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3권, 인조 8년 1630년 8월

싸라리리 2025. 12. 2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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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무신

비국이 아뢰기를,
"일찍이 수군·육군을 파병(罷兵)시켜 돌아가게 할 일로 하유하였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유흥치(劉興治)의 동정을 분명히 알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그가 우리 나라에 대해 노여워하여 전속 휘하 군대를 나누어 보내 멋대로 노략질하게 한다면 청천(淸川) 이북에는 이를 막을 군대가 머물러 있는 곳이 없으니,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또 유흥치가 차임(差任)하는 명을 받고 나왔다 하더라도 모장(毛將)102)  과는 달라서 엄히 방비하지 않으면 뒷날의 걱정을 이루 말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방제책은 반드시 그로 하여금 꺼리는 것이 있게 해야 하는데 본도의 병력이 단약(單弱)하여 사세상 이를 대비하기가 어렵습니다. 총융사가 거느리고 있는 경포수(京砲手)와 어영군(御營軍)을 수변사 유림(柳琳)에게 붙여 주고 또 도내의 정예병을 조발하여 안주(安州)·정주(定州)·구성(龜城) 등지에 나누어 배치시켜 연해변에서 중국인들이 노략질하는 환란에 대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군병을 이미 파하였으니 도로 머무르게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처음에는 반드시 멋대로 노략질하지는 않을 것이니, 첨방(添防)하는 포수 몇 사람을 들여보내는 것이 옳다."

 

경상도 하양(河陽)·경주(慶州)·함안(咸安)·영천(永川)·인동(仁同)·선산(善山)·기장(機張)·현풍(玄風) 등 여덟 고을에 도적이 날뛰었으므로 조정에서 감사에게 명하여 체포를 독려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고문을 가하여 자복받은 자가 17인이었는데 모두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강석기(姜碩期)를 도승지로, 이소한(李昭漢)을 부응교로, 신천익(愼天翊)을 수찬으로, 남양 부사(南陽府使) 윤지(尹墀)를 좌부승지로 삼았다.

 

8월 2일 기유

음성 현감(陰城縣監) 정대붕(鄭大鵬)이 소장을 올려 소격서(昭格署)와 추숭(追崇)하는 일에 대해 논하니, 간원이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그 소장의 내용은,
"소격서는 일월 성신(日月星晨)의 초제(醮祭)를 맡고 있습니다. 무릇 산천(山川)의 높고 낮은 곳에는 모두 영(靈)이 있는 것인데 더구나 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일월 성신이겠습니까. 이른바 삼청(三淸)이란 천청(天淸)·지청(地淸)·인청(人淸)인데 그 이름이 이미 정해져서 사사(祀事)에 드러난 것입니다. 그런데 임진 왜란 이후 폐기시킨 채 회복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천변(天變)이 늘 나타나 한재(旱災)가 끊이지 않고 변방의 환란이 계속 발생하여 인민을 보존할 수 없게 된 것은 하늘의 섬김이 경건하지 못한 데서 연유되지 않은 것이라고 기필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처럼 국가의 저축이 탕갈된 때에는 전임할 관원을 설치하는 것은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관원에게 겸임시켜 다시 초례(醮禮)를 행하게 한다면 아마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계운궁(啓運宮)의 초상(初喪)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대소 절목을 일체 국상(國喪)의 예법에 따른 것은 반드시 천리와 인정의 자연스러움에 연유된 것입니다. 참봉(參奉)을 설치한 데 이르러서도 능침(陵寢)과 다름없이 하였는데 유독 추숭하는 일절(一節)에 대해서만 아직껏 거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의논을 주장한 사람들은 모두 지식이 있고 의견이 고매한 이들인데 시일을 끌면서 미루기만 하고 결단하지 않습니다. 상사(喪事)는 모두 국상에 의거하였는데 추숭을 버려두고 행하지 않으니, 성현이 예법을 제정함에 있어 어찌 선후를 다르게 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예조에 내렸다. 회계하기를,
"일월 성신은 천자가 교제(郊祭)를 지내는 예(禮)입니다. 제후들은 봉강(封彊)안의 산천에 제사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춘추(春秋) 때 여러 나라들이 자기 분야(分野)에 있는 별일지라도 감히 제사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전조(前朝)103)  에서는 송(宋)과 원(元)을 차례로 섬겨 도교(道敎)와 불교(佛敎)의 초제(醮祭)에 대한 이야기를 익히 들었던 탓으로 마니산(摩尼山)에 제성단(祭星壇)이 있었는데 아조(我朝)에서도 이를 폐하지 않고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러다가 중묘조(中廟朝)104)  에 이르러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가 부제학이 되었을 적에 삼사(三司)가 일제히 논계함에 따라 대신과 의논하여 혁파하게 되었는데, 대신은 곧 정광필(鄭光弼)·안당(安塘)·김응기(金應箕)였습니다. 그 뒤 당로자(當路者)들이 조광조를 배척하기에 있는 힘을 다 하였지만 그래도 소격서를 설치하는 것은 불경(不經)에 관계된다고 말했습니다. 임진년 이후 품정(稟定)하여 혁파한지가 이제 이미 오래되었는데 정대붕(鄭大鵬)이 감히 다시 설치하기를 청한 것은 매우 외람된 짓입니다.
그리고 추숭례(追崇禮)에 이르러서는 조정에서 예경(禮經)을 상고하고 전례를 인용해서 일대(一代)의 법전으로 만든 것인데 정대붕은 본디 무식한 사람으로서 의류(醫流)로 발신하여 이미 결정이 된 뒤에 감히 소장을 올렸으니, 더욱 통분하고 놀랍습니다. 아울러 다시 의논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정묘 호란 때 안주(安州)가 함몰될 적에 광주(廣州) 사람 윤회(尹懷)가 성중(城中)에 있다가 죽었으므로 조정에서 남이흥(南以興)의 전례에 의거하여 포장(褒奬)하고 녹용(錄用)하게 했었다. 그런데 윤회의 아들이 상(喪)도 벗기 전에 죽었으므로 그의 어머니가 아우 윤탁(尹𢖲)을 아들을 대신하여 녹용하여 줄 것을 청하니, 해조(該曹)에서 법전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시행하지 말기를 청하였다.

