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갑진
조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영사 김류가 아뢰기를,
"주공(周公)은 성왕(成王)의 숙부인데도 유언(流言)의 변을 당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참소를 당해 죄를 받은 충신과 곧은 선비를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국가의 흥망이 여기에 달려 있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왕은 어린 나이인데도 끝내는 이처럼 깨달았으니, 성인이라 하겠다."
하자, 특진관 홍방(洪霶)이 아뢰기를,
"선왕조 때에 이정암(李廷馣)이 상소하기를 ‘전하는 요·순의 마음을 가지시고서 유왕(幽王)이나 여왕(厲王)의 자취를 밟아가고 계신다.’ 하자, 선왕께서 크게 칭찬하고 격려해 주시면서 의복을 하사하기까지 하였으니, 이 어찌 본받을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이원익(李元翼)이 가도에 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어제 서울에 들어 왔으므로 조야가 모두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런 사람을 가리켜 국가의 안위가 그 한 몸에 매어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의 공덕(功德)이 지대할 뿐더러 청백한 지조 역시 근고(近古)에 없는 바이니, 후생들은 멀리 배울 필요없이 이 사람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평안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치계하기를,
"가도의 난에 유흥치(劉興治)에게 피살된 장관들은 모두 절의가 뛰어난 자들이니, 제사를 지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묘당에서 의논하여 처리토록 하소서."
하였는데, 회계하기를,
"본도로 하여금 듣고 본 대로 사절(死節)한 자들을 한꺼번에 제사지내게 함으로써 원혼을 위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관(京官)을 따로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한데, 다시 의논해서 처리토록 하라."
하였다.
4월 2일 을사
김시양(金時讓)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4월 3일 병오
간원이 아뢰기를,
"예전부터 무신이 장수의 임무를 받으면 아무리 병고(病故)가 있더라도 감히 자신의 상황을 거론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경기 수사 최진립(崔震立)과 경상 병사 신경원(申景瑗)은 병을 이유로 서로 잇따라 상소하여 해직을 청했으니, 의리에 어긋나고 분수를 뛰어넘은 잘못이 큽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모두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4월 4일 정미
간원이 아뢰기를,
"이번에 대군(大君)의 집을 지을 때 유사로 하여금 옛 제도를 분명히 살피게 해 간략한 쪽으로 짓도록 함으로써 모범이 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군의 집을 옛 제도대로 짓게 한다면 필시 2, 3배는 더 크게 지어야 할 것이니, 그대들이 논한 것은 잘 살피지 못한 듯하다."
하였다. 이튿날 간원이 연계(連啓)하기를,
"어제 성비(聖批)를 받들건대 ‘만일 옛 제도대로 한다면 2, 3배를 더 크게 지어야 할 것이다.’고 하셨는데, 신들의 생각에도 상께서 형편에 맞추어 비용을 아끼느라 이처럼 규모를 줄이고 또 줄인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지금 듣건대, 앞으로 지으려는 집의 규모가 1백 68간(間)이나 된다 하니, 조종조에 정해진 60간의 제도에 비교하면 너무나 현격히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말씀하신 옛 제도라는 것은 천하가 태평할 때 사치스러울 정도로 크게 지었던 규모를 염두에 두신 듯합니다. 지난해에는 종묘의 나무에 벼락이 떨어졌고 금년에는 진전(眞殿)이 불탔으며 역변(逆變)이 계속 일어나고 산융(山戎)이 틈을 노리고 있어 민심이 그지없이 불안해하고 있는데, 어찌 조종조의 정해진 제도를 경홀히 여겨 태평할 때에나 쓰던 잘못된 규례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한결같이 조종조의 제도를 따르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건국 초기에 제정한 법을 준행하지 못한 지가 1백 년도 훨씬 넘었다. 60간은 너무 협소하니, 칸 수를 알맞게 줄여 너무 지나치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흥정당(興政堂)에서 이원익(李元翼)을 인견하였다. 이때 이원익의 나이 85세였다. 상이 두 환관에게 부액(扶掖)하여 들어오도록 명하였다. 위유(慰諭)하기를,
"경이 시골로 물러가고 나서 밤낮으로 다시 돌아오길 바랐는데 오늘 다시 상면하고 보니 그지없이 기쁘다."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신이 죽기 전에 주상을 다시 뵙고 싶었으나 쇠약한 몸에 갈수록 병이 심해져 기력이 다 떨어졌으므로 다시 돌아올 가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가도에 변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즘 풍속이 크게 무너지고 역변이 여러 차례 일어나 백성의 원성이 갈수록 심해지니, 이는 모두 내가 부덕한 소치이다. 어떻게 하면 세도를 만회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겠는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풍속을 단시일 내에 변화시키는 것은 본디 어렵습니다만, 백성들이 부역에 지친 나머지 위로 부모를 봉양하지 못하고 아래로 처자를 기르지 못하고 있으니 그들이 원망하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백성이야말로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건해야 나라가 편안해지는 법입니다. 인심이 굳건하기만 하면 어떤 변란이 있더라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천하의 뜻이 통하게 된 뒤에야 천하의 일을 이룰 수 있는 법인데, 상께서 독단(獨斷)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이 황공하여 자신의 허물을 없게 하기에도 여유가 없으니, 이렇게 되면 천하의 일을 이루지 못하게 될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정말 잘못했다. 지금 경의 말을 듣고서 비로소 깨달았다."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적에 관해 위급한 경보가 없으면 신은 물러가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의지하게 될 것이고 나라에도 광영이 될 것이니 경이 조금 머물러 주기를 바란다."
하자, 이원익이 아뢰기를,
"신의 나이가 이미 많아 쇠해 빠졌으니, 있거나 없거나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적의 대신은 어진이를 천거하는 것으로 임무를 삼았다. 앞으로는 누가 대신이 될 만한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옛 사람들이 물러갈 때에 후임자를 천거했습니다만, 신같은 사람이야 어떻게 감히 옛 사람처럼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잘못된 점과 조정의 부족한 점을 듣고 싶다."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진정 요·순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잘못하는 일이 없겠으며 조정에도 부족한 점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노신은 혼모하여 어떻게 말씀을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4월 7일 경술
이때 날씨가 크게 가물어 예조가 기우제를 행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4월 8일 신해
이조가 아뢰기를,
"역적 여후망(呂後望)은 거창(居昌) 사람이고 박흔(朴訢)은 성주(星州) 사람이니, 그 고을 수령을 파직하고 읍호(邑號)를 강등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성주는 일찍이 혼조 때에 신안현(新安縣)이라고 하였지만 지금 그 읍호를 그대로 쓸 필요없이 성산현(星山縣)으로 내려야 온당하겠습니다. 그러나 거창의 경우는 이름은 현이지만 실은 영남우도의 큰 고을로서 물산이 풍부하고 지역이 넓어 합병하기가 곤란한데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거창 또한 혁파하지 말라."
하였다.
고부(古阜) 사람 봉춘(奉春)이 그 주인을 죽였으므로 그 군(郡)을 현(縣)으로 강등하였다.
이귀(李貴)가 차자를 올려 지경연의 해직을 청하기를,
"신이 감히 조정의 반열에 끼일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신은 천성적으로 큰 의논을 만날 때마다 자신의 의견만 주장한 나머지 항상 조정에 풍파를 크게 일으키니, 이것이 첫째 이유입니다. 말을 하고 일을 처리할 때마다 으레 시의(時議)에 어긋나니, 이것이 둘째 이유입니다. 충성심에서 우러나와 하는 일이 도리어 허물이 되고 말을 해도 죄만 얻을 뿐 국사에는 보탬이 없고 신의 몸만 해치고 있으니, 이것이 셋째 이유입니다. 대인도 못 되는 몸으로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자 하여, 인륜을 밝히고 역적을 치고 사대(事大)하는 일을 만날 경우, 한 번 차자를 올리고 두 번 차자를 올려 십수 차례나 차자를 올리면서 그치지 않고 기필코 시행되고 난 뒤에야 그만두려 하니, 이것이 넷째 이유입니다. 요즘은 대신의 허물을 말하는 것이 나라의 큰 금지 사항으로 되어 있는데, 신은 군부가 있다는 것만 알 뿐 대신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논의할 때마다 함께 다투게 되니, 이것이 다섯째 이유입니다.
