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신사
상이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였다.
예조가 삼공의 의견으로 아뢰기를,
"예로부터 난적(亂賊)의 무리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이번 흉역(兇逆)의 참혹한 정상은 나라 안에서 역모를 꾀한 적들보다 훨씬 더 심한 점이 있으니, 이는 실로 고금 천하에 아직까지 없었던 큰 변고입니다. 주벌(誅罰)하는 전형(典刑)을 이미 시행했다고는 하지만, 중외(中外)에 반포하여 그 죄악을 밝히지 않는다면 신령과 백성의 울분을 시원히 씻어낼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종묘에 이미 고하였으니, 교서를 반포하는 일을 더욱 그만둘 수 없습니다. 옛 관례에 따라 속히 해조로 하여금 날을 가려 거행케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2일 임오
정원이 아뢰기를,
"조금 전에 어떤 사람이 개양문(開陽門) 밖에 와서 문 안에 있는 군사를 급히 불러 한 통의 봉함된 언문 편지를 건네주며 말하기를 ‘이것은 승지의 집에서 보낸 편지인데,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러니 바로 속히 전해 들이라.’ 하였는데, 군졸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가지고 왔습니다. 하인이 겉봉을 보니 승지의 집에서 온 편지가 아니었으며 언문으로 겉봉에 ‘여섯 승지는 뜯어보라.’고 되어 있어 고변서(告變書)인 듯싶기에 하리(下吏)가 즉시 사람을 시켜 추적하게 하였으나 간 곳을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신들이 곧장 주서(注書) 및 한림(翰林)과 뜯어서 보니 언문으로 썼는데 내용이 지극히 흉악하고 참혹했으며, 끝에 어영군(御營軍) 이기위(李起渭)라고 성명을 기록하였습니다. 어두운 밤에 남몰래 올린 것을 보면 흉악한 자의 소행이 분명한데,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태워버리라고 명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말세에 인심의 착하지 못함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대체로 투서하는 변고는 실상 혼조(昏朝)의 여풍(餘風)에서 나온 것인데, 과거의 여얼(餘孼)들이 남몰래 흉계를 이루어 보려고 한 것이 아닌지 어찌 알겠는가. 상께서 태워버리라고 하신 명 역시 못된 짓을 꾸미는 자들로 하여금 저절로 풀이 죽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태백산사고본】 22책 22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359면
【분류】사법-치안(治安) / 역사-편사(編史)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말세에 인심의 착하지 못함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대체로 투서하는 변고는 실상 혼조(昏朝)의 여풍(餘風)에서 나온 것인데, 과거의 여얼(餘孼)들이 남몰래 흉계를 이루어 보려고 한 것이 아닌지 어찌 알겠는가. 상께서 태워버리라고 하신 명 역시 못된 짓을 꾸미는 자들로 하여금 저절로 풀이 죽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1월 3일 계미
예조가 아뢰기를,
"갑자년001) 에 변란002) 이 있은 이후에 대신과 호조·예조·양사가 의논드려 각릉(各陵)의 오향(五享)003) 을 없앴는데, 올해부터는 다시 거행해야 하겠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원소(園所)에 오향을 거행하는 일은 새로 시작하는 일이라서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는데, 행 판부사 윤방(尹昉), 영의정 오윤겸(吳允謙), 좌의정 김류(金瑬), 우의정 이정구(李廷龜)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제사에 관한 예가 본래 번잡한 듯했으므로 변란을 겪은 이후에 의논드리기를 ‘태묘(太廟)에서 이미 오향을 거행하는 이상 능침에서 중복하여 대제(大祭)를 지낼 필요는 없다.’고 하여 품계(稟啓)해서 줄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당시의 형세가 궁하여 경비를 줄일 목적에서 나온 것만도 아니었고 또 어느 해까지라고 한정하는 말도 없었습니다. 지금 만일 다시 제향을 올린다면, 해조가 예전대로 다시 의논하여 품처(稟處)해야 마땅할 듯합니다. 원소에 제향하는 예에 있어서는 사중삭(四仲朔)에 사묘(私廟)에서 행하고 오명일(五名日)에 원소에서 행하도록 이미 계하(啓下)되어 준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흉년 때문에 잠정적으로 없앴던 것도 아니고 또 기한이 지나면 다시 지내려고 한 것도 아니니, 가볍게 의논드리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홍서봉(洪瑞鳳)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1월 5일 을유
정원이 아뢰기를,
"대신이 의논드리기를 ‘태묘에서 일단 오향을 거행하는 이상 능침에서 중복해 올릴 필요는 없다. 그러나 지금 만일 다시 거행한다면 해조가 강정(講定)하여 품처(稟處)해야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해조가 미리 강정을 못했습니다. 오늘이 춘향 대제(春享大祭)인데, 능침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는 조상들이 하신 대로 따르는 것이 옳다."
하고, 이어 전향(傳香)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있어 더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이 제례인데, 그 중에서도 능침의 오향은 더욱 중요한 제향이다. 그런데 두어 해 사이에 금방 없앴다가 복구했다가 하는가 하면 해조도 갑작스럽게 품계하는 바람에 비례(非禮)인 예를 행하게 하였다. 예가 번거로워지면 어지러워지는 법이니, 탄식을 금치 못하겠다.
