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4권, 인조 9년 1631년 2월

싸라리리 2025. 12. 29.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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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병오

호차(胡差) 중남(仲男)이 한(汗)의 편지를 가지고 와 용만(龍灣)010)  에 개시(開市)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때 춘신사(春信使) 박난영(朴蘭英)은 이미 심양(瀋陽)으로 떠난 뒤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개시한 뒤로 다시는 이런 말이 없었는데 갑자기 이런 요청을 해 왔습니다. 혹시라도 저들이 뒤따라 나와 우리에게 기한을 어겼다고 따진다면 필시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니, 지금 바로 국서(國書)를 만들어 호역(胡譯)에게 부쳐 주고 중남과 함께 심양으로 보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유흥치(劉興治)가 출몰하여 가도와 물화(物貨)를 통할 수 없으니 지금 시장을 열더라도 필시 전처럼 할 수는 없다.’는 내용을 별지에 써서 은밀히 박난영에게 전하여 주선하게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한(汗)이 보낸 편지의 대체적인 내용은 회령(會寧)의 미곡을 빌려 달라는 것과 강상(江上)에서 개시(開市)하자는 두 조목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들이 의주에서 쌀을 주었던 일을 거론하는 것을 보면 은연중에 보상을 바라는 의도가 있는데 만약 교역만 허락한다면 필시 실망할 것이고 또 이것을 트집잡을 구실로 삼을 염려도 없지 않으니, 차라리 쌀을 그냥 주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리고 강상에 개시하는 문제는 이렇습니다. 한번 개시한 뒤로는 단지 왕래하는 차인 일행에게만 매매를 허락하였는데, 이번에 갑자기 이런 요청을 해 온 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으로, 저들의 요청을 일체 거부함으로써 후일 난처한 환란이 있게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따라서 마땅히 ‘양국이 우호관계를 맺은 이상 위급할 때에는 서로 구조해야 한다. 다만 북쪽 지방은 인민이 적은데다가 해마다 계속 흉년이 들어 공사(公私)간에 고갈된 상태이다. 그러나 회령 고을에 분부하여 미곡을 적당량 지급하게 함으로써 위급함을 구제하도록 하였다. 봄과 가을에 개시(開市)하기로 원래 약속을 하였지만 우리 나라 상인들이 대부분 물자가 빈약할 뿐더러 용만에서 시장을 열어 매매를 하는 것이 이롭지 않다는 것은 이미 전날 경험했던 일이다. 그리고 춘신사(春信使)와 추신사(秋信使) 일행과 매매하는 것도 개시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지금 비록 상인들을 독촉하여 그곳에 들어가라 하더라도 필시 그 말에 따르려 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농우(農牛)의 경우는 난리를 겪은 뒤로 제대로 번식이 되지 않았는데, 2개월간의 기한은 또한 너무도 촉박하다. 이러한 점을 부디 모두 헤아려 달라.’는 내용으로 승문원으로 하여금 말을 꾸며 답서를 만들게 해서 중남이 오래 머물러 있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헌납 이경증(李景曾)과 정언 이상질(李尙質) 등이 이미 체직되었는데도 옥당이 계속 쟁집(爭執)하고 이비(吏批)가 감히 차출하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아뢰니, 상이 일렀다.
"요즘 들어 옥당이 대각(臺閣)의 일까지 대행하고 있으니 너무나도 형편없이 되었다. 궐원이 된 대간은 속히 차출하여 권한을 독점하는 풍조가 없어지도록 하라."

 

김수현(金壽賢)을 대사헌으로, 김세렴(金世濂)을 부응교로, 이명한(李明漢)을 부제학으로, 심동구(沈東龜)를 부수찬으로, 김광혁(金光爀)을 헌납으로, 민광훈(閔光勳)을 정언으로 삼았다.

 

