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1권, 인조 7년 1629년 10월

싸라리리 2025. 12. 26.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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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임자

함경도 안변(安邊)에 사는 전 참봉 이여현(李與賢)이 가전(駕前)에서 상언하기를,
"올 봄에 백성을 효유하여 영직첩(影職帖)으로 곡식을 모으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전토를 모두 팔아서 바쳤습니다. 그런 지 몇 달 안 되어 조정에서는 다시 바쳤던 곡식을 되돌려 주고 영직(影職)에서 태거(汰去)시켜 군역(軍役)에 충정(充定)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본도는 타도(他道)의 수군(水軍) 자손과는 달라서 모두 품관(品官)과 유생(儒生)인데 강제로 군보(軍保)에 예속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원통한 일입니다."
하였다. 비국이 복계하기를,
"응당 군역에 충정되어야 할 자들이 물품을 바치고 모면하려는 폐단이 있으므로 연신(筵臣)이 아뢰었던 대로 조사토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북도(北道)는 다른 도와 형편이 다르므로, 아직 바쳤던 곡식을 되돌려 주고 태거시켜 충정하라는 명령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품관과 유생들이란 모두 군오(軍伍)에 편성되어 있어서 명색은 사족(士族)이지만 실로 정군(正軍)입니다. 따라서 이번에 곡식을 바쳤던 자들도 혹시 사변이 생기게 되면 모두 징발하여 쓸 군사들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벌써 가산을 기울여 관청에 바쳤는데 이제 다시 조사하여 군역에 충정한다면 얻게 될 군사의 숫자는 적고 백성에게는 신용을 크게 잃을 것이니, 당초의 사목(事目)대로 정역시키지 마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그 당시 임무를 맡았던 자들은 영을 어긴 죄를 면하기 어려우니, 중률(重律)을 따라 추고하고 치죄하여 소홀히 처리하는 습관을 막도록 하라."
하였다.

 

자전(慈殿)이 다시 삼공과 육경에게 하교하였다.
"풍정(豊呈)은 불가하다는 뜻을 지난번에 이미 경들에게 다 유시하였다. 안에서도 이런 뜻을 주상에게 간곡히 말하였으니 경들도 다시 품달하여 기필코 정지하도록 하라. 만약 주상이 지성으로 꼭 행하려고 한다면 명년 가을을 기다려서 거행하도록 하고 사용되는 모든 물품은 절대로 구례를 따르지 말고 간략하게 하기를 힘써 민간에게 폐단이 미치지 않도록 하라."

 

10월 2일 계축

경상도의 무진년조 당량(唐粮) 1천 1백 68석을 실은 배 7척이 바다에서 패몰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정화 옹주(貞和翁主)가 연달아 병고(病故)가 있어서 길례(吉禮)를 행하지 못하였다. 그 병이 쾌히 낫지는 않았으나 왕녀(王女)로서 배필이 없을 수 없으니, 해조로 하여금 부마(駙馬)를 간택하도록 하라."
하였다. 옹주는 선조(宣祖)의 따님으로 어릴 때부터 벙어리가 되어 지각이 없었는데, 뒤에 권대항(權大恒)에게 하가(下嫁)하였다.

 

좌승지 서경우(徐景雨)가 아뢰기를,
"장오(贓汚)의 죄는 항상 은사(恩赦)에도 제외되며 비록 훈척(勳戚)의 신하라고 하더라도 감히 용서되지 않았는데, 근래에 이 법이 크게 해이되었으므로 식자들이 한심스럽게 여긴 지 오래입니다.
이번 길주(吉州)의 일로써 보건대, 현극(玄極)이 무오년에 체직되어 온 뒤로 이미 창고에 부족된 수량이 있었는데도 그후 10여 년간 발견해 낸 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정묘년에 권확(權鑊)이 목사가 되어 처음으로 창고를 조사해서 보고하였으나, 도중에 다시 묻어둔 채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다가 지난번에 연신(筵臣)의 계사로 인해 재촉하여 조사하고 범장률(犯贓律)로 다스리도록 하였으나, 해조에서 회계한 당초에 상께서 ‘죽은 사람은 추징하지 말라.’고 하교하셨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실로 온당치 못하게 여겼으나 해조에 소관된 일이라 감히 주제넘게 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금부의 공사(公事)를 보니 ‘생존자는 엄하게 국문하여 법률을 적용한다.’고 하였으나 죽은 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처벌 규정이 없으니, 법령이 어찌 이같이도 잘못되었단 말입니까.
대개 장법(贓法)을 범한 자는 그 자신은 참형에 처하고 물품은 거두어 들이며 자손은 금고(禁錮)에 처하는 법입니다. 상께서 비록 그의 처자들이 직접 범한 죄가 아님을 가엾게 여겨 의논해서 처리하라고 명하시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해조의 회계에 이미 ‘처자에게 징납(徵納)하도록 법전에 실려 있습니다.’고 하고는, 또 말하기를 ‘고과(孤寡)069)  를 염려하는 뜻이 지극하니 성교(聖敎)대로 추징하지 마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조종(祖宗)이 입법했던 당초에 어찌 고과를 염려하신 뜻이 없었겠습니까. 인심(仁心)이 없어서가 아니라 법이 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변응벽(邊應璧)은 작질이 높은 문관으로서 반정(反正)한 초기에 지방 수령이 되었으면 의당 청백하게 자신을 다스리고 여러 진영(鎭營)에 대해 위엄을 세워 변방의 백성들로 하여금 새로운 정치의 교화를 눈을 닦고 볼 수 있도록 했어야 하는데도 혼조(昏朝)의 무부(武夫)들이 마음대로 관곡(官穀)을 훔쳐내던 것보다 더 심하게 하였습니다. 그 정상을 살펴보면 죽여도 그 죄가 남을 것인데 어찌 법을 벗어나 외람되게 특별한 은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금부로 하여금 법률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대신들에게 의논하였다. 대신들이 아뢰기를,
"《대명률(大明律)》에 ‘장오의 죄인은 정범(正犯)이 현존할 때는 물건을 관청이나 주인에게 돌려 주고, 만약 범인이 죽었으면 추징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말한 바 ‘법전(法典)에, 죄인이 비록 죽었더라도 처자에게 재산이 있는 자는 추징을 허락한다고 하였다.’는 것은 곧 《대전(大典)》 징채조(徵債條)의 공사(公私)의 부채(負債)를 가리켜 한 말이고 범장(犯贓)에 대해서 논죄한 정률(正律)은 아닌 듯 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그 의논을 따랐다.

 

10월 3일 갑인

재자사(齎咨使) 최유해(崔有海)가 가도(椵島)에 도착하였는데, 진 부총(陳副摠)이 말하기를, "일찍이 독사(督師)가 두 통의 자문(咨文)을 보냈는데 지금 한 통의 자문만을 답으로 보내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면서, 최유해를 가도에 머물게 하고 다시 조정에 품(稟)하여 두 통의 자문을 함께 가지고 가게 하려고 하였다. 이에 최유해가 정문(呈文)하기를,
"독사 노야(督師老爺)가 다시 요동 도독(遼東都督)이 되어 인의(仁義)를 넓히니, 오랑캐는 겁을 먹었고 우리 나라는 소문만 듣고도 기뻐 춤추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천과(天戈)로써 못된 오랑캐의 추복(酋腹)을 베고 그 소굴을 무찔러, 쾌히 황령(皇靈)이 다시 요동땅을 밝히기를 바랐습니다. 지난번에 독사(督師)가 한 통의 서찰은 과군(寡君)에게 보내고, 한 통의 자문은 우리 나라에 급히 보내 선유(宣諭)하였는데, 당당한 대의(大義)를 해와 별같이 밝게 제시하여 군신 상하가 모두 경건하고 엄숙하게 읽었습니다. 충담(忠膽)과 절의가 고무되고 분발되어 온 나라가 한결같이 오랑캐를 짓밟고자 하여 맹세코 귀를 기울여 기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에 과군께서는 먼저 자문의 뜻을 나라 안에 선포하고 민심을 신칙시켜 앞장서서 칼날도 무릅쓸 바탕으로 삼게 하였으며, 즉시 한 통의 서찰을 받들어 속마음을 토로하고 대의를 베풀어서 저를 차출하여 원문(轅門)에 가져가게 하였으니, 지극한 정성과 늠름한 절의는 신명(神明)에 부끄러움이 없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문서 왕복의 일을 가지고 어찌 이토록 까다롭게 하십니까.
독사가 자문을 보낸 의도는 백성에게 널리 효유하도록 함이었으니 조정에서 받들어 효유한 것은 의리입니다. 그리고 당초에 쓰기를 ‘국왕(國王)’이라고 하지 않고 ‘고려국에 자문한다.’라고 하였을 뿐이었으므로, 조정의 의논이 모두 ‘이는 유시문(諭示文)과 같을 뿐이므로 꼭 회자(回咨)를 독촉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대의를 게첩(揭帖)에 밝히고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 그 정성을 밝혔으니, 공사간(公私間)의 정례(情禮)가 각기 정도를 얻은 것이거늘 무엇이 털끝만큼이라도 온당하지 못한 점이 있습니까.
노야(老爺)께서 지금 1통의 자문에 대한 회자가 빠졌다 하여 사신이 가는 길을 막고 있으므로 하늘도 도와 순풍이 부는데도 엄명(嚴命)이 조금 늦어지고 있습니다. 내가 지체되고 있는 것은 가지 못하도록 붙들어서이니 후일 독사가 즉시 답례를 하지 않았다고 우리 나라를 책망한다면 우리 나라는 무슨 말로 대답하겠습니까. 정의가 있는 바에는 반드시 바른 말과 성의로 신속하게 대해야 한는 것으로, 법도가 이토록 매우 엄하니 이제 미세한 이유로 중간에서 결코 지연시켜서는 안됩니다. 그러니 노야께서는 깊이 사기(事機)를 생각하고 의거(義擧)를 보살펴서 속히 표첩(標帖)을 내어주어 빨리 갈 수 있도록 뱃길을 열어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진장(陳將)이 답하기를,
"독사가 두 통의 자문을 보냈고 본진(本鎭)에서는 이를 귀국(貴國)에 전해 주었는데 지금 한 통의 자문만 가져 왔으니, 갖고 온 사신이 대답할 말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만약 독대(督臺)가 다시 본진에 물어오면 무슨 말로 대답하겠습니까. 이에 본관(本官)이 잠시 뱃길을 멈추게 한 것이니, 본진에서 귀국에 서신을 보내 전일 자문에 대한 회답을 받은 뒤에 즉시 출발해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최유해가 다시 진장(陳將)에게 정문하기를,
"폐방(弊邦)이 지난번에 흉봉(兇鋒)에 짓밟혀 여러 성(城)이 꺾이고 백성들이 굶주린 이리떼의 먹이가 되었는데, 지금까지도 시체를 묻지 못하고 상처가 아물지 않았으니 국가가 받은 상처는 고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군신(君臣)의 대의가 있어 천지에 뻗치고 귀신이 믿는 바이어서 이로 인해 안위(安危)가 손상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독사의 척서(尺書)로 인해 썩은 재목을 떨쳐버리고 동량(棟樑)을 부지하려고 하니 피나는 그 정성은 크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의 사신 행렬이 바닷길을 가는 일로 인해 사공의 양식과 배를 준비하느라 국력이 고갈되었습니다. 그런데 미처 명을 전하지도 못하고 한낱 미세한 일로 일이 지체되고 있으니 이 어찌 본인만의 걱정이겠습니까. 역시 폐방의 지성을 천하에 펼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말로서는 생각을 다 전할 수 없으니 오직 노야께서 잘 생각하여 결정해 주십시오."
하였는데, 이 두 번의 정문은 모두 변헌(卞獻)이 지은 글이다. 변헌은 관서(關西)의 한미한 족속으로 사람됨이 괴이하고 허탄하였다. 중이 되었다가 환속하였는데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삭직(削職)을 당하였다. 최유해가 그의 글솜씨를 인정하여 데리고 갔는데 모든 문서에 관한 일은 변헌이 관장하였다.
이에 진장(陳將)이 비로소 표문(標文)을 내주었는데, 최유해가 치계하기를,
"신이 두 번 정문하여 비로소 표문을 받아 거우도(車牛島)로 출발합니다. 그러나 염려되는 것은 신이 군문(軍門)에 갔을 때 만약 원사(袁師)가 ‘그대가 재자사로 왔는데 막중한 문서에 대해 어찌 회답하지 않는가?’ 하고 힐문한다면 신이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할지가 걱정입니다. 만일 ‘전번 자문 내용에 고려국 운운 한 말이 있어 감히 회답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면 화를 낼 듯한데 어찌 처신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들이 만일 ‘게첩(揭帖)은 사문서요, 이자(移咨)는 공문서이다. 황상(皇上)께 주문(奏文)하는 것은 반드시 자문에 의거해서 한다.’고 말한다면 더욱 응답할 만한 말이 없을 것입니다. 진장도 이런 말을 하였는데 더구나 도사의 아문에서 어찌 의논이 없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이러한 문제에 부딪치면 앞으로의 일이 난처하게 될 것이니 재자사라는 칭호를 바꾸어서 문안사(問安使)라고만 칭하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이 바다 가운데 이르러 일이 급박하여 조정에 품명할 수 없으니 더욱 황공스럽고 답답합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복계하기를,
"최유해가 이미 자문과 게첩을 가지고 갔으면 어떤 자문임을 논하지 말고 표문을 얻어 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제 스스로 자세하게 말해주어 속담에 ‘제 입으로 길을 가르쳐 준다.’는 말과 같이 한 듯하니, 전후의 소위가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그리고 재자사의 칭호는 아무리 생각해도 합당한 것인데도 다시 고치고자 하였으니 더욱 괴이합니다. 혹시 변통할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바닷길을 출발하였으니 장계 내의 일은 시행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같이 용렬하고 겁많은 사람을 수의(首擬)로 차송하여 국가를 욕되게 하였으니, 당해 당상과 낭청을 모두 추고하라."
하였다.

