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4권, 인조 9년 1631년 6월

싸라리리 2025. 12. 29.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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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계묘

상이 하교하였다.
"한재가 이와 같으니 약방의 향온(香醞)과 날마다 내리는 술을 각 전(殿)에는 보내지 말라."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 주고(酒誥)편을 강하였다. 부제학 최명길이 아뢰기를,
"술에 빠지는 일은 고금의 공통된 근심거리인데, 근래 사대부들 사이에 이런 습성이 있으니 어찌 염려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덕을 잃고 품위를 손상할 뿐만 아니라 끝내는 그 몸을 망치는 데 이른다. 그런데 심한 자는 가는 곳마다 술을 찾으면서 구차한 것도 따지지 않으니 어찌 염치에 손상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손님을 접대하고 제사를 지내는 데 술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 화가 매우 크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여염간에 잔치를 하는 자가 매우 많은데, 심지어 외방 사람들 중에는 이런 흉년을 만나서도 살림은 헤아리지 않고 먹고 마시는 것을 일삼는다고 하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찍부터 금령이 있었는데도 그 폐단이 이같으니, 정원은 다시 경계시켜 금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이처럼 가뭄이 극심한 날에 대군의 집을 짓는 공사가 있는데, 외간에서 모두 때가 아니라고 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혼인한 뒤에 집이 없어서는 안 되니 공사를 정지할 수는 없지만, 그 칸수를 줄여서 민정(民情)에 부응해야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번에 대간의 계사로 인하여 수십 칸을 줄였는데, 가뭄이 이같으니 결국 공사를 중지시켜야 하겠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노비도 서울에 있는 각 관청의 하인으로 뽑아 준다고 하는데, 만약 그렇게 한다면 각 관청이 꼴사납게 될 것입니다. 외방에도 노비가 있는데 하필이면 각 관청의 노비로써 뽑아 준단 말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이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에 각 관청마다 한 사람씩으로 정해서, 그 숫자가 수십 명에 불과하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근일 여염간에는 장사와 빚을 거두는 폐해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여러 왕자들이 전택(田宅)을 점유하고 백성들에게 해를 끼쳐 원성이 길에 가득한데, 상께서 어떻게 모두 살필 수 있겠습니까. 선왕조에서는 왕자·대군들이 대간을 두려워하였고, 임해군의 숙노(稤奴)는 여러 번 법사에서 죄받았습니다. 지금의 왕자군은 모두 숙부의 항렬입니다만, 국가의 법금이 지엄하니 어찌 그들의 폐단을 알면서 막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김남중(金南重)은 아뢰기를,
"여염 사람들이 빚을 받을 수 없으면 그 문권(文券)을 왕자군의 집에 넘겨 줍니다. 그러면 가두고 독촉하는데 사람들은 감히 따지지도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른 왕자는 이같지 않을 것인데, 그 중에 경평군(慶平君)은 실성한 사람이다. 그리고 문권을 넘겨 주는 자는 법사에서 치죄하되 사죄(死罪)로 처리하라."
하였다.

 

6월 2일 갑진

조종호(趙廷虎)를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삼았다.

 

6월 3일 을사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부제학 최명길이 나아가 아뢰기를,
"대신은 일반 관원과 다릅니다. 단지 예를 의논한 것이 상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김류를 견책하시며 조금도 용서해 주지 않으시니, 대신을 대우하는 도리가 어찌 이같습니까. 상께서 만약 사관을 보내어 그를 불러 처음과 같이 대우하신다면, 이것은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일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박동선(朴東善)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6월 4일 병오

평안도 성천부(成川府)에 크게 우박이 내렸다.

 

간원이 아뢰기를,
"불필요한 관직을 도태시키고 사치스러운 비용을 줄이며 대군의 집 칸수를 줄이고 궁노들의 작폐를 금하여 하늘에 답하는 성실을 보이고, 삼남의 조세를 감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논한 것이 매우 좋은 일이나 이 일에 대해 묘당에서 지금 적절히 처리하고 있으니, 우선 변통하기를 기다리라."
하였다. 이튿날 간원이 다시 아뢰기를,
"애통하게 여기는 교서를 내리고 진휼할 방법을 유시한 뒤에, 금년 전조(田租)의 반과 5결포를 감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행 호군(行護軍) 장현광(張顯光)이 상소하여, 속히 추숭을 의논하라는 명을 거두고 중국 조정에 먼저 주문하지 말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중국 조정에 먼저 주문하는 것은 타당치 못한 듯하기 때문에 정지시켰다."

 

6월 7일 기유

헌부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천하 국가를 차지한 사람이 검소로 흥하고 사치로 망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책을 상고해 보면 훤히 알 수 있습니다. 삼가 듣건대, 궁중 빈어(嬪御)의 복장을 찬란한 비단으로 하여 검소함을 숭상하지 않고 전날의 형태가 남아 있으며, 대군의 집을 칸수를 줄이라는 하교가 있었으나 사실상 별로 칸수를 줄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 팔도가 큰 가뭄을 당했는데도 집을 짓는 공사를 중지하지 않아 어영차 소리가 끊이지 않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혼례의 시기가 멀지 않아 새집을 반드시 기한에 맞게 이루지 못할 것이니 우선 공사를 정지시켜 후일을 기다리거나 다시 칸수를 줄여 백성의 힘을 여유있게 하소서. 혼례 때의 등록(謄錄)은 조금 감하기는 하였지만 형식적이고 쓸데없는 것을 다 변통하지는 않았으니, 신들은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상께서 결단해서 크게 감축하여, 하늘의 견책에 답하고 검소한 덕을 숭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궁인들의 복색이 찬란하다고 하나 착용하는 품복(品服)은 옛부터 모두 그랬으니, 지난날의 습성을 따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여염의 곳곳에 좋은 집이 연이어 서 있고 낮은 벼슬아치들이 거처하는 집도 50∼60칸이나 되는데, 대군에게만 감축하기를 계속 청하니, 그 뜻은 좋으나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혼례에 소용되는 물품도 매우 검소하게 하였는데 논의가 이와 같으니 참작하여 감축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8일 경술

