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3권, 인조 8년 1630년 10월

싸라리리 2025. 12. 29.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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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병오

황태자 탄생의 경사로 인하여 별시(別試)를 베풀고 정뇌경(鄭雷卿) 등 10인을 뽑았다.

 

10월 2일 정미

예조가 아뢰기를,
"개장(改葬) 때의 우제(虞祭)를 지금 강정해야 합니다. 신들이 《대명집례(大明集禮)》·《두씨통전(杜氏通典)》·《가례의절(家禮儀節)》 등의 책을 참고해 보니, ‘주인 이하 처첩의 자녀들은 시복(緦服)을, 주친(周親)121)   이하는 소복(素服)을 갖추고, 제례가 끝나면 주인 이하는 별도의 장소로 가 시복을 소복으로 갈아입고 돌아온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본다면 우제의 복색은 시복을 써야 하는데 선릉(宣陵)·정릉(靖陵) 개장시의 등록을 상고하니 ‘백관과 헌관 및 제집사는 오사모(烏紗帽)·흑단령(黑團領)·오각대(烏角帶)를 착용하고 예를 행한다.’ 하였습니다. 선조에서 이미 행한 예(禮)와 고례(古禮)가 크게 서로 다르니, 어떤 예를 따라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신들이 평소 예경(禮經)에 어두워 감히 경솔하게 절충할 수 없으니 대신들에게 다시 의논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대신들이 시복으로 제례를 행하는 것은 이미 《통전》·《집례》·《의절》 등의 책에 나타나 있으니 이에 따라 예를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오는 11월에는 자전(慈殿) 탄일과 동지절의 진하(陳賀) 행사가 있습니다. 동지 망궐례는 상께서 시복을 입고 있는 상중(喪中)이라도 폐할 수 없을 듯하나 본조(本朝)의 진하와 자전·대전의 탄일 진하는 미안한 감이 있으므로 감히 여쭙니다."
하니, 본조 진하는 행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10월 3일 무신

민성징(閔聖徵)을 평안 감사로, 조익(趙翼)을 대사성으로, 김세렴(金世濂)을 집의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지금 경상도 암행 어사의 서계를 보니 ‘백성들 사이에서는 「흉년이 들면 기근이 두렵고 풍년이 들면 빚을 독촉하여 받아들인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모두 삶을 즐기는 마음이 없습니다.’ 하였다. 농사가 잘되면 백성이 즐거워하는 것은 고금이 같은데, 우리 백성의 근심과 원망은 어느 때이건 그러하니 내 마음이 슬프다. 아, 백성의 부모가 되어 백성이 흉년에는 죽음을 면할 수 없게 하고 풍년에도 얼굴을 찌푸리며 수근거리게 하니, 하늘이 견책을 보임도 괴이할 게 없다. 남녘땅이 이러할 때 서북쪽은 알 만하며, 농사가 어지간히 된 곳도 이러하니 전혀 안 된 지역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해조로 하여금 오래된 빚을 양감(量減)하게 하여 민력(民力)을 펼 수 있게 하라."

 

10월 4일 기유

정원이 아뢰기를,
"전일 경연에서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가 ‘안주(安州)에서 중화(中和)까지의 대로변 고을은 중국인과 호인(胡人)이 왕래할 때 쇄마(刷馬)를 공급하는 폐해가 외진 고을보다 백배 더하니, 징수하는 곡식을 감하여 조금이나마 은혜를 보여 주라.’고 하였습니다. 수신(帥臣)이 대로변의 폐해를 목도하고 이러한 의견을 아뢰었으니, 안주 동쪽의 다섯 고을은 1결당 1두씩 감하는 것이 실로 편리할 듯 합니다. 그러나 먼 외방의 일을 멀리서 헤아리기는 어려우니 향신(餉臣)에게 참작하여 아뢰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5일 경술

한인(漢人) 이성룡(李成龍)이 도망쳐 충청도에 살고 있었는데, 상이 가도로 쇄송(刷送)할 것을 명하였다.

 

10월 6일 신해

헌부가 아뢰기를,
"신하가 명을 받으면 임무의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아야 하는데, 수원 부사 장신(張紳)은 근래 서문(西門)의 중임을 받고 소를 올려 면하기를 바랬습니다. 이것이 비록 상례라고는 하지만 모자의 사사로운 정으로 임금에게 아뢰어 반드시 체임되기를 원했으니 극히 외람됩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해조에서는 외람된 상소를 곡진히 좇아 심지어 어미를 돌보기에 불편하다는 등의 말로써 태연히 회계(回啓)하였으니, 이조의 당상과 낭청을 엄중하게 추고하소서.
순천 현감(順天縣監) 강대진(姜大進)은 시종(侍從)으로 고을 원에 나갔으니 몸가짐을 청렴 근면하게 해야 할 것인데 백성에게 폐해를 끼치며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난이 있고, 고산 현감(高山縣監) 송석몽(宋錫夢)은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소문이 원근에 파다하니, 모두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강대진은 절대 청렴치 못할 리가 없고 송석몽은 부임한 지 오래지 않으니, 모두 번거롭게 거론치 말라. 장신은 추고하라."
하였다.

