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3권, 인조 8년 1630년 11월

싸라리리 2025. 12. 29.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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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병자

부제학 이현영(李顯英) 등이 차자를 올려 자전이 능을 참배한다는 명을 중지하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이번은 일단 거행하고 나중에 법식으로 삼지 않게 하면 불가할 것이 없다."

 

완풍 부원군(完豐府院君) 이서(李曙)가 능에 거둥할 때 근읍에 있는 어영군(御營軍)을 징발하여 호위케하기를 청하니, 상이 수자리를 마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여 허락치 않았다.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書傳)》을 강하였다.

 

11월 2일 정축

부교리 최유해(崔有海)가 상소하였다.
"세자를 책봉함은 종사의 큰 근본이며, 위로 천자에게 고함은 번방(藩邦)의 대의입니다. 봄이 되면 즉시 사신을 파견하소서. 호차(胡差)를 접대함은 비록 임시 방편이기는 하지만 먼저 백성의 힘을 고갈시켜서 도적을 받들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임금이 직언을 용납하여 받아들임은 실로 치도(治道)에 관계됩니다. 남선(南銑)이 안악(安岳)에 제수된 것을 사람들은 모두 직언 때문에 폄직(貶職)된 것이라고 하니, 신은 그를 애석히 여깁니다."

 

사직단에 기청재(祈晴祭)를 지냈다. 예조가 아뢰기를,
"구릉(舊陵)을 파는 기일이 하루밖에 안 남았는데 내리는 비가 조금도 개일 가망이 없습니다. 《오례의》를 상고해 보니, 발인(發引) 하루 전에 사직에 날씨가 개기를 기도한 내용이 있습니다. 예에 따라 거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4일 기묘

목릉(穆陵)의 재궁(梓宮)을 모셔 내어 영악전(靈幄殿)에 봉안하였다. 도승지 강석기(姜碩期), 주서 최욱(崔煜), 사관 정치화(鄭致和) 등이 명을 받들고 가서 배시(陪侍)하였고, 병조와 도총부의 당상, 낭청 등은 각기 군인을 거느리고 빈전을 지켰다. 상은 시복을 입고 숭정전 계단 위에서 망곡례(望哭禮)를 행하고, 세자는 뜰에서 곡하고, 백관들은 흰모자·베옷·마대(麻帶)를 착용하고 뜰 아래에서 곡하였다.

 

가도(椵島)의 차관(差官) 이표의(李豹義)가 유흥치의 표문(票文)을 지니고 항복한 달자(㺚子)와 사냥개를 거느리고 의주부(義州府)에 달려 와서는 음식 제공을 요구하면서 마을 민가들을 침탈하였다. 부윤이
"현재 공궤(供饋)하라는 관찰사의 명이 없으니 너희가 여기에 왔다 하더라도 지레 식량을 공급해 줄 수는 없다."
고 하니, 이표의가 크게 노하여 모인 사람에게 난사하였다. 관리들이 위세에 눌려 흩어지니, 부윤이 거스를 수 없어 마침내 그들의 인마(人馬)를 먹여 주었는데 요구에 응한 것이 적지 않다고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하룻밤 사이에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 능소(陵所)를 생각하니 매우 걱정이다. 그 중 왕자군(王子君)은 자라온 환경이 다른 사람과 다르니 추위를 견딜 수 없을 듯하다. 병이 나면 의약을 조금도 지체해서는 안 되니, 내의(內醫) 한 명에게 약을 주어 보내고, 상방(尙方)에서 초피(貂皮)와 귀가리개 한 벌씩 만들어 보내도록 하라. 그리고 군사와 장인(匠人) 중 얼고 주린 자도 도감(都監)이 보살피도록 하여 병들거나 다치는 걱정이 없도록 하라."

 

예조가 상이 시복(緦服) 중이므로 동지 망궐례 때에 주악(奏樂)과 무도(舞蹈) 등의 일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5일 경진

계릉(啓陵)124)  의 재계 때문에 조시(朝市)를 정지하였다.

 

유 부총(劉副摠)의 접반사(接伴使) 이경헌(李景憲)이 가도에 들어가니 유흥치(劉興治)가 견관례(見官禮)를 행하고 이어 예단(禮單)을 받았다. 다음날 친히 경헌의 관소에 와서 회사례(回謝禮)를 마친 뒤 잔치를 베풀어 대접하면서 말하기를,
"군량 수송을 얼음이 얼기 전에 다 마치지 못한다면 군사를 풀어 열읍(列邑)에서 먹도록 할 것이다."
고 하였다.

