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일 계미
김시양(金時讓)이 치계하기를,
"진 부총(陳副摠)이 그의 휘하들을 풀어놓아 육지에 나와 난동을 부렸으며, 도사(都司) 상가희(尙可喜)가 표문(票文)을 가지고 나와 변 독수(邊督帥)의 문서라고 사칭하였습니다."
하고, 또 치계하기를,
"부총의 차관(差官) 양영화(楊永華) 등도 양곡을 무역하는 일로 나와서 평양(平壤)에 도착하였는데, 금차(金差)의 행차가 임박하였다는 말을 듣고 강서(江西) 등지로 흩어져 갔습니다. 그리고 원 경략(袁經略)의 차인(差人)이 안융포(安戎浦)에 도착하여 한인(漢人)을 살해한 호인을 결박해 보내주기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헌 김상헌(金尙憲)이 아뢰기를,
"들으니 최명길의 차자 가운데 여러 번 신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떠들어 댄다고 비방하였다 합니다. 원본을 내리시지 않아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외간에 전파된 말이 너무도 떠들석하여 신은 낯뜨거워 더욱 직임에 나갈 수 없습니다."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간원이 처치하기를,
"스스로 반성하여 곧으면 그 책임은 돌아갈 곳이 있기 마련이니, 출사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최명길의 차자 가운데 김류·홍서봉·김상헌을 지목한 내용에 "김상헌 등은 전일 후배들을 오늘날엔 도리어 선배로 삼았고, 또 전날의 맑고 준엄한 의논을 일대의 연소한 자들에게 양보해 주고는 자신들은 남의 비난을 받는 처지에 있으면서 어찌 서로 떠들썩하게 지껄이는 짓을 하는가."라고 하였다.
좌의정 김류가 다시 차자를 올려 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1월 4일 을유
금천 현감(衿川縣監) 윤탄(尹坦)이 큰 개울을 파서 백성들의 전답에 관개(灌漑)하였으므로 상이 상주라고 명하였다.
11월 5일 병술
호조가 아뢰기를,
"전번에 가뭄으로 인해 감선(減膳)하신 일이 있었는데, 이는 재변을 만나 수성(修省)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나, 감하고 또 감하여 금일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사대부의 자봉(自奉)만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매우 미안스럽거니와 더구나 지금은 왕비께서 만삭이 되는 절일로 온 나라가 함께 축복하여 여느 절일의 진상과는 달라야 하는데도 이미 봉진한 것까지도 호조에 내리셨으니, 군정이 극도로 안타깝고 답답해 합니다. 구구한 생각을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1월 7일 무자
이날은 동짓날이다. 대전(大殿)의 탄신일과 겹쳤으므로 백관들이 진하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상이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였다.
우의정 이정구(李廷龜)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일찍이 물선(物膳)을 전례대로 봉진할 일로 천청(天聽)을 번독스럽게 하였습니다마는 윤허하지 않았고, 이번에도 탄일의 진상을 해조에 내리셨습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성탄(聖誕)의 날은 다른 절일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중국의 경우에는 만수성절(萬壽聖節)에 천하 만국에서 옥백(玉帛)을 실은 배가 잇따라 각기 방물을 헌납합니다. 이번의 이 약간의 물선은 매우 변변치 못한 것이나 실로 신하로서 위에 드리는 정성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 물리치고 받지 않으시니 아랫사람들의 실망이 어떠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진납(進納)을 빨리 허락하시어 아랫사람들의 정리에 부응하소서."
하고, 정원에서도 계청하였으나, 상이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11월 8일 기축
셋째 대군(大君)이 졸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대군께서 졸서(卒逝)하였다 하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비록 성인이 못된 나이지만 상장(喪葬)의 예에 있어, 2, 3세의 상례와는 다릅니다. 정조시(停朝市)나 예장(禮葬) 등의 일에 의거할 만한 예문(禮文)이 없으니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염장(斂葬) 등 모든 일에는 주관하고 검칙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니 본조의 낭청 1명과 귀후서(歸厚署)의 관원으로 하여금 각 해사(該司)를 영솔하여 거행토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러나 예장은 할 수 없다."
하였다.
11월 9일 경인
예조에서 정시(庭試)의 시취일(試取日)을 17일로 택일하여 입계하니, 상이 답하였다.
"기일이 먼 것 같고 날씨도 매우 추워서 외방의 거자들이 오래 머물 수 없을 것이니 12일이나 13일로 앞당겨 정하는 것이 좋겠다."
11월 11일 임진
대사헌 김상헌(金尙憲)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은 자주 잘못 성은을 입었고 또 동지경연(同知經筵)을 겸임하고 있습니다. 대개 성상과 함께 앉아 경의(經義)를 강론하여 상의 고문(顧問)에 대비하고 보익(輔益)을 돕는 것을 어찌 우신(愚臣)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신의 형 김상용(金尙容)이 지금 지경연이 되었으니 일가가 함께 차지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옛날 중종(中宗) 때에 김안국(金安國)이 세자 빈객(世子賓客)이 되었는데 그의 아우 김정국(金正國)이 또 부빈객(副賓客)이 되자 춘궁(春宮)을 보도(輔導)하는 중임에 형제가 같이 있는 것은 미안한 일이라는 내용으로 진소(陳疏)하고 교체되었습니다. 이런 고사와 문헌의 증거가 있으니, 삼가 바라건대 속히 신의 동경연의 직임을 체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형제가 이 직임에 함께 있을 필요는 없다. 체차하라."
하였다.
동지(同知) 강복성(康復誠)이 나이 80세가 되었으므로 상이 초자(超資)할 것을 명하였다.
11월 12일 계사
상이 전 부사(府使) 송상인(宋象仁)을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송상인이 일찍이 남원 부사(南原府使)가 되어 적당(賊黨)을 끝까지 다스려서 선영(先塋)에 적당의 욕이 미쳤으므로 관직을 버리고 돌아갔었다. 그의 치적을 생각하여 이런 명이 있은 것이다.
정시(庭試)에서 이상질 등 5명을 뽑았다.
11월 13일 갑오
헌부가 아뢰기를,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 문희성(文希聖)은 일찍이 방어사(防禦使)로서 군사를 영솔하고 출정하였다가 도리어 강홍립(姜弘立) 등과 함께 투항하여 오래도록 포로로 있었습니다. 군율을 어기고 군사를 잃었으며 살기를 바라 나라를 욕되게 한 그의 죄는 주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번에 곤수(閫帥)의 직임에 제수되기에 이르니 여론이 모두 놀라워합니다.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문희성의 일은 그 죄가 주장(主將)에게 있었다. 그리고 재기(才器)가 매우 아까우니 이번에 수용한 것은 무방한 것 같다."
하였다.