 

완성군(完城君) 최명길(崔鳴吉)이 만언차(萬言箚)를 올렸다. 그 대략은 먼저 나만갑(羅萬甲)을 귀양보낸 것과 장유(張維)와 박정(朴炡)을 외직으로 보낸 잘못을 말했고, 다음으로 계해년 이후의 인물과 진퇴와 공도(公道)를 넓힐 일을 말했으며, 끝으로 장유의 질박한 충성과 박정이 무고당한 이유를 말하였다. 그런데 그 저의는 오로지 청류(淸流)들이 편당하지 않았는데 도리어 편당의 지목을 당했다 하여 그 죄를 좌의정 김류(金瑬)에게 돌리려는 데 있었다. 상이 회보하지 않았다.
사신은 논한다. 최명길은 연소한 훈신(勳臣)으로 자신의 재주와 지혜를 믿고 조정의 일을 마음대로 결정짓는 바가 많았고 논의할 적에도 스스로 공정한 체하였으며, 시비를 따질 때에는 바르지 않은 말이 많았다. 나만갑이 과연 죄가 있어 축출된 것이 아니며 장유와 박정을 외직으로 내보낸 것도 역시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었으니, 최명길이 차자를 올리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차자 중에 말하기를 "교묘하게 헐뜯는 말이 갑자기 잇달아 일어나 서로 그물과 함정속으로 딸려 들어갔다."고 하고, 또 "사사로운 말을 적발하여 죄를 만들었다." 하였으며, 또 "분한 감정에 동요되어 서로 연루자까지 형벌에 처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일의 실상은 살피지도 않고 별안간 배격하는 단서로 만들었다."고 하고, 또 "만약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윤가(尹家)가 화평하게 한 것과 같이 하였다면 서로 충동하는 말이 있었다 하더라도 어디로 해서 들어 갈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 윤방(尹昉)의 손자 윤지(尹墀)가 일찍이 대간의 비평을 당하였으나 윤방은 노여움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상 몇 가지의 말은 모두 김류가 음으로 양으로 화란을 만들어 냈다고 지목한 것이다. 아, 김류의 처사가 과중하였으니 남의 말이 있는 것은 의당하나, 김류가 사사로이 분한 감정으로 착한 사람들을 일망타진하였다고야 할 수 있겠는가. 대개 김류의 본의는 의논을 좋아하고 일벌이기를 즐겨 하는 자들을 미워했던 것인데, 하루 아침 경연에서 했던 말이 임금을 격노케 하여 여러 신료가 귀양가고 쫓겨나게 했던 것이다. 명류들을 죄에 빠뜨렸다고 단정하여 일대(一隊)의 선배들을 불안하게 하였으니, 최명길의 의논도 역시 편벽되지 않은가.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348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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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최명길은 연소한 훈신(勳臣)으로 자신의 재주와 지혜를 믿고 조정의 일을 마음대로 결정짓는 바가 많았고 논의할 적에도 스스로 공정한 체하였으며, 시비를 따질 때에는 바르지 않은 말이 많았다. 나만갑이 과연 죄가 있어 축출된 것이 아니며 장유와 박정을 외직으로 내보낸 것도 역시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었으니, 최명길이 차자를 올리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차자 중에 말하기를 "교묘하게 헐뜯는 말이 갑자기 잇달아 일어나 서로 그물과 함정속으로 딸려 들어갔다."고 하고, 또 "사사로운 말을 적발하여 죄를 만들었다." 하였으며, 또 "분한 감정에 동요되어 서로 연루자까지 형벌에 처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일의 실상은 살피지도 않고 별안간 배격하는 단서로 만들었다."고 하고, 또 "만약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윤가(尹家)가 화평하게 한 것과 같이 하였다면 서로 충동하는 말이 있었다 하더라도 어디로 해서 들어 갈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 윤방(尹昉)의 손자 윤지(尹墀)가 일찍이 대간의 비평을 당하였으나 윤방은 노여움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상 몇 가지의 말은 모두 김류가 음으로 양으로 화란을 만들어 냈다고 지목한 것이다. 아, 김류의 처사가 과중하였으니 남의 말이 있는 것은 의당하나, 김류가 사사로이 분한 감정으로 착한 사람들을 일망타진하였다고야 할 수 있겠는가. 대개 김류의 본의는 의논을 좋아하고 일벌이기를 즐겨 하는 자들을 미워했던 것인데, 하루 아침 경연에서 했던 말이 임금을 격노케 하여 여러 신료가 귀양가고 쫓겨나게 했던 것이다. 명류들을 죄에 빠뜨렸다고 단정하여 일대(一隊)의 선배들을 불안하게 하였으니, 최명길의 의논도 역시 편벽되지 않은가.

 

도승지 김수현(金壽賢)이 아뢰기를,
"불행히도 지난해에 간신히 변란을 넘긴 뒤에도 또 흉년을 만나서 각전(各殿)의 삭선(朔膳)과 어공(御供)의 물품을 모두 정지시켰는데, 사리로 헤아려 보아도 역시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올 가을은 조금 풍작이 되었으니 다음달부터는 구례대로 봉진(封進)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재삼 검토해서 결정했던 일이니 이제 다시 고치기는 어렵다."
하였다.

 

대신이 아뢰기를,
"요전에 자전의 하교로 인하여 명년 봄의 진풍정(進豊呈)을 가을철로 물려 행할 뜻으로 이미 진달하였습니다. 그런데 상께서 의당 행해야 할 성례(盛禮)를 오래 폐함은 온당치 못하다고 전교하셨으므로 어제 자전께서 또 하교하셨습니다. 성상께서 봉양하려는 지성은 비록 다른 일을 돌아볼 겨를이 없는 것이겠지만 비용을 줄여 백성을 구휼하려는 자전의 뜻도 간절하십니다.
삼가 성상께서는 양지(養志)하는 도리를 중히 여기어 가을철로 물려 행하라는 하교에 순종하소서. 그러면 그동안 지연될 기일이 불과 여름 한 철일 뿐이니 대례(大禮)를 오래 지체하는 것도 아니고 자전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 생각은 벌써 유시하였으니 물려 행할 수 없다는 뜻으로 자전께 회계하라."
하였다.

 

홍서봉(洪瑞鳳)을 겸 지의금부사(兼知義禁府事)로 삼았다. 홍서봉은 일찍이 시명(詩名)을 떨쳤고 또 정훈(正勳)에 참여되어 재상의 지위에까지 이르렀으나 학식이 재화(才華)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신천익(愼天翊)을 홍문관 부교리로 삼았다. 신천익은 그의 아우 신해익(愼海翊)과 함께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신해익이 먼저 죽었고 신천익은 혼조(昏朝)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여러 번 현관(顯官)에 제수되었으나 호남(湖南)에 돌아가 노모를 봉양하면서 세로(世路)에 급급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신천익을 지조가 있는 선비로 일컬었다.
김광혁(金光爀)을 홍문관 부수찬으로 삼았다. 광혁은 김상용(金尙容)의 조카로서 성품이 강직하여 동료들의 취하는 바 되었다.
특지(特旨)로 유백증(兪伯曾)을 가평 군수(加平郡守)로 삼았다. 유백증을 나만갑(羅萬甲)의 편당이라 하여 쫓아낸 것이었다.

