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임인
지돈령부사 김상헌(金尙憲)이 겸대한 홍문관 제학을 사직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대사헌 박동선(朴東善)이 차자를 올려 체직을 청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8월 2일 계묘
수원 부사(水原府使) 장신(張紳)이 임기가 만료되어 체직될 예정이었는데, 본부의 군민(軍民)이 글을 올려 유임시키기를 원하므로 관찰사가 이를 보고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강원도 관찰사 신득연(申得淵), 전라도 좌수사 송영망(宋英望), 동래 부사(東萊府使) 홍입(洪雴)을 인견하고, 상이 각자 마음에 품은 바를 진달하도록 하였다.
신득연이 아뢰기를,
"본도에는 한 곳도 관방(關防)이 없는데, 위급할 때의 대비가 이와 같아서는 안 됩니다. 원주(原州)에 영원성(鴒原城)이 있고 춘천(春川)에도 산성이 있으니 모두 수축하는 것이 온당한데, 신이 도임한 뒤에 이 일을 계품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도 사람은 활을 잘 쏜다고 하는데, 방백(方伯)이 된 자가 모두 조련하는 일에 유의하지 않아 무비(武備)가 허술하기 짝이 없게 되었다. 민심도 어질고 착하다고 일컬어지는데, 지난번에 역도(逆徒)가 갑자기 일어난 것은 실로 풍화(風化)가 시행되지 않은 데 연유하니, 학교에 관한 정사 역시 당연히 마음을 다하여야 된다."
하였다. 송영망이 아뢰기를,
"신이 본영의 일을 꽤 들었는데, 수군이 많이 흩어져 도망쳤으므로 육군으로 첨방(添防)시킨다 합니다. 그러나 육군은 늘 휘하에 있지 않으니, 이른바 군사가 장수를 익히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급할 때 쓰기 어려우니 의당 변통이 있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듣건대 남쪽 변경의 전선(戰船)을 가을과 겨울에는 언제나 육지에 정박시킨다고 한다. 그러나 강도의 우환은 가을이나 겨울이라고 차이가 없으니 이를 더욱 유념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홍입이 아뢰기를,
"본부는 으레 면포를 왜인에게 지급하였는데, 조정에서 수량을 줄였으니 받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왜인은 간교하여 대하기가 매우 어려우니, 그들이 성낸다고 겁내지 말고 기뻐한다고 긴장을 풀지도 말라. 만일 일처리를 한번 그르치면 매양 이것을 끌어대어 전례로 삼으려 할 것이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8월 3일 갑진
이때 상이 한창 강도(江都)의 보장(保障)에 관한 일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마침 유수 이시백(李時白)이 군무(軍務)를 품하러 왔으므로 상이 이서(李曙)·김자점(金自點) 및 이시백을 명소(命召)하였다. 김자점에게 이르기를,
"강도의 양식과 병기는 이미 다 조처하였는가?"
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백성의 생활이 한창 곤궁하고 또 저축된 것이 없어서 10여만 명의 양식을 마련하기가 지극히 어렵습니다. 만일 전하께서 신의 계책을 쓰고 조정도 협심하여 서로 돕는다면 일을 혹 이룰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반드시 비국 당상과 함께 강도에 가서 자세히 돌아보고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예컨대 군기(軍器)는 훈국과 군기시가 마련해야 할 것이고, 군량은 경과 유수가 요리하기에 달려 있다. 또 강도는 성이 가장 좁으니 그 앞쪽과 좌측 우측으로 물려 쌓으려 하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고려 때에는 외성(外城)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주위의 한계가 어느 곳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이어 이시백에게 하문하기를,
"본부는 성이 좁으니, 반드시 물려서 쌓아야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이시백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이서의 사신(私信)을 보건대 부성(府城)을 물려서 쌓아야 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다만 주위가 넓어서 공역이 필시 많을 것이 염려됩니다."
하였다. 김자점이 아뢰기를,
"일찍이 갑곶에 성을 쌓으라고 분부하셨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가서 살핀 뒤에 상의하라."
