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3권, 인조 8년 1630년 12월

싸라리리 2025. 12. 29.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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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을사

옥당이 상차하기를,
"심명세(沈命世)가 천릉(遷陵)의 일로 올린 상소는, 그 뜻이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망령되이 논한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정언 이행건(李行健)은 풍수설로 견강 부회하여 많은 말을 늘어놓으면서 주장하기를 마치 정론을 펴는 양하였습니다. 헌부와 옥당이 서로 이어 체직을 청하자 스스로 공의에 용납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한갓 성상의 관용만 믿고 뻔뻔스럽게 출사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양사를 공격하면서 십수 명이나 되는 관원을 한꺼번에 배척하여 마치 전하의 조정에는 한 사람도 없는 듯이 하였습니다. 이에 이백 년간 이어온 대각의 기풍이 오늘날에 와서 모조리 없어졌습니다. 당당한 조정이 어떻게 한 사람이 무너뜨리는 것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정언 이행건을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시고, 양사의 여러 관원을 체직하라는 명령을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간관의 직책은 직언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자신의 의견을 버리고 남을 따라 움직이는 것은 간관으로서 힘쓸 일이 아니다. 이행건이 피혐하지 않고 독계한 것은 타당치 않은 것 같지만, 그의 말은 옳으니, 명을 거두라는 청은 불가하다. 그러나 이행건이 독계한 일은 앞으로 폐단이 생길 수도 있으니, 체직시키라."
하였다. 옥당이 다시 상차하여 논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행건이 너무 지나치게 한 잘못이 없지 않기 때문에 이미 체직시키라고 명하였다. 그런데도 홍문관에서 대각의 임무를 대신하여 연계(連啓)하니, 이 또한 이상한 일이다. 경들은 체직되어야 할 것인데 출사한 것을 그르게 여기고는 또 조익(趙翼) 등을 출사시키라고 청하고 있는데, 조익 등이 비록 출사하여 공무를 본다 해도 그것이 염치가 있는 일이겠는가. 공무를 보지 못할 줄 알면서도 이같이 번거롭게 하니 이것은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이며 잘못을 합리화하는 일로, 내가 좋아하지 않는 바이다. 조익 등이 아무리 염치가 없어도 한결같이 옥당에서 하자는 대로 따르지는 않을 것 같으니,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
하였다.

 

평안 감사 민성징(閔聖徵)이 치계하기를,
"요즈음 듣건대, 우리 나라의 사정이 모두 가도에 알려진다고 합니다. 이는 반드시 한인(漢人)들이 서울 곳곳에 있으면서 듣는 즉시 전해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서울에 있는 한인을 모조리 찾아내어 송환시키면 누설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도성내에 한인이 여기저기 살고 있으니, 분명 그런 일이 있을 것입니다. 서울은 한성부에서 찾아내게 하고 경기는 감사가 철저히 색출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홍서봉(洪瑞鳳)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12월 2일 병오

비국이 관서의 겨울철 유방병(留防兵)을 돌려보내고 남은 군량미로 내년 봄에 안주(安州)의 동성(東城)을 수축하는 데 쓰기를 계청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하교하였다.
"이번 천릉에는 처음에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 했는데, 일이 여의치 않아 여러 가지 폐단을 끼치게 되었으니 경기의 백성을 생각할 때 마음이 매우 편치 않다. 해당 관청에서는 금년 전조(田租)를 견감하여 조정의 뜻을 보이라."

 

옥당이 세 번째 상차하여, 이행건을 파직시키고 양사의 관원을 체직하라는 명을 거두기를 청했는데, 차자 중에 조광조가 부제학으로 있을 때 소격서를 혁파하기를 청한 일로써 하나하나 예를 들었다. 상이 답하기를,
"내 뜻은 이미 밝혔으니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 조광조의 마음씀씀이나 처신은 배울 것이 한둘이 아니나, 지나친 것은 본받지 않아도 된다."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삼가 옥당의 차자에 대한 성상의 비답을 보건대, 온당치 않은 말씀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풍수설은 애매모호하여 알기 어려운 것인데, 심명세는 이를 혹신하여 광(壙)에 물이 난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능을 파보니 습기가 조금도 없었으므로 여론이 일제히 일어난 것입니다. 따라서 심명세를 처벌하기를 청한 것은 공론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행건이 당돌하게 출사하여 양사의 여러 관원을 모조리 공박하였으니, 이는 전에 없던 충격적인 일입니다. 옥당의 간곡한 차자는 바른 길을 넓히고 여론을 진정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비답의 말씀이 너무도 각박하니, 성상의 덕에 누가 될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풍수설이 비록 모호하다고는 하지만 예로부터 도읍을 정하거나 능침을 쓸 때는 모두 그 설을 따랐다. 그러니 이제 와서 알기 어렵다고 모조리 없애버릴 수는 없을 듯하니 다만 맹신하지만 않으면 된다. 대체로 이번 천릉은 물이 난다고 해서 한 것만이 아니라 나쁜 곳을 피하고 좋은 곳을 택한 것이니, 이 역시 경사이다. 그런데도 천릉을 다 마친 지금에 와서 감히 지나친 의논을 끄집어내어 마치 전의 능침이 좋은 곳인데도 불구하고 오직 물이 나기 때문에 천릉한 것처럼 말하니, 오늘날의 일도 잘못이 아닌가. 만약 폐단을 막으려고 그랬다면 그 책임은 의당 그 말을 채용한 사람이 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전 정언 이행건의 일은, 옥당에서 한번쯤은 논박할 수 있다. 그러나 연계하여 죄주기를 청하기까지 하니, 나는 정말 그것이 합당한 일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12월 3일 정미

영의정 오윤겸(吳允謙), 우의정 이정구(李廷龜)가, 정원의 계사에 대한 비답에 ‘책임은 그 말을 채용한 사람에게 있다.’는 하교가 있다는 이유로 대죄하면서 아뢰기를,
"말을 꺼낸 사람은 심명세이고 의논하여 결정한 것은 묘당입니다. 신들이 대신의 반열에 있으면서 국가의 대사를 미리 알아서 제대로 분변하지 못하여 물의를 빚게 하였으니, 신들도 죄가 있습니다."
하고, 김류도 총호사(摠護使)로서 산릉에서 돌아와 역시 이를 이유로 대죄하니, 상이 모두 답하기를,
"어제 하교한 것은 경들에게 잘못이 있다고 한 말이 아니다. 안심하고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수비(守備) 전국해(錢國海)를 숭정전(崇政殿)에서 접견하고 매우 융숭히 대접하였다. 전국해는 손 군문(孫軍門)127)  이 보내서 왔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유흥치(劉興治)가 보낸 것이다. 가도에서 쓸 군량과 군마를 빌려주기를 요구하였는데, 상이 모두 거절하였다.

