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11월 1일 경자
풍덕(豊德)의 사인(士人) 전상해(全尙諧) 등이 상소하기를,
"본군은 토지가 척박하고 백성들은 궁핍한데다 금년에 또 혹심한 가뭄이 들고 천둥이 치며 우박이 내려 더욱 심하게 흉년이 들었는데, 강도(江都)의 적곡(糴穀)이 1천 석으로 1결(結)당 1석(石)씩 거두어 갚아야만 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강도의 적곡은 본래 백성의 위급함을 구하고 백성의 목숨을 살리려는 것인데, 만약 헐벗은 백성들에게 납부를 독촉하면, 본군의 백성들이 장차 유망하여 흩어짐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니, 이는 국가에서 재앙을 만났을 때 백성들을 구휼하는 뜻이 아닙니다. 쌀은 창고에 모이더라도 백성이 사방으로 흩어질텐데, 그렇게 되면 곡식이 있더라도 누구와 더불어 지키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특명으로 중지시켜 내년 추수를 기다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지금은 우선 받아들이지 말아 조금이나마 폐해를 제거하라."
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강도의 군량은 다른 피곡(皮穀)에 비할 것이 아니므로 금년에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대로 전년도의 포흠(逋欠)으로 이월되고 맙니다. 그런데 풍덕의 피해가 그다지 심하지 않은데도 그곳 백성들이 상소하여 면하려 하니, 또한 매우 외람된 일입니다. 시행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윤11월 2일 신축
헌부가 아뢰기를,
"전적 정홍원(鄭弘遠)·강익문(姜翼文)·양시우(楊時遇) 등은 모두 적신(賊臣)086) 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혹은 폐모론에 부화 뇌동하고 혹은 자신이 장오죄(贓汚罪)를 범하였으며 혹은 충직하고 선량한 사람을 모함하여 해쳤는데도 지금까지 전리(田里)에서 편안히 살고 있으니, 이것만도 너그러운 은전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정사에 모두 조정의 반열에 끼었으므로 제목(除目)이 한 번 내려지자 여론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모두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여러 차례 아뢰자 이에 따랐다.
공청 감사 윤지경(尹知敬)이 사조(辭朝)하니, 상이 불러서 보았다. 지경이 아뢰기를,
"본도는 흉년이 들었는데 내포(內浦)가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합니다. 따라서 황정(荒政)이 가장 시급합니다만, 진휼할 때에 별도로 경관(京官)을 보내면 구애되는 일이 많아 도리어 폐단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수령 중에서 적합한 자를 택하여 그 일을 맡겼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부터 경관을 보냈던 것은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겼기 때문인데, 과연 경의 말대로라면 보내지 않는 것이 낫겠다."
하고, 또 상이 이르기를,
"근래 인심이 착하지 않은데 내포는 더욱 복종하지 않으니, 어루만져 따르게 하는 방법을 모두 강구한 뒤에야 그들을 진압하여 복종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 조정이 어찌 수령을 신중히 가리고 싶어하지 않겠는가마는, 사람들의 말과 실제가 서로 어긋나 전관이 두루 알 수 없으나, 이것이 정사하는 데 있어서 큰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백성의 행 불행은 수령에 달려 있으니, 출척(黜陟)을 엄하고 분명하게 하면 백성들이 은혜를 많이 입을 것이다. 경은 노력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황 도독(黃都督)이 이미 복관(復官)되어 난을 주동한 자들을 베었으니, 우리 입장에서는 위로하고 축하하는 것이 도리일 것입니다. 당하관의 문관을 문안관(問安官)으로 호칭하여 예물을 갖고 들여 보내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윤11월 3일 임인
간원이 아뢰기를,
"영장(營將)을 설치한 것은 그 뜻이 범연한 것이 아닙니다. 당초에 의논이 분분했던 것은 수령이 달갑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인데, 지금 시행한 지 오래되어 자못 효과가 있으니 거의 위급할 때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장이 되는 자는 박대당하는 것을 고통스럽게 여겨 모두 꺼리며 피하려고만 생각하는데, 전후 차임하여 보낸 자들도 대부분이 구차하게 충원된 자들이고, 각 고을에서도 모두 예외없이 그들을 정당하게 대우하지 않으며 교체도 너무 빈번합니다. 각영에 소속된 군사의 수가 수천 명뿐만이 아니고 우리 나라의 군대라고 하는 것도 다만 이것뿐인데, 이처럼 숫자만 채우고 있으니, 각도 감사로 하여금 심히 부적당한 자들은 도태시키도록 하소서. 그리고 지금부터는 뛰어나게 명성이 드러난 자가 아니면 절대로 영장에 의망할 수 없게 하고, 공을 세우기를 기다려 차례로 권장해 등용함으로써 무장이 승진하는 발판을 삼으소서. 이와 함께 조정도 때때로 어사를 보내어 영장을 박대하는 수령과 각 고을에 폐를 끼치는 영장을 염탐하게 한다면 거의 착실하게 되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윤11월 4일 계묘
이조 판서 이귀(李貴)가 상차하여 대죄하였다. 이귀가 처음 정사에서 강익문(姜翼文) 등을 첫째로 거론했다가 대론(臺論)을 일으켰으므로 이귀 스스로 불안하게 느껴 상차하여 대죄한 것인데, 대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김남중(金南重)을 사간으로 삼았다.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 다방(多方)편을 강하였다. 참찬관 김상헌(金尙憲)이 아뢰기를,
"주(周)나라가 거울로 삼았던 것은 하(夏)·상(商)에 있었으니, 오늘날 거울로 삼을 것도 지난날에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먼 곳을 거울로 삼기보다는 가까운 일에 징계되는 것이 낫고 귀로 듣는 것보다는 눈으로 보는 것이 낫다. 그래서 당 태종(唐太宗)이 경계하고 조심한 것이 항상 수 양제(隋煬帝)에게 있었으니, 대개 수나라가 망하는 것을 몸소 보았기 때문에 경계하기를 더욱 절실히 했던 것이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탐악하고 성을 잘 내는 사람을 걸(桀)이 이처럼 신용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상헌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나라를 쇠퇴하게 하고 어지럽게 한 임금은 각기 신하를 어질다고 여겼으니, 만일 탐악하고 성을 잘 내는 것을 알았다면 어찌 신용했겠습니까. 어둡고 미혹한 임금은 다만 아첨하여 기쁘게 하고 받들어 순응하는 자를 어질다고 여겼기 때문에 간특한 자를 신임하여 그 간특함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검토관 구봉서(具鳳瑞)가 아뢰기를,
"광해 때에 정치가 번잡하고 조세가 무거워 백성들이 명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근래 각 아문이 각기 무판(貿販)을 하여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고 있으니, 지난날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지난번 옥당의 차자를 인하여 금지시키는 분부를 이미 내렸으나, 각 아문이 화식(貨殖)을 이롭게 여겨 폐지한 채 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 듣건대 삼강(三江)087) 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원성이 길에 가득하다고 하는데, 이는 대개 상사(上司)가 소금과 젓갈 등을 독점하며 사상(私商)을 금하기 때문에 이처럼 원망하고 한탄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이 매우 해괴하니, 정원에서 사문(査問)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헌이 아뢰기를,
"이른바 교(榷)란 외나무다리라는 말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함께 걸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마치 이익을 불리는 신하가 무판을 독점한 뒤에야 그 이익을 거둘 수 있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왕정(王政)에서 가장 미워해야 할 바입니다."
하고, 상헌이 또 아뢰기를,
"사문하는 일은 정원의 임무가 아니니, 법부(法部)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윤11월 6일 을사
상이 하교하였다.
"날씨가 몹시 추우니 옷이 얇은 병사에게 병조로 하여금 유의(襦衣)를 지급하도록 하여 얼어 죽는 근심이 없게 하라."