평안 병사 유림(柳琳)이 치계하기를,
"호차(胡差) 중남(仲男)·아지호(阿之戶) 등이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한(汗)의 편지를 가지고 와서 가산(嘉山) 서쪽을 곳곳마다 막았습니다. 이에 대소변방의 보고를 전해 듣지 못하니 매우 염려됩니다."
하고, 평안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치계하기를,
"호인들이 선언하기를 ‘조선에서 배를 빌려 가도(椵島)를 들어가 습격하면 노략질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지금 검산(劍山)에 있으면서 정주(定州) 등 6개 고을의 수령 및 여러 장수들과 함께 모여 군사를 호궤(犒饋)하였는데, 그대로 있으면서 성을 지키고자 합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속히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을 보내되, 훈련 도감의 마군(馬軍) 50명, 금군(禁軍) 50명, 포수 4백 명을 거느리고 평양에 가서 머물러 책응하도록 하고, 또 계속해서 해서(海西)의 병력을 동원하소서. 그리고 배를 빌려주는 일은 결단코 따르지 마소서. 이밖에도 허다하게 아뢸 일이 있으니, 등대(登對)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체찰사가 아직 출사하지 않아 회의를 하지 못하고 있으니, 속히 패초(牌招)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숭정전(崇政殿)에 납시어 손 군문(孫軍門)의 차관(差官)인 도사(都司) 왕순신(王舜臣)·이매(李梅)를 접견하였다.

 

상이 대신, 비국 당상, 삼사 장관을 인견하고, 묻기를,
"지금 적의 상황이 어떠한가?"
하니, 영의정 오윤겸이 아뢰기를,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모두 ‘우리 나라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요, 배를 빌려 가도를 습격하고자 해서 나온 것이다.’ 합니다. 배는 의리상 빌려 줄 수 없는데, 빌려주지 않을 경우 의외의 환란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감사가 검산(劍山)에 들어가 있어서 책응할 길이 없으니 부원수를 속히 보내야 하는데, 수하에 군사가 없으니 우선 해서의 군사를 조발해 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제도의 병마도 하유하여 징발하되, 먼 도의 군사는 갑자기 징발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각도로 하여금 수를 정하여 대기하게 하였다가 급한 일이 있으면 때맞춰 징발해야 한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어영군(御營軍)은 전부를 대기시키고 속오군은 수를 정해 차출하여 분부를 기다리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김기종(金起宗)이 아뢰기를,
"징발하는 일은 매우 중대하니 중남(仲男)이 돌아간 뒤에 하유해야 합니다."
하고, 최명길이 아뢰기를,
"적병들이 온 것은 반드시 우리 나라를 공갈하여 식량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니 중심부까지 꼭 들어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직 군사를 뽑는 일은 중지하고 먼저 하유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병이 국경에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 어찌 편히 있으면서 방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하교하기를,
"내구마(內廐馬)를 부원수 정충신에게 주라."
하였다.

 

6월 9일 신해

부원수 정충신이 출정하려 하는데, 상이 불러 보았다. 정충신이 아뢰기를,
"중남이 온 뒤에 차사(差使)를 가려 보내 한(汗)에게 답장을 보내면서 저들의 상황을 살펴보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사람을 잘 가려 쓰지 못하여 전부터 이 책임을 완수하고 온 사람이 드물어서, 사정을 꿰뚫어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부끄러운 욕만 끼쳤다. 경은 무사 중에서 합당한 사람을 알 것이다. 누가 맡길 만한 사람인가?"
하자, 정충신이 아뢰기를,
"이응징(李應徵)이 능력이 있고 글도 잘하니, 이 사람으로 부사(副使)를 삼아서 한번 써 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국에 말하라. 그리고 경은 지금 내려가면 어느 곳에 머무를 것인가?"
하였다. 정충신이 아뢰기를,
"평양과 순안(順安) 사이가 머물기에 마땅한 듯합니다. 소신의 수하에 군사가 없어서 깊이 들어가면 형세가 고립되어 위험합니다. 곧바로 안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안주에 들어가서 지키면 밖에는 원병(援兵)이 없을 것인데 어쩌겠는가?"
하자, 정충신이 아뢰기를,
"전날에 중국 장수 양호(楊鎬) 등이 모두 성에 들어가서 승리를 하였으니, 신도 안주에 들어가서 굳게 지키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쟁은 멀리서 헤아리기 어려우니 미리 작전을 계획하는 것은 안 되지만, 먼저 스스로 성에 들어가는 것은 옳지 않을 듯하다."
하였다.

 

6월 10일 임자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이 금천(衿川)에서 들어왔는데, 상이 승지를 보내 문안하고 쌀·콩·찬물(饌物)을 하사하였다.

 

차관 왕순신(王舜臣)이 손 군문(孫軍門)이 자문(咨文)한 뜻을 가지고 조총·동와(銅鍋)·운량선 1백 척을 사고자 하였는데, 조정에서는 그가 값으로 가져온 은을 돌려주고 조총 5백 자루와 동와 1백 구를 우선 허락하여 보냈다.

 

6월 11일 계축

호차(胡差) 중남(仲男) 등이 서울에 들어오려 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중국 사신과 서로 만날까 두려워하여 그로 하여금 한강 가에 나가 피하도록 하였다.

