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2권, 인조 8년 1630년 2월

싸라리리 2025. 12. 26.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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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신해

정두원(鄭斗源)을 진위사(進慰使)로 삼았다.

 

2월 2일 임자

예조 판서 김상용(金尙容)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지난번 비국에서 개좌(開坐)했을 때에 어공(御供)을 복구하자는 의논을 하다가 제향에 관한 일을 언급하자, 호조 판서 김기종(金起宗)이 말하기를 ‘종묘에서 일단 오향(五享)을 지내는데 각 능(陵)에서 중첩해 지내는 것이야말로 번거롭게 하는 것에 관계되는 일이고, 난리로 인해 없앤 것 또한 예에 혐의될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신의 생각에도 그렇게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오례의》를 가지고 상고해 보건대 각능에 오향을 거행하는 것이 예문에 기재되어 있었고, 또 정묘년021)  에 본조가 대신에게 의논했던 공사(公事)를 상고해 보건대 대신의 의논이 모두 ‘제향을 줄인 지 4년이나 지났는데, 현재의 사세는 갑자년022)  보다도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니 우선 해조가 아뢴 대로 어공과 함께 똑같이 실시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햇수를 한정하는 말이 분명히 있었던 것인데,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난리 뒤에 줄였던 것들을 지금 모두 복구한 이상 오향만 유독 복구하지 않는다면 인정과 예절에 비추어 볼 때 매우 마땅치 못한 일이다. 해조로서는 그저 관례에 의거하여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고 여겨졌기에, 감히 다시 품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양사가 해조가 다시 품하여 의논드리지 않은 것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신이 예관(禮官)의 직책을 맡아 조정의 막중한 예전(禮典)을 그르치는 결과를 초래했으니, 속히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복구할 것을 계청하였으니, 이미 근거가 있는 것이다.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2월 3일 계축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지경연 이귀(李貴)가 아뢰기를,
"신이 망령된 견해를 어제 청대(請對)하여 진달하려고 했었는데, 오늘 다행히 입시하면서 말로 아뢸 수 없기에 초를 잡아 왔습니다."
하고, 이어 탑전에서 읽었는데, 그 계사(啓辭)에,
"군신(君臣)의 의리란 천지의 상경(常經)이요 고금의 통의(通誼)입니다. 사람으로서 이러한 의리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면 임금은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하며 아비는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은 자식답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나라와 중국의 관계는 의리로 보면 군신이고 은혜로 보면 부자간과 같습니다. 노병(奴兵)이 서쪽을 침범했다는 말의 진위 여부를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군신과 부자의 대의로써 볼 때 군부(君父)가 침략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경우 어떻게 저들 오랑캐가 헛되이 과장한 말이라고 치부한 채 마음에 동요됨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나라가 조용히 수수방관하며 근왕(勤王)하는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있다가 후일 중국 조정에서 죄를 묻는 일이라도 있으면 장차 무슨 말로 대답할 것입니까. 그리고 중국에서 우리를 불쌍하게 여겨 책망치 않는다 하더라도 군신간의 분의(分義)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오랑캐가 만일 군사를 모으는 명이 내려졌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우리에게 강화(講和)를 저버렸다고 책망할 경우, 우리가 대답하기를 ‘중국과는 부자의 의리가 있으나 그대와 우리는 형제의 약속이 있을 뿐이니 그 경중이 자못 다르다.’고 한다면, 군부의 대의를 오랑캐도 알고 있으니, 반드시 이것으로 우리 나라를 깊게 허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비록 군사를 선발했다 할지라도 황제의 명이 없을 경우 중지하면 될 것이고, 황제의 명이 있게 되면 전쟁터에 나아가는 것이 또한 옳을 것입니다. 어찌 오랑캐의 희노(喜怒)에 구애받아 이 거사를 차마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뢴 말이 매우 좋다.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참찬관 김경징(金慶徵)이 아뢰기를,
"요즘 듣건대 지차암(芝次巖)의 별당을 보수하는데 그 일의 규모가 엄청나게 크다고 합니다. 풍정(豊呈)의 예를 거행한다 하더라도 일이란 마땅히 절약하며 간소하게 해야 합니다. 이번에 보수하는 일은 폐단만 있을 뿐이 아닙니다. 마음이 한번 유상(遊賞)하는 데에 빠지게 되면 실로 적은 잘못이 아니게 될 것이니, 그 조짐을 끊어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별당의 공사는 혹 자전(慈殿)께서 거둥하시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에 보수하도록 한 것인데, 경이 이처럼 말하니 정지시키도록 하겠다."
하였다. 강이 끝나자 상이 암행 어사 조정호(趙廷虎)를 인견하여 북도(北道)의 폐단을 하문하였다. 조정호가 아뢰기를,
"남도(南道)는 사천(私賤)이 모두 군병에 예속되어 고공(雇工)이나 봉족(奉足)이 없습니다. 국법으로 그 주인들이 노비 신공을 거두지 못하게 하였는데도 혹 그들의 주인이 아닌 자들까지 침해를 가하기 때문에 도망쳐 흩어진 자들이 많았습니다. 또 포흠(逋欠)에 관한 일은 남·북도를 통틀어 커다란 폐단이 되고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천의 폐단을 어떻게 변통해야 하겠는가?"
하자, 조정호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노약자들은 보인(保人)이라고 아울러 칭하여 정군(正軍)에게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날에는 탐관 오리들이 포악을 일삼아 육진(六鎭)의 백성들이 지탱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었는데, 지금도 그렇던가?"
하니, 조정호가 아뢰기를,
"경성(鏡城)은 거진(巨鎭)으로 불려지고 있는데도 신이 그 지역을 돌아 보건대 하루 이틀 여정에 역촌(驛村)만 있을 뿐 인가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육진이 이미 극도로 황폐되어 있으니, 만일 어떤 일이라도 발생할 경우 어떻게 해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민심만은 모두 적과 싸우다 죽겠다는 마음을 품고서 두려워하거나 위축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만일 병사(兵使)를 가려 보내어 착실히 가르쳐 단련시키게 한다면, 적은 군사로 많은 군사를 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성지(城池)와 기계가 한 가지도 믿을 만한 것이 없었고, 관저(官儲) 또한 극도로 고갈되어 있어 사신도 잘 접대할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관상감이 아뢰기를,
"각루(刻淚)가 천시(天時)와 매번 서로 어긋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춘분과 추분에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 물이 꼭 중간에서 2 등분될 때 으레 교정하여 천시와 합치되도록 합니다만, 그래도 혹 어긋나는 걱정이 있곤 합니다. 그런데 지난해 춘분에는 전혀 교정하지 않아 봄과 여름 사이에 각루의 차(差)가 두 시각이나 어긋나기에 이르렀습니다. 올해 춘분에는 교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 장인(匠人)을 모집하여 교정토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4일 갑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비국이 아뢰기를,
"이번에 전라 수사(全羅水使) 유림(柳琳)이 격군(格軍)에 대한 일로 첩보하였는데, 전 통제사 구굉(具宏)도 이에 대한 폐단을 진달했습니다. 신들이 전일 주사(舟師)에게 격군을 정해 지급하는 규정을 가져다 조사해 보건대, 격군은 본도 연해(沿海)의 사노(寺奴) 및 중도(中道) 이하의 기병과 보병을 모두 주사에 소속시켜 45일만에 서로 교체시켰습니다. 그리고 격군의 군량은 본도의 민결(民結)에서 따로 정해 거두어 들였는데, 갑자년023)  에 본도의 치계에 의해 첨방(添防)하는 규정이 폐지되면서 격군의 군량으로 거두어 들이던 것도 정지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지금 만일 첨방시킨다면 격군의 군량도 복구시키지 않을 수 없는데, 금방 정지시켰다가 다시 받아들이자니 또한 매우 미안스럽습니다. 그리고 연해의 사노들이 이미 돌아가버린 상태에서 해조가 격군을 더 지급하자니 새 군적(軍籍)으로 군졸들이 배정된 뒤라서 달리 남아 있는 군졸이 없고, 번드는 차례를 바꾸어 전용해 쓰려고 계책을 세우자니 기병과 보병으로서 주사에 소속될 자들의 고생이 반드시 갑절은 더 많을 것이니, 지금으로서는 사세가 여러 가지로 불편합니다. 올해에는 우선 배 4척을 줄이고 보낼 6척의 배 가운데 모자라는 격군은 본진의 번차례에 해당하는 격군을 옮겨 지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중국에 변란이 있다는 말을 들은 이상 급히 사신을 파견하여 어려움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천하의 가장 첫번째 의리일 것입니다. 다만 아직 정확한 소식도 없는데 이 일을 갑자기 의논한다는 것은 일보다 미리 앞서 움직이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원근이 소란스러워져 헛소문이 진짜 화란이 될 것 또한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신들이 감히 미리 논의드리지 못하는 것은 실상 이 점 때문입니다. 지금 이귀(李貴)가 아뢴 말을 보건대 참으로 정대합니다만, 우선은 각처에서 탐지해 올리는 보고를 기다렸다가 다시 품하여 조처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또 아뢰기를,
"북로(北路)의 사천(私賤)들 중 남정(男丁)은 정군(定軍)하여 입방(入防)시키고 여인들에게는 신공(身貢)을 거두어서 군량으로 보충해 온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또한 본주인들로부터 시달림을 면치 못했던 관계로 그들만 고통받기 때문에 생기는 원망은 과연 어사가 아뢴 바와 같으니 변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의당 본도로 하여금 장정의 실제 인원수를 뽑아서 낸 뒤 그들 각자의 어미·처·자매 중 한 사람을 덜어 봉족으로 삼게 하되, 어미·처·자매가 없는 경우에는 노약자 중에 전쟁에 쓸모없는 자를 덜어 내어 각자에게 한 사람씩 지급하여 봉족으로 칭하게 함으로써 지탱해 나갈 기반을 마련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말이 마땅한 듯하다. 그러나 이같이 변통한다면 필시 군졸도 줄고 군량도 모자랄 걱정이 있을 것이니, 우선은 옛날 했던 대로 시행하고 본주인들이 신공을 받아내는 폐단을 엄금토록 하라."
하였다.

