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5권, 인조 9년 1631년 12월

싸라리리 2025. 12. 29.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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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일 신미

이경증(李景曾)을 수찬으로, 채유후(蔡𥙿後)를 지평으로 삼았다.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12월 4일 임신

영중추부사 이원익(李元翼)이 치사(致仕)를 청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원익은 금천(衿川)에 물러나 살았는데, 거처하는 집이 비와 바람을 가리지 못할 정도였기 때문에 상이 특별히 본도로 하여금 집 한 칸을 지어 거처하도록 하자 원익이 극력 사양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상소하기를,
"성상께서 천한 신하에 대해 각별한 대우와 특별한 은혜를 날이 갈수록 더욱 깊게 하시니, 그 덕을 갚고자 해도 하늘과 같이 끝이 없습니다. 지금 늙고 죽을 날이 가까워 국은에 보답할 길이 없으니, 남은 한이 가슴에 가득 차서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습니다. 칠십에 치사하는 것이 국가의 훌륭한 법인데, 신은 나이가 벌써 구십에 들어섰습니다. 신하로서 반드시 구십이 되어서야 치사한다면, 역대 이래로 어찌 다시 치사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지난날에는 조금 기력이 있어 몸을 지탱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누우면 일어나지도 못하고 숨이 곧 끊어질 듯하니, 충성을 바치고자 하는 뜻이 슬프게도 이미 틀려버렸습니다. 성명께서 저의 심정을 곡진히 헤아려 치사를 단연코 허락해 주신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늙은이를 우대하는 성덕(聖德)이 지극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자세히 알았으나 내 마음이 무척 서운하다. 경이 물러나 노년을 보내고 있는 것은 치사와 다를 바 없으니, 모름지기 나의 뜻을 받아들여 다시는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유격(遊擊) 송유창(宋有倉)을 접견하였다. 유창은 등주(登州)에서 가도(椵島)로 가던 중 바람을 만나 표류하여 전라도 영광현(靈光縣)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이르러 서울로 들어왔다. 상이 유창에게 이르기를,
"황상(皇上)은 만복하시요?"
하니, 유창이 아뢰기를,
"성천자(聖天子)는 평안하십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멀리에서 풍파를 겪으며 오느라 참으로 고생했겠소이다."
하니, 유창이 사례하기를,
"현왕(賢王)의 큰 은혜 덕분에 다행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습니다."
하고, 이어 아뢰기를,
"군문(軍門)이 비직(卑職)으로 하여금 국왕께 말씀을 전하게 하기를 ‘모 총병(毛摠兵)100)   때부터 관군(官軍)과 섬에 있는 요동 백성이 오직 물자를 보내주신 귀국의 은혜를 입어 왔는데, 유적(劉賊)101)  이 난을 일으킨 뒤에도 귀국의 충의(忠義) 덕분에 수만의 피폐한 백성들이 도륙을 면하였으니, 감격을 금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조 판서 이귀(李貴)가 상차하기를,
"요즈음 도헌(都憲)102) 이현영(李顯英)이 신을 논한 말은 반드시 말한 것 이외의 율(律)로 신을 꿰맞추려고 하는 것이니, 대략 신의 소견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전(吳竱)이 신을 공격한 것은 피혐하면서 갑자기 나왔기에 처음에는 우연히 한 말로 여겼습니다만, 김세렴(金世濂) 등이 장관(長官)의 출사(出仕)를 기다리지도 않고 논의를 꺼냈는가 하면, 이현영이 또 성상소(城上所)가 없는데도 파격적으로 혼자 아뢰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신의 죄악은 말로 인한 사소한 허물이 아니고 반드시 국가의 성패에 관계된 것이라서 사람들이 마치 호랑이를 때려 잡듯 신을 급히 공격하는 것이니, 진정 두렵기만 합니다.
현영은 신을 ‘임금의 총애를 탐내고 나이 많은 것을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이 만일 실제로 임금의 총애를 탐내는 마음이 있었다면 반드시 위로 상의 뜻에 순응하고 아래로 시의(時議)에 아부하여 총애를 굳히는 계책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 국가의 대사에 매양 특별히 나서서 혼자 쟁론하다가 위로 상의 뜻에 저촉되고 아래로 조정의 의논에 거슬리어 오랫동안 배척받는 속에 있으면서 하루도 조정에서 편한 날이 없이 지내겠습니까. 오늘날에 이르러 오전과 이현영의 무리가 전후로 신을 공격하는 것 역시 신이 상의 총애를 제대로 탐내지 못했던 결과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이 많은 것을 믿는다는 것으로 죄명을 삼는 것도 이치에 닿지 않습니다. 신은 포의(布衣) 때부터 의로운 일에 분발하여 몸을 잊고 항쟁하는 소를 올려 혼자 배척하였는데, 이것도 나이 많은 것을 믿고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원훈(元勳)의 반열에 있으면서 대례(大禮)가 정해지지 않아 윤리의 기강이 장차 어두워지는 것을 눈으로 보고서도 나이 많은 것을 믿는다는 것을 혐의스럽게 여겨 남김없이 말하고 힘껏 쟁론하여 긴 밤을 해와 달처럼 밝히기를 기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나이 장차 팔십이 되어 죽을 날이 가까우니 잠시 동안이나마 죽지 않아 큰 윤리가 다시 밝아지는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신의 지극한 소망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신을 전관(銓官)의 장(長)에서 체직시켜 대간의 곧음을 권장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자세히 알았다. 이현영 등은 필시 경이 오랫동안 천관(天官)103)  에 있으면 추숭(追崇)하는 예가 이루어져서 이론(異論)이 꺾이고 벼슬에 오르는 길이 달라져 제 뜻과 같은 자가 용납되기 어렵다고 여기는 것이니, 어찌 한심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경이 지금 사직하고 물러나면 바로 그들의 계책에 빠지는 것이니, 다시는 사직하지 말고 조리하여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6일 갑술