 

12월 4일 무신

간원이 남선(南銑)·조정호(趙廷虎)를 지방관에 보임한 명을 거두기를 청하고, 또 청운군(靑雲君) 심명세가 망령되이 큰 일을 논한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으며, 또 아뢰기를,
"전 정언 이행건(李行健)은, 공론이 한창 일어날 때 이견을 내세웠으며, 헌부와 옥당이 체직하기를 청한 후에도 다시 뻔뻔스럽게 출사하여 십수 명의 관원을 탄핵하면서 자신은 전혀 무관한 것처럼 하였습니다. 고금 천하에 어찌 이같이 남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기탄없는 대관이 있겠습니까. 삭탈 관작하소서."
하였다. 헌부도 이런 내용으로 논박하였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대비전 방물 중 인두를 한 자루만 봉진하는 것은 사체에 맞지 않다고 하교하셨는데, 이는 방물을 상정할 때 전라 감영에서 한 자루만 봉진하도록 정하였으므로 매년 이를 답습하여 그렇게 된 것으로, 실로 사체에 어긋납니다. 그러나 정해진 규례가 이와 같기 때문에 더 봉진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앞으로는 더 봉진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자전의 탄일에 한두 도에서만 물선을 봉진한다고 하는데, 이것도 사리에 매우 어긋나니, 모든 도로 하여금 봉진하게 하라."
하였다.

 

부교리        최유해(崔有海)가 상소하기를,
"신은 지금 논의되는 예에 대하여 별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또 모든 노성한 선비와 조정 대신이 대부분 종통(宗統)이 중하다고 하여 국론이 이미 정해졌습니다. 신도 지금 결정된 예가 매우 합당하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신이 지난번 사행길에 등주(登州)에 표류하였을 때 송 호부(宋戶部)128)                  와 자주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그가 ‘귀국 왕은 소경왕(昭敬王)129)                  과 어떤 관계인가?’라고 묻기에, 친손자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송 호부가 ‘왕자가 몇이고 몇번째 왕자의 아들인가?’라고 묻기에, 신이 ‘병으로 죽은 임해군(臨海君)이 장자이고 폐위된 광해군이 차자이며, 그 다음인 정원군(定遠君)은 일찍 죽었는데, 우리 주상은 바로 정원군의 아드님이다. 주상께서는 대의로써 종사를 바로잡으시고 소경 왕후(昭敬王后) 김씨(金氏)의 명을 받들어 대통을 이으셨다.’고 답했습니다. 그가 또 묻기를 ‘그렇다면 왕이 양자로 들어갔는가?’라고 하기에, 신이 ‘곧바로 할아버지의 뒤를 이은 것이다.’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일찍이 들은 바가 있는데, 지금 당신의 말을 듣고 보니 한나라와 송나라의 사례와는 실로 다르다. 귀국에서는 당연히 추숭(追崇)하자는 논의가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기에, 신이 ‘그런 논의가 있었는데, 신하들의 의견이 분분하였었다. 대부분 《춘추》의 희공(僖公)과 민공(閔公)의 사실을 근거로 왕통을 존중해야 하며 따라서 추숭할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는데, 그것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가 ‘왕이 양자가 되지 않았다면 근본이 둘로 되는 혐의가 없는데, 추숭하더라도 의리에 해로울 게 뭐가 있겠는가. 내게 예설(禮說)이 있으니, 나중에 상고해 내어 그 의논을 뒷받침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송 호부의 표제(表弟)인 금릉 유생(金陵儒生) 장가도(張可度)가 송헌(宋獻)이 쓴 세 장의 글을 주기에, 보니, 그 중 하나가 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환국한 후 사적으로 주고받은 것이라 감히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의 친구인 공주 목사(公州牧使)        홍진도(洪振道)가 신의 집에 와서 예설을 보여달라고 하기에 주었더니 그대로 가지고 갔습니다. 신은 이 글이 이귀(李貴)에게 건네져서 상께 올려질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또 처음부터 신이 송 호부에게 이 일에 대한 예를 문의한 것이 아니라, 그의 물음에 따라 대답한 것입니다. 전후 사정이 이와 같은데도 이귀는 즉시 상께 올리지 않았다는 것으로 신의 죄목을 삼아 가는 곳마다 헐뜯고 다닌다고 합니다. 신을 파직하여 주소서."
하였다. 상소가 올라가자, 상이 답하기를,
"부교리        최유해는 예에 대하여 논한 글을 숨겨서 명나라의 공론을 알 수 없게 하였으니, 몹시 그르다. 먼저 파직시킨 후 추고하라."
하였다.

 

홍서봉을 이조 판서로, 김상헌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이날 개장(改葬) 후의 안릉제(安陵祭)를 지냈다.

 

12월 6일 경술

헌부가 아뢰기를,
"전 부교리 최유해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왕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감히 나라의 막중한 일을 사적으로 중국인과 경솔히 논의하였습니다. 망령된 죄에 모두가 놀라고 분개합니다.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고, 간원도 이런 내용으로 논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상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성균관 직강 이상혐(李尙馦)이 사예에 제수되었을 때 명망이 가볍다는 이유로 논박당하였는데, 겨우 몇 달이 지나 또 그 직에 제수되었으므로 여론이 그르게 여기고 있습니다. 체직시키소서. 이조는 공론을 생각지 않고 탄핵한 주장(奏章)의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곧바로 주의(注擬)하였으니, 당상과 낭청을 추고하소서. 대간은 임금의 이목이니 하루라도 그 자리를 비워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선조(先朝)에서는 대간에 결원이 생기면 으레 그날로 뽑았으니, 이는 언로를 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양사의 여러 관원이 한꺼번에 체직되었을 때, 옥당이 체직 명령을 거두도록 날마다 차자를 올렸기 때문에 곧바로 뽑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상차를 중지한 후에는 당연히 이조가 즉시 계품하여 뽑아야 하는데도 하루 이틀 미루다가 대각의 자리를 비게 하였습니다. 해당 당상과 낭청을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대간을 바로 뽑지 않은 것은 이조의 잘못이 아니니, 추고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이조 판서 홍서봉이 상차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민성징(閔聖徵)이 치계하기를,
"중화(中和)의 대장(代將) 양덕위(梁德渭)가 한인(漢人)의 노략을 참다 못해 그들과 싸워 17명을 살상했습니다. 만약 그를 살인죄로 처벌하면 앞으로 한인들은 더욱더 거리낌없이 난동을 부릴 것이며, 반대로 우리 백성들은 분이 치밀어도 화가 두려워 감히 막지 못할 것입니다. 묘당이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비국이 회계하기를,
"한인이 소란을 피우면서 인명을 살상하고 처녀를 겁탈하기까지 하여 서방 백성들은 통분이 골수에 맺혔습니다. 지금 중화에서 발생한 사건도 분명히 참다 못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양덕위 등이 멋대로 군졸을 보내 17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가도에 이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평안도 관찰사로 하여금 주동자 한두 명을 색출하여 유장(劉將)에게 통보하고 그들을 참수하여 수급을 보낸다면, 앞으로 이런 사태가 다시 발생한다 하더라도 이것으로 유장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저들이 분한 김에 저지른 일이니 용서할 만하다. 장계 중에 분이 치밀어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 막지 못할 것이라는 말도 일리가 있다.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12월 7일 신해

예조 판서 김상헌이 상차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윤지(尹墀)를 우승지로 삼았다.