이 가운데 한 가지만 있어도 조정에 서기가 어려울 것인데, 더구나 이 다섯 가지를 모두 갖고 있는 경우이겠습니까. 이제는 연소배들에게만 모욕을 받을 뿐만 아니라 대신에게도 비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경연의 직책이야말로 보도(輔導)를 맡는 중임인데, 어떻게 감히 뻔뻔스럽게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 보고 경의 간절한 마음을 다 알았다. 부디 시작하지 말라."
하였다.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특진관 김상헌(金尙憲)이 아뢰기를,
"신이 준원전(濬源殿)의 영정을 봉심(奉審)한 결과 지금 2백 년이 지났는데도 어용(御容)이 방금 그린 것과 같으니 참으로 기이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임진란 때에 수복(守僕) 등이 있는 힘을 다해 모시고 나와 보전할 수 있었으니, 옛 백성들의 마음이 참으로 가상하다."
하였다. 김상헌이 아뢰기를,
"그 당시의 수복 다섯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이 아직도 살아 있는데, 봉사관(奉使官)이 모두 식물(食物)을 주어 권장하는 뜻을 보였을 따름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비들이라 하더라도 이와 같은 일을 하기가 어려웠을 것인데, 더구나 하천배들이겠는가. 당초에는 어떤 상을 주었던가?"
하자, 김상헌이 아뢰기를,
"본인을 면천(免賤)해 주고 원종 공신(原從功臣)에 녹훈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제 상전(賞典)을 더 베풀고 싶은데 어떻겠는가?"
하니, 김상헌이 아뢰기를,
"이와 같이 해 주시면 그들의 사기가 반드시 진작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영직(影職)의 첩지를 주고 또 복호(復戶)하게 하는 것이 타당할 듯한데, 본조로 하여금 의논해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김상헌이 아뢰기를,
"《여지승람(輿地勝覽)》을 상고해 보건대, 정통(正統)019) 연간에 태조의 영정을 모사(模寫)하였는데 영정 뒤에 56자가 있으며 그 끝에는 ‘삼척의 칼 머리는 사직을 안정시키고, 한 가닥 채찍 끝은 온누리를 안정시켰네’라는 싯귀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것이 없으니, 이 점이 의심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싯귀가 《여지승람》에 실려 있다면 모사한 뒤에 다시 봉심하도록 하라."
하였다.
조경(趙絅)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4월 9일 임자
이원익(李元翼)이 차자를 올리기를,
"노신이 죽기 전에 주상을 다시 뵙고 보니, 감격스럽고 슬픈 마음이 교차되어 어떻게 자신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노신은 병든 몸이 쓰러질 듯하여 끝내 궐하에 나아가 하직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바로 고향에 돌아오고 말았으니, 황공하여 대죄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니 마음에 무척 섭섭하다. 경은 안심하고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4월 10일 계축
석강에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시독관 이경의(李景義)가 나아가 아뢰기를,
"따스하고 부드러운 태도로 어버이에게 순종하는 것이 바로 효자의 일이니, 위엄있게 엄격히 하는 것은 위를 섬기는 도리가 못 됩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백성들의 위에 계신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위엄으로써 엄격하게만 대하시면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엄격하게만 하는 것은 사나움과 가깝고 근엄하게만 하는 것은 교만함과 가깝다.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용모가 엄숙했기 때문에 신료들을 볼 때마다 반드시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였다 하니, 이것을 보더라도 본래 엄숙하려고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자, 이경의가 아뢰기를,
"선조대왕께서 유근(柳根)에게 ‘그대가 당상관이 되었다고 해서 글을 읽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인군으로서 이토록까지 곡진하게 권장하며 타일렀으니, 선조대왕께서 얼마나 화열한 기색을 가지셨는지 지금도 상상할 만합니다."
하였다.
4월 11일 갑인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4월 13일 병진
의주 부윤(義州府尹) 신경진(申景珍)과 선유사(宣諭使) 박난영(朴蘭英)이 치계하기를,
"개시(開市)했을 때 용호(龍胡)020) 가 물건 값을 억지로 정했는데, 이는 약탈해 가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을 내며 말하기를 ‘우리들이 앞서 소와 말을 매매하자고 하였는데, 소는 겨우 50마리 밖에 안 되고 말은 한 마리도 시장에 내놓지 않았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물건을 실어나를 정도의 수량에 불과하다. 끝까지 이를 허락하지 않으면 물건을 강가에 쌓아둔 채 수백 명을 안주(安州)나 평양 등지로 곧장 들여보내 기어코 말을 끌어오도록 하겠다.’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용호가 말을 사겠다고 청했을 때에 거절만 해서는 안 될 듯하기에 신들이 처음 세웠던 의견을 고수하지 못하고 일찍이 여쭈어 보았습니다만, 상의 비답이 너무 엄하여 감히 다른 논의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장계를 보아도 어찌할 수 없는 점이 있음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용호가 요구한 것이 그저 물건을 실어가기 위한 것 정도라면, 전마(戰馬)를 요구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성상께서 말을 팔지 못하도록 금지하시는 특별한 뜻이 있다는 것을 신들도 원래 알고 있습니다마는, 견양(犬羊)처럼 욕심을 부리는 자들과 떠들며 다투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이번에 매매를 허락하지 않으면 필시 전일처럼 약탈하는 행패를 부릴 것이니, 도리어 우리에게 욕이 될 것입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이번에 잠정적으로 허락한 뒤 추신사(秋信使)를 가려 보내어 개시(開市)에 따른 폐단을 곡진하게 말하게 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박난영이 온 힘을 기울여 제대로 개유(開諭)하지 못한 결과, 상인들이 나라를 원망하여 뒤폐단이 끝이 없게 만들었으니, 참으로 통분하고 놀랍기 그지없다. 그가 돌아오는 대로 잡아다 국문하여 정죄(定罪)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4일 정사
이원익(李元翼)이 녹봉을 받지 않자, 상이 창고의 관리로 하여금 그의 집에 실어 보내도록 하였다. 이원익이 차자를 올리기를,
"관직을 물러난 신하는 사리상 녹봉을 받을 수 없으니, 성명을 거두소서."
하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관례를 상고해 조처하도록 하였다.
4월 16일 기미
개기월식이 있었다.
헌부가 최유해(崔有海)의 일을 연계(連啓)하니, 답하였다.
"분명치도 않은 일을 가지고 중죄(重罪)를 주도록 사람을 논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김시양(金時讓)이 아뢰기를,
"선왕조에는 불차탁용(不次擢用)하는 법이 있었으니, 이순신(李舜臣)·이광악(李光岳) 등이 모두 이렇게 선발되었습니다. 요즘도 비국이 적임자를 정선하면 전조(銓曹)는 이 사람을 주의(注擬)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법이 가장 좋긴 하다마는, 정밀하게 가려 뽑지 못할까 염려된다. 그리고 옛적에는 무예에 종사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니, 어째서인가?"