 

원주 목사(原州牧使) 심명세(沈命世)가 상소하기를,
"신이 듣건대 옛날에는 묘를 개수(改修)하지 않았다024)  고 하는데, 이는 어버이의 장례는 마땅히 그 시초에 신중히 해야 된다는 점을 밝힌 것입니다. 그리고 체백(軆魄)이 편안치 못하게 될 걱정이 있으면 개장(改葬)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에 예에도 천장(遷葬) 때에 입는 복(服)이 있으니,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옛날 송 인종(宋仁宗)의 장례025)  에 장인(匠人)이 광중(壙中)에 나무틀을 잘못 설치하여 곧 무너져 내릴 화가 있게 되자, 정이(程頤)가 부필(富弼)에게 극력 권하며 수개(修改)할 것을 건백(建白)하여 청하게 하면서 대신 그 상소의 초안을 작성해주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침 때가 늦어 결국은 올리지 못하게 되자 항상 충효죄인(忠孝罪人)이라는 탄식을 하곤 했습니다. 송 효종(宋孝宗)의 장례 때에도 대사(臺使)가 속설을 잘못 적용하여 물이 솟는 땅을 잡아 쓰자 주희(朱熹)가 두번이나 상소를 올려 강력히 개복(改卜)할 것을 청했습니다만, 한탁주(韓侂胄) 등이 도리어 요망한 말이라고 배척하여 문도인 채원정(蔡元定) 등을 귀양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뒤 영종(寧宗) 때 종묘 제사가 끊겼고 송나라의 운세도 길게 지속되지 못하였습니다.
이를 보건대 풍수설 또한 하나의 도(道)가 될 수도 있다는 것으로서 성현의 견해가 결코 허탄한 것이 아닙니다. 보통 사대부의 집안에서도 엄밀하게 자리를 가려 혹시라도 처음에 살피지 못해 물이 솟는 걱정이 있으면 반드시 개복할 것을 생각하여 기어코 온전히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더구나 인군이 추원(追遠)하는 효성을 가지고 조종(祖宗)을 편히 모시려는 계책을 세우면서 어떻게 그럭저럭 구차하고 소홀하게 함으로써 씻지 못할 후회를 끼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생각건대 목릉(穆陵)은 곧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영원히 계실 현궁(玄宮)인데 당시 총호사(摠護使)가 풍수설을 극도로 배척한 나머지 용렬한 지사(地師)에게 맡김으로써 길하지 못한 땅을 잡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와서는 사람들마다 모두 미안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너무도 중대한 관련이 있는 일인 까닭에 감히 앞장서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으니, 신은 속으로 통탄할 따름입니다. 우선 지가(地家)의 설을 가지고 논하더라도 장법(葬法)에서는 바람이 막히고 기(氣)가 응결하는 것을 선결과제로 삼습니다. 그런데 목릉은 혈도(穴道)가 우뚝 드러나고 지형이 비탈지고 험준하고 안쪽에 가려주는 산이 없어 큰 들과 평평히 맞닿아 물이 흘러나가는 곳이 곧바로 보이니, 이것은 모두가 장법에서 크게 꺼리는 것들입니다.
신이 일찍이 공조 참판으로 있으면서 고 상신(相臣) 신흠(申欽)과 예조 판서 이정구(李廷龜)를 수행하여 봉심(奉審)했는데, 그때 보니 동쪽 사대석(莎臺石) 한 모퉁이가 떨어져 나갔고 발라놓은 유회(油灰)가 떨어져 나간 흔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수복(守僕)에게 물었더니, 모두 말하기를, ‘술방(戌方)·자방(子方)·축방(丑方) 등에 사초(莎草) 아래쪽에서 장마가 질 때면 물이 샘솟듯 솟아난다.’고 하였습니다. 또 재랑(齋郞)의 경력이 있는 자의 말을 듣건대 혹 연일 비가 내리면 무석(武石) 아래쪽에서 물이 새어나와 흐른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필시 땅속에 물이 있어 돌과 흙으로 쌓은 축대에 막혀 있다가 콸콸 솟아 나온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장법상 이미 저토록 의심스럽고 능(陵)에 의심됨이 또 이와 같으니, 이 어찌 선왕의 체백이 안정될 땅이겠으며 종묘 사직의 혈식(血食)을 구원하게 할 도리이겠습니까.
신이 삼가 영릉(英陵)026)  의 장지를 상고해 보건대 처음에는 광주(廣州)의 대모산(大母山) 아래에 있다가 그 뒤에 여주(驪州)로 옮겼는데, 그 당시 개장(改葬)에 대한 의논들이 필시 국승(國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무슨 이유로 옮겼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전해오는 소문에 의하면, 처음 영릉에 장례를 지낸 뒤로 문묘(文廟)의 재위가 짧았고 노산(魯山)이 양위(讓位)하였으며 6명의 대군(大君)들이 잇따라 일찍 죽는가 하면 덕종(德宗)이 또 오래 살지 못하였으므로 당시에 모두들 대모산의 능이 불길하다고 탓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개장하는 논의를 결단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종(睿宗) 원년에 여주로 옮겼는데, 여주는 풍수학상으로 국가의 능묘 중 첫번째로 일컬어지는 곳입니다. 이것이 어찌 조종의 깊고 먼 계획이 아니겠으며 나라의 운세가 영원히 힘입을 복록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국가의 여론을 살피건대 대부분이 목릉을 이장하는 논의를 절대로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고들 하고 있는데, 신 또한 이것을 밤낮으로 애태워하고 있습니다. 아마 땅에 묻히신 선왕의 체백도 불안한 바가 있을 것이며 하늘에 계신 영혼도 전하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번에 우연히 듣건대 목릉의 방위가 유좌(酉坐)여서 금년이야말로 묘를 옮기기에 아주 길하며 만일 올해를 넘기면 계유년 이전은 모두 불길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점으로 볼 때에도 속히 도모하여 옮기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주희가 전후에 걸쳐 올린 산릉에 대한 장차(章箚)를 상고하시어 유념해서 살펴 주소서."
하였는데, 상이 그 소를 예조에 내렸다. 예조가 대신에게 의논할 것을 청하였는데, 대신이 아뢰기를,
"일이 매우 중대하니 이 방면의 술(術)을 아는 자들을 널리 불러 정밀히 살피고 강정(講定)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응천 도정(凝川都正)의 처 이씨(李氏)가 상언(上言)하기를,
"옛날 우리 선조 대왕께서 방계(旁系)에서 들어와 대통을 계승하시고서 대신들이 의논하여 아뢴 말에 따라 사친(私親)을 대원군(大院君)으로 추숭(追崇)하시고, 가묘(家廟)를 세우도록 명하시는 한편 전답과 노비를 하사하여 제사를 받들게 하고 수묘군(守墓軍) 16명을 선발하여 번갈아 번(番)을 서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래 정해진 위전(位田)이 없이 옛날 사전(私田)을 그대로 경작케 하면서 단지 각 능전(陵殿) 수호군(守護軍)의 관례대로 한 사람당 1결(結)의 전세(田稅)를 면제하고 또 그 집에 부과되는 잡역(雜役)을 제외시키도록 해 온 것이 지금 이미 50여 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난리 뒤에 처음으로 각자 60부(負)에 해당하는 역만을 급복(給復)해 주도록 하자 그것만으로도 원통하다고들 했는데, 지금은 다른 전결(田結)의 관례대로 잡역까지 책임지우고 있습니다. 돌아 보건대 이렇게 복호(復戶)해 준 것은 한 때에 새롭게 만든 규정이 아니니, 예전대로 세금을 면제해 주소서."
하였는데, 호조가 복계(覆啓)하기를,
"수묘군들에게는 선혜청(宣惠廳)의 이문(移文)에 따라 60부를 급복해 주고 전세는 면제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 이미 성문화된 규정입니다. 면세해 주는 한 가지 일을 지금 새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상언 가운데 잡역을 책임지운다고 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다. 본 주(州)의 관리를 추고하고 이 뒤로는 침해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2월 6일 병진

