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갑술
합사(合司)하여 주청(奏請)하라는 명을 거두기를 청하고, 옥당도 주청과 이행원(李行遠) 등을 귀양보내라는 명을 거두기를 청하니, 모두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대사헌 박정(朴炡)이 아뢰기를,
"지금 전하께서 진노하시어 조정이 실색하고 있습니다. 말씀과 표정에 매우 화평을 잃어 논사(論思)하는 신하들은 임금을 과실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려고 할 뿐인데 벼슬을 뺏고 귀양보내라는 명이 내리기에 이르렀고, 묘당과 대각(臺閣)은 지성으로 논쟁하여 비례(非禮)를 바루고자 하였는데 전하께서 마음을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때에 강직 방정하고 명망과 실력을 갖춘 자가 아니면 어떻게 이 직책을 감당하여 여러 사람이 바라는 바에 부응하겠습니까.
신은 더욱 민망스러운 바가 있습니다. 신의 부자는 성명의 시대를 만나 재보(宰輔)의 반열에 같이 올랐으니 영화와 은총이 극진합니다. 중요한 대사헌의 자리를 부자가 서로 출입하는 데 이르러서는, 이는 실로 고금에 드문 일이며, 정사의 체모에 있어서도 매우 타당치 못합니다. 속히 신을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고 김상헌(金尙憲)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5월 2일 을해
영돈녕부사 윤방(尹昉), 영의정 오윤겸(吳允謙), 우의정 이정구(李廷龜) 등이 2품 이상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상께서 하려고 하는 바는 인정에서 나왔으나 예에는 합당치 못하고, 신들이 간쟁하는 바는 정성에서 나왔고 예에 맞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염의 사대부로서 부모 섬기는 도리를 다하려 하는 자도 살았을 때 섬기고 죽었을 때 장례치르며 제사지내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한결같이 예에 따르고 구차하지 않게 하려 합니다. 그런데 더구나 제왕가의 왕통을 계승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데, 삼대(三代)의 바른 예를 따르지 않고 한(漢)·당(唐) 이후의 예에 합당치 않은 그릇된 처사를 본받고자 하십니까. 대원군께서는 성상을 낳고 옛날의 법도를 회복하시어 중흥의 공렬이 조종(祖宗)보다 빛나니, 그 덕을 쌓고 경사를 이루심은 백대(百代)토록 흠앙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구구하게 비례(非禮)의 위호(位號)가 있어야만 존경과 현양(顯揚)을 받겠습니까. 성상께서는 마음을 공평하게 갖고 사리를 살펴 주청하라고 한 명을 속히 거두소서."
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선왕조에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간행하여 반포한 뒤에 다시 계속하여 편찬하지 못한 기간이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어찌 드러내어 기록할 만한 사람이 없겠습니까마는 전에 적신(賊臣) 이이첨이 자칭 효자라 하여 그 속에 넣어 간행하였던 것을 반정(反正) 초에 곧바로 폐기토록 명하는 과정에서 기록할 만한 사람들까지 함께 폐기하였습니다. 이제 분부에 따라 전에 인출한 《삼강행실》과 그 뒤 각부(各部)나 도에서 보고한 책자에 의거해 간행하여 반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만 내용을 보존하고 삭제할 때에 본조가 듣고 본 것만을 믿어서는 안 되니, 별청(別廳)을 설치하거나 본조가 뽑아 조사한 다음 정부와 양사로 하여금 서경(署經)하여 결정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대신들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다. 윤방·오윤겸·이정구 등이 아뢰기를,
"보존하고 삭제하는 과정은 일의 체모가 과연 중하니 별청을 설치하여 뽑아 조사하여 간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옥당이 추숭(追崇)을 주청하는 명을 거두기를 청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태학 유생 이지항(李之恒) 등이 상소하기를,
"지금 이 추숭하는 거사는 천칙(天則)을 어기고 인기(人紀)를 문란하게 하여, 사은(私恩)을 높이고 의리를 무시한 혐의가 있으며 조종(祖宗)을 존경하는 도리를 잃었습니다. 송 영종(宋英宗)이 복왕(濮王)의 추숭을 의논하였을 때 여러 신하들의 예에 의거한 논변이 매우 분명하자 영종이 의리와 예법을 따랐고, 효종(孝宗)도 선조의 업적을 이어 실추시키지 않았으니, 이것이 삼대 이후에 송나라 가법이 바를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정이(程頤)가 말한 천지대의(天地大義)와 주희가 말한 천리자연(天理自然)이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니, 후세에 종통을 이어받아서 생부를 강등하여 보답할 때 마땅히 송나라의 전례를 바꿀 수 없는 상법으로 삼아야 됩니다.
한(漢)나라 이래로 효선제(孝宣帝)·광무제(光武帝)와 진 원제(晋元帝)도 모두 방계 자손으로서 대통을 이어받았지만 생부를 추숭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효선제는 도원(悼園)을 황고(皇考)라 칭하고 침묘(寢廟)를 세웠는데, 송나라 사람 범진(范鎭)이 이르기를 ‘효선제는 소제(昭帝)의 손자이니 그의 아버지를 황고(皇考)라고 칭한 것은 옳다. 그런데 논하는 자들이 옳다고 하지 않는 것은 소종(小宗)을 대종(大宗)에 합하였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주희가 이 말을 취하여 강목(綱目)에 썼고, 또 정이는 ‘선제가 생부를 황고라고 칭한 것은 인륜을 어지럽히고 예를 잃음이 심한 것이다.’라고 논하였습니다.
손자로서 할아버지를 계승하는 대의는 멀리 삼대(三代)를 인용할 필요가 없이 이 논거(論據)에서 훤히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남의 후사(後嗣)가 되지 않은 자는 추숭(追崇)할 수 있다고 한다면, 선제가 누구의 후사가 되었기에 선유(先儒)들이 이토록 심하게 기롱하였단 말입니까. 성제(成帝)·애제(哀帝)·환제(桓帝)·영제(靈帝) 같은 임금은 모두 사리에 어둡고 망령되어 선조를 높이는 것이 도리어 선조를 업신여기고 예가 지나치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불효 불의의 속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가정황제(嘉靖皇帝)는 석서(席書)·장총(張璁)과 같은 무리들에게 농간을 당하여 대의를 멸하고 사은(私恩)을 높였는데, 이는 전세(前世)의 과실로서 지금의 경계로 삼을 만합니다.
덕종대왕은 중국의 명을 받아 책봉되었고 앞서 세자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지자(支子)와는 차이가 있는데도, 당시에 여러 신하들은 종통에 혐의가 있다 하여 힘껏 논집하였습니다. 하물며 전하의 거사는 선조(先朝)의 비례(非禮)보다 더 심한 경우인데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더구나 종묘 소목(昭穆)의 차례는 한쪽을 올리면 한쪽은 내려야 되는데, 선조(宣祖)한테 성종은 임금이자 조부이고, 대원군은 지자(支子)이자 신하이거늘 어찌 올려서는 안 될 신위를 올리고 조천(祧遷)하면 안 될 때에 조천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선조의 혼령도 반드시 마음에 편치 않게 여기실 것입니다.
‘사(士)로 죽으면 시복(尸服)은 사복(士服)으로 한다.’는 말이 《상복소기(喪服小記)》에 실려 있고, 또 ‘공자(公子)의 자손이 국군(國君)이 된 자가 있으면 이 사람을 태조(太祖)로 삼고 공자를 태조로 삼지 않는다.’는 말이 《의례(儀禮)》에 나오니 경전에 분명한 문구가 없다 할 수 없습니다. 최유해(崔有海)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몰래 중국 사람과 결탁하여 문자(文字)를 지어내어 위로는 상의 총명을 흐리게 하고 아래로는 여러 사람의 귀를 현혹시켰습니다. 필부로서 임금의 귀를 현혹시킨 자는 죽음을 받아야 마땅한데, 전하께서는 죄를 주지 않을 뿐 아니라 그를 총애하고 신임하십니다. 온 세상에 한 사람도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까.
삼가 들으니, 전하께서 경사(卿士)들과 의논하지 않고 곧바로 중국 조정에 주청할 것을 분부하셨다 합니다. 그러나 전에 혼조에서도 예에 맞지 않는 것을 청하여 모두 허락받았으니, 중국 조정에 허락받았다고 하여 공론이 정하여진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천하의 비웃음만 취하게 될 뿐입니다. 더구나 전하께서는 사기(辭氣)가 매우 준엄하여 신료들을 꺾으시니 성조(聖朝)의 기상에 걸맞지 않고 백성들이 바람에 어긋납니다. 대오 각성하시고 흔쾌히 조정 신하들의 청을 따르소서."
하니, 답하기를,
"중국에 주청하는 일은 윤리를 깨뜨리거나 나라를 손상하는 일이 아닌데 너희들이 와서 성가시게 구니, 지나치다 하겠다."
