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기유
전라 감사 송상인(宋象仁)이 수군과 육군을 분리시킬 것을 청하였다. 대개 바닷가에서 물에 익숙한 병사가 육군에 많이 예속되고 산골의 병사가 또 수군에 예속되었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익숙해진 장기에 따라 개정할 것을 청한 것인데, 비국에서 불편하다 하여 결국 그 일이 시행되지 않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익위(翊衛) 성여발(成汝撥)은 본디 거칠고 비루한 사람으로서 관직 수행이나 개인 행동에 한 가지도 볼 것이 없으니, 결코 동궁을 호위하는 직책을 맡길 수가 없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체차하라고 답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신들이 방금 영평 부원군 이귀의 소를 보건대 그 의견이 가장 좋습니다. 신들도 실은 유흥치의 사건에 대해 이런 점을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오랑캐의 실정을 알기 어렵고 유흥치의 행방도 확실치 않으며 선약해(宣若海)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거듭 차관을 보내면 그들의 의심을 살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잠시 지연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오랑캐의 사신이 때마침 왔으니 반드시 우리가 군사를 동원한 일을 알 것입니다. 박난영(朴蘭英)으로 하여금 말을 잘 꾸며 먼저 유흥치가 투항했는지의 여부와 금(金)의 한(汗)이 받아들였는지의 여부를 묻게 하고, 이어 ‘유적(劉賊)이 화를 일으키려는 마음은 예측할 수가 없다. 전에 은밀히 군사를 이끌고 의주를 침범하여 금의 사신을 살해하려다 흉계를 펴지 못하자, 그의 도당을 풀어 우리의 변방 고을을 침략하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다. 지금 갑자기 그의 무리를 이끌고는 섬을 버리고 떠나면서 서쪽으로 등주를 향해 떠난다고 큰소리쳤는데, 명나라에게 귀순한다고도 하고 쌍도(雙島)에 머물러 각부(閣部)의 지시를 기다린다고도 하고 북쪽으로 심양(瀋陽)과 통하여 은밀히 그의 어미와 아내를 구출할 계책을 세운다고도 하고 동쪽으로 우리 나라를 침략할 것이라고도 한다. 모두가 믿기 어려운 것들이지마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변화에 대응하는 조치가 없을 수 없다. 그가 만약 끝까지 우리를 해치는 일이 없다면 우리 나라 또한 원한을 맺을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말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유흥치가 전후 보낸 게첩(揭帖)과 주고(奏稿) 중에서 이른바 ‘명나라를 위해 적을 토벌하고 형을 위해 복수하기로 하늘에 제사지내고 바다를 두고 맹서하였다.’는 등의 글을 일일이 보여 주어 유적의 반복 무상한 실상을 모두 폭로하면 그 사이에서 그가 모함할 수 없을 것이니, 이런 내용으로 설득시키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유흥치가 투항했는지의 여부와 금의 한이 받아들였는지의 여부는 우리가 자세히 물어볼 사항이 아니다. 말을 꺼낸 뒤에 난처할 염려가 있을지도 모르니, 동쪽을 침범한다는 것이나 북쪽과 내통한다는 것들만 말하고 이어 게첩을 보여주는 것이 옳을 듯싶다."
하였다.
금차(金差) 아지호(阿之虎) 등이 숙천(肅川)에 도착했을 때 어떤 사람이 밤에 그들이 묵고 있는 곳에 와서 은밀히 금차를 보기를 요구하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조선인 홍대웅(洪大雄)인데, 모반하다가 죄를 얻어 지금 이미 망명 중이니, 심양(瀋陽)으로 따라가고 싶다."
하였다. 아지호 등이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사람을 물리치고 밀담을 나누고는 드디어 은밀히 안주로 보내 용골대(龍骨大)로 하여금 그와 함께 가게 하였다. 이때 포로로 일행 중에 있던 우리 나라 사람이 숙천 부사(肅川府使) 이완(李浣)과 관찰사 김시양(金時讓)에게 밀고하였으므로 이러한 사실을 조정에 자세히 알렸다. 비국이 팔도로 하여금 도망 중인 역당을 대대적으로 수색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일 경술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근래 나라 일이 점점 어렵고 위태로워지는데, 비국 당상 가운데 충실히 근무하는 자가 많지 않으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그 중 병을 핑계댄 날짜가 가장 많은 자를 당상과 낭청에서 각각 한 사람씩 조사해내어 추고하고, 앞으로는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도록 하라."
상이 하교하였다.
"서쪽을 정벌할 때 종군(從軍)한 장사들 모두에게 1년 간 호역(戶役)을 면제해주고 이웃에서 그들의 농사를 도와 주게 하라. 수령 가운데 만약 이를 즉시 시행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제도(諸道) 감사로 하여금 적발하여 보고하게 하라."
6월 3일 신해
호장(胡將) 실이아(實伊阿)가 3천여 기병을 이끌고 강상(江上)에 도착하였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정지한(鄭之罕)이 가판관(假判官) 백광종(白光琮)과 소통사(小通事)를 강 건너로 보내 그의 군문 앞에 가서 묻기를,
"그대가 이미 퇴군하였는데, 무슨 일로 다시 왔는가?"
하니, 호장이 성을 내며 질책하기를,
"3천 병력이 5일간 주둔하는 동안 그대 나라에서는 겨우 쌀 30석을 보냈다. 이것으로는 하루의 식량도 못되어 십수 마리나 되는 말을 잡아 먹었다. 우리들을 굶겨 죽이려 하는가. 우호 관계를 맺은 뜻이 어디에 있는가."
