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2권, 인조 8년 1630년 5월

싸라리리 2025. 12. 28.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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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경진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이 교동(喬桐)에 출진(出鎭)하면서 폐사(陛辭)를 드리니, 상이 불러 보고 하문하기를,
"우리 나라는 논의가 여러 가지라서 이루어지는 일이 하나도 없다. 오늘날의 일로 보더라도 전에는 정벌해야 한다고 말하던 자가 지금은 정벌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모두들 확고한 견해가 없기 때문이다."
하자, 정충신이 대답하기를,
"군대는 사기를 위주로 하는데, 사기는 아침 낮 저녁에 따라 차이가 납니다. 더구나 의논이 일치되지 않은 채 시일을 오래 끌게 되면 장사의 기운이 시들어 빠질 우려가 있게 마련이니, 이 점을 신은 크게 우려합니다. 그리고 양서(兩西)는 새로 병란을 치루어 투사(鬪士)나 전선이 모두 쓸 만한 것이 없으니, 더욱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평안도는 김시양(金時讓)이 있는데 자못 지혜로운 생각이 있고 일에 임해서도 두려워하며 위축하지 않으니, 독려하지 않아도 반드시 마음을 다해 조치할 것이다. 그런데 임기 응변할 일을 멀리서 지시할 수는 없으나, 적의 세력이 궁하여 위축되면 반드시 오랑캐에게 구원을 요청할 것인데, 오랑캐가 만약 한 장의 글을 보내 우리의 작전을 중지시킬 경우, 사태가 매우 난처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되기 전에 빨리 공격해야 할 것이다."
하니, 정충신이 아뢰기를,
"오랑캐의 사절이 오기 전에 이 일을 마친다면 참으로 좋겠습니다마는, 병사(兵事)란 미리 헤아릴 수가 없고 전쟁은 쉽게 결말을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섬 사람들이 모진 위력에 협박을 받고 있습니다마는 충의로운 인사가 없지는 않을 것이니, 반드시 격문을 보내 효유하고 기미를 보아가면서 움직여야지 급하게 공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죄를 추궁할 자는 유흥치뿐이니, 섬 백성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 상륙하는 날에 신중히 하여 한 사람도 함부로 죽이지 말라."
하니, 정충신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이토록까지 인자하게 사랑하시니, 그 누군들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적을 평정하지 못할까 우려할 것조차도 없습니다. 신이 감히 성상의 생각을 본받아 경건히 거행하지 않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일을 말리고 동요시키는 자가 매우 많다. 그러나 경의 재질이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기 때문에 뭇 의견을 물리치고 토벌하는 것이니, 경은 힘쓰라."
하였다. 마침내 하직하고 물러났는데, 상이 갑옷과 궁시(弓矢)와 칼을 주도록 명하였다.

 

전라도에 가뭄이 들었다.

 

비국이 아뢰기를,
"삼가 어제 특별히 병조 판서 이귀를 파직하라는 분부를 보고 신들은 두려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각자 생각을 다 말하여 그 이해관계를 진달드리는 것이야말로 신하의 의리상 당연한 일입니다. 이귀의 말은 본래 너절하니 말하는 가운데 어떻게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모두가 나라를 위하는 성심에서 나온 것이지 실로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엄한 견책을 중하게 받는다면 뒷날 큰일이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필시 감히 입을 열어 잘잘못을 논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자못 성스러운 세상의 아름다운 일이 못됩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다시 더 깊이 생각하시어 내리신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범한 죄가 작지 않으니 결코 용서하기 어렵다."
하였다.

 

이홍주(李弘胄)를 병조 판서로 삼았다.

 

5월 2일 신사

태백성이 나타났다.

 

간원이 아뢰기를,
"역적 이공(李珙)의 죄상이 훤히 드러나 의심할 것이 없기에 왕법(王法)을 이미 시행하여 국시가 확고히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전 대사헌 정온(鄭蘊)만은 유독 괴상하고도 망령된 의논을 제기하여 복직시킬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여 시비를 혼동시킨 그 죄가 큽니다. 어찌 체차만 하고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속히 파직을 명하소서.
노인에게 가자(加資)하라는 명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은전(恩典)에서 나와 안팎이 환호하니, 그 누군들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명기(名器)는 지극히 중하고 귀천은 구별이 있으니, 이를 가져서는 안 될 자가 분수넘는 영광을 얻게 된다면 응당 가져야 할 자가 혼잡하게 되는 수치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법전을 상고해 보건대, 노직(老職)으로 당상에 가자하는 것은 동반이나 서반에서 4품의 실직(實職)을 역임하지 않은 자에게는 제수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조종조에서 명기를 아낀 뜻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지금 나이 든 군보(軍保)나 공천(公賤) 사천(私賤)들도 모두 특혜로 품계가 올라가고 교지까지 받게 되었으니, 명기가 이처럼 심하게 문란된 적은 없었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한결같이 법전에 따라 다시 여쭈어 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이어 하교하기를,
"귀천은 다르다 해도 늙은 것은 똑같으니 다 같이 은전을 베풀어도 안 될 것이 없다."
하였다. 며칠 동안 간쟁하였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총호사(摠護使) 김류(金瑬)가 아뢰기를,
"신들이 명을 받고 건원릉(健元陵)의 둘째 능선과 영릉(英陵)이 있는 홍제동(弘濟洞) 두 곳의 지형을 살펴 보았는데, 전일 여러 지관(地官)이 논한 것에 모두 실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둘째 능선에 부족한 곳이 있다고 한 것은 왼쪽 산등성이가 낮고 가는 것을 흠으로 잡은 것입니다. 대체로 주봉(主峯)이 높이 솟았는데 여기에 올라 내려다 보면 과연 낮고 가는 것 같았습니다마는, 무덤의 자리에서 보면 그 형세가 자못 높았습니다. 따라서 지금 흙을 쌓아 보완한다면 다시 하자가 없을 것입니다.
홍제동에 대해서는 지관들 모두가 형국(形局)은 치밀한데, 수파(水破)가 좋지 않다고 합니다. 그리고 목격한 것으로만 말하더라도 정혈(正穴)이라고 하는 데에 두 개의 무덤 형태가 있는 듯하였고 그 밑에도 고총(古塚)을 파낸 흔적이 많이 있으니, 용맥(龍脈)이 훼손되거나 땅의 기운이 빠질 염려가 있지 않겠습니까. 대체로 지관들이 나름대로의 소견을 고집하여 갑이 옳다 하면 을이 그르다 하는 등 시끄럽게 다투어 하나로 귀결되지 않고 있는데, 신들이 두 곳의 우열을 별단(別單)에 써서 아룁니다."
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5월 4일 계미

