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4권, 인조 9년 1631년 3월

싸라리리 2025. 12. 29.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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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을해

평안도 강서현(江西縣) 등 지역에 지진이 발생했는데, 소리가 우레와 같았고 붉은 빛이 하늘에 가득하였다.

 

호차(胡差) 용골대(龍骨大)가 수행하는 호인 수천 명을 이끌고 왔는데, 이는 용만(龍灣)에서 개시(開市)하는 일 때문이었다.

 

예조가 아뢰기를,
"역적의 괴수가 복주(伏誅)되었으므로 종묘에 고하고 진하(陳賀)하였으며, 자전의 병환이 회복되었으므로 상하가 함께 경하하였습니다. 예로부터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에는 은택이 아래까지 미쳤으니, 이제 백성들의 부역을 덜어 주고 과거를 실시하여 인재를 뽑음으로써 함께 경하한다는 뜻을 보여 주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3일 정축

간원이 아뢰기를,
"의주(義州)가 비록 물량이 고갈되었다고는 하나 본래 큰 고을이니만큼 수령이 어떻게든 제대로 조치만 하면 몇천 석의 잡곡쯤은 마련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따라서 전 부윤 이시영(李時英)에게 이런 정도의 일로써 가자(加資)하라는 명까지 내린 것은 외람되기 그지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응성(鄭應聖)에게 상으로 내린 가자도 이시영의 경우와 다름이 없었으므로 본원이 한창 개정하라고 논하고 있는 중인데, 호조가 공론을 무시한 채 감히 시상할 것을 청했으니, 너무도 형편없다 하겠습니다. 이시영에게 내린 가자의 명을 도로 거두시고, 호조 당상은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이시영의 일은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3월 5일 기묘

이귀(李貴)가 차자를 올리기를,
"역적을 국문하는 것은 공적인 일이고 아내를 장사지내는 것은 사적인 일입니다. 역적을 국문하는 법에 있어서는 판부사(判府事)만 유고(有故)하여도 개좌(開坐)하지 못하는데, 더구나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재단하여 품해야 될 영상의 경우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아내의 장례를 이유로 휴가를 청해 떠났으니, 이는 역적을 다스리는 일은 가벼이 여기고 사사로운 일을 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신이 옛일을 두루 보건대, 역적을 다스릴 일이 생기면 외방에 있는 신하들도 모두 바삐 조정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감히 조정에서 나갈 수 있단 말입니까.
영상은 그저 ‘역적의 괴수가 이미 복주(伏誅)되어 종묘에 고하고 반사(頒赦)하였고 보면, 남은 자들이야 모두 위협에 못이겨 따른 자들이니, 국청(鞫廳)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공의(公義)에는 구애되지 않을 것이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고, 전하께서 그에게 휴가를 주신 것도 이런 의도에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은 다릅니다. 날마다 죄인들이 체포되어 들어오는데, 그 가운데 역적 정한(鄭澣)보다 더한 괴수가 또 있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속히 영상을 소환하여 한편으로는 역적을 다스리는 의리를 엄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대신의 체통을 중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튿날 영상 오윤겸이 바삐 돌아와 대죄(待罪)하니, 상이 위로하며 타일렀다.

 

금(金)나라 한(汗)이 우리 나라에서 보낸 예단(禮單)을 돌려 보냈다. 비국이 아뢰기를,
"듣건대 금나라 한이 예단을 받지 않고 돌려 보냈다고 합니다. 원칙으로 말하면 예단을 다시 보내어 나라의 체면을 손상케 해서는 안 되겠으나, 이적(夷狄)을 대하는 제왕의 도리로 보면 너그럽게 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 예단 가운데 좋지 않은 물건은 바꿔 주고 적은 물건은 더해 주어 사체를 아는 자를 따로 임명하여 호차(胡差)와 함께 보내는 동시에 저들의 사정을 탐지해 오도록 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런데 호조가 애당초 잘 가려 보내지 않아 나라를 욕되게 하였으니, 손실이 적지 않다."
하였다.