태백성이 나타났다.

 

진하사(進賀使) 이흘(李忔)이 원 독수(袁督帥)의 군문(軍門)에 도착하여 동지사(冬至使) 윤안국(尹安國)이 익사했다고 치계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일이 놀랍고 참혹하기 그지없다. 해조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거행케 하라."
하였다. 예조가 관작의 추증(追贈)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정경세(鄭經世)를 겸 지춘추관사로 삼았다. 【 《광해일기(光海日記)》를 정리하기 위해서이다.】

【태백산사고본】 22책 22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364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한국고전번역원

 

예조가 아뢰기를,
"세견선(歲遣船)027)  의 직첩(職帖)을 받은 왜인 등영정(藤永正)이 규정 이외에 진봉(進奉)한 호조(胡椒) 1백 근을 물리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함흥(咸興) 사람 이세붕(李世鵬) 등이 어가(御駕) 앞에서 상언하여 자칭 사왕(四王)028)  의 후예라고 하면서 법전대로 급복(給復)해 줄 것과 천역(賤役)에 배정시키지 말 것을 청하였는데, 병조가 복계하기를,
"사왕의 자손들은 군역에 편입시키지 못하도록 한 것은 우연한 뜻이 아니라 하겠습니다만, 연대가 오래되어 그 숫자가 매우 많을 뿐만 아니라 난리를 치른 뒤로 보첩(譜牒)이 유실되어 지파(支派)나 대수(代數)를 고증할 길이 없습니다. 게다가 나라의 기강이 해이되어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은 나머지 자손록(子孫錄)을 수정할 때 함부로 수록된 자들이 많은데, 혹 서자를 적자라 하기도 하고 다른 족속을 끼워넣기도 하였으니, 속히 본도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9일 기미

정효성(鄭孝誠)을 공청도 관찰사로 삼았다. 정효성은 여러 군현을 맡아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제법 있었는데, 고을에 재임하며 아랫사람을 대할 때 농담과 해학을 섞어 말하곤 하였다. 부제학 이경여(李敬輿)를 청주 목사(淸州牧使)로 삼았는데, 이는 이경여가 어버이를 위해 지방 고을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2월 11일 신유

태백이 나타났다.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서성(徐渻)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2월 13일 계해

황해도 무학(武學) 1백 명을 평안도의 파발로 세우고 두 달만에 서로 교대하게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경외(京外)의 전쟁에서 사망한 자의 자손들은 선묘(宣廟)의 옛날 관례대로 녹용(錄用)해야 할텐데, 그 가운데서 모범적으로 싸우다 죽은 남이흥(南以興)의 아들 남두극(南斗極)은 시임(時任) 수령으로, 기협(奇恊)의 아들 기진경(奇震慶)은 시임 별좌(別坐)로, 김준(金俊)의 아들 김진성(金振聲)은 시임 주부(主簿)로서 이미 상전(賞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교생(校生)·업유(業儒)·유학(幼學) 및 내관(內官) 장순남(張順男)에게는 본조가 별로 시행할 만한 상이 없으니, 모두 해조로 하여금 헤아려 거행케 하고, 자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각도로 하여금 휼전을 거행케 하소서."
하니, 이에 상이 하교하기를,
"복수장(復讐將)인 전 권관(權管) 김양언(金良彦)의 아들 김세호(金世豪)에게 변장(邊將)을 제수하라."
하였다.