하였다. 시양이 아뢰기를,
"요즘에는 음관(蔭官)으로 보직되는 자가 매우 많은데, 사람들이 모두 무인은 천하게 여기기 때문에 무예에 종사하는 자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렇게 된 것이야말로 이조가 잘못한 것이다. 수령의 자리가 빌 때마다 오로지 음관으로만 메꾸기 때문에 문인도 아니고 무인도 아닌 자들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폐습 때문에 무사들이 풀이 죽는 것이다. 전 병조 판서 이귀는 무사로 하여금 병서(兵書)를 강하고 진법(陣法)을 익히게 하였는데, 이대로 준수해서 시행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김광혁(金光爀)이 아뢰기를,
"봄부터 여름이 되도록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아 모맥(牟麥)이 모두 말라버려 수확할 가망이 없으니, 이보다 더한 절박한 재변이 없습니다. 아래에서 인사(人事)가 잘못되면 위로 천변(天變)이 나타나는 법인데, 상께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몸을 닦고 마음을 반성한다면 하늘이 감동하는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몸을 닦아야 하늘의 견책에 응답할 수 있겠는가?"
하자, 광혁이 아뢰기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덕을 닦는 일 외에 어찌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뽕나무와 닥나무가 자라서 해질녘에 서로 엉킨 현상을 보고 은(殷)나라 중종(中宗)은 덕을 닦았고, 융(肜) 제사 지내는 날에 꿩이 울자 고종(高宗)은 자신을 반성했다고 하였습니다. 인사를 닦으면 그림자나 메아리보다도 빨리 하늘이 감응할 것입니다."
하였다.
장유(張維)를 대제학으로, 윤지경(尹知敬)을 승지로, 최명길(崔鳴吉)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4월 17일 경신
경상도 성주(星州)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천둥 소리가 났으며 기왓장이 모두 흔들렸다.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시독관 김광혁(金光爀)이 아뢰었다.
"요즘 제도(諸道)에서 주인을 죽이고 어버이를 시해하는 변이 한둘이 아니게 일어나고 있는데, 인심이 이러고서야 나라 꼴이 될 수 없으니, 가의(賈誼)가 말한 ‘심한 경우는 부형을 죽인다.’고 한 경우와 불행히도 비슷하게 되었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선비의 가문에서도 남을 저주하는 변이 자주 일어나고 있으니 더욱 통탄스럽습니다."
4월 18일 신유
판중추부사 서성(徐渻)이 죽었다. 서성은 인품이 엄중하고 행정에 능하여 여섯 도의 관찰사로 나가 모두 유능하다는 이름을 얻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었다. 충숙(忠肅)이란 시호를 내렸다.
헌부가 최유해(崔有海)의 일을 연계(連啓)하니, 파직하라고 답하였다.
4월 20일 계해
상이 대신인 해창군(海昌君) 윤방(尹昉), 영의정 오윤겸(吳允謙), 좌의정 김류, 우의정 이정구(李廷龜) 등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추숭(追崇)하는 예를 오래 전부터 경들과 강정(講定)하려 하였다.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오윤겸이 아뢰기를,
"신은 전에 저의 의견을 이미 다 진달하였으므로 지금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고, 김류는 아뢰기를,
"당초 계운궁(啓運宮)의 초상 때에 조정의 의논이 이미 정해졌습니다. 그 뒤 사대부들이 모이기만 하면 반드시 이 일로 다투고 있습니다만, 온 조정의 의논은 모두 불가하다고 하는 것이니, 소신도 의견이 어찌 이와 다르겠습니까."
하고, 이정구는 아뢰기를,
"신은 성상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예관의 신분이었으므로, 상으로부터 종묘와 사직을 전알(展謁)할 때와 사묘(私廟)에 친제(親祭)할 때의 전례를 강정하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신이 경전을 자세히 연구하고 대신들과 함께 친제할 때의 축사(祝辭) 및 지자(支子)가 봉사(奉祀)하는 의리를 강정하여 이미 8년 전부터 준행해 오고 있는데, 요즘에 와서 이론(異論)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성상께서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높이려고 극진히 마음을 쓰고 계시니, 어떤 신하가 성상의 뜻을 따르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구구히 이 일을 만류하는 것은 다만 우리 임금을 허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려 함이니, 조금이라도 후세에 비난을 받게 되면 어버이를 높이는 일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진실로 예에 합당하기만 하다면 여러 신하들이 받들어 따르기에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천리에 합당하고 인정에 흡족하다면 이론이 어떻게 생기겠습니까. 이 추숭의 예를 거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들 대단한 잘못이라고 여기고 있는데, 임금을 섬기는 신하의 도리상 어찌 대단한 잘못인 줄 알면서 위를 받들어 따를 수 있겠습니까."
하고, 윤방이 아뢰기를,
"이정구가 사묘에 친제할 때의 절차를 강정할 때 신은 상신(相臣)의 위치에 있으면서 이미 의논드렸고, 계운궁의 초상 때에도 상께서 삼년복을 입으시면 안 된다는 뜻을 당시에 의논해 정하였습니다. 오늘 여러 상신이 모두 의견을 진달하였는데, 신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하고, 이정구가 아뢰기를,
"하(夏)나라 상(商)나라 이전에는 추숭하는 예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천하를 얻고 나서 태왕(太王)·왕계(王季)·문왕(文王)을 추숭하여 제사지냈는데, 이는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주공(周公)이 예를 제정하면서 ‘아버지가 선비이고 아들은 천자나 제후가 되었을 경우 제사는 천자나 제후의 예를 쓰지만 그 시동(尸童)에게는 선비의 옷을 입힌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건대 창업한 인군만이 추숭을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왕위를 계승한 인군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모두가 일반론일 뿐이다. 전대(前代)에도 근거할 만한 기록이 있는가? 장유(張維)가 지은 ‘전례문답(典禮問答)’은 너무 근사하지도 않아 한 번 웃을 거리도 되지 않는다."
하니, 오윤겸이 아뢰기를,
"신이 전일 진달드렸던 말씀은 갑작스럽게 나온 것이어서 근거가 없는 것처럼 되었습니다만, 장유가 예를 논한 글을 보건대 상당히 근거를 제시하고 있었는데 신의 의견과 암암리에 합치되었습니다. 이는 곧 공론이 있는 바이기 때문에 의견이 같지 않음이 없게 된 것입니다."
하고, 김류는 아뢰기를,
"장유의 ‘전례문답’은 옛 예경에 의거하여 말한 것인데, 예경 외에 달리 할 논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전대의 제왕 가운데 추숭하는 일을 한 자가 있다 하더라도 다 인정에 어긋나는 것이니, 본받아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대를 두루 상고하건대 어찌 예위(禰位)가 없는 때가 있었던가?"
하니, 이정구가 아뢰기를,
"제왕과 사서인(士庶人)은 경우가 같지 않습니다. 일단 군신간이 되면 바로 부자의 의리가 있게 되기 때문에, 손자로서도 할아버지를 잇고 숙부로서도 조카의 뒤를 이은 일이 있는 것이니, 노(魯)나라의 희공(僖公)과 민공(閔公)이 이러한 예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성종대왕께서도 덕종(德宗)을 추숭하였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성묘께서 거행했던 추숭의 일 또한 어찌 만세의 법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오윤겸이 아뢰기를,
"선유가 부묘(祔廟)하는 예에 대하여 논의하기를 ‘사서인은 대부에게 부묘할 수 있으나 대부 이하는 제후에게 부묘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군신간의 의리는 엄격하여 문란하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송 호부(宋戶部)의 문서는 어떠한가?"
하니, 이정구가 아뢰기를,
"중국에도 예학(禮學)을 아는 사람이 없는데, 송헌(宋憲)이야말로 이름없는 사람일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소견이 옳은가 그른가에 달려 있는 것이지, 이학(理學)은 논할 바가 못 된다. 가령 김장생(金長生)이 숙부라고 불러야 한다고 한 것은 너무도 근거가 없으니, 이렇게 본다면 이학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하니, 이정구가 아뢰기를,
"김장생이 숙부라고 불러야 한다고 한 말은 미리 조짐을 예방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고인도 이러한 논의를 할 때에는 기필코 그 싹을 잘라버리려고 하였으니, 이렇게 하지 않으면 필시 사친(私親)을 지나치게 높이려는 일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고, 오윤겸이 아뢰기를,
"가정(嘉靖)021) 때에도 이런 논의가 있었으나 대다수가 간쟁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당시의 일도 지금과 같았는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사당을 세우는 일이었는데 어찌 달랐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인후(人後)가 된 사람과 인후가 아닌 사람은 그 경우가 서로 현저하게 다른 것이다."
