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정축
공조 참판 최진립(崔震立)이 소장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최진립은 무인(武人)으로서 몸가짐이 청근(淸勤)했기 때문에 이 직을 제수한 것이다.
경상도에 토적(土賊)이 매우 치성하여 여염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고 불지르는 데도 주현(州縣)에서 금하지 못했는데, 우병사(右兵使) 이익(李榏)이 초관(哨官) 강우렵(姜遇獵) 등을 보내어 체포하였다. 상이 이익은 가자하고 강우렵은 상으로 포(布)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비변사에서 《소학(小學)》 2백 권을 인출하고 파장(罷場)되기를 기다려 외방 거자(擧子)들에게 시재(試才)해서 반급(頒給)하기로 이미 품정(稟定)했었는데, 외방 유생들이 과거에 응시한 뒤에 현재 서울에 머무르고 있으니, 그들이 흩어지기 전에 정시(庭試)를 실시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일 무인
공청도 암행 어사(公淸道暗行御史) 권심(權淰)이 치계하기를,
"수사(水使) 송영망(宋英望)은 국사에 마음을 다하여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기계(器械)를 정비하였으니 자신의 직무를 잘 거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먼 섬에 사냥 나갔다가 많은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으니 그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다. 병조에서 심상하게 버려둘 수 없으니 먼저 파직시키고 나서 추문하라고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범죄가 작지 않으니 마땅히 이에 의거하여 시행해야 한다. 그러나 그의 재능이 아깝고 전해 들은 것이 또한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기필할 수 없으니 군병의 익사 여부를 본도(本道)로 하여금 조사하여 계문하게 하라."
하였다.
일본 대마주수 평의성이 차왜(差倭)를 보내어 경오년111) 의 세공(歲貢)을 바쳤다.
9월 3일 기묘
유흥치(劉興治)가 차관(差官) 이현(李見)을 보내어 글을 보내 오기를,
"유흥치는 참소를 당하여 대죄(待罪)하고 있다가 황제의 명에 의거하여 차임되어 서쪽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평양에 자문(咨文)을 보내고 전하께 계문(啓文)을 올리기 위해 보낸 차인(差人)이 아직껏 돌아온 사람이 없으니, 그들이 모두 귀국(貴國)에 의해 도륙당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어쩌면 그리도 귀국의 집사(執事)들은 중국을 경시하고 인명을 초개 같이 여긴단 말입니까. 심지어 숯을 굽는 장령들을 영어(囹圄)에 수금하는가 하면 그들의 부녀를 끌어다가 실가(室家)를 삼고 나무하는 무리들까지도 반은 형틀에 묶어 가두고 반은 처형하기에 이르렀으니, 가슴 아픈 일입니다. 생각건대 귀국의 존폐가 걸려 있을 적에 모수(毛帥)가 여기에 있었는데 그때도 이런 거동은 있지 않았습니까.
이번에 유흥치는 성은(聖恩)을 입어 품계를 올려 받고 군사를 더하여 각도(各島)를 통령(統領)하여 상유(桑楡)112) 에서 공을 세울 책임을 부여받았습니다. 따라서 바로 마음을 함께하고 힘을 다하여 조정(朝廷)에 보답할 것을 도모해야 할 때인데, 귀국의 정수(鄭帥)113) 가 보낸 글은 내용이 오만하여 조정을 무시하고 유흥치를 업신여길 줄을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숯을 굽고 군기(軍器)를 만드는 것은 사적인 일이 아닌데 정수가 지방 관리들과 약속하여 일체 용납하지 못하게 하니, 전하께서는 분부를 내리시기 바랍니다. 나무를 베어 숯을 굽고 목재를 깎아서 배를 만드는 것을 엄하게 금하지 말아 피차 서로 편안히 지내면서 마음을 함께하여 오랑캐를 주멸하게 되기를 충심으로 바랍니다. 군대는 정해진 액수(額數)가 있고 군량도 정해진 숫자가 있는데 액수 이외의 병민(兵民)이 실로 많아서 무리를 이루어 이들이 탄식하고 원망하는 것이 진실로 가련하기 그지없습니다. 바라건대 귀국에서는 얼마나마 저축된 식량을 보내어 죽게 된 민생을 살려주기 바랍니다."
하였다. 상이 차관을 접견하니, 차관이 말하기를,
"섬에 있는 사람들이 지금 바야흐로 굶주리고 있으니, 식량의 무역(貿易)을 허락하시어 노약자들을 구제하여 주소서."
하자, 상이 말하기를,
"병화(兵火)를 겪고난 다음이라서 공사(公私) 모두가 바닥이 나 진실로 식량을 잇대기가 어렵소. 그러나 내가 편의에 따라 무역하게 하라는 뜻으로 담당 관리들에게 분부하겠으니 그대로 부중(部衆)에게 신령(申令)하여 억지로 강매하는 폐단을 엄금하시오."
하였다.
양사가 합계하기를,
"한선내(韓善乃)를 당초에 잡아오지 않았으면 그만이지만 이미 잡아다 국문하여 자복받았는데 그의 공사(供辭)가 모두 부실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의 공초에서 거론된 사람은 역시 의심스럽습니다. 역적을 국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어떻게 부실하다고 핑계하고 불문에 부칠 수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상규(常規)에 구애되지 않고 민간이 소란스럽게 되는 폐단을 없애려 하는 의도는 매우 훌륭합니다만, 신들은 생각건대 죄가 있는 자가 혹 상형(常刑)을 벗어나게 되어 간적(奸賊)이 그 사이에서 웃는 일이 있을까 염려스럽습니다. 국청의 계사에 따라 그가 끌어들인 사람들을 잡아다가 국문하여 옥사(獄事)의 체모를 중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의논하여 조처하였으니 번독스럽게 할 필요 없다."
