한 이 몸이 어떻게 합하(閤下)의 뜻에 부응할 수 있겠습니까. 주신 글을 읽고 나니 기쁨과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오는 것이었습니다.
모수(毛帥)가 스스로 왕법(王法)을 범하더니 과연 참형을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중국으로서는 고황에 든 병을 먼저 없앤 것이 되고, 요동(遼東) 백성에게는 호랑이 입을 빠져나와 자애로운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결과가 되고, 우리 나라의 입장에서는 종기를 시원스럽게 터뜨려 목숨을 다시 이어 회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진정 합하께서 황상의 은총에 충분히 보답하고자 은밀하게 계책을 협찬하시어 물샐틈없이 기틀을 마련해 놓은 다음 벼락이 치듯 단호하게 결행한 결과로서 일거수 일투족을 마치 귀신처럼 기묘하게 운용하신 것이었으니, 아무리 날뛰는 간흉이라도 어떻게 계책을 써 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가진 자로서 그 누가 흠모하며 공경하지 않겠습니까. 모든 조처가 합당하여 뭇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열복(悅服)하고 있는 이상. 천하의 일도 순조롭게 되지 않을 리가 없으니 변방의 강토를 회복하는 일쯤은 진정 걱정거리가 못 된다 하겠습니다. 하늘이 불세출의 인재를 낸 이상 필경 불세출의 공을 이룰 것이니, 《주역(周易)》에서 말하는 ‘왕이 밝으면 위아래가 모두 그 복(福)을 받는다.[王明並受其福]’고 한 것이 어찌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공선(貢船)의 통로를 바꾸는 문제와 관련하여 교시해 주신 뜻은 정녕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불곡 또한 이 덕택으로 공경하는 마음을 전할 여지가 생겼으니, 폐방의 일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모두 의논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찌 ‘누구를 의지하며 어디에 가서 하소연할까.[誰因誰極]’ 하는 탄식이 다시 있겠습니까.
《시경》 무의(無衣)장의 시야말로 불곡이 평소 재삼 음미하던 것입니다. 폐방은 2백년 동안 열성(列聖)이 끼치신 교화의 덕택으로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도리를 다해 오면서 선왕의 종묘를 지켜 왔습니다. 그러다가 임진 왜란을 만나게 되었는데, 신종 황제(神宗皇帝)께서 나라를 재건해 주신 큰 은혜를 거듭 받게 되어 소방은 나라가 없어졌다가 다시 있게 되었고 백성은 목숨을 잃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하늘과 같이 큰 그 은덕을 어느 날인들 잊은 적이 있겠습니까. 벌레 같은 미물도 보은할 줄을 아는데, 더구나 사람에게 있어서며 국가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다만 폐방은 국토가 협소하고 재력(材力)이 보잘것없는 탓으로 왜적을 막고 호인(胡人)을 방비하느라 벌써 힘이 바닥나고 말았습니다. 기미년의 전역(戰役) 때에 정예한 군사가 모두 죽었고, 정묘년의 변란 때에는 더욱 참혹하게 결딴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백성을 안정시킬 방도도 아직 취하지 못하고 훈련시킬 겨를은 더더욱 없는 상황에서 통분한 마음으로 모욕을 참아가며 우선 기미책(羈縻策)을 쓰기로 하였던 것이니, 이는 진실로 부득이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소방이 본래 조정에 숨긴 것이 없으니, 합하께서도 그때의 상황을 필시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대의(大義)가 있는 귀국에게 한마음으로 영원히 맹서합니다. 힘을 합쳐 원수에 공동 대처함으로써 우리의 적개심을 보여 드릴 날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어찌 잠시인들 망각한 적이 있었겠습니까. 왕사(王師)가 크게 일어나 바야흐로 정벌하게 되는 날, 소방의 병력이 허약하기 짝이 없다 하더라도 위령(威靈)을 의해 모든 역량을 동원하고 고무시켜, 황은에 보답하고 나라의 치욕을 씻는 이것이야말로 불곡의 소원입니다. 단지 일이 엄청난데 힘은 미약하기만 하니 집사(執事)가 요구하는 중책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울 뿐입니다. 보내 오신 자문의 훌륭한 뜻은 나라 전체에 선포하여 대소 신민으로 하여금 우리를 천하게 보지 않는 합하의 후덕하신 뜻을 모두 우러러 보게 하였습니다. 이에 사신을 달려 보내어 공경히 안부를 여쭙게 하는 한편 변변치 않은 토산물로나마 성의를 표하는 바이니 모두 양찰해 주시기 바랍니다."