【태백산사고본】 22책 22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359면
【분류】왕실-궁관(宮官) / 왕실-의식(儀式)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있어 더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이 제례인데, 그 중에서도 능침의 오향은 더욱 중요한 제향이다. 그런데 두어 해 사이에 금방 없앴다가 복구했다가 하는가 하면 해조도 갑작스럽게 품계하는 바람에 비례(非禮)인 예를 행하게 하였다. 예가 번거로워지면 어지러워지는 법이니, 탄식을 금치 못하겠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월 6일 병술
병조가 아뢰기를,
"칼을 잘 쓰는 것이 단병전(短兵戰)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일본과 절강(浙江)은 이것으로써 천하의 강병(强兵)을 만들었습니다. 선조조(宣祖朝)에는 당상들도 숙달시켰는데, 이는 참으로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오래도록 폐지되었다가 우리 성조(聖朝)에 이르러 다시 밝혀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겨우 1년이 지났는데 선전관(宣傳官) 이하 금군(禁軍)과 각 아문의 군관, 유청 제색(有廳諸色)004) 들 중에서 기예를 숙달한 자가 제법 많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만일 과정을 정해 시험을 보이는 방안을 세운다면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권장하거나 징계하는 일이 없으면 힘써 노력하게 할 수 없어 장차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그 가운데 우등(優等)으로 입격(入格)한 자들은 전례대로 등급을 나누어 시상하거나 혹 근무 일수를 가산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초등자(超等者)는 4일을 가산하고, 상상(上上)은 3일을 가산하고, 상중(上中)은 2일을 가산하고, 상하(上下)는 1일을 가산하고, 중상(中上) 이하 중중(中中) 이상은 상도 없지만 벌도 없고, 하하(下下)나 세(勢)005) 를 실수한 자는 5일을 삭사(削仕)하고, 순찬(順贊)006) 이하와 한량(閑良)은 초등자를 뽑아 금군에 배치하도록 함으로써 격려하고 권장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병조가 아뢰기를,
"근년 이래로 역졸(驛卒)들이 본역(本役)을 피하려고 하여 거의 대부분이 일이 수월한 곳으로 투속(投屬)한 결과 역로(驛路)가 장차 끊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어영청과 훈련 도감 등에 투속한 자들은 모두 법전(法典)에 따라 본역(本驛)으로 다시 소속시키고, 그 나머지 각 고을의 초군(哨軍)으로 투속한 자들은 그 도(道)의 감사로 하여금 사실대로 샅샅이 조사하여 수령을 추고하게 하고, 만일 알면서도 숨겨주거나 빨리 내주지 않는 자들이 있으면 법에 따라 죄를 다스림으로써 결딴난 역(驛)이 되살아 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어영청과 훈련 도감에 투속한 무리들은 본청과 본 도감으로 하여금 무예의 숙달여부와 소속된 기간을 조사하여 처리케 하라. 그리고 각 고을의 초군은 도감에 입속(入屬)한 자들과는 다르니, 그대로 두도록 하라."
하였다.
특명으로 이서(李曙)를 공조 판서로 삼았다.
1월 7일 정해
병조가 아뢰기를,
"역졸(驛卒)은 다른 일을 하는 것보다 배나 고생합니다. 오래도록 길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데, 1개 참(站)에 2, 3인 밖에 없으며 아예 없는 곳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고을에서 보졸(保卒)로 있던 자들을 새로 군적(軍籍)이 편성되면서 빼앗겼으므로 남은 자들이 그 고초를 이겨내지 못한 나머지 도감이나 어영청으로 투속한 경우가 한둘만이 아닙니다. 이런 길이 한번 열리면 결딴난 역이 절대로 되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대체로 수군(水軍)과 역졸은 대대로 그 일을 물려받는데,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고초인가를 이에 근거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또 소속을 영장(營將)에게 옮겨 기예를 조련토록 하고 있으니, 한 몸에 두 가지 일을 해야 할 뿐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위급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역졸은 본디 역졸로서의 일이 있고 초군은 초군대로 군역(軍役)이 있게 되어 형세상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행하기 어려우니, 옛날 관례에 따라 역(驛)의 일만 전담케 하는 것이 온당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교서(敎書)를 중외에 반포하였다.
"왕은 말하노라, 천지에 음험한 요기(妖氣)가 서려 혹 흉악한 무리가 나라에서 준동하려 하였으나 때마침 종묘의 영험함을 인하여 역적의 괴수를 고가(藁街)에서 처형하였다. 응당 법대로 이미 모두 형벌을 시행한 이상 중외에 크게 알리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아, 난적(亂賊)이 어느 시대고 없었겠는가마는 패역(悖逆)하기로는 이들 무리가 가장 흉포하였다. 그리하여 먼 변방으로 유배를 보내고 이 땅에서 같이 살도록 덕을 베풀지 않았으니, 이는 그들의 모의가 일조일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하늘을 쏘려는 음모를 오래 전부터 준비해 왔기 때문이다. 양계현(梁繼賢)과 결탁하고 심복으로 삼아 격문을 은밀히 내통시켰고 한윤(韓潤)을 길 안내자로 결속시켜 장차 요충을 차지하려 하였다. 또 요동(遼東)을 평정할 날짜를 못박았다고 일컫고는 허락한 이웃을 끌어들여 함께 침략하려 하였다. 이미 망극하게 참언한 이상 어찌 일벌백계의 응징을 내리지 않겠는가. 귀신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끝내는 같은 패거리가 고발을 하였다. 음모와 비밀스런 계략들을 이미 형틀 아래 모두 자백하여 난리를 주모한 자의 목과 요망한 자의 허리가 도끼날 아래 잘렸다. 이 일은 고달픈 백성이 잠깐 소요을 일으킨 종류가 아니요 그야말로 국가의 안위가 매인 것이었다. 이에 이미 지난 12월 30일에 역적의 괴수 양경홍(梁景鴻) 등이 역모를 꾸미다 복주(伏誅)된 사실을 갖추어 종묘에 고하였기에 백성들에게 널리 고해서 모두 알도록 하는 바이다. 아, 임금에게 무례한 짓을 한 것만 보아도 여론은 절치부심하며 필시 울분에 찰 것이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야 어찌 이런 일을 좋아서 하는 것이겠는가. 그들의 집을 웅덩이로 만들 정도로 나라의 법이 실로 엄하기 때문이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월 8일 무자
군적(軍籍)이 완성되었다. 이에 주관한 당상과 낭청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리고, 최명길(崔鳴吉)은 가자(加資)하였다.
1월 10일 경인
상이 유신(儒臣)을 소대(召對)하여 《서전(書傳)》을 강하였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양사가 양사복(梁嗣福)007) 을 처형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대신에게 의논하여 처치하라."
하였다. 대신이 모두 의논드리기를,
"양사복을 절도(絶島)에 정배한 것은 법대로 처리한 것이 아니니, 대론(臺論)이 법대로 할 것을 논집하고 있는 이상 감히 다른 의논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11일 신묘
달이 동정(東井)에 들어갔다.
1월 14일 갑오
호인(胡人) 10여 명이 의주(義州)에 나와 묻기를,
"중남(仲男)이 들어 갔을 때 신사(信使)를 보냈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였다. 이는 대체로 한(汗)이 군사를 일으켜 관중(關中)에 들어가 심양(瀋陽)이 텅비었으므로 뒤에서 쳐들어오지 않을까 염려하여 정탐하러 온 것이었다.