하였다. 그리고 못할 짓 없이 공갈을 치고 구박을 하면서 강을 건너 가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광종이 간곡히 퇴군하기를 요구하니, 호장이 그제서야 허락하고, 하루에 쌀 50석을 요구하면서 그렇지 않을 경우 기어코 강을 건너 가겠다고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형옥(刑獄)에 관한 일체의 공사는 날이 어두워진 뒤라도 지체말고 즉시 입주(入奏)하게 하라는 뜻으로 지시하였는데, 어째서 거행하지 않는가?"
6월 4일 임자
관향사(管餉使) 성준구(成俊耉)가 죄를 지어 하옥되었는데, 뒤이어 석방되었다.
성준구가 여러 해 동안 관향사로 있으면서 탐욕스럽고 비루하다는 평이 상당히 있었다. 그러다가 금차(金差)가 인삼으로 청포(靑布)를 바꾸어 주기를 요구했을 때 성준구가 그 뜻에 부응하지 못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용골대(龍骨大)가 성을 내며 안주(安州)에 들어와 변수(邊帥)를 모욕하였다. 상이 성준구가 조정에 치욕을 끼쳤다하여 특별히 잡아다 국문할 것을 명하고 장차 중율(重律)로 다스리려 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성준구의 소임이 막중한데, 이처럼 일이 많은 때를 당하여 업무에 숙달된 인물이 아니면 안 됩니다. 성준구가 죄는 있습니다마는 용서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그 전에 호조 참판 이경직(李景稷)이 교동(喬桐)에서 돌아와, 통진(通津)에서 증미(拯米)를 상환하는 폐단에 대해 역설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현감 박유관(朴由寬)이 다시 상소하여 감해 줄 것을 청하였다. 상이 그 소를 호조에 내렸는데, 호조가 원래의 수량인 6백 석 중에서 반을 감해 주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총융사 이서(李曙)가 섬으로 진격해 들어갈 날짜를 계품하였는데, 비국이 잠시 적당한 지역에 주둔하였다가 사태를 관망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 좌랑 조경(趙絅)이 이서가 즉시 진군하지 않은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면서 묘당을 모욕하는 말을 하니, 상이 하교하였다.
"조정의 처치에 미진한 점이 있을 경우 그에 대한 의견이 있는 자는 시비를 설명하여 깨닫게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조경이 근래의 일로 인하여 못할 짓 없이 원훈(元勳)과 대신을 모욕하였으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우선 추고하라."
6월 5일 계축
간원이 아뢰기를,
"한천경(韓天景)이 소송을 제기한 사건에 대하여 상이 특별히 사실을 조사하여 처리하라고 명하였으니, 해조로서는 제때에 조사하여 확실하고도 바르게 판결을 내렸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몇 달간이나 덮어두었는가 하면 헌부가 색리(色吏)를 추문한 뒤에도 양인이 했던 일을 조사하지 않고 단지 그 전에 받았던 공초(供招)에만 의거하여 회계하면서 책임을 완수한 것처럼 하였습니다. 이 송사의 시비에 대해서 신들이 감히 알 수는 없습니다마는, 소송인이 법부(法府)에 소송을 내는 것이 예인데도 형신(刑訊)까지 가하여 입을 막았으니, 한 쪽에 치우쳐 처결한 잘못이 뚜렷합니다. 당해 당상을 추고하고 색낭청은 파직하소서."
하니, 따랐다.
6월 6일 갑인
달이 태미(太微) 동원(東垣)으로 들어갔다.
김신국(金藎國)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대사헌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본직에 제수되어 동료와 개좌(開坐)하고 있는 중에, 개성부의 한천경(韓天景)이란 사람이 그의 여종을 의빈부(儀賓府)에 빼앗겼다고 정소(呈訴)하였는데 형조에서 판결을 잘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지방의 상민(常民)으로서 감히 상사(上司)와 소송을 벌였으니, 만약 그가 잘못하였다면 이렇게까지 할 수가 있겠는가.’ 하고 동료들에게 물었더니, 혹은 그의 억울한 정상을 말하면서 형조의 색리를 구금해 놓고 서서히 의논하여 처리하자고 하였으며, 혹은 그가 간교하게 속인 상황을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우선 색리를 구금해 놓고 다음에 개좌할 때 자세히 조사하여 처리하려고 하였는데, 때마침 동료에게 사고가 있어서 그 즉시 개좌하지 못했습니다.
그 뒤에 그 전 동료들은 모두 체직되었고, 새로 들어온 동료들과 모인 자리에서 신이 집의 김반(金槃) 등과 함께 그 송사에 관한 문서를 가져다 보면서 자세히 연구 조사하여 조목마다 별지를 붙여가며 철두철미하게 살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의빈부에서 양민의 아내를 노비로 들였던 것은 각 연도의 장적(帳籍)과 호적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으나 한천경의 천적(賤籍)에는 전혀 근거할 만한 흔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장적은 신빙성이 없는 문서로 여기고 천경이 소송을 낸 뒤의 문기(文記)만 중요하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형조에서 단안을 내려 입계한 안이 합당한 듯하고 구금된 색리도 별로 추궁할 만한 단서가 없었기 때문에 상의하여 석방했던 것입니다.