하였다. 김자점이 아뢰기를,
"연미정(燕尾亭) 등 지역이 모두 요해처이니 역시 보루(堡壘)를 쌓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생각에는 의당 강도를 빙 둘러 사방에 보루를 쌓고 각처에 수만 석의 곡식을 두어야 되리라 여겨지니, 먼저 창고를 설치할 지역을 고르는 것이 좋겠다. 또 부성이 급하고 갑곶은 다음이다."
하였다. 이시백이 아뢰기를,
"그 지역의 형세를 순행하여 살펴 보건대 큰 진(鎭)을 설치할 만한 곳이 일곱 군데이고 작은 진을 설치할 만한 곳이 열 군데인데, 모두 서로 바라다 보이는 곳이어서 성원(聲援)이 될 만합니다. 먼저 주둔할 곳을 결정하여 창고를 짓고 진영을 설치하고 군사를 모집한 다음, 본부(本府)에서 또 양곡을 지급하되 마치 조적(糶糴)처럼 하여 들어와 지켜야 할 각처의 수령으로 하여금 관리하도록 한다면, 목책(木柵)이나 가가(假家) 그리고 창고 등의 일은 저절로 조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가을을 기다려 거행하도록 하였다."
하자, 이시백이 아뢰기를,
"의당 농사 일이 조금 한가해진 때를 이용하여 먼저 각읍의 주둔지를 정하고 대장의 군영을 정하면, 군민이 출입하면서 당연히 지킬 곳을 알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또 하문하기를,
"본부에 저축된 곡식은 얼마인가?"
하니, 이시백이 아뢰기를,
"쌀과 겉곡식이 3만 6천여 석입니다."
하였다. 김자점이 아뢰기를,
"신이 양식을 마련하는 일을 관장했으면서도 좋은 계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만일 영광(靈光)·나주(羅州) 두 고을을 구관서(句管所)에 소속시킨다면 혹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영광·나주를 구관소에 소속시키기를 요청하는 것은 단지 그곳의 어염(魚鹽)만을 관장하고 공물(貢物) 등의 일은 전과 같이 하려는 것인가?"
하였다. 김자점이 아뢰기를,
"한결같이 태안(泰安)의 예와 같이 해야 마땅합니다. 또 무판(貿販)을 주관하는 사람이 그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면 변장(邊將)에 제수하고, 그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각 고을에 폐를 끼친 자는 무거운 벌로 논죄하는 것이 또한 타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김자점이 아뢰기를,
"반드시 가도(椵島)·등주(登州) 및 내주(萊州)와 통상(通商)한 다음에야 쉽게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명나라가 등주로 통하는 길을 허락하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김자점이 아뢰기를,
"둔전(屯田)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는데, 예컨대 목장(牧場) 등을 모두 개간하여 경작하게 하면 반드시 많은 곡식을 얻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을 먹여 기르는 지역에 쉽게 경작을 허락할 수는 없다."
하였다. 상이 이서에게 이르기를,
"듣건대 사복시가 많은 면포를 저축했는데, 역시 서로 도울 수 있겠는가?"
하니, 이서가 아뢰기를,
"저축하는 목적이 앞으로 뜻밖의 일에 대처하기 위함이니, 본사가 저축한 것의 절반을 수송해야 마땅합니다."
하였다.
상이 진위사(陳慰使) 정두원(鄭斗源)과 동지사 서장관 나의소(羅宜素)를 불러 입대시켰다. 상이 하문하기를,
"중원의 일이 어떠한가?"
하니, 두원이 대답하기를,
"신이 길에서 듣건대 모두들 황상은 거룩하다고 하였습니다. 또 포성이 연일 끊이지 않았는데, 아마도 뜻을 가다듬어 적을 토벌하는 듯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현재 명장(名將)이 몇 사람이나 있는가?"
하니 두원이 아뢰기를,
"손승종(孫承宗)이 수장(首將)으로서 군무를 총괄하는데, 등주 군문(登州軍門)인 손원화(孫元化) 등도 모두 승종의 재가를 받고 있으며 제장들이 기꺼이 그의 말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원의 성곽도 돌로 쌓았는가?"
하니, 두원이 아뢰기를,
"벽돌로 쌓은 것도 있고 흙으로 쌓은 것도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육약한(陸若漢)은 어떤 사람인가?"