11월 15일 병신
옥성 부원군(玉城府院君) 장만(張晩)이 졸하였다. 장만의 자는 호고(好古)인데 의표(儀表)가 훤출하고 재예가 통민(通敏)하였으며 관직에서 일을 처리함이 물흐르듯 하였다. 특히 군무(軍務)에 밝아 여러 번 병권을 쥐었고 원수(元帥)에 제수되기에 이르렀는데 깊이 군사들의 심복을 받았다. 역적 이괄(李适)의 변란에는 원수(元帥)로서 적병을 뒤쫓아 안현(鞍峴)에서 적을 섬멸한 뒤에 원훈(元勳)에 책록되었는데, 졸함에 미쳐 장수와 사졸들이 추모(追慕)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안으로는 성색(聲色)에 음탕하고 밖으로는 재물을 끌어모았으며, 폐조(廢朝) 때에는 아부했다는 비웃음을 면치 못했고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한 정청(庭請)에도 참석하였었으므로 사론(士論)이 비루하게 여겼다.
11월 17일 무술
고 안주 목사(安州牧使) 김준(金俊)의 아들 김진성(金振聲)이 소장을 올려 그의 누이가 절개로 죽은 상황을 진달하였는데, 상이 하교하기를,
"김진성은 김준의 아들인데도 아직 관직에 제수되지 않았는가?"
하였다. 이조가 아뢰기를,
"일찍이 외방으로 하여금 사절인(死節人)의 자손을 기록해 보내도록 하였는데 지금 미처 보내오지 않아 신 등은 김진성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거행하지 못했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김준의 일가는 삼강(三綱)을 구비하였으니 진실로 옛날에도 드물었던 일이다. 국가가 공로에 보답하는 일에 있어 준례를 따르는 것은 불가하니 6품의 실직(實職)을 제수하라."
하였다.
11월 18일 기해
헌부가 아뢰기를,
"예조 정랑 목성선(睦性善)의 전일 상소에 역적 이공(李珙)084) 을 무죄라고 하고, 또 이공을 처치하여 임금을 불의에 빠지게 했다고 하였으며, 심지어 형혹성과 태백성의 이변은 모두 이공을 내쫓아서 생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지난해의 역변을 두고 본다면 목성선이 역적의 우두머리를 신구(伸救)한 죄는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덮어두고 거론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비록 조정에서 너그럽게 용서하려는 뜻이지만, 공론은 아직도 불쾌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전조(銓曹)에서는 도리어 그를 끌어올려 여러 번 청요직에 의망하면서 미처 하지 못할 듯이 하였으니, 이 어찌 용사(用舍)를 신중히 하고 공론을 생각하는 뜻이라 하겠습니까. 물정이 모두 놀랍게 여기고 있으니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그리고 영변(寧邊)은 형세의 유리함을 의거하여 일도를 제어합니다. 지금 비록 영(營)을 폐지하고 부(府)를 두었지만 그래도 서로(西路)의 중요한 진(鎭)입니다. 새 부사 이일원(李一元)은 패군하고 적에게 항복하여 저들의 먹이를 달게 받아 먹다가 다행히 살아 돌아왔으므로, 오랑캐들이 이 사람 보기를 하인같이 여깁니다. 그런데, 이번에 서로의 중진에 제수되었으니, 오랑캐들이 듣는다면 우리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빨리 파직시키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 당시 사사로운 뜻이 있어 신구(伸救)하려 하였다면 목성선의 죄는 실로 주벌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만약 별다른 뜻이 없이 단지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라면 지금에 와서 죄를 받는다는 것은 억울할 듯하다. 너무 심하게 논죄하지 말라. 그리고 이일원을 이 직임에 제수한 것은 무방하니 역시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당초 북도의 내노비 신공(身貢)을 미곡으로 내게 한 일은 사실 군량의 보충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이미 군수(軍需)에 썼으니 그 댓가를 경창(京倉)의 저축으로 환급(換給)해 줄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현재 쓰이고 있는 재물은 부고(府庫)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고 거기에는 유사(有司)가 있습니다. 설사 용도에 부족할 근심이 있더라도 으레 해조에서 마련할 길이 있기 마련입니다. 왕자(王者)로서 재물을 쓰는 도리에 내외의 분별이 없어야 할 것 같습니다. 반정(反正)한 뒤부터 특별히 환급하는 일을 정지시키니 멀고 가까운 곳을 막론하고 성상께서 사재(私財)를 축재하지 않으시는 뜻을 흠양치 않는 자가 없었는데, 채 10년도 못되어 이렇듯 환급하라는 명령이 계셨습니다. 현재 경비의 결핍과 변방 근심의 극심함이 전날보다 더 심하니, 이는 바로 내탕고(內帑庫)의 저축을 아낌없이 군수에 보충해야 할 때입니다. 신 등의 구구한 뜻은 경비를 걱정하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변방의 일이 조금 안정되기를 기다려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아마 온편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당초에는 내탕고의 저축이 가득하였으므로 우선 이 일을 혁파시켰고, 또 많은 면포(綿布)를 내어다가 제사(諸司)의 공물가(貢物價)를 충당하였는데, 이것은 그 당시 사세상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갑자년085) 의 변란에 내탕고가 씻은 듯이 탕갈되어 잇대어 쓸 길이 없다. 그러니 지금에 다시 설치하는 것은 역시 오늘날 사세상 부득이한 것이다. 그 중에 자전(慈殿)에 소속된 명례궁(明禮宮)의 노비 신공은, 적은 비용을 아껴 위를 공경하는 도리에 흠이 되게 할 수는 없을 듯하니, 먼저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대제학(大提學)을 권점(圈點)하는 일로 내일 삼공(三公)과 정부의 동서벽(東西壁), 육경(六卿), 판윤(判尹)을 명초(命招)해야 합니다. 그런데 상규(常規)에는 전임 대제학이 천거(薦擧)하게 되어 있는데 전 대제학이 부재시에는 전전(前前) 대제학이 의천(議薦)한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전 대제학이 멀리 임소(任所)에 있고 일찍이 대제학을 지낸 사람들은 모두 대신의 직위에 있어서 일이 상규와는 다릅니다.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대신의 직위에 있더라도 전례대로 의천(議薦)해도 불가하지 않다."
하였다.
강원 감사 윤이지(尹履之)가 도내의 새로 개간된 전결(田結) 1만 2천 4백 76결(結) 몇 부(負)를 찾아 들였다고 호조에 보고하였다.
11월 19일 경자
정경세(鄭經世)를 대제학으로 삼았는데, 장유(張維)의 후임이다. 특명으로 송상인(宋象仁)을 전라도 관찰사로 삼았다. 상이 상인이 남원(南原)에 있을 때의 치적을 생각하여 대신들에게 물어서 이번 제수가 있게 된 것이다.
교서관에서 《소학(小學)》 2백 권을 인출하였는데, 내외의 신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명하였다. 김상헌(金尙憲)과 장유는 경악의 유신(儒臣)으로서는 유독 하사를 받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 두 사람은 상에게 미움을 받았기 때문에 은명(恩命)이 미치지 않은 것이다.