하였다.
경상도 영천현(永川縣)과 공청도 정산현(定山縣)의 유생들이 소장을 올려서 향교(鄕校)를 옮겨 건립하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향교를 옮겨 건립하는 것은 사체가 중대하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지세(地勢)를 살피고 물력을 헤아려 계문하게 한 뒤에 의논하여 조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근래 사습(士習)이 들뜨고 허탄해서 학업은 연마하지 않고서 향교의 자리에만 탓을 돌리고 있다. 계속 이렇게 한다면 3백 주현(州縣)의 향교를 모두 헐어서 옮기게 되는 것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일이 허망한 감이 있고 폐단 또한 작지 않으니 이런 일을 이후로는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9월 5일 신사
천둥 번개가 쳤다. 밤에 유성이 정성(井星) 위에서 나와 삼성(參星)으로 들어갔다.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검토관 최유해(崔有海)가 나아가 아뢰기를,
"처음 입사한 사람은 반드시 살펴서 가려야 하는데 좀 지식이 있는 사람은 애초에 벼슬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적격자를 얻기가 어렵습니다. 전에 이원익(李元翼)은 체신(體臣)으로 남쪽 지방에 내려가 있을 적에 선비들 가운데 재주와 기국이 등용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종사관 등으로 하여금 책자에 기록하게 하여 이조로 보냈었는데, 장유(張維)가 판서로 있으면서 그들을 거의 반이나 기용했었습니다. 지금도 이를 재차 거행해서 모두 수용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에 이르라."
하였다.
헌부와 간원이 배릉한다는 명을 정지할 것을 여러 날 동안 고집하여 간쟁하였다. 간원의 계사에 "시정(市井)의 필부(匹婦)도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상이 이는 공경심이 부족한 소치라고 하자, 정언 윤구(尹坵)가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자전께서 배릉하는 것은 결단코 불가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비례(非禮)인 거둥을 중지하기를 바란 것인데 말을 다듬을 줄 몰라서 스스로 공경이 부족한 죄에 빠지고 말았으니, 체척시켜 주소서."
하고, 정언 이상질(李尙質)도 인피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옥당이 아울러 출사를 명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윤구는 체차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구릉(舊陵)을 파는 것은 10월 4일이고 하현궁(下玄宮)은 10월 21일입니다. 그 사이에 삼전(三殿)과 세자궁(世子宮)의 공상(供上)은 마땅히 소선(素膳)을 써야 하니, 10월부터는 소선을 봉진하라는 뜻으로 각도에 알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자전의 공상은 20일간을 모두 소선으로 봉진하기는 미안스러울 것 같다."
하였다.
충훈부가 아뢰기를,
"이번 천릉(遷陵)할 적에 의정부·종친부·의빈부와 제도(諸道)에서 진향(進香)하는 절차가 있는데, 본부의 등록에도 국장(國葬) 때에는 진향하는 거조가 있습니다. 천릉할 때의 전규(前規)가 없습니다만 삼부(三府)와 팔도에서는 이미 모두 진향합니다. 본부는 훈신의 아문으로서 다른 각사와 함께 의정부에 예속되어 행할 수는 없으니, 이전의 등록에 의거, 각자가 진향례를 거행하게 하여 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6일 임오
정시(庭試)를 실시하여 입격자 가운데 거수(居首)인 이원진(李元鎭)을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 하고, 그 다음인 오첨경(吳添慶) 등은 회시(會試)에 직부하게 하고, 그 나머지 삼하(三下)114) 이상은 모두 급분(給分)하고, 또 장원(壯元) 이하 차하(次下)까지에게는 《소학(小學)》을 반급(頒給)하도록 명하였다.
9월 7일 계미
도승지 강석기(姜碩期)가 아뢰기를,
"산릉(山陵)의 금정(金井)을 팔 때는 총호사(摠護使)와 예조 당상·관상감 제조·도승지가 가 보아야 하는데 금정을 팔 날이 단지 하루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총호사가 지금 정고(呈告) 중에 있으니 어떻게 조처해야 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 번이나 근신(近臣)을 보내어 간청했는데도 따르지 않으니 나도 어찌할 수가 없다."
하였다.
강원도 강릉부(江陵府)의 유생 최언침(崔彦琛) 등이 소장을 올리기를,
"본부(本府)는 바로 고(故) 찬성(贊成)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외향(外鄕)115) 입니다. 온 고장의 선비들이 모여서 의논을 정하여 이미 서원(書院)을 세웠는데 공역(工役)이 준공되었으니, 의당 해서(海西)의 석담(石潭)을 모방하여 특별히 사액(賜額)을 명하소서."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이의 학문의 순수하고 조예가 정미롭고 깊다는 것은 성명(聖明)께서 이미 통찰하고 계시니 다시 진달할 것이 없습니다. 강릉은 바로 그의 외향인데 선비들이 풍격을 듣고 위의를 사모하여 그가 왕래하며 휴식하던 곳에다 서원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조정의 사액을 얻어 이를 긍식(矜式)으로 삼아 공부하는 곳을 만들기 위해 발을 싸매고 올라와 궐하(闕下)에서 부르짖으며 사액할 것을 청하고 있습니다. 전일 해주의 석담 서원(石潭書院)에 대해 조정에서 이미 사액이 있었으니,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는 것이 불가할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두 곳에다 사액함은 타당하지 못한 것 같으니,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이 차자를 올려 사면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정충신이 명을 받들고 출사(出師)했는데 중로에서 배회하면서 전진하려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떠도는 한인(漢人)들을 많이 살해하고서는 스스로 유적(劉賊)116) 의 염탐꾼을 체포하였다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유흥치가 섬으로 돌아와서 무고한 사람 주륙한 것을 책하고 그 모욕이 조정에까지 이르게 되자 정충신이 부득이 사면을 청한 것이다.
