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 계축
시강원이 아뢰기를,
"왕세자가 하령(下令)하기를,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사부(師傅)와 빈객에게 문의하였더니, 모두 ‘방심(放心)을 거두게 하는 공부에는 이 잠(箴)보다 절실한 것이 없으니 인대(引對)에서나 혹은 야대(夜對)할 때에 진강하는 것이 의당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상이 판중추 윤방(尹昉), 영의정 오윤겸(吳允謙), 좌의정 김류(金瑬), 우의정 이정구(李廷龜) 및 의금부 당상과 양사 장관들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지난번 양경홍(梁景鴻) 옥사의 정상은 어떠하였는가?"
하니, 오윤겸이 답하기를,
"대개 옥사란 실로 알기가 쉽지 않은데, 이번의 역옥(逆獄)은 매우 명백하였습니다."
하고, 이정구는 아뢰기를,
"여러 적도들이 오랑캐에게 통서(通書)했던 사실이 의심없이 드러났으니 의당 이런 때에는 그 역모 사실을 역력히 들어 오랑캐에게 서찰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속히 선유 어사(宣諭御史)를 파견하여 변방 백성들의 의구심을 풀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애초에 오랑캐에게 물은 일이 없이 지금 비로소 드러났다면 말해 주어도 될 것이지마는, 전에 벌써 여러 번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는데 지금 그 역모 사실을 통지한다면 아마도 도망하는 자를 불러들이는 근심이 있게 될 것이다."
하니, 윤방과 이귀도 모두 서찰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어사는 파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왕조(先王朝)에서도 제주(濟州) 사람 길운절(吉雲節)이 역모하였을 때에 선유 어사 김상헌(金尙憲)을 보내어 무마하여 안정시켰습니다. 그리고 이번의 어사는 암행을 겸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통서(通書)하는 일은 그만둘 수 없더라도 사신을 보낼 필요없이 춘신사(春信使)의 일행에 부쳐보내는 것이 의당하겠다. 무마하여 안정시키는 일도 어사를 파견할 필요없이 우선 하유(下諭)부터 하는 것이 의당할 것 같다. 그러나 만약 어사를 보낸다면 누가 좋겠는가?"
하니, 오윤겸이 아뢰기를,
"조경(趙絅)에게 일전에 행장을 꾸리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조정호가 보낼 만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가장 적합한지를 물으니, 삼공(三公)이 모두 대답하기를,
"조경은 나이 젊고 일에 경험이 없으며 조정호가 처사에 신중하고 치밀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암행 어사를 겸대시켜 보내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12월 4일 갑인
조정호에게 명하여 함경도에 가서 선유(宣諭)를 겸하여 행하게 하였다. 유서(諭書)에,
"대저 듣건대 착한 일을 하는 자는 하늘이 복으로 보답하고 악한 일을 하는 자는 하늘이 화(禍)로서 보답한다고 하였다. 이 이치는 매우 명백하여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으니, 어찌 고금이나 원근으로 차이가 있겠는가. 지난번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 등이 혼조(昏朝)를 광란시키고 국인(國人)을 선동하여, 모후(母后)를 유폐시키고 강상(綱常)을 두절시켜서 우리 나라를 불효의 나라로 만들었다. 