하니, 두원이 아뢰기를,
"도(道)를 터득한 사람인 듯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손 군문(孫軍門)은 어떤 사람인가?"
하니, 두원이 아뢰기를,
"청렴하고 검소하며 소탈하고 청아하니, 위무(威武)는 부족하지만 동문(東門)038) 에서 사람을 얻었다고 할 만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등주와 내주(萊州)의 군사는 어떠한가?"
하니, 두원이 아뢰기를,
"명나라가 연경(燕京)과 산해관(山海關)에 전력하기 때문에 산동(山東)은 병세(兵勢)가 미약합니다."
하였다.
8월 4일 을사
간원이 상차하기를,
"지난번 옥당의 관원이 외부 사람을 잡아 왔으니, 법을 무시한 책임을 진실로 면하기 어렵습니다만, 그 실정을 살펴 보면 곧 실수에 의한 허물일 뿐입니다. 그러나 액정서의 하인이 소리를 지르며 소란을 일으키고 상의 명이라고 속인 것은 고의로 죄를 범한 것인 듯합니다. 따라서 전하께서 먼저 액정서 하인의 죄를 다스리고 다음에 옥당의 잘못을 논했더라면 그 법을 집행함에 있어 두 가지 모두 합당함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죄가 무거운 자는 법을 적용받지 않고 가벼운 자가 먼저 추고당하여 조사를 받게 되었으므로 많은 신하의 심정이 석연하지 못하였습니다. 정원의 진계(陳啓)와 양사의 논집(論執)이 어찌 옥당을 위한 것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도리어 떼로 일어나 구해 주려 한다고 의심하신 나머지 한 번 바꾸어 ‘유신에게 청리하게 하라.’고 하셨는가 하면, 두 번째 바꾸어서는 ‘모든 언관을 체직시키라.’고까지 하셨으니, 전하께서 이토록까지 지나치게 행하실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허물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는 경계를 생각하시어 순순히 간언을 따르는 미덕을 보여 주소서. 그리하여 두루 포용하는 도량을 확대하여 말을 구하는 길을 넓히시면 천하의 선(善)이 장차 전부 돌아올 것입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8월 5일 병오
대사헌 박동선(朴東善)이 아뢰기를,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말씀하시는 사이에 쉽게 감정을 드러내시며 억제하지 못하는 병통을 면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사리상 결코 해서 안 된다는 것을 진실로 아신다면, 어찌 한때의 노여움으로 인하여 행해서는 안 될 일을 억지로 행하여 마치 신하의 허물을 본받는 것처럼 하신단 말입니까. 아, 전하께서는 옥당이 싸움의 송사를 청리해야 된다고 여기십니까. 만일 외물(外物)에 격발된 나머지 바름을 얻지 못한 것이라면 신은 그것이 어떨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지나간 일을 다시 제기할 필요는 없겠습니다마는, 성상께서 자주 이런 병통이 있고 보면 끝내 성덕(聖德)에 하자가 될까 걱정됩니다. 노신(老臣)은 우리 임금을 ‘노여움을 다른 곳에 옮기지 않고, 한 번의 잘못을 두 번 다시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경지에 이끌어 들이려고 생각했습니다마는,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일을 바루는 책임은 결코 신이 감히 감당할 바가 아닙니다.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가 상차하기를,
"신이 맡고 있는 도체찰사는 소임이 지극히 중하니, 변경이 조금 평온할 때라도 직임을 하루라도 비워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추방(秋防)이 박두하여 한창 분주하게 책응해야 할 지금이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묘당에서 크게 계획하여 조처할 일이 있어도 신의 출사를 기다려 의논해 처리하기로 미루고 있다고도 합니다. 또 서북 지방의 수령을 임명할 때에 전조(銓曹) 역시 관례에 따라 신에게 물어봅니다만, 신은 제대로 대답을 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중임을 헛되게 무릅쓰고서 국가의 큰 일을 폐하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속히 체부(體府)의 소임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사직하지 말고, 모든 군무에 관계되는 것은 집에서 재결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또 상차하여 굳이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유달(李惟達)을 장령으로 삼았다.