하였다. 이지항 등이 다시 상소하여 극력 말하였으나, 상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평안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치계하기를,
"황 도독(黃都督)의 차관(差官) 당요필(唐堯弼) 등이 가도(椵島)에서 나오기에 그곳의 사정을 물었더니 ‘황제가 유흥치(劉興治)에게 망룡의(蟒龍衣)·옥대(玉帶)·황금면사패(黃金免死牌)를 하사하여 배에 실어 보내려다가 모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중도에서 돌아갔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황 노야(黃老爺)는 직함이 흠차진수등요동강등처지방도독부첨사(欽差鎭守登遼東江等處地方都督府僉事)이고 이름은 황룡(黃龍)이며 강서(江西)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용골대 등이 수백 명의 기병(騎兵)으로 천가장(千家庄)을 습격하여 경작하는 한인(漢人) 수십 명을 죽이고 소와 가축을 노략질하였으며, 선유사 박난영(朴蘭英), 의주 부윤 신경진(申景珍) 등에게 와서 말하기를 ‘너희 나라가 어찌하여 이같이 중국 사람을 들어와서 살게 하는가?’ 하면서 공갈하였습니다."
하였다.
5월 3일 병자
상이 하교하였다.
"넉 달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아 양맥(兩麥)이 모두 말랐는데 세찬 바람과 불볕같은 날씨가 갈수록 더욱 심하니, 농사를 생각하면 밤낮 걱정이 된다. 내가 몸소 사직에 빌고자 하니, 해조로 하여금 날을 정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그리고 모든 신료들도 목욕 재계하고 정성을 다하여 천심을 감격시키도록 하라."
대사헌 김상헌이 아뢰기를,
"지금 전례(典禮)가 정해지지 않고 시비가 분명하지 못하여 상이 진노하자 백료들이 놀라서 구구한 말이나 글로 아뢰면서도 속에 품은 생각을 모두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막히고 답답한 뜻을 펴지 못하여 인심이 무너지고 흩어지는 형태가 이미 현저하니 국사가 한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불행하게도 하늘이 또 재앙을 내려 백성들이 죽을 날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정성들여 제사를 지내나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불볕같은 햇살은 갈수록 더욱 따가워져 백성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으니 기상이 참담합니다. 이것은 천기가 내려오지 않고 지기가 올라가지 않으며, 건도(乾道)가 지나치고 신도(臣道)가 날로 낮아져서 그런 것입니다.
하늘과 사람은 한 이치로서 피차에 간격이 없습니다. 지금 해야 할 것은, 임금이 지성으로 하늘에 빌어 흡족한 비가 내리게 하고 조정의 신하들이 지성으로 아뢰어 임금의 의혹을 풀어, 마른 것이 다시 소생하고 노여움이 바뀌어 후회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백성과 나라가 제자리를 얻어 위태한 지경에서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상의 마음을 열어 주고 경계를 올리는 일은 모두 대간의 책임이니, 신과 같이 사리를 모르고 어리석은 자는 결단코 그대로 대간의 우두머리로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영의정 오윤겸, 우의정 이정구 등이 주청하라고 한 명을 환수하기를 청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삼사가 추숭을 주청하라고 한 명을 중지하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내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다시 시끄럽게 굴지 말라."
상이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동지경연 장유(張維)가 대제학을 사임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김상용(金尙容)을 예조 판서로, 윤구(尹坵)를 부수찬으로, 이경직(李景稷)을 경기 감사로 삼았다.
5월 4일 정축
경상도 상주(尙州)에 지진이 있었다.
시강원이 아뢰기를,
"본원에는 실관(實官)과 겸관(兼官)이 모두 열 사람인데 그 중에는 질병과 사고가 없지 않습니다. 지금 상께서 친히 기우제를 지내면 세자가 마땅히 아헌례(亞獻禮)를 행해야 되는데, 그 궁관(宮官)과 집사들의 수를 갖출 수 없습니다. 전에 조종조에서도 겸관을 증설한 적이 있었다 합니다. 지금도 더 증원하여 집사를 갖춰야 하겠기에 하령(下令)을 받아 세자사(世子師)와 빈객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좌빈객 홍서봉(洪瑞鳳)이 말하기를 ‘조종조에는 강원(講院)의 겸관이 1명 뿐이었는데 인종이 동궁에 있을 때 4명으로 늘렸었다. 선조조에 이르러 다만 3인만 두었다가 그 뒤에 선조가 동궁이 강학을 힘쓰지 않는다 하여 강관을 꾸짖고 겸관 2인을 감하였다. 지금 하령에 의하여 수를 차출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하였고, 세자사 오윤겸, 좌부빈객 장유(張維)도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우부빈객 김상헌은 말하기를 ‘관제(官制)를 증설하는 것은 사체가 중대하고 갑자기 차출하는 것도 타당치 못한 듯하다. 사고가 있는 관원을 속히 차출하여 집사의 수를 갖추어야 된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김상헌의 말을 따르도록 명하였다.
5월 6일 기묘
해가 진 뒤에 별이 하늘 가운데로부터 남쪽을 향하여 흘러갔는데 모양이 동이와 같았다. 그 빛이 땅을 비추다가 얼마 뒤에 사라졌다.
5월 7일 경진
상이 사직단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합사(合司)하여, 주청토록 한 명을 거두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두 고조(高祖)가 한 사당에 함께 있는 것은 2백 년 이래 없었던 일이다. 그런데 경들은 조천(祧遷)해서는 안 된다고 말을 하니, 사리를 아는 자들에게 기롱을 받을까 염려된다."
간원이 아뢰기를
"친히 기우제를 지낼 때 상례(相禮)가 가장 예의를 잃었고 보덕(輔德)도 자세히 살피지 못하여 법도를 이루지 못했으며, 예모관(禮貌官)도 부복(俯伏)을 잘못 외쳐서 반열(班列)이 범절을 잃게 하였고, 악공들도 열에서 음악을 연주할 때 가끔 졸았으니, 모두 놀라운 일입니다. 상례 안경(安璥), 보덕 신민일(申敏一), 해당 예모관, 장악원 관원, 전악(典樂) 등을 모두 추고하소서. 그리고 안경은 노쇠하고 파리하여 본직에 합당치 않으니, 먼저 체직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전악은 유사(攸司)로 하여금 가두고 죄를 다스리게 하라."
하였다.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기를,
"예는 천하의 바른 이치이니, 자식으로서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시종여일 예에 따라서 하고 구차하지 않게 한 뒤에야 어버이를 높인 것이 지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명호(名號)만 높이고자 하여 바른 이치에 위배됨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성인이 말한 효가 아닙니다. 옛날의 제왕들은 이 이치를 분명히 보았기 때문에, 자신이 만승의 제왕이 되어서도 예를 어기거나 의를 해치는 일을 어버이에게 베풀지 않아, 천하 후세에서 아름답게 여기고 다른 말이 없었으니, 한 광무제가 이에 해당됩니다.
성상께서는 학문이 고명하여 모든 이치를 잘 아시는데, 어버이를 현양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옛 현명한 임금들을 본받지 않고 말세의 잘못된 사례를 답습코자 하여 바른 의논을 등지고 유신(儒臣)들을 물리치시니, 이 어찌 성명께 기대했던 바이겠습니까. 추숭을 주청토록 한 명을 속히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정청하기까지 하니 매우 괴이하다.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심세괴(沈世魁)·장도(張燾)가 접반사를 만나 눈물을 흘리면서 군민(軍民)이 굶주리는 형상을 말하였다. 접반사가 아뢰니, 상이 해서미(海西米) 2천 포(包)를 주도록 명하였다.
회답사 위정철(魏廷喆)이 치계하였다.
"금한(金汗)이 말하기를 ‘보내온 예물이 해마다 이같이 삭감되니 이 뒤로는 귀국은 사신을 보내지 말라. 우리도 다시 사신을 보내지 않겠다.’고 하고, 또 ‘유흥치(劉興治)가 우리에게 투항하려다가 귀국이 식량을 주어 살 수 있게 함으로 인하여 투항하지 않았다. 귀국의 처사는 어찌 이와 같은가. 만약 다시 도중(島中)에 식량을 주는 일이 있으면 내가 의주에 나가 공급로를 끊을 것이니, 귀국에 피해가 없겠는가.’ 하였습니다."
5월 8일 신사
대신이 백관 이하를 거느리고 속히 추숭을 주청토록 한 명을 거두기를 청하니, 이미 유시하였다고 답하였다.
합사(合司)하여 아뢰기를,
"어제 성상의 비답을 받아 보니, 두 고조(高祖)가 한 사당에 함께 있는 것은 이백 년 이래로 없던 일이라는 것으로 하교하셨는데, 신들은 몹시 의혹스럽습니다.