 

11월 6일 신사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오늘 재궁을 아직도 봉안하지 않았는데 내일 조시를 정지하지 않는다면 매우 미안한 일이다. 그 점에 대해 정원은 의계하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재궁을 봉안하기 전에는 계속 조시를 정지하는 것이 예(禮)입니다. 상의 말씀대로 예관에 분부하소서."
하자, 상이 따랐다.

 

유격(遊擊) 이매(李梅) 등이 증산(甑山)에서 섬으로 돌아가면서 쇄마(刷馬) 70여 필을 노략하고 아울러 사람들까지 협박하여 데리고 가니, 서로(西路)의 민심이 크게 동요하였다. 감사 민성징(閔聖徵)이 치계하기를,
"요즘 당차(唐差)들이 쇄마를 내도록 요구하는 폐단이 끝이 없고 심지어는 마부까지 납치하는 등 멋대로 소요를 일으키니 이는 실로 전에 없던 변고입니다. 신이 가도에 가서 흥치를 직접 만나 이러한 일을 말하고 또 이후로는 차관이 왕래 할 때 쇄마는 결코 대줄 수 없다는 뜻을 반복 설명하여 후일의 우환을 방지하도록 하게 해 주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성징의 말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
고 하니,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당차(唐差)가 장산곶(長山串)에서 배를 만들겠다는 청을 허락치 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7일 임오

병조가 아뢰기를,
"목릉(穆陵)에 거둥하실 때 대장(大將) 2명을 유도(留都)로 삼아야 하는데 거느릴 군관이 없으니, 호위청 입번군관(入番軍官)과 훈련 도감군 한두 초(哨)를 거느리고 도성에 남아 방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동부승지 강홍중(姜弘重)에게 명하여 목릉 영악전(靈幄殿)에 문안하도록 하였다.

 

11월 8일 계미

앞서 천릉의 의논이 정해진 후 대비가 친히 가서 전알(展謁)하기를 원하자, 상은 명을 어길 수 없어 예관(禮官)에게 의주(儀註)를 상고하여 정하고 또 길일을 택하여 자전의 마음을 위로하게 하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양사(兩司)가 합동으로 여러 달을 간쟁하고 연신(筵臣)들도 합당치 않음을 아뢰었는데, 상이 오랫동안 윤허하지 않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능에 거둥할 기일이 임박하자 양사가 더욱 힘써 간쟁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9일 갑신

차관(差官) 전국해(錢國海)가 손 각부(孫閣部) 차관으로서 자문(咨文)을 받았다 하면서 군량 2만 석과 전마(戰馬) 3천 필을 얻어 유흥치(劉興治)가 도적을 토벌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며 우리 나라에 이를 요청하기 위해 가도에서 서울로 향하려 하였다. 이때 접반사 이경헌이 섬 안에 있었는데, 국해를 만나 설득하기를,
"우리 나라는 본래 말의 산지(産地)가 아니며 양서(兩西)는 이미 탕진되었다. 국왕의 사대하는 성의가 지극하지 않음은 아니나 힘이 부족하니 어쩌겠는가. 더구나 현재 1만 석의 양곡을 섬으로 운반하는 중이니 이 외에는 결코 응하기가 어렵다. 굳이 갈 것이 없다."
하니, 국해가 말하기를,
"나는 이미 군문(軍門)의 명을 받았는데 어찌 감히 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천총(千摠) 동조(董祚)와 함께 가도를 떠나 나왔다. 경헌이 그간의 사유를 갖추어 치계하였는데, 비변사가 아뢰기를,
"국해가 군문의 명령을 받고 온 이상 우리의 도리로서는 예로써 대접해야 합니다. 지나는 일로(一路)에 십분 후대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10일 을유

예조가 목릉에 친제(親祭)하는 의주(儀註)를 올렸다. 상은 빈전(殯殿)에 친제하고 이어 건원(健元)·현(顯)·유(裕) 세 능에 참배한 뒤에 새 능의 터를 살필 참이었다. 그런데 새 능은 여러 능에 비해 가장 형세가 높았는데, 예조 의주 중에
"상의 가마는 곧바로 능 위에 이른다."
는 문귀가 있었다. 상이
"가마가 능 위에 이르면 필시 여러 능을 내려다 보게 될 것이니 매우 미안한 일이다."
하고, 정원을 시켜 그 의주를 고치도록 하였다. 새 능에 전배할 때 상이 가마에서 내려 걸어서 올라갔다.