8월 6일 정미
군기시가 별조청(別造廳)을 설치하여 화기(火器)를 만들고 화약을 구워내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8월 7일 무신
헌부가 아뢰기를,
"성묘할 때 말을 지급하는 것은 은전에 관계된 일로서 실로 안 될 것이 없습니다만, 기전의 민력이 이미 고갈되어 열읍의 주전(廚傳)039) 에 관한 비용과 각역의 인마(人馬)와 관련된 폐단이 말할 수 없는 점이 있으니, 1품의 재신(宰臣)이 아니면 모두 허락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8일 기유
김신국(金藎國)을 호조 판서로 삼았다.
8월 9일 경술
간원이 아뢰기를,
"양사가 통피(通避)하는 규정은 법전에도 없고 전에 시행했던 관례에도 나오지 않는데, 혼조(昏朝)에서 합사(合司)할 때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양사에 있게 되자 아래에 있는 자가 피혐하여 체직된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잘못된 것을 답습하여 아침에 임명했다가 저녁에 체직시켜 마치 여관(旅館)과 같게 되었으니, 해조로 하여금 옛 예를 두루 조사하여 법으로 확정하게 하여 소란스러운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이 뒤에 이조가 드디어 청하여 폐지하였다. 간원이 또 아뢰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 유여각(柳汝恪), 부산 첨사(釜山僉使) 문희성(文希聖), 좌수사 김진(金鎭)은 각기 관창(官娼)을 데리고 살고자 재물을 바치고 속량(贖良)을 꾀했습니다. 모두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고 관창은 조사해내어 도로 기적(妓籍)에 기록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유여각 등은 모두 우선 추고하라."
하였다.
전 형조 참판 김장생(金長生)이 죽었다. 장생은 자(字)가 희원(希元)으로 자질이 돈후하고 효도와 우애가 순수하고 지극하였다. 일찍이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따라 성리학(性理學)을 수학하여 마음을 오로지 쏟아 독실히 좋아하였다. 독서할 적마다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매일 경전(經傳)과 염·락(濂洛)040) 의 여러 책들을 가지고 담겨 있는 뜻을 탐색하였는데, 마음이 흡족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밤낮으로 사색하여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으며 반드시 그 귀취를 얻고난 다음에야 그쳤다. 또 고금의 예설(禮說)을 취하여 뜻을 찾아내고 참작하여 분명하게 해석하였으므로 변례(變禮)를 당한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질문하였다. 일찍이 신의경(申義慶)이 편집한 상제서(喪制書)를 정리하고 절충하여 《상례비요(喪禮備要)》라고 이름하였는데, 세상에 유행하였다. 장생은 사람을 정성으로 대하며 화기가 애애하였으나, 일의 시비를 논하고 사람의 선악을 분변할 때는 엄정한 말과 낯빛으로 굽히거나 흔들림이 없었다.
선조(宣祖) 초에 유학을 존숭하여 장려하였는데, 상신(相臣) 박순(朴淳)이 성인의 경전에 침잠하고 옛 가르침을 독실하게 믿는다고 그를 천거하자 드디어 벼슬하여 여러 차례 주군(州郡)을 맡았다. 상이 반정(反正)하여 덕이 높은 이를 구하였는데, 장령으로 부름을 받고 올라 왔다. 이때 상이 바야흐로 사묘(私廟)에 직접 제사를 지내려 하는데, 예관(禮官)이 ‘상이 친손자로서 할아버지의 왕통을 이은 이상 본생(本生)의 어버이에 대해 두 아버지를 모신다는 혐의가 없으니 축사(祝辭)에 의당 아버지[考]로 일컫고 아들로 일컬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장생이 수천 마디의 말로 상소를 올려 그 설을 공격하여 깨뜨렸는데, 이는 모두 선유(先儒)의 정론(定論)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추숭(追崇)하자는 의논이 일어나자 장생이 여러 차례 소를 올려 옳지 않음을 힘껏 말하였으나 끝내 쓰이지 않았다. 장생은 조정에 있기를 즐겁게 여기지 않은데다가 나이도 많았으므로 드디어 청하여 연산(連山)으로 돌아갔는데, 형조 참판으로 불렀으나 장생은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집에서 병으로 죽으니 나이 84세였으며, 학자들이 사계(沙溪) 선생이라고 일컬었다.