예에 제후는 5묘라 하였는데 2소(昭)와 2목(穆)과 태조가 합쳐 다섯이며 그 사이에 세실(世室)은 이 수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종묘는 성종에서부터 선조까지가 2소와 2목이니, 인종과 명종이 양실(兩室)이지만 《오례의(五禮儀)》에서 형제를 일실(一室)로 간주하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옛사람들은 고조 이상은 모두 고조라 일컬었고 증손 이하는 모두 증손이라 일컬었습니다. 그 예로 《춘추(春秋)》에 담자(郯子)가 소호(少皡)를 고조라 일컬었고 《시경》과 《서경》에서도 증손이라고 일컬은 곳이 많은데, 모두가 삼대손(三代孫)을 말한 것만은 아닙니다. 지금 능묘의 축사(祝辭)에서 태조 이하에게 전하 자신을 모두 증손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 예를 쓰는 것이니, 무슨 의심할 바가 있겠습니까. 태종·세종에 대하여는 예로 볼 때 마땅히 조천(祧遷)하여야 되지만, 공렬로 인하여 세사하여 소목의 수에 넣지 않기 때문에 고조라 일컫지 않습니다. 그러나 증손이라고 일컫는 것은 다름이 없습니다.
근일에 예를 논하는 여러 사람들이 고사는 살피지 않고 한 사당에 두 분의 고조가 있는 것을 매우 잘못된 것이라 하여 추숭해야 된다는 말에 일조(一助) 하고 있는데, 다른 인증(引證)도 모두 이와 유사하니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주청토록 한 명을 속히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계사 가운데 소목에 관한 말은 내가 학식이 얕아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부제학 최명길이 상차하기를,
"신이 삼가 생각건대, 이번 추숭하는 일이 성상의 어버이를 높이는 지극한 정에서 나왔으나, 예에 분명한 글이 없고 일이 의리를 일으키는 데 관련되어 조정의 의논이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청하라는 명이 먼저 내리니 일의 체모로 볼 때 타당하지 않습니다. 다만 신의 마음에도 의심이 없지 않습니다.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이 논집하는 본의는, 전하로 하여금 남의 후사(後嗣)가 된 것으로 자처하게 하여 대원군의 신주에는 아버지로 칭하되, 능원군(綾原君)으로 하여금 제사를 받들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남의 후사가 되었으면 생부를 아비라고 칭할 수 없고, 아비라고 칭하였으면 남의 후사가 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비라고 칭하면서 아우로 하여금 그 아버지의 제사를 받들게 하는 것은, 예에 근거가 없습니다. 이것은 한 때 의리를 일으켜서 정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후한 쪽을 따라 의리를 일으켰더라도 오히려 의심이 갈 것인데, 의리를 일으키면서 박한 쪽을 따랐으니, 어찌 미안한 점이 없겠습니까. 이것이 첫번째 신이 의심되는 점입니다.
대원군의 신주에는 고(考) 자만을 쓰고 방제(傍題)024) 는 쓰지 않았으며, 계운궁(啓運宮)에는 현비(顯妣)라 쓰고 능원군으로 방제를 썼습니다. 방제를 쓰는 것이 옳다면 대원군에게는 어째서 쓰지 않았으며, 방제하는 것이 옳지 않다면 계운궁에게만 쓴 것은 무슨 뜻입니까. 신은 배운 것이 적어 예문(禮文)을 잘 알지 못하지만, 고비(考妣)의 신주를 쓰는 데 다르게 쓸 수 없다는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조정에서는 다만 한 때의 승리만 취하려 하여 천고에 웃음거리를 끼치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이 두 번째 의심스러운 점입니다.
예에 제후는 5묘라 했으니 곧 태조와 고조 이하 사친(四親)이 이것이며, 세실(世室) 이외에는 친진(親盡)이 되면 순번대로 조천(祧遷)하는 법입니다. 지금 대원군을 이미 아버지라 일컬었기 때문에 종묘에 있어서는 선조가 할아버지가 되고 명종이 증조가 되고, 인종은 방친이기 때문에 백증조(伯曾祖)라고 일컬으나 댓수를 세는 데는 들어가지 않고, 중종이 고조가 되고 성종이 5세조가 됩니다. 그러나 종묘의 예는 일의 체모가 매우 중대하여 경솔하게 처리해서는 곤란하기 때문에 계해정난(癸亥靖亂)025) 의 처음에 열성의 속호(屬號)를 이렇게 고쳤는데, 성종은 여전히 그대로 두어 고치지 않고 고조로 칭하였습니다. 이것은 한 사당 속에 두 고조가 있는 것으로, 불가하지 않습니까? 흑자는 ‘고조는 원조(遠祖)의 통칭이다.’라고 합니다. 신도 전기(傳記) 중에서 보았는데, 이는 심존중(沈存中)의 말입니다. 심존중의 이 말은 상복(喪服)의 한 가지에 대해서만 말한 것으로서, 5세조가 친진(親盡)이 되었지만 혹 살아서 섬겼을 경우에는 그 복(服)을 고조의 복에 의거해야 된다고 말한 것이니, 주장하는 뜻이 조금 다릅니다. 또 원조(遠祖)는 동일한데 세조(世祖) 이상은 모두 속호(屬號)가 없고 성종에게만 고조라고 일컬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이 신이 세 번째 의심스러운 점입니다.
이 세 가지 일은 모두 법도를 어기고 전례(典禮)를 해치는 것으로 후세에 본보기가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조정에서는 먼저 처치할 방법은 강구하지 않고, 전하로 하여금 선조(先祖)를 받들고 선세(先世)를 추모하는 데 있어서 결례가 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전례가 이미 정하여져 다시 고칠 수 없다.’고 하니, 여론이 마구 일어나고 전하의 뜻을 돌리기 어렵게 되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신은 들으니, 《춘추》의 법에 ‘아버지는 지자나 서자의 집에서 제사를 지낼 수 없다.’ 하였습니다. 한 선제(漢宣帝)가 애당초 사황손(史皇孫)을 도고(悼考)라고만 칭하고 원(園)을 설치하여 입후(立後)를 하지 않은 채 관(官)에서 제사를 받들게 하였을 때에는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황(皇)자를 첨가시키고 침묘(寢廟)를 세워 소목의 차례를 올린 뒤에 비로소 비난하는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또 광무제의 초년에 사친(四親)의 사당을 낙양에 세워 위로 조통(祖統)을 계승하니 나라 사람들이 비난하였고 장릉(章陵)으로 옮겨 그곳 군현으로 하여금 제사를 받들도록 하니 선유(先儒)들이 예에 합당하다고 하였습니다. 선제와 광무제의 일은 변례(變禮)인 듯하나, 실제로 방계(傍系)로 이었으면서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더구나 전하는 한 선제나 광무제와는 입장이 다릅니다. 그런데 고(考)로 칭한 신주를 여염집에 강등하여 두고 지자를 시켜서 봉사(奉祀)하게 하여, 숙부(叔父)로 칭한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026) 과 조금도 차별이 없게 하였습니다. 그 뜻이 비록 잘못된 일을 미리 막고 예에 있어서 검소하게 하고자 한 것이지만, 어찌하여 조금도 참작하지 않고 선제의 초년과 광무제의 말년의 일을 본떠 행하신단 말입니까?
예를 의논한 지 9년이 지나 노사 숙유(老師宿儒)들이 이리저리 찾고 광범위하게 인증하기를 지극하게 하였지만 모두 오늘날의 경우에 적절한 증거가 아니고, 다만 《예기》의 ‘사(士)의 예로 장사지내고 제후의 예로 제사지낸다.[葬以士祭以諸侯]’는 한 문장만이 가장 밀접합니다. 신이 종전에 주장한 바도 다만 이 구절의 내용입니다. 근자에 빈청의 계사에서도 이 말을 들어 증거를 삼았는데 거의 근사한 듯합니다. 다만 이 문장 중에서 ‘사의 예로 장사지낸다.’는 한 조목만을 끄집어내어 논쟁하고 주장하는 바탕으로 삼고 ‘제후의 예로 제사지낸다.’는 조목에 대하여는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인의 교훈을 반은 얻고 반은 잃은 것이니, 참으로 애석한 노릇입니다. 지난해 경연에서 이 예에 대하여 논의가 미치자 대신들이 2묘가 된다는 것으로 의심하였으나, 이것은 아마도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별묘(別廟)의 제도는 유래가 오래 되었으니, 주(周)나라의 강원묘(姜嫄廟)와 한나라의 여(戾)·도(悼) 두 원(圓)과 동한의 장릉(章陵) 사사(四祠)가 모두 이것입니다. 그리고 당나라 때에는 후비(后妃) 한 사람만을 종묘에 배향하고 나머지 계후(繼后)는 별묘에서 제사지냈고, 무소왕(武昭王)은 당나라 시조이기 때문에 별도로 흥성묘(興聖廟)를 세웠지만 후세에 두 개의 사당이라는 것으로 비방하는 자가 있다고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본조에도 순회 세자(順懷世子)027) 의 사당이 있습니다. 국군(國君)의 사자(嗣子)도 사실(私室)에서 제사를 지낼 수 없는데, 더구나 임금의 부모이면서 예법으로도 마땅히 복을 입을 분에 대하여 지자의 집에서 강등하여 제사를 지내어 춘추의 의리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2묘가 된다고 의심하는 논의를 하는 사람이 첫째는 ‘위로 조종(祖宗)을 누른다.’ 하고, 둘째는 ‘종통(宗統)을 방해한다.’ 합니다. 신이 그 말의 엄격함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군신 부자의 사이에 하나라도 그 도리에 미진함이 있어서 신리(神理)에 유감이 있게 하고 후세에 비웃을 소지를 남긴다면, 이것은 자기를 속이고 임금을 속이는 것이요 또 하늘을 속이는 것이니, 인인 군자(仁人君子)가 차마 할 바가 아닙니다.