 

상이 주강에 《서전(書傳)》 홍범편(洪範篇)을 강하고 이어 상수지학(象數之學)을 언급하였다. 지경연(知經筵) 최명길(崔鳴吉)이 아뢰기를,
"하도(河圖)·낙서(洛書)는 그 이치가 심오합니다. 복희(伏羲)와 대우(大禹)는 그림을 보고 그 이치를 알았으며,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찾아가자 기자가 그 법을 더 깊이 추구하고 보태어 진술하였습니다. 상수에 관한 학은 필부도 오히려 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제왕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종사할 필요야 없지마는 그 수(數)는 알아두는 것도 무방하다. 지금 누가 그것을 잘 아는가?"
하니, 명길이 아뢰기를,
"듣건대 문학 이상형(李尙馨)이 조금 이해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눌하여 말을 잘 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경세(鄭經世)와 이상형 중 누가 나은가?"
하니, 특진관 장유(張維)가 아뢰기를,
"신은 누가 나은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상형이 경세보다 반드시 나은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이어 사(思)자의 뜻을 논하였는데, 장유가 아뢰기를,
"사람의 행위가 선하냐 불선하냐는 모두 사려가 밝느냐 밝지 못하느냐에서 연유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인에 대해 말한다면 어떤 일이 불선한가?"
하니, 시독관 최유해(崔有海)가 아뢰기를,
"성덕(聖德)은 참으로 말할 만한 흠이 없습니다. 다만 하교하실 때 실정 이외의 말씀을 신료들에게 하시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성을 참지 못하여 그런 것입니다. 신은 그 점을 안타깝게 여깁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나의 병통은 말하는 데에 있는 것인가?"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본(本)과 말(末)로 말하자면 생각은 본이자 체(體)이며, 말은 말이자 용(用)입니다. 고인들은 반드시 말하는 데 대한 공부를 하였는데 어찌 사(思)자에 대해 공력을 기울이지 않았겠습니까."
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유해의 말이 과연 매우 절실합니다. 그 병통의 근본을 따져보면 생각하는 공력에 혹 미진한 바가 있기 때문에 중도에 벗어나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참으로 좋다. 생각을 말의 근본으로 삼는 것이 더욱 절실하겠다."
하고, 이어 장유에게 남쪽 지방의 민속에 대해 물었다. 장유가 아뢰기를,
"토호들의 폐습은 수령의 힘으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남쪽 지방에는 토호(土豪)가 예전부터 있어서 신역을 피하려는 양민들이 토호에게 많이 귀속한다고 하던데 지금도 그러한가?"
하자, 장유가 아뢰기를,
"지방에서 세력을 부리는 자가 자기의 휘하에 양민을 은닉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로 적발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10월 7일 임자

유흥치(劉興治)의 차관(差官) 동 천총(董千摠)이 오니 예빈시에 관소(館所)를 정하도록 명하였다. 그의 답서에,
"멀리 사신을 보내어 하문하여 주시고 서한까지 보내주셨습니다. 하사하신 갖가지 진귀한 예물은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동쪽으로 전하를 사모하지만 한번 뵈올 길이 없습니다."
하고, 또,
"바꾸어 주실 곡식은 원래의 수효대로 틈을 보아 속히 운반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한편 주단(紬段) 등의 물건을 바쳐왔는데 호조에 넘기라고 명하였다.

 

석강에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검토관(檢討官) 유성증(兪省曾)이 나아가 아뢰기를,
"자전께서 능(陵)을 참배하는 일은 실로 지극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성상께서도 거역하지 못하시지만, 생각해 보면 이 거동은 예에도 맞지 않는데다 시기 또한 어려워 모두 행해서는 안 된다고들 합니다. 신은 일찍이 대간의 직임에 있으면서 이미 의견을 아뢰었습니다. 원컨대 성상께서는 조용히 말씀드려서 잘못된 일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대답하지 않았다.

 

문안관 정유성(鄭維城)이 가도(椵島)에 들어 갔다. 유흥치(劉興治)가 ‘기공대첩(奇功大捷)’ 4자가 쓰여진 붉은 기를 높이 세우고, 군장(軍將)의 배하(拜賀)를 받은 후 문안관을 접견하였다. 흥치가 말하기를,
"섬 안에 식량을 보급할 길이 없어 굶주림을 면치 못합니다. 부득이 물화를 보내 양식을 바꾸고자 청했던 것인데 겨울이 닥쳐도 쌀을 실은 배가 오지 않아 배를 보내 실어 오려고 했지만 소요를 일으킬까 걱정되어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당초에 섬 안에서 방해되는 것을 제거했던 일은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이 일이 귀국과 무슨 상관이길래 심지어 군사까지 일으킵니까. 천조(天朝)를 범하는 노적(奴賊)은 일찍이 토벌하지 않으면서 천조를 위해 해를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군사를 들이대려고 하니, 이는 무슨 의도입니까. 기왕의 일이라 내 마음에 두지 않았지만 지금 마침 조용하므로 말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어 잔치를 베풀고 음악을 갖추어 대접하였다.