 

정원이 아뢰기를,
"상께서 능에 행차하실 때 비록 밖에서 밤을 지내지는 않지만 왕세자도 호가(扈駕)를 하는데, 도성에 유도 대장 두 명만을 남겨놓는 것은 매우 온당치 않은 일입니다. 전일 배원(拜園) 때에도 유도 대신(留都大臣)을 두었었으니 구례를 따르소서."
하니, 영상 오윤겸(吳允謙)을 유도 대신으로 명하였다.

 

상이 내의원에 명하여 제조는 호가하지 말도록 하였는데, 이는 대비가 궁에 있기 때문이었다.

 

11월 11일 병술

새벽에 상이 백포(白袍)를 입고 국문(國門)을 나섰다. 의장(儀仗)과 여련(輿輦)은 모두 흑색을 사용하고 문무 백관은 흰옷과 베모자를 착용하고 호종하였다. 상이 송계(松溪)에서 주정(晝停)하였는데 왕세자가 막차(幕次)에서 문안하였다. 목릉에 이르러 상은 시복(緦服)을 입고 빈악(殯幄)에 나가 친히 술잔을 올리고 세자로 하여금 아헌례를 행하게 하였다. 곡을 함에 애통함이 극진하였으며 좌우의 근신들도 모두 곡하였다. 예를 마치고 이어 건원릉·현릉·유릉 세 능에 배알하는 한편 새 능의 형세와 석물의 공역을 살폈다. 어막(御幕)으로 돌아와 네 능의 참봉과 유시내관(留侍內官) 및 여러 공장(工匠), 수호군에게 각각 차등 있게 명주와 활을 상으로 하사하였다. 경기 감사 남이공(南以恭), 도사 유경집(柳景緝), 양주 목사 이시백(李時白)도 분주히 주선한 수고가 많아 각각 녹비[鹿皮]와 표피(豹皮)를 하사하였다. 이날 밤늦게 환궁하였다.

 

11월 13일 무자

산릉 도감 총호사(山陵都監摠護使) 김류(金瑬)와 제조 이하에게 각기 차등 있게 호피(虎皮)와 표피, 말장신구, 귀가리개를 하사하고, 여러 공장에게 무명베를 하사하였다.

 

예조가 세자 책봉 주청사를 파견하도록 청하니, 상이 그 일만을 위한 별도의 사신을 보낼 필요는 없다 하여 성절사로 하여금 주청사를 겸하도록 하여 파견하였다.

 

11월 14일 기축

이날은 왕대비의 탄신일이었다. 상이 시복(緦服) 중에 있었으므로 백관이 하례 올리는 예를 정지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오례의》에 적힌 바로는 안릉전(安陵奠)을 초상의 졸곡 전에 행하기 때문에 곡하는 예가 있는데, 이번의 안릉전은 우제를 지내고 탈복한 후에 행하여야 하고, 제관도 길복(吉服)으로 예를 행해야 하므로 곡하는 일은 행해서는 안 될 듯하니 개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15일 경인

상이 시복을 입고 숭정전(崇政殿) 계단 위에서 곡하고, 왕세자와 문무 백관은 베모자와 흰옷으로 뜰 아래에서 곡하였는데, 모두 북향사배하였다.

 

승지 윤황(尹煌)을 보내 목릉 영악전(靈幄殿)에 문안하였다.

 

11월 16일 신묘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진하사(進賀使) 이흘(李忔)이 바다를 건너 북경에 갔다가 객관에서 병사하였으니 매우 불쌍하다. 그의 관이 이미 돌아왔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해조(該曹)로 하여금 추증·조제(弔祭)케 하고 특별히 예장(禮葬)하여 후하게 보살피는 뜻을 보이라."