송 광종(宋光宗) 때 조여우(趙汝愚)가 세력을 잡고는 희조(僖祖)를 조천(祧遷)하여 태조의 위(位)를 바로잡아 동향(東向)시키고자 하였는데, 일시의 사대부들이 모두 그 말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주자만은 반대하여 말하기를 ‘태조를 높이어 동향하게 하는 것은 의(義)요, 희조(僖祖)를 받들어 동향하게 하는 것은 은(恩)이다. 의는 천하 신자(臣子)들이 오늘날 원하는 바요, 은은 태조 황제가 당시에 먹었던 마음이다. 의를 높이고 은을 낮추어 천하 신자들이 원하는 바를 따르기보다는, 차라리 의를 낮추고 은을 높여서 태조 황제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오늘날의 예가 희조의 경우와는 차이가 있지만, 근본을 보답하는 데 은과 의를 서로 참작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신은 생각건대, 주자가 오늘날에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꼭 강쇄(降殺)하자는 의논을 주장하여, 군부(君父)의 친친(親親)하려는 지극한 정을 상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더구나 별묘(別廟)를 두는 것이 창시하는 일은 아닙니다. 조선(祖先)과 종통(宗統)에 무슨 혐의와 해가 있다고 시행하지 않습니까?
근래에 일종의 새로운 주장이 있으니, 《의례》의 공자(公子)를 태조(太祖)로 하지 않는다는 말과 주자의 종묘협향도(宗廟祫享圖)를 인용하여 대원군을 묘향(廟享)할 수 없다는 증거로 삼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의례》의 말은 처음 임금에 봉해진 경우의 일이요, 주자의 종묘협향도는 형제 소목의 차례에 관련된 것으로, 지금의 예와는 서로 관계가 없습니다. 진실로 호승지심을 버리고 전문(全文)을 살펴 주된 뜻을 파악한다면, 신의 말이 증명이 될 것입니다. 성종은 우리 나라의 성군으로 태평성대를 이루어 깊은 은택을 끼쳤으니, 죽더라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차례가 되어 세실에 올려 부제(祔祭)할 경우라 하더라도 함부로 조천(祧遷)을 거론할 수 없으며, 오늘의 일은 또 상례(常例)와는 다릅니다. 성상의 입장으로 볼 때는 5세조이나 종묘의 입장으로 볼 때는 4대입니다. 친진(親盡)하면 조천하는 것이 예의 상도(常道)이고 변례(變禮)에 후한 것을 따르는 것이 사체의 권도(權道)입니다만, 고조가 아닌데 고조로 칭하면 조선(祖先)을 속이는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다시 처리하게 하여 속호(屬號)를 고쳐서 친소(親疏)의 순서를 구별하고, 이어서 소목을 배열하여 4묘(廟)의 수를 갖추면서 별도로 축사(祝辭)를 지어 그 이유를 밝게 고해야 됩니다. 이렇게 한 뒤에야 처치가 분명하고 사체가 구차스럽지 않아 오르내리는 혼령이 비로소 편안히 흠향할 것입니다. 만일 혹자의 말과 같이 통틀어 고조라고 칭할 경우에는, 세실(世室)의 각위(各位)도 모두 이 예에 의거하여 호칭해서, 존조(尊祖)의 예가 차이가 없게 해야 될 것입니다.
추존의 예는 중고(中古)에서부터 시작되었고 하나라나 상나라 이전에는 본래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주나라가 삼대(三代)를 추존하는 것은 왕적(王迹)이 시작된 바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감(祖紺) 이상의 제사에는 별면(鷩冕)을 쓰는 것이 선왕의 유제(遺制)로, 존조의 도가 실제로 이 추존에는 있지 않다는 것을 오히려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오늘날의 의논하는 바는 천고의 변례(變禮)로서 고금의 마땅한 것을 참작하여 한 왕조의 제도를 만드는 것이니, 독서를 하고 이치를 궁구해서 상황에 따라 잘 변통할 수 있는 자가 아니면 누가 이 문제에 대해 논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행하고자 하는 것은 후세의 잘못된 예문(禮文)에서 나온 것이요, 조정 신하들이 논쟁하는 것은 실로 삼대의 옛 제도입니다.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것은 ‘차라리 후하게 하고 말겠다.’는 것에 불과하고 조정 신하들이 바라는 것은 전하를 우(禹)임금이나 탕(湯)임금으로 만들려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말이 혹 지나치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뜻은 모두가 공평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성상의 거조는 화평을 잃어 훈구 대신을 일반 관원처럼 함부로 체직하거나 면직시키고, 경악 유신에게 노하시는 위엄을 보여 나가라는 명령을 내리기까지 하며, 예관(禮官)에게 분부를 내리면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게 하셨습니다. 어째서 전하의 차분하지 못함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노여움을 조금 거두어 심기를 편안히 하고서 대신들을 불러들여 여러 사람의 말을 절충하여, 이번 일이 지당한 곳으로 귀결되도록 하여 지나치거나 못 미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신은 여러 번 두터운 격려를 받아 감히 사직하지 못했으나 오랫동안 쌓인 병세가 갈수록 심해지니 파직시켜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지금의 조정 신하들이 모두 예를 안다고 하지만 평생 동안 글을 읽어 선비로 자처하는 자가 부모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모른다. 친구가 상을 당하면 친소를 막론하고 모두 가서 조문하면서 계운궁(啓運宮)의 상에는 백관이 모두 모여 곡하지도 않았으며, 임금이 궐내에서 성복(成服)을 하였는데도 밖에서는 길복을 입었다. 온 조정이 존중하는 대신들이 김장생(金長生)의 ‘대원군은 숙부로 칭함이 마땅하다.’는 말을 가지고 지금껏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라고 이르니, 이대로 간다면 신하는 신하답지 않고 자식은 자식답지 않은 데까지 이를 것이다. 이와 같이 사리에 어둡고 이기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끝내 깨달아 고칠 리가 없기 때문에 중국에 주문하여 시비를 결정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과인을 어린아이처럼 아무것도 모른다고 보아서 경위에 틀리는 말과 근거 없는 말을 날마다 장황하게 늘어 놓는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두둔하는 자가 있다.’ 하고, 또 ‘나라가 어지러워질 것이다.’고 하니, 매우 한심스럽다.
유생 이지항(李之恒)·이행우(李行遇) 등이 어떤 괴물인지는 모르겠다만, 따르지 않는 제유(諸儒)들을 노복 다루듯이 마구 몰아쳐 강제로 모아 놓고 무뢰한 말로 상소하면서 온 나라의 공론이라고 하니, 참으로 이상하다. 경의 차자 가운데 ‘이미 고(考)라고 칭하였으면 남의 후사(後嗣)가 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칭하면서 아우로 하여금 아버지의 제사를 받들게 하는 것은 예에 근거가 없다. 이것은 한 때 의리를 일으켜서 결정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의리를 일으켰을 경우 후한 쪽을 따르더라도 오히려 의심이 갈 것인데, 의리를 일으키면서 박한 쪽으로 따랐으니, 어찌 미안한 점이 없겠는가.’라고 한 말과 ‘한 사당 가운데 두 고조는 불가하다.’고 한 말 등은 모두 소견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 이기기를 좋아하고 잘못된 일을 우기는 무리들은 이것을 보고도 마음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예기》 중의 ‘사(士)의 예로 장사지낸다.’는 조목을 항상 끄집어 내어 고집하는 단서로 삼으면서 제사지내는 조목은 전연 이해하지 못하니, 차자 중의 ‘그 반은 얻고 반은 잃었다.’는 말이 과연 옳다. 내가 불학무식하여 신료들에게 수모를 당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니, 참으로 탄식스럽다. 경이 굳이 사직하려는 것은 지나치니 속히 나와 행공하라."
하였다.
조공숙(趙公淑)을 지평으로 삼았다.
5월 9일 임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합사의 계사 중에 논한 소목에 관한 한 조목은 과인의 식견이 얕아 의심을 풀지 못하였다. 승지는 나를 위하여 자세히 진술하여 의심스러운 마음이 없게 하라."