 

10월 4일 을묘

회답사(回答使) 김대건(金大乾)이 차호(差胡) 중남(仲男)·노음적(老音赤) 및 종호(從胡) 46명과 함께 왔다.

 

10월 5일 병진

수원 부사 장신(張紳)이 상소하기를,
"본부의 군보(軍保) 중에 도망하거나 물고가 서로 잇따라 축난 인원이 자못 많기 때문에 신이 여러 방면으로 찾아 내어 겨우 한정(閑丁) 30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연장(年壯)한 자 5, 6명 외에는 겨우 10세가 넘은 자도 있고 8, 9세에 불과한 자도 있어 그 부모들이 안거나 업기도 하고 손을 잡고 데리고 와서 다투어 억울함을 하소연하니 눈앞에 보기에 몹시 애처롭습니다.
신이 삼가 들으니 도감(都監)의 근례(近例)에 ‘포수(砲手)로 자망(自望)하는 자는 연령이 차지 않았더라도 그대로 정해 주되 가포(價布)는 연령이 차기를 기다려 거두어들인다고 합니다. 이미 이런 규례가 있다면 각 고을에 있어서는 어찌 유독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신이 찾아낸 양정(良丁) 중에서 장정(壯丁)은 우선 충정시켜 가포를 거두고, 그 나머지는 모두 이 규례에 의거하여 그대로 정해 주고 연령이 차기를 기다려 가포를 거두도록 허락하소서. 그렇게 하면 여러해 동안 축난 군보(軍保)를 거의 충정할 수 있고 호수(戶首)에게 있어서도 원래 보인을 정해 주지 않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당초 군적 사목(軍籍事目) 중에서 어떤 종류의 군보든지 막론하고 취재(取才)된 뒤에 다른 부서로 승진되도록 허락했던 자들이 많게는 10여 인입니다. 이들은 출신(出身) 및 전공(戰功)으로 군역에서 면제된 자와 사실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도감에서는 궐액(闕額)이라 혼칭하면서 아울러 본부로 하여금 그 대신(代身)을 충청시키라고 하는데, 이는 사리로 따지면 더욱 근거없는 일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편리한 방법으로 변통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 일을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아뢰기를,
"군보에 정역시키는 일은 으레 연한이 있기 마련인데 만약 열살도 안 된 자를 정급한다면 비록 군포(軍布)를 거두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군정(軍政)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정급하고 난 뒤에는 호수(戶首)들이 보가(保價)를 받지 않을 리도 없으니 8, 9세의 아이를 충정하는 일은 허락치 마소서.
보인(保人) 중에서 취재로 정로위(定虜衛)에 승진된 자들은 출신이나 전공으로 면역된 자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데, 만약 궐액으로 논하여 모두 그 대신을 충정하게 한다면 타당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정로위에 승진된 자들은 대신을 충정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연령 미만인 자는 비록 10세가 넘었더라도 충정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조종조의 군보에 대한 법이 어찌 이와 같을 뿐이었겠는가. 연령 미망인 자를 군역에 몰아넣는 것은 소위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긴다는 것으로서 선왕들의 차마 못하는 마음의 정치가 아닌 것이다. 장신(張紳)은 가포를 받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만 알았을 뿐 군보에 충정함이 불법임은 생각하지 못하였고, 묘당에서는 8, 9세를 허락하지 않을 줄만 알았을 뿐 연한의 규정이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였다. 성상의 하교야말로 성헌(成憲)을 어지지 않았고 인정(仁政)에 합치된다고 할 만하다.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30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348면
【분류】군사-군역(軍役) / 군사-군정(軍政) / 정론-정론(政論) / 역사-편사(編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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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조종조의 군보에 대한 법이 어찌 이와 같을 뿐이었겠는가. 연령 미망인 자를 군역에 몰아넣는 것은 소위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긴다는 것으로서 선왕들의 차마 못하는 마음의 정치가 아닌 것이다. 장신(張紳)은 가포를 받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만 알았을 뿐 군보에 충정함이 불법임은 생각하지 못하였고, 묘당에서는 8, 9세를 허락하지 않을 줄만 알았을 뿐 연한의 규정이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였다. 성상의 하교야말로 성헌(成憲)을 어지지 않았고 인정(仁政)에 합치된다고 할 만하다.

 

10월 7일 무오

증산현(甑山縣) 백성 강사성(康師聖) 등이 상소하여 쌀 1백 석을 관청에 바치겠으니 현령 이덕보(李德補)을 유임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이조가 아뢰기를,
"미곡을 바치고 수령의 유임을 원하는 일은 벌써 폐풍(弊風)이 되었습니다. 한두 사람의 상장(上章)으로 임기가 차면 체귀(遞歸)시키는 규례를 고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8일 기미

예조 참판 이경직(李景稷)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비국에 있으면서 들으니, 최명길이 나만갑 등을 위해 올린 차자에 신의 성명도 그 중에 들어 있다고 합니다. 신은 사실 이 일과 전연 상관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으로서 우선 놀랍고 까닭을 알 수 없어 그 초본을 구해다 보았더니, 많은 내용이 신이 알지 못하는 바였습니다. 다만 그 중 신에 대해 장단(長短)을 언급한 말은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그 한 조항은 바로 신이 폐조(廢朝) 때에 박자흥(朴自興)에게 무고를 당한 것입니다. 아직 차자의 회답이 내려지지도 않았는데 앞질러 진달하는 것이 매우 온당치 못한 일인 줄은 알지만 사세가 급박하니 급하게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과 족분(族分)은 있으나 젊어서부터 서로 알지 못하였고 그 문하에 출입하지도 않았습니다. 계축년 옥사가 일어나 일시의 사류(士類)가 모두 불측한 화에 빠졌을 때에 이르러 지금 좌참찬으로 있는 서성(徐渻)도 역시 연루되었는데, 서성은 곧 신의 아비와 평생 사귄 벗입니다. 그의 아들 서경우(徐景雨)가 정주(定州)의 임소(任所)에 있다가 아비가 옥에 갇혔다는 말을 듣고 황급히 올라왔으나 그의 아비는 벌써 옥에서 풀려나 멀리 귀양간 뒤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논의가 그에게 죄가 더해질 것이라고들 하였으므로 서경우가 신의 집안으로 하여금 적신(賊臣)070)  의 의중을 탐문하게 하려고 신의 집에 왔던 것입니다. 그때 신이 병조의 낭관으로 입직하고 있었는데, 신의 아비가 서찰을 보내 신에게 이르기를 ‘정주(定州)071)  가 여기 와서 그 부친의 일을 쌍리문(雙里門)072)  에 탐문해 보려고 하니 네가 잠시 가서 탐문해 보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튿날 신이 이첨의 집에 가서 서성의 논죄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 넌지지 물으니 이첨이 대답하지도 않고 종이 쪽지를 내어보였는데, 그것은 폐주(廢主)가 저들에게 답한 글로서 사람들의 죄목을 논한 것이라 신은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또 당판(唐板)으로 된 작은 책자를 내어다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기를 ‘《춘추》의 대의를 사람들이 모두 알지 못한다.’고 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일찍이 읽지 못했던 것이라 알 수가 없다.’고 하였더니, 이첨은 얼굴색을 변하면서 여러 책이 있는 위에 얹어두었습니다. 신의 심중은 타는 것 같았으나 다시 서성의 일을 묻지 못하고 일어나려고 할 때에 박자흥이 밖에서 들어왔으므로 즉시 나왔습니다.
며칠 안 되어 적신 이위경(李偉卿)의 상소가 나왔는데 그 당시 대군(大君)의 정청(庭請)으로 백관들이 일제히 궐하에 모였을 때라 신이 그 상소을 얻어보고 여러 사람이 있는 중에서 말하기를 ‘내가 일전에 쌍리문에 갔더니 《춘추》를 내보였는데 지금 이 소장을 보니 곧 《춘추》에 있던 그 말이다.’ 하였습니다. 그 때에 박자흥 부자가 이첨과 원수간이 되어 양가의 빈객들이 서로 물색하고 있었는데, 박자흥이 갑자기 신을 전에는 만나지 못했던 곳에서 만났기 때문에 마음에 의심을 품고는 곧 쫓아낼 계책을 세웠으나 신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습니다.
5월에 신이 병조 낭관으로 아무 까닭없이 수성 찰방(輸城察訪)에 제수되었으므로, 신의 생각에는 신의 스승인 고 정승 이항복(李恒福)이 하루 전에 피척(被斥)되었는데 그의 문도(門徒)였기 때문에 영향이 미친 것으로 여겼을 뿐 억울하게 오명이 씌워졌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신은 사실을 듣고 난 뒤에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곧바로 가서 밝히려고 하였으나 하지 못하였습니다. 한편 생각하니, 군자란 횡역(橫逆)이 닥쳐을 때 순순히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반성해서 옳은 일이면 부끄러워할 것이 없는 것이니, 내 스스로 정도를 지킨다면 백 가지 말로 아무리 비방한다 해도 햇볕 쬔 눈이 저절로 녹는 것과 같이 되리라 여겼습니다.
신은 계축년 이후로 하루도 조정의 반열에 끼인 일이 없었습니다. 무오년에는 지금의 좌의정 김류(金瑬)와 죄목을 같이 하여 원찬(遠竄)으로 논의되었고, 임술년 여름에는 기폐(起廢)라는 명분으로 철산에 제수되었는데, 이는 사실 사지로 몰아 넣은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신의 전후 자취에 의심할 만한 무엇이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의 직명을 파직하고 형관에게 내리시어 신의 죄를 속히 바로 잡아 사람들의 말에 사례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사실 밖의 일을 가지고 꼭 서로 겨룰 것은 없다.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수행하라."
하였다. 이경직은 김류와 사이가 좋아 간장(諫長)에 의망되었는데, 나만갑 등 연소한 무리들이 비난하여 저절로 시끄러운 단서가 일어났고, 최명길이 김류에게 죄를 돌리면서 경직의 일을 거론하였으므로 이 상소를 올린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이경직이 무오년 정청(庭請)에서의 이견(異見)을 제시하였으니 적신(賊臣)에게 아부하지 않았다는 자취가 명백하다. 그리고 집안에서 부모를 봉양함에 사재(私財)를 아끼지 않고 봉양하여 이웃에서 효자라고 하였다.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 근본을 먼저 따지는 법이다. 세상의 소위 명류(名流)라고 하는 자들 중에 경직과 같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으며 간장에 둔다 한들 불가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다만 위인이 거칠고 경솔하여 기백에 좌우되었으니 아까운 일이다.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348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변란-정변(政變) / 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註 070] 적신(賊臣) : 이이첨을 말함.[註 071] 정주(定州) : 서경우를 말함.[註 072] 쌍리문(雙里門) : 이이첨의 집이 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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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이경직이 무오년 정청(庭請)에서의 이견(異見)을 제시하였으니 적신(賊臣)에게 아부하지 않았다는 자취가 명백하다. 그리고 집안에서 부모를 봉양함에 사재(私財)를 아끼지 않고 봉양하여 이웃에서 효자라고 하였다.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 근본을 먼저 따지는 법이다. 세상의 소위 명류(名流)라고 하는 자들 중에 경직과 같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으며 간장에 둔다 한들 불가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다만 위인이 거칠고 경솔하여 기백에 좌우되었으니 아까운 일이다.