 

평안 병사(平安兵使) 유림(柳琳)이 안주 판관(安州判官)으로 하여금 치민(治民)과 재정(財政)에 관한 일을 전담케 하자고 청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당초 영변(寧邊)에서 안주로 영(營)을 옮긴 것은 관방(關防)의 지역을 중시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안주의 물력이 잔폐하여서 병사가 안주의 일을 겸하여 다스리게 하고 판관을 없앴습니다. 그후 병사가 주전(廚傳)의 지공(支供)을 겸하여 살피다보니 병정(兵政)에 전력하지 못할 뿐 아니라 체면도 손상되기에 다시 판관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 임무를 판관에게 모두 귀속시킨다면 신진의 무부(武夫)가 필시 감당할 수 없고 또한 간섭을 받을 염려도 없지 않습니다. 판관은 지공을 전임하고 병사는 그대로 치민과 재정에 관한 임무를 주관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11월 17일 임진

동지 망궐례를 임시 정지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전에는 정월 초하루와 동지의 망궐례를 상께서 상복중이라도 감히 폐한 적이 없었으니 신중한 뜻이 지극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재궁이 빈전에 있어 일이 전과는 다른데, 의논하는 자들은 대부분 행하는 것이 미안하다 합니다. 그리고 초하루와 보름에도 망곡(望哭)을 행하는데 더구나 동지는 큰 절기이니 망곡의 예를 더욱 폐할 수 없습니다. 일이 변례(變禮)에 관계되니 충분히 강론하여 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조로 하여금 품의하여 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예조가 아뢰기를,
"재궁이 비록 빈전에 있으나 축하하는 예는 폐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러므로 의주(儀註) 중에 풍악·무도(舞蹈)의 두 절차는 뺏으니 이는 참작하여 절충하는 뜻입니다. 그리고 삭망에도 망곡례를 행하고 있으니 동지에는 더욱 폐할 수 없습니다. 망궐례를 마친 후 상께서 옷을 갈아 입고 백관을 거느리고 망곡례를 행하소서."
하였는데, 이조 판서 정경세(鄭經世)가 차자를 올리기를,
"상께서 현재 시복(緦服) 중에 있으니 하루 동안에 하례와 곡을 겸해서 할 수는 없습니다. 망궐례는 임시 정지함이 옳겠습니다."
하자, 상이 대신들에게 의계(議啓)하도록 하였는데, 모두 경세의 의논이 매우 옳다고 하자, 상이 따랐다.

 

11월 18일 계사

상이 동지 망곡례를 숭정전에서 의주대로 행하였다.

 

양사가 남선(南銑)과 조정호(趙廷虎)를 외직에 보임한 명을 환수하기를 청하여 여러 날 간쟁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11월 20일 을미

좌부승지 이기조(李基祚)를 보내어 영악전에 문안하였다.

 

연평 부원군 이귀(李貴)가 상소하여 조정호를 외직에 보임한 명을 환수하도록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11월 21일 병신

현궁(玄宮)125)  을 무덤에 넣고 이어 우제를 지냈다. 상이 숭정전에서 망곡례를 행하고 세자와 백관이 의주대로 뜰에서 곡하였다. 드디어 시복을 벗고 이어 다음날까지 조시(朝市)를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부교리 최유해(崔有海)가 상소하기를,
"오늘 시복으로 탈복하는 의절(儀節)은 예관들이 이미 널리 상고하고 성상께서 선례를 의거하여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상기(喪期)를 단축하는 것은 바로 천고에 전해오는 인간의 도리에 있어서 큰 변입니다. 더구나 이번 개장하는 때에 어떻게 털끝만큼이라도 예에 어긋나게 하여 선왕의 뜻을 어겨서야 되겠습니까. 이제 검은 모자와 흰옷 차림으로 정사를 보는 제도는 상기를 단축하는 규례에 점차 가까워지는 것이니 결코 선왕의 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정도는 그렇다 하더라도 복을 벗는 의절에는 본디 의거할 만한 예가 있습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개장(改葬)할 때 시복(緦服)을 입는다.’는 말이 《예기(禮記)》에 있는데, 그 소(疏)에 ‘시복을 입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위해, 자식이 부모를 위해, 처가 남편을 위해서이다. 친히 시신과 관을 볼 적에 복이 없을 수 없으므로 3개월 동안 시복을 입고 탈복한다.’라고 했습니다. 예란 후한 쪽을 좇는다는 것은 이미 선유들의 정론이 있습니다. 이제 어찌 차마 석 달도 채우지 않고 곧바로 탈복하실 수 있겠습니까. 속히 다시 의논하여 정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정원이 아뢰기를,
"신하가 소견이 있으면 미리 상소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탈복이 임박해서야 비로소 상소를 하니 극히 온당치 않습니다. 그러나 유신(儒臣)의 상소이므로 감히 입계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진술한 일은 선조(先朝)에서 이미 행했던 선례이므로 지금 경솔히 개정하기 어렵다."
하였다.