하니, 이정구가 아뢰기를,
"예(禮)에 비추어 볼 때 아들이 아버지에게 벼슬을 높여 주는 의리는 없으니, 추숭을 하는 일이 어찌 예에 맞겠습니까. 상께서는 필시 인후(人後)가 되어야 그의 아들이 되는 것이지 할아버지를 이은 자는 아들이 아니라고 여기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인후(人後)라고 할 때의 인(人)은 그 후(後)가 되는 당사자의 상대가 되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니, 할아버지를 이었다 하더라도 어찌 그의 후(後)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주(周)나라 환왕(桓王) 때에도 예묘(禰廟)가 없었는데, 이는 당시에 주공의 시대와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도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이 바라는 바는, 역대의 일반 인주들이 거행한 일이라고 하여 전하께서 그것을 차마 본받으시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하였다. 이 이르기를,
"연소배들이 이 일을 기어코 만류하려고 하는데, 정신(廷臣)들까지 끝내 따르지 않는다면 중국에 주청(奏請)하여야 하겠다. 만일 황제께서도 허락하지 않는다면 나도 섭섭하지 않겠는데, 주청도 안 되겠는가?"
하니, 오윤겸이 아뢰기를,
"예전부터 우리 나라에서 주청하면 중국에서 허락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 일이 합당한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당연히 여기에서 강정(講定)해야지 어째서 대뜸 주청부터 한단 말입니까."
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중국에서 허락할 것인가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였다. 이 이르기를,
"어찌 허락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혹시 허락하지 않는다면 나도 거행하지 않겠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중국에서 허락한다 해서 어찌 이 일이 꼭 예에 합당하다고 하겠습니까. 그저 외국의 일이니 깊이 규명할 필요가 없다고 핑계대고 허락한다면 신령을 섬기는 도리상 온당하겠습니까."
였다. 이 이르기를,
"이 예는 끝내 거행하고 말 것이다. 경들은 소관(小官)과는 다른데, 어찌 연소배가 는 일을 본받을 수 있단 말인가. 경들이 여태껏 만류하더니 중국에 주청하는 일마저 못하게 하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하고서, 이어 송 호부의 문서를 제시하며 이르기를,
"요즘 조정이 이 문서를 배격하면서 존친(尊親)하는 한 가지 일을 도리어 조정에서 공격하는 자료로 삼고 있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하니, 이정구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에도 경전이 있고 또 여러 신하들이 있으니, 널리 상고하고 두루 자문을 구해 기필코 선처해야 마땅한데, 어찌 송헌(宋憲)의 문서를 중하게 여겨, 그대로 결정하려고 하십니까."
였다. 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인후(人後)가 되고서도 사친을 높이려 했던 제왕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그 당시 이의(異議)를 제기한 사람 가운데 화를 당한 자가 많았다. 내가 이렇게 될까 두려워해서 조용히 강문(講問)한 것인데, 경들은 한갓 편견을 고수하면서 이처럼 고집만 하니, 내가 더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신의 소견은 이것뿐이니, 절대 고치지 못하겠습니다. 이 일로 처벌을 주신다면 신은 달게 받겠습니다. 그저 밖에 나가 엄한 처벌을 기다릴 뿐입니다."
하고, 드디어 조심스럽게 일어나 나가려는 의향을 보이자, 이 한참동안 그 모습을 쳐다 보았다. 파할 무렵 이 승지 강홍중(姜弘重)에게 이르기를,
"오늘 대신과 문답한 말이 매우 많은데, 본원이 초출(抄出)하여 널리 조정의 의논을 거두도록 하라."
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대신 모두가 추숭하는 일은 불가하다고 하였습니다. 국가의 큰일에 대하여 대신에게 물어보고 나서 논란이 있게 되면 그 뒤에야 비로소 정의(廷議)를 수합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오늘 대신이 이미 불가하다고 하였고 보면, 어찌 더 논란할 것이 있기에 정신(廷臣)에게 널리 물어본단 말입니까. 신들이 근밀한 직책에 있으면서 대신을 공경하는 주상의 뜻에 흠이 될까 염려되기에 감히 이렇게 신품(申稟)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과인이 외람되게 대통을 이었으나 임금의 덕에 부족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조심하면서 말없이 지냈으나 항상 마음은 편치 못하였다. 그런데 전일 중국 사람이 예를 논한 것을 보건대, 예를 안다고 말할 만하였다. 중니(仲尼)가 ‘쌀밥을 먹고 비단 옷을 입으면서도 너는 편안한가.’ 하였는데, 이는 어버이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비난한 말이고, 자여(子輿)022) 가 ‘어버이를 후하게 장사지내지 못하면 나의 마음이 기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는 당연히 해야 할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을 가슴 아프게 여긴 말이다. 대체로 추숭하는 일이 근본을 둘로 한다는 혐의가 없을 뿐더러,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소목(昭穆)이 완비되지 않는 흠이 있게 되고, 또 옛 제왕의 일과도 같지 않은 점이 있다. 따라서 이 일은 중국에 주청하여 처분을 기다려야 하겠으니, 수의(收議)하지 말라."
하였다.
4월 21일 갑자
양사가 합계(合啓)하기를,
"이번에 추숭하는 전례에 대해서는 나라 전체가 불가하다고 할 뿐만이 아니고, 과거의 역사를 찾아보고 예경(禮經)을 참고해 보아도 근거할 만한 실례가 없습니다. 이런 막중한 전례는 반드시 사리에 충분히 합당하게 한 뒤에야 천하 후세에 비난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대신에게 자문을 구하신 것인데, 대신들은 불가하다는 뜻으로 진달드렸습니다. 이것은 단지 임금을 합당한 도리로 인도하여 허물이 없으시도록 하기 위함일 뿐인데, 그런데 어찌 의논이 합치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억지로 여론을 거슬려 가면서 곧장 중국에 주청하려 하십니까. 우리 성상께서 어버이를 드러내시려는 효성이야말로 지성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거기에 따른 예가 있는 것이니 마음 내키는 대로만 할 수는 없습니다. 고훈(古訓)에 ‘진심에서 우러나온 일이라도 예로 절제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속히 주문(奏文)하라는 명을 멈추소서."
하니, 답하기를,
"일단 인후(人後)가 아닌 이상 친부모를 추존하는 것은 예나 의로 볼 때 조금도 안 될 것이 없다. 그런데 9년 동안이나 논란을 벌이면서 한결같이 깨닫지 못한 채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마치 원수처럼 배격하고 있으니, 오늘날 나라의 풍조가 괴이하다 하겠다. 아버지를 높여 천륜을 펴는 것이야말로 당연한 예이고 중국에 품명(稟命)하는 것이야말로 폐할 수 없는 의리이니, 그대들은 다시 근거없는 말을 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하늘이 돕지 않아 이같이 큰 가뭄을 내렸는데, 백성의 일을 생각하면 걱정스럽기만 해 마음이 타는 듯하다. 나는 오늘부터 피전(避殿)하겠으니, 감선(減膳)·철악(撤樂) 등의 일을 해조로 하여금 전례를 상고하여 거행하게 하라. 백관들도 두려운 마음으로 직분을 다하여 하늘의 노여움이 풀리게 해야 마땅하다."
응교 이행원(李行遠), 교리 이성신(李省身)·김광혁(金光爀), 부교리 이경의(李景義), 부수찬 심동구(沈東龜)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들이 삼가 듣건대, 어제 추숭(追崇)에 관한 큰 논의를 대신에게 하문하시자, 대신 모두가 불가하다는 뜻으로 간곡히 진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어 듣건대, 정원의 계사에 비답을 내리시면서 ‘수의(收議)하지 말고 중국에 주청(奏請)하라.’고 분부하셨다 하기에, 신들은 서로 돌아보고 경악하며 안타깝고 답답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였습니다.
