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5권, 인조 9년 1631년 9월

싸라리리 2025. 12. 29. 12:18
반응형

9월 1일 임신

집의 한필원(韓必遠)이 아뢰기를,
"지난번 문과 별시(文科別試)의 초시(初試) 때, 신이 감시관(監試官)으로 이소(二所)에 갔는데, 사관(四館)의 관원 6인이 와서 1등을 차지한 다섯 사람의 피봉(皮封)을 뜯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관원 1인이 뒤따라 도착하였는데, 시관(試官) 등이 처음에는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다가 끝내는 참여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그 관원이 자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개봉한 것을 분하게 여겨 전시(殿試)를 보는 날에 그 다섯 사람을 정거(停擧)시켜 끝내 전시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등제(等第)를 마친 뒤 개봉하여 출방(出榜)하는 것은 처음부터 거자(擧子)와는 상관이 없는 일인데도 이렇게 너무도 심한 행동이 있게까지 되었습니다. 신이 제대로 점검하지 못하여 소란스럽게 되었으니, 체척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9월 2일 계유

헌부가 아뢰기를,
"과장(科場)을 규찰하고 점검하는 것은 전적으로 감시관의 책임인데, 규정외의 일을 행하여 잘못이 없지 않으니, 형세상 재직하기가 어렵습니다. 한필원을 체차(遞差)하소서. 국가에서 선비를 시험하는 일은 사체가 극히 중한데, 사관(四館)이 모두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미리 먼저 개봉한 것은 상규(常規)를 어긴 점이 있습니다. 뒷날의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니, 시관을 모두 추고하소서. 과거를 보일 때 책임이 시관에게 있으면 시관이 당하고 책임이 사자(士子)에게 있으면 사자가 당해야 됩니다. 1등의 피봉을 먼저 개봉한 것은 시관의 잘못인데, 사자가 어찌 그 사이에 간여하였겠습니까. 미처 참여하지 못했던 사관의 관원이 사자에게 노여움을 전가하여 강(講)한 뒤 전시를 보는 날에 갑자기 모두 정거하였으니 지극히 해괴한 일입니다. 해당 관원을 먼저 파직한 뒤 추고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태만한 것을 미워하여 참여를 허락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체통에 맞는 일이다. 시관의 처사는 별로 잘못된 것이 없다."
하였다.

 

9월 3일 갑술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이 차자를 올려 만성(灣城)을 수축할 수 없다는 뜻을 진달하면서 아뢰기를,
"만일 대대적으로 군대와 양식을 조발(調發)하여 군비(軍備)를 다해서 지키지 못한다면 우선 정지하고 때를 기다리는 편이 낫겠습니다."
하였는데,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대대적으로 군대와 양식을 조발할 겨를이 본래 없으나 점차적으로 수리하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을 듯합니다. 만일 정충신의 말대로 하면 청북(淸北)의 인심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어 의주에 도로 모인 백성들이 다시 옮겨갈까 염려됩니다. 체신(體臣)의 출사를 기다려 상의하여 처치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4일 을해

태백이 나타났다.

 

헌부가 아뢰기를,
"영남은 사람이 많고 땅이 커서 기무(機務)가 번다하고 여러 가지로 책응해야 하니, 방백(方伯)의 소임을 십분 신중하게 뽑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임 감사 남이웅(南以雄)은 이 소임에 합당치 않은 것은 아니나, 몸에 병이 있고 성품이 느슨한 데다 술을 많이 마시는 결점이 있으니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김남중(金南重)을 집의로, 이명웅(李命雄)을 특별히 임명하여 형조 좌랑으로, 조경(趙絅)을 지례 현감(知禮縣監)으로 삼았다. 명웅은 일찍이 옥당에 있으면서 외부 사람을 잡아 왔다가 액정서의 아랫것들과 시비에 얽혀들었고, 조경은 여러 차례 바른 말로 뜻을 거스렸기 때문에 이렇게 임명한 것이다.

 

진사 유문서(柳文瑞) 등이 상소하여 용인현(龍仁縣) 심곡리(深谷里)의 조광조(趙光祖) 서원에 사액(賜額)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해조가 아뢰기를,
"제유(諸儒)들이 서원에 사액해 줄 것은 원하니, 어진이를 존경하고 도(道)를 위하려는 그 정성이 가상합니다. 도봉 서원(道峯書院)과 죽수 서원(竹樹書院)의 예에 따라 특별히 편액(扁額)을 내리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세 곳에 사액하는 것은 지나친 듯하니, 우선 서서히 하라."
하였다. 그 뒤에 유문서 등이 또 상소하기를,
"정몽주(鄭夢周)의 서원은 숭양(崧陽)·임고(臨皐)·충렬(忠烈)의 세 곳에 있는데 모두 사액하였고, 이황(李滉)의 서원은 이산(伊山)·도산(陶山)·여강(廬江)의 세 곳에 있는데 여기도 모두 사액하였습니다. 진실로 서원이 있으면 반드시 편액을 내리는 것이 전례인데, 어찌 많다고 하여 혐의가 되겠습니까."
하였으나, 상이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9월 5일 병자

태백이 나타났다.

 

나주(羅州) 민가에서 소가 암송아지를 낳았는데, 목이 하나에 머리가 둘, 귀가 넷, 눈이 넷, 입이 둘, 코가 둘이었다.

