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3권, 인조 8년 1630년 7월

싸라리리 2025. 12. 29. 09:55
반응형

7월 1일 무인

유성이 천원성(天園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황해 감사(黃海監司) 이여황(李如璜)이 치계하기를,
"지금 농사가 바야흐로 급한데 장맛비가 개지 않아서 황주성(黃州城)이 쌓는 대로 무너져 내리니 들인 공력(功力)이 아깝습니다. 농사일이 좀 한가해질 때까지 기다린다면 무너지는 곳이 점점 많아질 것이어서 긴급한 일이 발생할 경우 제때에 수축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다. 비국(備局)이 회계(回啓)하기를,
"당초 성랑(城廊)을 설치한 것은 영구적인 계책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적들이 물러간 뒤 지킬 만한 데가 한 곳도 없었으므로 장신(張紳)이 성랑을 설치하여 겨울을 지내려고 했기 때문에 상의하여 축조할 것을 허락했었습니다. 그때에도 민력(民力)이 많이 들었는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년 동안 잇따라 무너지는 걱정이 있어 왔고 무너지는 대로 수축했기 때문에 분담한 고을에서는 그 고통을 감내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지금부터는 무너진 곳에다 체성(體城)을 높이 축조하고 성을 한 바퀴 둘러 여장(女墻)을 설치한다면 자연히 성이 높게 축조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이사이에 포루(砲樓)와 사각(射閣)을 설치하여 적을 방어하는 장소를 만드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성이 무너져 내리는 것은 실로 성랑에 연유된 것이니, 속히 이를 철거하여 민폐를 없애고 다시 의논하여 처치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체성이 성랑 때문에 무너진다면 수삼 년 동안에 있었던 장맛비에 반드시 모두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금년에 이르기까지 무너진 곳이 세 군데이니, 틀림없이 그 지점의 체성이 견고하지 못해서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몇 군데가 무너져 버린 것 때문에 성랑을 모두 철거한다면 허물어 철거하는데 인력이 많이 허비될 뿐만이 아닙니다. 본성(本城)의 둘레가 2만 8천 1백여 보(步)인데 무너진 곳 이외에는 모두 완벽하여 지킬 만합니다. 만약 성랑을 철거하고 나서 또 제때에 높게 축조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지킬 수 없는 곳이 되고 말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닐 듯하여 매우 우려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황조(皇朝)에서 오랑캐를 물리친 경사(慶事) 때문에 소식을 들으면 즉시 이를 반포해야 한다는 분부가 있으셨습니다. 고례(古例)를 가져다 상고해 보니 경태(景泰)057)  ·가정(嘉靖)058)   때에 모두 황성(皇城)이 포위된 변이 있었는데도 우리 나라에서는 진위(陳慰)나 진하(進賀)를 하지 않았습니다. 중국 대궐을 바라보면서 진하하는 것과 팔방에 이 사실을 반포하는 것은 새로운 예를 만드는 데 관계되니 대신과 의논하소서."
하였다. 영돈녕부사 윤방(尹昉), 영의정 오윤겸(吳允謙), 좌의정 김류(金瑬), 우의정 이정구(李廷龜)가 아뢰기를,
"무릇 일을 처리하는 방도는 이치에 합당한 것을 취할 뿐입니다. 구례(舊例) 가운데 행할 만한 것은 행해야 되고 행할 수 없는 것은 고치는 것이 또한 옳습니다. 경태·가정 때의 변이 있을 적에 우리 나라에서 진위나 진하를 하지 않은 것은 당시의 흠전(欠典)이었으니, 오늘날 전례로 인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이미 결정하였으니 어찌 다른 의논을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지체없이 거행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단지 염려되는 것은 선유(宣諭)하는 조칙이 만일 추후에 나올 경우 진하를 두 번 행한다면 번복스럽고 행하지 않는다면 미안한 일이 됩니다. 우선 진하사 이흘(李忔)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2일 기묘

처음에 경략(經略) 원숭환(袁崇煥)이, 등주(登州)의 해로(海路)가 순탄하기는 하지만 모장(毛將)059)  이 금하기를 청할까 의심하여 드디어 천진(天津)의 해로를 열고 우리 나라의 조공선(朝貢船)과 당선(唐船)의 왕래를 모두 천진을 경유하게 하였다. 이곳은 요하(遼河)의 물이 휘돌아 흘러드는 곳으로 파도가 소용돌이쳐서 비할 데 없이 험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진위사 정두원(鄭斗源)이 부경(赴京)하게 되었는데 해로를 고쳐 곧바로 등주로 향하게 해달라는 주본(奏本)을 가지고 가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삼조(三曹)060)  의 낭관은 음관(蔭官) 누구나가 외람되이 차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닌데, 지난번 도목 정사 때 낭관 6원(員)을 모두 음관으로 보임시켰으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태거(汰去)시키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행 부호군(行副護軍) 이명준(李命俊)이 소장을 올리기를,
"내수(內修)에 대한 조목이 다섯 가지인데, 첫째는 궁금(宮禁)을 엄히 할 것, 둘째는 전선(銓選)을 중히 할 것, 셋째는 간쟁을 들을 것, 넷째는 상벌을 분명히 할 것, 다섯째는 수령을 가릴 것이고, 외양(外攘)에 대한 조목이 네 가지인데, 첫째는 장수를 가릴 것, 둘째는 무용(武勇)이 있는 자를 모을 것, 셋째는 둔전(屯田)을 다스릴 것, 넷째는 성지(城池)를 수축할 것입니다.
궁굼을 엄히 하라는 것은 이렇습니다. 대저 《주관(周官)》에 의하면 내직(內職)은 반드시 명가(名家)에서 잘 골라 뽑는다고 했는데, 이는 곤정(壼政)을 엄히 하기 위한 것입니다. 신이 삼가 여항의 자자한 말을 듣건대, 궁중에 새로 나온 여시(女侍)가 있으니 바로 조기(趙琦)와 김두남(金斗南)의 첩의 딸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성명을 들어 말하기에 이르렀으니 부실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김두남과 조기의 딸은 예선(禮選)한 것이 아닌 이상, 반드시 부정한 길을 인연하여 나왔을 것입니다. 부정한 길이 한번 열리면 이는 국가가 망할 조짐이니, 신은 밥을 먹다가도 수저를 놓고 세도(世道)에 대해 깊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옛날 송 인종(宋仁宗) 때 외번(外藩)에서 두 명의 여인을 진상했는데, 왕소(王素)061)  가 간하자 인종이 눈물을 흘리면서 내보냈으므로 군신(君臣)이 모두 아름다운 이름을 향유하고 사직(社稷)도 장구해졌습니다. 어리석은 신은 진실로 왕소의 현명함에 미치지 못합니다만 전하의 성덕이 유독 인종만 못하단 말입니까. 규중의 일은 여염의 필부도 듣기 싫어하는 것이지만, 신이 듣고서 감히 실정을 숨기지 않는 것은 전하의 성명(聖明)함을 믿기 때문입니다.
전선을 중히 하라는 것은 이렇습니다. 대저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는 어진이는 나오게 하고 간사한 자는 물러가게 하는 데 있습니다. 진퇴시키는 권병(權柄)이 총재(冢宰)에게 달려 있기는 하지만 옛날의 대신은 어진이를 진용시키는 책임이 있었으니 사람을 기용하는 권한이 오로지 총재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조(我朝)의 고례(古例)에는 전관(銓官)이 신진(新進)을 현요직에 앉히려면 반드시 상신(相臣)에게 품의한 뒤에 했고, 황조(皇朝)의 법제에는 구경(九卿)이 모여서 추대하는데, 이는 그 일을 중히 여겨서인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붕당의 색목(色目)이 50년이나 되도록 그치지 않고 있어 온 조정이 한 사람도 지점(指點)을 벗어난 이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갑을(甲乙)이 서로 반목하고 현사(賢邪)가 뒤섞여 있으니, 통색(通塞)과 진퇴(進退)를 대신으로 하여금 알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찍이 큰 제배(除拜)가 있을 적에 보니 상신도 참여하여 알지 못했다가 제목(除目)을 보고서야 바야흐로 안 적이 있었는데, 이는 고례와 다릅니다. 옛말에 ‘임금은 치강(治綱)을 총람하고 정승은 치권(治權)에 참여한다.’고 했는데, 지금의 상신은 치권에 참여하여 어진이를 진용시키는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만일 조금이나마 조종조 옛일을 본받는다면 현사가 뒤섞여 나오는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간쟁을 들으라는 것은 이렇습니다. 임금의 한몸은 만인(萬人)의 위에 거하고 있으므로 국가의 이병(利病)을 두루 알 수가 없으므로 보고 듣는 임무를 간관(諫官)에게 맡겨 그로 하여금 일에 따라 말을 다하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인물의 현사(賢邪)와 국가의 흥쇠(興衰)는 실로 여기에 관계된 것입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근래에는 말 한마디가 뜻에 거슬리면 즉시 물리쳐 버리는가 하면 심상한 논핵(論劾)에 대해서도 서로 버티면서 결단을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장마(仗馬)의 경계062)  가 있게 되고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 것이 풍조를 이루게 되었는데 이는 말 한마디의 득실에 따라 영욕(榮辱)이 가름나기 때문입니다. 이러니 누구라서 바른말을 하여 임금의 노여움을 저촉해서 일생토록 빛을 보지 못하는 처지에 있으려 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임금의 눈귀는 날로 가리워지게 되어 고립 무원의 상황에 이르게 될 것이니, 또한 위태롭지 않습니까. 《역경(易經)》에 ‘성인은 천하의 뜻을 통할 수 있기 때문에 천하의 일을 완성시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뇌정(雷霆) 같은 노여움으로 매양 꺾어 누르지 마시고 충직(忠直)을 표창하여 언로를 넓히도록 힘쓰소서."
하였다. 그 나머지 여섯 조항도 모두 실정에 매우 절실한 것이었는데, 상이 살펴보고 비국에 내렸다. 복계(覆啓)하기를,
"삼가 이명준(李命俊)의 소장 내용을 보건대 그 충성스럽고 곧은 말이 모두 진심에서 우러난 것으로 근래 준례에 따라 진언하는 데 견줄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은 다 읽기도 전에 마음에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내수(內修)에 대한 다섯 가지 조목과 외양(外攘)에 대한 네 가지 조목 가운데 큰 것은 임금께서 유념해야 될 부분이 있고 작은 것은 유사(有司)가 봉행해야 될 일이 있으니 이런 것은 다른 사람들도 혹 말할 수 있는 것이지만, 궁금을 엄히 해야 한다는 조항에 이르러서는 말이 엄하고 의리가 올바른 것이어서 실로 보통사람으로서는 말하기 어려운 것을 이명준이 말한 것입니다.
지난번 간원의 차자를 보니 이런 이야기가 있었으므로 신들은 ‘성명(聖明)께서 계시는 세상에는 당연히 이런 일이 없을 것이지만 언관의 말 또한 반드시 우연한 데서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고 여겨 바야흐로 반신반의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명준이 그들의 성명을 지적하여 곧바로 말한 것을 보고 삼가 성명께서 이런 거조가 있게 된 것을 탄식하였습니다. 신들은 놀란 눈으로 머리를 모으고 있노라니 가슴이 막히고 기가 끊어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제왕가(帝王家)에서 빈어(嬪御)를 선발하여 두는 데 대해서는 고례가 그럴 뿐만이 아니라 또한 조종조에서 전하여 온 구례(舊例)가 있습니다. 반정(反正)한 이래 이제 8년이 되도록 아직껏 빈어를 선발하여 들이라는 분부가 없었으므로 신들은 전하의 성덕을 흠앙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어찌 하루아침에 부정한 길을 통하여 나오게 함으로써 끝내 성명의 덕에 누를 끼치게 할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빈어의 선발을 반드시 법가(法家)와 명족(名族)에서 하는 것은 시어(侍御)를 중히 여기고 곤정(壼政)을 엄히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 길이 한번 열리게 되면 장래의 근심이 어찌 성덕에 누가 될 뿐이겠습니까. 임금의 마음을 미혹시키고 국정을 해침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음은 신들이 멀리 전대(前代)의 일을 인용하여 논할 것 없이 혼조(昏朝)063)   때의 일이 오늘날의 감계(鑑戒)가 되기에 충분한데, 전하께서는 다시 그러한 난망(亂亡)의 전철을 답습하려 하면서도 전혀 깨닫지 못하니, 신들은 삼가 절통하게 여깁니다.
저 이끗을 즐기는 염치없는 무리들은 뜻밖의 행복을 노리지만 인연할 수 있는 길이 없으면 반드시 스스로 나올 수 없는 것인데, 우리 임금을 비례(非禮)와 부정(不正)의 지경에 빠뜨린 자는 과연 누구입니까. 그 죄상을 논한다면 진실로 주참(誅斬)으로도 용납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대간도 이미 차자에서 그 문제를 제기했건만 지금껏 한마디도 바루는 말이 없었으니, 그 뜻은 반드시 ‘지나간 일이니 간할 것이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 어찌 한심스런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속히 양가(兩家)의 딸을 내치라고 명하고 대궐에 들이는 것을 중개한 사람을 죄줌으로써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로 하여금 모두 허물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않다는 대성인(大聖人)의 성심(盛心)을 우러르게 하여 국가가 만세토록 영장(靈長)의 복을 누릴 수 있는 기반을 다지소서."
하니, 상이 크게 노하여 답하기를,
"내가 실로 변변하지 못하여 이런 어렵고 걱정스러운 때에 상신(相臣)에게 큰 근심을 끼쳤으니, 나의 과실이 중하다.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는가. 얼자(孼子)와 천인(賤人)이 복역(僕役)하는 하찮은 일에 정신(廷臣)들이 간여할 것이 아닌데 한번 이런 말이 들리자 연소배가 떠들고 묘당이 분노하고 있으니, 이는 실로 천하에 괴이한 일이다. 궁중에서는 본디 빈첩(嬪妾)으로 대한 적이 없는데도 억지로 죄를 만들고 있으니, 이는 필시 국가를 원망하는 간흉이 말을 날조하고 선동시켜 그럴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회계한 내용은 매우 엄정하였다. 법부(法府)로 하여금 언근(言根)을 조사해 내어 엄히 국문한 다음 처치하게 하라."
하였다. 이때 외간에 전파된 말에 의하면 궁중에서 조기와 김두남의 딸을 들여왔는데 조기의 딸이 제일 총애를 받는다 했다. 조기의 딸은 정백창(鄭百昌)이 진납(進納)했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었다.
사신은 논한다. 심하도다, 여융(女戎)의 화(禍)여! 예로부터 국가의 난망은 모두 여기에서 연유되었다. 옛날 당 현종(唐玄宗)은 당나라의 영명한 임금으로 일컬어졌지만 양귀비(楊貴妃)가 한번 들어오자 드디어 나라를 뒤엎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두려워하고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김두남과 조기의 딸이 궁중에 들어온 것이 이미 예선(禮選)이 아니었으며, 이명준의 소장과 대신의 진언은 모두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과 잘못을 바로잡는 의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만일 마음에 두려움을 느껴 그 말을 아름답게 여겨서 받아들였다면 지난 잘못은 그저 조각 구름이 하늘을 지나간 것과 같을 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벽력 같은 위엄으로 언근을 조사해 내어 죄를 주려 하고 있으니, 맹가(孟軻)가 이른바 말 한 마디가 나라를 망칠 수 있다고 한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