김광현(金光炫)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조계원(趙啓遠)·안헌징(安獻徵) 등의 석방을 명하고, 파직하였다. 상이 처음에 이해(李澥) 등의 말을 받아들여 계원 등에게 중벌을 내리려 하였으나, 신숙녀(申淑女)의 옥사에 증좌(證左)가 모두 죽었고 끝내 그런 사실도 없었기 때문에, 마침내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신숙녀의 옥사는 사람들이 대부분 억울하다고 하였는데, 어떤 이는 숙녀가 시동생 이함(李涵)의 간악한 일을 알았기 때문에 이함이 그녀의 입을 봉하려고 이 옥사를 일으켰다고 하였다.
윤11월 7일 병오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윤11월 9일 무신
임득열(林得悅)·이시해(李時楷)를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윤11월 10일 기유
간원이 아뢰기를,
"사람의 죄악으로 시역(弑逆)보다 큰 것이 없기 때문에 국가의 형벌에서도 시역보다 무거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막대한 죄악을 고발한 것이 사실무근이면 또한 반드시 그 죄를 돌려 고발자에게 그 법을 적용하게 되니, 이는 대개 이같이 하지 않을 경우 혐의 때문에 무고를 하거나 상을 타려고 함부로 고소하는 자가 앞으로 끊임없이 일어나서 백성들이 손발도 움직일 데가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선왕들께서 법을 만든 뜻이 지극히 엄중했으며 후세를 위하여 깊이 멀리까지 염려한 것입니다.
함릉군(咸陵君) 이해(李澥) 등은 신숙녀(申淑女)가 시아버지 등을 시역했다는 죄로 고소장을 내어 옥사를 일으켰으니, 이는 실로 막대한 죄악입니다. 만약 그런 죄를 범했다면 상형(常刑)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만약 분명한 증거가 없다면 고발자가 반좌(反坐)되어야 마땅합니다. 애당초 고발한 뜻이 비록 부형(父兄)을 위해 복수하여 원통함을 풀겠다는 지극한 심정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원장(元狀)088) 의 내용에는 다만 밝히기 어렵고 의심스러운 말만 거론하였을 뿐 시아버지를 시역한 실상으로 지목할 만한 명백한 사실의 형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사간(事干)089) 을 엄한 형벌로 끝까지 신문하여 형장(刑杖) 밑에서 죽기까지 하였지만 역시 시아버지를 시역했다고 판단할 수 있는 증거의 단서를 찾지 못하였다고 한 것은 사건이 모두 증거가 없어 옥사도 마침내 징험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국가의 법에 이 경우에 해당되는 율이 본래 있으니, 폐하거나 굽혀 뒷날 무궁한 폐단의 길을 열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원고인(元告人) 이해 등을 유사로 하여금 법에 따라 죄를 정하도록 함으로써 국법을 중하게 하소서.
근래 서로(西路)의 수령을 모두 무변(武弁)으로 차출하여 보내는 조정의 본뜻이 실로 범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른바 무변은 사람을 골랐다고 하더라도 어찌 모두가 청렴하고 근신하며 자애롭고 상서로우며 충직하고 용감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이겠습니까. 더구나 성을 지키고 적을 막는 것은 오직 민심을 얻는 데 달렸을 뿐으로 위급함에 임하여 확고한 힘을 얻는 것은 반드시 활을 잡은 손에만 전적으로 달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곁에 제압할 만한 사람이 없어 거리낌없이 백성들을 침탈하고 박해하며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니, 외롭게 살아 남은 쇠잔한 백성들이 거꾸로 매달린 듯 한창 위급하여 그들을 원망하고 고통스럽게 여기며 질시하기를 외적보다 심하게 합니다. 혹시라도 위급한 일이 있게 되면 반드시 수습할 수 없게 될 것이니, 지금부터 변방의 중요한 곳과 적의 길목을 방어하는 곳이 아니면, 명성과 덕망이 있는 문신으로써 빈 자리가 생기는 대로 교대로 차임하여 서민(西民)의 여망에 부응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서로의 수령에 관한 일은 체신(體臣)으로 하여금 헤아려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윤11월 11일 경술
지평 오전(吳竱)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시독관으로서 진강할 때 현 이조 판서 이귀도 입시하였는데, 의논이 추숭(追崇)하는 일에 미치자, 이귀가 ‘신을 이조 판서로 삼으면 이론(異論)을 가진 사람들을 내쫓고 곧 대례(大禮)를 이루겠다’고 하였으므로, 신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여 마음 속으로 이르기를 ‘일찍이 이 사람이 탑전에서 정승자리를 바라는 말을 했다고 들었는데, 지금 하는 짓을 보니 진실로 헛말이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 지금 이러한 임명이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나라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여 모두 말하기를 ‘이미 행하(行下)090) 를 받은 이조 판서가 있으니, 장래에 반드시 발괄(白活)091) 하여 정승되는 자가 있을 것이다.’ 하는데, 성명(聖明)의 세상에 어찌 이런 말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신은 적이 가슴이 아픕니다.
이귀가 추숭하기를 청하는 것이 어찌 진정 이치에 맞는 합당한 예(禮)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신이 알기에 이귀의 뜻은 좋은 벼슬에 있기 때문에 이 말을 빌려 벼슬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귀를 이조 판서로 임명한 것이 어찌 진정 그 사람이 그 벼슬과 서로 맞는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신이 알기에 전하는 뜻이 추숭하는 데에 있기 때문에 그 벼슬을 미끼로 추숭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상하가 서로 요구하여 자기의 사사로움을 이루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그저 추숭을 이루려고 하신 나머지 왕법이 어지러워지고 관직이 천해지는 것은 다시 염려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은 삼가 듣건대, 전일에 상신(相臣) 이하가 조당(朝堂)에 일제히 모여 있었으니 조의(朝儀)와 국법이 모두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인데, 이귀가 중신(重臣)을 꾸짖어 욕하며 이놈 저놈 하기까지 했는데도 상신 이하는 안색이 변하고 머리를 숙인 채 감히 대꾸도 못했다고 합니다. 신은 진실로 무슨 일 때문에 그가 화를 내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설사 화를 낼 만한 일이 있었더라도 국가의 일은 한 집안의 일이 아니니, 조용히 논란을 벌였어야 마땅합니다. 어찌 감히 기염을 토하여 욕지거리와 비열한 행동을 하면서 조의를 업신여기고 국법을 무시하여 이런 극한에까지 이르게 한단 말입니까.
신이 일찍이 간관으로 있을 때에 외람되이 어리석은 말을 아뢰었으나 전하께서는 그때 우레와 같은 위엄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잇따라 언지(言地)에 임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이렇게 임명되었으니 이는 전에 말씀드렸던 것을 허물로 여기지 않고 말을 하도록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신은 생각건대, 기미(幾微)를 예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금 또 예전에 없던 잘못이 있으시게 하였으니, 이는 모두가 신이 느슨하고 나약하며 분명하지 못하고 충성되지 못한 죄입니다. 그런데 어찌 감히 이미 죄가 드러난 후에 혼자 서서 감히 말한다고 하여 전하께서 언책(言責)을 맡기신 훌륭한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체척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이날 오전이 대궐에 나아가 사은하고 대청(臺廳)에 와서 기초(起草)한 것을 전달하니 날이 벌써 정오쯤 되었다. 상이 정원에 하문하기를,
"대간이 대궐 안에 와서야 비로소 초안을 작성하는 것이 전례에 있는 일인가? 어찌 그리 전달을 늦게 하는가?"
하니, 정원이 회계하기를,
"무릇 대간의 계사는 동료와 상의할 경우엔 초안을 작성한 뒤 대궐에 갖고 오지만, 스스로 피혐할 때는 집에서 기초한 뒤 대청에 와서 다시 고쳐쓰거나 혹은 깊이 생각하여 말을 만들었다가 대청에 이르러 기초하기도 하는 등 당초 규례가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만일 피혐하고자 하면 기초해 가지고 오는 것이 곧 상정(常情)이다. 이처럼 추운 날씨에 대청에 들어앉아 반나절이나 추위에 떨고 굶주려가며 언 붓끝을 입으로 불어 녹여가면서 글을 써 바치는 것이 어찌 인정이겠는가. 일이 매우 괴이하다."
하였다.