 

8월 3일 경술

간원이 아뢰기를,
"정충신(鄭忠信)은 해상(海上)에 군대를 주둔시킨 채 계책은 한 가지도 바치지 않고, 각 진보(鎭堡)의 제장(諸將)들이 선척을 수리한 공로와 분주(奔走)한 노고를 두루 열거하면서 포장해 줄 것을 청하기에 이르렀으니, 너무도 외람스럽습니다. 추고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총융사 이서(李曙)가, 조종조의 고사에 따라 다시 선사(宣沙)·노강(老江)·광량(廣梁) 등 3포(浦)에 거진(巨鎭)을 설치하여 바다를 방비하는 계책으로 삼기를 청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한두 군데에다 진보를 설치해 가지고는 힘이 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더구나 본도(本道)의 형세로는 다시 설치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북병사(北兵使) 이항(李沆)이 치계하기를,
"신이 북쪽 변방의 사세를 살펴보니, 전부터 여러 곳의 번호(藩胡)들이 출몰하면서 노략질을 하였는데, 지금 또 노추(老酋)에게 병합된, 니응고태(泥應古太)·나패(羅貝)·회패(回貝) 등이 부락을 완전히 취합하여 군량을 저축하고 무기를 제조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경성(鏡城)은 성가퀴가 무너졌는데도 아직 수선하지 못하였고 사졸들은 지쳐서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남군(南軍)을 더 조발(調發)하여 지키게 하소서."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남군은 형편상 더 조발하기가 어렵습니다. 성지(城池)의 경우 날씨가 이미 추워져 결코 역사(役事)를 시작하기가 어렵습니다. 본도의 수령과 변장에게 편리한 대로 수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경증(李景曾)을 헌납으로, 김광혁(金光爀)을 교리로, 조경(趙絅)을 이조 좌랑으로, 이상질(李尙質)을 정언으로 삼았다.

 

8월 4일 신해

간원이 아뢰기를,
"사직령(社稷令) 유중형(柳重炯)은 위인이 비루하고 공조 정랑 조후열(趙後說)은 명망이 드러나지 않았고 사어(司禦) 조문영(趙文英), 시직(侍直) 한희인(韓喜仁)은 모두 용잡하여 사람들이 모두 비웃고 있고 예빈 주부(禮賓主簿) 정호인(鄭好仁)은 위인이 비열한 데다가 나이가 늙었고 헌릉 참봉(獻陵參奉) 신서민(申瑞民)은 행신이 추잡하여 능졸(陵卒)들을 침학하고 서부 참봉(西部參奉) 권식(權侙)은 본디 서얼로서 성품도 망령되니, 모두 사태(沙汰)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5일 임자

헌부가 아뢰기를,
"좌윤(左尹) 유순익(柳舜翼)이 비밀 관문(關文)을 아산(牙山)에 멋대로 보내 그 고을 사람 장남(張男)의 모자(母子)를 체포하고 형틀에 묶어 서울로 올려보내게 한 다음 함부로 형신을 가하였습니다. 법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한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6일 계축

정충신(鄭忠信)에게 하유하였다.
"경은 병이 있는 사람으로 오랫동안 바다에 있었는데 이처럼 바람이 높아지는 계절을 당하여 해로(海路)를 통하여 돌아오게 된다면 탈없이 도착하기를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니, 육로(陸路)를 따라서 올라 오라."

 

8월 7일 갑인

주강에 《서전(書傳)》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자 참찬관 윤지(尹墀)가 나아와 아뢰기를,
"전분(田分)은 육등(六等), 연분(年分)은 구등(九等)105)  으로 되어 있는데, 전분은 전안(田案)에 기재되어 있고 연분은 수령이 먼저 답험(踏驗)하고 도사(都事)가 다시 살펴서 수시로 높낮추는 것이 구제(舊制)입니다. 해조에서는 진실로 미리 등급을 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기는 토질이 너무 척박하여 곡식이 번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양전(量田)할 적에 비록 4, 5등으로 된 곳이더라도 연분은 하하(下下)로 정하여 1결(結)의 세금을 매양 4두(斗)씩 거두어 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곡식이 조금 잘 여물었다고 해서 갑자기 등급을 올리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지난번 수원 부사(水原府使) 장신(張紳)이 등급을 올릴 수 없다는 뜻으로 해조에 보고하자, 해조에서는 기내(畿內)에 어찌 하지중(下之中)이 되는 전품(田品)이 없겠느냐고 했습니다. 이 말이 한번 나가자 백성들이 실로 놀라고 두려워했습니다. 해조에서 기필코 부세를 더 올릴지의 여부는 신으로서는 모르겠습니다만 부세를 더 올릴 의향이 없다면 등급을 올리라는 말을 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의당 해조로 하여금 모두 원래의 등급을 다르게 하도록 다시 의논하여 정하소서."
하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대사간 이명준 등이 정대붕(鄭大鵬)의 일 때문에 이귀에게 비난받았다는 것을 이유로 드디어 인피하였다. 지평 이행건(李行健)이 처치(處置)하기를,
"정대붕의 소장의 내용은 괴이하고 망령되기 그지없습니다. 간원이 논계한 것은 체통을 얻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귀가 글을 보내어 비난한 것은 매우 전거할 데가 없는 처사였습니다. 대사간 이명준 이하를 모두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8일 을묘

우참찬 최명길(崔鳴吉)이 차자를 올려 사면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최명길이 목릉(穆陵)을 개장(改葬)하는 일 때문에 좌의정 김류와 상의 면전에서 서로 힐난할 적에 김류가 희릉(禧陵)의 고사를 인용하자 최명길이 자신을 김안로(金安老)에 견준 것에 노하여 병을 칭탁하고 정사(呈辭)한 것이 세 번이었는데 모두 윤허하지 않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차자를 올리기를,
"실상이 없는 말은 으레 가까운 이의 의심을 일으키고, 터무니없는 비방은 뜻밖에 나오기도 합니다. 위로 임금 보기에 부끄럽고 아래로 동료들에게 무안합니다. 그 이유를 찾아보면 허물이 실로 신에게 있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이 진달한 것은 생각한 것을 반드시 진달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실상 밖의 말은 계교할 필요가 없다. 안심하고 사퇴하지 말라."
하였다.

