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경오
조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영경연 윤방(尹昉)이 나아가 아뢰기를,
"선왕조(先王朝)의 《실록》도 향산(香山)에 보관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평안도는 믿을 만한 곳이 못 된다고 여겨 적상산(赤裳山)으로 옮겨 두었으니, 이는 본래 향산의 《실록》을 합하여 보관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의 《실록》은 국초부터 선왕조에 이르기까지 모두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으나, 이곳의 《실록》만은 완전하지 못하니, 향산에 보관된 《실록》을 서울로 받들고 와서 적상산에다 합하여 보관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은 서로(西路)가 피폐되었으니, 내년에 의논하라."
하였다.
11월 2일 신미
전경문신(專經文臣)의 시강(試講)에서 우등한 정태화(鄭太和)·심지한(沈之漢)·남궁집(南宮鏶)·서정연(徐挺然)에게 숙마(熟馬) 각 1필, 금상현(琴尙絃)에게 반숙마(半熟馬) 1필을 하사하고, 참가하지 않은 자는 파직하고, 강에는 응하였으나 불통(不通)인 자는 추고하도록 명하였다.
11월 3일 임신
경기의 부서군(赴西軍)074) 을 감하였다.
이서(李曙)가 경기의 군사를 부서케 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상차(上箚)하여 간쟁하고, 또 등대(登對)하여 극력 말하자,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도록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혹시 사변이 발생하면 경기의 군사는 마땅히 먼저 들어와 서울을 지켜야 하니 멀리 변방을 수비하게 할 수 없다고 하는 이 말은 소견이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도감의 포수(砲手)가 경기 군사에 비하면 더욱 중요한데도 부서하고 있으니, 어찌 경기 군사만 면할 수 있겠습니까. 경기는 전결(田結) 수가 적기 때문에 자금을 주어 뽑아 보내기가 다른 도에 비해 힘들다고 하는데, 이 점은 실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각도에 부서군의 숫자를 이미 정해 행회(行會)하였는데, 지금 또 경기 군사 3백 명을 다른 도에 나누어 배정한다는 것도 매우 타당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 3백 명이 없어도 서쪽 지방의 방비에는 별로 상관이 없으니, 바로 감하게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11월 4일 계유
처음에 제생(諸生)이 권당(捲堂)을 하여 성묘(聖廟)가 오랫동안 비게되자, 상이 장차 알성(謁聖)을 하겠다고 하교하였는데, 이는 대개 제생이 도로 들어오게 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제생이 돌아오자,
"과인은 병이 있어 형편상 시학(視學)하기 어렵다."
고 하교하였다.
가도(椵島)의 도독(都督) 황룡(黃龍)은 군정(軍政)을 전폐하고 끝없이 탐욕을 부려 장관(將官)을 임명할 때면 반드시 뇌물을 받는가 하면 서쪽에서 보내온 은자(銀子)와 양식을 군사들에게 지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손 군문(孫軍門)075) 이 배를 구입하여 조총(鳥銃)·동과(銅鍋)076) 등의 물건을 보내 주었는데, 이것도 모두 자기가 차지하였다. 이에 군중(軍中)이 모두 원망하여 마침내 병기를 가지고 도독의 아문에 모여 도독 이하 여러 장관을 결박하였는데, 심세괴(沈世魁)도 그안에 포함되었다. 세괴가 스스로 결박을 푼 뒤 다시 황룡을 풀어주고 말하기를,
"비록 장리(贓吏)이긴 하지만 일찍이 도독이었던 사람인데, 어찌 권도(權道)를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바로 유격(遊擊) 왕량신(王良臣)의 집으로 옮겨 두었다. 그리고는 섬 안에 선포하기를,
"지금 양식이 없는 관계로 군병이 반란을 일으켜 총야(摠爺) 및 제장(諸將)을 결박하고, 본협(本協)을 서리(署吏)로 삼아 섬 안의 일을 맡도록 하였다."