상번(上番)한 어영군(御營軍) 중 두역(痘疫)으로 죽은 자들이 있었으므로 상이 해조와 본조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거행토록 하였다.
11월 20일 신축
가도사(假都事) 한득복(韓得福)이 북도에 이배(移配)된 죄인 장세철(張世哲)·진명생(陳命生) 등을 압송해 오면서 18일 낭천현(狼川縣)에 당도하자, 진명생이 언서(諺書)로 된 서찰을 도사에게 몰래 바쳤는데 이는 곧 고변서(告變書)였다. 그 글 속에 "죄인 양경홍(梁景鴻)이 호(胡)에 투항한 양계현(梁繼賢)과 더불어 역모하였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진명생·양경홍 등을 잡아다가 국문하였다. 진명생이 공초하기를,
"양경홍과는 당초 서로 모르는 사이였는데, 동관(潼關)에 충군(充軍)된 출신 노돈무(盧敦武)가 와서 양경홍이 만나자는 뜻을 전하면서 하는 말이 ‘귀양사는 죄인 진사(進士) 이극규(李克揆)가 양경홍과 절친한데 항상 네가 장사(壯士)라고 말하였으므로 만나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뒤 이극규가 와서 역시 ‘양경홍이 네가 의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 서로 만나고자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내 비록 의기가 있기로소니 양경홍이 무엇 때문에 만나려 하는가? 내가 지금 안치(安置) 중에 있는데 또 어찌 왕래할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이극규가 말하기를 ‘너는 사부(士夫)가 아닌데 가까운 곳을 왕래하는 데 무슨 방해가 있겠는가.’하였습니다.
작년 겨울 신이 양경홍에게 가서 남초(南草)086) 를 구하였는데, 양경홍이 흔쾌히 만나 주면서 말하기를 ‘서로 만나기가 어찌 이리 늦었는가? 내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다.’ 하였습니다. 금년 봄에 또 가서 만났는데, 양경홍이 그의 첩을 내보내고 함께 자면서 귀에 대고 말하기를 ‘유원(柔遠)에 사는 양계현은 곧 나의 일가로서 절친한 사람인데 이 사람을 통해 오랑캐 내부의 소식을 듣고 있다. 벌써 양계현을 시켜 오랑캐에게 통보하였으니 오래지 않아 의당 회답이 올 것이다. 그들이 만약 산북(山北)에 오면 내가 그들의 앞길을 인도하려고 한다. 너에게 전마(戰馬)가 없으면 두 마리의 소(牛)를 너의 말값으로 보태주겠다.’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이어 칼을 빼어 창문을 치면서 말하기를 ‘나에게 이 보검(寶劍)이 있으니 한 사람은 죽일 수 있다.’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오랑캐들은 짐승 같은 놈들이니 지금 비록 투항하더라도 어찌 죽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 하였으나, 양경홍이 ‘오랑캐가 산북에 올 것 같으면 즉시 너에게 통고하겠다.’ 하였습니다. 그 뒤 죄인을 이배(移配)시키는 일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장세철을 가서 만났는데, 임기지(任器之)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신이 묻기를 ‘이배를 한다는 일은 무슨 일인가?’ 하였더니, 장세철이 말하기를, ‘오랑캐에게 투서(投書)한 변이 있어 우리가 모두 위태롭게 되었으나 사람들이 있는 데서는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양계현은 양계인(梁繼仁)이라고도 하는데 유원 사람으로 어릴 때 포로가 되어 자호(者胡)를 따라 빈번하게 왕래하던 자입니다. 양경홍이 이로써 죄인 최배선(崔拜善)에게도 말하였으므로 이번 이배된 뒤에 최배선도 매우 우려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양경홍을 진명생과 대질시켰는데, 서로 변명하여 다투다가 형문 받기에 이르러 실토하기를,
"작년 9, 10월 사이에 이극규·정운백(鄭雲白)·한옥(韓玉)·신상연(申尙淵) 등 4명이 신에게 말하길 ‘의복을 준비해 줄 터이니 꼭 오랑캐에게 가라.’고 하였으나 신은 노친(老親)이 있고 호어(胡語)를 알아 듣지 못한다고 사양하였습니다. 그 뒤 정운백 등이 말하기를 ‘네가 호어를 알지 못하나 지금 마침 함께 갈 사람을 구하였는데 호인(胡人)과 다름이 없다. 그리고 인마와 행구(行具)도 준비 안 된 것이 없으니 너는 속히 가라.’ 하였는데, 신은 사고가 있다고 칭탁하고 머뭇거리며 시일을 넘겼습니다.
금년 봄 자호(者胡)가 나왔는데 양사복(梁嗣福)이 와서 신에게 말하기를 ‘한옥·정운백·이극규·한회(韓會)·신상연 등이 양계현에게 노자를 주어 흉서(兇書)를 부쳐 보냈는데, 한옥과 정운백이 상의하여 글을 짓고 이극규가 썼다. 그 글의 내용은 「적당들이 온 나라에 가득하여 강홍립(姜弘立)이 오게 되었다기에 우리들은 서로 축하하였는데, 마침내 침략이 정지되었으니 매우 아까운 일이다. 모름지기 속히 나와 달라.」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양사복이 또 말하기를, ‘정운백이 별도로 한 통의 서찰을 써서 한윤(韓潤)에게 보내 이르기를 「만약 오랑캐를 이끌고 오면 마땅히 향도할 것이며 군사를 모아 투항하겠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수창(首倡)한 자는 한옥·정운백 등 4 명이고 한회는 출발이 임박해서야 비로소 알았으며, 최배선은 침술로 왕래하였기 때문에 정운백에게 듣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장세철이 공초하기를,
"지난달 15일에 고개를 넘어 회양부(淮陽府)에서 잤는데, 진명생이 말하기를, ‘귀양살이 중에 겨우 한 자식을 얻어 7살이 되었는데 양경홍이 오랑캐에게 투서를 하여 부자가 떨어져 있게 되었으니, 비분함을 이길 수 없다.’고 하므로, 신이 묻기를 ‘양경홍이 누구와 함께 하였는가?’ 하니, 진명생이 ‘역시 양가 성을 가진 자가 오랑캐에게 출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즉시 권하여 도사(都事)에게 보냈는데, 도사는 그때 길떠날 차비를 하고 있으면서 별다른 치계(馳啓)하겠다는 기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도사에게 ‘진명생이 고한 일은 매우 중대한 일인데 어찌 지금까지 지체하는가?’ 하였더니, 도사가 ‘금성(金城)에 도착하면 치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신과 진명생은 이날부터 길이 나뉘어졌는데, 떠날 때에 신이 지필(紙筆)을 진명생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관아가 비었을 때는 지필을 얻기가 쉽지 않을 것이니 이것으로 속히 치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도사는 3일이 넘도록 치계하지 않으므로 신이 다시 재촉하였습니다. 신이 함께 모의하지 않았음은 이에 의거하여 알 수 있을 것입이다."