 

8월 9일 병진

이귀가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저보(邸報)를 보건대 간원은 정대붕이 추숭례(追崇禮)와 초제(醮祭) 두 조목을 논한 것을 이유로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목동이나 나무꾼의 말도 성인(聖人)은 반드시 채택하였으니 정대붕이 침의(鍼醫)로 발신하기는 했지만 추숭하자는 논의는 실로 만세의 공의(公議)인데, 어떻게 초제에 대한 망론(妄論) 때문에 추숭하자는 논의까지 아울러 공격할 수가 있겠느냐고 여겼습니다. 신의 의견이 이러했기 때문에 지난번 대사간 이명준에게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추숭례에 대해 망론했다고 하여 정대붕을 죄주라고 간원에서 청함으로써 이런 대례(大禮)가 아직껏 올바르게 귀결되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이것은 대간의 잘못이다. 그런데 도리어 파직을 청하는 것은 무슨 마음인가.’ 하였습니다. 그 뒤 두 번의 글도 묻는 데 따라 답하면서 대례를 속히 완결짓고 언로가 막히지 않게 하려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이명준의 답서에 ‘전후 대신(大臣)·유신(儒臣)과 예(禮)를 아는 사람들이 모두 이미 강정(講定)한 것인데 정대붕 같은 자가 무슨 지식이 있다고 이에 감히 당돌하게 논한단 말인가. 그가 조정을 경시한 것이 너무 심했다. 비의(鄙意)가 이러했기 때문에 논한 것이다.’ 하였으므로, 신이 또 글로 책하기를 ‘만일 지위가 낮은 자라고 해서 대사(大事)를 감히 말할 수 없다면 진동(陳東)과 구양철(歐陽澈)106)  은 오늘날 모두 삼사(三司)에게 죄를 얻게 되었을 것이다.’하였습니다. 이명준이 또 답장을 보내오기를 ‘진동과 구양철을 정대붕에게 견주는 것은 또한 욕되지 않은가. 만일 진동·구양철 두 사람으로 하여금 이 예(禮)를 논하게 했다면 내가 어떻게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명준은 청백하고 정직한 것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 있는데 그가 조정에 들어와서는 불과 한두 궁녀(宮女)에 대한 사소한 일을 논했을 뿐 군부의 대륜(大倫)에 관계되는 일에 이르러서는 감히 입을 열어 한마디도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끝내는 일국의 공론이 도리어 침의(鍼醫)의 입에서 나오게 만들어 놓고는 또 뒤이어 그를 공격하였습니다. 신의 이 말은 일개 정대붕을 아껴서가 아니라 실은 이명준을 아끼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근래의 일은 과연 매우 부당하다. 경이 강개(慷慨)해 하는 것은 마땅하다. 사퇴하지 말라."

 

최유해(崔有海)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최유해는 유희분(柳希奮)의 문객(門客)인데 이때에 이르러 이 직에 제수되었다. 비루한 사내가 명리를 추구하는 것은 그칠 때가 없는 것이다.

 

대사간 이명준이 아뢰기를,
"신은 듣건대, 예(禮)를 의논하는 것은 모여서 송사(訟事)하는 것과 같은 점이 있어서 진실로 쉽게 정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고상(故相) 문정공(文貞公) 신흠(申欽)은 바로 신의 매부이고 신은 또 박지계(朴知誡)와 서로 친한 사이이므로 나아가면 박지계의 의논을 듣고 들어오면 신흠의 의논을 듣게 되는데 두 사람의 말이 격차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본디 예를 배우지 못했고 또 경전에서 전거를 상고할 수도 없습니다만, 아무의 의견이 옳고 아무의 의견이 그르다고 하면서 경솔하게 국가의 대례(大禮)를 논하는 것은 신으로서는 하지 못하겠습니다.
연평 부원군 이귀(李貴)는 신의 본의는 모르고 옛사람을 인용하여 자기의 의논에 동조하기를 바라고 있으니, 또한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잇따라 중신의 비난을 받았으니 사세가 직무를 수행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하고, 사간 김반(金槃), 헌납 이경증(李景曾), 정언 이상질(李尙質)·윤구(尹坵) 등은 이귀에게 비난을 함께 받았다는 것으로 인피하였다. 대사헌 박동선(朴東善) 등이 아뢰기를,
"신들도 정대붕의 죄를 논하려 했는데 번거로울 것 같아 우선 버려두고 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연평 부원군 이귀의 차자를 보건대 신들이 간원을 처치한 것을 그르다고 하면서 드러나게 비난을 하였으니, 어떻게 감히 얼굴을 들고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아울러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정대붕을 사판(仕版)에서 삭제시키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진주(晉州)의 새 판관(判官)이 아직 부임하기 전이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사목(事目)을 상정(詳定)하게 하여 관부(官府)의 모양을 이루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옛날에는 권간(勸諫)에 대한 경계가 백공(百工)에게까지 미쳤었고 나무꾼과 목동의 말도 성인이 반드시 채택했다고는 들었어도, 벼슬이 한미하다 하여 죄주었다는 말은 못 들었다. 더구나 정대붕의 소장은 구언(求言)한 뒤에 나온 것이니 더욱 논할 만한 죄가 없다. 간원은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언자(言者)를 죄주려고 하니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 그대들이 중신(重臣)의 말에 분노하고 또 사체를 생각하지 않은 채 물렁한 땅에다 나무를 꽂듯이 하려고 하니, 이는 필시 사리를 모르는 젊은 사람들의 소위일 것이다. 법부(法府)의 처치가 이래서는 부당할 것 같으니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도록 하라. 진주 판관에 대한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8월 11일 무오