하고, 이에 군사를 이끌고 곧장 물화(物貨)를 쌓아둔 곳으로 가서 은화 5만여 냥을 꺼내어 각 영의 군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1월 5일 갑술
대사헌 강석기(姜碩期)가 사은(謝恩)을 늦게 하였다는 이유로 인피(引避)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석기는 항상 인척으로서 높은 벼슬을 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는데, 벼슬에 임명될 때마다 꼭 사피하고 나서 어쩔 수 없게 된 뒤에야 출사(出仕)했으므로 시의(時議)가 훌륭하게 여겼다.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부원수 정충신(鄭忠信)과 평안 병사 이완(李浣) 등이 치계하기를,
"가도(椵島)의 난리가 아직 끝나지 않은 때에도 도독을 결박하여 감금하고 관인(官印)을 빼앗아 임시로 다스리는 변이 일어났는데, 이는 모두 심세괴가 모의하여 난을 일으킨 것입니다. 지난해에 진계성(陳繼盛) 때문에 군대를 출동시켜 문죄(問罪)하였는데, 지금 아무 소리 없이 변에 대응하는 일이 없게 되면, 전일의 의거가 도리어 헛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게다가 세괴가 육지에 상륙하여 쌀을 사오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으니, 그가 은연중에 우리를 엿보고 있는 정상이 흉악하고 참혹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신들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신(臣) 충신은 우선 안주(安州)에 유방(留防)하는 경포수(京砲手)를 이끌고 먼저 철산(鐵山)에 도착하여 사포(蛇浦)를 굳게 지키면서 임경업(林慶業)으로 하여금 검산(劒山)에 유방하는 남군(南軍)을 뽑아 거느리고 선사(宣沙)를 나누어 지키게 하는 한편, 신(臣) 완은 휘하의 영병(營兵)으로 안융(安戎) 등의 포(浦)를 나누어 지키게 했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한인(漢人)은 누구를 막론하고 상륙하지 못하도록 하여 그들의 양식 보급로를 끊어버리는 한편 섬 안에 격문을 보내어 난리를 꾀한 자들의 죄를 성토하고, 또 천가장(千家庄)에 있는 도독 중군(中軍) 소국조(邵國祚)·조병의(曹秉義) 등에게 통지한 뒤, 형세를 보아 잘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게 여겨집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그 계책을 따를 것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이완이 안융을 나누어 지키면 안주에는 대장(大將)이 없게 되니, 다만 그 영하(營下)의 군사 가운데서 대장을 정해 안융을 지키도록 하고, 이완은 그대로 성안에 있으면서 책응하게 하는 것이 온당합니다. 그리고 부원수가 사포에 들어간 뒤에 한인인 혹시라도 내지(內地)에 상륙하면 반드시 낭패당할 것이니, 연해(沿海) 일대를 반드시 미리 대비하고 청천강(淸川江) 이남과 이북도 한결같이 단속해야 할 것인데, 모든 일을 본도 감사와 상의하여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섬으로 보내는 식량을 중지시키고 대제학으로 하여금 격문을 짓도록 하여 들여보내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격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국 의정부는 섬 안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군민(軍民)들에게 격문으로 고한다. 살펴 보건대 조정의 큰 분수는 등급보다도 중한 것이 없고 천하의 큰 의리는 순역(順逆)보다도 엄한 것이 없다. 무릇 졸오(卒伍)는 주장(主將)에 대하여 원래 명분이 정해져 있고 등급이 분명하니, 만약 능멸하여 범함이 있으면 진실로 패역(悖逆)에 관계되는 일이다. 이는 대의(大義)로 볼 때 용납할 수 없는 일로서 왕법(王法)으로 반드시 토벌하게 마련이다.
