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경술
조강에 《서전(書傳)》을 강하였다.
4월 2일 신해
상이 하교하기를,
"노인을 공경하며 어진이를 존경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다. 옛날 제왕들이 연회에 몸소 나와 위로하면서 관작이나 비단을 상으로 내리기도 하였으니, 이 모두가 존경하고 숭배하는 도리였다. 지금 내가 왕위에 오른 뒤로 전쟁이나 기근이 없는 해가 거의 없었으니, 노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측은하게 여겨지고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그러나 나라의 재정이 고갈되어 위로연을 베푸는 일을 참으로 가볍게 의논할 수 없으니, 노인직(老人職)을 주어 노인을 우대하는 나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조가 복계(覆啓)하기를,
"세상에서 나이가 많은 이를 귀하게 여긴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노인을 모시고 좋은 말씀을 듣는 예(禮)가 《예경(禮經)》에 실려 있고, 선대 조정에서도 매년 봄과 가을에 양로연(養老宴)을 열었는데, 근년(近年) 이래로 나라에 일이 많아 이럴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점에 대해 성상께서 마음속으로 미안하게 여겨 특별히 간절한 분부를 내리셨으니, 듣고 보는 자들로서 어느 누가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성상의 분부를 받들어 그들에게 각각 관작을 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다만 사대부들 가운데 나이가 80이나 90이 된 자에게는 그들 자손이 아뢴 상소에 따라 통정(通政)을 제수하기도 하고 가선(嘉善)으로 승진시킨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는데, 이는 그래도 관례에 따른 일이므로 특별히 명한 것과는 차이가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원래의 자급(資級) 외에 다시 한 자급을 더해 주는 일은 사체가 매우 중하므로 해조에서 감히 함부로 할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양로연에 있어서는 《오례의(五禮儀)》에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을 막론하고 모두 참여하도록 허용한다.’고 하였습니다마는, 관작을 하천배들에게까지 주는 것은 또한 매우 난처한 일인 듯하기에, 감히 아울러 품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귀천을 막론하고 똑같이 시행하되, 당상 이상은 각각 한 자급씩 올리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대신에게 의논하라."
하였다. 대신이 모두 그렇게 해야 한다고 의논드리니, 답하기를,
"이대로 시행하라. 그리고 나이 많은 과부에게도 해조로 하여금 등급을 나누어 물건을 주게 함으로써 골고루 은전을 받도록 하라."
하였다.
김상용(金尙容)을 판돈녕부사로, 김광현(金光炫)을 응교로 삼았다.
접반사 이석달(李碩達)이 치계(馳啓)하였다.
"신이 서변(西邊)의 소식과 송 호부(宋戶部)와 왕 안찰(王按察) 및 부총(副摠) 모원의(茅元儀) 등이 나오게 된 까닭을 부총에게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송 호부와 왕 안찰은 조만간 올 예정이지만 부총이 올지는 확실히 알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어 부총이 언제쯤 진(鎭)을 옮길 것인지를 물었더니, 부총이 말하기를 ‘현재 시기를 확정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병사를 뽑아 진강(鎭江)에서 상륙하여 적의 소굴로 진격하여 소탕하려고 하는데, 국왕에게 이자(移咨)하여 군사를 요청할 예정이다.’고 하였습니다."
4월 3일 임자
햇무리가 졌다.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치 풍조가 요즘 들어 더욱 심해지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이러한 폐단을 개혁할 수가 있겠는가?"
하니, 정경세(鄭經世)가 아뢰기를,
"요즈음 듣건대 혼인하는 예가 너무 사치스러워 신부의 집에서 신랑의 부모에게 드리는 예물이 한이 없다고 하니, 엄히 금지시켜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경세가 또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반드시 인재를 얻는 데 있습니다. 임금이 인재를 쓰는 것은 마치 목수가 나무를 쓰는 것과 같으니, 크고 작은 임무를 각각 그 재질에 맞게 부여한 뒤에야 그 임무를 제대로 감당하여 직책을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쓸 만한 재목을 쓰지 않고 버려두는 것은 국가의 이익이 못 됩니다. 신이 장유(張維)와는 서울과 시골에 서로 떨어져 있고 동년배도 아니어서 절친하게 지낸 사이는 아닙니다마는, 대개 듣건대 사람들과 어울려 한담하기를 싫어하는데다가 문재(文才)도 현재 으뜸이라고 하는데, 지금 하읍(下邑)에 버려져 있으니, 참으로 아깝습니다."
하니, 상이 아무 말이 없었다.
신천(信川)의 쌀과 콩 9백 석을 안주(安州)로 조운(漕運)하다가 폭풍을 만나 배가 침몰하였는데, 익사한 자가 35인이었다.
4월 4일 계축
진하 겸 사은사 이흘(李忔)이 북경(北京)에서 치계하였다.
"신의 일행이 영원(寧遠)에 들어갔을 때 마침 원 군문(袁軍門)이 금주(錦州)로 순시하러 나간다기에 한 달 넘게 머물러 기다리다가 비로소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적(奴賊)이 11월 27일 밤에 붕로 번가구(棚路潘家口)에서 장성을 헐고 들어와 한아장(漢兒庄)을 깨뜨리고 진격하여 준화현(遵化縣)을 포위하였으므로 경외(京外)가 모두 크게 놀랐습니다. 원 군문이 군대를 이끌고 관(關)을 지날 때에 신이 역관을 시켜 안부를 묻고 이어 적의 소식을 탐지하게 하였더니, 말하기를 ‘노적이 예전부터 이렇게 도발하였으니, 걱정할 것이 없다. 그러나 가벼이 나아갈 수는 없으니 다시 사태를 보아 가면서 떠나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원 군문이 여러 장수와 1만 4천의 병력을 이끌고 서로(西路)를 향해 떠났는데, 준화현이 이미 함락되어 총병 조솔교(趙率敎)가 적병을 맞아 싸우다 죽었습니다. 군문이 계주(薊州)로 들어가자 적병이 성 밖에까지 왔다가 공격하지 않고 바로 서로를 향해 갔습니다. 이에 군문이 샛길을 따라 급히 북경으로 진군하여 황성(皇城)의 제화문(齊華門)에서 적과 대진하였는데, 적병이 바로 사와문(沙窩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원 군문과 조 총병(祖摠兵) 등이 오시부터 유시까지 십여 차례나 피나는 싸움을 벌여 화살에 맞기까지 하였으나 다행히도 승리를 거두어 적병이 30여 리나 도망하였습니다. 적병이 황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지 못한 것은 대체로 두 장수가 힘써 싸운 공로 때문이었는데, 이 때에 대동 총병 태자 태사 좌도독(大同摠兵太子太師左都督) 만계(滿桂)와 선부 총병 우도독(宣府摠兵右都督) 후세록(侯世祿)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지원하니, 적이 조금 물러갔습니다.
그런데 황제가 입대(入對)하도록 이들을 불러들여 갑자기 원 군문을 파직시키고 국문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이에 그의 부하 군사들이 성 밖에서 울부짖으며 은혜를 베풀기를 애걸하였으나 들어주지 않고 군량도 지급하지 않자 군사들이 분개하고 원망하여 드디어는 모두 흩어져 돌아갔습니다. 조 총병·하 중군(河中軍)·장 부총(張副摠) 등도 금주(錦州)로 떠났는데, 관(關)의 많은 관원들이 머물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총병 마세룡(馬世龍)이 손 각부(孫閣部)가 황제에게 제본(題本)을 올려 받든 성지(聖旨)를 지니고 헌패(憲牌)로 소환하였으나 역시 돌아올 의향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손 각부가 명을 받고 산해관(山海關)으로 나와 병영을 차리고 여러 차례 회유하여 부르자, 조 총병 등 세 장수가 비로소 마병과 보병 4만을 이끌고 일시에 산해관에 도착하였는데, 손 각부가 매우 기뻐하며 모두에게 후히 대우하였습니다.
조 총병 등이 다시 서로(西路)로 회군하여 홍화점(紅花店)에 이르렀는데, 손 각부가 영평(永平)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시 조 총병과 함께 서문 밖에다 군영을 설치하고, 그의 아우 조가법(祖可法)과 참장(參將) 유응선(劉應選)·황유정(黃惟正)·맹도(孟道) 등으로 하여금 5천의 병력을 이끌고 무령현(撫寧縣)에 가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노적(奴賊)이 포위하였다가 요동(遼東)의 병력이 와서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물러갔습니다. 올해 정월부터 적이 오로지 동로(東路)에 힘을 기울였는데, 유흥조(劉興祖)가 영평(永平) 북쪽 태평로(太平路)에서 적의 선봉을 만나 야습하여 5백∼6백 명의 수급을 베니 환호성이 진동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안 되어서 또 적과 갑자기 만나 갑옷을 벗은 채로 힘껏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지금 듣건대 영평이 함락될 때에 적추(賊酋)의 사왕자(四王子)가 와서 포위하였는데, 성 안에 내통하는 자가 있어서 함락되었다 합니다. 그리고 전 포정(布政) 백양수(白養粹)가 위조 공문을 받고 병비도(兵備道)를 위하여 그의 딸을 적추에게 시집보냈는데, 병비도 정국창(鄭國昌)과 지부(知府) 장봉기(張鳳奇)가 모두 자살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무령(撫寧)까지는 겨우 1백 리 밖에 안 되는데, 네 명의 장수가 요동의 병력과 지방의 병력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적은 성이 작아 두려울 것이 없다고 여겨 공격하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조 총병은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성 밖에 주둔하고 총병 주매(朱梅)는 성 안에서 밤낮으로 엄중히 경계하는데, 손 각부가 날마다 성을 순시하면서 장수들을 단속하고 병사들을 위로하며 간첩을 엄중히 색출하고 있으므로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창려(昌黎)는 지현(知縣)이 그 지방의 병력을 이끌고 굳게 지키며 화포(火砲)를 쏘아 적을 많이 명중시키니, 적이 물러나 영평현의 동쪽에 군영을 설치하였습니다. 황(黃)·유(劉)·조(祖)·맹(孟) 네 명의 장수가 무령에서 노봉구(盧峯口)를 따라 적을 추격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었는데, 1백 40여 명의 수급을 베었다 합니다.
또 듣건대, 만 총병(滿摠兵)과 흑(黑)·마(麻) 두 총병 등이 북경성 밖에서 적을 만나 크게 패하였는데, 마 총병과 흑 총병은 적에게 붙잡혔고 만 총병은 간 곳을 모른다 합니다. 그 뒤 마세룡(馬世龍)이 또 대군을 이끌고 적을 추격하였으며, 총병 오지면(吳之冕)·양조기(楊肇基) 등이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계주에 도착하였고, 삼하(三河)·옥전(玉田)·풍윤(豊潤) 등지도 모두 병력이 지키고 있는데, 북경성 근처에는 현재 적병이 없다 합니다. 또 원 군문이 구금된 사유를 듣건대, 혹은 성을 지키던 장수들과 서로 공을 차지하려고 다투다 모함을 받아 그렇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손 각부는 성 위에서 대포를 쏘고 성 아래에서는 적을 시살(厮殺)하였다는 말에 비추어 볼 때 이 말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온 조정의 신하들이 주본(奏本)을 올려 풀어주기를 요청했어도 모두 들어주지 않다가, 요즈음 황제가 노여움이 조금 풀려 그가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의원을 보내 병을 진찰하게 하고 또 옷과 이불을 주었는데, 장수들이 손 각부의 관아에 가서 치하 인사를 드렸다 합니다.