대사헌 박동선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논열한 것은 실로 공의(公議)가 격발한 데서 나왔습니다. 어찌 중신의 말을 인하여 이런 구차스런 의논을 제기하겠습니까. 신들의 말이 미더움을 받지 못하여 성교(聖敎)를 성가시게 하였으니 어떻게 감히 스스로 옳게 여기면서 태연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사간 이명준 이하가 또 이를 이유로 모두 인피하였다. 옥당이 처치하기를,
"보잘것없는 정대붕(鄭大鵬)이 무슨 지식이 있다고 감히 국론이 이미 결정된 뒤에 망령되이 외람스러운 소장을 진달한단 말입니까. 임금이 구언했다는 것을 핑계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니, 대간의 탄핵이 매우 사체에 맞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성비(聖批)가 엄준한 것은 실로 미안한 귀결인 듯합니다. 양사의 여러 관원들은 모두 잘못이 없으니, 아울러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 판서 정경세가 차자를 올려 사면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어떤 사람이 숭례문(崇禮門)에다 재신(宰臣)과 현관(顯官) 몇 명을 금독(禽犢)이라 지목하여 각각 그 죄명을 나열하여 적은 방(榜)을 붙였는데, 정경세도 그 가운데 들어 있었다. 그 때문에 여러 날 병을 핑계대고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소장을 올려 자송(自訟)하니, 답하였다.
"흉인이 한 일이니 괘념할 것도 없다. 익명(匿名)의 비방은 계달할 필요가 없다. 속히 나와 행공(行公)함으로써 뒷폐단을 막으라."

 

8월 12일 기미

좌의정 김류가 차자를 올려 최명길이 진달한 차자의 내용에 대해 변명하기를,
"대저 마음을 말하는 글은 마음과 말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마음에 있으면 반드시 말로 나타나기 마련이니 말이 마음과 어긋나거나 마음이 말과 어긋나는 경우는 있지 않습니다. 가령 신이 남을 해칠 마음을 품고 있었다면 진달한 말이 어찌 지나치다는 정도뿐이겠습니까. 가령 신이 남을 해칠 마음이 없었다면 진달한 말에 살펴볼 만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신의 말을 지나치다고 하였고 또 신이 무심히 한 말이라고 하였는데 죄가 있든 없든 양단간에 분명히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신의 말을 집요하게 잡고 늘어져 신의 마음을 질타하는 것에 대해 죄를 주시겠습니까, 아니면 용서하시겠습니까? 이는 전하께서 신의 죄를 감싸주려다가 도리어 신의 죄를 가중시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신이 큰 사은(私恩)에 감격하여 억지로 얼굴을 들고 반열에 나아가고 싶기는 합니다만 물러오면 형벌을 도망한 사람이 되고 나아가면 죄를 기다리는 신하가 되니 이 한몸 천지 사이에 어디에다 목숨을 의탁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신의 민망하고 박절한 정상을 살피시어 신을 삭직시켜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처럼 굳게 사퇴하는 것은 지나친 것 같다. 안심하고 행공(行公)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14일 신유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참찬관 강석기(姜碩期)가 아뢰기를,
"지난번 이명준의 소장 때문에 대신과 대각이 모두 불안함을 느끼고 있으니 신은 삼가 민망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덕이 한없이 넓어 번연히 깨우쳤으므로 기쁨에 겹고 감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좌의정 김류의 차자 내용을 보니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게 여기는 뜻이 많았는데 반하여 상의 비답은 자못 대신을 예로 대우한다는 의의가 부족했습니다. 신의 생각만 그럴 뿐이 아니라 식견이 있는 사람은 모두들 미안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군의(群議)가 미안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어떤 말을 가리키는 것인가?"
하자, 강석기가 아뢰기를,
"군의는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만 신의 생각에는 간곡하게 하는 뜻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좌상의 두 번째 차자의 내용에서는 전일의 비답 내용에 두 갈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는데 지금 승지의 소견도 그러한가? 그때 좌상의 말은 실제로 지나쳤었다. 나의 의견으로는 ‘말이 과중하기는 하였지만 모두가 반드시 속 마음이 있어서 나온 것은 아니다. 혹 입으로 말하면서도 그 말이 지나치다는 것을 스스로 모르는 수도 있으니, 세속에서 이른바 망발이라고 하는 것이다.’고 여겼는데, 이제 망발을 속 마음이 있는 것이라고 하면 되겠는가. 사람이 한때 과격한 말을 하게 되는 것은 혹 분노에 연유되기도 하고 혹 이기기를 좋아하는 데서 잘못되기도 하는 것인데 이런 경우는 무심히 한 것이라고 해도 되는 것이다."
하니, 강석기가 아뢰기를,
"단지 문자(文字)에만 의지해 보았기 때문에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미안스럽게 여겼던 것인데, 이제 성교(聖敎)를 받들건대 명백히 분석한 것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어리석은 신의 가슴이 툭 트일 뿐만 아니라 좌상이 듣더라도 반드시 감격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록 치세(治世)일지라도 대소 군료(群僚)들이 마땅히 마음을 함께하고 힘을 합쳐야 하는데 지금 같은 때를 당하여 조정의 기색이 매우 화협(和恊)하지 못하니, 나도 모르게 한심스러워진다."
하니, 강석기가 아뢰기를,
"상하가 서로 미덥게 된 뒤에야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위에서는 아래의 실정을 살피지 못하고 아래에서는 위의 마음을 받들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신 사이는 정의가 서로 통하여 숨기는 말이 없는 것을 귀히 여기는 것이다. 나의 무슨 일과 무슨 말이 미안스럽던가?"
하니, 강석기가 아뢰기를,
"무슨 일이 잘못되었는지 기억하지는 못하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신을 비천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성교(聖敎)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신은 감격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삼가 살피건대 상이 강석기에 대해 상당히 기꺼워하는 안색과 묻기 좋아하는 뜻이 있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를 통해 두루 득실(得失)을 열거하여 성심(聖心)을 개발하지는 못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3책 23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395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역사-사학(史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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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삼가 살피건대 상이 강석기에 대해 상당히 기꺼워하는 안색과 묻기 좋아하는 뜻이 있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를 통해 두루 득실(得失)을 열거하여 성심(聖心)을 개발하지는 못하였다.