【태백산사고본】 23책 23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385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왕실-궁관(宮官)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군사-군정(軍政) / 농업-전제(田制) / 건설-토목(土木) / 역사-고사(故事)


[註 061] 왕소(王素) : 송 인종(宋仁宗) 때 사람으로 공부 상서(工部尙書)를 지냈음. 왕덕용(王德用)이 두 명의 여인을 인종에게 진헌하자 왕소가 극간(極諫)하여 두 여인을 즉시 내보내게 하였음. 《송사(宋史)》 권320(卷三百二十) 왕소 전(王素傳).[註 062] 장마(仗馬)의 경계 : 무서워서 말조심을 한다는 뜻. 장마는 의장(儀仗)으로 세워 두는 말임. 당(唐)나라 때 이임보(李林甫)가 권세를 독단하면서 조정 신하들을 위협하기를 "그대들은 입장마(立仗馬)를 보지 못했는가. 종일토록 소리를 내지 않고 있으면 3품에 해당되는 추두(芻豆)를 먹을 수가 있지만 한번 소리내어 울었다 하면 쫓겨나고 만다."했다. 《당서(唐書)》 권 223(卷二百二十三) 이임보 전(李林甫傳).[註 063] 혼조(昏朝) : 광해군(光海君).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심하도다, 여융(女戎)의 화(禍)여! 예로부터 국가의 난망은 모두 여기에서 연유되었다. 옛날 당 현종(唐玄宗)은 당나라의 영명한 임금으로 일컬어졌지만 양귀비(楊貴妃)가 한번 들어오자 드디어 나라를 뒤엎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두려워하고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김두남과 조기의 딸이 궁중에 들어온 것이 이미 예선(禮選)이 아니었으며, 이명준의 소장과 대신의 진언은 모두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과 잘못을 바로잡는 의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만일 마음에 두려움을 느껴 그 말을 아름답게 여겨서 받아들였다면 지난 잘못은 그저 조각 구름이 하늘을 지나간 것과 같을 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벽력 같은 위엄으로 언근을 조사해 내어 죄를 주려 하고 있으니, 맹가(孟軻)가 이른바 말 한 마디가 나라를 망칠 수 있다고 한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

 

도체찰사 김류가 아뢰기를,
"군대란 목숨이 걸려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무거운 형벌이 뒤에 있지 않다면 누가 앞장서서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사력을 다하려 하겠습니까. 우리 나라의 군율(軍律)은 정묘년064)  에 도망한 자들을 너그럽게 용서한 데에서 두 번째로 무너졌는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더 없이 극심합니다.
전일 풍덕(豊德)의 도망병 정수명(鄭守明)·김응계(金應戒) 등에 대해 율문(律文)에 의거하여 장 일백(杖一百)으로 입계했을 때 신이 군율에 의거하여 처단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강력하게 주장했었습니다만, 모두들 율문 이외의 것으로 높이거나 낮추어서는 안 된다고 했기 때문에 신도 그렇게 여겨 다시 억지로 쟁론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 임천(林川)·한산(韓山) 등 고을의 도망병을 수신(帥臣)이 바로 참(斬)하기를 청했기 때문에 이에 의거, 복계(覆啓)하여 행회(行會)하도록 윤허를 받았는데 비국에서 돈이(頓伊)도 똑같이 참하기를 청한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임천·한산의 도망병은 아직 다 체포하지 못했습니다만 보령(保寧)의 도망병 돈이를 먼저 효수(梟首)하소서. 이 뒤로는 도망병이 체포되는 대로 처참하여 일일이 그 수급(首級)을 군전(軍前)에 조리돌려서 군심(軍心)을 경동(警動)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3일 경진

호조가 아뢰기를,
"지난번 간원에서 올린 차자를 보건대 이른바 나라를 위하는 수령과 백성을 위하는 수령으로 나누어 둘로 분류하였는데, 그것은 진실로 오늘날의 폐단입니다. 그 가운데는 간혹 공사(公事)의 봉행에 마음을 다하지 않고 단지 백성에게 명예만을 얻으려 한 경우도 있긴 합니다만, 국가가 누차 변란을 겪어 공사(公私)의 재정이 바닥났는데도 응당 납입해야 할 공물을 독촉해 받아들이지 못한 데에는 많은 곡절이 있습니다. 혹 도망하거나 죽어서 절호(絶戶)된 경우도 있고 혹 오래된 포흠(逋欠)을 차마 독징(督徵)할 수가 없어서 미수된 것이 많아진 경우도 있는데, 이는 사세가 진실로 그렇게 된 것이지 오로지 백성을 기쁘게 해 주기만을 힘쓰고 국사는 만홀히 여겨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미수된 것을 독징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매양 경비가 핍절된 것을 인하여 부득이 준례에 따라 독촉하기 때문에 소요스러움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사리상 이를 정지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은택을 베푸는 것이 마땅하겠기에 일찍이 유신(儒臣)이 차자를 올려 진달한 것을 인하여 무진년065)   이전의 미수된 공부(貢賦)는 가을걷이를 기한으로 우선은 독봉(督捧)하지 말게 했습니다. 차자의 내용이 이와 같으니 오래된 포흠은 가을걷이가 지난 뒤에라도 점차적으로 거두어 들여야 합니다. 다만 근원을 막지 않고 물줄기만 잡으려 한다면 이는 무리한 일입니다. 오늘날의 일은 제도(制度)로 절제하여 재화(財貨)를 손상시키지 말게 함으로써 백성을 위하는 대각(臺閣)의 정성에 부합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계해년066)   이후 누차 줄여왔는데 회계(回啓)에서 이른바 부비(浮費)란 것이 무슨 일인지 낱낱이 서계하라."
하였다. 회계하기를,
"본조의 경상 비용은 일체 정간(井間)067)  과 등록(謄錄)에 의해서 쓰고 있는데, 이른바 정간이란 것은 항식(恒式)에 붙여져 있는 것이고 등록이란 것은 전례에 의거하여 기재된 것이니, 이 밖의 것은 모두 부비(浮費)입니다.
그 가운데 큰 것을 들어 말씀드린다면 호위(扈衛)·어영(御營) 양청(兩廳)의 늠료(廩料)는 정간과 등록에 기재되어 있지 않고 또 더 받아들이는 법규도 없으니, 부비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궐내에 사부(斜付)하는 것을 사람을 고용해 쓰는 것은 각사(各司)의 전복(典僕)이 적은 데에서 연유된 것이기는 하지만 해조에서 대가를 지급하는 것은 또한 근일에 새로 만들어진 것이니, 부비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부방(赴防)하여 있는 포수는 그곳에서 식량을 받고 있는데도 그 처자들의 늠료가 전의 정서군(征西軍) 칠초(七哨)의 처자들보다 더 받고 있습니다. 이는 전례에 없는 것으로 그 양이 수백여 석에 이르고 있으니, 부비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총융청(摠戎廳)에서 군관(軍官)을 기필코 거의 다 데리고 가는데도 그대로 원액(元額)에 대한 늠료를 지급하고 있으니, 부비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훈국(訓局)의 장인(匠人)들에게 염장(鹽醬)과 건어(乾魚)를 더 지급하는 것은 이 또한 고례(古例)가 아니니, 부비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그리고 기타 여러 상사(上司)에 진배(進排)하는 물건과 각 해사(該司)에서 으레 쓰는 숫자도 거의가 미미하던 것이 많아지게 되고 작은 것이 쌓여 큰 것이 됨에 따라 옛날에 없던 것이 지금 있기도 하고 달마다 해마다 증가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응당 써야 될 곳은 매우 적은데 헛되이 소비되는 물건은 매우 많게 됩니다. 어공(御供)과 제향(祭享)을 견감한 것으로 살펴본다면 이런 등등의 물건은 부비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이런 것을 일일이 서계하려 한다면 일이 번거롭게 되니 하나하나 거론하기가 어렵습니다. 부비를 덜자[省浮費]는 세 글자는 폐단을 진달할 적에 항상 하는 말에 불과한 것인데 일일이 서계하라고 명을 내리기에 이르렀으니, 신들은 황공스러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김양언(金良彦)을 정려(旌閭)하라고 명하였다.
김양언은 강서현(江西縣) 사람인데, 그의 할아버지 김장련(金長諫)은 아우 김장연(金長延)과 함께 임진 왜란 때 전사하였고, 그의 아버지 김덕수(金德秀)는 아우 김덕봉(金德奉) 및 김양언의 아우인 김의검(金義儉)과 함께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모두 전사했다. 정묘 호란이 발발하자 김양언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스스로 군병을 모집하여 복수장(復讐將)이 되었고, 안주(安州)를 지키고 있던 방어사 김준(金俊)에게 예속되어 성이 함몰될 때 힘껏 싸우다가 사망하였다.
총융사 이서(李曙)가 강서에 갔을 적에 김양언의 아들 김세호(金世豪)가 그 사실을 갖추어 말하자 이서가 이를 조정에 아뢰었기 때문에 상이 이런 분부를 내리게 된 것이다. 또 해도(該道)로 하여금 김덕수와 김양언의 처에게 의복과 식물(食物)을 넉넉하게 지급하여 긍휼(矜恤)하는 뜻을 보이게 하였고, 다시 3대의 사실을 찬술하여 정문(旌門)에 새기도록 명하였다.

 

7월 4일 신사

이조 판서 정경세(鄭經世)가 병을 칭탁해 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경세는 몸가짐이 청렴하고 검박하였으나 당론(黨論)에 치우침을 면하지 못하였다. 상이 경연에서 《중용》을 강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정경세가 참찬관으로 입시하여 남방(南方)의 강(强)이라는 대목에 이르자, 나아가 아뢰기를,
"남방은 풍기(風氣)가 유약(柔弱)하기 때문에 군자가 거처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 나라의 영남(嶺南)은 군자들을 배출하여 인재의 부고(府庫)라고 일컬어지고 있는데 지금까지도 염(濂)·락(洛)·관(關)·민(閩)068)  에 견주고 있습니다. 인물은 당연히 영남이 으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방의 풍속이 그렇게 아름답다면 정인홍(鄭仁弘)의 악역(惡逆)이 어찌하여 그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니, 정경세가 답하기를,
"정인홍은 거처가 호남(湖南)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하였으니, 그가 편당(偏黨)에 고질이 된 것이 이와 같았다. 전조(銓曹)에 들어갔을 때에는 어떤 사람이 자기 아우를 위하여 벼슬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이름을 잊은 탓으로 수망(首望)으로 의망한 것이 바로 허명(虛名)이었다. 소문을 들은 사람이 말을 하니 이에 병을 칭탁하고 출사하지 않았는데, 상이 억지로 나오게 하였다.

 

7월 6일 계미

순안 어사(巡按御史) 심지원(沈之源)을 함경도에 파견하여 잠상(潜商)을 금단하고 수령을 염찰(廉察)하고 성지(城池)와 기계(器械)를 순찰, 점검하게 하였다.