 

6월 12일 갑인

금나라의 차인 중남이 서울에 들어왔다. 비국이 아뢰기를,
"지금 한(汗)의 편지를 보니, 가도에 식량을 보급하는 일과 요민(遼民)들이 연안에 상륙한다는 두 가지 조항은 우리를 책망하는 것이고, 배를 빌리는 일과 군량을 요구하는 두 조항은 우리에게 바라는 것입니다. 지금 답하기를 ‘가도가 우리 나라의 걱정거리가 된 지가 오래 되었다. 다만 신으로 섬기는 의리와 우리를 살려 준 은혜 때문에 저버릴 수가 없어서 침략과 소요스러운 일을 당하더라도 원망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은 너희 나라가 아는 바요, 너희 나라도 허락한 바이다. 요민들이 연안에 상륙하는 문제는 약조에 실려 있는 것이 아닌데, 너희가 여러 차례 말을 하기 때문에 우리도 허락한 것이다. 지금 너희가 우리를 책망하는 것이 옳지만, 중국 사람들을 창칼로 상대할 수 없으며, 사람이 없는 변방 지역에 가끔 왕래하는 자들을 찾아서 쫓아내는 것도 형편상 어렵다. 이것은 왕래하는 너희들의 사신들도 아는 바다.
우리 나라는 본래 가난한데다가 전쟁을 치룬 이후로 더욱 탕진되어 우리가 살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어떻게 남을 구제할 수 있겠는가. 다만 섬 속의 사람들이 때로는 물건을 가지고 와서 쌀과 바꾸기를 원하면 우리 나라의 백성들도 절실히 필요하기에 간혹 교역하는 때가 있다. 너희 나라에 보내는 예단도 여기서 나오는 것이니, 진실로 숨길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이미 너희와 형제가 되었으니 성심으로 고하지 않을 수 없다. 형편상 부득이한 것은 너희도 양해하여야 한다. 우리가 중국에 대하여 부자(父子)의 나라인데 너희에게 배를 빌려 주어 중국 사람들을 죽이게 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 하늘을 저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부자간에 차마하지 못할 짓을 하는 자라면 형제간이라고 하여 차마하지 못할 짓을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만약 우리가 잔인하게 중국을 저버리고 너희 나라의 말을 따른다면 후일에 반드시 너희 나라에게 의심을 받을 것이다.
애당초 하늘에 고하고 맹세할 때 각각 국토를 지키는 것으로써 제1조를 삼았다. 우리는 너희 나라가 신의를 중히 여겨 하늘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청천강 서쪽 여러 고을에 풀밭을 개척하고 관사(官舍)를 지어 유민들을 불러모아 농사를 지을 계획을 한 것이다. 그런데 너희 나라의 군사가 뜻밖에 몰려 나와 우리 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놀라 도망쳐 농사의 시기를 놓치게 하였다. 이것이 우리를 침략한 것은 아니지만 향을 태우며 맹세한 뜻과는 어찌 위배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이미 너희와 형제의 나라가 되었으니, 너희들의 많은 군사들이 우리 경내에서 굶주리게 한다면, 이는 우리가 너희의 그릇된 일을 본받는 것이다. 그래서 약간의 쌀을 주어서 며칠간의 식량을 하도록 할 것이다. 이 뒤에는 돕고자 해도 힘이 미치지 못하니 너희는 속히 철수하여 돌아가서 약속대로 따라야 한다.’고 하여야 합니다. 이런 내용으로 승문원으로 하여금 미리 짓게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6월 13일 을묘

헌부가 아뢰기를,
"봉화(烽火)를 삼가고 척후(斥候)를 멀리 하는 것은 전쟁의 상법(常法)인데, 오랑캐의 기병이 갑자기 나오자 변방의 군리(軍吏)들이 알리지도 못하고 파발길까지도 모두 끊어졌으니, 기율이 떨어진 것과 절도사가 직무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 심합니다.
저들이 반드시 깊이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라고는 보장하기 어려운데, 관서 지방에서 믿을 곳이라고는 안주(安州) 한 성뿐으로, 방비하고 응변하는 책임은 오로지 주장(主將)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적병이 청천강에 접근한 지가 이미 십여 일이 되었는데도 보고하는 것은 적의 동태에 불과하여 일찍이 한 일도 기미를 살피고 이해를 논해서 조정에 알려 방어할 계책을 세운 적이 없으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싸움에 임하여 장수를 바꾸는 일은 옛사람이 경계한 것이니 평안 병사 유림(柳琳)에게 지금 무거운 형률을 쓸 수는 없으나, 그대로 두고 논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비국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처리하게 하든지, 아니면 글을 보내 엄하게 경계하여 지금 우선 죄를 용서해주니 앞으로 공을 세우라는 뜻으로 효유하소서. 그리고 어사를 양서(兩西)에 보내 싸우고 지키는 모든 일을 두루 신칙케 하여 소홀히 하는 걱정이 없도록 하소서.
변보(邊報)는 하루가 급한데 비국이 날마다 개좌하지만 파한 뒤일 때에는 시급한 일도 여러 당상에게 두루 고한 뒤에라야 상의하여 입계하니, 지체되는 폐단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유사 당상 한 사람으로 하여금 본국에 숙직하게 하여, 불시의 변보가 있으면 대신들에게 급히 고하고는 곧바로 회계하여 지체되어 제때에 일을 못하는 걱정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금나라 차인 중남 등이 조정에서 배를 빌려 주기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급히 나가 버렸다. 정익(鄭榏)을 보내 달래서 돌아오게 한 다음 구관소 당상(句管所堂上)이 잔치를 베풀어 접대하고 다시 배를 빌려 주지 못한다는 뜻을 말하니, 다시 대노하여 문지기를 떠밀고 나갔다. 비국이 낭청을 보내기를 청하여 녹번현(碌礬峴)에서 애써 그들을 만류하니, 금나라 차인들이 다시 돌아왔다.