 

3월 6일 경진

정원이 아뢰기를,
"역적을 국문하는 일이야말로 시급히 다루어야 할 막중한 일인 만큼 한시각도 지체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전에 국기(國忌)를 당해 재계(齋戒)하는 날에도 정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국청에서 형신(刑訊)을 청하고 있는데도 그대로 가두어 두라고 명하신 지가 5, 6일이나 지났으므로 죄인들이 생각지도 않은 간계를 만들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국청의 계사대로 속히 추국(推鞫)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영상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의논해 처리하는 것이 온당할 듯하다."
하였다. 양사도 이런 내용으로 논계하니, 답하기를,
"국문하는 옥사는 사체가 매우 중하니 영상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싶다. 논집(論執)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이경증(李景曾)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박난영(朴蘭英)을 선유사(宣諭使)로 삼아 호차(胡差) 용골대(龍骨大)를 의주(義州)에서 영접하게 하였다.

 

3월 7일 신사

강릉(江陵) 집경전(集慶殿)에 불이 났는데, 이곳은 바로 태조의 진전(眞殿)이었다. 예조가 아뢰기를,
"예에 이르기를 ‘선인(先人)을 모신 집에 불이 나면 3일 동안 곡을 하니, 그러므로 신궁(新宮)에 불이 나도 3일 동안 곡을 한다고 하는 것이다.’ 하였는데, 그 주(註)에 ‘선인을 모신 집이란 종묘를 말하는데, 신주(神主)를 들여오기 때문에 신궁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일로 미루어 보면 진전(眞殿)은 종묘와 다름이 없고 영정(影幀)은 신주와 한 가지입니다. 따라서 상께서 소복을 입고 백관을 거느리고 3일 동안 곡한 뒤 종묘 태조대왕 신위 앞에서 위안제를 거행하고, 관원을 강릉에 보내 역시 위안제를 거행하게 하는 한편, 불이 난 곳을 간심(看審)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런 뒤에 진전의 참봉과 수복(守僕)들의 죄를 각별히 의논토록 해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런데 자전(慈殿)께서도 변복(變服)해야 되는지 다시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회계하기를,
"전부터 각능에 불이 났을 때는 상께서는 변복하셨지만 내전(內殿)은 별로 변복한 예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영정(影幀)이 불탄 경우는 능에 불이 난 것보다 훨씬 중합니다. 따라서 상께서도 3일 동안 곡을 하시는 것이고 보면, 내전에서 복찬(服饌)을 바꾸지 않고 평일처럼 할 경우 정리로 볼 때 미안한 바가 있습니다. 자전·내전·빈궁(嬪宮)도 모두 소복과 소찬으로 3일 동안 지낸 뒤 중지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이튿날 상이 숭정전(崇政殿)에서 망곡례(望哭禮)를 거행하여 3일 동안 하였으며, 또 조시(朝市)를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양사도 전계(前啓)를 모두 정지하였다.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직접 가서 살펴 보려고 하였는데, 정원이 아뢰기를,
"이처럼 일이 많은 때에 종백(宗伯)이 멀리 떠날 수는 없으니, 다른 당상관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승지를 보내라고 답하였다.

 

금(金)나라의 차인(差人) 중남(仲男) 등이 각종 약재(藥材)를 무역해 가려 했는데, 양의사(兩醫司)가 감당할 수 없다고 하자, 상이 내국(內局)의 약재를 주도록 명하였다.

 

