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일 임오
대열(大閱)하였다. 수석을 차지한 김몽남(金夢南)은 회시에 직부하게 하고 그 나머지 입격(入格)한 2백 90여 명에게는 모두 차등있게 물품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예조 판서 서성이 아뢰기를,
"경수연(慶壽宴)의 습의(習儀)034) 를 장악원에서 거행할 예정인데, 장소가 좁아 도구를 배열하기 어렵고 춤추는 기생들도 대오를 맞춰 동작하기가 용이하지 못합니다. 인경궁(仁慶宮)에 진설하고 점고와 습의를 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판자로 계단을 수리하는 일이 끝난 뒤에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4일 갑신
평안 병사(平安兵使) 유비(柳斐)가 치계하였다.
"호차(胡差) 중남이 수행한 호인(胡人)을 시켜 신에게 말하기를 ‘남조(南朝)의 사신이 오면 무척 후하게 대접하고 선물을 주는 것을 그 때 직접 눈으로 본 자들이 내 진중(陣中)에 많이 있어 내가 모르는 것이 없는데, 지금 우리를 대접하는 것은 도리어 종놈들 대하듯 하고 있다. 그대들이 우리를 멸시하고 있으나 우리의 뜻은 조그마한 데에 있지 않기 때문에 때를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물화(物貨)를 무역하려고 이곳에 온 지 이미 이틀이 지났다. 만약 우리로 하여금 조정의 지휘를 기다리게 하고 있다면 내가 왜 꼭 앉아서 날짜를 허비하겠는가. 실로 경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마땅하니, 급히 말 90필을 내어 나의 행장을 준비하라.’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그를 힐문하기를 ‘물화를 무역하도록 하는 명이 수일 사이에 이를 것이니, 경사로 갈 필요가 없다. 또 차인(差人)이 국서(國書)도 없으면서 어떻게 감히 마음대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중남이 말하기를 ‘만일 말을 내주지 않으면 우리가 우리 말을 타고 내일 즉시 출발하여 우리들 마음대로 잡아 가겠다.’ 하였습니다."
3월 5일 을유
비국이 아뢰기를,
"왜인들에게 선물로 주는 물건이 매우 많아 탁지(度支)로서도 모두 주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사(舟師)에 소속된 노비 6천 5백여 명 중에서 전함(戰艦) 10척을 돌보는 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게 모두 미포(米布)를 징수하여 탁지에 소속시키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진 부총(陳副摠)의 접반사 이석달(李碩達)이 치계하였다.
"중국인 최지고(崔志高)가 등주(登州)에서 부총에게 와서 말하기를 ‘지난 겨울에 황상이 친히 나아와 전투를 독려하였을 때 총병 조대수(祖大壽)와 만계(滿桂)의 공이 제일이었고 유흥조(劉興祚)가 다음이었다. 독수(督帥) 원숭환(袁崇煥)은 적을 놓아주어 관중에 들어오게 한 죄목에 걸려 지금 구금되어 있고 각로(閣老) 손승종(孫承宗)이 대신 그 군사를 거느리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3월 6일 병술
호차(胡差) 중남(仲男)이 순안(順安)에 도착하여 장차 상경하려 하였다. 이에 부총(副摠) 진계성(陳繼盛)이 우리 나라 설관(舌官)을 불러 사람을 물리치고서 말하기를 "호인(胡人)이 지금 안주(安州)에 머무르고 있다 하는데, 내가 그대 나라와 힘을 합쳐 붙잡아 죽이고, 이어 의주(義州)의 성지(城池)를 수리하여 관방(關防)을 삼고자 하니, 빈신(儐臣)으로 하여금 계품하게 하라." 하였다. 접반사 이석달(李碩達)이 이를 치계하니, 상이 묘당의 여러 신료들과 의논하였다. 여러 신료들이 모두 아뢰기를,
"진계성이 설관에게 은밀하게 한 말이 비록 진실한 말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지도 않으니, 병사(兵使) 유비(柳斐)로 하여금 군사를 움직이는 기미를 미리 탐지케 하여 그 즉시 호인들을 몰아 내지로 피난케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9일 기축
중남이 평양에 들어와 인삼 1천 7백 근을 요구하며 갖가지로 공갈협박하자, 감사 김시양(金時讓)이 관향(管餉)으로 비축해 둔 것을 주었다.
3월 11일 신묘
밤에 유성(流星)이 유성(柳星) 위에서 나와 곤방으로 들어갔다.
자전이 인경궁(仁慶宮)으로 행행하자 연(輦)앞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상은 금천교(禁川橋) 서쪽까지 나가 공손히 전송하였는데, 풍정(豊呈)의 예를 거행하기 위해서였다.
부호군 신성립(申誠立)이 상소하기를,
"한 집안 사람이 싸움을 벌이면 머리를 풀어헤친 채라도 구원해야 할 의리가 있는 법인데, 더구나 부모가 어려움에 빠져 있는데도 어떻게 차마 앉아서 구경만 하고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황조(皇朝)는 우리 나라에게 실로 부모의 나라가 될 뿐만 아니라 나라를 재건해 준 은혜가 있습니다.
