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4권, 인조 9년 1631년 1월

싸라리리 2025. 12. 29.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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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을해

상이 정조 망궐례(望闕禮)를 거행하였다.

 

1월 3일 정축

상이 태복시의 말을 동창위(東昌尉) 권대항(權大恒)에게 하사하였는데 대항이 그 말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다른 말로 바꿔오도록 하니, 상이 이 말을 듣고 허락하였다. 그런데도 대항이 흡족하게 여기지 않고 관리를 매질하였으므로 간관이 탄핵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1월 6일 경진

민성휘(閔聖徽)가 치계하기를,
"본도 각 고을의 교생(校生)들이 난리를 겪은 뒤로 독서할 여가가 없었는데, 어디고 간에 모두가 그러합니다. 3년이 지난 뒤에 고강(考講)하여 도태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7일 신사

지난 겨울 11월에 함경도에 한 길이 넘도록 큰 눈이 내려 사람과 가축이 많이 죽었으며, 경성(鏡城) 이북의 도로가 불통하였다.

 

1월 8일 임오

조경(趙絅)을 이조 정랑으로, 이행원(李行遠)을 응교로 삼았다.

 

1월 10일 갑신

상이 태학생에게 황감(黃柑)을 내리고 시취(試取)하게 하였는데, 생원 이창립(李昌立)이 수석을, 생원 곽성구(郭聖龜)와 남노성(南老星)이 2등과 3등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이창립이 지은 글 가운데 선왕의 옛 이름 자가 들어 있었으므로 상이 창립의 수석을 취소시키도록 명하고, 곽성구와 남노성 등에게 직부전시(直赴殿試)할 자격을 부여하는 한편,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차등 있게 급분(給分)001)  하게 하였다.

 

전 병조 참판 이명준(李命俊)이 죽었다. 명준은 고 재상 이제신(李濟臣)의 아들로서, 선묘조(宣廟朝)에 문과(文科) 갑과(甲科)에 장원하였다. 인품이 강직하고 청렴 결백하여 관직을 역임할 때마다 청백하기로 이름이 났는데, 허술한 집에서 살면서 늘 양식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광해 때에는 서제(庶弟)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영덕(盈德)으로 귀양갔다가 반정(反正) 뒤에 장령으로 부름을 받고 돌아왔는데, 홀로 우뚝 서서 감연히 바른 말을 했으므로 조정이 이로 인하여 엄숙해졌다. 전에 궁인(宮人) 김(金)·조(趙)의 일로 상소를 올려 간(諫)하였는데, 그 말이 너무나도 절실하고 곧았으므로 상이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대사간에 임명하였다. 그 뒤 병조 참판으로 물러나 양천(陽川) 시골 집에 있다가 죽었는데, 임종 때에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라고 유언하였다. 상이 이 말을 듣고 찬탄하고 애도해 마지않으며 하교하였다.
"이명준은 관청의 일에 온통 마음을 기울였고, 임금을 바르게 하는 데에 뜻을 두었는데, 불행히도 갑자기 죽으니 애석하기 그지없다. 해도(該道)로 하여금 석회 및 조묘군(造墓軍)을 제급해 주어 그의 충성을 기리도록 하라."

 

1월 11일 을유

상이 승지를 보내 이원익(李元翼)의 안부를 묻게 하면서 승지에게 하교하기를,
"그의 기력은 어떠하고 살고 있는 집은 또 어떠한지 내가 자세히 알고 싶으니 일일이 서계하라."
하였다. 회계하기를,
"원익은 이미 극도로 쇠약해져 기력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돌아앉거나 누울 때에도 꼭 사람이 부축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살고 있는 집도 몇 칸 초옥(草屋)에 불과하여 바람과 비를 가리지 못하였습니다. 대대로 선영 아래에서 살아 오면서도 한 두락의 밭이나 두어 명의 노비도 없이 그저 온 식구가 월봉(月俸)으로 겨우 입에 풀칠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40년 동안 정승을 지냈으면서 몇 칸 초옥에 살며 바람과 비도 가리지 못한다니, 그의 청백한 삶이야말로 옛날에 없던 일이다. 내가 평소 그를 경모했던 것은 그의 공덕(功德) 때문만이 아니다. 이공(李公)의 맑고 검소한 삶의 자세를 여러 관료들이 본받는다면 백성이 곤궁하게 될까 걱정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의 검소한 덕행은 또한 높이 표창하여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해도로 하여금 정당(正堂)을 지어주게 하고 해조로 하여금 무명 이불과 흰 명주 요를 주게 함으로써 그의 높은 정신이 이어지도록 하라."
하였다. 이원익이 마침내 상소를 올려 저택을 사양하니, 상이 부드러운 말로 유시하며 윤허하지 않고, 공신에게 내리는 노비를 다른 예에 따라 주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이원익이 선조(先朝) 때 호성 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었으면서도 사패(賜牌)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1월 12일 병술

정조 문안관(正朝問安官)이 가도(椵島)에 도착하니, 유흥치(劉興治)가 말하기를,
"나의 휘하에 있는 가정(家丁) 30여 명이 중화(中和)에 갔다가 태반이 피살되었다. 이 사람들은 원래 중국 백성인데도 조선 사람들이 초개처럼 타살하였다. 당신들은 포정사(布政司)에 알리고 살인자를 찾아내어 가도로 묶어 보내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우리 측에서 표문(票文) 없이 조선 지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절대로 타살하지 말고 가도로 압송하는 것이 가장 온당한 일일 것이다."
하고, 또 그의 휘하에 있는 김성운(金聲運)과 이현(李見) 등을 육지에 내보내 살인자를 찾아내겠다고 큰소리쳤으므로 서쪽의 민심이 놀라 흉흉하였다.