그런 때에 이익을 즐기고 화란을 좋아하는 무리들이 위를 범하고 기강을 위반하는 논의를 멋대로 하여 대성(臺省)에 있으면서 잇따라 소장을 올리기도 하고, 혹은 초야에 있으면서 거듭하여 항소를 올려 흉언 패설(凶言悖說)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들은 귀천이나 대소를 논할 것 없이 대개 반역을 도모한 대역(大逆)들이었다. 다행히 종사(宗社)가 묵묵히 도움에 힘입어 대비(大妃)께서 반정(反正)하셨다. 흉의(兇議)에 관계되었던 사람들은 모두 대벽(大辟)의 형벌을 받을 자들이었으나 국가에서는 호생(好生)의 덕을 베풀어 가볍게 처벌하는 은전을 보였다. 이에 수종(首從)을 분별하여 괴수들만 주벌하고 그 나머지 도당들은 먼 변방에 나누어 정배(定配)시켜 마음을 고치고 죄를 깨달아서 그곳의 백성이 되어주길 바랐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경원(慶源)에 귀양살던 한옥(韓玉)·양경홍(梁景鴻)·신상연(申尙淵)·이극규(李克揆)·한회(韓會)·정운백(鄭雲白) 등이 화심(禍心)을 버리지 못하고 음흉한 꾀를 부려 토병(土兵)들을 꾀었다. 그리하여 함께 흉서를 작성하여 몰래 가까운 오랑캐를 불러들여 먼저 북로(北路)를 범하고 서울로 쳐들어 오려 하였다. 그들이 먹은 마음이나 부린 꾀가 이백 년의 종사를 위태롭게 할 뻔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천리의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하려 하였으니, 너희 관북(關北)의 사녀(士女)들이 먼저 잔혹스런 해를 받았을 것이다. 사람으로 악한 짓을 범함이 어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다행히 이일에 참여했던 진명생(陳命生)이 역모를 드러내어 상변(上變)하여 수범(首犯)들이 차례대로 실토하였으므로 벌써 몇 사람을 능지 처참하였다. 하늘은 악을 용서하지 않고 천리(天理)는 음흉한 자에게 화를 내림이 어찌 소소하게 밝지 않겠는가.
내가 생각건대, 관북은 실로 열조(列祖)께서 탄생한 고향이며 국조(國朝)가 창업한 터전이다. 그래서 나는 멀리 떨어진 궁벽한 곳으로 보지 않고 늘 서울이나 기전(畿甸)과 같이 여겼다. 그래서 반정한 뒤에 비록 선정(善政)은 없었으나 인휼(仁恤)하기에 힘써 앞뒤로 존무(存撫)했던 뜻을 사민(士民)은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너희 사민들은 순박하고 의리를 숭상하여 힘을 다해 변방을 지켜 왔다. 이에 이괄(李适)의 난리나 오랑캐의 변란에도 부르튼 발을 싸매고 정벌에 참여하여 현저한 공적을 세웠으며, 한 사람의 사졸도 미혹되어 역모를 범한 자가 없었다. 이것이 어찌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친 것일 뿐이겠는가. 실로 너희 부자(父子), 부부(夫婦)가 대대로 보전하여 살려는 착한 뜻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불행히도 토병 양사복(梁嗣福) 등이 적신에게 선동되어 스스로 패역(悖逆)에 빠졌으니, 아,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가 실형(失刑)하여 흉당에 오염되어서 그렇게 된 것이며, 너희 사민들은 모두 관계가 없는 일이다. 한두 사람을 잡아다 조사한 외에는 다시 더 문책하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도 의심하는 일 없이 오직 천도(天道)는 속일 수 없음과 국은(國恩)은 잊을 수 없다는 것만 알라. 그리하여 힘써 충의를 세워 강역(疆域)을 보전한다면 위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제 시신(侍臣)을 보내어 나의 뜻을 유시하고 아울러 관리들의 탐오와 군민(軍民)들의 폐단을 살피게 하여 새로운 은택을 베풀고 중심(衆心)을 안정케 하노니, 너희들은 잘 알지어다."