 

10월 8일 계축

예조가 아뢰기를,
"능을 옮길 때 재궁(梓宮)을 밖으로 내어 영악전(靈幄殿)에 안치하면 시위할 관원이 있어야 하니, 병조·도총부 위장(都摠府衛將)과 선전관·내삼청(內三廳)을 나누어 파견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9일 갑인

삼성 추국청(三省推鞫廳)이 아뢰기를,
"김득청(金得淸) 저주 사건은 이미 단안을 내렸지만 주민(柱旻) 형제가 조모를 잘 돌보지 않아 목매어 죽게 만들었으니 그들도 감히 죄를 면할 수 없습니다. 대체로 그 아비가 득청의 저주로 죽었으니 아비의 원수를 갚고자 함은 인정과 천리상 반드시 그럴 수 있는 일이고, 그 자식이 옥중에서 죽었으니 여인네로서 비통해 하는 것 역시 인정상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인정과 법을 참작함은 오직 상의 재가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자고로 형벌 받은 악인이 매우 많았지만 그 부모가 이 때문에 자살한 경우는 전혀 없었다. 주민 등이 이 점에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은 혹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복수하려는 마음이 아무리 절실하다 해도 형제가 많으니 3인이 관아에 있을 때 1인은 조모를 보호하였다면 아비의 복수나 손자의 도리에 모두 흠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를 생각지 못하고 조모가 가는 대로 내버려 두어 막대한 변고가 생기도록 하였다. 죄의 경중을 논한다면 큰형이 가장 중하니 주민을 조율(照律)하여 시행하고 나머지는 분간하는 것이 합당할 듯하다. 의계(議啓)하도록 하라."
하였다. 국청이 다시 아뢰기를,
"주민을 본부(本府)에서 조율하도록 하였습니다. 주민이 중한 율을 적용받는다면 형제 3인들도 그 죄를 홀로 면할 수 없다고 합니다. 등급을 감하여 논죄함이 좋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슬하에 있지 않았던 손자들이 죄를 입어 벌받는 이상 곁에 있으면서 구원하지 못한 며느리만이 죄를 면할 수는 없다. 득청의 처도 치죄하도록 하라."
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당초 일이 나던 날이 바로 조모와 서로 헤어진 날이었는데, 두 자식이 곤장을 맞기까지 하자 조모가 주민(柱旻) 등을 원수처럼 본 것은 필연적인 형세입니다. 때문에 주민 등이 비록 관대히 위로하며 화해하고자 해도 또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어찌 주선하여 선처할 방도가 없었겠습니까. 그 정리를 감안하여 죄를 박하게 준다면 조손(祖孫)의 윤리가 분명하지 못하고, 그 행적에 근거하여 중률로 다스린다면 복수하려는 뜻을 펼 수가 없게 됩니다. 신들이 감히 가볍게 의논할 수 없으니 대신들에게 상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대신들이 아뢰기를,
"득청 처의 원정(元情)을 비록 믿을 수는 없지만 ‘남편과 세 아들이 일시에 옥에 들어갔고, 시어미는 자기 자식이 형장을 받을 때 멀리서 고문하는 소리를 듣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관인들에 쫓겨날 때 시어미를 잃어버렸는데, 당황하여 도망가는 사이 옥 아래에서 시어미가 목을 매었으므로 미처 풀어서 구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 형세를 상상컨대 거짓말은 아닌 듯합니다. 부녀자가 변고를 당하여 선처하지는 못했지만 남자와는 차이를 두어야 될 것 같습니다. 오직 상의 재가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여인네가 함께 같은 곳에 있었다면 쫓겨나더라도 서로 잃어버릴 리는 없을 듯하다. 설사 쫓겨났다 하더라도 버리고 혼자 간 것은 효가 아니다. 이로써 따진다면 그 죄가 주민보다 무겁다. 또한 부모 섬기는 도리는 남녀에 차이가 있을 수 없다. 만약 가벼운 죄로 논단한다면 내 생각에는 주민 등이 불복할 것 같다."
하자, 대신들이 아뢰기를,
"성상의 비답이 매우 합당하니 금부로 하여금 주민과 한가지로 조율하여 단죄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12일 정사