 

병조가 기병(騎兵) 중 늙고 병든 자와 유청군사(有廳軍士)073)   등은 평상시의 준례에 의거하여 자원에 따라 포(布)를 거두어 용도에 쓰도록 청하였다.
비국이 복계하기를,
"만약 이런 길을 튼다면 함부로 늙고 병들었음을 칭탁하고 상번(上番) 면하기를 도모하는 자가 반드시 많을 것이므로 기병에게 가포를 거두는 일은 경솔히 허락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유청군사에 있어서는 정군(正軍)과는 다르므로 자원에 따라 가포를 거두는 것이 무방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9일 경신

대사간 이식(李植) 등이 상차하기를,
"국가가 민사(民事)를 걱정하여 수령을 신중히 선발하고 아울러 시종(侍從)으로 번갈아 임명하는 것은 참으로 청명한 조정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만약 형평을 잃거나 맡기는 방법이 타당치 못하고 구차스레 견책의 벌로 보낸다면 인정이 염려하고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임명를 받은 사람도 어떻게 시책을 펼 수 있겠습니까.
장유(張維)는 총재(冢宰)를 지낸 관료로 문병(文柄)을 주장하고 있으니 대신의 다음이요 귀신(貴臣)의 우두머리이니, 비록 실수가 있었더라도 의당 예의로써 물리칠 일입니다. 나주(羅州)는 4품 관원을 제수하는 곳으로 우후(虞候)나 도사(都事)도 그 윗지위에 있게 되고 군(郡)·현(縣)·진(鎭)·보(堡)가 동등하게 여기니, 예모에 있어서나 문첩(文牒)하는 사이에 욕됨이 심할 것입니다.
옛날 당(唐)·송(宋) 시대의 폄관(貶官)은 아래로 사마(司馬)나 사호(司戶)에까지 이르렀으나, 공사(公事)에는 서명하지 않고 원외(員外)의 녹봉을 받게 하였는데, 이것은 존귀(尊貴)의 체면에 크게 손상됨이 없는 것이니, 관원 등급의 일에 대해 옛사람들이 어찌 조심스럽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번 장유의 폄관은 전례에 없던 일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박정(朴炡)과 유백증(兪伯曾) 등이 오래도록 하읍(下邑)에 머물렀다가 겨우 시종으로 돌아왔는데, 수령으로 번갈아 차임함에 있어 어찌 다른 사람이 없겠습니까. 이번에 차례대로 특별히 제수하면서 성의(聖意)에 나무라고 노여워한 뜻이 없지 않았으니, 이것이 곧 조신(朝臣)들이 놀라워하고 사론(士論)이 저상되는 까닭입니다. 성명께서 전후로 내린 간절한 유지에 늘 붕당을 경계시켰으니 이미 나뉘어졌던 붕당도 합하려고 하는데, 설령 박정과 유백증의 무리가 스스로 서로 다름을 표방한다 하더라도 청명한 조정의 사부(士夫)로서 누가 함께 등지고 나뉘어져 서로를 배척하려고 하겠습니까. 더구나 박정 등이 애초에 한두 사람의 과오있는 자를 적발하였을 뿐인데 마침내 분당의 말까지 있게 된 것입니다. 만약 평온한 마음으로 서로 처신한다면 저절로 오래되면 잊게 되어 다시 흔적이 없을 것이니, 비록 경솔한 말이 새로 나오더라도 마침내 성조(聖朝)의 근심이 되지는 않을 것을 신들은 확신합니다.
지난번 대신들이 탑전에서 나만갑을 계론(啓論)했던 뜻은 외직으로 보내어 억제시켜 보려던 것에 불과하며, 그들이 사제(私製)에서 논한 바를 들어봐도 역시 전랑(銓郞)의 의망을 정지시키고 지방 수령에 제수하고자 했을 따름이었습니다. 대신은 국사를 공정하게 다스림에 있어 백성의 원망을 떠맡으며 할 말을 모두 다 말하니, 어찌 마음속을 다 드러내지 않는 것이 있겠으며 경중을 짐작해서 하지 않는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는 대신들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죄주기를 한층 가중시켜서 그 여파가 연루자에게 점차 확대되어 시끄러운 단서가 어지럽게 생겨나 도리어 대신들로 하여금 미안한 바가 있게 하고 있으니, 이것이 과연 당론을 진정시키고 알맞게 다스리는 도리이겠습니까.
전하께서 붕당을 미워하여 없애버리려고 하는 것은 매우 훌륭한 뜻이나 제거하는 방법을 돌아보건대 미진한 것 같습니다. 당 문종(唐文宗)이 ‘하북(河北)의 도적을 없애기는 쉽거니와 조정의 붕당을 없애기가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만승의 위엄으로 수십 명의 서생(書生)을 몰아냄을 어찌 강한 도적을 물리치는 것보다 어렵게 여겼겠습니까. 그 형세를 살펴보면 마침내 매우 어려운 것이 있기 때문이니,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인재를 구하기 어려운 것은 언제까지나 탄식할 일입니다. 옛날부터 사대부로서 붕당이란 지목을 당한 자는 대부분 총명하고 재예가 있어 대중들의 추앙을 받던 자들이었습니다. 만약 임금이 이들을 알맞게 화합시키고 분열되지 않도록 할 수 있다면, 비록 같은 무리라도 이견이 있기도 하고 이견이 있다가 합하기도 할 것이나 마침내 대동(大同)이 되기에는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혹 붕당이란 명목에 의거하여 긁어 없애려는 데에만 힘써 오늘 내일 날마다 한 명씩 쫓아내고 금년 명년 해마다 한 당씩 없앤다면 조정 내의 인물은 땅을 쓴 듯 없어지고 등용되는 자는 모두 아첨하고 재주없는 무리에 불과할 것이니 국가가 공허하게 된다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옛날 소식(蘇軾)은, 왕안석이 풍속을 동일하게 하려는 폐단을 비난하여 척박한 땅에 나는 황모(黃茅)와 백위(白葦)에 비교하였는데, 당파를 없애는 어려움도 어찌 이와 다르겠습니까.
대저 사론(士論)이 둘로 갈라지는 것은 국가의 큰 불행으로, 어진이와 사악한 자가 진퇴하는 자취를 쉽게 밝힐 수 없습니다. 우(牛)·이(李)의 시비(是非)074)  나 원우(元祐) 연간의 세 당파075)   같은 것은 당시에 능히 평정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후세에서도 결정짓지 못한 일입니다. 가령 그 당파들을 모두 없애버렸다면 이덕유(李德裕)의 정술(政術)이나 정이천(程伊川)의 정학(正學)도 의당 배척되는 중에 포함되었을 것이니 세도(世道)에 있어 어떠하였겠습니까.
우리 나라의 붕당의 근심과 같은 경우는 유래가 있습니다. 전랑(銓郞)의 권한이 막중하여 국정이 하부에 맡겨진 셈이 되었으므로 기백이 예리한 신진(新進)들이 쉽게 흔단을 일으키고 있으니 이는 실로 백년 동안 흘러온 폐단이며 반정(反正) 이후로도 다 없애지 못한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묘당의 보좌하는 중신들과 함께 일대 현재(賢才)들의 잘잘못과 장단점을 강론하여 낱낱이 안 다음 그들을 배양시키고 취사 선택하여 품계와 서열을 분별하여 직임을 맡겨서 의심하지 마소서. 그러면 어찌 붕당과 색목(色目)이 저절로 소멸될 뿐이겠습니까. 천지가 서로 통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삼가 성명께서는 사람이 못났다 해서 말까지 버리지는 마소서. 그러면 조정의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올린 차자는 잘 보았다. 너희들이 당파를 없애는 것은 당 문종(唐文宗)도 어렵게 여긴 것이라 하였거늘, 나는 문종보다 휠씬 혼미하고 용렬한데도 없애려고 하니 오활하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당파를 세우고 그 당만을 옹호하는 무리들을 축출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국가가 멸망된 뒤라야 그만둘 것이므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너희들은 허물삼지 말라. 그리고 차자 끝에 진달한 말은 유념하겠다."
하였다.

 

해주(海州)의 세미(稅米) 1천 2백여 석과 평산(平山)의 세미 9백 9 석을 옮겨다가 연안(延安)·배천(白川) 두 고을에 나누어 구휼하였다.

 

10월 10일 신유

황해 병사 신경인(申景禋)이, 황주(黃州)의 성지(城池)는 사면으로 적의 공격을 받아 지킬 수 없는 형세라고 치계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장계의 내용이 매우 놀랍다. 의당 잡아다 국문하여 군정을 진숙(振肅)시켜야 하겠지만 이런 때에 교체시키기는 불가하니, 우선 추고해서 뒷날에는 다시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10월 11일 임술

상이 팔도의 감사에게 하교하였다.
"형벌로써 정치를 돕고 소송을 청리(聽理)하여 분쟁을 없애는 일은 정치를 하는 도리에 있어 이보다 더 큰일이 없다. 그러나 형옥(刑獄)의 일이란 사실을 알아내기가 아주 어려워 중도를 잃기가 더욱 쉬운 일이니, 나와 함께 다스리는 자들은 이를 유념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허다한 주현에서 어찌 형벌을 지나치게 쓰며 청단(聽斷)이 밝지 못한 자가 없겠는가. 무고한 자가 옥에 갇히고 죄있는 자는 빠져 나가며 한 마디로 결단할 수 있는 일이 해를 넘기게 된다면, 우리 백성들을 병들게 하고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기에 족할 것이다. 나는 이를 매우 염려하니 경들은 수령들을 효유하여 모든 옥송(獄訟)을 가혹하게 하거나 지체시키는 일이 없이 마음을 비우고 명확하게 결단하여 나의 지극한 뜻에 부응토록 하라. 그리고 수령들 중에 군령(軍令)에 관계되지 않은 일로 곤장을 쓰는 자가 있으면 적발하여 계문하라."