또 듣건대, 만 총병(滿摠兵)과 흑(黑)·마(麻) 두 총병 등이 조 총병이 다시 서문의 밖에 주둔하였으므로 신이 장검(長劍)과 유둔(油芚) 등의 물품을 군사들의 용도에 보태 쓰라고 주니, 총병이 이를 받았습니다. 며칠 뒤에 신에게 사례하는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지난날 내가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빨리 영평으로 가 지키면서 서쪽으로는 북경을 지원하고 동쪽으로는 산해관과 요동을 견제하여 차츰 준화현을 수복하고 노적을 모조리 섬멸시킴으로써 한 대의 수레도 되돌려 보내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노적이 영평을 먼저 공격하는 바람에 수비책이 잘못되어 결국은 그들에게 점령되고 말았다. 지금의 전략으로는 오직 산해관을 근거지로 삼는 것이다. 연일 계책을 세워 적을 요격해 한바탕 싸워 여러 차례나 승리하였으므로 적을 많이 죽이진 못하였지마는 그들의 사기도 이미 떨어졌다. 무령과 산해관의 거리는 1백 리인데, 이미 네 명의 장수를 선봉으로 파견하여 굳게 지키게 하였다. 노적이 잇따라 성을 공격하였지마는 마구 화포를 퍼부으니, 이롭지 못함을 알고 남쪽으로 떠났다. 창려·낙정(樂亭)에 이미 급히 인원을 파견하여 정탐케 하였는데, 정확한 정보가 오기를 기다려 별도로 기회를 보아 섬멸할 예정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상 노적에 대한 요즈음의 개략적인 상황을 치계합니다."
4월 5일 갑인
병조 판서 이귀(李貴)가 차자를 올려 기악(妓樂)을 그대로 두기를 청하면서 아뢰었다.
"기악은 속악(俗樂)이므로 정악(正樂)과 같지 않은데, 2백 년 동안이나 폐지하지 않은 것은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오례의(五禮儀)》에까지 실려 있고 보면, 일시적으로 나라가 혼란하다고 하여 갑자기 폐지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또 풍정(豊呈)에서 노래로 덕을 찬미하는 것은 모두가 세종 대왕 때에 비롯되었는데, 세종 대왕은 우리 나라에 있어 중국의 요(堯)·순(舜)과 같은 성군(聖君)이신데, 뒷날 유흥에 빠져버릴 폐단에 대해서 어찌 생각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 뒤로도 성군(聖君) 현상(賢相)이 혁파하자고 말하지 않은 것은 풍정을 중하게 여겨서만이 아니라 세종 대왕이 제작하신 것이기에 또한 함부로 폐지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기악은 풍정만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옛날에 중국의 사신을 접대할 때나 손님을 위해 잔치를 열 때에도 사용한 적이 있었고, 일류 풍악을 하사할 때에도 모두 기악을 썼으니, 어떻게 한두 사람의 소견만으로 갑자기 폐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황성(皇城)이 적에게 포위당했다는 말을 듣고도 대소 신료들이 감히 군사를 정비하여 황제의 명을 기다리지도 않고 있는 상황이고 보면, 악을 폐지한다 하더라도 이는 정작 중요한 일은 아니하고 하찮은 일만 따져서 하는 짓이 될 것입니다."
선전관을 의주(義州)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모아 놓고 조정의 뜻을 선유(宣諭)하니 백성들이 감읍하였다. 그 동안의 상황을 보고해 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남(仲男)이 의주부에 들어온 날 중국 배 1백여 척이 나왔습니다. 부윤이 미리 먼저 정탐해 보니, 유흥치(劉興治)가 중국에 투항한 우리 나라 사람을 시켜 부윤에게 전하기를 ‘닭이 울 무렵에 들어가 공격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부윤이 타이르기를 ‘호인(胡人)이 벌써 많은 병력이 오는 줄을 알고 모두 성을 빠져나가 달아났다. 내일 아침 일찍 강을 건널 무렵에 힘을 합하여 공격한다면 사세에 알맞은 일이 될 것이다.’ 하니, 중국인이 말하기를 ‘이 계책이 매우 좋다.’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부윤이 즉시 중남을 만나 좋은 말로 타이르고 이어 길을 안내하는 군관(軍官)을 대동시켜 창성(昌城)으로 보냈는데, 그 군관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용골대(龍骨大)가 무장 기마병 3백여 명을 이끌고 중강(中江) 쪽에 도착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건천 권관(乾川權管) 백광종(白光宗)과 청성 첨사(淸城僉使) 안덕간(安德幹) 등을 파견하여 강을 건너 그에게 보냈는데, 용골대가 중남이 간 곳을 묻자 백광종 등이 당초에 일어났던 사실들을 일일이 설명하였습니다. 그러자 용골대가 수행한 호인 두 명을 보냈는데, 부윤 이하를 찾아 보고 화살에 맞은 상처와 성 안의 피해 상황을 물어보고 갔습니다."
진하사 이흘(李忔)이 치계하기를,
"신이 역관 김후각(金後覺)에게 장계(狀啓) 다섯 통을 주어 영원위(寧遠衛)로 떠나 보냈는데, 그곳에서 배를 빌려 타고 상경(上京)해서 그 동안의 사정을 진달드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듣건대 영원 병비도(兵備道)가 돌아가는 배를 물색하여 피도(皮島)로 실어 보낸다고 하였습니다.
요즘은 노적(奴賊)이 별로 기동하는 기색이 없이 영평(永平)에 그대로 웅거하고 있으면서 난주(灤州)와 준화(遵化) 등 지역에 병력을 나누어 진을 치고 영평에 있는 물화(物貨)를 운반하느라 줄을 잇고 있습니다. 또 듣건대 조 총병(祖摠兵)이 오영장(五營將)인 유원청(劉源淸)·조가법(祖可法) 등을 무령(撫寧)과 건창(建昌) 등지에 나누어 보냈는데 적을 많이 참획하고 마침내 건창현(建昌縣)을 수복하였으며, 또 초두영(招頭營)의 부장(副將) 왕유성(王維城)이 적 4백여 급을 베었으므로, 손 각부(孫閣部)가 매우 기뻐하며 부(部)·도(道)·진(鎭)으로 하여금 공을 확인하여 논상하게 하였습니다. 영평부의 사람인 전 포정(布政) 백양수(白養粹)가 앞장 서서 적에게 투항하였는데, 그의 친족 백연경(白衍慶)이 오영(五營)의 병사에게 붙잡히자 각부가 임석하여 목을 벤 뒤 거리에 매달았습니다.
병부(兵部)의 차관(差官)이 천진(天津)에서 배를 타고 와 전하기를 ‘조 총병에게 태자 소보(太子小保)의 벼슬을 겸하게 하고, 4만 냥(兩)의 은을 내어 군사들에게 상으로 나누어 주었고, 또 장렬 충담(壯烈忠膽)이란 넉자를 크게 써서 하사했는데 각부(閣部)가 이를 판각(板刻)하여 조 총병의 군영에 보냈다. 이러한 일들로 본다면 우리 조정에서 이미 조 장군의 공로를 인정하여 이토록 총애하며, 상전을 베풀고 있다 할 것인데, 원 군문(袁軍門)은 아직도 은총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노적이 사람을 차송(差送)하여 글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는데, 각부가 그때마다 사신을 목베고 글을 불태웠습니다. 노적이 영평에서 안산(安山)으로 나와 주둔하였는데 어디로 갈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러 장수들이 적이 돌아가는 길을 요격하여 매우 많은 사람들을 빼앗아 왔다고 합니다. 신 등 일행은 해빙될 때를 기다렸다가 바닷길로 천진에 가려고 하는데, 식량과 노자가 떨어져 지금 굶주림 속에 있습니다."
하였는데, 이를 보고 하교하기를,
"이흘이 가는 도중에 이처럼 형편이 매우 군색하니, 되돌아가는 중국 배가 있거든 진위사(進慰使)가 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먼저 식량과 노자를 보내 주도록 하라."
하였다. 비국이 복계(覆啓)하기를,
"중국 배가 혹 왕래한다 해도 서로 만난다는 것이 또한 매우 쉽지 않을 것입니다. 특별히 한 척의 배를 보내 쌀 70석과 은자(銀子) 수백 냥을 운반케 하여 다급한 형편을 구제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7일 병진
예조가 아뢰기를,
"산릉(山陵)·국장(國葬)·빈전(殯殿) 3도감(都監)의 당상과 낭청(郞廳)을 차출할 일로 대신에게 의논하니, 대신 모두가 ‘천릉(遷陵)과 같은 막중한 일은 십분 자세히 살펴야 하는데, 《실록(實錄)》의 기록이 이처럼 소루하니, 이를 근거로 행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리고 산릉과 천릉 두 도감을 설치하는 것만은 과연 분명한 듯한데, 그렇다고 빈전 도감을 천릉 도감과 합친다면 일이 구차하게 될 것이다. 이는 대체로 재궁(梓宮)을 광중(壙中)에서 꺼낸 뒤에는 빈전 절목을 모두 거행해야 하는만큼 각기 관장하는 바가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산릉 도감과 빈전 도감은 《오례의》에 의거하여 그대로 설치하고 국장 도감의 명칭을 고쳐 천릉 도감으로 한다면 이름도 알맞게 되고 사체상으로도 온당할 것이다. 그리고 《실록》에서 근거를 취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은, 선릉(宣陵)을 옮긴 것이 《오례의》가 반포된 뒤이긴 하지만 감조관(監造官)이 포상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어쩌면 그 당시 번거로운 글들을 삭제해서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실록》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오례의》나 근래 국장의 예를 보면 모두 감조관이 있으니, 예전대로 차출하는 것이 또한 무방할 듯싶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도감은 전례에 따라 두 곳만 설치하고, 낭청의 일은 감조관이 또한 겸해 살피게 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하였다. 산릉 도감이 아뢰기를,
"천릉할 때에 사용할 석회(石灰)와 격회(隔灰)를 사전에 배정해야 하겠기에 전후의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건대, 목릉(穆陵) 때에는 원수(元數)가 3천 5백 석(石)이었는데 실제 사용한 수량은 기재되지 않았으며, 유릉(裕陵) 때에는 원수가 역시 3천 5백 석이었는데 능 안의 묘소를 옮기는 사람에게 5백 석을 주고 실제 사용한 수량은 2천 8백 30석이었으며, 지금 육경원(毓慶園)의 경우는 원수가 3천 석인데 실제로는 2척 5백 석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계산하건대 3천 석의 회만 있으면 모자랄 염려는 없을 것이니, 지금 전후의 등록에 따라 경기·황해·공청도 등에 각각 1천 석씩 분담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8일 정사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상이 이르기를,
"맑고 밝은 시대에는 공도(公道)가 크게 행해지기 때문에 시비가 모두 잘 가려지는데, 말세가 되면 어떤 사람에 대한 평가가 같지 않고 어떤 일의 시비가 다르니, 이를 분별하기가 가장 어렵다."
하니, 참찬관 조익(趙翼)이 아뢰기를,
"진(秦)나라 사람들은 조고(趙高)가 악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고, 한(漢)나라 사람들은 왕망(王莽)이 악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으니, 혼란한 세상에선 대체로 이러합니다. 희릉(禧陵)을 옮길 때에 김안로(金安老)가 정광필(鄭光弼)을 해치려고, 대역죄로 논했는데도 온 조정이 한 사람도 말하지 못하였으니, 이 밖의 시비에 있어서는 논할 것조차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영부사 이원익(李元翼)은 충성심과 청백한 절조가 비할 데 없기 때문에 내가 매우 존경한다. 그런데 지난해 나의 실덕으로 말미암아 시골로 돌아갔으니, 부끄럽고 두려울 뿐만이 아니라 시구(蓍龜)를 잃어버린 것만 같다. 저번에 돈유(敦諭)했을 때 병이 있다고 사양하였는데, 지금은 필시 조금 나았을 것이니, 도성으로 들어와 한가히 지내면서 상하의 간절한 소망에 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승지는 나를 대신하여 교서(敎書)를 지어 가지고 가 유시하라."