 

1월 14일 무자

북병사 이항(李沆)이 치계하기를,
"길주(吉州)·명천(明川)·경성(鏡城)·부령(富寧)·회령(會寧)·종성(鍾城)·온성(穩城)·경원(慶源)·경흥(慶興)에는 모두 30여 개소의 보(堡)가 있는데, 성가퀴와 기구가 대부분 낡고 불완전하여 혹시라도 대적(大賊)이 침입해 올 경우 무너지고 말 것이니, 반드시 주진(主鎭)과 합력하여 지켜야만 서로 보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위급한 때를 당하여 철수해 들어간다면 거리가 너무 멀어 소와 말이나 재산 등을 모두 버리고 떠나야 할 것이며 형세상 늙은이와 어린이들도 데리고 가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얼음이 풀릴 때까지만이라도 옛 관례에 따라 합쳐 지키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15일 기축

이천(利川)의 유학(幼學) 김익선(金益銑)이 상소를 올려 추숭(追崇)하는 예를 속히 정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관향사는 책임이 너무도 중요한데 새로 임명된 박로(朴𥶇)는 별로 이렇다 할 재주도 없는데다가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난까지 있으니, 체차를 명하소서. 종사관도 일찍이 대간이나 시종을 역임하고 명망이 있는 자를 골라 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행 사직(行司直) 성준구(成俊耉)는 오래 전곡을 관리해 오는 동안 사람들의 말이 많았으며, 물품을 모리배들에게 모두 넘겨줘 본 창고에는 남아 있는 저축이 허술하기 짝이 없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그리고 현재의 수량과 나누어 준 수량을 조사하여 해조로 하여금 회록(會錄)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박로는 묘당에서 신중히 뽑았으니 필시 합당하지 않을 리가 없다. 성준구는 여러 해 동안 바쁘게 나라의 일을 위하여 마음을 다 하였으니, 도리상 포상을 해야 마땅하고 배척해서는 안 된다. 회록은 유사가 알아서 할 것이니, 꼭 번거롭게 할 것이 없다. 종사관은 앞서 이미 가려 보냈으니 만큼 우선 임무를 수행하게 하라."
하였다. 이튿날 회록하게 해야 한다는 뜻으로 재차 아뢰니, 상이 따랐다.

 

1월 16일 경인

행 판돈녕 김상용(金尙容)이 재차 차자를 올려 치사(致仕)를 간곡히 청하니, 상이 부드럽게 유시하며 윤허하지 않았다.

 

1월 17일 신묘

상아로 된 표신(標信)을 고쳐 만들었다.

 

경상 감사 조희일(趙希逸), 경기 수사 최진립(崔震立)을 인견하였다. 상이 희일에게 이르기를,
"경이 이제 멀리 떠나니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진달하라."
하니, 희일이 아뢰기를,
"출척(黜陟)을 밝게 하고 차역(差役)을 균등하게 하는 것이 바로 감사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영남의 좌도와 우도는 차역을 시키는 법이 각기 다르니, 신은 양전법(量田法)을 고쳤으면 합니다. 그리고 지금 수령들이 당연히 부과해야 할 부역으로 백성을 독촉하여 동원하면 백성을 학대한다고 지목받기 마련이고, 성실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한 사람이 비방하면 탄핵하는 논이 뒤따르게 되며, 그 간에 잘 다스린다고 이름이 난 자도 아첨하여 명성을 얻으려 하는 자들이 대부분이니, 감사로서 출척을 할 때는 반드시 실적을 우선으로 하고 명성은 뒤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진달한 두 가지 일을 보건대 모두 요령을 알고 있다 하겠다. 예로부터 영남은 인재가 많은 지방으로 일컬어져 온 만큼 문학의 선비가 부족할 걱정은 없다마는 무략에 있어서는 다른 도에 미치지 못하는 형편이다. 남쪽 지방의 풍습을 보면 문(文)을 귀하게 여기고 무(武)는 천하게 여기기 때문에 선비 집안의 자제들이 활 쏘는 법을 배우는 것조차도 부끄럽게 여기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다. 경은 문한(文翰)의 인사이니 만큼 유술(儒術)을 권장하기 위해 더 힘쓸 것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마는 무략을 진흥시키는 일 역시 폐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왜인들이 교활하여 더 머무르려고 하는 이 일도 나라의 근심거리인데, 이것도 감사가 선처하기에 달려 있다."
하니, 희일이 아뢰기를,
"난리를 겪은 이후로 무략에도 힘을 기울이지 못했으나 문교도 해이해지고 말았는데, 문무간에 인재를 양성하는 방법은 오직 권장시키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왜인을 대우하는 일이 큰 폐단이 되고 있긴 하나 이왕 주어야 할 물건이라면 흔쾌하게 허락해 주어야 마땅합니다. 어찌 이런 일 때문에 일을 만들어 뒷날 국가의 화환이 되게 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상이 최진립에게 이르기를,
"지난해 교동(喬桐)은 가뭄의 피해가 가장 혹독하였는데, 게다가 서정(西征)할 때에 다른 고을보다 병졸을 두 배나 뽑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지금 너무나도 지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처럼 청렴한 사람이 내려가게 되었으므로 백성들이 반드시 소생하게 될 것이다. 요즘 들어 해적은 없다 하더라도 중국 배들로 인한 근심은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고을은 지금 수사가 태수의 일까지 겸하고 있으니 군사와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 어찌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진립이 아뢰기를,
"이 고을은 사면에 배를 둘 곳이 없고 군졸도 너무 적습니다. 만일 전원을 동원하여 배를 지키게 하면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맡은 장소를 지키지 않게 되면 배는 쓸모없는 물건이 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신의 생각에는 포구를 파서 배 둘 곳을 만들었으면 하는데, 다만 백성들의 힘이 지나치게 소비될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을 백성들이 지금 너무도 지쳐 있으니, 포구를 파는 역사를 경솔하게 언급해서는 안 된다. 경이 형세를 살펴 선처토록 하라."
하였다.