대신들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전후 지관(地官)들이 건원릉 둘째 능선과 영릉이 있는 홍제동 두 곳의 형세에 대해 논한 것을 보건대, 그들의 견해가 조금 차이가 나기는 합니다. 그러나 두 곳의 길한 면을 논하면서 둘째 능선의 청귀(淸貴)한 점과 홍제동의 진밀(縝密)한 점 모두를 극구 칭찬하였고, 두 곳의 하자를 논하면서 둘째 능선의 왼쪽 산등성이가 조금 낮고 가는 듯하니 지금 보토(補土)하면 결국은 완전한 지형이 될 것이라고 한 반면, 홍제동의 정혈은 두 개의 무덤 형태가 있고 그 밑에도 고총을 파낸 흔적이 많이 있어 땅의 기운이 빠져나갈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수파도 길하지 않다 하였으니, 이런 곳은 사대부들의 집에서도 쓰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만으로도 취사 여부를 살펴 정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둘째 능선은 선왕께서 후일에 쓸 것이라고 분부하였으니, 또한 이미 정해진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둘째 능선에는 넘어다 보는 봉우리가 있다고 하는데, 만약 그렇다면 쓰기가 미안하다. 다시 의논하여 정하라."
하였다. 다시 아뢰기를,
"신들이 전후로 산에 대해 논한 것들을 가져다 상고해 보았으나, 넘어다 보는 봉우리에 대해 말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의심을 금할 수가 없기에 즉시 최현(崔睍) 이하 여러 사람을 불러 물어 보니, 모두들 ‘둘째 능선의 자리에는 본래부터 넘어다 보는 산은 없다. 그런데 청룡(靑龍) 쪽의 조금 낮은 곳으로 멀리 빼어난 봉우리가 있으니, 그러나 만약 한 가운데에 자리를 잡는다면 확실히 하나의 성봉(星峯)이 되므로 길하기는 해도 흉하지는 않으며, 조금 밑에다 자리를 잡는다면 넘어다 보는 산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한바탕 논설로 그친 데 지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지금 잡은 자리에는 별로 넘어다 보는 산이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렇다면 둘째 능선으로 정하라."
하였다.

 

총융사 등이 섬에 격문을 보내 회유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요동 지역이 적에게 함락된 뒤로 섬에 군영을 설치하여 군대를 주둔시키고 장수를 뽑아 보내 성세(聲勢)가 서로 이어져 천자의 위엄이 멀리 미치게 하였으니, 중국에서 부과한 책임이 무거울 뿐 아니라 우리 나라 역시 이에 의지한 것이 실로 많았다. 오직 진공(陳公)056)  이 실로 사명(司命)을 맡아 장자(長子)의 직책에 오래 있으면서 통제하는 권한을 전담하였다.
그런데 반복 무상한 역신(逆臣)이 감히 하늘의 명을 거역하리라 생각이나 했겠는가. 원망과 독기를 쌓아 은밀히 대장을 죽이고 간사한 꾀를 꾸며 관리를 해쳤다. 방자하고 사나운 세력이 이루어졌으니, 세상을 뒤엎으려는 그의 음모를 예측할 수가 없다. 만약에 서쪽으로 중국을 침범하지 않는다면 결국엔 북쪽으로 오랑캐에게 달아날 것이며, 만약에 가도의 군영을 점거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바닷길을 막을 것이다.
그의 부하 장교나 많은 군민(軍民)들 가운데 어찌 충용하고 의열심을 가진 자가 없겠는가. 그들이야말로 역순(逆順)과 향배(向背)의 도리를 잘 알아 너나없이 마음이 아파 이를 갈 것이며, 모두들 그의 살을 씹어 먹고 그의 가죽을 깔고 앉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모진 횡포에 겁을 먹고 분연히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위협에 오래 쫓기다 보면 못이겨 따르는 자가 점점 많아지지나 않을까 매우 염려된다. 그렇게 되면 드디어 음험한 마음이 자라나 끝내 흉악한 독기를 뿜을 것인데, 사태가 매우 심각하니 토벌을 지체할 수가 있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동쪽 나라는 실로 본토의 제후와 같으니, 군신간의 의리는 무겁고 부자처럼 은혜가 깊다. 그리하여 관성(關城)의 난동을 마음아파하며 중국의 길이 막힘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는데, 해외에 멀리 떨어져 있어 어려움에 뛰어들지는 못하지마는 국경의 주변에 있는 흉적을 제거하는 것이야 어찌 지체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 임금이 크게 노하시어 군사를 일으키고 나 같은 사람에게 정의에 입각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해로와 육로로 일제히 진격하며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조여갈 것인데, 잘못 연루된 자까지 해를 입을까 염려되기에 단지 우두머리만 처벌하고자 한다.
이에 죄를 추궁하는 뜻을 밝히고 그대들을 일깨우는 말을 전하니, 반역의 무리를 혼란시켜 음험한 계략이 좌절되게 하고, 반드시 힘을 내 함께 일어남으로써 그를 잡아 죽여 난리가 평정되게 하라. 그러면 앉은 채로 무기에 기름칠이나 하고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오직 우리의 군인은 모두가 임금의 조아(爪牙)이며 나라의 심복과 같으니, 어찌 그가 몰고 가게 놔두겠는가. 반드시 그 꾀임에 말려들지 않을 것인데, 반역의 속셈을 훤히 보았으니, 모두가 충의로운 분노를 품고 있을 것이다.
각자 신하의 열의를 분발하여 함께 하늘이 내린 토벌을 도와 혹 나의 병기를 펼치거나 그들의 보급로를 끊도록 하라. 그리하여 솥에 든 고기처럼 저절로 문드러지게 하면 가도의 백성이 소생될 것이다. 먼저 군문(軍門)에 자문을 보내어 알리고 또 중국 조정에도 주문을 올려 아뢸 것이다. 이에 포고하니, 힘쓰기 바란다."

 