 

간원이 아뢰기를,
"어제 갑자기 조경(趙絅)을 지례 현감(知禮縣監)에 제수하는 명이 있었습니다. 조경은 오랫동안 경연(經筵)에서 모시면서 몸을 돌보지 않고 충성을 다하는 절의가 자못 드러났는데, 하루아침에 까닭없이 외직에 보임하니, 여론이 모두 해괴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직과 외직을 번갈아 임명하는 것은 본래 안 될 것이 없다.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도체찰사 김류가 상차하기를,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임금의 명을 지연시키는 것은 죄이고 집에서 결재하며 처리하는 것도 죄이므로 온갖 생각으로 헤아려 보았으나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겠기에, 부득이 차자 하나를 갖추어 감히 상께 아뢰고자 합니다.
의주는 관방(關防)의 중요한 곳인데, 본도의 사민(士民)들이 앞뒤로 항의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이야말로 뭇 백성의 진정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조정에서도 어찌 하루인들 의주를 잊었겠습니까. 다만 만상(灣上)에 끼어 있어 적과의 경계가 오직 옷의 띠와 같은 강물 하나뿐이니, 만일 1만 명의 군사를 조발하여 지키지 않는다면 위급할 때 아무 도움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1만 명 군사의 1년치 양식이 미곡 5만 석인데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지금 안주(安州)와 황주(黃州) 두 성에 마음을 쏟는 것도 지당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안주를 지키는 군사가 7천 명에도 차지 않는데, 군량은 두 곳이 모두 몇 달을 지탱하지 못할 형편입니다. 그러니 무슨 물력(物力)으로 또 의주의 1만 명이나 되는 군사의 양식을 마련하겠습니까.
본부(本府)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뭐라고 이야기하더라도 도신(道臣)의 입장에서는 사세(事勢)로 타일러서 조정의 뜻을 알도록 해야 마땅할텐데 지금 먼저 버리겠다는 말을 하여 원망하고 헐뜯는 결과를 빚고 있으니, 신은 진실로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평양성의 경우는 그 안에 백성의 호수가 수천이나 되는 만큼 다른 고을의 군사를 번거롭게 하지 않더라도 넉넉히 수축할 수 있고 백성의 힘을 인하여 지키면 군사를 징발하는 시끄러움도 없어 그 형세가 의주와는 같지 않습니다. 게다가 백성이 심정적으로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한 꺾어 누르기도 어려우니, 민원에 따라 수축한다 해도 안 될 것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의주는 변이 일어난다면 순식간에 이루어질 것인데, 용골성(龍骨城)은 멀리 몇 사(舍)044)   밖이나 떨어져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미리 증원시켜 들어오게 하면 백성들이 반드시 견디지 못할 것이고 위급함에 임하여 물러가 지키려 하면 형편이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도신으로 하여금 사세를 참작하여 좋은 계책을 따라 계문하여 처치하도록 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현재 용골 등 여러 성은 벌써 수축하였으니 의주도 앞으로 차례로 수축하면 다만 앞뒤의 조금 더딘 것이 있을 뿐입니다.
경기와 황해도 사이에 진(鎭)을 설치하여 강도의 외부를 막아주는 울타리로 삼는 것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겹문을 만들어 사나운 일에 대비하는 뜻인 만큼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만 황주(黃州)의 개축을 이제 겨우 시작하였으니 해서(海西)의 군사를 다른 곳에 조발하여 쓸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흉년을 만나 사람들이 제대로 생활하지 못하니 경기 고을의 백성을 다시 토목공사에 몰아 넣을 수는 없습니다. 갖가지 어려운 형편이 이와 같으니, 우선 후일을 기다려서 의논해 처리해도 늦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받아들였다.

 

9월 6일 정축

수원 부사(水原府使) 장신(張紳)이 상소하여 강도(江都)의 편의(便宜)에 대하여 진달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강도에 성을 쌓는 일은 체신이 출사하기를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화량(花梁)·영종(永宗)·초지(草芝)·제물(濟物)의 4보(堡)를 옮겨 정하는 일에 대해서는, 조종조(祖宗朝)로부터 연해(沿海)에 진(鎭)을 설치한 목적이 오로지 왜구(倭寇)와 해적(海賊)을 방비하기 위해서인 만큼 그 뜻이 범연한 것이 아니고, 강도에서 적을 방어하려면 전적으로 수군에 의지해야 하는데 임금이 그 곳으로 옮길 경우 제진의 전선과 병선을 강도에 모이게 해야 할 것입니다. 약간의 토병(土兵)을 철수하여 옮기는 것이야 본디 큰 일이 못 되겠지만 설립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는 점 등을 감안한다면 가볍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육군의 담당 구역을 나누어 정하는 일은 3, 4처의 요해지를 골라 각지에 수천 명의 군사를 주둔시켜야 하겠습니다만, 지금 나눈 군대도 한 곳만을 붙박이로 지켜서 바꾸지 못하게 하는 뜻에서가 아니라 실로 위급할 적에 군사를 더하려는 목적에서이니, 자꾸만 계속해서 고칠 수는 없습니다. 10만의 쌀을 양호(兩湖)와 경기도 내의 바닷가 여러 고을에 반씩 나누어 저장하자는 일은 구관 당상(句管堂上)이 지금 한창 조치하고 있으니 우선 준비한 숫자를 보아 그 때 가서 처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오숙(吳䎘)을 경상 감사로 삼았다.

 

9월 7일 무인

운산(雲山)의 사민(士民)이 용각 산성(龍角山城)을 쌓기를 청하였는데, 비국이 허락할 만하다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9일 경진

이때 군문(軍門)의 차관(差官) 왕승은(王承恩)이 표류민(漂流民)을 이끌고 와서 그들의 청람포(靑藍布)를 양식과 바꿀 목적으로 휘하의 장화(張和)를 보내어 요청해 왔다. 상이 접견하려 하자, 간원이 아뢰기를,
"군문의 차관이 표류민을 끌고 왔으니 참으로 더욱 후하게 대접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만, 저들은 관직도 없는 일반 백성들인데, 이찌 꼭 지존(至尊)을 굽혀 하나의 천한 이서(吏胥)와 더불어 읍양(揖讓)의 예를 행하며 동서로 나누어 앉겠습니까. 재신(宰臣)으로 하여금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차인이 직명(職名)은 없지만 예에 따라 접견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하였다.