하니, 정원이 회계하기를,
"《예기》에 말하기를 ‘제후는 5묘인데 2소·2목과 태조의 묘를 합하여 다섯이다.’ 하였는데, 그 주석에 ‘종묘의 제도는 좌·우로써 소·목을 삼는데, 소는 항상 왼쪽에 있고 목은 항상 오른쪽에 있다. 태조의 묘는 처음 봉해진 임금이 거하고 소의 북묘(北廟)에는 2대의 임금이 거하고 목의 북묘에는 3대의 임금이 거하고 소의 남묘(南廟)에는 4대의 임금이 거하고 목의 남묘에는 5대의 임금이 거한다. 태조의 묘는 영원히 조천(祧遷)하지 않고 나머지 4묘는 6대 이후로는 한번 대수가 바뀔 적마다 조천한다.’ 하였으니, 이것이 고례의 소목의 서열이자 5묘의 제도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종묘는 성종으로부터 선조에 이르기까지 2소·2목이 되니, 합사하여 논한 소목에 관한 한 조항은 옛날 5묘의 제도입니다. 예나 경전에 상고하더라도 의심할 바가 없을 듯합니다."
하자, 답하기를,
"대간의 계사 중에 논한 소목은 광해군 때의 말이다. 고금 천하에 어떻게 아버지의 신주가 없는 사당이 있겠으며, 또 제후의 나라에 어떻게 고조가 둘 있는 사당이 있겠는가. ‘두 고조는 불가하다.’는 것은 오로지 고·증·조·부의 대수를 중심으로 말하는 것이다. 유경집(柳景緝)이 모르는 체 하면서 근사하지도 않은 고어(古語)를 인용하고, 또 ‘전례가 있다.’고 하니, 이는 자기의 마음을 속이는 것이고 또 임금을 속이는 것이다. ‘태종·세종은 공렬이 있어 세사(世祀)하기 때문에 고조라고 칭하지 않으나 증손이라고는 칭한다.’는 것도 회피하는 말이다. 승지는 대간을 두둔할 줄만 알고 임금에게 사실대로 고하는 의리는 생각지 않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이같은 일로 보면 옛날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 일도 괴이할 것이 없다."
하였다.
지평 유경집, 대사헌 김상헌, 사간 한필원, 정언 임득열·이현 등이 정원에 내린 비답이 너무 엄하여 그대로 직책에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였다. 대사간 이식(李植)도 이를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소목은 묘위(廟位)의 호(號)로, 선유의 정론이 사친(四親)으로만 순서를 삼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고·증·조·부의 순서로 소목의 차례를 한다면, 고금의 제왕 가운데 형이 아우를 계승하고 숙부가 조카를 계승한 경우에는 어떻게 소목의 순서를 하였겠습니까? 이의를 제기하는 신하들이 그말을 가지고 증거로 삼기 때문에 성상께서 의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들이 부득불 분변한 것입니다. 지금 성교를 받들고 보니, 말 뜻이 매우 준엄합니다. 무슨 면목으로 다시 쟁론하는 대열에 낄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말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내가 배운 바로는 소목의 호란 사친을 위주로 말하는 것이다. 지금 ‘소목은 조·고를 칭하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는데, 과연 이 말과 같다면 소목 중에 있는 자는 어떤 조선(祖先)인가. 만일 세(世)를 계승하는 순서로써 조·자·손으로 한다면 4형제가 서로 이어서 임금이 되었을 경우 아버지는 5대조가 된다 하여 조천을 하여야 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 나라 인종 대왕은 왜 고조라고 아니하고 백증조(伯曾祖)라고 부르는가. 너희들이 꼭 이기려고 한다면 진유(眞儒)의 증거할 만한 분명한 글을 찾아내어 아뢰라."
하였다. 이튿날 지평 조공숙, 장령 이경인(李景仁)도 임금의 노여움이 폭발하여 기상이 참담하니 대각의 꼿꼿한 기상이 온통 꺾였다는 이유로 함께 인피하니, 옥당이 처치하여 아뢰기를,
"소목의 예는 엄연히 고제(古制)가 있으며, 합사하여 간쟁하였던 것은 실로 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준엄한 하교가 뜻밖에 나왔으니 성상의 도량에 흠되는 바가 있습니다. 언론의 책임을 맡은 직위에 있는 자들은 인피할 만한 혐의가 없습니다. 양사의 모든 관원을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0일 계미
대사간 이식이 다시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소목은 단지 두 글자인데 4위(四位)로 나눈 것으로, 속칭(屬稱)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자가 육전(陸佃)의 말을 매우 그르게 여겨 말하기를 ‘소목은 본래 사당의 동서에 거하느냐와 신주가 남을 향하느냐 북을 향하느냐로 이름을 정한 것이니, 애당초 부자의 속호(屬號)가 아니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소라고 말하면 조부가 되고 목이라고 하면 아비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였으니, 이것이 소목의 명의(名義)에 대한 증거입니다. 조천(祧遷)의 예는 선유들의 말이 갑론 을박하여 어느 한 쪽을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오직 정숙자(程叔子)가 ‘오태백(吳太伯)의 네 형제가 서로 계승한 경우에 위로 조천(祧遷)하지 않은 두 사당이 있다면 결국 조부를 제사지내지 못한다. 그러니 사당이 많아도 해롭지는 않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소목이 사친(四親)에만 구애받지는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주희가 비록 ‘소는 항상 소가 되고 목은 항상 목이 된다.’는 논리를 폈지만, 《주묘제도(周廟制圖)》를 만들 때 의왕(懿王)이 숙부로서 조카를 계승한 데 이르러서는 주희도 정례(正禮)를 지키지 못하고 부득이 대를 계승한 전후로써 순서를 하여, 소에 해당되는데 목으로 하기도 하고 목에 해당되는데 소로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일도 오로지 사친(四親)으로 소목을 정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노 희공(魯僖公)이 민공(閔公)을, 한 선제(漢宣帝)가 소제(昭帝)를, 당 선종(唐宣宗)이 무종(武宗)을 계승함에, 그 묘제(廟制)가 고묘(考廟)에 거할 것이 조묘(祖廟)에, 조묘에 거할 것이 고묘(考廟)에, 고묘에 거할 것이 증조고묘에 거하였던 것은 형제가 일세가 된다는 엄연한 제도입니다. 그래서 세수(世數)는 비록 증감이 없으나 소목은 다소 변동되어 세수와 나란하지 아니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근래의 일로 밝힌다면, 명종의 대에 인종이 고묘에 있었기 때문에 아비인 중종은 조고의 묘에 거하였고, 명종이 올라가 부묘한 뒤에야 소목이 바르게 되었습니다. 아비가 소가 되고 아들이 목이 되는 것은 예의 정도요, 대를 계승함에 혹 변하는 것은 예의 권도입니다. 지금의 국론이 성종을 조천하는 것으로써 미안하다고 여기고 있으니, 성상께서는 후한 쪽을 따라 예를 바꾸어 소목의 상례(常例)에 구애받지 말고 헤아려 처리하기 바랍니다. 고·증·조·고(考)의 이름에 있어서는 계세(繼世) 문제로 인하여 호칭이 바뀌어지지 않는 것은 한(漢)·진(晉) 이래로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지금의 예제에 인종에게 황백조고(皇伯祖考)라고 칭하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으니, 전번에 대원군을 숙부로 칭하자는 의논을 예관(禮官)이 취하지 않은 것도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이 익히 듣고 본 것입니다. 어찌 감히 군말을 하겠습니까. 다만 신의 정성이 부족하여 상께 신을 의심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미 버려진 의논을 제기하여 소란을 떤 처지가 되었으니, 다시 무슨 면목으로 대간의 대열에 끼겠습니까.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영의정 오윤겸이 최명길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 타당치 못한 전교가 있다는 이유로 상차하여 사직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우의정 이정구가 이 문제를 이유로 재차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처음에는 사직하지 말고 몸을 조리하여 행공(行公)하라고 답하고, 또 사관을 보내어 타일렀다.
용골대(龍骨大) 등이 의주에 머물면서 6백∼7백 바리의 물건을 사고는, 성중의 우마를 끌어 모으고 부윤(府尹)의 말까지 탈취하여 가지고 갔다.
5월 11일 갑신
장령 이유달(李惟達), 지평 조공숙(趙公淑)이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유신들이 죄를 받은 것이 대각에 대하여 말을 하여서이니, 신들이 연약하지 않았으면 어찌 옥당이 규계하는 거조가 있었겠으며, 신들이 피혐하지 않았으면 어찌 유신을 중죄에 빠지게 했겠습니까. 그 까닭을 생각하면 죄가 신들에게 있으니, 신들을 파직시키소서."