 

7월 7일 갑신

지평 이행건(李行健)이 전후 부경(赴京)하는 것을 모면(謀免)한 사람을 상세히 조사하여 영원히 서용하지 말 것을 청하고, 또 전 찰방 강주(姜籀)가 아들 강백년(姜栢年)을 위하여 소장을 올려 서장관에서 체면시켜 줄 것을 청한 죄를 논하여 사판(仕版)에서 삭제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죄인 현수남(玄守男)을 사형으로 조율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사건에 고의성이 없는 것 같으니 감사(減死)로 조율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금부가 수남의 죄를 논하였는데 그것이 해당 형률에 어긋나자 우승지 강석기(姜碩期)가 아뢰기를,
"머리 풀고 칼을 들고 궐문에 돌입한 경우에는 교형률(絞刑律)에 처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대명률》에 이른바 ‘숙위(宿衛)로서 숙직에 해당되어 병장(兵仗)을 휴대해도 되는 사람이 아닌데 무기를 가지고 궁전의 문에 돌입한 경우에는 교형에 처한다.’ 했는데, 이것이 해당 형률입니다. 그러나 현수남의 죄는 본디 십악(十惡)069)  도 아니고 또 강도도 아닌데 금부에서 이 조항을 적용함은 타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왕부(王府)에서 조율했으므로 감히 이를 봉입(捧入)하여 성상의 재결을 기다립니다."
하였으므로, 상이 이에 이런 명을 내리게 되었다. 강석기는 인품이 청렴 근신하였는데 왕실(王室)의 인척이 되면서부터는 더욱더 겸손하여 직무의 봉행에 사심이 없었다. 지금 금부의 계사에 대해 법에 의거, 사실을 밝혀 아뢰었으니, 여기에서도 그의 인품을 알 수가 있다.

 

전라 감사 송상인(宋象仁)이 장계를 올려 흥양현(興陽縣)의 두 섬을 대군(大君)이 절수(折受)받아 침해하는 폐단을 진달하고 이를 금단시켜 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7월 8일 을유

성준구(成俊耉)가 병인년070)  의 전례에 의거하여 전결미(田結米)를 7두(斗)씩 거두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금년의 농사가 조금 풍년이 든 것 같지만 전곡(田穀)은 부실하니, 평시대로 거두어 들이는 것은 타당치 않은 것 같다."
하였다. 호조가 복계(覆啓)하기를,
"양서(兩西)가 참혹한 병화를 입은 것은 다를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초 적이 물러갈 적에 이미 기일의 선후가 있었고 지금 한(漢)과 호(胡)에게 해를 입은 폐단도 완급의 차이가 없지 않으니, 평안도는 7두에서 1두씩 감하게 하고 황해도는 아뢴 대로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유흥치(劉興治)의 아우 유흥기(劉興基)가 가도(椵島)에 있었는데, 게첩(揭帖)을 보내었으나 받지 않았다.

 

연평 부원군 이귀가 차자를 올려 속히 주사(舟師)를 혁파할 것을 청하니, 상이 비국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다. 복계(覆啓)하기를,
"주사들이 오래 머물면서 수고하는 정상을 신들 또한 어찌 잠시인들 잊었겠습니까. 지난번 탑전에서 이미 유흥치(劉興治)가 나오기를 기다려 조처하라는 명이 있었고 본사에서 또 왕덕공(王德功)의 일에 의거하여 계품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분명한 보고가 있은 뒤에 조처하라는 분부가 있었기 때문에 아직 처분이 있지 않았습니다. 유흥치가 언제쯤 나올지는 실로 알 수 없습니다만 왕덕공의 분명한 보고는 금명간 반드시 도착할 것이니 우선 기다리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10일 정해

유성이 규성(奎星) 아래에서 나와 천음성(天陰星)으로 들어갔다.

 

상이 목릉(穆陵) 천장(遷葬) 때의 지문(誌文) 초고를 열람하고 하교하였다.
"계축 옥사(癸丑獄事)를 얽어 만든 것은 이이첨(李爾瞻)의 죄일 뿐만이 아니라 유희분(柳希奮)도 참여하여 알고 있었는데 그 말이 기사 내용에 들어 있지 않으니, 불찰(不察)인 것 같다."

 

7월 11일 무자

상이 모화관에 나아가 황태자(皇太子)를 책봉한 데 대한 조서(詔書)를 영접하였는데, 조서의 내용은,
"예로부터 제왕(帝王)이 녹도(籙圖)에 의거 전왕(前王)의 공을 빛내고 후왕(後王)의 일을 복스럽게 해줌에 있어 제일 먼저 저이(儲貳)를 세우는 것을 중히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던 것은 종묘를 받들고 인심을 확고히 다지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지난해 황태자가 탄생했을 적에 중외가 모두 기뻐하였으므로 이미 분명한 조서를 내려 그대의 나라에도 온 천하가 모두 경사스럽게 여긴다는 뜻을 밝혀 반시(頒示)하였었다.
이번에 예신(禮臣)이 제때에 책립(冊立)할 것을 진달하였으나 짐(朕)은 황자(皇子)가 아직 어리다는 것으로 큰 전례(典禮)를 즉시 거행하지 않았었다. 그러자 문무 군신(文武群臣)들과 군민(軍民)·기로(耆老) 등이 모두들 적장(嫡長)의 분의가 이미 밝혀졌으니 원량(元良)을 일찍 세워야 한다고 입을 모아 재삼 간청하였으므로 짐이 굳게 어길 수가 없어 특별히 윤허하였다.
이에 예관을 명하여 중춘(仲春)에 삼가 천지와 종묘·사직에 고하고 책보(冊寶)를 주고 자랑(慈烺)을 세워 황태자로 삼는 의식을 행하기로 정하였다. 상서가 푸른 하늘에 열리니 만국의 근본이 곧게 되고 태자의 문명(文明)함이 널리 비추니 사표(四表)가 그 빛을 받게 되었다.
생각건대 그대는 충순하니 이 아름다움을 함께 해야겠기에 북극(北極)071)  의 밝은 윤음(綸音)을 반포하여 동번(東藩)072)  의 복을 도탑게 하기 위해 그대 나라에 조서를 내려 모두 다 알게 하노라."
하였고, 칙사(勅辭)에는,
"황제는 조선 국왕에게 칙유(勅諭)한다. 이번에 짐이 황태자를 세우니 신민이 서로들 경하하여 큰 은혜가 해우(海宇)에 가득 찼다. 생각건대 왕은 동방의 번병(藩屛)이 되어 대대로 직공(職貢)을 수행하여 왔으니 의당 상물(賞物)을 내려 그 충성에 답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에 일이 많을 때임을 생각하여 황화사(皇華使)의 파견을 면제하고 특별히 조서를 반포하여 유시하고 아울러 왕(王)과 비(妃)에게 채폐(綵幣)와 문금(文錦)을 하사하노니 왕은 공경히 받으라. 짐이 예로 우대하는 지극한 뜻을 보이기 위해 유시한다."
하였다.

 

행 부제학(行副提學) 조익(趙翼)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근래 여항에 은밀히 떠도는 말에 의하면 궁중에서 외간의 여자를 들였다고 하는데, 신들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감히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간원의 차자와 이명준의 소장을 가지고 살펴보건대 이 말이 전파된 지 실로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대저 빈어(嬪御)를 설치하고 중첩(衆妾)을 거느리는 것은 본디 상사(常事)인데 이제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부정한 길을 통하여 나왔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는 사리를 통촉하는 총명함과 몸가짐을 엄히 하는 근엄함이 있으시니 반드시 고혹될 우려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신하가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 있어서는 조짐이 보일 적에 막아야 하는 것이니, 지금 이 몇몇 신하들의 말은 참으로 임금을 사랑하는 도리를 깊이 체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 신하들의 말을 인하여 여융(女戎)의 화(禍)를 경계하시고 머지 않아 회복한다는 것을 법으로 삼는다면 자신의 사욕을 극복하여 선심(善心)을 회복시키는 공력과 제왕의 공업(功業)이 융성함을 이로부터 기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서얼을 궁인(宮人)으로 삼음은 예로부터 있어 왔던 것일 뿐만 아니라 계해년073)   사이에도 들어와 궁중에 있는 자가 많았는데 이 때문에 말을 했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하였다. 이제 하찮은 일 때문에 온 조정이 경황없이 분분하게 소장과 차자를 올리고 있으니 실로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지난번 이후 대궐에 있으면서 모두 비복(婢僕)의 일을 하고 있다. 또 나는 본디 빈첩(嬪妾)이 없는데 경들이 억지로 정하려 하니 이 또한 괴이쩍은 일이다. 지금 인심이 매우 나빠지고 있고 변방의 걱정이 극심하니, 이 점을 마땅히 걱정해야지 아직 닥치지 않은 걱정을 지레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진계한 뜻은 실로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내가 유념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황태자 책봉에 대한 조서를 반포했다는 것으로 별시(別試)를 보여 사람을 뽑으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구례에 의하면 별시는 3년에 한 번씩 하는 대비(大比)와는 같지 않기 때문에 모두 서울에 모이게 했었는데, 임진년074)   이후 경외(京外)의 선비들이 모두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혹 기근을 인하기도 하고 혹 농사가 바야흐로 급한 것을 인하기도 하여 경외를 나누어 시취한 때가 있었습니다. 등록을 가져다 조사해 보니 갑오년075)  에서 신해년076)  까지 18년 동안에 모두 열 번의 과거가 있었는데 갑진년077)  과 임인년078)  에만 경외를 나누어 과장을 설치했었습니다.
근래에는 사습(士習)이 크게 무너져 향시(鄕試)를 보일 즈음에 선비들의 작란(作亂)으로 인하여 파방(罷榜)한 것이 열에 두세 번은 됩니다. 이런 때문에 외방의 선비들 가운데 조금 재학(才學)이 있는 사람은 모두 향시에 응시하기를 원하지 않고 있고 외방의 의논도 그 폐단을 개혁하려고 해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의 별시는 구례에 따라 모두 서울로 모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12일 기축

상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왕세자와 백관의 하례(賀禮)를 받고 사령(赦令)을 반포하였는데, 그 교서(敎書)에,
"왕은 이르노라. 원량(元良)079)  이 일찍 정하여지니 천하의 인심이 매일 곳이 있게 되었고, 조서를 새로 반포하니 해내(海內)가 경사를 함께 하게 되었다. 무릇 숨을 쉬는 동물들은 모두 환희에 젖어 있는데 우러러 황조(皇朝)에서 우리 나라를 도와준 것을 생각하건대 실로 하늘이 내려주는 돌봄을 받았다. 주(周)나라의 국운이 혁혁히 빛나니 널리 팔백(八百)의 도(圖)를 부연하겠고, 한(漢)나라의 복조가 야물게 무르익으니 거듭 구오(九五)의 운(運)080)  을 어루만지도다.
종사(螽斯)·인지(麟趾)081)  의 노래를 살펴 후손을 위한 큰 계모(計謨)를 따르니, 이것이 갑관(甲觀)082)  에 드날리는 상서로움에 예속되니, 곧바로 진기(震器)083)  를 부탁할 데가 있게 되었도다. 이는 종사(宗社)의 신령이 도운 것으로 또한 구가자(謳歌者)와 옥송자(獄訟者)들이 귀의할 데인 것이다.
황제의 윤음(綸音)이 달려 나오니 은택이 온 적현(赤縣)084)  에 두루 미쳤고 사신(使臣)이 나오지 않으니 잔파된 청구(靑丘)085)  를 진념(軫念)한 조처인 것이다. 사행의 배가 돌아오자 지함(芝凾)086)  이 따라서 내려졌는데, 고전(古典)을 상고하여 보니 비록 혐의로운 점은 있지만 황은을 생각하면 지극하지 않음이 없다. 더구나 우리에게만 특별한 하사품을 내려 전후 거듭 큰 은혜를 입은 데이겠는가. 지척에서 얼굴을 대하고 있는 것과 같아 이미 만세 삼창의 축하를 바쳤고 심상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 기쁨을 미루어 사면(赦免)의 은전(恩典)을 내린다.
아! 바닷물은 넘치고 별은 빛나니 함께 끝없는 복록을 축하하고, 나쁜 기운은 없어지고 티끌은 고요하니 더불어 태평의 아름다움을 누리는도다."
하였다. 이는 홍문 제학(弘文提學) 김상헌(金尙憲)이 지은 글이다.

 

대사간 조성립(趙誠立), 사간 조정호(趙廷虎) 등이 아뢰기를,
"대신(大臣)이 이명준의 소장에 대하여 회계하면서 말하기를 ‘대간에서 바로잡는데 대해 한마디도 없었다.’ 했습니다. 신들이 이미 단서를 발론해 놓고 오래도록 바로잡는 실상이 없었으니 지지부진하게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를 면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만, 성상의 비답을 보기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황공스럽고 놀라움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궐내에 과연 이런 일이 없었다면 억지로 정하려한 죄는 실로 신들에게서 시작된 것이 됩니다. 신하로서 이런 죄를 지고는 일각도 그대로 무릎쓰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헌납 이경증(李景曾)은 아뢰기를,
"신은 외람되이 언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아무 말없이 구차스럽게 보전함으로써 재신과 옥당으로 하여금 진달하여 논열하게 만들어 놓고는 입을 다물고 방관한 채 아직껏 입술을 열지 않고 있었으니, 묘당의 엄한 배척과 물의의 비난을 신 또한 면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파척(罷斥)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당발(唐撥)087)  을 호차(胡差)에게 잡아준 자에 대해서는 단지 추고할 것만을 청하면서 시녀(侍女)를 나오게 한 사람은 기필코 주멸(誅滅)하려 하니, 묘당이 어쩌면 그렇게도 대의에는 약하면서 이 일에는 강한가. 이를 미루어 살펴보면 역시 경중을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의 처신이 환자(宦者)와 비슷한데도 오히려 신료들에게 용납받지 못하니 진실로 우습다."
하였다.