윤11월 12일 신해
헌부가 아뢰기를,
"지평 오전이 인피하고 물러갔는데, 밝은 임금에게는 곧은 신하가 있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겠습니다. 이귀가 이조 판서에 임명되기를 구한 것은 정말 너무도 형편없는 일인데, 처음에 곧바로 지적하지 않은 것 또한 뜻한 바가 있었을 것이니, 별로 피혐할 것이 없습니다. 출사를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런데 이귀가 거의 매달 빼놓지 않고 자천(自薦)하였는데, 오전이 요즈음에야 비로소 의심을 갖게 된 까닭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만약 자천할 때마다 요구대로 들어주었다면 정승이 된 것도 이미 오래 전일텐데, 어찌 9년이나 기다렸겠는가. 설혹 요구한 대로 들어준다 해도 그는 사직을 지킨 공이 있고 직위가 1품이며 명망이 높은 원훈(元勳)보다도 식견이 뛰어나니, 이조 판서를 임명한다 해서 본래 안 될 것이 없다. 자천한 것을 죄목으로 삼는다면 그때에는 어디 갔다가 이제야 비로소 논하는 것인가. 그리고 요구대로 들어준 것이 잘못이라면 병조 판서로 있을 때에는 어째서 규탄하여 바로잡지 않았는가. 일이 매우 의심스러워 그 뜻을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오전이 또 이 때문에 인피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지평 오전이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이귀는 지나치게 성을 내고 두서없이 얘기하는데, 이는 그의 병통입니다. 전일에 탑전에서 운운한 말도 두서없는 말의 일단(一端)입니다. 만약 의도적으로 구하는 바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의 본정(本情)이 아닐 듯합니다만, 혐의스러운 즈음에도 말을 가리지 않고 하였으니, 사람들의 비난을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언관으로서 논열(論列)한 것은 대개 일에 따라 서로 바로잡으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고, 대청에서 구초한 것도 본래 전례가 있는데, 엄한 분부를 내리셨으니, 실로 미안한 일입니다. 이 때문에 가벼이 언관을 체직할 수는 없으니, 출사를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윤11월 13일 임자
대사헌 강석기(姜碩期), 장령 권심(權淰)·이유달(李惟達)이 잘못 조율(照律)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처음 서로(西路)의 수령을 모두 무신으로 임명할 때 체부(體府)로 하여금 적임자를 추천하게 한 뒤에 전조(銓曹)가 의망(擬望)을 하였다. 그러다가 간원이 문관으로 서관(西關)의 수령을 번갈아 임명할 것을 청하니, 상이 체부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이에 체찰사 김시양(金時讓)이 상소하기를,
"삼가 서로(西路)의 수령을 체부로 하여금 헤아려 처리하도록 한 분부를 보고, 놀라움과 황송함을 금할 수 없어 감히 구례(舊例)를 인용하여 아룁니다. 선묘조(宣廟朝)에 대신(大臣)이 도체찰사로서 처음 개부(開府)했는데 수령을 주의(注擬)하는 일이 없었으며, 한효순(韓孝純)이 찬성(贊成)으로서 체찰사가 되어서는 수령을 임명할 때에 더욱 감히 참여한 일이 없었습니다. 광해 무신년에 고(故) 상신(相臣) 이항복(李恒福)이 도체찰사가 되었을 때도 이런 일이 없었으며, 기유년에 비로소 서북(西北) 수령을 의논해 천거하라는 명이 있자, 항복이 전후 10여 차례에 걸쳐 상차하여 월권 행위란 말까지 하였으니, 이는 대개 옛법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대신은 백관을 총괄해 다스리고 인재를 진퇴시키는 책임이 있으니, 혹 의논하여 추천하게 하더라고 할 말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6부(部)는 각기 맡은 직분이 있습니다. 이부(吏部)는 병부(兵部)를 다스릴 수 없는데, 병부의 관원이 유독 이부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지금 동전(東銓)092) 의 관직은 곧 옛날 총재(冢宰)의 직임이니, 백관을 통솔하고 사방을 고르게 하는 것이 바로 그 직무입니다. 그런데 유독 서북 수령의 일에 대해서만은 소매 사이에 손을 넣고 서전(西銓)093) 의 명을 듣게 하다니, 결코 그럴 수가 없는 일입니다. 국가가 믿고서 보존될 수 있는 것은 체통(體統) 때문인데, 체통이 한번 문란해지면 관제가 어지러워지고 시조(施措)가 전도될 것이니, 그 말류의 폐는 상관을 능멸하고 권세를 훔치는 데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선조(先朝)의 구례를 한결같이 준수하여 서로의 수령에 대한 일은 전적으로 이조에 맡겨 조정의 체통을 보존하소서."
하니, 그 일을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복계(覆啓)하기를,
"차자에서 아뢴 것은 분명히 선조의 고례(古例)가 있으니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는 것이 온당합니다. 그리고 간원이 번갈아 임명하자고 한 말에 소견이 없지 않으니, 해조로 하여금 문무(文武)를 막론하고 각별히 가려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윤11월 14일 계축
지평 오전이 아뢰기를,
"신은 위로 전하에게 이미 의심을 받고 아래로는 공론에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오직 물러가 죄책(罪責)을 기다리는 것이 마땅한데 어찌 감히 다시 말씀드릴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일단 간원이 출사(出仕)를 청하여 전하께서 또 허락하셨으니, 이는 상규(常規)로써 신을 대우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신이 한마디 말을 하더라도 큰 죄는 되지 않을 듯하니, 시험삼아 3일 전에 다 말씀드리지 못했던 것을 전하를 위하여 남김없이 말씀드릴까 합니다.
대저 피혐하는 일을 기초(起草)할 때 본디 정해진 장소는 없습니다. 그리고 임금은 다만 계사(啓辭)가 옳으냐 그르냐만 살펴야 하는 것으로, 기초한 장소는 상관이 없을 듯합니다. 신이 대청(臺廳)에 이르러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한 정상에 대해서는 신이 재차 피혐할 때 이미 극진히 아뢰었는데, 이는 당시의 형편이 마침 그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슨 다른 뜻이 그 사이에 있다고 전하께서는 매우 괴이하다고까지 하셨습니까. 그리고 이귀가 매달 거의 빠짐없이 자천(自薦)했다고 하셨는데, 그가 병조 판서였을 때의 일에 대해서는 신이 그때 그 직위에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일찍이 들은 바도 없습니다. 그러니 신이 아무리 의심을 잘 한다 하더라도 어디로부터 의심하겠으며, 신이 논하고 싶어도 무엇을 근거로 논하겠습니까. 이번에 신이 아뢴 것은 다만 실상을 눈으로 보고서 말한 것이니, 그 사이에 무슨 의심을 둘 만한 곳이 있다고 전하께서는 매우 의심스럽다고까지 하십니까.
성상의 분부를 음미해 보건대 뜻이 말 밖에 있는데, 신은 실로 놀랍고 황송할 뿐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헤아려 알 수가 없습니다. 과연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일이라면 어째서 곧장 내치시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대성인(大聖人)의 공변됨을 보이지 않으시고, 단지 이렇듯 의도를 숨긴 말씀을 하여 신의 마음을 황혹하게 하고 물정(物情)을 놀랍고 두렵게 하십니까. 군신 사이는 서로 믿음이 두터워야 하는 법인데, 한 마디 말이 막 들어오자 의심의 싹이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대저 어전에서 시비를 쟁론하는 것이야말로 언관의 직분입니다. 전하께서 신에게 언책(言責)의 직임을 맡긴 것이 말을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까, 말을 하도록 한 것입니까? 말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신의 직언에 대해 노여워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미 출사를 허락하고 나서 또 엄한 분부를 내리신 것은 신으로 하여금 수족을 묶어두고 한갓 자리만 채우는 대관이 되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까?