 

9월 10일 신사

삼남(三南)에 어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무재(武才)를 시험하였다. 경오년045)   봄에 경상 좌수영 우후(虞候) 이응징(李應徵)이 상소하여, 남쪽에 근신(近臣)을 특별히 파견하여 무재를 시험하고 그 중에서 더욱 뛰어난 자를 골라 변장(邊將)을 제수하거나 재주에 따라 거두어 쓰기를 청하니, 병조가 회계하기를,
"본조 역시 재주를 품은 채 헛되이 늙어가는 탄식이 있을까 걱정하여 이미 각도로 하여금 무재가 있는 사람 각 세 명씩을 시취(試取)하여 계문하도록 하였습니다만, 지금 이 상소를 보니 과연 크게 격려하는 일에 부합됩니다. 선조조(宣祖朝)의 예에 따라 근신을 특별히 파견하여 재주를 시험하고 논상케 하소서."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서 윤계(尹棨)·심연(沈演)·신계영(辛啓榮)을 공청(公淸)·전라·경상 등 도에 파견하여 무재를 시험해 보고하고 차등 있게 논상토록 하였다.

 

상이 숭정전(崇政殿)에서 장화(張和)를 접견하였다. 장화가 서울에 들어온 지 여러 날이 되어 상이 접견하려 하였으나, 장화가 직명이 없어 관대(冠帶)를 착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양하니, 상이 예관(禮官)에게 전례를 상고하여 아뢰게 하였다. 예관이 회계하기를,
"선조조(宣祖朝)에 차인 서룡(徐龍)이란 자가 있었는데, 천한 사람이지만 군문의 분부로 왔다고 하여 선조가 불러 접견하였습니다. 지난번에 표류해 온 사람 왕도륭(王道隆)도 천한 사람인데 숭정전에서 불러 접견하였으니, 이 예에 따르소서."
하니, 상이 드디어 숭정전에 납시어 접견하고, 인하여 군문이 표류민을 실어 돌려 보낸 뜻을 사례하였다. 장화가 아뢰기를,
"표류민에게 돈을 주고 압송하는 것은 당연한 예인데 어찌 사례하십니까. 지금 왕 참정(王參政)이 양식을 사려고 보낸 청포(靑布)를 가지고 왔으니, 조정의 분부를 얻어 관향사(管餉使)에게 가서 바꾸어 샀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원대로 해 주겠다."
하였다. 장화가 타고 온 배가 견고하지 못하여 다른 배를 사게 해 줄 것을 요청하니, 상이 수선하여 보내도록 명하였다.

 

9월 11일 임오

태백이 나타났다.

 

9월 12일 계미

헌부가 아뢰기를,
"용만성(龍灣城)은 천연의 요새인데, 이제 난리로 입은 상처를 수습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임 부사 민영증(閔栐曾)은 경력으로 볼 때 청렴하고 근신하다는 이름은 있으나 활쏘고 말타는 기예가 부족하여 서생(書生)과 다를 바 없으니, 승진시켜 거진(巨鎭)에 임명하는 것은 실로 합당치 않습니다. 체차를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체신(體臣)에게 물어 처리하라."
하였다. 체신이 대론(臺論)대로 개차(改差)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3일 갑신

태백이 나타났다.

 

간원이 아뢰기를,
"지난번 유격(遊擊)이 들어왔을 때, 접대소(接待所)의 당상과 낭청이 먼저 모두 모이지를 않았으므로 명나라 장수가 화를 내어 걸어서 대궐에 왔는데, 당상 한 사람이 큰길에서 만나자 말에서 내려 수행하면서 낭청에게 분주히 애걸하도록 하였으니, 거꾸로 바뀌어 너무도 예를 잃었습니다. 모두 파직을 명하소서.
중국의 차관(差官)을 접대하는 예에는 높고 낮은 등급이 있습니다. 전부터 유격의 접대에는 으레 호조와 예조의 참의를 당상으로 삼았었는데, 지난번 권확(權鑊) 등이 피사(避辭)하여 체직됨으로 인하여 그만 아경(亞卿)046)  으로 대신하였으니, 사체(事體)에만 미안할 뿐 아니라, 앞으로의 폐단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결같이 옛 예에 따라 시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먼저 나아간 당상과 낭청은 꼭 파직할 것이 없다."
하였다.

 

고용후(高用厚)가 동지사(冬至使)로 경사(京師)에 갔을 때 보삼(補蔘)047)  을 멋대로 사용했던 일이 발각되었으므로 마침내 영덕(盈德)의 유배지(流配地)에서 잡아와 국문(鞫問)하고 진주(晋州)에 유배하였다. 서장관 나의소(羅宜素)는 용후가 준 옷을 받은 것 때문에 역시 그 관직을 깎였다.

 

원계군(原溪君) 원유남(元𥙿男)이 죽었다. 유남은 젊어서 용력(勇力)으로 소문이 났는데, 임진 왜란 때에 권율(權慄)의 군영에 소속되었다가 죄가 있어서 형벌을 받게 되자 공을 세워 스스로 보답하겠다고 청하였다. 그리고는 이내 적군 속으로 달려 들어가 몇 사람의 머리를 베니 권율이 장하게 여겨 죄를 풀어주었다. 계해년048)  에 그 아들 원두표(元斗杓)와 함께 정사 공신(靖社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9월 15일 병술

태백이 나타났다.

 

윤방(尹昉)을 영의정으로, 이민구(李敏求)를 이조 참의로, 김준룡(金俊龍)을 북병사로 삼았다.

 

9월 16일 정해

유성이 천시원(天市垣)에서 나와 미성(尾星) 위로 들어갔다. 화성이 여귀성(輿鬼星)으로 들어갔다.