대체로 송사를 처리하는 법은 그들 형세의 강약을 따져서는 안 되고 오직 시비가 어떠한가를 살펴 공평한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만약 한 쪽에 대해 선입관을 가지면 끝내는 치우치는 결과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번 송사에서 양인과 천인의 구분만 확실히 알면 한 마디 말로 판결할 수가 있는데, 어찌 문서를 왕복할 것까지 있겠습니까. 의빈부에서 말한 ‘한천경은 송도의 부상(富商)으로 송사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가지고 논하건대, 형조에서 즉시 처리하지 못한 것은, 아마도 뇌물을 쓴 판독(判牘)에 대해서는 고인도 어려워했다는 것과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이를 가지고 율을 과한다면 해조에서도 할 말이 없을 법도 합니다마는, 단지 그 전에 받았던 공초에만 의거하였다고 하면서 확실하고 바르게 판결하지 않았다고 아뢴다면 해조에서도 필시 달갑게 수긍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제 간원의 논계는, 억울하다고 한 그의 말만 듣고 문서는 전혀 가져다 보지 않은 것이니 또한 한천경이 격쟁한 것이 실로 전가 사변을 당하는 것을 면하고자 해서였다는 것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억울한 일을 풀어주는 것이야말로 법부의 직책인데, 신이 망령된 견해만 고수하여 자세히 살피지 않은 나머지 승소해야 할 자에게 소원을 이루지 못하게 하였으니, 사세상 그대로 직위에 있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요즈음 더러 염치없이 사욕만 따르는 자들이 구차하게 대간에 충원되고 있으니, 부상(富商)을 위해 형관(刑官)을 파직하기를 청한 것은 괴이할 것도 없다."
하였다. 정언 정백형(鄭百亨)이 아뢰기를,
"신은 한천경이 누구인지 모릅니다마는, 대체로 듣건대 한천경이 자기 송사 때문에 징을 두드리기까지 하였다 하니, 참으로 가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에 해조가 법에 따라 복계(覆啓)하여 다시 형추(刑推)하기를 청하였는데, 상께서 혹시 원통하게 여기는 시골 백성이 있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특별히 조사해 처리하라고 명하셨고 보면, 해조가 어떻게 임의로 판결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 역시 문서를 가져다 조사해 보았는데, 한 사람에게 두 가지의 이름이 있기도 하였으며, 한 사람의 공초(供招)에도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한천경이 이 때문에 송도(松都)에 소송을 제기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사건의 발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해조로서는 다시 각 사람에게 물어 실상을 얻어낸 다음에 확실하고 바르게 판결해 주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 번도 사실을 조사하지 않은 채 모호하게 회계(回啓)하여 갑과 을에게 차이를 두는 것처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제 대사헌 홍서봉이 인피한 말을 보건대 ‘그들 형세의 강약을 따졌을 뿐만이 아니다.’고 하였는가 하면, 또 ‘만약 선입관을 가지면 한 쪽에 치우친 결과를 면치 못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의빈부와 한천경 중에 어느 쪽이 강하고 약한지 감히 모르겠으며, 또한 신이 한천경에게 무엇에 치우쳐서 선입관을 갖게 되었다고 했는지 감히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신이 보잘것없기는 합니다만, 부상(富商)에게 뇌물을 받고 형관(刑官)에게 잘못을 돌렸다고 한다면 만 번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잘못을 수긍하고 지하에서 눈을 감지는 못할 것입니다.
지난번 헌부도 이 사건으로 색리를 붙잡아 형추(刑推)까지 하였는데, 그렇다면 헌부도 부상의 이용물이 되었단 말입니까. 신이 오명을 뒤집어 쓴 것이야 본디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마는, 염치없이 사욕을 따랐다는 견책에 대해서만은 신의 생각에 자연 거기에 해당되는 자가 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신이 참으로 노둔하고 용렬하여 조금도 보답하지 못한 채 도리어 불측한 지경에 빠져 이러한 죄명을 지게 되었으니, 결코 직책에 그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였는데, 대사간 전식(全湜), 사간 조방직(趙邦直), 헌납 이경증(李景曾), 정언 남선(南銑) 등도 그 의논에 참여했다고 하여 인피하니, 모두에게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6월 7일 을묘
상이 숭정전(崇政殿)으로 나아가 금차(金差) 아지호(阿之好)와 중남(仲男) 등을 인견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삼가 금(金)나라 한(汗)의 글을 보건대, 여러 가지로 공갈 협박을 하였는데, 그 가운데에 네 조목을 들어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조목 별로 답하기를 ‘본국이 병화(兵火)를 겪은 나머지 해마다 기근이 들었고 변방에는 원래 비축된 군량이 없었기 때문에, 섬과 무역한 일이 있었다 해도 실은 쌀을 가지고 가 무역한 적은 없었는데, 변경의 백성들이 사사로이 서로 무역한 것에 대해서는 본래 관가에서는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감히 단속하지 않겠는가. 도망해 돌아와 발각 된 사람은 그 전에 즉시 쇄환하였는데, 요즈음에는 전혀 온 자가 없으니, 붙잡아 보내고 싶어도 바람을 잡는 일에 가깝다. 이러한 뜻은 전에 모두 말하였으므로 양해할 줄로 안다. 의주(義州)의 사변은 곧 유흥치가 한 짓이므로 본국에서는 알 바가 아니다. 북변의 밀무역상은 원래 우리 나라에서 금지하게 되어 있는데, 요즈음 들은 바로는 변신(邊臣)이 엄중히 단속하지 못하여 법을 어기고 매매하는 간사한 백성이 이따금 있게 하였다 한 이 일은 귀국의 말이 참으로 옳다. 이제 별도로 굳세고 밝은 관리를 뽑아 보내 착실히 금지하게 할 것이니 허물치 않으면 다행이겠다. 