총융사 등이 섬에 격문을 보내 회유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요동 지역이 적에게 함락된 뒤로 섬에 군영을 설치하여 군대를 주둔시키고 장수를 뽑아 보내 성세(聲勢)가 서로 이어져 천자의 위엄이 멀리 미치게 하였으니, 중국에서 부과한 책임이 무거울 뿐 아니라 우리 나라 역시 이에 의지한 것이 실로 많았다. 오직 진공(陳公)056)  이 실로 사명(司命)을 맡아 장자(長子)의 직책에 오래 있으면서 통제하는 권한을 전담하였다.
그런데 반복 무상한 역신(逆臣)이 감히 하늘의 명을 거역하리라 생각이나 했겠는가. 원망과 독기를 쌓아 은밀히 대장을 죽이고 간사한 꾀를 꾸며 관리를 해쳤다. 방자하고 사나운 세력이 이루어졌으니, 세상을 뒤엎으려는 그의 음모를 예측할 수가 없다. 만약에 서쪽으로 중국을 침범하지 않는다면 결국엔 북쪽으로 오랑캐에게 달아날 것이며, 만약에 가도의 군영을 점거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바닷길을 막을 것이다.
그의 부하 장교나 많은 군민(軍民)들 가운데 어찌 충용하고 의열심을 가진 자가 없겠는가. 그들이야말로 역순(逆順)과 향배(向背)의 도리를 잘 알아 너나없이 마음이 아파 이를 갈 것이며, 모두들 그의 살을 씹어 먹고 그의 가죽을 깔고 앉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모진 횡포에 겁을 먹고 분연히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위협에 오래 쫓기다 보면 못이겨 따르는 자가 점점 많아지지나 않을까 매우 염려된다. 그렇게 되면 드디어 음험한 마음이 자라나 끝내 흉악한 독기를 뿜을 것인데, 사태가 매우 심각하니 토벌을 지체할 수가 있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동쪽 나라는 실로 본토의 제후와 같으니, 군신간의 의리는 무겁고 부자처럼 은혜가 깊다. 그리하여 관성(關城)의 난동을 마음아파하며 중국의 길이 막힘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는데, 해외에 멀리 떨어져 있어 어려움에 뛰어들지는 못하지마는 국경의 주변에 있는 흉적을 제거하는 것이야 어찌 지체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 임금이 크게 노하시어 군사를 일으키고 나 같은 사람에게 정의에 입각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해로와 육로로 일제히 진격하며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조여갈 것인데, 잘못 연루된 자까지 해를 입을까 염려되기에 단지 우두머리만 처벌하고자 한다.
이에 죄를 추궁하는 뜻을 밝히고 그대들을 일깨우는 말을 전하니, 반역의 무리를 혼란시켜 음험한 계략이 좌절되게 하고, 반드시 힘을 내 함께 일어남으로써 그를 잡아 죽여 난리가 평정되게 하라. 그러면 앉은 채로 무기에 기름칠이나 하고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오직 우리의 군인은 모두가 임금의 조아(爪牙)이며 나라의 심복과 같으니, 어찌 그가 몰고 가게 놔두겠는가. 반드시 그 꾀임에 말려들지 않을 것인데, 반역의 속셈을 훤히 보았으니, 모두가 충의로운 분노를 품고 있을 것이다.
각자 신하의 열의를 분발하여 함께 하늘이 내린 토벌을 도와 혹 나의 병기를 펼치거나 그들의 보급로를 끊도록 하라. 그리하여 솥에 든 고기처럼 저절로 문드러지게 하면 가도의 백성이 소생될 것이다. 먼저 군문(軍門)에 자문을 보내어 알리고 또 중국 조정에도 주문을 올려 아뢸 것이다. 이에 포고하니, 힘쓰기 바란다."

 

중관(中官)과 도승지 이현영(李顯英)을 서교(西郊)로 보내 총융사 이서와 부원수 정충신을 전별케 하면서 일등(一等)의 음악을 내리고 이어 호군(犒軍)하도록 명하였다.

 

천릉 도감(遷陵都監)이 아뢰기를,
"능을 옮길 때 거행해야 할 일에 대해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해 보았는데, 대행(大行) 초상의 예에 비해서는 흉에 따른 의장(儀仗)이나 수레 등의 의물을 줄이는 절목이 반드시 있어야 하리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대행의 발인 때에는 대여(大轝)가 유문(帷門)까지 와서 그치고 견여(肩轝)를 사용해 영악전(靈幄殿)에 이르렀으며 영악전에서 현궁(玄宮)으로 갈 때에도 견여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목릉(穆陵)에서 신릉(新陵)까지는 모두가 건원릉의 역내이므로 그 사이의 거리가 매우 가까우니, 대여는 쓰지 말고 견여만 마련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또 죽산마(竹散馬)·죽안마(竹鞍馬)·청수안마(靑繡鞍馬) 등의 의물도 모두 대여에 쓰는 것이니 유문 안에는 들일 수가 없고, 구릉과 신릉의 사이는 지형이 좁고 급박해 사세상 배열할 수가 없으니 생략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이밖에 숱한 조목들은 근거할 데가 없는데, 그전처럼 쓴다거나 새로 만든다거나 생략하는 것을 예관으로 하여금 품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5일 갑신

도체찰사 김류(金瑬)가 강상(江上)에서 군대를 사열하였는데, 상이 여러 도의 병사들에게 면포(綿布)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함경도 갑산(甲山)에 우박이 크게 쏟아졌다.

 

5월 7일 병술

공청 수사 송영망(宋英望)이 수군을 이끌고 강화로 모였다.

 

양사가 ‘정온(鄭蘊)을 논핵하는 문제를 옥당이 처음 꺼냈는데, 정계(停啓)할 때에 서로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였다. 옥당이 처치하기를,
"보통 삼사가 공동으로 발론(發論)했을 경우에는 반드시 서로 알려 의견이 일치된 뒤에야 정계하는 것이 예입니다. 이번에 양사가 간통(簡通)하지 않은 것이 깜박 잊은 데서 나온 일이라 하더라도 사체에 비추어 볼 때에는 부당한 점이 있습니다. 그 잘못은 전적으로 성상소(城上所)에 있으니, 지평 조석윤(趙錫胤)과 정언 남선(南銑)을 체차하고 나머지는 모두 출사를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조석윤 등도 무심코 한 일이니, 체차하지 말라."
하였다.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시독관 민응형(閔應亨)이 아뢰기를,
"임금이 정말로 재물을 좋아하면 그 폐단이 반드시 백성을 못살게 괴롭히는 데까지 이를 것입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위와 아래가 서로 이익만 취하려 들면 나라가 위태할 것이다.’ 하였으니, 재물을 좋아하는 해가 이토록 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태고의 시대에도 재물을 좋아하면 해가 생긴다고 간절하게 경계하였다. 옛말에 ‘문신은 돈을 아끼지 않고 무신은 죽음을 아까워하지 않아야 적을 멸망시킬 수 있다.’ 하였으니, 재물을 좋아하는 풍습은 금지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방금 총융사의 장계를 보건대 ‘기밀이 누설될까 우려되니 빨리 진군했으면 한다.’ 하였습니다. 이 의견도 좋습니다마는, 출정할 날짜를 이미 11일로 정해 놓았는데, 지금 미리 진군할 경우 부원수와 호서(湖西)의 병선이 미처 도착하지 못할 우려가 있을 뿐만이 아닙니다. 부원수가 일단 정벌에 대한 명을 전담하게 된 이상 스스로 사태를 보아가며 진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두 장수의 소견이 같지 않게 되면 앞으로의 일이 매우 염려됩니다. 처음에 정한 날짜에 진군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8일 정해

좌부승지 이경용(李景容)을 교동(喬桐)으로 파견하여 수군을 검열하게 하고 이어 호군(犒軍)을 명하였다.

 

5월 9일 무자

유흥치(劉興治)가 장수를 보내 장산도(長山島)를 약탈하였는데, 유격 옥승란(玉承蘭)이 격파하였다.