상이 주강에 자정전에서 《서전》을 시강하였다. 시강관 조위한(趙緯韓)이 아뢰기를,
"삼한(三韓) 시대에는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병적(兵籍)에 들어가 있었는데, 지금은 전후에 걸쳐 난리를 치르는 통에 대장(大將)이 몇 만명의 군사도 거느리지 못하고 있으니 군대 없는 나라라고 할 만합니다. 그리고 제대로 군대를 양성하지 못하고 있으니, 병(兵)과 농(農)을 구분한 뒤에야 용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지경연 김상용(金尙容)이 아뢰기를,
"군대의 수로 보건대 삼한 때에는 풍족하고 오늘날은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삼한 때에는 전쟁을 일삼았기 때문에 한가롭게 놀고 먹는 장정이 없었던 반면, 지금은 문(文)에만 빠진 나머지 무(武)를 조롱하여 한가롭게 노니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병사가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신계영(辛啓榮)에게 하문하기를,
"호남에는 무슨 병폐가 있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호남 연해의 백성들은 어염(魚鹽)으로 생계를 삼고 있는데, 공가(公家)에서 무역하여 판매하면서 그 이익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무척 그 일을 원망하며 괴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폐단을 없애 준다면 백성이 소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참찬관 윤지경(尹知敬)이 아뢰기를,
"무역하여 판매하는 등의 일은 서울부터 먼저 금하지 않는 한 외방을 금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옳긴 하다. 그러나 군대를 일으켜야 할 무렵이니 모두 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강제로 금하지 않으면서 공사(公私)간에 모두 편할 방도를 찾는다면 좋을 것이다."
하였다. 윤지경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호남에서 올라온 장계를 보건대 살인계(殺人契)가 조직되었다고 하니 놀랍기 짝이 없습니다. 남원 부사(南原府使) 송상인(宋象仁)이 적도들을 다스리려 하다가 선조의 봉분이 모욕당하는 변고를 빚었다고 하니, 상께서 방백에게 하유하시어 추적해 체포한 뒤 엄하게 다스리도록 하셔야 하겠습니다."
하고, 조위한이 아뢰기를,
"송상인이 고을에 부임한 뒤 항통(缿筩)065) 법을 써서 10여 인을 잡아 죽이자 도당이 이 소문을 듣고 뿔뿔이 달아나면서 상인의 선조 묘를 파헤쳤다고 합니다. 토속이 이토록까지 패악스럽게 되었으니, 진실로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하였다.
황태자 탄생으로 인해 별시(別試)를 보였는데, 문과 초시에서 서울과 지방을 통틀어 6백 인을 뽑았다. 초장(初場)에는 부(賦)와 표(表)를, 종장(終場)에는 책문(策問)을 가지고 시험하였다.
9월 8일 기축
처음으로 황해도 각 고을의 무학(武學) 2백 인을 대상으로 2개 부대로 나누어 5개월마다 교대하여 역참(驛站)의 파발을 맡게 하였다.
9월 9일 경인
밤에 유성이 하늘 가운데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강하였다. 강이 끝난 뒤에 심액(沈詻)이 풍정(豊呈)하는 일을 정지하도록 청하니, 상이 일렀다.
"어버이를 위한 일인데,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는가."
9월 10일 신묘
박정(朴炡)을 남원 부사로 좌천시켰다. 이는 상이 박정을 나만갑(羅萬甲)의 당으로 여긴데다가 남원이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이기 때문에 특별히 임명한 것이었는데, 시론이 박정을 애석하게 여겼다.