다만 근래에 섬에서 발생한 사변으로 인하여 심지어는 우리 나라를 침범하려는 기미가 있기에 군사를 동원하여 변화에 대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변경에 일이 많아, 근일 유흥치가 빼앗아 간 물화를 미처 준비하지 못하여 금나라의 수많은 사람과 말을 벌판에서 지체하게 하였으니, 매우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승문원으로 하여금 이러한 내용으로 문장을 만들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대사헌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언관이 일을 논하는 것이 꼭 모두 목격한 데서 나온 것만은 아니고 들은 바에 의하여 논하게 되기 때문에 들은 바가 확실한가의 여부에 따라 잘잘못이 가려지게 되는데, 그 사이에 또한 어떻게 사의(私意)를 용납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번에 간원의 관리들이 피혐한 말이 실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양사가 서로 바로잡으려 한 것은 공을 위해서이지 사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정백형이 피혐한 말을 보건대 수많은 말을 늘어 놓았는데, 일일이 따져 해석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일개 상민으로서 큰 관청과 송사를 벌였고 보면 약자를 부추기고 강자를 억제하려는 것이야 사람의 동일한 심리입니다마는, 만약 먼저 이러한 선입관을 가지고 그 잘잘못을 따지지 않는다면 치우친 데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그가 헌부에서 색리를 형추하였다고 한 말도 신은 모르는 것이고 부상(富商)에게 이용당했느니 어쨌느니 하는 것도 변론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염치없이 사욕에 따른 책임은 자연 해당되는 자가 있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어떤 사람을 지적한 것인지 확실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의 소견이 꽉막혀 간관의 규탄을 받았습니다마는, 끝내 스스로 깨달아야 할 만한 단서를 얻지 못하였는데, 이대로는 결코 직위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고, 집의 김반(金槃), 장령 유수증(兪守曾)·권심(權淰)도 이를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모두에게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옥당이 처치하기를,
"의논하다 보면 더러 차이점이 있을 수 있는데 잘잘못을 살펴서 버리거나 취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갑자기 우레와 같은 위엄을 보여 언관으로서는 반드시 하지 못할 일을 가지고 이처럼 지나치게 엄중히 배척하십니까. 신하를 예로 부리는 도리가 아마도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인데, 대간으로서도 마음이 편안하겠습니까. 성상께서 이런 분부를 하신 것은 아마도 일시적으로 실수한 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꼭 혐의를 둘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성상의 분부 자체가 본래 미안한 터에 이것을 가지고 서로가 헐뜯기까지 한다면 자못 서로 공경히 대해야 하는 사대부의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나에게 잘못이 없으면 비방이나 배척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 책임은 돌아갈 데가 있을 것입니다. 정언 정백형은 체차하고, 대사헌과 대사간 이하는 모두 출사를 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6월 10일 무오
대사간 전식(全湜)이 정백형의 논계에 동참하였다 하여 불안해 하다가 마침내 정사(呈辭)하였는데, 첫번째 정사에 체차되었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간관은 위로는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고 아래로는 간사한 관리를 탄핵하니, 국가의 치란과 흥망성쇠가 간관다운 사람을 얻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근래 이 직책에 있는 자들이 모두 명류(名流)인데도 전부터 논핵하는 것들을 보면 혹 놀랍거나 해괴한 일이 없지 않았기에 내가 일찍이 통탄하고 반성하며 자책하였다. 전 정언 정백형은 부형자제(父兄子弟)로서 올바른 도리로 임금을 섬기지는 않고 사람을 위해 송사를 왜곡되게 처리하려고 하였으니, 사욕에 따라 관작을 더럽힌 짓이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다. 이러한 폐습을 막지 않는다면 남에게 사주를 받아 사람을 해치고 일을 그르치는 폐단을 금지하고 억제하기란 어려울 듯하다. 사판(仕版)에서 제명하여 후일을 경계하는 본보기로 삼으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대간이 일을 논한 것이 혹 중도에서 벗어났다 하더라도 임금이 항상 널리 받아 들이고 너그럽게 용서하는 것은 대각(臺閣)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정백형이 논한 것에 대하여 사실 무근한 풍문을 듣고 하였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반드시 그 사이에 사의가 개재되었다고는 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런데 뜻밖에 지금 또 사판에서 제명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설사 정백형에게 실제로 이러한 사실이 있었다 하더라도 바로 그의 잘못을 지적하여 배척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정리상 있을 수도 없는 일을 가지고 두 번씩이나 엄중한 분부를 내리시니, 보고 듣는 자가 거북하게 여길 뿐만이 아닙니다. 염치없이 사욕에 따라 송사를 왜곡되게 처리하려고 하였다는 것은 어디에도 비할 수 없는 오명(汚名)인데, 대간의 신분에다 씌워서야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대간을 이처럼 너무도 박대하는 것은 성스런 세상의 아름다운 일이 못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단정한 인사가 대각에 가득 차 있어야 조정이 이로 인해 존엄해질 것이다. 만약 현부(賢否)나 시비를 논하지 않은 채 너그럽게 용납하기만 하고 용서한다면, 그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조성립(趙誠立)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대사헌 홍서봉(洪瑞鳳)이 피혐한 말을 보건대, 형조 낭청에게는 잘못이 없는 듯하니, 파직하지 말라."
6월 13일 신유
민기(閔機)를 승지로, 정봉수(鄭鳳壽)를 전라 수사로 삼았다.
6월 14일 임술
총융사 이서(李曙)에게 밀서를 내리면서 정원에서는 보지 말라고 하였다.
여이징(呂爾徵)을 응교로, 박황(朴潢)을 부교리로 삼았다.
6월 15일 계해
공청 감사 정효성(鄭孝成)이 본도 원곡(元穀)의 포흠(逋欠)을 면제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호조가 매년 3분의 1씩 징수하여 점차 보충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6월 16일 갑자
청천(淸川) 이북 지방에 많은 비가 내렸는데, 평지의 수심(水深)이 열 자가 넘어 3일이나 길이 막혔다.
