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계유
오랑캐 군사가 북으로 돌아갔다.
경상도 안음현(安陰縣)에 6월인데도 서리와 우박이 교대로 내려 벼가 말라 죽었는데, 감사가 보고하였다.
7월 2일 갑술
유성이 규성(奎星) 아래에서 나와 벽성(壁星) 위로 들어갔는데, 색은 적색이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총융사 이서(李曙)에게 노비와 안구마(鞍具馬)를 내렸다.
이에 앞서 이서가 승려들을 사역시켜 남한 산성을 쌓으면서 백성을 모아 둔전(屯田)을 실시하여 수만 석이나 곡식을 수확하였고 기계를 마련한 것도 많았는데, 상이 하교하기를,
"이서가 남한 산성을 수축하는 역사를 처음부터 담당하였는데, 양식과 기계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 마련해 내었으니, 진실로 훌륭하다 하겠다. 각별히 논상하여 나의 뜻을 표하라."
하고, 마침내 노비 5인과 안구마 1필을 내렸다.
김수현(金壽賢)을 대사간으로, 조빈(趙贇)을 정언으로, 정봉수(鄭鳳壽)를 경상우도 병사로, 송영망(宋英望)을 전라좌도 수사로 삼았다.
7월 3일 을해
영돈녕부사 윤방(尹昉)이 상차(上箚)하기를,
"조정이 오랑캐 군대가 일단 물러갔다고 하여 기쁜 빛을 드러내면서 서로 축하하기만 하고 다시 미리 대비하지를 않으니 너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때를 당하여 대계(大計)를 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먼 도에서 군대를 징소(徵召)할 때 제때에 출동하지 못하거나 오는 도중에 있으면서 미처 도착하지 못하는 걱정이 늘 있습니다. 만일 대장 한 사람으로 하여금 전진하여 주차(駐箚)해서 형편에 맞춰 스스로 견고하게 하면, 우리가 본디 훈련시킨 군사가 있고 우리가 평소에 쌓아놓은 양식이 있으니, 어느날 갑자기 위급한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어찌 지난날과 같이 허둥대기까지야 하겠습니까. 또 생각하건대 현재의 큰 걱정거리는 대부분 장수의 권위가 가벼운 데에 연유하니, 사람을 가려 그에게 위임해서 재주를 펴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사(箚辭)는 참으로 소견이 있다.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과거에 등주 군문(登州軍門) 손원화(孫元化)가 사람을 보내어 은화(銀貨)를 가지고 와서 전선(戰船)의 매입을 요구하였는데, 조정이 오랑캐의 침략 때문에 들어주지 못했다가 이때에 이르러 전선 40척을 보내었다.
7월 4일 병자
이에 앞서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이 변보(邊報)를 듣고 입조하였다가, 이때에 이르러 물러나 돌아가면서 상차하기를,
"신은 늙어서 죽게 되었는데, 국가의 깊은 은혜를 받았어도 보답할 길이 없기에 대궐을 우러러보며 슬픔을 스스로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병이 들어 몸이 말을 듣지 않으므로 대궐 아래에 달려가 말씀을 드리지 못하고 곧장 촌사(村舍)로 돌아왔기에 황공하여 대죄합니다. 신이 지난번 등대(登對)했을 적에 몹시 늙어 정신이 혼란하고 아득하여 두서없는 말로 대략 어두운 견해를 진술하였습니다만, 이제 다시 거듭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국가가 일찍이 대비하지 않다가 적이 침입해오자 비로소 후회하였는데, 적이 물러간 뒤에는 또 다시 해이해지고 있습니다. 적이 지금 물러가기는 하였으나 조만간 반드시 침입해 올 것인데, 그렇게 되면 또 전날처럼 허둥대며 후회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진작하고 분발하여 한 순간도 잊지 마소서. 경영하던 모든 일은 모두 정지하여 그만두고 오로지 군대에 관한 일에만 뜻을 쏟아 정예한 군사를 불러 모으고 어루만지며 통제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소서. 강도(江都)는 국가를 보위하여 적을 막을 수 있는 곳이니 병기를 수선하고 양식을 비축해야 할 것이며, 남한 산성은 서울을 돕는 요긴한 곳이니 장수를 얻고 곡식을 저축해야 합니다. 삼남(三南)의 민심을 수습하고 그들의 고통을 제거해 주어 군민(軍民)이 윗사람을 친애하도록 하고, 양서(兩西)의 백성을 위로하고 권장하여 군민이 함께 적을 원수로 삼게 하소서.
그리고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견고해야만 나라가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백성이 없으면 먹을 것이 없게 되고 먹을 것이 없으면 백성이 없게 되니, 백성의 힘을 여유있게 하고 백성의 먹을 것을 넉넉하게 하는 것이 제왕의 급무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각 아문을 살펴보건대 중외(中外)의 관리들이 원망을 사면서 일을 처리하는 것을 어질다 하여 포상하고, 관리들도 백성을 기쁘게 하는 것을 혐의스럽게 여겨 스스로 좌절하고 맙니다. 조정에서 징계하고 권장하는 일이 이와 같은 까닭에 백성을 보호하려는 상의 마음이 아무리 간절해도 은택이 아래에까지 미치지 못하여 백성들이 흩어지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상께서는 늘 이 점을 생각하시어 지극한 정성을 언제나 백성을 보호하는데 두소서. 그러면 실질적인 혜택이 저절로 백성에게 미치게 되어 민심이 돌아오고 국가가 편안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탑전(榻前)에서 아뢴 죄수의 소방(疏放)에 대한 일도 억울한 것을 풀어주어 민화(民和)를 얻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유념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이 지론(至論) 아닌 것이 없다. 내가 가슴에 새겨 스스로 힘쓰겠다."