하고, 이어 정기광(鄭基廣)을 금천(衿川)으로 보내 도성에 들어오도록 유시하였는데, 이원익이 늙고 병들었다고 사양하면서 오지 않았다.
관상감이 아뢰기를,
"오경(五更)의 시각마다 하늘 중심에 떠오르는 성좌를 지금 이미 추산해 놓았는데, 천문도(天文圖) 성좌의 도수(度數)와 더러 맞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지난해에 본감에서 4월 30일 소만(小滿)으로부터 관측을 시작하여 다음 해 소만까지를 기한으로 그 차이를 살펴 보도록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소만으로부터 올해 입하(立夏)까지의 사이에 간혹 밤새도록 구름이 끼어서 관측을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24절기는 유추할 수가 있습니다. 다만 천문도와 일치하지 않고 2, 3 도 가량 차이가 나는 것은 대체로 성좌의 도수가 세월이 오래되면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을해년048) 부터 올해까지가 총 2백 36년이니 저녁과 새벽에 떠오르는 성좌의 도수가 틀리지 않을 수가 없는데, 구도(舊圖)와 천문도를 비교해 볼 때 매 시각 하늘 중심에 떠오르는 성좌가 이미 한 절기나 차이가 나고 있으니, 모두 쓰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일관(日官)으로 하여금 내년 신미년부터 시작하여 다시 추산해 관측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9일 무오
북도 절도사 이항(李沆)이 치계하기를,
"여섯 고을 진(鎭)의 형세가 좋지 못한 데다 성과 못도 높고 깊지 못한데, 경성(鏡城)의 성만은 조금 완비되었으니 반드시 수비해야 할 지역입니다. 그러나 성벽 안쪽을 보토(補土)한 곳이 모두 무너져 수축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는데, 얼마 안 되는 토민(土民)으로는 그 일을 끝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본부에 비축한 곡물이 너무 적어 혹시라도 성을 지켜야 할 일이 생길 경우 식량을 대기가 실로 어렵습니다. 이 두 가지 일을 급히 변통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복계(覆啓)하기를,
"북변(北邊)의 일은 참으로 한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각 성의 치첩(稚堞)을 옛제도대로 보완해야 하겠는데, 이는 실로 주장(主將)이 어떻게 잘 조치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강화(江華) 백성들이 유수(留守) 이안눌(李安訥)의 유임을 청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임기가 만료되면 체직되는 것이 법에 당연한 것입니다. 고을마다 백성들이 수령의 유임을 시끄럽게 요청하는 것이 점점 풍조로 이루고 있으니, 허락해서는 안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0일 기미
전라 감사 송상인(宋象仁)이 치계하기를,
"남원(南原)의 적(賊)이 지금 더욱 세력이 강해져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는 환난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데 부근의 고을 가운데 적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부사 박정(朴炡)이 중군(中軍) 김급(金級)을 천총(千摠) 김상견(金尙堅)으로 하여금 씩씩하고 날랜 자 70여 명을 이끌게 하여 신의 군관 박세중(朴世重)과 함께 일시에 떠나 보내 25명을 붙잡았는데, 죄의 경중을 조사하고 심문하여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런데 효시(梟示)하는 일이 본래 아무 때나 쓰는 법이 아닌만큼 신이 여쭈어서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신이 일찍이 본부에 취임하였을 때부터 적도들이 수령을 죽이고 죄를 탈취하려고 모의한다는 것을 들었는데, 현재 죄수가 옥에 가득 차 있는 상황에서 혹시라도 측량하기 어려운 화가 발생한다면 후회해 보았자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별도로 처단하여 징계의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하였는데, 형조가 복계하기를,
"남원의 적들이 살인계(殺人契)를 만들었는데 그 무리가 날로 불어나 인명을 해쳐왔습니다. 지금 두목이 처형되었습니다만 그 도당도 별로 경중의 차이가 없으니, 모두 끝까지 문초한 뒤 처단하게 하소서. 그리고 부사 박정은 계략을 꾸며 무려 25명이나 덮쳐 잡았으니 공로가 작지 않고, 중군 김급, 천총 김상견, 전 첨사 박세중 등도 병사를 이끌고 뒤쫓아 붙잡았으니 또한 매우 가상합니다. 모두 예(例)에 비추어 논상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황해도 관찰사 이여황(李如璜)이 치계하기를,
"신천(信川)과 송화(松禾) 등 고을에 도적이 횡행하자 군수 박로(朴𥶇)가 계략을 꾸며 뒤쫓아 붙잡았는데, 자복한 자가 9명입니다. 시상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는데, 형조가 회계하기를,
"박로가 큰 도적을 붙잡아 죽여 백성을 위해 해를 제거하였으니, 그 공이 가상합니다. 다만 가정(嘉靖)049) 연간에 도적을 붙잡은 자를 포상하는 데 대한 의논이 있었는데, 그 때에 수령이 도적을 붙잡는 것은 직분상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경국대전(經國大典)》에도 이러한 예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상을 주어 권장하지 않는다면 수령들이 필시 적을 붙잡으려고 힘쓰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에 박로가 붙잡은 자는 사나운 큰 도적이 아니니 강도를 붙잡은 자에게 주는 상을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가자(加資)하라고 답하였다.
4월 11일 경신
조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영경연 김류(金瑬)가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외람되이 총호사의 임무를 맡게 되어 천릉(遷陵)할 때의 일을 자세히 살펴 보건대 그 공사가 매우 엄청났습니다. 어떻게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역군(役軍)은 27만 명이 하루씩 일하는 만큼의 인력을 써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건원릉(健元陵)의 둘째 능선을 사용한다면 공사가 조금 줄어들 것인데, 품삯을 주고 사람을 모집한다면 농사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고 승려는 원래 농사를 짓지 않으니 농사철에 부린다 하더라도 피해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백성의 힘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큰 역사를 끝낼 수 있다면 다행한 일이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선대 조정에서 유릉(裕陵)의 장지를 잡을 때 건원릉(健元陵)의 둘째 능선을 정하려다가 곧바로 ‘둘째 능선은 후일에 사용하도록 하라.’고 하교하셨다 하니, 선왕의 뜻은 실로 우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술관(術官)이 어떻게 당시의 술사(術士)보다 낫다고 하겠습니까. 신들의 의견으로는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둘째 능선이 참으로 좋은 자리였다면 왜 그전에 사용하지 않았겠는가."
하자, 김류가 아뢰기를,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 놓은 데에 각기 그 주인이 따로 있는 것이고 보면 술가들의 일도 그럴 수가 있다고 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재상 중에도 지술(地術)을 잘 아는 자가 있는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최명길이 조금 안다고 합니다."
하였다. 김류가 또 아뢰기를,
"소신이 지난해 경연 석상에서 망령되이 생각을 말씀드렸다가 한바탕 풍파를 일으켰으니, 지금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대체로 최명길이 올린 차자에, 신이 이조 낭관을 불러 ‘만약 나만갑(羅萬甲)을 전천(銓薦)050) 에 포함시키면 입계하여 치죄하겠다.’고 하였다는 대목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신이 바로 윤원형(尹元衡)이 되고 말 것인데, 어떻게 이처럼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낭관이 중한 명망이 있다고 할지라고 어떻게 대신보다 중할 수가 있겠는가. 최명길의 차자는 참으로 괴이하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나만갑은 경박하고 잡된 자입니다. 신하로서 분수를 모르고 월권하였으니 조정을 혼란케 할 우려가 없지는 않습니다마는, 아직 죄가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벌을 준다면 너무나 심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만갑은 확실히 소요를 일으키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벌을 받게 되자 의정부 이하가 모두 서로 구호하였는데, 대신의 체면으로서 어찌 이래서야 되겠는가."
하자, 김류가 아뢰기를,
"나만갑이 경박하고 잡되기는 하지만 장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러 그를 인정하기도 합니다만, 어찌 자기들의 당이라고 감싸느라 그러는 것이겠습니까. 이 때문에 갑자기 벌을 준다면 성덕이 손상되지 않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많이들 말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각도에 영장(營將)의 관직을 설치한 것은 원래 군정(軍政) 때문으로서 병사(兵事)를 전담시켰던 것인데, 수령들이 모두 멸시하므로 여러 고을을 호령할 수가 없습니다. 영장으로 임기가 만료되어 체직되는 자들을 추천하여 수령으로 삼기도 하고 승진시켜 곤수(閫帥)에 임명함으로써 그 직책을 중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체찰사의 직책을 맡은 지가 오래 되었는데, 무사 중에 쓸 만한 자는 누구인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더러 있기는 합니다만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거나 지적을 받으면 대론(臺論)이 따르게 마련인데, 옛날에는 사람을 쓰는 길이 이처럼 좁지는 않았습니다. 이일원(李一元)이나 유응형(柳應泂) 같은 자들은 모두가 재질이 있으니 쓸 만한 자들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수일(李守一)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경도 쓸 만한 사람을 말해 보라."
하니, 이수일이 대답하기를,
"신이 어떻게 감히 사람을 천거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백전 노장인데, 어찌 굳이 사양하는가?"