하여다. 【 지제교(知製敎) 이식(李植)이 지은 글이다.】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357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어문학-문학(文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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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6일 병진
경상도 안동(安東) 사람 김대현(金大賢)의 아들인 김봉조(金奉祖)·김연조(金延祖)·김영조(金榮祖)·김응조(金應祖)·김숭조(金崇祖) 등 5명이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봉조가 상장(上章)하여 법전에 의거하여 그의 아비의 관작을 추증(追贈)해 줄 것을 청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그의 부모가 모두 죽었으니 의당 추증하고 사제(賜祭)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좌부승지 정기광(鄭基廣)이 아뢰기를,
"들으니 현방(玄方)이 돌아갈 때에 줄였던 공무목(公貿木)을 복구하여 주기로 하였다고 합니다. 신은 그 상세한 것을 알지 못하나, 신이 일찍이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있을 때 여러 문서를 상고하여 보았더니, 신해년087) 은 곧 약조(約條)를 맺은 뒤 왜선(倭船)이 처음 도착했던 해로, 세견선(歲遣船) 제2선 이하부터 제17선에 이르기까지 공무목으로 준 합계는 77동(同)이었으며, 계축년에 준 것은 36동 뿐이었습니다. 이는 대개 처음이라 정식(定式)이 없고 동(銅)과 납을 무역한 수량에 따라 발급(發給)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임자년 이창정(李昌庭)이 부사로 되었을 때에 대·중·소선에 대한 규례를 정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계축년에 주었던 것은 정규(定規)에 의한 것임이 명백한데 이번 현방이 말한 것은 86동에 이릅니다. 그렇다면 신해년의 숫자보다 많은데 어디에 근거하여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신해년으로 기준을 삼는다면 감해진 것은 8동으로 비록 사소한 것 같지만 누적되면 그 숫자가 매우 많습니다. 제2 특송선(特送船)과 제3 특송선에 대해 당초에 주던 것은 1백 31동이었는데, 임술년에 이르러 각각 19동을 더해 주던 것을 그대로 존속시키는 것은 부당합니다. 그러니 비록 세견선에 대해 감해진 것을 준다고 하더라도 특송선에 더해진 것을 제할 것 같으면 그 득실이 서로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이번에 역관(譯官)이 가니, 묘당으로 하여금 특별히 더 지휘하여 개유시켜 정식(定式)을 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참작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비국이 복계하기를,
"정기광이 신해년의 숫자로 정규(定規)로 삼으려고 한 것은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조정에서 저들의 청에 따라 벌써 복구시키도록 허락하였는데 지금 다시 원수(元數)를 추가로 감한다면 저들이 유감을 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도리에 있어서도 앞뒤가 다른 말을 하여 기모(譏侮)를 불러들여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당초의 약조 중에 대·중·소선에 대한 공무역의 숫자에 이미 정규가 없어 이렇게 다른 말이 있게 된 것입니다. 제1 특송선에 이르러서는 으레 1백 50동을 주었고 다음 배는 1백 30동을 주다가 그후에 20동을 더해 주었으며 신해년 이후로도 이 숫자대로 주었습니다. 그리고 셋째 배는 모두 1백 50동을 주었습니다. 이 한 가지 일로서 다시 서로 다툴 수는 없으니 지금 이후로는 이것으로 정급(定給)해 주고 길이 항식을 삼게 하면 뒷날 더 증가되는 폐단은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그 당시 이런 곡절을 알지 못하여 명백하게 개유하지 못하였던 것이 매우 한탄스럽다."
하였다.
상이 금부에 하교하기를,
"북도로부터 이배(移配)시키는 죄인을 제주(濟州)의 세 고을에는 분배하지 말라."
하였는데, 금부가 아뢰기를,
"이배시키는 죄인을 동래(東萊)·부산(釜山)과 가까운 곳에는 둘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전후로 정배(定配)시킨 죄인들도 왜관(倭館)과 가까운 곳에 살게 할 수 없으니, 동래와 2일정 안에 있는 자는 모두 다른 곳으로 이배시켜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7일 정사
상이 하교하였다.
"재신(宰臣) 가운데 나이 많은 사람은 해조로 하여금 작년의 전례대로 세찬(歲饌)과 옷감을 제급하여 노인을 우대하는 나의 뜻을 표하라."
행 도승지 조익(趙翼)이 소장을 올려 겸 대사성을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8일 무오
태백성이 나타났다.