 

헌부가 아뢰기를,
"지금 교생(校生)을 고강(考講)하는 일이 있으니 따로 어사를 파견해야 마땅한데도 조정이 소란스런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여 본도의 도사(都事)에게 강경(講經)을 시험하게 하였으니, 구차하고 소홀한 일이 될 듯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시재 어사(試才御史)가 장차 열읍을 두루 순회하게 되었으니, 겸하여 이를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헤아려 처리하게 하였다. 비국이 편하겠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강도 구관 당상(江都句管堂上) 김자점(金自點)이 아뢰기를,
"나주(羅州)·영광(靈光)·서산(瑞山)·부안(扶安)을 강도에 소속시켜 등주(登州)·동래(東萊)와 통상하게 하고, 제주에서 채취하는 미역과 각도의 어염세(魚鹽稅)를 모두 본청에 소속시키며, 삼명일(三名日)의 방물(方物)을 면포(綿布)로 바꾸어 거둬 배 만드는 자본을 삼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미역의 채취와 어염세를 거두는 것은 필시 뒷날의 폐단이 있을 것이니, 다시 의논하여 처치하라."
하였다.

 

9월 17일 무자

영의정 윤방(尹昉)이 상차하여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가도(椵島)에 양식이 떨어지자 독부(督府)의 차관(差官)이라고 일컬으며 표문(票文)을 가지고 나오는 자가 매우 많았다. 수비(守備) 강신(江莘)이 두 배에 재물을 싣고서 가정(家丁)과 수수(水手) 모두 80여 명을 거느리고 안악(安岳)에 머문 지가 한 달이 가깝게 되었다. 또 소만량(蘇萬良)·장천록(張天祿)·장홍표(張弘驃)·이성동(李成棟)·이국주(李國柱) 등이 도사(都司)라 일컫기도 하고 천총(千摠)이라 일컫기도 하면서 열 척의 배에 재물을 싣고 각자 가정과 수수 모두 3백여 명을 거느리고 한꺼번에 나왔다. 바닷가의 군읍(郡邑)이 그들의 등쌀에 못이겨 장차 지탱하지 못하게 되자, 비국이 강신을 결박하여 보내자고 청하였는데, 얼마 뒤에 다시 아뢰기를,
"강신이 데리고 온 사람들이 무려 수백 명이나 되는 만큼 반드시 즐거운 마음으로 오라를 받지 않고 필시 옮겨 다니면서 싸우는 폐단이 있게 될 것이니, 그의 죄상을 진정하여 독부의 처치를 기다리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8일 기축

태백이 나타났다.

 

이전에 추신사(秋信使) 박로(朴𥶇)가 6월에 오랑캐 지역으로 들어갔는데 물에 막혀 나아가지 못하다가 도착하고 보니 오랑캐가 7월에 모든 군대를 동원하여 서쪽으로 대릉하(大凌河)를 【 명나라가 새로 쌓은 성이다.】 침범한 뒤였다. 이 때문에 박로가 국서(國書)를 전하지 못하고 끝내 심양(瀋陽)에 머물게 되었다.

 

주강에 《서전(書傳)》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지사 이귀(李貴)가 나아가 아뢰기를,
"현재 노적(奴賊)이 한창 으르렁거리고 있고 역옥(逆獄)이 잇따라 일어나며 천재 지변이 자주 나타나서 국사를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되어 성상께서 홀로 밤낮으로 부지런히 애쓰시니, 신은 가슴이 아픕니다. 예로부터 임금은 반드시 의지하고 맡기는 사람이 있어 대신을 의지하기도 하고 훈신(勳臣)을 의지하기도 하였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외척(外戚)에게 기울어지고 여자와 환관의 말을 듣게 마련이었습니다. 성상에게는 이 몇 가지가 모두 없는데도 어진 재상을 얻지 못한 까닭에 일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공적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정(反正) 후에 의지하고 맡긴 사람을 보건대 예컨대 이원익(李元翼)은 청렴하고 검소하기는 했지만 본디 학술이 없고, 오윤겸(吳允謙)은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공부하기는 했지만 그 찌꺼기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명상(名相)으로 일컬어지면서도 끝내 세도(世道)를 만회하는 효과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조경(趙絅)이 박지계(朴知誡)를 논하면서는 벌레에 견주었고 이서(李曙)를 논할 때는 쥐에 견주었는데, 심지어 신의 몸에 대해서는 그 고기를 먹고 싶다고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선인(善人)의 말이라 하겠습니까.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현재 대간이 되어 곧은 절의를 행하는 자는 반드시 남을 헐뜯고 욕한 다음에야 명망을 얻는 것입니까. 또 한번 외직에 보임되자 양사가 함께 다투고 있는데, 신은 그 뜻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남한 산성에 가 보고서야 이서의 사람됨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견고한 성첩(城堞)과 웅장한 관사(官舍)와 양식의 저축 등을 어떻게 다 꾸려나갔는지 모르는 사이에 탄복하였습니다.
또 예를 의논하는 일을 지금껏 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지난번 대간은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않는 이유는 추숭(追崇)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성상께서 나이가 어린 임금도 아닌데, 대간이 어떻게 감히 이처럼 기만한단 말입니까. 신은 아버지의 위[考位]가 미정인 상태라서 날씨가 가문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려할 일은 변경(邊警)도 아니고 천변(天變)도 아닙니다. 윤기(倫紀)가 바루어지지 않아 대원군의 사당이 아직도 여염에 있는데, 신은 성상에게도 미진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날을 가려 친히 제사를 지내고 전일 있던 별궁(別宮)에 봉안(奉安)한 뒤 명나라에 주문(奏聞)하여 대례(大禮)를 정하소서. 그러면 대륜(大倫)이 바르게 될 것이니 국가로서 그만한 다행이 없을 것입니다. 장유(張維)가 ‘아버지의 사당은 일정한 위가 없다.[禰無定位]’049)  고 한 말이나 장현광(張顯光)이 ‘편안하고 크게 여길 수 없다.[不可豫大]’050)  고 한 말은 매우 형편없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이 젊은 무리들의 위세가 극히 중하여 저들의 논의를 따르면 모두 청환(淸宦)과 현직(顯職)에 오르므로 대신이라도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지를 못한다. 지난번 옥당의 관원을 추고만 하도록 한 것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인데, 떼를 지어 일어나 구해 주려 하면서 ‘조종조(祖宗朝)에서는 친히 옥당에 임하였다.’고까지 말하였다. 그러나 그 때의 옥당이 어찌 오늘의 옥당과 같았겠는가. 옥당은 책을 읽고 정사를 논하는 곳인데, 어찌 싸움에 간여할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는 ‘임금의 말을 따를 수가 없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형편인데, 그들의 소견이 이와 같으니 지극히 한심스럽다."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허목(許穆)이란 자는 예를 의논한 일 때문에 박지계(朴知誡)를 제멋대로 학적(學籍)에서 삭제하였는데, 그 때문에 지계의 제자들이 모두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고 하니, 신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한 유생의 망론(妄論) 때문에 전 지평을 학적에서 삭제하기까지 하였으니 매우 괴이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허목의 일은 정말 너무도 부당하니, 정거(停擧)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9월 19일 경인