9월 11일 임진
병조 판서 이귀(李貴)가 차자를 올렸다. 그 대략에,
"문과(文科) 초시(初試) 일소(一所)에서 ‘황조(皇朝)의 독수(督帥) 원숭환(袁崇煥)이 모문룡(毛文龍)을 멋대로 죽인 죄를 다스리지 않고 오히려 장유(奬諭)를 내림에 대하여 감사해 한 일을 논하라.’는 것을 표제(表題)로 출제하였습니다.
이것은 비록 시관(試官)이 무의식적으로 취한 일이기는 하나 중국 조정의 경략(經略)을 대접해야 하는 우리 나라의 입장에서 보건대 ‘황조의 독수’라면 동쪽의 군무(軍務)를 총괄하는 신분으로서 이제 막 모수(毛帥)를 복주(伏誅)하여 그 위엄이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는 인물인데, 그 막중한 체면을 생각할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번방(藩邦)의 배신(陪臣)이 경략의 성명을 거론하면서 ‘멋대로 죽였다.’는 등의 말을 사용하여 과장(科場)에 출제했으니, 만약 이 말이 멀리까지 전파되어 경략이 듣기라도 하면 그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중국 조정과 관계된 일이니 출제해서는 안 됩니다.
선묘조(宣廟朝) 때에 ‘가슴을 열어젖히고 화살을 받았다.’는 것으로 시험 제목을 낸 일이 있었는데, 선조께서 황상(皇上)과 관계된는 일이라 하여 시관을 파직시킨 예가 있습니다. 이번 일은 우리 나라에서 사대(事大)하는 의리로 비추어 볼 때 크게 손상되는 일인데, 대신이나 간관들 모두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선묘조의 고사에 따라 속히 출제한 시관을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의 표제(表題)로 낸 일은 선조(先朝) 때의 일과는 상당히 다르고 대단하게 잘못한 것도 없으니, 놔 두라."
하였다.
상이 윤대관(輪對官)을 인견하였다.
9월 12일 계사
유성이 남하성(南河星) 아래에서 나와 성성(星星) 아래로 들어갔다.
대사헌 홍서봉(洪瑞鳳), 대사간 이식(李植) 등이 이귀가 차자를 올린 것 때문에 와서 피혐하기를,
"갑오년 봄 정시(庭試) 때에, ‘황조(皇朝)의 어사(御史) 한취선(韓取善)이 산동(山東)의 양향(粮餉)을 운송하여 조선을 구제하기를 청한 일에 대하여 논하라.’고 출제하였습니다. 당시에 중국 장수들이 성에 가득하여 이목이 무척이나 번다했는데도, 선조께서는 한번도 중국 조정의 대관(大官)의 이름을 거론한 것을 혐의로 여기지 않으셨으며 조정의 의논 역시 잘못되었다고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귀의 차자를 보건대 대체적으로 괜히 평지풍파를 일으킬 염려가 있다는 내용으로, 우국충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겠으나 활달하게 보아넘기지 못했다고도 여겨집니다. 장옥(場屋)과 관계된 일은 일체 감시관(監試官)이 주관하는 것이긴 하나 출제할 때에 신들도 함께 상의하였으니, 만약 잘못이 있다고 한다면 신들도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그대로 직위에 있을 수 없으니 체척을 명하소서."
하였는데, 옥당이 차자를 올려 모두 출사(出仕)시키도록 명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4일 을미
연해(沿海) 각 고을의 신출신(新出身)들을 기일에 앞서 주사(舟師)에 나눠 소속시킴으로써 위급시 조용(調用)하는 데 대비하게 하였다.
9월 16일 정유
상이 자정전(資政殿)에서 소대(召對)하였다.
유해(劉海)의 동생 유흥기(劉興基)라는 자가 영원(寧遠)에서 와서 해선(海船)을 관장하였다. 그런데 국서를 내주면서 말하기를 ‘속히 귀국에 전하여 회보하게 하라.’ 하였는데, 말투가 방자하고 건방졌다. 또 유해의 동생 유흥치(劉興治)라는 자도 도사(都司)의 직함을 받고 가도(椵島)에 나왔다.