3월 8일 임오

간원이 아뢰기를,
"집경전(集慶殿)이 실화된 일이야말로 개국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큰 변입니다. 그곳의 수령이 필사적으로 진화를 하지 않아 이런 변을 초래했으니, 결코 심상하게 파추(罷推)만 할 수 없습니다. 강릉 부사(江陵府使) 민응형(閔應亨) 및 그날 집경전에 근무했던 집사관과 향소(鄕所)의 색리(色吏) 등을 모조리 잡아다가 국문하여 정죄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하늘은 명군(明君)을 사랑하여 반드시 재이(災異)를 보임으로써 경계시키고, 명군은 이에 하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반드시 자신을 닦고 반성하여 응답을 하니, 이럼으로써 하늘과 사람이 간격이 없게 되어 재이가 상서로움으로 바뀌는 기틀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전일 관서 지방에 두 차례나 지진의 변고가 있었는데, 더구나 이번 집경전의 화재 사건은 옛날에 없었던 일입니다. 선유는 궁침(宮寢)에 불이 나기만 해도 ‘임금이 도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하였는데, 모르겠습니다만 성상께서는 무슨 잘못을 저질러 이런 변이 일어나게 하였습니까. 닦고 반성하여 자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헛된 형식만 따르거나 옛 일대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인군의 한 마음이야말로 하늘을 움직일 수 있는 근본인데, 전하께서는 항상 상제를 대하듯 마음에 한 점도 부끄러움이 없을 만큼 두려워하고 삼가하며 변고를 상서로 전환시킬 수 있는 기틀을 다지고 계십니까. 옛적에 수레를 타고 갈 땐 여분(旅賁)015)  의 경계가 있고 조정에는 관사(官師)016)  의 법도가 있고 침전에 설어(暬御)의 잠언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전하께서는 언로(言路)를 넓게 열어 물흐르듯 간언을 받아들임으로써 아랫사람의 마음이 위에 통하도록 하고 임금의 덕이 부족함이 없게 하고 계십니까. 전하께서는 다시 더 마음을 가다듬어 어느 때이든 나태한 마음을 갖지 말고 재변과 위태로움을 상서와 편안한 상태로 바꿀 방도를 강구하심으로써 하늘이 사랑해 주는 마음에 보답하고 조종의 영령들을 위로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못난 후손인 나의 죄 때문에 태조의 영정에까지 화가 미쳤으니, 통곡하고 싶지 않을 때가 없다. 진달하여 아뢴 것이 나의 병통을 정곡으로 맞췄으니, 깊이 뉘우쳐 가슴에 새기겠다."
하였다.

 

3월 9일 계미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차자를 올려 대신을 집경전(集慶殿)에 보내 위안제를 거행해야 한다고 하니, 상이 그 의논을 예조에 내렸다. 회계하기를,
"대신을 보내는 것은 상규(常規)에 어긋납니다."
하니, 상이 대신으로 하여금 논의하게 하였다. 윤방(尹昉)·오윤겸(吳允謙)·김류(金瑬)·이정구(李廷龜) 등이 아뢰기를,
"차자에서 대신이 가야 한다고 한 것은 그 일을 참으로 중하게 여겨서입니다. 그러나 상께서 이미 태묘에서 위안제를 거행하였고 특별히 승지를 보내 봉심(奉審)하게 하였으며 해조가 또 청하여 강릉(江陵)에서 위안제를 거행했고 보면, 전례(典禮)에 비추어 볼 때 대략 거행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대신을 추가로 보낸다면 과연 상규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형세상으로도 미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10일 갑신

간원이 아뢰기를,
"요즘 기강이 해이해져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아 관방(關防)의 금법(禁法)이 날로 무너져 죄를 진 흉악한 자들이 잇따라 오랑캐들에게 투항하면서 나라의 정세를 저들에게 알리고 있으니,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어찌 할 수 없다고 그냥 놔둔 채 막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함경남·북도의 병사(兵使) 및 평안 병사가 평상시에 제대로 관진(關津)을 단속하지 못해 이렇게 되었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양 도의 감사도 그 책임을 면키 어려우니, 모두 추고를 명하시고, 이 뒤로는 각별히 기찰하는 법을 다시 밝혀 이런 폐단이 없게 하소서.
강릉(江陵)은 영동(嶺東)의 중요한 지역인데, 예전에 없던 변까지 당하여 앞으로 전우(殿宇)를 중건하는 부역이 있게 될 예정입니다. 신임 부사 윤천구(尹天衢)는 전에 담양(潭陽)의 수령으로 있을 때 정령(政令)이 전도되어 창고의 저축 물량을 거의 다 소진시켰으므로 지금까지 담양 사람들이 원망하고 욕해 마지 않습니다. 지금 중요한 지역을 그에게 맡길 수 없으니, 체차를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서북 병사는 추고하라."
하였다.

