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일 경자
영중추부사 이원익(李元翼)이 여러번 상소하여 치사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상소하기를,
"선조(宣祖) 때에도 몇몇 노신(老臣)들이 치사하기를 청하여 모두 윤허를 받았습니다. 이는 비단 대성인(大聖人)이 노인을 우대하는 지극한 덕일 뿐만 아니라 사대부의 기풍도 여기에 힘입어 부지되었습니다. 원하건대 아랫사람의 마음을 굽어살피시어 속히 치사를 허락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옛날과 지금은 입장이 다르고 안위(安危)도 같지 않으니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생각해서라도 태평할 때의 일을 끌어대지 말라."
하였다.
1월 3일 신축
백관이 원일(元日)001) 하례(賀禮)를 행하였는데, 인순 왕후(仁順王后)의 기신(忌辰)이 2일에 있었기 때문이다. 상이 권정례(權亭禮)로 할 것을 명하였다.
헌부가 연계(連啓)하여 경평군(慶平君)과 이성 현감(利城縣監) 이익(李益)을 파직하라고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일찍이 전조(銓曹)에서 관원을 도태시키는 규정에 대하여 듣건대, 각사 관원의 경우는 혹 《대전(大典)》을 강하고 관장하는 일에 대해 묻고 대감(臺監)002) 과 낭청(郞廳) 역시 모두 대론(臺論)에 따라 도태시켰다고 하는데, 그 당시 전조 당상관이 어찌 모두 정체(政體)를 모르는 사람이라서 스스로 제수하고 스스로 도태시키는 것을 꺼리지 않았겠습니까. 무릇 주의(注擬)에 든 사람은 반드시 모두 전관(銓官)이 직접 본 자가 아니고, 혹 그 이름을 듣고 임용하기도 하고, 혹은 남이 천거함에 따라 주의하는데, 어떻게 그들의 재능을 전부 알아서 한번 제배(除拜)한 후에 전혀 살피지 않겠습니까.
대개 대간이 논핵하는 일은 풍문에 의한 것이니 풍문이 미치지 못한 것은 해조에서 친히 보고 도태시켜 백집사로 하여금 용잡하고 구차스레 충당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는 것이 어찌 사리에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해조는 전례를 살피지 않고 많은 말을 늘어놓으면서 저지하고 있으니, 일이 매우 타당치 못합니다. 이조의 해당 당상을 추고하소서.
경산 현령(慶山縣令) 구장원(具長源)은 수령이 되었을 때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던 경우가 있었으며, 훈련 도감 낭청이 되어서도 근실하지 못하다는 비난이 있었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조의 계사는 추고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구장원은 체차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완(李浣)은 젊은 나이로 갑자기 승진되어서 소임을 감당할 수가 없으므로 계달(啓達)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곤외(閫外)의 중임을 길에 떠도는 말만 듣고서 경솔히 체개(遞改)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우선 어사(御史)의 회계를 기다렸다가 실상을 알고난 다음 처리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감사의 장계를 보니, 변장(邊將)의 포폄(褒貶)하는 일에 대해 함께 의논하지도 않았고 이문(移文)하여 힐책했으나 역시 회보(回報)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민성휘(閔聖徽)가 심지어 체직시켜 달라고 자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이완을 그 직에 그대로 있게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체차시키라고 명하였다.
1월 4일 임인
헌부가 아뢰기를,
"종묘(宗廟)의 춘향 친제(春享親祭) 의식을 익힐 때 당하 집례(堂下執禮) 내섬 정(內贍正) 이후천(李後天)은 끝내 와서 참석치 않아 부득이 다른 관원으로 대행하도록 하였으니, 태만한 그의 실책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를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낙안 군수(樂安郡守) 정원필(鄭元弼)은 사람됨이 어리석은데다가 성미가 또 술을 좋아하여 토호(土豪)의 집에서 마냥 취해 있습니다. 그를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민성휘(閔聖徽)가 군문(軍門)에 이자(移咨)하여, 도중(島衆)003) 이 노적(虜賊)을 막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우리 나라에 폐해만 끼칠 뿐인데 서로 방치하여 변란이 여러 차례 일어난 형상을 갖추어 진달하기를 청하였다. 조정에서도 이러한 내용으로 이문하고자 했으나 인편(人便)을 얻지 못했었는데 마침 유격(游擊) 송유창(宋有倉)이 우리 경내(境內)에 표류해 이르렀다가 군문으로 돌아가게 되자 조정에서는 유창에게 자문을 은밀히 부치려고 하였다. 이에 호조 참의 이명한(李明漢)이 상소하기를,
"가도가 중국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우리 나라에 피해만 주어온 지 오래이니 지금 만약 이 일로 인해 철수해 돌아가게 할 수만 있다면 더없이 큰 다행이지만 만약 청을 들어주지 않을 경우 중국의 의심만 받게 되고 결국은 가도의 무리와 원한을 맺게 될 터이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한 섬의 굶주린 백성이 노적을 막는 데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만 중국은 바다로 막혀 있는 섬의 일에 대해 극진히 살피지 못하고 오히려 조금이라도 이익이 있기를 바라고 있으니 우리의 도리로는 마땅히 인내하면서 중국의 처분을 기다려야 할 뿐입니다. 만약 갑작스럽게 이자했을 경우 우리가 접대하기를 싫어한다는 의심을 받지 않을 줄 어찌 알겠으며, 또 노적에게 사(私)를 두고 가도를 꺼려한다는 의심을 받지 않을 줄 어찌 알겠습니까. 자문을 은밀히 전하는 일은 더욱 나라의 사체가 아니어서 비밀스럽게 하면 할수록 더 의심을 받을까 염려됩니다. 허락을 받지 못하고 한갓 의심만 받게 되면 지난번에 성의를 다해서 접대하여 천하의 칭찬을 받았던 일이 끝내는 헛일이 되고 말 것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더욱 생각하시어 후회가 없도록 하소서."