하니, 이수일이 아뢰기를,
"신처럼 노둔하고 못난 사람이 어떻게 감히 사람을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다만 듣건대 서로(西路)가 무너져 흩어질 때 정봉수(鄭鳳壽)만은 용골성(龍骨城)을 지켰다고 하니, 다시 한 곳의 책임을 맡겨 그가 어떻게 하는지 시험해 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도 경직(京職)을 주어 시험해 보고 싶다."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각도의 누락된 군인들을 조사해 뽑아내어 작호(作戶)하는 일과 관련하여 그 원수(元數)는 일찍이 계하(啓下)되었습니다마는, 번(番)이나 대오의 명칭은 미처 마련하지 못하였습니다. 서울에 번드는 군사가 있는 고을의 경우는 누락된 군인의 많고 적음에 구애하지 말고 각 번의 번드는 차례에 나누어 예속시켜 각 고을이 일시에 동원하여 보내는 데 편리하게 하였으면 합니다. 그리고 양남(兩南) 하도(下道) 각 고을의 경우 수군은 본관의 수군에 예속시키고 육군은 원수가 많지 않아 각포(各浦)에 분산시킬 수 없으니 우선 병영에 예속시키도록 허용하였다가 서서히 누락된 액수(額數)가 채워질 때를 기다려서 모두 처리하게 하소서. 충순·충찬·충장·충익위 등의 수군과 사수로 충정될 자는 또한 모두 본도로 하여금 사수를 마련하는 가운데에 포함시키는 것이 옳겠습니다. 서울로 번드는 번군의 명칭과 각 포와 병영에 나누어 배속할 수는 모두 별단(別單)에 써서 올립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평안도 감사 김시양(金時讓)이 치계하기를,
"정밀하게 뽑은 병사가 모두 4천여 명인데 겨울철 석 달부터 얼음이 녹을 때까지 안주(安州)로 들여보내 수비하게 하였고, 방군(防軍)은 3천 4백 명인데 겨울철이나 여름철을 막론하고 교대로 번들게 하였습니다마는 노약자가 반절이나 됩니다. 의주(義州)는 위급 시에 반드시 수비해야 할 지역인데, 남쪽 병력이 여기에 들어와 방어하는 일이 다시 없습니다. 예로부터 변경을 지키는 데 내지(內地)의 병력을 쓴 것은 변방의 힘을 축적하기 위한 것으로서 처음부터 백성을 학대하여 먼곳에 가 수고하도록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현재 변방이 예전보다 훨씬 우려스러운데, 둔병(屯兵) 3백 명 정도는 위급할 때 있으나마나 합니다. 앞으로 다시 중국인이 소란을 피우는 화가 일어날 경우 어떻게 그들이 두려워하도록 만들겠습니까. 조정에서 만약 군량 대는 일을 걱정한다면, 신은 3백 명을 4개 부대로 나눈 뒤 서로 교대로 철산(鐵山)에서 군량을 받도록 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그럴 경우 4일 밖에 걸리지 않고 또 2백 50명은 항상 성 안에 남아 둔전(屯田)을 설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흉년만 당하지 않으면 1년 수확량이 적어도 6천∼7천 석은 될 것이니, 추수한 뒤에는 번거롭게 식량을 수송하지 않아도 자체적으로 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는 조충국(趙充國)이 황중(湟中)에 둔전을 설치하려던 뜻과 같습니다. 그러나 조충국이 백전 노장으로서 빠짐없이 계획을 세웠는데도 그의 계획을 옳다고 한 공경(公卿)은 처음에 겨우 열 명 중에 두서너 명에 불과했습니다. 조정으로 하여금 헤아려 조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해서(海西)의 병력은 원래 번을 나누어 입수(入戍)하게 하는 예가 있었는데, 정묘년의 변으로 인해 잠시 정지하였습니다. 이제는 정군(正軍)으로 예전처럼 번을 나누어 들여보내야 하겠으니, 본도로 하여금 현재 남아 있는 병력의 수를 조사하여 보고하게 한 뒤에 참작하여 재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중국인이 다시 난을 일으키는 변이 있다 하더라도 수백의 잔약한 병력만으로는 두렵게 보일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농사철에 사람을 동원하여 들어가 지키게 하는 것은 무익한 듯싶다."
하였다. 비국이 또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매우 타당합니다. 농한기를 기다려 천천히 의논해서 처리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5일 갑자
지릉(智陵)에 화재가 발생했다. 승지 정기광(鄭基廣)이 봉심(奉審)한 뒤 와서 아뢰기를,
"을축년에 불이 났을 때, 수호군(守護軍)이 경옥(京獄)에 구금되어 혹독한 침해를 입었기 때문에 다시 모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재실(齋室)이 조금 떨어져 있는데, 승려 2명이 보살피고 있을 뿐 참봉이나 수호군은 아예 돌아가며 수호하는 규정마저 없습니다. 만약 서로 바라다보이는 곳에 재실을 옮기고 또 참봉 이하를 모두 입직(入直)토록 한다면 반드시 이런 환난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6일 을축
대사헌 정온(鄭蘊)이 부름을 받고 들어와 상소하기를,
"신이 옛날에 해도(海島)에 있을 때 듣건대 귀양살이 하는 무리들로서 매양 해가 뜨고 달이 뜰 때면 축수(祝手)하며 두 번 절하고 죄가 없다고 호소하면서 살아서 돌아가게 해 주기를 바라는 자가 비일비재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비록 아무 것도 모르는 미천한 자들의 소행이라 하더라도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기에는 충분하다 할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한 사내가 가슴을 두드리고 원망해도 5월에 서리가 내리고, 한 여인이 원한을 품어도 3년 동안 가뭄을 초래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온 나라 안에 가슴을 두드리며 원망하는 자가 한 사내나 한 여인뿐만이 아니니,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유사에게 명하여 자세히 죄안(罪案)을 살피게 해 죄가 그다지 무겁지 않은 자는 깨끗이 씻어 주어 조금이라도 인색한 바가 없게 하소서. 그러면 재앙을 막는 데 일조(一助)가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 서민들이 무고한 벌을 받을 때에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더구나 선왕이 사랑했던 아들의 경우이겠습니까. 이공(李珙)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 신이 탑전에서 대략 진달드리고 계사(啓辭)에서도 약간 언급하였습니다만, 삼가 성상의 말씀을 듣고 우러러 깊은 뜻을 헤아려 보고는 상의 뜻이 굳게 정해져서 움직일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뒤 며칠이 못되어 신은 체직되어 남녘으로 돌아갔는데, 조정과는 약수(弱水)051) 처럼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이공의 유죄 여부와 사형에 해당되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실로 알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신의 생각에는, 설사 이공의 역모한 사실이 죄다 드러났다 하더라도 외딴 섬에 안치시켜 사형을 면케 해 준다면 죄에 대한 벌을 주고 친한 이에게 친하게 대해 주는 전하의 의리가 양쪽 모두 온당함을 얻어 완전하게 될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조정 신하의 요청에 못 이겨 은혜를 온전히 하는 아름다움을 보전하지 못하고 말았으니, 신은 전하를 위해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이제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지금 그의 늙은 아내와 어린 아이들이 아직도 외딴 섬에 있으니, 그들의 울부짖는 소리나 괴로워하는 모습은 말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깊숙한 궁궐과 넓은 집에서 살다가 모진 바람과 독한 안개를 가리지 못한 채 살고, 비단옷을 입었던 몸에 헌 누더기도 제대로 걸치지 못하고, 고량 진미를 먹었던 입에 겨밥도 그나마 부족할테니, 그런 상황에서 살아 남을 자가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또 듣건대 혼기가 찬 딸이 있다 하는데, 전하께서 끝내 보살펴 주시지 않는다면 선왕이 남기신 혈육이 결국 해도의 미천한 백성이 되고 말 것이니, 또한 매우 불쌍하지 않습니까.
신은 듣건대 하늘과 사람이 서로 응하게 되는 이치를 매우 두렵게 여겨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아래에서 사람의 일이 잘못되면 위에서 하늘의 변고가 응하는데, 그 감응되는 것이 그림자나 메아리보다 더 빠르다고 합니다. 따라서 전하가 골육에게 이처럼 대한 이상 괴변이 생기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시경(詩經)》에 ‘문왕(文王)이 오르내리어 상제의 곁에 계신다.’고 하였는데, 주희(朱熹)가 풀이하기를 ‘문왕의 영혼이 하늘에 있으면서 오르락내리락하며 언제나 상제의 곁에 있기 때문에 그의 자손들이 복과 은혜를 입어 천하를 소유한 임금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하늘에 계신 선왕의 영혼이 상제의 곁에서 오르내리며 그들의 억울함을 호소하여 재앙을 내리지 않았겠습니까. 대체로 천둥친 변고는 상제가 성낸 것이고, 태묘(太廟)의 나무에 벼락이 친 것은 선왕이 성낸 것입니다. 상제와 선왕이 전하에게 경고하여 훌륭하게 마무리짓도록 한 것이 전하의 곁에서 친히 가르쳐 준 것보다 더 간절합니다. 만약 속히 생각을 바꾸어 상제의 선왕이 내리신 책망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지 않는다면 재변은 언제나 있게 될 것이고 나라는 제대로 되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신의 소를 내리시어 대신에게 의논케 하소서. 그리하여 특별히 공의 죄를 사면함과 동시에 봉작(封爵)을 회복해 주고, 그의 늙은 아내와 어린 아이들도 빨리 육지로 나오게 하여 공의 무덤 밑에 초막을 짓고 향화(香火)가 끊이지 않게 하고, 시집보내야 할 딸을 사족(士族)을 택해 예를 갖추어 시집보내고, 성장한 아들의 경우 혹 완전히 풀어 줄 수 없거든 가까운 섬으로 옮겨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죽는 것을 면할 수 있게 해 주소서. 그러면 선왕의 영혼도 위에서 반드시 위로되고 기뻐서 상제를 도와 재앙을 상서로움으로 바뀌게 할 것입니다. 신이 간관의 임무를 띠고 있는데다 또 구언(求言)하시는 기회를 만났기에 감히 남김없이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금부가 회계하기를,
"정온이 역적 이공을 논한 것은 망령스럽기 짝이 없어 거론할 가치도 없습니다만, 나머지의 죄인을 풀어 주는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양사가 정온이 망언한 죄를 논하여 파직을 청하였는데, 여러 차례 아뢰니, 체차를 명하였다.
4월 17일 병인
병조가 아뢰기를,
"산성의 역사에는 으레 연호군(烟戶軍)을 부렸는데, 그 수가 8천∼9천 명을 밑돌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동원한다면 농사에 방해가 될 듯하여 승군(僧軍)과 유위군(留衛軍)만을 우선 계청했던 것인데, 승군은 1천 명을 한 달 기한으로 복역시켜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8일 정묘
헌부가 아뢰기를,
"요즈음 궁액(宮掖)의 금방(禁防)이 날로 해이해져 외인들이 드나들고 있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지난번 풍정(豊呈) 때에 들어오게 되어 있는 명부(命婦) 이외에 여염의 아낙들이 연줄을 통해 함부로 들어 왔는데, 심지어는 유식한 경사 대부들의 집에서도 친속(親屬)을 끼고 멋대로 돌아다니며 구경하였으니, 그 혼잡되게 한 것이 더욱 놀랍습니다. 그들 가운데 유난히 드러난 자의 경우는 그 가장에게 벌을 주어 후일의 폐단을 막아야 합니다.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 사직(司直) 홍영(洪霙), 이조 참의 강석기(姜碩期)는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홍영 등은 잇따라 왕실과 혼인을 맺었으니 그의 아내가 대궐에 출입하는 것은 실로 이상할 것이 없다. 그 가운데 완풍 부원군 이서의 집에서는 한 사람도 데리고 오지 않았는데 이와 같이 논하였으니, 이렇게 본다면 외방의 일들을 잘못 논하는 것이 괴이할 게 없다."
하였다. 집의 윤황(尹煌), 장령 유성증(兪省曾)이 이 때문에 인피하였다. 지평 조석윤(趙錫胤)·정양필(鄭良弼) 등이 처치하기를,
"윤황 등의 논계에 일단(一段)의 착오가 없지는 않습니다마는, 또한 모두 사실과 틀린 것은 아닙니다. 출사를 명하소서."
하니, 상이 체차를 명하였다. 정원이 윤황 등에게 내린 체차의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자, 조석윤 등이 처치를 잘못하였다고 인피하였는데, 간원이 출사를 명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9일 무진
함경 감사 윤의립(尹毅立)이 치계하기를,
"함흥부(咸興府)에 있는 4능과 신씨(申氏)의 묘소에는 한식에만 제사지내고 있는데, 안천백(安川伯)과 이씨(李氏) 묘소 및 영흥부(永興府)의 영흥백(永興伯) 묘소에는 봉사인(奉祀人)이 제물을 스스로 준비하여 사명일(四名日)에 제사지내고 있으며, 덕원부(德源府)의 경안백(慶安伯) 묘소에는 관에서 제물을 준비하여 사명일에 제사지내고 있습니다. 본도의 6능에는 한식에만 제사지내고 있는데 각 묘소에는 사명일에 제사지내고 있는 그 이유를 모르겠고, 제물을 관에서 준비하는가 하면 혹은 사가(私家)에서 준비하기도 합니다. 제사지내는 중요한 일이 이처럼 같지 않으니, 해조로 하여금 강정(講定)하게 하여 영구히 쓸 수 있는 규범이 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명하였다.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특진관 정경세(鄭經世)가 아뢰기를,
"신이 어제 삼가 헌부의 계사를 보고 매우 섬뜩하였습니다. 헌부가 한 말은 원래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컨대 홍영 등의 집은 그의 아내야 혹 들어올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친척까지 데리고 버젓이 대궐로 들어왔으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두 신하의 집은 원래 명부와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보통 때의 연회라면 볼 수가 있겠습니다마는 풍정과 같은 대례(大禮)를 치르는 자리에 어떻게 감히 함부로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지극히 옳다. 그러나 예로부터 경축하는 예가 있으면 인척들이 인사를 드렸는데, 이는 잔치에 참석하는 것과는 다르다. 만약 일률적으로 의(義)에 입각해서 말한다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자전을 위해 막중한 예를 행하는 이때에 친척들이 들어와 보지 못한다면 어찌 섭섭하지 않겠는가."