 

정원이 아뢰기를,
"입지 포수 이덕탁(李德卓)이 와서 말하기를 ‘지금 금나라 차인이 국서에 대한 회답도 받지 않고 화를 내며 갔다고 들었다. 저 적들은 가도를 공략하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니고, 먼저 들어주지 못할 말을 하여 우리의 허실을 엿보고 돌아가려는 것이다. 지금 돌려보내면 화가 반드시 머지 않아 일어날 것이니 곧바로 구류(拘留)시키고 속히 군사를 동원하여 우리의 형세를 굳건히 해야 한다. 비록 미천한 말이나 전하께 아뢰어 주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상이 모욕을 당하는 이러한 때 나라를 위하는 강개한 말이 미천한 자에게서 나와 사람으로 하여금 기운이 솟게 하고, 또 그의 사람됨을 보니 나이는 젊고 용감하여 보통 미천한 자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미천한 자의 말이라도 상달해야 하겠기에 서계(書啓)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의 뜻이 가상하다. 해조로 하여금 상포(賞布)를 주게 하고, 뒷날 각별히 발탁해서 쓰게 하라."
하였다.

 

6월 14일 병진

간원이 아뢰기를,
"오랑캐와 화친하는 것은 애당초 약속이 지켜질 리가 없는 것인데, 지금 갑자기 우리 경내로 들어 왔습니다. 만일 계책을 부린다면 안주 이남부터 국중에 이르기까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절벽에 둘러 싸인 굳은 성보(城堡)도 없는데 가령 적병이 가도를 공격하는 것이 불리하여 군사를 돌리 경우, 그 화를 헤아리기 어려우니 방어책을 늦출 수가 없습니다.
부원수가 이미 안주에 들어가 한 성 안에 두 대장이 있게 되었으니, 알력이 생길 염려가 있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속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전라 좌수사 정봉수(鄭鳳壽)는 전날 적병이 침입해 왔을 때 홀로 고립된 성을 보존하여 평안도 백성들이 지금까지 칭송하고 있으며, 추로들도 두려워 꺼릴 것이니, 지금 그를 호남 지역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속히 불러 요충이 되는 한 성을 주어 서쪽 백성들의 소망대로 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병사(兵使)는 원수에게 통제를 받아야 되니 명령권에 알력이 생기는 일은 염려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서(李曙)를 보내서 서도의 군무를 대신하여 총괄하도록 청했으니 머지 않아 출발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봉수가 올라올 즈음에 사태가 발생하면 어쩌지 못할 것이니 부르는 것이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안주는 군사를 더 보낸 뒤에 정충신으로 하여금 성에서 나와 응원하게 하라. 이서는 보내지 말라."
하였다.

 

6월 15일 정사

비국이 아뢰기를,
"추신사(秋信使) 오신남(吳信男)이 지금 들어가야 되는데, 호차(胡差)의 말을 듣건대 ‘매번 이 사람을 보내니 매우 온당치 못하다.’고 합니다. 지금의 사정이 전일과 달라 따지고 처리할 일이 많이 있으니, 해조로 하여금 사리가 밝고 담력과 지략이 있는 사람을 가려 보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호차 중남과 만월개 등을 불러보고 금한의 안부만을 묻고 한(汗)의 편지 내용은 말하지 않았다.

 

금의 차인 중남과 만월개 등이 돌아갔다.

 

비국이 아뢰기를,
"원수(元帥)가 명을 받고 출정하고 또 제도(諸道)에 징병하는 거사가 있는데, 도처마다 식량이 떨어졌다고 보고합니다. 정묘년의 변란에 베를 내게 하는 법이 있었는데, 지금 등급을 나누어 쌀을 내게 하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일인 듯합니다. 주관하는 사람이 없으면 일이 쉽게 성취되기 어려운데, 이귀(李貴)는 임진란 이후로 여러 번 군사와 쌀을 모집하는 책임을 담당하여 매우 성과가 있었으니, 만약 이귀를 시켜서 주관하게 하면 저축하는 실효를 볼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근래 가뭄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기근에 허덕일 것이니 정묘년의 예를 다시 행할 수는 없다. 곡식을 거두는 일은 부당한 듯하다."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사신을 보내는 것은 관계됨이 매우 중합니다. 만약 전례에 따라 그대로 보내면 저들이 우리의 말을 들어 줄 리가 없으니, 먼저 특사를 보내는 것이 좋습니다. 정문익(鄭文翼)의 예에 의하여 별도로 당상 이상 한 사람을 가려 상사로 칭하고, 박난영(朴蘭英)·오신남(吳信男)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을 부사로 칭하여, 예물을 가지고 가서 ‘가도는 형세가 험하여 가벼이 침범하기가 어렵고, 우리 나라의 변방에는 저축미가 떨어져 계속 식량을 이어 줄 수 없다. 그러니 오래 머물면서 식량을 요구하는 것은 스스로 맹세를 어기고자 하는 것이다.’고 말하게 하소서. 그러면 이 일로 인하여 철수시킬지도 모릅니다."
하니, 답하기를,
"계속 특사를 보내는 것은 온당치 못한 듯하니, 별도로 문관을 가려 추신사(秋信使)라 칭하여 속히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6월 17일 기미