12월 9일 기미
호조가 아뢰기를,
"전후의 동래 부사(東萊府使)들이 공무목을 축낸 숫자가 매우 많습니다. 이는 장오(贓汚)에 관계되는 일이니 유사(攸司)를 시켜 처리하게 한 뒤에 법률을 적용하여 추징해야 할 것입니다. 그중 문서에 불명확하게 등재되어 있는 것으로서 8백여 동(同)의 많은 숫자가 각각 그 당시의 부사 이름 밑에 쓰여져 있는데, 곧 황여일(黃汝一) 8백 4동 44필(匹), 윤민일(尹民逸) 12동 22필, 윤굉(尹宖) 1동 44필입니다. 그런데 황여일·윤굉은 벌써 죽었으므로 구문(究問)할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문서가 불명확하다는 이유로 모두 죄를 씻어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본도로 하여금 다시 조사하도록 하였던 것은 그 실상을 알아보라고 한 의도였는데 사계(査啓)한 것조차 불명확하니 본조에서 어디에 근거하여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본도로 하여금 명백하게 조사하여 계문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12일 임술
전라 감사 송상인(宋象仁)이 배사하니, 상이 불러서 보고, 묻기를,
"경은 일찍이 남원(南原)의 수령을 지냈으니 남방의 일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남원의 일만 알 뿐입니다. 본부에 세 가지 폐단이 있으니, 곧 살인, 저주(咀呪), 겁간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살인의 폐단은 그 유래가 오래임을 알았으나 전후로 수령이 된 자들이 뿌리뽑지 못했는데 경만은 능히 다스렸다. 그래서 경을 방백으로 삼은 것이니 모쪼록 그 뿌리를 아주 없애도록 하라."
하고, 표피(豹皮)와 호초(胡椒)를 하사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인신으로서 역모을 꾀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입니다. 그러니 그런 일을 듣게 되면 의당 발고(發告)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도 회령 판관(會寧判官) 최경희(崔景禧)는 신상연(申尙淵)의 불측한 말을 듣고 죄인 권의(權誼)에게는 전하면서 감사에게는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즉시 발고하지 않은 죄를 캐묻지 않을 수 없으니 최경희와 권의를 함께 잡아다 국문하여 정죄하소서."
하였다. 이튿날 또 헌부에서 최경희의 국문을 청하였는데, 여러 번 아뢴 뒤에야 최경희는 잡아다 국문하고 권의는 덮어두고 문초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선왕(先王) 후궁(後宮)의 의복이 난리 뒤부터 매우 박해졌다고 하니, 해조로 하여금 양급(量給)케 하여 우대하는 뜻을 보이라."
12월 13일 계해
평안 감사 김시양(金時讓)이 마을에서 칭예를 받는 자들을 순방하고 몇 사람을 계문하였는데, 상이 모두 관직을 제수할 것을 명하였다.
도적 금줄세(琴注叱世) 등이 장수라고 자칭하고 살인하며 겁략하였는데, 붙잡아서 목베었다.
12월 14일 갑자
상이 상번(上番)하는 군사로서 옷이 엷은 자들에게 유의(襦衣)를 나누어 주라고 명하였다.
군기시(軍器寺)가 아뢰기를,
"본시는 각도의 공물을 작미(作米)하거나 작포(作布)하기도 하고 혹은 권감(權減)된 것이 많기 때문에 전칠(全漆)·중폭지(中幅紙)·근교(筋膠) 등의 물건이 모두 부족합니다. 작미한 고을은 용이하게 변통할 수 없겠으나, 경상도의 공물로서 갑자년부터 권감된 것을 해조로 하여금 상량하여 복설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15일 을축
회답서계(回答書契)를 차왜(差倭) 귤성공(橘成供)에게 부쳐 보내면서 새 도서(圖書)를 가지고 가라는 뜻으로 말하니, 대답하였다.