하고, 사간 한필원(韓必遠), 정언 이현(李𥙆), 지평 유경집(柳景緝)이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대사간 이식이 이미 인피하였으니 편안히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신들을 체직시키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태학 유생들이 관중에 함께 모여 최명길의 차자에 대한 비답 중에 ‘노복 다루듯이 마구 몰아쳐 강제로 모이게 하였다.’는 등의 말이 있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해명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제생들이 성상의 전교 중에 ‘괴물’ 등의 말이 있으므로 성균관에 그대로 있을 수 없다 하여 떼를 지어 나가 한 사람도 재실에 머무는 자가 없었다. 대사성 이현영(李顯英) 등이 아뢰기를,
"유생들이 성균관을 비우는 일은 사문의 막대한 변인데 불행히 지금 다시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성묘(聖廟)가 공허하여 기운이 썰렁하여 부득이해서 본관의 관원들이 성묘를 지키고 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제생들이 관을 비우기까지 하다니, 매우 괴이하다. 잘 회유하여 과격한 거조가 없도록 하라."
하였다. 이튿날 지관사(知館事) 장유와 이현영 등이 특별히 부드러운 전교를 내리고 근신을 보내 선유(宣諭)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에 따라 승지를 보내 회유하였는데, 제생들이 명에 따르지 않았다. 상이 또 하교하기를,
"나의 실언으로 인하여 여러 날 동안 관을 비우게 되었으니 매우 후회스럽다. 승지를 보내어 나의 이 뜻으로 타이르라."
하였다. 승지가 다시 가서 타이르니, 제생들이 다시 들어갔다.
영의정 오윤겸이 차자를 올리기를,
"등대할 때 네 신하 중에 신이 사리에 매우 어두워 ‘미연에 방지하여야 한다.’는 말을 신이 한 듯한데도 미처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전교를 내리어 신의 죄를 바루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이 한 말이 아니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고, 영돈녕부사 윤방(尹昉)도 이 문제로 상차하여 대죄하니, 답하기를,
"경은 잘못이 없다. 대죄하지 말라."
하고, 승평 부원군 김류가 상차하기를,
"신의 입에서 나왔으니 신의 죄를 바루소서."
하니, 답하기를,
"우연히 언급한 일이니 경은 안심하라."
하였다.
옥당이 양사를 처치하여 대사간 이식, 장령 이경인·이유달, 지평 조공숙·유경집, 정언 이현, 사간 한필원은 출사하게 하고 임득열은 체차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임득열은 피혐하는 말 가운데 정원에 내린 전교를 최명길의 차자에 대한 비답이라고 잘못 말하였기 때문에 체직한 것이다.
대신들이 백관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예기》에 이르기를 ‘제후는 5묘인데 2소·2목과 태조를 합하여 5묘다.’ 하였습니다. 이른바 소목은 상도(常道)로 말하면 고·증·조·고입니다. 그러나 제왕가의 승통은 꼭 상도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어서 노나라의 희공(僖公)과 민공(閔公)은 형이 아우를 예위(禰位)로 삼고 주나라의 효왕(孝王)과 의왕(懿王)은 숙부가 조카를 예위로 삼았으니, 이것은 모두 변례입니다. 그러나 이미 춘추의 정해진 제도와 주자의 정론이 있으니, 지금 이 문제에 대하여 달리 의논할 수 없습니다. 예위가 변하였으면 4대(四代)를 따져서 2소와 2목을 갖출 따름이니, 이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국통(國統)을 존중하여서인 것으로, 사친(私親)이 있더라도 감히 여기에 참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식의 계사를 보고는 진유(眞儒)의 명문(明文)을 듣고자 하셨는데, 호 문정공(胡文定公)과 주자는 진유가 아니며, 《춘추전》과 《주자도설(朱子圖說)》은 명문이 아닙니까. 전하께서는 난을 다스려 반정하시어 위로 선조를 계승하였으니, 고례로 따져보면 선조가 예(禰)가 됨이 마땅하고 성종은 4대 가운데 있어서 조천하지 않아야 합니다. 속호(屬號)를 논한다면 고조는 아니나 사당으로 말하면 고조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지금 만약 속호를 고쳐서 성종 이상 열성의 축사와 형식을 똑같이 한다면, 변례이지만 정도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허심탄회하게 살피셔서 허락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추숭의 가부를 중국에서 결정한 연후에야 소목에 대한 일을 의논하여 정할 수 있다. 지금 미리 의논할 것이 아니다. 대개 고·증·조·예가 2소 2목이 되는 것은 예의 정도요, 희공과 민공, 효왕과 의왕이 부자의 의리가 있다는 것은 예의 권도이다. 정도를 버리고 권도를 따르는 것은 옳지 않다."
하였다.
김수현(金壽賢)을 대사간으로, 김세렴(金世濂)을 집의로, 민광훈(閔光勳)을 정언으로, 김반(金槃)을 응교로, 김남중(金南重)을 교리로 삼았다.
5월 14일 정해
대사헌 김수현, 집의 김세렴, 장령 이유달, 지평 조공숙 등이 삼사가 힘써 간쟁하였으나 한번의 윤허도 내리지 않아 직기(直氣)가 꺾이고 온 나라가 놀라게 된 것은 모두 신같은 자들이 자리에 있어서라는 이유로, 지평 유경집은 병으로 인하여 사직단자를 올렸는데 정원에서 저지를 당했으니 그대로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정언 민광훈은 정언 이현과 더불어 상피 관계라는 이유로 모두 체직해 주기를 청하였다. 옥당이 처치하여 아뢰기를,
"김수현·김세렴·이유달·조공숙 등은 별로 잘못이 없으니 출사하게 하소서. 유경집은 교묘히 회피하려는 의도가 있고, 민광훈은 상피로 응당 체직하여야 하니, 함께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정원에서 상이 감기가 있다는 이유로 친제(親祭)를 물려 행하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재해가 혹심하고 날짜가 이미 정해졌으니 물려 행하기가 곤란하다."
상이 하교하기를,
"지난번에 진전(眞殿)에 재앙이 생겨 내가 놀라고 두려워하여 구언(求言)하는 하교를 내려 날마다 구제하기를 바랐었다. 그런데도 입을 다무는 것이 습성이 되어 바른 말을 아뢰지 않으니, 내가 부덕하여 보필할 만한 가치도 없다는 것인가, 아니면 하늘의 운수 탓이라 어찌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인가? 지금 또 한재가 이렇게까지 심하여 백성들이 굶어죽게 생겼다. 나에게 죄가 있는 것이지 백성이 무슨 잘못이 있는가. 생각할수록 부끄럽고 두려워서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
아, 임금이 덕을 닦지 못하여 천재지변이 일어나게 해 놓고는 다시 재앙이 사라지길 빌어 하늘의 은택을 바라고 있으니 어설픈 일이다. 그러나 사정이 절박하여 남단(南壇)에 친히 빌고자 하니, 모든 제관(祭官)과 집사들은 각각 정성을 다하여 위로 천심을 감격시키라. 또 해조로 하여금 빈곤한 자를 구제하고 원통한 일을 풀어주고 현능한 자를 등용토록 할 것이며, 아울러 백성들에게 편리한 모든 일을 계획하여 아뢰어 근심스럽고 답답한 백성들의 마음을 풀어주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삼가 성지를 받아 보니 두려워하는 뜻과 뉘우치는 마음이 말 밖에 넘치니, 이것은 참으로 하늘에 응하고 백성을 아끼는 성인의 훌륭한 거조입니다. 현재 원통하고 답답한 일을 하나하나 열거할 수는 없지만, 온 나라의 인정을 알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유신들은 차자를 올렸다가 죄를 입고, 대신들은 준엄한 비답에 불안해 하여 상하가 틈이 벌어지고 백성들의 마음이 답답하니, 5월에 서리가 내리고 반 년이나 가뭄이 계속되는 것이 어찌 그 까닭이 없겠습니까. 성상께서는 즉시 뉘우치는 마음을 인하여 뜻을 거스른 유신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외정(外廷)의 공론을 따르소서."
하자, 답하기를,
"몹시 가물고 서리가 내린 것은 한두 명의 유신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미 원통하다고 한다면 크고 작은 것을 어찌 가리겠는가. 정청(庭請)을 처리한 일도 재앙을 부른 것과는 상관이 없는데 억울하다고 말들을 하니,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 이행원(李行遠) 등은 모두 죄를 용서해 주고, 추숭하는 일은 우선 주청하지 말고 조용히 강정(講定)하라."
하였다.
5월 15일 무자
경상도 동래 등읍과 전라도 흥양(興陽) 땅에 4월부터 5월까지 저녁마다 서리가 내렸다.
상이 남교(南郊)의 단소(壇所)에 거둥하여 재숙(齋宿)하고 이튿날 새벽에 의식에 따라 기우제를 지냈다.
5월 16일 기축
이명한(李明漢)을 대사간으로, 김반(金槃)을 집의로 삼았다.
5월 17일 경인
승지에게 명하여 전옥서에 가서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게 하였다.