간원이 아뢰기를,
"유림(柳琳)은 국가의 막중한 소임을 맡았는데, 미리 가속들을 성 밖에다 두었다가 일이 다급해지자 벽지 고을로 옮겨 보냈으니, 성을 굳게 지킬 뜻이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림이 평상시에는 멋대로 굴다가 난에 임해서 겁을 내는 꼴은,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본도의 감사를 시켜 실상을 조사해 중률로 다스리소서.
전 파주 목사(坡州牧使) 양귀생(梁貴生)은 몰래 고을 비(婢)와 간통하여 그의 집에서 묵자, 그 남편이 분을 못 이겨 관가의 창고에 불을 놓아 수백 석의 곡식을 재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를 국문하여 죄를 정하고 그 곡식을 모두 징수토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고 양귀생은 추고하라."
하였다. 그 뒤에 비국이 아뢰기를,
"유림이 처자를 성 밖에 둔 자취는 조사할 때 확실히 드러났으니,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배를 빌려 달라는 조목은 지금 다시 의논할 것이 없으나 식량은 이미 허락하였으니, 저들이 만약 이로 인하여 내놓기를 요구하면 형편상 그들이 요구를 모두 들어줄 수 없습니다. 금번의 국서는 전례에 따라 소식을 보내되 별지로 알리기를 ‘우리가 이미 너희와 형제의 나라가 되기로 하였으니 마음에 품은 바를 말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너희가 정묘년의 싸움에 승승장구하고서도 씻은 듯이 마음을 바꾸어 온 나라의 생령(生靈)을 온전하게 해 주었으니 매우 좋은 뜻이었다. 우리가 원수처럼 여기던 마음과 유감을 풀고 형제가 되기를 약속한 것은, 너희 나라의 높은 의리를 가상히 여겨서일 뿐만 아니라 온 나라의 생령을 위했기 때문이다. 지금 너희가 신의와 맹약을 지키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국경을 침범하여, 청천강 이북의 백성으로 하여금 일시에 놀라 흩어지게 하였으니, 우리 나라가 유감이 없을 수 없다. 너희 군사가 이미 멀리 나왔으므로 우리가 식량을 대주지 않으면 구제될 수 없겠기에, 약간의 식량을 주어 지탱해 나가도록 한 것이지 본래 오래도록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너희 군사가 만약 오래 머물면 우리 나라는 자연히 지탱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무릇 사람에게 지탱할 수 없는 일을 요구하면서 나는 다른 뜻이 없다고 하면, 어찌 이치에 닿겠는가. 너희가 만약 하늘을 어기고 맹약을 파기할 뜻이 없다면 속히 군사를 돌려 처음의 약속을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고 따르기 어려운 말을 고집하여 잘못을 우리에게 돌린다면 우리도 달게 받을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목(李楘)을 공주 목사로 삼았다. 이목은 오래도록 후설(喉舌)의 자리에 있으면서 일에 따라 바로잡았는데, 이때 특별히 이러한 명이 있자 듣는 자들이 놀라고 탄식하였다.

 

6월 18일 경신

상이 영부사 이원익(李元翼)을 인견하였다. 이때 이원익의 나이 85세였는데 금천(衿川)에서 변란을 듣고 조정에 들어오니, 상이 불러 본 것이다. 이원익이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자 젊은 환관을 시켜 부축하여 앞으로 나오게 하고는 상이 이르기를,
"나라에 변란이 있으면 경은 꼭 들어오니 더없이 고맙고, 경에게 의지하고픈 마음도 없지 않다. 저 적들이 우리의 경내를 억압하고 철수할 기미가 없으니,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평소에 미리 방비하지 못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으니 어떤 방법으로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하삼도의 군사는 믿을 수 없으니 서울의 정병을 속히 조발하여 보내소서. 또 어영군은 조발을 허락하지 않아 사람들이 모두 불쾌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나라의 존망이 이번 거사에 달려 있으니 상께서 진작시키는 일을 하지 않으면 누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 하겠습니까. 또 저들이 노략질을 한다면 대응해야 되지만 우리가 먼저 공격하는 것은 불가한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도 먼저 공격하려는 것은 아니다. 서울의 군사는 이미 1천여 명을 보냈다."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삼남은 나라의 근본입니다. 만약 불행하여 적기(賊騎)가 쳐내려와서 대가(大駕)가 강도(江都)로 들어간다면, 호령이 행해지지 않고 인심이 안정되지 못할 것인데 불순한 무리들이 안에서 일어나면 그 근본이 쉽게 흔들릴 것이니, 매우 염려됩니다. 먼저 체찰사를 보내어 인심을 수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좋은 말이다."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일찍이 선왕조 때에는 사변이 있으면 죄의 경중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사면해 주었기 때문에, 감격하여 보답을 꾀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지금 이런 일을 시행하였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왕조 때에 지금과 같은 중죄인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하였다.

 

6월 19일 신유

지평 심연(沈演)이 상소하기를,
"중문(重門)을 크게 열어 놓고 편전에 납시어, 날마다 대신·삼사 및 비국의 제신들과 시무를 강구하여 일이 잘 되도록 계획하소서. 적을 방어할 계책과 나라를 살릴 꾀를 가진 자는 귀천을 막론하고 반드시 들어와 고하게 하소서. 식량을 적에게 주는 실책을 깊이 징계하고 와신상담하는 뜻을 분발하여 속히 회답사를 보내는 일을 정지하고 적을 토벌하는 의논을 결정하소서."
하니, 상이 그 말을 깊이 받아들이고 곧바로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삼가 상소의 내용을 보건대 비분강개로 가득차 있습니다. 신들의 뜻도 화의(和議)만이 믿을 만하다 여겨 일부러 일을 흐릿하게 하자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변란이 뜻밖에 생겼는데 변방의 방비가 형편없어 싸움을 하려 해도 병마가 모이지 않고 방어를 하려 해도 군량의 저축이 완전하지 못하므로, 부득불 이렇게 기미책(羈縻策)을 쓰는 한편 격문을 보내 팔도의 군사를 모아 차례로 지원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또 묘당이 원융(元戎)을 차출할 의논을 한창 하고 있으니, 여러 군사들이 모이기를 기다려 원수(元帥)를 내려 보내서 기회를 살펴 변란을 제어하도록 계책을 쓰려는 것입니다. ‘편전에 나아가 신하들을 접견하여, 계책을 강구해서 환난을 막아야 한다.’ 등의 말은 모두가 약석이 되는 것이니 성명께서 유념하여 행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6월 20일 임술

헌부가 아뢰기를,
"사람을 쓰는 데는 내외 경중의 구분이 있으니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주 목사 이목(李楘)을 특지로 제수하셨는데, 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겠으나 이목은 오래도록 경악에서 모시면서 도움이 많았습니다. 또 후설의 자리에 있다가 갑자기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이 있으니, 정체(政體)가 거꾸로 된 것이 매우 심합니다. 개차를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전에 정호서(丁好恕)를 영일(迎日)에 귀양보냈는데 황주(黃州)의 백성들이 상소하여 신원하니, 금부가 회계하기를,
"정호서는 정묘 호란 때에 한 도의 주장으로서 성을 버리고 지키지 않았으니, 군율로 논하면 사죄(死罪)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안주(安州)가 무너지고 평양이 무너져서 적들이 파죽지세로 몰려오자 황주성을 지키던 군사들이 소문만 듣고도 기가 죽어 한꺼번에 무너져 흩어졌으니, 백면서생인 정호서가 어떻게 고립된 성을 지키면서 기세가 등등한 적과 대항할 수 있었겠습니까. 죄는 면하기 어려우나 정상은 용서할 만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6월 21일 계해