하였다. 양경홍이 재차 공초하기를,
"이극규·정운백·한옥·신상연 등이 신에게 말하기를, ‘인마가 벌써 장령(長嶺)에서 기다리고 있고 오늘이 매우 좋은 날짜이니 속히 들어가라.’고 하기에, 신은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가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후 한회(韓會)가 신의 집에 와서 ‘정운백 등이 양계현에게 노자를 주어 그 흉서를 벌써 부쳐 보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신상연이 공초하기를,
"임길후(任吉後)가 신을 만나고자 하므로 신이 가서 임길후를 만났습니다. 임길후가 자호(者胡)가 갈 때에 네가 한윤(韓潤)의 소식을 물어 볼 수 있겠는가?’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파총(把摠) 황계언(黃繼彦)이 출입할 수 있으니 이 사람을 시켜 물어 봐야 할 것이다.’ 하였더니, 임길후가 ‘네 말이 그럴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임길후를 만났는데, 임길후가 ‘벌써 황계언에게 물어 보았다.’고 하고, 또 ‘한윤 아비의 백골이 경흥(慶興)에 묻혀 있는데 제사 지내러 올 수 있겠느냐는 뜻을 자호 편에 통문(通問)할 수 있겠는가?’ 하기에, 신이 ‘황계언을 시켜 통문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뒤 황계언이 신을 만나 말하기를 ‘임 영공(任令公)이 나를 시켜서 서찰을 가지고 정랑(正郞) 임흥후(任興後)에게 갖다 주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임흥후가 이번 모의를 주장한 자이므로 통서(通書) 한 통과 한윤에게 보내는 서찰 한 통을 이영남(李英南)을 시켜 자호의 행차에 부쳐 보낸 것입니다."
하였다. 정운백이 공초하기를,
"흉서를 부쳐 보낼 때에 한옥이 글을 짓고 한회가 썼습니다."
하였고, 이극규도 승복하였다. 최배선이 공초하기를,
"신은 침구(鍼灸)의 기술을 조금 아는데 정운백이 병(病)을 보아 달라고 하기에 신이 즉시 가서 만났더니, 정운백이 술을 빚고 빈객을 모아 김이일(金以一)·한옥·양경홍·정운서(鄭雲瑞) 등과 함께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때 양경홍이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우습다 삼각산아
옛임금은 지금 어디 있는가
지난번에 강도를 만나서
강화도에 가서 있지."
하였으며, 정운백이 또 하나의 노래를 불렀는데, 저들은 모두 잘 한다고 칭찬하였습니다. 그 노래에,
"여덟 칸 크고 큰 집
불강도 들어왔나
재물이야 말할 것 없고
주인이나 상치 않았나."
하였습니다. 양경홍의 일가인 양가(梁哥)라는 자가 오랑캐의 포로가 되어 자호를 따라 왕래하였으므로 이전방(李傳芳)이 신을 시켜 서찰을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이 그 까닭을 물으니, 이전방이 말하기를, ‘이번에 오랑캐들이 나올 것인데 네가 양경홍과 함께 사생(死生)을 같이할 것 같으면 너도 이익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정운백·한회·신상연·이극규·양경홍·최배선 등은 모두 승복하고 복주(伏誅)되었으며, 정운서·임길후·한옥 등은 모두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국청이 아뢰기를,
"임기지의 경우, 진명생이 말하기를 ‘임기지는 일찍이 저들을 보내 오랑캐의 사정을 탐지하게 한 일이 없다.’고 하였으며, 흉서에 대해 의논한 일에도 드러난 단서가 없습니다. 임흥후의 경우, 황계언이 서로 알지 못함을 명백하게 말하였고, 노돈무의 경우는 양경홍이 진명생을 만나자고 한다는 뜻을 전했을 뿐입니다. 양사복(梁嗣福)은 양계현의 아비로서 서찰을 전하는 일에 참여하였으니 의당 형신(刑訊)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모두 예재(睿裁)를 기다립니다."
하니, 모두 풀어 주되 사복은 절도(絶島)에 정배(定配)시키며, 진명생은 당상(堂上)의 품계에 승진시키고 또 적몰한 노비와 전택(田宅)을 주라고 명하였다.
상이 상사(賞賜)할 것을 명하여 국청에 참여했던 삼공(三公)에게는 안구마(鞍具馬) 1필씩, 해창군(海昌君) 윤방(尹昉) 이하 5명에게는 각각 숙마(熟馬) 1필 씩, 대사간 정백창(鄭百昌) 이하 7명에게는 각각 반숙마(半熟馬) 1필씩, 한림(翰林)과 주서(注書) 및 전 판의금(判義禁) 김상용(金尙容), 전 금부 도사(禁府都事) 유경소(柳景紹) 등 5명과 내관(內官) 오대방(吳大邦) 등 3명에게는 각각 아마(兒馬) 1필씩을 주었다. 금부의 별형방 도사(別刑房都事) 김홍익(金弘翼) 등 4명은 모두 승서(陞叙)시켰다.
예조가, 역당을 토벌한 경사로 진하, 진전, 반교 등의 예를 행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한옥(韓玉)의 역모 사실이 여러 적당들의 공초에 낭자하였는데, 곤장 맞다가 바로 죽어 상형(常刑)에 복죄(服罪)되지 못하였으니, 전형(典刑)을 추가로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할 것을 명하였다. 해창군(海昌君) 윤방(尹昉), 영의정 오윤겸(吳允謙)이 아뢰기를,
"한옥이 흉모(兇謀)를 주장하고 흉서를 만든 정상이 여러 역적들의 초사에 낭자하였는데 곤장을 참다가 곧바로 죽었으니 대론(臺論)이 일어나는 것은 실로 의당합니다. 그러나 승복한 뒤에 정형(正刑)하는 것이 법도인데 법도 밖의 일은 뒤폐단이 없지 않으므로 경솔히 의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억하건대, 그전에 이계선(李繼先)·민대(閔濧)를 추형(追刑)했을 때 신의 생각엔 월법(越法)이어서 곤란하다고 여겼으나 군의(群議)에 굴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준례로 삼을 수 없다는 뜻을 계진(啓陳)하였습니다. 삼가 성상의 재결을 바랍니다."
하고, 좌의정 김류(金瑬), 우의정 이정구(李廷龜)는 아뢰기를,
"추형은 옛법이 아니라서 경솔히 의논할 수는 없는 것은 뒤폐단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번 한옥이 역모를 주장하고 흉서를 만든 사실은 여러 적당들의 공초에 모두 똑같이 나왔습니다. 역적을 토벌하는 뜻이 매우 엄하니, 신 등은 감히 대론(臺論)과 다를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윤방 등의 의논을 따랐다.
11월 21일 임인
대사헌 김상헌(金尙憲)이 와서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어제 목성선(睦性善)을 논계할 일에 대한 비답을 삼각 보건대, 죄목을 억지로 정한다고 분부하셨습니다. 신이 당초에 이 일을 발언하였고 또 계사(啓辭)를 지었습니다. 그렇다면 남의 죄목을 억지로 정한 자이니 어찌 뻔뻔스럽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파척하도록 명하소서."