 

12월 8일 임자

정언 송국택(宋國澤)이 동료에게 상회례(相會禮)를 거행하기로 약속하고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대사간 홍방(洪霶)과 사간 김세렴(金世濂)이 피혐하니, 헌납 김광혁(金光爀)이 아뢰어서 국택을 체직시켰다.

 

이귀가 상차하여 아뢰기를,
"신이 송 호부가 쓴 글을 보니 모두 지금 논의되고 있는 예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최유해는 의당 전후 사정을 갖추어 그 글을 올려 대례를 결정하게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조정의 의논을 두려워하여 올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도 못했습니다. 신도 지난번 어떤 이를 통하여 처음 그 글을 보았습니다.
지금 조정의 논의는, 종통이 중하니 전하의 친부를 숙부로 칭하여야 한다는 김장생(金長生)과 정경세(鄭經世)의 주장을 정론이라 하고, 부자 관계는 천륜이므로 이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신 등의 주장은 전하의 뜻에 영합한다고 몰아붙이면서 온 힘을 다해 공격하고 있습니다. 송 호부는 명나라의 유명한 유신으로서 그의 주장은 박지계(朴知誡)의 설과 꼭 같으니, 이는 바로 천하의 공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박지계의 학식은 세상에 존중받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이 논의로 말미암아 시론에 거슬려 곡학 아세하는 무리들이 심지어는 요충(蓼蟲)130)  이라고 욕하기까지 하니, 어찌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예에 식견이 깊은 우리 나라 초야의 선비가 주장한 것이 이러하고, 명나라의 유신이 논한 것이 모두 같은데, 전하께서는 무슨 어려움이 있기에 지금까지 미루고 결정하지 못하신단 말입니까. 감히 송 호부가 쓴 원본을 올리니, 전하께서는 예관에게 물어서 속히 대례를 결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잘 살펴보았다. 이 일을 경들이 강력히 주장하였지만 나는 본래 예에 대하여 잘 모르고, 또 여러 사람의 반대가 두려워 결정하지 못했었다. 지금 송 호부가 예를 논한 글을 보건대 우연히도 경들의 주장과 일치하니 이제서야 비로소 경들이 예에 대해 식견이 있음을 믿게 되었다. 대체로 이 일은 고금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비슷하지도 않은 사실을 끌어대면서 그에 대해 감히 말도 못하게 하여, 사람들이 혹 추숭이라는 말만 해도 눈을 부라리며 제멋대로 배척하니, 이 어찌 우연한 생각에서 그러는 것이겠는가. 양사에서 최유해를 탄핵한 것도 깊은 뜻이 있는 것이기에 내가 실로 부끄러우며, 그의 사람됨을 경멸한다.
아, 부모를 높이고자 하는 마음은 자식의 상정인 것이다. 신분상 할 수 없거나 재물이 없어서 못하는 것도 슬픈 일이고, 할 수 있는 데도 높이지 못하는 것도 애통한 일이다. 이런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모두들 성을 내고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 벌떼처럼 일어난다면, 이는 높이려다가 도리어 욕을 끼치는 것이다. 그리고 선군(先君)은 덕이 없었고 나 역시 이렇다 할 공이 없었다. 조정 신하들이 감히 대놓고 말은 못하면서도 감히 성을 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감히 여러 사람의 반대를 물리치고 억지로 요구할 수 있겠는가. 또 명나라의 공론이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차마 염치없게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하겠다. 경은 이런 뜻을 알아 나로 하여금 신하들에게 죄를 짓게 하지 말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지금 이귀의 차자에 대한 비답을 보건대, 말뜻이 매우 준엄하니, 신들은 놀라 넋을 잃고 서로 바라만 볼 뿐,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조정 신하들이 예에 의거하여 여러 가지 논의를 올린 것은 전하를 지극히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한 것입니다. 어찌 말을 못하게 하고 배척하고자 하는 데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더구나 덕이 없다느니, 공이 없다느니 하신 말씀은, 신하로서 차마 못 들을 말입니다. 전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누군들 놀라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노여움을 조금 풀고 빨리 비답을 거두어 신하들의 마음을 편케 하여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처럼 말하지 않으면 전에 상차한 이들이 반드시 깨닫지 못할 것이다. 막지 말라."
하였다.

 

12월 9일 계축

대사헌 박동선(朴東善) 등이 능침에서 벌목한 죄인에 대한 조율을 잘못하였다는 이유로 모두 피혐하니, 체직시켰다.

 

대사간 홍방, 헌납 김광혁, 정언 이척연(李惕然)이 아뢰기를,
"전 부교리 최유해는 조정의 별다른 분부가 없었는데도 막중한 일을 사적으로 송 호부와 문답하였고, 심지어는 글까지 받아 가지고 왔으므로 신들이 상의하여 논박하였습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처음에는 신들의 논박이 공정치 않다고 물리 치시더니, 이제 이귀가 상차하자 ‘나도 실은 부끄러워 그의 사람됨을 경멸한다.’는 비답을 내리셨습니다. 신들이 어떻게 태연히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직하여 주소서."
하였다. 헌부가 처치하여 그들을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전 참판 최명길(崔鳴吉)을 서용하도록 명하였다. 윤계(尹棨)를 수찬으로 삼았다.

 

12월 10일 갑인

장유(張維)를 대사헌으로, 채유후(蔡𥙿後)를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12월 11일 을묘

이귀가 상차하기를,
"신이 삼가 보건대, 최유해가 송 호부에게 예에 대하여 문의하였다는 이유로 양사에서 죄목을 얽어 말하기를 ‘감히 나라의 막중한 예에 대하여 송 호부에게 의논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예악 문물은 모두 중국을 본받아 예로부터 선유들의 정론(定論)이 모두 중국의 예에서 나왔으며, 나라에 곤란한 의례 문제가 있을 경우 중국 선비에게 질문하였는데, 무슨 사사로이 접촉한 혐의가 있겠습니까. 선조 때 조헌(趙憲)이 질정관으로 중국에 가서 그곳 선비들과 문답하고 중국의 의례(儀禮) 18조목을 뽑아 조목별로 진달하였습니다. 지금 최유해가 예를 물어본 것이 무슨 큰 죄라고 사판에서 삭제하기까지 한단 말입니까. 선현의 정론과 중국의 공론이 이미 밝혀진 이상 마음을 가라앉히고 잘못을 깨달아서 자책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예를 문의한 사람을 죄주려고 하니, 이는 인륜을 해치고 임금을 무시하는 처사에 가깝지 않습니까. 성상께서는 다수의 주장에 동요하지 말고 빨리 이 일을 결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 뜻은 이미 밝혔으니 경은 깊이 생각하라."
하였다.