이전에는 매년 중추(仲秋) 이후로 사형에 해당되는 죄수의 기록을 가지고 의정부에 조율 감정(照律勘定)을 하여 정부가 그 율(律)을 인준하면 정원이 품달하여 계복(啓覆)104)  을 하였는데, 상이 친히 여러 신하들과 심의하여 삼복(三覆)105)  을 한 뒤에 단안을 내리곤 하였다. 그런데 무진년106)  에 계복한 뒤로 조정에 일이 많아 오랫동안 옥사를 재심리하지 못하여 수년 동안이나 죄인들이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경외(京外)의 사형수가 통틀어 22인이나 되었다. 상이 정전(正殿)에 거둥하여 초복(初覆)의 규례를 행하였는데, 이때 입시(入侍)한 자는 우의정 이정구(李廷龜), 행 호조 판서 김신국(金藎國), 한성부 판윤 김자점(金自點), 지경연사 김기종(金起宗), 대사헌 박동선(朴東善), 우참찬 한여직(韓汝溭), 이조 참판 이성구(李聖求)  【 이상은 동쪽 벽에 있었다.】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署), 판돈녕부사 이덕형(李德泂), 행 형조 판서 구굉(具宏), 행 병조 판서 김시양(金時讓), 형조 참판 정두원(鄭斗源), 종실(宗室) 진성군(珍城君) 이해령(李海齡)  【 이상은 서쪽 벽에 있었다.】  대사간 윤지(尹墀), 예조 참의 여이징(呂爾徵)  【 이상은 동쪽에 가깝게 있되 서쪽을 상석(上席)으로 하였다.】  첨지 조국빈(趙國賓), 형조 참의 정기광(鄭基廣), 공조 참의 이윤우(李潤雨), 교리 조위한(趙緯韓), 수찬 강대수(姜大遂)  【 이상은 서쪽에 가깝게 있되 동쪽을 상석으로 하였다.】  행 도승지 김상헌(金尙憲), 좌승지 김상(金尙), 우승지 이민구(李敏求), 좌부승지 정지우(鄭之羽), 우부승지 조방직(趙邦直), 동부승지 정세구(鄭世矩)  【 이상은 기둥 앞에 있었다.】 한주(翰注)107)   4인이었다. 【 2인은 기둥 밖 동쪽, 2인은 기둥 밖 서쪽에 있었다.】

【태백산사고본】 25책 25권 52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461면
【분류】사법-재판(裁判)


[註 104] 계복(啓覆) : 임금에게 상주하여 사형수를 다시 심리하는 일.[註 105] 삼복(三覆) : 사죄(死罪)에 대한 세번의 복심(覆審).[註 106] 무진년 : 1628 인조 6년.[註 107] 한주(翰注) : 한림 주서.

ⓒ 한국고전번역원

 

12월 7일 을해

경상도 청송군(靑松郡)에 지진이 있었다.

 

지평 채유후(蔡𥙿後)가 인피하기를,
"일전에 듣건대 이행원(李行遠) 등을 잘못 주의(注擬)한 것 때문에 상이 천조(天曹)에 견책을 가하였는데 성지(聖旨)가 준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늦여름에 낭청(郞廳)으로 있었으니 의당 죄를 같이 받아야 하는데도 뜻밖에 지금 총애하는 임명을 갑작스럽게 받았습니다. 글을 올려 자수(自首)했으나 도리어 따뜻하게 타이르는 말씀을 받고 보니, 감격스러움과 송구스러움이 교차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대개 낭관이 죄를 얻을 때 장관(長官)이 면한 적은 있었지만, 어찌 그때의 장관이 바야흐로 중한 죄를 받고 있는데 낭관인 자가 태연스럽게 죄없는 듯이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1, 2년 전부터 왕의 말씀이 한 번 전파되면 온 조정이 놀라고 두려워 하였습니다만, 조정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죄를 얻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이를 보는 사람들도 모두 축하를 했지 위로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랫사람의 실정이 이러하다는 것을 전하께서 어떻게 알겠습니까. 저 죄를 입은 제신(諸臣)들이야 진실로 애석히 여길 것이 없지만 적이 성조(聖朝)를 위하여 근심이 되기만 합니다. 신은 또 장관에게 죄를 떠넘기고 요행히 혼자만 면할 수 없으니, 체척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지평 조공숙(趙公淑)도 생각한 바를 기탄없이 다 말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천조(天曹)가 죄를 입은 것을 혐의로 여긴다면 그것은 이미 지난 일이고, 기탄없이 다 말하지 못한 것을 혐의로 여긴다면 앞으로도 늦지 않으니 논할 만한 일이 있으면 기탄없이 다 말해야 마땅할 것이고 꼭 그 일을 끌어다가 혐의스럽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채유후와 조공숙을 모두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8일 병자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12월 9일 정축

태백이 나타났다.

 

전주(全州)에 사는 생원 이돈례(李惇禮) 등이 상소하여 이언적(李彦迪)을 향사(享祀)하는 서원에 편액(扁額)을 내려 주기를 청하였는데, 예조가 회계하기를,
"근래 서원이 너무 많이 생긴 나머지 폐단이 없지 않아 중하게 여겨야 할 학교가 도리어 겉치레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러나 본주(本州)는 바로 선현이 부임해 다스렸던 곳이기 때문에 끼친 교화가 아직도 남아 있고 문풍(文風)도 가장 성합니다. 또 서원이 이미 설치되어 세월도 오래되었으니, 지금 떠들썩하게 새로 세운 서원과는 비할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아름다운 편액을 내려 원방(遠方)에 있는 많은 선비들의 여망에 중하게 부응하는 것도 무방할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까지 편액을 얻지 못했다면 실로 우연한 일이 아니니, 우선 서서히 하라."
하였다.

 

12월 11일 기묘

상이 자정전(資政殿)에 거둥하여 사형수들을 삼복(三覆)하였는데, 입시(入侍)한 자는 의정부 영의정 윤방(尹昉), 우참찬 한여직(韓汝溭), 예조 판서 최명길(崔鳴吉), 한성부 우윤 홍영(洪霙), 호조 참판 윤이지(尹履之)  【 이상은 동쪽 벽에 있었다.】  행 형조 판서 구굉(具宏), 의빈부 길성위(吉城尉) 권대임(權大任), 종친부 풍해군(豊海君) 이호(李浩), 병조 참판 강석기(姜碩期), 형조 참판 정두원(鄭斗源), 충훈부 평원군(平原君) 이택(李澤), 돈령부 동지 홍희(洪憙), 공조 참판 정광성(鄭廣成)  【 이상은 서쪽 벽에 있었다.】  이조 참의 유백증(兪伯曾), 사헌부 집의 김남중(金南重), 사간원 정언 민광훈(閔光勳)  【 이상은 동쪽에 있되 서쪽을 상석(上席)으로 하였다.】  중추부 첨지 강담(姜紞), 형조 참의 정기광(鄭基廣), 홍문관 교리 조위한(趙緯韓), 수찬 강대수(姜大遂)  【 이상은 서쪽에 있되 동쪽을 상석으로 하였다.】  행 도승지 김상헌(金尙憲), 좌승지 김상(金尙), 우승지 이민구(李敏求), 좌부승지 정지우(鄭之羽), 우부승지 조방직(趙邦直), 동부승지 정세구(鄭世矩)  【 이상은 기둥 앞에 있었다.】 한주(翰注)108)   4인이었다. 【 2인은 기둥 밖 동쪽, 2인은 기둥 밖 서쪽에 있었다.】  이날 사형에 해당된 죄인은 22인이었는데, 상이 특별히 그 가운데 2인을 용서하였다. 외방(外方)에 있는 사형수는 입춘(立春)이 겨우 엿새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다.