태백이 나타났다.

 

영의정 윤방(尹昉)이 두 번째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상이 강도의 양식을 마련하려고 비국의 계사에 따라 호조에게 수백 동(同)의 면포를 내어 돕도록 하니, 호조가 면포 2백 동, 은 1천 냥과 산릉도감(山陵都監)이 쓰고 남은 면포 50동을 이송하였다.

 

이전에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이 각도의 군사를 번(番)을 나누어 입방(入防)시킬 일을 상차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면서 말이 명백하지 못했고 군사를 나누는 것도 고르지 못했으므로 상이 하교하였다.
"호서의 속오군(束伍軍)이 거의 1만에 이르고 보면 15년이 지난 뒤에야 드물게 입방하고 자주 입방하는 등 고르지 못한 폐단이 있게 될 것인데, 비국의 회계를 보면 5년이 지난 뒤에는 고되고 덜 고된 차이가 현격해질 것이라고 하였으니, 살피지 못했다 하겠다. 정충신이 곤외(閫外)의 장수로 임명되어 정성을 다해 계책을 진달했는데 묘당이 전혀 채용하지 않으니 진실로 한탄스럽다. 유사 당상은 살피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려우니, 추고하라."

9월 20일 신묘

태백이 나타났다.

 

상이 강릉(康陵)051)  ·태릉(泰陵)052)  에 참배하려 하였는데, 대간과 대신이 천재 지변이 거듭 일어난다는 이유로 우선 정지하기를 요청하니, 상이 이에 따랐다.

 

민광훈(閔光勳)을 지평으로 삼았다.

 

시재 어사(試才御史)에게 남방의 군량과 군기를 검열하는 일을 겸임시켜 근만(勤慢)을 매기도록 하였는데, 체찰사의 의논을 따른 것이다.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참찬관 이경여(李敬輿)가 아뢰기를,
"요즈음 상하가 꽉 막힌 채 마음이 통하지 않아 대각의 기운이 꺾이고 언로가 막혔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제대로 국가를 다스리겠습니까. 계해년 초에 경연에 입시했을 때는 모두들 기뻐하며 고무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지금 시강(侍講)하는 사람들은 도리어 근심하고 위축되는 빛이 있습니다. 이는 필시 물흐르듯 따르시는 성상의 미덕이 차츰 처음과 같지 않아서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조경(趙絅)이 더할 수 없이 선한 사람은 아니라 할지라도 외간에서는 모두들 ‘감히 할 말을 다 한다.’고 칭찬하는데, 지금 특명으로 외직에 보임시켰으니, 삼가 국가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겨집니다."
하니, 상이 잠자코 있었다.

 

9월 21일 임진

태백성이 나타났다.

 

상이 가도(椵島)의 차관(差官) 유격(遊擊) 강정국(江定國)을 숭정전(崇政殿)에서 접견하였다. 이때 가도에 굶주림이 심하여 백계안(白繼安)이 섬에 돌아오기도 전에 또 강정국을 보낸 것이다. 상이 불러서 보자, 정국이 아뢰기를,
"지금 총진(摠鎭)이 저를 위임하여 보낸 목적은 단지 서방의 양식을 구해 오라는 것입니다. 섬안의 백성들은 모두들 현왕(賢王)께서 먹여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가 불행하여 해마다 흉년이 들었으나 총진의 요청이 지극히 간절했기 때문에 민폐를 돌아보지 않고 이미 5천 포(包)를 힘껏 마련하여 뜻에 부응하기로 하였소."
하였다. 정국이 아뢰기를,
"제가 출발하기 전에 백 유격(白遊擊)의 표첩(票帖)이 먼저 도착하였으므로 총진도 5천 포의 무역을 허락한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어찌 섬 백성들을 두루 살리겠습니까. 제가 올 적에 총진이 분부하기를 ‘만일 요청을 허락받지 못하면 섬으로 돌아오지 말라.’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향신(餉臣)에게 물어서 처리하겠소."
하였다. 정국이 아뢰기를,
"관향사(管餉使)에게 묻게 되면 왕복하는 사이에 필시 시일이 많이 걸릴 것이니, 저는 반드시 지연시킨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도 섬의 급한 사정은 알고 있소만 향신에게 물으려는 것은 미곡(米穀)의 실제 숫자를 알아서 처리하려는 것이지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오. 중국의 백성도 우리의 백성과 같은데, 구원할 만하면 어찌 차마 괄시하겠소."
하였다. 인하여 예물을 주니 정국이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면서 물러갔다. 비국이 아뢰기를,
"정국의 요청이 매우 간절하여 전혀 허락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3천 포를 더하여 허락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다음날 정국이 접대소(接待所) 당상과 만나기를 요구하며 말하기를,
"내가 온 목적은 오로지 양식을 구하는 것인데, 만일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많은 민중이 필시 앉아서 굶어 죽기를 기다리지는 않을 것이오. 그 형세로 볼 때 앞으로 육지에 나와 식량을 찾게 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도독도 어쩌지 못할 것이오. 지난번에 5천의 곡식을 얻었다 하더라도 이것으로는 하루 먹기에도 부족하니, 1만 석을 채우지 않으면 결코 구제하지 못할 것이오."
하고, 인하여 크게 성을 내며 급히 돌아가려 하였다. 비국이 이에 다시 2천 포를 첨가하여 허락하기를 요청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3일 갑오