조위한(趙緯韓)을 홍문관 교리로 삼았다. 조위한은 젊었을 때부터 문명(文名)을 날렸는데, 우스갯소리를 잘하는 통에 예법을 지키는 선비들로부터 배척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혼조(昏朝) 때에는 ‘유민탄(流民歎)’이라는 글을 지어 당시 혼란했던 정치상과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상을 남김없이 표현하였는데, 당시에 전해 읽으면서 절창(絶唱)이라고 하였다.
9월 17일 무술
상이 자정전에서 소대(召對)하였다. 시독관 조위한이 아뢰기를,
"임금이 아랫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썩은 새깨줄로 여섯 마리의 말을 모는 것과 같으니, 백성의 위에 있는 자로서 어찌 삼가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여색에 빠지는 것’ 등 여섯 가지 조목 중에서 하나만 있게 되어도 반드시 멸망을 초래할 것입니다.066) "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에게 여섯 가지 중에서 어느 조목이 해당되는가?"
하였다. 참찬관 김수현(金壽賢)이 아뢰기를,
"오자지가의 대체적인 취지는 공경하게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께서 어느 한 조목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삼가고 경계하는 자세로써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휩쓸리고 말 것입니다. 신이 지난날 폐조 때에 인경궁(仁慶宮)을 건립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야말로 준우(峻宇)와 조장(彫墻)에 해당되었으니, 이것이 나라를 망칠 징험이었다 하겠습니다."
하고, 조위한이 아뢰기를,
"‘아, 어디로 돌아갈꼬.’라는 한 구절은 천년이 지난 뒤에 읽어도 눈물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이 뜻은 대체로 아무리 존귀하기 짝이 없는 임금이라도 올바른 도리를 잃게 되면 필부가 되려 한들 그것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니, 성명께서는 마땅히 살펴 경계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조위한이 또 아뢰기를,
"영외(嶺外)의 경우, 요역(徭役)은 그다지 번다하거나 무겁지 않지만 군정(軍丁)의 가포(價布) 때문에 원망을 초래하는 것이 많습니다. 민간에서 아들을 낳으면 겨우 5, 6세가 지나자마자 보인(保人)에 편입시켜 가포를 징수하는데, 호주(戶主)067) 가 처음에는 독촉하여 징수하지 않다가 나중에 날과 달을 계산하여 한꺼번에 그 금액을 거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짐승들도 제 자식 사랑할 줄 아는데 영외의 백성들은 아들을 낳으면 내버리기까지 하니, 너무도 애처롭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보인을 모두 군정으로 만들어 번(番)을 나눠 상경케 한다면 군사의 수도 많아지고 입역(立役)도 여유있게 될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가포를 징수하는 규정은 근거가 없다. 군대는 적을 막기 위한 것인데, 어떻게 가포를 징수할 수 있겠는가."
하자, 조위한이 아뢰기를,
"옛날에는 이런 규정이 없었는데, 양연(梁淵)이 이 법을 창시했습니다. 호남 등의 지역처럼 면포(綿布)가 생산되는 곳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으나, 영외의 경우는 본래 생산되는 곳도 아니니 내라고 요구하는 것은 너무도 안 될 일입니다."
하였다.
9월 18일 기해
《선원록(璿源錄)》을 오대산(五臺山)에 보관하였다.
이조 판서 김상용(金尙容)이 세 차례 차자를 올려 병이 들었다고 아뢰고 체직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평안도에서 백성을 모집하여 둔전(屯田)을 실시한 본래의 목적은 농사에 힘쓰도록 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기민을 구제하기 위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추수를 다 끝냈는데도 급료를 주지 않았고 보면 적잖은 농정(農丁)들이 흩어져 버릴 것이 분명한데, 매양 진휼을 행한다는 것도 계속하기 어려운 우려가 있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그대로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자는 그들 뜻대로 들어주고 급료를 지급하도록 함으로써 내년 봄 둔전의 농사에 대비하게 하고, 종군(從軍)하기를 원하는 자는 연령의 제한에 구애받지 말고 건장한 자와 기예가 있는 자를 뽑아 군오(軍伍)에 편입시키고, 나머지 가기를 원하는 자는 가도록 허락해 준다면, 실로 편리하겠습니다."