하고, 집의 김반(金槃), 장령 고부천(高傅川), 지평 임광(任絖) 등도 이 일을 이유로 인피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김상헌 등이 모두 인피하고 물러갔습니다. 비록 목성선의 소장(疏章)이 당초에 이공(李珙)을 위하는 사사로운 뜻이 없었다 하더라도 이공이 마침내 종사(宗社)의 대역(大逆)이 되었으니 신구(伸救)하려던 자가 어찌 무죄일 수 있겠습니까. 덮어두고 논하지 않았던 것은 특별히 관대하게 용서한 것으로서 공론(公論)이 쾌하게 여기지 않으며 청요(淸要)의 직위에 끌어 올린 데에 이르러서는 여론이 더욱 들끓었으니, 이번의 이 논핵은 실로 쟁신(諍臣)의 체모를 얻은 것으로, 어찌 억지로 죄목을 정하여 너무 심한 짓을 한 것이겠습니까. 모두 인피할 만한 혐의가 없으니 김상헌 이하를 모두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되 김상헌은 체차(遞差)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목성선(睦性善)의 소장(疏章)이 다만 이공(李珙)의 죄를 모두 봐주는 성은을 바라서 하였을 뿐이라면 그의 품은 생각을 진달한 것은 불가할 것이 없다. 그러나 소장의 어투를 보면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 겉으로는 이공을 구원하는 체하면서 속으로 그의 속셈을 이루려 하였고 거짓 충직을 칭탁하여 일세를 구함(構陷)하였는데, 포장(褒奬)을 너무 지나치게 하였다. 그러니 당시의 대평(臺評)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으며 부정(不正)을 탄핵한 것이 실로 그 죄에 합당하다. 그러나 호역(護逆)이라고까지 말한 것은 적론(的論)이 아니며, 예조의 낭관직이 설령 모람(冒濫)이었다 하더라도 청현(淸顯)의 직책이 아니니 덮어두는 것이 옳았을 것인즉, 김상헌의 논핵은 과중(過中)함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김상헌은 정직하고 절조를 지켜서 시비(是非)에 구차하지 않았으니, 논의가 비록 준엄하긴 하였으나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는가? 그런데 주상은 편견을 가지고 처리하여 대간을 대우하는 도리를 매우 잃어 별안간 체직을 명하였으며, 엄준한 사지(辭旨)를 전후로 여러 번 내렸다. 그리하여 목성선의 무리로 하여금 남을 빈정거리고 놀리게 하였으니, 임금으로서 좋아하고 미워함을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44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355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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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목성선(睦性善)의 소장(疏章)이 다만 이공(李珙)의 죄를 모두 봐주는 성은을 바라서 하였을 뿐이라면 그의 품은 생각을 진달한 것은 불가할 것이 없다. 그러나 소장의 어투를 보면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 겉으로는 이공을 구원하는 체하면서 속으로 그의 속셈을 이루려 하였고 거짓 충직을 칭탁하여 일세를 구함(構陷)하였는데, 포장(褒奬)을 너무 지나치게 하였다. 그러니 당시의 대평(臺評)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으며 부정(不正)을 탄핵한 것이 실로 그 죄에 합당하다. 그러나 호역(護逆)이라고까지 말한 것은 적론(的論)이 아니며, 예조의 낭관직이 설령 모람(冒濫)이었다 하더라도 청현(淸顯)의 직책이 아니니 덮어두는 것이 옳았을 것인즉, 김상헌의 논핵은 과중(過中)함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김상헌은 정직하고 절조를 지켜서 시비(是非)에 구차하지 않았으니, 논의가 비록 준엄하긴 하였으나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는가? 그런데 주상은 편견을 가지고 처리하여 대간을 대우하는 도리를 매우 잃어 별안간 체직을 명하였으며, 엄준한 사지(辭旨)를 전후로 여러 번 내렸다. 그리하여 목성선의 무리로 하여금 남을 빈정거리고 놀리게 하였으니, 임금으로서 좋아하고 미워함을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청 수사(公淸水使) 송영망(宋英望)이 치계하여 조수군(漕水軍)으로서 다른 역(役)에 이속된 자는 의당 본역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하였다. 비변사에게 회계하기를,
"조수군으로서 기병·보병 등 잡역에 이속된 자는 즉시 환속(還屬)시키되 수군(水軍)으로서 조군(漕軍)에 이정(移定)되었거나 조군으로서 수군에 이정된 자는 양역(兩役)이 모두 고된 역이니 환속시킬 필요가 없겠습니다. 그리고 충순위(忠順衛) 등의 유음군사(有蔭軍士)는 유음의 진위을 조사하여 환속시키는 것이 의당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아비가 출신(出身)이 되었으면 비록 조수군의 자손이라 하더라도 모두 본인을 사족(士族)으로 허통하여 본역(本役)을 면제하는 것이 전부터 사목(事目)이 있는 터이니, 환속시킬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함경도 함흥(咸興)의 보인(保人) 윤기남(尹麒男)이 젊어서 효행이 있어 모상(母喪)에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아비가 죽어서도 그와 같이 하여 묘 옆에 초옥(草屋)을 짓고 아비가 생전에 쓰던 관건(冠巾)을 걸어놓고 공경하기를 살았을 때와 같이 하였다. 이에 감사 윤의립(尹毅立)이 파격적으로 본도의 능참봉(陵參奉)에 제수하고 문려(門閭)에 정표(旌表)해 주기를 계청하였다.
함경도에 우박이 내렸는데 부령(富寧)에서 더욱 흑심한 재해를 입었고 회령(會寧)·온성(穩城) 등지도 역시 그러하였다.
11월 22일 계묘
지평 유경즙(柳景緝)이 김상헌에 대한 처치가 마땅함을 잃었다는 이유로 피혐하였다. 장령 고부천(高傅川), 집의 김반(金槃), 지평 임광(任絖) 등이 서로 잇따라 와서 피혐하면서 아뢰기를,
"목성선(睦性善)을 논열(論列)함이 김상헌과 다름이 없은데, 체직시키라는 특명이 장관(長官)에게만 미쳤으니, 파척을 명하소서."
하였다. 헌납(獻納) 채유후(蔡𥙿後)가 와서 피혐하며 아뢰기를,
"헌부의 많은 관원이 전례에 따라서 출사시키기를 청한 것은 의당합니다. 그러나 목성선의 일에는 의논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성선이 소장을 올린 것이 역적 이공(李珙)의 흉변(凶變)이 탄로되기 전이었으며, 사람이라면 공연하게 소장을 올려 호역(護逆)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자취는 주륙되어도 남음이 있겠지만 그 정상은 용서할 만합니다. 가령 목성선의 소가 지나치게 광망(狂妄)스럽고 말투가 불평스럽다고 한다면 목성선도 반드시 달갑게 죄를 받고 아무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헌부에서 다시 올린 계사(啓辭)는 지나치게 엄준함을 면치 못한 것으로, 자취를 의심하여 죄준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못됩니다. 신의 망령된 소견은 동료들과 같지 않으니 체척(遞斥)을 명하소서."