청천(淸川) 이북 지방에 많은 비가 내렸는데, 평지의 수심(水深)이 열 자가 넘어 3일이나 길이 막혔다.
6월 18일 병인
헌부가 아뢰기를,
"정원은 후설(喉舌)의 위치에 있으니, 아무리 막중한 기밀의 일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여기를 거쳐 출납하기 때문에 입계(入啓)나 명령을 선포할 때에 정원에서 모른 게 없었는데, 이는 조종에서 유래된 옛날의 법규입니다. 전일 특별히 선전관을 파견하여 총융사 이서에게 밀서를 내리셨는데, 이것이 극비에 부칠 일이라 하더라도 정원에서 어찌 보아서는 안 될 리가 있겠습니까. 슬기로운 상의 결단이 독단적으로 나오셨다 하더라도 묘당에게 자문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폐가 있을 듯 합니다. 따라서 정원으로서는 종전의 예(例)에 따라 거듭 여쭈었어야 했을 것인데, 애매하게 분부하는 대로만 따랐으니, 매우 무식합니다. 해방 승지를 파직하소서."
하고, 간원도 이를 논하니, 답하기를,
"오직 내가 망령되이 한 일이지 실은 승지의 잘못이 아니다. 고집스럽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여러 번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그 뒤에 상이 밀서의 초본을 대신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 글에,
"이 적이 거짓으로 황제의 명을 받았다고 우리를 속여 군사를 지체시킬 염려가 없지 않다. 그가 한 말이 설사 허위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는 명나라의 본의가 아닐 것이고, 또 호랑이를 풀어주어 후환을 남겨서는 안 될 것이니, 경들은 단연코 토벌하여 후회를 남기지 말라. 그리고 병사 가운데에 항복한 달족(㺚族)들은 한 명도 살려두어서는 안 될 것 같으니, 이 점도 유의하여 처리하라. 경이 부원수와 은밀히 의논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이행건(李行健)을 지평으로 삼았다.
승지를 전옥서(典獄署)로 파견하여 죄수를 조사해서 죄가 가벼운 자는 석방하도록 하고, 이어 하교하였다.
"우포도청의 죄수가 가장 많으니, 옥사를 지체한 과실을 면하기 어렵다. 당해 대장을 추고하라."
6월 20일 무진
정윤(鄭沇)을 정언으로 삼았다.
6월 21일 기사
지중추부사 김상헌(金尙憲)이 겸 홍문관 제학을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상헌이 일찍이 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의 행장을 썼는데, 김공량(金公諒)의 일에 언급하기를,
"김공량은 곧 인빈(仁嬪)의 오빠로서 정원 대군(定遠大君)의 외숙이다. 인빈이 선조의 후궁으로 총애를 받자, 당시 영상 이산해(李山海)가 세력에 빌붙고자 밤에 그의 집에 찾아 갔는데, 궁금(宮禁)과 내통하여 안팎으로 권력을 농락한 자이다."
하였다. 상이 그 글을 보고 노여워하며 이르기를,
"김상헌은 인정도 모르는 사람이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가."
하고, 다시 고쳐 짓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김상헌이 불안하게 느껴 상소를 올려 면직을 청했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6월 22일 경오
대사간 조성립(趙誠立), 사간 조정호(趙廷虎), 헌납 채유후(蔡𥙿後), 정언 남선(南銑)·정윤 등이 차자를 올려 여섯 조목의 일을 아뢰었는데, 검약을 숭상하고 궁금을 엄히 하고 대신에게 책임을 맡기고 대간을 너그러이 용납하고 변방의 방어를 튼튼히 하고 고통받는 백성을 구휼하라는 것이었다. 상이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그대들의 정성을 잘 알았다. 조목 별로 아뢴 일들을 유념하겠다."
하였다. 차자 가운데에 이른바 궁금을 엄히 하라는 것은 김씨와 조씨(趙氏) 두 여인을 지적한 것인데, 조정호가 논한 것이다.
간원이 아뢰기를,
"박홍중(朴弘中)은 본디 괴이하게 속임수를 쓰는 사람으로 잡술(雜術)에 종사하였습니다. 이번 능을 옮길 때에 처음부터 끝까지 술관(術官)들의 반열에 참여하여 산을 정하고 자리를 잡는 데에 동참해 알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만약 미진하다는 생각이 있었다면 총호사에게 품하여 즉시 선처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일이 경과된 뒤에 거리낌없이 뻔뻔스럽게 상소하였으니, 말을 바꿔가며 조정을 경멸한 그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판(仕版)에서 제명하소서."
하니, 따르지 않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평안 병사 유비(柳斐)는 용골대(龍骨大)를 응접하면서 사사건건 말썽을 일으켰고, 또 호인(胡人)이 옥으로 난입하여 중국인 죄수를 모두 탈취해 가 협박 문초하여 군사 기밀이 누설되게 하였으니, 붙잡아 국문하여 정죄하소서. 원창군(原昌君) 이구(李玖)는 종실의 신분으로 법을 어기고 도성 밖에 살고 있으면서 호차(胡差)가 보기를 청했어도 제때에 오지 않았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단지 유비는 파직하고 이구는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6월 24일 임신
의주 부윤(義州府尹) 정지한(鄭之罕)을 의금부에 내렸다. 그 전에 호차(胡差)가 왔을 때 중국인 파발이 외딴 곳으로 피해 숨었는데, 호차가 그들의 소재를 물었을 때 정지한이 숨기지 못하여 모두 죽고 약탈당하였으므로, 상이 붙잡아 국문하라고 명한 것이다.