2월 3일 정미

옥천인(沃川人) 조흥빈(趙興賓)이 정원에 나아가 고변하였다. 상이 그 글을 빈청(賓廳)에 내리는 한편, 금부 도사를 보내 권대진(權大進)·권계(權繼)·권락(權絡)·권순(權純)·정담(鄭潭)·양천식(楊天植)·양정식(楊廷植)·이찬희(李贊希)·정후엄(鄭厚淹), 박선검(朴先儉)·박후검(朴後儉) 등 16인을 잡아오게 하고,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국문하였다. 흥빈이 공초(供招)하기를,
"부근 마을에 사는 출신(出身) 권대진이란 자가 지난 기사년011)  부터 요승(妖僧) 두 사람 및 무뢰한들과 왕래하며 회합을 가졌는데, 거동이 수상했습니다. 언젠가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를 ‘나의 상(相)으로 볼 때 앞으로 아주 귀하게 될 것이며 우리 집의 터도 좋아서 오(午)·미(未)년 사이에 부원군이 될 것이다.’ 하였는데, 모두 그가 이상한 모의를 하고 있다고 의심하였으나 그 단서는 예측하지 못하였습니다.
지난 경오년012)   1월에 대진의 아들 낙이 술이 취한 채 신의 집에 와서 신의 아들 조완(趙浣)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지금 한창 백성들의 원성이 날로 극심해지고 있으며 천변(天變)도 참혹하니 시사(時事)를 알 만하다. 지금 호남과 영남에 8대장이 있는데 동시에 군대를 일으켜 대사를 도모하려 한다. 네가 나와 같이 행동하면 부귀를 얻을 것이니, 절대 전파시키지 말고 남몰래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의 아들 완은 의심을 살까 두려워하여 부드러운 말로 대답해 두었습니다. 낙이 간 뒤에 신이 동생 조희빈(趙熙賓)과 함께 대진을 찾아가 물어 보았더니, 대진이 말하기를 ‘우리 집 검은 말이 흰색으로 변했는데, 참기(讖記) 가운데에 백마장군에 관한 설이 있으니, 이야말로 우리 집이 일어나는 좋은 징조이다.’ 하고, 8대장에 관한 이야기는 감추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완이 권락·권계와 왕래하면서 물어보니 그들이 말하기를 ‘양천식·양정식 및 이찬희 등이 모의를 주도하고 있는데, 도당들이 매우 많다. 그런데 먼저 영남과 호남 사이에서 병사를 일으켜 왜적들이 쳐들어온다고 하면 우리 아버지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왜적을 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곧장 경성을 치기로 약속이 되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영남의 정(鄭)씨 성을 가진 사람은 생김새가 기이하고 두 어깨에 해와 달의 모양이 있는데, 이 사람을 추대하여 인군으로 삼을 것이다. 이 사람은 가야산(伽倻山) 아래에 사는데, 이름은 담(潭)이고, 【 담(潭) 자는 잘못 되었다. 그 뒤 적(賊)의 공초(供招)에서 모두 정한(鄭澣)이라고 하였다.】  나이는 임오생(壬午生)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양천식과 이찬희란 자가 그와 왕래하며 모의하였는데, 모두가 승려였다가 환속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서로 약속하기를 ‘전일에 실패한 무리들은 모두 문서가 발각되었기 때문이나 우리들은 다만 상면해서 약속했으니, 혹시 붙잡힌 자는 죽는다 하더라도 나머지 살아 있는 자들이 이어서 일어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공청 감사(公淸監司) 정효성(鄭孝成)이 또 공주인(公州人) 한설(韓渫)이 고변한 것을 치계하였는데, 대체로 조흥빈이 고변한 내용과 같았다. 그런데 그 가운데 ‘양병(楊丙)이라고 하는 자는 바로 양천식이며, 양팽(楊彭)은 바로 양정식이다. 병 등은 세 번이나 그 이름을 바꿨는데, 10년 동안에 세 번이나 승려가 되었다가 환속했다.’ 하고, 또 ‘문일광(文日光)·이찬희와 정인홍(鄭仁弘)의 조카인 정류(鄭溜)·정회(鄭澮)·정유(鄭渝) 및 호서 장군(湖西將軍) 김자중(金自重)이란 자가 있는데, 자중은 군사가 일어난 뒤에 장날을 이용하여 난리를 일으켜서 먼저 직산(稷山)·온양(溫陽)·천안(天安) 등지의 수령들을 베고 그 군사를 탈취해 기세를 돋군다고 하였다. 양팽은 「정담이 말하기를 『나라를 얻은 뒤에는 도읍을 진잠(鎭岑)이나 신도(新都)로 옮겨야겠다.』고 하였다.」’ 하였다. 고변자 한설이 공초하기를,
"한임생(韓壬生)은 바로 나의 서제(庶弟)로서 팽이(彭伊)나 병이(丙伊)와는 이부동모(異父同母)의 형제간입니다. 임생이 승려 자장(慈藏)에게 글을 배워 공주(公州) 묘각사(妙覺寺)에 기거하였는데, 기사년 8월에 집에 와서 비밀히 말하기를 ‘병이와 팽이가 대진·희찬과 함께 내가 거처하던 승방에 모였는데, 밤이 깊은 뒤에 서로 역적을 모의하는 것을 깊이 잠든 체하고 엿들었다.’ 하였습니다.
그 해 10월에 병이가 찾아와 말하기를 ‘기미년 사이에 지리산에 가서 글을 읽던 중 어느날 이인(異人)을 보게 되었다. 성은 정(鄭)이고 이름은 담(潭)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은 과연 신도의 주인이 될만 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떠나면서 나에게 시를 주었는데, 그 시에
‘탑전에 올라 앉아 남쪽을 제압하고
권세의 저 위엄 북두성을 두르리라.’
하였습니다. 지난해 봄에 팽이가 신을 보러 왔기에 비밀리에 묻기를 ‘너의 형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나의 형이 「우리들은 동방에서 일어나는데, 동방은 푸른 색에 속하니 너의 전복(戰服)도 푸른색으로 하라.」 하였다.’ 하였습니다. 함께 모의한 자를 보면 보성(寶城)에 문일광(文日光), 옥천(沃川)에 권 천총(權千摠)이라는 자가 있으며, 경기에는 홍계남(洪繼男)의 둘째 아들이 있는데 그를 대장으로 삼는다고 하였고, 찬희와 자중(自重)도 모두 동모했다 합니다. 그리하여 지난달 거사하려고 술사를 데리고 경성에 가 보았더니, 궁궐이 그야말로 길지(吉地)에 있고 왕기(王氣)가 아직 쇠하지 않아 경솔하게 움직이지 못하겠기에 그만두고 돌아왔는데, 그 길로 계룡산(鷄龍山)으로 내려가 지남철로 택지(擇地)한 뒤 도읍을 정할 계책을 세웠다 합니다. 권의립(權義立)과 권인립(權仁立)은 바로 대진(大進)의 아들로서 힘을 다해 그 일을 도왔으며, 팽이의 친구인 정후엄(鄭厚淹), 찬희의 동생 이수남(李守男), 찬희의 가까운 친척인 조이남(曺二男) 등이 모두 흉모에 참여하였습니다."