1월 15일 을미
정원이 아뢰기를,
"호변(胡變)이 있은 뒤로 이명한(李明漢)이 아뢴 말에 따라 전문(篆文)을 삭서(朔書)008) 하는 등의 일을 정파(停罷)하여 지금까지 복구하지 않고 있으니, 권장하는 일에 크게 흠이 되는 듯싶습니다. 올해부터는 의당 다시 거듭 밝히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완성군(完城君) 최명길(崔鳴吉)이 차자를 올려 상으로 내린 가자(加資)를 사양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은 일찍이 호패법(號牌法)을 입안하여 실시할 때에 외람되이 유사 당상(有司堂上)의 직책을 제수받았습니다. 그러나 지혜와 생각이 원대하지 못해 하는 일마다 잘못되었기 때문에 뭇사람들의 원망이 벌떼처럼 일어나 큰 법령을 중간에 폐기시키게 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업신여김을 받는 한편 임금에게 비난이 돌아가도록 하였으니, 일을 그르친 죄를 생각하면 만 번 죽어도 남음이 있다 하겠습니다.
군적(軍籍)을 정리한 한 가지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호패법이 이미 폐기된 이후라서 온당하게 처리하기 곤란하다는 것은 어리석거나 지혜로운 자를 막론하고 다 아는 상황이었는데, 어찌할 수 없이 구차하게 마무리짓기는 하였으나 눈 앞에 벌어지는 폐단을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형벌을 면한 것만도 신에게는 다행이라 할 것입니다. 외람한 작상(爵賞)은 어찌 과분한 바람이 아니겠습니까. 상으로 가자하신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부드러운 말로 답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1월 16일 병신
충훈부가 아뢰기를,
"모든 공신의 적장자(嫡長子)들에게 부록(付祿)한 것이야말로 조종조의 고사(故事)로서 그 의도가 우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호변(胡變)으로 인하여 비국이 나라의 재원(財源)이 고갈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충의위(忠義衛)에 있는 중자(衆子)나 생존한 공신의 적장자들은 모두 녹을 견감하고 구공신의 적장자들만 견감치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이는 대체로 생존한 공신의 적장자는 아비가 이미 녹을 받고 있으므로 그것으로 생활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생존 여부를 구별하여 후하게 하고 박하게 하는 것은 사리로 따져볼 때 매우 합당치 않은 듯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과거에 줄였던 것들을 모두 복구시키고 있으니, 공신의 적장자들은 아비의 생존 여부를 논하지 말고 모두 녹을 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17일 정유
상이 편전의 월랑(月廊)에 거둥하여 유신(儒臣)을 소대(召對)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검토관 한흥일(韓興一)이 아뢰었다.
"요즈음 보건대 제수(除授)하는 즈음에 ‘뒷날의 정사(政事)에서 차출하라.’는 분부가 있곤 하는데, 이는 곧 혼조(昏朝) 때에 있던 일입니다. 비록 말씀으로만 하시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잘못을 다시 답습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월 18일 무술
사옹원이 아뢰기를,
"웅어[葦魚]를 잡는 어호(漁戶)에게는 급복(給復)해 주었는데, 지난번 호변(胡變)과 흉년을 만나 모두 재감(裁減)하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공(上供)하는 물품을 모두 이미 옛날대로 복구하였으니, 어부 20호(戶)에게 도로 급복해 주어 예전대로 봉진(封進)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19일 기해
김자점(金自點)을 판윤으로 삼았다. 김자점은 성미가 모질고 사나웠으며 일처리도 엄하고 급했으므로 이서(吏胥)들이 그를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였는데, 경조(京兆)의 일이 자못 질서가 잡혔다.
겸 예조 판서 김상용(金尙容)이 상소하여 70세에 치사(致仕)하는 예경(禮經)의 규정대로 조정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70세에 치사하는 것은 곧 태평 시대의 일로서 지금 논의할 성질이 못 되니, 경은 부디 이런 마음을 두지 말라."
달이 토성(土星)을 범하였다.
1월 20일 경자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양암(亮闇) 제도는 옛 제도와는 다르지만 그 예는 있었다. 조종조에서 비록 1개월을 1일로 환산하긴 하였지만 그래도 이 제도를 폐기하지는 않았다."
하니, 검토관 한흥일(韓興一)이 아뢰기를,
"선왕이 제정한 예가 지극하기는 하나 후세에서 행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폐조(廢朝)가 성복(成服) 전에 청정(聽政)하였는데, 옛 사람이 들었다면 필시 한심해 했을 것이다."
하니, 부제학 이경여(李敬輿)가 아뢰기를,
"그 때 최유원(崔有源)이 예조 판서를 논핵(論劾)하였습니다.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상고해 보건대 세종(世宗)과 명종(明宗)은 천성적으로 효성이 지극하신 분이었는데, 양암하는 제도를 쓰지는 않으셨어도 삼대(三代) 이후로 두 성주(聖主)만큼 훌륭한 분은 없었습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요·순을 본받고자 하거든 조종조를 본받으라.’ 하였습니다. 성상께서 한가한 시간에 늘 《국조보감》을 열람하시면 반드시 도움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경여가 또 아뢰기를,
"조종조에서는 경연에 자주 나오시어 조강(朝講)과 주강(晝講)을 거르지 않으심으로써 어진 선비를 접하는 시간이 많고 궁중에 머무는 시간은 적었습니다. 지금은 성학(聖學)이 고명하시어 배우지 않으셔도 법도에 맞으십니다. 따라서 신 같은 강관(講官)이야 겨우 음훈(音訓)이나 알 뿐이니, 어떻게 제대로 성학에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직 이후로 날씨가 몹시 추웠으므로 경연에 임어하시다가 옥체를 상할까 염려되어 으레 여는 경연도 감히 청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날씨가 차츰 포근해질 것이니, 경연을 열어 학문을 강론하는 일을 쉬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더 염두에 두소서."
하고, 한흥일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즉위하신 초기에는 날마다 경연에 거둥하시어 피곤한 줄 모르고 도를 논하셨으므로 당시에 모두가 성상께서 부지런히 학문을 닦는 것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그런데 신은 성상께서 시종일관 한결같이 하지 못하실까 염려됩니다."