지금 노적(奴賊)이 중국을 모욕하면서 황성을 바짝 에워싸고 여러 달 동안 풀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번방(藩邦)으로서는 응당 어려움을 구원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텐데, 아직 장수 한 사람을 임명한다거나 군사 한 사람을 징발하여 싸움을 도우는 일이 없으니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원로 중신들이 유독 군사를 조련하여 명을 기다리자는 뜻을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끝내 시행되지 못했으니, 신은 우리 나라가 하늘과 땅 사이에 설 수 있는 면목이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더구나 지금 진 부총(陳副摠)이 이게(移揭)하여 저토록 간절하게 구원을 청하고 있으니, 나라의 형세나 군사의 힘을 논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신자(臣子)의 의리상 어떻게 차마 편안하게 강 건너 불보듯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설령 중국 조정이 저들을 중국의 국경 밖으로 몰아낸다 하더라도 동쪽을 침략해 올 걱정이 없지 않으니, 자강책(自强策)을 더욱 조금도 늦춰서는 안될 것입니다. 군사 수만을 선발하여 황주(黃州)와 평산(平山) 사이에 진주시켜 한편으로는 어려움을 구원하는 의리를 밝히고 한편으로는 국경을 굳게 방어하는 계책으로 삼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일거 양득의 계책이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 소를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우선은 그대로 놔둘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3월 12일 임진
승지를 인경궁(仁慶宮)에 보내 자전에게 문안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내수사가 외방을 침해하여 소요를 일으킨 것이 혼조(昏朝) 때에 극에 달했는데, 그 유폐(流弊)가 지금까지도 개혁되지 않고 있습니다. 전토(田土)와 노비를 찾아 내는 문서로서 이조에 공문을 띄운 것들이 권축(卷軸)으로 쌓였는데, 해조에서는 감히 가부를 말하지 않고 관례대로 도장만을 찍어 내려보내고 있고, 감사와 수령들은 행여 늦을세라 그것을 받들어 행하여 백성들의 원망과 탄식이 그칠 날이 없으니, 어찌 크게 근심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뒤로 모든 쇄괄 공사(刷括公事)는 절대로 계하(啓下)하지 말으시어 민폐를 제거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일은 다시 더 자세히 살펴 조처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중남(仲男)이 왕래하는 사신을 중국 사신처럼 대접해 주기를 청한 것은 약조에도 없는 것인데, 지금 이처럼 말하고 있으니 매우 통탄스럽습니다. 감사 김시양(金時讓)으로서는 엄한 말로 배척했어야 마땅한데, 도리어 공손한 말로 이같이 번거롭게 문답하였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지금부터 응수할 때에는 사리에 의거하여 명백하게 깨우쳐 줌으로써 저들이 알아듣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김시양이 당초의 약조 문서를 보여주어 훗날 응수할 자료로 삼게 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조정이 따랐다.
3월 13일 계사
겸 병조 판서 이귀(李貴)가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앞서 여덟 차례 차자를 올리고 뒤에 여섯 차례 차자를 올리면서까지 그만 두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고 군신(君臣)의 큰 의리를 천하 만세에 밝히려는 목적에서입니다. 어찌 조금이라도 국가에 화를 전가시키려는 마음에서 그러는 것이겠습니까. 신이 아무리 변변치 못하나 임금을 섬기는 의리에 대해서는 조금 압니다. 현재 목소리를 낮춰 소근거리는 무리들은 그저 고식적인 것만을 일삼을 뿐 국가를 위해서는 제대로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역모의 변괴가 자주 일어나고 백성들의 마음이 흩어진 것은 실상 여기에서 기인된 것입니다.
신이 대신이나 대간들과 전후 변론해 다툰 일이 또한 많습니다만, 일이 지난 뒤에는 신의 말을 쓰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 적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지금 미리 정예 군사를 뽑아 황명(皇命)을 기다리자고 하는 것은 모두가 국가를 위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니, 한갓 큰 소리만 치는 것에 비유될 수 없는 일입니다. 진실로 의리를 가지고 말한다 하더라도 군부(君父)가 포위를 당했다는 소문을 들은 이상 우리의 병력을 모두 모아 곧바로 그들의 소굴을 짓밟는 것이 옳을 것이며, 이해를 따져 말한다 하더라도 저들도 군신의 큰 의리를 알고 있으니 또한 반드시 이를 빌미로 흔단을 만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비국이 따를 수 없다고 회계하니, 상이 따랐다.
3월 14일 갑오
해에 우이(右珥)가 있었다. 달이 토성(土星)을 범하였다.
상이 인경궁(仁慶宮)에 거둥하여 자전에게 문안하였다. 소여(小輿)에 올라 원(苑)의 북쪽문으로 나가니 정원과 옥당의 여러 신료들이 흑단령(黑團領)을 입고 수행하였다. 이날 저녁에 상이 환궁하였다.
우의정 이정구(李廷龜)를 보내 술관(術官)과 지술(地術)을 아는 조사(朝士)들을 이끌고 목릉(穆陵) 안의 여러 언덕을 살피도록 하였다. 전 감사 최현(崔晛), 병조 좌랑 이상형(李尙馨), 전 현감 박홍중(朴弘中), 신령 현감(新寧縣監) 성력(成櫟), 전 참봉 성여춘(成汝櫄)이 참여하였다.