부고(訃告)를 아뢰자 제사와 부의(賻儀)를 하사하고 이조 판서에 추증하였으며 장례 때에는 본도(本道)에게 조묘군(造墓軍)을 지급하도록 하였는데, 원근에서 장례에 모인 자가 거의 1천 명이나 되었다. 뒤에 장유(張維)가 경연에서 시호를 내리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예를 의논한 것이 합치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홍문관 수찬 신계영(辛啓榮)을 형조 정랑으로 삼았다. 이에 앞서 상이 ‘옥당에게 싸움에 관한 송사를 청리(聽理)하게 하라.’는 분부를 내리자 양사가 여러 차례 도로 거두기를 요청하니 상이 억지로 따랐는데, 이때에 이르러 형조의 낭관에 결원이 생기자 상이 특별히 제수한 것이다.
8월 11일 임자
유림(柳琳)을 검산(劍山)에 정배하였다. 과거에 유림이 평안 병사가 되어 처자를 성밖에 내보내어 살게 하자, 대간이 논하여 잡아다가 심문하였다. 금부가 아뢰기를,
"각 고을에는 본디 들어가 살아야 할 아사(衙舍)가 있는데, 유림은 풍토(風土)가 사람을 상하게 한다고 핑계대고 성밖에 살림집을 지었으니, 처자만을 아끼고 사수할 뜻은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 변경에 충군(充軍)하소서."
하니, 상이 정배를 명하였다.
함릉군(咸陵君) 이해(李澥)가 궐내에서 격쟁(擊錚)하니, 추고 경차관(推考敬差官) 조계원(趙啓遠)·안헌징(安獻徵)을 하옥하도록 명하였다.
이해는 이효원(李效元)의 아들인데, 효원은 그 아우 이복원(李復元)과 함께 청양(靑陽)에서 살았다. 복원에게 이점(李漸)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의 아내 신씨(申氏)의 이름은 숙녀(淑女)였다. 그런데 그녀는 성품이 본디 순하지 않고 또 말이 많아 남편의 족당(族黨)에게 인심을 잃은 나머지 끝내 버림을 받았다. 그러다가 효원·복원과 그 아들 이잠(李潛)이 서로 잇따라 죽게 되자, 집안 사람들은 숙녀가 저주한 것이라고 의심하였는데, 이해의 형의 아들 이의길(李義吉)이 그녀의 남편 점을 협박하여 관에 고발토록 하였다. 드디어 숙녀를 체포하고 그 여종과 여종의 남편 등을 국문했으나 말들이 어지럽게 많았으므로 감사가 보고하니, 이에 조계원을 추고 경차관으로 삼아 가서 조사하게 하였다.
이때 여종 등이 처음에 말한 것을 변경하였는데, 계원이 이 일이 원통하고 억울함에 해당된다 하여 의심스러운 일곱 가지의 일을 조목조목 아뢰자 상이 또 안헌징을 경차관으로 삼아 계원을 대신하여 다시 조사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헌징도 실상을 찾아내지 못한 채 옥정(獄情)이 의심스럽다고 하였다. 그러자 이해는 옥사가 이루어지지 못할까 걱정하여 이내 서울에 올라와 격쟁하였는데, 공사(供辭)에서 계원 등을 많이 헐뜯었다. 이에 상은 저주한 것이 의심이 없는데도 계원 등이 옥사를 조사함에 공정하지 못했다 하여 모두 잡아다가 심문하도록 명한 것이다. 이때 저주하는 변고가 매우 성하여 사대부 집안에서도 이것 때문에 옥사가 일어나는 일이 많았다. 상의 뜻은 이를 엄금하려는 것이었는데 계원과 헌징 등이 그 옥사를 느슨하게 처리한다고 의심했기 때문에 이런 명을 내린 것이다.