9월 8일 갑신
함경도의 열 두 고을에 큰물이 졌다.
좌의정 김류가 출사하여 대죄하면서 아뢰기를,
"삼가 어제 정원에 내린 하교를 보건대 송구스러움을 견딜 수 없어 바야흐로 몸을 이끌고 나아가 사죄하고 능하(陵下)로 나아가겠다고 이미 도감(都監)에 분부하였는데, 예조에서 신이 출사하려 한다는 것을 모르고 또 번거롭게 품계하여 우상으로 하여금 가서 간심(看審)하게 하라는 하교가 있게 되었으니, 신은 더욱 가슴이 떨려 몸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땅에 엎드려 대죄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은 국가의 안위를 떠맡은 사람인데 이처럼 어려운 때에 여러 달을 출사하지 않아 내 마음이 매우 안타깝고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경이 이제 출사했으니 나의 걱정이 없어졌다. 안심하고 대죄하지 말 것은 물론, 가서 총호사의 직임을 수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흥치가 섬으로 돌아오고 난 뒤 조정에 보낸 게첩에 모욕적인 말이 많았었다. 상이 김상헌(金尙憲)에게 명하여 회게(回揭)를 지어 올리게 했다. 김상헌이 이에 그의 무례함을 책하고 곧은 말로 꺾어 누르니, 상이 유흥치의 노여움을 격동시킬까 저어하여 너무 지나친 부분을 삭제하거나 고치라고 명하였다. 그래도 김상헌이 죄다 고치려 하지 않자 상이 기뻐하지 않으니, 드디어 홍문 제학(弘文提學)을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9월 9일 을유
연평 부원군 이귀(李貴)가 차자를 올려 추숭(追崇)하는 일을 논하면서 아뢰기를,
"김장생(金長生)은 단지 할아버지가 있는 것만 알 뿐 아버지가 있는 것은 모르고, 정신(廷臣)들은 종통(宗統)이 있는 것은 알아도 남의 후사(後嗣)가 된 경우는 다르다는 것을 모릅니다. 장생이 숙부라고 칭한 말은 전하께서 이미 그 무리(無理)한 점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정경세(鄭經世)의 종통설(宗統說)에 대해서는 그것이 전거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시의(時議)도 또한 그 한 조목에 현혹되고 있으니, 너무도 생각지 않은 처사입니다.
대원군(大院君)은 선조(宣祖)의 장자(長子)이고 전하는 대원군의 장자로서 선조의 대통(大統)을 곧바로 이어받았으니, 이는 할아버지·아들·손자가 죽 계승한 것으로 바뀔 수 없는 정통(正統)인 것입니다. 이밖에 다시 무슨 대통이 있기에 대원군을 소종(小宗)으로 삼아 종묘에 들어갈 수 없게 한단 말입니까."
하였다. 차자를 들이자, 상이 유중(留中)하고 내리지 않았다.
민광훈(閔光勳)을 정언으로, 조경(趙絅)을 수찬으로, 신득연(申得淵)을 판결사로, 여이징(呂爾徵)을 사인(舍人)으로 삼았다.
신득연은 인품이 사리에 어둡고 벼슬살이하면서 탐오한 짓을 많이 했으므로 송관(訟官)의 장(長)에는 합당하지 못한 자이다. 이징은 몸가짐이 근신하여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역임했다. 그의 아내가 중전(中殿)의 여동생으로서 정백창(鄭百昌)의 처와 함께 궁금(宮禁)을 출입하면서 외간의 여인(女人)을 진헌하는 일을 중개하였는데 이징이 이를 금하지 못했으므로 사람들이 집안을 잘 다스리지 못했다고 비난하였다.
9월 10일 병술
유성이 천봉성(天棓星) 아래에서 나와 천기성(天紀星)으로 들어갔다.
지평 심연(沈演)이 아뢰기를,
"어사(御史)의 임무는 불법한 짓을 살피고 간사한 관원을 규핵하는 것입니다. 조정에서 그들이 계문하는 대로 상벌을 시행하는 것은 그 일을 중히 여겨서인데, 만약 길에 떠도는 이야기로 여기고 시행하지 않는다면 특별히 파견하여 순방(詢訪)하게 하는 의의가 없습니다. 공청 수사(公淸水使) 송영망(宋英望)은 이미 범죄가 있는데다 다시 물을 말한 일이 없으니, 해조의 회계(回啓)대로 시행하시고 속히 본도로 하여금 조사하라고 한 명을 중지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조사하여 조치하여도 무방하니 번거롭게 논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정언 이상질(李尙質)이 아뢰기를,
"이번 별시의 시관(試官)을 주의(注擬)할 적에 예조가 국가에서 과거를 설치하여 사람을 뽑는 의의는 생각하지 않고 조원범(趙元範)·강선여(姜善餘) 등 글을 못하는 용잡한 무리들을 의망(擬望)하여 낙점(落點)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선비들에게 비웃음을 받게 만들었으니 해조(該曹)의 혼암으로 인한 잘못이 너무 심했습니다. 예조의 해당 당상과 낭청은 모두 추고하여 무겁게 다스리소서.
악역(惡逆)은 천하의 극죄(極罪)입니다. 그가 이미 자수한 이상 번신(藩臣)으로서는 당연히 사실을 일일이 열거하여 치계하고 조정의 처치를 기다렸어야 하는데, 전라 감사 송상인(宋象仁)은 일찍이 한선내(韓善乃)의 옥사를 심상하게 여겨 범연히 형조에 이문(移文)했으니, 이는 국가의 상헌(常憲)을 무너뜨리고 뒷날의 큰 폐단을 열어놓은 것입니다. 송상인을 우선 파직시키고 나서 추고하소서.