하니, 소를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이명한의 말이 옳다고 하여 드디어 이자하지 않았다.
1월 6일 갑진
태백(太白)이 나타났다.
지평 이행건(李行健)이 인피하기를,
"일찍이 언관(言官)의 자리에 있으면서 일처리를 전도되게 하여 물의를 많이 초래하였고 중한 논핵을 입었으므로 스스로도 폐척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더군다나 이번의 새로운 명(命)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내려졌습니다. 풍헌(風憲)의 중한 자리에 감히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하니, 헌부가 처치하기를,
"이미 지나간 일이니 깊이 허물할 필요는 없겠으나, 직책이 서관(庶官)이 아니고 여론이 엄준합니다. 체차하소서."
하였는데, 따랐다.
1월 8일 병오
상이 태묘(太廟)에서 춘향 대제(春享大祭)를 행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마전 현감(麻田縣監) 박희현(朴希賢)은 오로지 자기 욕심만 채워 징렴(徵斂)이 한정 없으니,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간원이 아뢰기를,
"산음 현감(山陰縣監) 이노(李)는 두 눈이 어두워서 사물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조 좌랑 구봉서(具鳳瑞)를 파직하였다. 이날 정사(政事)에서 판서 이귀(李貴)가 박지계(朴知誡)를 지평에 의망하고자 하였는데, 참판 이성구(李聖求)와 참의 유백증(兪伯曾)이 말하기를,
"지계 때문에 유생(儒生)이 정거를 당하고 4관(館)이 파직을 당해 여론이 엄준하니, 마땅히 후일을 기다려 의망해야 합니다."
하였다. 이귀가 이때 한창 추숭(追崇)하는 의논을 주장하고 있던 터라 기필코 먼저 지계를 임용하고자 하였는데 동료들이 자기를 따르지 않자 화를 내면서 꾸짖었다. 성구와 백증이 모두 일어나 나가자 이귀가 봉서에게 남아서 쓰도록 하였다. 봉서가 말하기를,
"당상(堂上) 두 사람이 나갔으니, 전망(前望)을 그대로 쓸 수 없습니다."
하고는 마침내 사양하고 물러나왔다. 그러자 이귀가 크게 노하여 즉시 이 일을 진계하니, 상 역시 노하여 봉서를 파직하고 성구와 백증은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1월 9일 정미
헌부가 아뢰기를,
"도목(都目)은 나라의 큰 정사(政事)여서 으레 전최(殿最) 후에 바로 하는데 이는 의도한 바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전관(銓官)이 유고(有故)함으로 인해 이렇게까지 지연되었습니다. 각사(各司)에 적체되는 걱정이 있을 뿐만이 아니라 농사철이 이미 박두하였으니 각 고을의 관원을 교체하는 시기를 늦출 수가 없습니다. 속히 정사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개성부(開城府) 및 교동(喬桐)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상이 하교하였다.
"전 판서 김상용(金尙容)을 서용하라."
한필원(韓必遠)을 사간으로, 김종일(金宗一)을 지평으로 삼았다.
이조 참판 이성구와 참의 유백증 등이 상소하기를,
"이조 판서 이귀가 박지계를 수망(首望)으로 지평에 의망하고자 하여 논란하는 즈음에 판서가 말하기를 ‘만약 내 말을 어기면 나는 나가고 말겠다.’ 하기에, 신들은 생각하기를 ‘장관이 만약 나가버리면 하관(下官)은 마땅히 그대로 정석(政席)에 있을 수 없고, 판서의 경우는 비록 보좌하는 관원이 없더라도 정사를 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부득이 피해 나왔던 것입니다.
예로부터 대간을 차출하는 즈음에는 반드시 논의가 하나로 결정된 뒤에 주의하여야만 제배된 사람도 역시 안심하고 출사할 수 있었습니다. 신들의 뜻은 단지 한결같이 조정의 정체(政體)를 따르려 하다가 필경에 장관의 노여움을 사고 말았으니 결코 뻔뻔스레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들은 사직하지 말고 일을 보라"
하였다.