 

11월 22일 정유

양릉군(陽陵君) 허적(許𥛚)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는 성조(聖祖)의 장지가 길하지 않다고 하여 옮겨서 체백(體魄)으로 하여금 길지(吉地)에서 편안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독 고비(考妣)의 신령이 걸맞는 곳을 잃고 의지할 데 없이 방황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는 별종(別宗)의 맏아들로 그분들을 가묘(家廟)에 봉안하고 부모로 모시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하루아침에 보위(寶位)에 올라 대통을 차례로 이어받지 않았기에 종묘에는 예위(禰位)가 비어 있습니다. 고비에 대해 의당 그 지위를 바르게 해야 하는데도 아직까지 사실(私室)에 있으니 어찌 걸맞는 곳을 얻었다 하겠습니까. 또 고비라고 칭하면서 신주 옆에는 사자(嗣子)를 써 놓지도 않고 제사는 작은아들에게 맡겼으니 어찌 의지할 데가 있다 하겠습니까. 고비께서 걸맞는 곳을 잃어 의지할 데가 없다면 전하께서도 그 지위가 편안하시겠습니까? 자신이 임금이 되어 한 나라를 다스리니 대를 이어 들어가 대통을 이어받은 경우와는 다른데도 고비를 신하의 반열에 두고 사실에서 제사지내니, 이는 옛날 성왕들의 추존하는 정례(情禮)를 크게 잃은 것입니다. 저 다른 의론을 주창하는 자들은 실로 무슨 마음에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실행하지 않는 것이지 다른 의론에 제어되어서가 아닙니다."
하였다. 상소가 주달되었으나 답하지 않았다.

 

11월 23일 무술

전에 국장(國葬) 때에는 팔도의 감사가 와서 진향례(進香禮)를 행하였었는데, 임진 변란 이후로 양서(兩西)와 하삼도(下三道)의 감사는 오지 말도록 하고 단지 수령을 보내 전례(奠禮)를 대행하게 하였다. 목릉 천장(遷葬)에는 여러 도의 감사가 모두 품계 높은 수령을 파견하였는데 평안 감사 민성징(閔聖徵)과 황해 감사 이여황(李如璜)은 찰방과 현감을 보냈다. 예조가 아뢰기를,
"군부(君父)의 상에 지방관이 진향(進香)하는 것은 그 예가 매우 중한데 성징 등은 사체를 모르고 소홀함이 이와 같으니 모두 엄히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보령 현감(保寧縣監) 최진명(崔振溟)이 정사를 매몰차고 엄하게 하자 고을 사람들이 성묘(聖廟)의 위판을 훔쳐다 불태워 버렸는데, 예조가 추고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근래 인심이 옛날 같지 않다. 국사에 마음을 다하는 수령이 있으면 읍인들이 그 선조의 신위를 갖다 버리기도 하고 성묘의 위판을 태워 없애기도 하여 온갖 계책으로 그가 체직되기를 도모하니 매우 흉악하고 참담한 일이다. 이대로 간다면 열읍의 수령이 손발 놀리기가 어려울 형세에 놓일 것이다. 추고하지 말고 특별히 표리(表裏) 한 벌을 하사하여 직무에 진력한 공로를 포상하라."
하였다. 당시 부여현의 아전으로서 세미(稅米)를 훔친 자가 있었는데 현감 김경여(金慶餘)가 체포하여 다스렸다. 그러자 그 아전이 밤에 관아에 들어가 경여 선조의 신주를 훔쳐다 훼손하여 길가에 버리니, 경여 또한 관직에서 물러나 돌아갔다. 상은 간교한 백성이 고을 수령을 함정에 빠뜨리는 폐단을 막고자 하였으므로 이같은 명이 있었다.