하니, 상이 대답하기를,
"너의 말이 매우 타당하다. 사퇴하지 말라."
하였다. 대사간 이목(李楘), 정언(正言) 정태화(鄭太和)가 와서 피혐하며 아뢰기를,
신 등이 헌부의 많은 관원들의 출사를 청하는 뜻으로 초(草)를 잡아 간통(簡通)하였습니다. 삼가 헌납 채유후가 피혐한 내용을 보니 신 등이 감히 옳다고 하지 못하겠습니다. 체척을 명하소서."
하고, 사간(司諫) 김남중(金南重)도 이를 이유로 인피하였다. 옥당에서 처치하기를,
"목성선이 진소(陳疏)하여 이공(李珙)을 신구한 일은 흉역(兇逆)이 드러나기 전이었으니 영호(營護)하였다는 것으로 죄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별안간 청요(淸要)의 직위에 두어 전연 하자가 없는 것처럼 하는 것도 부당합니다. 이번의 논핵(論劾)에서 말의 내용이 지나쳤다 하더라도 억지로 죄목을 정하였다고 말하면서 특별히 언사(言事)의 관원을 체척시킨 일도 아마 타당한 일이 아닌 듯합니다. 그러니 처치한 신료나 참론(參論)한 사람들이 어찌 체직시킬 만한 실수가 있겠습니까. 간원이 출사시킬 것을 청한 것은 일을 논의하는 사체에 매우 알맞은 것입니다. 각기 소견을 진달하여 구차하게 같이 하려고도 하지 않는 것도 피혐할 만한 혐의가 없는 것입니다. 청컨대 지평 유경즙, 장령 고부천, 집의 김반, 지평 임광, 헌납 채유후, 대사간 이목, 정언 정태화, 사간 김남중을 모두 출사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채유후는 병을 칭탁하고 패초(牌招)에 나가지 않았는데, 논의가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병조가 아뢰기를,
"조종조에서는 5진관(五鎭管)의 수령이 각각 영장(營將)을 겸임하였는데 난리 후에 폐지된 채 행하지 못하였으니, 의당 옛제도를 신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근래 별영장(別營將)을 너무 많이 내보내 매사에 방해만 되고 있어 그에 대한 폐단을 일일이 거론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오늘날을 위한 계책으로는 비록 영장(營將)을 모두 다 혁파할 수는 없더라도 진관(鎭管) 중에서 무신이 수령으로 되어 있는 곳은 영흥(永興)·길주(吉州)·원주(原州)·이천(伊川) 등의 준례에 의거하고, 경상도의 김해(金海)·진주(晋州) 등지의 영장은 모두 혁파하여 그 진관의 수령이 영장을 겸임하고 중군(中軍)을 거느리게 하여 군병을 조련시키도록 하는 것이 실로 사기(事機)에 합당합니다. 그리고 광주(廣州)와 수원(水原) 같은 곳의 수령은 비록 무변(武弁)은 아니지만 방어사(防禦使)를 겸임하고 있으니, 이는 조정에서 벌써 장령(將領)으로 대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영장을 겸임토록 하여 각 고을의 공억(供億)하는 폐단을 없애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천천히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하였다.
익산 군수(益山郡守) 윤전(尹烇)이 소장을 올려 시폐를 진달하였는데, 첫째로 한정(閑丁)을 찾아내어 궐액(闕額)을 보충할 것과 둘째로 미수(未收)된 군포(軍布)를 추징하여 군기(軍器)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이 해조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는데, 병조가 복계하기를,
"어린 아이를 정군(定軍)하는 폐단은 매우 측은한 일이니 궐액을 보충하는 일은 이치로 따져 우선 늦추어야 합니다. 이미 정역(定役)된 자는 다시 실제의 나이를 조사하여 연령이 미달이면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 정역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여정(餘丁)에게 포(布)를 거두는 일은 비국에서 주장하는 일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의처(議處)토록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실제의 나이를 조사하는 일도 묘당에 물어보라."
하였다.
11월 24일 을사
사간 김남중(金南重), 정언 정태화(鄭太和)가 와서 피혐하며 아뢰기를,
"헌부에서 목성선(睦性善)을 논핵한 일은 실로 공공의 의논이었는데, 헌납 채유후(蔡𥙿後)는 쓸데없는 말로 이론(異論)을 제기하여 ‘목성선의 상소는 말투가 불평스러운 듯한데, 헌부의 계사는 과도함을 면치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헌부가 재차 아뢴 논핵 역시 불가한 것이 없는데 채유휴가 성상의 비답이 이미 내려진 뒤에 성의(聖意)를 엿보아 살펴 그에 따라서 영합(迎合)하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이에 ‘많은 관원을 전례에 따라서 출사시키기를 청한 것은 의당하다.’고 하였고 ‘목성선의 일은 혹 다시 의논할 만한 점이 있다.’고 하였으며, 또 ‘그 자취는 주륙하여도 남음이 있겠지만…….’이라고 하여, 그 저의는 모두 헌부를 공격하는 데 있었으면서도 역시 출사시키기를 청한 잘못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 자취는 주륙하여도 남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실이야 비록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청요(淸要)의 직위에 또한 편안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헌부의 논핵은 당초에 곧바로 목성선의 죄를 들먹인 것이 아니고 청요의 직위에는 합당치 않다는 것만 말하여 공의(公議)는 끝내 민멸될 수 없음을 보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채유후가 논한 것을 살펴보면 목성선을 비록 청요의 직위에 두더라도 한 점의 하자가 없으며 공의(公議)에도 합치된다는 것입니다. 일을 논하는 체통은 하나가 옳으면 하나는 그른 것인데, 옥당(玉堂)이 처치한 내용을 보면 이미 ‘간원이 헌부의 출사를 청한 것은 매우 일을 논하는 체통에 알맞다.’고 하였고, 또 ‘구차스레 같이 하려고 하지 않았으니 역시 피혐할 만한 혐의가 없다.’고 하였으니, 말이 매우 구차스럽고 분별하는 단서가 없습니다. 동료의 이론(異論)에 잘못이 없다면 신 등의 논사(論事)는 잘못임을 면키 어려우니, 파척을 명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헌부의 논핵은 공심(公心)이 아닌 것 같은데 너희들은 늘 공의(公議)라고 하니, 몹시 형편없다."
하였다. 대사간 이목, 지평 유경즙 등도 모두 사피하였고, 헌납 채유휴는 명패(命牌)로 궐하에 불려와서 말하기를, "거듭 동료들의 배척을 당하여 감히 명을 받들 수 없다."고 하고, 소장(疏章)을 올리고 나갔다. 정원이 아뢰기를,
"대간들은 속히 처치하라는 하교로서 분부하였더니, 헌부의 하리(下吏)가 와서 말하기를 ‘집의 김반(金槃), 장령 고부천(高傅川), 지평 임광(任絖) 등이 모두 정사(呈辭)하였는데, 정사한 것을 비록 도로 내준다 하더라도 이미 정사하였으니 결단코 처치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모두 체차시키고 옥당으로 하여금 간원의 일을 처치하게 하라."