 

대사간 홍방 이하 여러 관원이 모두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신들은 나라의 법을 세우고 뒤폐단을 막기 위하여 최유해를 논박한 것이지,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이제 이귀의 차자를 보니, 온 힘을 다하여 대간을 공격하였습니다. 언관이 일에 따라 논박하는 것은 언관의 직분이며, 당초에 논박한 것도 가벼운 죄로 논박하였습니다. 그런데 중신 이귀가 이같이 심하게 헐뜯고 배척하니, 신들을 파직시켜 주소서."
하였다. 옥당에서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민성징이 치계하기를,
"유 부총(劉副摠)의 차비 역관(差備譯官) 이현남(李賢男)이 와서 말하기를 ‘지난 번 내가 아는 남쪽 사람에게 몰래 물어보니, 유장이 글을 아는 영리한 사람과 솜씨 좋은 장인들을 서울에 들여보내 사대부집이나 여염집에 다니면서 여러 가지 소식을 자세히 탐지시킨다고 하였다. 그래서 금(金)의 차사가 왕래할 때에도 여기에서는 알지도 못하였는데 가도에서 먼저 알고 있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한인이 우리 나라의 사정을 탐지하여 가도에 알릴 수 있는 것은 반드시 사정을 알려 주는 우리 나라 사람이 있기 때문이니, 더욱더 통분스럽습니다. 오부(五部)에 명하여 서울에 있는 한인을 일일이 색출하여 모조리 압송시키게 하소서. 그리고 가도에 있는 마시장(馬市場)을 없애지 않으면 역관 및 장사치들이 매매하는 길이 끊어지지 않아 항상 우리 나라 사정이 이를 통해 흘러 나갈 것입니다. 엄히 신칙하여 금지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지평 김원립(金元立)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해 사간원에 재직하였을 때 마침 상소를 올린 허적(許𥛚)이 논박당하였는데, 신도 죄주기를 청하는 논의에 참여하였었습니다. 따라서 신 역시 이귀가 헐뜯고 배척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니,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다. 옥당이 아뢰기를,
"원립이 엉뚱한 일을 끌어다가 억지로 피혐하니, 구차스럽습니다.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양릉군(陽陵君) 허적이 상차하기를,
"삼가 신이 살펴보니, 당초에 어떤 이는 ‘백부나 숙부로 호칭해야 한다.’ 하였고, 어떤 이는 ‘임금의 어머니는 부인(夫人)이 아니다.’고 하였으며, 어떤 이는 ‘할아버지에게 왕위를 물려 받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종통을 존중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 선현의 말을 잘못 적용하거나 고례(古禮)를 잘못 해석한 것이지, 처음부터 전하를 오도하고 예를 그르치려는 마음에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일은 전하께서 한번 결정하시면 그만인 것입니다. 아, 아버지와 아들간의 도리를 분명히 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위패를 바로잡는 것은 하루가 급한데, 지금까지 미루고 있으니, 이는 성상의 큰 잘못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논의가 분열되어 대례가 지연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 나라의 식자들도 오히려 답답해 하고 있는데, 어찌 중국 사람이 알게 해서 거기에 대해 왈가 왈부하는 말이 있을 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일찍 이 일을 결정하셨다면 최유해가 무엇 때문에 송헌에게 물어 보았겠으며, 그의 말이 어찌 우리 나라에 전해졌겠습니까. 전하의 효성으로써 전하의 부모를 높이는 일인데, 중국인의 말을 듣고 결정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속히 비답을 내려 대례를 결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임금을 아끼는 경의 정성을 아름답게 여긴다. 송 호부의 글에 ‘아버지가 죽었는데도 당 현종(唐玄宗)과 같이 부모를 높이지 못하였으니, 아픈 마음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하고, 또 ‘내가 헤아려 보건대, 어찌 의리에 합당한 예가 없겠는가.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사람에게는 두 아비가 없다. 이미 양자가 된 후에 친부를 높인다면 이는 근본이 둘이 되는 것이다. 그러고도 혐의스럽게 여기지 않는다면 불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약 양자가 되지 않았다면 부자의 도리는 하늘이 정해 준 것인데 위패의 차례를 바로 하지 않는다면 비례(非禮)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대종(大宗)을 존중하여 소종(小宗)을 강등하는 것은 의리를 은혜보다 앞세운 것이다. 지자(支子)를 세워서 대통을 잇게 할 경우에는 군신간의 의리가 중하여 감히 친부모를 대통에 끼워 넣을 수 없다. 그러나 왕좌를 양위받은 것이 아니고 몸소 대업을 일으켜 바로 할아버지의 대업을 이었을 경우에는, 아버지를 높여 할아버지를 잇게 하는 것이 곧 할아버지를 높이고 부자간의 도리를 다하는 것으로, 이는 부자간의 사사로운 정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고 했으며, 끝에는 ‘큰 강령이 바로잡히면 모든 조목은 자연히 바르게 되니, 마음이 편한 바를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하였다. 비록 끝의 말은 우리를 기롱하는 듯하지만 큰 뜻은 엄정하고 공평한 까닭에 다만 그 말이 예에 꼭 맞는다는 점에 감복했을 뿐, 수치스러운 것인 줄은 몰랐다. 이제 경의 차자를 보니 소견이 과연 출중하다."
하였다.

 

이경증(李景曾)을 헌납으로 삼았다.

 

12월 13일 정사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은 모두 불초한 몸으로 성상을 가까이 모시면서 구구한 마음은 오직 말씀을 하심에 있어서 화평하게 하도록 힘쓰시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요즈음 중신들의 차자에 대하여 전후에 내리신 비답을 보건대, 말씀이 너무도 심하시니, 신들은 황공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요즈음 삼사에서 올리는 계사를 보면 한 조정에 같이 있는 사람을 배척하고도 모자라 중국인까지도 배격하니, 이 역시 화평한 기상은 아니다. 대체로 옳고 그름을 말할 때는 오직 공정한 마음으로 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접대소(接待所)에서 아뢰기를,
"수비(守備) 일행이 내일 돌아가는데, 싸가지고 온 물화를 모두 버리고 가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협박하는 말에 불과할 것입니다만, 이렇게 할 경우에는 가정(家丁)들이 중간에서 훔치는 걱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역관들로 하여금 직접 싸가지고 가서 중도에서 주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수비가 장단(長湍)에 도착해서 장단부 백성들이 한인을 많이 죽였다고 부사를 속이고는 죽은 한인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였다. 부사 이엄(李淹)은 본디 겁이 많아서 채무증서를 써 주었다. 접반관 박금(朴嶔)이 안 된다고 힘껏 말했으나 허사였다.

 

조희일(趙希逸)을 경상 감사로 삼았다.

 

12월 16일 경신

총호사 김류 이하 여러 사람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총호사에게는 안장을 갖춘 말을 내리고, 산릉 도감 제조 세 사람, 천릉 제조 세 사람, 두 곳의 도청(都廳) 각 두 사람은 모두 가자하였으며, 시위한 도승지는 가자하고 사관은 모두 6품직에 천전(遷轉)시켰으며, 사릉(四陵)의 참봉 및 감조관(監造官)·장인 등도 모두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주인을 살해한 죄인 몽이(夢伊)와 낙금(洛今)을 처형했다.

 

허적이 다시 차자를 올려 대례를 빨리 결정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차자를 머물러 두고 내리지 않았다.