9월 19일 경자
상이 자정전에서 소대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는 모두 일식(日食)을 큰 변고로 여겼는데 후세에는 보통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이는 무슨 연유에서인가?"
하니, 시독관 김남중(金南重)이 아뢰기를,
"지금은 일식이 있어도 그저 형식으로만 대처할 뿐 실제로 재난을 당해 삼가는 자세가 없어서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는 관사(官師)가 서로 잘못을 바로잡았는데, 후세에는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들을 수 없는가?"
하니 검토관 신계영(辛啓榮)이 아뢰기를,
"이는 치세(治世) 때에나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흥국(興國)의 왕은 간신(諫臣)을 상준다.’고 하였으니, 반드시 언로(言路)를 넓혀 준 뒤에야 어느 정도 서로 잘못을 바로잡는 일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고 김남중이 아뢰기를,
"오늘날의 일로 말하건대 대관(臺官)이 말씀드려도 상께서 윤허하지 않으시는데, 더구나 백관이 서로 바로잡아 준다 한들 어찌 기꺼이 듣고 받아들일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아무 말이 없었다.
전라도 감시(監試)의 고사(考査) 첫날에 거자(擧子) 정란(鄭瀾) 등이 시관(試官)을 면전에서 배척하기를,
"상시관(上試官)이 영광(靈光)·나주(羅州) 등 지역을 돌아다녔으니 필시 개인적으로 덕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만약 상시관이 출제하면 유생들이 시험을 거부하고 나갈 것이다. 그리고 시험지를 봉함할 때 ‘근봉(謹封)’이라고 직접 쓰게 하면 표지를 하여 농간을 부릴 것이니, 반드시 근봉이라는 글자를 모두 쓰지 못하게 해야만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시관이 난동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여 겉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그냥 봉함하게 한 뒤 시험지를 거두어 취사(取士)하였다. 감사 권태일(權泰一)이 치계하기를,
"과거를 실시하여 취사하는 것이야말로 사체상 지극히 중요한 일로서 고관(考官)은 거자들에 대해 체면이 엄숙하기 이를 데 없는데, 면전에서 시관을 욕하며 자기 뜻대로 방자하게 행동했으니, 경박하고 패악스럽게 행동한 그 정상은 실로 예전에 없었던 변고라 하겠습니다. 한때 거자들이 능멸하고 위협한다 하여 막중한 과거의 규례를 임의로 변경한 것은 놀랍기 짝이 없으니, 시관인 도사(都事) 박경원(朴慶元), 장흥 부사(長興府使) 윤시용(尹是勇), 흥양 현감(興陽縣監) 변복일(邊復一)은 파출(罷黜)하고, 수창(首唱)한 거자는 해조로 하여금 처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예조가 복계(覆啓)하기를,
"수창한 거자는 법대로 죄를 처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관과 거자 모두 잘못이 있으니, 그대로 그 방(榜)을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도(右道) 감시(監試)의 방은 선조조(宣祖朝)의 고사에 의거하여 파방(罷榜)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춘추관이 아뢰기를,
"지난해 주강(晝講)할 때 참찬관 이식(李植)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해외의 편방(便邦)인데도 중국 사람들이 예의지국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필시 상고하기에 충분한 문헌이 있다는 점을 취한 것일 텐데, 요즘 춘추관에서 기사(記事)하는 직무를 전연 수행하지 못한 채 하번(下番) 사관(史官)들만 사초(史草)를 정리하고 있으나 문견이 고루하기만 합니다. 서울과 지방의 겸춘추관들은 으레 일별 월별로 기록하는 일이 있게 마련인데 요즘은 이 규정이 완전히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앞으로는 이 관직을 설치한 본래의 뜻을 다시 밝혀 겸 대관들을 포폄할 때 그들이 기록한 것 일체를 본관에 보내게 함으로써 역사를 편수하는 기초를 마련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다시 신칙하여 그들의 노력 여하를 고과(考課)함으로써 전최(殿最)068) 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이소한(李昭漢)·신계영(辛啓榮) 등을 파직하고 김광현(金光炫)을 추고하였는데, 시정기(時政記)를 정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9월 20일 신축
김상용(金尙容)을 예조 판서로, 정경세(鄭經世)를 이조 판서로, 남이공(南以恭)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9월 21일 임인
상이 자정전에서 소대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대야 위엄을 위주로 하니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지만, 군대가 아니라도 위엄을 위주로 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하니, 시독관 김남중(金南重)이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관대함과 위엄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일을 성취시킬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제갈량(諸葛亮)이 촉(蜀)을 다스릴 때에는 오로지 위엄을 위주로 하였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촉을 다스릴 수 없었던가?"