 

사복시가 아뢰기를,
"병란을 겪은 이후로 각도의 목장(牧場) 중 말[馬]이 없는 곳들을 혹 유민(流民)이 점유하여 경작하는 곳도 있고 혹 각 영(營)·읍(邑)·진(鎭)·아문(衙門)들이 둔전(屯田)을 설치한 곳도 있는데, 본시(本寺)에서 막연히 알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야 비로소 본시의 관원을 내보내 하삼도(下三道)를 적간(摘奸)하였습니다. 이제까지의 오래된 세금을 오늘에 와서 추징하는 것은 소요를 일으킬 듯싶습니다만, 몰래 경작하거나 둔전을 설치한 곳인 경우는 모두 본시에 환속(還屬)시키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 진주(晋州)의 흥선도(興善島), 고성(固城)의 해평장(海平場), 동래(東萊)의 오해야(吾海也) 등지의 목장들은 목장 안에서 살고 있는 백성들이 사전(私田)이라 일컬으면서 호조에 세금을 납부했다고 합니다. 지금 만일 그대로 내버려두면 뒷날 그대로 차지해 버릴 근심이 없지 않으니, 해조로 하여금 그 결수(結數)를 감하여 본시에 환속시키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 중에서도 속이고 숨긴 것이 많은 자는 가려내 죄를 다스리라. 그리고 적간한 관원과 감목관(監牧官) 등에게는 상벌이 없을 수 없으니 헤아려 거행하라."
하였다.

 

2월 14일 갑자

종묘 대문 밖에 있는 버드나무에 벼락이 쳤으므로 위안제(慰安祭)를 거행하였다.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사간 김광현(金光炫)이 아뢰기를,
"노적(奴賊)이 황성(皇城)을 포위하고 조이고 있다는 말이 전후에 걸쳐 잇따라 이르렀습니다. 이 말이 비록 오랑캐들이 과장한 것이라 하더라도 또한 절대로 이럴 걱정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가 군사를 징발하여 어려운 상황을 구하러 달려가 급할 때 서로 구해주는 의리도 보여주지 못했는데, 도리어 풍정(豊呈)을 거행한다는 이유로 음악을 점고할 즈음에 춤이며 노래며 악기들을 날마다 잔뜩 벌이고 있으니, 정전을 피해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지 않는 뜻이 과연 어디에 있다 하겠습니까. 우선은 정확한 보고가 오기를 기다려 그 말이 허망하다는 것을 안 뒤에 다시 습의(習儀)하고 점고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갑자년 풍정 때에 처소가 충분치 못해서 걱정이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 금년에는 또 인경궁(仁慶宮)을 수리하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국가가 무사하고 재정이 풍부하더라도 다른 곳에 따로 설치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지금은 국가에 일이 많고 재정이 고갈된 상태인데, 어찌 허비해서는 안 될 재물을 낭비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러나 수리하는 곳이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의 끝나가고 있는데 지금 와서 정지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하다."
하였다.

 

2월 15일 을축

태백성이 나타났다. 정원이 아뢰기를,
"인사(人事)에 잘못이 있게 되면 하늘이 반드시 재이(災異)로 응하게 마련입니다. 이번에 벼락의 변괴가 갑자기 종묘 앞에 있는 나무에 떨어진 것은 하늘의 경계를 보인 것으로서 반드시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니, 지금이야말로 전하께서 공구수성(恐懼修省)하실 때입니다. 따라서 풍정(豊呈)의 예라 할지라도 의당 잠시 정지시켜야 할 것인데, 더구나 도대체 근거할 만한 것이 없는 인경궁의 수리이겠습니까. 속히 이 일을 정지시켜 실제로 하늘에 응답하시는 한편 비용을 절약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수리하는 일이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고 나를 위해 하는 일도 아니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2월 16일 병인

예조 참의 윤지경(尹知敬)이 재이(災異)를 인하여 상소하면서 수성(修省)해야 할 도리를 진달하고, 구언(求言)하는 분부를 내릴 것을 청하니, 상이 즉시 승지로 하여금 교서를 초하여 직언(直言)을 널리 구하게 하였다.

 

평안도 유학(幼學) 강원립(康元立) 등이 상소하기를,
"기미년029)   전역(戰役)에 김경서(金景瑞)가 전쟁터에서 죽지는 못했지만 사로잡힌 뒤에도 우리 나라를 잊지 못하여 번호(藩胡)를 통해 소본(疏本)을 전달할 기회를 얻자 적의 정세를 낱낱이 적고 이어 방어할 계책까지 언급하였다가 이것이 오랑캐에게 발각되어 마침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지금 그 소본과 집으로 보낸 편지가 그대로 남아 있으니, 전하께서 그 절의를 소급하여 표창해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김경서는 밀[蠟]먹인 종이를 새끼에 섞어 꼬아 오랑캐의 정세를 진달하였다가 이로 인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처음의 행동은 밉지만 마지막 행한 것을 보면 용서해 줄 만하니, 그의 관작을 회복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8일 무진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시독관 이성신(李省身)이 나아가 아뢰기를,
"능침에 오향(五享)을 거행하는 것이야말로 비례(非禮)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예가 번거로우면 어지럽게 된다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이른 것입니다. 그것이 비례라는 것을 알았다면 속히 그만두어야 할 것인데, 양사가 논계한 지가 이미 오래인데도 아직까지 윤허하지 않으시니, 뭇사람들이 상당히 답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곧 조종조로부터 유래된 제사 규정이다. 임진 왜란 때에도 그것을 혁파하지 않았는데 지금 어떻게 폐지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남이공(南以恭)을 특별히 대사헌에 제수하였다.
사신은 논하다. 상이 공의(公議)를 어기고서 특별히 제수하였으니, 이는 공도(公道)를 행하려고 하면서 도리어 한쪽에 치우친 병폐를 남긴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22책 22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365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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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하다. 상이 공의(公議)를 어기고서 특별히 제수하였으니, 이는 공도(公道)를 행하려고 하면서 도리어 한쪽에 치우친 병폐를 남긴 것이다.

 

2월 19일 기사

황해 감사 이여황(李如璜)이 청어(靑魚)를 진상하였다. 청어는 본래 서해에서 잡히지 않고 또 정공(正供)도 아니었다. 그런데 감사 이경용(李景容)이 처음으로 봉진(封進)했는데, 여황이 그것을 이은 것이다.

 

조졸(漕卒) 장풍연(張風連)·박응연(朴應連) 등이 법을 어기고 과거에 응시하여 등과(登科)하였는데, 병조가 삭과(削科)할 것을 계청하니, 상이 따랐다.

 

진 부총(陳副摠)의 접반사 이석달(李碩達)이 치계하였다.
"지난 겨울에 오랑캐 군사들이 희봉구(喜峰口)에 들어와 밀운(密雲)을 약탈하고 곧바로 창평(昌平)을 범하고 유격(遊擊) 1인이 맞아 싸우다 패하였는데 오랑캐의 군사들도 많이 죽었습니다. 총병(摠兵) 조대수(祖大壽)는 지금 옥전(玉田)을 진압하고 원 독수(袁督帥)는 관중(關中)으로 진군했으며 등주(登州)의 수장(守將)은 군사를 점검하여 곧 나아가 구원하려 하고 있는데, 섬의 일만은 아직 정확한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2월 20일 경오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에게 문충공(文忠公), 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에게 문정공(文貞公), 우찬성 구사맹(具思孟)에게 【 인조 대왕의 외조(外祖)이다.】 문의공(文懿公), 영돈녕 한준겸(韓浚謙)에게 문익공(文翼公), 우찬성 이직언(李直彦)에게 정간공(貞簡公), 증 영의정 이수광(李睟光)에게 문간공(文簡公), 지돈령 조존성(趙存性)에게 소민공(昭敏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헌부가 재이(災異)를 인하여 차자를 올리면서 당시의 폐단을 차례로 진달하였는데, 그 끝에 아뢰기를,
"중국 조정의 소식을 접하건대 길하게 될지 흉하게 될지 아직 불확실한 상태이니, 지금이야말로 온 나라가 경황없이 아침 저녁으로 변란을 대비해야 할 시기입니다. 그런데도 풍정(豊呈)의 큰 예를 아직 정지시키지 않고 있으니 조정에 있는 신하로서 그 누가 걱정하며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심지어 인경궁(仁慶宮)을 수리하고 의물(儀物)을 만드느라 너무나도 비용을 허비하여 재력(財力)이 거의 고갈되었으니, 효성을 극진히 하는 성인의 도리는 이렇지 않을 듯싶습니다. 그러나 신들이 단지 재력이 모자란다거나 공사 규모가 크다는 것만 가지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의 변고가 두렵고 적에 대한 보고가 걱정스러우며 백성의 실정이 어떠한지 알 수 있으니, 삼가 원하건대 풍정의 예를 우선 정지시키고 양지(養志)로 근본을 삼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대들의 정성을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내가 불민하긴 하나 감히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겠는가."
하였다.