하고, 인하여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회계(回啓)하기를,
"원로인 신하가 적이 물러간 뒤에 깊이 걱정을 하면서 물러갈 즈음에 간절히 말하였는데, 차자에서 진술한 것은 국가를 위하는 훌륭한 생각 아닌 것이 없습니다. 강도를 보장(保障)으로 삼고 남한 산성을 보거(輔車)로 삼는 일은 조정에서 현재 강구 중에 있습니다마는, 삼남의 민심을 수습하고 양서의 백성을 격려하는 일은 성조(聖朝)가 의당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아문의 호령이 일을 처리하는데 급하고 청렴하고 조심스런 관리들이 백성을 기쁘게 하는 것을 혐의로 여긴다고 한 것은 실로 잘못을 바로잡으려다가 너무 지나쳐서 오히려 나쁘게 된 요즈음의 폐단이니, 깊이 생각하여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인을 소방하여 억울함을 풀어 주는 것이야말로 왕정(王政)의 급무입니다. 원로의 말에 소견이 없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런데 강도가 보장이라고는 하나 성지(城池)와 병량(兵粮)을 모두가 믿을 만한 것이 없다. 재신(宰臣) 중에 재주와 성의가 이서(李曙)와 같은 자가 있으면, 이를 맡아 관장하는 임무를 주어 먼저 10만 군사가 먹을 양식을 비축하게 하고, 읍성(邑城)과 갑곶성(甲串城)을 개축하여 만전에 대비토록 하라. 기계는 군기시와 훈련 도감으로 하여금 마음을 다해 마련하고 미리 옮겨 두도록 하여 전투에 임하여 사용에 부족할 염려가 없도록 하라. 그리고 필시 많은 양식을 마련할 곳이 없을 테니, 올해 삼명일(三名日)에 각전(各殿)에 진상하는 방물(方物)을 목면(木綿)으로 바꾸어 이송하고, 호조와 병조도 수백 동(同)의 목면을 내어 양식을 마련하는 자금으로 하라. 또 강화 연안 사면의 군사가 주둔할 만한 곳에 각각 큰 창고를 지어 가져다 먹기에 편하게 하라. 이 밖에 양식을 마련하는 계책을 속히 강구하여 각별히 거행하라. 죄인을 소방하는 일은, 윤기(倫紀)에 죄를 얻은 사람을 무단히 석방할 수는 없을 듯하니, 천천히 의논하여 처치하라."
하였다. 이에 비국이 김자점(金自點)에게 강도의 일을 관장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서전(書傳)》을 강(講)하였다. 강이 끝나자 완풍 부원군 이서가 청대(請對)하니, 상이 불러 보았다. 이서가 아뢰기를,
"신이 비국의 계사로 인하여 장차 청석동(靑石洞)·산예(狻猊) 및 평산(平山)의 진(鎭)칠 만한 곳을 가서 살피게 되었습니다만, 신의 의견은 비국과 조금 다릅니다. 비국의 의견은 평산이야말로 산성(山城)의 형국이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다른 성을 다시 쌓을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만, 신의 의견은 평산은 곧 병가(兵家)에서 말하는 위지(圍地)이기 때문에 작전을 벌일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성안에 돌산이 어금니처럼 솟아 있어 사람들이 서로 바라보지 못하므로 대장이 웅변하기도 어렵습니다. 그 대신 만약 우토(牛兎)·송도(松都)의 사이와 저탄(猪灘)·산예의 통로에 요해처(要害處)를 가려 관방(關防)을 설치하고 강도의 성원(聲援)이 되게 한다면, 적을 차단할 수도 있고 작전을 벌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겠다."
하였다. 이서가 아뢰기를,
"안주(安州)의 일은 신이 참으로 우려됩니다. 본성은 의당 1만 명을 사용하여 지켜야 하는데, 원방의 군사를 오래도록 그곳에서 수자리살게 할 수도 없고 서관(西關)의 군사도 항상 머물게 할 수 없으니, 수비책이 엉성하기만 합니다. 어리석은 신의 의견으로는, 본주의 백성 중에 15세 이상은 모두 군사로 모집하여 그들이 납부할 미곡을 면제해 주고 쇄마로 물건을 실어나르는 부역을 면제해 주는 한편, 4백∼5백 동(同)의 무명을 내어 상으로 주면, 적군이 오더라도 고무되어 모두 성으로 들어갈 것이니, 이것이 반드시 지켜내는 방법이라고 여겨집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매우 타당하다. 경은 우선 갔다가 와서 체신(體臣)의 병이 낫기를 기다려 상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남한 산성에는 한 곳도 포루(砲樓)가 없으니, 이것이 결점이다."
하니, 이서가 아뢰기를,
"포루는 성을 지키는 일에 가장 방해가 됩니다. 포를 쏘게 되면 연기와 불꽃으로 사방이 어두워지기 때문에 처음부터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우마장(牛馬墻)029) 과 성 위의 좁은 곳에 흙을 메우는 일은 그만둘 수 없기에 이수일(李守一)에게 그 역사를 감독하여 완성시키도록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다른 사람에게 일을 대신 맡겼다고 하여 소홀히 하지 말라."
하였다. 이소한(李昭漢)이 아뢰기를,
"고 상신(相臣) 심희수(沈喜壽)의 처가 나이 99세인데, 양자마저 죽어 친척에게 기식한다 하니, 지극히 애처롭습니다. 보살펴 주는 은전을 내림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해조에게 음식물을 제급(題給)토록 하였다.
7월 5일 정축
영돈녕부사 이원익이 금천(衿川)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상이 승지를 보내어 위문하였다.
전에 상이 가뭄 때문에 남교(南郊)에서 직접 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이어 하교하기를,
"빈곤한 사람을 구휼하고 억울한 사람을 풀어주는 등 백성을 편하게 하는 일체의 일을 계획하여 보고하라."
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요사이 국가의 곡식을 허비하는 두 가지 폐단이 있습니다. 호위청(扈衛廳)을 임시로 설치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혁파해야 마땅할 듯하고, 어영군(御營軍)의 삼동(三冬) 입번(入番)에 드는 양식이 적지 않으니 올 겨울만은 우선 입번을 면제하여 집에서 변란을 대기토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백관의 녹봉이 당상관 이상은 조금 넉넉하니 해조로 하여금 적당히 줄이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호위 군관은 위급할 때의 의지해야 하니, 아직 혁파하지 말라."