"우리가 나올 때에 도주(島主)가 처음부터 언급하지도 않았으니 결코 도서를 받아 갈 수 없습니다. 만약 차역(差譯)을 보낸다면 우리가 함께 태우고 돌아가겠습니다."
형조 판서 심집(沈諿)이 소장을 올려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걸군(乞郡)하였는데, 이조가 아뢰기를,
"육경(六卿)을 수령으로 내보낸 전례는 없으나 정리(情理)가 절박하니 허락할 만합니다."
하니, 안변 부사(安邊府使)에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12월 17일 정묘
달이 헌원성(軒轅星) 셋째 별을 범하였다.
12월 18일 무진
태백성이 나타났다.
12월 19일 기사
태백성이 나타났다. 달이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갔다.
이조가 아뢰기를,
"승복한 죄인 최배선(崔拜善)은 평안도의 중화(中和) 사람입니다. 현감은 율문에 의거하여 의당 파직될 것입니다마는 본읍은 벌써 강호(降號)되어 현(縣)으로 되었으므로 이번에는 혁파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고을은 양서(兩西)의 경계점에 있어 만약 수령을 없앤다면 사명(使命)들을 응접할 수가 없습니다.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대신들이 혁파할 수 없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21일 신미
태백성이 나타났다.
비국이 아뢰기를,
"국가가 설치한 잠상(潛商)에 대한 금령이 매우 엄한데도 죽음을 무릅쓰고 법을 어깁니다. 그러나 만약 죄를 승복한 자를 일체로 행형(行刑)한다면 당초의 수창(首倡)만 벤다는 뜻에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의당 본도로 하여금 수창자를 조사하여 계문하게 한 뒤에 처단하도록 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공청 감사 남이웅(南以雄)이 계문하여 해당 장정의 10분의 1을 뽑아 속오군(束伍軍)으로 정하는 폐단을 진달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10분의 1을 속오군에 편성시키라는 영(令)은 실로 부득이한 일입니다. 지금 말한 바 43읍(邑)은 모두 호패총수(戶牌摠數) 중에 들어 있는데 만약 이 숫자를 덜어내고 또 10분의 1을 더 뽑아낸다면 명목은 10분의 1이나 사실은 6,7명 중에서 1명을 초정하는 것이니, 온 도(道)가 반드시 소요하게 될 형세입니다. 이 계사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간원이 아뢰기를,
"3조(三曹)의 낭관은 실로 문음(門蔭) 중에서 가릴대로 가려서 뽑았었는데 근래에는 용잡(冗雜)한 자로 구차스레 충원된 자가 많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태거시키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에 이조에서 한 사람을 태거시켰는데, 상이 하교하기를,
"음관(蔭官)을 많이 쓰므로 사족(士族) 중에는 업무(業武)하는 자가 없다. 대론(臺論)이 일어난 것은 고규(故規)에 어긋난다는 것만으로 말한 것이 아닌데도 해조에서는 한 사람만을 태거시켜 책임을 모면하려고 하였으니 매우 그릇된 일이다. 다시 태거시키고 책임을 모면하려고 하였으니 매우 그릇된 일이다. 다시 태거시키고 전번의 하교대로 문무(文武)를 번갈아 차출하라."
하였다.
12월 22일 임신
태백성이 나타났다.