해도(該島)는 모문룡(毛文龍)이 진(鎭)을 설치한 이래 평소 충순했는데, 지난해에 유흥치(劉興治)가 반역을 하여 주장(主將)을 참혹하게 해쳤으므로 본국이 이에 의로운 군대를 일으켜 장차 하늘을 대신해 토벌하려 하였으나 각부(閣部)의 명이 있어 바로 군대를 귀환시켰다. 그 후 장도(張燾)와 심세괴(沈世魁) 두 장수가 유흥치(劉興治)의 반역을 토벌하여 없애자, 그 의로운 행동을 가상히 여겨 원수에 같이 대처하기를 허락하였는데, 이 모든 사실을 해도에서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흠차 진수등진 후군도독부도독 첨사(欽差鎭守登鎭後軍都督府都督僉事) 황룡(黃龍)이 천자의 밝은 명을 받고서 관인을 걸고 깃발을 세워 동강(東江)에 와서 진(鎭)을 설치하였으니, 이는 실로 천자가 명하신 장수요, 온 섬사람의 목숨을 맡은 사람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군정(軍政)에 마땅함을 잃어 군사들의 마음이 이반되었다 하더라도, 그 잘잘못은 조정에서 의논해야 할 것이니, 부하의 입장에서는 오직 자기의 신분에 맞는 도리를 삼가하여 지키기만 했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편비(褊裨)077) 가 난을 주동하여 감히 주장을 노복처럼 결박하고 감금하는 무도한 짓을 행하고 도장과 인끈을 빼앗으며 재물을 약탈하였으니, 비록 흉포하고 완악한 오랑캐라 할지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총진(摠鎭)은 명망과 지위의 높고 중함이 진장(陳將)078) 에 비할 바가 아닌데, 결박하는 것은 죽이는 것과 거의 다를 바가 없고 보면, 오늘의 변이 흥치 때와 비교하여 어찌 차이가 있겠는가. 본국이 변을 들은 이래로 군신 상하가 모두 매우 놀라워하며 통분해하였다.
일전에 총진이 섬 안에 양식이 떨어졌다고 여러 차례 양식을 바꾸어 주기를 청하기에, 본국이 흉년으로 백성이 굶주려 한창 황정(荒政)079) 을 근심하고 있었지만 총진의 청을 중히 여겨 전후 1만 7천 석을 보내주기로 허락하고 이미 향신(餉臣)으로 하여금 계속 재촉해서 운송토록 하였는데 갑자기 총진이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변을 당할 줄은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만일 다시 전례대로 곡식을 보내주어 난리를 일으킨 무리들을 먹인다면, 이는 반역을 도와 간사함을 기르는 것이다. 만약 황조(皇朝)에서 힐문하며 정의로써 꾸짖는다면 본국이 장차 무슨 말로 대답하겠는가.
이어 생각건대 섬 안의 수만 백성들은 모두 그동안 충순하였는데, 오늘날 앞장 서서 난을 일으킨 자들은 다만 일종의 불만을 품은 무리들로서 망령되이 바라서는 안 될 것을 엿보아 권세와 지위를 도박하듯 빼앗은 것일 뿐이다. 양민과 의사(義士) 중에는 반드시 강개하고 분격하여 총진을 위해 원수갚을 것을 생각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만일 대의를 밝게 들어 죄를 꾸짖고 토벌하여 원악(元惡)080) 을 포박한 뒤 본국에 전시(傳示)하여 반역과 순종의 이치를 원근에 분명히 알리게만 한다면, 본국이 감히 옛날과 같이 우호를 돈독하게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을 경우 본국은 오직 황령(皇靈)을 받들어 왕법(王法)을 이루는 것만을 알 뿐이다. 차라리 섬의 백성들과 결별을 고할지언정 윗사람을 범하는 의리없는 자들과는 사사로이 서로 친하여 황조의 기강을 차마 어지럽힐 수는 없다. 감히 사사로이 포고하여 섬의 백성들로 하여금 실로 이익을 도모하게 하고자 격문을 보내는 바이다."