하였다.
7월 7일 기묘
함경도 회령(會寧)·온성(穩城)·경원(慶源) 등 고을에 황충(蝗蟲)이 온 들에 가득하고, 단천(端川)에는 삼색충(三色蟲)이 몹시 성하였다. 삼수(三水)·갑산(甲山)에 5월에 서리가 내렸다.
7월 8일 경진
헌부가 아뢰기를,
"열읍(列邑)에 봉수(烽燧)를 설치한 목적이 분명히 있는데, 지난번 적이 국경에 이르렀을 때 끝내 봉화를 올려 변경의 경보를 알린 일이 없었으니, 변방에 근무하는 관리가 너무나도 직책을 수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양서(兩西)의 감사와 병사를 먼저 추고하고, 봉화를 올리지 않은 관원을 조사해 내어 중한 율로 다스리게 하소서. 병조는 당연히 검찰했어야 하는데도 아직까지 적발하여 죄를 다스리지 않았으니, 해당 당상과 낭청도 중하게 추고하도록 하소서.
국가가 보인(保人)을 주고 급료를 지급하면서 훈련 도감의 군졸을 기르는 까닭이 어찌 그 자신만 넉넉히 재주를 갖게 하는 것일 뿐이겠습니까. 군사가 된 사람으로서 포(砲)를 맡은 자는 포를, 검(劍)을 맡은 자는 검을, 활쏘기를 맡은 자는 활을 쏘아 위급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 쓰임이 되게 해야 마땅한데, 그 본업(本業)을 버리고는 다른 기술을 다투어 일을 삼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석수(石手)·목수(木手)·숙수(熟手)와 금·은 등의 온갖 기술에 이르기까지 모두 배워 능숙한 것처럼 행동하는 여염의 공장(工匠)과 다른 점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장관(將官)이 된 자 역시 부리기에 편리한 점 때문에 더 이상 단속하지 않고 있으니, 훈국(訓局)을 설치하여 군사를 조련하는 뜻이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또 정원 이외의 보인의 수가 매우 많은데도 도감에서는 한번도 그들을 옮겨 충정(充定)하지 않고 모두 군포(軍布) 바치는 것을 허락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도감 군사로서 본업을 버리고 딴 기술을 배우는 자는 조사해 내어 금단하고, 사사로이 사역시키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고 정원 이외의 보인 역시 낱낱이 조사해 내어 보인이 없는 자에게 채워 주소서. 만일 옛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거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대장(大將)과 색제조(色提調)는 파직시키고 중군(中軍) 이하 각 초(哨)의 장관(將官)은 법을 어긴 죄로 논하소서.
바다로 가는 행차야말로 오늘날 제일 고역일텐데도 역관(譯官)과 군관(軍官)들이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서로들 가려고 다투는 것은 조그마한 이익이나마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근래 북경(北京)에 갈 때, 각 아문(衙門)·제 궁가(宮家)·사대부가(士大夫家)가 사사로이 돈을 주면서 강제로 무역하도록 하는데, 저들이 위세에 겁을 먹고 부득이 받아 가기는 하지만 돌아와서는 여기저기서 재촉하고 피차간에 불법으로 빼앗아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가동(家僮)이 갇히기까지 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재물을 다 쓰고 전지(田地)와 집을 판 뒤에야 끝날 경우도 있어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니 놀랍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지금부터 북경에 갈 때에는 전례(前例)대로 공무역(公貿易)을 하는 외에는 새로 설치한 각 아문·제 궁가 및 사대부가의 사사로운 무역은 일체 금단하고, 이를 범할 경우에는 적발하여 파직하소서.
각사(各司) 공물(貢物)과 각도(各道) 역마(驛馬)와 삼명일(三名日) 진상마(進上馬)를 제 궁가와 사대부가의 세력 있는 자들이 서로 다투어 방납(防納)하는데, 말 1필을 진상하면서 요구하는 금액이 많게는 10여 동(同)이고 적어도 5, 6동을 밑돌지 않으며, 혹 늙고 병든 쓸모없는 말을 청탁하여 바치기를 꾀하기까지 하니 너무나도 놀랍습니다. 심지어 역졸(驛卒)과 태복(太僕)의 사람들이 고관 대작을 따지지 않고 그 말을 부를 적에 반드시 그 주인의 이름으로 부르니, 사대부의 염치에 입각한 행실이 어디에 있습니까. 말하는 것조차 부끄럽습니다. 지금부터 각사 공물·각도 역마·삼명일 진상마를 사사로이 방납하는 자는 장률(贓律)로 논하고, 각 고을의 수령·각역 찰방·각도 감사·병조 색관(色官)으로서 말을 바치는 것을 허락하는 자는 모두 그 죄와 같게 하소서.
요사이 여염에서 사치하는 풍습이 날로 심해져 혼인이나 연회를 할 때마다 곧 의복과 음식을 서로 낫게 하려고 경쟁적으로 힘쓰는 결과 한 부녀자의 복식이 수백 금이 나가기까지 합니다. 그 중에 수의(繡衣)·수상(繡裳)·금봉차(金鳳釵)는 모두 예전에는 없던 물건이니 먼저 엄금하되, 만일 범하는 자가 있으면 듣는 대로 적발하여 그 가장(家長)이 관직을 가진 자일 경우에는 영원히 서용(敍用)하지 못하게 하고 유생은 정거(停擧)케 하며 사족(士族)이 아닌 자는 정배(定配)하소서.