상의 별좌(尙衣別坐) 이정방(李廷芳)·이한(李澣) 등이 상소하여 적(賊)을 치자고 청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6월 23일 을축

김시양(金時讓)을 팔도 도원수로 삼았다. 상이 비국에 묻기를,
"원수는 별장에 비할 바가 아닌데 어찌하여 품하지 않고 갑자기 차출하였는가? 전례가 이와 같은가?"
하니, 회계하기를,
"변보를 들은 이래로 묘당에서는 원수를 차출하는 의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체신(體臣) 김류가 신등과 함께 상의하기를, ‘김시양을 우선 부체찰사로 칭하였다가 다시 일의 형편을 보아 칭호를 고쳐 서로(西路)에 출진(出鎭)하도록 하자.’ 하였습니다. 이것이 본래 정한 계획이었는데, 근래에 서방의 변보가 전과 다르고 각도의 군사를 점검하여 보낼 날이 점점 가까워지므로 통솔할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되겠기에, 체신과 함께 상의하여 입계한 것입니다. 전례의 유무는 신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6월 24일 병인

동지사 고용후(高用厚)가 경사(京師)에서 돌아왔다. 홍무(洪武) 초년에 우리 나라가 부험(符驗) 7부를 주청하여 사신들이 입조할 때마다 가지고 가서 표신(標信)을 삼았는데, 유간(柳澗)·박이서(朴彛叙)·윤안국(尹安國)이 배가 침몰했을 적에 3부를 잃어버렸다. 고용후가 가서 보충해 줄 뜻을 아뢰어 허락을 받고는 그 일을 자랑하고자 하여 치계하기를,
"신이 삼가 부험을 받아 거듭 봉하여 싸가지고 귀국합니다. 중국에서 부험을 반사한 것은 홍무 이후에 처음 있는 일일 뿐 아니라, 그 비단 주머니에도 황제성지(皇帝聖旨)란 네 글자가 있고 또 연호를 써서 옥새를 찍었습니다. 조정에서는 흠사한 은전을 받는 데 특별히 강정한 의식 절차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예조로 하여금 상의하게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부험은 칙서를 받는 것과 비교되지 않으니 교외에서 맞는 절차가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정묘 이후로 사신이 줄지어 노중(虜中)에 왕래한 것은 모두 국가와 백성을 위하여 화호(和好)를 굳건히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 적병이 까닭없이 깊이 들어와 우리의 변방 백성을 노략질하고 창고를 약탈하니, 가도를 공격한다고 명목을 삼고 있으나 사실은 맹약을 어긴 것입니다. 한결같이 고식지계만 쓰고 부질없이 기미책을 힘써서는 안 되는데, 회답사를 갑자기 이때에 보내기로 하여 벌써 부사를 차출하였고 또 높은 직함으로 가정(假定)하였으니, 당당한 국가가 어찌 이같이 스스로 모욕을 당한단 말입니까. 저들이 군사를 속히 철수하느냐 않느냐는 한 사람의 사신이 가는 데 달려 있지 않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상의하여 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진하사 정두원(鄭斗源)이 중국에서 돌아왔다.

 

전에 정문익(鄭文翼)이 노중(虜中)에 사신갈 적에 원예단(原禮單) 이외에 별단(別單)의 수도 많았는데 【 청포 1천 필, 백면주 1백 필, 백목면 3백 필, 백저포 50필, 청서피 50장, 설화지 1백 권, 백면지 5백 권, 유둔 10부, 표피 5장, 화사주 70필이다.】 박로(朴𥶇)가 가려고 할 때 해조가 문익의 원단대로 보내고자 하니, 박로가 아뢰기를,
"저 적들은 물건의 다소로 예의 후박을 삼습니다. 지금 신이 가는 것은 전날과 사정이 다른데도 해조가 정문익 때의 원예단대로만 보내고 별예단은 일체 마련하지 않았으니, 어떻게 저들이 화를 내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국이 회계하기를,
"박로의 계청은 별단(別單)에 관련된 문제인데, 그때 별단으로 준 것은 포로들을 속환(贖還)하는 값이었지 별도로 보낸 예물이 아니었으니, 지금 그것으로 준례를 삼을 수는 없습니다. 위태로운 때 사신으로 가면서 이렇게 곤란해 하는 말을 하니, 당초의 청포(靑布) 5백 필 내에서 감한 2백 필을 그대로 주어 보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완(李浣)을 평안 병사로 삼았다. 이완은 계림 부원군(鷄林府院君) 이수일(李守一)의 아들이다.

 

옥당이 차자를 올리기를,
"우리 나라가 중국에 대해서는 군신의 의가 있고 부자의 도가 있는데, 지금 노적(奴賊)들이 우리의 서쪽을 짓밟고서 가도를 공격하려 한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도리에 있어서는 갑옷을 입고 달려가고 갓을 쓰고라도 달려가서 구원해야 될 것으로, 강약과 성패는 따질 것이 아닙니다. 변고가 난 이래로 신들이 비국의 모의를 듣건대, 아침에 창고를 털어 도적에게 주고 저녁에 사신을 보내 회답하니, 가슴 아픕니다.
그리고 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적병이 안주에 들어오면 군사를 쓴다고하는데, 이 무슨 말입니까. 안주 서쪽은 우리 나라의 토지와 백성이 아닙니까? 설령 당초의 맹약 중에 군사가 들어와도 금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더라도 이것은 말을 잘못한 것이니, 절대로 그 말을 지켜서 신의가 있음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각각 국경을 지키자고 맹약한 글에 먹물이 채 마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적병이 가득히 머무는 것을 좌시하며 도리어 ‘가도를 공격하는데 뜻이 있고 우리에게 맹약을 어기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니, 통곡할 만합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오늘부터라도 더욱 분발하시어 온 나라의 군사를 모두 동원하여 그들과 함께 싸우소서. 그러면 명분이 바르고 말이 사리에 맞아서 후세에 영원히 찬사가 있을 것이며 국세도 떨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6월 25일 정묘