11월 6일 을해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가 상차하여 도체찰사를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조위한(趙緯韓)을 부수찬으로, 조빈(趙贇)을 정언으로 삼았다. 이덕수(李德洙)에게 통정 대부를 가자(加資)하고 박정(朴筳)에게 중직 대부를 가자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대군(大君) 혼례 때의 공로에 대한 상으로 가자한 것이다.
헌부가 추고하여 조율(照律)한 것을 가지고 익령군(益寧君) 홍서봉(洪瑞鳳)의 고신(告身)을 3등급 강등시켜 빼앗고, 이어 하교하였다.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로지 부박(浮薄)한 것만을 일삼아 인심과 풍속을 날이 갈수록 점점 아름답지 못하게 되도록 하였고, 체직된 뒤에도 오히려 거리낌없이 방자하게 설쳤으니, 그 죄가 작지 않다. 그러나 우선 이 율(律)에 의하여 시행하라."
11월 7일 병자
예조 판서 정광적(鄭光績)이 상차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1월 8일 정축
영돈녕부사 오윤겸(吳允謙)이 물러나기를 청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윤겸은 충성스럽고 근실하며 청렴하고 결백하여 평온할 때나 험할 때에나 조금도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 수상(首相)으로 있으면서 추숭(追崇)하는 의논을 따르지 않아 마침내 훈구 재신에게 배척당하자 사직하여 체직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병을 핑계로 물러나기를 청한 것이다.
11월 9일 무인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11월 10일 기묘
대사성 윤황(尹煌)의 체직을 명하였다. 상이 지난번 유생이 공관(空館)했을 때에 윤황이 일을 제대로 선처하지 못하여 성묘(聖廟)를 오랫동안 비게 하였다는 이유로 마침내 추고를 명하였는데, 윤황이 함답(緘答)081) 하기를,
"돌아오도록 지극하게 타이르지 않은 것이 아닌데, 유생들이 즉시 들어주지 않았던 것이니, 본관이 주선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니, 상이 이에 체직을 명하였다.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11월 11일 경진
경기 감사 이경직(李景稷)이 진대(賑貸)의 일을 의논하기를 청하였는데, 호조가 아뢰기를,
"삼세(三稅)082) 는 당연히 줄여야 하겠습니다만, 다시 내년 봄을 살펴 또한 특별히 두텁게 구휼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수령들로 하여금 정성을 다해 보살펴서 유랑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경기 감사 이경직(李景稷)이 진대(賑貸)의 일을 의논하기를 청하였는데, 호조가 아뢰기를,
"삼세(三稅)082) 는 당연히 줄여야 하겠습니다만, 다시 내년 봄을 살펴 또한 특별히 두텁게 구휼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수령들로 하여금 정성을 다해 보살펴서 유랑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11일 경진
김시양(金時讓)을 지경연사로, 김상(金尙)을 우승지로, 윤지경(尹知敬)을 공청도 감사로 삼았다.
11월 12일 신사
이조 참판 박정이 상소하기를,
"전석(銓席)에서 주의(注擬)할 때 세 당상이 서로 가부를 의논했었는데, 죄를 받을 때는 신만 면하였으니, 김상용 등과 똑같은 죄와 벌을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망(擬望)할 때에 경은 밖에 있었다. 경은 아는 바가 없으니 사직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박정이 또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헌부와 간원이 모두 전조를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는 명을 환수하도록 청하니, 답하였다.
"이행원 등은 상하를 협박하여 시상(時相)083) 에게 아첨한 죄가 있다. 따라서 그 싹이 점차 자라게 한다면 필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데까지 이르게 될 것이기에 한산한 지위에 두어 스스로 허물을 반성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전관이 국가를 위하여 그 조짐을 막을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행원 등 3인을 모두 한 정사에 의망하였으니, 이는 전 판서 때에도 없었던 일이다. 만일 당파를 심는 데 뜻을 두어 마음속으로 거리낌없이 행동하는 자가 아니라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겠는가. 지금 전관이 죄벌을 받지 않는다면 국가의 기강이 온통 없어져서 수습할 수 없을 것이니, 다시 논하지 말라."