국가가 관직을 설치하여 업무를 분담시키면서 각각 주관하는 바가 있게 하였는데, 재물을 생산하는 책임은 바로 호부가 맡고 있는 것입니다. 요사이 국사(國事)가 차츰 번성함에 따라 아문이 번갈아 생겨나는데, 관아를 설치한 곳마다 곧 재물을 모으는 것으로 일을 삼고 있습니다. 둔전(屯田)을 하거나 무판(貿販)을 하기도 하고 방납을 하거나 이자를 놓는 등 서로 다투어 이익을 추구하여 제각기 재능을 바쳐서 수만 금을 축적하는데도 조정에서 출납을 묻지 않고 해조에서 있는지조차 알지를 못한다면, 국가의 회계가 어찌 궁핍하지 않겠으며 백성이 어찌 병들지 않겠습니까. 지금부터 각 아문은 일체 외방에서 모리(牟利)를 못하게 하고, 저축한 재물과 곡식은 호조에게 숫자를 조사하여 관리하게 하며, 군관의 요포(料布)와 기타 수용(需用)의 물품도 해조로 하여금 본 아문과 상의하여 그 다소에 따라 전례를 조사하여 변통해 쓰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황해 감사와 병사는 별로 잘못한 것이 없으니 추고하지 말라. 훈국의 군졸이 딴 기술을 배워 익히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그러나 이는 대장이 참작하여 처리할 일이지 조정이 간여할 일은 못 된다. 또 이른바 봉족(奉足)은 정수 이외의 사람이 없는 듯하니 아마도 잘못 전하여 들은 것 같다. 역관 등에 관한 일은 반드시 이와 같이 강제로 한 폐단이 없을 것인데, 설혹 있더라도 이는 곧 자기네들끼리 모리(牟利)한 일이니, 대간이 얻어 들은 것은 혹 불결한 듯도 싶다. 각 아문의 무판(貿販)은 모두 부득이해서 하는 일이니 아직은 금지하지 말고 다만 폐단이 없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조사하여 관리하고 숫자를 알게 하자고 한 것은 사의(辭意)가 지나치게 각박하여 자못 서로 공경하는 도가 없으니 지극히 불가하다."
하였다.
7월 9일 신사
지평 심연(沈演)이 아뢰기를,
"어제 계사(啓辭) 가운데 시폐(時弊)에 관한 다섯 조항은 모두 신이 먼저 의논을 내어 초안을 잡은 것입니다. 그런데 삼가 성상의 비답을 받들건대 미안한 분부가 많았는데, 심지어는 불결하다고까지 배척하셨습니다. 신이 참으로 보잘것은 없으나 이런 불결한 일이 있다면 전하께서 곧장 그 실상을 거론하여 주륙(誅戮)해야 할 것이고, 일을 논하는 때에 먼저 의심을 일으켜 갑작스럽게 이런 분부를 내리시면 안 될 것입니다. 이 일은 이익은 사문(私門)에 돌아가는 반면 전하에게는 원망만 돌아가는 일입니다. 이 일은 민간에서 모두들 말하고 있는데, 전하께서만 구중 궁궐에 깊이 계시어 들어 알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신은 직책이 대관이기에 조금이라도 들은 것이 있으면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는데, 구구하게 전하를 사랑하는 마음이 도리어 전하를 저버린 죄에 빠지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신의 한 몸이야 진실로 말할 것이 못 되지만 전하께서는 유독 신이 맡고 있는 직책과 전하가 신료들을 대접하는 예를 생각지 않으십니까."
정수 이외의 봉족(奉足)에 대해서는 진실로 그런 사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수외(數外)라는 두 글자를 신이 어떻게 마련해 내어 말하였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일 제 도감에 문의하시어 본디 이런 일이 없으면 신은 부월(鈇鉞)에 복주(伏誅)되어 망언(妄言)한 사람의 경계가 되기를 요청합니다. 또 신이 이미 이 임무를 맡은 이상 전하의 잘못도 오히려 말하는데, 유독 도감에 대해서만 마음 속으로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 대장이 짐작하며 처리할 것으로 맡겨둔 채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각 아문의 물화(物貨)에 대해서는 신의 망령된 생각에, 재물을 늘리는 부서가 많은 것이 안타깝고 백성이 이 때문에 병드는 것이 가슴 아프게 여겨졌습니다. 그리하여 저축한 재물과 곡식을 모두 호조로 귀속시킨 뒤 본 아문에서 쓰는 것은 해조에서 마련토록 하려는 것이었을 뿐, 처음부터 각 아문을 의심하여 해조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는 표현상 미숙한 점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만, 서로 공경하는 도가 없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신의 본심이 아닙니다. 고금 천하에 어찌 불결한 대관이 있으며, 또 어찌 불결한 자를 대관으로 삼고서 그 나라를 제대로 보전한 경우가 있겠습니까. 신을 삭직(削職)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불결하다고 말한 것은 뇌물을 받은 것으로 의심한 것이 아니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헌부의 많은 관원이 모두 이 일로 인혐(引嫌)하였는데, 간원이 처치하여 모두 출사를 명하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헌 박동선(朴東善)은 패초(牌招)하였으나 나오지 않아 체직되었다.