하고, 이경여가 아뢰기를,
"신은 4년 만에 처음 입시(入侍)하였으니, 먼저 백성들의 고충을 아뢸까 합니다. 대체로 호패법(號牌法)은 혁파되었다는 이름만 있을 뿐 실제로는 혁파되지 않고 있으니, 백성들이 어떻게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호패에 등록된 숫자에서 10분의 1을 속오군(束伍軍)으로 뽑도록 하였는데, 조정에서 이 명을 내리자 민간이 더욱 심하게 소요스러워져 선발해 보려고 애를 써도 효과를 얻기가 힘든 상황입니다. 당초에 10분의 1을 뽑도록 한 것도 편의를 감안해서 한 방안이었는데, 군사를 뽑을 즈음에 10분의 1을 뽑도록 한 조정의 뜻을 제대로 체득한 자가 드물어 혹 3분의 1을 뽑기도 하고 혹 4분의 1을 뽑기도 하므로 백성의 원망이 극에 달해 있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해 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영남에서 이미 행했던 일이기 때문에 그 방법대로 시행한 것이다. 근래에 병조의 정사가 해이되었기 때문에 본래 거기에 맞춰 편의대로 10분의 1만 뽑도록 하였던 것인데, 그보다 적게 뽑아도 해이하게 될 걱정은 여전히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은 수년 동안 방치해 둔 일인데, 하루아침에 시행하려 하니 과연 그런 폐단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경여가 또 각 고을의 포흠(逋欠)에 대한 폐단을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일이 성사되느냐의 여부는 적임자를 얻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을 뿐이다. 어찌 단지 빈말만 하며 마냥 소득이 없는 짓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포흠에 대한 일은 참으로 큰 폐단이니, 차츰 거두어 들이는 일을 해조에서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경여가 아뢰기를,
"사전(祀典)에 관한 예야말로 가볍게 의논하기가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제사는 번거롭게 해서는 안 되니 번거롭게 하면 공경하는 일이 되지 못합니다. 선조를 받드는 의리는 지극히 엄하고 중한 것인데, 예가 번거로우면 어지러워진다는 것은 예로부터 있어온 가르침입니다. 지난번에 예조가 진계(陳啓)하여 대신이 의논을 드렸는데, 상께서는 그만 ‘상제(喪制)는 선조를 따르는 법이다.’고 분부하시며 치지도외하였습니다. 이런 주장을 한 자들이 어찌 물력(物力)이 달린다고 해서 그런 의논을 감히 드린 것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를 가지고 말한다면 잦고 중첩되는 듯하나 조종조에서 이미 오래도록 행해 왔으니, 지금 번거롭다고 하여 폐지하기는 어렵다."
하였다. 이경여가 아뢰기를,
"한(漢)나라 때 원묘(原廟)009) 를 세운 것은 후덕스러운 일이라 이를 만한데도 후세에 논하는 사람들은 선조를 받드는 도리를 모른 것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마음에 내키는 대로 곧장 행하는 것은 조종을 존경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옛사람이 ‘예아닌 예는 행하지 말라.’ 하였는데, 이것이야말로 나라의 큰일이니, 속히 개정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논해 정하기 전에 일찍이 이런 말을 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이미 결정된 뒤이니 중지시키기 어렵다."
하였다. 이경여가 또 언로(言路)가 넓지 못한 폐단을 말하니, 상이 이르기를,
"옥당은 삼사(三司)의 하나로서 임금의 덕을 도와 인도하는 것이 곧 그 책임이다. 어떤 일을 내가 잘못했는지 모르겠으나 어디 한번 말해 보라."
하였다. 이경여가 아뢰기를,
"일을 행하고 조처하시는 가운데 나타나고 드러나는 일이라면 신이 어찌 감히 직언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성상께서 스스로 살펴 보실 때 마음가짐과 행한 일 가운데 천리(天理)와 어긋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이 곧 허물인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조정 신하들이 일을 논할 때 너그럽게 받아들이면서 아름답게 장려하는 것이 곧 제왕의 훌륭한 덕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명께서는 자신을 굽혀 남을 따르는 도량이 상당히 부족합니다. 그리하여 언론이 약간 직선적이기만 하면 일찍이 너그럽게 용납하신 적이 없었는데, 심지어는 취사(取捨)하실 즈음에 있어서까지 또한 그런 태도를 면치 못하셨습니다. 만일 정성된 뜻이 서로 부합되어 한 집안 사람이나 부자(父子) 사이와 같은 친한 느낌이 생긴다면 누가 기꺼이 선한 일로 말해 드리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옛사람이 이르기를, ‘붕당(朋黨)이라는 두 글자가 나라를 망칠 수 있다.’고 했으니, 당대의 군주들로서는 깊이 미워하고 통렬하게 끊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붕당을 제거해야 하겠다는 선입견을 갖게 되면 취우치게 되는 결과를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마음을 비우고 이치를 밝게 살펴 뜻이 안정되면 밝은 거울에 곱고 추한 것이 그대로 비치듯 저절로 구별될 것입니다. 만약 인물을 등용할 때마다 형적을 구하려 들면 사람들이 필시 당목(黨目)에 구애되어 각자 불안한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참으로 옳기는 하다. 그러나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명철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요(堯)임금도 어렵게 여겼던 일이다. 혹 이미 시험해 본 사람이라면 그 현부(賢否)를 알 수 있겠지만, 어떻게 사람마다 알아볼 수 있겠는가. 오직 전조(銓曹)에서 색목(色目)에 구애받지 말고 반드시 현부를 기준으로 취사(取舍)하기만 하면 될 뿐이다. 그리고 논핵(論劾)하는 일을 말하건대, 자기와 다른 자는 그 말이 옳아도 반드시 엉뚱한 말로 덮어 씌우면서 죄까지 입게 하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승복하지 않는 것이다. 논핵할 때에 반드시 그 죄에 합당한 벌을 내리고, 인물을 등용할 적에도 파벌을 막론하고 오직 인물의 현부에 따라 일일이 취사한다면, 그 누가 승복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나의 뜻인데도 뭇 신하들은 내가 붕당을 치우치게 미워한다고 생각하니, 이는 나의 뜻을 모르는 것이다."
하였다. 이경여가 아뢰기를,
"상의 마음이 이미 공정하시다면 폐단을 개혁하는 것이 뭐가 어렵겠습니까. 붕당을 제거하는 요체는 오직 뭇 신하들을 단속하여 서로의 마음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 뒤에야 거의 치우치는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만약 말씀이나 표정에 드러내시게 되면 도리어 갈라서게 하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단을 막지 않으면 정도가 유행되지 않는다는 옛말에 있지 않은가. 그 폐단을 막으려고만 한다면 어찌 그 방법이 없겠는가."