 

2월 21일 신미

집의 김광현(金光炫)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사간원에 재직하고 있을 때 풍정을 거행하고 음악을 점검하는 것은 타당치 못하다고 감히 전하의 귀를 번거롭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중신(重臣)이 차자를 올려 기롱하고 배척하면서 ‘음악을 익히게 하는 본뜻도 모른다.’고 하고, 또 ‘시마(緦麻)나 소공(小功)을 살피는 짓이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우매하긴 하지만 장악원(掌樂院)을 설치하여 음악을 익히게 하는 것이 종묘 사직의 중함을 위해서라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원의 소식이 아직 길흉을 정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우선 정지하여 스스로 불안해하는 뜻을 간직하자는 뜻에서 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군사를 정돈시켜 중국 조정의 명을 기다리는 것에 대해서는, 신자(臣子)로서 그만 둘 수 없는 의리인데 어찌 이것이 큰일이란 것을 몰랐겠습니까. 다만 지금의 국가 형세로는 쉽게 말할 수 없는 점이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동료들과 이 일에 관해 언급하면서 비분강개하며 애만 태울 뿐이었습니다. 이제 중신의 기롱과 배척을 당했으니, 결코 그대로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2월 22일 임신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동지경연 김기종(金起宗)이 아뢰기를,
"임금 가운데 끝까지 제대로 잘한 분들은 흔치 않습니다. 당 태종(唐太宗)이 가뭄으로 인해 조서를 내려 구언(求言)하자 위징(魏徵)이 열 가지의 조짐을 하나하나 진달하며 처음 시작할 때에 비교하면 크게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태종은 주(周)나라와 한(漢)나라 이후로는 치세(治世)를 이룩한 훌륭한 군주였는데도 이와 같았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위징의 이 상소야말로 크게 비위를 거스르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텐데 태종은 노여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해 또 표창해 드러내 주고 이어 황금 열 근과 어구마(御廐馬)를 하사하였으니, 이는 직언(直言)을 잘 받아들인 경우라 할 것입니다."
하고, 이어 십점소(十漸疏)를 매우 자세히 외우니, 상이 이르기를,
"호판(戶判)은 옛 역사를 적절하게 구사하여 풍간(諷諫)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이를 만하다. 이미 옛일을 말했으니 오늘날의 일에 대해서도 어찌 말할 만한 것이 없겠는가."
하자, 김기종이 아뢰기를,
"신이 지금 하문하심을 받들었으니 감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까. 인경궁(仁慶宮)을 수리하는 데에 그다지 많은 비용이 드는 것은 아닙니다만, 대신(臺臣)이 연계(連啓)하는 것은 물력(物力) 때문이 아니라 실로 그 조짐을 근심해서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 일은 단지 옛 건물을 그대로 두고 수리하는 것뿐인데, 외부에서는 마치 새로 짓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왜 그런가?"
하니, 시독관 이소한(李昭漢)이 아뢰기를,
"옛날 진풍정(進豊呈) 때에는 시어(時御)하시는 궁궐에서 그대로 거행했어도 넉넉하였는데, 하필 인경궁에서 하려고 하십니까. 간관이 극력 간쟁하는 것이 실로 옳지 않은 것이 아니나, 그 논의를 일찍 시작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자전께서 오랜 세월을 유폐되어 계셨는데, 지금 와서 옛날 환란을 당하시던 때를 생각하면 늘 비통한 마음이 사무치며 위로하며 기쁘게 해 드릴 길이 없었다. 그래서 특별히 수석(壽席)을 마련하여 잠시나마 회포를 푸시도록 바랐던 것이니, 내가 어찌 그만둘 수 있는 데도 그만두지 않고 있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참찬관 김경징(金慶徵)이 아뢰기를,
"구언(求言)하신 것은 단지 겉치레였을 뿐입니다. 지난번에 대관(臺官)이 궁가(宮家)에 대해 면세(免稅)해 주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논열(論列)한 것이 한달 가까이 되는데도 전하의 윤허는 더욱 아득하기만 하고 그 밖에 쓸 만한 말들도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고 계십니다. 이로써 본다면 겉치레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고, 이소한이 아뢰기를,
"수령이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그 범죄가 중하면 파직시키고 가벼우면 곤장을 치고 있는데, 어떻게 곤장치는 형벌이 가벼운 것이며 파직이 무거운 것이겠습니까. 옛사람이 이르기를 ‘형벌을 대부 이상에게는 가하지 않는다.’고 했으며, 또 ‘저자에서 매를 맞는 것처럼 부끄럽게 여긴다.’고 하였는데, 이는 신하를 예로써 부려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곤장치는 형벌이 장차 재상과 시종에게까지 미치려 하고 있는데, 벌을 받고 나면 장차 무슨 낯으로 아전들을 호령하겠습니까."
하고, 김기종이 아뢰기를,
"이소한의 말이 맞습니다."
하니, 상이 아무 말이 없었다. 김기종이 아뢰기를,
"국가의 세입(稅入)은 그 액수가 9만을 넘지 못합니다. 그래서 종묘와 사직에 제사지내고 백관에게 녹봉으로 지급하는 비용도 마련하기가 무척 힘든 형편입니다.
신의 계책으로는 풍년이 드는 해를 기다렸다가 양전(量田)을 해서 경계를 정해야 하리라고 여겨집니다. 경계가 일단 바르게 되면 백성들의 원망을 없게 할 수 있을 것이며 나라의 쓰임새도 풍족해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어떤 일이든 간에 백성들이 조금만 비방해도 중도에서 이내 포기해 버린다. 무슨 일을 시작했다가 끝을 보지 못한면 도리어 처음에 시작하지 않는 것만 못할 것이다."
하였다. 김기종이 아뢰기를,
"우선 한 도(道)에서 시험하여 편리한지의 여부를 살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은 시행하지 말라."
하고, 또 이르기를,
"북쪽 사람들을 쇄환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이니, 억지로라도 모두 쇄환토록 하라, 옛적에는 남쪽 지방 사람들을 북쪽으로 이주시켰는데, 지금은 북쪽의 변방 사람들이 대부분 남쪽으로 이주하는데도 금지하지 않으니 참으로 놀랍다."
하였다.