영유 현령(永柔縣令) 정기수(鄭麒壽)가 상소하기를,
"청북(淸北)030) 은 곧 조종(祖宗)의 강토로서 전하께서 포기할 땅이 아닙니다.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실지로 그 지역을 버리려 하십니까? 아, 청북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정묘년031) 간에 유리 걸식하면서 입에 풀칠하기가 지극히 어려움을 알고 부득이 본토로 도로 들어 왔는데, 모두 말하기를 ‘적을 피해 나가도 죽고 싸우다가 죽어도 죽는 것이다. 똑같이 죽을 바에야 차라리 한번 싸우다가 죽겠다.’ 하니, 인심이 이와 같은 것은 국가의 복입니다. 근일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이 신에게 영원(寧遠)·운산(雲山)·구성(龜城)·태천(泰川)지역에 가서 정장(丁壯)을 모집하되 사람마다 아홉 말의 쌀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하여 안주(安州)로 거느리고 들어 오도록 하였습니다. 신이 모군(募軍)하는 전령(傳令)을 내보였더니, 백성들이 성내어 말하기를 ‘부원수가 국가의 대장이 되어 청북의 수복(收復)은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우리를 나오도록 유도하려 하는가.’ 하면서 모두 응모하지 않았으므로 신은 한 사람도 얻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부원수는 청북에 청야(淸野) 작전을 펼 수 밖에 없다고 여깁니다마는, 신은 울타리를 철거할 정도로 국세가 떨치지 못함을 몹시 괴롭고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현재의 계책으로는 의주성(義州城)을 수복하여 용골(龍骨)과 검산(劍山)의 두 성으로써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는 발판을 삼고 토민(土民)을 시켜 지키도록 하였다가 적군이 오면 들어가서 지키고 적군이 물러가면 들에 나가 농사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또 제도(諸道)의 군사를 더하여 힘을 다해 방어하면 만에 하나라도 불행한 일이 없을 것인데, 양식 등에 관한 일은 자연히 해조에서 처리할 길이 있을 것이니, 어찌 그에 대한 계책이 없음을 근심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소(疏)를 살펴 보니 너의 정성이 몹시 가상하다. 현재 사세로는 수복하기가 쉽지 않으나 말한 뜻이 매우 좋으니,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고, 인하여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아뢰기를,
"삼가 보건대 본도 감사와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첩보(牒報)한 말과 정기수가 상소하여 진술한 뜻이 모두 만성(灣城)032) 을 수축하자는 계책인데, 이 상소가 더욱 격렬하고 절실합니다. 조정이 청북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힘이 부족해서 그러는 것일 뿐이니, 그 마음이야 어찌 하루인들 청북을 잊었겠습니까. 본도 감사가 도내의 여론을 따라 이미 검산 산성(劍山山城)을 쌓아 조금 성공한 효과가 있는데, 검산을 일단 지키게 되면 용골과 의주도 차례로 수습하여 청북의 세력을 웅장하게 해야 마땅합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의당 먼저 용골성을 쌓아 의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변란이 닥쳤을 때 들어가서 지키도록 하여 한편으로는 백성을 보전하고 한편으로는 적군의 세력을 견제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청북을 청야하려는 정충신의 계책과 농사짓는 한편 수비하자는 정기수의 말이 끝내 함께 어울려 같은 결과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적임자를 얻은 다음에야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당초 용골에 성을 쌓자는 말을 정가(鄭家) 형제가 꺼냈는데, 정기수의 재지(才智)에 대해서는 칭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제 상소한 말을 보건대 그의 사람됨을 알 수가 있으니, 참으로 용골의 역사를 이 사람에게 맡겨 주면 서민(西民)의 기대를 결부시켜 반드시 지켜내는 땅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의주에 성을 쌓는 한 조항은 우선 용골성이 이루어 지기를 기다려 서서히 도모함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쪽 변경의 일을 헤아려 처리하는 것은 오로지 체신(體臣)에게 달려 있으니 의당 그가 출사하기를 기다려 다시 의논하여 처치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10일 임오
소모장(召募將) 지계최(池繼崔)가 사조(辭朝)하니, 상이 활과 화살을 하사하였다. 처음 지계최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은 역적 이괄(李适)의 변을 당하여 전일 모집한 군사 6백여 명을 거느리고 도원수 장만(張晩)에게 달려가서 안현(鞍峴)에서 승리를 거두고 인하여 정훈(正勳)에 참여되었습니다. 이제 노적(奴賊)이 창궐하는 때를 당하여 소모장이 되어 연전에 거느렸던 군사를 조발해 모으고 또 응모한 사람을 더하여 서쪽 변경에서 목숨을 바치기를 원합니다."
하니, 비국이 회계하기를,
"지계최가 처음부터 끝까지 적군에 달려가기를 자원하니 실로 지극히 가상합니다. 소모장에 임명하여 군사를 소모하도록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때 군무(軍務)에 유념하여 변장(邊將)이 배사(拜辭)할 적마다 활과 화살을 하사하였다.
저번에 상이 한재(旱災) 때문에 정전(正殿)을 피하고 상선(常膳)을 감하였는데, 가을 절후가 닥쳐오자 예조가 회복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다시 청하니 이에 허락하였다.
7월 11일 계미
집의 김반(金槃) 등이 와서 피혐하며 아뢰기를,
"신들이 이미 단서를 꺼낸 이상 그 이야기를 마무리지었으면 합니다만, 우선 윤허를 받지 못한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도감 군액(軍額)의 원수(元數)가 거의 4천 명에 달하는데, 세 사람의 보인(保人)을 갖춘 자도 있고 두 사람의 보인이 있는 자도 있으며 보인이 없는 자도 있습니다. 그 중에 보인을 가진 채 죽은 자도 한량이 없는데, 일단 호수(戶首)033) 가 없게 되면 별도의 책에 기록을 하니 그 이름을 수외 봉족(數外奉足)이라고 합니다. 이는 곧 도감에서 쓰는 문서입니다. 정묘호란 때에 도감의 포수(砲手)로서 서쪽 변경에서 죽은 자가 무려 1백여 명이나 되어 그 때의 수외 봉족이 가장 많았는데, 낭청으로 있는 자가 사적으로 1천 수백 명을 조사해 내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8백∼9백 명이 되었는데 지금은 몇백 명이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 밖에 또 이른바 별초(別抄)라는 것이 있는데 이름을 붙인 뜻은 조금 다르지만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이 두가지를 가지고 주현(州縣)에 독촉하면서 군포를 받아들이는 숫자가 몇백 동(同)이나 되는지 알지 못하고 보면, 간혹 옮겨서 충급(充給)하는 곳이 있다 하더라도 당초 보인을 설치한 뜻이 어찌 결단코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원근의 양민을 불러 모아 원전(原田)의 결수(結數)를 감손(减損)해 줌으로써 나라에 죄를 짓고 도망친 자들의 소굴이 되게 한 것은 각 아문의 둔전(屯田) 때문입니다. 성화(星火)보다 급하게 가렴 주구하며 조그만 이익도 경쟁적으로 다투어 바다에 싣고 가는 재물이 끊이지 않게 된 것은 각 아문의 무판(貿販) 때문입니다. 경외(京外) 백성들이 파산 지경에 이르러 땅과 집을 팔고서 길에서 울부짖으며 원망하는 것은 각 아문에서 징수하는 빚 때문입니다. 백금(白金)을 건네 받고 중국에 가 비단을 싸가지고 와서 감옥에 수감되어 가슴을 치며 원한을 품는 것은 북경에 간 원역(員役)들이 여러 곳에서 침탈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이 몇 가지의 폐단이 가깝게는 서울로부터 멀리는 먼 지방에 이르기까지 어리석은 백성으로 하여금 전하에게 원망을 돌리게 하고 있습니다. 신등은 사람들이 전하를 원망하는 소리를 듣고는 마치 남들이 부모를 원망하는 소리를 들은 것과 같았습니다. 이에 이미 들은 것을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국가가 이익되고 백성이 원망을 누그러뜨리게 되기를 바랐던 것인데, 전하께서는 도리어 당치도 않은 말씀으로 그런 마음을 의심하고 계시니, 무슨 낯으로 다시 깨끗한 조정에 설 수 있겠습니까. 파척(罷斥)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김반 등이 끝내 전의 일을 이어 아뢰었으나, 상은 다만 무역을 금단하자는 논만을 따르고 나머지는 모두 듣지 않았다.