회답사 박로와 부사 오신남이 조정을 하직하니, 상이 그들에게 빨리가라고 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전 파주 목사 양귀생(梁貴生)이 파직된 뒤에 3백 석이 창고에 남아 있다고 방백에게 보고하고서 회록(會錄)하기를 청하였는데, 회록은 원래의 회계(會計) 외에 별도로 비치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상을 속이고 자기의 죄를 감추려는 정상이 고을 여비와 간통한 것보다 심합니다. 그러나 대간이 지금 국문하기를 청했으니, 본조에서 감히 죄를 청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니, 양귀생을 잡아다 국문하라고 답하였다.

 

공조 판서 김신국(金藎國)이 차자를 올리기를,
"관서의 곤수(閫帥)는 관계됨이 매우 중하니 충분히 의논하여 신중히 선발해야 합니다. 서군(西軍)의 촉망과 묘당의 추중이 정충신 한 사람에게 있는데, 부월(斧鉞)을 주는 명을 갑자기 한 소장(小將)에게 내리니, 신은 진실로 의아합니다. 이완(李浣)은 아직 젖비린내가 나고 시험해 본 일도 없는데, 갑자기 막중한 소임을 맡기니 신은 위태롭게 여깁니다.
무릇 지키는 성을 밖에서 지원하는 일은, 반드시 세력이 성을 포위한 적보다 큰 뒤에야 공격하고 옆에서 견제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정충신과 윤숙(尹璛)의 군사는 합쳐 5천에 불과하니, 안주의 성곽이 포위된 뒤에 어떻게 강적을 상대하여 포위된 성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산군(山郡)에 군사를 거두고 멀리서 성원(聲援)하는 데 불과할 것입니다. 안주성이 한번 차질이 생기면 도하(都下)가 모두 놀랄 것이니, 그때는 정충신 같은 사람이 열이 있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정충신은 성 안에 있으면 공을 세우고 성 밖에 있으면 쓸 데가 없으니, 그가 성에 들어가기를 청했던 것도 이 점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이완은 나이가 젊고 명성과 품계가 낮았는데, 하루아침에 뛰어 올라 곤수의 책임을 맡았으니, 상례(常例)에 없던 일이라 혹 이의가 있을 것입니다. 처음 천거를 의논할 때에, 정충신은 숙장(宿將)이고 성적이 평소에 드러났기 때문에 첫째로 의망하고, 이완은 나이가 젊으나 담략이 있고 네 번이나 서군(西郡)을 거쳤는데 사람들의 촉망이 많다고 하기 때문에 둘째로 의망하였는데, 이완이 상의 재가를 받게 된 것입니다. 성상께서 뜻한 바도 있고 바깥에서 응원하는 소임도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그 뒤에 이완의 아비 이수일(李守一)이 상소하여 조괄(趙括)의 어미028)  를 끌어 말을 하니, 상이 따스하게 유시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부원수 정충신이 치계하였다.
"아지호(阿之好)와 마부대(馬夫大) 등이 안주에 와서 말하기를 ‘우리가 군사를 머물게 하고 싶지만 귀국에 폐를 많이 끼치므로 25, 26일 사이에 철수하여 돌아가겠다’고 했습니다."

 

6월 26일 무진

상이 하교하기를,
"금나라 군사가 철수할 기미가 있는 듯하니, 영남의 군사는 조발하지 말고 내년 방수(防守)하는 데 쓰는 것이 어떻겠는가. 1년에 두 번이나 징발하니 불공평하게 고생을 많이 하는 듯하다. 그 지역은 흉년이 타도보다 심하여 걱정이 없지않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참작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비국이 영남의 군사를 먼저 파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연평 부원군 이귀가 차자를 올려 싸우는 것과 지키는 것에 대한 편의를 진술하고 또 별도로 도독에게 근신(近臣)을 보내어 승리를 하례해야 된다고 하였다. 이에 김세렴(金世濂)을 문안관으로 삼아 가도에 보냈다.

 

6월 28일 경오

함경도 육진(六鎭)에 충재[蝗]가 있었다.

 