 

자전이 삼공과 육경에게 또 하교하였다.
"풍정잔치는 불가하다는 뜻을 안에서 여러 번 진달하였으나 주상은 아직도 중도에서 그만둠을 고민하고 있는 듯하다. 효성을 막는 것 같아 의당 따라야겠지만 근년에 민생이 기근에 시달리고 양전(兩殿)076)  의 공선(供膳)을 아직도 폐지한 채 행하지 못한다. 이러한 때에 내가 풍정을 받는다 해도 즐거운 뜻이 없을 것이니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천천히 각도의 공선이 복구되기를 기다려 행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며 나의 마음도 편안할 것이다. 내 부득이 재삼 말하노니 꼭 내 말대로 되도록 주상에게 진계하여 명년 가을로 물려서 행하도록 하라."

 

10월 12일 계해

상이 형조에 하교하여 도망 중에 있는 죄인의 자제와 질손(姪孫)들은 모두 연좌(緣坐)시켜 잡아 가두지 말라고 하였다.

 

대신이 삭선(朔膳)의 복구를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국가란 백성 기르기에 힘써야 하는데 구복(口服) 때문에 남에게 누를 끼칠 수는 없다. 복구할 기한도 멀지 않으니 경들은 안심하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

 

10월 13일 갑자

호조가, 경기·강원도·하삼도(下三道)에 분정한 서쪽 변방의 군량을 전례대로 받아들일 것을 청하니, 상이 일렀다.
"금년의 농사가 조금 풍작인 듯하나 기근의 여파로 먹고 살기에 어려움을 면치못할 것인데 전례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요동의 백성들이 다 돌아가지 못한 터이라 아주 정지시키기는 어려우니, 우선 작년의 준례대로 감해 받아서 민력을 펴게 하라."
사신은 논한다. 경비(經費)의 걱정은 유사(有司)의 직분이며 자혜로운 염려는 임금의 도리이다. 위에서 한 푼의 폐단을 덜면 아래에서 한 푼의 혜택을 입게 되는 것이니, 성상의 이 하교 역시 자혜의 도리이다.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350면
【분류】재정-군자(軍資) / 농업-농작(農作) / 역사-편사(編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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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경비(經費)의 걱정은 유사(有司)의 직분이며 자혜로운 염려는 임금의 도리이다. 위에서 한 푼의 폐단을 덜면 아래에서 한 푼의 혜택을 입게 되는 것이니, 성상의 이 하교 역시 자혜의 도리이다.

 

좌의정 김류가 최명길의 차자 중에 자신에게 침급(侵及)된 말이 많다 하고 병을 핑계로 정사(呈辭)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내가 윤허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지제교(知製敎)가 나를 대신하여 교서를 초(草)하라."
하였다. 교문(敎文)의 대략에,
"지난번 판탕한 때를 만나 거의 단련(鍛鍊)의 화를 당할 뻔하였다. 처신을 조심한지 몇 날이던가. 큰뜻을 펴는 데는 시기가 있었다. 꿈속에 웅비(熊羆)가 따랐으니 빈번하게 하기를 어찌 삼고초려(三顧草廬)를 꺼렸겠는가. 바람과 구름이 서로 만남에 사직이 마침내 한 번의 거사에 의지하게 되었다. 그러니 어찌 부열(傅說)이 염매(鹽梅)로써 은(殷)나라를 화합시킴과 같았을 뿐이겠는가. 이는 실로 소하(蕭何)가 국주(國柱)로서 한(漢)나라를 부지한 것이었다. 기강을 세워 인민이 금수됨을 면하였고 햇볕을 쬐고 하늘을 떠받들어 살게 되었으니 그 공로가 대수 장군(大樹將軍)077)  과 비교하여 누가 더 나은가. 직책은 의정부의 중책에 있고 명망은 실로 백성에게 매여 있다. 국가는 장성(長城)으로 삼아 의탁하고 조정은 반석과 같이 의지하도다.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방해되는 자를 제거 하는 법으로 이 어찌 유식한 사람이 의심할 일이겠는가. 뭇인재를 쓰는 데는 허물을 버려둠이 귀중하거늘 알아주지 않는 자의 괴롭힘을 많이도 당하였다. 국사에 온 힘을 다했으니 어찌 근력의 쇠퇴가 없었겠는가. 밤낮으로 공무(公務)에 힘썼으니 공의(公義)에 있어 어찌 돌아가 쉬는 것이 합당하겠는가."
하였다.

 

10월 14일 을축

상이 주강에 자정전에서 《서전(書傳)》을 강하였다. 동지경연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대우(大禹)의 공덕은 만세토록 길이 의지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당시 사람들에게 스민 깊이가 어떠하였겠습니까. 후세의 걸(桀)에 이르러 백성들이 언제나 망할까라고 탄식하게 되었으니 천명도 끊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니 임금이 자기의 덕을 밝히지 않으면 조종(祖宗)의 덕택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지극하다. 경의 말이여, 지금 백성들의 원망이 극도에 이르렀으니 어찌 언제나 망할까라는 탄식이 없겠는가."
하였다. 상이 특진관 이서(李曙)에게 이르기를,
"군정을 능히 수행한 곳은 어느 고을이며 능히 수행하지 못한 곳은 어느 고을이던가?"
하였다. 서가 아뢰기를,
"신이 다녀본 곳 가운데에는 상줄 만한 자가 없었는데, 광주 목사(廣州牧使) 이시방(李時昉)만이 능히 직사를 다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정을 수행하지 못한 자 중에 심한 자는 벌 주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서가 아뢰기를,
"과천(果川)은 실로 잔약한 고을이긴 하나 전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벌을 시행토록 하라. 근래에 수령들이 만사를 폐지한 채 백성을 구휼한다고 칭탁하고 조정으로부터 칭찬받으려 하며 조정에서도 이를 선치(善治)라고 한다. 간혹 부지런하고 성실한 자라도 있으면 대간에서는 지나치게 논핵하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심각한 폐단이다."
하였다. 서가 아뢰기를,
"한(漢)나라 때는 구경(九卿)을 수령으로 내보내기도 하였으니 수령을 중시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수령을 중시하시니 선치자라면 반드시 직사를 잘 수행할 것입니다. 만약 호조와 병조에 납부하는 공세(貢稅)와 군액의 숫자를 상고해 보면 그들이 선치하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경여(李敬輿)의 치민(治民)은 백성이 그를 부모와 같이 여기나 관청의 일에 있어서는 전혀 볼 만한 것이 없었다."
하니, 홍서봉이 아뢰기를,
"요즈음의 선정(善政)이라고 하는 것은 옛날의 양리(良吏)와는 다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같은 폐단들은 방백(方伯)이 살펴야 할 것이다."
하니, 이서가 이르기를,
"신이 이신의(李愼儀)의 치민(治民)을 살펴보았는데 양리라고 할 만하였습니다. 그가 일찍이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있었을 때 임기가 만료되어 교체되어 떠나던 날에 송사(訟事)를 결단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결단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해주를 다스린 지 6년만에 관고(官庫)가 가득 찼습니다. 심지어는 구피(狗皮)가 3천 령(領)이나 쌓였는데 떠나는 행장은 쓸쓸할 정도였으므로 당시에 칭송하였습니다."
하였다. 참찬관 이현영(李顯英)이 아뢰기를,
"하북(河北)의 적도를 없애기는 쉬우나 조정의 붕당을 없애기는 어렵다고 하였는데, 이는 옛날의 명언입니다. 전날 간원의 차자 중에는 단지 ‘없애기 어렵다.’라고만 말하였는데 상교(上敎)가 너무 준엄하였고 한 조목의 말에만 대답하였을 뿐 전편(全篇)의 뜻은 거론하지 않았으니, 매우 온당치 못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여러 번 엄한 전지(傳旨)를 내려 기를 꺾었으니, 상께서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인다 해도 다 말하기란 어려운 일인데 더구나 남의 말을 듣지 않으려는 기색을 보이는 데이겠습니까. 요전날 경연에서 하교하시기를 ‘신하가 임금이 하는 일을 꺾으려고 한다.’ 하셨습니다. 옛날부터 절개를 굽히지 않고 의리에 죽는 것은 임금이 싫어함을 무릅쓰고 과감히 간하는 자만이 능히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없음을 근심할 일이거늘 어찌 임금이 하는 일을 꺾으려 한다고 걱정하십니까."
하고, 홍서봉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박정(朴炡)·유백증(兪伯曾)을 일시에 축출하였는데, 이들은 외직으로 내보낼 죄목이 없었는데도 상께서는 붕당의 습관이 있다고 하였으니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는 말은 당초 갑술078)  ·을해 연간에 일어나서 점점 조정에 가득해져, 조신이라면 모두 색목(色目)에 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 박정 등의 소위를 어찌 여기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상종했던 것은 취향이 서로 같거나 혹은 사는 곳이 서로 가깝기 때문이었지 논의하기를 좋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외직으로 보낼 때 혹 한마디의 말 때문에 축출당하기도 하였으나, 지금 이일은 너무도 명분이 없습니다. 상께서 아랫사람들의 사정을 다 살피지 못하고 사사로운 붕당만을 막으려고 하시니, 신이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간원에서 차자를 올린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였다.

 

10월 15일 병인

호조가, 절수(折受)한 제언(堤堰)을 다시 공가(公家)로 환속시켜 저수와 몽리(蒙利)를 넓히도록 청하였는데, 상이 일렀다.
"절수한 연한을 조사하여 처리하되 선조(先朝)에서 내려 준 곳과 자전에 소속된 곳은 조사하지 말라."

 

유생 이성후(李成厚) 등 5인을 전강(殿講)하였다. 거수(居首)한 자는 회시에 직부하게 하고, 나머지 입격한 자는 필묵(筆墨)을 차등있게 하사하였다.