7월 12일 갑신
진주사(陳奏使) 정두원(鄭斗源)이 명나라 서울에서 돌아와 천리경(千里鏡)·서포(西砲)·자명종(自鳴鐘)·염초화(焰硝花)·자목화(紫木花) 등 물품을 바쳤다. 천리경은 천문을 관측하고 백 리 밖의 적군을 탐지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서포는 화승(火繩)을 쓰지 않고 돌로 때리면 불이 저절로 일어나는데 서양 사람 육약한(陸若漢)이란 자가 중국에 와서 두원에게 기증한 것이다. 자명종은 매 시간마다 종이 저절로 울고, 염초화는 곧 염초를 굽는 함토(醎土)이며, 자목화는 곧 색깔이 붉은 목화이다. 상이 하교하기를,
"서포를 찾아온 것은 적의 방어에 뜻을 둔 것이니, 정말 가상하기 그지없다. 특별히 한 자급(資級)을 올려 주라."
하니, 간원이 가자(加資)하는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자, 상이 따랐다.
상이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를 소견(召見)하였는데, 이서가 오조천(吾助川)에 성을 쌓는 것이 편리함을 극구 아뢰니, 상이 가납(嘉納)하였다.
7월 18일 경인
박정(朴炡)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7월 19일 신묘
태백(太白)이 나타났다.
헌부가 훈련 도감 군졸이 다른 기술을 학습하는 것과 포보(砲保)034) 에게 군포를 징수하는 잘못을 논하여 일체 금단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도감이 아뢰기를,
"대간이 논한 두 건의 일은 실로 사리에 부합됩니다. 다만, 그 사이에 또한 곡절이 있습니다. 사람의 재능은 각기 장기(長技)가 있습니다만, 본업 이외에 간혹 곁으로 공장(工匠)의 기술을 익혀서 생활에 도움이 될 기반을 마련한다 하더라도 주장(主將)이 그런 사소한 일까지 조사하여 간섭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리고 군졸을 사사로운 역사에 뽑아 보내는 폐단 또한 간혹 있었습니다만, 지금 이후로는 엄히 규정을 세워서 일체 통렬하게 금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봉족(奉足)의 경우는 당초 사목(事目)에 따라 군사 1인당 3명의 보인을 지급하였으나, 과연 도망치거나 죽었는데도 그 보인은 그대로 두는 일이 있기도 하여 끝내 군포를 징수하는 규정이 이루어졌으니 그 일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원래 봉족이 없는 자가 매우 많으니 만일 영원히 지급하려면 그 숫자가 도리어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부득이 군포를 징수하여 골고루 지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세가 이와 같은데도 거듭 물의를 입었으므로 황공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7월 20일 임진
이에 앞서 승지 이기조(李基祚)가 액정서(掖庭署)의 하인이 옥당을 모욕했다고 아뢰면서 유사로 하여금 치죄하게 하였는데, 상이 그 공사(供辭)를 보고 하교하기를,
"아랫것들이 이웃 사람들과 싸우는 것은 관원이 참여하여 알 바가 아닌데, 옥당이 국법을 생각하지 않고 차인(差人)을 보내어 체포하면서 민간에 폐를 끼쳤으니, 추고하라."
하였다. 이날 이기조가 입직(入直)하고 있다가 옥당의 문비(問備)035) 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진달하고, 이내 대죄하여 아뢰기를,
"별감(別監) 등의 공사(供辭)는 본래 믿을 수 없고 유신(儒臣)이 불러다가 물을 때에도 그다지 해를 끼친 일이 없는데, 액정서의 하인 때문에 갑자기 추고하여 조사하는 일이 있게 되었으니, 어찌 보고 듣는 자들이 놀라지 않겠으며 성덕(聖德)에 하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신의 망언으로 말미암아 임금에게 잘못된 일이 있게 하였으므로 황공하여 대죄합니다."
하니, 대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우부승지 이소한(李昭漢)이 아뢰기를,
"옥당의 관원이 설사 앞질러 차인을 보낸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이는 그 곡절을 물으려 한 데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아랫것들이 싸운 일로 인하여 경악(經幄)의 신하를 추고하기에 이르렀으니, 체면과 관례로 헤아려 보건대 지극히 미안합니다. 속히 추고하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니, 상이 노하여 이르기를,
"유신(儒臣)의 직임은 책을 읽고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것일 뿐, 마을에서 사람을 잡아 곡직(曲直)을 변별하는 일은 당연히 행할 바가 아니니, 지금의 이 추고는 안 될 것이 없다. 그대들이 한갓 이목(李楘)이 남긴 습관만을 배워 외람되게도 서로 봐 주려는 일을 진달하니 매우 부당하다."