 

함경도의 열 한 고을에 태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고 또 연일 폭우가 쏟아져 화곡(禾穀)이 물에 잠겼다. 감사 윤의립(尹毅立)이 영남(嶺南)과 영동(嶺東)의 미곡을 옮겨다 기민(飢民)을 구제할 것을 청하니, 상이 비국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8월 15일 임술

평안도 창성부(昌城府)에 태풍이 불었다.

 

8월 17일 갑자

상이 이매(李梅)를 인견하였다. 이매가 말하기를,
"유 병부(劉兵部)가 소관(小官)을 차송한 것은 옛날의 우호관계를 다시 유지하려 해서입니다. 지난번 불행하게도 도중(島中)의 요언(妖言)이 귀방(貴邦)으로 흘러들어갔으니, 귀방에서 의심을 일으킨 것은 진실로 괴이할 것도 없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처음에는 천조(天朝)의 뜻을 모르고 정말 군사를 일으켜 난을 정토하려 했었지만, 지금은 상국(上國)의 명을 받았으니 양쪽에 절대로 의심하는 단서가 없을 것이오."
하였다. 이매가 말하기를,
"유 병부가 바라는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절대로 소민(小民)의 말을 듣지 않은 연후에야 피차가 서로 미덥게 될 것입니다. 한인(漢人)을 살해한 일은 이미 지난 일이니 진실로 언급할 것이 없겠습니다. 숙천(肅川)에 잡혀 수감되어 있는 사람은 방환(放還)시키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소."
하였다. 드디어 파하고 나아갔다.

 

추신사(秋信使)        오신남(吳信男)이 노중(虜中)에서 돌아왔다.

 

좌의정 김류가 소장을 올리기를,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섬기는 것과 같은데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을 다하지 못한다면 이는 효도가 아니고 신하가 임금에게 말을 다하지 못한다면 이는 충성이 아닌 것입니다. 신이 등대(登對)하던 날 최명길(崔鳴吉)이 풍수설(風水說)에 대해 논변한 것 때문에 우연히 희릉(禧陵) 때의 일을 인용하였습니다만 김안로(金安老)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었습니다.
만일 산릉(山陵)이 이미 정해진 뒤에 지난날 천개(遷改)했던 일을 제기했다 하여 신을 죄주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만, 만일 김안로(金安老)의 일을 의도하고 은밀히 사람을 무함할 계책을 품었다고 한다면 신은 만번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가령 신이 음험하고 간특한 마음을 품고 실지로 무함할 의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직 말로 발하여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드러나지 않은 것을 미리 헤아려 스스로 신을 지레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현우(賢愚)를 막론하고 억울한 마음을 품는 것은 한가지여서 신의 억울함은 곧 최명길의 억울함인 것입니다. 맹자(孟子)가 ‘붕우에게 믿음을 받지 못하면 위의 신임을 얻지 못한다.’고 했는데, 평생의 언행을 스스로 돌아보건대 동료에게 믿음을 받지 못하여 이런 씻기 어려운 오명을 남기게 되었으니, 장차 무슨 얼굴로 다시 조정의 반열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산릉(山陵)의 동역(董役)과 변사(邊事)의 책응(策應)은 모두 일각도 늦출 수 없는 것인데 신이 엎드려 대죄하는지라 여러날 동안 업무를 보지 못하였으니, 신의 죄가 여기에 이르러 더욱 극도에 달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나의 뜻은 이미 유시하였으니 굳이 사퇴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8월 18일 을축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 이지천(李志賤)이 병이 심하다고 하면서 배에 올랐다가 도로 내렸는데, 진주사가 이를 계문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풍파가 거세게 칠 적에는 대부분 이 병을 앓는데 만일 이 때문에 이미 배에 오른 사신의 체직을 허락한다면 사세상 앞으로 끝내 차견할 사람이 없게 될 것이니 뒤폐단이 끝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19일 병인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지사(知事) 이귀가 아뢰기를,
"지금 성상께서 붕당을 타파할 생각을 항상 하시면서도 먼저 색목(色目)을 가지고 사람을 의심하십니다. 그러므로 공심(公心)에서 나온 말도 상대를 배격하는 의논인가 의심하시고 이로 인하여 죄를 주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조정이 화협(和恊)하지 못하여 일을 당해도 감히 말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전하를 위하여 계책을 세운다면 한 사람의 어진 신하를 얻어 그에게 중임을 맡겨 어진이를 등용하고 악한 이를 물리치는 것을 주관하게 한다면 화협해질 것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이귀가 다시 나아가 아뢰기를,
"목릉(穆陵)의 지문(誌文)을 이제 개찬(改撰)해야 하니 지금 추숭례(追崇禮)를 의정(議定)하여 첨입(添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이어 소매 속에서 차자를 꺼내어 올리니, 상이 다 보고 나서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이귀가 아뢰기를,
"신이 이 일 때문에 20여 번에 걸쳐 차자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논하는 자들은 모두 《예기(禮記)》가 한나라 때 학자들이 찬술한 것이어서 믿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기》 이외에 다시 어느 경서(經書)를 전거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일을 말하는 사람에 대해 어찌 관직의 고하를 따질 수 있겠습니까. 연소배들이 감히 신은 탄핵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탄핵하여 위협을 가하고 있으니,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조신(朝臣)은 이런 의논이 제기되면 모두들 똑같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각기 시비를 가릴 줄 아는 마음이 있는 것이니, 옥당에서 입시한 사람들도 각기 자신의 뜻을 말하여 보라."
하였다. 최유해(崔有海)·신계영(辛啓榮)이 명백하게 따져서 대답하지 못하니, 이귀가 아뢰기를,
"신하로서 임금을 진실로 부모처럼 사랑한다면 주야로 사실을 고증하여 고문(顧問)에 대비해야 하고, 만일 모른다면 물러가서 입을 다물고 묵묵히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옥당은 시의(時議)에 영합할 줄만 알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알기가 어렵지 않다. 제신(諸臣)들이 모두 전거할 곳이 없다 하고 더구나 불가하다고 쟁론하는 것은 필시 군상(君上)에게 조금도 공덕이 없으므로 부모를 추숭할 수 없다고 여긴 때문일 것이다. 덕종(德宗)은 성묘(成廟)에 대해 숙부(叔父)인데도 추존하였고 중국 조정에서도 사친(私親)을 추존한 일이 있었다. 근고의 전례를 헤아려 보아도 이미 이와 같고 역대(歷代) 이래에도 행한 경우가 있는데, 아랫사람들이 이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비록 곧바로 지척(指斥)하지는 못하지만 의도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감히 스스로 행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이다.
정대붕(鄭大鵬)의 경우 예조가 이미 분노하여 반대하였고 양사가 서로 소장을 올려 죄를 청하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마음이란 말인가. 구언(求言)하는 날 말이 지나치더라도 죄주지 않겠다고 이미 전교하였으니 죄를 줄 만한 말일지라도 버려두어야 되는데, 더구나 말한 것이 조금도 죄줄 만한 것이 없는데이겠는가. 만약 어린 임금이라면 혹 기미를 예방해야 할 걱정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덕이 적고 사리에 어둡다고 하더라도 결정하여 행하려고 한다면 어찌 정대붕의 의논을 기다려서 하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찌 일개 정대붕의 말에 미혹되어 결정하겠는가. 그런데 논하는 자들이 기필코 정대붕에게 죄를 준 뒤에야 그만 두려 하니, 또한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하였는데, 이날 양사가 정대붕을 사판에서 삭제하라는 논계를 중지하였다. 경연의 신하들이 처음 상의 분부를 듣고서는 서로 돌아보며 아연실색했었는데 정계(停啓)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 다행스럽게 여겼다.