 

10월 16일 정묘

상이 조강에 자정전에서 《서전》을 강하였다. 지경연 이귀(李貴)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즉위하신 뒤로 민간의 부역이 견감되었으나 백성의 병폐는 점점 심해지고 있으니,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정치의 요령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이 들으니 요즈음 북도의 백성이 가장 고되다고 하는데 이것은 대개 각 아문에서 해마다 장사를 일삼기 때문입니다. 공익을 빙자하여 사익을 도모함이 공판(公販)보다 배나 되고, 이익이 되는 것으로는 인삼 만한 것이 없으므로 잠상(潛商)들이 계속 모여들어 서로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도 죄인을 잡는 경우는 매우 드무니, 그 폐단이 적지 않으며 백성이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강도(江都) 여러 곳의 모든 어선의 이익은 백성들이 생활을 의지하고 있는 바인데, 근래 관가(官家)에서 이익을 독점하므로 고기잡이를 하지 못하고 있으니, 국가가 이런 미세한 이익까지 쫓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각 아문의 어염(魚鹽)에 관한 이권은 호조에 넘겨주고, 궁가(宮家)가 점유한 곳은 모두 다 빼앗을 수는 없더라도 그 반만 주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병무(兵務)에 관한 일은 의당 병조에서 책임져야 하는데 요즈음은 비국에서 주장하고 있으므로 병조의 장관은 한가로이 아무 일도 살피지 않고 있습니다. 신은 바라건대 전곡(錢穀)의 일은 호조에 넘겨주고 병무에 관한 일은 병조에 넘겨주소서."
하니, 양사가 잇따라 나아가 아뢰기를,
"여러 궁가(宮家)에 대해 면세(免稅)하는 일은 법전에 없는 일이며 그 폐단도 끝이 없습니다. 호조에서 장부에 올린 것 외에도 여러 궁가의 면세처는 해마다 늘어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해택(海澤)과 염장(鹽場)들도 모두 입안(立案)되어 있으니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속히 혁파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들어 주지 않았다. 양사에서 또 허적이 망령스레 소장을 올린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니, 이귀가 아뢰기를,
"허적의 일은 공척(攻斥)할 수 없습니다. 신흠(申欽)이 살았을 때 신이 가서 입묘(立廟)의 옳음을 말하였고, 오윤겸(吳允謙)도 ‘입묘하는 일은 옳다.’고 하였으며 홍서봉(洪瑞鳳)의 뜻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남이공(南以恭)은 외방에 있으면서는 입묘해야 한다고 말하였다가 조정에서 의논할 때에는 관직을 잃을까 염려하여 구차하게 반대의견에 따랐습니다."
하자, 대사헌 남이공이 아뢰기를,
"이귀는 의당 자기의 의견만을 진달해야 하며 합계(合啓)의 의논을 이간해서는 안됩니다."
하고, 대사간 이식(李植)이 아뢰기를,
"대례(大禮)의 소재를 신 등이 감히 알 수 없으나 국가에서 이미 유신(儒臣)과 더불어 그 예를 작정하였는데 오늘 경연에서 한 마디로 결정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귀와 최명길이 자기 의견의 대개를 진달하였는데, 최명길의 말에 ‘만약 추숭(追崇)하지 않으면 앞으로 도적이 닥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너무 지나칩니다. 상께서 비록 추숭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공론을 따름에는 해로울 것이 없으며 또한 어찌 윤기(倫紀)를 두절시켜서 도적을 닥치게 할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남이공이 아뢰기를,
"이귀는 신하로서 품은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해야 한다고 하지만, 대관(臺官)들이 논계하는 때에 이같이 남의 말을 표절하여 조정의 체모를 어그러뜨려서는 안 됩니다."
하니, 이귀가 항변하여 말하기를,
"이 무슨 말입니까. 나 역시 중신인데 무슨 일이건 말하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영사 오윤겸(吳允謙)이 아뢰기를,
"전일 인견할 때 조정내의 분당에 관한 일을 상께서 하문하셨으나 소신은 전연 알지 못하였으므로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 이귀가 경연에서 진달하였는데 이는 사람들이 모두 알 만한 일이었습니다. 신이 알면서도 대답하지 않은 것 같이 되어 황송스럽게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어찌 이토록 알지 못하였는가?"
하자, 오윤겸이 아뢰기를,
"신의 나이 벌써 노쇠하여 교유에 뜻이 없으며 또한 성품이 옹졸한 탓으로 공무를 마치고 나가면 사실(私室)에 있어서 모든 이야기를 전연 듣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특진관 김기종(金起宗)이 말하기를,
"왕자(王者)로서 사람을 씀에 어찌 남북도(南北道)에 한계를 두겠습니까. 뒷날 도적이 쳐들어 올 때에는 반드시 양계(兩界)를 경유할 것이니 장수의 일을 감당할 만한 자를 가려서 쓴다면 뒷날 힘을 얻을 것입니다."
하니, 이귀가 아뢰기를,
"남북의 무사들을 신이 모두 써야겠지만 다 쓸 수는 없으며 함경도의 문과(文科) 출신자들은 스스로 쓰이지 못할 것을 알고 올라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의당 쓸만한 자를 가려서 써야 할 것입니다."
하고, 남이공이 아뢰기를,
"관서인(關西人)으로서 무사는 쓰인 자가 많으나 문관도 가려서 써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북의 인재를 수용하라는 뜻을 일찍이 하교하였으나 해조에서 도무지 거행하지 않았으므로 내가 지금 말하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특진관 조익(趙翼)이 겸임한 대사성(大司成)을 사임하고자 하니, 오윤겸이 아뢰기를,
"대사성이 겸임이 되면 직책에 전념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병조 참의로서 비변사 유사(有司)의 직임을 겸하고 있는 데이겠습니까. 병조 참의의 직책을 체직할 수는 있겠으나 대사성에 있어서는 조익 만한 사람을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도 그러하다. 인재를 얻기 어려워 그가 한 관직에 오래 머무니, 아까운 일이다."
하였다. 조익이 아뢰기를,
"옛날 진 원제(晋元帝)가 남도(南渡)한 뒤 판탕한 때에도 오히려 학교를 일으켰는데 더구나 이런 때이겠습니까."
하고, 참찬관 홍명구(洪命耉)가 아뢰기를,
"신이 어제 전강(殿講)에서 사자(士子)들의 소위을 보고 한심스러웠습니다. 강하는 책은 《대학(大學)》 등이며 입으로 읽고 외울 뿐 문의(文義)는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습관을 버리지 않는다면 처음 배우는 선비들에게 권과(勸課)할 것이 없고 상(賞)을 바라는 마음만 키우게 할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학》은 역시 폐지할 수 없다. 전에는 《대학》과 《중용》을 병강(並講)하던 규례가 없었으니 지금 이후로는 《대학》과 《중용》을 병강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 전강의 규례는 사서 삼경(四書三經) 중에서 각각 한 책을 뽑아서 하도록 되어 있는데, 요즈음은 《중용》과 《대학》 두 책을 응당 강하는 것으로 하기 때문에 아뢴 것이다.】  검토관 김광혁(金光爀)이 아뢰기를,
"향시장(鄕試場) 가운데서 종일토록 시제(試題)를 고쳤다고 하니 사습(士習)이 놀랄 만합니다."
하고, 홍명구가 아뢰기를,
"호남 뿐만 아니라 공청도·경상도 등에서도 닭이 우는 새벽에 시권(試券)을 바치므로 선비들과 노복들이 무리지어 장난질하며 마을에까지 횡행하며 침탈하는 데도 관아에서 금지시키지 못했으니, 이 폐단을 엄하게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폐단이 매우 놀랍다. 해조로 하여금 조사해 아뢰어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조익이 아뢰기를,
"노서(老西)니 소서(少西)니 하는 말을 신은 도무지 듣지 못했습니다. 수년 전에는 청서(淸西), 의서(義西)의 말이 있었으나 서로 공격하는 일은 없었는데, 요즈음 분당(分黨)의 명목은 실로 맹랑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반드시 붕당을 없앤 뒤라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데, 근래의 소장이나 차자에서는 붕당을 없앨 수 없다고 하니 나의 소견이 잘못된 것인가?"
하였다.

 

좌의정 김류가 두 번재 정사(呈辭)하였는데, 상이 불윤 비답을 내렸다.

 

우레가 치고 우박이 내렸다.

 

10월 17일 무진

평안 감사 김시양(金時讓)이 치계하기를,
"보산 산성(保山山城)을 이제 다 쌓았습니다. 매우 험준한 것 같으나 지세가 기울어져 있어서 성중이 환히 들여다 보여 지푸라기나 개미라도 적이 모두 볼 수 있으므로 결코 국경 수비를 위한 방비 시설을 설치할 곳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도내 잡색군(雜色軍)의 통계가 5천 명 미만이어서 모두 안주(安州)에 귀속시켜도 오히려 부족할까 근심되는데, 이 산성에 어떤 장수가 무슨 병졸을 거느리고 들어가 수비하겠습니까. 불행히 변란이라도 있으면 비록 민정(民丁)에게 들어가 지키게 한다 하더라도 수령들이 모두 안주성에 속해 있어 역시 영솔할 사람이 없으니 대책을 어떻게 세워야 하겠습니까?"
하였는데, 비국이 복계(覆啓)하기를,
"당초 보산 산성을 설치했던 것은 꼭 적을 방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평양의 본성을 지키지 못하기라도 하면 노약한 남녀들이 적을 피해 있을 만한 곳이 없습니다. 보산은 멀리 40리 밖 바닷가에 있고, 비록 지세가 기울어져 안이 노출된 것 같으나 두 강 사이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들어갈 수 있는 곳은 불과 한 가닥의 길 뿐입니다. 불행히 변란이 생기더라도 적은 반드시 바닷가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지 않을 것이므로 민병(民兵)이 들어가 지키더라도 난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또 설사 도내의 수령이 모두 안주성으로 들어간다 해도 본부의 서윤(庶尹)이나 강서(江西)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자가 거느리고 들어가 보호할 수 있습니다. 인력과 비용이 벌써 많이 들었으니 이제 중지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호차(胡差) 중남(仲男) 등을 접견하였다.

 

황해 감사 이경용(李景容)이 《격몽요결(擊蒙要訣)》 수백 본(本)을 인쇄하여 올렸는데, 상이 중외에 반포하라고 명하였다. 《격몽요결》은 이이(李珥)가 저술한 것이다.