 

3월 11일 을유

이귀(李貴)가 다시 차자를 올려 진전(眞殿)에 대신을 보내 위안제를 거행하기를 청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대신이 제사하여 고하는 예를 두 번 거행할 수는 없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12일 병술

전에 금(金)나라 차인이 원창군(原昌君) 이구(李玖)를 보려고 하였는데, 당시 구는 외방에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헌부가, 종실로서 외방에 있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는 이유로 파직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3월 13일 정해

정경세(鄭經世)가 다시 차자를 올려 대제학을 사직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이때 상이 구언(求言)하는 전교를 내렸다.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성재(誠齋)가 지은 《역전(易傳)》을 바치면서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살피건대 성상께서 진전(眞殿)의 재변에 대해 깊이 애통해 하시며 구언하는 전교를 내리셨는데, 신은 재변의 원인과 그에 따른 대응 방법을 논하는 학설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했으니, 오직 듣고 본 것을 가지고 응답드릴까 합니다.
임진 왜란은 옛날에 볼 수 없었던 전란으로서 적이 7년 동안이나 물러가지 않았으니,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국가가 위태로운 운명에 처한 것이 오늘날에 비해 볼 때 어찌 한두 배뿐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선왕께서는 마음을 더욱 굳건히 하여 중흥의 업적을 이루었으니,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고 지성으로 백성을 사랑하여 민심을 굳게 결속시켰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선왕께서 절검(節儉)하신 덕행이야말로 어느 임금보다도 높이 뛰어난 것에 대해서는 전하께서 친히 보셨던 바입니다. 낡은 자리와 꾸밈새 없는 탁상에 화려하지 않은 병풍, 그리고 빈시(嬪侍)와 귀근(貴近)들도 비단옷을 입지 않아 당시 검소하게 지내는 풍조가 중외의 거의 전 지역에 확산되었습니다. 선왕께서 치기(治己) 치인(治人)하신 것을 보면 모두가 실질적인 것으로서 형식적인 것은 없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전하께서 귀감으로 삼아야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병오년017)                  간에 총부(摠府)에서 숙직을 하고 있을 때, 선왕께서 신이 《주역》을 좀 읽었다고 잘못 들으시고서 성재가 지은 《역전》 1부를 주셨습니다. 신이 이 《역전》을 받은 지 26년이 되었으나 아직도 그 오묘한 의미를 완전히 알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삼가 그 전을 살펴 보건대 고인이 행한 일들을 괘효(卦爻)에 배열하면서 격언과 확론(確論)을 많이 기술하였으므로 치도(治道)에 깊이 유익함이 있겠기에 감히 전하에게 올리는 것입니다. 공자는 ‘역(易)을 지은 것은 우환이 있었기 때문이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재변을 만나 참회하는 마음으로 남이 보고 듣지 않는 곳에서도 두려워하고 삼가하시어 득실(得失)과 치란(治亂)을 탐구하고 굴신(屈伸)과 소장(消長)에 통달하며, 음양(陰陽)이 발동하는 기회를 밝히시어 강유(剛柔)를 활용하는 묘미를 궁구하고, 천도(天道)를 체득하여 꿋꿋이 행하시면서 시기를 살펴 의(義)를 취하심으로써 간이(簡易)한 방법으로 왕업을 원대하게 하신다면, 그야말로 제왕의 효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하늘에 계신 조종의 영령들을 위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 건괘(乾卦)와 곤괘(坤卦)는 음양을 구별하였고, 함괘(咸卦)와 항괘(恒卦)는 음양이 서로 감응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별하지 않으면 서로의 경계(境界)가 엄하게 되지 못하고 감응되지 못하면 서로의 마음이 통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군신 관계에 있어서는 엄하게 되지 않을 것을 걱정할 게 아니라 서로 통하지 못할까 염려해야 합니다. 함괘의 구오(九五) 효사(爻辭)에 이르기를 ‘온몸이 감응되니 후회가 없다.[咸其脢無悔]’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지극히 허심탄회하게 사심없이 대하는 것이 가장 훌륭하게 감응하는 것이라는 의미로서 성인의 뜻이 은미(隱微)하다 하겠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유념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이 정성스럽게 진언하여 나를 깨우치니, 마음속으로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그대가 바친 《역전》의 의미를 상세히 탐구하여 지극한 뜻을 저버리지 않겠다."
하고, 인하여 구마(廐馬) 1필을 하사하였다.