1월 10일 무신
이조 판서 이귀가 차자를 올리기를,
"모든 청망(淸望)을 주의할 즈음에는 반드시 당상(堂上) 및 낭청(郞廳)과 함께 기일에 앞서 의논해 정한 연후에 의망하는 것이 규례입니다. 박지계는 40년 동안 초야에서 독서하였는데, 그의 효성스럽고 우애있는 행실과 진실되게 면학한 것이 세상의 추증을 받았기 때문에 계해년 반정했을 당시에 이미 지평을 제배했었습니다. 비록 예(禮)를 의논한 것 때문에 시의(時議)에 배척을 받았으나 삭적(削籍)된 유생에게 특별히 명하여 정거하도록 하였으니, 공론이 이미 행하여진 것입니다. 이는 처음으로 청로(淸路)에 통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이 정석에서 발언하였는데, 동료의 의논이 어렵게 여겼습니다. 반복해 상의하면서 비록 헐뜯고 욕하지는 않았지만 말하는 사이에 조용하지 못한 흠이 있어 소란을 피우고 말았습니다. 신이 일처리를 경솔하게 하여 동료 및 낭청으로 하여금 모두 견책을 당하게 하였으니, 끝내 나만 옳다고 여기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양 행공(行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고(呈告)하여 체직을 빌었던 것인데 도리어 조리(調理)하여 출사하라는 명을 받았고 또 대론으로 인해 속히 도목정(都目政)을 하라는 명을 받았으니, 신하의 분수와 의리로 어찌 감히 물러나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신 때문에 동료 두 사람이 인피하여 나오지 않고 있고 또 낭청이 없으니, 비록 정사를 하고자 해도 하지 못할 형세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신의 본직을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위유(慰諭)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전조에서 초야에 묻혀 있는 사람을 수용하고자 한 것은 그 뜻이 좋습니다. 만약 조용히 순방(詢訪)하여 한 시대의 유일(遺逸)을 한꺼번에 모두 나오게 하였더라면 동료들 사이에서 어찌 서로 격론(激論)하여 체면을 손상시켰겠습니까. 이조 판서 이귀가 발언한 후 동료의 의논이 같지 않다고 갑자기 화를 내어 먼저 나가려고 했으니, 동료들이 어찌 자리에 편히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좌이(佐貳) 두 사람이 이미 지났으므로 낭관이 더욱 혼자 남아 있을 수 없는 것은 형편상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나가버렸다는 것으로써 동료의 죄안(罪案)을 삼아 입계하기까지 해서 파직하고 추고하라는 명이 있게 했습니다. 나라에서 세 당상 및 낭관을 둔 것은 의도한 바가 있어서이니 관직이 높거나 낮거나 다같이 존경해야 합니다. 논의하는 사이에 혹 어긋나는 일이 있더라도 상호의 가부간에 화평을 유지하도록 힘써야 하는데 말 한 마디가 서로 일치되지 않는다고 해서 문득 입계해 벌을 주도록 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귀의 병통이 화를 잘 내는 데 있습니다마는 일이 지난 후에는 곧바로 후회할 줄을 아니 깊이 책망할 것은 못됩니다. 그러나 정석(政席)은 일반적인 자리와는 다르므로 이런 길이 한 번 열리면 뒤폐단을 막기가 어렵습니다. 이귀를 되도록 엄중하게 추고하고 낭관을 파직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낭관은 실수한 바가 작지 않으니, 중한 벌을 면하기 어렵다."
하였다.
1월 11일 기유
이조 판서 이귀가 또 차자를 올려 굳이 사직하니, 답하였다.
"굳이 사직하지 말고 속히 낭관을 차출하여 도목 대정(都目大政)이 오래 지체되지 않도록 하라."
신숙녀(申淑女)의 옥사(獄事)에 대하여 단서를 얻지 못했는데 사간(事干)이 모두 형장(刑杖)을 맞다 죽었다. 대간이 아뢰기를,
"이해(李澥) 등은 마땅히 반좌(反坐)시켜야 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했다가 얼마 후 사유(赦宥)했다.
이해와 숙녀의 남편 이점(李漸)이 여러 차례 상언(上言)하여 다시 숙녀를 국문하기를 청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할 것을 명하였다. 영의정 윤방(尹昉)이 의논드리기를,
"삼성(三省)의 옥사를 이미 마친 후에 만일 호소한다고 해서 다시 국문한다면 비단 후일의 폐단을 막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사간이 모두 죽고 없는데 누구에게 물어 옥사를 종결짓겠습니까. 다만 숙녀의 패악한 행실은 전파된 지 이미 오래이니, 만약 사람들이 모두 아는 죄로 결장하여 정죄한다면 의당할 듯합니다."
하고, 영돈녕 오윤겸(吳允謙)은 의논드리기를,
"사람이 친밀하기로는 부부 사이보다 더한 경우가 없으므로 아내 마음의 은미한 곳을 그의 남편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숙녀의 일은 과연 의심이 나는데 그 비자(婢子)와 비부(婢夫)가 승복(承服)하지 않고 죽었으니 지금 옥사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숙녀는 남편의 집에서 죄를 얻어 패악한 행실이 이미 드러났으니, 이미 드러난 죄로 죄를 주어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신이 옛 규례를 중히 여기고 후일의 폐단을 염려함은 실로 일리 있는 것이다. 다만 그 전후의 정적(情迹)을 살펴보면, 숙녀는 머리 없는 시체를 그 집안에다 두었는데 쫓겨간 후 이해의 아비와 점(漸)의 동생이 모두 괴질을 앓다가 연달아 사망하였으니, 이것이 그 정적이 만분 의심나는 것이다. 숙녀의 초사에는 의거해 발명한 단서가 없으나 이해 등의 원정(原情)은 호소함이 매우 분명하다. 잘못 판결한 옥사를 후일의 폐단이 있다고 핑계하여 다시 청단(聽斷)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징계되어 두려워할 줄을 모르고 나쁜 짓을 점점 더할 것이다. 해부(該府)로 하여금 다시 숙녀를 국문하여 사람의 아들된 자로 하여금 아비의 원수를 갚게 하고 흉악한 사람이 징계되도록 하라."
하였다. 양사가 대신의 의논을 따라 숙녀를 다시 국문하라는 명을 모두 환수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는데, 숙녀가 그 말을 듣고는 마침내 자살하고 말았다.
1월 12일 경술
헌부가 아뢰기를,
"묘정(廟庭)은 예(禮)를 행하는 지엄(至嚴)한 곳이므로 상께서 비록 출입하고 오르내릴 때일지라도 으레 압존(壓尊)되는 까닭에 신료들이 국궁(鞠躬)하는 한가지 일에 대해서는 애초에 의주(儀註)에 기록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지난번 친제(親祭)할 때 왕세자가 반열에 돌아와 국궁하자 신료들 역시 따라서 국궁하였는데 더러 하지 않은 자도 있어 사체가 아주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예를 상고하여 강정(講定)하도록 하여 후일 준행할 규례를 삼으소서.