하니, 김남중이 아뢰기를,
"한(漢)나라 말기에 정사가 형편없이 무너졌기 때문에 시대 상황에 맞춰 방편을 쓴 것입니다. 제갈량이 어찌 처음부터 위엄으로 다스리겠다고 마음 먹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仁)과 명(明)과 무(武)를 병칭(並稱)하는데 그중에서도 명이 가장 어렵다.
어떤 방법을 취해야 명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하니, 김남중이 아뢰기를,
"제왕의 명(明)을 말할 때는 세세히 살피는 것을 명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고, 신계영(辛啓榮)이 아뢰기를,
"임금이 진정 제대로만 수신(修身)하고 정심(正心)하면 일을 처리할 때에 저절로 공명(公明)해질 것이니, 마치 거울에 미추(美醜)가 저절로 구별되듯 하는 것이 바로 명입니다."
하였다.
자전(慈殿)이 언서(諺書)로 삼공과 육경에게 하교하였다.
"내년에 수연(壽宴)을 거행할 예정이라는 말을 듣고 놀랍기 짝이 없었다. 첫째로 나는 본래 음악을 듣기 싫어한다. 그리고 둘째로 지난해에 기근이 들어 올봄에 진휼을 했던 처지이다. 올해 농사가 지난해처럼 흉년이 들지 않았다 하더라도 풍작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이제 가까스로 기근을 면한 백성들에게 풍정(豊呈)에 소요되는 비용을 내도록 하는 것은 너무도 안 될 것이다. 게다가 호란(胡亂)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국가가 바야흐로 전시 상황에 있다. 동쪽과 서쪽 양면으로 적을 맞고 있는 상황에서 군량 조달도 어려운 형편이니, 이런 때에 풍정을 거행한다는 것은 정말 타당하지 못한 일이다. 주상께서야 지극한 정성으로 거행하려 하시겠지만 우선 잠시 기다렸다가 풍년이 든 뒤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경들은 모름지기 내년에는 거행할 수 없다는 뜻으로 극력 계달하여 기필코 이미 내리신 명을 거두시도록 하라."
9월 22일 계묘
함경 감사 윤의립(尹毅立)이 명천(明川)의 재덕(在德)과 길주(吉州)의 성진(城津)에 축성하여 주둔하여 지킬 곳으로 삼을 것을 청하니, 조정이 허락하였다.
함경도 길주 고을의 원곡(元穀)을 축낸 숫자가 쌀·콩·잡곡 등 도합 9천 2백 70여 석이었다. 상이 병진년 이후에 그 고을의 수령으로 있었던 자들을 모두 금부에 내리도록 명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그간에 수령들은 모두 남용하고 범장(犯贓)한 죄를 면할 수 없습니다. 그 중 이미 사망한 사람들의 경우는 법률상 처자에게 징수하는 것이 마땅하겠고 생존한 자들은 장오죄(贓汚罪)에 해당되니 금부로 하여금 처치하게 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죽은 사람들에게는 징수하지 말라."
하였다.
9월 23일 갑진
유성이 헌원성(軒轅星) 위에서 나와 정성(井星) 아래로 들어갔다.