 

11월 24일 기해

헌부가 아뢰기를,
"심명세(沈命世)는 술사의 말에 미혹되어 감히 소장을 올려 국가의 막중한 일을 논하였습니다. 그중 화복(禍福)에 관하여 말한 설은 괴이하고 허탄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리고 능 안에 물이 있다는 말은 더욱이 신자(臣子)로서는 누구나 놀랍고 비통한 것이어서 누구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으므로 이로 인하여 산릉(山陵)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풍수가들의 길흉에 관한 설을 알 수는 없으나 능 안이 보송보송하여 조금도 축축한 기운이 없었으니 물이 있다는 그 말은 전혀 허망합니다. 감히 잘 모르는 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경솔하게 옮기게 하였으니 원근의 듣는 자들이 모두 분하게 여깁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명세를 죄주지 않고서는 많은 이의 분노를 막고 후일의 폐단을 방비할 길이 없으니 삭탈 관작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능 위에 물기가 있었던 이상 사람들이 그 안을 의심하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다. 대체로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주달함은 임금 섬기는 도리이고, 가부를 작정함은 묘당의 임무이다. 사리는 따지지 않고 말한 자를 죄주는 것은 실로 온당치 못한 듯하다."
하였다. 이후로 여러 날 연계하였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정언 이행건(李行健)이 아뢰기를,
"동료들의 의견은 천릉의 연유로 당초 발언한 사람을 죄주고자 하였으나 신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개 구릉(舊陵)이 무너지려 한다는 우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말하면서 모두 의심쩍은 마음이 있었으나 감히 발설하지 못했었습니다. 지난날 청운군(靑雲君) 심명세(沈命世)가 이를 상소하였으나 이는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주달하는 뜻에 불과합니다. 조정에서도 의심쩍은 마음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술관(術官)에게 의논하여 가부를 따져서 천릉의 계획을 정하였었습니다. 그렇다면 발언한 것은 명세요, 채용한 것은 조정입니다. 이제 물이 없었다는 한 조목을 가지고 발언한 사람을 죄주려 하니, 법을 너무 각박하게 따지려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만약 명세의 상소가 어리석고 망령스러워 믿을 것이 못 되었다면 당초에 배척하고 죄를 주어야 옳지, 어찌 그 말을 채용한 후 도리어 그 사람에게 죄를 줄 수야 있겠습니까. 신의 뜻은 이와 같으나 말이 신임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체척(遞斥)하여 주소서."
하였고, 대사간 정백창(鄭百昌), 사간 김반(金槃), 헌납 이경의(李景義), 정언 민광훈(閔光勳)이 아뢰기를,
"산릉을 옮기는 것은 사체가 매우 중한데, 심명세는 술가(術家)의 말을 그릇 믿고 앞서서 허망한 소를 올렸습니다. 그 소는 본디 채용할 것이 못 되었지만, 그 중에 땅 속에 물기가 있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당시 조정 의논도 감히 그렇지 않다고 기필하지 못하고 반신반의하다 마침내 막대한 역사를 일으켰으나 천장(遷葬)할 때 보니 바닥까지 건조하였습니다. 그러니 일의 주모자가 어찌 죄가 없겠습니까. 신들이 의논하여 논계하려 하니 정언 이행건이 이론(異論)을 제기하였습니다. 신들이 어찌 감히 자기의 의견이 옳다고 하겠습니까. 체척하여 주소서."
하니, 사임하지 말라고 모두에게 답하였다. 헌부가 처치(處置)하여 행건은 체차하고 백창 등은 출사케 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되 이행건은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으니 체차하지 말라."
하였다. 행건과 백창 등이 모두 재차 인피하니, 이에 대사헌 조익(趙翼), 집의 조방직(趙邦直), 장령 이유달(李惟達), 지평 심연(沈演)·정지우(鄭之羽)는 자기들의 처치가 온당치 못하였다 하여 인피하였다. 옥당이 처치하여 아뢰기를,
"양사 모두 체차할 혐의가 없으니 아울러 출사하게 하고, 이행건은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되 이행건은 체차하지 말라."
하였다. 양사는 또 함께 출사함을 혐의하여 모두 인피하였다. 행건이 직에 나간 후 혼자 아뢰기를,
"천하의 일은 반드시 양 쪽이 다 옳은 법은 없습니다. 신의 말이 옳으면 양사의 많은 관리의 의논은 필시 그를 것이고, 양사의 많은 관리의 의논이 옳으면 신의 말은 필시 그를 것입니다. 옥당이 신의 직을 체차토록 아뢰었으니 이는 옥당이 신의 말을 그르다고 여긴 것이고, 전하께서 체차하지 말라고 특명하시니 이는 전하께서 신의 말을 그르다 여기지 않으신 것입니다. 오늘의 일은 양사의 많은 관리가 반드시 신과 구차히 같지 않으려 하고, 신 또한 반드시 양사의 많은 관리와 구차히 같지 않으려는 것이어서 형세가 결코 양립하기 어렵습니다.
대체로 대간이란 인주(人主)의 이목으로 한 세상의 공론을 주도하니, 무릇 논할 것이 있으면 그 경중과 시비를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명세를 논죄하는 이 일은 당초에 통렬하게 배척하지 못한 이상 대사가 이미 정해진 뒤에 추론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이치는 매우 분명하니 누군들 모르겠습니까. 그런데도 단지 발언한 사람에게 죄를 씌우려고만 하지 허물이 조정에 돌아감은 모르고 있으니 그 논의가 구차하고 사리의 경중을 모름이 심합니다. 대사헌 조익, 집의 조방직, 장령 이유달·신계영(辛啓榮), 지평 심연·정지우, 대사간 정백창, 사간 김반, 헌납 이경의, 정언 민광훈을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26일 신축