좌참찬 홍서봉(洪瑞鳳), 형조 판서 장유, 호조 판서 김기종(金起宗), 호조 참판 안응형(安應亨) 및 당상과 당하의 조관(朝官) 18인이 연명하여 예조에 정서(呈書)하기를,
"예전 세종조에 관찰사 이정간(李貞幹)이 잔치를 베풀고 그 어머니에게 헌수(獻壽)하였는데, 그 일이 알려지자 중관(中官)을 보내어 문안하는 은전이 있었습니다. 그후 고(故)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 판서 윤돈(尹暾), 진흥군(晋興君) 강신(姜紳), 동지(同知) 홍이상(洪履祥)이 수친계(壽親契)를 만들어 잔치를 할 때 선조 대왕께서 악(樂)을 내려 그 아름다운 일을 격려하였는데, 지금까지 사람들이 미담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서봉 등도 또한 노모가 있어 모두 칠순을 넘겼습니다. 그래서 계를 만들어 수연(壽宴)을 행하려 하는데, 옛 병조(兵曹)를 빌려서 하루 동안 예를 행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 건물이 관청이기 때문에 부득불 유사에게 아룁니다. 그리고 관공 건물에서 예를 행하자면 음악을 사용하는 것도 마음대로 하기 어렵습니다."
하였는데, 예조가 이것을 아뢰니, 답하기를,
"원하는 대로 빌려 주고 일등악(一等樂)을 내려 주라."
하고, 이어 각기 설면자(雪綿子) 2근씩을 하사하였다.

 

호조가 포흠(逋欠)122)  을 탕감하라는 하교에 따라, 임술년 이전의 포흠은 모두 탕감하여 조정의 실질적인 은혜를 알게 하자고 청하니, 답하였다.
"그중 살아 있는 사람인 경우 비록 임술년 이전의 것이라도 전부 감해 주기는 어려울 듯하다. 모두 탕감해 준다면 면제 액수가 10여 만 석 이상일 것이니 작은 일이 아니다. 대신에게 문의하고 다시 아뢰어 처리하라."

 

10월 13일 무오

간원이 말하기를,
"국가에서 역적의 가산을 훈신에게 떼어 주면 훈신된 자는 공경히 받아야 할 일인데 양릉군(陽陵君) 허적(許𥛚)은 조그마한 땅을 차지하고자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고 버젓이 차자를 올려 심지어 교서에 추록(追錄)할 것을 청하기까지 하다가 정원에서 기각당하였으므로 듣는 자들이 침을 뱉고 비루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처사에 혹 미진한 점이 있다 할지라도 원훈(元勳)의 일은 경솔히 논해서는 안된다.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민광훈(閔光勳)을 정언으로 삼았다.

 

대마도주 평의성(平義成)이 정관(正官) 평성(平成) 등을 보내 유황 등의 물건을 바치며 좋은 매와 인삼·호피를 요구하였다.

 

금나라에서 보낸 아지호(阿之戶)·동남명(東南明)·김돌시(金乭屎) 등이 추신사(秋信使)로 왔다. 동남명은 우리 나라 북도(北道) 토병(土兵) 박중남(朴仲男)이다.

 

10월 14일 기미

남원 부사(南原府使) 박정(朴炡)이 적당(賊黨)을 많이 죽여 혹 그를 원망하는 자도 있었는데, 밤중에 도적이 관사에 들어와 칼로 그의 왼쪽 다리에 상해를 입혔다. 비국이 아뢰어 청하기를,
"박정에게는 70세 된 양친이 있으니 법으로 보면 체직되어야 하지만 당초 특별히 제수하였기 때문에 감히 정장(呈狀)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런 변고를 당하였으니 그 곳에 그대로 두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르고 목장흠(睦長欽)으로 대체하였다. 이어 정청(政廳)에 하교하기를,
"장흠이 일찍이 수령이었을 적에 아속(衙屬)들을 지나치게 많이 거느렸었으니 큰 고을에 임용해서는 안 되지만, 능하다는 명성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 이 직에 제수한다."
하였다.

 

10월 15일 경신

유생들을 전강(殿講)하였다.

 

지중추부사 서성(徐渻)이 아뢰기를,
"국조(國朝)의 기로소(耆老所)는 바로 옛날의 상상(上庠)과 동교(東橋)의 제도에서 유래된 것으로, 태조 대왕께서는 전 왕조가 이미 행하여 오던 규례에 의거하여 은전을 더욱 융숭히 하시고, 기영회(耆英會)에 행차해서는 보축(寶軸)에 서명을 하시어 이제까지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봄가을 연회에 선온(宣醞)과 사악(賜樂)을 하는 것이 이미 전해오는 규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임진년 이후 제도 문물이 공허해졌으나 그래도 옛일을 찾아 명색이라도 보존하려는 데 뜻을 두고 수십 년 이래 연회를 베푼 것이 모두 네 차례였습니다. 풍정(豊呈) 후 즉시 설행(設行)하려 했으나 연이어 흉년이 닥치고 또한 북경이 포위되는 변고를 만나 아직까지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이달에 여러 대신을 맞이하여 잔치를 베풀어 늙은이를 우대하는 은전을 이루소서."
하니, 상이 일등악(一等樂)을 내려 빛내주도록 명하였는데, 마침 천릉(遷陵)하는 예를 익히느라 결국 시행하지 못하였다.