5월 18일 신묘
상이 이귀가 올린 예를 논한 차자를 의정부에 내려 대신들로 하여금 강정하게 하였다. 영의정 오윤겸이 아뢰기를,
"국가의 막중한 전례는 반드시 대신들이 자리에 있을 때 예관·대관들과 더불어 널리 상고하고 충분히 강론하여 마땅하게 되도록 하여야만 올바르게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좌상이 비어 있고 우상은 휴가중이어서 신만 홀로 남아 있으니, 곧바로 봉행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이 해창군(海昌君) 윤방(尹昉)과 함께 의논하여 아뢰어라."
하였다. 윤방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원임 대신이 신뿐만이 아닌데 의논에 참여하라는 명이 신에게만 내렸으니 사례에 어긋납니다. 명을 거두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 뒤에 윤방이 다시 오윤겸과 함께 상차하여, 상신들이 자리를 갖추기를 기다려서 널리 상고하고 충분히 강론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알았다고 답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공청 수사(公淸水使) 이경여(李慶餘)는 술에 취하여 실성한 채 형장을 함부로 써서 열읍에 폐를 끼치고, 각 고을의 전선(戰船)을 방납(防納)하게 하면서 배 한 척의 값을 강제로 쌀 3백 석으로 정하였으니, 파직시키소서."
하니,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5월 19일 임진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당초에 조정에서 세자 책봉의 주청을 동지 성절사의 행차에 아울러 보내기로 의논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예조가 승문원을 시켜 문서를 짓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추숭하는 대례를 근일에 강정하면 주청하는 일이 있을 것이니, 책봉의 주청은 우선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0일 계사
상이 주강에 자정전(資政殿) 남무(南廡)에서 《서전》을 강하였다. 【 가뭄 때문에 정전을 피하였다.】 강이 끝나자 동지경연사 장유가 아뢰기를,
"가뭄이 극심하여 상께서 두 번씩이나 친히 제사지냈으며, 간절한 분부를 내리신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비올 가망이 전혀 없어 백성들이 죽게 생겼습니다. 전번에 전례 문제로 조정의 신하들이 논집하여 상하간에 서로 버티고 있었는데, 상께서 천재 때문에 마음을 바꿔 공론을 따르셨으니, 신료들이 누가 감복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또 이어서 세자 책봉을 아직 주청하지 말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세자는 나라의 근본인데 책봉하는 일을 이같이 지체하니, 매우 타당치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재가 정말로 매우 극심하다. 그러나 정청(庭請)이 어찌 한재를 불렀겠으며, 추숭하는 예를 어찌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세자 책봉은 관계됨이 중대한데 어찌 중지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모든 일은 차서가 있다. 그런데 추숭하는 예에 대하여 경이 불가하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어찌 신 홀로 주장하는 것이겠습니까. 온 나라의 공론입니다. 제왕의 종통은 매우 엄격한데 만약 사은(私恩)으로써 추숭하여 사당에 들인다면 소목 가운데는 반드시 조천하여야 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어찌 매우 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선유의 정론에서 모두 증거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박지계(朴知誡)의 의견을 어떻게 여기는가?"
하니, 장유가 아뢰기를,
"신이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마는, 대개 그의 말은 《의례(儀禮)》 자하전(子夏傳)에 있는 ‘공자(公子)가 봉해져 국군(國君)이 된다.’는 구절의 주소(注疏)에 별묘를 세운다고 한 말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처음으로 봉해진 임금의 일입니다. 처음 봉해진 임금은 추숭할 수가 있으니 어찌 사당만 세울 뿐이겠습니까. 만일 계세(繼世)한 임금에게 적용하여 같게 하려 하면 안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삼대의 예에는 부합되지 않으나, 후세에 혹 남의 후사가 되어 추숭한 경우도 있다. 어버이를 위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그것이 크게 해롭지 않을 경우에는 대체적으로 후하게 보아주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도 중신들이 분노하니, 참으로 괴이하다."
하니, 장유가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이 어찌 감히 분노하는 것이겠습니까. 추숭하는 것을 불가하다고 하는 것은 종통이 중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람들이 모두 송헌(宋獻)의 글을 그르다고 하는데 그의 말이 옳은 듯하다."
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송헌의 말에 ‘나라를 받은 은혜가 없다면 마땅히 추숭하여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잘못입니다. 상께서 자전(慈殿)에게 명을 받아 손자로서 할아버지를 이었으니 어찌 나라를 받은 은혜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송헌은 우리 나라의 일을 모르는 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송헌의 말은 남의 후사가 되지 않은 경우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근래에 상의 사기(辭氣)가 불평스러워 상하가 막혔으니, 매우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혹 말이 과격한 실수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대개 학력이 부족하여 분한 마음이 없지 않아서이다. 모두 ‘소목은 이미 정해져서 바꿀 수 없다.’ 하고, 또 ‘고조 이상은 모두 고조라고 칭한다.’ 하니 어찌 근거없는 말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고조 이상을 모두 고조라고 한다는 설은 신도 그르다고 여깁니다. 성종 대왕은 조천해서는 안 되고 또 전날에 쓰던 말을 가지고 고조라고 범칭해서도 안 됩니다. 선유들은 왕통을 이은 순서로 소목을 하였으니, 역대의 의논이 일치하지는 않으나 《춘추전》과 주자의 《주묘제도(周廟制圖)》가 어찌 정론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친(四親)의 차례는 고·증·조·예이다. 어찌 원칙의 예를 버리고 변칙의 예를 취하는 것이 옳겠는가. 노 희공(魯僖公)과 민공(閔公)같은 일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형이 아우의 아들이 되고 숙부가 조카의 아들이 될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제왕의 승통은 언제나 상도만을 쓸 수는 없으니, 변칙적인 상황을 만나면 변칙을 쓰는 것도 상도입니다. 추숭하는 일은 사은(私恩)이고 종통을 잇는 일은 대의입니다. 사친(私親) 때문에 갑자기 조종을 조천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일 선조를 예(禰)로 삼는다면 속호(屬號)를 개칭해야 된다. 두 명의 고조가 있는 현재의 상황은 2백 년 이래로 없었던 일이다."
하였다. 장유가 아뢰기를,
"상의 입장에서 보면 성종이 벌써 친진이 되었지만 종묘 제도로 보면 4대가 되니, 속호만 고치면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추숭하는 예가 정해진 뒤에 입묘(入廟)를 의논할 수 있다. 나의 생각에는, 세종대왕은 공덕이 높기 때문에 친진되었더라도 조천하지 않았으니, 성종의 덕도 백성들이 지금까지 잊지 못하니 불천지주(不遷之主)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
하자, 장유가 아뢰기를,
"조천하는 일은 절대로 안 됩니다."
하였다.
5월 21일 갑오
흰 까마귀가 순천현(順天縣)에 나타났다.
한재 때문에 원통한 일을 심리하라는 하교가 있었다. 도승지 이성구(李聖求)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역적 공(珙)의 딸이 나이가 장성하였으니 속히 출가시키소서. 그리고 김상준(金尙寯)·박동량(朴東亮) 두 신하는 형(刑)을 받은 지 10년이 되어 법 적용이 고르지 못하고, 사인(士人) 허보(許𡧰)는 역적 허균(許筠)의 조카로 애매하게 삭과(削科)당한 채 아직도 연좌되어 귀양살이 중에 있습니다. 선왕조에 애매하게 삭방(削榜)된 사람은 모두 복과(復科)되었는데 이 사람만 은전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상의 몇 사람이 전교 중에서 말씀한 가장 원통한 사람입니다. 양찰하시어 채택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예조와 의금부에 내려 상의하도록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공이 나라에 죄를 졌으나 그 딸이 나이가 장성했는데도 배필이 없다 하니 어찌 가련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직까지 혼인을 하지 못한 것은 조정에서 금지하여 혼인하지 못한 것이 아니고 그 어미와 자식이 섬 속에 있으며, 사람들도 그와 혼인하기를 꺼려 그런 것입니다. 상소 가운데 조정에서 사족의 자제를 찾아 억지로라도 짝을 지어 주자는 것은, 일의 체모에 합당한 것인지 의문입니다. 그의 어미로 하여금 육지에 나와 구혼(求婚)하게 하고 관가에서 혼수의 비용을 주어 혼례를 치르게 하면, 처리하는 방법에 있어서 흠이 없을 듯합니다.
허보는 삭과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당초에 허균의 사위와 조카가 참방하였다는 말이 서울에 떠돌자, 대간이 사정(私情)을 쓴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논계해서 삭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독권관(讀券官) 이항복이 말하기를 ‘허보의 책문(策文)은 신이 직접 뽑은 것입니다.’고 했으니, 이것으로 보면 허균이 사정을 쓴 것이 아님을 대략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복과(復科)는 중한 일이므로 해조가 가벼이 의논할 수 없으니 대신과 의논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구혼(求婚)하는데 허락하지 않는 자는 관에 알려 처치하게 하라."