 

7월 13일 경인

헌부도 대신의 회계를 이유로 인피하니, 답하기를,
"언근(言根)을 조사해 내어 시녀를 나오게 한 사람을 잡아 대신의 정률(定律)에 의거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옥당이 차자를 올려 처치하기를,
"언관의 책임을 맡은 사람은 진실로 임금의 잘못된 일을 듣게 되면 숨김없이 말하는 것이 직분입니다만, 상세한 것을 알지 못한 경우에는 감히 극력 간쟁하지 못하는 것도 한 가지 도리인 것입니다. 만약 이미 들은 것이 있는데도 전연 묵묵히 있다면 적절하게 해야 하는 언관의 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대사간 조성립, 사간 조정호, 정언 남선(南銑)·정윤(鄭沇)은 출사하게 하고, 헌납 이경증, 장령 유수증(兪守曾)·권심(權淰), 지평 이행건(李行健)은 체차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경증은 체차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내가 부덕한 몸으로 외람되이 큰 통서(統緖)를 이어받아 상하로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송구스런 마음으로 다른 일에는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어제 비국의 회계에서 빈어(嬪御)에 대한 한 가지 일 때문에 고례를 인용하여 말했었는데, 전일에 이에 대해 겨를이 없었던 것은 실로 나의 불찰이었다. 대저 마음이 고혹되면 정사에 해를 끼치게 되는 것은 천인(賤人)의 경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고금의 증거를 인용한 것이 반드시 공평한 마음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군정(群情)은 막기가 어렵고 중노(衆怒)는 두려운 것이니, 해조로 하여금 참작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제왕의 빈어는 예법에 정해진 제도가 있는 것인데 전하께서는 임어하신 지 8년 동안 한번도 선발하여 두지 않으셨으니, 시국이 몹시 어수선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두 명의 시녀를 앞에 두고 부린다고 하더라도 어찌 부정한 길이 열릴까 두렵겠으며 물욕(物慾)에 가리워지는 일이 있겠습니까. 과거 혼조 때 권간(權奸)과 척리(戚里)들이 각기 문호(門戶)를 세우고, 다투어 여색을 구하여 부정한 길을 통하여 진헌하는 것으로 권세를 유지하고 총애를 공고하게 하는 계교로 삼았었습니다. 그리하여 임금을 고혹시키고 국가를 좀먹게 하여 결국은 망하고야 말았습니다. 오늘날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이를 목격했고 가슴이 떨려 은감(殷鑑)의 경계로 마음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일단 앞서 말한 바와 같은 일이 있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시종(侍從)은 선한 일은 진달하고 간사한 일은 막는 자리이고, 대신은 임금을 인도하여 도(道)로 나아가게 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서로 잇따라 진언하여 성색(聲色)에 의한 해를 걱정하기도 하고 중간에서 진헌하게 한 자를 죄주라고 청하기도 한 것입니다. 이는 복철(覆轍)을 밝을까 걱정하고 명주(明主)의 일을 근심하여 우리 임금을 더욱 성스러운 지경으로 올려놓기 위한 것에 불과합니다. 옛말에 이른바 단주(丹朱) 같은 오만함이 없어야 한다088)  고 한 것이 어찌 순(舜)에게 단주 같은 행실이 있어서 그랬겠습니까. 신하가 환난을 걱정하고 은미할 적에 방지하는 도리가 예로부터 이러했습니다. 임금은 성스럽고 신하는 정직하니, 마땅히 오늘날 경하할 일입니다. 일호(一毫)라도 그와 흡사한 폐단이 있으면 실로 성덕(聖德)에 하자가 될 것이니, 조정 신하들이 극력 간쟁해야 되는 것이 어찌 간예(干預)에 그칠 뿐이겠으며 묘당에서 죄주기를 청하는 것이 또한 어찌 일을 그르치는 강신(强臣)들만 못할 수 있겠습니까.
전후의 성비(聖批)에 입술을 놀린다느니 분노라느니 하는 등등의 말이 있었는데, 이는 너무도 대각과 대신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었습니다. 간흉이 말을 만들었다고 한 분부에 이르러서는 전하께서 스스로 돌이켜 보아 부끄러움이 없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이처럼 과격한 분부를 내려 사람들에게 너그럽지 못함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묘당의 진계(陳戒)도 오히려 너그럽게 용납하지 못하신다면 말단의 반열에 있는 소신은 어떻게 감히 전하를 위하여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언근을 조사해 내라는 명은 언로에 큰 해로움이 있으니, 신들이 감히 봉행하여 유사(有司)에게 선포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빈어에 대한 한 가지 일은 조용히 선발하여 들이는 것이 진실로 사체(事體)에 합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진언하는 사람의 마음은 헤아려주지 않은 채 갑자기 참작하여 거행하라는 분부를 내리면서 군정(群情)이니 중노(衆怒)니 하는 등의 말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실로 화평한 마음에서 발로된 것이 아닌 것으로 이른바 천지가 한없이 크지만 사람은 그래도 유감을 품는다는 것과 같은 격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다음날 또 아뢰기를,
"대신의 계사를 인하여 속히 언근을 조사해 내라는 분부가 있었는데 이는 사체에 손상이 있을 뿐만이 아닙니다. 임금의 말이 일단 전파되면 보고 듣는 이가 모두 놀랄 것이므로 신들은 감히 봉행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어제 장황하게 진계하고 지금 또 이렇게 반대하니 그 의도가 범연한 것이 아니다. 중간에서 진헌하게 한 죄는 중죄이고 주멸(誅滅)은 극형인데, 언근을 찾아보지도 않고 갑자기 살육을 가하면 어찌 사리에 맞는 일이겠는가. 경들이 중간에서 소개한 사람을 안다면 이 승전을 받들 필요없이 바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오윤겸(吳允謙), 좌의정 김류(金瑬), 우의정 이정구(李廷龜)가 아뢰기를,
"신들은 삼가 비국에 내리신 비답(批答)을 보고 다 읽기도 전에 저도 모르게 놀라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신들이 얼핏 여염의 여자가 대내(大內)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기는 했습니다만 상세한 내용은 알지 못했는데, 이명준(李命俊)의 소장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감히 회계에 대략 소회를 진달한 것이니, 어찌 다른 마음을 품었겠습니까.
성상께서는 그런 일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평상심을 지니고 살펴 겸허한 자세로 받아들이도록 힘쓰는 것이 실로 성인(聖人)의 널리 포용하는 큰 도량입니다. 그런데 이제 억지로 정하여 죄를 만들었다느니 분노라느니 하는 등등의 말을 가지고 지나치게 꺾어 누르니, 신하로서 이런 죄명을 지고 어찌 천지 사이에 스스로 설 수 있겠습니까. 용렬한 신들은 돌아볼 것도 없습니다만, 삼가 말하는 사이에 화내는 마음이 있어 올바름을 얻지 못하게 되면 성덕에 큰 손상이 있게 될까 걱정스럽습니다. 이는 모두 신들의 성의가 부족한 탓으로 말이 믿음을 받지 못한 소치이니 황공스러움을 견딜 수 없어 대죄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실로 잘못하였다. 경들은 안심하도록 하라."
하였다.

 

부제학 이하가 또한 차자를 올려 대죄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연평 부원군 이귀가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병으로 누워 있는 중에 이명준의 소장에 있는 궁금(宮禁)을 엄히 해야 한다는 한 조항을 보았는데, 부정한 길이 한번 열리게 되면 이는 망국(亡國)의 조짐이라고 했습니다. 신이 스스로 입속으로 되뇌이기를 ‘이런 일이 있었구나! 이런 말은 우리 성명께서 계시는 때가 아니면 감히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미 이런 말을 하였어도 또한 우리 성명이 아니시면 반드시 간언을 물흐르듯이 따르는 아름다움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했습니다. 계속해서 비국의 회계 내용을 들어보니 근일에 들어보지 못했던 직언이었으므로, 신은 또 ‘성명이 아니면 이런 말을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바야흐로 전하를 위하여 축하하고 대신을 위하여 축하하려 했는데, 이제 엄준한 성비(聖批)를 보건대 이는 천만 뜻밖에서 나온 것이니 신은 실로 안타깝습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전하의 궁중에 이런 일이 없었다면 이는 말하는 사람이 망령된 것이니 전하께서 노할 것이 뭐 있겠으며, 진실로 이런 일이 있다면 말하는 자가 혹 중도에 지나치게 했더라도 전하께서는 너그러이 용납하여 따르면 될 뿐인데 어찌하여 불평해 하는 분부를 내려 대신과 대간을 이토록 심하게 꺾어 누르실 수 있겠는가고 여겼습니다. 신은 기우(杞憂)를 견딜 수가 없어 망령되이 저의 어리석은 소견을 진달하니,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조금 벽력같은 위엄을 거두시어 대신과 대간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가 깊이 미워하는 것은 회계한 것이 이 일을 인하여 무고한 사람을 해치려고 했기 때문이다. 소장에서 조목별로 논열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모두 회계하지 않은 채 단지 이 일만을 거론하였으니, 이것이 진실로 무슨 마음이란 말인가. 이는 틀림없이 흉인(凶人)의 술수에 빠진 것일 것이다. 나의 소견은 이와 같은 데 불과하니 경은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하였다.

 

이조 판서 정경세가 재랑(齋郞)089)  을 잘못 의망한 것을 이유로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상이 소대(召對)하여 《서전(書傳)》을 강하였다. 연신(筵臣)이 대신과 대간이 궁녀를 논한 일에 대해 언급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전 판관(判官) 안사열(安士說)이 소장을 올리기를,
"신은 듣건대 옛날에는 총분(冢墳)을 수장(壽藏)이라고 했는데 이는 오래간다는 뜻을 취한 것이라고 합니다. 상세(上世)에는 제왕을 장사지낼 적에 자리를 가렸다는 말을 못 들었고, 공성(孔聖)께서 부모를 합장(合葬)할 적에도 자리를 가려서 천개(遷改)했다는 글이 없습니다. 무릇 장사지내는 사람은 지역이 높고 건조하고 경작하지 않는 곳을 가리는 것을 최상으로 여겼는데, 자리를 가리는 것은 말세의 옳지 못한 의논인 것입니다. 그것이 자손에게 길흉을 끼치게 한다는 것에 이르러서는 또한 너무도 무리한 말인 것입니다. 설사 그런 이치가 혹 있다고 하더라도 그 술법(術法)이 모호하여 세상에는 여기에 밝은 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땅속에 물이 있는 것은 그 또한 분명히 알기 어려운 것인데, 그저 한 사람의 견해만 믿고 경솔하게 선왕(先王)께서 백년 동안 잠들었던 안택(安宅)을 차마 옮길 수 있겠습니까.
신이 근래 살펴보건대 사대부들의 집안에서 천장하고 난 뒤에 이롭지 못한 경우가 속속 있었습니다. 신은 이 때문에 더욱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신이 사마광(司馬光)의 장론(葬論)을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 ‘나의 형은 나이 79세에 경재(卿宰)의 반열로 치사(致仕)했고 나는 나이 66세로 외람되이 시종(侍從)에 몸담고 있으며 종족(宗族) 가운데 벼슬에 종사하는 사람이 23인이나 되니, 삼가 장서(葬書)를 이용하여 장사지낸 사람들과 견주어 볼 때 그들이 우리 집안보다 반드시 나은 것은 아니다. 지난해에 나의 처가 사망했으므로 관을 만들고 염을 해서 제구를 준비하여 가지고 가서 광중(壙中)을 파고 장사지냈는데, 음양가(陰陽家)에게 한마디도 물어 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까지 별다른 일이 없다. 내가 일찍이 음양가들이 사설(邪說)을 만들어 사람들을 미혹시킴으로써 세상에 걱정거리가 되는 것을 증오했으므로 지난번 대관(臺官)이 되었을 적에 천하의 장서(葬書)를 금지시키도록 주청했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장서가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알려면 우리 집안을 보라.’ 했습니다.
그리고 송유(宋儒)인 정이(程頤)의 장설(葬說)에는 ‘택조(宅兆)를 가리는 것은 그 땅이 좋은지 나쁜지를 가리는 것이지 음양가의 이른바 화복(禍福)을 가리는 것은 아니다. 좋은 땅은 흙빛이 윤택하고 초목이 무성한 곳이다.’ 했으며, 땅의 방위(方位)를 가리고 날짜의 길흉(吉凶)을 결정하는 것은 매우 잘못이라 했고, 장혈(葬穴)에 있어서는 ‘제일 높은 사람이 가운데 위치하고 왼쪽은 소(昭)이고 오른쪽은 목(穆)으로 후손은 동쪽이나 서쪽에 위치한다.’ 했으니, 산의 형세를 가리는 데 자손을 위해서 하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양정수(楊廷秀)가 이 시강(李侍講)에게 준 서한에는 ‘경순(景純)090)  의 장서는 동한(東漢) 이전에는 없던 것이다.’고 했습니다.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요(堯)·순(舜)·우(禹)·탕(湯)·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공자(孔子)의 부조(父祖)를 어떠한 곳에 장사지냈기에 이런 성현을 탄생하였고 귀(貴)와 수(壽)를 누릴 수 있었습니까. 신이 삼가 《송사(宋史)》를 살펴보건대, 효종(孝宗)의 산릉(山陵)에 토육(土肉)이 천박하고 밑에 물과 돌이 있다 하여 성지를 내려 회의하게 하였는데, 그때 유신(儒臣) 주희(朱熹)가 의장(議狀)을 올리기를 ‘황성(皇聖)의 의관(衣冠)을 수장(壽藏)하는 곳은 마땅히 명산(名山)에서 널리 구해야 하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대사(臺史)091)  만 믿고서 물·돌·자갈 속에 버려두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하였으니, 옛날에 대사의 말을 믿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선왕(先王)의 의관을 수장한 것이 바로 6월이었는데, 그때는 우수(雨水)가 잇따랐을 뿐만 아니라 용이(龍轜)가 출발할 적에는 비가 들어 붓듯이 쏟아졌었으니, 만에 하나 수기(水氣)가 있었다면 배시(陪侍)했던 대소 신민들이 당연히 보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상신(相臣) 이원익(李元翼)·심희수(沈喜壽)·이항복(李恒福)은 어진 정승으로 일컬어졌고 지금의 상신인 이정구(李廷龜)와 김상용(金尙容)도 명신(名臣)인데 이들이 보고서도 말하지 않았다면 그 죄가 똑같습니다. 장마가 질 때를 당해서도 이미 수기가 없었다면 지금에 와서 어디서 물이 나오겠습니까. 상신과 중신이 한 사람도 말한 이가 없었는데 유독 심명세(沈命世)만이 오늘날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길흉을 가지고 논한다면 폐조의 패륜과 실덕으로도 국가가 멸망하지 않았고 전하께서 인륜을 밝히고 사직을 안정시키는 거사가 있게 되었으니, 먼저의 능(陵)이 길하다는 것은 이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나라를 위하는 그대의 정성이 가상하다. 마땅히 유념하여 채택해서 시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7월 14일 신묘