 

오전(吳竱)을 교리로, 신경유(申景𥙿)를 전라 병사로 삼았다.

 

1월 19일 계사

자전에게 병환이 있자 시약청(侍藥廳)의 설치를 명하고, 이어 하교하였다.
"자전의 병세가 너무 중하니 그지없이 걱정스럽고 안타깝다. 해조로 하여금 산천에 기도를 드리게 하는 한편, 억울한 옥사를 심리하여 죄가 가벼운 죄수를 우선 석방하도록 하라."

 

1월 20일 갑오

상이 하교하기를,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은 가자(加資)하고, 유학 김군석(金君錫)과 심진(沈榗)은 모두 실직(實職)에 임명하여, 위로가 되시도록 하라."
하였다. 【 김군석은 연흥 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손자이며, 심진은 그의 외손이다.】 심진을 사재감 참봉으로 삼았다.

 

1월 21일 을미

간원이 관향사 박로의 일로 연일 논계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헤아려 처리하게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이미 논핵을 받은 이상 그 임무를 수행케 하기는 어려울 듯하니, 다시 의논하여 천거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22일 병신

금부가 원옥(冤獄)을 심리하라는 분부에 따라 회계하기를,
"나만갑(羅萬甲)은 당초 언어상의 잘못으로 인하여 3년간 부처(付處)되었으나 이미 대사(大赦)를 받은 반면, 김육(金堉)은 문외 출송(門外黜送)되었기 때문에 서계에 참여되지 못한 채 지금까지 죄적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용서해 주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모두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금부가 또 아뢰기를,
"신들이 본부에 있는 죄인의 명단을 살펴 보건대, 위리(圍籬)된 자가 41명, 멀리 귀양간 자가 1백 87명, 중도 부처(中道付處)된 자가 22명입니다. 그들의 죄명을 보면 용서할 자가 한 명도 없습니다만, 생각건대 죄를 받은 자들이 아무리 자신들이 지은 죄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산골이나 바닷가에서 갖은 풍상을 겪고 있으니, 낮과 밤으로 비탄에 잠겨 있는 정상이 어떻다 하겠습니까. 천도(天道)도 10년이면 한 번 변한다 하였는데, 사람의 마음 역시 궁해지면 본심으로 되돌아가는 법입니다. 죄인들 가운데 어찌 후회하며 새롭게 마음을 가다듬은 자가 없겠습니까. 자전께서 병환 중인 때를 당하여 특별히 예외적으로 너그러운 은전을 베푸시어 역적죄에 관계된 자를 제외한 여타의 죄인에게는 양이(量移)하거나 분소(分疏)토록 해 주심으로써 호생(好生)의 덕을 보여 주신다면, 누구인들 기뻐하고 감사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이는 또한 재앙을 없애고 복을 구하는 일에도 다소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석방할 만한 자는 부표(付標)하여 내려 보내니, 이에 따라 시행하라."
하였다. 이에 귀양갔던 자로서 용서받은 자가 매우 많았다.

 

이조가 아뢰기를,
"동지사(冬至使)·성절사(聖節使)·주청사(奏請使) 등을 지금 차출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청사의 행차는 처음으로 관례를 만드는 데 관계되는 만큼 뒷날 준용할 규칙이 될 것이니, 묘당에 자문을 구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이번에는 바다로 가야 하니 전과는 다릅니다. 따라서 경비도 지탱할 수 없고 참혹하게 익사할 우려도 있는 등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리고 금년에는 이미 천추사의 행차가 있었는데 또 동지사와 성절사의 행차가 있게 되면 1년에 두 번 보내는 결과가 되고, 또 부사(副使)를 차출할 경우에는 한 번 더 선박과 원역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경제 사정으로 볼 때 경비를 어떻게 마련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벼슬이 높은 재신으로 동지사와 성절사를 겸하여 임명하고, 또 주청사와 명년 천추사를 겸하여 임명함으로써 해마다 상례로 삼게 하면 일이 매우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25일 기해

강화 부사 이시백(李時白)이 치계하기를,
"본부는 창고에 쌓아둔 곡식이 거의 4만 석이나 되므로 빌려주거나 받아들일 때면 백성들이 너무 고역을 겪습니다. 처음에 통진(通津)과 김포(金浦) 두 고을의 백성들로 하여금 봄에 내주고 가을에 받아들이게 하였으나 두 고을에서는 또 자기들만 고역을 치른다고 하고 있습니다. 승천진(昇天津) 가에 창고를 하나 더 설치한 뒤 풍덕(豐德)과 교하(交河)의 백성으로 하여금 통진과 김포의 두 고을과 더불어 빌려주고 받아들이는 일을 같이 하도록 했으면 합니다."
하였는데, 묘당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온당하겠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27일 신축