예조가 아뢰기를,
"진위사(陳慰使)의 행차가 가도(椵島)의 사변으로 인하여 중지되었는데, 지금의 형세로 볼 때 얼마 안 되어 안정될 것이니, 속히 사신을 보내소서."
하니, 따랐다.
선전관을 해상(海上)에 파견하여 군사를 위로하였다. 이때에 섬을 정벌하는 사졸들이 오래도록 해상에 머물러 있는 동안 사망자가 매우 많이 나자, 군중(軍中)에 원성이 많았다. 비국이 아뢰기를,
"삼가 생각건대 여러 섬의 군사들이 해상에서 노숙한 지 지금 벌써 몇 달이 지났는데 현재 혹서기를 맞았으니, 그들의 괴로운 정상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특별히 선전관을 파견하여 그들의 병과 고통을 위문하여 조정에서 매우 염려하고 있다는 뜻을 보이소서. 그리고 두 도의 감사로 하여금 약간의 어염(魚鹽)을 거둬들여 일일이 나누어 주게 하면, 먹는 것은 적더라도 반드시 동고동락하는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받아들였다.
6월 25일 계유
이때 유흥기(劉興基)가 장산(長山)에서 가도로 돌아와 우리 병력이 항구에 이미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겸손한 말로 사람을 보내 동태를 살피려고 하였는데, 조정에서 물리쳤다.
6월 26일 갑술
추신사(秋信使) 오신남(吳信男)이 심양(瀋陽)으로 갔다.
6월 28일 병자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이 군사를 파할 것을 청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군사를 파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으나, 좌상 김류(金瑬)만은 그럴 수 없다면서 말하기를,
"정충신이 명을 받고 출정해서 군사들에게 적개심을 일으킬 방도는 생각하지도 않고 갑자기 군사를 파하자는 의논을 내놓았으니, 그의 죄는 참해야 마땅하다."
하였다. 삼공(三公)이 서로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여 결말이 나지 않자, 각자 의견을 진달하여 아뢰었다. 김류가 아뢰기를,
"당초 유흥치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가 왔을 때 온 조정의 인사가 너나없이 팔을 걷어붙이며 유흥치를 정벌해야 한다고 하였고, 등대(登對)했을 때에도 상께서 자문을 구하자 모두들 입을 모아 유흥치를 정벌해야 한다고 하다가, 얼마 뒤에는 논의가 점점 변하여 처음엔 정벌해야 한다고 하던 자도 나중에는 정벌해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만은 어리석고 어두워 변통하지 못한 채 한결같이 처음의 의견만을 굳게 지키면서 안타깝게 지금까지 침묵만을 지켜왔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정지우(鄭之羽)의 장계 가운데에, 유흥치의 대죄(待罪)하는 주본(奏本)에 대해 내린 성지(聖旨)와 각부(閣部)가 자문을 보내 유시하고 정지우와 문답한 말을 가지고, 사람들이 모두 ‘성심으로 받아들여 진정시키려는 의도이므로 결코 정벌해서는 안 된다. 수신(帥臣)에게 섬 가까이 다가가 군사의 위용을 떨치고 섬에 글을 보내 그의 죄를 성토하고 나서 회군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합니다마는, 신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각부가 정지우에게 묻는 말 가운데에 ‘귀국이 말·군량·전투 장비 등의 물품을 제공했는가.’라는 말이 있었고 보면, 우리가 유흥치와 함께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아심을 갖고 있는 듯하니, 각부가 유흥치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또 자문을 보내 유시한 가운데 ‘성심으로 충성을 바치면 혹 사형을 면해 줄 수도 있다.’고 하였는데, ‘혹’이란 말이 확정적인 말이 아니고 보면 그 의미가 또한 깊습니다. 더구나 ‘월권해서 반역을 도모한 자가 있으면 변방의 강력한 신하가 존엄한 황제의 신령을 받들어 토벌하는 법이니, 이것이야말로 본디 귀국이 충성스럽게 계획해야 할 바이다.’라는 등의 말로 끝을 맺었으니, 그의 말이 더욱 더 엄중합니다. 따라서 기미책을 쓰는 것은 유흥치의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을 잠시 가라앉혔다가 장차 체포하려는 계략을 쓰려고 하는 데 불과한 것입니다. 만약 이때에 우리 삼군(三軍)의 위용을 펼쳐 유흥치의 죄를 성토하고 나아가 섬멸한다면 각부만이 통쾌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천하에 할 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다만 염려스러운 점은 유흥치가 아직도 여순(旅順)에 있는데 언제 나올지 까마득하다는 점입니다. 그의 귀환을 기다리자니 군사가 피곤해지고 군량이 떨어지겠고, 당장 정벌을 그만두고 회군하자니 정벌에 나선 명분이 없을 것이니, 건곤일척하는 이외에는 별다른 계책이 없습니다. 따라서 속히 장수들에게 가도로 진격하여 역순(逆順)의 이치로 회유하고 유흥기·세괴(世魁)·영평(永平) 등을 붙잡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별도로 한 통의 자문(咨文)을 작성하여 군문(軍門)에 보내 그의 지시를 기다리는 한편 여러 섬에 격문을 보내면, 유흥치가 이 소식을 듣고는 간담이 떨어지고 말문이 막혀 저절로 그의 흉측한 반역의 기운이 움츠려들 것이니, 이야말로 중국에 우리의 큰 의리를 알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영상 오윤겸(吳允謙)과 우상 이정구(李廷龜)가 아뢰기를,
"삼가 정지우가 보낸 각부의 자유(咨諭)와 각부와 문답한 말을 보건대, 유흥치가 반역한 실상을 중국에서도 모르고 있지는 않지만, 다만 해도에서 날뛰고 있어서 실로 제압하기 어렵기 때문에 다독거려 붙잡아두려는 계책을 시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단지 유흥치의 역순(逆順)에 대한 거취가 지금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 중에 모두 두 가지로 말하고 있고, 정지우에게 한 말에도 ‘형세를 보아가며 변화에 따라 제압함으로써 소요를 초래하지 말라.’고 이야기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그가 귀순하리라 꼭 보장 못하겠다는 뜻인 것입니다.