양사(兩司)가 직에 나왔다가 다시 피혐하니 옥당이 처치하기를,
"언책이 있는 신하는 들은 것이 있으면 일에 따라 다 말하는 것이 직분이요, 시종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 것은 속이지 말라고 한 교훈에 어긋나는 처사입니다. 이미 체직시키라는 논핵을 받았으니 감히 억지로 얼굴을 들고 반열에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사세상 당연한 것이고, 처치에 대해 혐의하여 인책(引責)하면서 다시 피혐하는 것은 진실로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헌납 이경증(李景曾) 등은 체차시키고 대사간 조성립(趙誠立) 등은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홍무(洪武)092)   23년에 부험(符驗)을 주청하여 얻은 원수(元數)가 7부(部)인데 그 가운데 유간(柳澗)·박이서(朴彛叙)·윤안국(尹安國)의 사행(使行) 때 이미 3부를 잃어버려 4부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1부는 이흘(李忔)이 가지고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1부는 정두원(鄭斗源)이, 1부는 고용후(高用厚)가 이제 가지고 가야 하니, 지금 남은 것은 1부뿐입니다. 앞으로 다시 사행이 있게 되면 일이 매우 곤란하니 의당 3부를 보사(補賜)해달라는 내용으로 부경(赴京)하는 사행에게 주본(奏本)을 갖추어 보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15일 임진

대사간 조성립 등이 또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대신이 이명준의 소장을 인하여 부정한 길을 통렬히 끊으라는 말이 있었습니다만, 결단코 그 사이에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언근을 알아 내어 대신의 말과 대간의 말을 증험하려 하시고 계십니다. 조금만 임금의 뜻에 거스르면 그때마다 언근을 찾아내어 증빙자료로 삼으려 한다면 벽력 같은 위엄 아래 누가 감히 말을 하려 하겠습니까. 말 한 마디가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전하께서 기필코 진헌을 중개한 사람을 죄주려 한다면, 그 일이 궁중에 관계된 것이니 외정(外廷)의 신하가 어떻게 적발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그런 사람이 있다면 궁중 사람들이 반드시 그 이름을 알 것이고 과연 그런 일이 없다면 누차 엄지(嚴旨)를 내려 매우 급하게 찾아낼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일찍 이런 줄 알았다면 이런 말을 해서 전하에게 걱정을 끼칠 필요가 뭐 있었겠습니까. 전하께서 기필코 언근을 알아내려 한다면 신들이 제일 먼저 이 의논을 내었으니 언근은 실로 신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신들을 파직시켜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현재 원로 대신들은 충후하게 임금을 공경하는 마음이 없고 연소(年少)한 자들은 경사(傾邪)하게 상대를 해치려는 뜻만 있으니 이것이 매우 우려스럽다. 그대들이 내간(內間)에서 끌어들였다고 하므로 이제 궁중에 하문하려 하고 있는데 지난번 이른바 내간이라고 한 것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가? 곧바로 그 사람을 지척(指斥)한다면 마땅히 즉시 하문하여 간흉의 마음을 통쾌하게 하겠다. 오늘날의 정상(情狀)은 내가 이미 깨닫고 있으니 그대들은 기만을 일삼지 말라. 우려한다[憂]는 한 글자는 실로 우롱하는 감이 있으니 진실로 한심스럽다."
하였다. 옥당이 처치하기를,
"모두 출사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경증(李景曾)을 교리로, 신천익(愼天翊)·심연(沈演)을 지평으로, 김광현(金光炫)을 응교로, 심동구(沈東龜)를 헌납으로, 유성증(兪省曾)·고부천(高傅川)을 장령으로, 권확(權鑊)을 승지로 삼았다.

 

7월 16일 계사

대사간 조성립(趙誠立), 사간 조정호(趙廷虎), 정언 남선(南銑)·정윤(鄭沇) 등이 출사하라는 명을 받고 궐문 밖에 이르렀다가 기만한다느니 우롱한다느니 하는 전교가 있었기 때문에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다. 정원이 이를 계품하니 상이 들어오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다시 인피하며 아뢰기를,
"당초 차자에서 내간(內間)이라고 한 것은 궐내를 통틀어 내간이라고 하기 때문에 궐내로 들어온 여염의 여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요, 외간 사람으로서 그들을 끌어들인 자를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비(聖批)에 이른바 내간이 누구냐는 분부가 계셨었는데 이는 실로 천만 뜻밖의 말이어서 신들은 대답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기만이니 우롱이니 하는 말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신하로서는 극악한 대죄이므로 일각도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옥당이 번독스럽다는 이유로 체차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는 고사(故事)에 대간이 세 번 피혐했을 경우에는 번독스럽다는 이유로 하여 체차시켰는데, 조성립(趙誠立) 등이 네 번이나 인피했기 때문이다.

 

박동선(朴東善)을 대사헌으로, 김광현(金光炫)을 사간으로 삼고, 이명준(李命俊)을 대사간으로 특배(特拜)하였다.

 

승지 민기(閔機)가 아뢰기를,
"지난번 천릉(遷陵)할 적에 자전(慈殿)의 복색(服色)을 강정(講定)하라는 분부가 있었으므로 해조에 문의하였더니, 해조에서 ‘예경(禮經)에는 「개장(改葬)할 때는 시마(緦麻)를 입는다.」고 되어 있고, 또 상복조(喪服條)에는 「매우 가는 숙포(熟布)를 써서 만드는데 그 제도는 참최복(斬衰服)과 같고 부판(負版)과 벽령(辟領)을 제거할 뿐이다.」했는데 이는 남복(男服)이다. 《오례의(五禮儀)》의 복제조(服制條)에는 「왕비(王妃)는 참최 삼년복을 입는데 대수(大袖)·장군(長裙)·개두(盖頭)·두수(頭𢄼)·죽차(竹釵)·포대(布帶)·포리(布履)를 한다.」고 되어 있고 그 주(註)에는 「두수는 본국(本國)의 수파(首帊)로 대신한다.」고 되어 있는데 수파는 지금 천한 자들의 옷이니 여모(女帽)로 대신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대수·장군 등의 옷은 매우 가는 숙포(熟布)를 써서 만들어 올리게 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졸곡(卒哭) 뒤 조항의 주(註)에는 「내상(內喪)이 먼저 있을 경우, 전하의 복이 끝나기 전에 내명부(內命婦)의 빈(嬪) 이하가 궐내에서 진현(進見)할 때에는 백색 의상(衣裳)에 흑색 띠를 하고 상궁(尙宮) 이하는 백색 포배자(布褙子)를 한다.」고 했고, 또 「내상(內喪)이 먼저 있을 경우, 시위(侍衛)하는 궁인은 성복(成服)한 뒤 백색 배자에 흑색 띠를 한다.」고 했으니, 상궁 이하는 빈(嬪)·귀인(貴人)과 등차(等差)가 있는 것이 분명하여 복제가 같지 않은 것 같다. 전하가 성복(成服)한 뒤 조정에서 시사(視事)할 적에 익선관(翼善冠)·오서대(烏犀帶)·백포(白袍)로 할 경우, 자전(慈殿)은 평상시에는 두수(頭𢄼)에 백색 띠를 해야 하고, 전하와 왕세자가 문안이나 진알(進謁)할 적에는 외전(外殿)에서 시사(視事)하는 복색에 의거하여 두수와 띠는 모두 흑색을 쓰고 의상(衣裳)은 백색을 쓴다. 왕비·빈 이하의 복색도 같다. 상궁 이하는 궐내에 있기 때문에 진현하지 않더라도 두수와 띠는 모두 흑색을 쓰는 것이 온당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시복(緦服)에 의상을 백색으로 하는 것은 지나친 것 같다. 자전의 어의는 옥색(玉色)으로 하되 두수는 흑색을 쓰라. 궁인들이 입는 것은 모두 위의 복색을 따르는 것이 의당할 것도 같다. 문안할 때에 이르러서는 이는 가인(家人)의 예(禮)인데 어찌 조모(祖母)가 손자를 보면서 옷을 바꾸어 입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의 이 강정(講定)은 미진한 것 같으니 다시 의논하여 결정하라."
하였다.

 

7월 17일 갑오

상이 흑포(黑袍)에 면류(冕旒)를 쓰고 궐정(闕庭)에서 진위표(陳慰表)를 배송(拜送)하였다.

 

간원이 【 헌납 심동구(沈東龜).】 아뢰기를,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제왕가(帝王家)의 일은 그 분의가 지극히 엄하고도 바른 것이어서 진실로 예(禮)로 간선(揀選)하지 않을 경우 사사(私邪)가 뒤섞여 나오는 것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말류의 폐해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 이르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번에 이 여인들이 궁중에 들어올 적에 어떤 경로를 통하여 들여졌는지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자취를 감추고 은밀히 중간에서 알선한 것이요 정당한 방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그들의 가장(家長)이 어떻게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부사과(副司果) 김두남(金斗南)은 분의에 의거하여 사양할 것을 생각하지 않았으니 엿보려는 마음이 현저히 드러났습니다. 그 정상을 따져보면 매우 음흉하니 사판에서 삭제시키소서."
하니, 상이 파직만 시키라고 명하였다.

 

헌부가 【 장령 유성증(兪省曾) 등이다.】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청명함을 스스로 책려하여 성색을 가까이하지 않으시니 이는 신료들이 흠앙하는 바이고 중외가 환히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자를 선발하여 궁중으로 들여왔다는 이야기가 하루아침에 전파되었습니다. 부정한 길이 한번 열리면 후환을 보장하기 어려우니, 은미할 때 방지하는 계책을 당연히 급히 서둘러야 합니다. 따라서 대신과 대간의 말에는 단연코 다른 뜻이 없는데도 전하께서는 너그러이 포용하여 가납(嘉納)하지도 못하고 도리어 언근을 조사해 내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신들은 차라리 부월 아래에서 죽을지언정 감히 그 명을 봉행하여 전하의 허물을 중첩시킬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금 이 계사는 모두 나의 본뜻을 모른 것이다. 진실로 알 수 없다면 이는 불민(不敏)한 것이고 앞으로 덮어두려고 한다면 이는 참으로 곧지 못한 것이다. 사퇴하지 말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근래 대간이 유고(有故)했었기 때문에 이제야 비로소 조사해 내라는 명을 전했는데, 대간이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간은 매우 신하로서의 예(禮)가 없다. 너무도 놀랍다."
하였다.

 

이조 판서 정경세가 차자를 올리기를,
"근래 궁녀에 대한 한 가지 일 때문에 온 나라가 황황하여 위로 대신에서부터 아래로 삼사(三司)·정원에 이르기까지 모두 좌불안석입니다. 이 일은 하찮은 것이어서 본디 성청(聖聽)을 번거롭힐 것도 없는 것이었는데 전후 성교(聖敎)가 갈수록 준엄하여 신하로서는 차마 듣지 못할 내용이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아래에서의 잘못이 없지 않습니다만 전하의 대응도 이와 같이 너무 엄준하게 하는 것은 부당한 것 같습니다.
이명준(李命俊)의 소장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충정에서 나온 것으로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운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제 간장(諫長)에 제배된 것은 실로 특명에서 비롯되었으니, 전하께서 이명준의 말을 귀에 거슬리게 듣지 않았음을 신은 이것으로 더욱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비국의 회계 내용이 완곡하지 않고 지나치게 직설적이어서 전하의 노여움을 격발시켰으니, 이른바 아래에서의 잘못이 없지 않다는 것은 이를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따져보면 또한 평일 임금이 요·순처럼 되기 바라는 마음에 갑자기 이런 말을 듣게 되니 놀랍고 걱정스러운 생각이 가슴속에 축적되어 밖으로 발현되면서 말이 과중하게 된 것을 깨닫지 못한 탓이었습니다. 어찌 일호인들 공경하지 않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이른바 임금을 만류하는 사람은 임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에 가까우니, 선한 일을 진달하고 간사한 일을 막는 것이 곧 진심으로 임금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노기(怒氣)를 발한 것이 중도에 맞지 않아 괴려(乖戾)되어 화기(和氣)를 잃는 경우가 없지 않았습니다. 근일의 노여움에 이르러서는 또 발한 것이 절도에 맞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사기(辭氣)가 엄해 곤두선 머리칼이 관(冠)을 뚫고 나올 것 같은 안색이 있었습니다. 하천(下賤)에게도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거늘 더구나 삼사(三司)와 대신에게 이겠습니까. 장사숙(張思叔)은 진사(進士)인데 그가 복부(僕夫)를 꾸짖자 정 선생(程先生)이 나무라기를 ‘어찌 하여 조심해서 참지 않는가.’ 하였는데, 이제 천승(千乘)의 임금으로서 대신과 수응(酬應)함에 있어 이런 목소리와 얼굴빛을 지녀서야 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치를 살피고 사물에 응할 즈음에는 겸허한 마음을 가지시고 억제하기는 어렵고 발하기는 쉬운 것에 대해 공력을 기울이시어 분노하는 기운을 구름이 없어지듯 안개가 걷히듯 하게 하소서. 그러면 지난번의 일을 돌이켜 생각할 적에 반드시 견딜 수 없는 뉘우침이 있게 될 것입니다. 속히 사핵(査覈)하라는 명을 정지시키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이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가상하게 여긴다. 사핵하는 일은 힘써 경의 뜻에 부합되게 하겠다."
하였다.