 

12월 12일 경진

신민일(申敏一)을 장령으로 삼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김계종(金繼宗), 최상원(崔尙元)의 범죄 사실은 모두 극적(劇賊)에 해당됩니다. 어보(御寶)를 위조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계획하여 실정과 행적이 낭자하니, 그 죄가 꼭 같습니다. 그런데 상원만 면하였으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대신(大臣) 이하가 이미 용서할 수 없다고 진달드렸는데도 상께서는 특별히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을 나누었으니, 물의가 모두 온당치 못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상원을 법에 의하여 죄를 정하소서.
법이란 천하에 믿음을 펴는 것이니, 의견을 가지고 꺾어 고칠 수는 없습니다. 이극성(李克成)이 살인한 죄는 이미 원고(元告)의 공초(供招)에 나왔고 또 극명(克明)의 공초에도 드러났으니, 극성의 죄는 이미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동생인 자신이 죽겠다고 한 정상을 참작하여 그 형까지 특별히 용서하였는데, 국가가 피해자를 위해 살인한 자를 죽이는 법을 폐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데도 죄를 주지 않으면 뒷날의 폐단이 무궁할 것이니, 이극성을 법대로 적용하여 처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최상원은 실정과 행적이 조금 가벼우니 용서할 수도 있는 일이고, 이극성을 용서하여 세상을 격려하는 것 또한 안 될 것이 없을 듯하다. 모두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형조 참의 정기광(鄭基廣)은 일찍이 강원 감사로 있을 적에 처첩(妻妾) 양가가 모두 원주(原州)와 횡성(橫城) 사이에 있어서 폐를 끼치고 삼가하지 않는다는 비평이 있었으며, 영문(營門)을 마음대로 버려두고 오랫동안 집에 있었으므로 온 도의 사람들이 침뱉고 비루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 뒤 본직에 임명되자 역시 사람들의 비난이 많은데, 소사구(小司寇)의 직임을 이같은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원주(原州)야말로 영문(營門)이 있는 중요한 곳인데, 목사 이영도(李詠道)는 나이가 70이 넘어 정사를 하리(下吏)에게 맡기므로 관청의 일이 날로 형편없게 되었으니, 파직하소서.
65세 이상은 수령에 임명하지 못하도록 법전(法典)에 실려 있는데, 근래 공(公)이 사(私)를 이기지 못해 법이 폐해진 채 시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목민관에 적임자를 얻지 못하는 것이 꼭 여기에 연유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으니, 해조로 하여금 법례(法例)대로 하도록 신칙하여 늙고 병든 사람을 수령에 의망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민폐를 없애소서.
수령의 업적을 비석으로 세우는 일이 중고(中古) 이전엔 겨우 한두 경우가 있었을 뿐 거의 없었는데, 근일에 목민관이 된 자는 전적으로 명예 구하는 것만을 일삼아 먼저 목비(木碑)를 세우고 또 석각(石刻)을 세웁니다. 그러나 그의 치적을 객관적으로 살펴 보면 조금도 실제의 공효가 없는데, 인심이 날로 비하되어 아첨하는 것이 풍습을 이루었으니, 오늘날 제거하기 힘든 폐단이 되었습니다. 각도의 감사로 하여금 일체 엄금하도록 하고, 만일 성적(聲績)이 없는데 명예를 구하여 비(碑)를 세우는 자가 있으면 주동한 품관(品官)을 무거운 벌로 다스려 투박한 습속을 바로잡으소서.
온갖 일이 무너지고 폐해지는 것은 실로 처음 입사(入仕)하는 자를 고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근래 이 길이 뒤죽박죽되어 부적격자로서 벼슬에 진출하는 자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니, 해조로 하여금 걸맞지 않는 자를 도태하도록 하여 벼슬길을 맑게 하소서.
문관으로 까닭없이 산직(散職)에 있는 자가 무려 1백여 인이나 되니, 그 가운데 어찌 쓸 만한 인재가 없겠습니까. 해조 당상을 모두 추고하고 빈 자리가 나는 대로 거두어 써서 공도(公道)를 극진하게 하소서.
청양(靑陽) 옥사는 이미 대신의 추국을 거쳤는데도 이점(李漸)이 격쟁(擊錚)하였으므로 금부(禁府)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라는 분부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자못 삼사(三司)를 중히 여기는 뜻이 못 되니, 다시 의논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정기광은 추고하라. 그리고 청양 옥사는 내가 다시 추국하고자 하니, 경들은 미리부터 변호하지 말도록 하라. 나머지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2월 14일 임오

이조 판서 이귀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위로하고 타이르며 허락하지 않았다.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이 상소하여 치사(致仕)를 청하니, 상이 부드럽게 유시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15일 계미

지평 윤효영(尹孝永)이 인피하기를,
"삼가 살펴 보건대, 전하께서 간언을 싫어하는 병통이 근래 점점 고질화되었습니다. 관원이 서로 바로잡는 것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도인데 전하께서는 너무 지나치게 의심을 하시고, 바른 말을 피하지 않는 것은 신하의 직무인데 전하께서는 너무 심하게 꺾어버리십니다. 그리하여 준엄한 비답을 늘 대각(臺閣)에 내리시므로 인정(人情)이 황송하여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기상(氣象)이 쓸쓸하고 참담해지니, 이것이 어찌 성명께 바라는 것이겠습니까. 이목(耳目)을 맡은 신하는 말하는 것이 책무이니, 설사 과격한 말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품은 생각은 모두 반드시 진달드려 임금을 섬기는 데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뜻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허적(許𥛚)은 상소하면서 심지어 무군 부도(無君不道)로 죄명을 삼기까지 하였습니다. 아, 무군 부도야말로 얼마나 큰 죄명인데, 고금 천하에 어찌 이 네 글자로 품은 바를 남김없이 말하는 대신(臺臣)에게 가한 적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아직도 통렬히 배척하는 분부를 내리지 않고 계시니,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 신하가 간언을 드리는 것은 자기 몸을 이익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오직 나라에 충성하려고 해서입니다. 비록 말을 하도록 인도하여 온화한 얼굴로 들어주더라도 충간(忠諫)의 길이 막히고 아름다운 말이 혹 숨어버릴까 염려되는데, 지금 전하께서는 귀에 거슬리는 말을 이처럼 듣기 싫어하고 무함하는 말을 이처럼 편중하여 들으시니, 이 뒤로 위망(危亡)이 곧 닥치더라도 누가 하늘 같은 위엄 아래에 감히 말을 하여 벽력과 같은 노여움을 자초하려 하겠습니까.
신은 보잘것 없는 몸으로 여러 차례 외람되이 분수에 넘치는 자리에 있었는데, 이처럼 상하가 막히고 국사(國事)가 날로 글러지는 날을 당해서도 일찍이 조정의 잘잘못에 대하여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한 채 용렬하게 남의 뒤만 따라다니며 입을 다물고 세월만 보냈으니, 신의 죄야말로 이미 많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이번에 다시 제수하는 명을 받았는데, 마침 천질(賤疾) 때문에 지금에야 비로소 와서 사은하니, 결코 직책에 있기 어렵습니다. 체척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효영이 인피한 것은 쟁신(諍臣)의 기풍을 깊이 체득한 것으로서 병 때문에 사은을 늦게 한 것은 더욱 피할 만한 혐의가 없으니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17일 을유