하였다. 임생(壬生)의 공초는 대개 한설의 고변과 내용이 같았는데, 대진의 아들이라고 하던 인립은 바로 권계(權繼)였으며, 의립은 바로 권락(權絡)이었다. 정후엄(鄭厚淹)이 공초하기를,
"이 음모는 모두 찬희에게서 나왔습니다. 찬희가 처음에 대진의 막내 아들에게 말하여 그의 아비 대진에게 이야기하게 하기를 ‘이 일은 처음에 주선하기가 어려우나 나는 군사를 거느린 자이니 그 때에 당하여 우리 측을 위해서 싸울 수 있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선검(先儉)과 후검(後儉)도 찬희 및 양가(楊哥)란 자와 【 바로 천식(天植)이다.】 대진의 집에 모여 유숙하며 모의하였습니다."
하고, 권계(權繼)는 공초하기를,
"정후엄이 와서 말하기를 ‘양가란 자가 이 일을 앞장 서서 주도하였는데, 경상도에 내려가 군사를 모집했으므로 영남에 공모한 자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정가(鄭哥)란 자의 몸에는 해와 달의 모양이 있고, 덕산(德山)에 조가(趙哥)란 자가 있는데 옛날 최영(崔瑩)과 같은 자라고 하였으며, 찬희의 족속으로 공주(公州)에 사는 김가 성을 가진 자가 전에 파총(把摠)을 지냈는데, 역시 모의에 참여했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권순(權純)은 공초하기를,
"대진이 숙부라고는 하나 서로 자주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또 나는 글도 모르고 무예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일에 참여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대진의 종인 영이(永伊)는 공초하기를,
"환속한 양가란 자가 대진을 찾아와 말하기를 ‘침착하여 장수가 될 만한 자는 권 천총(權千摠)보다 나은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 듣건대, 남원(南原)에서 도적이 일어나자 천총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국가에 사태가 발생했으니, 내가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의 병사와 중로에서 회합하여 곧바로 경성을 향하겠다.’ 하였답니다. 옥천(沃川)에 사는 서인 임생, 출신(出身) 박남(朴男)·주명세(周名世)·남신록(南信祿), 신선(新選) 전금세(全今世)도 다 모의에 참여하였습니다."
하고, 선검(先儉)은 공초하기를,
"기사년에 자칭 관상을 잘 본다는 어떤 승려가 대진의 집에 와 관상을 보고 매우 좋다고 하였답니다. 그리고 지난 겨울철 끝 무렵에 또 와서 말하기를 ‘경오년의 운수가 좋았으나 지나가 버렸다. 그러나 이 뒤에 어찌 좋은 기회가 없겠는가. 너는 과연 백마장군이다.’고 하였답니다. 이 말은 대진에게서 들은 것입니다."
하고, 천식(天植)은 공초하기를,
"무진년 봄에 정읍(井邑) 내장산(內藏山) 절에 있을 때 김안국(金安國)이란 자가 불공을 드리러 제문(祭文)을 가지고 왔는데, 그 끝에 ‘집에 계신 늙으신 부모님 길러준 그 은혜 아직도 못 갚았는데, 권력 투쟁도 한계가 있는 법이거늘 지금까지 임금의 은혜 받지 못했네. 나이 삼십이 다 되는데 장한 뜻 아직 펴지 못했네. 그러나 오랜 세월 가노라면 황하수도 다시 맑아지겠지. 그 때 되면 태평성대 이루어져 백성들도 편안하리라. 천안(天顔)을 뵈오니 그대를 가상하게 여기는 임금의 은총이 내려지고, 높은 벼슬에 임명되니 역사에 이름 남겨지리. 부처님이시여, 어떻게 될지 모를 나의 길, 닥쳐올 일들을 알려 주소서. 이 때문에 향불을 받들어 불전에 올리나이다.’ 하였습니다. 이 글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져 그 뜻을 물으니, 안국이 ‘대북(大北)·소북(小北)이 다 모여 대사를 거행하려고 한다. 그리고 정한(鄭澣)이라는 이인(異人)이 있는데 머지않아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너는 나와 일을 함께 하기만 하면 된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안국과 함께 정한의 집에 갔는데, 그 곳에서 ‘탑전에 올라 남쪽을 누르고[坐榻南藩壓]’라는 싯귀를 보았습니다.
다시 청주(淸州)로 내려가 출신(出身) 조철(趙澈)을 보았는데, 이 자는 8대장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자에게 간 이유는, 안국이 전에 조가란 자가 거사를 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 자의 관상을 보아두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안국이 또 ‘순창(淳昌)의 양시태(楊時泰)도 함께 거사하기로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진년에 정한의 집에서 돌아오다가 찬희와 함께 대진의 집에 갔는데, 대진이 ‘내 조카 집의 암탉이 수탉으로 변했고 우리 집의 검은 말이 흰색으로 변했다.’고 하기에, 내가 바로 말하기를 ‘그대가 바로 백마장군이구나.’ 하였습니다. 