 

당초에 간원이 정응성(鄭應聖)·이시영(李時英) 등에게 상으로 가자(加資)한 일에 대해 논의하자, 상이 대신에게 묻도록 하였다. 영의정 오윤겸(吳允謙) 등이 아뢰기를,
"작상(爵賞)은 사람들이 노력하도록 격려시키는 도구이니, 조금이라도 참람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주어서는 안 될 상을 주거나 주어야 할 상을 주지 않는 것은 모두가 중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이번에 정응성이 미곡을 1천 석이나 따로 마련했고 목면포(木綿布)도 5백 필이나 되니, 전에 수상(受賞)한 자들의 수량에 비하면 몇 배나 됩니다. 그리고 이시영은 결딴이 난 지역을 맡으면서 비록 피잡곡이라고는 하지만 진심으로 무역하여 무려 1천 석이나 마련했습니다. 따라서 이 두 사람에게 가자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 되지 않을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강석기(姜碩期)를 이조 참판으로, 이성구(李聖求)를 도승지로, 이민구(李敏求)를 대사성으로, 박정(朴炡)을 대사간으로, 윤계(尹棨)를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석기는 외척(外戚)으로서 여러 차례 전조에 들어 갔는데 갈수록 더욱 근신하였다. 성구·민구 형제는 세상에 현달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였다. 정은 성품이 꿋꿋하기는 하나 편협하고 강퍅한 면이 있어 남의 잘못을 너무 심하게 미워 하였으므로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3월 16일 경인

상이 만상루(萬象樓)에서 정사(靖社) 1등 공신 김류 등을 인견하면서 술을 내리고 한가한 말들을 주고받고 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훌륭한 일로 여겼다.

 

3월 17일 신묘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동지사(同知事) 박동선(朴東善)이 아뢰기를,
"요즘 천재와 시변(時變)이 끝없이 일어나고 있는데, 뜻하지 않게도 진전(眞殿)에서 화재까지 일어났으니, 상께서는 더욱 두려운 마음으로 몸을 닦고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밤낮으로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으나, 본래 나의 기질이 혼탁하여 어떻게 하늘의 견책에 응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였다. 특진관 이서(李曙)가 아뢰기를,
"현재 북쪽 오랑캐와 가도(椵島)의 일을 예측할 수 없는데, 우선은 눈 앞에 닥친 위급한 사태가 없기 때문에 마치 태평하게 일이 없는 때처럼 여기고들 있습니다. 그러나 양서(兩西) 백성들은 모두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기색들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요즘 가도의 무리가 노적(奴賊)과 서로 통하고 있기 때문에 서쪽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전일 현방(玄方)018)  이 왔을 때 영남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겁냈다는데, 이 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이서가 아뢰기를,
"정묘년에 서쪽 지방에 재변이 있었다고 하는데, 요즘 산천에 물괴(物怪)의 변이 있으므로 유언비어에 선동되어 백성들이 그 때문에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게다가 봄이 되면서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아 파종도 못하고 있으니 실로 안타깝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재(旱災)가 이처럼 혹독한 때에 큰 옥사가 또 일어났는데, 무고한 사람에게까지 미칠까 염려되니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전에 듣건대 병사(兵使)나 수사(水使) 가운데 혹 한 배씩 실어다가 뇌물로 주는 자가 있다고 하였는데, 요즘에도 이런 풍조가 있는가?"
하니, 동선(東善)이 아뢰기를,
"그런 일이 있다면 어찌 사람들의 말이 없었겠습니까. 신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서가 아뢰기를,
"민성휘(閔聖徽)가 청천강(淸川江) 이북을 수습하려고 하는 계책이 매우 좋긴 합니다. 그러나 만일 미리 완전한 성벽을 쌓아 우리 백성들이 의탁해 돌아갈 만한 곳을 만들어 놓지 않으면 이것은 백성을 몰아 적에게 바치는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농사가 조금 끝나는 때를 기다려 4군(郡)과 3현(縣) 사이에 몇 군데 성을 쌓아 두었다가 백성들로 하여금 들어가 보전되게 하면, 거의 어육(魚肉)이 되는 환란을 면하게 될 것은 물론 국가 역시 백성을 사랑하는 실효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지극히 타당하니, 묘당에 말하라."
하였다.