하였다. 이경여가 또 아뢰기를,
"나라의 형세는 결딴이 나 있고 백성들의 삶은 곤궁에 빠져 있으며, 천재와 시변이 중첩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홀로 한가히 계실 때에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보살피는 정성을 더욱 극진히 하시어 재앙을 사라지게 하는 방도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재이(災異)가 일어나는 것이 어찌 이상하겠는가. 윗사람이 제대로 덕을 닦지 못하고 그 다음으로 뭇 신하들이 화목하지 못해 의논이 날로 어긋나고 있는데, 조정이 이 모양이니 외방의 일도 따라서 알 수 있다. 하늘이 반드시 우리 백성들을 통해서 보고 듣는 이상 어떻게 오늘의 재앙이 없을 수 있겠는가. 우선 한 가지 일만 거론해 볼까 한다. 지난번 목성선(睦性善)의 일에 대해 논하는 자들이 그저 망령된 논의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했으면 됐을텐데 그를 역적으로 논하려고까지 하였다. 그에게 이미 그런 마음이 없었고 보면 어떻게 그가 구원하려고 한 죄를 먼저 논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이경여가 아뢰기를,
"당초 목성선의 상소가 왕실의 지친(至親)을 구하려고 한 것이었다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기찰(譏察)에 관한 일을 말하건대, 이는 대체로 훈신들이 나라를 지나치게 근심한 나머지 나온 것이었는데, 일을 맡은 자들이 대부분 무뢰배였기 때문에 그 사이에 혹 개인 감정을 개입시켜 얽어 날조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훈신들이 사주한 것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대답하지 않았다.
1월 22일 임인
정원이 아뢰기를,
"금부 도사가 와서 말하기를 ‘지난번 익명서를 정원에 올리자 상께서 불태워버리라고 명하셨다. 그런데 밤에 또 본부에 투서하였는데, 그 내용이 더없이 흉악하기에 정원에 품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전일 금부 당상을 인견할 때 병판(兵判) 이귀(李貴)가 ‘흉악하게 투서하는 변괴는 임가(任哥)가 죽고 난 뒤로는 절대 없을 것이다.’고 하기에 내가 어폐가 없지 않을 것을 염려했었다. 그런데 그 뒤로 투서의 변고가 잇따라 일어났으니, 이는 실로 이귀가 실언한 소치이다. 지금은 또 법을 어기고 와서 품했으니, 판의금 이귀를 추고하고 흉서는 들이지 말라."
하였다.
병조 판서 이귀의 상소로 인해 정원에 하교하였다.
"흉서의 내용을 글로 만들어 상소까지 하다니 지극히 부당하다. 이 상소는 되돌려 주고 이 뒤로는 이같은 상소를 절대 받아들이지 말라."
금부가 아뢰기를,
"조종조에서 원찬(遠竄), 부처(付處), 도삼년(徒三年) 이하의 죄인들에 대해 각각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였는데, 도삼년 이하는 《대명률(大明律)》에 의거하여 혹 조지서(造紙署)나 와서(瓦署)에 정배하여 그 기한만큼 노역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난리 이후로는 이 법이 영영 폐기되어 비록 도년(徒年)일지라도 원근을 구분하지 않고 마음대로 정배하고 있는데, 대부분 변방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이귀가 여러 차례 탑전(榻前)에서 이러한 뜻을 극력 간쟁하였습니다만 대간에게 논박을 입어 자기의 견해를 고수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부터 도삼년 이하의 죄는 법전대로 정배하리까?"
하니, 답하기를,
"와서 등지에 정배하는 것이 옛규례였다 하더라도 합당치 않은 듯하다."
하였다.
1월 23일 계묘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특진관 이서(李曙)가 아뢰기를,
"국가가 남쪽과 북쪽으로 변란을 대비해야 하는데도 해마다 수한(水旱)과 기근이 들어 성지(城池)의 보수를 까마득히 잊고 있으니 신은 안타깝기만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보수하는 일이라도 있다면 백성들이 원망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아무 일도 없는데 민심이 왜 불안해 하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이서가 아뢰기를,
"합당한 시기에 일을 시키면 일도 쉽게 진척될 것이고 백성들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지경연 정경세(鄭經世)가 아뢰기를,
"오늘날 민간이 소요스러운 것은 모두가 속오군(束伍軍)을 더 뽑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더 뽑도록 한 것은 괜히 군사의 숫자만 더 늘이려고 해서가 아니다. 전에 뽑을 때 다소간 고르게 하지 못해 소현(小縣)의 경우 부역이 많은데 속오군도 많았으며 대읍(大邑)은 부역이 수월할 뿐 아니라 속오군도 적게 뽑았던 까닭에, 10분의 1을 취하는 법을 만들어 그 역을 고르게 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충청도는 더욱 소요스럽기 짝이 없는데, 이는 세력가들 중에 불편하게 여기는 자가 많기 때문인가, 아니면 수령이 제대로 시행치 못해서 나온 결과인가?"
하였다. 이서가 아뢰기를,
"갑자년010) 부터 속오군을 더 뽑는 법을 시행해 왔는데, 지금 본도에서 군사를 뽑은 문서를 보았더니, 사천(私賤)은 아주 적고 대부분이 정군(正軍)의 보인(保人)으로 채워져 있어 일이 매우 정당함을 잃고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이서가 아뢰기를,
"잡색군(雜色軍)들이 혹 2, 3인씩 보인(保人)을 두고 있는데, 위급한 사태가 벌어져도 이들 무리는 편히 앉아만 있으니, 결코 부역을 균등히 하려는 조정의 뜻이 아닙니다. 의당 정군(正軍)의 보인들은 면제시키고 대신 이들 무리를 속오군에 편입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묘당에서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지난 가을에 이미 이조의 낭관들을 파직시키고 또 그들이 천거한 사람들은 등용치 말라는 분부가 있었는데, 이는 화평하게 하시는 성인의 행동이 아닌 듯합니다. 낭관의 추천을 반드시 낭관(郞官)에게 하도록 한 이유는, 실제로 당상들은 벼슬도 높고 나이도 많아 연소배들과는 서로 어울리지 못하므로 적합한 인물인지의 여부를 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조(先朝) 때도 당상들에게 파격적으로 의망(擬望)하여 천거하게 한 분부가 있었다."
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이는 계미년011) 때의 일로서 이이(李珥)가 사림의 영수로서, 낭관이 추천하는 규정을 혁파하도록 청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하교했는지의 여부는 신이 자세히 모르겠습니다만 그 일은 정지되어 시행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왕께서 실제로 하교하셨다."