창업한 임금은 왕위를 계승한 임금과는 달라 전대(前代)에 눌려야 할 일이 없으니, 이것이 주(周)나라 때 태왕(太王)과 왕계(王季)를 추숭하였던 이유입니다. 그 뒤 평왕(平王) 때에 이르러 태자가 일찍 죽자, 환왕(桓王) 임(林)이 손자로서 할아버지의 뒤를 이었으나, 추숭하는 전례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참으로 당시 문왕·무왕·주왕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예법과 제도를 분명히 상고할 수 있었기 때문에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뒤로는 추숭하는 일을 행하려 했던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과거 역사상 대표적인 것만 거론할까 합니다.
한(漢)나라 선제(宣帝)가 처음으로 사친(私親)을 높이면서 아버지를 도고(悼考)라고 하고 어머니를 도후(悼后)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선유가 ‘한나라가 처음에는 그래도 공의(公議)가 늠름하였다.’고 칭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황고(皇考)라고 부르며 사당을 세웠는데, 이에 대해서는 당시의 식자들이 간쟁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후세에 송(宋)나라 범진(范鎭)과 정이(程頤) 등의 제론(諸論)이 매우 엄하고 분명하였습니다. 이 일이 오늘날의 일과 다르기는 하지만 대를 이은 차서를 논한 것은 대략 같습니다. 한(漢)나라 애제(哀帝)가 사친인 정도공왕(定陶恭王)을 추존하자, 사단(師丹)이 ‘아들이 아버지에게 벼슬을 높여 줄 수 없다.’는 의리를 가지고 애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잘못 예를 적용한 동굉(董宏)의 죄를 탄핵하였으며, 심지어는 ‘부정한 예는 공왕(恭王)을 높이고 후대하는 것이 아니다.’라고까지 하였으니, 이 말이 극진하다 하겠습니다. 한나라 광무(光武)는 중흥주(中興主)로서 원제(元帝)의 대통을 이었으나, 그저 용릉(舂陵)에 사친묘(四親廟)를 옮겼을 뿐 더 존호를 올리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에는 주부(朱浮)·장순(張純) 등이 강력히 논의를 주도하여 저지시켰는데, 전사(前史)에서 이 일을 칭찬하였습니다. 진(晋)나라 원제(元帝)는 하순(賀循)이 ‘아들이 자기의 벼슬을 아버지에게 가할 수 없다.’고 한 의논을 좇아 낭야공왕(瑯琊恭王)을 황고(皇考)라고 호칭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송(宋)나라 복왕(濮王)에 대한 논의는 오늘날의 일과 다르긴 하지만 선대(先代)에 눌리는 것과 종통을 중하게 여겨야 하는 의리에 있어서는 그 법도가 한 가지인데, 여회(呂誨) 등이 조정에서 간쟁한 것이 너무도 간절하였습니다. 과거 역사만 살펴보아도 이미 시비가 판가름납니다. 그러므로 이는 소신들이 한두 마디 덧붙이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들이 《의례(儀禮)》의 주소(註疏)를 살펴 보건대, 위인후자(爲人後者) 조에 대하여 뇌씨(雷氏)가 해설하기를 ‘인후가 된 사람에 대해 그 뒤를 잇게 된 아버지[爲所後之父]라는 다섯 글자를 생략한 것은, 뒤를 잇는 아버지가 일찍 죽었을 수도 있고 혹 조부를 이을 수도 있으며 증조나 고조를 이을 수도 있기 때문에 빼놓은 것으로서 뒤를 잇게 되는 상대자가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이다.’ 하였습니다. 《예기(禮記)》 상복소기(喪服小記)에 ‘사(士)와 대부(大夫)는 제후(諸侯)에 부묘(祔廟)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그 에 ‘공자(公子)와 공손(公孫)이 사나 대부가 되었으면 선군(先君)의 사당에 부묘하지 못한다.’ 하고, 또 ‘제후의 귀한 위치에서 조종과 단절되었기 때문에 사나 대부는 친(親)으로 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곡례(曲禮)에 ‘어버이가 없는 상태에서 자신이 제후가 되었다 하더라도 아버지에게 시호를 내릴 수 없다.’고 하였는데, 여씨(呂氏)가 해석하기를 ‘아버지가 사(士)인데 아들이 천자나 제후가 되었을 경우 제사에는 천자와 제후의 예를 쓰지만, 시동에게는 사의 복장을 갖추게 한다. 이는 자기의 녹봉으로 어버이를 봉양할 수는 있지만 감히 자기의 벼슬을 가지고 어버이에게 더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자신의 벼슬을 가지고 아버지에게 더해 주면 아버지를 높이려다가 도리어 낮추는 결과가 되니 어버이를 공경하는 일이 못 되는 것이다.’ 하였으니, 그 교훈이 매우 자상하고 그 의리가 너무도 엄하다 하겠습니다.
이런 점으로 말하면 전하는 선조(宣祖)의 손자로서 중흥의 업을 일으켜 선조의 대통을 들어와 이었으니, 이는 선조의 뒤를 이은 것으로서 바로 《의례》에서 말한 바 조부의 뒤를 이은 의리가 되는 것입니다. 《춘추전(春秋傳)》에 ‘신하와 아들은 그 의리가 같다.’고 한 설이 참으로 이치에 합당한데, 이것을 가지고도 손자가 조부를 잇는 도리를 증거할 수 있습니다. 아들로서 어버이를 높이려는 것이야말로 지극한 정입니다. 더구나 전하께서는 임금의 지위에서 몸소 봉양하지 못하셨으니, 종신토록 가지고 있는 서글픈 심정에서 우러나오는 그 지극한 마음이야 어찌 그 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는 한계를 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군자는 어버이를 친애하려다가 존엄한 군신의 의리를 해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중대한 종통을 생각지 않으시고 대신들의 제의는 도외시한 채 곧장 중국에 주청하려 하십니까. 전하께서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고 계시는데 어떻게 예도 아닌 청을 무턱대고 군부(君父) 앞에 올린단 말입니까.
송 호부가 예에 대해 논한 설도 취할 가치가 없습니다. 설사 구준(丘濬)처럼 예를 안다 하더라도 합당하지 않은 예를 주장할 경우에는 인용해서 본받을 수 없는 법인데, 도대체 그 위인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도 없는 송 호부의 설을 취한단 말입니까. 전하가 대신에게 물었을 때 대신이 모두 불가하다고 한 이상, 전하께서 어떻게 한 가정의 일처럼 여론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마음 내키는 대로만 하려 하신단 말입니까. 전하께서는 위에서 독단(獨斷)하시면서 누구의 말도 돌아볼 가치가 없고 어떤 전례도 본받을 것이 없다고 여기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대신이 아무리 반복해서 간곡하게 말씀드려도 끝내 전하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있는데, 더구나 외정(外廷)에 있는 신하들의 경우이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마음을 평안히 가지고 사리를 살펴 고금의 일을 근거하여 예에 합당하도록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방도를 강구하심으로써 공평하고 광대한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되면, 척연히 뉘우치는 점이 있게 되실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 차자를 안에 머물러 두고, 이어 정원에 하교하기를,
"추숭하는 일을 금년에 주청하고 세자 책봉에 관한 주청은 내년으로 물려서 거행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어제 연중(筵中)에서 대신이 불가하다고 극력 진달드렸는데, 이런 막중한 일은 반드시 대신이 충분히 논의한 뒤에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신들이 그저 전하의 뜻에 따를 줄 알아서 무턱대고 해조에 분부한다는 것은 너무도 타당하지 못한 일이 되겠기에 감히 고인이 봉환(封還)한 의리에 따라 황공하게 다시 품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신들 가운데 이귀(李貴)와 불화한 자가 유독 배격하는데, 그 마음을 알기 어렵지 않다. 이번에 추숭하는 일을 중국에서 허락하지 않는다면 나도 섭섭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은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튿날 영의정 오윤겸, 우의정 이정구가 차자를 올려 대죄하면서 체직을 청하니, 답하기를,
"어제 하교한 것은 경들을 가리킨 것이 아니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4월 22일 을축
양사가 합계(合啓)하여 추숭에 대한 문제로 주청하라는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내가 어둡고 미련하여 몸을 닦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 모두가 한(漢)나라·당(唐)나라 때의 용렬한 임금에게도 미치지 못하는데, 유독 어버이를 높이는 일에 있어서만은 조종조를 본받지 않고 멀리 하(夏)·은(殷)·주(周) 삼대 이전을 따르려 한다면, 이것은 불효이다. 그대들의 근거없는 말은 결코 따를 수 없다."