 

2월 24일 갑술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시독관        조위한(趙緯韓)이 아뢰기를,
"임금이 깊이 구중 궁궐에 계시니, 하정(下情)을 어떻게 상달하겠습니까. 따라서 반드시 엄숙한 위엄을 누르고 좋은 낯빛을 꾸며야만 하정을 전달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임금의 공통된 걱정거리는 바로 ‘나는 위대하고 남은 변변치 못하다.[自廣狹人]’고 여기는 데에 있었기 때문에, 이윤(伊尹)이 이처럼 그 임금을 경계시킨 것입니다. 근래에 경연의 신료들이 아뢴 바가 아무리 비천하기 짝이 없다 하더라도 그 가운데 어찌 답할 만한 말이 없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의 모습이 영걸스럽고 굳센데다 아무 말씀도 않고 계시니, 하정이 어떻게 위에 전달되겠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자광협인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고, 검토관        채유후(蔡𥙿後)가 아뢰기를,
"신들이 외람되이 경연에서 모시고 있은 지 이미 여러 날이 지났는데, 상께서는 한 번도 대답을 하지 않으시니, 신이 조정을 물러 나오고 나면 마치 무엇을 잃어 버린 것처럼 허전하기만 합니다. 또 성상을 모시고 있는데도 끝내 하문하지 않으시니, 부질없이 측근에서 모시는 반열에 끼어 있는 이 몸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신의 견해가 고명해진 다음이라야 뜻을 캐어 물을 수 있는 법이다. 의심할 만한 곳이 있거든 연신(筵臣)들끼리 서로 논란해 보도록 하라. 자광협인(自廣狹人)에 대한 경계가 옛날부터 있어 왔고 또 이로 인해 나라를 잃은 역사의 교훈이 멀지 않은데도, 후세의 임금들이 거의 대부분 그런 결과를 면치 못했으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하자, 채유후가 답하기를,
"인군이 반드시 성학(聖學)을 닦아 밝혀서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는 도량을 넓히고 자기 생각을 버리고 남을 따를 수 있게 된 다음에야 이런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참찬관        정기광(鄭基廣)이 아뢰기를,
"공청도(公淸道)에서 실어 온 세곡(稅穀)이 숫자에 미달된다는 이유로 수재(守宰)에게 장률(杖律)을 시행하려 하고 있는데, 이는 염치를 북돋우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전 청주 목사(淸州牧師)        오숙(吳䎘)이 현재 상중에 있는데, 역시 면치 못하게 되어 있어 여론이 모두 온당치 못하게 여기고 있으니, 더욱 마음을 기울여 주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인(喪人)에게는 장률을 시행하지 않는다는 율문(律文)이 있으니 오숙은 품하여 조처하라."
하였다.

 

2월 25일 을해

유성(流星)이 정성(井星)에서 나와 낭성(狼星) 위로 들어갔다.

 

강원도 영월(寧越) 사람 엄여겸(嚴汝謙)이 상소하기를,
"본군은 평창(平昌) 및 정선(旌善)과 삼각지대를 이루고 있는데, 인구가 적고 잔약한 상태가 평창이나 정선 두 고을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두 고을의 공부(貢賦)는 10년 기한으로 전액을 탕감해 준 반면 본군은 부역이 옛날과 똑같으니, 두 고을의 예대로 햇수를 정해 견감해 주소서."
하였는데, 호조가 복계(覆啓)하기를,
"강원도는 전체 전결(田結)의 숫자가 다른 도의 큰 고을 한 곳의 숫자에도 미달되는데, 본군의 결수(結數)는 1백 20결 밖에 안 되니 백성이 가난하고 부역이 무겁다는 것은 과연 소에서 말한 그대로입니다. 다만 고을이 쇠잔하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견감할 경우, 국가의 세입(稅入)을 계속 댈 길이 없습니다. 평창과 정선을 전액 탕감시켜 준 것도 온당한 것인지 모르겠는데, 그것을 근거로 관례화한다는 것은 결단코 허락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함경도 경성(鏡城) 사람 참봉 이란(李蘭) 등이 상소하여 경성부의 피폐된 상황을 아뢰고 여러해 밀린 포흠(逋欠)을 탕감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2월 26일 병자

부제학 조익(趙翼)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생각건대 봄철이 겨우 반을 지나 치양(穉陽)이 용사(用事)할 때니 천둥소리가 치기에는 아직 적당치 않은 때입니다. 그런데도 나무에 벼락이 쳤고 그것도 종묘의 담장 안에 있는 나무였으니, 일찍이 보고 듣지 못했던 일입니다. 인사(人事)에 잘못이 있을 때 하늘이 변괴를 보이는 것이니, 변괴가 괜히 생기는 것이 아닌 만큼 반드시 거기에 응답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미 그것을 초래한 이유가 있다면 반드시 그것에 대응하는 길이 있을 것이니, 크게 놀랍고 두렵게 여기며 크게 깨우쳐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정령(政令)과 행사 가운데 하늘의 뜻에 부합되지 않는 것들은 일체 개혁해야만 실제로 하늘에 응답하는 것이 될 것이고, 자질구레하게 형식적으로만 처리해서 책임을 메꿀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늘은 모두 우리 백성들로부터 보고 듣는데, 화평한 기운은 서기(瑞氣)를 부르고 괴이한 기운은 재이(災異)를 초래하는 것이고 보면, 반드시 백성들의 삶이 고달프고 괴로워 근심하고 원망함으로 말미암아 초래되었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지금 포흠(逋欠)을 독촉해서 징수하는 한 가지 일만을 말한다 하더라도 여러 고을의 부담으로 되어 있는 포흠이 모두 꼭 백성들이 완악스럽기 때문에 빚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는 대체로 백성의 힘이 고갈되고 도망쳐 떠돌아 다니는 자가 많기 때문인데, 혹 가난해서 제대로 납부하지 못한 것도 있을 것이며 혹 도망쳐서 징수할 수 없는 것도 있을 것이며 혹은 이미 납부하였는데도 관리가 도적질한 것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러한 여러 종류의 포흠들을 일시에 징수한다면, 혹 현재 남아 있는 자들이 도망친 자의 부역을 떠맡아야 할 것이며 혹 이미 납부한 자들이 거듭 징수당하는 환란이 생겨날 것입니다. 가난하고 쇠잔한 백성들에게 여러 해 동안 쌓인 부역을 감당시킨다는 것은 형세상 불가능한 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수령들이 제대로 독려하여 징수하지 못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할 것인데, 이제 와서 수령이 백성들의 호감을 사 명예를 구하려고 했다는 죄목으로 모두 다스리려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할 경우 아마 지금부터는 관리로 있는 자들이 감히 다시 너그러운 정사를 펼치려 하지 않고 다투어 각박하고 급하게 굴테니 백성들이 더더욱 견디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또 요즈음 서울 백성들의 일을 보건대 서울에서 부역의 책임이 있는 백성은 오직 시정(市井) 사람들뿐입니다. 그런데 시정 백성들은 여러 차례 황급하게 도피해야 할 일을 겪었는가 하면 잇따라 흉년을 만났으니, 그들이 축적한 재화(財貨)나 장사로 취득한 이익이 어찌 능히 전날만 하겠습니까.
게다가 중국이나 호인(胡人)과의 무역에서 손해본 것이 거의 1천 금(金)에 이르고 있으니, 이것이 시정 백성들이 거듭 곤궁해지게 된 연유입니다. 요즈음 풍정(豊呈)에 소용되는 것과 상방(尙方)의 의물(儀物)을 마련하는 일, 그리고 별궁(別宮)을 수리하는 등의 일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고 있는데, 이 시정 백성의 힘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서울의 각 시정 백성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허다한 일들을 감당하게 되었으므로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들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렇게 보면 서울이나 지방이나 원망하며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똑같다 하겠습니다.
풍정을 거행하는 것도 본시 때가 아닌 듯합니다. 풍정은 곧 풍년이 들고 형통하여 기쁘게 즐거워한다는 뜻이니 반드시 시절이 화평하고 농사가 풍년이 들어 사방이 걱정이 없는 시절이어야만 거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늘이 바야흐로 엄하게 노하시고 백성들이 깊이 원망하고 있으며 오랑캐들이 위세를 뽐내고 있어 근심과 걱정이 헤아릴 길이 없으니, 그야말로 두려워하고 걱정해야할 시기입니다. 어찌 대대적으로 즐기며 노는 일이 마땅하겠습니까. 자전께서도 당초 재삼 하교하시며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셨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뜻이니, 전하께서 진실로 그 뜻을 받들어 따르셔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만일 부득이하다면 추수 때를 기다려 하라는 자전의 분부대로 하시는 것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전하의 마음이 본래 자전을 위로하여 기쁘게 해드리려는 데서 나온 것이고 보면, 이 또한 이른바 ‘허물을 보고 어짊을 안다.[觀過知仁]’는 것이라고 할 만합니다만, 지금 태묘(太廟)의 변괴를 볼 때 그 놀랍고 두려운 것은 다른 재이(災異)에 견줄 바가 못됩니다. 그런데도 아무 거리낌없이 행한다면 거의 하늘의 경계를 소홀히 하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능침에 오향(五享)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본래 올바른 사전(祀典)이 못됩니다. 대체로 사명일(四名日)에 묘소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나라의 풍속이라고 하지만 또한 예경(禮經)에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사시 정제(四時正祭)를 이미 종묘에서 지내면서 또 다시 거듭 능침에서 지낸다면,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이 무슨 의리입니까. 조종조에서 지내오던 제사일지라도 근거가 없고 올바르지 않은 것이라면 진실로 소급해서 고쳐야 마땅한데, 더구나 이미 없앤 제사를 다시 지내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그대들의 정성을 무척 가상하게 여긴다. 차자의 내용이 매우 타당하니, 채택해 시행치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2월 27일 정축