신은 삼가 보건대, 간원이 처치(處置)하면서 ‘이귀가 탑전(榻前)에서 운운한 말 역시 두서가 없는 말의 일단이다.’고 하였는데, 탑전에서 한 말을 과연 보통 때의 두서없는 말의 병통일 뿐이라고 핑계댈 수 있겠습니까. 또 ‘만약 이를 일러 뜻에 구하는 바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의 본정(本情)이 아닐 듯하다’고 처치하였는데, 신이 매우 미워한 것은 다만 그의 뜻에 구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본정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본래 잘못이 없는데, 신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날조해 낸 결과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신이 논한 것을 과연 허무맹랑한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귀와 본래 은원관계가 없습니다. 더구나 인척의 의리가 있으니 상정(常情)으로 논해도 어찌 그와 서로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신은 본래 남을 해치는 마음이 없는데, 어찌 이귀에 대해서 유독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꾸며 내려고 하겠습니까. 염치와 관계된 일인 만큼 결코 태연히 반열에 나갈 수 없으니, 체척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집의 한필원(韓必遠)이 아뢰기를,
"전설사 가관(假官) 윤귀상(尹龜祥)이 간여한 일도 없는데 제서유위(制書有違)094) 로 잘못 의율(擬律)했으니, 어찌 감히 태연히 그대로 직명을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체척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사간 김남중(金南重)이 아뢰기를,
"사람을 논하는 도리는 마땅히 그 본심을 보아야 합니다. 이귀의 말은 전부터 대부분 두서가 없었는데 만약 희망하는 뜻을 두었다고 한다면 혹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기에 어제 처치할 즈음에 감히 운운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오전의 피사(避辭)를 보건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꾸며낸 결과가 된다.’는 등의 말까지 하였으니, 신이 어찌 감히 그대로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척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납 윤구(尹坵), 정언 이시매(李時楳)가 아뢰기를,
"삼가 오전의 피사를 보건대 ‘대각(臺閣)이 입을 다물고 한 마디 말도 없다.’는 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신들도 대관의 한 사람인데, 어찌 감히 태연히 구차하게 직명을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체척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윤11월 15일 갑인
옥당이 상차하여 처치하기를,
"지평 오전, 집의 한필원, 사간 김남중, 헌납 윤구, 정언 이시매가 모두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인신(人臣)은 꺼리지 않고 말을 다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임금의 기색을 관계하지 않고 간하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인군(人君)은 물 흐르듯이 쉽게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제대로 용납하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전후에 걸쳐 출사하도록 모두 윤허하셨고 보면 모든 것을 포용하는 훌륭한신 뜻을 알 수 있는데, 이에 반해 세 번이나 피혐한 것은 번독스럽게 한 일에 관계될 듯합니다. 그리고 숙직했던 가관(假官)은 애당초 죄가 없었는데 의율(擬律)할 즈음에 너무 중하게 한 결과를 면치 못하였습니다. 소견이 같지 않은데도 억지로 출사를 청하였고, 조율(照律)에 잘못이 있어 처치가 각각 달랐고 범연히 논한 말을 들춰내면서 피혐해서는 안 될 피혐을 억지로 하여 언지(言地)에 있는 신분으로서 일을 피한 형적이 분명하니, 오전·한필원·김남중·이시매·윤구를 모두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이현영(李顯英)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윤11월 16일 을묘
전 수찬 강대수(姜大遂)가 상소하여 아비 강익문(姜翼文)을 위하여 신원(伸冤)을 청하니, 답하기를,
"그 곡절은 나도 자세히 모르는데, 지금 소장을 보니 그대가 원통하다고 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전일 강익문이 대간을 논핵한 것에 대해 자세히 살펴 처리하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려우니, 조사하여 추고하라."
하였다. 살펴 보건대 강익문은 정인홍(鄭仁弘)을 스승으로 섬기고 이이첨(李爾瞻)에게 몸을 의탁하여, 정철(鄭澈)을 간적(奸賊)으로 논하고 황신(黃愼)을 지목하여 역괴(逆魁)라 하였으며 자전(慈殿)095) 을 길러준 은혜가 없다고 하였는데, 그밖에 인물을 해친 것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임자년096) 옥사(獄事)에 인홍의 이름이 초사(招辭)에 나오자, 익문이 그때 대간으로 있으면서 인피하기를,
"신은 인홍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그의 충성은 해와 달 같고 행실은 천지 신명도 보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일을 들으니 간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여 배회하더니 도리어 상대방을 해치는 계책을 내었으니, 이 자야말로 더 말할 수 없는 소인이라 하겠다. 대수도 처음에 인홍의 문에 붙좇아 아부하여 정언에 임명되었는데, 다만 정온(鄭蘊)을 구하려고 했던 한 가지 일 때문에 홍천(洪川)에 유배되었다. 이 일로 자신의 죄를 갚은 것만도 족하다 하겠는데, 어찌 감히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아 이토록까지 천청(天聽)을 속인단 말인가. 참으로 통분스럽다.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참찬관 김상헌(金尙憲)이 아뢰기를,
"후세의 임금은 자기의 총명함만 믿었기 때문에 임명받은 사람들이 혹 해이해지는 마음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 시황(秦始皇)과 수 문제(隋文帝)는 신하들이 해야 할 일까지 하였는데, 후세의 임금 가운데 이같은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하자, 상헌이 아뢰기를,
"당 덕종(唐德宗)도 자기의 총명함을 믿어 신하들을 의심하고 꺼리는 생각을 많이 가졌기 때문에 현인들이 자기 뜻을 펼 수가 없어 자주 화란(禍亂)을 초래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덕종은 사람을 알아보는 데에 어두웠으니 총명이란 말을 쓸 자격도 없다."
하니, 상헌이 아뢰기를,
"덕종은 육지(陸贄)가 현인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면서도 시기하는 마음이 많았기 때문에 끝내 신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크게 간사한 사람은 위로 임금의 뜻에 영합하고 아래로 시속에서 좋아하는 것을 따르는데, 태평한 세상에서 간사한 사람을 알아내기란 더욱 어렵다."
하니, 상헌이 아뢰기를,
"만약 그 사람을 분명히 알지 못하고서 신임하면 반드시 화란을 초래할 것이고, 그 사람의 어짐을 알면서도 쓰지 않으면 어진이가 도를 행할 수 있는 때가 끝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진 자를 믿지 않는 해와 어질지 못한 자에게 정사를 맡기는 해 가운데 무엇이 큰가?"
하니, 상헌이 아뢰기를,
"어질지 못한 자를 임용하면 그 해가 빨리 나타나기는 하나, 만약 어진 자를 믿지 않을 경우 어질지 못한 자가 반드시 진출할 것이니 그 또한 어지럽게 되는 것은 결과적으로 마찬가지입니다."
하였다.
윤11월 17일 병진
김세렴(金世濂)을 집의로, 나만갑(羅萬甲)을 헌납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 이귀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답하였다.
"실정에서 벗어난 말은 서로 따질 필요가 없으니, 안심하여 사직하지 말고 빨리 출사하여 공무를 행하라."