 

좌의정 김류가 네 번이나 정사하여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으나, 모두 불윤 비답(不允批答)을 내렸다.

 

전라 감사 송상인(宋象仁)이 형조에 이문(移文)하기를,
"능성(綾城)의 수인(囚人) 한선내(韓善乃)는 고신(拷訊)을 받을 적에 스스로 역적 모의를 했다고 했으나, 이는 흉인(凶人)이 죽을 지경에서 살아나려는 계책이었으므로 감히 이를 치계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형조가 아뢰기를,
"이미 역적 모의를 했다고 했으니 본조에서도 처치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금부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다. 회계하기를,
"한선내가 역적이라고 자칭하였으면 번신(藩臣)으로서는 당연히 급급히 치계하여 조정의 처치를 기다렸어야 하는데 심상하게 여겨 범연히 형조에 이문했으니, 일이 매우 해괴합니다. 송상인은 추고하고 한선내는 도사(都事)를 보내어 잡아다가 추국하소서."
하니, 드디어 잡아다가 금부에서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한선내가 고신에 임하여 즉시 자백하고 5, 6인을 끌어 들이니, 상이 고한 것이 부실하다 하여 모두 불문에 부치도록 하고 한선내만 주참(誅斬)하게 하였다.

 

정백창(鄭百昌)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8월 21일 무진

유성이 하고성(河鼓星) 위에서 나와 허량성(虛梁星) 아래로 들어갔다.

 

함경도 안찰 어사(咸鏡道按察御史) 심지원(沈之源)이 치계하기를,
"잠상(潛商)을 적발했는데 토병(土兵) 중에 경상인(京商人)과 함께 호중(胡中)으로 들어가서 사람과 말을 판 자가 9인이나 되었습니다만 유독 정배(定配)를 면하였습니다. 이는 죄를 주는 데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본도에 정배되는 것은 그들이 본디 바라는 것이니, 이들을 모두 효시(梟示)하소서."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일이 매우 경악스러우니 다시 조사하게 하여 실제의 숫자를 계문(啓聞)하게 한 뒤 조처하소서."

 

평안도의 토민 홍대추(洪大秋)가 죄가 있어 사형에 해당되었는데, 노중(虜中)으로 도망하여 들어가서 스스로 부원군(府院君) 홍진(洪進)의 손자로서 제주 판관(濟州判官)을 역임했다고 일컬었다. 그러나 노중에서 이를 믿지 않고 한윤(韓潤)에게 문의하니 사실이라고 했기 때문에 호중에서 한윤과 같이 대우하였다. 감사가 이런 내용을 계문하면서 홍대추의 동생들을 호차(胡差)에게 보이고 그가 토민이라는 것을 명백히 밝힌 다음 홍대추를 되돌려 보내도록 책하고 그 동생들은 특별히 중률(重律)로 다스려 뒤폐단을 막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8월 22일 기사