하였다. 대신 윤방·오윤겸 등이, 허보의 일은 일찍이 알지 못하는 일이라서 가벼이 의논할 수 없다고 아뢰니, 드디어 복과(復科)를 허락지 않았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박동량·김상준 등이 엄형 중에 화를 두려워하여 아무렇게나 한 말은 모두가 사실에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귀양간 지 벌써 10년이 되어 가니 상소 중의 법 적용이 고르지 못하다는 말은 타당성이 없지 않습니다. 지금 재해를 만나 원통한 일을 심리하는 때 사면하는 은전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들의 정상은 따라서 참여하기만 한 사람과는 다르니, 사면하지 말라."
하였다.
5월 22일 을미
호조 판서 김기종(金起宗)이 아뢰기를,
"백성들의 부역이 고르지 못한 것은 전정(田政)이 바르지 않기 때문이니, 양전(量田)하는 일은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상께서 미루기만 하시는 것은 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꼭 변통해야 할 것이 있으니, 시험삼아 공청도(公淸道) 한 도를 가지고 말해 보겠습니다.
좌도의 전안(田案)은 모두 계묘년에 측량한 숫자를 써서 그 등급이 4∼6등이 많고 우도의 왜란을 겪지 않은 연해(沿海)의 13고을은 임진년 이전의 전안을 그대로 써서 등급이 1∼3등이 많습니다. 그래서 좌도는 1결의 토지에 4, 5석을 파종하고 우도는 1결의 토지에 겨우 1석을 파종하는 데 불과하여 좌도의 백성들은 4, 5석의 곡식을 파종한 수확으로써 1결의 부역에 응하며 우도는 1석의 곡식을 파종한 수확으로써 1결의 부역에 응하니, 우도의 백성들이 어찌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좌도의 등급을 올리기가 어려우면 우도의 등급을 내리는 계책을 강구해야 하는데, 올리면 원망하고 내리면 편하게 여겨서 올리고 내릴 때 소요가 생기게 되어 시행하기가 사실 어렵습니다. 지금 우선 우도 홍주(洪州) 등 13고을의 등급을 내려서 백성들의 극심한 괴로움을 덜어주어야 합니다.
다만 염려는 그 등급수를 내리면 총 결수가 줄어들 것이니 이렇게 되면 백성에게는 이롭지만 나라에는 도리어 손해가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신기전(新起田)과 은결(隱結)의 수를 가지고 강등하여 줄어들게 되는 결수를 계산하여 보충한다면 나라의 세입은 전보다 감소되지 않고 백성들의 부역은 전에 비하여 조금 가볍게 될 것이며, 대단히 소요스러운 폐단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 만일 신기전과 은복(隱卜)이 드러나는 다과에 따라 차차 그 등급을 헤아려 내린다면, 결복수(結卜數)가 감해짐에 따라 세금을 내는 것도 가벼워질 것입니다. 가령 감축할 만한 수를 계산하여 등급을 내려서, 신기전을 가지고 그 감축된 수를 보충해 나갑니다. 그렇게 하여 경오년의 시기전(時起田) 수를 잃지 않도록 1년에 얻은 결수로 줄어든 숫자를 채워나간다면, 2년도 채 되지 않아서 완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제대로 시행되느냐의 여부는 각 고을 수령들이 잘 조처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이밖에 경상좌도의 몇몇 고을과 경기의 인천·안산 등읍도 평시의 전안(田案)을 써서 등급이 매우 높아 백성들의 원망과 괴로움이 많으니, 변통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선은 충청우도에 시험해 보고 점차로 다른 지역에도 거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등급을 올리고 내리는 일은 관계되는 바가 크니 대신에게 물으라."
하였다. 오윤겸 등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공청좌·우도의 전결이 공평치 않아 괴롭고 수월한 것이 현격하게 다른 상황은 신도 들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해조의 계사를 보니, 백성의 숨은 고통을 통찰하고 모두를 자세히 참작하여, 전결(田結)이 감축되는 수를 보충하고 또 백성들의 소요스러운 걱정도 없게 하였습니다. 해조의 공사에 의거하여 시행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여이징(呂爾徵)이 형방 승지로서 입시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고의로 법을 범한 사람은 작은 죄라도 반드시 용서하지 않고 실수로 법을 범한 사람은 큰 죄라도 용서한다.’고 한 이 말은 가장 중요한 말이니 임금이 몸소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 억울하게 죄를 받은 자가 있으면 어찌 형벌을 쓰는 도에 크게 손상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분별하기가 매우 어렵다."
하니, 여이징이 말하기를,
"학문을 잘해서 환하게 이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다음에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지금 심리하는 날을 당하여 옥에 갇힌 자가 80여 인이요 계복(啓覆)한 사람도 많으니, 속히 처리하여야지 오래도록 옥중에 체류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계복한 자는 논죄할 때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5월 23일 병신
강원도 강릉에 5월에 서리가 내려 벼가 상했다.
승평 부원군 김류가 상차하여 체찰사와 내국(內局)의 소임을 체직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내의 제조(內醫提調)만을 체직시켰다.
5월 25일 무술
간원이 이수백(李守白)·기익헌(奇益獻)을 석방하라는 명을 거두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들은 용서할 만한 점이 있는 듯하니, 지금 석방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하였다. 사흘 동안 연계하니, 답하기를,
"대신들에게 물어 처리하겠다."
하였는데, 이귀가 상차하여 명을 거두지 말기를 청하니, 상이 아울러 대신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다.
5월 26일 기해
관향사(管餉使) 박추(朴簉)가 청하기를,
"백성들로 하여금 원에 따라 공명첩의 값을 납부하도록 하되, 60세가 안 된 사람은 역(役)이 있고 없고를 막론하고 원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응모를 허락하지 말고, 다만 60세 이상으로 늙어 한가하게 노는 자로 하여금 응모하여 물건을 납부하게 하소서. 그러면 국가가 헛되이 정군(正軍)을 잃는 폐단이 없고 군량과 흉년을 구제하는 데는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근래에 여러 궁가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멋대로 작폐함이 날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어제 본부에서 음사(淫祀)하는 무당을 잡아왔는데, 능원군(綾原君) 이보(李俌)가 궁노들을 풀어 금리(禁吏)의 어미와 처 및 장모까지 잡아다가 함부로 매질을 하였습니다. 이런데도 징계하지 않으면 법을 집행하는 관리가 수족을 놀릴 수가 없게 되고 국가의 법령도 이로부터 무너질 것이니, 능원군 이보를 파직시키소서."
하니,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書傳)》을 강하였다.
5월 28일 신축
유성이 하고성(河鼓星) 아래에서 나와 동방으로 들어갔다.
헌부가 아뢰기를,
"능원군 이보는, 전번에 대간들의 논의가 발한 뒤에 상께서 추고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마땅히 문을 닫고 가만히 있으면서 두렵게 여겨 뉘우쳐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더욱 성을 내어 서리(書吏)의 어미와 처를 고문하면서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이보가 신분이 귀하다 하더라도 한 사람의 신하일 뿐인데, 나라의 기강이 달린 문제를 어찌 이렇게 한단 말입니까. 심상히 추고하고 말 것이 아니니 파직하소서. 그리고 궁노가 방자하게 작폐한 것은 정상이 더욱 가증스러우니, 일을 맡은 숙노(稤奴)도 유사로 하여금 가두고서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보는 파직할 필요 없다."
하였다.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부제학 최명길이 나아가 아뢰기를,
"이수백·기익헌 등의 일을 상께서 대신들에게 물어 처리하겠다고 하였는데, 지금 들으니 이귀가 상차하여 석방하기를 청하였다고 합니다. 그 말이 소견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수백 등은 위협에 따른 무리가 아니라 이괄(李适)을 부추긴 자입니다. 이괄의 형세가 궁하게 된 뒤에 이르러서는 이수백이 아니라 하더라도 어찌 목을 베어 바치는 자가 없었겠습니까. 저들의 앞 일을 보장할 수 없으니 경솔하게 석방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은 반드시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었을 것이다."
하니, 참찬관 이기조(李基祚)가 아뢰기를,
"기익헌은 적소(謫所)에 있을 적에 방자한 일이 자못 있었다고 하니, 사람됨이 이같으면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튿날 대신들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법관의 의논은 이와 같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때 죽이지 않은 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지금 사면을 내리는 날을 당하여 석방하는 가운데 포함시킨 것은 상의 심려가 보통이 아닐 것이니, 신들은 다른 논의를 하지 않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인조실록25권, 인조 9년 1631년 7월 (1) | 2025.12.29 |
|---|---|
| 인조실록24권, 인조 9년 1631년 6월 (0) | 2025.12.29 |
| 인조실록24권, 인조 9년 1631년 4월 (1) | 2025.12.29 |
| 인조실록24권, 인조 9년 1631년 3월 (1) | 2025.12.29 |
| 인조실록24권, 인조 9년 1631년 2월 (0) | 2025.1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