대진이 또 ‘무진년 3월에 군사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마침 고변하는 일이 있어 일으키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정한 등이 처음에 유효립(柳孝立)의 무리와 결탁하고 모의하였으나 효립 등이 잡혀 죽을 적에 정한만이 면하게 된 것은 달리 연줄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8월에 또 일어나려고 하였으나 한회(韓會)의 옥사(獄事)로 인하여 정한의 도당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 한회와 약속하기로는, 북쪽 지방에서 변란이 일어나면 정한 등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일어나기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안국이 처음에 정한을 보고서 그의 뜻을 탐지할 목적으로 자기의 이름을 양후영(楊後瑩)이라 하고 그를 보며 말하기를 ‘최영(崔瑩)의 후신이 이제 또한 있다.’고 하자, 정한이 ‘북쪽 지방에 변란이 일어나면 우리들이 남쪽에서 일어나겠다. 남쪽 지방에 변란이 일어날 때에도 마찬가지로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안국의 승명(僧名)은 회옥(懷玉)이며, 양시태는 안국의 친구로서 공모한 자입니다. 대개 정한·김안국·문일광·권대진·양시태·조철 등이 근간을 이루고 있으나, 그 가운데 정한이 주동자입니다. 그리고 정한의 형인 정숙(鄭潚)의 아들 정부(鄭榑)도 동모하였습니다."
하고, 권락(權絡)은 공초하기를,
"지난해 2월 조완(趙浣)의 집에 갔더니 조완이 한사코 만류해서 함께 잤는데 조완이 ‘변란이 있게 되면 너와 함께 뛰어들겠다.’ 하였습니다. 그 뒤 정후엄과 동행하다가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났는데 환속한 승려인 것 같았으며, 정후엄이 ‘이 사람은 풍수지리를 잘 본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자에 대해서는 완의 아비 조홍빈도 ‘그 승려는 사람의 관상까지도 잘 본다.’고 하였는데, 그가 바로 병이(丙伊)였습니다. 병이는 ‘좋은 기회가 필시 멀지 않아 있을 것이다. 조가(趙哥)란 자가 북쪽에서 일어나기만 하면 성사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고, 정한(鄭澣)은 공초하기를,
"기사년에 양천식이 왔기에 문일광과 함께 정부(鄭榑)의 집에서 잤습니다. 이때 천식이 먼저 ‘탑전에 올라 남쪽을 누르고……’ 하는 시를 지었고, 나도 백설(白雪)이란 시를 지었습니다. 지난해 천식이 또 와서 말하기를 ‘금년은 국운이 가장 불길하여 무슨 일이 있을 것이고 15년 뒤에도 불길한 일이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천식과 회옥이 말하기를 ‘평안도에 냇물과 못이 마르고 재변이 많으니 5월 사이에 병화(兵禍)가 있을 것인데, 7월 이내에 철병하지 않으면 변란이 있게 될 것이다. 전주(全州)의 이일명(李一命)과 김대해(金大海)는 다 쓸 만한 자들이다.’ 하였습니다."
하고, 문일광(文日光)은 공초하기를,
"약재를 구하러 정부의 집에 갔더니 승려 사성(師聖)과 승윤(勝允)이 자리에 있었는데, 자칭 바둑을 잘 둔다고 하기에 두 판을 두고 헤어졌습니다. 그 뒤에 또 정부의 집에 갔더니 그 두 승려가 자리에 또 있었는데 ‘진인(眞人)을 보지 못하였더니 가까이에 있지 아니한가.’ 하며, 이어 ‘머나먼 길 눈이 쌓여 막혔네.[長途阻積雪]’라는 시귀를 지어 주었습니다."
하고, 정부(鄭榑)는 공초하기를,
"무진년 봄에 거창(居昌)에서 집에 돌아왔는데, 어느 승려가 찾아 왔기에 누구냐고 물으니 ‘지리산에서 왔는데 산수 구경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누구를 찾아보려고 왔다.’ 하였으므로 그대로 유숙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승려가 말하기를 ‘지리산 아래에 가기(佳氣)가 있으니 신인(神人)이 나오게 되어 있다. 예전부터 허교(許喬)의 손자나 허의(許懿)의 아들 가운데 신인이 있다고 들었기에 찾아보려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 8일 초저녁에 두 승려가 찾아 왔는데 그 중 하나는 전에 보지 못했던 자라서 이름을 물었더니, 태허(太虛)라고 하였습니다. 밥을 먹이고 유숙케 했는데, 이튿날 문일광도 왔기에 정한의 집으로 가서 잤습니다. 그 승려에게 나와 일광과 한의 관상을 보게 하자, 승윤(勝允)이 ‘정한의 상이 가장 좋다. 귀 아래에 줄줄이 반점이 있으니, 이것이 좋은 상인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 일광이 나에게 ‘승윤의 손바닥에 붉은 반점이 있는데, 이것이 매우 기이하다.’고 하였습니다. 사성이 ‘전주에 이일명이란 자가 있는데, 그 자는 시운을 타고 태어났다.’고 하였으며, 또 ‘양시태란 자가 있는데, 양후영과 동성(同姓)으로서 또한 시운을 타고 태어난 자이다.’고 하였습니다.
지난해 7월 사이에 승윤이 환속하여 양천식이라 칭하고 와서는 정한과 밀담을 나누며 ‘전라도 영웅과 사귀고 싶다.’고 하였으며, 한은 또 ‘홍가(洪哥)란 자의 손아귀에 군사 1천여 명이 있는데, 이 내용을 박희집(朴禧集)에게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회옥이 또 말하기를 ‘어느 곳에 김자중(金自重)이란 자가 있다.’고 하기에, 그가 있는 곳을 물으니, 자칭 자기의 이름이라고 하면서 김자중이라고 해야겠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교생(校生) 박희집(朴禧集)이 공초하기를,