헌부가 아뢰기를,
"내승(內乘) 신종술(辛宗述)은 본디 재능이 없는데도 별도로 서용되어 특배(特拜)되기까지 하였으므로 물의가 매우 그르게 여기니,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종술이 재능이 없다고는 하나 내승에는 합당하고, 전일에 범한 죄도 대단한 것이 아니니, 번거롭게 할 것이 없다."
하였다.
영의정 윤방(尹昉)과 우의정 이정구(李廷龜)가 상차하기를,
"삼가 전조를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는 명을 보건대 미안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정병(政柄)의 책임은 세도(世道)와 관계 있으니, 일단 적임자를 선발하여 임명했으면 전적으로 책임을 주어 내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전조가 임무를 받은 지 한 달도 채 못 되었으니 아무리 정성을 다하여 공효(功効)를 보답하고자 하더라도 날짜가 충분하지 못한데, 전례를 따라 정사를 한 것 때문에 갑자기 두려운 위엄을 보이면서 중하기만 한 정석(政席)을 역마(驛馬)처럼 자주 바꾸고 계십니다. 더구나 근래 군신간에 정의(情意)가 서로 막혀 분위기가 좋지 못한데, 신의 생각에는 상하가 모두 잘못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오직 마땅히 마음을 돌려 고치기를 도모하고 지성으로 서로 믿어주어 조정의 화기(和氣)를 만회하는 것이 오늘의 시급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같이 중도를 지나치는 거조가 있어 가항(街巷)에서 저윽이 탄식하고 여론이 더욱 해괴하게 여기니, 이는 정말 전하에게 기대했던 바가 아닙니다. 신들이 정축(鼎軸)084) 에 있기 때문에 감히 구구한 근심을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에 의견이 없지는 않다마는, 이미 사사로움을 따른 벌을 시행하였으니, 지금 환수하기는 어렵다."
하였다.
11월 13일 임오
강원도 원주(原州)에 지진이 일어났다.
전 교리 나만갑(羅萬甲)을 특별히 서용하였다. 이에 앞서 김류가 우상으로 있을 때 만갑이 부의(浮議)를 선동하여 자못 제멋대로 하는 조짐이 있다고 여겨, 상에게 아뢰었기 때문에 상이 곧 벼슬을 깎아 내쫓았었다. 마침 가뭄 때문에 사면을 받아 방면되었다가, 김류가 파직되자 상이 특명으로 서용하였다.
11월 14일 계미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가 또 상차하여 도체찰사를 면직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15일 갑신
경상도 안동(安東)과 함창(咸昌)에 지진이 일어났다.
11월 16일 을유
우의정 이정구가 상차하기를,
"삼가 지난번 양사에 답한 비답을 보건대, 상하를 위협하여 시상(時相)을 기쁘게 했다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이 곧 그때 상신(相臣) 중의 한 사람이었으므로 끝내 스스로 편안할 수 없으니, 신을 면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른바 시상이란 지난 4월에 인대(引對) 때 나의 하교를 듣고는 통분함을 금치 못한 나머지 수상(首相)의 진퇴를 기다리지도 않고 나가서 대죄(待罪)한다고 하면서 혹은 다시 일어나고 혹은 벼슬은 그만둔 사람들이 스스로 해당될 것이니,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이정구가 또 상소하여 굳이 사양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1월 17일 병술
김상헌(金尙憲)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11월 20일 기축
헌부가 아뢰기를,
"환관의 무리들이 날로 거만해져서 대간의 계사에 대한 비답을 가져올 때에 승전 내관(承傳內官)이 진탕 취하여 부축을 받고 왔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명한(李明漢)을 대사간으로, 나만갑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11월 21일 경인
대사헌 김상헌이 그의 형 김상용(金尙容)이 방금 견책을 받아 파직을 당하자 양사가 한창 환수할 것을 청하고 있는 만큼 그 논에 참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체직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호조 판서 김신국(金藎國)으로 진휼사(賑恤使)를 겸하게 하였다.