 

12월 17일 신유

유격 최요조(崔耀祖) 휘하 40여 명이 파선을 수리하기 위하여 장연(長淵)으로 가다가 황주(黃州)에 이르러 민가에 투숙하였는데, 항상 한인(漢人)들의 행패에 대해 걱정하고 있던 동네 사람들이 밤을 틈타 그들을 습격했다. 화살에 맞은 한인이 자못 많았고 죽은 자도 있었는데, 화가 난 한인들이 모두 황주로 가 습격자의 색출을 요구하려 했다. 접반사 이경헌(李景憲)이 이를 제지하지 못하고서 ‘서흥(瑞興)에서도 섬의 주민을 습격하여 죽인 변이 있었는데 또 오늘날의 일이 발생했으니 만약 변을 꾸민 사람을 통렬하게 치죄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유장(劉將)에게 답변할 말이 없을 것이다.’는 내용으로 치계하였다. 조정에서 드디어 한인들을 함부로 죽인 자를 수금하니 서로(西路)의 백성들이 더욱더 분통해 하고 원망했다.

 

망명한 역적 이경검(李景儉)을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권태일(權泰一)을 대사간으로, 김광혁(金光爀)·이경의(李景義)를 부교리로, 김덕승(金德承)을 지평으로 삼았다.

 

12월 19일 계해

이서(李曙)가 차자를 올리기를,
"총융청의 은과 포목을 태복시의 미곡과 교환하여 산성의 군량미로 삼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렇게 하는 것이 양쪽에 모두 편리할 듯하니, 해조로 하여금 차자의 내용대로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거의(擧義)하여 힘껏 싸웠거나 나를 호종했던 사람은 모두 충의로운 선비이다. 내가 경외의 실직에 제수하라고 여러 차례 명하였건만 아직도 이조와 병조에서는 시행하지 않고 있으니, 매우 잘못했다. 이번 도목정에서 특별히 뽑아 써서 그 공로에 보답하도록 하라."

 

12월 20일 갑자

지평 김덕승이 동료와 더불어 상회례를 거행하고자 문에 들어가는데, 감찰이 아무도 마중나가지 않았다. 김덕승이 이를 이유로 피혐하자, 헌부가 아뢰기를,
"대간이 문에 들어오는데도 감찰이 아무도 마중나가지 않았으니, 이는 근래에 없었던 일입니다. 언관의 체면은 일반 관리와는 다른데, 이미 여러 감찰에게 무시당한 이상 그 직책에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김덕승을 체직시키소서. 감찰은 지평보다 하급 관리로서 나아가 맞이하는 예가 분명히 법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새로 대간에 임명된 김덕승이 대각에 들어갈 때 감찰이 아무도 마중나가지 않았습니다. 비록 이렇게 하는 것이 전해오는 풍습이라고 핑계를 대기도 하겠으나, 체면을 손상시킨 점은 면할 수 없습니다. 행수 장무 감찰(行首掌務監察)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마 도주 평의성(平義成)이 정관(正官) 귤성종(橘成種)을 보내어 후추 등을 바치고, 호피와 표피 및 우리 나라의 토산물을 요구했다.

 

의금부에서 역적 이경검(李景儉)에 대해 연좌 및 적몰법을 적용하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당초에 다른 죄인에게 적용하였던 예에 따라 연좌법은 적용하지 말라."

 

진사 이원서(李元瑞)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 대원군(大院君)을 추숭하는 일은 예법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계운궁(啓運宮)131)  이 돌아가셨을 때부터 조정의 신하들이 예를 의논한 것이 어긋나, 조금 예를 안다고 하는 자도 오히려 숙부로 호칭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이어 유생이라 하는 자들이 종통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모든 사람들이 이에 부화 뇌동하여 한입에서 나온 것처럼 떠들어댑니다. 이에 비록 한두 명의 훈신이 예경에 근거하여 의논을 폈으나 그 말이 시행되지 않았고, 전하께서도 ‘나는 조부가 있음을 알 뿐 아버지가 있는 줄은 모른다.’고 하시고, 또 ‘앞으로 이같은 말은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도 그들을 완전히 제어하지 못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비록 전하의 효성이 미덥지 못하다 해도 가합니다.
지금 조정 신하들이 함부로 그릇된 예를 주장하여 전하께서 삼년상을 지내지 못하게 하니, 이는 잘못된 견해와 옳지 못한 주장으로 전하를 오도하면서도 조금도 거리끼는 바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는 빗나간 논의가 분분하게 일어나 바른 주장을 사설이라고 배척하여 성대한 조정을 하나의 아비 없는 나라로 만들 것이니, 신은 통탄합니다.
삼가 이귀의 차자에 대한 비답을 살펴보건대, 종이에 가득한 온화한 말씀은 모두 지성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원에서는 도리어 ‘임금을 지극히 올바른 곳으로 인도하고자 한 것이니, 비답을 거두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전하의 총명을 어찌 이다지도 심하게 가리울 수 있단 말입니까. 이른바 지극히 올바르다는 말은 공자가 순임금에 대하여만 쓰신 말인데, 순임금은 그의 아비인 고수(瞽瞍)를 천하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정원에서는 아비를 아비로 대접하지 못하게 하면서 지극히 올바르다고 하니, 어찌 당대만의 죄인이겠습니까. 당 현종과 같은 임금으로도 그의 친부인 상왕(相王)132)  을 받들어 천자가 되게 하였고, 가정 천자(嘉靖天子)133)   역시 그의 친부를 천자로 추존하였습니다. 이는 곧 부모를 높이는 도리를 제대로 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그렇게 한 경우가 있습니다. 성종께서 덕종을 추존한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오직 전하만이 친부를 추존할 수 없단 말입니까.
또 제사를 주관하는 점에서 보면 대원군 신주에는 고(考)라 쓰고 방제(傍題)를 쓰지 않았으니, 이는 주관자가 바로 전하인 셈이며, 계운궁의 신주에는 비(妣)라 쓰고 능원군(綾原君)으로 방제를 썼으니, 이는 능원군이 주관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찌 한 부모에 대해서 임금과 신하, 형제와 아우가 나누어서 제사를 주관하는 경우가 있겠습니까. 또 어떻게 임금이 고비(考妣)라고 칭한 신주를 오래도록 여염집에 모실 수가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먼저 뜻을 가로막은 신하들의 잘못을 바로잡고 속히 대례를 결정하여 인륜을 밝히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조익(趙翼)을 부제학으로 삼고, 특지로 정광성(鄭廣成)을 공조 참판에 제수하였다. 조익은 자질이 뛰어났으며 경학에 전념하였다. 광성은 몸가짐이 근신하였다. 그의 아비인 정창연(鄭昌衍)은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고, 나이 80이 넘어서도 무병하였으며, 그의 동생 정광경(鄭廣敬)과 함께 현직(顯職)에 오르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영예롭게 여겼다.

 

12월 21일 을축

김종일(金宗一)을 지평으로, 이상질(李尙質)을 정언으로 삼았다.