내승(內乘) 이후여(李厚輿)는 역적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킬 때 서로(西路)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수부(帥府)의 호령을 따르지 않고 관수(官守)를 버린 채 도주하여 목숨을 구차스레 보존했습니다. 그래서 당초 종군했던 사람들은 모두 한번 잡아서 마음껏 분풀이를 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기강이 진작되지 못하여 군율(軍律)을 시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연줄을 통하여 빌붙어서 다시 사판에 끼이게 되었고 엊그제의 정사(政事)117) 에서 이 직에 제배되었으므로 물정이 더욱 놀라고 통분해 합니다. 파직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후여는 체차하라. 예조의 당상과 낭청은 추고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평안도 선천군(宣川郡)에 큰비가 내리고 우박이 쏟아졌으며 또 큰 눈이 내렸다. 박천군(博川郡)에는 태풍이 불고 비와 우박이 쏟아졌다.
9월 11일 정해
옥당의 많은 관원들이 돌려가면서 서로들 병을 핑계하고 입직(入直)하려 하지 않자 정원이 추고하기를 청하였고 본관(本館)에서 또 패초(牌招)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한 사람도 오는 사람이 없자 조야(朝野)가 모두 놀랐다. 이미 모두 특명(特命)으로 추고하게 했는데 본관에서 다시 패초하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국체(國體)에 손상이 되니 다시 패초하지 말라."
9월 12일 무자
조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검토관 최유해(崔有海)가 아뢰기를,
"주왕(紂王)이 망하게 된 것은 달기(妲己)118) 에게서 연유하고 주(周)나라가 흥기하게 된 것은 관저(關雎)119) 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폐조 때의 구습이 하나라도 궁중 안에 남아 있으면 혹 오염될 걱정이 없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임금이 실덕(失德)은 여색에 연유되는 경우가 많다. 멀리 걸(桀)·주(紂)를 귀감으로 삼을 필요가 뭐 있겠는가. 지난날의 일을 살펴보면 된다."
하였다. 영경연(領經筵) 오윤겸(吳允謙)이 아뢰기를,
"사람의 마음은 한결같이 할 수가 없는 것이어서 처음에는 잘 지키다가 나중에 잘못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외치(外治)는 볼 만하지만 내덕(內德)은 부끄러운 것이 많은 사람도 있는데 당(唐)나라의 태종(太宗)과 현종(玄宗)이 그런 사람입니다. 임금은 반드시 학문에 힘을 써서 뜻을 성실하게 하고 마음을 올바르게 한 연후에야 시종 결손됨이 없이 내외가 한결같게 되는 것입니다. 진실로 자신의 덕을 성실하게 할 수 없으면 하루아침에 별난 모양의 사람이 되어 마침내는 혼미한 데 이르러도 스스로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항상 경계심을 지니고서 마음을 잊지 않고 잘 지키면서 보존하는 사람이라야만 덕을 쌓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지난번 조강에 입시했을 적에 따로 묘사(廟祠)를 세워야 한다는 의논이 신에게서 나왔다고 이귀(李貴)가 했다는데 그때에는 신이 듣지 못했었습니다. 그 뒤 이귀의 차자에서 매양 신이 그 의논을 따른다고 했는데 신이 대략 그 이유를 진달하겠습니다.
고상(故相) 신흠(申欽)이 신에게 문의하기를 ‘따로 묘사를 세운다면 어떻겠는가?’ 하기에, 신이 당초 익히 생각하지 않은 채 즉시 응하기를 ‘나의 의견에는 별로 미안할 것이 없다고 여겨진다.’ 하였습니다. 뒤에 다시 생각하여보니 따로 묘사를 세우는 것이 지금에는 그래도 예묘(禰廟)가 될 수 있지만 후세에 이르면 아울러 조묘(祖廟)가 되게 되니, 이것은 2묘(廟)가 되는 혐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뜻으로 다시 신흠에게 얘기했더니, 신흠이 ‘공의 말이 옳다’ 했었습니다. 지금 이귀는 단지 신의 처음 말만 듣고서 그 상세한 것은 알지 못한 채 증거로 제시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귀의 소견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근자에 잇따라 올린 차자의 내용에는 전개한 의논이 어떠한가?"
하자, 오윤겸이 아뢰기를,
"이귀가 신이 있는 곳에 올 적마다 반드시 이 일에 대해 말합니다만 신은 본디 예경(禮經)에 어두워 일정한 의견이 없으므로 감히 쉽사리 말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건대 창업(創業)한 임금의 경우 처음 종묘(宗廟)를 세워 부조(父祖)를 추존하는 것은 이미 전대(前代)에 정해진 제도가 있고 또 사리에서도 합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일을 가지고 말하여 본다면 성상의 공덕이야 창업한 것과 다를 것이 없지만,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은 것은 창업한 것과는 다릅니다. 비록 부모를 추존하려는 지극한 정회에서 이 일을 행하려고 하십니다만 신은 감히 예법에 합당하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중용(中庸)》에 ‘그 지위에 올라서는 선왕(先王)의 예법을 행하고 선왕의 음악을 연주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이미 그 지위에 오르지 않았다면 추존하는 호칭을 가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미 승부례(陞祔禮)를 거행하였는데 또 조천(祧遷)할 위패(位牌)가 있게 된다면 어찌 제사를 지내고 효도를 극진히 하는 도리에 있어 혐의스럽지 않겠습니까. 신의 소견은 이러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 조정에서는 정궁(正宮)의 소생이 아닐지라도 사위(嗣位)하게 되면 자기의 어머니를 추존하고 있는데 우리 나라는 이와 다르다. 중국에서는 어찌하여 그 예법을 거행할 수 있는 것인가?"