정원이, 옥당의 차자에 대해 비답을 내리지 않은 것은 온당치 않다는 내용으로 아뢰니, 상이 비로소 ‘알았다.’고 답하라는 명을 내렸다.
4월 23일 병인
양사가 합계하여 추숭하는 일로 주청하라는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중국에서 허락하지 않는다면 나 또한 섭섭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속히 정계(停啓)하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
옥당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들이 그제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추숭하는 일을 중국에 주청하라는 명을 내리셨기에 서로 의논하여 차자를 올리면서 불가하다고 진달하였는데, 하룻밤이 지나도록 비답을 내리지 않으셨으니, 이는 실로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임금에 대한 신하의 관계는 곧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관계와 같으니, 부모에게 허물이 있을 경우에는 간곡하게 말씀드려야지 차마 향리와 주군(州郡)에 죄를 짓게끔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신들이 어찌 감히 위축된 채 구경만 하고 구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번 추숭하는 일은 실로 전하께서 어버이를 높이려는 지극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참으로 예가 올바르고 일이 타당하게 되는 데에 해가 없다면, 누가 성상의 뜻을 받들어 따르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종통(宗統)은 더없이 중대하고 예법은 너무도 엄한 것이니, 의기(義起)023) 하여 후세의 비난을 받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대원군(大院君)이 이미 조종을 계승하는 명을 받지 못했는데, 전하께서 특별히 사사로운 은정으로 추숭하여 종묘에 모신다면 열성조 가운데 한 분은 당연히 조천(祧遷)해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전하의 어버이를 더 없이 높이려는 전하의 뜻은 지극하게 되겠으나, 조종을 높이는 도리는 어떻게 되며 종통을 중히 여겨야 하는 의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온 나라에서 인정하지 않고 정신(廷臣)들이 따르지 않는데 중국에 품명(稟命)한다면 이런 규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신령을 섬기는 도리에도 미안한 바가 있게 될 듯싶으니, 어긋남이 없어야 할 전하의 효(孝)를 해치는 하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대간의 말은 무기력하고 연약함을 면하지 못했으니, 오늘날의 일이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신들이 논하는 것은 실로 공적인 입장에서 나온 것으로서 다만 임금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것뿐입니다."
하였는데, 차자를 올린 뒤 아직 답이 내려오지 않았을 때에 대사간 김수현(金壽賢), 정언 조공숙(趙公淑)이 인피(引避)하기를,
"이번 추숭하는 일이야말로 막중한 전례이니, 언관이 된 자로서는 죽음을 각오하고 극력 간쟁하여 전하의 마음을 돌리도록 했어야 마땅한데, 신들이 일을 분명히 살피지 못한 나머지 즉시 합사(合司)하여 아뢰지 못하고 관례에 따라 진달하기만 하였습니다. 방금 듣건대 옥당이 차자를 올리면서 ‘언관이 무기력하고 연약하니 참으로 한심스럽다.’는 등의 말로 배척하였다 하니, 신들이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 죄가 큽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고, 대사헌 이홍주(李弘胄), 장령 이유달(李惟達), 지평 윤효영(尹孝永), 사간 김세렴(金世濂), 헌납 채유후(蔡𥙿後), 정언 이사상(李士祥)도 이를 이유로 인피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옛날의 제왕들도 모두 사친을 추숭하였는데, 더구나 나는 인후(人後)가 된 자가 아니니, 친부모를 추존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더욱 없다. 이행원(李行遠) 등이 대각을 침해하는 말까지 하여 위와 아래를 협박하는 발판을 만들고 있으니,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다. 모두 잡아다 국문하여 정죄하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본원에 내린 분부를 보고서 서로 돌아보고 경악하며 모르는 사이에 몸이 떨렸습니다. 삼사(三司)가 서로 잘못을 바로잡는 것은 본디 예로부터 내려오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옥당에서 차자 가운데 논한 것은 관례에 따라 말을 만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에 불과한데, 터무니없이 엄한 분부를 내려 잡아다 국문하라는 명까지 내리셨으니, 성명께서 이렇듯 전에 없던 거조를 취하실 줄은 생각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신들이 외람되이 임금의 명을 출납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결코 이를 받아들여 임금께 허물이 끼쳐지도록 할 수 없기에 감히 이를 봉환(封還)하니, 삼가 원하건대 조금 노여움을 푸시어 성명(成命)을 거두소서."
하자,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행원(李行遠) 등이 금부에서 대죄하였으므로 옥당에 숙직하는 관원이 없게 되었다. 정원이 일을 계품하니, 답하였다.
"우선 모두 체차하고, 내일 아침 정사(政事)를 열어 차출하라."
4월 24일 정묘
우의정 이정구(李廷龜)가 차자를 올리기를,
"국가가 홍문관을 설치하여 논사(論思)하는 책임을 부여하고서 옥당이라 부르고 유신(儒臣)의 관원이라고 한 것은 큰 의논이나 큰 전례(典禮)가 있을 때 반드시 유신들로 하여금 널리 상고토록 하여 채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번 이 추숭론에 조금이라도 미진한 점이 있으면 어떤 관원도 각각 생각하는 바를 진달하여 우리 임금이 허물이 없는 곳에 처하시도록 기대해야 마땅할 것인데, 더구나 공론을 주도하는 옥당의 경우이겠습니까. 옥당에서 혹시 대각을 침해하는 말을 하였다 하더라도 이는 본디 으레 하는 일이니, 어찌 위협하여 제어하려는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한밤중에 정신없이 달려와 옥문 밖에서 머리를 나란히 하고 처벌을 기다리고 있어 보고 듣는 자들이 경악하고 있는데 광경이 참혹하고 서글프기만 하니, 이는 실로 근고에 없었던 일입니다. 신은 정성이 임금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말씀을 드려도 신임을 받지 못하는데다가 병세마저 위독하니, 사리상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마땅한 몸으로서 원래 입을 열어 일을 논할 입장이 못 됩니다. 그러나 명색이 대신으로서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 있으면서 임금의 잘못된 행동을 보고도 입을 다문 채 말하지 않는다면 신의 죄는 보다 더 커질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평안한 마음으로 사리를 살펴 속히 유신을 잡아다 추문(推問)하라는 명을 정지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을 위해 정지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영의정 오윤겸(吳允謙)이 차자를 올리기를,
"이 막대한 추숭의 논의를 당하여 신은 가지고 있던 생각을 감히 숨기지 못하겠기에 반복해서 그 불가한 점을 진달하였는데, 전하께서는 채택하여 받아들이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중국에 주청하라는 명을 갑자기 내리셨습니다. 이는 대신의 말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기신 것으로서 전하께서 신을 대신으로 대우하지 않는 것이니, 신이 무슨 면목으로 뻔뻔스럽게 조당(朝堂)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야흐로 신의 집에 짚자리를 깔아놓고 앉아서 날마다 엄한 처벌이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삼가 차자에 대한 비답을 받들건대 ‘어제 하교한 것은 경들을 지칭한 것이 아니다.’고 분부하셨습니다. 신은 성상의 의도가 어디에 계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일단 신들 두 사람이 아니라면 결과적으로 좌상 김류에게 귀결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김류는 원훈인 대신으로서 성상과는 군신 일체의 입장에 처해 있고 이귀(李貴)와는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해야 할 의리가 있으니, 어찌 사사로운 혐의를 품고서 전례를 의논하는 그 사이에 감히 적대하려 하였겠습니까. 신은 그가 필시 그렇지 않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전하께서 엉뚱하게 의심을 하여 이처럼 미안한 분부를 내리시니, 같은 반열에서 함께 말씀드렸던 신도 황공하기 그지없어 어찌할 줄을 모르겠는데, 더구나 김류 본인은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너그러이 살펴 말끔히 의심을 푸소서.