 

10월 17일 임술

유흥치(劉興治)가 유격(遊擊) 이견(李見)을 용강(龍岡)에 보내 곡물 운반을 감독하게 하였다. 이때 서로(西路)의 여러 고을이 공사(公私)간에 재물이 탕갈되었었는데 한인(漢人)들이 일으키는 소요의 폐단은 갈수록 심하였다. 이견이 하인들을 거느리고 삼화(三和)에서 용강에 와 군량 수천 석을 내도록 재촉하면서 강이 얼어붙기 전에 수송하려고 한다 하니, 조정에서 허락하였다.

 

10월 20일 을축

상이 주강에 《서전(書傳)》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지경연 정경세(鄭經世), 특진관 장유(張維) 등이 내수사(內需司)의 폐해를 두루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말하는 자들은 모두 ‘내수사는 임금의 사사로운 재산이니 이는 공정한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지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조종조에서 설치한 의도는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대체로 궁중에 재물을 비축하는 곳이 있어야 임금이 낭비하는 걱정을 면할 수 있다. 임금이 만약 절약하는 의리에 어두워 유사가 관리하는 재물을 남용한다면 그 해가 필시 민생에 미칠 것이다. 지금 이 내수사는 털끝만큼도 백성의 힘을 빌지 않으면서 나라에 도움이 되는 것이 적지 않으니 또한 제왕의 낭비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정경세와 장유가 아뢰기를,
"상의 하교도 그럴 듯합니다만 이 사(司)를 혁파하지 않고는 그 폐단이 제거되지 않습니다. 지난날 사노비 중 주인을 배반하고 투속한 자들이 매우 많습니다. 심지어는 옛 주인을 가두어 욕보이는 등 못하는 짓이 없으므로 보고 듣는 이들이 통분해 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근래에 들으니 외방에도 그러한 일이 있다 하니 한심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정경세가 또 아뢰기를,
"자전께서 능에 참배하려는 일은 양사에서 논쟁한 지 오래인데 전하께서 줄곧 굳게 거부하시니 삼가 성덕(聖德)이 손상될까 염려됩니다. 자전의 정이야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마는 국모의 동정은 신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일이 후세의 잘못된 예가 되어 끝없는 폐를 길이 남기지 않으리라 어찌 장담하겠습니까. 여염집 부인도 누군들 묘에 올라가 참배하며 곡하고자 하는 정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부인네는 남자와 달라 정에 따라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는 것은 예(禮)를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존엄한 국모의 경우이겠습니까. 그리고 선조 대왕 지문(誌文) 중 성경(聖敬)의 ‘경’자가 소경(昭敬)의 ‘경’자와 중첩된 것은, 소경의 ‘경’자가 중국에서 증시(贈諡)한 줄 만을 알았지 성경의 ‘경’자를 ‘예(睿)’자로 고친 줄은 모른 것입니다. 16자 휘호(徽號)를 당시에 과연 고쳤는지의 여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경’자는 필시 고쳤을 것인데 초안을 내올 당시 멍청히 살피지 못하였으니 신의 죄가 큽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쓰여진 본을 한두 곳에서만 본 것이 아닌데도 모두 지나쳐 버렸다. 혼조(昏朝)에 이르러 자화자찬할 의도로 망령되이 선왕의 휘호를 가상하였으니 매우 무리한 일이다."
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하늘에 계신 선왕의 영령께서는 혼조에서 올린 호를 분명히 받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에 신은 반정 초에 종묘에 고하여 신주를 고쳐 쓰자고 청하였었습니다."
하였다.

 