하니, 오윤겸이 아뢰기를,
"신하들이 굳게 간쟁하게 되면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중국의 일은 모두 그것이 불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만 당시에 간쟁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폐조 때에도 자신의 어머니를 추존했습니다만 한 사람도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어찌 통탄스런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폐조 때의 일은 과연 해서 안 될 일이었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그와 크게 다르다."
하였다. 최명길(崔鳴吉)이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지난번 경연 석상에서 미안스런 하교가 많았다고 하는데 신이 생각건대 의혹스럽습니다. 전에 없던 일을 당한 데다가 또 전거할 만한 예법이 있으니, 논자(論者)들이 가타부타하는 것은 공(公)을 위해 다투는 것이요 사(私)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오직 양쪽을 잘 살펴서 중정(中正)을 찾으면 되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시비를 서로 다투다가 결국 서로 배척하게 되어 국가에까지 화를 입힌 경우가 매우 많았습니다. 천명과 인심의 향배(向背)가 여기에서 나뉘는 것이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따로 묘사(廟祠)를 세우는 것이 지금에는 합당한 것 같지만 뒤에는 곤란한 점이 있다는 영상의 말이 옳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큰일을 당한 사람은 의당 화평한 마음과 온화한 기운으로 서로 의논하여 결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중국 조정에서도 선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때의 명류(名流)들이 모두 그 화를 입었으니, 후세에 살펴보는 사람의 마음에 유감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큰일은 진실로 상례에 구애되어서는 안 된다. 성묘조(成廟朝)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경의 말대로라면 마치 길가에다 집을 짓는 것과 같으니 언제 결정이 나겠는가."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패초해도 나오지 않은 옥당의 많은 관원이 모두 논핵을 받았으니, 부교리 이성신(李省身)을 패초하여 입직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임금이 명소(命召)하면 신하된 사람은 멍에 메기를 기다리지 않고 조정으로 달려오는 것이 바로 옛사람이 임금을 섬기던 예법이다. 전에 박승종(朴承宗)의 무리는 자신의 욕심이 차지 않거나 나태한 마음이 싹틀 때면 문을 닫고 드러누워 임금이 명소해도 나오지 않았으니, 이미 신하로서의 예절이 없었다. 그런데 임금도 그들의 오만한 잘못을 바로 잡아주지 않고서 계속해서 누차 명소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상하가 도리를 잃은 것이다. 내가 비록 아둔하고 용렬하지만 이 습성을 증오해 온 지 오래다. 억지로 청하여 국체를 손상시키고 싶지 않다."
하였다.
정세구(鄭世矩)를 전라 감사로, 김집(金集)을 세자 익위사 위솔(世子翊衛司衛率)로 삼았다. 김집은 김장생(金長生)의 아들인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아버지의 학문을 잘 전수받았다. 반정(反正)한 처음에 학행(學行)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그때 김집이 참여되었다. 누차 벼슬에 제배(除拜)하는 명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이 직에 제배되었다.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천릉(遷陵)할 때의 복색 단자(服色單子)를 보니 ‘위에서는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데 능을 파고 망곡(望哭)하는 날부터 우제(虞祭)가 지난 뒤에 벗고는 백의(白衣)로 3개월을 끝내며, 백관들도 같다’고 되어 있습니다. 신들은 예법을 잘 모르기는 합니다만 삼가 의심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의례(儀禮)》 상복기(喪服記)에는 개장(改葬) 때 시마복을 입는다고 했고, 한유(韓愈)의 개장복의(改葬服議)에는 시마복을 입고 3개월이 지난 뒤에 벗는다고 되어 있으니, 이는 반드시 시마복을 입고 3개월을 끝마치는 것입니다. 자사(子思)가 사도(司徒) 문자(文子)의 물음에 답하기를 ‘예(禮)에 부모를 개장(改葬)할 적에는 시마복을 입고 개장한 뒤에는 벗는다.’고 했고, 개원례(開元禮)에는 ‘개장하고 나서 벗는다.’고 했고, 구준(丘濬)의 《가례의절(家禮儀節)》에는 ‘개장하고 우제(虞祭)를 끝마치고 나서 시마복을 벗고 소복(素服)으로 돌아온다.’ 했으니, 이는 개장한 뒤에 즉시 벗는 것입니다.
오늘날 취사(取捨)를 강구함에 있어 이 두 조항을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해조에서 이에 백의(白衣)로 3개월을 끝마치는 예제(禮制)를 만들었으니, 신들은 그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우제를 지낸 뒤에 시마복을 벗는 한 이는 진실로 자사(子思)의 설(說)에 근거를 두는 것이니 개장할 때의 복색은 이와 같이 할 따름입니다. 만약 정설(鄭說)을 따라 3개월이 지난 뒤에야 벗는다면 당연히 시마복을 입고 그 달수를 끝내야 하는 것이니, 따로 시마복을 벗은 뒤에 백의를 입을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두씨통전(杜氏通典)》에 원준(袁準)이 말하기를 ‘상사(喪事)에는 두 번 복을 입는 법이 없다. 그러나 슬픔이 극심하면 복이 없을 수 없지만, 달수를 끝마치려 한다면 이는 두 번 복을 입는 것이 된다. 길이 멀다면 그 기간을 지나도 되겠으나 길이 가깝다면 열흘이면 된다.’ 했는데, 이 말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더구나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개장할 때 이미 거행한 예법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선조(先祖)의 고사(故事) 또한 증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니 의당 예관으로 하여금 다시 참고하여 결정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개장할 적에 시마복을 입는 데 대해 자사(子思)가 문자(文子)의 물음에 대한 것, 왕숙(王肅)이 논한 개원례(開元禮), 《대명집례(大明集禮)》, 구준(丘濬)의 《가례(家禮)》에는 모두 개장한 뒤 즉시 벗는 것을 옳다고 했고, 정현(鄭玄)의 《의례(儀禮)》주(註), 가공언(賈公彦)의 《의례》소(疏), 한유(韓愈)의 개장복의(改葬服議), 주자(朱子)가 문인(門人)에게 답한 데에는 모두 3개월을 마치는 것을 옳게 여겼습니다. 고금의 예법에 대한 의논이 이와 같이 서로 같지 않기 때문에, 사대부의 집안에서 어버이를 개장할 적에는 이 두 가지 논의에 의거하되, 시마복은 개장한 뒤 즉시 벗더라도 시마복을 벗은 뒤에 감히 즉시 길복(吉服)을 입지 못하고 소복(素服)으로 3개월을 마칩니다. 이는 예법은 후한 데를 따른다는 뜻입니다.