 

3월 19일 계사

사간원이 진산 군수(珍山郡守) 김근(金瑾)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할 것을 연계(連啓)하니, 상이 파직을 명하였다.

 

경기 양주(楊州) 민가에서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였다.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참찬관 이성구(李聖求)가 아뢰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역옥(逆獄)과 강상(綱常)의 변이 잇따라 일어났기 때문에 혁파된 고을이 매우 많아 백성들에게 미치는 피해가 없지 않은데, 법문을 살펴 보아도 이런 조항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실 경의 말과 같다. 그러나 이미 규례로 굳어졌고 사체 또한 중하니 가볍게 논의할 수 없다."
하였다. 홍서봉(洪瑞鳳)·이성구 등이 아뢰기를,
"함양(咸陽)은 호남과 영남 사이에 있는데, 이미 군(郡)에서 현(縣)으로 강등되었으니, 지금 혁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케 하라."
하였다.

 

3월 20일 갑오

간원이 아뢰기를,
"전일 경연에서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최유해(崔有海)가 예에 대해 의논한 문서를 가지고 와서 올렸습니다. 그때 승지로서는 당연히 규례에 따라 그 문서를 보자고 했어야 할 것인데, 끝내 아무 말도 않고 물러나 버렸으니 붓을 들고 입시한 좌·우 사관들이 무엇을 근거로 책에 기록하겠습니까. 사체에 비춰 볼 때 실로 놀랍기 그지없으니, 입시했던 승지에게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승지는 잘못이 없는 듯하니, 번거롭게 논할 것이 없다."
하였다.

 

3월 21일 을미

가도의 수장(守將) 유흥치(劉興治)가 모반하려다가 장도(張燾)·심세괴(沈世魁) 등에게 살해되었다.
흥치가 오랑캐에게 투항하려 하였으나 가도의 대중이 따르지 않을까 염려하여 몰래 항복한 달인(㺚人)들과 굳게 결탁하고 먼저 자기를 따르지 않는 장교들을 죽인 다음 따라오지 않는 가도 사람들을 모조리 제거하려 하였다. 이러한 의도를 장도와 세괴 등이 미리 알고 서로 비밀히 모의한 뒤 밤을 틈타 흥치의 진영에 돌입하여 함성을 지르면서 불을 지르고 항복했던 달인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였다. 흥치는 종적을 알 수 없었는데, 혹 어지럽게 싸우던 병사들 틈에 죽었다고도 하였다.

 

조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동지사 장유(張維)가 아뢰기를,
"한재(旱災)가 너무 혹심하니 눈 앞에 닥친 급한 일로 이것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하늘에 실질적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 경연에서 항상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가슴에 새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구언(求言)을 해도 말하는 자가 하나도 없으니, 내가 부끄럽기 그지없다."
하자, 장유가 아뢰기를,
"이 일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구언을 하고 나서도 위에서 실제로 채용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진언하는 것을 무익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였다. 참찬관 이목(李楘)이 아뢰기를,
"국법을 일단 세운 이상에는 위배하면 안 됩니다. 모든 소장과 차자를 반드시 정원을 거치게 한 그 의도가 어찌 범연한 것이었겠습니까. 지난번 이귀(李貴)가 사서(私書)를 가지고 와 탑전(榻前)에서 올렸는데, 이런 길이 한번 열리면 반드시 뒷날의 폐단이 있을 것이니, 그 글을 정원에 내려 참견(參見)하도록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이목이 아뢰기를,
"전일 훈신(勳臣)들을 인견하신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승지와 사관이 입시를 하지 않았으니, 무엇을 근거로 이 일을 사책(史冊)에 기록하겠습니까. 정원이 입시를 청하지 않은 것도 너무나 해괴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종조에서도 불시에 불러 인견할 때에는 승지와 사관이 또한 참석하지 않았다."
하였다. 검토관 신계영(辛啓榮)이 아뢰기를,
"인군의 거조에 대해서는 반드시 기록해야 하니, 그 사체가 매우 엄합니다. 조종조에 승지와 사관이 참여하지 않았던 경우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본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한재가 혹심한 때를 당하여 대신을 인견하면서 술을 내리기까지 한 것은 너무나 미안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의 말이 매우 타당하다."
하였다.