예조가 아뢰기를,
"전에 연신(筵臣)이 아뢴 데에 따라 전경 문신(專經文臣)을 가려 뽑아 평소대로 고강(考講)케 하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폐지한 나머지 기일에 맞춰 과정을 마치게 하기가 어려우니, 10월부터 시작하되 전강(殿講)하기도 하고 명관(命官)이 고강케 하기도 하여 실질적인 공부가 이루어지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충원 현감(忠原縣監) 최유연(崔有淵)이 아록(衙祿)과 무판미(貿販米)로 도망간 군사의 가포(價布)를 충당하고, 또 이웃과 일가를 연좌시키는 폐단을 변통해야 한다는 뜻으로 감사에게 보고하니, 감사가 이를 포계(褒啓)하였다. 이에 병조가 ‘물고(物故)된 자의 대리를 속히 정하여 군정(軍政)이 허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는 내용으로 이문(移文)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르는 한편 그를 승진시켜 가상하게 여긴다는 뜻을 표시하라고 명하였다. 좌부승지 윤지(尹墀)가 아뢰기를,
"도망친 자와 죽은 자의 자리에 곧 인원을 채우지도 않고 또 끝까지 쫓지도 않는다면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군적(軍籍)이 모두 빈 문서가 될 것입니다. 최유연은 군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염두에도 두지 않고서 도망간 자를 방임한 채 아록과 무판미로써 군보(軍保)의 포목을 충당함으로써 고식지계를 삼으려 했고, 심지어는 과장되게 논보하여 아록으로 군포를 채웠다는 말을 조정에 아뢰게까지 하였으니, 너무도 형편없습니다. 이런데도 포상을 받는다면, 신은 명예와 공을 탐내는 자들이 돌아가며 서로 이런 짓을 본받게 되어 군정이 날로 허술해질까 두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는 왕명을 제대로 출납한다고 이를 만하다."
하였다.

 