이석달(李碩達)이 치계하기를,
"부총(副摠)이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도사(都司) 유흥치(劉興治)와 【 유해(劉海)의 아우이다.】 배를 타고 바람을 기다리는데, 휘하 한 사람이 은밀히 말하기를 ‘부총의 이번 길은 호차(胡差)를 사로잡아 훗날 책임을 메꾸려 하기 위해서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진 부총의 휘하가 은밀히 전한 말은 그 이치가 없지 않을 듯합니다. 이를 중남(仲男)에게 통지하여 의외의 환란을 면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따랐다.
3월 15일 을미
유성이 직녀성(織女星) 아래에서 나와 대각성(大角星)으로 들어갔다.
3월 16일 병신
식년 문과 전시(式年文科殿試)를 거행하여 정시망(鄭時望) 등 33명을 뽑았다.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특진관 최명길(崔鳴吉)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 가을 병조에 재직할 때 강무(講武)하는 자리에 상을 수행하였는데, 여러 신료들이 성(城) 위를 돌아보며 모두들 기쁜 낯빛으로 말하기를 ‘자전께서 10년 동안 유폐(幽閉) 생활을 하신 나머지에 성에 나오시어 구경까지 하게 되셨으니 이 또한 성대한 일이다.’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도 그렇게 여겨졌는데, 곁에 있던 어떤 늙은 아전이 홀로 언짢은 기색으로 말하기를 ‘이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옛날에 있지 않았던 일이다.’고 하기에, 신이 다시 생각해 보니 과연 타당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전이 성에 나아가 구경하셨다는 말은 실로 거리의 허무맹랑한 소문에서 유래된 것이다."
하였다. 자전이 지난 가을 초정(椒井)에서 목욕하기 위해 인경궁(仁慶宮)으로 행행하다가 모화관(慕華館)의 강무(講武)에 친림하는 상의 행차와 우연히 마주쳤다. 그런데 인경궁 담장이 성과 가까이에 있고 성 밖을 내려다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자전이 내전(內殿) 및 여러 비빈(妃嬪)들과 함께 성 위에 나와 구경하였다는 말이 외간에 꽤나 전파되었다.
해창군(海昌君) 윤방(尹昉)이 삼공 및 예관(禮官)과 함께 아뢰기를,
"목릉(穆陵)의 형세에 대해서는 별단 서계(別單書啓) 가운데 모두 갖추어 말씀드렸는데 이미 예람(睿覽)하셨을 것이니 신들이 다시 의논드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모두 건원릉(健元陵)035) 의 두 번째 언덕이 매우 길한 곳이라고 말하고들 있는데, 이곳은 실로 경자년036) 에 선왕께서 정해 놓으신 곳으로서 훗날 쓰기 위해 남겨놓은 자리입니다. 따라서 이 언덕으로 옮겨야 마땅할 듯한데, 막중한 일이니만큼 다시 더 살펴보게 해야 하겠습니다. 재혈(裁穴)과 천릉(遷陵) 등의 일을 해조로 하여금 관례를 고찰하여 거행케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재혈하는 일은 나라에서 쓸 자리로 치부(置簿)해 놓은 곳들을 모두 살펴보고 다시 의논하여 정하라."
하였다.
3월 17일 정유
상이 인경궁(仁慶宮)에 거둥하여 자전에게 문안하고 환궁하려 할 때 비가 쏟아져 그대로 머물렀다. 자전이 시위 장사 및 승지 김경징(金慶徵) 등에게 주찬(酒饌)을 내렸다. 병조가 아뢰기를,
"시어소(時御所)에는 도감(都監)037) 의 대장이 군사를 인솔해서 신영(新營)에서 직숙(直宿)해야 하니, 오늘 밤에는 대장이 이곳 궐문 밖으로 와 직숙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훈국(訓局)038) 이 아뢰기를,
"출궁하실 때 무덕문(武德門)으로 나왔기 때문에 입직(入直)한 군사로만 호위하였습니다만, 이제 이곳에서 밤을 새워야 하는만큼 호위를 엄히 하지 않을 수 없으니, 하번(下番) 군사를 모두 소집하여 들어와 시위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밤에 소집하면 폐단이 있을 것이니 그대로 놔 두어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천릉(遷陵)은 막대한 일인데 난리를 치른 뒤로 문서들이 유실되어 의거해 증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춘추관(春秋館)으로 하여금 전후 천릉할 때의 실록 및 등록(謄錄)을 속히 찾아내게 하여 의거해 고찰해서 준행할 수 있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18일 무술
비가 개었다. 상이 인경궁에 있었다. 정언 이상질(李尙質)이 아뢰기를,
"무덕문(武德門)으로 소여(小輿)가 거둥한 것만도 이미 구차하기 짝이 없는 일인데, 비로 인해 환궁하지 못했으니 일이 매우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비가 내리지 않고 꼭 쾌청하리라고 보장하기 어려우니, 법가(法駕)를 서둘러 준비하도록 하여 정로(正路)로 환궁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왔던 길로 가겠다."