 

5월 11일 경인

조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영경연 이정구(李廷龜)가 아뢰기를,
"삼가 김시양(金時讓)의 장계를 보건대, 유흥치가 의주(義州)를 빌려 줄 것을 청하고 또 화기(火器)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하니, 그의 흉모를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처음부터 이미 그의 행동을 예측하지 못하였는데, 이처럼 갑자기 음흉한 꾀를 낼 줄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대개 섬 백성들이 모두가 옛날 요동 사람들인데, 10년 동안이나 바다 속 섬에 살면서 어찌 답답한 마음이 없겠는가. 요동이 수복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날마다 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적이 관내(關內)로 들어와 고향으로 돌아갈 희망이 영원히 끊어졌으니, 대중의 마음이 극도로 괴로워하는 점을 이용해서 유인해 온다면 즐거이 따르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다. 어찌 우려할 일이 아닌가."
하였다. 이어 손 각부(孫閣部)에게 자문을 보내 중국 조정에 알리는 문제에 대해 의논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번에 지은 자문은 상당히 소루한 듯하였다. 장유(張維)가 그 전에 이러한 글을 지었는데, 참으로 잘 지었다."
하니, 이정구가 아뢰기를,
"장유의 문장은 조리가 있고 빠짐이 없는데 사명(詞命)에 더욱 능합니다. 장유와 같은 자는 과연 쉽게 얻을 수가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국운이 불행하여 이런 큰 변을 당했는데, 오늘날 군대가 동원한 것은 실로 부득이한 조처입니다. 그러나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반드시 경사(卿士)나 서민에게까지 의견을 묻는 법입니다. 그런데 저번에 전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나라를 위해서 나름대로 염려하고 지나치게 생각한 나머지 발언한 것이 번거로운 듯하긴 하였습니다마는, 실은 다른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미 그에게 벌을 주었으니, 지금은 용서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아무 말이 없었다. 연신(筵臣)이 물러가자, 윤대관(輪對官)을 인견하였다.

 

5월 12일 신묘

상이 중사(中使)를 전옥서(典獄署)에 파견하여 죄수를 점검하니, 1백 52명이었는데, 인하여 하교하였다.
"죄수가 전일보다 훨씬 많아졌다. 속히 처결하여 내보내라."

 

헌부가 아뢰기를,
"궁가(宮家)에 절수(折受)하는 폐단이 바다에까지 미치고 있는데, 황해와 경기의 연해안 일대는 수입이 반이나 개인에게 들어가고 있으므로 식자가 한심하게 여긴지가 오랩니다. 지금 듣건대 흥양현(興陽縣)에 나로도(羅老島)가 있는데, 호남의 연해 7, 8읍 가운데 큰 어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대군방(大君房)에 떼어 주었다 하니, 본도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여 엄중히 금단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5월 14일 계사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참찬관 이경용(李景容)이 아뢰기를,
"신이 명을 받들고 교동(喬桐)에 가서 수군을 점검하였는데, 연로에서 들은 것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통진(通津)과 강화(江華)는 토질이 비옥하여 농사가 꽤 잘된 편입니다마는, 교동은 돌밭으로 척박해서 오곡이 잘되지 않아 해마다 흉년으로 백성들이 가난에 굶주리고 있는데다 원수(元帥)가 병영을 개설하였으므로 여러 가지로 피해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 사람들이 바다에 익숙하기 때문에 격군(格軍)으로 뽑힌 자가 매우 많아 유독 괴로움을 받고 있습니다. 조정에서 도리상 넉넉하게 구휼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가 수군을 보고서 마음에 저어되는 바는 없었는가?"
하자, 경용이 아뢰기를,
"수군이 자못 정돈되었고 기치(旗幟)도 선명했습니다."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수령들이 공사를 빙자하여 사욕을 채우면서 군졸을 침해하고 있는 현상이 어느 곳이나 다 그러하니, 억울한 일이 있을 경우 호소하는 것이야 상관이 없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민(吏民)이 수령을 고발할 경우에는 전가 사변(全家徙邊)을 시킨다고 법전에 명백히 실려 있습니다. 만약 관하(管下)의 사람들로 하여금 임의로 고발하게 하는 습속을 그대로 둘 경우, 사적인 혐의로 인하여 모함하는 폐단이 어찌 꼭 없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수령이 명령을 한 번도 내리거나 시행하지 못할 것이고 결국엔 손발조차도 놀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상하의 질서와 명분을 유지하는 의의가 이에 이르러 모두 무너질 것이니, 어찌 매우 염려스럽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삼가 어영청(御營廳)에서 올린 전후 계사를 보건대, 죽산(竹山)·상주(尙州) 두 고을의 수령을 모두 관하 백성들의 고소로 인하여 붙잡아 가두도록 한 명이 잇따라 있었습니다. 신들은 그들이 무엇을 범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고소한 자들이 관청의 문서를 빼내 조만간 수령을 모함하여 해치는 미끼로 삼으려 한 그 속마음이야말로 가증스럽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본청에서 후임의 폐단은 생각하지 않고 군사의 마음을 위로하고 즐겁게 해주는 데에만 급급하여 이렇게 아뢰었으니, 매우 잘못되었습니다. 두 고을 수령이 공초(供招)한 대로 만약 억울하게 되었다면 전후 고소한 자는 무거운 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유사로 하여금 다시 확실히 조사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두 고을 수령들이 명을 어기고 백성을 해친 죄가 매우 무겁고, 군인들의 고소도 모두 진실하니, 다시 조사할 일이 없을 듯하다."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요즈음 소각사(小各司)의 색리(色吏)와 사주인(私主人)들이 제멋대로 외람하게 날뛰는 폐단이 말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는 각관의 공리(貢吏)들이 해가 넘도록 끌면서 쌀과 베를 빌려 준 핑계로 그들의 한없는 욕심을 채우고 있습니다. 민생고가 거듭되는 것이 바로 여기에 기인되고 있는데, 수령들은 마치 시동(尸童)처럼 자리에 가만히 앉아 전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으며, 이따금 몸가짐을 삼가하지 않고 종용하여 그른 짓을 하는 자도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 중에서 더욱 심한 자는 장흥고 직장 구숙(具䎘)인데, 그의 파직을 명하여 나머지 사람들을 경계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5일 갑오

헌부가 아뢰기를,
"지난날 공천(公賤)과 사천(私賤)들이 서로 투속(投屬)하는 폐단이 끝이 없었는데, 계해년 이후로 신원(伸寃)할 수 있는 문을 크게 열어 놓자, 먼 지방의 억울한 백성들이 기뻐하며 고무되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고 나서는 점차 처음보다 못해졌는데, 지금은 과거 그러한 마음조차도 먹지 못하던 자까지 다시 버젓이 투속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충훈부(忠勳府) 등의 상사(上司)가 그들의 소굴이 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내수사(內需司)가 더욱 심합니다. 그러나 어리석고 겁많은 백성들은 두려운 마음을 내어 감히 오지 못하는 자가 십중팔구인데, 그래도 스스로 대궐에 와서 경비가 삼엄한 문 밖에서 호소하는 자들은 모두 그 전에 고무되었던 백성들입니다. 이는 식자라면 깊이 근심하고 가슴 아프게 여기는 일로서 눈물을 흘리며 통곡만 하고 말 일이 아닙니다. 내수사의 관원 중에 이 일을 주도하여 폐단을 만든 자를 유사로 하여금 적발하여 치죄하게 하고, 지방에서 억울하다고 호소하러 온 백성이 있으면 일체 기각하지 말고 일일이 아뢰어 신원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와 같은 일이 실제로 있으면 원한을 품게 된 곡절과 폐단을 일으킨 자의 성명을 하나하나 자세히 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6일 을미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떤 도를 행해야 하늘의 마음에 합치되겠는가?"
하니, 시강관 민응형(閔應亨)이 아뢰기를,
"이는 다른 게 없고 정성으로 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였다.