태복시(太僕寺)의 아전 지응립(池應立)이 임금이 타는 말을 훔친 일은 사형을 시켜도 남은 죄가 있습니다. 관원이 된 자는 막중한 마정(馬政)을 간사한 아전의 손에 맡기고 처음부터 직접 문서(文書)를 손에 잡지 않아 마침내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였으니 일이 매우 통분하고 놀랍습니다. 청컨대 해당 관원을 잡아다 국문하여 정죄하고, 전후 관원으로 말 1필(匹) 이상을 잃어버린 자는 아울러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고, 제조(提調)는 되도록 엄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제조는 잘못한 바가 없는 듯하니 추고하지 말라."
하였다.
1월 15일 계축
우레가 쳤다.
병조가 아뢰기를,
"지금 경상도 시재 어사(試才御史) 심연(沈演)의 서계를 보건대, 대구 부사(大丘府使) 김상복(金尙宓), 성산 현감(星山縣監) 유시회(柳時會), 부산 첨사(釜山僉使) 문희성(文希聖) 등은 군기(軍器)를 수리하여 직책을 잘 수행하였으니, 모두 상전(賞典)을 내리소서. 함창 현감(咸昌縣監) 허평(許坪)은 죄책을 면하고자 하여 먼저 폐단을 보고하였고, 의령 현감(宜寧縣監) 윤지복(尹之復)은 병적으로 술을 좋아하니 아울러 파출하소서. 수사(水使) 김진(金鎭)은 사신에게 아첨했고, 영장(營將) 안신일(安信一)은 공(公)을 의탁해 사(私)를 도모했으니, 아울러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유시회 등 3인에게는 각기 표리(表裏) 한 벌을 하사하라."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전라 병사(全羅兵使) 신경유(申景𥙿)는 여러 차례 곤직(閫職)에 있으면서 오로지 자신을 살찌우기에 힘써 사제(私第)를 크게 지어 중하게 대평(臺評)을 받았는데, 본직을 제수받고 나서도 옛날처럼 제멋대로 방자하여 도내에 있는 군사들의 마음을 크게 잃었으니,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용강 현령(龍岡縣令) 이억(李嶷)은 일찍이 안악(安岳)의 수령이 되었다가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파직당했으니 다시 백성 다스리는 직임을 제수할 수 없습니다. 체차하소서.
통례(通禮)는 바로 가까운 곳에서 전도(前導)하는 관직이어서 임무가 매우 중한데 우통례(右通禮) 남벌(南橃)은 나이 70이 넘어서 그 직임에 맞지 않으니,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신경유는 추고하라."
하였다.
상이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 병조 판서 김시양(金時讓)을 소견하였다. 상이 이서에게 이르기를,
"전에 경의 차자를 보니 깊은 의견이 있어 보였다. 지금은 의논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서 경들을 소견한 것이다. 병조 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김시양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서로(西路)의 명을 받았기 때문에 관서(關西)의 일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안주(安州)에는 성(城)은 있으나 군사가 없어 수비가 매우 허술합니다. 이서의 뜻은 반드시 군사를 모으고자 하는 것이나 본주(本州)에는 민정(民丁)이 매우 적어서 반드시 첨방(添防)하는 군사를 얻은 연후에야 지킬 수 있습니다."
하고, 이서는 아뢰기를,
"신도 본주의 민정이 매우 적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평소 15세 이상 50세 이하인 사람을 뽑아 의식(衣食)을 지급하다가 급한 일이 생길 경우 그들의 부모와 처자를 거느리고 성으로 들어가게 하면 성을 지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김시양은 아뢰기를,
"이서가 먼저 황주(黃州)에서 시험해 보고자 한 것은 의도한 바가 있습니다. 반드시 내지(內地)에서 먼저 시행해서 효과가 있는 연후에야 바야흐로 안주에서도 행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설령 백성을 모집하더라도 변방에는 쓸 수 있으나 안주에는 쓸 수가 없다."
하니, 김시양이 아뢰기를,
"서로(西路)의 병정(兵丁)이 적고 약하니, 이는 반드시 변통해야 할 일입니다."
하였다.
정태화(鄭太和)를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1월 16일 갑인
사도시 정 최유해(崔有海)가 상소하여 추숭하기를 청하고, 인하여 중국 사람과 문답한 것 및 그가 논한 학설을 바쳤는데, 정원에서 물리쳤다. 유해가 본래 추숭하자는 의논을 냈었는데 등주(登州)에서 돌아온 후 스스로 말하기를,
"송 호부(宋戶部)와 추숭하는 예를 논하여 예설(禮說)을 지어가지고 왔다."
하니, 사람들이 의심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사도시 정 최유해는 마음씀이 바르지 못하여 예를 의논할 때에는 사람의 말에 따라 변환(變幻)하고 피차에 부회(附會)하여, 일찍이 연석(筵席)에서 추숭의 부당함을 역설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송 호부가 논한 예설로 몸을 숨긴 채 전서(傳書)하는가 하면 얼굴을 바꾸고 상소하여 중국 사람의 말이라 가탁(假托)하는 등 이학(理學)의 정종(正宗)임을 자칭하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 웃습니다. 당당한 국가의 전례(典禮)는 마땅히 조정에서 강정해야지 어찌 빈정거리는 이런 무리들에게 맡기고서 엄하게 단속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이로부터 양사가 연계하였는데 끝내 따르지 않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경성 판관(鏡城判官) 김주우(金柱宇)는 한 집안이 막대한 변을 만나 심지어 숙부(叔父)가 갇히고 조모(祖母)가 이로 인해 스스로 목을 매 죽었으니, 이는 실로 윤기(倫紀)에 죄를 얻은 것으로 통분하고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때는 비록 가장(家長)이 아니어서 죄를 면했으나 지금은 다시 사로에 낄 수가 없으니, 사판에서 삭거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주우는 용서할 만한 도리가 없지 않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는데, 여러 차례 아뢰자 체직하라고 명하였다.