하였다. 병방 승지 이기조(李基祚)가 아뢰기를,
"어제 날이 저물었기 때문에 일들이 대부분 바쁘고 두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훈련 도감 대장 신경진(申景禛)은 장관(將官) 한 사람의 말만 듣고 다시 자세히 살피지 않은 채 지레 먼저 군사를 모아 들였으니 경솔하게 행동한 잘못을 면키 어렵습니다.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관상감이 아뢰기를,
"신들이 경자년 이후로 인산(因山)할 때의 등록(謄錄)을 가져다 살펴 보면서 여러 술관(術官)들과 상의해 보았더니, 치부(置簿)된 곳이 많긴 하지만 쓸 만한 자리가 없다고들 하기에, 근년에 원소(園所)를 의논하여 정할 때 거론된 곳들을 가서 살펴 보았습니다. 그 결과 그 중에서 가장 나은 곳이 고양군(高陽郡) 자리, 교하읍(交河邑)이 들어서 있는 곳, 수원(水原)의 객사 뒤편, 포천(抱川)의 신평(新坪), 양주(楊州)의 와촌(瓦村), 광주(廣州) 임영 대군(臨瀛大君)과 이지방(李之芳)의 두 묘, 고양 김천령(金千齡)의 묘 등 모두 여덟 곳이었는데, 그곳도 모두들 쓸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수원(水原)의 자리가 쓸 만하다고 말하나 철거해야 할 관사(官舍)와 민가(民家)가 무려 1천여 호나 되기 때문에 당시 의논하여 정할 때에 이미 바로 그 사유를 아뢰었으니, 지금 그곳을 가서 본다 하더라도 도움이 없을 것입니다. 또 광주(廣州)는 일찍이 유릉(裕陵)039) 의 자리를 잡을 때 선조 대왕께서 ‘무엇 때문에 강 건너편에 쓰려고 하는가.’ 하고 분부하셨으니, 지금 가서 본다 해도 그 곳을 쓰기는 미안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수원과 광주는 가서 볼 필요가 없다. 여러 능 가운데 쓸 만한 곳이 있거든 모두 가서 살펴 보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9일 기해
관상감이 아뢰기를,
"여러 능 가운데 국용(國用)으로 치부(置簿)된 곳은 헌릉(獻陵)040) 의 백호(白虎) 안쪽 언덕, 광릉(光陵)041) 의 화소(火巢) 안, 태릉(泰陵)042) 의 재실(齋室) 뒤편 등 모두 세 곳입니다. 그런데 술관들이 말하기를 ‘태릉과 광릉 안에는 모두 쓸 만한 곳이 없다. 다만 듣건대 영릉(英陵)043) 의 화소 안에 길한 자리가 있다고 한다.’ 하였는데, 그곳 역시 강 건너 땅이기 때문에 어제 감히 서계(書啓)하지 못했습니다.
일찍이 유릉(裕陵)의 자리를 잡을 때 의논이 매우 분부하였는데, 혹은 ‘술관들이 사사로운 인정 때문에 사대부 집안의 좋은 묏자리들은 말하지 않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선조 대왕께서 특별히 엄한 분부를 내려 술관들로 하여금 각각 밀봉(密封)을 올리게 해 숨기거나 감추지 못하게 한 까닭에 술관들이 서계(書啓)한 곳이 무려 40여 군데나 되었습니다. 그 당시 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 좌윤 성영(成泳), 승지 김시헌(金時獻) 등이 풍수설을 잘 안다고 하여 마침내 중국 사람 섭정국(葉靖國)·이문통(李文通)과 술관 박상의(朴尙義)·이의신(李懿信) 등을 대동해 거느리고 여러 산들을 살펴 보도록 하였는데, 임영 대군(臨瀛大君)과 이호민(李好閔) 부모의 묏자리가 조금 낫다고 하였으므로 선조 대왕께서 이호민 부모의 묏자리로 잡아 쓰도록 명했으나, 광중(壙中)에서 물이 나와 마침내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실은 등록을 상고하면 모두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여러 묏자리를 모두 국용으로 치부하지 않은 것은 일시적으로 밀봉하여 올리도록 한 데서 나온 것으로, 선조께서도 이미 그것들이 부적합하다는 것을 알고 내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제 여러 술관들과 상의하여 다시 살펴보기를 청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들이 비록 변변치는 못하나 이 일이 얼마나 큰 일인데, 감히 어디를 두둔하여 숨길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술사들의 안목도 피차 다름이 없을 수 없고 천지의 조화 역시 혹 시기를 기다렸다가 나타날 수도 있으니, 한번 결정된 견해라고 하여 그것에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에 살펴볼 때 치부가 되었는지의 여부에 구애받지 말고 적합한 곳이 있거든 일일이 살펴보고 오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영의정 오윤겸(吳允謙)이 차자를 올리기를,
"성왕(聖王)의 사업은 지력(智力)이나 공리(功利)를 가차(假借)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성인의 학문을 근본으로 삼은 뒤에야 계획하고 시행하는 일들이 모두 마땅하게 될 것인데, 성인의 학문이란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학(大學)》 속에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삼대(三代)의 가르침도 오직 이 법이 있을 뿐으로서 예로부터 성현들 모두가 이 책을 통해 공부하여 종신토록 활용하였으니, 제왕들이 수신(修身)하고 치국(治國)하는 도리도 이 책을 버리고 달리 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논어(論語)》나 《맹자(孟子)》 같은 책도 다 성현의 절실하고 요긴한 말들이기는 하나 모두 일에 따라 문답한 것으로서 그저 한 가지 항목의 일에 관한 한 가지의 도리를 설명한 것이니만큼, 이 책처럼 학문하는 큰 길을 총설하여 그 규모와 절목과 전후의 순서들을 질서정연하게 제시함으로써 한번 책을 펼치면 바로 이해할 수 있게 한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학문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두었다면 당연히 이 책을 반복해서 충분히 익히면서 온 정신을 다 들여 체득하고 순서대로 공부해야 할 것이니, 잠시라도 내 몸에서 떠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옛날 윤화정(尹和靖)은 이천(伊川)을 만난 뒤로 반 년 동안 이 책만을 열심히 읽었고, 주자(朱子)도 ‘내가 평생 동안 기울인 정력이 모두 이 책 속에 들어 있다.’ 