경기도의 강화·교동(喬桐)·통진(通津)·김포(金浦)·교하(交河)·부평(富平)·양천(陽川)·인천·금천(衿川)·양지(陽智) 등 10읍에 우박이 크게 내렸다.

 

9월 24일 을미

영의정 윤방(尹昉)이 나와 사은하고 재이(災異)에 대해 진달해 아뢰면서 면직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오윤겸(吳允謙)을 영돈녕부사로 삼았다.

 

9월 25일 병신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특진관 남이공(南以恭)이 아뢰기를,
"정묘호란 이후로 백관이 융복(戎服)을 입은 지 지금 벌써 4, 5년이 되었습니다. 진실로 자강(自强)하는 방법에 도움이 있는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상하가 문란해져 귀천(貴賤)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난번 대군(大君)의 길례(吉禮) 때 관대(冠帶) 차림으로 예를 행하니, 도민(都民)들이 보고 ‘다시 한관(漢官)의 위의를 보게 되었다’053)  고 하였습니다. 장복(章服)의 중한 제도를 이와 같이 오랫동안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에 소견이 없지 않다. 또 듣건대 명나라는 노적(奴賊)이 바야흐로 황성(皇城)을 포위하고 있는데도 융복을 입지 않고 있다 한다. 이 일을 대신에게 의논하라."
하였다. 영상 윤방(尹昉)이 의논드리기를,
"변란 뒤에 별로 자강한 일이 없으니, 융복에 관한 한 조목은 허문(虛文)에 불과합니다. 만일 군신 상하가 백성을 구하고 변방을 굳게 하는 데에 한결같이 뜻을 둔다면, 편안할 적에 위태함을 잊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지 융복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12월 1일부터 관대를 회복하도록 하였다.

 

9월 26일 정유

간원이 상차하기를,
"신들은 듣건대 상서로움이 많으면 그 나라가 창성하고 재이(災異)가 많으면 그 나라가 망한다 하였습니다. 춘추 시대 2백 42년 간에 위태롭고 어지러운 나라가 52국이었는데 그 나라들이 재이가 특히 성하였습니다만, 실로 1년 안에 여러 차례 중첩하여 나타나기를 오늘날과 같이 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초봄에 불이 태조의 진전(眞殿)에 미쳤고 6월에는 남쪽 지방에 서리가 내렸으며, 지진이 일어나고 냇물이 말라붙는가 하면 반년 동안 비가 오지 않았으며, 형혹성(熒惑星)이 궤도를 이탈하고 태백이 대낮에 나타나는 등 괴이하고 놀랄 만한 변고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달 21일에 발생한 우레와 우박의 변고는 더욱 놀랍고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천둥과 번개가 번쩍이고 폭풍우가 몰아닥쳐 화곡(禾穀)이 모두 결딴났으므로 들판마다 통곡하는 소리로 가득합니다. 신들은 국가가 하늘에 무슨 죄를 얻었으며 하늘이 무엇 때문에 노한 것인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 오늘날의 일이 급하게 되었다 하겠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충직한 선비를 진출시켜 감히 할 말을 다하는 길을 열어주시고, 자신의 지혜만 최고로 여기면서 남은 모자라게 여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심은 물론, 분한 마음을 품어 불평스럽게 여기는 것을 경계하소서. 급하지 않은 역사는 중지하고 명분없는 비용은 억제하며, 병기를 수선하고 군사를 조련하여 화친을 믿을 만하다고 여기지 말 것이며, 흉년에 대처하는 정사를 익히 강구하여 반드시 진휼(賑恤)하는 것을 급한 업무로 삼으소서. 마구 세금을 거두는 것이 백성들을 병들게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절용(節用)을 힘써야 되고, 사치 풍조가 풍속을 파괴시키는 것을 염려한다면 검소한 생활을 반드시 먼저 하여야 됩니다. 옛 풍습을 일신하여 놀랄 정도로 새롭게 고쳐 시작하면, 재앙을 상서로 변화시키고 화패(禍敗)를 복으로 되돌릴 수 있으니, 어찌 백성의 원망을 걱정하며 변경(邊警)을 두려워하며 천재와 변고를 염려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차자 내용이 지론(至論) 아닌 것이 없다. 내가 가슴에 새겨 스스로 힘쓰겠다."
하였다.