1월 17일 을묘
대사간 윤지(尹墀)가 최유해(崔有海)에 대해 논죄한 것이 너무 가볍다는 것으로써 인피하면서 드디어 사판에서 삭거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최유해가 말 때문에 죄를 얻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으니, 너무 심한 논핵은 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서전》 고명편(顧命篇)을 강하였다. 시독관 조위한(趙緯韓)이 아뢰기를,
"계통(繼統)하는 일을 후세에 소홀히 하더니 결국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서 폐지해버린 것은 환관(宦官)이 장악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니, 참으로 통분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명(明)나라에서는 환관들이 병권(兵權)을 장악한 일이 없었는가?"
하니, 참찬관 이민구(李敏求)가 아뢰기를,
"서창(西廠)은 우리 나라의 내수사의 옥(獄)과 같은데, 환관들이 여기에서 권한을 농락했으니, 참으로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하였다.
1월 18일 병진
정충신이 병으로 사직하고, 또 말하기를,
"한번 망령되이 만성(灣城)004) 의 역사(役事)를 논한 후부터 본도의 배척을 크게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청북(淸北)005) 을 떼어 버리려 한다.’ 하고, 어떤 사람은 ‘검산(劍山)의 공(功)을 시기해서이다.’ 하는 등 여러 사람의 상소가 거듭 일어나 견주어 논함이 아주 참혹했습니다. 심지어 6월에 죽은 박인검(朴仁儉)이 오히려 9월에 상소를 하기까지 했으니, 이는 귀신까지도 몰래 죽이려는 것입니다. 어찌 감히 하루인들 직임을 살피겠습니까. 빨리 체면시키소서."
하였는데, 병조가 회계하기를,
"정충신이 이미 본도의 배척을 받았으니, 그대로 그 직임에 있으면 일을 그르칠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재(睿裁)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명을 받고서 출사(出仕)하여 감히 체면하기를 도모하니, 실로 장신(將臣)의 체통을 잃은 것입니다.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 체직을 명하였다.
1월 19일 정사
간원이 아뢰기를,
"총융청에서 쌀을 무역하는 것은 유사(有司)가 할 일에 불과한데도 총융사 이서(李曙)는 이에 잗단 말로써 천청(天聽)을 번거롭게 하였으니 국체를 훼손함이 심합니다. 추고하소서.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개인적인 원수를 뒤로 한 것은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006) 가 조(趙)나라에 충성하였던 경우입니다. 서관(西關)의 중요한 관방(關防)은 한 나라의 안위가 달려 있으므로 사람마다 제수할 수가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병사(兵使)가 방백(方伯)과 화협하지 못해 연차로 체직되니, 일이 매우 타당치 못합니다. 전 병사 정충신이 지금 공사장(公事場)의 일로써 외람되이 천청을 번거롭게 한 것은 비록 과람하나 이처럼 보루(堡壘)를 마주하고 있는 날을 당하여 변방의 중요한 직임을 체차해 달라고 청하였으니, 번신(藩臣)의 체통을 아주 잃었습니다. 감사 민성휘는 추고하고, 정충신은 잉임시켜 체차하지 말아서 한마음으로 노력하여 함께 나라 일을 이루도록 하소서.
새로 제수한 온성 현감(穩城縣監) 손필(孫泌)은 통영 우후(統營虞候)가 되었을 때 거칠고 외람된 일이 많았으며, 낙안 군수(樂安郡守) 변시민(卞時敏)은 경흥 부사(慶興府使)가 되었을 때 잘 다스리지 못하여 파직당했으며, 경원 부사(慶源府使) 서필문(徐弼文)은 오로지 자기 살찌우기만을 일삼아 토착민(土着民)을 침해하였으니, 아울러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정충신은 이미 그 대신을 차임했으니 이제 번거롭게 하지 말라. 손필과 변시민은 아울러 체차하라. 서필문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김상용(金尙容)을 의정부 우의정으로, 박정(朴炡)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정충신(鄭忠信)을 잉임하여 부원수로, 신경원(申景瑗)을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삼았다. 윤선도(尹善道)를 특별히 제수하여 호조 정랑으로 삼았는데, 선도가 오랫동안 대군(大君)의 사부(師傅)였기 때문이다.
1월 20일 무오
태백(太白)이 나타났다.
우의정 김상용이 차자를 올려 새로 제수한 직명(職名)을 체차해 달라고 청하니 상이 따뜻하게 유시(諭示)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또 차자를 올려 굳이 사직하였으나 상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1월 21일 기미
승지 정지우(鄭之羽)가 병으로 체직되니, 이경석(李景奭)을 좌부승지로 삼았다.
정지우는 비루하고 간사하여 아첨 잘하는 자이다. 윤안국(尹安國)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갔었는데, 윤안국이 물에 빠져 죽자 지우가 일을 끝까지 마치고 돌아오니 당상에 특별히 제수하고 드디어 승지에 제배하였다. 사람의 과실을 잘 들추어내므로 모든 사람이 바로 보지를 않았다.