하였으니, 성현들이 이 책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이 책을 이미 오래도록 강독하셨으니, 성학(聖學)이 고명하시어 이 책의 규모와 절목이며 글의 뜻과 구두에 대해서는 이미 훤히 꿰뚫고 계시리라 여겨집니다만, 몸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으로 체득한 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책을 읽는 목적은 장차 그것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가령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읽었다면 모름지기 격물에 대한 공부에 실제로 공력을 들여 그 앎에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그저 이처럼 읽기만 하고 실제로 이같이 실천하지 않는다면 읽은 책들이 얘깃거리에 도움이 되거나 문필(文筆)을 매끄럽게 해 줄 뿐, 몸이나 마음에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늘 이 책을 책상에 놓아두고 펼쳐 읽으면서 날마다 그 깊은 뜻을 음미해 보소서. 그리고 다른 책을 읽더라도 그 책에서 말하고 있는 도리를 이 책의 조목(條目)에 적용하여 일일이 꿰어 맞춰 보충해서 이해하고 서로 발명(發明)되게 하소서. 또 마음을 쓰고 일을 조처할 즈음에도 반드시 이 책을 기준으로 삼아 낮에 행한 것들을 밤에 하나하나 징험해 보소서. 그리하여 합당하지 않는 행동이 있거든 두려운 마음으로 그것을 따라잡지 못할 것처럼 고치시고, 편벽된 성품이 있거든 더욱 크게 반성하여 극복하도록 공력을 기울이소서. 그러면 제가(齊家)하고 치국(治國)하는 도리로 자연 미루어 넓혀져 차서가 있게 될 것입니다. 다시 원하건대 전하께서 날로 자신의 덕을 새롭게 하여 신민(新民)하는 근본으로 삼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지극한 정성을 깊이 가상하게 여긴다. 내가 불민하기는 하나 가슴에 새겨 노력하겠다."
하였다.
3월 20일 경자
상이 인경궁(仁慶宮)에 거둥하여 자전을 문안하고, 이어 "풍정(豊呈)을 끝낸 뒤에 환궁하겠다."고 하교하였다. 정원이 별궁(別宮)은 지존(至尊)이 여러 날 묵으실 곳이 못 된다는 이유로 환궁하기를 계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기조(李基祚)가 아뢰기를,
"대가(大駕)가 앞으로 여러 날 이 궁에 머무르실 경우, 훈련 도감의 군사들을 옛날 관례대로 합번(合番)하여 시위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합번하게 하지 말고, 경덕궁(慶德宮)의 안팎을 수직(守直)하는 군사들을 이곳으로 데리고 와 시위하게 하라."
하였다.
평안 병사(平安兵使) 유비(柳斐)가 치계하기를,
"이 달 17일에 유흥치(劉興治)가 갑병(甲兵) 5백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 어귀에 배를 대자, 부윤 이시영(李時英)이 호차(胡差) 중남(仲男)에게 ‘중국인들이 보병이라고는 하지만 모두 갑병인데, 교전하게 되면 의주 백성들이 반드시 엉뚱한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니, 급히 피하도록 하라.’ 하니, 중남 등이 물화(物貨)를 모두 내버리고 삭주(朔州) 쪽으로 달아났습니다. 조금 뒤에 중국인들이 진격하여 성을 포위하였는데, 부윤이 호인(胡人)이 이미 도망쳤다고 통보하고, 이어 성에서 나와 그들을 만나니, 유흥치가 ‘너야말로 호인과 한 통속이기 때문에 도망치게 한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부윤을 결박하고 난타하였습니다. 또 우리 나라 사람이 급히 달려가는 것을 보고는 호차에게 청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다시 성 안으로 들어와 창고를 부수고 백성들에게 활을 마구 쏘았는데, 부윤도 화살에 맞았으며 호인의 짐을 모두 약탈당했습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승문원으로 하여금 자문을 짓게 해 군사들의 행패를 낱낱이 적어 말하고 특별히 더 단속해 주기를 청하는 뜻을 총진(摠鎭)에 통지하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1일 신축
이조가 천릉(遷陵)할 때의 빈전(殯殿)·국장(國葬)·산릉(山陵) 등 세 도감(都監)의 당상과 낭청을 차출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좌의정 김류(金瑬)를 총호사(摠護使)로, 서성(徐渻)·김자점(金自點)·한여직(韓汝溭)을 빈전 도감 당상으로, 서성·신경진(申景禛)·김기종(金起宗)을 국장 도감 당상으로, 이서(李曙)·윤신지(尹新之)·심기원(沈器遠)을 산릉 도감 당상으로, 여이징(呂爾徵)·윤황(尹煌)·김광혁(金光爀)·권도(權濤) 【 뒤에 체직되어 이소한(李昭漢)이 대신하였다.】 ·고부천(高傅川)·조위한(趙緯韓) 【 뒤에 체직되었다.】 등을 세 도감의 도청(都廳)으로 삼았다.