8월 12일 계축
의주(義州) 사람 백광종(白光宗) 등이 본주 성지(城池)를 수축할 일을 청하였는데, 비국에 내리니, 비국이 회계하기를,
"이처럼 반드시 지켜야 될 지역에 이처럼 지키기를 원하는 백성이 있으니, 민심을 헤아려 보건대 막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양식과 기계를 미처 조치하지 못했고 보면 진실로 크게 수축하는 일을 거행할 수는 없습니다. 먼저 성문 등처를 수개(修改)하고 인하여 일을 담당한 신하에게 병량(兵粮)을 요리하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니, 이 뜻으로 위로하고 타일러서 보냄이 합당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따랐다.
8월 14일 을묘
이 해 봄에 가뭄이 들어 5월이 되도록 비가 오지 않다가 6월에 처음으로 비가 와 백성이 그때에야 파종했는데, 가을이 되자 또 장맛비가 그치지 않았다. 예조가 사문(四門)에 영제(禜祭)를 지낼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8월 15일 병진
영의정 오윤겸이 또 상차하여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곽산군(郭山郡) 백성 김은정(金殷鼎) 등이 능한성(凌漢城) 안의 태초봉(太初峯)과 사인봉(舍人峯) 두 봉우리 사이에 성을 쌓고 집을 지어 곡식을 쌓아두고 들어가 지키기를 청하고 군수 조수령(趙修齡)도 잉임(仍任)시켜 줄 것을 원하였는데,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이 조정에 전문(轉聞)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험한 곳을 가려 성을 쌓아 스스로 보전하기를 도모하려는 것이야말로 백성들의 진심이라 할 것인데, 만일 본읍에서 독자적으로 그 역사를 완성한다면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조수령은 성을 수축하는 기간에 한하여 잉임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16일 정사
오전(吳竱)을 부교리로, 유성증(兪省曾)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8월 18일 기미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동지사 박동선(朴東善)이 아뢰기를,
"청북(淸北)의 관방(關防)이 비단 용골(龍骨)·검산(劍山) 뿐만은 아니니, 여러 성을 수축하여 인민이 들어가 보전할 곳이 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국으로 하여금 급히 헤아려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8월 20일 신유
간원이 아뢰기를,
"과거를 실시하는 날에 사관(四館)041) 의 관원이 모두 문밖에 모여 제생(諸生)을 점검하여 들여 보내며, 이미 들여 보낸 뒤에는 과장(科場)을 돌아다니며 단속하는 것이 예입니다. 그런데 이번 일소(一所)의 종장(終場)에 단지 주장관(主掌官) 한 명만 참관했을 뿐 나머지 삼관(三館)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지 않았습니다. 그날 담당했어야 하는 삼관의 관원을 모두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소서."
두 시험장에 명단을 균등하게 배분하여 기록해야 하는데, 이번에 무과(武科) 일소·이소의 녹명하는 관원이 사정(私情)을 썼으므로 조금 세력이 있는 거자(擧子)는 모두 이소에 속하였습니다. 두 시험장의 녹명한 관원을 잡아다가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경인(李景仁)을 헌납으로, 윤명은(尹鳴殷)·안시현(安時賢)을 정언으로, 이경증(李景曾)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8월 21일 임술
정충신이 치계하여 백성의 소원에 따라 철산(鐵山)의 운암 산성(雲巖山城)을 수축할 것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8월 23일 갑자
태백(太白)이 나타났다.
"가도(椵島)의 명나라 장수를 접빈(接儐)하는 소임이야말로 사기(事機)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중요하니 조금도 비워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접반사 이여황(李如璜)은 병으로 체직되기를 꾀하였고, 이명(李溟)은 또 병을 핑계대고 소를 올려 출발 시기를 늦춰 줄 것을 청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험난함을 피하지 않는 신하의 의리라 하겠습니까. 이여황과 이명을 중하게 추고하고, 급히 이명을 보내어 사신의 일을 중히 하소서. 근래에 외람되게도 편안하고자 하는 상소를 올리는 일이 앞뒤로 서로 잇따랐는데, 정원이 사체를 돌아보지 않고 공공연히 봉입(捧入)하였으니, 색승지를 추고하여 뒷날의 폐단을 막으소서.