이행원을 부응교로 삼았다.

 

11월 28일 계묘

홍문관 응교 김세렴(金世濂) 등이 상차하기를,
"정언 이행건은 양사의 여러 관리의 논의를 구차하고 사리를 모른 것이라 하면서 혼자 아뢰어 그들을 체차시켰습니다. 신들은 삼가 생각건대 대간으로서 물의에 배척을 받은 이상 인혐(引嫌)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 감히 탄핵의 소장을 올려 대각(臺閣)을 텅 비게 하였으니, 행동이 해괴하여 진실로 근래에 없던 일입니다. 신들은 이미 양사를 출사케 하라 청하였는데 지금 모두 탄핵을 받아 물러갔으니, 신들이 어찌 태연하게 죄없는 사람인 양 논사(論思)의 대열에 있겠습니까."
하니, 사임치 말라고 답하였다.

 

11월 29일 갑진

전 수비(錢守備)가 가정(家丁)을 시켜 예궐하여 손 군문(孫軍門)의 자문(咨文)을 바치게 하였다. 전국해(錢國海)는 본디 유흥치의 수하 사람이다. 흥치가 난을 일으킨 후 섬 안에 식량이 떨어져도 중국에서 곡식을 대주지 않자 드디어 한인(漢人)을 풀어 양서(兩西) 지방에서 곡식을 토색질하였다. 백성들이 모두 괴로워하여 때로 한인을 습격하니 죽은 자가 자못 많았다. 흥치가 이를 근심하여 국해를 속여 군문의 위조 자문(咨文)을 준 뒤 우리 나라에 내보내어 군량과 전마(戰馬)를 요구하도록 하였다. 그의 자문에 말하기를,
"섬의 장수 유흥치는 동료와 원한을 맺어 경솔히 함부로 죽였습니다. 조정의 도량이 하늘 같아 불화가 남으로 인하여 시작되었음을 생각하고 스스로를 새롭게 하도록 과분하게 허락하였습니다. 이제 본관은 급히 공을 세우고 싶으나 식량과 말이 부족하여 괴롭습니다. 아무리 배를 잇대어 운송하려 해도 역풍(逆風)이 빌미가 되니 기일에 대지 못할까 염려되고, 얼음이 녹는 봄을 기다려야겠으나 그 때까지 늦출 수도 없으니 덕있는 이웃에 의지하지 않으면 부지할 방도가 없습니다. 말[馬]에 있어서도 파도에 익숙치 않고 멀리 건너 오노라면 매서운 삭풍을 만나게 될 것이니 배에 실어서 건너는 것은 불편합니다. 만일 봄을 기다려서 보낸다면 또한 한 겨울에 변란이 있을까 염려되는데 경계하고 방어하는 데 무엇을 의지하겠습니까. 만약 조정에서 은혜롭게 용서받은 죄 많은 신이 외람되게 이웃나라에 있으면서 살 길을 도모하여 충성을 바치지 못하고 성상의 은택을 욕되게 한다면 수백 년 공손함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본원이 영원(寧遠)에서 군사를 맡았을 때 매양 귀국의 총수(銃手) 천 명이 심양(瀋陽)을 방위하였다는 소문, 염초(焰硝)로 적을 많이 도왔다는 소문, 우리의 연해 거주민을 모조리 죽였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천한 백성들의 말이어서 본원은 마음에 두거나 귀담아 듣지 않고 입밖에 내는 것조차도 금하였으니, 조정에 전해지면 억측이 더욱 심해지고 의심하는 의논이 불어날까 염려해서입니다. 대체로 그런 일이 없는데 의심하는 것은 우리의 수치이지만, 그런 일이 있어서 밝혀지면 우리는 더욱 귀국을 위해 부끄럽게 여길 것입니다. 본원은 변변치 못하나 병권을 잡고 영원에 있을 때 힘써 앞서의 잘못을 징계하고 묵은 수치를 갚고자 하였으니, 이는 배신(陪臣)이 산해관(山海關)과 요양(遼陽) 지방에 오래 있으면서 직접 보고 들은 일입니다.