10월 21일 병인

상이 전라 감사 정세구(鄭世矩), 공청도 수사(公淸道水使) 이경여(李慶餘), 마전 현감(麻田縣監) 박희현(朴希賢), 종성 판관(鐘城判官) 배시량(裵時亮) 등을 인견하였는데, 우승지 박홍미(朴弘美)가 입시(入侍)하였다. 상이 세구에게 이르기를,
"남쪽 사람들은 성질이 강경하여 선한 일을 하는 자는 반드시 그 충의를 끝까지 다하고 악한 짓을 하는 자는 반드시 그 흉악함을 다한다. 지난번 남원(南原)의 도적들은 심지어 지방 수령에게까지 칼부림을 하려고 하였다. 이대로 간다면 앞으로 그들의 무리가 불측한 변을 일으키지 않을까 참으로 염려된다."
하니, 세구가 대답하기를,
"신이 외람되게 중임을 맡고 보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난민을 다스림에 있어서 서둘러서도 안 되고 느슨해서도 안 되지만 멀리서 헤아릴 수 없으니, 감영에 당도하여 적절하게 처리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도에 맞도록 하기란 어렵다. 저들 괴수야 죽여도 되지만 옥석(玉石)을 분간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경은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이경여에게 수영(水營)의 일을 묻고 또 이르기를,
"성지(城池)가 아무리 험하고 무기가 아무리 좋더라도 인화(人和)가 되지 않는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군졸들을 어루만져 인화를 급선무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박희현이 아뢰기를,
"소신은 이문(吏文)으로 등용되었으니 승문원의 일을 아뢰겠습니다. 국가에서 이습관(肄習官)을 설치하고 다시 이문 학관(吏文學官)을 두었지만 모두 과거 공부로 업을 삼고 이문은 전공하지 않으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비록 국가가 위난을 당할 때일지라도 사대(事大)의 글은 폐할 수 없습니다. 미리미리 배우고 익혀 인재가 되게 해서 후일에 쓸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매우 합당하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착실히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10월 22일 정묘

앞서 한인(漢人) 이성룡(李成龍)이 우리 나라에 표류해 와서 공청 수사(公淸水使) 송영망(宋英望)에게 의탁하고 있었다. 영망이 수군으로 서쪽에 나갈 때 성룡이 그를 따라 갔는데, 유흥치(劉興治) 휘하의 하상진(夏尙進) 등에게 발견되었다. 그 후 차관(差官) 이매(李梅)가 와서 상에게 그를 쇄환할 뜻을 말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성룡이 비국에 정장(呈狀)하여 일단 섬에 들어 가면 반드시 죽을 형편이라고 하였다. 이에 비국이
"성룡의 정황이 매우 가련하니 쇄환시켜 반드시 죽는 지경에 놓아 두어서는 안 됩니다. 혹시 다시 따지는 일이 있으면 서서히 의논하여 처리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평안 감사 민성징(閔聖徵)이 부임차 하직 인사를 드리니, 상이 불러 보고 묻기를,
"서쪽 변방은 재정이 탕진된데다 한인(漢人)들의 침탈하는 걱정을 만나 살아 남은 백성들이 정착할 수가 없으니 참으로 민망하다. 이 폐해를 없애려면 어떠한 계책을 써야 하겠는가? 소요를 일으키는 무리는 바로 반장(叛將)의 휘하들이니, 우리 나라 수령은 지나치게 두려워하여 굴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고시(告示)한 대로 하나하나 엄히 금해야 한다."
하니, 성징이 아뢰기를,
"청천(淸川) 이북은 그 화가 더욱 참담합니다. 모두가 위로하여 불러 모은 백성이므로 방어하고자 해도 힘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안주(安州)를 국경 방어의 경계선으로 삼아 청천 이북 백성을 무관심한 지역에 놓아 두었으니 이는 옳은 계책이 아닙니다. 만약 선천(宣川)과 철산(鐵山) 등의 지방에 대진(大鎭)을 설치하고 떠도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백성이 정착하고 군졸이 둔전(屯田)을 하도록 하여 백성을 안정시키고 적을 제어하는 계책으로 삼는다면, 한인(漢人)들도 이후로는 두려워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해빙으로 길이 막히기 전에 흥치(興治)를 찾아가 ‘지나치게 소란을 피우는 자는 비록 중국 사람이라도 도적으로 취급할 수 밖에 없고 사태가 부득이하면 무기를 사용하여 금지시킬 것이다.’고 말하라. 그리하면 아마도 두려워 꺼리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하였다.

 