1월 28일 임인

헌부가 아뢰기를,
"세자 책봉을 주청할 때는 예전부터 상사(上使)와 부사(副使)를 차출했는데, 이번에 단 한 사람만 차출키로 한 것은 폐단을 줄이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바다를 건너 사명을 수행하려면 왕래하는 데에 1년이나 걸리는데, 그 사이에 어떤 질병이나 사고가 있을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사신이 3, 4가지 행차의 임무를 겸한다는 것도 사체가 소홀해질 뿐만이 아니라 만일 뜻밖의 환란이라도 있게 되면 막중한 이 사신의 임무를 누구에게 부칠 수 있겠습니까. 구구하게 작은 폐단이 있다 한들 돌아볼 여유가 없으니, 상사와 부사를 차출하여 주청하는 일을 중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주청사를 한 사람으로 하는 것은 과연 구차하고 천추사(千秋使)를 함께 보내는 것도 폐단이 있을 듯하니, 주청사로 상사와 부사를 뽑아 보내되 천추사의 방물도 주청사의 편에 같이 부쳐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헌 장유가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삼가 생각건대, 근래에 추숭(追崇)하는 예를 의논하는 일로 성상께서 여러 차례 엄한 분부를 내리셨는데, 언관이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는 자들을 탄핵할 때마다 전하께서는 더욱 준엄하게 거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위와 아래가 막히고 대각(臺閣)이 어수선하여 자못 성세의 아름다운 기상이 되지 못하고 있으므로 신은 삼가 안타깝게 여겨집니다.
삼가 살피건대, 전하께서는 천품이 순수한데다 성학(聖學)이 고명하시어 언어와 행동 및 조처하는 모든 일에 한결같이 의리를 따르시니, 필시 옳은 일인줄 아시면서 일부러 어기거나, 옳지 않은 일인 줄 아시면서 일부러 따르려고 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대체로 추숭하는 논의에 대해서는 세상에서 10인 중 8, 9인은 그르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필시 ‘이 일이 예(禮)로 볼 때 꼭 잘못된 일도 아닌데, 조정의 신하들이 각기 의견을 고집하여 나의 지극한 효성을 억지로 저지하려 한다.’고 여기실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마음속 깊이 항상 이런 생각을 품고 계시기 때문에 말씀할 때면 발끈 성화를 내며 불평한 기색이 있게 되는 결과를 면치 못하고 계시는데, 만약 성명께서 예경(禮經)의 본의를 환히 아시게 되면 이와 같은 잘못은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서경(書經)》에 ‘먼저 임금을 바로잡아야만 일이 바르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위로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지 못한 채 한갓 구구하게 잘못된 의견을 가진 자들을 공격하고 있으니, 이는 신들의 죄입니다. 신은 식견이 얕고 고루하여 본디 전례에 대하여 논의할 자격이 없으나, 요즘 이 일 때문에 꽤나 경전을 들춰보고 중론을 참고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대략 한두 가지 견해를 얻었기에 외람된 일인 줄 알면서도 삼가 ‘전례문답(典禮問答)’의 8단(八段)을 엮어 정서하여 올립니다. 행여 한가한 틈에 정신을 가다듬어 보신다면 요즘 알고 있는 의논의 시비가 밝게 판명되어 전하의 의견이 벗어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 ‘전례문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신에게 묻기를 ‘요즘 추숭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모두 예에 당연하다고 하는데, 여기에도 그만한 근거가 있을 것이다. 자상하게 이야기하여 분명히 분별해 줄 수 있겠는가?’하기에, 대답하기를 ‘내가 듣기로는 계체(繼體)002)  한 임금은 사친(私親)을 추숭할 수 없는데, 경전에서 찾아 보면 그 의리가 매우 분명하다. 《곡례(曲禮)》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자신의 벼슬이 무척 높아졌다 하더라도 아버지를 위해 시호를 만들 수 없다.」 하였는데, 선유가 이를 해석하기를 「아버지의 벼슬로 보면 시호가 당치 않은데, 자신의 벼슬은 시호를 받기에 합당하다 하여 아버지의 시호를 짓는다면, 이는 자신의 벼슬을 아버지에게 더해주는 결과가 되어, 아버지를 높이려다가 도리어 낮추는 일이 되는 것으로서 아버지를 공경하는 일이 못 된다.」 하였다. 또 《상복소기(喪服小記)》에 「아버지는 선비이고 아들은 천자나 제후일 경우 제사에는 천자나 제후의 예를 쓰지마는 그 시동(尸童)은 선비의 복장으로 한다.」 하였는데, 선유가 해석하기를 「제사에 살아있는 자의 예를 쓰는 것은 아들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이고, 시동은 신(神)을 상징하기 때문에 자연 본복(本服)을 입히는 것이다.」 하였다. 또 《상복소기》에 「대부는 제후에게 부묘(祔廟)할 수 없고 제후는 천자에게 부묘할 수 없다.」 하였는데, 선유가 해석하기를 「공자(公子)로서 대부가 된 자는 선군(先君)에 부묘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였다. 《의례(儀禮)》 자하전(子夏傳)에 「제후의 아들이 공자인데 그 공자의 자손 가운데 국군(國君)으로 봉해진 자가 있으면 대대로 이 사람을 시조로 삼고 공자를 시조로 삼지 않는다.」 하였는데, 선유가 해석하기를 「후세에 국군이 된 자들은 처음 국군으로 봉해진 사람을 시조로 삼아야지 별자(別子)를 제사지낼 수는 없다.」 하였다.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 「군자는 어버이를 모시기 위해 존엄한 군신의 의리를 해치지는 않는다.」 하였는데, 선유 호 문정공(胡文定公)003)  도 이 설을 인용하였다. 만일 《의례》·《예기》·《춘추전》을 믿을 가치가 없다고 한다면 그만이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이 다섯 가지의 설명만 가지고도 오늘날 문제되는 예에 대하여 충분히 단안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죽은 아버지를 위하여 시호를 만들지 못한다고 한 이상 추숭하는 즈음에 묘호와 시호를 올리는 것은 모두 예에 어긋나는 것이며, 시동에게 선비의 옷을 입혀야 한다고 한 이상 선친의 본래 지위에 상응하는 복장 이외에는 감히 더할 수가 없는 것이다. 복장에 있어서도 더 덧붙일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명위(名位)를 더해주는 것이겠는가. 그리고 일단 제후에게 부묘할 수 없다고 한 이상 사친을 종묘에 모시는 것이 잘못된 예라는 것은 밝히지 않아도 분명한 것이다. 