이조 판서 이귀가 또 상소하여 사직하니, 답하였다.
"경의 간절한 뜻을 모두 알았다. 오전(吳竱)의 무리들의 마음은 길을 가는 사람들도 아니, 경은 서로 따지지 말고 속히 출사하라."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성인의 효도는 어버이를 높이는 것을 훌륭하게 여기고 인군의 다스림도 효도와 공경을 우선으로 삼으니, 아버지의 사당을 오래도록 누항(陋巷)에 둘 수는 없고 아버지의 신위(神位)를 오랫동안 비워둘 수도 없다. 당조(唐朝)이 고사(故事)에 ‘살아계실 때와 돌아가신 후의 예(禮)를 달리 한다면 죽은 이 섬기기를 살아계실 때와 같이 한다는 뜻이 없게 된다.’고 하였다. 우리 나라의 옛 규례를 잘못된 의논에 구애된 나머지 끊지 못한다면, 아버지를 잊고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른다는 비난이 있을 것이니, 할아버지를 높여 차례를 펴고 효도를 다하여 예에 맞게 하는 것이야말로 추숭(追崇)하는 일에 달려 있다.
아, 지난번에 한두 명의 대신이 예가 아닌 의논을 그릇 주장했고 두세 명의 경좌(卿佐)가 함부로 떳떳하지 못한 전고(典故)를 고증하여 ‘부자(父子)의 친함을 끊을 수 있다.’ 하였고, 후세에 양자가 되는 예(例)를 고집하여 ‘존숭하는 일은 함부로 할 수 없다.’고 하며 사리에 맞지 않는 글을 지어 견강 부회하였다. 이는 계통(系統)과 후사(後嗣)가 서로 다르고 친밀하고 소원한 관계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고, 선조(宣祖)께서는 아들이 없다가 아들이 있게 되고 과인은 예위(禰位)가 없다가 예위가 있게 되어 유명(幽明)이 함께 빛나고 정례(情禮)가 모두 극진해지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니, 통탄스러움을 금할 수가 있겠는가.
이 일은 알기가 어렵지 않은데,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더러는 천리(天理)를 궁구하지 않고 자기 소견만 고집하며, 더러는 예문(禮文)을 살펴보지 않고 남의 말만 경솔히 믿으며, 더러는 사정(私情)에 끌려 이기는 것을 훌륭하게 여기며, 더러는 떠도는 논의에 겁을 내어 침묵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며, 더러는 부산하게 한갓 헛된 명예만을 따르며, 더러는 사리에 어두워 전연 실제로 아는 것이 없어 십 년이 지나도록 깨닫지 못한 채 한결같이 미혹스러운 의견만 고집하니, 이것이 어찌 인정(人情)이겠는가. 나의 불효로 말미암은 것이다. 대례(大禮)를 이루기 전에는 한 시각도 내 마음이 편할 수가 없으니, 이것이 어찌 다만 사사로운 뜻일 뿐이겠는가. 천리와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일이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속히 의논해 결정하도록 하여 미진함이 없도록 하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지금 내리신 전교야말로 막중한 일인데, 청(廳)에 좌승지 김상(金尙)과 동부승지 정세구(鄭世矩)만이 있으니, 쉽게 분부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자, 답하기를,
"무식한 말은 하지 말고 빨리 해조에 내리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추숭하는 것이야말로 막중한 전례(典禮)로서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이 본래 굳게 논집한 적이 있는데, 신 등 두 사람만이 청에 있는 관계로 감히 경솔하게 분부할 수 없기에 이렇게 우러러 여쭈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엄한 분부를 받고 보니 진실로 황공스럽기 그지없으나 또한 감히 분부를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12월 18일 병술

상이 하교하였다.
"임금의 명은 덮어 두는 물건이 아니고, 정원은 예를 의논하는 곳이 아니다. 그런데 어제 하교했는데도 승지 김상·정세구 등이 회의를 핑계대고 끝내 거행하지 않았으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모두 먼저 파직시킨 다음 추고하여 윗사람을 업신여긴 죄를 징계하라."

 