10월 23일 무진

광주(廣州) 사람 김극형(金克亨)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대원군에 대하여 이미 ‘고(考)’라 칭하였으니 아버지의 명분이 있다 하겠지만 종묘에 모시지도 못하고 제사를 주관하지도 못합니다. 이는 아버지의 명분은 있으면서 아버지의 실상은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명분은 있으면서 아버지의 실상이 없다면 그 명분도 헛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단지 죽은 이를 섬기는 예로만 말한다면 참최(斬衰)의 복을 입어 그 슬픔을 표하고 제사를 모시어 그 정성을 다하며 종묘에 모셔서 그 신(神)을 편안케 하여야 합니다. 어찌 아버지라 하면서 참최의 복을 입지 않고, 참최의 복을 입으면서 제사를 모시지 않으며, 제사를 모시면서 종묘에 모시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논자들은 ‘대원군이 전하에게는 아버지요 어른이지만, 조종(祖宗)에 대해서는 신하요 아랫사람이니 어찌 왕노릇하지 않은 사친(私親)을 왕들의 종묘에 들일 수 있겠느냐.’고 합니다. 만약 공이 없고 왕노릇하지 않았다 한다면 그럴 수 있거니와, 왕노릇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묘에 모실 수 없다고 한다면 전하께서는 공이 없기 때문에 아버지를 섬기지 않은 셈이 되니 너무나 윤리를 어지럽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원군은 전하의 아버지이며, 성묘(成廟)는 전하의 5대조입니다. 5대조의 체천(遞遷) 때문에 아버지를 아버지로 대우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차라리 지위를 버리고 떠나가 부자의 윤리를 온전케 할지언정 어찌 하루라도 그 지위에 편안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정원이 아뢰기를,
"그의 언사가 도리에 어긋나고 오만하여 차마 보지 못할 곳이 있고, 또 광주가 서울에서 지척간인데 병이 중하다 칭탁하고 노비를 대신시켜 소를 올렸으니, 실로 음흉하고 교활합니다. 그런데도 관찰사 남이공(南以恭)은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올려 보냈으니 추고를 명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주강에 《서전(書傳)》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상이 특진관 이서(李曙)와 지경연 홍서봉(洪瑞鳳) 등에게 이르기를,
"지난번 유흥치(劉興治)를 토벌한 일을 사람들은 모두 그르다 하지만 중국 조정의 여러 장수들은 군사를 일으켰다는 보고를 듣고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니 우리 나라 신민과는 소견이 다르다."
하니, 서봉이 아뢰기를,
"중국 사람들도 흥치를 적으로 여기나 근본 세력이 이미 형성되었기 때문에 쉽사리 처리하지 못합니다. 우리 나라도 어떻게 해야 그 뒷처리를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10월 24일 기사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서전(書傳)》을 강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유성증(兪省曾)이 나아가 아뢰기를,
"이 편(篇)에는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에 대한 경계가 들어 있습니다. 임금이 제일 먼저 살펴야 할 것 중에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은 없습니다. 좋아하고 미워함이 이미 공정한 데서 나왔다면 나라를 다스림에 진실로 어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필히 요·순으로 법을 삼아 그 사이에 사사로운 뜻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현재의 일로 말한다면 어떤 일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중도를 잃었는가?"
하자, 성증이 대답하기를,
"어떤 일이 편벽되게 좋아하고 미워한 데서 나왔는지 신은 모르겠으나, 대개 임금은 지극히 공정함으로 법을 세워야지 사사로운 뜻을 사람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10월 25일 경오

앞서 평안 감사 김시양(金時讓)이 치계하기를,
"유흥치를 흠차(欽差)123)  하였다는 설이 섬 안에서 나왔지만 칙명은 실제 내려오지 않았으니, 지금부터 중외(中外)의 문서에 모두 ‘흠차’ 두 자를 쓰지 말아야 합니다."
하였는데, 비국에서도 시양의 의논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 하니, 상이 따랐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상차하기를,
"가도(椵島)의 사태는 군사를 출동시킨 뒤에 마침 변하였으니 우선 기미책(羈縻策)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그를 공격하여 멸할 수도 없는데, 다시 격분시켜 변을 독촉한다면 어찌 좋은 계책이 되겠습니까. ‘흠차’ 두 자는 사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에 소견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미 참작하여 정하였으니, 지금 다시 고치기는 어렵다."
하였다.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상이 ‘오직 임금만이 좋은 음식을 먹는다.’는 대목까지 읽고 경연 석상의 제신들에게 이르기를,
"지난 폐조(廢朝) 때에 간신들이 법을 멋대로 하여 상과 벌을 마음대로 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팔도 수령의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좋은 음식 드는 것이 임금보다 더하였다. 세력을 믿고서 이처럼 사치를 하였으니 어찌 그 뒤가 좋을 리가 있겠는가."
하니, 특진관 김수현(金壽賢)이 아뢰기를,
"오늘날 시정(市井)의 무리들이 서로 다투어 사치하는 것은 대개 그 남은 폐습이 아직 가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동지사(同知事) 박동선(朴東善)은 아뢰기를,
"부유한 상인은 참람하여 기강이 없습니다. 법관(法官)이 금단하고자 해도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폐습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매우 한심스럽다. 나만갑(羅萬甲)이 법부(法府)에 있을 때 가장 기풍이 있었기 때문에 시정 백성들이 자못 위축되었었다 한다. 만갑이 지금 비록 죄를 얻었으나 그 사람됨을 논한다면 실로 법관에 합당하다. 경은 한 부(府)의 장관이니 백성의 풍속을 살펴서 바루는 것이 직책이다. 삼가서 기풍을 실추시키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동선이 대사헌이었으므로 이러한 하교가 있었다.