음관(蔭官)으로서 각사(各司)의 장관(長官)이 된 자가 간혹 있는데, 반드시 이력(履歷)과 자급(資級)을 따지고 사람을 가려서 임명하여야 됩니다. 군자 정(軍資正) 조창원(趙昌遠)은 직산 현감(稷山縣監)으로 있으면서 치적(治績)이 있다는 이유로 준직(准職)042) 에 제수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만, 6품의 전함(前銜)을 가지고 정3품에 뛰어 올려 제수하는 것은 단계적으로 승진시키는 것이 아닌 것으로서 행정이 전도되었습니다. 체차를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여황 등은 모두 실제로 병이 있었으니, 추고할 필요가 없다. 조창원의 일은 비록 단계를 뛰어넘은 것인 듯하다만, 선행(善行)을 표창하는 일은 이와 같이 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수일(李守一)·이서(李曙)·김자점(金自點)·김시양(金時讓) 등이 강도(江都)에서 돌아와 아뢰기를,
"신들이 그곳에 가서 형세를 살피고 나서 소속된 수령들을 소집해 방어상의 요긴한 곳과 덜 요긴한 곳을 헤아리고 군사의 많고 적음에 따라 담당 지역을 나누어 주었으며 사태 발생시 군사를 첨가할 계획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별도의 단자(單子)로 서계(書啓)합니다. 그리고 부성(府城)을 물려 쌓을 곳도 도면으로 올립니다."
하니, 상이 불러서 물었다. 이서가 아뢰기를,
"조수가 들어오면 배를 대기가 쉬울 듯하나 물살이 매우 급하고, 조수가 빠지면 암초가 모두 드러나 배를 잘 부리는 자라도 마음대로 연안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는데다가 바닷가가 진펄이라서 사람과 말이 통행할 수 없습니다. 연미정(燕尾亭)과 승천부(昇天府)는 진펄은 아니지만 조수가 빠지면 배를 대기가 매우 어렵고, 손돌목[孫梁項]은 좁기는 하지만 물살이 역류하니, 참으로 천연의 보장(保障)이 되는 지역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부성을 물려 쌓는 일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자, 이서와 김자점이 아뢰기를,
"남문(南門)의 성은 내를 건너 물려 쌓고 싶어도 남산이 너무 가까운데, 이는 병가(兵家)에서 꺼리는 것입니다."
하고, 김시양이 아뢰기를,
"영상은 ‘강도의 성은 쌓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우상은 ‘강도는 행행(幸行)할 수 없으니 도성을 지켜야 마땅하다.’ 하고, 체신(體臣)은 ‘강도에 행행하더라도 성을 쌓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외부의 의논에 모순이 많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소견은 어떠한가?"
하니, 이수일과 이서가 모두 아뢰기를,
"성은 마땅히 물려 쌓아야 하는데, 백성은 곤궁하고 재물은 고갈되었으니, 이 점이 난처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만일 강도를 지킬 경우 몇 명 정도를 쓰면 충분하겠는가?"
하니, 자점이 아뢰기를,
"성이 모두 1천 6백여 간(間)에 성가퀴[堞]가 수천에 지나지 않으니, 1만 명의 군사를 쓰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사를 배치한 담당 구역은 몇 곳이며, 서로의 거리는 얼마나 되는가?"
하니, 이서가 아뢰기를,
"전에 이시백(李時白)은 17곳을 정하였는데, 지금은 16곳으로 하였습니다. 거리는 20리가 되기도 하고 10여 리가 되기도 하는데, 20리가 되는 지역은 요긴한 곳이 아닙니다. 군사를 배치한 뒤에 체신의 말을 들으니 ‘갑곶은 급하지 않은 반면 승천부가 요긴하다.’고 하였는데, 이에 신들이 문득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겠다."
하였다.
8월 24일 을축
상이 서교(西郊)에서 열무(閱武)하고 이어 활쏘기 시험을 참관하였다. 기추(騎篘)·모구(毛毬)·육량전(六兩箭)·조총(鳥銃) 등의 기예에 응시한 자가 수백여 명이나 되었는데, 시험을 반쯤 치뤘을 때 해가 벌써 저물었으므로 양사가 일찍 환궁하기를 요청하니, 윤방(尹昉)에게 머물러 시험을 마치도록 명하였다. 수석을 차지한 자는 곧장 전시(殿試)를 보게 하고, 그 나머지는 차등 있게 상격(賞格)을 주었다.