 

12월 22일 병인

영의정 오윤겸(吳允謙)이 상차하기를,
"신은 학문이 거칠어서 예경(禮經)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신도 혼모하여 사리를 밝게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난번 어전에서 이귀가 올린 차자의 주장에 대해 신에게 물어보시니, 신이 비록 어리석고 무지하지만 감히 생각을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창업한 임금은 처음으로 종묘를 건립하는 까닭에 전대를 추숭함에 있어서 압굴(壓屈)되거나 방애되는 바가 없으니, 참으로 사리에 합당하며, 또한 근거로 삼을 만한 전례가 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비록 중흥의 큰 공이 창업한 것과 다를 바 없지만, 소종(小宗)으로서 들어와 대통을 이어 선왕의 종묘를 받들었으므로, 그 사체가 창업한 군주가 종묘를 처음 건립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또한 대원군은 위로는 선왕의 명을 받지 못했고 아래로는 백성을 다스린 사실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 친부라는 이유로 왕에 추존하고 태묘에 올리려 하시니, 신은 이 일이 종통에 대해서 압굴되는 바가 있고 공의에 있어서 방애되는 바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지위에 오른 뒤에 그에 맞는 의례를 거행하고 음악을 연주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지위에 오르지 못했다면 맞지 않는 의례와 음악을 어떻게 쓸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중대한 일은 반드시 올바른 예에 맞은 다음에야 여러 사람이 승복하게 됩니다. 만약 사리에 맞지 않아 사람들이 승복하지 않는다면, 비록 부모를 높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부모를 높이는 바른 도리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또한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지금 추존하여 종묘에 모시는 일은 실제로 임금이 되어서 자연히 승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위패를 종묘에 모시면 다른 한 위패를 종묘에서 내와야 합니다. 따라서 전하의 부모를 높이려는 마음과 조상에 대한 효성을 양쪽 다 온전히 할 수는 없을 것이니, 이 또한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명확한 근거도 없는 신의 의견은 진실로 고려할 것도 못 되지만, 추숭하여 종묘에 모시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릅니다.
삼가 이귀가 전후에 올린 차자에 대한 비답을 살펴보고는, 신은 마음이 황공하고 불안하여 오래도록 진정치 못하였습니다. 지금 조정의 신하들이 전하의 부모에 대한 지극한 정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단지 이 일이 국가의 막중한 일인 데다 전대에도 명확히 근거로 삼을 만한 글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관점이 다르기도 하고 생각이 못 미치기도 했으며, 혹은 말이 맞지 않기도 하고 비유가 부적합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한결같이 나라와 임금을 위한 것이지, 다른 뜻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지나친 말씀으로 여러 신하들을 지나치게 의심하시니, 자못 성대의 훌륭한 일이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심기를 화평히 하여 뜻을 거스린다고 무도하다 하지 말고 사적인 은혜로 공론을 저버리지 마소서. 그리고 그 일을 어렵게 여기시고 신중히 생각하시어 알맞은 예가 되도록 힘쓰소서. 학식과 지혜가 없는 신이 외람되게 영상의 자리에 앉아 국가의 중요한 의논이 결정되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는 모두가 신의 죄입니다. 성상께서는 빨리 신을 물리치시고 어질고 덕있는 사람을 뽑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를 잘 살펴보았다.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대사헌 장유(張維)가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삼가 연평 부원군 이귀의 계사를 살펴보니, 신을 나무라고 배척하는 말이 매우 많아 크게 놀랐습니다. 요즈음 추숭의 예를 의논하는 일로 인하여 상소를 서로 올리니 보기에 모양이 좋지 않고, 전후에 전하께서 내리신 비답도 각박한 말씀 뿐이어서 자못 백성들이 전하에게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신은 대사헌의 자리에 있으면서 일찍이 바른말을 올려 전하를 잘 인도하고 일을 바로잡는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신의 잘못입니다. 그러나 신이 비록 불초하지만 지금 중신이 나무라는 점에 대하여는 그 잘못을 시인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본래 식견이 낮고 예학에 어두워서 국가의 대례에 대해서 함부로 논의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추숭하는 것에 대해서만은 여러 경전의 말씀과 선현의 정론을 살펴본 결과, 옳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지금까지 의견이 같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이랬다 저랬다 한다.’고 한 말은 무엇에 근거를 두고 말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견해는 마땅히 스스로가 알아서 지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사이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 수 있겠습니까.
또 최유해의 일은, 당초에 논박한 계사 가운데 ‘신하는 개인적인 교제를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한 말과 ‘본국의 사정을 누설했다.’고 한 말 등은 너무 각박한 것 같아서 신은 지나친 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최유해는 사신으로서의 본임무가 아닌 국가의 막중한 전례를 중국인과 논의하였으니, 망령된 죄는 면키 어렵습니다. 당시 대간의 논의가 이미 거듭 일어나서 갑자기 이견을 내세워 그만두게 할 수 없었으므로 다만 말만 고쳐서 그대로 연계(連啓)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이귀와 공청에서 만났을 때 매우 성을 내며 말하기에, 신은 서로 다투기 싫어 아무말 않고 있다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의 계사 중에 다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언관으로 있으면서 뚜렷하게 배척을 받은 이상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대로 자리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추숭의 일은 국가의 대례여서 경전을 깊이 연구하여 끝까지 일관된 주장을 하였으며, 최유해를 논박한 계사 중의 몇 가지 조목에 대해서도, 최유해가 잘못이 없다고 여긴 것이 아니라 헌부의 논박이 너무 각박하다고 여긴 것이니 뜻은 사실 중도에 맞은 것입니다. 전에 논박한 계사에 의거하여 망령된 죄를 질책하였으며, 이귀가 성내어 함부로 하는 말에 대해서도 서로 다투지 않았으니, 더욱더 잘못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피혐할 만한 일이 있겠습니까. 장유를 출사시키소서.
진주 판관 윤좌벽(尹左辟)은 본래 흉패한 사람으로 지난 계축년에 정창언(鄭昌言)의 상소에 연명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유독 그만은 죄를 받지 않고 아직도 버젓이 조정의 반열에 끼어 있으므로 물정이 매우 통분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판관에 임명된 후에는 외람된 일을 자행하고 있으며, 또 그 아비의 농장이 관내에 많이 있는데 갖가지로 백성들에게 폐단을 끼쳐 백성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문(營門)을 신설한 지역에 이같은 사람을 하루라도 그대로 놔둘 수 없습니다.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윤좌벽에 관한 일은 다시 상세히 살펴서 논계하라."
하였다.

 

12월 24일 무진

평안 감사 민성징(閔聖徵)이 황해도의 소나무를 베어다가 광량진(廣梁鎭)의 전선과 병선을 만드는 데 쓰기를 청하였는데, 허락했다. 광량진이 폐지된 지 칠 년 만에 다시 설치하였는데, 기계가 모두 없어졌고 또 평안도에는 조선에 필요한 재목을 기른 곳이 없는 까닭에 이러한 요청을 한 것이다.

 

영의정 오윤겸이 첫 번째 사직서를 올렸다. 상이 하교하기를,
"과격한 말은 따질 것이 없으니, 경은 사직하지 말고 편안히 공무를 수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오윤겸이 차자를 올려 추숭에 반대하자, 화가 난 이귀가 편지를 보내어 오윤겸에게 욕을 했으므로 오윤겸이 사직서를 올린 것이다.