강홍중(姜弘重)·목서흠(睦敍欽)을 승지로, 신천익(愼天翊)을 수찬으로 삼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를 보니 말 뜻이 간절하고 측은하였는데, 전례(典禮)가 결정되지 않은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겨 한 시각도 마음이 편치 못하다는 분부를 내리시기까지 였습니다. 모든 신료(臣僚)들도 각기 부모가 있으니, 누군들 금일의 분부에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신들은 보잘것 없는 자로서 춘관(春官)109)  에 재직하고 있으니, 어찌 성상이 마음에 순응하여 큰 효도를 이루시도록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다만 일은 사전(祀典)보다 큰 것이 없고 예는 묘제(廟制)보다 중한 것이 없으니, 진실로 조금이라도 미진한 점이 있어 군상으로 하여금 나라 사람들의 비평을 면치 못하게 한다면, 또한 임금을 섬기면서 예를 극진히 는 도리가 아닙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인이 제정하실 처음에는 매우 간소하고 질박하여, 아버지가 사(士)이고 아들이 대부(大夫)이면 장사는 사의 예로 하고 제사는 대부의 예로 했으며, 아버지가 사이고 아들이 천자나 제후이면 장사는 사의 예로 하고 제사는 천자나 제후의 예로 였으니, 이것이 바로 삼대(三代) 때 정했던 제도로서 상하에 통용되던 것이었습니다.
한(漢)나라는 주(周)나라의 예를 모방하여 황(皇)이라 하고 제(帝)라고는 하지 않았는데, 조위(曹魏) 이후로 이 예가 마침내 변하여 대부에게 추증(追贈)하는 규례가 있고 제왕에게 추숭(追崇)하는 전례(典禮)가 있게 되었으니, 일은 비록 옛것이 아니었으나 예는 혹 때를 따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처음으로 봉(封)함을 받은 임금에게 해당되는 일이었고, 왕위를 계승한 임금에 있어서는 적손(嫡孫)으로 대통(大統)을 이어받아 일찍 죽은 아버지를 추숭하는 경우에만 간혹 있었습니다. 또 방손(傍孫)이나 지손(支孫)으로 들어와 계승하였는데도 참람되이 사친(私親)을 높인 경우엔 매우 윤리에 어긋나고 예에 벗어난 것으로 당시 사람들이 비난하고 후세 사가(史家)들도 죄를 주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선조(宣祖)의 직손(直孫)으로서 종묘 사직이 장차 망할 것을 안타깝게 여겨 악하고 더러운 것을 쓸어 없애고 할아버지의 대통을 이어받았으니, 일이 처음으로 봉함을 받은 임금과는 다르고 예가 방손으로서 대통을 이은 자와는 다르므로, 적손으로서 왕통을 이은 자와 다를 것이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대원군(大院君)은 일찍이 저군(儲君)110)  의 자리에 있지 않았으니 일찍 죽은 태자와 비교하면 또한 차이가 없지 않습니다. 오직 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고사(故事)와 가장 걸맞으나, 왕위에 오른 것과 오르지 않은 것 사이에 상례(常禮)와 변례(變禮)의 구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상하 수천 년 동안에 실로 오늘의 일과 흡사한 경우는 없습니다. 그런데 애당초 예를 논의할 때 창졸간에 의논하여 결정하게 된 데다가 또 복왕(濮王)과 가정(嘉靖) 때의 일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성상이 번저(藩邸)로부터 대통(大統)을 이은 것을 보고 인후(人後)가 되었다고 잘못 알고, 성상이 손자의 항렬로서 할아버지의 대통을 이은 것을 보고 한(漢)나라 선제(宣帝)가 소제(昭帝)의 후사가 된 것으로 잘못 비의한 나머지 방계(傍繼)와 직계(直繼) 사이에는 일이 같지 않고 종손(從孫)과 직손(直孫) 사이에는 예가 각각 다르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그만 대원군의 사당을 지자(支子)111)  에게 소속시켰으니, 이것은 한때의 소견이 미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호칭에 대해서는 그 당시 예관(禮官)이 의논할 때, 고위(考位)가 빠지는 것을 의심하였기 때문에 선조(宣祖)를 할아버지라 하고 대원군을 아버지로 부르기로 였으니, 이는 전례(典禮)의 결정에 있어서 생각이 많이 접근된 것이었습니다. 예로부터 왕으로서 고(考)라 부르는 신주(神主)를 사가(私家)의 집에서 제사지내는 경우는 없었는데, 조정의 의논이 일치되지 아니하여 9년 동안이나 결정하지 못하였습니다. 예가(禮家)에 파당이 많아 사람마다 소견이 다르므로 떼 지어 송사하는 탄식이 예로부터 있었으니, 비단 오늘날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부자간의 정은 천리(天理)에서 나오고 어버이를 높이려는 마음은 상하에 차이가 없으니, 전하 같은 지극한 효도로 고(考)라 칭할 곳을 더 높이고자 하면 무슨 일인들 못하시겠습니까.
그러나 공자가 말하기를 ‘나는 하(夏)나라의 예(禮)를 보고 싶기 때문에 기(杞)나라에 갔으나 기나라에서 고증할 수 없었고, 은(殷)나라의 예를 보고 싶기 때문에 송(宋)나라에 갔으나 송나라에서 고증할 수 없었다. 문헌이 충분히 있었다면 내가 고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였고, 또 말하기를 ‘증거가 없으면 미덥지 못하고, 미덥지 못하면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고 였습니다. 대저 공자와 같은 성인으로 선왕들이 예를 만든 뜻에 무엇을 통하지 못했겠습니까마는 오히려 감히 증거없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 이는 대개 믿음을 받지 못할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추숭하는 예는 경전(經典)에도 증거할 만한 말이 없고 사적(史籍)에도 의거할 곳이 없으니, 비록 통달한 선비와 큰 선비가 오늘날 태어났더라도 반드시 징험할 수 없다는 탄식을 할 것인데, 더구나 신등과 같이 학문이 얕은 자에게 있어서이겠습니까. 소견이 미치지 못하는데 억지로 대례(大禮)를 논하는 것은 신들로서는 감히 할 수 없습니다. 의심난 일은 결단하지 말고, 예는 사치스럽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하게 해야 합니다. 두터움을 쫓는 예를 결단코 행하여 혹 후세 사람의 조롱을 초래하기보다는 차라리 절충하는 의논을 따르기에 힘써 후회없게 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신들의 의견으로는 대략 한(漢)나라 광무(光武) 때의 고사를 모방하여 따로 사당을 세우고 제후의 예로 제사지내는 의논을 따르면, 할아버지·아들·손자의 차례가 정연하여 문란하지 않을 것이며,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제사하는 예도 모두 질서가 있게 되어 잘못됨이 없을 것인데, 다만 종묘(宗廟)에 들이지 않고 소목(昭穆)에 끼이지 못하게 하여 피혐하는 뜻만 붙여두면 될 것입니다. 성상의 분부에 이른바 ‘할아버지를 높이고 차례를 펴며, 효도를 다하고 예에 맞게 한다.’는 도리도 아마 이에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성명(聖明)께서는 필시 화려한 예로 거행하지 못하는 것을 혐의스럽게 여기실 것이나, 제후의 예로 제사지낸다는 것은 예(禮)에 명문(明文)이 있으니, 대저 순(舜)·우(禹)·탕(湯) 같은 성인으로서 어찌 어버이를 높이는 데 부족하게 했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후세의 번잡한 예문(禮文)을 생략하고 삼대(三代)의 옛 제도를 회복하면 전고(前古)에 손색이 없고 후일에도 할 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조정의 처치는 스스로 체면이 있고 관직을 만들어 직무를 나눌 때에 크고 작은 관직마다 할 일이 다릅니다. 따라서 제사지내는 일은 진실로 유사(有司)가 있으나 전례(典禮)를 결정하는 것은 대신(大臣)에게서 나오는 것이 마땅하니, 추숭을 는 것이 가한지 불가한지와 별묘(別廟)를 세우는 것이 타당한지 부당한지를 여러 대신들에게 두루 묻고 결정해야 바야흐로 사체(事體)에 맞게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런데 추숭하는 것이 진실로 고례(古禮)에 합당하고 입묘(入廟)112)  는 것이 정통(正統)에 빛이 나는 일인데, 경들은 정밀하게 살피지 않고 막으려고만 하니, 매우 부당한 일이다."
였다.

 

12월 19일 정해

영의정 윤방(尹昉)이 상차하기를,
"이처럼 일이 많은 때를 당하여 정석(鼎席)113)  이 거의 비었으니, 삼가 바라건대 우상에게 돈유(敦諭)하여 빨리 출사하도록 하고, 차임하지 않은 자리도 즉시 차출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잘 알았다. 차자의 내용을 유념하겠다."
하였다.