이때 목릉(穆陵)을 천장(遷葬)하게 되었는데 자전이 기일에 이르러 직접 행행하려 하였으므로 상이 부득이 예관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니, 예관이 예법에 의거하여 중지시키지 못하고 내년 봄으로 물려서 정할 것을 청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예(禮)는 정해진 법제가 있어 이를 무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염의 사대부들 집안에서도 부인(婦人)이 분묘에 가는 예법은 없는데 하물며 제왕의 능침이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후비(后妃)가 행행하는 것은 이미 전거할 고례가 없고 또 전사(前史)에도 볼 수 없으니, 진실로 마음 내키는 대로 바로 행행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지금 자전의 이 분부는 지극한 정회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전례로 헤아려 보면 결단코 행할 수 없는데도 해조의 회계에 내년 봄에 하자고 정하였습니다. 이는 한때의 잘못된 거조일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만세의 뒤폐단을 열어놓게 되는 것이니, 정에서 발로되어 예에서 그친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 차분히 진달하시어 기어이 정지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예관이 이미 강정(講定)하였으니 번독스럽게 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분묘에 제사지내는 것은 고법(古法)이 아닙니다. 한(漢)나라 이래 고친 적이 없기는 합니다만, 부인이 분묘에 가는 것은 전례(典禮)에 기재되어 있지 않으니, 그것이 비례(非禮)임은 분명합니다. 지금 여염에서도 이런 일이 없는데 더구나 궁위(宮闈)의 근엄함과 국모(國母)의 존귀함으로서이겠습니까. 예관으로서는 당연히 예법에 의거하여 방계(防啓)했어야 하는데도 이를 생각하지 않고 기일을 물려 거행할 것을 청함으로써 마치 종당에는 거행할 것 같이 하였으니, 불찰이 심합니다. 예조의 해당 당상과 낭청은 추고하여 무겁게 다스리고 속히 자전께서 배릉(拜陵)한다는 명을 정지시키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번의 이 배릉은 방해됨이 없을 것 같으니 번독스럽게 할 필요가 없다. 예조의 당상·낭청은 모두 잘못한 것이 없으니 추고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자전께서는 일국의 국모이시니 모든 동정(動靜)을 구차스럽게 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궁액(宮掖)과 곤위(壼闈)에서도 진실로 예법에 의거하여 행해야 되는데 더구나 이는 교외(郊外)의 행행이요 먼 산릉(山陵)인데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전성(展省)에 간절한 것이 지극한 정이기는 하지만 예의(禮義)는 절도에 맞게 하는 데 요점이 있는 것입니다. 신들은 처음 성교(聖敎)를 듣고, 해조에서 반드시 예법에 의거하여 따지리라고 여겼었는데, 내년 봄을 기다려 거행하자고 함으로써 마치 응당 행해야 하는 예법인 것처럼 하였으니, 너무도 무례한 처사였습니다. 예조의 당상·낭청은 추고하여 모두 무겁게 다스리고 속히 자전께서 배릉하겠다고 한 명을 중지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번의 배릉하는 일은 그렇게 대단하게 불가한 일은 아닌 듯하니,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예조의 당상·낭청은 잘못한 것이 없으니 추고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이조 판서 정경세(鄭經世)가 차자를 올려 대제학을 체면시켜 줄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상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근래 사명(辭命)을 살펴보면 장유(張維)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 했는데, 정경세가 이 말을 듣고 드디어 체면을 청한 것이다.

 

8월 23일 경오

주강에 《서전(書傳)》 태서편(泰誓篇)을 강하였는데 ‘신하들이 붕당을 만들어 서로 원수가 된다. [朋家作仇]’고 한 귀절에 이르러 상이 이르기를,
"주왕(紂王)의 세대를 당해서 신하들이 붕당을 만드는 폐단이 있었는데 성인(聖人)이 나와서 옛 폐단을 혁신하여 새 왕조를 세웠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붕당론은 수군(水軍)이 그 신역(身役)을 대대로 전해가는 것과 같은 점이 있으니, 어찌하여 이렇게 스스로 고통스럽게 하는가."
하니, 동지경연(同知經筵) 김기종(金起宗)이 아뢰기를,
"만일 고통스럽다면 반드시 이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이를 연줄로 삼아 벼슬길에 나오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길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몸을 닦고 행실을 연마하면 쓰여질 수가 있는데 붕당을 일삼을 것이 뭐 있겠는가. 무릇 붕당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소인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용잡스런 자들은 반드시 연줄을 통해서야 벼슬길에 나올 수 있겠지만 선한 사람의 경우에는 이런 짓을 하지 않더라도 어찌 스스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없겠는가."
하니, 김기종이 아뢰기를,
"사람으로서 누가 기필코 붕당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단지 아들은 아비에게 듣고 손자는 할아비에게 전해 받은 것을 연유하여 이렇게 되었을 뿐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붕당이 없었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옛날의 붕당은 선한 자는 군자의 당이 되었고 나쁜 자는 소인의 당이 되었을 뿐이었는데, 지금은 이와 다르니 진실로 개탄스럽다. 《서전》에도 ‘오직 황제(皇帝)라야 표준을 세울 수 있다.’고 했으니, 반드시 어진 임금이 나와야만이 이런 폐단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나처럼 아둔하고 용렬한 사람이야 어떻게 조정에서 붕당이 제거되기를 바라겠는가."
하였다.

 

8월 24일 신미

서정군(西征軍)의 신역을 감해 줄 것을 의논하였다.
앞서 비국에서 부서군(赴西軍)을 잘 구휼할 것을 청하면서 그들이 거처하고 있는 본읍(本邑)으로 하여금 신역을 감하게 할 것을 청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경기 감사 남이공(南以恭)이 치계하여 경기 백성 가운데 정서군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여 성택(聖澤)을 고르게 받게 할 것을 청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육군과 수군은 다른 것이어서 진실로 일일이 급대(給代)하기가 어렵습니다. 속오군(束伍軍) 가운데 정군(正軍)과 사복 제원(司僕諸員)은 당번(當番)을 감하고 포보(砲保)107)  와 공천(公賤)은 1년 동안의 신역을 감하고 사천(私賤)은 2년을 기한으로 호역(戶役)을 감하여 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귀가 또 차자를 올려 추숭하는 전례(典禮)를 속히 거행할 것을 청하면서 아울러 주자(朱子)의 조묘의장(祧廟議狀)을 써서 올리니, 답하였다.
"경의 식견은 남보다 뛰어난 점이 많다. 차자의 내용은 마땅히 의정(議定)하도록 하겠다."