하자, 정경세가 아뢰기를,
"인정에서 우러나온 것도 예의로 절제해야 한다는 것이 고인의 가르침입니다. 어떻게 위로하고 기쁘게 해드리는 한 가지 일 때문에 예의상 한계가 있는 것을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토성(土星)이 물러나 항성(亢星)의 셋째 별을 범하였다.
독부 도사(督府都司) 유흥치(劉興治)가 난을 일으켜 부총병 진계성(陳繼盛)과 흠차 통판(欽差通判) 유응학(劉應鶴) 등을 살해하고 스스로 무리를 거느렸다.
평안 감사 김시양(金時讓)이 치계하였다.
"유흥치의 부하인 김가(金哥)라는 자가 30여 인의 군사를 이끌고 의주(義州)로 왔기에, 그 이유를 물으니 그가 말하기를 ‘유 도사(劉都司)가 이달 15∼18일 사이에 배 편으로 북경으로 갈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4월 21일 경오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명소(命召)하여 유흥치를 토벌하는 일을 의논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흥치가 주장(主將)을 살해하였으니, 이야말로 중국 조정의 반적(叛賊)이다. 내가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려 하는데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좌의정 김류(金瑬)가 아뢰기를,
"유흥치가 주장을 죽였으니만큼 군중(軍中)에 그를 따르지 않는 자가 필시 많을 테니, 사세상 호인(胡人)에게 투항할 것입니다. 만약 그가 항복한 달인(撻人)들을 이끌고 중국 군대의 길을 차단하면서 우리 나라에 호령한다면 큰 근심거리가 될 것이니, 신은 그를 토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이조 판서 정경세(鄭經世)도 토벌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속히 공격하는 것이 좋다. 군사 기밀이 혹 누설되어 적이 오랑캐와 화친한 뒤 여러 가지로 따지게 되면 필시 방해되는 점이 있을 것이다. 그 무리의 마음이 그를 따르지 않을 때를 이용해 죄를 세상에 알리고 토벌한다면, 반드시 온 섬이 놀라 동요할 것이다. 다만 우리 나라는 항상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지 못하니, 그것이 염려스럽다."
하니,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이 아뢰기를,
"만약 수군 3천 명을 이끌고 바로 가도(椵島)를 공격하여 먼저 그들의 배를 불태운다면 반드시 적을 붙잡게 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계책이 가장 좋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미 계획을 정하셨으면, 먼저 대장을 임명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누가 대장에 적합하겠는가?"
하자, 김류가 아뢰기를,
"이서(李曙) 만한 자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해창군(海昌君) 윤방(尹昉)이 아뢰기를,
"신의 의견도 그러합니다. 장수들 중에 그보다 나은 자는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도 그가 늙고 병든 것이 안타깝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인재를 얻기가 가장 어려운데, 이서가 아니면 안 됩니다."
하였다. 이서가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세상에 드문 은혜를 입었으니 죽음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마는 날이 갈수록 병들고 쇠약해져 감당치 못할까 염려됩니다. 정충신·유응형(柳應泂)·이일원(李一元) 등을 데리고 갔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마음대로 택하라."
하였다. 정충신은 아뢰기를,
"신이 보잘것은 없습니다마는 한 방면을 혼자 맡았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충신이 한 방면을 스스로 맡고 싶다고 하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정충신은 수군을 통솔하고 이서는 보병을 지휘하라."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속히 정충신을 파견하여 먼저 일을 처리하도록 해야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경들은 빈청에 물러가 군무(軍務)를 계획하라."
하였다. 그 뒤에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심기원(沈器遠) 등이 모두 상소하여 불가하다고 말하였으나, 상이 모두 답하지 않았다.
4월 23일 임신
부체찰사 이경직(李景稷)에게 교동(喬桐)으로 나가 순시하여 수군을 점검하고 독려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승지 김시국(金蓍國)을 영중추부사 이원익(李元翼)에게 보내 돈유(敦諭)하기를,
"경은 숙덕(宿德)을 지닌 원로로서 의리상 기쁨과 슬픔을 같이 해야 할 것이다. 내가 경에게 기대하는 것이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 것보다 더 간절한데, 경은 꼭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있다. 내가 덕이 없다 하더라도 선왕의 은혜만은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현대 시국이 무척 어려워 마치 불구자가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것과 같다. 경은 생각해 보라. 옛날 사상보(師尙父)는 90의 나이에도 고로(告老)하지 않았고 문로공(文潞公)은 나이가 80이 넘었어도 조정에 나왔으니, 대신의 도리는 본디 이러해야 마땅하다. 지금 또 근신(近臣)을 보내 나의 간절한 뜻을 알리니, 경은 포근한 날을 택해 교자를 타고 도성으로 들어와 나의 간절한 소망에 부응하라."
하였다. 그러나 이원익은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끝내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비국이 아뢰기를,
"공청도 수군의 집합 기일이 너무 늦으니, 선전관을 파견하여 본도에 하유해서 5월 10일에 떠나 보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24일 계유
함경 남도 병사 윤숙(尹璛)과 경기 수사 유응형(柳應泂)이 사조(辭朝)하니, 상이 불러서 보았다. 상이 윤숙에게 하문하기를,
"남도와 북도의 기병을 비교해 볼 때 어느 곳이 더 정예인가?"
하니, 윤숙이 대답하기를,
"북도의 기병이 가장 정강(精强)하니, 남도는 훨씬 못미칩니다. 그런데 그저 빈 장부만 있을 뿐 실제로 있는 수는 적으니, 위급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어떻게 적을 방어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깜짝 놀라며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기병이 거의 전멸 상태이다. 이는 대체로 북방이 서울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수령이나 변장들이 조정에서 모를 것이라고 여긴 나머지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횡포를 부렸기 때문이다. 이대로 간다면 간신히 살아 남은 병사와 백성이 결국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 것이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경은 그들의 현부(賢否)를 살펴 출척(黜陟)하는 일을 엄히 밝히도록 하라."
하고, 유응형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경은 나라에 공로가 있고 재주와 용맹이 있기 때문에 전의 장수와 교체하여 임명했으니,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윤숙과 유응형에게 갑옷과 활·화살 등의 물품을 내리고 술을 하사한 뒤 보냈다.
김반(金槃)을 전한으로, 채유후(蔡𥙿後)·민응형(閔應亨)을 교리로, 김세렴(金世濂)을 헌납으로 삼았다. 김세렴은 총명한데다 기억력이 좋아 일찍이 장원급제하였다. 혼조(昏朝) 당시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났을 때, 정언으로 있으면서 참여하지 않았다가 이로 인해 벌을 받았는데, 사론(士論)이 훌륭하게 여겼다. 반정 초에 그를 불러 수찬에 제수하였는데, 김류가 더욱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늘 말하기를,
"김세렴은 진정한 학사(學士)이다. 경연에서 학문을 강론하는 데에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
하였다. 그러다가 김류가 이조 판서가 되자, 그를 추천하여 전랑(銓郞)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묘 호란을 당해 무군사(撫軍司) 종사관으로 동궁을 따라 전주에 이르렀다가 조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역마(驛馬)를 타고 상에 달려갔다. 그리하여 강릉(江陵)에서 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가 거처했던 곳의 경치가 빼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점을 헐뜯었다. 이조 정랑 김육(金堉)이 사명(使命)을 받고 출발하려 할 즈음에 좌랑 심지원(沈之源)에게 말하기를,
"김세렴이 이미 복을 벗었으나 사람들의 말이 이와 같으니, 그 전에 추천한 것을 그대로 쓰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대가 헤아려 처리하라."
하니, 심지원이 알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김육이 돌아왔을 때 김세렴이 이미 전랑의 추천에서 삭제되었으므로 김육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심지원에게 말한 것은 신중히 하기 위해서였는데 어찌 이처럼 경솔히 하였단 말인가."
하였다. 심지원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전에 그렇게 말하였기 때문에 동료들과 의논하여 처리하였는데, 이제 와서 딴 소리를 하는 것은 무슨 의도인가."
하였다. 김류가 이를 듣고는, 나만갑(羅萬甲) 등이 평소 김세렴과 사이가 좋지 않아 모함한 것으로 의심하였는데, 그 뒤에 경연에서 아뢰기를,
"나만갑은 경박한 사람으로 전상(銓相)의 권리를 침해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또한 유언비어를 듣고 의심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마침내 크게 노하여 나만갑은 중도 부처하도록 명하고, 김육은 금부에 내린 뒤 자기와 의견이 다른 자를 모함하였다고 하며 문외 출송시켰다.
4월 25일 갑술
상이 대신과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 부원수 정충신(鄭忠信) 및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불러 보고 이르기를,
"방금 김시양(金時讓)의 장계를 보건대, 대개 유흥치(劉興治)가 오랑캐와 내통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었다."
하니, 영의정 오윤겸(吳允謙)이 아뢰기를,
"이는 곧 소만량(蘇萬良)이 말한 것이니, 서로 통하고 있다는 것이 헛된 말은 아닌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만약 그렇다면 그들 입장에선 계책을 잘못 세운 것이고, 우리 입장에선 토벌하는 일이 명분도 바르고 말하기도 편하게 되었다."
하였다. 해창군(海昌君) 윤방(尹昉)이 아뢰기를,
"듣건대 섬 안의 장사들이 유흥치를 보호해 주려고 거론한 일이 있다고 하는데, 중국 조정이 만약 이들을 무마하여 받아 줄 경우, 우리가 토벌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 점이 신은 크게 걱정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들이 주본(奏本)을 올렸다 하더라도 실은 중국 조정에 충성을 바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잠시 군대 출동을 늦추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그리고 설사 무마하여 받아 준다 하더라도 그것은 당(唐)나라 때 이름은 번진(藩鎭)이지만 실은 적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토벌하는 것이 옳다고 하는 것이다. 항우(項羽)가 경자관군(卿子冠軍)을 살해하였을 당시에 항우를 죽인 자가 있었더라면 그 누가 옳지 않다고 했겠는가. 더구나 유흥치의 죄는 항우보다 더 심하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였다. 오윤겸이 아뢰기를,
"중국 조정이 힘으로는 제압할 수가 없어서 임시로 붙잡아두려는 계책을 썼을 경우, 속국이 마음대로 토벌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을 것 같고, 후환이 없다고도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그다지 염려할 것이 없다. 나는 후환이 진정 없을 것으로 알고 있다."