1월 22일 경신
헌부가 아뢰기를,
"배천 군수(白川郡守) 신해(申垓)는 중화 현감(中和縣監)이 되었을 때 마침 전쟁이 일어난 날을 당해 싸움터로 달려가는 것을 싫어하여 내외가 사사로이 부탁하였다가 마침내 체직되기에 이르렀으니, 그 죄가 큽니다. 이미 지난간 일이라 하여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근래에 무장(武將)들이 부귀를 편안히 누려 나라를 위해 죽을 생각은 하지 않고 조금만 혼잡함을 만나도 문득 규피(規避)할 마음을 먹습니다. 전 병사 정충신은 일처리가 어긋나 오랫동안 서토(西土) 사람들에게 인망을 잃었습니다. 그렇다면 본직에 제수되고 난 다음 마땅히 고쳐 도모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텐데 이에 감히 작은 일과 하찮은 혐의를 가지고 버젓이 봉소(封疏)하여 면하고자 하는 계책을 삼았으니, 해조가 체직하도록 아뢴 것은 마침 그의 소원을 이루게 하는 결과가 됩니다. 파직하고 백의 종군시켜 다른 사람을 경계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청안(淸安) 사람 정호학(丁好學)·정호철(丁好哲) 등이 죄가 있어 본현에 체포되어 장차 형을 받게 되자 마침내 한마을에 사는 사람 이호인(李好仁) 등이 역모한다고 무고하였다. 대개 호학과 호인은 묵은 혐의가 있어 죽음에 빠뜨리고자 하였는데, 국문에 나아가서는 드디어 종성 부사(鍾城府使) 조정호(趙廷虎) 및 김지수(金地粹) 등을 이끌어 들였다. 상이 그 공사를 보고 하교하기를,
"이 옥사는 매우 부실하지만 이미 모역(謀逆)이라고 말하였으니 부득이 붙잡아다 국문하였다. 어제 포도청의 계사를 보건대 그것이 무고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김지수 등은 국문하지 말라. 이럴 때 북변의 수령을 체차하여 바꾸는 것은 더욱 신중을 가해야 할 일이니, 조정호를 먼저 분간(分揀)하여 다시 부임하게 하라."
하였는데, 국청이 회계하기를,
"조정호는 상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김지수 등은 그들이 올라오기를 기다려 호학(好學) 등과 면질(面質)해서 처치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그후 호학 등이 모두 죽고, 지수 등도 역시 석방되었다.
1월 23일 신유
헌부가 아뢰기를,
"음관으로 목사나 부사가 될 경우 반드시 평소 명칭(名稱)이 있고 이력(履歷)이 많은 연후에야 차제(差除)할 수 있습니다. 삼척 부사(三陟府使) 윤취지(尹就之)와 인천 부사(仁川府使) 최규(崔珪)는 일찍이 수령이 되었으나 별다른 성적이 없었고, 또 이력이 없어 사람과 관직이 맞지 않으니 아울러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취지 등은 치적이 모두 드러나 이번에 이 직임을 제수하였으니, 불가할 것이 없다."
하였는데, 여러 차례 아뢰자 따랐다.
간원이 아뢰기를,
"신법(新法)을 시행하는 것이 구법(舊法)보다 1백 배나 이롭지 않으면 다시 개혁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악생(樂生)의 역사를 경보병(京步兵)에게 옮겨 정한 것은 비록 민폐를 진념(軫念)하시어 변통하신 것이지만 비단 조종조의 구법이 아닐 뿐만 아니라 하루아침에 갑자기 괴로운 역사를 정했기 때문에 근일 이 무리들이 울부짖으며 억울하다고 합니다. 먼 지방의 폐단을 구하려다가 먼저 도성 백성의 마음을 잃어서는 합당치 않으니, 다시 더 생각하여 결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평양(平壤)에 사는 명보충(明輔忠) 등이 상언하기를,
"진리(陳理)·명승(明昇)007) 등의 가구에는 민역(民役)·군역(軍役)을 시키지 말아 한가하게 살게 하라는 것은 본래 고황제(高皇帝)008) 의 조서가 있어 우리 나라의 열성(列聖)께서 삼가 성조(聖詔)를 지켜 정군(定軍)하지 말게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는 본읍에서 군역을 억지로 정했으니 참으로 아주 억울하고 민망합니다. 구례(舊例)에 따라 살아가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1월 24일 임술
밀양(密陽) 사람 이호일(李豪一)이 반노(叛奴)에게 피살되었다고 본도의 감사가 보고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맹인(盲人) 이후성(李後晟)이 본원(本院)에 와서 급변(急變)을 올렸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국청으로 하여금 국문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 이때 청안 사람 정호학 등이 아뢴바 때문에 바야흐로 국청을 설치하고 있었다.】 후성이 공초하기를,
"신은 연방축(蓮妨築)에 사는 동지(同知) 유응형(柳應泂)과 한동네 살면서 점을 치는 일로 왕래하다 서로 친하게 되었습니다. 갑자년009) 에 응형이 나를 불러 그 여종을 시집보냈는데, 그후 묻기를 ‘너는 사대장(四大將)의 팔자(八字)를 아는가?’ 하기에 모른다고 대답하였더니 말하기를 ‘네가 비록 네 사람의 운명은 모른다 하더라도 시험삼아 국운(國運)의 장단(長短)을 점쳐 보아라.’ 하기에 답하기를 ‘어찌 감히 그런 점을 칠 수 있겠는가.’ 하니, 응형이 이에 더 묻지 않았습니다. 그후에 응형이 중군(中軍)이 되었는데 또 묻기를 ‘내가 중군이 되었으니 용병(用兵)할 일이 있겠는가. 시험삼아 길흉을 점쳐 보라.’ 하기에 흙을 파 산을 만드는 점괘를 얻어 성사(成事)는 늦을 듯하고 외임(外任)은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후 응형이 북로(北路)의 수령이 되었으나 끝내 부임하지 않고 별초 무사 별장(別抄武士別將)이 되었습니다. 또 묻기를 ‘이제 이 별장이 되었는데, 이 무리들과 더불어 하면 성사되겠는가?’ 하여, 즉시 점을 쳐보았는데 지금은 그 점괘의 내용을 잊어버렸습니다.