이를 보건대 이번에 출병한 것은 중국 조정에서도 참으로 가상하게 여기고 있으니, 만약 아군이 유흥치를 붙잡아 놓고 황상에게 알려 중국의 처분을 기다린다면 넉넉히 온 세상에 큰 의리를 알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좋은 계책이 없는 터에 지금 유흥치가 돌아올 기약 또한 막막하기만 한데, 삼군은 노숙하고 군량도 잇대어 수송하지 못하고 있으니, 난처한 걱정거리를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정지우가 올린 장계를 보건대 ‘유흥치가 지금 여순(旅順)에 있는데, 유(劉)·주(周) 두 장수도 와서 모였다. 상선이나 일반 선박도 여러 섬에 그전처럼 끊이지 않고 왕래하고 있으며, 호부(戶部)에서 보낸 양곡도 계속 오고 있다. 황상도 사세를 보아 진정시키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이미 이를 봉행하고 있다.’고 하였으니, 조정의 조치가 이미 10분의 8, 9가 이루어져 관내를 숙청하고 존엄한 황제의 신령을 펼쳐 유흥치를 귀순케 해야겠다는 계획이 더욱 굳어져 다른 마음이 없게 되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각부의 자문 가운데에 단지 사형을 면해 준다고 하였는데, 사형을 면해 준 뒤에는 예전의 성지대로 쌍도(雙島)에 그대로 주둔하게 하거나 유흥치의 소원대로 가도로 돌아가도록 허락할 것이라고도 합니다. 요컨대 이 두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인데, 만약 그가 쌍도에 주둔한다면야 말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만, 불행히 가도로 돌아올 경우 황제의 명을 받았다 자칭하고 아무 죄도 없는 자처럼 우리에게 한없이 반감을 품을 것이니, 환란이 많게 될 것이 매우 염려됩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빨리 정벌을 구만두어야 하겠습니다마는, 그렇다고 명분없이 슬그머니 퇴군하여 그들에게 더욱 구실거리를 주게 할 수는 없습니다.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섬에 격문을 보내게 하기를 ‘유흥치가 멋대로 주장(主將)을 살해하고 또 관리를 죽였다. 이에 섬 전체가 흉흉하여 모두들 유흥치가 중국을 배반하고 앞으로 등주(登州)를 침범할 것이라고도 하며, 혹은 그의 무리를 이끌고 호인에게 투항할 것이라고도 하였기 때문에, 본국이 이에 입각하여 군사를 일으켜서 그의 죄를 추궁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듣건대, 그가 병선을 이끌고 서쪽으로 떠났다고 하는데 그가 반역할 것인지 순종할 것인지를 알 수가 없는데다, 섬 백성들 또한 중국의 백성 아닌 자가 없기에 쉽사리 정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군대를 단속하여 가만히 있으면서 사태의 기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온 사신을 통하여 각부의 자유(咨諭)를 보건대, 그 가운데에 「만약 성심으로 충성한다면 사형을 면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월권행위를 하며 반역을 도모한다면 변경의 강력한 신하가 존엄한 황제의 신령을 받들어 토벌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본국으로 하여금 유흥치의 태도를 보아 처리하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유흥치가 이미 먼 섬에 가 있어서 그의 태도를 본국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섬 안의 장수들은 본디 그의 위협 때문에 따랐을 것이니, 마음은 틀림없이 중국에 있을 것이다. 유흥치가 저지른 앞뒤의 상황을 들어 우리에게 명백하게 말하도록 하라. 만약 일시적인 서로의 충돌로 발생한 사건으로서 당초 반역하려는 마음이 없었다면 스스로 몸을 묶어 처분을 기다리고 다른 짓을 하지 말라. 그러면 우리는 즉시 정벌을 중지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방자하게 날뛰어 끝내 중국의 걱정거리가 된다면, 그와 함께 나쁜 짓을 한 자는 죽이고 죄가 없는 자는 보살피고 나서 중국에 알려 처분이 내리기를 기다릴 것이다. 너희들의 한 마디 말을 듣고 진격하거나 물러가려고 한다.’ 하소서.
그러면 그들이 반드시 대답하는 바가 있을 것이니, 그들의 회답을 기다렸다가 그 때 정벌을 그만두고, 또 이 의견으로 각부에 자문을 보내 앞뒤의 사실을 자세히 알린다면 수시로 대응하는 권한이 모두 우리에게서 나오고 군사를 일으킨 큰 의리가 온 세상에 저절로 알려질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도 반드시 자신이 지은 죄를 시인하고 감격할 줄을 알아 우리를 침범하거나 능멸하는 후환이 이로 인해 혹 조금이라도 누그러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각부의 자문 가운데에 이미 도적에게 식량을 주지 말라고 한 경고가 있었으니, 정벌을 그만 둔 뒤라도 참으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왕래하는 사신이나 상인들의 무역 등등의 일에 있어서는 변신(邊臣)으로 하여금 거절하게 하면서 ‘각부에서 이렇게 분부하였으니 본국에서 임의로 허락할 수가 없다. 반드시 중국 조정의 명령을 기다려 허락할 수 있다.’고 말하게 하소서. 그러면 각부가 이를 듣고는 반드시 변방으로서의 체면을 지켰다고 할 것이니, 지금의 전략으로는 이보다 나은 게 없을 것입니다.