하였다. 소한이 황공하여 감히 공무를 행하지 못하고 두 차례 정사(呈辭)하여 체직되었다. 얼마 안 있어 이기조도 병으로 면직되었다.
7월 21일 계사
헌부가 아뢰기를,
"가깝게 모시는 천한 부류는 위엄으로써 엄하게 하고 의관(衣冠)의 사류(士類)는 예로써 부리는 것이 성상께서 아랫사람을 거느리는 도입니다. 전하께서 액정 별감의 공사(供辭)로 인하여 유신을 추고하라는 명을 내리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전하께서 아랫것들이 하소연하는 것을 믿고서 경연의 신하에게 죄를 돌리는 것입니다. 신등은 액정서의 사람들이 이 일로 인하여 기세가 더욱 등등해져 의관들을 능멸하며 앞으로 하지 못할 짓이 없을까 적이 두려우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추고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임금에게 고하는 일은 억탁(臆度)으로 진계(陳啓)해서는 안 되니, 다시 더 자세히 살피라."
하였다.
홍방(洪霶)을 대사간으로, 김반(金槃)을 사간으로, 이경인(李景仁)을 헌납으로 삼았다.
7월 22일 갑오
봉림 대군(鳳林大君)의 집을 영건(營建)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재목 값으로 포(布) 2천 7백 60필을 써야 하겠는데, 이 밖에 들어가야 할 것이 매우 많습니다. 철물은 벌써 수송한 것이 3천 8백 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철물 같은 것은 이미 사용한 뒤에는 해사(該司)로 돌려보낼 것이니 비용이 많이 든다고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헌부가 추고하라는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연계(連啓)하니, 답하기를,
"옥당의 관원이 아랫것들의 말을 듣고 여염에서 사람을 체포하여 막 대궐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 친척 중에 별감이 된 자가 있어서 마침 서로 만났기에 따라 가면서 싸우자, 중관(中官)이 사람을 시켜 소란을 금하게 했다는 이것이 그 대략이다. 분부를 듣고 소란을 금한 자는 별로 죄를 범한 것이 없고 따라가면서 싸운 자는 그 정상이 가증스러우므로 이미 조율(照律)하도록 하였다.
당초 여염에서 서로 싸우는 일은 유신이 따져서 조사할 일이 아닌데, 사령(使令)들이 나갔으면 필시 민간에 폐를 끼쳤을 것이기에 징계시키려고 특별히 추고를 명한 것이니, 이 뜻은 소민(小民)을 편안하게 보호하려는 데 있는 것으로서 별감을 위하여 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정원과 본부(本府)가 서로 잇따라 진달하여 따지며 임금에게 허물을 돌리니, 애초에 이와 같이 될 줄을 알았다면 학사(學士)에게 과실이 있고 민간이 폐단을 받았더라도 내가 어찌 꼭 말했겠는가.
근래 풍습을 보건대 삼사(三司)에 관계되는 일이면 옳고 그름을 돌보지 않고 떼를 지어 일어나 서로들 구해 주려 하니, 이 역시 깨끗한 조정의 아름다운 일은 아닌 듯하다. 남의 윗사람이 된 자가 아랫사람들의 옳지 않은 곳을 보았더라도 은인자중하며 세월만 보낸 채 다시 경계시키지 않음으로써 그런 습관이 암암리에 자라나게 한다면, 모르겠다만 나라 일이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사소한 일을 이처럼 변명하는 것이야말로 좀스러운 일이다마는, 그대들이 자세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지난번의 금훤 별감(禁喧別監)은 다시 수금(囚禁)하여 죄를 다스리도록 하고, 지금 이후로 만일 도성 안팎에 싸우는 자가 있거든 모두 옥당이 청리(聽理)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3일 을미
대사헌 장유(張維) 이하가 와서 피혐하며 아뢰기를,
"유신의 추고를 명하신 것이 아랫사람을 단속하여 폐단을 고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이는 마치 유신만 바짝 죄고 별감은 풀어주는 것으로서 그저 옥당이 사람을 체포한 것이 폐단이 된다는 것만 생각하고 별감의 방자한 폐단이 더욱 커져서 막기 어려움이 된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신 것인 듯합니다. 신등이 감히 이를 논계(論啓)하였으나 정성이 하늘에 이르지 못하여 도리어 엄한 비답을 내리시게 하였습니다. 또 상의 하교를 보건대 안팎의 싸움에 관한 송사는 모두 옥당이 청리하도록 하라고 하여 불평스런 기운과 미안스런 거조(擧措)가 전에 내린 비답보다 심한 점이 있으니, 이는 신등이 망언한 죄 아닌 것이 없습니다. 체척을 명하소서."
하였는데, 간원이 처치하여 아뢰기를,
"옥당을 추고하라는 명이 전에 나온 일이 없는 만큼, 말하는 책임이 있는 관원이 일을 따라 바로잡은 것은 깊이 일을 논하는 대체를 얻은 것입니다. 모두 출사를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논사(論思)하는 신하는 직책과 위치가 임금과 친하고 가까우니, 일을 처리하는 사이에 조그만 실수가 있더라도 포용하며 너그럽게 용서해야 마땅하고, 일에 따라 힐책하기를 서관(庶官)을 감독하는 것과 같이 해서는 마땅치 않습니다. 또 싸움에 관한 송사는 옥당이 청리하라는 분부는 더욱 미안하기 짝이 없으니, 이 어찌 분한 마음에 치우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추고와 청리하라는 명을 모두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듣지 않다가 오랜 뒤에 따랐다.
겸 예조 판서 김상용(金尙容)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상이 허락치 않았다. 상용이 극력 사직하니, 상이 이에 허락하였다.