 

3월 22일 병신

황해 감사 성준구(成俊耉)를 인견하였다. 준구가 나아가 아뢰기를,
"황주(黃州)에 성을 개축하는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강도(江都)를 방어하는 데는 수양 산성(首陽山城)만한 곳이 없습니다만, 구월 산성(九月山城)과 서흥 산성(瑞興山城)도 수축하여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실로 경의 말과 같다."
하였다.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김기종(金起宗)이 나아가 아뢰기를,
"내수사를 고발하는 일이 요즘 더욱 많아지고 있으므로 상께서 그때마다 조사하도록 하셨는데, 그저 위차(委差)만 보내 더 이상 분명하게 조사하지 않기 때문에, 내수사가 그대로 취하고 있으니, 일이 지극히 미안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필시 하배(下輩)들이 위의 뜻을 체득하지 못하여 그런 것일 것이다."
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가도의 일은 처치하기가 매우 곤란한데, 이 적이 오랑캐에게 투항하려 하다니 말도 제대로 안 나온다."
하니, 오윤겸(吳允謙)이 아뢰기를,
"경솔하게 손을 쓸 경우 끝내는 난처하게 될까 염려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도 기어코 이들을 죽이자는 것이 아니라, 다만 군사를 일으켜 투항한 달인(㺚人)들을 몰아내자는 것뿐이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유흥치(劉興治)는 중국 사람이면서도 투항한 달인들을 심복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가 오랑캐와 화친을 했어도 중국에서는 죄를 주지 않았으니, 지금 이 적을 치지 않더라도 중국에서는 필시 그다지 괴이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흥치가 중국인을 많이 죽이고 또 오랑캐에게 투항하려고 하는데, 어찌 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여러 의견이 모두 경솔하게 움직이면 안 된다고 하니, 우선은 경들의 말을 따르겠다."
하였다.

 

3월 23일 정유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차자를 올리기를,
"전일에 최유해(崔有海)가 예(禮)에 대해 의논한 글을 승지 여이징(呂爾徵)에게 전해 그 글을 펴보게 한 뒤 전하에게 올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양사가 피혐한 것과 옥당이 처치한 것을 보건대, 혹 승지에게 미리 보이지 않았다 하고, 혹 사사로운 글을 바쳤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런 이유로 승지를 처벌하라고 하더니, 이제는 또 양사를 다 체직하여 언로를 막아버리는 꼬투리를 삼으려고 하는데, 아직 막지 못하고 있는 것은 노신(老臣)의 입밖에 없습니다. 윤기(倫紀)를 밝히려 했던 신의 죄를 다스려 삼사의 마음을 통쾌하게 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옥당이 처치한 것은 실로 지나쳤으나, 탑전(榻前)에서 직접 올린 것도 타당치 못한 듯하다. 경은 서로 따지지 말고 안심하고 행공(行公)하라."
하였다.

 

3월 24일 무술

토성(土星)이 물러나와 저성(氐星)으로 들어갔다.

 

비국이 아뢰기를,
"지금 장도(張燾)와 심세괴(沈世魁)에게 게첩을 보내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유흥치(劉興治)가 제멋대로 주장(主將)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켜 가도를 점거한 뒤 앞으로 오랑캐에게 투항하면서 장관(將官)들을 죽이려는 흉계를 세웠다. 그러나 다행히도 대인이 기미를 알고 그를 처치해준 덕택으로 위로는 천하에 대의를 밝히고 아래로는 가도의 무리를 진정시킬 수 있었으며, 소방은 동쪽이 침략당할 환란을 면하였고 중국 역시 서쪽이 침범당하는 화가 없게 되었다.’는 것으로 말을 만들어 보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5일 기해