 

10월 18일 기사

대사간 이식(李植)이 아뢰기를,
"경연에서 전후로 내리신 성교(聖敎)의 대개는 신 등이 일전의 차자에서 인용했던 당 문종(唐文宗)의 말이 그릇됐다는 것이었으니, 이는 모두 신이 망령되이 잘못 인용한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이 일찍이 유악(帷幄)에서 모시면서 상께서 늘 선조(先朝)에서 두 당파를 다 축출하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기면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상께서 문종의 처사를 통한하고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우(牛)·이(李)의 붕당이 어찌 모두 소인이었겠습니까. 그들 모두를 축출하였다면 순(舜)이 4흉(四凶)을 베고 16상(十六相)을 등용했던 일079)  과는 틀리는 처사가 아니었겠습니까. 당 문종이 서로 틈이 벌어지도록 내버려 두었던 것은 그 실책이 유약한 데에 있었다면, 전하께서 모두 내쫓으려고 하는 것은 아마 그 실책이 강한 데에 있다 할 것입니다.
대저 그 해가 많은 줄 안다면 의당 없애는 어려움도 알아야 할 것이며, 없애는 어려움을 안다면 그 처리할 방도를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잘것없는 도적이나 장사치들의 분쟁도 시군(時君)이 화해시키는 것이거늘 요즈음의 조정 신하에게 무슨 대단히 악한 정상이 있기에 모두 없애려고 하십니까. 이는 다만 형체도 없는 당파를 만들어서 갈라 놓고 게시하는 것일 뿐이니 어찌 성대(聖代)에서 바람직한 일이겠습니까.
삼가 오늘날 조정의 의논을 보건대 대동시켜야 하고 다르게 만들어서 안되며, 화목시켜야 하고 괴려시켜서는 안되며, 진정시켜야 하고 괴열시켜서는 안되겠기에 외람됨을 무릅쓰고 한 장의 차자를 올려 조금이나마 소견을 진달합니다. 그러나 말이란 다 할 수 없고 정성이란 다 표현치 못하는 것이라 전번의 주대(奏對)가 이미 휘당(諱黨)의 유감이 있었다면 다음번의 논사(論事)는 호당(護黨)으로 귀착됨을 면키 어려울 것이니, 신의 죄가 어찌 이미 견책을 받은 자들보다 적겠습니까. 속히 파척하소서."
하였다. 이어 헌부에서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하교하였다.
"근자에 외방의 유생들이 필시 경중에 많이 모였을 것이다. 예관(禮官)을 시켜 길일을 택하여 정시(庭試)를 설행토록 하라."

 

10월 19일 경오

상이 자정전에서 소대(召對)하여 《서전》의 중훼지고(仲虺之誥)편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덕있는 자는 벼슬시키고 공이 있는 자는 상을 준다고 하니, 덕과 공로에 보답하는 것에 다름이 있는 것인가?"
하니, 검토관 오전(吳竱)이 아뢰기를,
"덕과 공은 다름이 있으니, 덕있는 자는 벼슬시키지 않을 수 없으며 공있는 자는 상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공과 덕이 거꾸로 되면 모든 일이 마땅함을 잃게 되니, 상께서는 반드시 관작을 아껴서 남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시독관 김남중(金南重)이 아뢰기를,
"근래에 작은 공로로 관직을 받은 자가 많은데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하고, 오전이 아뢰기를,
임금의 학업이란 평범한 선비들과 달라 모든 성현의 글을 깊이 생각하고 힘쓴 뒤라야 유익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글을 강론하는 것만 일삼을 뿐이라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공이 많은 자는 많은 상으로 보답한다는 것은 평범한 공로를 두고 한 말이다. 만약 큰 공이 있는 자라면 반드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일 것이니, 상줄 뿐만 아니라 관작을 주어도 될 것이다."
하니, 김남중 등이 아뢰기를,
"대개 공과 덕을 분리해 말하는 것은 공이 있는 자에 대해 상은 주되 관작을 주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덕에는 관작을 주고 공에는 상을 준다는 것이 상도(常道)이긴 하지만, 만약 큰 공덕이 있는 자라면 꼭 여기에 구애될 것은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이윤(伊尹)의 공이 덕보다 과하다고 하시나, 이윤의 일은 맹자(孟子)도 말하였거니와, 이윤의 덕이 비록 공자(孔子)의 시중(時中)과는 같지 못하였지만 역시 온 세상을 다스릴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은 성인(聖人)으로 말하였습니다. 선유(先儒)들도 말하기를 ‘이윤은 권도(權道)를 아는 사람이다.’ 하였으니, 이윤의 덕이 어찌 공보다 아래이겠습니까. 이와 같은 사람은 반드시 남보다 뛰어난 덕이 있은 뒤에 비상한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큰 공을 세웠다 하더라도 왕도(王道)를 다하였다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윤이 탕(湯)을 도와 걸(桀)을 주벌하고 태갑(太甲)을 동궁(桐宮)으로 추방시켰는데 이것이 가장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공이 많으면 많은 상으로 보답한다는 일을 한 광무(漢光武)도 그렇게 했는가?"
하니, 참찬관 윤지경(尹知敬)이 아뢰기를,
"광무는 일시의 공있는 자에게 관작을 주되 도에 지나치지 않고 모토(茅土)를 분봉(分封)하여 제후로 삼았을 뿐이니, 공이 많으면 많은 상으로 보답하였다고 할 만합니다. 그리고 탁무(卓茂)는 그 당시 미관(微官)이었는데도 곧바로 포덕후(褒德侯)에 봉하였으니, 덕이 많으면 높은 관작으로 보답하였다고 할 만합니다. 가복(賈復) 등은 모두 정승이 될 만하였으나 정승의 권한을 주지 않았는데, 이는 고조(高祖)의 일에서 깨달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광무의 거조는 바로 고조의 일에서 깨달은 것이다. 대개 큰 공을 세운 사람은 재능이 남보다 뛰어나나 혹 공로를 믿고 방자해져서 마침내는 잘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당 태종(唐太宗)은 울지경덕(尉遲敬德)을 의심하기까지 하였다."
하니, 윤지경이 아뢰기를,
"울지경덕을 쓰지 않은 것은 그의 목숨을 보전해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공신(功臣)으로서 쓸 만한 자는 마땅히 써야 할 것으로, 만약 쓸 만한 사람이 있는데도 쓰지 않는다면 잘못된 일이다. 내 생각에는 공신을 대우하는 일에 광무를 법 삼을 필요없이 쓸 만한 자는 쓰고 쓸 만하지 못한 자는 쓰지 말 것이며, 공신이 된 자도 스스로가 공로를 믿고 교만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니, 오전이 아뢰기를,
"관작은 비록 인주(人主)가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한다고 하나 실은 천직(天職)인 것이므로 선유(先儒)들이 천록(天祿)이니 천작(天爵)이니 하였던 것입니다. 공과 덕의 두 가지는 분명히 분별하여 덕이 많으면 높은 관작으로, 공이 많으면 많은 상으로 보답하는 교훈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의 공신을 어찌 모두가 덕이 없다고 하겠으며 또 모두가 덕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공이 비록 크더라도 덕이 미치지 못한다면 큰 일을 맡기더라도 마침내 일을 그르칠 것입니다. 그러니 관작을 주는 것을 조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반드시 분별함이 매우 밝은 연후에야 각기 직책에 알맞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총명이니 요 임금도 이를 어렵게 여겼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항상 잘 다스려진 날은 적고 혼란한 날이 많았던 것이다. 사람 알아보기가 쉽다면 어찌 난망(亂亡)이 있겠는가."
하니, 오전이 아뢰기를,
"신이 임금에게 기대하는 것은 요·순같이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요·순의 덕이란 능히 사람을 알아본 것이었으니 이는 바로 본심의 바른 길을 정일하게 지킨 데에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 고조(漢高祖) 같은 분이 무슨 학문을 했겠는가마는 천성이 고명하였으므로 능히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후세에는 학문을 좋아하는 인주는 있었으나 능히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오전이 아뢰기를,
"한 고조가 비록 사람은 알아보았지만 학문의 공부가 없었으므로 공신을 대우한 도리가 저와 같았으며, 후세의 인주는 학문을 좋아하는 이가 있었으나 독실하지 못하였으므로 능히 사람은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니, 타고난 자질로 논할 수는 없습니다. 과연 진실하게 학문에 힘쓴다면 《중용》에 ‘어리석은 자라도 명철해지며 유약한 자라도 강하게 된다.’ 하였으니, 바로 여기에 달린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 말이 옳다. 비록 자질이 아름답다 하더라도 학문의 공력도 없이 자질에만 의탁한다면 거의 자포(自暴)한 자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국가가 경연을 설치한 뜻은 상하가 성경(聖經)과 현전(賢傳)에서 간절히 깨우치려 함이니, 법 삼아 행할 만한 일은 토론하고 강구하여 서로가 권장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근일의 연신(筵臣)들은 순서대로 책을 들고 들어가서 강한다는 것은 고작 몇 줄의 글을 해석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니, 하루에 세 번씩 경연을 한들 실지로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그 중에 오전만이 능히 차분히 강론하고 분석하여 깨우치니, 오전 같은 사람은 쉽사리 얻을 수 없을 사람이라 하여도 될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351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인사-관리(管理) / 역사-고사(故事) / 역사-편사(編史)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국가가 경연을 설치한 뜻은 상하가 성경(聖經)과 현전(賢傳)에서 간절히 깨우치려 함이니, 법 삼아 행할 만한 일은 토론하고 강구하여 서로가 권장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근일의 연신(筵臣)들은 순서대로 책을 들고 들어가서 강한다는 것은 고작 몇 줄의 글을 해석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니, 하루에 세 번씩 경연을 한들 실지로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그 중에 오전만이 능히 차분히 강론하고 분석하여 깨우치니, 오전 같은 사람은 쉽사리 얻을 수 없을 사람이라 하여도 될 것이다.

 

경상 감사 홍방(洪霶)이, 진주(晋州)에 문관으로 목사(牧使)를 차출하고, 또 판관(判官)을 설치하여 그곳을 비중있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비국이 복계하기를,
"목사는 병사(兵使)로 하여금 그전대로 겸임하게 하되 판관은 대신(臺臣)이나 시종(侍從)의 경력이 있는 문관을 가려 보내서 백성을 다스리는 일을 전부 판관에게 위임토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시사 최연(崔葕)이 아뢰었다.
"허적은 본래 경망스런 사람으로 세상의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으나 역시 2 품의 훈신(勳臣)입니다. 비록 분수에 넘치는 말을 했더라도 그것이 옳지 않다면 내버려 둘 뿐으로, 깊이 따질 것도 없고 서로 오래 끌 필요도 없습니다. 이렇듯 합계(合啓)가 한창인 때에 미신(微臣)의 의견은 이렇게 어리석고 미련하니 무릅쓰고 언관의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을 파직하소서."