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당상에게 의망하여 천거하게 하는 것은 잘못된 규정일 뿐만이 아닙니다. 천거된 사람들 모두가 적합한 인물들인데, 어찌 파직된 낭관이 천거했다는 이유만으로 버릴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당상들로 하여금 취사(取舍)케 하신다면, 신은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낭관이 매우 적으니 다음 정사(政事)에서는 모두 차출토록 하라."
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지난날 흉악한 자들이 국권(國權)을 장악하여 자전(慈殿)이 거의 위태롭게 되었을 때 이항복(李恒福)이 수의(收議)한 덕택으로 이륜(彛倫)이 무너질 뻔하다가 다시 확립되었으니, 어느 사람인들 그 큰 절의에 감복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전망자(戰亡者)의 자손도 녹용(錄用)하게 하고 있는데, 이항복이 세운 절의는 전망자들보다 훌륭하다 할 것입니다. 그의 첩자(妾子)인 이규남(李奎男)이 이미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기에 벼슬자리 하나를 주어 그 어미를 봉양토록 했으면 하는데, 이 사람이 서얼 출신이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자라도 거두어 임용하라."
하였다. 상이 시독관 조경(趙絅)에게 【 조경이 암행 어사로 해서(海西)를 살피고 돌아와 복명하였다.】 이르기를,
"해서의 사정은 어떠하던가?"
하니, 조경이 아뢰기를,
"신이 두루 다녀 보니, 우봉(牛峰)과 토산(兎山) 지역은 모두 호변(胡變)으로 피해를 입었으나 해주(海州)·황주(黃州)·봉산(鳳山) 등지와 같지는 않았습니다. 옹진(甕津)과 풍천(豊川) 일대는 대부분 어염(魚鹽)의 이로움이 있는 까닭에 살아 남은 백성들이 다시 모여 들고 있는데, 조정에서도 3년 기한으로 복호(復戶)해 주었기 때문에 그 덕택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다만 중국 사람들이 오가며 약탈하는 까닭에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안악(安岳)은 관향사(管餉使)가 머물고 있는 곳인 까닭에 마치 감영(監營)이 선 지역과 같았는데, 섬에 있는 중국인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아 유독 그들이 침략해 오는 근심을 안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정봉수(鄭鳳壽)를 인견하고 이르기를,
"정묘 호란 때에 여러 고을의 장사(將士)들이 소문만 듣고도 뿔뿔이 흩어졌는데, 경만은 홀로 잔병(殘兵)을 규합하여 외로운 성을 지켜냈으니, 옛사람들과 비교해도 필적할 만한 경우가 드물 것이다. 더구나 경은 직책도 가지지 않은 몸으로 이렇게 충성을 바쳤으니, 내 무척 가상하게 여긴다. 적들도 필시 우리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이를 터이니, 단지 한 시절에만 그치는 공훈이 아니요 장차 후세에까지도 영광이 될 것이다."
하고, 이어 남단(藍段) 1필, 신[靴子] 1켤레, 내구마(內廐馬) 1필을 하사하였다.
1월 25일 을사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시독관 조경(趙絅)이 아뢰기를,
"임금이 지치(至治)를 이루는 데에는 어진이를 구하는 것보다 큰일이 없습니다. 성명께서 즉위하신 지 오래 되었는데도 어진이를 구하는 길을 넓게 하지 못하셨는데, 국가의 사업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꼭 이 탓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밝지 못한 탓으로 제대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마는 조정 안에도 어찌 인물이 없겠는가. 그리고 이 편(篇)012) 에도 ‘늙고 덕 있는 이를 멀리 한다. [遠耆德]’라는 말이 있는데, 지금 나이와 덕이 함께 높은 이가 【 이원익(李元翼)을 가리킨다.】 아직까지 멀리 떠나 있으니, 이것이 늙고 덕 있는 이를 멀리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특진관 김기종(金起宗)이 아뢰기를,
"신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의 근력이 직책을 감당할 만하다면 지금이 어찌 멀리 물러날 시기이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연로해서 물러간 것이라면 어찌 성상께서 그를 멀리 한 것이겠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대우하는 정성이 미진했기 때문에, 그가 스스로 물러간 것이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옛날 선조(先朝)에서는 청간(淸簡)한 신하에게 마음을 쏟아 혹 궐내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기도 하였는데, 어진이를 높이는 도리가 이와 같았던 까닭에 사람들이 보고 감동하는 바가 많았다."
하였다.
1월 26일 병오
비국이 아뢰기를,
"속오군(束伍軍)에 대한 일을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이에 신들이 이모저모로 상의해 보건대, 호패의 문서에 이름이 등재되어 있으면 노소와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피해를 받고 있는데, 취사(取舍)할 즈음에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므로 부자들은 뇌물로 모면하고 가난한 자들은 도망쳐 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호패법이 이미 혁파되어 단속할 길조차 없으니 편오(編伍)의 명칭만 있을 뿐 실제로는 껍데기뿐인 문서에 불과합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당초의 영장 사목(營將事目)에 의거해 단지 속오군의 원안(原案) 가운데 도망친 자나 죽은 인원만을 보충해야 한다.’ 하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호패 문서에 등재된 장정의 10분의 1을 뽑게 되면 온통 뒤섞여 피해를 받게 되어 더 뽑는다는 이름만 있을 뿐 실제로 더 뽑는 효과는 보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군적(軍籍)은 요원을 잘 관리해야 한다는 제도에 의거하여 기병과 보병 및 그에 따른 보인(保人)과 솔정(率丁)을 구분해 정해야 한다. 그리하여 정병(正兵)은 한 집에서 한 사람씩을 뽑아 편대를 이룬 뒤 정군초(正軍哨)라고 이름하고, 그 나머지 잡색군(雜色軍)은 《대전(大典)》의 잡조(雜條)에서 말하는 제색(諸色)의 군사 중에서 또한 10분의 1을 취해 잡색초(雜色哨)라고 이름해야 한다. 그러면 군사도 많이 확보하는 동시에 소요스러운 폐단도 없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당초의 영장 사목에 의거하여 더 뽑지 못하게 하는 것은 참으로 좋지만, 만일 마지막에 말씀드린 주장을 따른다면 신들이 다시 더 의논을 정하여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가을 농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변통해 거행함으로써 농사에 방해되는 폐단이 없게 하라."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선조를 받드는 도리에는 본래 정해진 예(禮)가 있습니다. 제례(祭禮)를 번거롭게 하는 것은 이른바 공경치 않는다[不欽]는 것에 해당됩니다. 우리 나라가 오향(五享)을 태묘(太廟)013) 에서 이미 지내는데 또 능침에서 지낸다면 ‘예가 번거롭게 되면 어지럽게 된다.’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일찍이 대신이 호조 및 예조가 함께 의논드린 것을 인하여 상량해 보시고서 줄이도록 한 것이야말로 폐단을 바로잡자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서 시절이 곤란하여 비용을 줄여 보려는 의도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햇수를 한정한다는 말도 없었는데 해조에서 복계(覆啓)하지도 않고 자기네들 마음대로 다시 설행(設行)하였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전날 의논해 결정하였던 대로 능침의 오향 대제(五享大祭)를 속히 정지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를 선조의 예에 따르는 것은 고금의 통례이다. 그런데도 요즈음엔 막중한 제향을 근본 뜻도 생각해 보지 않고 가볍게 줄여 없애버리니, 이는 실로 대단히 미안한 일이다. 기왕에 이미 다시 거행키로 하였으니 결코 도로 정지시킬 수는 없다.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1월 27일 정미
조강에서 《서전》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자의 도는 괜히 그 말만 꾸미려 해서는 안 되고 실천해야 마땅하니, 군신 상하가 이 점을 서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편(篇)014) 가운데, ‘심상하게 여기고 들으려 하지 않았다.[惟庸罔念聞]’고 하였다. 지금 아름다운 말들이 적지 않은데도 제대로 듣고 따르지 못하니, 내가 부끄럽게 여긴다."