좌의정 김류(金瑬) 등이 육경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내년 봄에 풍정(豊呈)을 거행하기로 한 것은 실로 자전을 위로해 기쁘게 해 드리려는 성상의 지극하신 뜻에서 나온 것인만큼, 물력이 풍부하든 않든, 시대 형편이 적당하든 않든 그런 문제는 따질 겨를이 없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삼가 자전께서 신들에게 내리신 분부를 살피건대, 종이 가득 정녕하신 사양의 뜻이 그렇게 간절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남김없는 성상의 정성어린 효성과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자전의 배려가 진정 둘 다 지극하여 차이가 없으니, 신들은 지극히 흠양하여 감격스러운 마음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금년 농사가 그다지 크게 흉년이 들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굶주림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남은 목숨이 아직도 소생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지금 만약 성지(聖旨)를 따라 내년 추수한 뒤로 물려 거행한다면, 뜻을 받드는 도리에도 해가 되지 않고 또 성대한 예(禮)를 완전히 폐지하는 데에도 이르지 않을 듯싶습니다.
아래 신하들의 심정이 이러하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천하 때문에 어버이에 대해 검약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은 옛사람의 지론(至論)이었다. 그리고 응당 행해야 할 성대한 예를 오랫동안 하지 못하는 것도 미안스러운 일이다. 경들이 잘 말을 만들어 자전께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대신의 계사에 대비 비답에 ‘경들이 말을 잘 만들어 회계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런데 대신이 예전부터 직접 자전께 아뢰는 규례는 없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9월 24일 을사
조익(趙翼)을 병조 참판 겸 대사성으로 삼았다. 국조(國朝)에서는 이 직임을 가장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진실로 유술(儒術)로 한 시대의 명망을 지닌 자가 아니면 제수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관직으로서 겸대한 자는 약간 명에 지나지 않았으니, 반정 초에는 오직 정엽(鄭曄)만이 이 직임을 겸대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조익이 또 겸대하게 되었는데, 조익이 여러 차례 사양했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9월 25일 병오
유성이 오거성(五車星) 아래에서 나와 유성(柳星) 위로 들어갔다.
9월 26일 정미
유성이 위성(危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달이 태미원(太微垣)에 들어갔다.
통제사(統制使) 구굉(具宏)이 통영(統營)의 둔전(屯田)에 대해 예전대로 급복(給復)해 주어서 둔전군(屯田軍)을 잘 보살피도록 청하였는데, 호조가 복계(覆啓)하기를,
"통영의 둔전은 처음에 군량이 모자랐기 때문에 공한지에만 설치하였는데, 그 뒤 연해(沿海)에까지 점점 파급되었고 내지에도 퍼지게 되었으므로 그 폐단이 한이 없습니다. 원전(元田)을 경작하는 자들이 둔소(屯所)에 투입(投入)하여 면세 받는 발판을 삼아서, 소위 둔전이라는 것이 없는 데가 없으니, 세입(稅入)이 날로 줄어들고 민역(民役)이 균등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여기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만약 변통하지 않을 경우 앞으로 그 폐해를 구제하기 어려울 것이니, 이순신(李舜臣)이 둔전을 설치한 뜻에 따라 연해와 조금 가까운 지역에만 설치하도록 하고 기타 먼 지역에 설치되어 있는 둔전을 적당히 헤아려 혁파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먼 지역에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혁파하지 말라. 둔전군에 대해서는 해당 고을로 하여금 잘 보살피게 하라."
하였다.
전 참판 장현광(張顯光)이 쇠약하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양하며 소명(召命)에 응하지 않고 상소하여, 격려시키고 진작시켜 기필코 원수에게 복수할 것과 정성된 마음으로 도를 극진히 하여 더욱 성학(聖學)에 매진할 것을 상에게 권하니, 상이 포상하며 답하였다.
9월 28일 기유
상이 흥경원(興慶園)에 거둥하였다. 상이 융복(戎服) 차림으로 연을 타니 호가(扈駕)하는 백관들도 모두 융복 차림으로 수행하였으며, 왕세자는 궁료(宮僚)를 거느리고 흥화문(興化門)에서 공경히 전송하였다. 밤에 비가 많이 내려 여러 위의 군사들이 노숙하다가 추위에 떤 자들이 많았다.