11월 22일 신묘
김시양(金時讓)을 4도 체찰사로 삼았다. 처음에 김류가 스스로 김시양을 추천하여 부사(副使)로 임명하였는데, 김류가 도체찰사에서 면직되자, 김시양이 아뢰기를,
"신은 김류가 임명한 사람인데 지금 김류가 이미 체부(體府)를 떠난 이상 그대로 부사의 칭호를 갖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비국에 하교하기를,
"김시양은 크게 쓰기에 합당한 인물이니 의당 칭호를 올려 공을 세우도록 하라."
하였다. 비국이 의논드리기를,
"시양은 실로 이 임무에 적합한데, 품계가 2품입니다. 체찰사는 으레 1품으로 겸하게 하니, 우선 도원수로 부르거나 혹은 자급(資級)을 올리거나 해야 할텐데, 오직 상께서 재가하시기에 달렸습니다."
하니, 상이 마침내 명하여 숭정 대부로 직급을 뛰어 올려 함경·강원·황해·평안 등의 도체찰사로 임명하는 동시에 병조 판서를 겸하게 하였다.
강석기(姜碩期)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11월 25일 갑오
이귀(李貴)를 이조 판서로 삼았다. 이귀가 일찍이 경연에서 상에게 아뢰기를,
"지금 추숭(追崇)하는 의논을 막는 자들을 전관(銓官)이 모두 거두어 쓰기 때문에, 추숭하는 의논이 행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신 같은 자는 도저히 전장(銓長)이 될 수 없는 것입니까?"
하고, 이어 홍서봉(洪瑞鳳)이 뇌물을 받았다고 극력 비난하니, 마침내 상이 홍서봉을 파직시키도록 명하였다. 이귀는 아뢸 일이 있을 때마다 오랫동안 앉아서 얘기하면서 손으로 임금의 옷과 띠를 잡아 당기기까지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경은 그만 하라. 다른 사람도 일을 아뢰고 싶어한다."
하였다. 계해년085) 이후로 이귀가 일찍이 이조 판서에 의망되었으나 임명받지 못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임명되었다.
11월 28일 정유
처음에 가도(椵島)의 도독(都督) 황룡(黃龍)이 탐학하고 비루한 짓을 자행하여 섬의 대중이 원한을 품자, 장관(將官) 왕응원(王應元) 등이 무리를 이끌고 난을 일으켜 황룡을 사제(私第)에 감금하였다. 그러다가 우리 나라가 격문을 보내어 문죄하자 섬의 대중이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오늘의 변은 도독이 자초한 것이긴 하지만, 조선이 만약 우리의 양곡 보급로를 끊어버리고 격문을 보내어 문죄하면, 온 섬 사람들이 똑같이 반역의 무리가 될 것이고 또 바로 굶어 죽게 될 염려가 있다."
하고, 이에 경중유(耿仲裕)·왕응원 등 10여 인을 잡아 참수하고 도독을 부축하여 나오게 해서 일을 보도록 하였다. 도독이 유격 강정국(江定國)을 보내 와 식량을 요구하였다.
11월 30일 기해
최명길(崔鳴吉)을 예조 판서로, 이성구(李聖求)를 이조 참판으로, 김상헌(金尙憲)을 도승지로 삼았다. 박정(朴炡)은 스스로 정석(政席)에 같이 참여했는데 판서와 참의는 모두 견책을 받아 파직되었고 자기만 홀로 면하였다는 이유로 극력 사양하여 체직되었다. 상이 특명으로 도승지 이성구를 그 후임에 임명하고, 또 정2품 중에서 도승지를 가려 의망하도록 명하여, 상헌이 마침내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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