이제 정원의 계사를 보건대 의견이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선릉(宣陵)·정릉(靖陵)의 개장 때 등록(謄錄)을 상고하여 보니 ‘위에서 시마복을 입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백관을 거느리고 곡림(哭臨)했으며 시사(視事)할 적에는 흑립(黑笠)·백의(白衣)·흑대(黑帶)를 썼는데 개장할 때 이르러 중지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대명집례》에 기재된 시왕(時王)의 예제(禮制)가 저와 같고 선조(先朝)에서 이미 거행한 전례가 또 이와 같습니다. 신은 스스로 자신의 의견을 옳다고 감히 할 수 없으니, 대신과 다시 의논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3일 기축
연평 부원군 이귀가 또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생각건대 천릉할 날이 박두했고 지문(誌文)도 거의 끝마쳐 가는데 아직도 전하께서 고위(考位)의 호칭에 대해 특별히 정탈(定奪)하는 하교가 없으니, 신은 삼가 민망하기 그지없습니다. 듣건대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 부인(夫人)의 명정(銘旌)을 쓰던 날 선조(宣祖)께서 명묘(明廟)에게 출계(出繼)했기 때문에 감히 부인이라고 쓰지 못하고 왕백모 모씨지구(王伯母某氏之柩)라고 썼다고 합니다. 더구나 지금 조정에서는 전하께서 비위(妣位) 호칭하는 것을 부인(夫人)이라고 씀으로써 전하로 하여금 예경(禮經)에 위배되는 지경으로 귀착시키고 있으면서도 조정이 오히려 ‘대례(大禮)를 우리가 이미 정했다.’ 하고 있습니다. 지금 계책으로서는 ‘대원군 정원군(大院君定遠君)’이라는 여섯 글자를 삭제하고 단지 지문(誌文)에 ‘광해(光海)가 죄를 얻어 폐위되었으므로 장자(長子) 모(某)의 아들 모(某)가 장손(長孫)으로서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어받았다.’고 쓰는 것이 제일 상책이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뒷날 추숭할 수 있는 계제가 될 뿐만이 아니라, 또한 아들은 아버지에게 벼슬을 줄 수 없다는 의리에도 해가 되지 않겠습니다. 삼가 성명께서는 성충(聖衷)으로 결단하시어 속히 예관에게 정탈하게 하소서."
하였다. 차자를 올리니, 유중(留中)하고 내리지 않았다.
일본 대마도에서 평성륜(平成倫) 등을 보내어 경오년조의 방물(方物)을 바쳤다.
9월 15일 신묘
평안도 벽동군(碧潼郡)에 태풍이 불고 눈이 4자나 쌓였으며, 안주(安州)·정주(定州)에는 큰비가 내리고 우박이 쏟아졌다.
유흥치(劉興治)가 차관(差官) 이광유(李光裕)를 보내어 은(銀) 3만 냥을 가지고 와서 식량을 무역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연평 부원군 이귀가 차자를 올렸다. 군병을 한 곳에 모으게 하라는 명을 파하여 그들로 하여금 집에 있으면서 변을 기다리게 해놓고 서서히 사기(事機)의 완급(緩急)을 살펴 진퇴에 수응케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6일 임진
함경도 안찰 어사(咸鏡道按察御史) 심지원(沈之源)이 육진(六鎭)의 일을 조목별로 진달하기를,
"여러 고을의 기계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그 가운데 화포(火砲)의 숫자가 매우 적었습니다. 그리고 투구는 머리를 덮어씌울 수 없고 갑옷은 몸을 가릴 수 없어 모두 쓸 수가 없었는데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성지(城池)가 곳곳에 형체가 없어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부령성(富寧城)은 북쪽으로 소산(小山)과의 사이에 넓고 깊은 못이 있어서 형세가 좋은 것 같았고 제구(諸具)도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내성(內城)이 공고하지도 않고 높지도 않았습니다. 회령성(會寧城)은 들판에 있는데 둘레가 너무 넓은 데다가 못이 매우 얕고도 좁았습니다. 또 그 안에 샘이 없었습니다. 종성성(鍾城城)은 회령과 같았는데 공고하지도 않고 높지도 않은 것은 더 심했습니다. 또 큰 산이 성중(城中)을 내려다 보고 있기 때문에 형세가 제일 좋지 않았습니다. 온성성(穩城城) 또한 들판에 있었는데 그 둘레가 너무 넓었고 못이 얕고도 좁은 것과 내성이 공고하지 않은 것은 종성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경원성(慶源城)도 온성과 같았습니다. 경흥(慶興)은 성의 북쪽이 절벽이라 형세가 매우 좋았는데 내성은 너무 넓었고 못은 얕고도 좁았습니다. 행영(行營)의 성은 반은 산기슭을 의지하고 반은 평지에 있었는데 성내에 샘이 너무 적었습니다. 그리고 각 고을의 성가퀴는 모두 제도에 맞지 않고 설치한 것이 매우 적어 수어(守禦)에 크게 방해가 되었습니다. 군병들 또한 매우 단약한 상황이어서 변방의 일이 매우 한심스럽습니다."