7월 25일 정유
간원이 아뢰기를,
"엊그제 옥당이 싸움에 관한 송사를 청리하게 하라는 분부야말로 미안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으니, 정원의 입장에서는 사리를 따져 아뢰고 봉환(封還)하여 한 때 중도(中道)를 잃은 전교가 중외에 전파되지 못하도록 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한 마디 말도 없이 조용히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마치 분부한 것처럼 옥당의 서리(書吏)가 베껴 가도록까지 하였으니, 매우 형편없는 일입니다. 해당 승지는 파직하고 동참했던 승지는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승지에게 죄주기를 청하는 것은 매우 형편없는 일이다."
하였다.
평안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상소하기를,
"지금 검산(劍山)의 축성을 이미 완료하였는데, 용골(龍骨)의 중수(重修)는 검산보다 쉽고 만성(灣城)은 퇴락한 곳이 그다지 없으니, 모두 군사를 조발하고 양식을 지급하여 지키게 하면, 기계와 해자는 차례로 이룰 수 있습니다. 세 진(鎭)이 일단 완성된 뒤에 또 능한(凌漢)까지 수리하면 적군이 저돌적으로 온다해도 필시 이 3, 4진을 감히 넘어 안주(安州)로 진격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고, 평안도 진사 양점형(楊漸亨) 등도 상소하기를,
"청북(淸北)의 19읍이 5백여 리나 되어 국가가 울타리로 믿고 있는데, 한 번 전쟁을 겪은 뒤로는 온통 폐허가 되어 버려진 땅이 될 판인데도, 청북을 잘 조처하게 한 명을 듣지 못했으니, 전하께서는 정말로 버리려고 하십니까? 진실로 의주 옛성의 공사를 완성하여 기필코 지킬 지역으로 삼으면, 용골·검산과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어 청북의 큰 세 진이 될 수 있으니, 수복할 수 있는 계책으로 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그 상소를 모두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두 상소의 말 뜻이 엄정하고 정세도 매우 절박하여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하게 합니다. 조정에서도 어찌 하루인들 의주를 잊었겠습니까. 대체로 용골은 부근의 읍에 사는 백성들이 들어가 보전하는 곳에 불과한데도 이미 정묘호란 때에 이득을 본 곳이고, 또 검산·의주와 서로 기각(掎角)이 되므로 지키지 않을 수가 없으니, 검산에 있는 남쪽 군사를 적당히 나누어 주고 무너진 곳을 수축하여 완전한 국면을 이루도록 계책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또 만성은 단지 문루(門樓) 몇 곳이 기울어지거나 무너졌다고 하니, 조정이 수축을 허락하기만 하면 부관(府官)이 스스로 수습하여 조치하기를 담당하여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당연히 지킬 만한 곳이 될 것입니다. 민성휘가 벌써 대략 요리하여 두서가 있는 듯하니, 이에 따라 시행함이 옳을 듯한데, 군사의 조발과 양식의 지급과 장수의 선발 등의 일은 체신(體臣)이 출사하기를 기다려 상의해 처리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병판 김시양(金時讓)이 일찍이 의주의 일을 이야기했는데 소견이 있는 듯하였다. 양식과 기계를 구비한 뒤에 크게 수축하는 일을 거행하여 유명 무실한 폐해가 없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6일 무술
태백(太白)이 나타났다.
처음에 관서(關西)와 청천강(淸川江) 이북에 12개의 참(站)을 두고 이남에 9개의 참을 두었는데, 참마다 파발을 설치하여 경보를 전하였다. 그러나 파발을 조발하여 세우기가 매우 어려워서 무진년036) 이후로는 양식을 지급하여 사람을 사기도 하고 값을 주고 말을 고용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부방 출신(赴防出身)으로 하기도 하고, 본도의 씩씩한 무인(武人)으로 하기도 하여 변경하여 설치한 것이 일정치 않았다. 기사년037) 겨울에 비국이 해서(海西)의 무학(武學) 1천 명을 두 달마다 서로 교대시키도록 청하였는데, 청북은 본도의 군사와 영남(嶺南)의 첨방군(添防軍)을 옮겨서 배치하고 청남(淸南)은 해서에서 조발하여 서로 교대하여 보낸 자를 8개월에 기한을 다 마치도록 하였다. 민성휘가 치계하기를,
"청북의 각 파발에 근무한 남군(南軍)은 벌써 부방을 마쳤고 청남의 해서군(海西軍)도 앞으로 기한이 다 되어가니, 비국에게 지휘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본도의 요역(徭役)을 모두 면제해 주더라도 파발에 세우는 고역은 필시 감당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청남·청북은 모두 본도의 군사를 조발하여 세우게 함이 타당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영의정 오윤겸(吳允謙)이 체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고, 이어 내의(內醫)에게 병을 살피도록 명하였다.
이에 앞서 상이 늘 강도(江都)의 양식을 걱정하였는데, 마침 병조가 조례미(皂隷米)를 장부에 계상(計上)하여 올리자, 상이 1천 5백 석을 강도에 보내도록 명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조례미로 매월 지출되는 양이 매우 많은데 지방에서 실어오는 것은 언제나 4, 5월 사이에 있게 됩니다. 만일 저축이 넉넉하지 않으면 대기 어려운 걱정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우선 5백 석을 보내도록 하였다.
박동선(朴東善)을 대사헌으로, 이경증(李景曾)·유성증(兪省曾)을 부교리로 삼았다.
7월 28일 경자
황 도독(黃都督)의 접반사 권태일(權泰一)이 정주(定州)에서 죽었다. 태일은 집이 영남에 있었으므로 상이 관(棺)을 특별히 하사하고, 또 지나는 곳의 각 고을로 하여금 호상(護喪)하여 보내도록 하였으며, 장사할 때에는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명하였다.
정광적(鄭光績)을 예조 판서로, 정백창(鄭百昌)을 대사간으로, 한필원(韓必遠)을 집의로, 김세렴(金世濂)을 사간으로, 이경여(李敬輿)를 부제학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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