한명욱(韓明勗)을 동지사 겸 성절사로, 김수남(金秀南)을 서장관으로, 정두원(鄭斗源)을 진위사로, 이지천(李志賤)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3월 22일 임인
상이 인경궁에서 진풍정(進豊呈)의 예를 거행했는데, 아홉 번 술잔을 올리고 파하였다. 다음날 환궁하였다.
문화 현감(文化縣監) 이수원(李樹元)이 역적 한명련(韓明璉)의 처족(妻族)인 승려 종민(宗敏)과 이계복(李季福)을 체포하여 조정에 보고하니, 모두 풀어주라고 명하였다.
3월 23일 계묘
전라 병사 정응성(鄭應聖)이 치계하였다.
"남원(南原)은 풍속이 모질고 사나운데, 평소 살인계(殺人契)란 것이 있다고 일컬어져 왔습니다. 그런데 이 달에 구례현(求禮縣)의 민가에 도적떼가 갑자기 들이닥쳐 살인하였는데, 본부가 길목에서 기다렸다가 20여 명을 체포하였습니다."
3월 25일 을사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시영(李時英)의 체직을 명하였는데, 중국인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했기 때문이다.
3월 26일 병오
헌부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와 중국 조정은 의리로는 군신간이고 정으로는 부자간입니다. 버러지같은 저들 흉악한 무리가 황성(皇城)을 에워싸고 핍박하여 황상께서 이미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쓰게 되었으니, 국가의 어려운 형세나 병력의 강약을 따질 것 없이 우리의 도리로서는 당연히 죽기 살기로 나서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미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하러 나가지도 못하였고 또 제 때에 맞추어 달려가 위로하지도 못했으니, 대의로 헤아려 볼 때 통한스러운 심정을 어떻게 금할 수 있겠습니까. 진위사(進慰使)의 사행(使行)에 병기(兵器)로 방물(方物)을 대신하여, 한편으로는 전쟁에 임해 싸움을 돕는 도구로 삼게 하고 한편으로는 원수인 적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 뜻을 보이소서.
그리고 여무(女舞)와 악공(樂工)을 불러 모은 것이 아무리 풍정(豊呈)과 관계 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이처럼 변란에 대처해야 할 위급한 때를 당해 이들 무리를 그대로 머물게 할 수는 없으니, 속히 파하여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가평 군수(加平郡守) 유백증(兪伯曾)이 상소하였다.
"신이 전일 전하께서 구언(求言)하신 분부를 삼가 보건대, 재앙을 만나 하늘을 공경하고 반성하여 자책하는 말씀의 뜻이 간절하셨기에, 신이 엎드려 읽으면서 감격의 눈물이 저절로 방울져 떨어졌습니다. 신하가 충성을 바치는 데에는 진실로 안팎이 있을 수 없기에 감히 기휘(忌諱)에 저촉되는 것을 꺼리지 않고 평소 가슴에 품었던 것들을 모두 말씀드릴까 하니,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을 평온히 하고 살펴 주소서.
대저 사람에게 사정(邪正)이 있는 것은 천지에 음양(陰陽)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당요(唐堯)의 세상에도 사흉(四凶)이 조정에 있었고 주(周)나라 성왕(成王) 때에도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헛소문을 퍼뜨렸는데, 더구나 말세가 되어 바른 사람은 적고 사특한 사람이 많은 지금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군자와 소인은 각기 그들대로 벗이 있어 군자가 나아가면 국가가 다스려지고 소인이 등용되면 나라가 망하니, 이것이 이른바 군자 한 사람이 나아가면 여러 군자가 나아가고 소인 한 사람이 물러나면 여러 소인이 물러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붕당은 이와 다릅니다. 처음이야 그들에 대해 시비를 논할 수도 있었겠지만 동서(東西)로 분당된 이후 5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선 사정이 다릅니다. 아무리 손자가 할아버지의 실마리를 계승하고 아들이 아버지의 의논을 답습하였다 하더라도 군자의 후예라고 해서 꼭 모두가 현인이라고 할 수도 없고 소인의 후손이라고 해서 꼭 모두 악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청탁(淸濁)과 우열(優劣)이 혹 서로 뒤섞여 있게 되었으니, 가능한 한 조화롭게 보합(保合)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시시비비를 가려 그 사이에 공론(公論)이 행해지게 한 뒤에야 조정이 안정되어 서로 협력하는 아름다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시비를 가리는 일에 대해 당파를 구분해 배척하려는 것으로 생각하신 나머지 시비를 가리지 않은 채 오직 진정시키려고만 하신다면, 공론이 행해지지 못하고 현부(賢否)가 구분되지 않아 취사(取捨)한 것들에 대해 인심이 승복하지 않고 국시(國是)도 정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뜨거운 국물에 혼이 나 냉수도 불어 마시는 격으로 굽은 것을 교정하려다 바른 것까지 잘못되게 하는 오류를 범하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혹간 탄핵이라고 있게 되면, 다른 당파를 배격하려는 것으로 의심하시고 매번 일을 말하는 신하에게 실정에 벗어난 분부를 내리심으로써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려 감히 논열(論列)하지 못하게 하니, 보합하여 조정하려는 뜻만 있을 뿐 곧은 사람을 등용하여 그른 사람을 바로잡는 효과는 없는 실정입니다. 전하께서는 사람들의 결점이나 잘못을 용서해 주고 더러운 것까지도 받아들여 감추어 주는 것을 인군의 도량이라고 생각하고서 사람마다 뜻을 잃거나 원망하는 마음을 없게 하려고 한 나머지 얼음과 숯불을 한 그릇에 담고 물과 불이 함께 도와나가게끔 하려고 하신 것은 아닙니까.