하니, 이 일은 비국에 내렸다.
내수사(內需司) 공사(公事)에 대한 것을 이조에 관유(關由)했는데 정랑(正郞) 윤계(尹棨)가 즉시 거행하지 않자 상이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헌부가 태오십(笞五十)에 해당시켜 속바치게 하라고 하니, 상이 노하여 파직시키라고 명하였으므로 식자(識者)들이 걱정하였다.
9월 17일 계사
장령 고부천(高傅川)이 아뢰기를,
"전 좌랑(佐郞) 윤계를, 내수사의 공사를 즉시 거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파직까지 시킨 것은 사체(事體)에 미안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본사(本司)의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윤계를 파직시키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윤지경(尹知敬)은 병 때문에 해직되어 전리(田里)로 물러가 있기는 합니다만 접반(接伴)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당연히 병을 무릅쓰고라도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뻔뻔스레 비국(備局)에 정장(呈狀)하여 결국 체면되었으니 신하로서 어려운 일을 피하지 않는 의리가 너무도 없습니다. 먼저 파직시키고 나서 추문하소서.
이지천(李志賤)이 병을 칭탁하고 가지 않은 것은 일이 매우 경악스러운데 접반사 나덕헌(羅德憲)이 장황하게 병세를 설명하면서 뻔뻔스레 치계했으니, 조정을 경멸한 방자하고 외람스러운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파직시키소서. 그리고 이지천이 뱃멀미 때문에 하륙(下陸)했다는 것을 진위사(陳慰使)가 이미 계문했으니, 방백(方伯)이 간여할 일이 아닌데도 평안 감사 김시양(金時讓)은 항해를 할 수 없다는 등의 말로 또 장계를 올려 마치 신구(伸救)하는 것처럼 했습니다. 그가 사체를 돌아보지 않고 멋대로 사심(私心)을 행한 잘못이 큽니다. 엄중히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윤지경은 연전의 호란(胡亂) 때 군전(軍前)으로 달려가기를 자원했었으니 어려움을 피하려는 사람이 아니다. 실정 밖의 말은 하지 말라. 윤계는 하교한 일을 봉행하지 않았으니 파직시키는 것이 불가하지 않다. 나덕헌은 추고하라."
하였다.
9월 19일 을미
전 선전관 이응인(李應寅)이 임진난(壬辰亂) 때 묘사(廟社)를 호위한 공이 있었는데도 유독 상을 받지 못했다는 것으로 글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상이 충훈부(忠勳府)에 하문하니, 회계하기를,
"그때 묘사(廟社)의 시위(侍衛)에 대해 낙점한 일은 지금 전거할 문서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때 묘사를 받들었던 관원인 강선(姜璿)·한천두(韓天斗) 등에게 문의하였더니, 선조 대왕은 영변(寧邊)에 계시고 분조(分朝)는 의주(義州)에 있을 적에 묘사의 호위관(扈衛官)을 차정했는데 이응인이 임발영(任發英)과 동시에 낙점받은 것이 확실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한천두 등과 일체로 논상해도 불가할 것이 없겠습니다만, 세월이 오래된 일이어서 한두 사람의 말만 가지고서는 사실로 믿기가 어렵습니다."
하자, 답하기를,
"강선 등은 반드시 속이지는 않을 것이다. 공은 중한 것을 따른다는 법전에 의거, 헤아려서 시상(施賞)하라."
하였다.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자 검토관 최유해(崔有海)가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등주(登州)에 갔을 때 《의례(儀禮)》 경전(經傳)을 구하였으나 얻지 못했는데, 모두들 북경의 서점(書店)에는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나라는 단지 도산 서원(陶山書院)에 1건(件)이 있는데 안동(安東)에 있는 활자(活字)를 도봉 서원(道峯書院)에다 저장해 놓았다고 하니, 교서 제조(敎書提調) 정경세(鄭經世) 등으로 하여금 헤아려 인출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상이 흥정당(興政堂)에서 야대(夜對)를 명하였는데 승지 윤황(尹煌), 옥당의 이경증(李景曾)·최유해(崔有海), 가주서(假注書) 이도장(李道長), 사관(史官) 신상(申恦)·이해창(李海昌) 등이 입시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강이 끝나고 좌우(左右)가 인사하고 물러가려 하자 상이 소환(小宦)에게 명하여 배반(杯盤)을 내어오게 한 다음 먼저 큰 술잔으로 한 잔 마셨다. 소환이 또 하엽배(荷葉杯)로 행주(行酒)하니 윤황이 마실 수 없다고 사양하자, 상이 이르기를,
"술잔 잡은 모습을 보니 마실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술잔이 4, 5순배에 이르자 최유해(崔有海)가 사양하면서 아뢰기를,
"혹시 실례할까 두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실례한들 무슨 손상될 것이 있겠는가. 다 마시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한 순배를 더하니 좌우가 잔을 잡고 사양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부터 야대할 때에는 반드시 양껏 마시기에 이르렀으니, 지금도 음식은 변변찮지만 모쪼록 취하도록 마시라."
하니, 최유해가 아뢰기를,
"정신이 혼란해져서 엎어져 실의(失儀)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세종조 때는 술은 석 잔을 넘지 않았으므로 실례하는 데 이르지 않았으니 이는 진실로 본받아야 된다. 성종조 때에는 학사(學士)들이 취하여 엎어져 나아갈 수 없게 된 경우가 매우 많았었다고 하니, 또한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조종(祖宗)의 고사는 모두 본받을 만한 것이다."