 

대제학 정경세(鄭經世)가 선조 대왕(宣祖大王)의 천릉(遷陵) 때 쓸 지문(誌文)을 지어 올렸다. 상이 하교하기를,
"지문에 누락된 말이 있다. 10년을 하루같이 조석으로 문안하는 예(禮)를 하였고 병환이 있으면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였으며, 상사(喪事)를 당해서는 슬퍼함이 지나쳐 몸이 손상되었고, 글을 볼 적에는 열 줄을 한꺼번에 읽어내렸고 한 번 보면 모두 기억하였다고 한 것은 덕행 가운데 세세한 일이기는 하지만 전문(前文)에 이미 기재되어 있으니 지금 삭제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나와 중궁을 모두 전하 혹은 주상이라고 일컬은 것은 온당치 않은 것 같으니, 왕(王)과 비(妃)로 칭하도록 하라."
하니, 대제학이 회계하기를,
"주상전하와 중궁전하라는 호칭은 본디 더 높이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기재된 조종조(祖宗朝)의 비지(碑誌)에도 모두 썼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쓰는 것이 미안할 게 없을 것 같습니다만, 성교(聖敎)가 이러하니 우선 전하라는 두 글자는 부표(付標)하여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왕이라 칭하고 비라고만 칭한다면 사리에 있어 미안할 뿐만이 아니라 말 또한 단촉(短促)하여 상문(上文)의 허다한 왕(王)자·비(妃)자와 서로 혼동되니, 부득이 전대로 두고 고치지 않아야겠습니다.
천문(天文)이 응한 바이고 중흥(中興)의 업(業)을 이루었다고 한 두 글귀의 경우에는 당초 지나치게 찬미한 뜻이 아닙니다. 참으로 선왕(先王)에게 질정하여 보아도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성심(聖心)이 겸손하시어 스스로 자처하지 않으시고 부표하여 써서 내리시어 삭제하라고 명하였으니, 진실로 준봉해야 마땅하겠습니다. 그러나 발란 반정(撥亂反正)했다는 아래에서 중흥의 업을 세웠다.[建中興之業]는 다섯 글자를 끊어내어 버린다면 문세(文勢)를 이룰 수가 없으며, 이 다섯 글자는 감당하지 못할 말이 더욱 아니니, 역시 다 성교(聖敎)를 따를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7월 18일 을미

대사간 이명준이 아뢰기를,
"삼가 생각건대,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물러가서는 허물을 도울 것을 생각하며, 아름다움을 받들어 따르고 나쁜 것은 바루어 구제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이 처음 항간에 떠들썩하게 전하는 말을 듣고 감히 혈성(血誠)을 다하여 소장을 올렸던 것인데 전하께서 신의 말을 들어 주시고 또 신을 발탁하여 주었으니, 간언을 따르는 아름다움과 말을 들어주는 도리가 백왕(百王)들보다 우뚝이 뛰어났습니다. 신 한 사람만이 은혜에 감격할 뿐 아니라 조정에 있는 신료 그 누군들 우러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비국의 회계에 대해 누차 엄한 전지를 내려 언근을 규명해 내라는 분부가 있기까지 했으므로 대신과 대각이 모두 두려운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신의 한마디에 연유되어 점차 확대되어 여기에 이르게 된 것이니, 신 또한 무슨 마음으로 혼자서만 은혜로운 포장(褒奬)을 받으면서 중한 지위에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또 외관(外官)으로 있다가 체직되어 온 경우에는 해유(解由)가 도착하기 전에 조천(調遷)시킬 수 없는 것이 전례여서 사세상 그대로 무릅쓰고 있기가 어려우니 체척시켜 주소서."
하고, 지평 신천익(愼天翊)이 사적인 일로 반일정(半日程)이나 출타한 데 대한 죄를 이유로 인책하면서 피혐하였다. 헌납 심동구(沈東龜)가 양사를 처치하기를,
"차라리 부월 아래에서 죽을지언정 봉행하여 일을 할 수 없다고 한 것에서 간관의 풍채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루 늦은 사은은 규피(規避)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감히 봉행할 수 없다는 것도 다른 뜻이 없습니다. 임금을 섬김에 있어 충성을 다하는 정성으로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소장을 진달하여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켰기 때문에 특별히 총탁(寵擢)된 것이니, 혼자서 은혜로운 포장을 받은 것이 무슨 혐의스러울 것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해유가 도착하기 전에 조천(調遷)할 수 없다는 것은 해조에서 주의할 때의 상례로 특배하는 은전에는 논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장관에게 고하지 않고 사적으로 축타한 것은 법례를 어긴 것입니다. 장령 유성증(兪省曾) 등과 대사간 이명준은 출사하게 하고 지평 신천익은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삼공(三公)이 차자를 올리기를,
"지난번 이명준의 소장에서 이른바 내수(內修)와 외양(外攘)에 대한 조목이 많기는 하였지만 모두가 이미 전후에 진달했던 것이었습니다. 두루 거론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큰 것은 성상께서 유념하기를 청했고 작은 것은 해사로 하여금 봉행하게 했던 것입니다. 당초 회계에서 다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또한 어찌 감히 취사(取捨)할 마음을 품었겠습니까.
궁금(宮禁)의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기왕의 일에 징계되어 삼간 지 오래였으므로 이명준의 소장을 보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라 말을 만드는 즈음에 지나치게 됨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는 신들이 살피지 못한 소치입니다. 이것으로 죄를 준다면 신들은 진실로 변명하지 않겠습니다만, 무고한 사람을 해치려 했다고 한다면 이는 실로 신들의 생각했던 바가 아니었습니다. 간인(奸人)의 술수에 빠졌다는 분부에 이르러서는 신들이 반복하여 깊이 생각해 보아도 끝내 성의(聖意)가 지적하는 것을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상께서 명백하게 교지(敎旨)를 내려 밝히신다면 변백(辨白)할 여지가 있겠습니다.
신들이 전하를 섬겨 온 지가 모두 몇 년입니까. 그런데 흰머리로 죽음이 가까운 나이에 도리어 사실 아닌 질책을 받고 있는데 오늘 엄지(嚴旨)가 내리고 내일은 준비(峻批)가 내려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가중되고 있습니다. 신들은 비록 만번 주륙을 당하더라도 진실로 사양하지 않겠습니다만 이런 상태 그대로 어떻게 정승의 자리에 웅거하고 있으면서 불충(不忠)과 불경(不敬)의 죄를 가중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허물은 과인에게 있으니, 경들에게야 무슨 손상될 것이 있겠는가. 의당 글을 올리지 말아서 나의 마음을 편케 하도록 하라."
하였다.

 

헌납 심동구(沈東龜)가 속히 조사하여 내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어제 정경세의 차자를 인하여 이미 정지했으니 번거롭게 논할 필요가 없다."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최유해(崔有海)가 나아와 아뢰기를,
"신이 등주(登州)에 갔을 적에 송 호부(宋戶部)가 신에게 ‘그대가 지금 원 경략(袁經略)에게 보내는 문서(文書)를 가지고 왔는데 경략이 죄를 받았으니 마땅히 손 각부(孫閣部)를 가서 만나야 한다. 그런데 문서에 다른 점이 있으니 그대가 간 뒤에 또한 손 각부를 가서 만난 사람이 있는가?’ 하므로, 신이 ‘소방(小邦)의 체면에는 반드시 상국(上國) 사람이 먼저 자문(咨文)을 보낸 뒤에야 감히 회자(回咨)할 뿐이요 먼저 보내지는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이번에 손 각부가 이미 유자(諭咨)를 보냈으니 중국 조정의 사람들이 반드시 전례를 살필 것입니다. 그러니 원 경략에게는 사신이 자문을 가지고 가고, 손 각부에게는 역관(譯官)을 시켜 자문을 가지고 가게 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견이 없지 않다. 비국에 이르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원숭환(袁崇煥)이 수감된 데 대해 물정이 어떠하던가?"
하니, 최유해가 아뢰기를,
"중국 조정은 붕당의 폐단이 고질이 되어 있습니다. 한광(韓壙)이란 자는 원숭환과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추천하여 기용되었는데, 전상곤(錢象坤)이란 자가 시독(侍讀)으로 있다가 입각(入閣)하여 환관(宦官)들과 체결한 다음 원숭환이 오랑캐와 통하였다고 참소했기 때문에 원수(袁帥)가 수감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원숭환은 뇌물을 받고 이욕을 탐하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죽을 힘을 다해 싸운다고 합니다."
하였다. 그 뒤 이귀가 아뢰기를,
"손 각부의 군전(軍前)에 역관을 파견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니 따로 사신을 보내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불가하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19일 병신

삼공이 모두 병을 핑계대고 사면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나의 언사(言辭)가 중도에 맞지 않은 탓으로 대신들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불안스럽게 여기고 있으니, 잘못된 것을 생각함에 그지없이 후회스럽다. 현재 변방의 소란이 매우 위태로우니 대신은 하루도 병을 핑계대어서는 안 된다. 모쪼록 국사를 생각할 것이요 나의 분노한 말 때문에 괘념하지 말라."

 

7월 20일 정유

상이 대신들을 불러 궐하(闕下)로 나오게 하여 안심하고 행공하게 하라고 정원에 명하였다. 영의정 오윤겸, 우의정 이정구는 대궐에 나왔는데, 좌의정 김류는 병으로 사양하고 이에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망령되이 진계하였다가 스스로 불충과 불경에 빠졌으니, 신의 죄는 만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어제 근신(近臣)을 보내어 효유하였고 이제 또 명을 내려 부르니, 신이 아무리 사리에 어둡다고 하더라도 어찌 신하가 임금의 부름을 받으면 수레에 멍에를 메울 시간도 기다리지 않아야 한다는 의리를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죄를 많이 지어 명부(冥府)의 책벌이 또 이르러서 병이 위험한 지경이므로 거의 죽을 것만 같아 두 신하의 뒤를 따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스스로 엄한 주벌을 자초한 것이어서 다시 온전하기를 바랄 수가 없습니다.
전하의 노여움이 극도에 이르러 매일 엄지(嚴旨)가 내릴 때를 당해서는 중외(中外)가 두려움에 싸여 있었는데 성심(聖心)이 홀연히 깨달으시어 이명준에게는 간장(諫長)을 제수하고 김두남은 파직시키고 사핵하라는 명을 환수하였습니다. 따라서 지난번 위태롭게 여겼던 사람들이 스스로 편안해졌고 의심하였던 사람들이 절로 풀어져버려 조각 구름이 하늘을 지나니 태양의 빛은 그대로인 것처럼 되었습니다. 신은 죽더라도 그 영예로움에 참여하고 싶습니다만 풍신(楓宸)093)  을 우러러 축하하지도 못하고 또 궐하에 나아가 명을 기다릴 수가 없게 되었으니, 신의 죄가 여기에 이르러 더욱 극심하게 되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은 굳이 사퇴하지 말고 조리한 다음 행공하라."
하였다.

 

서장관(書狀官) 정지우(鄭之羽)가 경사(京師)에서 돌아왔다. 이때 염초(焰硝)·궁각(弓角)과 잡화(雜貨)를 실은 선박이 뒤따라 가도(椵島)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유흥기(劉興基)에게 구류(拘留)당하였다. 평안 병사가 그 상황을 아뢰니, 비국이 회계하기를,
"이 선박은 황제의 명에 의해 무역한 물품이 실려 있고 또 각부(閣部)에서 선박을 갖추어 보낸 것이니, 가도의 장수들이 마음대로 구류시킬 수 없습니다. 방백(方伯)과 반신(伴臣)으로 하여금 이런 내용으로 유흥기에게 효유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7월 21일 무술

대사간 이명준이 소장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2일 기해

상이 하교하였다.
"근일 내수사에 계하된 공사(公事)를 전혀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일이 매우 놀랍다. 이조의 색낭청을 추고하라."