하니, 영사 이정구(李廷龜)가 아뢰기를,
"조정 신하들이 경계하며 아뢰는 일들과 초야의 충직한 말들이 모두 겉치레로 끝나버리는 것은 신들의 죄입니다."
하였다. 이정구가 또 아뢰기를,
"광해군 때의 사기(史記) 1백 80개월 분량 가운데 1백 30개월의 것은 이미 중초(中草)015) 를 마쳤습니다만, 나머지 50개월의 분량은 아직 다 마치지 못했는데, 사기가 중단될까 두렵습니다. 대제학 정경세(鄭經世)가 현재 겸춘추(兼春秋)를 겸대하지 않고 있는데, 반드시 대학사(大學士)가 겸대한 뒤에라야 사국(史局)의 일을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지경연 이귀(李貴)가 아뢰기를,
"신이 정정경세가 낭관의 추천 제도에 대해 아뢴 일을 들었는데, 잘못 전한 것이 있었습니다. 이이(李珥)가 계미년간에 전장(銓長)이었는데, 그 때 과연 파격적인 분부가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그랬던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미 경연에서 분명히 말했던 것인데, 주서(注書)가 기록한 것은 크게 본래의 뜻을 잃고 있었다. 경연에서 나온 말들은 좋거나 나쁘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후세에 전해야 하는 것인데, 기록한 것이 이처럼 실상을 잃고 있다면 《정원일기(政院日記)》 모두 믿을 것이 못되고 말 것이다. 다만 근래 경연에서 신료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너무 빠른 듯싶은데, 뛰어난 문장력과 속필(速筆)의 솜씨를 가졌다 할지라도 다 써내려가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들으니 일을 아뢰는 구례(舊禮)는 반드시 아뢸 말만 간추려 진달하면서 천천히 말을 해 사관이 다 쓰기를 기다렸다가 다음 말을 하였다고 한다. 나 역시 말을 빨리 하는 병통이 있으나 경연의 신료들은 더욱 심하다. 지금부터는 상하가 모두 마땅히 유념하여 사관이 받아 쓸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원수(袁帥)가 모장(毛將)016) 의 일로 인해 의심을 품고 우리 나라의 공로(貢路)를 바꾸어 각화도(覺華島)에 배를 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수로(水路)가 등주(登州)보다 배나 멀 뿐 아니라 배는 큰데 수심이 얕아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일 옛길대로 하지 않으면 사행(使行)이 통하기 어렵게 될 뿐 아니라 중국의 상인들도 장차 끊어지게 될 것입니다. 현재 남쪽과 북쪽의 두 적을 응수해야 하는 때에 중국의 물화(物貨)가 아니면 결코 모양을 갖추기가 어려우니, 사신이 왕래할 때에 혹 주청(奏請)하거나 혹 예부에 이자(移咨)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국가에 일이 많아 아직 왕세자의 책봉을 청하는 일을 못했습니다. 이는 대체로 중국 사신을 접대하기가 어려워 그랬던 것이지만 지금은 비록 법식대로 청한다 하여도 중국 사신이 쉽게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어찌 응당 행해야 할 막대한 일을 오래도록 미루어 둘 수 있겠습니까. 이번 동지사(冬至使) 편에 겸하여 주청하게 하고 또 일을 아는 역관(譯官)을 데리고 가게 하여 면복(冕服)과 의장(衣章)을 하사하여 줄 것을 청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현재 물력이 이와 같아 백성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매우 많으며 만약 중국 사신이 오지 않을 경우 예(禮)에 결함이 있게 될 것이니 우선은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대간이 능침에 지내는 오향(五享)에 대한 일을 논하자 상께서 정지할 수 없다고 분부하셨습니다. 반정 초기에 이원익(李元翼)이 조정에 있을 때 소신도 종백(宗伯)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대신들이 의논해 결정하기를 ‘약·사·증·상(禴祠蒸嘗)017) 은 태묘에 지내는 제사이니, 능침에 쓰는 것은 잘못된 예이다.’고 하였으므로, 이를 복계(覆啓)하여 줄일 것을 청했습니다. 따라서 이번에 해조가 마침내 다시 거행할 것을 청하자 대간이 이렇게 논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가 반복되면 번거롭고 번거로우면 어지러워집니다. 더구나 예는 충분해도 경(敬)이 부족한 것보다는 경이 충분하고 예가 부족한 것이 나은 데이겠습니까."
하였다. 강이 끝나자 상이 배사(拜辭)하러 온 수령인 춘천 부사(春川府使) 김덕함(金德諴) 등을 인견하였다.
1월 28일 무신
금(金)나라 사람 고아부(高牙夫)가 와서 말하기를,
"금나라 한(汗)이 군사를 거느리고 관중(關中)에 들어가 이르는 곳마다 큰 승리를 거두었다. 영원(寧遠)에서 대군이 맞아 싸웠으나 패하였으므로 명나라 조정에서 원 군문(袁軍門)을 붙잡아 갔고, 애꾸눈 대장 한 사람이 흩어진 군사를 모아 산해관(山海關)으로 물러나 머물러 있다."