대마도주(對馬島主) 평의성(平義成)이 예조에 서계(書契)를 올리기를,
"귀국의 이씨(李氏) 성을 가진 사인(士人)이 일찍이 포로가 되어 몇 년 간 본국의 살주(薩州)에 있었는데, 지난 겨울에 주주(州主)가 우리 섬으로 보내왔습니다. 그리고 표류해 온 사람이 아홉 명인데, 이번에 모두 함께 쇄환해 보냅니다."
하였는데, 예조가 예물과 서첩(書帖)을 보내 사례하였다.

 

춘신사(春信使) 박난영(朴蘭英)이 심양(瀋陽)에 있으면서 치계하였다.
"신은 정월 초순에 심양에 도착하였습니다. 중남(仲男)이 찾아와 말하기를 ‘오늘 요토(要土)와 호구(虎口) 두 장수가 유해(劉海)의 아우를 사로잡아 멀지 않은 지역에 와 있다.’고 하면서 신에게 가서 그들을 만나보라고 하기에, 신이 답변하기를 ‘사신은 명을 전할 따름이다. 어찌 감히 다른 일로 한 걸음이라도 내딛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러자 중남이 신의 군관인 이형장(李馨長) 등 두 사람을 파견하여 줄 것을 청하기에, 신이 그것은 허락했습니다.
하루 뒤에 이형장 등이 돌아와 말하기를 ‘중남과 함께 요토와 호구 두 오랑캐 장수를 60리 밖에서 맞아 만났는데, 호장(胡將)이 포로로 잡은 남녀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하였습니다. 이어 한(汗)이 관중(關中)에 들어간 일을 물었더니, 말하기를 ‘한은 몽고 지방으로부터 홍산구(紅山口)에 들어가고 대왕자(大王子)는 마래구(馬來口)로 들어가 혹 장성의 문을 습격하기도 하고 혹 장성을 깨뜨리고 들어가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지난해 겨울 10월 그믐부터 향하는 곳마다 큰 승리를 거두어 준화(遵化)·영평(永平)·계주(薊州) 등 30여 성을 잇따라 함락시키고, 북경(北京)의 병사들과 황성(皇城) 밖 5리쯤 떨어진 지역에서 전투를 벌여 무찌른 뒤, 북경의 서북쪽으로 70리쯤을 넘어가 양현(梁縣)에서 말을 먹이며 몽고 병사들로 하여금 누가교(樓哥橋)를 지키게 하고 북경을 진격하여 포위해 20여 일을 보냈다. 금년 1월이 되자 한이 군마를 모두 거느리고 영평부(永平府)로 물러나 주둔하고 있는데, 명나라 대장들이 많이 죽었고 원 경략(袁經略)도 감옥에 갇혀 있다.’고 하였습니다.
며칠 뒤에 홀합(忽哈)·용골대(龍骨大)·중남 등이 신에게 말하기를 ‘사신이 왜 이다지도 더디게 오는가. 이는 필시 우리 나라가 남조(南朝)와 한창 전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에 승패를 관망하려고 해서 그런 것일 것이다.’ 하기에, 신이 답변하기를 ‘한이 군사를 이끌고 나갔다는 말을 듣고는 명을 전할 곳이 없을까 염려해서 지체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하였더니, 골대(骨大)가 좌우를 물리치고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원공(袁公)030)  이 과연 우리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일이 누설되어 체포당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필시 반간계(反間計)를 쓰는 말일 것입니다.
신이 골대와 중남 등에게 말하기를 ‘가지고 온 국서와 예단(禮單)은 어떻게 전해야 하겠는가?’ 하였더니, 용골대 등이 말하기를 ‘한이 지금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사신은 머물면서 기다려야 하겠다. 돌아오면 사람을 보내 귀국 사람들과 함께 내보내겠다.’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말하기를 ‘중남이 처음에 말하기를 「진영에 머물고 있는 왕자가 충분히 응접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에 급히 춘신(春信)의 예를 갖추어 말을 몰아 들어왔는데, 지금 나를 잡아두려고 하니, 이는 크게 서로 믿음이 없는 짓이다.’ 하였더니, 용골대가 마침내 일어나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 돌아와서 이왕자(二王子)의 뜻을 전하며 말하기를 ‘중남이 의주(義州)에서 「사신을 응접할 수 있다…….」라고 한 것은 과연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한이 오래지 않아 곧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귀국의 사신과 몽고 등 여러 지역의 사자들이 모두 머물러 기다리고 있는 것인데, 사신은 어찌하여 이처럼 의심을 내는가. 금나라와 귀국과는 이미 하늘을 두고 맹서하였으니, 모든 일에 부디 의심을 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비국이 호인(胡人)과 삼화(蔘貨)를 무역하는 일 등을 가지고 아뢰기를,
"당초 개시(開市)하는 장소를 의주(義州)로 정했던만큼 안주(安州)까지 깊이 들어온 것은 이미 약조에 위배됩니다. 그리고 왕래하고 교역할 때에 반드시 한(汗)의 증명서를 소지하고 오게 한 것은 두 나라의 통호(通好)를 중시하는 뜻에서였는데, 지금은 국서(國書)도 없이 여러 바리의 삼(蔘)을 싣고 와 안주에서 교역하니, 매우 타당치 못한 일입니다. 결코 따를 수 없는 일이니 이런 뜻으로 굳게 거절하고, 만일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관향(管餉)하는 신하를 순안(順安)과 숙천(肅川) 사이로 보내 형세를 보아가며 대책을 강구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전부터 호차(胡差)가 안주에 도착할 경우 병사(兵使) 정도로는 그들의 업신여김을 당하였으니, 감사로 하여금 잠시 안주에 가 혹 여러 가지로 타이르기도 하고 혹 이치를 들어 극력 쟁집(爭執)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8일 무인