윤11월 18일 정사
상이 경외(京外)로 하여금 충신·효자·열부 중에 널리 드러난 자를 모두 찾아 등급을 나누어 포상하도록 하였다. 효자의 경우 정문(旌門)이 세워진 자는 69인, 증직(贈職)된 자는 61인, 상으로 물건을 받은 자는 19인, 복호(復戶)된 자는 1백 6인이었으며, 충신의 경우 정문이 세워진 자는 5인, 증직된 자는 8인, 복호된 자는 12인이었으며, 절부(節婦)의 경우 정문이 세워진 자는 1백 76인, 복호된 자는 11인, 상으로 물건을 받은 자는 6인이었으며, 효우(孝友)의 경우 정문이 세워지거나 복호되거나 상으로 물건을 받은 자가 모두 19인이었다. 폐조(廢朝) 때에 국(局)을 설치하여 《삼강행실(三綱行實)》 20여 권을 간행하였으나 진짜와 가짜가 뒤섞여 있었으며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을 병통으로 여겼다. 그러다가 상이 즉위한 뒤에 곧 바로잡아 고치려고 하였으나 일이 많아 겨를이 없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경외에서 절행(節行)이 있는 자를 찾은 것인데, 그 중에는 잘못 실린 자도 꽤 있었고 지극한 행실이 있는데도 빠진 자도 있었다.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윤11월 19일 무오
달이 화성(火星)을 범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이조 판서 이귀가 감히 탑전에서 총재(冢宰)되기를 자천(自薦)했으니, 비록 성상의 선발이 진실로 지극히 공정한 데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제목(題目)이 마침 이것과 때를 같이하여 나왔고 보면 여론이 자자한 것도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대제학은 한 시대의 중망(重望)을 한 몸에 받는 자이고 묘당(廟堂)은 바로 조정의 대신이 크게 모인 자리인데, 방자하게 욕하며 꾸짖기를 마치 종을 부리듯이 하여 좌중의 모든 사람들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전하의 조정이 이로부터 조용한 날이 없고 관방(官方)이 어지러워져서 나라꼴이 되지 못할까 두려우니, 이귀를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람의 죄상(罪狀)을 논할 때에는 반드시 본정(本情)을 캐보아야 하니, 비록 낮은 관직이나 천한 사람이라도 사사로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에 따라 경솔하게 논해서는 안 된다. 전일 이귀가 한 말은 이조 판서에게 매우 분격하여 한 말에 불과하다. 그 때 홍서봉(洪瑞鳳)은 자신이 총재로 있으면서 추숭하는 일을 크게 미워하였기 때문에, 준엄하게 논하는 사람들은 모두 청현(淸顯)의 직으로 올리고 느슨하게 논하는 사람들은 더러 타향의 귀신이 되게 하여 온 세상으로 하여금 공(公)을 빌려 사(私)를 이루며 정직을 팔아 자신을 이롭게 하였으니, 풍속을 상하고 쇠퇴하게 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저 느슨하게 논한 사람들이 무슨 윤리를 어지럽게 하는 일이 있다고 사사 원수같이 대한단 말인가.
이귀가 자천한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았고, 말하는 자도 벼슬을 요구하는 뜻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대들이 또 그의 말에 품은 마음이 있다고 하니,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 내가 보기에는 이조 판서를 참소하여 죄에 빠뜨리게 하는 것은 딴 뜻이 있는 듯한데,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조 판서 이귀가 상차하기를,
"지난번 연석(筵席)에서 오전(吳竱)과 함께 입시하여 전하께서 뭇 의논에 못견디어 대륜(大倫)의 일을 빨리 밝히지 못하시는 것을 극력 아뢰면서 ‘전하께서 대원군을 높이고자 하는 것은 천하의 공변된 의논이다. 그런데 조정의 의논이 하나가 되기를 기다려 하고자 하면 잘못된 견해를 고집하는 자들이 어찌 갑자기 올바른 의논을 따르려 하겠는가. 만약 신으로 하여금 전판(銓判)이 되게 한다면, 대의(大義)를 밝히고자 하는 사람들로써 삼사(三司)에 배치할 것이니,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는 대륜이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채 조정의 의논에 위협받고 있는 것을 매우 통분스럽게 여긴 나머지 나온 말에 불과합니다. 신이 만약 전판에 뜻이 있었다면 어찌 감히 이 말을 상께 직접 진달했겠습니까. 만약 신의 이 말을 실정(實情)으로 여겼다면, 오전은 어째서 당초 등대(登對)했던 날에 한 마디도 배척하는 말을 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 때는 일단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다가 지금에 와서야 이 말을 끄집어 내어 신을 공격하는 기화로 삼으니, 그의 마음이 어디 있는지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신은 나이가 칠십을 넘었고 지위가 1품이니, 만약 젖비린내 나는 어린애와 자질구레하게 서로 따진다면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 몸이 전지(銓地)에 있으면서 남의 헐뜯음과 배척을 당했으니, 아무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공무를 보고자 하더라도, 공의(公議)에 어떠하며 염치(廉恥)에 어떠하겠습니까. 신을 체직하여 물의(物議)를 통쾌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이 만약 출사하지 않으면 간사한 계획이 이루어져 나라가 나라답게 되지 않을 것이니, 부디 고사(固辭)하지 말라."
하였다.
윤11월 20일 기미
김남중(金南重)을 응교로, 윤구(尹坵)를 교리로 삼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인심의 동요는 말을 통하여 퍼지는 법입니다. 처음에 이미 말을 하여 임명되기를 구했고 이미 임명된 뒤에는 뻔뻔스럽게 공무를 보고 있으니, 외부의 사람들이야 어찌 그 말이 본심에서 연유하지 않았고 그 형적이 벼슬을 요구하는 데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사람을 논하는 도리는 그 말과 형적에 의거하여 논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 말이 이미 저와 같고 그 형적이 또 이와 같으니, 위로 벼슬아치로부터 아래로 노복 같은 천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말하기를 ‘지금의 이조 판서는 자천하여 얻은 것이다.’고들 합니다. 신들이 논한 바는 실로 공적인 입장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감히 그 사이에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저 노복들이 이러쿵저러쿵하는 말들이 어찌 딴 마음이 있어 그렇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이조 판서 이귀를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대들이 뻔뻔스럽게 잇따라 아뢰다니 매우 염치가 없는 일인 듯하다. 오늘날 다시 옛날의 작태를 보게 될 줄은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하였다.
윤11월 21일 경신
집의 김세렴(金世濂) 등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신들을 못났다고 여기지 않고 대성(臺省)에 근무하도록 하였습니다만, 충정이 격동되어 구차히 자리에 있는 것이 부끄럽기만 한데, 정성으로 임금의 마음으로 돌리지는 못한 채 도리어 엄한 분부를 받게 되었습니다. 대저 탑전에서 자천하고 불경스럽게 좌중을 욕한 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죄입니까. 그런데도 이를 논하지 않는다면 조정은 높아지지 않고 기강은 서지 않으며 예양(禮讓)은 땅을 쓴 듯 없어지고 관방(官方)은 어지러워져 대각이 이로부터 외롭고 쓸쓸하게 될 것입니다.
예로부터 인군이 대간을 대하면서 물리쳐 내쫓거나 귀양보내는 일은 있었지만, ‘딴 마음을 가졌다.’든가 ‘염치가 없다.’는 것으로써 배척하기까지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전하께서 신들을 의심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지 않으십니까. 인신으로서 이같은 죄명을 갖게 된 이상 죽어도 죄가 남을 것이니, 신들의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집의 이하가 모두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이귀가 자천한 혐의를 피하지 않고 또 좌중을 욕하는 잘못을 저질러 물의(物議)가 뒤따랐는데, 이는 대개 서로 바로잡아주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 만큼 꼭 이 사람에게 약석(藥石)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성명께서 특별히 이귀의 본정(本情)을 살피면서 유독 대간에게는 딴 마음이 있다고 의심하여 심지어는 염치가 없다는 분부를 내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좌우의 말에 치우친 나머지 지나치게 의심하여 꺼리는 마음이 생긴다면, 이는 언관을 대하는 도리가 아닐 듯싶습니다. 모두 출사를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는 언어가 광포하고 난잡하여 예모(禮貌)에 익숙하지 못한데, 이것이 바로 그의 병통이다. 스스로를 천거한 것이나 좌중을 깔보고 꾸짖은 것 모두가 내 보기에도 좋은 일이 못 된다. 다만 그의 죄과(罪過)를 광포하고 난잡하여 무례하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관직을 구하는 데 뜻이 있었다고 논한다면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오전(吳竱)이 앞에서 주창하자 이경(李坰)의 무리가 뒤에서 호응하여 반드시 실정에 벗어난 죄를 얽어 만들어 얼굴을 들고 공무를 보지 못하게 하려고 하니, 그들의 의도를 헤아려 알 수가 없다. 인군의 입장에서는 진실로 한 백성이라도 원통함을 품고 펴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나이가 많은 원훈(元勳)에게 있어서이겠는가. 대간의 신분으로 중신(重臣)을 무함한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우선 체차하라."
하였다.
금차(金差) 골자(骨者)·만월개(滿月介)·중남(仲男)이 입경(入京)하니, 상이 구관소(句管所)에 하교하였다.