 

호역(胡譯) 박인범(朴仁範)이 심양(瀋陽)에서 돌아왔다. 한(汗)의 글에,
"원래의 약속은 1년에 봄 가을 두 차례씩 의주(義州)에서 시장을 열기로 하였는데, 우리 나라에 일이 있어 마침내 가을에 열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조금 여유가 있습니다. 생각건대 양국은 이미 한 집안이 되었으니, 진정 교역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약간의 재물을 마련하여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갖고 갔습니다만, 만일 교역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형세상 반드시 갖고 돌아올테니, 어찌 터무니없는 요구를 할 리가 있겠습니까. 후시(後市)를 일단 열지 않으면 전시(前市)도 필시 열지 않을 테니, 전부 철수시키겠습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지금 한의 글을 보니 그다지 성내는 뜻은 없는 것 같습니다. 끝부분의 말은 자못 불평스러운 뜻이 있어 전부 갖고 돌아가겠다는 말까지 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지나치게 서로 다투어 힐난한다면 거두어 돌아가는 일을 초래하여 처리하기 곤란한 걱정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해도(該道)의 감사로 하여금 다시 예전의 견해를 고수하지 말고 물화(物貨)를 넉넉히 보내 빨리 일을 매듭짓도록 하여, 후환을 초래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미 물화가 떨어졌다고 말했는데 또 곤궁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면 타당하지 않을 듯하니, 예전대로 결정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철산(鐵山)의 아전 이계립(李繼立)이 오랑캐에 투항한 정상을 실토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우리 나라가 섬에 물자를 대주었다는 사실을 골자(骨者)에게 말하였고, 밀무역한 한 조항만은 그도 제대로 숨기지 못하고 있으니, 효수(梟首)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21일 기축

태백이 나타났다.

 

우의정 이정구가 상차하여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정태화(鄭太和)를 정언으로 삼았다.

 

12월 22일 경인

이조 판서 이귀가 상차하기를,
"삼가 예관(禮官)에 내린 분부를 보건대, 부모가 있는 자라면 마음속에 느낀 바가 없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노신(老臣)의 마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이어 예관의 회계를 보건대, 그 논변한 바가 조정의 의논에 비교하면 군신간의 큰 윤리를 조금 안다고 할 수는 있겠으나, 다만 멀리 고례(古禮)를 인용함에 있어서 자못 근거가 없는 듯합니다. 전하께서도 이미 통촉하고 계실 줄로 생각됩니다만, 신의 지나친 생각으로는 만일 이 기회를 한 번 놓치게 되면 지나간 뒤에 뉘우쳐도 소용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변론을 할까 합니다.
지금 사당에 예위(禰位)는 없고 고조(高祖)만 두 분 계시니, 이야말로 더할 나위없이 큰 변례(變禮)인데, 만일 이 예(禮)를 정하게 되면 추숭도 그 안에 포함되고 입묘(入廟)도 그 안에 있게 될 것입니다. 만일 대신이 의논하여 선조를 예(禰)로 일컫는다면, 사람은 근본이 둘이 될 수는 없으니 대원군을 숙(叔)이라고 일컬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대원군을 고(考)라고 일컫게 되면 고(考)와 예(禰)가 호칭은 다른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이면서 둘입니다. 그런데 장유(張維)가 둘로 나누려고 했으니, 그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역대로 별묘(別廟)라고 하는 것이 모두 예(禮)에 합당함을 얻지 못했습니다. 한(漢)나라의 선제(宣帝)와 광무(光武)는 모두 인후(人後)였기 때문에 사친(私親)을 높이고자 하여 강제로 별묘를 세웠습니다. 만일 광무가 원제(元帝)의 친손(親孫)이었다면, 어찌 자기 아버지의 적서(嫡庶)를 논하며 정묘(正廟)에 들이지 않았겠습니까. 최명길(崔鳴吉)은 지식이 조금 있는 자인데도 당초부터 조정과는 다른 의논을 세웠는데, 지금 회계할 때에 이르러 또한 물의(物議)를 따르지 않을 수 없어 스스로 자기의 소견을 지키지 못한 채 그만 도리어 근사하지도 않은 전례(典禮)를 인용하여 별묘를 세우고자 하니, 이는 오십보 백보입니다.
그리고 부모를 추숭하는 경우는 처음으로 봉(封)함을 받은 임금뿐만이 아닙니다. 만일 인후(人後)가 되지 않고 바로 할아버지·아버지·손자가 서로 계승하는 대통을 이었다면, 아버지를 높이고 할아버지를 이어서 부자간의 큰 윤리를 펴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원(元)나라 성종(成宗) 같은 이를 본받을 필요는 없으나, 당종(唐宗)이 상왕(相王)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과 명(明)나라 건문(建文)이 부모를 추숭한 것은 선유(先儒)들도 잘못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금일 장유의 무리들이 이른바 적통의 원자(元子)라도 왕위에 오르지 않았으면 입묘(入廟)할 수 없다는 말은 어쩌면 그다지도 상반됩니까.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는 송(宋)나라 태조(太祖)의 4대조인 희조(僖祖)가 신손(神孫)을 독실하게 낳은 공이 있으니 추숭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논하였습니다. 만일 이 말대로 한다면, 대원군은 우리 전하를 낳으신 공이 있고 또 형이 아들이 없이 죽으면 아우가 혈통을 잇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묘(正廟)에 들어갈 수 없어 성스러운 조정의 사당에 고조가 두 분이 있고 예위가 없게 한다면 되겠습니까. 명길은 스스로 소견이 이르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억지로 근사하지도 않은 고례(古禮)를 인용하여 목전의 비방을 면하고자 하니, 적이 명길을 위하여 취할 바가 못 된다 하겠습니다. 명길은 또 말하기를 ‘금일의 예는 경전에도 고증할 만한 말이 없고 사적에도 의거할 만한 곳이 없으니, 비록 통달한 선비와 큰 선비가 오늘날 태어났더라도 반드시 고증할 수 없다는 탄식이 있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명길이 알고 이 말을 했다면 정리(情理)에 가깝지 않고, 모르고 이 말을 했다면 전하의 이른바 사리에 어두워 실제 아는 것이 없는 자와 같이 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의 망령된 뜻으로 예로부터 종묘에 예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와 고조가 두 분인 것이 가한지 불가한지를 특별히 최명길로 하여금 다시 회계토록 한 다음에, 묘당 및 여러 대부들에게 물어 보아 속히 대례(大禮)를 정하되, 근거없는 의논에 꺾이지 말고 윤기(綸紀)를 밝히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글을 올리자 대내(大內)에 두고 정원에 내리지 않았다.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검토관 구봉서(具鳳瑞)가 아뢰기를,
"지난번 전하께서 시학(視學)코자 하였다가 중지하였습니다. 인군의 시학은 선비들에게 과거를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닌데, 이미 결정했다가 곧 중지하는 것은 선성(先聖)을 공경하여 섬기는 도리가 아닐 듯합니다. 조종조의 시학은 더러 선비를 시취(試取)하지 않고 술잔만 올리는 때도 있었습니다. 내년에 정시(庭試)가 있으니, 정시는 행하지 말고 알성시(謁聖試)를 보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시독관 윤계(尹棨)가 아뢰기를,
"지금 대례(大禮)를 대신과 예관들에게 물었으나 결말이 나지 않고 있으니, 어떻게 처치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방금 진강한 책을 보니 ‘서언동즉역(庶言同則繹)’이란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뭇 의논을 하나로 귀결시키되 반드시 실마리를 찾아 깊이 생각하여 이치에 합당하게 된 다음에 행하라는 뜻입니다. 정령(政令)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더구나 비할 데 없이 큰 전례(典禮)를 뭇 의논이 하나로 귀결되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고 경솔히 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조상을 받드는 도리에 부족한 바가 있을 듯합니다. 대저 예는 정도를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과 같으니, 전하께서 미치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여 지나치게 하는 것은 또한 중정(中正)의 도가 아니니, 그 잘못은 마찬가지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는 예를 아는 자인데, 이른바 불가하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일인가?"
하자, 윤계가 아뢰기를,
"신은 배운 것이 적고 들은 것도 적어 경전을 널리 고찰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뭇 의견이 같게 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대례를 정하기 때문에, ‘뭇 의견을 하나로 귀결시키되 반드시 실마리를 찾아 깊이 생각하여 이치에 합당한 다음에 행한다.’는 이 말을 인하여 상달하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12월 23일 신묘