"금년 정월에 홍성징(洪聖澄)이 집에 와서 ‘천재와 시변(時變)이 겹쳐 일어나니 세상 일을 알 만하다. 영천(榮川)에 나와 마음을 같이 하는 자가 많고 경기에도 있는데, 너도 같이 일을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 길에서 박흔(朴訢)과 유지수(柳之燧)를 만났는데, 그들이 ‘영천의 홍성징이 의기가 많아 장수가 될 만하다고 들었다. 한번 보고 싶으니 혹시 오거든 꼭 소식을 알려 달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창녕인(昌寧人) 성지도(成至道)는 ‘형혹성(熒惑星)이 남두(南斗)에 들어 갔고 시운(時運)마저 불길하다.’고 하였으며, 박흔은 ‘요즘 각 고을의 천총(千摠)들을 대부분 전에 경력이 있는 자로 차출하니 나도 천총이 될 것이다. 만약 은혜와 의리로 맺어두면 누구인들 따르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징은 ‘강화도에는 군사 1백 명만 보내도 폐주를 모셔 올 수 있다.’고 하였으며, 여후망(呂後望)은 또 ‘고령(高嶺)에서 귀양살이할 때, 첨사 정여린(鄭汝麟)이 어느 날 밤 함께 앉아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박승종(朴承宗)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다. 지금 비록 이 직책에 임명되긴 하였으나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항상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하고, 홍성징(洪聖澄)은 공초하기를,
"전에 박광선(朴光先)의 집에 갔더니, 말하기를 ‘귀양살이하는 사람을 자주 이배(移配)시키니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하였으며, 떠나올 때 회양 부사(淮陽府使) 조찬한(趙纘韓)을 보았는데, 그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내가 지금 벼슬을 하고 있긴 하나 옛 임금을 잊을 수는 없다. 박로(朴𥶇)도 옛 임금을 그리는 마음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금년 봄에 희집(禧集)의 집에 갔더니, 말하기를 ‘지난 겨울 나의 할아버지를 적소(謫所)로 찾아가 뵙고, 인하여 귀양살이하는 심지청(沈之淸)을 만나 나의 옷을 벗어주면서 「언제나 옛 임금을 복위시킬 것인가.」 하니, 지청이 「우리가 얼마나 여기에 있겠는가.」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또 여후망(呂後望)을 보았더니 ‘최내길(崔來吉)이 귀양사는 사람을 박대하는데, 어느 때나 이 놈을 죽일 것인가.’ 하였으며, 정여린(鄭汝麟)도 ‘내가 북병사만 되면 내 뜻을 펼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희집은 또 ‘성주(星州)의 박흔은 바로 지수의 6촌인데 나와 일을 같이 한다.’고 하였으며, 또 ‘성지도(成至道)는 점술에 능한데, 이괄(李适)의 난 때에 국운이 불길한 것을 점치고 이괄을 맞이하려고 떠났다가 3일만에 다시 성상의 팔자(八字)를 점쳐 보니 너무 좋아 머지 않아 회복되겠기에 돌아왔었다. 요즘 또 국운이 불길한 것을 점쳤기 때문에 합천(陜川) 사람들과 거사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작별하면서 희집이 또 말하기를 ‘성주(星州) 초군(哨軍)의 경우는 정담(鄭澹)이 천총(千摠)이 되었으니, 마병(馬兵) 2개 초(哨)를 강화(江華)에 보내 옛 임금을 모셔와야 하겠다. 다만 아들이 없으니 인성군(仁城君)013)  의 아들로 동궁을 삼아야 할 것이다. 전라도에서는 정여린(鄭汝麟)과 고용후(高用厚) 숙질간이 모두 우리를 따를 것이다.’ 하면서 용후의 시를 외웠습니다. 그 시는
‘대궐의 주인 새로 바뀌었는데
신하인 나는 아직도 살아 있네.
강촌에 나 홀로 돌아오고 보니
이 몸의 벼슬이 부끄럽기만 하네.’
이었는데, 이는 옛 임금을 생각한 시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꼭 박흔을 찾아보라고 하기에 돌아오는 길에 들렀더니, 흔이 말 한 마리를 주면서 ‘정인홍의 조카 중에 호남에 귀양간 자가 있는데 그 사람의 아들이 나에게 준 말이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성지도(成至道)는 공초하기를,
"기사년 겨울에 희집의 집엘 갔더니 희집의 5촌숙부인 종형(宗衡)과 서숙(徐淑)·성람(成欖)·송지술(宋知述)이 다 모여 있었습니다. 희집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일광과 지수 및 합천 사람들과 거사를 꾀하고 있는데, 요즘 형혹성(熒惑星)이 남두(南斗)에 들어갔으니, 이것은 무슨 조짐인가?’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사략(史略)》에 「형혹성이 남두에 들어가면 천자가 대궐에서 도망친다.」고 하였는데, 내가 아는 것은 그저 이 정도이다.’고 하였습니다. 희집이 ‘오랑캐들도 천상(天象)에 나타나는가?’ 하고, 또 ‘주상의 팔자는 어떠한가?’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내가 전에 점을 쳐 보고 아주 좋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거사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하였는데, 희집은 말하기를 ‘호란이 발생하면 일이 쉽게 성공할 것이다.’고 하면서, 술을 마시고 헤어졌습니다."
하고, 양환(梁桓)은 공초하기를,
"지수의 동생 지환(之煥)과 나의 첩의 집이 서로 가까워 절친하게 지낸 관계로 그들이 모의했던 일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창녕(昌寧)의 성지도는 점술에 능한데, 자기의 상에 대해서 스스로 말하기를 ‘구레나룻이 미간까지 뻗쳤으니, 당상과 가선대부가 될 것이다. 그런데 요즘 이 수염이 상당히 길었기 때문에 감히 모의를 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성람은 폐조 때에 급제하였는데 반정 후에 삭과(削科)되었으므로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성주(星州)의 여효증(呂孝曾), 창녕(昌寧)의 성창리(成昌履) 및 박흔·정부·정니(鄭柅)·유지수 등이 천식과 정부의 집에서 함께 자면서 모의했습니다."