가도로 진격하여 유흥치의 도당 몇 명을 죽이는 것도 명분이 없지는 않습니다마는 일을 시작할 때에는 결말을 생각해야 합니다. 심복을 죽인다 하더라도 악당의 우두머리가 여전히 남아 있게 되는데, 만약 그 즉시로 정벌을 그만둔다면 이미 원한을 깊이 맺게 된 상태이고, 그렇다고 머물러 그가 오기를 기다리려 한다면 끝장낼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용골대가 이미 힘을 합쳐 가도를 공격하자고 말을 꺼냈으니, 만약 가도를 공격한 뒤에 들어주기 어려운 말을 한다면 후환이 막대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내일 직접 만나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이튿날 상이 여러 신하를 인견하고 하문하기를,
"어제 경들이 의논하여 아뢴 말을 보건대, 의견이 각각 다르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니, 영의정 오윤겸이 대답하기를,
"유흥치가 주장을 죽이고 또 관리를 해쳤을 때에 물론 예상할 수 없는 변이 있을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군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떠났는데, 산동(山東)과 충돌하면 중국이 쉽게 흔들릴 것이고 또 북쪽으로 노적(虜賊)에게 달아나지는 않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반역자를 토벌하자는 전략에 찬성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태가 크게 변한 이상, 신들의 의견으로는 정벌을 그만두었으면 합니다."
하고, 좌의정 김류가 아뢰기를,
"지금 만약 가도를 먼저 공격하여 중국 조정에 포로를 바친다면 중국 조정에서도 반드시 그 적이 무능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유흥치도 듣고는 저절로 몹시 겁을 내며 간담이 서늘해질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의 사세는 그 전과 다르니, 비어 있는 섬을 공격한다는 것은 참으로 무익하다. 유흥치가 일단 가도로 돌아와서 황제의 명을 받았다고 일컬으며 군향을 요구하거나 호차(胡差)를 침해하여 일을 벌인다면 결국 우리 나라의 큰 근심거리가 될 것이니, 이 점을 잘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섬 안의 식량이 바닥이 나 겨우 한 달쯤 지탱할 것이라고 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중국 조정에서 무고한 백성들을 부질없이 섬에서 죽게 버려두겠는가. 얼마 안 가서 반드시 유흥치를 되돌려 보낼 것이다."
하니, 김류가 나아가 아뢰기를,
"어리석은 신의 계책은 벌써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결국 신의 계책은 쓰지 않으시면서 ‘가도는 토벌할 수가 없고, 세괴(世魁)와 영평(永平)도 죽일 수가 없다.’고 하고는, 쓸데없이 오래 지친 수군을 머물러 두어 오지 않는 유흥치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신은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오윤겸과 이정구가 모두 김류의 말이 불가하다 하였는데, 상 역시 불가하다고 하면서 이르기를,
"가도를 공략할 때 불편한 점이 하나뿐만이 아니다. 지금 군사를 일으켜 토벌한다면 세괴와 영평이 반드시 달아나 흩어질 것이니, 각부(閣部)가 소요를 일으키지 말라고 한 말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염려된다. 그리고 가도의 남은 백성들이 굶주려 죽게 되었는데, 그들을 구하지는 않고 전투를 벌이려 한다면 중국에서 과연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또 호차가 유흥치의 말을 듣고 이미 군침을 흘리며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만약 다시 가도를 공격한다면 요동 백성을 그들의 백성이라고 하여 반드시 모두 쇄환시키려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중국에게 큰 죄를 짓게 되어 한없는 걱정거리를 만들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때 여러 의견이 분분하여 한낮이 되어도 결말이 나지 않았다. 김류가 나아가 아뢰기를,
"날이 이미 저물었습니다. 오늘의 일은 정벌을 그만둘 것인지의 여부만 결정하면 되니, 이 두 가지만 결정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우참찬 최명길(崔鳴吉)이 아뢰기를,
"듣건대, 수군이 해상에서 노숙하다 보니 지쳐서 일어나지 못하는 자가 많은데, 주장이 그들이 도망쳐 흩어질까 염려하여 상륙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군사들이 모두 목마르고 굶주려 있다 합니다. 군사들이 괴로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이와 같다면 오래 주둔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깜짝 놀라며 이르기를,
"어째서 이렇게까지 되었단 말인가."
하였다. 김류가 나아가 아뢰기를,
"유흥치가 사형을 용서받고 돌아온다 하더라도 옛날에 가지고 있었던 도사(都司)의 직함만 있을 뿐 새로 관작을 주는 명이 다시 없는 이상 토벌할 수 있는 것입니다. 토벌할 수 없는 경우는 반드시 황제의 명이 있을 때뿐입니다. 대체로 세상의 일은 예상 밖에서 벗어나지 않는 법이니, 이 두 가지만으로도 넉넉히 결정지을 수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잠시 사세를 살펴보고 처리하고 싶다."
하였다. 최명길이 다시 명을 받고 관서(關西)로 나간 장수들에게 물어보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물어볼 필요가 있겠는가. 수군은 아직 머물러 두고 육군은 회군케 하라."
하였다. 이에 의논이 마침내 정해졌다.
공청도 관찰사 정효성(鄭孝成)이 연해의 속오군을 수군에 소속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이 일을 비국에 내렸다. 그런데 비국이 온당치 못하다고 하여 이 일이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함경 북도에 비가 많이 내려 보리가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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