하였다. 병조 판서 이귀(李貴)가 아뢰기를,
"저 유흥치가 진계성(陳繼盛)이 진을 옮기는 일로 인하여 군사들이 원망하고 분노하는 기회를 틈타서 감히 반란을 일으켜 주장(主將)을 살해하였으니, 참으로 그의 죄를 성토하고 토벌해야 마땅하겠습니다마는 그에 따르는 이해와 시세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당초에 반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누가 분개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일을 시작할 때는 반드시 처음부터 계획을 잘 세워 형세를 살펴보고 힘을 비교해 본 다음에 시행해야만 싸웠다 하면 승리하게 되고 공략하였다 하면 차지하게 되어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군사를 일으키는 날을 당하여 어떻게 감히 저지하는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다만 바다를 건너 멀리 정벌하다 보면 자칫 한 달이 걸릴텐데 저들은 이미 정돈하여 휴식된 군사로 지친 병력을 기다릴 것이므로 싸우고 싶어도 이기지 못할 것이고 물러가고 싶어도 물러가지 못하게 될 것이니, 낭패당할 우려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또 설령 한바탕 싸워서 이긴다 하더라도 중국 조정과 상의하지 않고 임의로 정벌하는 이상 또한 의심을 살 우려가 없지 않으니, 신은 이 점이 걱정됩니다."
하니, 상이 노기 띤 목소리로 이르기를,
"오늘은 반역자를 토벌하는 일에 대해 의논하고 있지 군대의 해산을 의논하고 있지 않다."
하였다. 상이 총융사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완풍(完豊)이 그 전에 면대(面對)를 청했었는데,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하니, 이서가 대답하기를,
"신이 이미 명령을 받았습니다. 신의 행군은 정충신과 앞서거나 뒷설 것인데, 정충신이 먼저 떠나면 신이 뒤따라 갈 것입니다만, 반드시 본도와 상의하여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인이 서쪽 지방에 두루 퍼져 있어 군사 기밀이 누설될 염려가 있으니, 병사를 풀어 체포함으로써 서로 통하는 길을 끊어야 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일리가 없지는 않으나 또한 그렇지 않은 점도 있다. 그들이 도망쳐 돌아가는 길목을 가로막아 과연 남김없이 붙잡을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만약 놓쳐 섬으로 달아난다면 병력을 출동시키기 전에 화가 먼저 닥칠까 염려된다."
하였다. 상이 또 정충신에게 이르기를,
"경은 가도(椵島)의 형세를 잘 알고 있는가?"
하니, 정충신이 아뢰기를,
"일을 할 때는 만전을 기해야 합니다. 먼저 그들의 배를 제거하여 중국과 통하는 양도(糧道)를 끊으면 그들의 형세가 필시 군색하게 될 것인데, 이렇게 하면 틀림없이 무찌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충신의 계책이 잘못되었습니다. 짐승도 몰리다 보면 덤벼드는 법인데, 만약 그들의 도망갈 길을 끊는다면 반드시 죽을 힘을 다할 것입니다. 유흥치가 이렇게 패역스러운 일을 저질렀는데, 성 사람들이 어찌 심복할 리가 있겠습니까. 한 쪽을 터놓아 살아갈 길을 가리켜 주고, 거역하고 순종하는 것에 관한 도리를 설명함과 동시에 그에 따른 화복(禍福)의 이치를 일깨워 주는 것이 제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로부터 유혹과 협박을 받았던 무리들이 반드시 저절로 무너져 흩어질테니, 병사의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평정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바로 나의 뜻과 맞다."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지금 상께서 결단을 내려 정하셨으니 말씀드려도 소용이 없겠습니다마는 어리석은 신의 소견을 조금 아뢸까 합니다. 훈련도 안 된 병력으로 하루 아침에 멀리 정벌하여 이처럼 성공할 수가 없는 일을 한다는 것이 신은 걱정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병조 판서로 이러한 말을 하다니, 서쪽으로 정벌하러 가는 장사들도 반드시 맥이 풀리고 말 것이다. 만약 중국 조정의 율로 말한다면 불문에 부쳐서는 안 될 것이다."
하자, 이귀가 대답하기를,
"신을 군법으로 처벌하면 신도 달갑게 죽을 것이고, 신에게 정충신을 따라 가도록 한다면 신이 또한 가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우레와 같은 위엄을 조금 거두시고 죽음에 다다른 사람의 말을 굽어 살피소서."
하였다. 상이 노여워하며 대답하지 않고 소대(召對)를 파하도록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총융사 이서(李曙)가 서쪽으로 정벌하러 떠날 때에 전마(戰馬) 20필을 하사하라."
비국이 아뢰기를,
"이번 일은 극비로 행해야 되는데 누설될 폐단이 염려되었으므로 그 때에 임해서 본도(本道)에 지시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김시양(金時讓)의 장계를 보건대, 이미 병력의 정돈을 끝마쳤다고 하니, 본도의 동태를 그들이 못 들었을 리가 없습니다. 속히 본도에 은밀히 알리어 전선(戰船)을 정비하고 군량을 거두어 모아 대기하도록 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26일 을해
평안 감사 김시양(金時讓)이 치계하기를,
"청천(淸川) 이북 지역은 병화(兵禍)를 입은 뒤로 궁시(弓矢)나 기계가 없는데, 가도(椵島) 수군이 만약 순풍을 만나면 하루도 채 못되어 세 고을에 도착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안주(安州)를 수비하는 병사도 겨우 4백 명뿐으로서 다시 변에 대비해 동원할 병력이 없으니, 해서의 병력을 증원시키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하운증(夏雲蒸)이란 중국인은 진 부총(陳副摠)의 부하입니다. 일찍이 어떤 일로 육지에 나왔다가 가도로 되돌아가는 길에 평양에 이르러 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역관 김언혼(金彦渾)에게 말하기를 ‘나의 부모와 처자가 모두 광록도(廣鹿島)에 있다마는 어떻게 다시 섬으로 들어가 유흥치와 함께 도적이 되겠는가. 포정(布政)이 나를 북경으로 가는 배 편에 보내 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조정에 알려 남쪽으로 나를 보내 준다면 귀국의 백성이 될 수도 있다.’ 하였습니다. 신이 불러 보고 술을 주면서 위로하였더니, 그가 눈물을 흘리고 울먹이며 말하기를 ‘투항한 달자(㺚子)는 우리와 같은 족속이 아닌데 모문룡(毛文龍)이 그 때 즉시 없애지 않았다가 이러한 변고를 초래하였으니, 그 죄를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예로부터 배반한 도적치고 오래 버티었던 예가 있었는가. 이 적이 패한다는 것이 훤이 눈 앞에 보이는데, 내가 어떻게 다시 섬으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오랑캐가 될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그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신유년의 변란 때에 간신히 살아나 머리털이 그대로 있다.’ 하고는 이내 목메어 말을 잇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이제 장차 대장이 병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떠나게 되는데, 크고 작은 군무(軍務)를 감사와 상의하여 적병의 습격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운증은 충성스럽고 의로운 인사이니, 군중(軍中)에 두고 후하게 대우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지경연 김기종(金起宗)이 아뢰기를,
"당(唐)나라의 고사를 보건대, 중서성(中書省)에서 오정(午正) 6각(刻)에 퇴근하였는데, 이임보(李林甫)가 재상이 되어서는 천하에 할 일이 없다고 하여 사시(巳時) 초에 퇴근하면서도 오히려 날마다 중서성의 문을 열었다고 하니, 이를 본다면 얼마나 직무에 충실했던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관리들이 직무에 태만하여 관아에 앉아 있는 때가 드문데, 비국의 모임까지도 형식적인 행사로 여겨 도리어 비평하고 있으니, 시속의 부박함이 극에 달했다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삼공(三公)이 나라의 대신으로서 이처럼 애쓰고 있는데, 보고 감동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거기에다 비평까지 한단 말인가."
하였다. 참찬관 김시국(金蓍國)이 아뢰기를,
"옛날 부견(苻堅)의 부진(苻秦)052) 에서는 천재(天災)가 있자 제(帝)라는 칭호를 쓰지 않고 정형(政刑)을 잘 닦아 현부를 가려 상벌을 고르게 하였으므로 온 경내가 숙연해져서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고 합니다. 저 부진(苻秦)053) 이란 자는 오랑캐의 추장이었지마는 그래도 재앙을 돌이켜 상서로움으로 만들었으니, 이는 실제로 힘썼던 효과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재변이 극도에 이른 적은 없었습니다. 종묘의 나무에 벼락이 친 변고는 양한(兩漢)의 역사에도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그런데도 실제로 응답하는 일은 없이 대소 신료들이 안일에 빠져 사람마다 다른 마음을 품고 있으니, 비평을 초래한 것은 본래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대체로 부박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을 보면 자기 자신을 책망하는 것은 박하게 하면서도 남은 여지없이 몰아세우고 남들이 못한다고 비웃으면서 자기가 못하는 것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 세상이 온통 이 지경이다. 고인이 이르기를 ‘나쁜 것을 따르기는 쉬워도 착한 것을 따르기는 어렵다.’ 하였는데, 이 말이 정말 허언이 아니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이서와 정충신이 서쪽으로 정벌하러 갈 때에 내외에 술을 내리고 일등의 음악을 하사하라."
총융사 이서(李曙)가 아뢰기를,
"신이 경기 지역의 병력을 처음 정비할 때에 선봉(先鋒)을 만들 목적으로 고을마다 2백 근을 들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를 뽑아 아병(牙兵)이라고 부르면서 항상 보살펴 주었고, 또 지갑(紙甲)과 대검을 만들어 돌격할 때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신이 명을 받고 전장에 나가게 되었으니, 그 중에서 1백여 명을 뽑아 데리고 갔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27일 병자
우의정 이정구(李廷龜)가 병으로 사직 상소를 세 번 올렸는데 상이 다시 관리를 보내 유시하니, 이날 나와 정무를 보았다.
유흥치(劉興治)가 보낸 차관(差官)이 왔다. 상이 대신 및 비국 당상·총융사·부원수를 불러 보고 이르기를,
"유흥치가 파견한 자는 참으로 구류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기한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적이 반드시 의심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니, 좌의정 김류가 아뢰기를,
"그가 보낸 사신을 대우하고 그가 보낸 서계에 답한다는 것은 의리상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큰일을 도모하려면 또한 상규(常規)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하고, 우의정 이정구가 아뢰기를,
"대우해서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래야 할 것 같다."
하였다. 정구가 아뢰기를,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급히 진위사(進慰使)를 보내 각부(閣部)에 이자(移咨)하여 천자에게 주문(奏文)한 다음 성지(聖旨)를 받들어 토벌한다면, 명분도 바르게 되고 후환도 없을 것입니다마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중국 조정에 할 말이 없게 될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배반한 적은 누구나 죽을 수가 있으니, 군사들이 아직 그를 따르기 전에 토벌하려고 하는 것이다. 만약 중국 조정에 알려 회답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면 그들의 위세가 이미 이루어질 것이니 쉽사리 도모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신이 비국에 나왔을 때는 밖에 있는 신하들이 모두 정벌하기 어렵다고 말하였는데, 지금 주상의 앞에 와서 보니, 순종만 하고 어렵다고 하는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신하의 도리가 과연 이렇단 말입니까. 예컨대 이서나 정충신 무리들이 자기 입으로 말하는 것을 신이 직접 들었으니, 그들이 어떻게 감히 숨기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명을 받은 장수들도 어렵다고 했단 말인가?"