신미년 9월에 그 집에 갔더니, 세 사람이 자리에 있었는데, 경오생(庚午生)·계유생(癸酉生)·신사생(辛巳生)의 명(命)을 묻기에 답하기를 ‘아주 좋은 줄을 모르겠다.’ 했습니다. 응형이 말하기를 ‘너는 이일원(李一元)과 이웃에 사니 그의 운명을 알 것이다.’ 하기에, 답하기를 ‘그의 명 역시 좋지 않다’ 했더니, 좌객(座客)은 일어나 나가고, 응형이 칼을 들어 내 손에 쥐어주면서 어루만지게 하고는 말하기를 ‘내가 이 칼로 이식(李植)·정백창(鄭百昌)·박로(朴𥶇)를 제거한 후에 일을 도모하려 하는데 이 칼의 성공 여부에 대하여 너는 점을 쳐보라.’ 하기에 이어 솥의 발이 부러지는 괘를 얻었습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세 손님을 처음에는 누구인가 몰랐는데 돌아오는 길에 응형의 종 두게(豆揭)에게 물었더니 한 사람은 바로 전평군(全平君) 이신(李愼)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비로소 이신의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9월 사이에 불려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즈음에 중군청(中軍廳) 군사라고 하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응형이 나가 묻기를 ‘그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하니, 그 사람이 답하기를 ‘오늘 조암(槽巖)에서 만났는데 장관(將官) 3인이 소 세 마리를 다 잡았고, 술은 각 사람에게 나누어 정했다.’ 하니, 응형이 말하기를 ‘너는 절대로 누설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라서 즉시 충청 감사(忠淸監司) 윤지경(尹知敬)에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지경이 말하기를 ‘너는 그 일의 단서를 자세히 알아보고 나서 상변(上變)하라.’ 하였습니다.
그후에 또 응형의 집에 갔더니, 응형이 또 김응학(金應鶴)이란 자를 불러 말하기를 ‘기패(旗牌) 이득경(李得京) 역시 데리고 와야 된다.’ 하고, 인하여 들어와 말하기를 ‘전일의 경오생은 이신(李愼)의 명(命)이며 계유생은 나덕헌(羅德憲)의 명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인하여 묻기를 ‘신사생은 어떤 사람인가?’ 하니, 응형이 말하기를 ‘물을 필요 없다. 기묘생은 이신의 첩이다. 반드시 그 사람이 여기에 있어야 바야흐로 내응(內應)할 수 있는데 이신이 지금 인솔하여 외방(外方)에 갔으니, 언제나 올라오겠는가?’ 하기에 답하기를 ‘2월 사이에 반드시 체직되어 올 것이다.’ 하였습니다. 응형이 말하기를 ‘손대신(孫大信)이 일찍이 묘책이 있다고 하였는데, 한 번 나팔을 불면 대장이 마땅히 나올 것이니 먼저 격살(擊殺)시키고, 인하여 그 군사를 거느리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라고 하기에 신은 그 말을 듣고 더욱 놀라서 즉시 나만갑(羅萬甲)에게 말했더니, 나만갑이 말하기를 ‘잠시라도 숨겨 지체해서는 안 되니, 내가 마땅히 훈재(勳宰)에게 말하겠다.’ 하였습니다.
그후 신의 처족(妻族) 석몽복(石夢福)이 신의 집에 와서 그릇을 빌리면서 말하기를 ‘도감 장관이 가을 강신(講信)을 하려 한다.’ 하고 인하여 묻기를 ‘내가 여러 벗들에게 이끌리고 유 수사(柳水使)와 서로 절친하니, 이제 그 은(銀)으로 소를 사 군사들을 먹이려 하는데, 나도 가서 참석하고자 한다. 어떻겠는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그런 말을 어찌 나에게 하느냐?’ 하니, 몽복은 작별하고 떠났습니다.
하루는 응형이 말하기를 ‘추숭한 후에 만약 대과를 설치하게 되면 그때 거자(擧子)들이 성 안에 모여 들 것이니 궁시(弓矢)를 지니고 섞여 들어가게 하면 사람들이 반드시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미 이런 말을 듣고는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국청이 유응형(柳應泂)·이일원(李一元)·이신(李愼)·나덕헌(羅德憲)·두게(豆揭)·김응학(金應鶴)·이득경(李得京)·석몽복(石夢福) 등을 잡아와 내병조(內兵曹)에서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응형의 공초에,
"신이 이후성(李後晟)과 과연 서로 절친하였는데 후성이 조석으로 왕래하면서 여종을 사간(私奸)했습니다. 4대장의 사주 및 국운에 관하여 점쳐보라고 언급한 일이 전혀 없습니다. 설사 역모를 꾀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그런 무리에게 바른대로 말하겠습니까. 중군 별장(中軍別將)이 되었을 때 점을 쳤다고 하는데 역시 그런 일이 없습니다. 신처럼 연소한 무부(武夫)가 만약 국가의 변란을 만났다면 절친한 맹인(盲人)에게 길흉을 점치는 것이 그럴 이치가 없지 않습니다만 전후해서 후성에게 한번도 묻지 않았습니다. 신이 이신과는 서로 가장 절친하게 지내며 경오생(庚午生)은 과연 그의 운명입니다.
신은 일생 동안 구설(口舌)을 들어 왔으며, 이신 역시 여러 차례 탄핵을 입었으므로 때로 길흉을 물어보긴 했습니다만 계유생(癸酉生)·신사생(辛巳生)은 전혀 모릅니다. 자리를 같이했던 세 사람의 경우는 맹인이 수시로 왕래했는데 어느 때 누구와 서로 만났는지 어떻게 기억하겠습니까? 이일원(李一元)의 팔자를 물었다는 것은 도무지 거짓말입니다. 비록 흉악한 모의를 하였다 하더라도 하필이면 맹인의 손을 잡아 칼을 만져보게 하고서 점을 쳐보도록 했겠습니까.