"지금 골자가 온 것은 아무 목적없는 일이 아닌 듯하니, 접대하는 일을 전보다 더욱 후하게 하여 호의를 보이되, 말을 주고받을 때에는 절대로 두렵게 여겨 굽히지 말고 우리의 실정을 다 말하라. 한(汗)의 글에서 힐문했던 말은 명백하게 설명하여 허물을 우리에게 돌리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중남의 무리로 하여금 꺼리는 바가 있게 하는 동시에 내일 불러서 우대하는 뜻을 보아라."
윤11월 22일 신유
대사헌 이현영(李顯英)이 아뢰기를,
"지금 성상의 분부를 보건대 이귀가 자천한 것이 이미 오래 전부터 여러 차례나 되며 병조 판서도 모두 입으로 차지하였는데, 시험삼아 전고(前古)의 역사를 보더라도 이같은 일은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주공(周公)과 같은 훌륭한 재주가 있더라도 이같이 스스로를 판다면 나머지는 족히 볼 것도 없으니, 불경스럽게 좌중을 욕했던 것은 하찮은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귀가 상의 은총을 탐내고 나이 많은 것만 믿고서 두서없이 난잡하게 설쳐대는 것이야말로 가소로운 일로서 깊이 나무랄 가치도 없습니다만, 백관의 모범이 되고 인물을 진퇴시키는 임무는 결코 남에게 비웃음과 욕설을 당하는 자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조 판서 이귀를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그의 말에 입각하여 실마리를 찾아 보면 말 밖의 뜻을 충분히 알 수 있는데, 마음에서 발하여 입으로 나온 말도 오히려 본심이 아니라고 하고 계시니, 성명(聖明)께서 형체없는 곳에서 살피어 허물이 있는 속에서 허물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일에 의거하여 곧장 배척해야 하는 대신(臺臣)의 입장에서는 이와 같이 말을 빙빙 돌려서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광포하고 난잡하여 두서가 없는 것을 진정 나이 많은 훈신이라는 이유로 용서해 줄 수 있다면, 강어(强禦)를 두려워하지 않고 우레 같은 위엄을 범하는 것이야말로 유독 언책을 맡은 사람이 숭상해야 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한 사람의 백성이 원통함을 품고 있는 것도 진정 어진 정사를 베푸는 위정자에게는 걱정거리가 되는 것인데, 세 대신(臺臣)이 죄없이 배척당하는 것이 어찌 성조(聖朝)에서 생각해야 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김세렴(金世濂)·이경(李坰)·박안제(朴安悌)를 체차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대사간 윤지(尹墀), 정언 민광훈(閔光勳)이 아뢰기를,
"연평 부원군 이귀는 저같은 공훈이 있고 저처럼 자신을 알아주는 임금을 만났으니, 남 앞에 서기를 머뭇거리고 양보하여 남의 뒤에 서며 말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을 신중히 했다면, 조정에서 한결같이 칭찬해 마지 않을 것인데, 누가 혹시라도 업신여기고 능멸하겠습니까. 오직 그는 말을 하는 것이 법도가 없어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곤 합니다. 근래 헌부가 논한 것이 그에게 완전히 갖추기를 바라는 뜻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성명께서는 단지 말이 과격하고 비의(比擬)한 것이 적절치 않다고 하여 누차 엄한 분부를 내려 지나치게 기를 꺾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랫사람은 윗사람이 요구대로 들어준다고 의심하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이 딴 마음이 있다고 의심을 하니, 상하가 서로 의심하여 점점 더 막히게 되어 앞으로의 근심 걱정이 이것뿐만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언지(言地)에 있는 신분으로서 전관(銓官)에게 아첨하고 싶지는 않다.’고 한 그 말이 나약한 말은 아닌 듯하기에 그 기운을 꺾어서 대각을 외롭고 쓸쓸하게 해서는 안 되리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김세렴 등을 처치하면서 출사시키기를 청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곧 성상의 분부를 보건대 말 뜻이 더욱 엄하여 특별히 체직하라는 명이 있기까지 하였으니, 신들이 처치를 잘못한 실수가 드러났습니다. 신들의 직을 체척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납 나만갑(羅萬甲)이 아뢰기를,
"총재(冢宰)는 스스로 요구할 직책도 아니고 연중(筵中)은 말을 함부로 지껄여서 될 곳도 아닌데, 이귀가 자천하는 말을 탑전에서 여러 차례 하였고 보면,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도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홍서봉은 관직을 파는 사람이 아니고 장유는 트집잡을 일이 없는 사람인데도 온 힘을 다해 참혹하고 각박하게 공격하였으며, 그 밖에 사류(士類)로서 그의 헐뜯음을 당한 자 또한 한둘이 아닙니다. 조정에서는 예로써 사양하는 것이 중한데도, 대소(大小)의 관원 중에 비방과 모욕을 면한 자가 드물고, 말을 가려서 하지 않고 일이 절도에 맞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대부분 불만을 품고 있으니, 오늘날 그가 사람들에게 배척당하는 것은 모두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라도 할 것입니다. 따라서 헌부가 탄핵하여 바로잡은 것은 그만둘 수 없는 것이었기에 동료와 상의하여 출사시키도록 한 것인데, 엄한 분부를 일단 내린데다가 특별히 체직시키라는 명까지 계셨으니, 처치를 잘못한 실수가 드러났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부가 대사간 이하를 모두 출사시키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숭정전(崇政殿)에 거둥하여 금차(金差)를 불러 보았다. 금차가 국서(國書)를 가지고 정문(正門)으로 들어와 전(殿) 문 안에 서서 국서를 바쳤다. 이어 삼배례(三拜禮)를 행하고 전 동쪽의 교의(交椅)에 나란히 앉으니, 종호(從胡) 30여 인이 뜰 위에서 세 번 절하고 차사 뒤에 열지어 섰다. 상이 말하기를,
"귀국의 한(汗)은 평안하십니까?"
하니, 골자가 말하기를,
"평안하십니다. 한의 글 가운데 사정을 갖추어 말했습니다만, 한께서 신등으로 하여금 직접 진달드리도록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할 말이 있거든 전례에 따라 접대하는 재신(宰臣)에게 갖추어 말하시오."
하니, 골자가 말하기를,
"반드시 직접 진달드리려 한 것은 말을 전할 즈음에 빠질까 걱정되었기 때문인데, 지금 전교를 받았으니 공경히 명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마침내 세 번 절하고 물러갔다. 한이 보낸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국(金國) 한은 조선 국왕에게 글을 보냅니다. 귀국의 글을 받아 보건대 ‘정묘년의 사건 뒤에 이미 각기 국경을 지켜 피차간에 강을 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였는데, 지난번에 까닭없이 군대를 일으켜 갑자기 우리 국경을 침입해서 배를 약탈하고 백성을 위협하며 창고를 털었다.’는 등의 말을 하였는데, 모르겠습니다만 왕의 이 말은 일부러 우리를 속이려는 것입니까, 아니면 왕이 자기의 잘못을 합리화하려는 것입니까? 백성이 해를 입은 것은 모두 왕 때문에 초래된 것이니,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정묘년의 일이 있은 뒤에 왕의 사신이 일찍이 말하기를 ‘중국 군대가 해도(海島)097) 를 차지하고 있는데 형세상 쫓아낼 수가 없다. 그러나 만일 상륙하면 반드시 용납하지 않겠다.’고 하기에, 마침내 섬을 방어하는 군대를 철수하고, 의주(義州)지방을 다시 귀국에 주어 머물러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귀국은 뒤에 다시 중국인을 귀국의 땅에 용납하여 살게 하면서 양식까지 대주었고, 중국 군사를 깊이 숨기고 의모(衣帽)를 바꾸어 입혀 귀국의 백성으로 분장시킨 뒤 정세를 정탐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에 해도의 관민(官民)이 이미 우리에게 귀순하고자 했는데도 귀국은 또 식량을 주어 귀순하려는 뜻을 막았습니다. 그때 우리가 여러 차례 글을 보내어 그들에게 식량을 주지 말 것을 바랐으나, 왕이 염두에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군대를 출동시켜 섬을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우리는 이미 왕이 배를 내주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 예상했지만, 그래도 내 마음속으로는 배를 내주기를 기대했는데, 사람을 보내어 먼저 간청했어도 과연 얻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무지한 소민(小民)들이야 군대가 오는 것을 일단 보게 되면 자연히 놀라 흩어지게 마련이고, 백성이 일단 놀라 흩어지게 되면 살림살이는 자연히 없어지게 마련입니다. 이는 모두 왕이 이웃 나라를 사귀는 것이 정성이 없어 연유된 것인데, 소민들이 의심한 나머지 두려움이 생겨 경솔히 자기 고을을 버린 것입니다. 왕의 마음이 만약 정성스러웠다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겠습니까.