하고, 유지수(柳之燧)는 공초하기를,
"정부와 양환이 항상 집에 왕래하였습니다. 어느 날 부가 말하기를 ‘천식이 사람의 관상을 잘 보고 풍수설도 아는데, 정한과 금산(金山)을 왕래하면서 함께 역적 모의를 하고 있으니, 너는 그 사람과 생사를 같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양환은 말하기를 ‘어떤 승려가 호서(湖西)에서 왔는데 「진인(眞人)이 이 부근에 있어 찾아 보려고 한다.」 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이태경(李泰卿)의 일을 이야기하자, 부도 말하기를 ‘호남과 호서에 이일명(李一命)·권대진(權大進)이란 자가 있는데 같이 모의할 만하다. 영남에서는 최현(崔睍)이 모의를 주도하고 있는데, 현이 천식을 보고 영웅이라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박희집의 동생 박경집(朴慶集)은 ‘허완(許完)·정여린(鄭汝麟)·김신국(金藎國) 형제들은 유효립(柳孝立)과 같이 일했는데 법망에서 빠졌다.’ 하였습니다."
하고, 이일명(李一命)은 공초하기를,
"나는 본래 천식과 절친했는데, 천식이 일반 사람들의 옷을 만들어 달라고 하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기에 환속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큰일을 거행하려는 자가 있는데 내가 그 자를 따라야 하겠다. 전일 경상도에 가서 성인을 찾아보았는데, 성인이 남쪽에서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 때 내가 다시 올테니 너희도 준비하고 기다리라.’ 하였습니다."
하고, 이정(李侹)이 공초하기를,
"일찍이 천식과 절친했는데, 천식이 ‘정한의 생김새가 웅대하고 훤칠하여 끝내는 귀인이 될 것이다. 대진은 그 집의 검은 말이 흰색으로 변하였으니 이것은 좋은 징조이다. 박흔은 경상도에서 병사를 모으게 되어 있다. 배상룡(裵尙龍)은 침착해서 큰일을 도모할 만하다. 그래서 모두 모의를 함께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고, 박광선(朴光先)은 공초하기를,
"홍성징이 와서 ‘내가 신라(新羅)를 세운다는 명분을 내걸고 한두 고을을 쳐부순다면 조정이 반드시 놀라 두려움에 떨 것이다. 그런데 호군(犒軍)할 주미(酒米) 15석을 마련했는데도 군사를 얻지 못하고 있으니, 한스럽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들은 모두 복주(伏誅)되었다. 국청이, 권순(權純)은 이미 모의의 내용을 알고 있었으니 율대로 적용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상이 용서할 만한 정상이 없지 않으니, 3천리 밖으로 유배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대신·금부·양사를 인견하고 옥사의 상황을 하문하니, 여러 신하가 역변을 모의한 흔적이 의심할 것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미 역적의 두목을 죽였으니 끝까지 다 다스릴 필요는 없다."
하고, 그 뒤에 또 하교하기를,
"이 무리들이 뜻을 잃어 앙앙불락한 나머지 서로 난을 일으키려 하였으니, 그 심사가 괘씸하고 그 죄도 죽여야 마땅하다. 다만 그들이 끌어댄 말들을 보면 진실과 거짓이 서로 섞여 있으니, 맹렬한 불길 속에 옥석을 구분할 수 없게 될까 하는 이 점이 매우 두렵다. 더구나 요즘 한재(旱災)가 무척 혹심한데, 이것은 무고한 자가 원통하게 죽는 일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 많이 죽여 화기(和氣)를 손상시키기보다는 조금 늦추어 그들 스스로 새로워지게 해 주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들의 괴수는 이미 전형(典刑)에 복주되었으니, 나머지 조무라기들을 죽일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리고 한창 씨뿌리고 경작할 이 절기에 계속 잡아들인다면 필시 놀라 흩어져 농사를 망칠 염려가 있으니, 자세히 헤아려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국청이, 박종형(朴宗衡)·서숙(徐淑)·성람(成欖)·송지술(宋知述)·오익환(吳益煥) 등도 역적을 따른 정상이 있다는 이유로 잡아다 국문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백성들이 원망하고 배반하는 것은 내가 임금답지 못한 탓으로서 위를 쳐다보고 아래를 굽어봐도 부끄럽고 두렵기만 할 뿐 마음을 어찌하지 못하겠다. 이 무리들은 모두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와 다름이 없으니, 묻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이 옥사에서 승복(承服)하여 정형(正刑)에 처한 자는 정한 이하 30여 인이었으며, 장하(杖下)에 죽은 자는 양시태 등 10여 인이었으며, 유배된 자는 고용후 등 6인이었으며, 방면된 자는 최현·박로 등 50여 인이었다. 최현이 방면될 적에 상이 하교하기를,
"지난해 야대(夜對)할 때에 마침 미진하게 처치한 일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그때 입시하여 극력 간쟁해 마지않았으므로 내가 꽤나 괴롭게 여겼다. 그런데 그 뒤에 생각해 보니, 참으로 나를 아끼는 자였다. 이번에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필시 초심(初心)은 저버리지 않았을 것이니 용서하여 방면하라."
하였다. 예조가 역적을 토멸한 경사로써 종묘에 고하고 진하(陳賀)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다만 사면령을 반포하라고 명하였다. 백관에게 가자(加資)하고, 고변한 조흥빈은 당상관으로 승진시키고 한설은 6품의 실직(實職)으로 올려 제수하였다.