하였다. 술이 일곱 순배를 돌자 윤황이 사양하기를,
"너무 심하게 취했으니 삼가 물러가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 순배만은 다 마시도록 하라."
하였다. 순배가 끝나자 취하여 부축을 받으면서 나왔는데 밤은 이미 삼고(三鼓)였다.
9월 20일 병신
이기조(李基祚)를 좌부승지로, 조석윤(趙錫胤)을 헌납으로 삼았다. 조석윤은 성질이 단아하고 문화(文華)가 풍부하여 대각을 출입하였으며, 인망(人望)이 높았다.
9월 21일 정유
조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영경연(領經筵) 김류(金瑬)가 아뢰기를,
"고문(古文)인 《서전》·《대학》 등의 서책에 착간(錯簡)이 있기는 합니다. 검토관 최유해가 지금 고정(考定)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 말은 타당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경상도 암행 어사 이경의(李景義)가 치계하기를,
"영해 부사(寧海府使) 유대일(兪大逸)은 정사가 지체되고 간사한 아전들이 용사(用事)하기 때문에 차역(差役)이 고르지 못하여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고 있으니, 조정으로 하여금 처치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조에서 파직시켜야 된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유대일은 자리만 지키고 앉아 녹봉만 받아먹었는데 유백증(兪伯曾)의 아버지라서 논핵을 면할 수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암행어사가 계문했기 때문에 파직시킨 것이다.
9월 23일 기해
보령현(保寧縣)에 있는 성묘(聖廟)에 도둑이 들어 공자(孔子)와 증자(曾子)·맹자(孟子)·안유(安裕) 네 분의 위판(位板)을 훔쳐내다가 불태워버렸으므로 본도에 명하여 위판을 다시 만들고 이어 위안제(慰安祭)를 지내게 하였다.
9월 24일 경자
수원 부사(水原府使) 장신(張紳)을 평안 감사로 삼았는데, 장신이 소장을 올려 사퇴하니 상이 허락하고 이어 전의 직임을 제수하였다.
지중추부사 김상헌(金尙憲)이 또 차자를 올려 홍문관 제학을 사퇴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9월 26일 임인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검토관 최유해가 나아가 아뢰기를,
"자녀를 둔 외로운 과부들이 제때에 혼인을 시키지 못하고 있으니, 정상이 매우 가긍합니다. 옛날 성묘조 때에는 중외에 하교하여 듣는 대로 관에서 혼사비용을 지급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에 의거, 시행해서 성덕을 빛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원에서 분부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정언 정지우(鄭之羽)가 아뢰기를,
"강경(講經) 때 추생(抽栍)하여 녹명(錄名)하는 것은 실제 호봉(糊封)120) 하는 것과 같으니, 엄하게 하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혼조 때에는 일곱개의 대문(大文)을 미리 외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니, 참으로 매우 통분스럽고 놀라운 일입니다. 근래에는 절대로 이런 습관이 없었는데 이번 별시의 강경 때에 사관(四館)에서 녹명할 적에 선후(先後)가 있었기 때문에 바깥 의논이 분분하게 되었습니다. 양소(兩所)의 주장관(主掌官)을 먼저 파직시키고 나서 추문하고 동참한 사관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잡아다가 추문하라고 하였다.
9월 27일 계묘
유성이 여귀적시성(輿鬼積尸星)에서 나와 헌원대성(軒轅大星) 아래로 들어갔다.
헌부가 아뢰기를,
"김중청(金中淸)이 죽은 것은 그의 아우 김득청(金得淸)의 저주(詛呪) 때문이었으니, 김중청의 아들 된 자가 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관에 발고하여 추문하기 바라는 것은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러나 김득청의 일 때문에 그의 조모(祖母)가 옥하(獄下)에서 목을 매었으니, 그가 시종 잘 돌보아 구호하지 못한 탓으로 목숨을 잃게 한 죄는 실로 윤기(倫紀)에 관계가 됩니다. 김중청의 아들 김주민(金柱旻)·김주국(金柱國)·김주우(金柱宇)·김주한(金柱漢) 등을 모두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경차관(敬差官) 이탁(李濯)은 경솔하게 정범(正犯)에게 고신(拷訊)을 가하여 곧바로 죽게 만들었고, 또 나이가 차지 않은 아이를 고신하였으니, 법을 어긴 죄가 큽니다. 예안 현감(禮安縣監) 김진(金瑨)과 봉화 현감(奉化縣監) 홍은(洪檃)은 옥사(獄事)를 다스리던 당초에 감사의 분부를 기다리지 않고 무거운 태장(笞杖)을 가하였으니, 또한 매우 놀랍습니다. 아울러 먼저 파직시키고 나서 추문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탁 및 김진·홍은 등은 모두 추고하라."
하였다.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이귀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대원군에 대해 이미 고(考)라고 칭하였으니, 능원군(綾原君)에게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한 것이 어찌 사리에 맞는 조처이겠습니까. 김장생(金長生)은 예위(禰位)를 숙부라고 칭하였고 조익(趙翼)은 조부(祖父)의 뒤를 이었으니 출계(出繼)한 것과 다름이 없다고 이야기했는데 이는 매우 무례한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처음 창업(創業)한 임금은 추숭할 수 있지만 대를 이은 임금은 안 된다.’고 합니다만, 예경(禮經)을 상고해 보건대 이렇게 근거 없는 이야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성충(聖衷)으로 결단하시어 속히 대례(大禮)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만이 이렇게 개탄하고 있지만 조정의 의논은 허락하지 않고 있으니 누가 옳은지 모르겠다."
하였다.
이경의(李景義)를 헌납으로, 이경증(李景曾)을 부교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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