8월 25일 병인
태백이 나타났다.
8월 26일 정묘
태백이 나타났다.
우의정 이정구(李廷龜)가 상차하기를,
"삼가 김시양이 인대(引對)할 때 한 이야기를 듣고 신은 괴이하게 여겨지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이른바 경성에 관한 이야기는 신이 늘 이런 의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도 탑전(榻前)에서 진달드렸습니다. 신의 본 의도는 이 성의 형세가 지켜 방어할 만하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도성이야 말로 팔방의 근본이니만큼 적병이 움직이기도 전에 근본이 먼저 흔들린다면 민심이 크게 무너져서 변경이 필시 뜻을 굳게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기에 나라에서 먼저 경성 서쪽의 지역에 힘을 쏟아 적으로 하여금 지쳐 들어오지 못하게 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는데, 그렇게 되면 그 사이에 그런 대로 힘을 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지난번에 총융사 이서를 보내 경기와 황해도 지역의 형세를 자세히 살핀 뒤 하나의 큰 진(鎭)을 설치하여 적을 막아내는 데 도움을 주게 할 것을 청한 것이야말로 신의 뜻이었는데, 이는 대체로 도성을 버리는 것을 염려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그 뜻을 헤아려 보지도 않고 그저 이 성의 모양만 가지고도 지킬 만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신의 본 뜻과는 서로 어긋나는 것입니다.
강도에 대해서는, 현재의 보장(保障)으로 이보다 나은 곳이 없다는 것은 신이 정묘년043) 에 어가(御駕)를 모시고 두루 돌아볼 적에 벌써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지금 강구하는 것은 단지 성을 쌓을 기지(基址)의 넓고 좁음에 대한 것뿐입니다. 신이 어찌 살펴보기도 전에 불가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필시 김시양이 자세히 듣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임금이 잠시 머물 곳일라도 성이 없어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반드시 의지해야 할 이 보장의 경우이겠습니까. 다만 지금 강도를 믿을 수 있는 곳으로 여기는 것은 물 때문이지 성 때문이 아닙니다. 지금 섬안에 넓게 성곽을 쌓고 본토의 백성과 이주하여 간 사람을 모두 들어가 보전하게 한다면야 참으로 아주 좋겠습니다만, 힘이 넉넉치 못하여 혹 미처 공사를 마칠 겨를이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먼저 연도(沿島)의 방수하는 일에는 힘을 쏟지 않고 단지 옛 성을 위주로 그 주위만 넓힐 뿐이라면, 형세상 필시 그곳에 모두 들어가지 못할 것이고,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반드시 먼저 두려움을 갖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신은 안도감을 갖고 있는 백성을 동요시키고 백성들의 안정된 마음을 꺾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체직을 청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경의 뜻을 모두 알았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병을 조리하며 행공(行公)하라."
하였다.
권심(權淰)을 장령으로, 윤구(尹坵)를 헌납으로, 남이웅(南以雄)을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
8월 27일 무진
태백이 나타났다.
영의정 오윤겸(吳允謙)이 열일곱 차례나 사직서를 올려 체직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8월 28일 기사
태백이 나타났다.
오윤겸을 판중추부사로, 김세렴(金世濂)을 사간으로, 박안제(朴安悌)를 장령으로, 김휼(金霱)을 정언으로 삼았다.
8월 29일 경오
상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명나라 차관(差官) 백계안(白繼安)을 접견하였다. 계안이 곡식의 무역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가 봄에는 가물고 여름에는 큰물이 져서 변경을 지키는 장사(將士)도 현재 양식이 없소만, 힘이 닿는 대로 구원하겠소."
하였다. 계안이 또 개인적으로 조총(鳥銃)·전마(戰馬) 등의 물건을 요구하니, 상이 주도록 명하였다.
8월 30일 신미
자전(慈殿)의 병이 완쾌된 경사로 별시(別試)를 베풀어 민우(閔愚) 등 15인을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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