 

2월 4일 무신

이성구(李聖求)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2월 5일 기유

김세렴(金世濂)을 집의로, 이사상(李士祥)을 장령으로, 임득열(林得說)·정지우(鄭之羽)를 지평으로, 조계원(趙啓遠)을 정언으로 삼았다.

 

2월 7일 신해

김경서(金景瑞)의 아들 김득진(金得振)이 상소하여 스스로 의병을 모아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그 소를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아뢰기를,
"이 소의 내용을 살펴 보건대, 아비의 원수를 갚겠다는 뜻이 혈성(血誠)에서 나온 것이긴 하나, 다만 도내에 일단 감사와 병사가 있는 이상 지금 군사를 모은다는 이유로 장수 하나를 더 둘 수는 없습니다. 득진을 순찰사 휘하에 소속시켜 복수별장(復讐別將)으로 칭하게 하고 복수하려는 사람들을 모집하게 하였다가 위급한 사태가 발생하면 형편에 따라 알맞게 쓰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조공숙(趙公淑)을 정언으로 삼았다.

 

2월 9일 계축

헌부가 아뢰기를,
"전 부윤 이직(李溭)은 일찍이 의주(義州)를 맡고 있을 때 군관으로 하여금 잠상(潛商)의 물품 27개 짐바리를 호송하게 하면서 자기의 물건도 부쳐 보냈으니,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간원이 아뢰기를,
"요즘 약간의 공로만 있어도 중한 상을 내려 명기(名器)가 날로 문란해지고 있으므로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전 병사(兵使) 정응성(鄭應聖)은 약간의 미포(米布)를 별도로 마련했다고 하여 자헌 대부까지 승진시켰으니, 그지없이 참람합니다. 개정을 명하소서."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2월 17일 신유

지중추부사 정경세(鄭經世)가 상주(尙州)에 돌아가고 나서 마침내 상소하여 대제학과 경연 빈객(經筵賓客)의 직임을 체직해 주기를 청했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2월 18일 임술

헌부가 아뢰기를,
"조희빈(趙熙賓)이 은밀히 불괘(不軌)014)  를 도모한 정상이 그 형의 고변서에 이미 드러났고 여러 역적들과 서로 통한 흔적이 또 역적 권락(權絡)과 대질한 공초에 나와 있으니, 잡아다 국문하여 역적을 다스리는 법을 엄하게 하소서. 진산 군수(珍山郡守) 김근(金瑾)은 역적인 승려를 관아에서 접대하며 자제들을 가르치게 했는가 하면, 심지어는 계집종을 그 자에게 시집보내었는데, 체포하려 할 즈음에 관아에게 도망가게 하여 역적의 괴수가 법망에서 빠져나가게 하였습니다. 듣는 자마다 통분하게 여기고 있으니, 그를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조희빈 등은 고변할 의향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가 역적과 서로 통한 일이 있었다 한들 심각하게 문책할 것이 없다. 그리고 설혹 그에게 죄가 있다 하더라도 그 형의 공으로 보아 용서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 김근의 일은 사실무근인 듯하니, 꼭 잡아다 국문할 것이 없다."
하였다.

 

2월 19일 계해

함경도 관찰사 윤의립(尹毅立)이 치계하기를,
"금(金)나라 한(汗)이 글을 보낸 의도는 회령(會寧)에서 쌀을 얻자는 데 있습니다만, 본부가 요즈음 자호(者胡)에게 공궤(供饋)한 비용이 무척 많은데, 또 그들에게 쌀을 주는 길까지 열어놓는다면 형세상 필시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호인들이 이곳에 온 뒤에 치계하여 품정(稟定)할 경우 필시 시일이 걸리게 되어 그들이 머물러 있는 동안 토식(討食)하는 폐단이 있게 될 것이니, 조정에서 미리 저들에게 줄 수량을 정해 주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미(米)·두(豆)·피곡(皮穀) 중에서 2백 석을 주도록 허락할 것을 계청하니, 1백 석을 더 주라고 답하였다.