 

9월 27일 무술

개성부 유수 이덕형(李德泂)이 치계하기를,
"본부의 생원 이장형(李長馨) 등이 신에게 글을 올리기를 ‘조종조로부터 본부의 유생을 우대하여 교생(校生)까지도 고강(考講)하는 일을 행하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전례를 상고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예조가 한결같이 옛 예를 따라 고강하지 않도록 하여 옛 도읍의 선비를 위로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구봉서(具鳳瑞)를 수찬으로 삼았다.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지경연 이귀(李貴)가 아뢰기를,
"박지계(朴知誡)를 유적(儒籍)에서 삭제한 사자(士子)를 정거(停擧)하라는 상의 명이 있었으니, 사관(四館)의 관원이 된 자는 즉시 받들어 시행했어야 마땅한 데, 사관에게 물었더니 뭇 사람의 의논에 저지당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듣건대 성균관에서 크게 의논하는 일이 있다고 하는데, 앞으로 다시 무슨 일을 만들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지난번 전교 중의 괴망(恠妄)이란 글자 때문에 공관(空館)하기까지 하였는데, 지금은 또 이와 같이 시끄러우니, 무슨 의논들을 하는 것입니까."
하였다. 이때 조형(趙珩)이 대교로 입시하였다가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정거에 관한 일로 중학(中學)에 모였는데, 사관의 논의가 일치되지 않아 정거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오늘날의 일이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임금이 그르게 여기는 자가 있으면 전조(銓曹)는 감히 주의(注擬)하지 않아야 될 듯한데, 지금 조금도 거리낌없이 곧바로 의망(擬望)하여 고쳐 의망하라는 전교까지 있게 하였으니 지극히 놀랍습니다. 심지어는 사관이 직접 하교를 받고도 아직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 감히 이토록까지 임금의 명을 거역할 수 있습니까.
또 최명길(崔鳴吉)이 무슨 과실이 있기에 정부(政府)에 의망하지 않는 것입니까. 만일 반드시 명망이 무거운 자로 해야 한다면, 김기종(金起宗)은 전부터 인망이 가벼웠습니다. 그런데도 여기에 의망한 것은 다른 까닭이 없습니다. 요사이 들으니 김기종이 추숭(追崇)을 배척하는 논을 주도한다 합니다.
또 ‘이귀에게 경연을 겸임하지 못하게 하면 잡스런 의논이 없을 것이다.’는 이야기도 나돌고 있는데, 그 계획이 이루어졌더라면 신이 어떻게 오늘 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장유(張維)는 ‘예(禰)는 정해진 위(位)가 없으니, 선조(宣祖)를 예로 하고 대원군은 고(考)라고 하는 것이 합당하다.’ 하였는데, 고와 예가 다른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온 조정이 분노하는 것을 경이 어찌 홀로 이와 같이 하는가. 저들은 추숭하는 일을 인륜을 어지럽히는 일이나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일로 생각하는 것인가. 나의 소견으로는 강상(綱常)에 죄를 얻은 것에 견줄 바가 아닌데도, 이렇게까지 다투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임금이 그 부모를 높이고 싶어하니, 큰 변고만 아니라면 곡진하게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지금은 억제할 뿐만 아니라 망신을 주고 욕보이기까지 하므로 내가 이것을 욕스럽게 여겨 바로 거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전조의 주의도 형편없기 짝이 없다. 그들의 의논에 따르면 영달시키고 그들의 의논을 거스르면 배척하니, 사람들이 어찌 빌붙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홍서봉(洪瑞鳳)이 어찌 꼭 최명길보다 낫겠습니까. 상이 반드시 그 옳고 그름을 밝히려 한다면, 속히 명길을 이조 판서로 삼아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김상헌(金尙憲)이 글을 잘 한다고 여겼는데, 지난번 소목(昭穆)에 관한 논의를 보건대 필시 문의(文義)를 살피지 않고 글을 읽는 자일 것이다."
하였다. 이귀가 아뢰기를,
"대례(大禮)를 지연시킬 수는 없으니, 즉시 대신과 장유·박지계를 불러 신과 동시에 쟁론을 벌여 질정하게 하면 하루도 못 되어 결정이 날 것입니다. 지금 국세(國勢)가 위태롭고 어지러운데도 상하가 서로 저지하고 있는 것은 단지 추숭에 관한 의논으로 정의(情意)가 도탑게 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반드시 이조 판서를 먼저 체직하여 최명길로 대신하고 박지계를 대사헌으로 삼는 한편 그의 제자들을 거두어 조정에 벌여 세워야 합니다. 그러면 논의가 일정해져 대례가 즉시 거행될 것이니, 전하는 따르시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어찌 꼭 홀로 나서서 쟁론하는가. 저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좋은 벼슬을 차지하도록 내버려 두어라."
하자, 이귀가 아뢰기를,
"만일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대소 관원을 막론하고 먼 변방으로 귀양보내었다가 대례를 완결지은 뒤에 재주에 따라 거두어 써도 본래 안 될 것이 없습니다. 만일 신에게 이조 판서를 겸하게 하면 하루가 지나기 전에 이론을 제기하는 자를 물리치고 도(道)가 같은 사람을 등용시켜 인륜을 밝히는 이 논의를 결정짓겠습니다."
하였다. 이튿날 상이 하교하기를,
"박지계를 유적에서 삭제한 유생은 그 죄가 매우 작지 않아서 저번에 정거하라는 하교를 내렸는데도 아직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사관의 관원을 모두 잡아다가 국문하여 죄를 정하라."
하였다.