영의정 윤방이 의논드리기를,
"대원군이 살아계실 때에 이미 제대로 봉양하지 못하였고 돌아가신 뒤에도 또 제대로 제사지내지 못했으니, 성상의 지극한 효성으로 어찌 일찍이 잠시라도 마음속에 잊은 적이 있었겠습니까. 추숭의 전례(典禮)는 전에도 이 있었으나 신들이 감히 뜻을 받들어 따르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삼대(三代) 이전에는 전혀 이러한 예가 없었고, 주(周)나라 무왕(武王)과 주공(周公)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왕으로 추존하는 예(禮)가 시작되었는데, 이는 실로 처음으로 천명을 받아 제왕이 된 세대였습니다. 그리고 앞 시대의 일을 두루 살펴 보아도 오늘날과 비견할 만한 경우는 전혀 없었습니다. 우선 한(漢)·당(唐) 이후의 경우를 미루어 보건대, 국가를 중흥한 임금으로서는 광무제(光武帝)보다 성대한 임금이 없었으나 남돈군(南頓君)114)  을 추숭한 일은 듣지 못했으니, 어찌 계승한 임금과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임금과는 차이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동한(東漢) 초(初)를 비록 중흥(中興)이라고 부르지만 실은 창업(創業)과 같으니, 나를 낳아주신 조상을 높여 태묘(太廟)에 향사(享祀)한들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끝내 의논하는 신하들의 말을 써서 위로 서경(西京)의 대통을 이었는데, 추숭을 하지 않았다는 꾸짖음을 그 당시에 듣지 않았고 예를 잃었다는 기롱도 후대에 생기지 않았으며 선유들도 가장 그 올바름을 얻었다고 말했으니, 이 어찌 후세에 마땅히 본받을 바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신은 오늘날 추숭은 가벼이 의논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용릉(舂陵)에 있는 광무제의 4친(親)의 사당은 그 규모의 예제(禮制)를 비록 상고할 수 없으나, 이미 영장(令長)115)  으로 하여금 시사(侍祠)하도록 하였고 황제도 때때로 친히 제사를 지냈으니, 대개 공가(公家)의 한 사당입니다. 그 제의(祭儀)와 품식(品式)도 필시 넉넉하고 특이한 전례(典禮)가 있었겠지만, 당(唐)·송(宋)의 제유(諸儒)를 거쳐 명나라의 예를 논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도 싫어하고 의심하는 기롱을 가한 자는 없었습니다. 이른바 백승(伯升)116)  의 아들로 하여금 제사를 받들도록 한 것이 옳다는 설이 당시 문답하는 말에서 나왔는데, 이 또한 그렇게 배척할 말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은 오늘날 별묘(別廟)를 세우는 일을 진정 의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우리 성상께서 반정(反正)하신 날에, 이륜(彛倫)을 다시 밝게 하고 종묘 사직을 다시 편안하게 하였으니 공렬(功烈)의 성대함이 진실로 광무제에 손색이 없습니다. 만일 건문(建文)과 광무(光武)의 고사(故事)를 모방하여 별도로 사당 하나를 세워 신주(神主)를 봉안하고 모든 향사(享祀)의 의물(儀物)을 제후의 예로 침작해 써서, 옛날 시동(尸童)은 사(士)의 복장을 쓰고 제사는 제후의 제도를 쓰는 제도를 따른다면, 이미 예를 지나치게 했다는 혐의도 없을 뿐더러 성상께서 조상을 생각하고 제사하는 지극한 정을 조금이나마 펼 수 있을 것이니, 그 정통을 이은 뜻과 어버이를 높이려는 효도가 서로 방해됨이 없이 둘다 완전해지지 않겠습니까.
시험삼아 지금 현재 시행되고 있는 절목(節目)으로 말하건대, 제사 축문에는 이미 고(考)라고 칭하여 승지가 전향(傳香)117)  하고, 묘소는 원(園)이라 칭하여 참봉이 수직(守直)하니, 이러한 예의 잘잘못은 논할 겨를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시행된 지 수년이나 되어 이미 사가(私家)에서 제사를 받드는 모양도 못 되고 있는데, 유독 신주를 오랫동안 여염 집에 있도록 하여 봉안할 곳을 아직 정하지 못하였으니, 사리로 헤아려 보아도 근거할 바가 없는 듯합니다. 근래 보건대 사부(士夫)들 사이에 이같은 의논이 없지 않으나 이 말이 한번 나오면 더 심한 의논이 나올까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있으니, 이 또한 군신 상하의 정의(情義)가 미덥지 못한 탓입니다.
신은 지난 여름 등대(登對)했을 때에 정씨(程氏)의 정통사은(正統私恩)의 설을 외워드렸는데, 이 때문에 사우(祠宇)가 정해지지 않아 진실로 매우 온당치 않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성상께서 한창 추숭하는 한 조목에 관심을 두고 더 살피지 않으시기 때문에 신이 감히 다시 그 설을 다 말씀드리지 못하고 물러나왔습니다. 천하의 대성(大聖)으로서 천하의 대례(大禮)를 거행할 때, 반드시 위로 천리에 합당하고 아래로 인심에 순응하여 천하 후세로 하여금 시비거리가 됨이 없도록 한 다음에야 바야흐로 거행할 수 있는 것이니, 추숭하는 한 조목은 아마도 의논을 용납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고, 영돈녕 오윤겸(吳允謙)이 의논드리기를,
"보잘것 없는 소신이 일찍이 상신(相臣)의 우두머리로 있으면서 지식이 어둡고 잘못되어 성상의 지극한 정성을 제대로 받들어 따르지 못함으로써 성상으로 하여금 마음속으로 이토록까지 근심하고 번뇌하게 하였으니, 신의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합니다. 삼가 예관(禮官)에게 내린 분부를 받들건대 황공하여 감히 의논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상의 출사를 기다린 뒤에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12월 24일 임진