또 공자(公子)를 시조로 삼지 않는다고 한 이상, 맨 처음 국군(國君)으로 봉해진 임금의 아버지도 시조로 제사를 지낼 수 없는데, 더구나 계체(繼體)한 임금의 신분으로서 또 어떻게 사친을 높여 오묘(五廟)의 위에 모실 수 있겠는가. 또 어버이를 높이느라 존엄한 군신의 의리를 해치지 않는다고 하였고 보면, 사친을 높이는 것은 위로 대통을 침범하는 것으로서 심지어는 아직 모시고 있어야 할 조종(祖宗)을 사당에서 미리 옮기기까지 해야 할 것이니, 존엄한 군신의 의리를 또한 크게 해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설명은 모두 경전의 분명한 가르침으로서 책마다 뚜렷이 나타나 있으니, 만일 그 글을 상고하여 본의를 되새겨 본다면, 굳이 다른 증거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추숭에 대한 시비는 바로 판정이 날 것이다.’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경전의 설명은 이미 들었으나, 사적에 실려 있는 역대 제왕들의 행적에 대해서도 말해 줄 수 있겠는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역대의 잘잘못에 대해서는 그 설이 매우 많으니 아무리 자세히 말하려 하더라도 다할 수 없다. 우선 우리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서 분명하게 드러난 것만 거론하겠다. 옛날 한 선제(漢宣帝)가 도고(悼考)를 추존하자 정자(程子)가 「너무도 윤기(倫紀)를 문란케 하고 예에 어긋났다.」고 비난하였으며, 범진(范鎭)도 「소종(小宗)이 이제는 대종(大宗)이 되었다.」고 조롱하였다. 또 애제(哀帝)가 정도공왕(定陶恭王)을 추존하려 하자 사단(師丹)이 「아들이 아버지에게 벼슬을 더해주는 의리는 없는데, 이는 부모를 높이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진 원제(晉元帝)가 낭야공왕(瑯琊恭王)을 황고(皇考)로 호칭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조서를 내리자, 하순(賀循)이 「예전(禮典)의 의리로 볼 때 아들이 자신의 벼슬을 가지고 아버지의 호를 더해줄 수는 없다.」고 하니, 원제가 따랐다. 한 광무(漢光武)가 처음에 사친묘(四親廟)를 낙양(洛陽)에 세웠다가 얼마 뒤에 장순(張純)과 주부(朱浮)의 제의를 받아들여 그 묘를 용릉(舂陵)에 옮기고는 명호(名號)도 더하지 않았는데, 호 치당(胡致堂)004)  이 「당시에 사친에게 박정하게 했다는 비난을 듣지 않았고 후세에서도 예의를 잃었다는 논의가 나올 수 없다.」고 칭송하였다. 이로써 보건대 역대 제왕들이 추존한 일에 대한 시비와 득실을 알아보는 일은 흑백을 가리는 것보다 더 쉬울 것이다.’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의례》와 《예기》의 말대로라면 주공(周公)이 태왕(太王)과 왕계(王季)를 왕으로 추존한 일도 잘못된 것인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어찌 그렇겠는가. 이 경우는 곧 창업한 임금의 일에 해당되는 것이고, 《의례》와 《예기》의 말은 천하에 보편적으로 행해지는 것으로서 계체(繼體)한 임금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예이다. 대체로 추존하는 예는 하(夏)·상(商) 이전에는 있지 않았다. 무왕(武王)이 일단 천하를 통일하자, 주공이 문왕과 무왕의 뜻을 미루어 살피고 왕업이 일어나게 된 근본을 세워야 하겠기에 마침내 그 선조를 왕으로 추존하는 예를 거행하였던 것이니, 이는 의리상 확립해야 되었던 일로서 전대(前代)의 예를 본보기로 삼았던 것은 아니다. 그뒤 이윽고 다시 예법을 만들어 천하 후세에 가르쳤는데, 계승한 임금으로부터 아래로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지키고 따르게 했으니, 《의례》와 《예기》에서 언급한 것 등이 이것이다. 왕제(王制)005)  에 「상례(喪禮)는 죽은 자를 위주로 하고 제사에는 살아 있는 자손을 위주로 한다.」한 것과, 《중용(中庸)》에 「아버지는 선비이고 아들이 대부이면 장례 때에는 선비의 예로써 하고 제사에는 대부의 예로 한다.」고 한 말들은 같은 의미이다. 그렇다면 창업을 한 임금은 선조를 추숭할 수 있다는 것과 계승한 임금은 추숭의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다 주공에게서 나온 예로서 다른 점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람마다 자기의 어버이를 높이려는 마음은 한 가지이다. 그런데 계승한 임금이라고 하여 유독 창업한 인군처럼 못하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이것은 의리가 같지 않기 때문에 예도 따라서 달라지게 된 것이다. 창업한 인군이 나라를 세운 뒤 처음으로 종묘를 세워 선조를 제사하는 것은 왕업이 시작된 근본을 소급하여 숭봉하는 예를 극진히 하는 것이니 도의상 당연하고 추숭된 분이 구애되거나 눌린 데가 없는 것으로서 진정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계승한 인군은 조종의 계통을 이어 조종의 자리에 있는데 조종의 계통을 혼란케 할 경우, 아래로는 아들의 벼슬을 아버지에게 더해주는 꼴이 되어 어버이를 공경하는 도리에 어긋나게 되고 위로는 시조에 부묘하는 예를 어기게 되어 조종을 높이는 의리를 크게 손상시킬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칠묘(七廟)나 오묘(五廟)에는 소목(昭穆)에 일정한 수가 있으니, 한 신위가 올라 오면 한 신위를 옮겨야만 한다. 따라서 올려서는 안 될 사친을 올리고 옮겨서는 안 될 조종을 옮길 경우, 사은(私恩)을 돌보다가 의리를 해치게 됨으로써 어버이를 친애한 나머지 존엄한 군신의 의리를 해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예로부터 말세의 인군들이 사친을 높이다가 천하 후세에 비난을 받게 된 것은 대개 이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경계해야 할 일로서 본 받아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단(師丹)의 설과 하순(賀循)의 의논 및 사친을 높이는 것에 대해 선유들이 비난한 것을 보면 너무나 설명이 완벽하고 의리가 삼엄하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인후(人後)006)  가 된 자를 대상으로 말한 것이니, 조후(祖後)007)  가 된 자와는 의리나 관례가 같을 수 없다. 그런데 그대는 이것을 거론하여 오늘날의 전례(典禮)를 의논하고 있으니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인후가 된 경우와 조후가 된 경우는 의리상으로 이미 다른 만큼 상례(喪禮)·제례(祭禮)의 법도에 각기 차별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추존하는 전례에 있어서는, 예경(禮經)에 단지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아들의 벼슬로 아버지에 더해 줄 수 없다.」