 

5월 17일 병신

현극(玄極)과 조방보(趙邦輔)의 탐장죄(貪贓罪)를 다스리도록 명하였는데, 곤장 1백 대에 고신(告身)을 모두 박탈하였다. 현극과 조방보는 광해 때에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있으면서 관곡(官穀) 6백여 석을 횡령하였다가 나덕헌(羅德憲)과 함께 체포되어 여러 달 동안 형신(刑訊)을 받았다. 상이 혼조 때 있었던 일이므로 그다지 처벌할 것이 없다 하여 정부(政府)에 내려 의논하도록 하였는데, 대신들이 용서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판의금부사 이귀(李貴)가 차자를 올리기를,
"법이란 천하에 공평하게 적용해야 하는 것이니 시간의 선후에 따라 다를 수 없으며 친소(親疎) 때문에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고요(皐陶)가 법을 집행하면 천자의 아버지라 하더라도 면할 수 없으며, 장석지(張釋之)가 법을 고수하면 천자의 위엄으로도 뺏을 수가 없습니다.
반정 초에 신이 본부의 당상으로 있을 때 보건대, 혼조 때의 수령들이 풍문으로 인하여 탐장죄(貪贓罪)로 구금된 자가 자못 많았습니다. 그래서 신이 계청하기를 ‘지은 죄가 명백히 드러난 자는 법에 따라 처리해야 하겠지만 풍문에서 나와 억울하게 된 자는 모두 용서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현극과 조방보의 경우는 탐장죄를 저지른 사실이 낭자하니, 나덕헌과는 경중의 차이가 조금 있다 하더라도 그의 죄를 완전히 사면하여 작명(爵名)을 보전하게 할 수야 있겠습니까. 지난번 안찰사(按察使)가 조사한 것에 따라 조금이라도 문서를 불법 조작한 자에게도 오히려 귀양까지 보냈는데, 현극 등이야 말할 게 있겠습니까. 전후로 법을 적용하는 경중이 상호 틀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다시 정부에서 재심하라고 명하였다. 정부가 이에 나덕헌의 차율(次律)을 적용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집의 권도(權濤), 장령 신달도(申達道), 지평 홍집(洪)·조석윤(趙錫胤) 등이 아뢰기를,
"지난날 어지러웠던 정사로서 국가를 망하게 하고도 남을 것들을 낱낱이 다 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 중 하나가 그대로 있으니, 내수사(內需司)의 폐단이 그것입니다. 계해년 초에 조정 신하들이 이 관사를 폐지하기를 청한 것도 깊은 우려와 원대한 생각이 바로 여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근래에 인심이 좋지 않고 염치를 죄다 잃어 횡령으로 죄를 얻은 사대부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런 쓸모없는 무리들이 제 몸에 이익이 된다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먼 지방에서 주인을 배반하려는 사천(私賤)들은 반드시 집과 전답을 팔아 서울로 싣고 들어와 먼저 그 일을 주도하는 무리를 찾아가 있는 대로 뇌물을 주고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고 있습니다. 본사의 소장이나 지방의 공문으로 아는 사람을 통해 부탁하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모두가 그들의 손에서 나온 것입니다. 계하(啓下)된 공사가 지방에 내려갔다 하면 수령들이 그저 그대로 따르는 것은 물론 이상하게 여길 것조차도 없습니다마는, 지방관들이 가끔 임의로 처리하는 것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이는 모두가 옛날의 남은 풍습입니다. 그런데 지체가 낮고 어리석어 동구 밖에도 나가 보지 못한 백성들이 갑자기 이런 일을 당하면 벌벌 떨며 죽음을 면하고자 여념이 없기에 자신의 억울한 데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니, 참으로 가엾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감히 이를 논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제 성비(聖批)를 받아 보건대, 하나는 사실 무근이라고 하였고 하나는 자못 정직하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전하에게 무엇을 저버렸기에 이처럼 한결같이 믿어주질 않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현재 본사의 공사로서 해조나 해원(該院)에 계하(啓下)된 것이 무수한데, 모두 전하께서 보셨을 것이니, 하소연하는 실상을 전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신들의 말이 과연 근거가 없단 말입니까. 저 쥐새끼 같은 무리들이 처리하는 권한을 훔쳐 쥐고 농락하였습니다마는, 그 일들이 조정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이름도 관안(官案)에 들어 있지 않았으니, 신들이 몰랐던 것은 당연합니다. 못난 신들이 감히 정직하다고 자처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만약 알고도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또한 신들이 승복하지 못하겠습니다. 전하가 이 폐단의 원인을 모르지 않으시면서도 그 뿌리를 깨끗이 끊지 못하였고, 게다가 왜곡되게 어려워하며 두둔하면서 간하는 말을 막는 수단으로 삼고 계십니다. 이는 모두가 신들이 어리석고 꽉 막혀 말할 줄을 몰라 전하로 하여금 사사로운 뜻에 가리어 간하는 자를 꺾게 한 잘못이니, 신들의 죄가 큽니다."
하고, 모두 스스로 탄핵하고 물러갔다. 대사헌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나라의 재정을 관리하는 유사가 본디 있으니 내수사의 설립은 처음부터 옛날에 있었던 제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당초에는 소박하였으나 참람하게 되고 말았는데, 혼조에 이르러 극도에 달했습니다. 반정 초에 여러 신하들이 이 부서를 폐지하여 큰 폐단을 제거하자고 청하였으니, 성상께서도 이미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알고 계실텐데, 단지 개혁하라는 명만 내리지 않고 계실 뿐입니다. 그 뒤에도 옛날의 습관이 제거되지 않아 쌓인 폐단이 여전히 불어나고 있으므로 원한을 품은 채 풀지 못한 서민들이 비방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귀와 눈은 다 똑같으니, 사람치고 그 누가 모르겠습니까.
대간은 말하는 책임을 몸에 지니고 일을 바로잡는 직책에 있으니, 답답하게 막힌 인심을 풀어 주지 않을 수 없으며, 간사하게 법을 남용한 무리들을 다스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 논계한 것도 실로 성스런 조정을 위해 폐단을 제거하려는 성심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어찌 조금이라도 사정(私情)에 치우칠 수가 있겠습니까. 한 부서의 쌓인 폐단을 빠짐없이 자세하게 아뢰었으니, 누가 임의로 그런 일을 하였는가는 명백히 지적할 필요도 없습니다. 따라서 결국은 근거없는 것이 아니었으니, 정직하지 못한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집의 권도 등에게 모두 출사를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심열(沈悅)을 공조 판서로, 최명길(崔鳴吉)을 우참찬으로 삼았다. 최명길은 체격이 왜소했으나 말을 잘하고 지략이 많았는데, 약관에 급제하여 이름이 났다. 광해조 때에 버림을 받아 도성 밖에서 살았는데, 김류·이귀와 함께 모사하여 거의하였다. 정사 공신(靖社功臣)으로 1년만에 지위가 재상의 반열에 이르러 권력을 행사하니, 출세하려는 젊은이들이 그를 많이 따랐다. 이때에 김류가 오래된 명망을 지닌 원훈으로서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나 최명길이 굽신거리지 않았으므로 이 때문에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졌다.