경서와 언해(諺解)를 북도(北道)에 하사하였다. 이에 앞서 경성(鏡城)의 유학(幼學) 최상례(崔尙禮) 등이 상소하기를,
"북로(北路)의 9개 군(郡) 가운데 경성이 가장 큰 도회(都會)인데, 학교를 세우더라도 풍속이 궁마(弓馬)를 숭상하여 조두(俎豆)를 일삼지 않으니, 이는 대개 서적이 거의 드물어 글을 강론하고 익히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지난 태평한 날에는 국가에서 각종 서책 및 사서 삼경과 언해서까지 나누어 보내주어 구두(句讀)를 익히는 선비에게 편리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제생(諸生)이 배우고 익혀 향당(鄕黨)에서 행실을 닦은 자가 왕왕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쟁뒤로 서적이 온통 없어져서 앞으로 무식하고 예의가 없어지게 됨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경서와 언해를 각각 1건씩 반사(頒賜)를 허락하여 배우고 익히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희천 군수(熙川郡守) 지계최(池繼漼)가 상소하기를,
"신이 모집한 군사는 비록 적지만 모두 죽기를 각오한 군사입니다. 희천 고을은 산골에 치우쳐 있어 난리를 피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 있으니, 본임(本任)을 체직시켜 안주(安州)와 황주(黃州) 양 진(陣) 사이에 종사하여 국은을 갚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이조가 회계하기를,
"지계최가 모집한 군사를 거느리고 병사(兵使)와 생사를 맹세하여 몸을 잊고 국가에 목숨을 바치고자 하니, 그 정성이 매우 가상합니다. 조시준(趙時俊)의 예에 따라 그의 본직을 체직하여 싸우다 죽겠다는 그 마음을 이루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그 뒤에 간원이 조시준과 지계최를 모두 파직하여 거짓으로 남을 속이는 풍습을 혁파하도록 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박난영(朴蘭英)이 오랑캐를 방어하는 계책을 상소하여 진술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박난영이 진술한 것은 모두 조정이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양국의 틈이 벌어지는 근심은 중간에 있는 간사한 소인의 무리에 전적으로 달려 있으니, 양경홍(梁景鴻)의 일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한심한 일입니다. 주회인(走回人)118)  이 비록 우리 나라 사람이긴 하지만 저들에게서 도망쳐 왔다면 저들 또한 트집잡는 단서가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골자(骨子)가 말하기를 ‘신미년119)   윤월(閏月) 이후의 주회인을 낱낱이 찾아 돌려보내라.’ 하였는데, 만일 성심(誠心)에서 나왔다면 소원에 따라 약속을 정한다고 해도 안 될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속환(贖還)의 값이 청포(靑布) 6통(桶)에 불과한데, 이쪽에서 저쪽으로 투항하게 되면 국가의 우환을 이루 다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 약속이 만일 이루어지면 우리 나라에 불이익이 된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국서(國書)에 약속을 거듭 정하여 주회인은 그때마다 값을 마련하여 속환시켜 한결같이 임중복(林仲福)의 일처럼 하면, 우리쪽도 바르게 되고 저쪽도 할 말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25일 계사

이조 판서 이귀가 또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경평군(慶平君) 이륵(李玏)이 거리낌없이 제멋대로 행동하여 민간에 폐를 끼치는 정상은 낱낱이 논열(論列)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집을 짓는 돈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허물을 해조에 돌려 누백 금(金)을 서리(書吏)와 산원(算員)들에게 두루 징수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양(高陽)에서 사민(徙民)을 쇄환시켰다고 하여 군리(郡吏)를 가두었으며, 혹은 집안에 스스로 사옥(私獄)을 설치하여 채무자들을 많이 가두어 놓는가 하면, 법관(法官)이 때때로 궁노(宮奴)를 찾아내어 붙잡아 오면 도리어 부리(府吏)를 구타하고 그 처자까지도 가두니,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아 그 죄를 징벌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평군이 필시 이렇게까지 심하게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 이상으로 지나치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남병사(南兵使)120) 이익(李榏)을 인견하였다. 이익이 삼을 캐는 사람들이 국경을 넘는 폐단을 장황하게 얘기하고 조종에서 엄히 금할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12월 27일 을미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상이 숭정전(崇政殿)에 거둥하여 가도(椵島)의 차관(差官) 왕량신(王良臣)을 접견하였다. 양신이 아뢰기를,
"지금 온 섬이 굶주리게 될 걱정이 바야흐로 급한데, 2천 석을 육지로 운반하라는 명이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원하건대 빨리 육지로 운반하여 철산(鐵山)으로 보내 주신다면, 삼판선(三板船)으로 계속 운반해 들여 하루밖에 남지 않은 목숨을 구하겠습니다. 이미 현왕(賢王)의 분부가 계셨기에 배를 갖추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왕래하는 역관들이 모두 바다가 얼었을 때에는 삼판선도 통행하기 어렵다고 말하기에 아직 운반해 보내지 못하였소. 섬에서 실어 들일 수 있다면, 어찌 제때에 운반해 보내지 않겠소."
하자, 양신이 아뢰기를,
"삼판선은 얼음이 떠다닐 때에도 조수(潮水)를 따라 왕래할 수 있습니다."
하고, 삼가 사례하고 물러갔다.

 

관상감이 아뢰기를,
"지난해에 내년부터 추산(推算)하여 측후(測候)하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그래서 금년 정월부터 12월까지 추산하여 측후해 보건대, 사시(四時)보다 중성(中星)121)  이 천도(天度)와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으니, 이 법을 시행해 쓸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러나 그 측량하는 기형(璣衡)122)  은 꽉 차지 않고 경루(更漏)123)  는 정밀하지 않으니, 이것을 쓰면 약간 착오가 있을 듯합니다. 더구나 예로부터 별이 돌아가는 도수(度數)를 측정하는 법은, 만 5년이 되면 구름낀 날을 제외하고 3년동안 실제로 간 도수를 얻어 계산한 날짜로 엮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별이 돌아간 도수를 신중히 관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번에 추산한 중성(中星)은 1년 동안 측후한 것이지만 구름끼고 흐린 날이 반이 넘으니, 이를 영구히 적용해 쓴다면 혹 미진할 듯합니다. 5년까지는 안 된다 하더라도 1년만 더 측후하여 틀림없이 꼭 맞는지의 여부를 알고난 다음에 시행해 쓰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정밀하게 하여 미진한 점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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