 

정언 윤명은(尹鳴殷)이 인피(引避)하여 아뢰기를,
"엊그제 본원(本院)의 차자는 실로 우레와 우박의 참상을 인하여 전하께서 병드신 원인과 시대를 구하는 일이 모두 한 번 전하의 마음을 전이(轉移)하는 사이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한 것으로, 수성(修省)하는 요점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비답을 오히려 차자를 올린 뒤에 내리십니까.
아, 사나운 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상을 조경(趙絅)이 갖고 있고, 추숭이 잘못된 예라는 것을 조경이 간쟁하였으며, 화친(和親)에 대한 이의를 조경이 배척하였습니다. 그런데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이 갑자기 내렸으므로 벌써 오래 전부터 도로 거두시라고 청했는데도 아직 윤허하지 않고 계시니 전일 가슴에 새겨 스스로 힘쓰겠다는 뜻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이목(李楘)이 직언하다가 외직에 보임되었어도 대간이 간쟁하여 뜻을 관철시키지 못하였고, 조경이 또 직언하다가 외직에 보임되었는데도 간쟁하여 뜻을 관철시키지 못하였고, 이제 전하의 시대에 행세하려면 반드시 아첨하여 구차한 짓거리를 한 다음에야 겨우 전하께서 믿는 신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보잘것은 없으나 차마 이런 짓거리를 하면서까지 전하에게 구차스럽게 합하지는 못하겠으니, 체척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태조조(太祖朝)에 전중경(殿中卿) 변계량(卞季良)이 병조 정랑 이회(李薈)와 함께 조준(趙浚) 등의 일을 몰래 말하자, 태조가 그 말을 듣고 노하여 꾸짖으면서 영해(寧海)에 유배(流配)시켰으니, 조종(祖宗)에서 공신을 대우한 것이 높고도 중했다 하겠다. 저 조경은 사리를 알지 못한 채 불측하다고 헐뜯기도 하고 몹시 흉측하다고 욕하기도 하였다. 추숭하는 일이 인륜을 어지럽히고 나라를 망치는 일이 아닌데도 조경은 또 주장하는 사람을 배척했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옛적에 아랫사람을 거느리던 방법으로 논한다면 조경은 장형(杖刑)이나 유형(流刑)을 면하기 어려우니, 어찌 감히 현령의 직임을 바랄 수 있겠는가. 또 이목은 승지의 신분으로 임금을 속이고 권신(權臣)에게 아부하여 상으로부터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054)  는 분부까지 받았는데도 전혀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으니, 이는 실로 벼슬을 잃을까 걱정하는 비부(鄙夫)이다. 그대는 참으로 무슨 마음을 가지고 이토록까지 칭찬하는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이튿날 헌납 윤구(尹坵), 정언 김휼(金霱), 사간 김세렴(金世濂)이 처치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대사헌 박동선(朴東善), 장령 이형(李坰)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정언 윤명은이 피혐한 말을 보건대 그 말이 매우 간절하고 곧았는데도 전하께서 부드러운 비답은 내려주지 않으시고 도리어 미안한 분부를 내리시니 신은 적이 의혹됩니다. 이목과 조경의 일을 전후에 논열하다가 윤허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끝내 정지함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고 보면 윤명은이 말한 ‘구차한 짓거리로 임금의 뜻에 합하기를 구한다’고 한 것이 바로 신에게 해당됩니다. 어찌 감히 얼굴을 쳐들고 그대로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하고, 집의 김남중(金南重)도 이를 이유로 인피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훈신(勳臣)은 곧 임금의 팔 다리와 같아 시종 한 마음이라 할 것인데, 사람마다 의심하여 싫어하면 심복(心腹)이 해체되어 조정이 높아지지 않는 까닭에, 죽이기도 하고 귀양보내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신은 책임이 중대하니 경시를 당하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고 권세가 무거워지면 때로 해로움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모욕하는 자도 죄를 주고 칭찬하는 자도 죄를 주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공신을 모욕하는 자를 충직하다 하고 재상을 욕하는 자를 감히 할 말을 다 한다고 하며 염치가 없고 간사한 행동을 하는 자를 곧은 신하라 하니 진실로 마음이 아프다.
지난번 조경이 훈구(勳舊)를 의심하고 대신을 욕하고 추숭하는 일을 억누른 등의 죄가 있었으나 나는 그의 청렴하고 검소한 점을 사랑하여 그 죄대로 죄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목은 나를 어린아이처럼 취급하여 하문한 것이 있어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은 채 태연히 행공(行公)했으니, 이 사람은 아무 거리낌없이 행동하면서 오직 벼슬을 잃을까 염려하는 사람이다. 그래도 나는 그가 근시(近侍)이기 때문에 역시 그 죄대로 죄주지 않았다. 이는 모두 내가 엄격하지 못한 탓이다. 한 때의 옳고 그름이 밝지 못한 까닭에 식견이 없는 연소배들이 도리어 이러쿵저러쿵 말들을 하는데, 계속 이런 식이 되면 당파가 날로 불어나고 간사한 풍조가 점점 자라나서 나라가 나라꼴이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이목과 조경을 중하게 논죄하여 한편으로는 국가의 체면을 높이고 한편으로는 옳고 그름을 정함이 타당할 듯하니, 의논하여 아뢰라."
하니, 좌부승지 이경헌(李景憲) 등이 회계하기를,
"이목과 조경은 모두 경연의 신하로 임금의 모자란 점을 보충하고 빠진 것을 채우는 데 뜻을 두고 일을 만날 때마다 감히 말씀을 드렸을 뿐 결단코 다른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잇따라 특명으로 외직에 보임시켰으니, 이는 자못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대간이 논집한 것이야말로 임금을 사랑하는 성의에서 나온 것인데, 전하께서는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도리어 논죄하라는 분부를 내렸습니다. 이 어찌 신들이 전하에게 바라는 바이겠습니까. 왕의 말이 한 번 전파되면 관계되는 것이 작지 않은데, 신들이 가깝고 친밀한 자리에 있으면서 감히 받들 수 없기에 이를 감히 도로 봉입(封入)합니다."
하자, 답하기를,
"위로부터 의계(議啓)하라는 분부가 있었는데도 전혀 의논을 말하지 않은 채 감히 도로 봉입하다니, 너무도 사체(事體)를 모르는 짓이다. 오늘날의 국사가 참으로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하였다. 정원이 이 때문에 대죄하니, 대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