오늘 또 듣건대, 옥당의 관원을 모두 잡아다 국문하라는 명을 내리셨다 하는데, 이는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간언을 받아들여야 하는 임금의 도리를 필시 익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다만 사친을 위하는 지극한 정에 가리운 나머지 마음에 거슬리기만 하면 버럭 성을 내어 위엄으로 제압하려 하십니다. 전하께서 평소 유신을 선택하여 논사하는 책임을 맡긴 목적이 다만 전하의 뜻을 받들어 따르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희로애락의 감정에 얽매이지 마시고 서서히 옳고 그른 사리를 살피시어 잡아다 국문하라는 명을 속히 거두소서.
그리고 신이 5년이나 자격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조금도 보좌해드리지 못한 데다가 정신마저 혼미하여 결코 직임을 받들 가망이 없으니, 삼가 원하건대 신을 삭직(削職)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행원(李行遠) 등을 잡아다 추문하는 일은 이미 정지시켰다.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고, 정원에 하교하기를,
"대관(大官)이 염치가 없고 소관(小官)이 방자하면 나라 꼴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행원 등은 모두 관직을 삭탈하고 멀리 유배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옥당의 여러 신하들을 모두 멀리 유배보내라는 분부를 받드니, 신들은 어제보다도 더 놀랍기만 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평안한 마음으로 잘 살피시어 속히 성명(成命)을 거두소서."
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부교리 박황(朴潢)이 양사를 처치하기를,
"이처럼 국가의 막대한 변례(變禮)를 당하여 언관이 된 자는 극력 간쟁하여 우리 임금을 허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해야 마땅합니다. 상규(常規)로 헤아려 보건대 본디 완급과 경중의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관례에 따라 진달하였다.’는 등의 말을 보면 구차하고 무기력하게 된 결과를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대사간 김수현(金壽賢), 정언 조공숙(趙公淑)·이사상(李士祥), 지평 윤효영(尹孝永), 사간 김세렴(金世濂), 헌납 채유후(蔡𥙿後), 대사헌 이홍주(李弘胄), 장령 이유달(李惟達)을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고, 이어 정원에 하교하기를,
"많은 관리를 모두 체직시키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닌데, 박황은 어째서 동료들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혼자서 처치하였는가?"
하였다. 회계하기를,
"옥당에 물어 보니 ‘차자를 올릴 때 동료 관원이 유고로 밖에 있을 경우에는 패초(牌招)할 것을 계청하여 동참케 하지만, 현존하는 관원이 없을 경우에는 정자(正字) 한 사람이라도 차자를 올리는 것이 관례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응교가 아직 있는데 패초할 것을 계청하지도 않고 혼자서 먼저 처치를 하다니 괴이하기 짝이 없다."
하였다. 이때 응교 최혜길(崔惠吉)은 시의(時義)와 맞지 않아 정고(呈告)하고 나오지 않았다.
장유(張維)를 예조 판서로, 한필원(韓必遠)을 사간으로, 김세렴(金世濂)을 부응교로, 신계영(辛啓榮)을 교리로, 이경증(李景曾)을 부교리로, 유성증(兪省曾)을 수찬으로 삼았다.
홍문관 교리 박황, 수찬 유성증, 부수찬 이덕수(李德洙)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이행원 등이 전례를 의논하는 날에 당하여 올바르고 곧은 말씀을 드렸는데, 어제 갑자기 잡아다 국문하라는 명이 내렸으므로 조야가 대경실색하며 분위기가 참담하였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대신이 한 말씀을 올리자 즉시 정지토록 하셨으므로 사람들이 마치 일식과 월식이 끝나는 것처럼 모두 바라보면서 감격하였습니다. 그러나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유배보내라는 명을 내리시는 등 갈수록 더 심하게 조치하고 계십니다. 이 어찌 신들이 평소 전하에게 바라던 바이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마음을 평안히 가지시고 사리를 살펴 속히 관직을 삭탈하고 멀리 유배보내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4월 25일 무진
예조 판서 장유(張維)가 차자를 올리기를,
"신은 듣건대, 언책(言責)이 있는 자가 말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면 떠나야 하고 직위에 있는 자가 직책을 다하지 못하면 떠나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전일 언관의 우두머리로 있을 때 조정으로부터 추숭하는 일에 대해 의논하는 일을 부탁받았습니다. 그래서 신은 참람된 일이 된다는 것도 스스로 헤아리지 못한 채 예전(禮典)을 상고하여 하나의 글을 만들어 위로 전하의 마음을 바르게 해 보려 하였는데, 차자를 올리자 그냥 안에 머물려 두기만 하셨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신의 말을 채택할 가치도 없다고 여기신 것이니, 신이 제대로 언책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정상이 드러났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종백(宗伯)으로 임명되었는데, 종백이라는 것은 예관(禮官)의 우두머리입니다. 현재 한창 큰 예를 의논하고 있습니다만 국가의 전례는 해조를 경유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신의 의견이 동떨어지게 차이가 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성명께서도 이미 통찰하고 계실 것입니다. 신이 이미 신의 미혹된 의견을 고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만약 다시 마음속의 생각과 현실적인 일이 서로 어긋나는데도 억지로 재직하게 된다면, 이는 그 직책을 다하지 못하면서도 떠나가지 않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진퇴에 근거가 없게 되고 공사(公私)간에 낭패만 볼 것이니, 신을 속히 면직하소서."
하니, 상이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오윤겸(吳允謙), 우의정 이정구(李廷龜)가 차자를 올려 이행원(李行遠) 등의 관직을 삭탈하고 유배보내라고 한 명을 거두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이행원 등이 나추(拿推)를 면할 수 있게 된 것만도 다행이라 할 것이다. 그 조짐을 키워서는 안 된다."
헌부가 추숭하는 일에 대히 중국에 주청하도록 한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고, 또 이행원 등을 삭탈 관직하고 귀양보내도록 한 명을 거둘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부응교 김세렴(金世濂) 등이 차자를 올려 주문(奏文)하도록 한 명을 속히 환수할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요·순을 본받으려면 조종을 본받아야 마땅하다. 그대들은 물러가 생각해 보고 다시는 무익한 말을 하지 말라."
부제학 최명길(崔鳴吉)이 차자를 올려 면직을 청하니, 답하였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속히 나와 행공(行公)하라."
오백령(吳百齡)을 대사헌으로, 이식(李植)을 대사간으로, 홍집(洪)을 장령으로, 유경집(柳景緝)을 지평으로, 이경증(李景曾)을 헌납으로, 채유후(蔡𥙿後)를 부교리로 삼았다.
4월 26일 기사
이원익(李元翼)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떠나온 뒤에 삼가 듣건대, 성상께서 추숭하는 일에 대해 이미 결단을 내리시고서 상신(相臣)이 말씀을 드리면 견책이 뒤따르고 있다 하니, 신은 놀라고 떨리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이 일에 있어서는 신이 처음부터 불가하다는 입장을 견지하였으며 지금도 그 의견을 바꾸지 않고 있으니, 신의 죄가 당연히 첫째로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상신이 견책을 받은 이상 신만 홀로 면할 수가 없으니, 다른 대신과 함께 견책을 받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모두 알았다. 차자의 말은 과한 듯하다. 경은 부디 안심하라."