9월 29일 경술
상이 원소(園所)에 친제(親祭)를 거행하고 환궁하였다.
9월 30일 신해
추신사(秋信使) 박난영(朴蘭英)에게 가자(加資)하도록 특별히 명하였는데, 이는 오랑캐 가운데 들어가 주선한 공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간원이 여러 차례에 걸쳐 제수하는 잘못을 아뢰면서 개정하도록 명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병조가 아뢰기를,
"궐내에서 형장(刑杖)을 사용할 때의 한도는 태(笞) 7대가 고작입니다. 그런데 좌랑 유석(柳碩)은 국기(國忌)라서 형벌을 금해야 되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술에 취한 채 장형을 집행한 나머지 서리(書吏) 한 사람이 곤장을 맞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죄가 사소한 것이었는데도 죽음에 이르게까지 하였으니, 유사로 하여금 추치(推治)하게 하여 인명을 중히 여기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은 법을 어기고 살인한 죄를 면하기 어려우니 잡아다 추치하여 뒷사람들을 경계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유석은 사람됨이 흉험한데다 술주정까지 부렸는데, 하는 일이 이런 식이었다.
도체찰사 김류(金瑬)가 아뢰기를,
"얻기 힘든 것은 민심이고, 잃기 쉬운 것은 백성의 농사철입니다. 만약 거조가 온당치 못하여 아무 때나 동원할 경우, 백성들이 원망하고 괴로워할 것은 형세상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지금은 바로 수확이 덜 끝나서 백성들이 한창 힘이 달릴 때입니다. 그런데 총융사(摠戎使)의 점병(點兵)하는 행사가 끝나자마자 계속해서 방어사(防禦使)의 사열이 잇따르게 되었으므로 각 고을에서는 미리 징집된 자들이 관문(官門)에서 대기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원소(園所)에 참배하시기 위해 거둥하실 때 동원된 경기 군사의 수가 5천 1백여 명이니, 일도(一道) 군병의 총수를 계산해 보건대 이미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밖에 길을 닦는 사람, 식사를 담당한 사람 등 각종 역사를 담당한 사람들과 사환 노릇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속오군(束伍軍) 중에서 차출되고 있는데, 이것을 또 계산하면 일도의 군병 가운데 집에 있는 자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노숙하는 군사들이 밤새도록 비를 맞는 의복과 군장(軍裝)이 모두 물에 젖어서, 병이 들어 상한 자들도 있다 하니,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도 혹시라도 원망하는 일이 어찌 없다 하겠습니까.
날짜를 계산해 보건대 앞으로 대조(大操)를 실시할 기일이 10여 일밖에 남지 않았으니, 아마도 10월 20일 전까지는 오래도록 도로에 있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선혜청에 납부해야 할 삼별수미(三別收米)는 모두 10월 이전에 납부해야 될 물품인데, 자기 자신의 몸도 쉬지 못하는 처지에 어떻게 이것에 힘을 쓸 여가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물가에 위치한 고을의 경우 모두 배로 운반하는데, 혹시라도 얼음이 얼어 강으로 올 수 없게 되면 별수없이 육운(陸運)해야 될 것이니, 그 폐단이 또한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몇 가지 폐단은 신이 모두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입니다. 지금 만약 이를 정지하고 내년 농한기로 미루어 거행하도록 속히 명하신다면, 군사와 백성들이 감격하고 기뻐하며 목숨을 바칠 마음까지 갖게 될 것이니, 그 효과는 한번 합동 훈련을 실시하는 것보다 배나 될 것이 분명합니다. 대조(大操)에 친림하시는 것은 군정(軍政)을 엄숙히 하고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과 관련된 일로서 실로 막중한 행사이긴 합니다만, 신이 일단 군무(軍務)를 총괄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이상 군정(軍情)이 어떠한가를 대해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 또한 이 점을 염려하여 마침 하교하려는 중이었다. 아뢴 말은 매우 타당하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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