하고, 두 장수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어떤 일이든지 가벼이 하면 실패하고 신중히 하면 성공하는 법이다. 경들은 어렵게도 여기지 말고 가볍게도 여기지 말라. 그러나 경계해야 할 것은 미리 겁먹는 것이니, 경들은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또 이르기를,
"우리 나라가 예의의 나라로서 중국을 돕기에는 역부족이나 맹세코 이 적을 섬멸하여 조금이나마 황은에 보답하는 것이 바로 나의 뜻이다. 무기는 흉한 물건이고 전쟁은 위험한 일인데, 난들 어찌 마음에 좋아서 하겠는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출정할 날짜가 이미 박두하였는데, 이러쿵저러쿵 의논이 분분하니, 명을 받은 장수들도 어떻게 동요되지 않겠습니까. 병사들 또한 당연히 맥이 풀릴 것입니다. 반드시 군법을 엄하게 한 뒤에야 성사시킬 수가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의심을 품으면 성공할 수가 없다. 그래서 손권(孫權)이 책상을 칼로 쳐 쪼갠 일이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한 해의 세입(稅入)으로 한 해의 용도에 공급하기도 부족한데, 이번에 군사를 동원하는 일이 또 뜻밖에 생겼으니, 군량을 대는 방안을 미리 강구해야 하겠습니다. 전라도 창고에 비축된 미곡의 회록(會錄)을 가져다 상고해 보건대, 그 수량이 4만 2천 8백여 석이었습니다. 해안 지역에 비축된 여러 종류 미곡 8천 석을 배를 임대하여 운송해서 경창(京倉)과 강도(江都)에 나누어 두었다가 급히 써야 할 때에 대비하게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섬 사람들 모두가 반드시 반역자를 따르지는 않을 것이니, 군사를 일으킨 뒤에 격문을 보내 효유(曉諭)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글 짓는 신하로 하여금 격문을 짓게 하여 부원수의 행차에 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28일 정축
전 길주 목사(吉州牧使) 나덕헌(羅德憲)이 장오죄(贓汚罪)에 걸려 사형에 해당되었는데, 멀리 덕천(德川)으로 유배보내도록 명하였다.
병조 판서 이귀(李貴)가 면대를 요청하니, 상이 불러 보았다. 이귀가 나아가 아뢰기를,
"처음에 유흥치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누군들 분노가 치밀지 않았겠습니까. 상의 뜻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정벌의 조치를 내린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어렵게 여기는 것은 혹시라도 불리할 경우 원한을 사 화만 재촉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신과 다시 의논하여 만전을 기하는 것만 못하다 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계책을 정한 이상 정벌을 중지하고 싶어도 되겠는가. 이 적이 외딴 섬에 웅거하여 수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있으니, 식량이 떨어지면 반드시 우리 나라를 침범할 것이다. 김시양이 이점을 우려하였는데, 그의 말이 매우 일리가 있다. 경도 깊이 생각하여 고식적인 계책을 하지 말라."
하였다. 이귀가 대답하기를,
"적이 수군이 온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선주(宣州)와 철산(鐵山)의 사이로 나온다면 계속 밀고 올 우려가 없다고 반드시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수군을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육군에 더욱 힘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현재 시급한 일은 장수를 얻는 데 있습니다. 이서의 충성심은 취할 만합니다마는 그에게 장재(將才)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정충신은 조금 영민한 것 같습니다마는 또한 원대한 지략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지위가 높은 자는 장수로 삼으면 안 되니, 부귀가 극에 달해 의지와 기백이 이미 해이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진취성 있는 연소한 사람을 택하여 장수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은 노련한 장수에게 자문해야 하니 이수일(李守一)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 역시 군무(軍務)를 주관하고 있는데, 신에게 하나의 책략이나 하나의 계책도 말하지 못하게 한다면, 이 소임을 그만두게 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어리석은 소견을 모두 말씀드릴까 합니다. 유흥치가 보낸 관리에게 반드시 말하기를 ‘처음에 유흥치가 주장을 살해하고 사신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바야흐로 그의 죄를 추궁하려고 군사를 일으키는 중이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중국 조정에 주문하여 알렸다고 하고, 또 사람을 보내 우호를 보이기 때문에 특별히 정벌을 중지하게 하는 것이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반드시 기뻐 감격하면서 두려운 마음을 가질 것이고, 중국 조정에서도 이를 듣고 의롭게 여길 것이며, 노적(奴賊)도 이 사실을 알고는 두려워 자제할 것이니, 그야말로 원수를 이용하여 친하게 만들고 이쪽을 인하여 저쪽을 제압하는 술책이라 할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생각해 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헤아려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옥당이 차자를 올려 유흥치를 치지 말 것을 청하니, 계하(啓下)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섬 안에서 일어난 사건은 그들의 행위로 보면 반역한 것이 훤히 드러났고 사세로 논하면 후환이 끝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오랑캐와 서로 결탁한 뒤에는 사세상 손을 쓰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우익(羽翼)이 조성되기 전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급히 공격한다면 대의를 밝히고 후환을 끊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에 소대(召對)하던 날에 토죄(討罪)하기로 이미 결정했던 것입니다. 다만 기밀은 누설되기 쉽고 병력은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이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며칠 사이에 논의가 파다해졌는데, 심지어는 처음에 정벌해야 한다고 한 사람들까지도 다시 사세가 조금 변했으므로 지금은 정벌할 수가 없다고들 합니다. 출정할 날짜가 이미 박두하였는데, 군사들이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있으니, 신들은 안타깝고 우려되는 마음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대체로 군대를 출동시킬 때는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을 위주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병법에도 ‘사기가 아침에는 힘차고 낮에는 풀어지고 저녁에는 시들시들해진다.’고 하였는데, 오늘날의 일이야말로 사기가 풀리고 시들시들해질 염려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애석함을 금할 수가 있겠습니까. 옛날에 당 헌종(唐憲宗)이 회서(淮西)의 난을 평정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결단을 내렸기에 성사한 것이니, 이를 지금의 본보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시경(詩經)》에 ‘모사(謀事)하는 자가 너무 많아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한 것도 오늘날의 경계가 될 만합니다. 그러나 유신(儒臣)이 진달드린 것도 깊은 우려와 원대한 생각에서 나온 것인만큼 신들이 감히 자신의 견해만 고수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 결단을 내려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회계한 말이 매우 타당하다. 앞으로 다시 망령된 말을 하여 군사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자는 중률(重律)로 논하라."
하였다.
4월 29일 무인
태백성이 나타났다.
양사가 합계(合啓)하기를,
"묘당의 계책이 이미 정해져 출정할 날짜가 이미 박두하였으니 나라의 큰 일을 함부로 의논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마는, 안위(安危)가 걸린 일에 대해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유흥치가 사신을 마음대로 죽였으니, 참으로 왕법(王法)에 비추어 토벌해야 마땅하겠습니다마는, 섬의 정세를 지금 잘 알지 못하는데다가 중국 조정에서 어떻게 처리할지 예측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미 반란이 일어난 초기에 바로 토벌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또 자세히 탐색한 다음에 천천히 도모하지도 못하게 되면, 정정당당한 우리의 거사가 도리어 중국 조정에 의심을 사 거듭 후일의 난처한 걱정거리를 남기게 되지 않을까 매우 두렵습니다. 국가의 사세가 매우 우려스럽고 위태로우니 ‘가만히 있으면 길하고 움직이면 흉하다.’는 경계가 바로 지금을 두고 한 말입니다. 만약 부득이하게 행할 대단한 일이 아니라면, 어떻게 쉽사리 뭇의견을 반대하면서까지 6월에 군사를 일으켜 괜한 일을 만들어서야 되겠습니까. 충분히 검토하는 일이 아직도 늦지 않은데, 잘못된 뒤에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니, 묘당에서 다시 더 상의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짐작해서 정한 것이니, 지금 동요되어 고치기는 어렵다. 그리고 걱정할 것이 없으니,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총융사 이서(李曙)가 폐사(陛辭)하니, 상이 불러 보고는 궁시(弓矢)와 갑주(甲胄)를 내리고 또 선온(宣醞)을 명하였다.
유흥치의 차관(差官) 육구주(陸九州)가 서울에 도착하였다. 처음에 조정에서 차관이 온다는 말을 듣고 구류하려고 하였으나, 그 뒤에 대신들 모두가 되돌려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상이 그 의견을 따랐다. 차관이 도착하자, 태평관(太平館)에 묵게 하고 더욱 후하게 대우하였으며, 그가 바친 예물은 호조로 보냈다.
비국이 아뢰기를,
"유흥치에게 회게(回揭)할 것인지에 대해 신들이 거듭 생각해 보건대 결국은 옳지 않게 여겨집니다. 다만 생각건대 차관을 예우한 뜻은 그가 의심하지 않게끔 하기 위한 것인데, 차관이 돌아갈 때 회게 하는 것이 없으면 그가 의심할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큰 계획을 위해서 작을 일에 얽매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지금 만약 회답한다면 ‘전에 변신(邊臣)의 보고를 받건대 섬에 갑자기 변이 일어났다고 하기에 마음속으로 매우 놀랐다. 그런데 지금 전해온 서찰을 보고 비로소 내막을 알았는데, 후한 선물까지 받고 보니 고맙기 그지없다. 섬이 일단 안정되면 상고(商賈)가 자연 통할 것이니, 마시(馬市)가 열릴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염려할 것이 없다. 오래지 않아 사신이 갈 것이니, 지금은 우선 이만 줄인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승문원으로 하여금 이러한 내용으로 작성하게 하고, 예단(禮單)도 호조에서 마련하여 보내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차인(差人)의 접대를 일단 전례대로 한 이상 접반관도 해조로 하여금 차송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또 아뢰기를,
"가도(椵島)의 지형이 상당히 험난해서 배를 정박시킬 곳이 두 군데뿐이라고 합니다. 적이 만약 배를 타고 나와 싸운다면 우려할 것이 없습니다마는, 혹 험난한 곳을 굳게 지킨다면 가벼이 싸울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오직 계략을 써서 그들을 곤궁하게 만들어야 할텐데, 그럴 경우 오래도록 지구전을 벌일 염려가 없지 않으니, 병력을 증가하고 군량을 계속 대어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본도(本道)는 전란을 치른 뒤로 남아 있는 배가 많지 않고 또 군량을 운반하고 명을 전달하는 등의 일을 전부 본도에서 징발하여 쓰기가 사세상 어려우니, 할 수 없이 전라 우도의 전선을 징발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연해 각 고을은 원래 정해진 수군이 없으므로 반드시 전결군(田結軍)으로 격졸(格卒)을 충당해야 할텐데, 소요스럽게 될 폐단이나 지연될 우려가 있지 않을까 모두 염려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각 진포(鎭浦)의 전선과 병선의 원수(元數) 19척 내에서 수영(水營)의 상선(上船) 1척, 귀선(龜船) 1척·가리포(加里浦)의 1척, 군산(群山)의 소모(召募)병선 1척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 병선 15척을 서둘러 징발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소요스럽게 될 것이니, 격졸 및 각종 군수품과 두 달간의 군량만 싣고서 다음 달 15일 안에 교동(喬桐) 앞 바다에 정박한 뒤 다시 분부를 기다려 행동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선전관을 파견하여 표신(標信)을 가지고 본도 관찰사 및 수사·통제사에게 가서 하유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도체부 총융사(都體府摠戎使) 이서(李曙)에게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왕은 이르노라. 이식(李息)은 재관(材官)의 장수로 한안국(韓安國)의 휘하에 있었고, 왕준(王濬)도 전함(戰艦)의 관리로 두진남(杜鎭南)의 지휘를 받았다. 그러나 총융사의 재목만큼은 중도에 맞게 군사를 지휘할 인물이 필수적이기에, 여러 사람에게 자문을 구해 이제 내가 그 적임자를 얻었다. 생각건대 경은 반정에 동참하여 나라를 내 집처럼 걱정하는 지조를 보였으며, 민부(民部)에 마음을 기울이니 조금도 틀리지 않았고, 산성에서 몸소 삽을 드니 계대(械帶)가 웅장해졌다.