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금나라 한이 관중에 들어갔다는 말이 전후에 걸쳐 금나라 사람들의 입에서 여러 차례 나왔습니다.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 일단 그런 말을 들은 이상 가도에 물어보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의당 급히 일을 아는 역관과 선전관을 파견하여 진 부총(陳副摠)에게 물어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지사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이때처럼 백성이 곤궁하고 재정이 고갈된 때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사치하는 폐단은 하천배들이 더욱 심하니, 이는 상께서 실제로 검소함을 본보이는 것이 혹 미진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방(尙方)018) 의 구규(舊規)를 보건대 단지 겉옷에만 단(段)이나 초(綃)를 사용했고 궁중에서는 문단(文段)을 사용하지 않았으니, 조종조의 검박하신 덕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외간의 사치 풍조가 온통 이와 같으니, 이는 모두 내가 제대로 모범을 보여주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하자, 참찬관 이경여(李敬輿)가 아뢰기를,
"듣건대 선묘조(宣廟朝)에는 대궐의 방에 온돌을 놓은 것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기인(其人)이 바치는 땔나무가 오늘날처럼 많지 않아 단지 관리들의 신역(身役)으로만 내게 했고 백성들의 전결(田結)에서는 징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 갑자기 고칠 수는 없겠지만 의당 폐단을 줄이는 방도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금은(金銀)·주옥(珠玉)·사라(紗羅)·능단(綾段) 등의 물건에 있어서도 먼저 궁중에서 금지해 끊은 다음에야 아랫백성들이 사치하는 것을 금지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듣건대 법부(法府)의 관리가 혹 아는 사람이거나 청탁을 받은 자일 경우 범법자를 놓아주어 세력이 없는 자들만 벌을 받는다고 하였다. 이것이 지엽적인 일이라 하더라도 이처럼 불공평하니 인심이 승복치 않는 것은 족히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이 편(篇)의 주(註)에 ‘이것은 태갑(太甲)이 잘못한 것인 까닭에 특별히 말한 것이다.’ 하였는데, 옛사람들은 반드시 먼저 인군의 잘못된 것부터 말하였다."
하니, 이경여가 아뢰기를,
"잘못된 것을 알기가 쉽지 않은데, 반드시 병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자세히 안 뒤에야 약을 써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실로 성인이 아닌 한 그 누가 잘못이 없겠습니까. 신은 성상께서 성(誠)을 생각하시는 공부가 부족한 듯싶어 염려됩니다."
하고, 홍서봉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렇게까지 분부하시니, 국가의 복입니다. 근래에 말을 받아들이는 성의가 점점 처음만 같지 못하시어 언로(言路)가 넓혀지지 못하는 결과를 빚었습니다. 만일 계해년019) 초기처럼 하신다면 나라가 반드시 다스려질 것입니다."
하고, 검토관 채유후(蔡 𥙿後)가 아뢰기를,
"만일 겉치레만 많고 실지의 노력이 적다면 어떻게 실효를 바라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부터 진언하는 사람들 모두가 나를 실질적인 면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야말로 나의 병통을 그대로 맞춘 것이다. 나도 실질적인 면에 힘쓰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다스리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내가 매우 민망하게 여긴다. 어떻게 하면 겉치레를 없애고 실덕(實德)을 진취시킬 수 있겠는가?"
하니, 채유후가 아뢰기를,
"윗글에 ‘새벽에 그 덕을 크게 밝히셨다.[昧爽丕顯]’고 했습니다. 반드시 한 생각이라도 작위적인 것이 없도록 하고 오로지 실덕으로 정치를 펴는 근본을 삼은 뒤에야 실효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이경여가 아뢰기를,
"옛날 조종조에서는 날이 새기 전에 옷을 찾아 입고 이른 아침에 정사를 보았으며, 세종조에 이르러서는 편전(便殿)에 나와 앉아 계시면서 여섯 승지가 각기 해방(該房)의 공사를 가지고 때없이 드나들게 하였습니다. 이같이 한 까닭에 대소 신료들이 감히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였습니다. 성상께서 진실로 항상 편전에 거하시면서 아무 때나 일을 아뢰게 한다면, 조종의 치적을 어렵지 않게 이룰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통주(通州)에서 황도(皇都)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홍서봉이 아뢰기를,
"40리 길입니다. 신이 일찍이 듣건대 우리 나라가 임진년에 침략을 당했을 때 만력 황제(萬曆皇帝)020) 께서 정전(正殿)을 피하기까지 했다 하였습니다. 지금 황도가 포위되었다는 설의 진위 여부를 알 수는 없습니다마는, 지금이 어찌 군신과 상하가 태연히 있을 때이겠습니까. 상께서는 의당 정전을 피하여 불안해하는 뜻을 보이셔야 할 것입니다."
하자,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강이 끝나자 상이 정전을 피했다. 월랑(月廊)에 나아가 삼공(三公)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노적(奴賊)이 서쪽으로 쳐들어갔다는 말이 연속 들어왔어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는데, 지금 장계를 보니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우리 나라의 도리상 태연히 있을 수 없으니, 모든 일들을 반드시 미리 논의해야 하겠다."
하니, 영상 오윤겸(吳允謙)이 이르기를,
"가도(椵島)에서는 혹시 중원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니, 의당 먼저 역관과 일을 아는 선전관을 부총(副摠)에게 보내 정확한 소식을 탐지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군사를 움직인 지가 오래 되었는데도 아직 돌아왔다는 소식이 없으니, 이는 필시 궁궐을 범해 서로 버티고 있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먼저 분문사(奔問使)를 뽑아 두었다가 정확한 소식을 기다려 들여보내야 할 것입니다."
하자,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좌상 김류(金瑬)가 아뢰기를,
"신이 경사(京師)에 갔을 때 보건대 대동(大同)·요(遼)·광(廣)에는 모두 중병(重兵)이 있었으나 관(關) 안쪽으로는 군사를 주둔시킨 곳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중원은 태평세월이 오래 지속되어 문물(文物)은 더 없이 성대하나 무비(武備)는 허술하니, 적이 관을 돌파하면 어렵지 않게 승승장구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랑캐가 만일 깊이 들어갔다면 황상께서 필시 남쪽으로 행행하셨을텐데 소식을 들을 수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우리 나라에 약간의 병력만 있다면 지금이 오랑캐의 본거지를 쳐들어가 뒤엎어버릴 적기(適期)인데, 도리어 신사(信使)를 저들에게 보내야 하다니, 일로 보아도 옳지 않고 마음에도 편치 못하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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