지금 존엄하신 성천자(聖天子)께서 중대하고도 어려운 임무를 맡기시니 비록 모기가 태산을 진 격이라 부끄러우면서도 삼가 요양에서 방비하였던 경험으로 등주(登州)와 요양을 실패없이 무마하는 데 자신할 수 있을 듯하기 때문에 등주와 요양의 장사들과 일체 새로운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귀국에 겨울철 섬에 들어가는 곡식을 막지 말고 다시 1만 섬을 지원하여 구제해 주기를 청하니, 이는 죽게 된 우리 백성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전마 2천을 골라 유흥치의 군영으로 속히 보급하여 겨울과 여름 사이에 적에게 당하지 않고 이길 수 있게 한다면 이는 우리 신하를 죄에서 벗어나 공을 세우게 하는 것입니다. 값을 치루거나 말을 되돌려 주거나 간에 귀국의 큰 공은 감히 은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귀국이 태평한 지 오래되니 그저 안일에 익숙하여 갑자기 분발하여 난에 대처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므로 오랑캐를 두려워하여 머리를 숙이고 수치를 참는 것이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총수(銃手)와 염초에 관한 여러 소문은 본원이 믿지 않고 또한 마음으로 양해하여 끝내 본국에 보고하지 않았고, 해민(海民)이 우리 유민(流民)들을 죽이는 경우 살해당한 자가 본원에 보고되지만 살인한 자가 어찌 귀국에 보고하겠습니까. 본원은 또한 마음으로 양해하여 끝내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지금부터는 요녕(遼寧)의 일을 맡은 자가 다시는 옛날 사람이 아니니, 귀국은 귀를 씻고 말을 듣기 원합니다. 합심하고 힘을 다해 겨울철 식량과 말을 급히 도와 주어 천하 후세로 하여금 겉으로는 귀국이 방물(方物)로써 우리 조정을 섬겼지만 실은 한물(漢物)로써 우리의 적을 도왔다고 일컫지 않게 하십시오. 믿느냐 의심하느냐와 의리에 밝느냐 어두우냐가 이 곡식과 말에 달려 있습니다. 연해의 백성도 신칙하기를 바랍니다.
병인년 귀국의 주소(奏疏)에 대한 병부(兵部)의 답에 ‘모문룡(毛文龍)의 진(鎭)은 언제나 요동 땅을 멀리하는 마음이 없기를 바라고, 조선은 언제나 요동 사람을 멀리하는 마음이 없기를 바란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본원이 쓴 것으로, 깊이 따져서 한 말입니다. 원하건대 즉시 전마 2천 필을 골라 급히 피도(皮島)126)  로 보내고, 백성들에게도 금하고 타일러 떠도는 백성을 핍박하지 말도록 하여 오래 거주한 덕을 베풀도록 하고, 또한 양곡을 주어 겨우살이를 도와주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그 자문을 읽고 하교하기를,
"이 자문은 언사가 거칠고 거만하여 대아문(大衙門)의 말씨가 아닌 듯하다. 흥치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일이 매우 의심스럽다. 그리고 요청한 세 가지 일을 들어주어야 하겠는가? 비국으로 하여금 의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등주 군문(登州軍門)이 바다 건너로 사람을 보내 양식과 말을 번방에 청하는 것은 전에 없던 것입니다. 신들은 ‘흥치가 군문의 위세를 빌리고 군문도 흥치의 처지를 위한 것이다.’라 의심하였으나, 방금 원자(原咨)를 보니 말씨가 거칠고 거만할 뿐 아니라 현저하게 자기를 높이고 해명하는 뜻이 있으니 군문이 지은 글이 아닌 듯합니다. 양식과 말의 청탁이 실제 군문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우리의 오늘날 형편에서는 결코 응할 수 없습니다. 만약 흥치가 중간에서 만든 일이라면 그 간계에 빠져서야 되겠습니까. 내일은 우선 접견하지 말고 일을 잘 아는 역관을 시켜서 실상을 자세히 탐지하도록 한 후 의논하여 처리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르고 드디어 접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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