 

5월 18일 정유

부제학 조익(趙翼)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보건대 전일 헌부의 여러 신하가 공천과 사천이 투속하는 폐단을 논하였는데, 성상께서는 분부를 내려 그들의 성명을 자세히 말하게 하고 또 근거가 없고 자못 정직하지 못하다고 배척하시면서 듣기 싫어하는 뜻을 뚜렷이 보이셨습니다. 신들은 상께서 대신(臺臣)들의 말을 깊이 살피지 못하지 않았는지 염려됩니다.
대체로 우리 나라 사민(士民)들이 노비를 두는 것은 이들의 힘으로 생업을 경영하기 위해서이니, 전답이나 다름없이 중합니다. 정치의 중요한 점은 사람마다 산업을 갖고 서로 침해하지 않게 하는 데 있으니, 이것이 곧 이른바 혈구(絜矩)의 법입니다. 만약 한계를 지어 처리하지 않고 마음대로 투속하게 하거나 점유하도록 허용한다면, 빼앗은 자는 탐욕스러운 나머지 의롭지 못한 짓을 한 것이 되고, 빼앗긴 자는 생업을 잃어 굶주리며 추위에 떨 것이니, 이는 크나큰 혼란으로 가는 길입니다. 백성들이 서로 빼앗는 짓도 오히려 가증스러운데, 더구나 상급 관청으로서 도피자들의 소굴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더욱이 내수사는 임금의 사적인 창고이니, 만약에 내수사에게 투속을 용납하는 일이 있다면 어떻게 다른 관서의 투속을 금지할 수가 있겠으며, 서민들 서로가 빼앗는 짓도 금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인심의 이합(離合)과 국가의 존망이 걸린 관건이라 할 것입니다.
대개 내노(內奴)가 하는 일은 다른 곳의 역사에 비해 가장 수월하기 때문에 주인을 배반한 사노(私奴)만 귀의할 뿐 아니라 부역을 기피하려는 양민도 많이들 귀의하고 있습니다. 이는 물론 간교한 사람들이 불러들인 데서 생긴 것입니다마는 민심의 원망은 모두 국가로 돌아가고 있으니, 매우 마음아프지 않습니까. 대신이 아뢴 것은 실로 민망하고 답답한 뭇 인심으로 인한 것이니 전하는 참으로 척연히 살피시어 백성에게 해가 된다는 것을 깊이 두렵게 여기고 이러한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을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즉시 그들의 청에 따라 사실을 살펴 제대로 처리하도록 하여, 국민들 모두가 국가에서는 의리를 소중히 여기지 이익은 소중히 여기지 않고 있는데 그동안의 폐단은 단지 중간에서 간사한 좀도둑들이 일으킨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면 민심이 필시 즐거워 감복할 것이니, 참으로 한 마디의 말이 나라를 일으킬 수가 있다고 한 격언이 이를 두고 한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그만 이처럼 힐책하여 꺾으시니, 간하는 말을 따르는 미덕에 크게 손상이 될 뿐만이 아니라 민간에서도 주상이 이 폐단을 개혁하지 않으려 한다고 더러 의심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어 생각건대 전하가 신하들의 말을 들을 때에 기꺼이 들으려는 정성이 지극하지 못한 바가 있으며, 용납하여 받아들이는 도량이 넓지 못한 바가 있습니다. 오늘날 정치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실은 여기에 말미암은 것이 아닐까 두렵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는 살펴보고 잘 알았다. 내가 유념하겠다."
하였다. 이 뒤에 헌부가 아뢴 내용을 팔도에 하유하여 색출해서 보고하게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 능을 옮기는 예에는 실록(實錄) 및 등서(謄書)와 《통전(通典)》 개장례(改葬禮), 《가례의절(家禮儀節)》 개장보문(改葬補問)이 있습니다만, 모두 소략해서 의거할 수가 없으니, 반드시 널리 문견을 모아야만 비로소 의주(儀註)를 강론하여 정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는 삭감해도 되고 그대로 두어도 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오례의》 중에 대행(大行) 때 발인(發引)하는 의절과 목릉 등록(穆陵謄錄)에서 큰 조목만을 뽑아내어 우선 입계합니다. 그런데 이는 예에 들어 있지 않은 예이기에 대신들과 의논하고 예서(禮書)를 읽은 사람에게 널리 묻는다 하더라도 예에 맞을지의 여부를 모를 것이고, 또 의논해야 할 변례(變禮)도 있으니, 다시 고금의 예서를 상고한 뒤에 감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9일 무술