 

대사간 이식(李植)이 아뢰기를,
"사간 최연이 합계에 참여하여 결말을 지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의도가 있었고 까닭없이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허적은 본래 업신여길 만한 신분도 아니고 그의 소장도 분수에 넘는 실수에 그친 정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조정을 능멸하고 임금을 협박하여 기어코 자기의 소견을 이루고야 말려고 했던 것만은 의례(議禮)의 잘못 뿐만이 아니어서 여러 달의 논핵을 그만 두지 못하게 하는 바입니다. 그것을 정지시키든 그대로 두든, 오래 끌든 빨리 해결하든지 간에 으레 의논이 하나로 귀결되는 데에 달린 것이니, 최연이 출사한 뒤에 발론하여 정지시켜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앞질러 인피하여 이 의논이 하나의 큰 규범이나 되는 듯이 동료들을 잡아꺾어 돌이키기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하였으니, 신이 어찌 감히 어연히 처치하겠습니까. 신을 파직하소서."
하였다. 양사가 함께 사피(辭避)하자, 옥당이 이식 등은 출사시키고 최연을 체직시킬 일로 차자를 올리니, 상이 이에 따랐다.

 

10월 20일 신미

좌의정 김류(金瑬)가 세 번째 정사(呈辭)하였는데, 불윤 비답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허적을 논계한 것은 실로 일국의 공론에서 나온 것인데 전 사간 최연은 감히 이의(異議)에 부화뇌동하여 의논에 참여하려 하지 않았고 합계가 한창인 때에 앞질러 인혐하였습니다. 치우치게 자기 의견을 고수하여 공론을 무시한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시키라고 명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죄줄 만한 일이 없으니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10월 21일 임신

유성(流星)이 천진성(天津星) 아래에서 나와 하고성(河鼓星)으로 사라졌고, 달이 헌원성(軒轅星)의 넷째 별을 범하였다.

 

김상헌(金尙憲)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10월 22일 계유

병조가 아뢰기를,
"등극별시(登極別試)에 북도(北道)의 무사로서 초시(初試)에 합격한 자가 2백여 명이었는데, 길이 매우 멀고 전시(殿試)의 기일이 급박하여 미처 와서 응시하지 못하였으며, 또 추방(秋防)이 급박하다는 이유로 본도가 출송(出送)을 허락하지 않아 까닭없이 정거(停擧)되었으니, 실로 억울할 듯하기 때문에 병조에서 복계하여 다음번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작년에 합격했던 사람들이 금년의 전시에 응시코자 한다 하니, 모두 허락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23일 갑술

밤에 달이 태미원(太微垣)에 들어 갔었고 유성이 구진성(鉤陳星) 아래에서 나와 부광성(扶筐星)으로 들어갔다.

 

모영(毛營)에 전후로 준 미곡이 모두 26만 8천 7백여 석이라고 관향사(管餉使) 성준구(成俊耉)가 치계하였다.

 

금한(金汗)이 서책을 요구하였으므로 《춘추(春秋)》·《주역(周易)》·《예기(禮記)》·《통감(通鑑)》·《사략(史略)》 등의 서책을 주었다.

 

10월 24일 을해

제주 목사(濟州牧使)가 치계하였다.
"본주는 지난 7월에 동남풍이 크게 불고 비도 따라 내렸기 때문에 모든 과실과 벼가 남김없이 손상을 입었습니다."

 

문과의 거자를 전정(殿庭)에서 복시(覆試)하여 유학(幼學) 정두경(鄭斗卿) 등 18명을 뽑았다.

 

10월 25일 병자

상이 자정전에서 소대(召對)하여 《서전》의 중훼지고편을 강하였다. 시강관 김광혁(金光爀)이 아뢰기를,
"이 편은 실로 임금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뜻입니다. 임금으로서 선인인 줄 알면서도 쓰지 못하거나 악인인 줄 알면서도 없애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사람의 선악을 참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필부(匹夫)도 뜻이 자만스러우면 그 몸을 보전치 못하는 것이거늘 더구나 임금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탕(湯)의 덕으로 어찌 이런 실수가 있을까마는 옛날 인신(人臣)들이 진계(進戒)하는 말은 성군(聖君)이라 하여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능히 스스로 스승을 찾았다고 한 말은, 순(舜)은 대성인인데도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자신을 버리고 남의 말을 따랐으며, 대우(大禹)도 좋은 말에 절하였다는 것이니, 더구나 성인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이것은 임금으로서 더욱 근신해야 할 부분입니다. 예로부터 스승을 얻은 자는 적고 제멋대로 한 자가 많아 난망(亂亡)에 이른 것입니다."
하였다. 검토관 오전이 아뢰기를,
"백성은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를 막론하고 각기 중용(中庸)이 없지 않으나 다만 기품(氣稟)에 구속되고 인욕(人慾)에 가려 중용이 되지 못한 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임금이나 스승된 사람이 먼저 자신에게 있는 중용을 세워 의(義)로써 일을 다스리고 예(禮)로써 마음을 다스려 천하의 천가지 만가지 일을 의와 예에 귀일시킨다면 내외가 서로 길러져 각기 그 도리를 다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는 중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심으로 스승을 구한다면 천하의 선인이 모두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니, 누가 선을 가지고 와서 고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자기만이 옳다고 한다면 선한 말이 들어오지 못하게 되고 난망이 따를 것입니다.
옛날 성탕(成湯)이 이윤(伊尹)을 스승으로 삼았는데 이윤이 아무리 어질다 해도 어찌 탕보다 어질겠습니까. 그러나 탕은 스승으로 삼았으니 인주란 먼저 남의 좋은 점 취하기를 즐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상께선 늘 자신이 지혜롭다고 여기는 것을 경계하시어 신료 중에서 한 마디의 말과 한 가지의 일이라도 법될 만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취하여 자기의 선으로 삼아 중용을 세우는 도리를 성탕처럼 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아래 백성들이 모두 전하에게서 법을 취할 것이며 덕화(德化)가 크게 행해질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겸약(兼弱)이란 무슨 뜻인가?"
하니, 오전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연구해 보았는데, 이것은 멸망된 나라를 일으켜 세워주고 단절된 대수를 이어준다는 뜻과는 다릅니다. 흥계(興繼)라고 하는 것은 나라는 망하지 않았으나 미약한 자손을 부지하여 흥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겸약이라는 것이 만일 남의 미약함을 다행으로 여겨 나라를 취하는 것이라면 성인의 도리가 아니고, 부득이한 뒤에 겸병하는 것이라면 곧 성인의 뜻인 것이니, 이것으로 논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김광혁은 아뢰기를,
"제 스스로 잘못하여 멸망하게 된 것을 성인이 부득이해서 겸병하는 것이니, 성인이 어찌 그 사이에 터럭만큼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대문(大文)은 미진한 것이 있다. 천자로서 제후를 대우함에 꼭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약매(弱眛)한 나라를 겸공(兼攻)한다고 하는 말은 타당하지 못하다. 이것은 아마 탕을 위해 수치스러움을 풀어주려는 의도일 것이다."
하니, 오전이 아뢰기를,
"성교(聖敎)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탕은 성인이며 중훼(仲虺)도 현인인데 어찌 탕의 수치를 풀어주려고 이렇듯 미진한 말을 하였겠습니까. 대개 약매(弱眛)한 국가란 천명이 벌써 떠났고 인심도 끊어진 것인데 겸공(兼攻)하지 않는다면 어찌 도탄에 빠진 백성을 건질 수 있겠습니까. 갈백(葛伯)이 노약자를 먹여주는 자를 원수같이 여긴 연후에 탕이 취하였는데, 만약 탕이 다스리지 않는다면 갈백의 악정이 무고한 백성에게 미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어찌 겸공하지 않을 도리가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밤에 유성이 필성(畢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10월 26일 정축

이목(李楘)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10월 27일 무인

밤에 화성(火星)이 물러나 오제후성(五諸侯星)의 다섯째 별을 범하였다.

 

10월 29일 경진

능창군(綾昌君) 이전(李佺)의 묘소를 경기 광주(廣州) 땅에 이장하였다. 능창군은 곧 상의 동모제(同母弟)인데 계축년080)  에 소명국(蘇命國)의 무고로 교동(喬桐)의 배소(配所)에서 죽어 양주(楊州)의 풍양(豊壤) 땅에 묻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옥당과 정원 및 모든 훈신들과 문사들로 하여금 만사(挽詞)를 짓게 하고 예의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10월 30일 신사

제주(濟州)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호조에서 삼읍(三邑)의 원곡(元穀) 2만 8천 2백여 석을 풀어 진휼하기를 청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금년의 별시(別試) 때에 북방의 무사로 초시(初試)에 합격한 자가 5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시(殿試)에 참여하지 못한 자 중에 장사(壯士)가 상당히 많고 또 힘써 종군(從軍)한 공로도 있습니다. 이런 무리들에 대해 조종조에서는 특별히 금군(禁軍)에 제수하기도 하였는데, 이번에도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모두 제수하여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간략하게 재예를 시험하고 분수(分數)를 계산하여 차례대로 제수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저들은 재예가 부족하여 낙방한 것이니 국가가 알 바가 아니다. 그러나 멀리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지 않을 수 없으니, 시재(試才)하여 분수가 많은 자는 계사대로 하라."
하였다.

 

정백창(鄭百昌)을 병조 참의로 삼았다. 백창은 젊어서 문명(文名)이 있어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고 나이 18세에 삼장(三場)081)  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재주를 믿고 남에게 교만하였으므로, 어떤 장자(長者)가 시(詩)로써 경계시키기를,
"백창이 십팔 세에 삼장을 관통하니
양양한 그 의기 당할 수 없구나
소학의 글 속에 진미가 있나니
일생에 모름지기 경신장을 읽으라."
라고 하였으며, 사람들이 경망한 자로 지목하였다. 백창의 아내는 곧 인렬 왕후(仁烈王后)082)  의 언니였는데, 계해년083)   이후로는 인척(姻戚)의 세력을 끼고 더욱 기세를 부리고 남에게 교만하였다.

 

특명으로 홍영(洪霙)을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홍영은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의 아비인데, 주원이 정명 공주(貞明公主)에게 장가 들었었다. 공주는 자전(慈殿)이 낳은 딸이므로 상이 자전을 위로하려고 이렇게 제수한 것이다. 이에 헌부가 홍영이 본래 인망이 없음을 탄핵하였고 사사로운 은사로 잘못 제수할 수 없다는 것으로 여러 번 개정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들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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