이 일에 대해서 우리는 왕이 반드시 자신을 허물하리라고 생각했는데, 거꾸로 우리에게 허물을 돌릴 줄이야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는 왕의 생각에 장도(張燾)의 계책과 조수(祖帥)의 용맹을 가지고 우리 군대를 패배시켜 의주(義州)와 영유(永柔)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은 나머지 교묘히 말을 만들어 흔단을 찾은 행동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리 양가(兩家)가 이미 하늘을 두고 맹세하여 형제의 의를 맺었는데, 만약 마음과 입이 한결같지 않으면, 이는 맹호(盟好)를 영원히 굳게 하는 지극한 방법이 결코 못 되는 것입니다.
글 가운데에 또 용만(龍灣)098) 에서 억지로 가격을 매긴 것과 회령(會寧)에서 무리하게 요구하며 받아낸 것을 말하였는데, 이는 우리 나라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속이는 자가 있거나 왕의 백성 가운데 왕을 속이는 자가 있는 것이니 만큼 엄히 구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이런 일이 있었다면 이는 우리 양국의 우호를 해치는 것이니, 왕은 마땅히 의주의 해당 관원에게 행문(行文)하여 억지로 값을 매긴 자의 성명과 빼앗긴 마필(馬匹)의 털 색깔을 조사하게 한 뒤 상세히 우리에게 알려 주어 철저히 조사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십시오. 회령의 일은 양국이 각기 똑똑한 관원 1명씩 보내어 함께 그곳에 가서 공동으로 허실을 조사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금년 5월 중에 귀국의 10인이 말 아홉 마리와 함께 우리 나라에 와서 복아합토(卜兒哈兎) 지방에서 사냥을 했는데, 저 찰(札)이 노하여 4인을 억류하고 말 아홉 마리는 돌려 보냈으며 그 가운데 6인은 도망하였습니다. 9월 중에는 귀국인이 회팔(灰扒) 지방에 와서 삼(蔘)을 캐다가, 우리 나라 사람과 싸움이 벌어져 귀국의 5인이 피살되었습니다. 또 9월 중에 귀국인이 도인(島人)099) 과 함께 관전보(寬奠堡)에 와서 삼을 캐다가 우리 나라 사람에게 붙잡혔는데, 도리어 동남명(東南明)을 대하여 이 사람은 우리 나라로 도망해 와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화의를 맹세한 이래로 다만 귀국인이 여러 차례 국경을 넘어 사건을 일으킨 적은 있어도, 우리 나라에서 일찍이 한 사람이라도 국경을 넘은 적이 있었습니까. 성의를 다하여 알려 드리니 왕께서 유의(留意)하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이에 회답합니다."
상이 하교하였다.
"말을 빼앗긴 일은 전후의 말이 모두 명백하지 않으니, 저들이 만약 문제를 제기하면 ‘그때 장사꾼의 말을 모두 빼앗겼다가 떠날 때 억지로 싼 값에 주었기 때문에 국서(國書)에 언급하였다. 이것은 비록 아무 대가없이 빼앗긴 것과는 차이가 있지만 값이 서로 맞지 않는데도 억지로 매매하도록 하였으면 사람들이 빼앗겼다고 말하는 것이다. 양탈(攘奪) 두 자는 조어(措語)에 혹 지나친 점은 있지만 본디 허무맹랑한 말은 아니니, 너희들은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고 대답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이 뜻으로 구관소(句管所)에 말하라."
비국이 아뢰기를,
"창고를 털어 갔다는 말에 대해서는 서쪽에서 온 사람들이 대부분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군율이 매우 엄하여 영을 내리면 금지가 된다고 스스로 여기고 있는데, 우리가 그들이 하지 않은 일을 그들에게 뒤집어 씌우면, 그들이 마음속으로 복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란을 야기하는 근심이 없지 않을 것이고, 다른 일까지도 옳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구관 당상(句管堂上)으로 하여금 그들의 기색을 살펴 만약 이치로써 서로 따질 수 없으면 전에 복계(覆啓)한 대로 행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우리 나라의 일에 대해서도 상세히 들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같은 일이 초래되었으니 더욱 한심하다. 본도로 하여금 다시 조사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윤11월 23일 임술
한필원(韓必遠)을 집의로 삼았다.
김세렴(金世濂)을 현풍 현감(玄風縣監)으로, 박안제(朴安悌)를 목천 현감(木川縣監), 이경(李坰)을 강진 현감(康津縣監)으로 폄출(貶出)하였다. 상이 이 세 사람이 이귀를 탄핵한 것을 미워하여 특별히 먼 고을에 임명한 것이다. 도승지 김상헌이 아뢰기를,
"대간이 일을 논한 것은 다만 직무를 수행한 것인데, 김세렴 등 3인을 한꺼번에 특명으로 외직에 임명하였으니, 이후에 대간이 되는 자로서 그 누가 국가를 위하여 직무를 다하려 하겠습니까. 언로의 소통과 막힘은 국가의 안위에 관계됩니다. 신이 정방(政房)에 재직하고 있기에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무리들은 실정 밖의 죄를 얽어서 원훈(元勳)으로 하여금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려고 했으니 그 죄가 어찌 작다고 하겠는가. 대간이기 때문에 말감(末減)하여 외직에 보임한 것이니, 경은 이 일을 알고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하였다.
체찰사 김시양(金時讓)이 아뢰기를,
"체부(體府)의 군수품인 미곡·청포(靑布)·은화(銀貨) 등의 물건은 호조로 이송하고, 각종 군기(軍器)는 군기시로 이송하고, 제주의 말 및 여러 곳의 목장에 있는 말로써 장사(將士)에게 나누어 주었거나 각 고을에 나누어 기르도록 한 말도 모두 태복(太僕)으로 이송하고, 정묘년 이후로 각 도의 농우(農牛)를 양서(兩西)에 들여보낸 것도 아울러 태복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소서. 그런데 부(府)에 소속된 대변 군관(待變軍官)에게는 전부터 요미(料米)를 지급하는 일이 있었고 군수에 필요한 비용도 빠뜨릴 수 없으니, 쌀 1천 석, 콩 1백 석, 무명 50동(同), 청포 1천 통(桶), 은자 2천 냥을 그대로 놔두어 불시의 수요에 대비하도록 하고, 평양에 있는 인삼 2백 근도 본부에 그대로 두어 섬과 무판(貿販)하여 군수의 비용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본부가 그전처럼 관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추신사(秋信使) 박로(朴𥶇)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랑캐의 정세가 어떻던가?"
하니, 박로가 아뢰기를,
"조대수(祖大壽)가 관하(關河)를 회복(恢復)하는 책임을 전담하여 이미 여덟 곳의 대진(大鎭)을 수복하였는데, 만일 능하(凌河)를 지키게 되면 광령(廣寧)·요계(遼界)를 모두 되찾을 수 있기 때문에, 노병(奴兵)이 장차 중국 군대가 능하를 지킬 것을 알고는 국중(國中)의 군대를 모두 거두어 불의에 공격을 하였습니다. 대릉하(大淩河)의 성(城)은 수비가 완전치 못하기 때문에 조장(祖將)이 방어의 계책을 극진히 하여 성벽을 굳게 하고 기다렸습니다. 이에 노병이 능하성에 설치된 대포의 사정거리 밖에 진을 나누어 치고서 성을 쌓아 그 둘레에다 도랑을 팠으며 허교(虛橋)를 만들고 내성(內城)을 설치하는가 하면 밖으로는 8진(鎭)을 두어 원병(援兵)을 위한 방어시설을 만들었습니다. 여러 장수들이 결전(決戰)을 청하니, 한(汗)이 말하기를 ‘능하의 사람들도 하늘이 우리에게 준 백성이다.’ 하고는 굳게 지키기만 하고 싸우지 않았는데, 조장(祖將)이 식량이 떨어지자 항복하는 체하고 달아났습니다. 한은 일단 성을 함락하고 나서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회군할 때 신에게 크게 펼쳐져 있는 병세(兵勢)를 보도록 청하였는데, 군대가 거의 6만∼7만이나 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장춘(張春)이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인가?"