평안 감사 김시양(金時讓)이 치계하기를,
"방금 접반사 나덕헌(羅德憲)의 장계 초안을 보니, ‘유흥치가 49척의 배를 이끌고 등주(登州)로 향했는데, 유흥기(劉興基)도 따라갔다.’ 하였습니다. 지난번 조견(趙堅)이 ‘배에다 말을 실어 놓고 육구주(陸九州)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기에 동쪽으로 와 노략질할 것으로만 의심하였지 서쪽으로 향할 줄은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현재의 전략으로는 가도(椵島)로 진격해서 유흥치의 심복들을 붙잡아 명나라에 포로로 바친 뒤 부고를 봉하고 황제의 명을 기다리는 것보다 좋은 방안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넉넉히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수가 있을 것이고, 또 그들이 등주에서 혹 불리해질 경우 전진하거나 후퇴할 곳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고, 총융사 이서(李曙)가 치계하기를,
"문죄(問罪)하는 일은 단지 유흥치 때문인데, 이미 소굴을 비웠으니, 공략해 보았자 무익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 리 밖에서 군사를 동원한 이상 헛되이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신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우리의 큰 배는 숨겨둔 채 먼저 선봉을 섬 가까이 주둔시켜 약세를 보였으면 합니다. 그러면 유흥치가 이 소식을 듣고는 우리의 형세가 고단한 줄로 생각하고 반드시 회군하여 올 것이니, 기선을 잡아 요격하면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원수 정충신의 치보를 보건대 ‘수군이 이미 강령(康翎)으로 들어갔다.’ 하였으니, 본도의 군사도 지금 안주(安州)로 모두 집결시키고 신도 전진해야 하겠습니다. 섬에 들어간 뒤에는 처리할 일이 많은데, 묘당에서 헤아려 지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유흥치가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떠났는데, 등주(登州)나 내주(萊州)를 침범할 것인지 혹은 오랑캐에게 투항할 것인지 혹은 여러 섬을 노략할 것인지 혹은 명나라 아문으로 가 호소하고 귀순할 것인지의 여부를 모두 알 수가 없습니다. 꼭 육구주(陸九州)가 오기를 기다려 떠난 의도가 실로 헤아리기 어려우니, 반드시 섬 안의 사정을 탐지하고 또 유흥치의 실상을 알아본 뒤에야 임기응변할 수가 있을 것인데, 모두가 주장(主將)이 잘 처리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유흥치가 섬을 떠난 이상 나덕헌은 섬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으니, 철산(鐵山)에서 대기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대신, 비국 당상, 삼사 장관들을 불러 하문하기를,
"서쪽 정벌의 사태가 전일과 다르기 때문에 경들과 의논하려 한다."
하니, 좌의정 김류가 아뢰기를,
"김시양이 ‘섬을 공격하여 평정한 다음에 부고를 봉하고 군민(軍民)의 수를 기록하여 명나라에 주문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신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아직 그의 반역과 순종을 판명하지 못한 터에 갑자기 공격한다면 되겠습니까. 수군에게 세 고을로 물러가 주둔하였다가 서서히 사태를 보아가면서 조용히 대처하게 하는 것보다 좋은 방안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각자 말을 해보라."
하니, 계림 부원군(鷄林府院君) 이수일(李守一)이 아뢰기를,
"어리석은 신의 의견으로는, 여러 섬이 대부분 유흥치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으므로 직접 가 공격하리라고 여겨집니다. 등주가 텅 비었다고 하지마는 감히 약한 군사로 침범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병조 판서 이홍주(李弘胄)가 아뢰기를,
"유흥치가 만약 복종하지 않는 섬들을 먼저 공격한다면 명나라가 이미 그가 반역자임을 훤히 알게 될 것이니, 귀순하고 싶더라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신은 반드시 유흥치 스스로가 먼저 귀순할 것으로 여깁니다."
하고, 우참찬 최명길이 아뢰기를,
"어리석은 신의 소견으로는, 진군을 중지하고 빨리 나덕헌으로 하여금 가도에 들어가 유흥치의 행방을 물어보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안은 없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성에서 만약 우리가 군사를 동원한 일을 물으면 ‘섬에 대장을 시해한 변란이 있었다기에 우리가 과연 명나라를 위해 그의 죄상을 세상에 알리고 정벌하고자 하였으나, 육구주를 보고나서는 비로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곧이어 군사 행동을 중지하였다.’고 대답하게 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가 이미 그의 대장을 죽인 이상 그의 뜻이 작은 데 있지 않은데, 우리 나라에서 한 일을 당연히 모르지 않을 것이니, 이는 대체로 이 적이 우리 나라에 군침을 흘린 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그가 중국 조정에 알려 황제의 명을 얻어낸 뒤에 우리 나라에 난동을 부리려고 하였는데, 정벌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장산(長山)과 장자(獐子) 사이에 우선 피했다가 우리의 군사가 해이해지기를 기다려 회군해 습격하려고 하는 것이니, 그의 계략이 흉칙하지 않은가.
등주를 침범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매우 확실하다. 수천의 군사로 만 리의 바다를 건너 경솔히 중국을 침범하다 한번 실패하면 반드시 그대로 말라 죽을 것인데, 그가 이런 위험한 전략을 쓰겠는가. 오랑캐에게 투항하리라는 것도 그렇지 않다고 본다. 대체로 그가 심양(瀋陽)과 우호를 맺어 성세를 서로 의지하고 중간에서 사태를 지켜 보면서 마치 괴통(蒯通)이 한신(韓信)을 설득한 것처럼 한다면 되겠지마는, 그가 무리를 이끌고 스스로 귀순하여 금노(金虜)의 일개 장수가 되려 하겠는가. 차라리 섬 안에 있는 것이 낫다고 여길 것이니, 그가 오랑캐에게 투항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명백하다.
우리 나라도 군대를 해산할 수는 없다. 군사를 동원하였다가 중도에서 그치는 것은 도적이나 하는 짓이니, 공명 정대한 처사가 못 된다. 차라리 가도로 진군하여 역순(逆順)의 이치를 격문으로 알리고 토벌하는 의리로 회유하기를 ‘문책해야 할 자는 유흥치인데, 지금 이미 도주하였으니, 섬의 백성은 관계가 없다.’ 하고는, 이어 그의 심복들을 죽이고 즉시 물러나 선천(宣川)·철산(鐵山)의 사이에 주둔하였다가 변화를 기다리는 것이 옳은 전략일 것이다. 그리고 가도에 전선 등이 있으면 모두 탈취해야 하겠으나 땔감이나 물을 실어나르는 배 등은 탈취하지 못하게 하여 그들의 생활하는 길을 열어 주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뜻을 모두 두 장수에게 하유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신들이 물러나 생각해 보건대 변신(邊臣)이 보고한 것이 너무도 소략합니다. 단지 유흥치가 함대를 이끌고 등주(登州)로 향했다고만 했을 뿐 무엇 때문에 떠났는지는 자세히 염탐해 보지도 않고서 갑자기 치계하였으니, 사실 여부를 실로 알 수가 없습니다. 우선 하유하는 일을 정지하고 다시 확실한 보고를 받은 뒤에 사태에 따라 대책을 세워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는데, 마침내 총융사 이서와 부원수 정충신에게 하유하는 글을 내리기를,
"지금 듣건대 유흥치가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갔다 하는데, 이는 필시 자신의 죄악이 크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가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도피하려는 계략이니, 참으로 매우 가증스럽다. 경은 수군을 이끌고 군대의 위엄을 떨쳐 가도로 육박한 뒤 격서를 보내 역순(逆順)의 사리를 들어 회유하기를 ‘유흥치가 주장(主將)을 멋대로 죽이고 반역하는 죄를 물으려 하였는데 유흥치가 이미 서쪽으로 떠났다. 모르겠다만 그가 어디로 가서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 섬 사람들 모두가 꼭 유흥치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인데, 유흥치의 심복이 있거든 즉시 목을 베어 군문(軍門) 앞으로 가지고 오라. 그러면 일반 백성은 물론이고 한 포기의 풀이나 한 그루의 나무도 결코 해치지 않을 것이다.’ 하여, 섬 사람들로 하여금 의거(義擧)인 것을 확실히 알게 하라. 그런 다음에 즉시 상륙하여 유흥치의 심복과 도당으로서 함께 반역한 자들을 죽이고 부고를 봉하여 약탈하려는 뜻이 없다는 것을 보이라.
섬의 전선은 모두 탈취하고, 땔감을 실어나르는 작은 배만 남겨 생활의 길을 열어 주라. 그리고 이어 선천(宣川)과 철산(鐵山) 사이에 정박하였다가 유흥치가 나오거든 기회를 보아 요격하라. 또 유흥치가 섬에 와서 식량을 가져가는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니 미리 수군을 보내 길을 차단하게 하라. 총융사는 전진하지 말고 잠시 안주(安州)에 주둔할 것이며, 군사도 선천과 철산으로 들여보내지 말라."
하였다.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함경도에 크게 가뭄이 들었다.

 

5월 21일 경자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漢)나라 선제(宣帝)가 민간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민생고를 알았으니, 아마도 은(殷)나라 고종(高宗)과 같을 것이다."
하니, 지경연 정경세(鄭經世)가 아뢰기를,
"한나라 선제가 여염에서 자라 백성들의 고달픔을 알았는데, 지금 우리 성상께서도 민간에 계셨으니, 또한 은나라 고종이나 한나라 선제와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을 구제할 수 있는 정치를 해야만이 참으로 그들의 고달픔을 알았다고 할 것입니다. 반정 초에 신이 일찍이 경연에 입시했을 때 어떤 대신이 종이를 공상(供上)하는 폐단을 아뢰니, 상이 자전(慈殿)에게만 올리고 나머지는 모두 없애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이 모두 감하면 일용(日用)에 부족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상이 ‘그래도 민간에 있었을 때보다는 나을 것인데, 종이가 부족할까 염려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라고 하셨으므로 그때 이 말을 듣고 감격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신중하게 마무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날마다 독실히 하시어 혹시라도 소홀히 하거나 무너뜨리지 말도록 하소서. 대체로 간직하기는 어렵고 놓치기는 쉬운 것이 마음입니다. 요즈음의 일을 듣건대 점차 처음만 못하시기에 신은 걱정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지극하다. 내가 유념하겠다."
하였다.