 

8월 25일 임신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덕(一德) 일심(一心)의 아름다움에 대해 모두들 숭상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지금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지경연(知經筵) 정경세가 아뢰기를,
"일덕 일심은 이치가 당연히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비록 다같이 천리를 품부받기는 했지만 인심은 다른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인심이 같지 않음은 마치 사람들의 얼굴이 다름과 같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조정을 가지고 말하여 본다면 각기 편당이 있는데 예로부터 편당이 있으면 결국은 나라가 망하는 데 이르고야 마는 것이니,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위에 있는 사람이 공명 정대한 마음을 가져 천리에 부합한다면 당연히 군하(群下)의 표준이 되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왕도(王道) 왕의(王義)를 준행하여 탕탕 평평(蕩蕩平平)한 데로 귀결시킨다는 것입니다."
하자, 상이 그 말이 옳다고 하였다.

 

8월 26일 계유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차자를 올리기를,
"선신(先臣)의 유문(遺文) 가운데 책궤에 보관되어 있는 것을 차마 함부로 버릴 수가 없어 찬수(纂修)하여 인출(印出)한 것은 본디 집에 보관하여 두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국내의 서적(書籍) 가운데 인간된 것은 반드시 진어(進御)를 거쳐야 된다고 하였고 어제 전석(前席)에서 직접 부드러운 유시를 받들었으므로 삼가 인본(印本) 22권을 진헌합니다. 인하여 삼가 생각건대, 선신은 성명의 알아줌을 입어 받은 은혜가 매우 중하였고,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그 마음은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수 있습니다. 성상의 아름다운 말이나 아름다운 정사를 볼 적마다 기쁜 빛을 보이지 않은 적이 없었고 혹 잘못된 거조가 있으면 온 종일 근심 걱정으로 보냈었습니다. 이제 신이 감히 선신의 뜻을 미루어 대강 우자(愚者)의 일득(一得)108)  을 바치려고 합니다.
상대를 다스릴 적에는 반드시 성심으로 할 것이요 술수를 부려 군림하지 마시고, 일을 생각할 때는 반드시 삼가서 여럿의 뜻을 어기고 마음대로 자신의 의견만을 주장하지 마십시오. 사기(辭氣)를 너무 드러내어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의 천심(淺深)을 엿보게 하지 마시고, 언로는 반드시 넓혀서 사람으로 하여금 진정을 다 말하게 하십시오. 건건(乾健)을 체득하여 손권(巽權)을 행하는 것109)  이 오늘날 마땅히 힘써야 될 군덕(君德)입니다. 옛사람의 말에 ‘마음이 신중하면 가벼운 외물을 이길 수 있고 체득한 것이 깊으면 조그마한 유혹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말은 간략하지만 뜻은 구비되어 있어 마음 공부를 하는 데는 제일 절실한 말입니다. 삼가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이 올린 차자를 보니 매우 가상스럽다. 그리고 선경(先卿)의 유고(遺稿)를 올려 그것을 대하니 슬픈 감회가 솟구쳐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차자의 끝부분에 진달한 것은 실로 약석(藥石)과 같은 말이니 내가 불민하기는 하지만 이것으로 스스로를 경계하겠다."
하였다.

 

8월 27일 갑술

일본(日本) 대마주수(對馬州守) 평의성(平義成)이 예부(禮部)에 글을 보내어 세공(歲貢)의 방물(方物)을 바쳤다.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서전(書傳)》을 강하였다.

 

8월 28일 을해

강원도 간성군(杆城郡)에서 노비가 주인을 시해한 일이 있었는데 주참(誅斬)하라고 명하였다.

 

8월 29일 병자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상이 이르기를,
"정관(貞觀)110)   때 태종(太宗)이 군신(群臣)들과 이야기하면서 누차 수 양제(隋煬帝) 때의 일을 거론했는데 이는 눈귀로 보고 들은 것을 가지고 경계시키기 위함이었다. 지금도 그러하니 혼조(昏朝) 때의 일을 귀감으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혼조 때의 신하들은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벼슬자리를 잃을까만 걱정했기 때문에 마침내 복패(覆敗)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니, 오늘날 상하 모두가 이것으로 경계를 삼아야 한다. 그리하여 임금의 잘못을 보면 반드시 극력 간쟁하여 임금 사랑하는 마음을 극진히 하고 벼슬을 잃을까 걱정하는 마음을 끊고서 이런 자세로 시종 면려한다면 어찌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지난날 박승종(朴承宗)은 정승의 지위에 있었어도 스스로 ‘이 일은 상이 반드시 따르지 않을 것이니 말해도 무익하다.’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의 도리이겠는가. 신하가 진실로 임금의 잘못을 보았으면 어찌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핑계대고서 말하지 않으려 해서야 되겠는가. 박승종이 아첨하면서 구차스럽게 용납되기를 바란 것이 이러했으므로 결국은 국가가 복패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며, 그 자신도 홀로 온전할 수 없었으니, 과연 무슨 유익함이 있는가."
하니, 검토관 신계영(辛啓榮)이 아뢰기를,
"이제 성교를 받들진대 이는 실로 국가의 복입니다."
하고, 참찬관 강석기는 아뢰기를,
"군신 상하가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 본받아야 할 것이 있으면 본받고 경계해야 할 것이 있으면 경계하면서 이로써 서로 면려한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이제 당 태종이 간언을 잘 따라 주어 훌륭한 정치를 이루었다는 분부를 받드니, 이는 성명께서 서책을 읽으시고 착실히 체득하여 안 데가 있으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옛사람의 말에, 자기 임금에게 간할 뿐만이 아니라 너 자신도 남의 간언을 따르라고 했는데, 이 말이 매우 좋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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