하였다. 부교리 조경(趙絅) 등이 상소하기를,
"신은 식견이 어두워 어저께 처치할 적에 능히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고 양사(兩司)의 많은 관원을 모두 출사시킬 것을 청하였으니, 간원에서 신 등을 구차하다고 말한 것은 의당합니다. 어찌 감히 처치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너희들은 조금의 실수도 없으니 안심하고 처치하라."
하였다. 옥당이 차자를 올리기를,
"전 대사헌 김상헌이 목성선을 논핵한 내용은 과연 엄준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장관이 체직을 당하였으니 자리를 함께 했던 자들이 어찌 편안히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신 등의 처음 뜻은 실로 이 때문이었는데 처치할 적에 논의가 한결같지 않아 모두 출사시키기를 청함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간원의 모든 신료들이 재차 피혐한 내용을 보니, 오히려 너무 준엄한 이론을 고수하며, 구차스레 함께 하려 하지 않은 동료를 공격하고 있으니, 모두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이 아닌 듯합니다. 김남중·정태화·이목·유경즙을 모두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현영(李顯英)을 대사간으로, 김광현(金光炫)을 집의로, 심동귀(沈東龜)·조경(趙絅)을 지평으로, 조정호(趙廷虎)를 사간으로, 신천익(愼天翊)·이상질(李尙質)을 정언으로, 유성증(兪省曾)을 장령으로 삼았다.
11월 25일 병오
사간 조정호가 와서 피혐하며 아뢰기를,
"지난번에 옥당의 관원으로 있으면서 양사(兩司)를 처치할 때에 많은 동료들이 헌부의 관원을 의당 체직시켜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는 장관을 특별히 체직시킨 것도 매우 미안한 일인데 그 나머지를 모두 체직시킴은 부당한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이에 마침내 모두 출사시키를 청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젯밤 옥당에서 대간들을 처치한 내용을 보니 소위 ‘논의가 한결같지 않아 모두 출사하기를 청함을 면치 못하였다.’고 한 것은 바로 신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신이 출사시키기를 청했던 자들은 벌써 다 체직당하였는데 신은 다시 언관(言官)의 직위에 있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편안히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체척을 명하소서."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사간 조정호, 헌납 채유후가 인혐하여 물러났습니다. 목성선의 소장은 장황스런 말을 늘어놓아 역적 이공(李珙)에 대한 한 가지 일 뿐만 아니라 경위(傾危)스런 말과 부정(不靖)한 뜻이 그 속에 은연중에 숨어 있습니다. 헌부의 계사는 그 내용이 비록 지나쳤으나 파직시킬 것만을 청했을 뿐이니 실로 허물된 것이 없는 바, 준례에 따라서 출사시키기를 청한 것은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쓸데없는 말로 감히 이의(異議)를 제기하였으니, 사사로이 비호한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부름을 받고도 나아가지 않은 것은 벌써 모피(謀避)의 법규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처음엔 동참하였다가 뒤에 다른 말을 한 것은 그 책임이 돌아갈 곳이 있기 마련이니, 별로 피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채유후는 체직시키고 조정호는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26일 정미
집의 김광현이 와서 피혐하여 아뢰기를,
"옥당의 궐직(闕直)한 것이 겨우 며칠이 지났는데 관직을 옮겼다는 핑계로 뻔뻔스럽게 규정(糾正)의 지위에 낯을 들어낼 수 없습니다. 체척을 명하소서."
하고, 사간 조정호가 와서 피혐하여 아뢰기를,
"신이 삼가 본원에서 처치한 내용을 보니 ‘부름을 받고도 나아가지 않은 것은 응체(應遞)의 법규가 성립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채유후는 이 때문에 체직되고 신은 출사한다면 군명(君命)은 하나인데 처치가 다른 것입니다. 신이 어찌 낯뜨겁게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지평 조경이 와서 피혐하여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에 옥당에 있으면서 양사의 일을 처치할 적에 하나의 일을 두고 앞에서는 출사하기를 청하였다가 뒤에는 체직시키기를 청하였습니다. 이는 능히 뜻을 세우지 못하고 특별한 지조도 없는 것이므로 신은 날로 남의 말이 있기 전에 스스로 부끄러워할 일입니다. 그러나 음양으로 오르내리며 반복하여 말한 것에 대해서는 신에게도 할 말이 있습니다. 처음에 처치할 적에 신의 소견을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신이 말한 것이 시행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신이 이견(異見)을 내세워 참석하지 않은 줄을 모른 것은 아니나 사실은 이견을 세울 것도 못되었던 것입니다. 어저께 간원이 처치한 내용 중에 ‘처음엔 동참했다가 뒤에 가서 다른 말을 한 것은 그 책임이 돌아갈 곳이 있기 마련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신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신이 남과 함께 일을 같이 하면서 눈을 돌려 배반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신은 본래 무상(無狀)하여 조정에 서서 바른 일을 행하지 못하여 남의 교묘한 무고를 당하였으니, 결코 낯뜨거워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대사헌 박동선이 와서 피혐하여 아뢰기를,
"전 대사헌 김상헌이 목성선을 논핵한 것은 말의 내용이 과하긴 하였으나 본뜻은 일을 논하는 사체에 해로울 것이 없는 것으로, 상께서 특별히 엄지(嚴旨)를 내리셨다는 이유로 갑자기 전론(前論)을 정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로 연계(連啓)하고자 반나절을 논란하였습니다. 그러나 소요스런 근심이 있을까 염려되었고 바삐 국청(鞫廳)에 갈 일로 해서 마침내 동료들에게 강요되어 정계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신은 처사가 어두워 당초의 소견을 고수하지 못하였으니 구차스레 무릅쓰고 있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하고, 정언 이상질(李尙質)이 와서 피혐하여 아뢰기를,
"대개 일을 논할 즈음에는 소견이 있다면 억지로 구차하게 동참할 필요는 없는 것이며, 또 일이 이미 결정된 뒤에는 물러가서 뒷말을 해서도 안 됩니다. 지난해 목성선의 소장은 단연코 공정한 사람으로서 할 짓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역적 이공(李珙)을 처치했던 일은 실로 국가의 불행한 일이었는데, 성상께서 본전(保全)시키려던 뜻이나 사변에 대처하는 도리는 지극했다고 할 만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목성선은 감히 죄목이 분명치 못하다고 하여 허물을 조정에 돌렸으니, 그 정상이 매우 미워할 만합니다. 그중에 위태로운 말씨나 이랬다 저랬다 하는 태도가 여러 군데였습니다. 조정이 조용치 못하고 당론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이같이 일벌이기 좋아하는 무리들의 소치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 가서 전일의 허물을 버려두고 조금 관직을 높여주는 것이 하나의 방법은 되겠습니다. 그러나 청반(淸班)에 끌어다 둠은 불가하다고 했던 것은 바로 경상(經常)의 논이었습니다. 지난번에 올린 헌부의 논계(論啓)가 포용력에 결함이 있다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으나, 억지로 죄명을 씌웠다고 한다면 반드시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헌부에서 청한 처벌이 파직에 그쳤으니, 호역(護逆)의 법으로 가하려고 하지 않았음은 저절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간의 말 내용이 과중함이 있었음은 사실이나, 이는 언어의 착오에 불과한 것으로, 장관을 특별히 체직시킨 것은 지나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동참했던 관원들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간원에서 출사시키기를 청한 일은 실로 불가할 것이 없으며, 이론을 제기한 것은 호당(護黨)으로 귀결됨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옥당에서 이일을 처치할 때 조정시키기에 힘써 모두 출사시킬 것을 청하여 진정시키려는 계책으로 삼았으니 매우 아름다운 뜻입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동료들이 처음에는 다른 의견이 있었으나 토론을 반복하여 좋은 쪽으로 귀일되어 차자를 올려 출사시키기를 청하였다면, 이는 이미 결정된 의논입니다. 그뒤 옥당에서 대간들의 체직을 청하여 앞뒤의 내용이 달라졌으나 사간 조정호(趙廷虎)는 별로 실수한 일이 없었으므로 신 등이 처치하는 내용 속에 이 뜻을 간략하게 언급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지평 조경이 피혐한 내용을 보니, 말 이외의 뜻을 만들어 내어 교묘히 무고하였다고까지 말하였으니, 신의 실수는 이에 이르러 더욱 큰 것입니다. 체척을 명하소서."