 

과거 선조(宣祖) 때에 공빈 김씨(恭嬪金氏)가 【 광해군의 어미이다.】  죽자 양주(楊州)에 장지를 잡았는데, 고려의 상주국 문하 시중(上柱國門下侍中) 조맹(趙孟)의 묘소가 그 곁에 있었으므로 그 부분을 허물 것을 의논하였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광해가 왕위에 오른 뒤 공빈을 왕후로 추존하고 묘호(墓號)를 성릉(成陵)으로 올렸는데, 조맹의 묘소를 파낼 것인지에 대해 광해가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이 불가하다고 하였기 때문에 봉분만 헐었다. 광해가 폐위되자 김씨도 따라서 공빈으로 폐해지고 마침내 능호도 고쳐졌으나 조맹의 무덤은 여전히 봉분이나 표석도 없는 상태였다. 그의 후손 조수이(趙守彝) 등이 상소하여 봉분할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고 이어 공빈의 묘소에 법에 어긋나게 세운 석물들을 헐도록 명하였다.

 

5월 24일 계묘

부원수 정충신이 은율 현감(殷栗縣監) 도경유(都慶兪)를 시켜 유흥치의 관하(管下)인 도사(都司) 하상진(夏尙進)을 회유하게 하였는데, 항복받았다.

 

5월 25일 갑진

공조 판서 심열(沈悅)이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광해 때에 청류(淸流)가 모두 유배되고 쫓겨났으나 심열만은 면하여 함경 감사로 제수되었는데, 은 술잔을 바쳤다는 비난이 있었다. 반정 뒤에 호조 판서가 되어 재무 관리를 잘 하였는데, 그 뒤에 지경연에 제수되자, 연평 부원군 이귀가 조정에서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논사(論思)하는 자리는 숙덕(宿德)이 있는 곳이라고 하는데, 심열 같은 무리가 있어서야 되겠는가."
하였으므로, 심열이 부끄러워 통진(通津)으로 물러가 살았다. 참찬으로 불렀으나 나오지 않자, 또 이 직책을 제수하였는데, 상소하며 굳이 사양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반정 뒤로 대간이 대궐을 드나드는 여인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청하였던 것은 대체로 경계해야 될 점이 있어서 통렬히 쇄신하려고 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근래 방금(防禁)이 점차로 해이해져 적(籍)도 없는 여인들이 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출입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병조는 대궐의 통행을 살필 의무가 있는데 전혀 단속하지 않고 있으니, 직무를 태만히 한 책임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당해 당상과 낭청을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5월 26일 을사

도적이 보령(保寧)의 곡물 수송선을 노략질하였는데, 포도 대장 신경진이 그 무리 2인을 붙잡아 강가에서 목을 베어 조리돌렸다.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느 시대인들 어진 사람이 없겠는가마는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 나는 듣건대, 옛사람은 그의 임금을 보필하여 잘 이끌지 못하였을 때 마치 시장에서 매를 맞는 것처럼 부끄러워하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이런 사람을 다시 볼 수가 없다."
하니, 참찬관 강석기(姜碩期)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옛사람은 시장에서 매맞는 것처럼 하였다고 분부하시면서 그러한 사람이 없다고 탄식하시니, 이는 참으로 신료들을 경책하시는 훌륭한 뜻이라 하겠습니다."
하고, 시강관 김반(金槃)이 아뢰기를,
"신의 소견으로는 지금이 계해년 초보다 훨씬 못하다고 여겨집니다. 전하께서 비록 시장에서 매맞는 것처럼 하였다고 분부하셨습니다만, 위에서 분발하여 스스로 힘쓰는 뜻이 없기 때문에 아래에서도 받들어 권면하는 사람이 없게 된 것인데, 나랏일이 날로 쇠퇴해지고 있으니, 신은 실로 안타깝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묘당에 어찌 사람이 없다 하겠는가."
하니, 김반이 아뢰기를,
"묘당의 신하들이 성의는 있으나 재주가 없는데, 할 말을 다하지 못하는 자도 있습니다. 신은 성상께서 말을 받아들이는 도리에 미진한 점이 있는 듯싶습니다."
하였다.

 

5월 28일 정미

평안도 파발군(擺撥軍)이 호랑이에게 해를 당했는데, 상이 본도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거행하도록 하였다.

 

괴산 군수(槐山郡守) 이득윤(李得胤)이 죽었다. 처음의 이름은 덕윤(德胤)이고 자는 극흠(克欽)으로 경주인(慶州人)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효행이 있었다. 반정 초에 공조 정랑에 제수되어 부름을 받고 왔다가 뒤에 괴산 군수로 제수되었다. 서울에 와 사은하는 길에 도성 사람들의 음성을 듣고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아직도 쇳소리가 거세게 나오고 있으니, 난리가 끝이 안 났다."
하였는데, 정묘년에 이르러 그가 한 말이 과연 들어맞았다. 고을을 다스리는 데 성적이 으뜸이었으므로 상이 특별히 통정(通政)의 자급(資級)을 주어 포상하였다. 결국은 늙고 병들어 집에 돌아갔다가 이 때에 이르러 죽으니, 78세였다.

 

5월 29일 무신

박난영(朴蘭英)을 호차 선위사(胡差宣慰使)로 삼았다.

 

전식(全湜)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 고종융일편(高宗肜日篇)을 강하였다. ‘먼저 왕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대목에 이르러 검토관 채유후가 나아가 아뢰기를,
"2월에 일어난 태묘(太廟)의 재앙은 비상한 변고인데, 이는 곧 제사를 잘못 지냈기에 재앙을 보인 것입니다. 우리 나라도 태묘(太廟)의 사전(祀典)에 예(禮)를 잃게 되는 점을 더욱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한참동안 말없이 있다가 이르기를,
"이 글에 ‘먼저 왕의 그릇된 마음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하였으니, 그대도 나의 그릇된 마음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하자, 검토관 김세렴(金世濂)이 아뢰기를,
"꿩이 운 변고가 그렇게 대단한 변고는 아닌 듯한데도 은나라 신하는 이처럼 훈계하였습니다. 만약 사소한 재앙이라 하여 소홀히 넘긴다면 하늘을 두려워하는 것이 못 됩니다."
하고, 참찬관 이현영(李顯英)이 나아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나의 그릇된 마음을 바로잡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언로(言路)가 활짝 열려야만 다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귀에 거슬리는 말이라 하더라도 받아들여 도리에 맞는가 살펴보고 채용하소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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