그 결과 군신(君臣) 상하가 서로들 시늉만 내게 되었는데, 중요한 벼슬에 있는 자들 모두가 줏대없이 이리저리 눈치나 살피면서 이쪽에 끌리고 저쪽에 잡히는 등 모난 것을 두리뭉실하게 만들어 풍채는 온데간데없이 오직 진정시켜야 한다고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모호한 태도로 용납받으려 하고 벼슬자리를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려 하고 있으니, 현부(賢否)가 어디로부터 구분될 것이며 시비가 어떻게 분별되겠습니까. 아, 자기 몸을 생각하여 직위에 연연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며, 임금의 뜻을 거스리고 기휘(忌諱)에 저촉되는 것은 세속에서 경계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자기와 다른 자를 공격하다가 견책을 당한 일이 전후로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탁한 무리를 치고 맑은 무리를 드러내려고 한 그 일이 어떻게 자신을 위한 계책이었다고 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그저 자기와 다른 자들을 배격하는 일을 미워하실 줄만 알고 나라를 위해서 원망을 사는 일이 가상한 것인 줄은 알지 못하고 계십니다. 만일 오늘날 조정에서 끝내 자기와 다른 자들을 배격하지 못하도록 하실 경우, 반드시 소위 서인이 서인을, 남인이 남인을, 소북이 소북을 탄핵하게 한 뒤에야 공론이라고 하실 것입니까. 아니면 전하께서는 지금 조정에 가득한 사람들이 모두 사류(士類)로서 진실로 말할 만한 잘못이 없다고 여기시는 것입니까. 그리하여 그들이 행한 일이 모두 이치에 합당하고 또 한 가지 일도 논박할 만한 것이 없다고 여기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만일 조정에 가득한 사람들이 모두 사류이고 시행한 일들이 모두 타당한 것이었다면, 어찌하여 국가의 위태로움이 조석간에 박두했단 말입니까. 전하께서는 또한 너무나도 생각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예로부터 임금은 바른 말을 미워하고 공손한 말을 좋아했으며 소인을 가까이 하고 군자를 멀리 하였습니다. 그래서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는 자와 뜻대로 따르는 자가 함께 나올 경우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는 자가 패하기 마련이고, 간특한 자와 정직한 자가 서로 다투게 되면 간특한 자가 이기게 마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 이유는 현부(賢否)와 사정(邪正)이 마구 뒤섞인 채 구별하지 못하게끔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임금이 마음속으로 반신반의하며 물결에 휩쓸려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상의 뜻을 짐작하고는 차츰 간교한 꾀를 부려 물이 스며들 듯 이간하고 임금이 좋아하는 일을 미리 예측하여 기쁘게 하며 마음을 격동시켜 의혹케 하는데, 이는 군상이 귀로 듣기에는 공정하고 충성스러운 듯하나 사실은 개인적인 의도를 달성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죄명(罪名)을 날조해서 모함해 배척하게 되는데, 그때 인군이 그 당을 미워하여 제거하려고 할 경우 선류(善類)들이 모두 없어진 결과 나라가 어지러워져 망하게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또한 이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조정에 화평한 기운이 날로 사라져 사대부들이 여러 가지로 말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피차 정의(情意)가 미덥지 못해 마음들이 각각 다르고 의논이 각각 다른 나머지 조정의 의논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절충할 길이 없습니다. 이는 마치 주인 없는 집에 행인들이 서로 들어가려고 싸우고, 폭풍이 몰아치는데 키를 잃은 배와 같다고 하겠는데, 전하께서 붕당을 깨뜨리려는 것은 그 요점을 얻지 못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 요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단지 현부(賢否)를 분별하고 시비를 분명하게 하여 아랫사람들을 정성으로 대하고 한쪽으로 치우치는 사사로움이 없이 허심탄회하게 착한 것을 받아들이고 지극히 공정한 도리를 행하는 것일 뿐입니다. 할 말을 극진하게 말하는 자를 총애하여 발탁하고, 심모 원려하는 자를 채용하고, 숨어서 자기 몸을 닦으며 활용되기를 기다리는 자를 예의로 대우하고, 아첨하여 뜻을 맞추는 자를 물리치고, 자기의 견해만을 고집하고 공의를 따르지 않는 자를 제재하여 억누르고, 여기저기 오가며 이리저리 말을 만들고 일을 만들어 내는 자들을 배척하여 멀리해야 할 것입니다. 건백(建白)하는 것이 없는 자는 그에게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없음을 알 수 있고, 작록(爵祿)을 애석히 여기는 자는 어려울 때 목숨을 바치려는 절의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몸에 흠이나 허물이 없는 자를 청로(淸路)에 발탁하고, 재간과 국량이 있다고 일컬어진 자를 번거롭고 바쁜 곳에 두고서 하는 행동을 보고 마음 먹은 바를 눈여겨 보며 마음에 편하게 여기는 바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높고 낮은 벼슬을 각기 그 그릇에 따라 임명하고 어질고 어리석은 자가 각기 제자리를 얻게 되면, 마치 저울대를 설치한 것이 경중(輕重)을 달아보려는 것이 아니었는데도 경중이 저절로 구별되고, 수경(水鏡)을 만들어 둠이 이쁘고 미운 것에 뜻을 둠이 없었는데도 이쁘고 미운 것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과 같게 될 것입니다.