 

12월 25일 기사

예조 판서 김상헌이 차자를 올리기를,
"전하께서 하늘을 받드시는 것 같이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시어, 중국의 경사(慶事)에 대해 한번도 예를 폐한 적이 없었으니, 어찌 우리 나라의 신민들만 감복하겠습니까. 아마도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소문을 들었을 것이니 참으로 성대한 일입니다. 그러나 신이 어제 궐정에서 예를 관장하여 행하였는데, 마음에 온당치 않다고 여겨지는 점이 있기에 감히 신의 생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달 24일은 우리 성종대왕의 기일인데 마침 중국 황제의 생신과 겹쳤습니다. 따라서 생신에 거행하는 모든 축하 의례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기일에 가져야 할 슬픈 마음 또한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이 알기로는, 예의 기본 원칙은 길흉은 그 도리가 다르기 때문에 그에 따른 애락(哀樂)이 서로 겹쳐질 수 없으며, 예의 근본 의리는 부모 잃은 슬픈 마음이나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효성을 다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기제(忌祭)는 상례를 뒤이은 것이며 경하하는 것은 즐거운 일인데, 제삿날 몸소 춤추는 의식을 거행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효성을 다하게 한다는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비록 예에 ‘낮은 사람의 일 때문에 존귀한 사람의 일을 폐할 수 없다.’는 조문이 있기는 합니다만 이는 천지의 신에게 제사지낼 때 직접 주관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대신 주관시키는 것을 지적한 것이지, 제삿날에 몸소 춤추는 경우와는 다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의 등급을 낮추어 간략히 거행하는 것이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라는 것은 마치 우리의 몸과 같은 것입니다. 몸이 다 갖추어지지 않으면 그것을 불구라고 합니다. 어찌 경솔히 간략한 예를 거행하여, 불구라는 비방을 자초해서야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미 사신을 보내어 천자가 계신 곳에서 하례를 올리도록 하였으니, 이는 전하를 대신하여 사신이 그곳에서 예를 거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하께서는 여기에 계시면서 본국의 기제를 위하여 하례를 사정상 생략한다 해도 예를 폐한 것은 아닙니다. 하물며 동짓날이나 설날에도 매번 하례를 올려 한번도 거른 적이 없었으니 이제 하루쯤 생략한다고 해도 어찌 사대하는 지극한 정성에 조금이나마 흠이 나겠습니까.
또 전하께서 의식을 마치시고 궁에 돌아오실 때에 전내에서 지척도 떨어지지 않은 곳을 바로 지나 오시면서 하례를 올린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급히 신판(宸版)을 거두고 연을 타고 임하시었으니, 이 역시 합당한 처사는 아닙니다. 가셨던 길로 되돌아 오시는 것이 마음에도 편하고 사세에도 알맞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각별히 유념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말이 일리가 있으니 상의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공조 참판 정광성이 소를 올려 특지로 공조 참판에 제수한 명을 거두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지난 광해조 당시 모든 외척들이 교만하고 방자하였으나, 오직 경의 집안만은 이에 물들지 않고 시종 근신하였다. 내가 경탄하는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이번에 내린 명령은 그러한 훌륭한 일을 표창하기 위한 것이니, 경은 사양하지 말라."

 

간원이 아뢰기를,
"추숭은 본래 옳은 예가 아닙니다. 연평 부원군 이귀는 비록 나름대로의 견해가 있다 하더라도 자기의 견해를 밝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날마다 차자를 올려 방자한 말을 기탄없이 하고 재상에게 편지를 보내 심하게 욕보이어, 마치 임금을 협박하고 조정을 억누르는 듯이 하였습니다. 이에 기강이 완전히 무너지고 예의는 모조리 땅에 떨어졌습니다. 당당한 나라에서 어떻게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준동하는 무뢰배들은 예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넌지시 전하는 말에 따라 번갈아 소를 올려 조정을 모욕하니, 온 나라가 한심하게 여기어 심지어는 그들을 상소꾼이라고까지 합니다. 추숭하는 일이 옳고 그른지는 고사하고라도 그들의 행위는 해괴한 것이며 조짐도 좋지 않습니다. 이것은 필시 이귀가 선도한 것입니다. 중신이라는 이유로 용서할 수 없으니,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양릉군(陽陵君) 허적은 본래 요망스런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었는데, 운 좋게 공을 세워 분수에 넘치는 재상의 대열에 끼게 되었습니다. 무슨 학식이 있어 예를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여러 번 상소를 올리니, 이는 기회주의자에 불과합니다. 요즈음 성상의 너그러운 비답을 인하여 망령되이 성상의 뜻을 알 수 있다고 여기어 야유와 농락이 더욱 이르지 않는 곳이 없고, 무뢰배와 접촉하여 번갈아 상소를 올리게 하고는 그들이 초야의 선비라고 하여 임금을 기만하고 조정을 우롱하고 있습니다. 당당한 나라에서 어찌 한 요망한 사람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예를 무너뜨리는 행위를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그 뜻은 간악하고 그 일은 경악스럽습니다. 이를 벌하지 않는다면 나라꼴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관직을 삭탈하도록 명하소서."
하고, 헌부에서도 이런 내용으로 논하였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상이 야대를 열도록 하여 《대학연의》를 강론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편은 부모를 섬기고 수신(修身)하는 도리에 대하여 간략하고도 곡진하게 설명하고 있다."
하니, 시독관 김광혁(金光爀)이 아뢰기를,
"옛사람들은 부모를 섬기고 수신하는 도리에 대하여 반드시 시종 일관해야 한다고 경계하였기 때문에 이 글에서도 당 현종을 예로 들어 경계하고 있으니, 그 뜻이 매우 간절합니다. 예로부터 임금은 안일 속에서 태만에 빠지기 쉬운 까닭에 끝과 처음이 같지 않아서 화란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당 현종의 경우도 개원(開元) 연간에는 정치에 힘쓰고 요숭(姚崇)이나 송경(宋璟)과 같은 어진 신하가 있었던 까닭에 천하가 태평하였지만, 천보(天寶) 이후에는 간신이 정권을 농락하고 어여쁜 후궁들이 화를 조장하여 나라가 망할 뻔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유종의 미를 거두기가 어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검토관 윤계(尹棨)가 아뢰기를,
"임금이 처음과 끝이 다르게 되는 것은 공경하느냐 태만하느냐에 달렸습니다. 나라의 치란이 임금의 한 마음에 달려있는 까닭에 《대학》에서도 ‘마음에 성내는 바가 있으면 바르게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요즈음 성상의 분부에 격한 내용이 많으니, 신은 전하께서 마음을 바르게 하는 공부에 미진한 점이 있지 않나 염려됩니다."
하고, 김광혁이 아뢰기를,
"윤계의 말은 바로 요즈음 조정의 신하들이 걱정하여 항상 하는 말입니다. 지난번 중신(重臣)이 올린 차자에 대한 비답이 온당치 않아서 여러 신하들은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 서로 돌아보며 놀라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감히 이렇게 진달하는 것입니다."
하자, 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어 술을 내렸다.