비국이 아뢰기를,
"지금 듣건대 도사(都司) 이현(李見)과 윤광유(尹光裕) 등이 가도를 향해 이미 해로로 갔다 합니다. 장도·심세괴 두 장수에게 ‘이제 이(李)와 윤(尹) 두 사람의 목을 베지 않으면 소방의 인심을 승복시킬 수 없을 뿐더러 중국에 대의를 밝힐 수 없을 것이다. 속히 두 사람의 머리를 베어 군문(軍門)에 보냄으로써 군문으로 하여금 이현 등이 유흥치와 함께 반역했던 내용을 분명히 알게 하라.’고 게첩을 보내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간원이 아뢰기를,
"최유해(崔有海)가 예에 대해 논한 글이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으나, 이귀(李貴)가 실제로 전하에게 올리려고 하였다면 정원으로 하여금 자상하게 읽어보게 하고 외정(外庭)에서도 분명히 알도록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옷소매 속에 감추었다가 갑자기 올렸으니, 사체에 비춰 볼 때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귀를 중하게 추고하여 뒷날의 폐단을 막으소서."
중신이 문서를 올리는 것이야 승지가 만류할 수 없었다 하더라도 애당초 그 내용이 어떠한지도 자세히 알아보지 않은 채 묵묵히 물러났고, 이미 파하고 난 뒤에 또 원본을 내릴 것을 청하지도 않음으로써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일을 기록할 근거가 없게 하였으니, 입시했던 승지를 추고하라고 명하소서.
최유해가 예에 대해 논한 글이 2본이 있다면, 어째서 자신이 직접 올리지 않고 이론(異論)을 주장하는 중신에게 몰래 전했단 밀입니까. 그 마음가짐이 이토록 단정치 못할 수가 없으니, 최유해를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특진관 이경직(李景稷)이 아뢰기를,
"가도의 제적(諸賊)은 이미 죽었습니다만, 우리 나라는 하나도 믿을 만한 일이 없어 적이 올 경우 먼저 도망갈 생각만 하고 있는데, 수천 병력을 1개월 간 먹일 식량도 없으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량은 호조가 하기에 달렸으니, 경은 유의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27일 신축

유성(流星)이 천시 동원(天市東垣) 아래에서 나와 저성(氐星)으로 들어 갔다.

 

용골대(龍骨大)가 1천여 기(騎)를 이끌고 와 구연성(九連城)에 주둔하였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신경진(申景珍), 숙천 부사(肅川府使) 맹효남(孟孝男)이 박난영(朴蘭英)과 함께 가서 보니, 용호(龍胡)가 말하기를
"듣건대, 가도에 변이 일어나자 투항한 달인(㺚人) 5백여 명이 우리 나라에 투항하려 했는데, 귀국에서 가로막았다는 말이 사실인가? 내가 바로 투항한 달인들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가겠다."
하자, 효남 등이 말을 잘 꾸며 대답하였는데, 용호 등이 말하기를
"귀국이 딴 생각을 품고 있다면 우리들이야 강을 건너가 죽는다 하더라도 심양(瀋陽)에는 또 군대가 있다."
하였다. 그 뒤,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투항한 달인들을 궁벽한 곳에 두고 양식을 주어 안정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좌부승지 강홍중(姜弘重)이 집경전(集慶殿)을 봉심(奉審)하고 돌아와 아뢰기를,
"본전의 수복(守僕)이 제관(祭官)이 나간 틈을 타 타다 남은 나무를 몰래 가져가려고 풀더미 밑에 두었다가 불을 냈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불러서 하문하기를,
"그 고을은 인구도 많은데 어째서 불을 끄지 못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전문(殿門)이 닫혀 있었던데다가 불길이 빨리 번져 어떻게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우(殿宇)를 중건할 때에는 감사와 부사가 있으니, 예조의 낭관은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참작해서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3월 28일 임인

영부사 이원익(李元翼)이 가도에서 난이 일어나고 진전(眞殿)에 화재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 금천(衿川)에서 올라 오니, 상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승지를 보내 위문했다.

 

예조가 아뢰기를,
"준원전(濬源殿)의 영정을 봉심해 보니 털끝만큼도 틀리지 않았는데, 경기전(慶基殿)의 영정도 모사(模寫)한 지 얼마 안 되니 이 역시 의심할 것이 없겠습니다. 그래도 이번에 봉심해야 합니까? 그리고 모사할 시기는 반드시 주상의 결재를 받은 뒤에 해도에 알려 의물(儀物)을 만들고 도로를 닦도록 해야 합니다. 또 영정을 모사한 뒤에 예조 당상과 낭청, 그리고 중사(中使)와 승지를 보내 새로 지은 전우(殿宇)에 옮겨 모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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