아, 오늘날 말할 것이 많으나 국가의 흥망은 전적으로 군덕(君德)의 잘잘못에 있는 것입니다.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지나치게 자신하여 남을 따르는 점이 부족하고, 의심이 많으면서 지나치게 이기기를 좋아하는 단점이 있으며, 인자한 면은 충분하나 위엄과 과단성이 부족하고, 근심하고 애쓰는 것은 간절하나 실덕(實德)은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파직이나 추고에 해당되는 죄는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면서 중한 벌은 행하시지 않고, 문서를 살필 때는 너무나도 총명하면서 큰 기강은 확립시키지 못하고 계십니다. 옛날 진 시황(秦始皇)은 자신이 하루에 처리할 문서를 저울에 달았고, 수 문제(隋文帝)는 일 처리에 바빠 군사들로 하여금 음식을 가져오게 하였는데, 이것이 과연 인군의 체통이겠습니까.
게다가 안으로는 주석(柱石)처럼 의지할 만한 신하가 없고, 밖으로는 간성(干城)이 되어 외적을 막아주도록 부탁할 만한 자가 없습니다. 인심이 원망하고 등돌려 역변(逆變)이 잇따라 일어나고 공안(貢案)이 고쳐지지 않아 부역이 불균등하기만 합니다. 호령을 내놓는 것도 조변석개 식이라서 은택과 신의가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고, 이익만 따르고 공도(公道)가 무너져 벼슬길이 혼탁해져 뇌물 꾸러미가 조정에 횡행하고 있습니다. 국가의 위험이 마치 끊어지려는 실끈과 같은데, 신은 광해(光海)가 아직 죽기 전에 종사가 먼저 망해 천고에 웃음거리가 될까 두렵기만 합니다."
3월 28일 무신
유성이 북두(北斗) 아래에서 나와 정성(井星)으로 들어갔다.
자전이 비로소 환궁하였다.
3월 29일 기유
춘추관 당상 조익(趙翼)이 아뢰기를,
"신들이 강화부(江華府)에 가 실록에 실린 영릉(英陵)044) ·희릉(禧陵)045) ·정릉(靖陵)046) 을 천장(遷葬)할 때의 일들을 고찰하여 서계하라는 명을 받들었습니다. 그러나 실록에 실린 내용도 매우 소략하였습니다. 영릉의 천장 사목(遷葬事目) 중에 ‘지석(誌石)과 애책(哀冊)은 다시 만들지 말고 옛것을 쓰라.’고 하였는가 하면, 또 ‘애책은 초상이 아니니 옮기지 말라.’고 하였는데, 당초 도감(都監)의 글이 분명치 못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사관(史官)이 기록한 바가 잘못되어 그렇게 된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희릉을 천장할 때에는 능을 옮기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일들을 마련하라는 분부가 있었으나 해조의 회계(回啓)가 없었으며, 정릉을 천장할 때에도 대신들이 응행 절목(應行節目)을 해조로 하여금 마련하게 해야 한다고 의논드렸으나 역시 회계가 없었습니다. 영릉과 정릉은 도감에서 서계한 일들이 있으나 희릉은 도감이란 글자도 보이지 않고, 영릉은 어느 날 옮겨 안장하였다고 기록되었으나 희릉과 정릉은 모두 옮겨 안장한 날짜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정릉을 옮길 때에 대신과 예관(禮官)이 복제(服制)를 의논하면서 단지 영릉과 희릉을 천장할 때 입었던 바의 전례만 인용하였는데, 정작 능을 천장할 때의 실록에는 복제에 대해 의논한 말이 없었습니다. 영릉과 희릉의 천장에 대해서는 혹 풍수설로 인해서라든지 혹 광중(壙中)의 돌로 인해서라고 그 이유가 기재되었으나, 정릉은 옮기게 된 까닭을 싣지 않고 있으니, 이것은 크게 누락된 부분이라 할 것입니다.
신들이 각능의 도감 등록(都監謄錄)에는 필시 절목(節目)이 낱낱이 실려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포쇄안(曝曬案)과 형지안(形止案)을 살펴 보았더니, 단지 유릉(裕陵)047) 의 등록만 있고 다른 능의 등록은 모두 없었습니다. 이 역시 매우 소홀한 점들입니다. 다만 정릉을 천장하고 상을 내릴 때 천릉(遷陵)·산릉(山陵) 두 도감의 제조(提調)만 거론되고 빈전 도감(殯殿都監)은 없었으며, 도청(都廳)과 낭청(郞廳)만 지칭되고 감조관(監造官)은 없었습니다. 생각건대 개장(改葬)과는 다름이 있었던 까닭에 두 도감만을 설치하고 감조관도 뽑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합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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