고만 했지 처음부터 인후와 조후의 구별을 둔 것은 아니다. 대체로 인후가 된 자가 이미 생부를 숙부라고 불렀는데, 바르지 못한 칭호를 만들어 백부나 숙부라고 부르는 위치에 덧붙인다면 이것은 참으로 계통을 둘로 나누고 높은 이가 두 분이나 있게 되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의례》와 《예기》 같은 글은 곧 통론(通論)으로서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예가 이렇게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니, 인후가 된 자를 위해서 논한 예는 아닌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의논하는 전례의 단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선유들이 논한 것도 그것이 비록 인후가 된 자를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오늘날의 전례와는 약간 다르다 하더라도, 「제후가 된 자를 말미암아 대종을 받든다.」 하고, 「사친을 높이면 조종의 계통을 침해하는 일이 된다.」고 하였고 보면, 그 본의는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를 들어 오늘날의 전례를 논한들 무엇이 불가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추존하는 일은 의심의 여지없이 잘못된 예이다. 그러나 옛날의 제왕들을 살펴 보건대, 한 광무(漢光武)나 진 원제(晉元帝) 외에도 이 예를 거행하려는 자가 적지 않았다. 만승의 천자가 된 몸으로서 부모를 높이려는 것은 또한 사람이라면 모두 갖고 있는 지극한 심정인데, 그대는 왜 심하게 비난하는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옛적에 맹의자(孟懿子)가 효(孝)에 대해 묻자, 부자(夫子)께서는 「어긋남이 없게 해야 한다.」고 답하였다. 어긋남이 없게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예에 어긋남이 없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아들은 어버이에 대하여 생존시에나 돌아가셨을 때, 그리고 장사지내고 제사지낼 때에 모두 예에 합당하게 해야 한다. 그런 뒤에야 바야흐로 효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아무리 명호(名號)를 높이고 의물(儀物)을 사치하게 하여 더할 수 없이 겉모양을 훌륭하게 꾸미더라도 공자의 가르침과는 어긋나게 될 것이니, 어떻게 효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임금은 그 한 몸에 위로는 조종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신민들을 대하고 있으므로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도 수많은 백성들이 바라보게끔 되어 있다. 따라서 혹시 하나라도 그릇된 예를 행할 경우 위로는 조종에 대해 공경함을 잃게 되고 아래로는 신민들에게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효도를 하려다가 끝내는 잘못된 결과가 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늘날 예를 의논하는 자 가운데에는 혹 「주상이 위로 할아버지의 뒤를 이었으므로 태묘(太廟)에는 현재 예위(禰位)008)  가 비어 있다. 따라서 이미 대원군을 고(考)라고 부르고 있는 이상, 소목(昭穆)의 대열에 참여시키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데, 이 말에도 근거가 있는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이것이 바로 오늘날 추숭론(追崇論)이 나오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이것은 애석하게도 그저 자기의 견해만을 고집하고 선유들의 정론(定論)은 살펴보지 못한 것이다. 내가 이 점을 가려서 말해 보겠다. 대체로 나라에 종통(宗統)이 있는 것은 사가(私家)에 종법(宗法)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사가의 종법의 경우는 존비와 귀천을 막론하고 다만 할아버지·아버지·아들·손자로만 계승의 순서를 삼기 때문에, 고조와 증조는 공경(公卿)이 되었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사서인(士庶人)이 되었다 하더라도 서로 계승하는 데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제왕의 종통은 이와는 달라 반드시 왕위에 오른 뒤에야 그 뒤를 이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아무리 세자나 적자나 원자였다 하더라도 감히 대통(大統)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니 사사로운 은정의 후하고 박한 정도에 따라 대통에 참여시키고 삭제시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옛 인군 가운데에는 혹 형이 동생의 뒤를 이은 경우도 있으니, 노(魯)나라의 민공(閔公)과 희공(僖公)이 이들이며, 숙부가 조카의 뒤를 이은 경우도 있으니 당(唐)나라의 선종(宣宗)이 그러하며, 증조가 종손의 뒤를 이은 경우도 있으니 진(晉)나라의 간문제(簡文帝)가 그러하며, 종손이 종조를 이은 경우도 있으니 한(漢)나라의 선제(宣帝)가 그러하다. 친속(親屬)의 존비나 원근에 관계없이 일단 왕위를 이었으면 체통을 이은 의리는 바로 부자간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상례를 치르고 제사를 받을 때에 부자간과 차별없는 예를 쓰는 것이나, 이것이 어찌 종통을 중히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오직 종통을 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왕위에 오르지 못했으면 종통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며, 종통에 참여되지 못한 이상 태묘에 끼일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상경(常經)이며, 통의(通義)인 것이다. 종묘의 소목에 대한 차서(次序)에 있어서는 고인이 논한 의견이 한결같지 않고 역대 전례도 각기 다른 점이 있다. 그러나 선유의 정론으로 미루어 본다면 어찌 절충할 수 있는 의리가 없겠는가. 삼가 《춘추전》을 살펴 보건대, 노 희공(魯僖公)은 문공(文公)의 아버지인 동시에 민공(閔公)의 형인데, 동생인 민공이 먼저 즉위하고 형인 희공이 그 뒤를 이었다. 