노병(虜兵)이 철수하여 돌아갔다. 이보다 앞서 가도에 있는 유흥치(劉興治)의 어미가 노중(虜中)에 있었는데, 노병이 유흥치에게 항복하라고 달래려 하였고 유흥치도 사신을 보내 항복을 약속하고서 노병을 빌려 동으로 우리 나라를 공략하려 하였다. 유흥치가 장도(張燾) 등에게 살해되자, 가도에 투항했던 달자(㺚子)가 다시 노중으로 도망쳐 들어가 말하기를 ‘유흥치가 피살되고 도중(島中)이 안정되지 못하였으니, 이때 한 부대의 군사로 가도를 습격하면 완전히 승리할 수 있다.’ 하였다. 그러자 한(汗)이 그럴 듯하게 여겨 일고산(一高山)으로 하여금 군사 1만 2천여 명을 거느리고 의주를 거쳐 급히 선천·정주·가산·철산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그리고 중남(仲男)·만월개(滿月介) 등을 차출하여 우리에게 배를 빌리게 하고는, 먼저 자신이 해상을 수색하여 11척을 얻어 신미(身彌)  【 섬 이름.】 선사(宣沙)  【 섬 이름.】  도치(都致)  【 곶 이름.】  등처에 나누어 둔(屯)을 치고 가도를 습격하고자 하였다.
그때에 도독 황룡(黃龍)이 가도에 와서 진을 지켰는데, 노병이 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장도(張燾)를 시켜 신미도에 가서 싸우게 하였다. 싸움이 조금 유리해지자 다시 대소 병선 1백여 척을 독려하여, 사포(蛇浦)에서 맞아 싸워 일고산과 우록(牛鹿) 두 장수를 참획하였는데, 죽은 호병이 매우 많았으며, 명나라 군사도 육지에 올라와 적의 수급을 다투다가 노병에게 기습을 당하여 사망한 자가 많았다. 중남 등이 돌아가자 호장(胡將) 등이 모두 말하기를 ‘조선이 배를 빌려 주지 않은 것은 참으로 대의에서 나왔다. 가령 배를 빌려 주었더라도 우리에게 이로움이 없었을 것이다.’ 하고 그날로 11척을 우리에게 직접 돌려주고 마병(馬兵) 2백여 기만 남겨 놓고 갔다.
노병이 청천강 이북에 들어왔을 때, 가산(嘉山)의 마을 사람들이 숲 속에 숨어 있다가 흩어져 있던 노병을 쳐죽였다. 노가 이를 알고 본읍 군수 방식(方軾)에게 힐문하였는데, 방식이 부원수 정충신과 병사 유림(柳琳)에게 말하여, 사형시킬 우리 도졸(逃卒)을 대신 죽여 보상하기를 청하였다. 정충신 등이 허락하였는데,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상소하여 안 된다고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자강(自强)하지 못하니, 이 뒤로 호인들이 죽으면 매번 인명으로 보상하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첫번째 이유입니다. 변민들은 모두 호병 죽이는 것을 통쾌하게 여기는데, 지금 우리 나라 사람을 대신 죽여 보상하면 변민들이 어떻게 그가 사형수인 줄 알겠습니까. 변민들의 적을 토벌하는 마음을 저해할 뿐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우리 나라의 사정을 호로가 모르는 것이 없는데, 뒤에 사형수를 대신 죽여 속였다고 말하면 신의를 잃을 것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이유입니다."
하였다. 조정에 미처 보고하지 못하였는데, 방식이 끝내 사형수를 호장에게 주어 죽이게 하니, 사형수가 호소하기를 ‘나는 호병을 죽인 사람이 아니다.’ 하자, 호장이 풀어주어 다시 가두었다. 뒤에 정충신 등이 몰래 방식을 시켜 그 사형수를 죽여서 보상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방식이 사형수를 대신 죽이기를 청했다 하더라도, 정충신 등은 사실에 근거하여 처리하지 못하였습니다. 정충신과 유림의 죄는 추고해야 되고 방식은 곤장을 쳐야 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9일 신미

강원도 고성(高城)에 큰비가 내렸다.

 

헌부가 아뢰기를,
"회답사 박로(朴𥶇)와 부사 오신남이 정계(停啓)도 하기 전에 갑자기 하직하였으니 추고하소서. 그리고 호인들이 피살된 것은 그들이 먼저 노략질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이것으로 힐문하는 단서를 삼더라도 우리의 입장에서는 사리로 깨우쳐야지, 꼭 호병을 죽인 사람을 찾아서 그들의 노여움을 풀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변신(邊臣)들이 사형수를 묶어 보내어 속임수로 미봉할 계획을 하다가 끝내 탄로되어 사단을 만들었으니, 망령스럽게 나라를 욕되게 한 죄는 엄중히 따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충신·유림·방식 등을 비국으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망령되게 지은 죄는 용서하기가 어렵지만 공적인 죄에 해당되기 때문에 양장(兩將)은 추고하고 방식은 잡아다가 곤장을 치기를 이미 청했으니, 다시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그대로 두라고 답하였다.

 

상이 제도(諸道)의 군사를 즉시 해산하여 농사 짓는 시기를 잃지 말도록 명하였다.

 

상이 가도의 차인 유격(遊擊) 백계안(白繼安)을 접견하였다. 처음에 가도에서 있었던 유흥치(劉興治)의 난에 죽은 자가 매우 많았는데, 우리 나라에서 교리 신계영(辛啓榮)을 보내 난에 죽은 장사들은 조제(吊祭)하고, 겸하여 임시 수장(守將) 장도(張燾)·심세괴(沈世魁) 등에게 예를 올렸다. 황룡(黃龍)이 도독으로 와서 ‘가도의 무리들은 철수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려 하지 않고 곧바로 유격 백계안을 차견하여 식량을 요청한 것이다. 상이 불러 보니, 계안이 말하기를,
"도중(島中)의 생령들이 대왕을 우러러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데, 위문관을 보내 죽은 자를 조상하여 유명(幽明)을 감격시키기까지 하셨습니다. 총진(揔鎭)이 몸소 사례하고자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서 나를 시켜 대신하게 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 호병들이 아직도 국경에 있어 깊이 들어올 걱정이 없지 않으니, 밤낮으로 도독이 구제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였다. 계안이 말하기를,
"총진도 귀국이 배를 빌려주지 않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적병이 만약 다시 침범하면 총진도 정병을 거느리고 협공하여 견제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손 군문(孫軍門)의 뜻은 섬 안에 있는 무리들을 철수시키고자 하는데, 황 총진은 ‘수만의 군중을 하루아침에 갑자기 철수할 수는 없다.’고 여겨서 그대로 머물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예물을 주라고 명하였다. 계안이 사례하며 절하고 물러갔다.

 

처음에 호병이 국경에 들어왔을 때 조정에서는 강도(江都)의 식량이 모자랄까 염려하여 독운 어사(督運御史)를 삼남에 보냈었다. 이때 와서 호조가 아뢰기를,
"지금 호병들이 철수해서 돌아가려고 하여 제도의 군사를 징발하기를 이미 중지하였으니, 삼남의 어사도 파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쌀도 이미 포구에 운반하여 배에 실은 것 외에는 다시 징수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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