하였다.
대사헌 오백령(吳百齡)이 상소하기를,
"삼가 듣건대 옥당 관원에게 처음에는 잡아다 국문하라는 명을 내리셨다가 나중에는 관직을 삭탈하고 귀양을 보내는 법을 적용시켰다 합니다. 우레와 같은 위엄이 거듭 떨어져 정의(情意)가 통하지 못하고 있으니, 인군으로서 벌을 내리는 일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위에 계신 성상께서 전에 없이 이런 일을 하시리라고는 일찍이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병이 들어 거의 죽게 된 처지에서 외람되이 이 언관의 책임을 맡아 이미 합계(合啓)하는 뒤꽁무니에도 참여하지 못한 채 관례에 따라 상소하면서 그저 체직만을 청하였으니, 무기력하게 처신한 죄를 면할 수 없습니다. 신의 관직을 삭탈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은 사직하지 말고 조리하며 직무를 수행하라."
하였다.
양사가 합계(合啓)하여 주청하라는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나의 뜻은 이미 정해졌으니, 다시 번거롭게 소요를 일으키지 말라."
부응교 김세렴(金世濂), 부교리 채유후(蔡𥙿後)가 상소하여 대죄하며 죄를 입은 여러 신하들과 똑같이 벌을 받음으로써 분수에 편안하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하교하였다.
"이번에 추숭하는 일은 윤기(倫紀)에 죄를 얻는 일도 아니고 흥망에 관계되는 일도 아닌데, 부박하고 허탄한 연소배들이 시비를 살피지 못하고 한갓 옛일만 사모한 채 의기양양하게 날뛰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라도 처벌을 받으면 더욱 기운이 나서 자신이 큰 사업이나 세운 것인 양 여기고 있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옛 사람이 ‘아름다운 점은 받들어 따르고 악한 점을 바로잡아 고치라.’고 하였는데, 오늘날 정신들이 나의 하려고 하는 일을 대단히 악한 일이라고 여겨 이처럼 야단법석을 떨며 바로잡아 고치려 하는 것인가? 나의 천박한 견해로 헤아려 보건대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그 중에서도 부응교 김세렴 등의 소장은 더욱 말이 안 되니 도로 내주어라."
4월 27일 경오
양사가 합계하여 주청하라는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고, 2품 이상이 빈청(賓廳)에 나아가 역시 이 일을 진달하여 아뢰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홍문관이 차자를 올려 주청하라는 명을 속히 중지할 것을 청하니, 이미 유시하였다고 답하였다.
삼사(三司)가 이행원(李行遠) 등에게 내려진 삭탈 관직과 유배보내는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4월 28일 신미
남대문을 닫고 시장을 옮기고 북을 치지 못하게 하였는데, 날씨가 너무 가물기 때문이었다.
이홍주(李弘胄)를 예조 판서로, 이안눌(李安訥)을 함경도 감사로 삼았다.
4월 29일 임신
예조 판서 이홍주가 차자를 올리기를,
"신은 지난번 언관의 자리에 있을 적에 추숭하는 것은 비례(非禮)라고 감히 논하였는데, 신의 학문이 몽매하긴 하지만 천한 신의 소견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종백(宗伯)의 임무는 국가의 전례를 관장하는 것인데, 지금까지 견지하던 자기의 의견을 고쳐서 전하의 뜻에 굽혀 따르는 행태는 신이 차마 보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억지로 시키기 어려운 줄 알면서도 강제로 끌어 하게끔 하는 것도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이 못 됩니다. 삼가 면직을 바랍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내가 왕위에 있는 것만도 외람스럽기 짝이 없는데 이제 또 부모마저 높이려 하니, 이 사람이 종백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이런 악한 짓은 차마 하지 못하겠다니, 역시 귀하게 여길 만하다. 그가 그토록 지조를 지킨다면 강제로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 소원대로 면직시켜 그의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이 뒤로는 예조 판서를 아예 차출하지 말아 나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면할 수 있게 하라."
하였다.
4월 30일 계유
간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어제 예조 판서를 면직시킨 분부를 보고서 당황하고 의혹스러운 심정을 가누지 못했습니다. 이홍주만이 몸둘 바를 모르게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조정에서 이 일을 쟁논한 신하로서 그 누구인들 두려워하며 떨지 않겠습니까. 임금의 말이 한번 떨어지면 사방이 모두 듣는 법인데, 신들은 전하께서 이토록 중도에 어긋나게 노여워하실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종백의 자리는 단 하루도 비워둘 수 없는 것인데, 어찌 한두 사람이 번거롭게 사직하였다고 하여 마치 혁파한 것처럼 그 후임자를 내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즉시 차출하여 중한 자리가 비어 있지 않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박정(朴炡)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지경연 이귀(李貴)가 아뢰기를,
"좌상이 신과 화목치 못하다는 이유로 체직된다면 미안하기 그지없습니다. 반정(反正)한 이후로 그와 의견이 같지 않았던 것은 화친에 관한 한 가지 일뿐으로 김류도 신을 미워하지 않았고, 신도 김류를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소견들이 그와 같았기 때문이지 어찌 분해서 화를 내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요즘 듣건대 관유(館儒)들이 사방의 제생(諸生)을 불러들여 상소하려 한다 하는데, 경박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몇 명이 상소하려 한다 하더라도, 어찌 많은 선비들을 위협해서 끌어올 수야 있겠는가."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정청(庭請)하는 여러 신하들도 책임을 메우려고 온 것이니 이처럼 더운 날씨에 하루종일 노천에 앉아 있노라면 모두들 염증을 낼 것입니다. 상께서 독단(獨斷)하여 속히 대례(大禮)를 정하시면 안 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이현영(李顯英)이 아뢰기를,
"이귀가 간쟁하는 것은 아마도 고조를 두 분으로 하는 혐의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좌전(左傳)》에 ‘고조 이상은 모두 고조로 통칭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폐주가 성묘(成廟)를 고조라고 칭하였는데 전하도 고조라고 칭할 경우, 아무리 옛말에 모두 고조로 칭한다 했더라도 한 사당 가운데 어떻게 두 분의 고조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성종이 아무리 성군(聖君)이라 하더라도 친진(親盡)이 되었으며 조천(祧遷)해야 마땅한데, 어찌 이것 때문에 주저하신단 말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많이 변론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최혜길(崔惠吉)이 아뢰기를,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안 된다고 하니 이것이 곧 인정이고, 인정이 똑같이 그러하니 이것은 바로 천리입니다. 다만 신주를 여염에 두는 것은 미안하니 별도의 조처를 취해야 마땅할 듯합니다. 어찌 꼭 주청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양사가 한창 이행원 등의 관직을 삭탈하고 유배보내는 일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데, 너그러이 살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이귀가 아뢰기를,
"최혜길과 논변하는 것이 도리어 더럽습니다."
하고, 인하여 최혜길을 꾸짖기를,
"역대 임금 가운데 예묘(禰廟)가 없었던 경우가 있는가. 네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단지 외정(外庭)의 여러 신하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 날 이귀는 목소리와 얼굴빛을 모두 사납게 하여 좌우를 꾸짖고 모욕을 가하면서 혹 주먹으로 땅바닥을 치는가 하면 손으로 혁대를 휘두르기도 하였는데, 오시부터 유시까지 굳게 앉아 나가지 않았다. 상도 피곤한 기색이었으며 좌우의 사람들도 모두 눈을 흘겼다.
좌의정 김류가 면직되었다. 김류가 추숭하는 일을 극력 간쟁하여 굽히지 않다가 드디어 세 차례 정사(呈辭)한 끝에 체직되니, 조정이 모두 놀라며 탄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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