조정이 황성(皇城)의 포위가 풀렸다는 소식을 듣고, 상에게 정전(正殿)으로 다시 나아갈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9일 기묘

천문학 교수 홍경립(洪敬立)이 상소하기를,
"하늘은 본래 헛되이 경계를 보이는 법이 없습니다. 대체로 재변과 허물이 아래에 있으면 천상(天象)에 나타나는 법이니, 별들의 운행이 어긋나는 것은 모두 인사(人事)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젊어서부터 천관(天官)에 소속되어 조금은 《성전(星傳)》을 알고 있는데, 감히 눈으로 본 것을 가지고 우러러 어리석은 의견을 아뢸까 합니다.
삼가 보건대 지난해 봄에 세성(歲星)이 흰 빛을 내면서 광채가 없었으니, 이는 보통 변괴가 아닙니다. 신이 삼가 살펴 보건대 《성전》에 ‘세성의 빛이 희고 광채가 없으면 외적이 침입해 오고 전쟁이 함께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세성은 소양(小陽)의 속성을 발휘하는 임무를 맡은 별로서 위치는 정동(正東)이고, 태세(太歲)031)  가 바뀌는 것과 표리관계를 이루기 때문에 세성이라고 이름하며 복덕(福德)을 주관하고 있는데, 이렇듯 변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가을과 겨울에는 형혹성(熒惑星)이 오래도록 동정성(東井星)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신이 삼가 살펴 보건대 《성전》에 ‘원봉(元封)032)  중에 혜성이 은하수 분야에 나타났는데, 태사(太史)가 점을 치기를 「남수(南戍)는 월문(越門)이고 북수(北戍)는 호문(胡門)이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 한(漢)나라 군사가 조선(朝鮮)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낙랑(樂浪)·현도(玄菟) 등 군(郡)을 세웠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조선은 바다 가운데 있으니 월(越)나라를 상징하고 북쪽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호인(胡人)의 지역을 나타내는데, 남수는 남하성(南河星)이고 북수는 북하성(北河星)입니다. 두 별자리 사이가 비록 삼광(三光)033)  이 지나는 길목이기는 하나 모두 동정성(東井星)에 속한 별들입니다. 은하수에 혜성이 떠돌아도 이와 같은데, 더구나 지금 형혹성의 변괴야 더욱 어떻게 말로 다하겠습니까.
또 지난 겨울에는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났는데 미방(未方)까지 갔을 때 밤이 되었습니다. 신이 삼가 살펴 보건대 《성전》에 ‘태백은 소음(少陰)이라서 미약하여 전 궤도를 운행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방(巳方)과 미방까지를 운행하여 경계선으로 삼는데, 저녁에 미방에 이르려고 할 때는 시간이 지체되나 아침에 사방으로 향할 때는 속도가 빠르다.’고 하였고, 이에 대한 점괘는 ‘많은 사람들이 떠돌아다니게 되고 전쟁이 아울러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또 태양이 솟아오르면 별은 사라지는 것이 상례인데, 지금 태백이 태양을 범한 지가 여러 달이나 되었습니다. 이런데도 어찌 끝내 이에 대한 반응이 없겠습니까. 아, 세성은 동쪽을 주관하고 형혹성은 남쪽을 주관하며 태백은 서쪽을 주관합니다. 별들이 나뉘어 각기 주관하는 바가 있는데 세 별자리가 모두 어긋나고 흉한 징후가 거듭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자(朱子)는 ‘별자리가 잘못 나타난 쪽에 재앙이 발생한다.’고 하였는데, 이로써 본다면 한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번 갑자일 아침에 엄청나게 천둥 번개가 쳤는데, 그것도 도성 밖이 아닌 도성 안이었으며 여염이 아닌 태묘(太廟)였습니다. 천둥 소리가 진동하여 신좌(神座)를 놀라게 하였으니 이 어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경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옛날 인군의 한마디 말씀으로 인해 형혹성이 자리를 물러 앉았고, 태평한 세상에서는 해가 일식을 해야 하는데도 일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인군의 동정(動靜)이 은연중 하늘의 마음과 감응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 두려운 마음으로 반성하시어 하늘의 견책에 응답하심으로써 재앙을 변화시켜 상서가 되게 하신다면 국가가 무척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나라를 근심하는 그대의 정성을 가상하게 여긴다. 상소한 내용은 유념하겠다."
하였다.

 

예조 판서 서성이 차자를 올리기를,
"왕실에 어려움이 발생하면 제후가 달려가 구원하는 것이 고금의 공통된 의리입니다. 황성(皇城)이 포위를 당하는 변괴가 뜻밖에 갑자기 일어났는데, 지금의 형편으로 비록 군사를 일으켜 나아가 구원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변방 멀리에서 편안히 즐긴다면 지성으로 사대(事大)하는 성상의 뜻에 흠이 될 듯합니다. 풍정(豊呈)을 거행하는 것이 본디 봉양을 지극히 하기 위한 것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자전께서 두 차례나 정원에 의지(懿旨)를 내려 가을로 물려 거행하게끔 하신 것은 흉년이 거듭되고 동쪽과 서쪽이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화평하고 편안해지는 시기를 기다리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효자가 어버이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으로는 그 뜻을 받드는 것이 첫째입니다. 지금 이 변괴를 듣고 자전께서 마음 속으로 불안하게 느끼시는 것이 반드시 전날보다 더할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풍정의 날짜를 물려 가을이나 겨울을 기다려 기일을 택해 거행하도록 명하소서. 신이 직책상 예악(禮樂)을 관장하고 있기에 감히 이렇게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차하여 아뢴 말들이 매우 마땅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탄복케 한다. 그러나 오랑캐가 이미 물러나 주둔해 있고, 우리 나라로 말하면 이 예야말로 막중한 것이니, 옛날 정했던 그대로 거행하는 것이 무방할 듯하다."

 

2월 30일 경진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시영(李時英)이 치계하였다.
"중남(仲男)이 의주에 도착하여 갖가지로 공갈하며 매우 급하게 말[馬]을 요구하면서 수행한 호인(胡人) 50여 명을 이끌고 용천(龍川)을 통과하여 내지(內地)로 들어가려 합니다."

 

지리(地理)를 볼 줄 아는 사람과 지술(地術)을 아는 조사(朝士)들을 불러 모아 목릉(穆陵)의 천장(遷葬)에 대한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선조 대왕 능의 병풍석(屛風石)이 자주 기울어지는 일이 발생하자 당시에 물이 광내(壙內)에 있지 않나 하고 의심들 하였고, 또 지술을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 지리가 불길하다고 하면서 혹 능을 옮겨야 한다고 말들하였으나 감히 드러내어 말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심명세(沈命世)가 상소하자 뭇 사람들이 거의 그렇다고 의논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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