호조가 아뢰기를,
"궐내 각처에 사부가(斜付價)를 제급(題給)하는 일은, 일찍이 각사(各司)의 전복(典僕)으로 파송하였었는데, 그 뒤 팔도에 대동법을 실시함으로 인하여 미포(米布)로 제급한다는 사목(事目)이 창립되었습니다. 그런데 대동법은 이미 혁파되었는데도 미포로 제급하는 잘못된 규례만 그대로 남아 있으니, 이것은 실로 계속하기 어려운 방법입니다. 그러나 을축년 이후로 시행된 지 오래되었으니 경비가 넉넉치 못하다는 이유로 다시 고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다만 지난해 한재(旱災)로 인해 긴요치 않은 곳에 약간 명을 재감(裁減)시켰는데 명년에도 그대로 재감된 숫자를 쓰고 우선 복설시키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응당 제급해야 할 곳은 작년의 전례대로 병조와 반씩 나눠서 제급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병조가 아뢰기를,
"호조에서 급가(給價)하는 것은 곧 유래되어 오는 항식(恒式)이니 지난해를 준례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23일 계유
황해 감사 이경용(李景容)이 치계하기를,
"일찍이 육군과 수군 및 도감(都監)의 포보(砲保)를 사목에 의거하여 충정(充定)하라는 뜻으로 열읍에 신칙하였습니다. 그러나 병란 뒤 겨우 안집(安集)된 백성들이 한정(閑丁)을 찾아낸다는 말을 듣고 다른 곳으로 유산하므로 사정(査定)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무진년의 세초(歲抄)는 우선 정지시켜 두고 기사년조의 세초를 서둘러 사정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그중 수군은 도망했거나 물고된 자가 태반이어서 빈 장부만 남아 있을 뿐인데, 입방(立防)을 재촉하므로 그 피해가 이웃과 일족에게 미쳐 잇따라 계속 유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다가 나이 80인데도 대정(代定)시킬 수 없어서 아직도 노제(老除)가 안 된자도 많이 있습니다. 이에 방어사(防禦使)에게 현재 남아 있는 숫자를 뽑아 도안(都案)을 고쳐 작성하여 해조에 올려 보내게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병조가 회계하기를,
"수군의 액수가 매우 허술하나 다시 조사하기는 어려운 형편입니다. 우선 장계에 의거하여 새 도안에 따라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체부(體府)가 아뢰기를,
"서로(西路)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일은 미리 계획해야 하는데, 서민(西民)으로 아직 본토로 돌아오지 않은 자가 많으니, 명년 농사철까지는 일일이 돌아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청천강(淸川江) 이북의 선천(宣川)의 검산성(劍山城)과 용천(龍川)의 용골성(龍骨城)은 모두 꼭 지켜야 할 곳인데, 그 성 아래에는 모두 넓은 들이 있어 둔전을 넓게 설치할 만하니, 농사지으면서 지키게 하면 실로 양쪽이 다 편리하겠습니다. 또 들으니 유민(流民)으로서 해서(海西)에 있는 자들이 그대로 가을보리를 뿌린 자가 있다고 하니, 가을에 가서 들여 보내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 하교하기를,
"유민들은 모두 일시에 쇄환(刷還)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종부시(宗簿寺)가 아뢰기를,
"조종조에는 종실(宗室)을 교도하는 법규가 잘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종학 교수(宗學敎授)를 설립하여 명관(名官)으로 겸임시켜 교회(敎誨)의 직임을 전장(專掌)하게 하고 종부시는 규검(糾檢)의 책임을 전장하게 하였습니다. 직장(直長)은 혹 유일(遺逸)을 발탁하여 제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부 이상은 각각 전도(前導)하는 군졸이 있고 종실들이 길에서 만나게 되면 모두 피마(避馬)하였는데, 이것은 그 직임을 소중히 여기고 체면을 존중해서입니다.