하니, 박로가 아뢰기를,
"연회를 베풀 때마다 장춘에게 나와서 앉도록 하였는데, 체구는 작고 나이는 50세쯤 되었습니다. 주지번(朱之蕃)의 아우도 잡혔는데 시종 굴복하지 않았으며, 장·주 두 사람은 머리도 깎지 않았습니다. 성 밖에 장흥사(長興寺)가 있는데, 장·주가 중국 복장으로 절 안에 거처한다고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는 가상한 일이다."
하였다. 상이 또 하문하기를,
"한의 용모와 행동은 어떠하던가?"
하니, 박로가 아뢰기를,
"용모는 제장(諸將)에 비해 조금 특이했지만, 행동거지는 장난하고 히히덕거리며 말하고 웃는 것이 뭇 오랑캐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상을 주는 것은 반드시 손수 주었습니다. 연회에서 술을 마실 때마다 술 그릇을 수십여 개 놓고서 아끼는 장수들을 상(床) 아래로 불러 친히 술을 따라 주었는데, 이는 대개 여러 부족들을 수합한 관계로 그들의 마음이 하나로 합쳐지지 못할까 걱정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의 아들은 아비와 비교하여 어떠하던가?"
하니, 박로가 아뢰기를,
"아들의 이름은 호고벌어(好古伐於)인데, 나이는 20살 남짓 되었으며 용모가 범상치 않았고 궁마(弓馬)의 재주가 상당하였습니다. 그리고 귀영개(貴榮介)는 아들이 여섯으로 모두 병권(兵權)을 갖고 있었는데, 8왕(王)이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니 어찌 오랫동안 안정을 유지하겠습니까. 신의 망령된 소견으로는 반드시 서로 죽이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그리 될 것을 아는가?"
하니, 박로가 아뢰기를,
"고산(高山) 한 사람이 모처(某處)에 사람을 보내면 나머지 일곱 고산들도 증인용으로 각기 한 사람을 보내 참석시킵니다. 우리 나라 사신이 들어 갈 때에 여덟 명의 고산이 번갈아 음식을 제공하며 잘 해 주려고 애를 쓰는데, 이 또한 시기하고 의심하는 소치입니다. 용골대(龍骨大)는 한이 가장 믿고 아끼는 사람이지만 신을 만나 볼 때엔 반드시 여덟 고산이 보낸 사람들과 함께 오는데, 이것도 의심을 받아 은밀하게 고해 바칠까 두려워하기 때문인 듯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의 대우가 정문익(鄭文翼)이 갔을 때와 비교하여 어떠하던가?"
하니, 박로가 아뢰기를,
"그때엔 문신인지 무신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여러 오랑캐들이 성명을 말하지 않고 바로 들어왔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드시 대문 밖에서 말을 내려 성명을 말한 뒤 들어오라고 하면 들어오는 등 예가 매우 공손해졌습니다. 한도 사실(私室)에 별도의 연회를 베풀어 신을 옆 자리에 앉혔는데, 털 담요를 다섯 겹으로 깔고 금으로 된 그릇과 옥으로 된 잔에 술을 따라 권하였습니다."
하였다.
윤11월 24일 계해
간원이 아뢰기를,
"이목(耳目)을 맡은 관원이 어전에 서서 시비를 따질 때에, 낭묘(廊廟)에 관계된 일이면 재상도 죄를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말한 것이 모두 꼭 옳지는 않더라도 그 기운을 꺾지 않고 다 말하게 하는 것이니, 어찌 부질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지금 김세렴(金世濂) 등이 일을 논한 것이 비록 어느 정도 합당함을 잃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 마음은 대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엄하고 매정하게 분부하신 것만도 이미 미안하기 그지없는 일인데, 또 뜻밖에도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이 내렸으니, 자못 성조(聖朝)에서 언관을 대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언로의 소통과 막힘은 관계되는 바가 작지 않으니, 김세렴·이경·박안제를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고, 그 뒤에 헌부와 간원이 모두 이 일을 가지고 연계(連啓)하였으나, 상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이목(耳目)을 맡은 관원이 어전에 서서 시비를 따질 때에, 낭묘(廊廟)에 관계된 일이면 재상도 죄를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말한 것이 모두 꼭 옳지는 않더라도 그 기운을 꺾지 않고 다 말하게 하는 것이니, 어찌 부질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지금 김세렴(金世濂) 등이 일을 논한 것이 비록 어느 정도 합당함을 잃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 마음은 대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엄하고 매정하게 분부하신 것만도 이미 미안하기 그지없는 일인데, 또 뜻밖에도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이 내렸으니, 자못 성조(聖朝)에서 언관을 대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언로의 소통과 막힘은 관계되는 바가 작지 않으니, 김세렴·이경·박안제를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고, 그 뒤에 헌부와 간원이 모두 이 일을 가지고 연계(連啓)하였으나, 상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윤11월 25일 갑자
박동선(朴東善)을 대사헌으로, 이현영(李顯英)을 행 호군(行護軍)으로 삼았다. 헌부의 관원이 모두 피혐중이었기 때문에 현영이 헌장(憲長)으로서 연계(連啓)하여 이귀를 탄핵하였는데, 말이 매우 곧고 끊는 듯하여 임금의 뜻에 거슬려 체직되었다. 대간으로서 체직된 자에게는 으레 그 품계에 해당하는 실직(實職)을 주는 법인데도 상이 군직(軍職)에 부치도록 명하였다.
박동선(朴東善)을 대사헌으로, 이현영(李顯英)을 행 호군(行護軍)으로 삼았다. 헌부의 관원이 모두 피혐중이었기 때문에 현영이 헌장(憲長)으로서 연계(連啓)하여 이귀를 탄핵하였는데, 말이 매우 곧고 끊는 듯하여 임금의 뜻에 거슬려 체직되었다. 대간으로서 체직된 자에게는 으레 그 품계에 해당하는 실직(實職)을 주는 법인데도 상이 군직(軍職)에 부치도록 명하였다.
윤11월 26일 을축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시독관 윤구(尹坵), 검토관 구봉서(具鳳瑞) 등이 아뢰기를,
"김세렴 등 3인을 한꺼번에 외직에 보임하였기 때문에 뭇 의논이 놀라고 의혹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세렴 등의 말은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모함하려는 생각에서 한 것이겠습니까. 성상의 분부가 준절하신 것만도 매우 온당치 못한데, 외직에 보임하기까지 했으니, 대간을 너그럽게 용납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양사의 의논을 흔쾌히 따르소서."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윤11월 27일 병인
화성(火星)이 물러나 헌원(軒轅)의 다섯째 별을 범하였다.
김남중(金南重)을 집의로 삼았다.
윤11월 28일 정묘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윤11월 29일 무진
우승지 이민구(李敏求)가 아뢰기를,
"어제 저녁 전 찰방 이중형(李重馨)이 와서 상소를 올렸는데, 대체적인 내용은 신숙녀(申淑女)의 옥사에서 삼성(三省)의 추관(推官)이 비호한 잘못을 극언(極言)한 것으로서 전일 김극형(金克亨)의 상소 내용과 전후가 같은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단에서는 전적으로 본원(本院)을 공격하면서 말이 장황하였는데 심지어는 책을 불사르고 선비를 묻어 죽였다는 것으로 비유하기까지 하였으므로, 감히 그냥 머물려 둘 수가 없어 입계(入啓)한 뜻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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