하고, 대사간 이현영이 와서 피혐하여 아뢰기를,
"전 헌납 채유후와 사간 조정호가 부름을 받고도 나가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옥당의 사체는 대간과는 다르기 마련이어서 부름을 받고 나가지 않은 것으로 체차(遞差)되는 규례는 일찍이 없었고, 관적을 옮기기 이전의 일도 추론(追論)할 것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드디어 한 명은 체직시키게 하고 한 명은 출사시키게 한 불공정한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신이 국청(鞫廳)에 있으면서 시끄러운 사이에서 말의 내용이 소루하여 동료들로 하여금 재차 피혐하기에 이르게 한 것이니, 신의 실수가 많습니다.
헌부에서 목성선을 논핵한 것을 그 자취를 따라 말한다면 말투를 과중하게 한 죄를 면할 수 없으나, 그 정상을 용서하여 죄를 준 것이 파직하고 서용하지 않는 것에 불과할 뿐이니, 처음부터 일을 논하는 사체에 손상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일 장관의 논계는 오로지 풍재(風裁)를 부지하고 관사(官邪)를 규찰함에 있었는데도 특별히 체직시킬 것을 명하였으니,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못 됩니다. 이에 영합(迎合)하는 논란이 개미떼처럼 분분히 일어나 당초의 말을 바꾸어 허물을 동료들에게 돌리기에 이르렀으니, 공론(公論)을 주장하는 지위에서 이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신이 조정호의 처음 피혐에 대해 처치할 때에 이런 뜻을 대략 언급하였는데, 지평 조경은 내용 이외에 뜻을 끄집어 내어 쓸데없는 말로 인혐하면서 ‘음양으로 오르내리고 말을 반복한다.’고 하여 남이 생각치 못한 것을 자기 혼자 알게 된 것인 양 교묘하게 비방하여 신에게까지 미쳤으니, 신이 어찌 감히 그대로 편안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김남중(金南重)은 어사(御史)에 합당치 않으니 개차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상이 김남중에게 어사로서 행장을 꾸리라고 명하였는데, 목성선을 논핵한 일로 상의 뜻을 거슬렸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11월 27일 무신
이조 판서 정경세(鄭經世)가 차자를 올려 본직과 겸대하고 있는 문형(文衡)의 직임을 사직하니, 상이 효유하여 그대로 출사하게 하였다. 그뒤에 재차 상소하여 사직을 간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홍문관에서 차자를 올려 집의 김광현, 사간 조정호, 지평 조경, 대사헌 박동선, 대사간 이현영, 정언 이상질을 모두 체직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이번 헌부의 계사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유감을 품고 한 논핵을 공의(公議)라고 말하고 중정(中正)한 말을 영합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임금을 무시하고 다만 당여(黨與)만 안 것이다. 임금의 말이 도리에 어긋나지 않았다면, 아무리 순순히 따르는 사람을 영합한다고 지목하더라도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또한 바르지 못한 논의는 남이 듣기에 해괴한 점이 있는데 자신들의 마음속으로 불가한 것인 줄 알면서도 억지로 공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 더운 날에 김매는 일보다 더 괴롭게 여겨진다.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임금을 속이는 잘못과 역적을 국문하는 중대함을 알지 못했으니, 실로 매우 놀라운 일이다. 그 중에 지평 조경은 조금도 실수한 일이 없으니 체차하지 말라."
하였다.
이귀(李貴)를 판의금부사로, 조익(趙翼)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11월 29일 경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사옹원이 아뢰기를,
"병란이 있던 초기에 진상(進上)을 감축시켰던 별봉진(別封進)은 이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청어(靑魚)와 대구어(大口魚)의 선장(膳狀)을 모두 도로 내려보내니, 매우 미안스럽습니다. 통영(統營)에서 진상한 청어는 받아들이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통제사와 수사(水使)가 영을 어기고 봉진을 하였으니 매우 부당한 일이다. 그들을 추고하라."
하였다.
공청 감사 남이웅(南以雄)이 치계하기를,
"도내 각 고을의 절호(絶戶)에 대한 적곡(糶穀)을 탕감해 준 뒤로 회계도안(會計都案)에는 등재되어 있으나 실제의 재고는 매우 적습니다. 심지어 직산(稷山) 같은 곳은 기전(畿甸)과 양남(兩南)을 통괄하는 곳인데 재고의 실제 수량은 겨우 1백 30여 석 뿐입니다. 만약 급한 사변이라도 있으면 각도의 군마(軍馬)가 모두 이곳에 모일 것인데, 반드시 어쩔줄 모를 근심이 있을 것입니다. 본 고을에서 전세(田稅)로 거두는 미곡을 1, 2년간 상납하지 말게 하여 군량에 보충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호조가 아뢰기를,
"근년에는 연이어 흉년을 만나 세입(稅入)이 감축된데다가 앞으로 풍정(豊呈)의 잔치도 있어 소용될 미포(米布)가 매우 번다하고 백관의 녹봉도 이을 길이 없습니다. 경창(京倉)의 탕갈은 외방보다 더 급한데 도신(道臣)은 도내의 사정만 보고 이렇게 치계하였으니, 시행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정온(鄭蘊)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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