임진년088) 이후로 국가에 일이 많아 이 법이 폐지되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 종학(宗學)을 다시 설치할 수는 없습니다만, 본시의 관원은 옛 규례대로 택차하여 종학의 직임을 겸직하게 하고 그 근만(勤慢)을 살피고 전최(殿最)를 엄중히 한다면 종실 중에서도 반드시 즐겨 따르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예조에서도 본시의 계사대로 시행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26일 병자
선혜청(宣惠廳)이 아뢰기를,
"전세조(田稅條)의 공물을 본처에서 받아들여 사주인(私主人)에게 주려고 하였으나, 다만 흉년을 당했을 때에는 모든 일을 옛날대로 하는 것이 마땅하고 변경시켜서는 안 되겠기에 명년을 기다리기를 청하였었습니다. 금년은 의당 거행해야 할 것인데 모든 일은 반드시 처음에 신중히 해야 하고 민정의 편부(便否)를 익히 알고서야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 조익(趙翼)이 각사의 주인을 불러 모아 그 편리하다는 자와 불편하다는 자가 반반이었습니다. 이는 종전에 각읍에 주던 것이 다과(多寡)가 같지 않아 한 물건의 값이 피차가 현격하게 달랐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편리하다는 자를 따라 행하면 불편하다는 자가 원망하고 불편하다는 자를 따라 행하지 않으면 편리하다는 자가 실망할 것입니다. 신 등의 생각엔 편리하다는 자들은 본청에 와서 납부하게 하고 본청에서 분급하며, 불편하다는 자들은 그 전대로 각사에 스스로 납부토록 하는 것이 의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일이 구차스러우니 우선은 구례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이비(吏批)가 아뢰기를,
"국가의 정사(政事)는 수령을 선택하는 것보다 더 큰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천거된 약간의 인원 중에서 수령을 구하고 있으니, 인재를 구하려다가 어진이가 진출할 길을 막을 뿐입니다. 더구나 1년에 두 번 있는 도목 정사(都目政事)는 각사(各司)의 참하관(參下官)들의 근무기간을 계산하여 승천(陞遷)시켜주는 대정(大政)인데, 전부터 감찰(監察)과 주부(主簿) 중에서 수령에 합당한 자를 수령에 의차(擬差)한 뒤라야 직장(直長) 이하의 관원들이 차례대로 승천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천거된 자가 없는 것에 구애되어 수령을 의차하지 않는다면 많은 참하관들이 승천할 길이 매우 좁게 되어 적체되는 근심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천거의 유무에 구애됨이 없이 널리 구하여 인재 얻기에 힘쓰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상이 하교하기를,
"이요(李㴭)를 인평 대군(麟坪大君)으로 삼으라."
하였는데, 곧 상의 셋째 아드님이다.
12월 27일 정축
동부승지 권확(權鑊)이 아뢰기를,
"금부의 당직 도사(當直都事)가 와서 봉서(封書)를 올리면서 ‘직방(直房)에 갑자기 돌을 던지는 소리가 들려 놀라서 보니 곧 이 봉서였는데 감히 덮어 둘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사관(史官)과 함께 뜯어 보니 말투가 흉역(凶逆)에 관계되었습니다.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태워 버리라고 명하였다.
상이 이비(吏批)에 하교하였다.
"옥당의 관원은 차례대로 천전(遷轉)시키라. 그리고 목장흠(睦長欽)은 전에 장흥 부사(長興府使)가 되었을 때에 법을 범하고 외람되이 가솔을 거느리고 간 잘못이 있었는데 어째서 늘 수령에 의망하는가?"
12월 28일 무인
태백성이 나타났다.
12월 29일 기묘
호조가 아뢰기를,
"올봄에는 풍정례를 행하여야 하고 또 대내(大內)를 수리할 일도 있으므로 소용될 잡물이 매우 많습니다. 그런데 지난해에 흉년을 만났고 금년에도 흉년이 들었으니 만약 외방에 분정한다면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들이 결코 지탱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만약 터럭만큼의 민폐라도 있게 되면 자전의 성대한 뜻을 체득하는 일이 못됩니다. 그러므로 호조에서 여러 방면으로 힘써 마련하여 태반은 준비되었습니다만, 그 나머지 몇 가지 물품은 모두 마련하기가 어려우니 진휼청(賑恤聽)의 목면 30여 동(同)을 갖다 쓰게 하소서. 그리고 각 고을에는 별도로 분정한 일이 없으니 연례로 바치는 공물은 제때에 납부하도록 독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뜻으로 각도에 행회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되 진휼청의 목면은 갖다 쓸 수 없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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