 

12월 26일 경오

상이 능을 옮기는 역사로 인해 경기 백성만 피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전조(田租)를 견감시켜 주게 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해마다 봄에 지급하는 녹봉은 모두 경기의 세미(稅米)로써 충당하여 왔는데, 금년에는 능을 옮기는 역사로 인해 두 도감의 제조 이하 원역(員役) 및 시위 장사, 여러 집사, 액정서(掖庭署) 하인의 급료를 모두 경기의 세미로 지급하였으므로 앞으로 거둘 수 있는 세미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지금 성상의 하교를 보니, 경기의 백성을 염려하시는 뜻이 말 밖에 넘쳐 흐릅니다. 본 호조에서 앞으로 쓸 경비를 고려하여 견감하지 않는다면, 이는 성상의 백성을 돌보는 마음을 헛 것으로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전하의 뜻에 따라 세입을 줄이면 여러 관리의 녹봉을 지급할 수 없게 됩니다.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왕도(王道)의 근본이긴 하지만, 충신한 신하에게 후한 녹봉을 지급하는 것도 아랫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도리입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해서 모두를 만족하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전하의 명령이 한번 내림에 백성들이 현재 고개를 쳐들고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내려진 은택을 본조에서 저지한다면 무식한 백성들이 어찌 경비가 부족하여서 이런 부득이한 조처를 한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조금 전에 경기의 각 고을에서 보고한 바를 보니, 이미 많은 세미를 써서 남은 것이 얼마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부득이할 경우 별수미(別收米)를 매 1결당 5승씩을 감면해주면 그 양이 1천 2백 30여 석이나 되니, 이에 의거하여 견감해 주어 조금이나마 혜택을 베푸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다시 헤아려 더 견감하여 주고 피해가 매우 심한 고을은 배를 견감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각 관아에서 무판(貿販)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때 날씨가 매우 추워 승지를 옥에 보내어 적간하게 하였는데, 각 관아에 채무를 져서 수감된 자가 매우 많았다. 이에 상이 하교하기를,
"요즈음 각 관아에서 행하는 무판에 모두 폐단이 있다고 하는데, 이 일은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다. 비록 매매한다고 하더라도 백성을 억압하는 일이 없다면 혹 모르겠지만, 도성 백성에게 대여해 주고 달수를 쳐서 이자를 받기까지 하니, 매우 부당할 뿐만 아니라 옥에 가두고 징수할 즈음에 반드시 원망이 깊을 것이다. 이는 바로 조그만 것을 얻으려다 큰 것을 잃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폐단을 엄금하지 않는다면 빈민은 도산하게 되고 감옥은 빌 날이 없을 것이다. 각 아문의 해당 당상 및 낭청, 체부(體府)의 종사관을 모두 추고하고, 앞으로는 절대 대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겨울철의 옥은 하루가 일년 같은데, 형관이 처결을 태만히 하여 수감자가 무려 1백여 명이나 된다. 해당 당상과 낭청을 모두 추고하여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죄를 징계하도록 하라. 그리고 앞으로는 매일 개좌(開坐)하여 즉시 처결하도록 하라."
하였다. 닷새 후 다시 승지를 파견하여 적간하도록 하였는데, 형조에서 석방한 사람을 도로 수감한 사실이 적발되었다. 상이 해당 당상을 먼저 파직시킨 후 추고하도록 명했다.

 

처음에 삼수(三水)의 토착민 이승덕(李承德) 등이 상소하기를,
"본 삼수군의 성은 적생면(積生面)과 1백 리 정도 떨어져 있는데, 성의 사방이 모두 산과 강으로 둘려 있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조그만 토지나 한 걸음이라도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조그마한 땅도 없습니다. 이에 본군의 이민(吏民)이 모두 적생촌에 살면서 성중에서 신역(身役)을 치루느라 식량을 사가지고 다니기를 군인들이 입번(立番)하듯이 하고 있으니, 그 폐단이 매우 큽니다. 적생은 평탄한 평원일 뿐만 아니라 의거할 만한 형세도 있고 10진(鎭)의 여러 보(堡)와 길이 가깝게 통해 있어 삼수와 비교해 볼 때 모든 일이 편리합니다. 또한 적로(賊路)의 요충지라는 점에서 보면 적생이나 삼수가 다를 바 없으니, 적생촌으로 진을 옮겨 백성들의 바람에 부응하여 주소서."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삼수진은 두 강 사이에 끼어 있는데 지대가 높고 척박하며 기후는 추워서 농사가 되지 않습니다. 성중의 민호(民戶)가 7,8가구도 못 되며, 다만 패랭이꽃을 심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민(吏民)들은 모두 1백 리나 떨어진 적생촌에 살면서 교대로 입번하므로 견디다 못해 도망치는 백성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본읍이 날로 피폐되는 것은 형세상 당연한 일입니다. 전부터 사명(使命)을 받들고 오가며 보고 들은 자들이 적생으로 읍을 옮기고자 하였으나, 단지 연혁(沿革)에 관계되는 중요한 일이라서 지금까지 미루어 온 것입니다. 이승덕 등이 올린 상소는 절박한 사정에서 나온 것으로 과장된 말이 아닙니다.
적생은 10진의 여러 보와 거리가 가깝게 통해 있고 지대가 평탄하며, 삼수와 1백 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나 기후의 춥고 따뜻함과 토질의 비옥하고 척박함이 전혀 다른 지역 같습니다. 백성들의 바람에 따라 읍을 옮겨야만 삼수군이 보존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조종조에서 군읍을 세우면서 반드시 깊이 생각하였을 것인데, 하루 아침에 몇 명의 백성이 호소한다고 하여 갑자기 옮긴다는 것은, 일이 곤란할 듯합니다.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다시 형편을 잘 살펴보고 아울러 민의도 참작하여 보고하게 한 후에 시행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영의정 오윤겸이 재차 사직서를 올렸으나, 불윤 비답을 내렸다.

 

12월 27일 신미

헌부가 연계하여 최유해·윤좌벽·이귀·허적 등의 일을 논하니, 상이 답하였다.
"윤허하지 않는다. 이귀는 상신을 욕한 잘못에 대해 추고하고 윤좌벽은 파직하라."
하였다.

 

체찰사 김류가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삼가 종사관(從事官)을 추고하라는 하교를 보고 신은 진실로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처음 체찰사의 임무를 맡았을 때는 막 난리를 겪은 뒤라 창고가 텅 비어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에 힘껏 경영하여 급할 때 쓸 수요를 마련한 것이지, 조그만 이익을 내려고 백성을 상대로 장사한다는 것은 신의 본뜻이 아닙니다. 모리배들이 체찰부에 물건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로 다투어 받아가 놓고는 갚을 때 가서는 여러 가지 꾀로 피하고 날짜를 미루어, 일년이 지나도 갚지 않기도 하고 아예 도망가서 나타나지 않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부득이 그 중에 가장 심한 자를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독촉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이 매우 악독하여 도리어 못된 꾀를 내 심지어는 비방하고 날조해 관리를 동요시키기까지 합니다. 본부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각 관아의 채무자들도 모두 이와 같으니, 이번 조처로 관원들이 문책이 두려워 그들을 놔두고 다스리지 않는다면 관청의 물화를 수습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세세한 일들은 모두 신의 지시에 따라 한 것으로, 종사관은 이 일에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제 성상의 하교를 받고 보니 두려운 마음을 누를 길이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은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고 이미 대여한 물품은 기한을 정하여 받아들이고 앞으로 더 이상 대여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폐단은 자연히 없어질 것이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종사관을 추고하지 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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