 

2월 20일 갑자

홍서봉(洪瑞鳳)을 좌빈객으로, 정경세(鄭經世)를 우빈객으로, 장유(張維)를 좌부빈객으로, 김상헌(金尙憲)을 우부빈객으로, 이목(李楘)을 부제학으로, 신계영(辛啓榮)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조흥빈(趙興賓)을 옥천 현감(沃川縣監)으로 삼았는데, 이는 고변한 공으로 상을 내린 것이다. 양사가, 흥빈에게 공로가 있다 하더라도 본읍에 임명하는 것은 법례(法例)에 어긋날 뿐 아니라 그 고을 이민(吏民)들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여러 차례 간쟁하자 이에 다른 고을로 바꿔 임명하였다.

 

2월 22일 병인

달이 남두(南斗)의 세 번째 별을 범하였다.

 

2월 24일 무진

간원이 아뢰기를,
"군기시 주부 한설(韓渫)이 고변한 것은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의배(李義培)·홍진도(洪振道) 등이 들추어내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에 부득이 고변한 것이니, 그 공이란 것도 이미 적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심지어는 손봉(孫鳳) 등 4인을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모함했는가 하면, 서정연(徐挺然)과 그의 종을 어떤 사람의 사주를 받아 글로 써 올림으로써 죄없는 사람을 옥에 갇히게 하고 집안을 망하게 만들었으니, 참으로 놀랍고 분통스럽습니다. 공에 비추어 볼 때 그 죄를 용서해 줄 수 없는 것은 아니니 반좌율(反坐律)은 적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6품의 실직(實職)을 제수하기까지 한다는 것은 과람한 일인 듯합니다. 개정을 명하소서.
한설이 공초할 때 ‘공주 목사(公州牧使)의 아자제(衙子弟)가 「이 일은 각인(各人)의 종도 필시 알고 있을 것이니, 서정연과 그의 종을 추가로 써서 올리라.」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고변은 다른 사람이 지시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감히 자기의 뜻대로 무고한 사람을 모함하여 소요를 일으켰으니, 공주 목사의 아자제를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한설이 올린 고변서는 진실과 허위가 마구 섞여 있으니 그의 죄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공도 적지 않으니 개정할 것까지는 없다. 그리고 공초 가운데에 말한 아동(衙童)의 말이란 것도 핑계대는 말인 듯하니, 그 말에 넘어가지 말라."
하였다. 공주 목사의 아들이란 바로 진도(振道)의 아들 홍부(洪溥)이다. 그 뒤 간원이 며칠 동안 논계하자, 잡아다 심문하도록 명하였으나, 곧바로 석방했다. 한설의 일은 끝내 따르지 않았다.

 

2월 26일 경오

함경 감사 윤의립(尹毅立)이 치계하기를,
"교생들을 고강(考講)하여 도태시키는 제도가 폐지된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갑자기 명이 내려졌으므로 기한이 너무 촉박해 강습할 틈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혹 뇌물을 바치고 강(講)을 면하려 하는가 하면, 혹 무학(武學)으로 옮기려 하기도 합니다. 만약 고강하는 기한을 3, 4년 뒤로 물린다면 그 동안에 학습을 하여 강에 응할 수 있을 것이니, 필시 다급하여 당황하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따랐다.

 

2월 28일 임신

예조가 아뢰기를,
"자전의 병환이 회복되었으므로 ‘날을 가려 진하(陳賀)하라.’는 분부가 계셨기에, 이미 외방에 진전(進箋)하여 진하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례의(五禮儀)》에는 진하하는 내용만 있고 반교(頒敎)하는 조항은 없으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교는 하지 말라. 그리고 진전하는 일도 없애 백성에게 폐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3일 뒤에 백관이 진하례를 거행하였다.

 

2월 30일 갑술

이조가 아뢰기를,
"역적 문일광(文日光)·정부(鄭榑)·정한(鄭澣)은 합천(陜川) 사람이고, 양천식(楊天植)은 대흥(大興) 사람으로 이들은 이미 정형(正刑)에 처해졌으나, 법으로 보면 그 고을의 수령을 파면하는 동시에 다른 고을에 합병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합천은 물산이 많고 땅이 넓을 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풍속이 더럽다고 소문이 나 도적들의 소굴이 되었으니, 그 지방을 다스리는 관원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별도의 조치를 취해야 마땅할 듯하니,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영의정 오윤겸(吳允謙) 등이 아뢰기를,
"역적을 고을을 혁파해야 된다는 것은 법으로 볼 때 당연합니다. 그러나 지금 합천을 강등시켜 현(縣)으로 만든다 하더라도 실은 큰 고을입니다. 게다가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로 소문이 났는데, 이들을 제압하고 수습하는 것은 전적으로 수령에게 달려 있으니, 하루라도 그 자리를 비워 두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해조가 청한 대로 그 수령만 파직하고, 그 고을은 그대로 두는 것이 참으로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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