 

7월 23일 경자

전라 감사 송상인(宋象仁)이 본도의 세안(稅案)을 조사하고 나서 소장을 올리기를,
"도내의 강진(康津)·해남(海南)·영암(靈巖)·나주(羅州) 등처는 포흠(逋欠)이 제일 많은데, 이는 모두가 전부터 수령들이 독촉해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연조(年條)가 증가될수록 물명(物名)도 번다해져 곤궁한 백성들이 일시에 수납(輸納)하기 어려운 것은 필연의 이치인 것입니다. 이러니 뒤에 온 수령들이 마음을 다해 공사를 봉행하려 하지만 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이 네 고을의 공물은 모두 갑자년094)   이후의 일이니 갑자년·을축년의 연조는 내년 3월 안으로 상납(上納)하게 하고, 그 나머지는 차차로 기한을 물려 조금이나마 민력(民力)이 펴지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서정군(西征軍)을 파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서정군이 오래도록 해상(海上)에 머물러 있으면서 유흥치(劉興治)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고 또 왕덕공(王德功)의 분명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듣건대 유흥치가 여순(旅順)에서 구류당해 있고 왕덕공은 돌아올 기약이 없는 데다가 사졸들이 지쳐 병든 것이 이미 극도에 이르렀고 앞으로 군량을 계속 댈 수도 없으니, 속히 군사를 파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이제 장차 군사를 파하게 되었으니 마땅히 한 사람의 장수를 파견하여 가도(椵島)로 보내어 효유하기를 ‘유흥치(劉興治)가 진계성(陳繼盛) 등을 살해하자 제장(諸將)들이 모두들 말하기를 「장차 천조(天朝)를 배반하고 가서 등주(登州)를 침범하겠다.」고 하였고, 또 와언(訛言)이 흉흉하여 군사를 숨겨 가지고 와서 동쪽을 노략질하려 한다는 말이 있었다. 이 때문에 문죄(問罪)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켜 변란에 대비하는 거사가 실제로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사신이 돌아옴에 따라 손 각부(孫閣部)의 자문(咨文)과 유첩(諭帖)을 받게 되었는데, 거기에 의하면 기회를 보아 위무(慰撫)하겠으니 소란스럽게 만들지 말라는 등등의 말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 우선 군사를 파하고서 소위를 살펴보기로 했다. 도중(島中)의 장관(長官)과 군민(軍民)은 의당 각기 천조(天朝)의 명령에 따라 이제부터는 경역(境域)을 벗어나서 노략질하지 말도록 하라.’고 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이런 뜻으로 이서(李曙)·정충신(鄭忠信)에게 하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24일 신축

영돈녕부사 윤방(尹昉)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삼가 지난번 비국의 계사를 보니, 말이 과격하기는 했지만 그 본심을 따져 보면 미미할 때 삼가고 조짐이 보일 때 막는다는 뜻에 불과한 것이니,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근래 엄한 분부가 누차 내렸는데 진실로 불평해 하는 뜻이 많았음은 물론 말하는 사이에 지나치게 화내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아랫사람들이 성명께 바라던 바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성심(聖心)이 머지 않아 깨닫고 뉘우치는 단서가 마음속에 싹터 바람처럼 빨리 고치셨습니다. 따라서 이왕의 허물은 구름처럼 사라져 버리고 장래의 선함이 방책(方冊)에 휘황하게 빛나게 되었습니다. 신은 이때에 성상의 가슴속이 얼음이 녹듯이 확 풀려 다시는 한 점의 누(累)도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어찌 쾌활하지 않겠습니까.
대저 마음이란 본래 허명(虛明)한 것인데 칠정(七情)의 발로에서 오직 노여움만이 제재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옛사람이 이를 날카로운 칼날과 사나운 말이 상대방을 베어 꺾고 적진을 함몰시키는 것에 견주었습니다. 이는 치우친 것이 있어서 제어할 수 없게 되면 그것이 발로되어 행해지는 것은 반드시 올바름을 잃게 되고 결국은 상도(常道)를 어기지 않는 경우가 드문 것을 우려해서인 것입니다. 마음을 보존하는 법은 마땅히 티끌이 없는 맑은 거울과 물결이 없는 고요한 물과 같이 해서 하나의 찌꺼기도 남아 있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이치가 다 밝아지게 되면 사물(事物)이 닥쳐 와도 이에 응하는 것이 포용력이 넓어 여유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나의 본원(本源)의 경계(境界)는 전처럼 여전히 허령(虛靈)하고 전처럼 여전히 징철(澄澈)하게 되니, 어찌 털끝만큼인들 교착되거나 흔들리는 걱정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은 모두가 격언(格言)이다. 내가 마땅히 잊지 않고 유념하여 살피겠다."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근년 이래 매양 군정(軍情)을 위로하기 위해 명분 없는 과거를 많이 설행(設行)하고 있으므로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겨온 지 오래입니다. 정충신(鄭忠信)이 해과(海科)의 설치를 청한 것은 군정 때문에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진실로 타당하지 못한 듯합니다. 더구나 지금은 군사를 파한 뒤인데도 그대로 진상(陣上)에 머물러 과거 기일을 기다리는 것은 더욱 온편치 못한 일입니다. 결단코 따로 하나의 과거를 설치하여 폐습이 잇따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장계의 사연은 시행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함경북도와 평안도는 지방이 매우 멀고 또 변에 대비해야 하는 추방(秋防) 때를 당하였으니, 이번 별시 무과의 초시는 양계(兩界)의 경우 그 액수(額數)를 정하여 그대로 본도에서 설행하게 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품정(稟定)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7월 25일 임인

해운 판관(海運判官) 조문수(曹文秀)가 조군(漕軍)들의 소첩(訴牒)에 따라 육군(陸軍)의 예에 의거하여 과거에 응시하게 해줄 것을 청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회계하기를,
"조군과 수군은 모두 그 임무를 대대로 전해 가게 되어 있는데, 수군은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고 조군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소원(訴寃)을 인하여 이 장계가 있게 된 것입니다. 단, 수군은 육군과 더불어 명칭은 다르지만 다같은 군인이므로 과거 응시를 허락할 근거가 있습니다만 조군은 역졸(驛卒)·일수(日守)·조례(皂隸)·나장(羅將)과 똑같습니다. 당초에 허락하지 않은 데에는 반드시 의도가 있었던 것 같으니, 구규(舊規)를 경솔히 고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26일 계묘

상이 동지(冬至)·성절(聖節)의 배표례(拜表禮)를 의식대로 거행하였다.

 

나주 목사 장유(張維)가 소장을 올려 본주의 조운선(漕運船)이 패몰된 정상을 갖춰 말하고 다시 세미(稅米)를 징수하는 걱정을 면하게 해주기를 청하였다. 호조가 복계(覆啓)하기를,
"이 소장을 살펴보니 한 주(州)의 폐단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 같을 뿐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은 인심이 좋지 못하여 간교한 짓이 백출(百出)하고 있으니, 많은 곡식을 결코 모두 탕척해주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길이 한번 열리게 되면 앞으로 분요로움을 견딜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원수(元數) 가운데 삼분의 일을 징수한다면 법전에 전거할 조문이 있고 본주도 또한 1천여 석의 쌀을 감면받게 되니, 이렇게 되면 법도 시행이 되고 폐단도 줄어들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도승지 김시국(金蓍國)이 소장을 올려 스스로를 탄핵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김시국은 김신국(金藎國)의 아우인데 혼조 때 폐모론(廢母論)에 참여하여 정청(庭請)했었기 때문에 스스로 뭇의논이 쾌하게 여기지 않는 줄 알고 드디어 면직되기를 청한 것이다.

 

7월 27일 갑진

유흥치가 등주(登州)에서 다시 가도로 돌아왔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제재(諸宰), 삼사의 장관을 명초하여 의논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사를 파하라는 명이 있은 지 겨우 수일이 지났는데 유흥치의 선박이 가도로 나오니 어찌해야 하겠는가?"
하니, 좌의정 김류가 아뢰기를,
"이제 김시양(金時讓)의 장계를 보건대, 유흥치가 들어갈 적에 1백 척의 선박이 있었는데 이제 황제가 차임하는 명이 있었다면 어찌 수십 척의 선박으로 나올 리가 있겠습니까. 전일의 조서에 ‘기회를 보아 위무하겠다.’는 말이 있었고 뒤에는 죽이지 않겠다는 소식이 있었는데, 중국 조정에서 상벌을 내리는데 어찌 이렇게 착오를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적(賊)이 틀림없이 우리로 하여금 손을 쓰지 못하게 하려는 것일 것이다. 이른바 부총(副摠)에 제수되었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겠는가."
하니, 우의정 이정구가 아뢰기를,
"황제가 차임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성지(聖旨)에 ‘기회를 보아 위무하겠다.’는 말이 있었으니 이는 중국 조정에서 이미 그의 죄를 용서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토죄(討罪)하는 것은 불가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황제가 차임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 나라로서는 당연히 공격할 수가 없다. 그러나 죽음을 용서해준 것뿐이라면 어찌해야 하겠는가?"
하니, 이귀(李貴)가 아뢰기를,
"그렇다고 하더라도 중국 조정에서 이미 죽음을 용서하여 주었다면 우리 나라로서 어떻게 감히 정벌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에서 죽이지 않고 가도의 사람들을 영솔하게 하였다면 반드시 과장하는 말이 있었을 것인데 이제 기세가 매우 외로운 것으로 보면 혹시 중국에서 미처 체포하기 전에 도망하여 돌아온 것이 아닌가. 중국에서 그에게 도중(島中)을 무마하게 하였다면 반드시 공문(公文)이 있어야 하는데 이토록 조용하기만 하니, 저가 억지로 교만을 떨어도 믿을 수가 없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신은 아마도 이 적이 스스로 자신의 죄를 헤아리고 지레 도주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군대를 일으킨 이상 우선 잠시 그대로 두었다가 황제가 차임했다는 소식이 사실이 아닐 경우에는 일개 도망병일 뿐이니 우리가 공격해도 불가할 것이 없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하고, 이귀가 아뢰기를,
"김류의 말이 지나칩니다. 중국 조정에서 그의 죽음을 용소해 주었다면 소방(小邦)의 입장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단지 지난날 공격하려던 마음이 아직도 가슴속에 버티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의논이 있게 된 것입니다. 만일 부득이하다면 우선 육군은 머물러 있게 해도 되겠습니다만, 주사(舟師)는 결단코 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일이면 분명한 소식이 있을 것 같다."
하니, 이정구가 아뢰기를,
"당초 군대를 일으킬 적에는 머무르며 유흥치가 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는데 이제 그가 다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아무 이유 없이 군사를 파하는 것은 불가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런 내용을 중국 장수에게 알려 바로 유흥치에게 말하게 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다. 우리 나라 사람을 보낸다면 육욕(戮辱)을 당할 우려가 없지 않다."
하니, 이정구가 아뢰기를,
"주사는 파하더라도 한편으로는 병마를 정돈하여 변란에 대응할 여지를 마련해야 됩니다. 중국인이 피해당한 일에 이르러서는, 저들이 혹 이를 고집하여 말할 경우 우리는 응답하기를 ‘처음 섬에 변란이 발생했다는 말을 들었고 또 그대의 군대가 우리를 노략질할 계획이란 말을 들었다. 우리가 군대를 일으킨 것은 바로 그대에게 죄를 묻기 위한 것이다. 싸움을 한 이상 중국인이 난동을 부리다가 살해당한 것은 괴이할 것이 없다.’고 하게 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 적이 혹 낭패해서 돌아왔다면 공격해도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오래 머물러 있으면서 춥고 배고픔에 시달리는 군졸들의 고통이 말할 수 없는 지경일 것이다."
하니, 이정구가 아뢰기를,
"중국 조정에서 이미 그의 죄를 용서하였다면 우리의 도리로는 토죄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이명준은 아뢰기를,
"지금 유흥치를 공격하는 데는 네 가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손 각부(孫閣部)가 쾌히 허락하는 말이 없는 것이 첫째이고, 부총(副摠)이 되지 않았더라도 반드시 아문(衙門)의 문서가 있어야 하는 것이 둘째이고, 가을 기운이 점점 차가와지는데 사졸들이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것이 셋째이고, 그들 성세가 성대하다면 반드시 난처한 일이 있게 될 것이 넷째입니다."
하고, 서성(徐渻)은 아뢰기를,
"군무(軍務)에 관계된 모든 일은 일체 체신(體臣)에게 위임하여 속히 결단하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고, 오윤겸(吳允謙)은 아뢰기를,
"뭇의론이 모두 군사를 파하려 하니, 헤아려 조처하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고, 홍서봉(洪瑞鳳)은 아뢰기를,
"2, 3일이 지나지 않아서 적의 정상이 반드시 드러날 것이니, 마땅히 조금 지체시켜 정확한 보고를 들은 뒤에 파하여 돌아가게 하도록 유시한다면, 그래도 그가 나왔다는 소식만을 듣고서 정신없이 지레 파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쪽 변방은 추위가 일찍 오는데 오래도록 군사를 파하지 않는다면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걱정이 매우 우려된다. 또 생각건대 기일에 앞서 파한다면 저 적이 반드시 말이 없을 것이지만 그가 도착한 다음에는 일이 난처하게 될 수도 있다. 만일 파하려 한다면 일찍 하는 것이 상책이겠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인심을 따르면 성취되고 인심을 그스르면 패망하는 것입니다. 이제 조정의 의논이 모두 군사를 파하려 하고 있으니 위에서도 중의를 따라야 하겠습니다."
하고, 이정구는 아뢰기를,
"군사를 파하라는 명을 이미 내렸으니 다시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그쪽에 통유(通諭)하는 내용을 지금 강정(講定)해야 됩니다."
하고, 오윤겸은 아뢰기를,
"통유한다는 내용은 특별히 고칠 만한 것이 없고, 다만
"처음에는 섬 사람들에게 효유하는 것으로 내용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유흥치가 부총으로서 왔다고 하니, 게첩(揭帖)이라고 해야 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게첩이라고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은 것 같다."
하니, 오윤겸·김류·이정구가 모두 아뢰기를,
"이미 격서(檄書)를 전하지도 못했고, 또 통문(通文)도 하지 못했으니, 게첩 말고 다시 무슨 글을 짓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충신이 명을 받은 애초에 이미 지구전(持久戰)을 할 뜻이 있었으니, 지금 독전하더라도 반드시 목숨을 버릴 각오로 적과 싸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니, 최명길(崔鳴吉)이 아뢰기를,
"섬이 비었을 때에도 들어가 공격하지 못하였는데 유흥치가 다시 나와 사세에 어려운 점이 많게 되자 정충신에게 죄를 돌린다면, 또한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제신(諸臣)들이 물러가려 하자 최명길이 나아가 아뢰기를,
"지난번 여러 곳에 있는 국릉(國陵)의 좌향(坐向)을 살피는 일로 지관(地官)을 내려보내라는 분부가 있었는데, 무슨 까닭에서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국릉 중 임좌(壬坐)에 병향(丙向)으로 된 곳이 있는가를 알고 싶어서였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지관의 말을 듣건대 24방(方) 가운데 길흉(吉凶)의 산세(山勢)가 없지는 않지만 형세가 좋으면 방위에 구애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유릉(裕陵)·현릉(顯陵)·선릉(宣陵)·태릉(泰陵)095)  은 모두 임좌에 병향이라고 하니 각능을 왕래하면서 날짜만 허비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신이 지난번 목릉(穆陵)096)  에 갔을 적에 여러 등성이의 능을 두루 살펴보라는 분부가 있었기 때문에 신이 지관과 함께 두루 살펴보았는데, 어떤 것은 해산(亥山)이라고 하고 어떤 것은 임(壬)과 해(亥)가 서로 섞였다고 했습니다. 대체로 해산에다 임좌에 병향으로 쓰면 매우 좋다고 하는데 광중(壙中)을 팔 때 상당히 비스듬하게 해야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를 물어 보니, 해방(亥方)으로 편주(偏主)되게 하는 것이 제일 길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뒤 박홍중(朴弘中)이 특별히 이론을 제기했는데 상세한 것을 물어보니, 이는 임산(壬山)이기 때문에 자좌(子坐)에 오향(午向)으로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지관들이 ‘뒤편이 허한 것 같다. 해산의 해좌 병향이 최고이고 임산의 해좌 병향이 그 다음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선묘(宣廟)께서 이미 이 산을 정하였으니 지금 거기다 쓰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상신(相臣)과 예판(禮判)·삼사(三司)가 모두 앞에 있으니 즉시 강정(講定)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의견으로는 전에 결정한 좌향(坐向)을 고치는 것이 의심스럽다. 선왕(先王)께서 뒷날의 택지(宅地)로 삼으신 데에는 그 당시 반드시 정견(定見)이 있었을 것이니, 오늘날 쓰는 것이 불가할 것이 없을 것 같다."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중국은 제릉(諸陵)이 모두 만수산(萬壽山)에 있는데 풍수법(風水法)에 구애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일이니 지관 혼자 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상(右相)이 반드시 상세하게 알고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경자년097)   국상(國喪) 때 신이 예조 판서로서 명을 받들고 가서 제릉(諸陵)을 살펴 보았는데 또 정구(鄭逑)·유영길(柳永吉)·유영립(柳永立)·성영(成泳) 등을 시켜 여러 곳을 두루 살피게 했었습니다. 건원릉(健元陵)에 길지(吉地)가 있다고 하니 선왕께서 다시 살피게 했는데 제이강(第二岡)이 과연 좋았기 때문에 쓰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선왕께서 뒷날의 택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그 다음의 자리에 썼으니, 지금의 유릉(裕陵)이 그것입니다."
하고, 김류는 아뢰기를,
"이번에 산지(山地)를 가림에 있어 매양 좋지 않다고 한 사람은, 재상으로는 최명길이고 술관(術官)으로는 이간(李衎)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감사로 하여금 역사를 감독할 수령을 차정하게 했는데 이제 다시 좌향을 살피라는 명이 있으니, 외방에서 들으면 다시 가리려는 것인가 의심하여 반드시 힘을 쓰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외람되이 막중한 임무를 받았는데 이런 트집잡는 의논이 제기되고 있으니, 희릉(禧陵)의 고사(故事)098)  를 거울삼아 경계해야 합니다."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상신(相臣)의 말이 참혹합니다. 이른바 희릉의 고사라는 것은 김안로(金安老)가 정광필(鄭光弼)을 모함하여 대역(大逆)으로 논한 것으로 사형을 면치 못할 뻔했다가 결국은 귀양가기에 이르렀던 일입니다. 신은 김류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지 오래입니다. 신하가 임금에 대해서는 극진히 하지 않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이런 큰일을 당하여 혹시라도 미진한 것이 있게 될까 우려하여 감히 소희를 진달한 것뿐입니다. 어찌 이것을 가지고 누구를 해칠 계책을 세웠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총융사(摠戎使)의 종사관(從事官)인 한흥일(韓興一)이 서쪽에서 돌아왔다. 상이 불러 보고 하문하기를,
"정서군(征西軍) 군졸들의 원망과 고통이 어떠한가? 병든 자는 또한 얼마나 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총융사가 거느리고 있는 군대는 육지에 있기 때문에 극심한 고통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사(舟師)는 여러 달 더위병에 시달렸기 때문에 병든 자가 많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졸들의 의장(衣裝)은 어떠한가?"
하니, 아뢰기를,
"경기 사람들은 간혹 솜으로 누빈 옷을 입고 있습니다만 원도(遠道) 사람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런 사졸들에게 싸움을 시킬 수 있겠는가?"
하니, 아뢰기를,
"군대는 사기가 주가 되는 것인데 해상(海上)에서 더위를 지냈기 때문에 용력을 부릴 기운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장(主將)이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사는 어떠한가?"
하니, 아뢰기를,
"삼로(三路)의 주사가 군용(軍容)을 정제하고 있을 적에 중국인 이영준(李永俊)이 처음 선소(船所)에 이르러 매우 놀라고 두려워 하였는데,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평생에 이러한 장관(壯觀)은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합니다."
하였다.