지난날 변군(汴軍)이 대장을 해쳤을 때 그대가 앞장 서서 왕사(王師)로 정벌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오직 그대만은 나와 의견이 같았으니, 큰일에 대해 결정하기 어려운 걱정이 뭐가 있겠는가. 시초나 거북점도 흉하지 않으니, 천시(天時)와 통함을 충분히 알겠다. 회(淮)·채(蔡) 정벌의 계책은 정승인 배도(裵度)가 주도했으나, 금성(金城)의 첩보는 대장인 영평(營平)054) 에게서 나왔으니, 장수와 정승이 갖추어져야 공명을 이룩할 수가 있는 법이다.
그래서 경을 팔도도체부 총융사로 삼는 바이니, 부찰사와 부원수 이하 명을 듣지 않거든 모두 군법으로 다스리라. 경은 부월(斧鉞)을 엄숙히 들고 대장의 단(壇)에 경건히 올라 나의 삼군(三軍)에게 음식을 먹이고 옷을 입히며, 나의 장수들에게 호령을 하고 상벌을 시행하라. 오기(吳起)가 병사의 종기를 빨아 준 것을 생각하고 한홍(韓弘)이 군사를 다스렸던 것처럼 하라. 아, 상사(象辭)에 백성을 포용한다고 한 것은 《주역(周易)》의 깊은 뜻이며, 대중을 관용으로 이끈다는 것은 옛날 철인의 격언이다. 관중(管仲)의 간서(簡書)는 여기에 있지만 왕회(王恢)가 세운 마읍(馬邑)의 전략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처럼 교시하니, 잘 이해하리라 여긴다."
하였는데, 지제교 조경(趙絅)이 지어 올렸다.
가도(椵島)에 유시한 격문(檄文)에,
"명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니 경내의 백성들이 신하로 순종하여 원근을 막론하고 모두가 지극한 정치의 교화 속에 들었다. 그러므로 죄가 크거나 작거나 왕법이 적용되니, 해내 해외 어디에도 도망쳐 숨을 데가 없다. 시대의 운수가 또 다시 어려워져서 요동(遼東)과 계주(薊州)가 난리로 길이 막혔으나, 성천자의 존엄한 신령이 빛나서 묘당의 전략이 먼 곳에까지 시행되고 있으니, 동녘의 평정을 손꼽아 기다릴 수가 있다.
더구나 유흥치는 휘하의 일개 장교로서 포로로 살아남은 목숨인데, 어떻게 군기를 문란케 하고 주장을 시해하고서도 하늘의 밝은 태양을 가릴 수가 있겠는가. 부총병 진 대인(陳大人)055) 이 새로 조정의 명을 받아 모문룡(毛文龍)을 대신해 진(鎭)을 수령하였으니, 이야말로 조정의 간신(幹臣)이며, 도민(島民)의 사명(司命)이었다. 그가 쌓은 공적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잘못한 점도 듣지를 못했다. 설사 사리에 어긋나고 일을 태만히 한 사소한 과실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안사(按司)나 독부(督府)에서 자연히 훈령으로 단속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역신(逆臣) 유흥치는 스스로 사사로운 불화를 조성하여 가슴에 음모를 품고 승냥이나 이리와 같은 흉악한 세력을 끼고는 벌이나 전갈과 같은 독기를 뿜어대었다. 그리하여 붙잡혀 온 달족(㺚族)들을 불러 모아 감히 반란을 일으켜 주장을 멋대로 해쳤는가 하면 통판(通判) 등의 관리까지도 죽이고 각부(各部)에서 파견한 관리도 아울러 죽였으니, 충실하고도 선량한 인사들이 모두 흉악한 피해를 입고 말았다. 그러고도 군사들을 위협하여 지휘권을 도적질하고는 앞으로 강관(江關)을 전부 점령하고 해진(海津)을 가로막아 더러운 무리들의 힘을 등지고 중국을 넘보려고 하니, 배반한 흔적이 불처럼 드러났고 반역의 기운이 하늘에까지 닿았다.
서방의 병사나 백성들만이 분노가 치밀어 팔을 걷어붙이고 뼈저리게 느낄 뿐만이 아니라 동방의 신민들도 모두 그의 살을 씹어먹고 그의 가죽을 깔고 앉으려 한다. 옛날에는 제후에게 죄가 있으면 방백(方伯)이나 연수(連帥)가 정벌하였기 때문에, 환공(桓公)이나 문공(文公)이 한 일들을 《춘추(春秋)》에서 높이 평가하였다. 더구나 지금은 요동에서 적들이 들끓고 있어 조정의 명령이 끊긴 지 오래 되어 만일 이 반적이 임의대로 난을 일으키게 놓아둔다면, 우리로서는 천지의 사이에 왕자(王者)의 정벌을 잠시라도 지체할 수가 없을 뿐만이 아니라 실로 국경안에다 뱀이나 돼지 같은 화근을 결코 양성하기는 어렵기에 털끝만큼도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우리 주상께서는 중국을 충성으로 섬기며 나라를 신중히 지키고 있기에 군신의 의리를 신중히 여기며 연수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 호랑이나 외뿔소가 우리에게 뛰쳐 나왔다면 그 책임을 누가 져야겠으며, 매가 참새를 쫓는데 누가 무례하다 하겠는가. 이러므로 우리 전하가 한 번 크게 성내시어 군사를 대대적으로 동원한 것이다. 본관이 나라의 명을 삼가 받들어 삼군을 이끌고 해상과 육로로 일제히 진격하며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포위하고자 하는데, 의기에 격동되어 사기가 저절로 배나 치솟고 있으니, 탄환만한 너희 일개 섬이 어떻게 빠져 달아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추궁하려는 자는 반역의 괴수이지 위협에 못이겨 잘못 연루된 무리가 아니며, 체포하려는 자는 유흥치이지 장교나 하사들의 유가 아니다. 더구나 저 요동 백성들은 맨 먼저 충의심을 품고 본진으로 들어와 공을 세워 관작을 받기도 하고 군대에 편입되어 배부르게들 먹고 있었으니, 군신의 의리나 장졸의 분수를 잘 알고 있으며 깊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비록 흉악한 위력에 눌려 시키는 대로 따르고 있다 할지라도 본디의 마음을 살펴 보건대 어찌 기꺼이 반역자에게 예속되어 영원히 금수(禽獸)의 지역에 빠지고자 하겠는가. 이러므로 본관들이 항구에 병력을 주둔해 놓고 천천히 행동을 지켜볼 것이니, 섬 안의 장사나 백성들은 각자 분발하여 다 같이 멸망을 취하지 말라. 그대들은 반역의 변고가 호로(胡虜)보다 심하다는 것을 알고 속히 유흥치를 결박하여 군문 앞으로 끌고 오라. 그러면 자연 황조로부터 벼슬과 상이 넉넉하게 내려질 것이며 열렬한 의거가 온 세상에 알려질 것이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천지의 귀신들이 실로 이 말을 듣고 있으니, 속일 수 없는 일이다."
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격문은 지금 이미 계하(啓下)되었습니다마는, 주위의 여러 섬에도 격문을 일제히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사이에 말을 만들 때 가도에 보내는 격문과는 다르게 해야겠는데, 예문관으로 하여금 별도로 한 통을 작성하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그리고 이 격문이 필시 앞으로 원근에 전파될 것이니, 격문을 지을 때에 반드시 중국인이 보고 좋게 여기고 노인(虜人)이 듣고 의심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30일 기묘
나덕헌(羅德憲)을 사면하고 유흥치(劉興治)의 접반사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 나덕헌이 그전에 길주를 맡았을 때 관곡(官穀)을 수천 석이나 횡령하여 은으로 바꿔 돌아갔다. 그 뒤에 권확(權鑊)이 목사가 되어 그 일을 들춰내고 구금시켜 다스리니 죄가 사형에 해당되었는데, 상이 특별히 면하여 길이 덕천(德川)으로 귀양보내게 하고 그의 자손들도 녹안(錄案)하였다. 장차 유배지로 떠나려는데, 때마침 가도의 전역(戰役)이 있게 되자 상이 접반사로 섬에 가 있는 이석달(李碩達)이 반드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여기고 묘당으로 하여금 탈출시켜 돌아 오게 하는 방안을 강구하게 하였다. 나덕헌이 이를 듣고 이석달을 대신하여 가겠다고 청하니, 마침내 그의 죄를 사면하고 파견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나덕헌이 대신 가기를 청한 것은 사실상 죄를 요행히 면해 보려는 간사한 속셈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묘당에서 보내기를 청한 것은 더욱 구차한 행동으로서 국법을 무너뜨리는 짓이었다. 그리하여 결국은 나덕헌과 같은 자가 목숨을 부지하게 하였으니, 어찌 분하고 애석하지 않겠는가.
【태백산사고본】 22책 22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377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사법-재판(裁判) / 역사-사학(史學)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나덕헌이 대신 가기를 청한 것은 사실상 죄를 요행히 면해 보려는 간사한 속셈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묘당에서 보내기를 청한 것은 더욱 구차한 행동으로서 국법을 무너뜨리는 짓이었다. 그리하여 결국은 나덕헌과 같은 자가 목숨을 부지하게 하였으니, 어찌 분하고 애석하지 않겠는가.
병조 판서 이귀의 파직을 명하였다. 처음에 조정에서 유흥치를 토벌하는 일을 의논했을 때 중외(中外)가 모두 위험하다고 하였다. 심기원(沈器遠) 등이 맨 먼저 그 불가한 점을 진달드리고 대신도 많이 어렵게 여겼으며, 이귀도 며칠동안 고집하며 간쟁하고 상소하여 정벌을 중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때에 이르러 이귀가 다시 아뢰기를,
"삼가 어제 비국에 내린 분부를 보건대 ‘군사의 마음을 동요시킨 자에게는 중률(重律)로 논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제왕은 큰일을 당했을 때 뭇 의견을 모아 이해 관계를 논의함으로써 큰 공을 이룩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남이 말을 하지 못하게 억누르고 막아 감히 입을 열지 못하게 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의 조처에 대해서는 온 나라 백성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는데, 원대한 생각이 없는 한두 명의 신하들이 앞으로 닥칠 이해 관계는 돌아 보지도 않고 나라를 망치려는 계획에 찬성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떻게 사람의 모사만으로 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아마도 시운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두렵습니다.
어제 밤 등대(登對)했을 때에 불가하다는 뜻을 남김없이 말씀드렸는데, 전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그렇다고 한 공론을 밀어내고 오합지졸로 가도를 소탕하려고 계획하시니, 진정 하나라도 옳은 견해를 가진 자라면 누구나 위험하게 느낄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만이 김시양(金時讓)이 한 말을 믿어 위망의 화를 초래하시면서 충성으로 간하는 길을 영구히 막고 계십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아마도 만에 하나 성공한다 하더라도 임의로 죽였다는 명나라의 질책을 면치 못할 것이니, 미리 후환을 염려한 나머지 먼저 군신의 의리를 잃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이 굳이 간하여 마지 않는 것은 실로 이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를 보고 크게 노여워하며 이르기를,
"병조 판서 이귀는 군령(軍令)을 무시하고 얼토당토않은 말로 군사들의 마음을 현혹하였으니, 일이 매우 놀랍다. 중률로 논죄해야겠지마는 공이 있는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법을 적용할 수는 없으니, 우선 파직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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