 

10월 26일 신미

헌부가 아뢰기를,
"의빈부(儀賓府) 도사(都事) 허채(許寀)는 역적 허균(許筠)의 조카로서 연좌의 율을 면한 것은 비록 너그러이 사면해 준 조정의 은전이기는 하지만 위인이 거칠고 비루하여 거두어 쓰기에 합당치 않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체차하라고 답하였다.

 

앞서 강원도 어사 최혜길(崔惠吉)이 돌아와 상에게 아뢰기를,
"강릉(江陵) 연곡역(連谷驛)은 옛 현(縣)입니다. 지금까지 성묘(聖廟)가 남아 있는데 몇 년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강릉에 성묘가 있는 이상 한 고을에 둘을 둘 수 없어 위판(位板)을 먼지 구덩이에 방치하여 관리하는 사람이 없으니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예조에서 참작하여 조치하도록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강릉부에 성묘가 있는데 폐현에 또 위판(位板)을 두는 것은 부당하니 정결한 곳에 묻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상이 계의장(稽疑章)까지 읽고 하교하기를,
"이 편은 오로지 복서(卜筮)만을 언급하였는데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이는 상(商)나라 풍속이 귀신을 숭상하였는데, 아마 그 유풍인 듯하다. 경사(卿士)와 서민(庶民)이 찬동치 않음은 살피지 않고 거북과 시초 점(占)만을 중시하였으니 이상하지 않은가?"
하니, 시독관 유성증(兪省曾)이 아뢰기를,
"순(舜)임금 때에는 ‘내 마음을 먼저 정한 뒤에 거북점을 친다.’라는 말이 있으니, 이는 중시하는 뜻이 아닙니다. 먼저 자기 덕을 닦고 복서(卜筮)에 물으니, 이른바 ‘귀신에 질정하여도 의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 혼조(昏朝) 때에는 복설(卜說)에 현혹되어 궁중의 자질구레한 일까지도 반드시 점을 쳤다. 덕을 닦지 않고 무당 귀신을 믿는 자는 오히려 해를 받는 것이다."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천릉(遷陵) 때 만장(挽章)을 여러 신하들이 모두 지어 올렸는데, 허적(許𥛚)이 지은 것은 매우 괴벽하였기 때문에 본원에서 다시 짓도록 하였지만 굳이 흠이 없다고 하면서 한 자도 고치지 않았습니다. 하교하신 뒤에야 비로소 약간의 글자를 고쳤지만 온당치 않은 여러 말은 끝내 고치지 않았습니다.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28일 계유

연평 부원군 이귀가 차자를 올리기를,
"부자간의 의리는 천자에서 서인에 이르기까지 귀천에 관계없이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예를 의논하는 자들은 왕위를 계승한 것만을 중하게 여겨 부자간의 대륜(大倫)을 폐하여 전하의 종묘(宗廟)를 아버지 신위가 없는 종묘로 만들려 합니다. 전하께서 대원군에 대하여 무엇 때문에 제사를 주관하거나 종묘에 모시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오늘날 조정 신하들은 전하가 조부(祖父)에게서 왕위를 이어받았다는 것을 이유로, 전하로 하여금 조부에 압존되어 자식의 도리를 다할 수 없게 하려고 하니, 어떤 예경(禮經)을 근거하여 감히 이같은 인륜을 무시한 설을 주장하여 8년 동안이나 부자의 큰 인륜을 정하지 못하게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원군에 대하여 ‘고(考)’라 칭하면서도 아직 신주를 여염집에 두어 마치 사친(私親)으로 대하는 듯함이 있으니, 전하가 ‘고’를 칭하는 실상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속히 묘(廟)를 세워 윤기(倫紀)를 바르게 하소서."
하니, 상이 안에 두고 계하하지 않았다.

 

상이 금차(金差) 야지호(阿之戶)·동남명(東南明) 등을 숭정전(崇政殿)에서 접견하였다.

 

10월 30일 을해

헌부가 아뢰기를,
"공청 도사(公淸都事) 손필대(孫必大)는 집이 본도에 있어 열읍(列邑)에 폐해를 끼쳤으니 파직하고, 황해 도사(黃海都事) 김집(金集)은 인망이 없으니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지경연 이귀가 아뢰었다.
"성상께서는 학문상의 공부가 부족하므로 좋아하고 싫어함이 분명치 않아 선악이 뒤섞이니 조정을 화합하게 하는 아름다움을 바라지만 역시 어렵지 않겠습니까. 학문이란 정치의 큰 근본입니다. 조광조(趙光祖)가 화를 입은 이후로 유풍(儒風)이 사라져 갔으며,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이 한 시대의 군자였지만 또한 소인배들의 참소를 입었으므로 근래에는 학문을 하려는 선비가 더욱 없으니 진실로 한탄스럽습니다. 왕세자의 춘추가 한창인데 좌우에 보필하는 선비가 없으니, 학문을 숭상하고 선비를 조성하는 것이 현재의 가장 급선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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