 

7월 28일 을사

헌부가, 지금부터는 병을 이유로 소장을 올려 진달하는 경우에는 절대로 들이지 말게 할 것과, 부총관(副摠管) 김완(金完)은 법을 어긴 죄를 졌으니 체차시키라고 청하자, 상이 답하였다.
"아뢴 대로 하라. 김완은 법을 어긴 죄가 있기는 하지만 전공(前功)이 매우 중하니, 지금 이 직임을 제수한 것이 불가하지 않다."

 

대사간 이명준이 소장을 올리기를,
"지난번 여인이 대내에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항간에 전파되어 부인네와 아이들까지도 모두 얘깃거리로 삼고 있었지만 일이 궁금(宮禁)에 관계된 것이어서 전하에게 말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대략 소장을 올려 언급했던 것인데 전하께서는 신의 소장에 대해 매우 너그럽게 용납하는 뜻을 보였었습니다. 그런데 대신과 삼사의 논계를 인하여 문득 성색(聲色)을 벽력같이 무섭게 하여 신하들이 두서를 잃게 되었는데, 신이 빌미가 된 것이므로 사람들 중에 신을 위하여 위태롭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신하가 군부에게 진언함에 있어서는 지우(智愚)를 막론하고 각자 정성을 다하여 임금이 한번 깨우치기를 바라야 합니다. 신의 소장에 사기(辭氣)니 용량(容量)이니 하는 등의 말이 있었던 것은 범연한 뜻이 아니었는데 그 소장의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사기가 전과 같으니 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며칠 안되어 신을 발탁하여 간장(諫長)에 제수하였으니 신은 숨김없이 다 말하여 조금이나마 알아준 데 대한 은혜에 보답해야 마땅합니다.
근래 전하께서 신료들을 대함에 있어 점차 예우를 하지 않기 때문에 조금만 전하의 뜻에 거슬리면 준엄한 견책이 뒤따라 이르므로 대신은 부끄러워하고 소신은 겁에 질려 있습니다. 따라서 군신 사이의 정의가 미덥지 못하게 되어 서로들 입을 다물고 말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위에서 고립되어 귀에 거슬리는 말이 들어갈 길이 없게 되면 기미를 아는 사람은 장차 물러나 멀리 떠나게 될 것이고 비분 강개한 사람은 형벌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신이 여자를 들이는 일을 중개한 자에 대해 극론한 것은 부정한 길이 한번 열리면 끝내 국가의 환란이 되는 것을 깊이 우려해서인 것입니다. 등통(鄧通)의 죄는 조정의 예를 어긴 데 불과하지만 신도가(申屠嘉)가 글을 보내어 불러서 베려고 했었습니다.099)   부정한 길을 통하여 진헌을 중개한 자의 죄를 어찌 조정의 예를 어긴 데 견줄 수 있겠습니까. 형적이 모호하여 그가 누구라는 것을 분명히 지적할 수는 없습니다만, 참으로 그런 사람이 있다면 대신이 상방검(尙方劍)을 빌어 한마디 곤월(袞鉞)을 가하여 틈을 엿보는 무리들로 하여금 두려워할 줄 알게 하는 것이 춘추(春秋)의 대법(大法)입니다. 전하께서도 의당 몸가짐을 엄숙하게 가지시어 궁위(宮闈)의 정사를 깨끗하게 하여야 합니다. 궁빈(宮嬪)의 선발은 전하의 본의가 아닌데 단지 간원의 논계에 격동되어 갑자기 거행하라는 분부를 내리셨으니, 이는 잘못을 정당화시키려는 데 가까운 조처가 아닙니까.
살피건대 근래 조정 신하들 가운데 조금이라도 뜻을 거스른 사람에 대해서는 전조(銓曹)가 의망할 적마다 낙점을 미루시면서 혹 수개월이나 1, 2년이 지나도록 쓰지 않으시니 마치 뜻을 거스른 것의 경중에 따라 미루는 달수의 길이를 정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언관이 뜻을 거슬러 체직이 되면 곁의 사람들이 서로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아무는 이제부터 벼슬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합니다. 아랫사람이 위의 뜻을 엿보는 것은 진실로 아름다운 일이 아닌데, 이 또한 전하께서 사람들에게 관대하지 못함을 보인 데 연유된 것입니다.
옛날 송 태종(宋太宗) 때 유창언(劉昌言)이 파직되었을 적에 태종이 좌우에게 하문하기를 ‘창언이 눈물을 흘리던가?’ 하였고, 여몽정(呂蒙正)이 파직되었을 적에는 또 말하기를 ‘복관(復官) 되기를 바란다면 눈이 빠질 것이다.’ 하니, 전약수(錢若水)가 탄식하기를 ‘위에서 보신(輔臣)을 이렇게 대우하는 것은 고매한 법도가 없이 전적으로 진퇴(進退)만 가지고 감동시키려는 것이다.’ 하고, 즉시 병을 핑계하고 물러가버렸습니다. 임금의 한마디 실수가 사대부의 마음을 잃기에 이르기도 하는데, 더구나 관직을 낙점하는 것을 가지고 징벌의 자료로 삼는데이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소장의 내용이 지성에서 나온 것이니 감히 유념하여 살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빈어(嬪御)에 대한 한 가지 일은 이미 첨의(僉意)를 따른 것이니, 지금은 환수하기가 곤란하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중국인들은 오복(五服)100)  의 상(喪)에 대해 각기 해당되는 상복을 입고 그 달수를 끝냅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예법을 지키는 집안에서는 기년복(朞年服)이 있더라도 출입할 적에는 흑립(黑笠)을 쓰고 있습니다. 신들의 생각에 자전께서 백관(白冠), 백대(白帶)로 달수를 끝내는 것은 과중하다고 여겨져서 예법을 강론하는 사람에게 의논하고 예경(禮經)과 《오례의(五禮儀)》를 널리 상고하여 보았으나 전거할 데가 없었습니다. 이에 드디어 평상시 거처할 적에는 두수(頭𢄼)와 띠를 백색으로 할 것을 계달했습니다만, 어떻게 감히 천견(淺見)으로 멋대로 증감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전하의 분부를 받들어 대신과 의논하였더니, 모두들 ‘실로 해조가 감히 멋대로 예문(禮文)을 고칠 수는 없다. 한유(韓愈)의 개장복의(改葬服議)를 상고하여 보건대 하면(下緬)101)  을 거론한 것은 이것이 하복(下服) 가운데 가장 경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사(子思)도 「개장할 적에 시복(緦服)을 입는 것은 차마 복이 없이 지친(至親)을 보낼 수 없기 때문이다.」하였다. 차마 복이 없을 수 없다면 복 가운데 가장 가벼운 복을 입어야 하는데 옥색(玉色)은 천담복(淺淡服)이니, 이것이 시복은 아닐지라도 또한 복을 입지 않은 것은 아니다. 두수를 흑색으로 하는데 이르러서는 상하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사대부 가운데 기년복을 입은 사람이 출입할 적에 흑립을 써도 사람들이 그르다고 하지 않으니, 자전의 어의(御衣)는 의당 옥색으로 마련해야 한다. 단지 성복(成服)할 때는 극히 가는 연포(練布)를 써서 소매를 크게 한 장삼(長衫)·장군(長裙)을 지어 올리게 하는 것도 무방하다. 만일 미진한 절목이 있으면 뒤에 마련하여 계품해서 시행하게 하기를 청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미 무방하다고 했으니 이것은 괜찮지만 미진한 점이 있다는 말이다. 전의 계사에 따라 모두 백색을 쓰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9일 병오

유성이 필성(畢星) 위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헌부가 빈어(嬪御)를 선발하라는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빈어를 선발하는 한 가지 일에 대해서 어떤 이는 과인(寡人)에게 거행하지 말라고 하고 어떤 이는 당연히 거행해야 된다고 하는데, 이러한 때에 이러한 말을 꺼내도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드무니, 이것이 어찌 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이제 굽혀 따르지 않는다면 뒤에 반드시 뉘우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계사의 내용 또한 일리가 있는 것 같으니, 따르도록 하겠다."

 

7월 30일 정미

도승지 김시국(金蓍國)이 세 번 소장을 올려 사면하니, 상이 따랐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