이에 대해 선유가 「문공과 희공은 문공과의 관계상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되어야 마땅하다.」 하였는데, 이것은 희공이 동생을 예묘(禰廟)로 삼아야 하고 문공은 숙부를 조묘(祖廟)로 삼아야 마땅하다는 말이다. 또 《호씨춘추전(胡氏春秋傳)》에 「양공(襄公)은 애공(哀公)의 황고(皇考)가 된다.」 하였는데, 「제법(帝法)에 증조묘(曾祖廟)를 황고묘라고 한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양공은 애공의 할아버지인데, 양공은 그 아들 소공(昭公)에게 위를 전하고, 소공은 그 동생 정공(定公)에게 전했으며, 정공이 죽자 애공이 그 뒤를 이었다. 따라서 정공은 당연히 형을 예묘로 삼아야 하고 애공은 당연히 숙부를 조묘로 삼고, 할아버지를 증조묘로 삼아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 주자(朱子)가 만든 《주묘소목도(周廟昭穆圖)》를 보면 효왕(孝王)이 의왕(懿王)을 소(昭)로 삼았는데 이는 숙부가 조카를 예묘로 삼은 것이며, 이왕(夷王)이 효왕을 목(穆)으로 삼았는데, 이는 종손이 종조를 예묘로 삼은 것이다. 또 주자가 만든 《송묘소목도(宋廟昭穆圖)》를 보면 태조·태종·철종(哲宗)·휘종(徽宗)·흠종(欽宗)·고종(高宗)이 각각 소와 목이 되었는데, 이는 모두 동생이 형을 예묘로 삼은 것이다. 그렇다면 소목의 위치는 오직 계승한 차례를 따져 순서를 정해야 하니, 할아버지이거나 손자이거나 형이거나 동생이거나 간에 모두 부자간과 다름이 없게 되는 것이다. 대체로 《춘추》의 정제(定制)가 이미 이와 같고 주자의 정론이 또 이와 같은 이상, 오늘날에 묘제(廟制)를 논할 때에도 선묘(宣廟)로부터 일대(一代)를 잡아야 마땅하고 오묘 구실(五廟九室) 역시 모두 이 방식으로 적용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태묘에 예위가 비어 있다고 말하는 것 또한 대체로 이런 의리를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소목의 제도가 이미 이와 같다면 계승한 임금은 모두 형 동생 할아버지 손자이거나 간에 다 부자간으로 불러야 하는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그렇지는 않다. 대를 이어 즉위한 자라도 전에는 신하였을 것인데, 군신의 의리는 부자간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일단 왕위를 잇게 되면 더욱 곧바로 부자간의 의리가 있게 되니, 삼년복을 입고 묘(廟)에 대해 예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천륜(天倫)으로 볼 때에는 나를 낳아 준 분이 아버지이고 아버지를 낳은 분이 할아버지이니, 이는 원래 만고 불변의 윤서(倫序)로서 고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춘추전》에 일단 「문공이 민공과 희공을 예와 조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하휴(何休)가 해석하기를 「형인 희공이 신하로서 동생인 민공을 이은 것은 마치 아들이 아버지를 이은 것과 같기 때문에, 문공의 입장에서는 숙부인 민공이 할아버지와 같은 것이다.」고 한 것이다. 또 범영(范寗)은 「신하가 임금에 앞설 수 없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에 앞설 수 없는 것과 같기 때문에 할아버지나 아버지로서 비유한 것이다.」 하였고, 호씨(胡氏)009)  는 「민공과 희공이 조와 예가 아닌데도 조와 예라고 하는 것은 신하와 아들은 그 예가 같기 때문이다.」 하고, 또 「희공은 동생인 민공을 아버지처럼 보아야 한다.」 하였으며, 오징(吳澄)은 「민공과 희공은 일찍이 군신간이었으나 그 의리가 부자간과 같다.」 하였다. 이들이 그렇게 말한 이유는 이러하다. 즉 「민공과 희공이 부자간은 아니지마는 의리상으로는 부자간과 같다. 따라서 그 종묘에서도 문공에게 조와 예가 되지 않지만 조와 예라고 칭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종묘에서는 조나 예라고 할 수 있어도 명칭을 부자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노(魯)나라 대부 공손수(公孫遂)의 아들 공손영제(公孫嬰齊)가 그의 형인 귀보(歸父)의 후(後)가 되었는데, 이에 대해 하휴(何休)가 말하기를 「동생이 형의 후사가 되는 의리는 없는 것이니, 소목의 차서를 어지럽히고 부자간의 친애를 잃게 한 것이다.」고 하였으며, 또 「아들을 아버지의 손자로 되게 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를 소가(疏家)들이 해석하기를 「영제가 귀보의 후가 된 것을 두고 마치 귀보의 아들이나 된 것처럼 여겼기 때문에 소목의 차서를 어지럽히는 것이 되었으며, 부자간의 친애를 잃었다고 말한 것은 만약 귀보의 아들이 되었을 경우에는 곧 중수(仲遂)의 아들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였는데, 《호씨춘추전》에서도 그 설명을 옳다고 하였다. 대체로 동생이 형의 제위를 잇는 것이야 안 될 것이 없지만 만약 곧바로 부자간처럼 된다면 천륜이 파괴되고 어지럽게 되는 것을 어찌 하겠는가. 이렇게 논하건대 사당에서 조(祖)와 예(禰)라고는 할 수 있어도 명칭을 부(父)와 자(子)로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진정 필연적인 일로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1월 29일 계묘

이때 양사가 최유해(崔有海)와 허적(許𥛚)의 일로 여러 날 동안 논핵하여 마지않으니, 상이 답하기를,
"허적은 종묘 사직에 공이 있으니 조정에서는 도리상 예우를 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경망한 연소배들이 사체를 돌아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모욕을 가하고 있다. 그리고 추숭하는 일도 그렇다. 나보다 어진 옛 인군들도 모두 거행하였는데, 나만이 무슨 심사로 근거도 없는 억설을 따라 차마 거행하지 못한단 말인가. 한두 사람이 혹시 죄를 받더라도 천하의 공론은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장유(張維)와 권태일(權泰一) 이하가 모두 이를 이유로 인피(引避)하였다. 지평 김종일(金宗一)이 출사(出仕)시킬 것을 계청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헌납 이경증(李景曾)과 정언 이상질(李尙質)은 체차하라."
하였다. 이는 대체로 이경증과 이상질이 피혐하면서 더욱 인군의 뜻에 거슬리는 말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대사헌 장유 역시 불러도 나오지 않았으므로 체직되었다. 이튿날, 옥당이 차자를 올려 두 신하에 대한 체차의 명을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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