정백창(鄭百昌)이 신을 논핵함이 매우 참혹했음을 누군들 모르겠습니까. 이 맹인이 반드시 그 일을 듣고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신이 처음 경기 수사(京畿水使)가 되었을 때 구굉(具宏)을 하직하니, 굉이 말하기를 ‘들으니, 네가 역모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므로 신이 놀라서 묻기를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는가?’ 하였습니다. 구굉이 말하기를 ‘이식(李植)이 와서 말하였는데, 박로(朴𥶇)에게서 들었다고 한다. 박로는 너의 매부(妹夫) 박진(朴)의 형이니 반드시 자세히 알 것이기 때문에 믿고 들었다.’ 하였습니다.
신이 즉시 상소하고자 하니, 굉이 말하기를, ‘이는 전해진 말이고, 또 우리가 이미 들었으니, 비록 상소하지 않아도 된다.’ 하므로 신은 생각하기를 ‘훈척 중신(勳戚重臣)이 스스로 말했다가 스스로 중지시키니, 그 말을 따라야 할 듯하다.’ 하였기 때문에 진소(陳疏)하여 스스로 변명하지 않았는데, 혹 후성이 이를 듣고 형적 없는 말을 한 것이 아닙니까?
조암(槽巖)에서 군사를 먹였다는 일은, 집이 조암에서 가깝기 때문에 후성이 그렇게 말한 것인데, 비록 은벽(隱僻)한 곳이라 하더라도 소 세 마리를 잡아 군사를 먹였다면 먹은 사람이 반드시 많았을 텐데 사람들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나덕헌(羅德憲)은 함께 체부(體府)의 막하(幕下)에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상면하였으나 덕헌이 죄를 얻고 하향한 후로는 다시 서로 만나보지 못했으니, 그의 생년(生年)이 무슨 갑(甲)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신(李愼)은 본래 축첩(蓄妾)하지 않았으니, 기묘생이 내응해야 한다는 설은 더욱 매우 형적이 없습니다. 신이 과연 이후성(李後晟)과 큰 혐의가 있습니다. 후성이 소첩(小妾)을 두었기에 신이 일찍이 편지를 보내 꾸짖었는데, 일이 발각되자 후성이 이 일 때문에 감정을 품고 이 지경에 이르도록 모함을 한 것입니다."
하니, 드디어 후성과 면질(面質)하게 했으나 그 곡직(曲直)을 가려내지 못하였다. 후에 민람(閔灠)의 고변을 인해 다시 민람과 면질하게 하니 역시 아주 억울하다고 하였다. 이득경(李得京)의 공초에,
"신이 처음에는 응형을 몰랐는데 이괄(李适)의 변란 때 응형이 부원수(副元帥) 진중(陳中)의 좌영장(左營將)으로 양주(楊州)에 이르러 장차 진을 치려고 했었습니다. 원수(元帥)가 신이 진법(陣法)을 조금 안다는 이유로 가서 가르치도록 하였기 때문에 비로소 응형의 사람됨을 알았습니다. 그후 응형이 중군이 되어 때때로 혹 불러 보았으나 모역하는 일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김응학(金應鶴)은 공초하기를,
"응형이 중군이 되었을 때 배행(陪行)했을 뿐 나팔수(喇叭手) 등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하였다. 두게(豆揭)는 공초하기를,
"아노(兒奴)로 심부름만 해서 다른 일은 모릅니다."
하고, 이일원(李一元)은 공초하기를,
"응형과 나이가 비슷하지 않고 사는 곳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전에는 서로 알지 못하다가 처음으로 체부 막하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유흥치(劉興治)의 난리에 응형이 경기 수사(京畿水使)가 되고 신이 장연 부사(長淵府使)가 되어 단지 항오(行伍) 사이에서 서로 보았을 뿐 본래 서로 두터운 의리는 없었으니, 응형이 점장이에게 명을 점쳤다는 것은 그럴 리가 만무합니다."
하고, 석몽복(石夢福)은 공초하기를,
"경오년010) 안주(安州)에 수자리를 가 신미년011) 에 비로소 돌아왔습니다. 수자리를 살고 돌아온 후에 강신(講信)은 스스로 도감(都監)의 규례가 있어 장사(將士)들과 조암에서 모여 각기 무명베 반 필(匹)씩을 내어 소를 사 반찬을 삼았으나 우박(雨雹)을 인해 조용하지 못했습니다. 함께 참석한 장관(將官)은 허정준(許廷準)·김성발(金聲發)·안경성(安敬誠)과 별무사(別武士) 30여 명이었습니다. 모여 술을 마시며 강신하던 날 후성(後晟)에게 그릇을 빌렸는데 후성은 바로 사촌 매서(妹婿)이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모역했다고 말한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하였다. 허정준은 공초하기를,
"신의 형 첩(妾)이 딸 하나를 낳았는데 응형이 첩으로 달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응형은 재물을 탐내고 색(色)을 좋아하며 그 서모의 시양녀(侍養女)를 취해 첩으로 삼았다. 또 창기(娼妓)를 많이 간통했으니, 지금 만약 시골 여자를 그의 첩으로 허락하면 응형의 한 여종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응형이 이 말을 듣고는 항상 매우 분해 욕을 했기 때문에 신과 응형 사이는 원수와 같았습니다. 그후 신은 초관(哨官)이 되고 응형은 중군(中軍)이 되었기 때문에 예(例)에 따라 명함(名啣)을 통했을 뿐입니다.
경오년 안주로 수자리를 살러 갔다가 돌아와 과연 조암에서 강신의 모임을 가졌으나 응형이 은(銀)을 주어 소를 샀다는 일은 전혀 모릅니다."
하고, 이신은 공초하기를,
"신이 전년 7월, 응형을 가서 보았더니 자리에 앉은 지가 오래지 않아 맹인이 들어왔습니다. 응형이 말하기를 ‘이는 유명한 점장이다.’ 하여 신은 단지 사주(四柱)만 묻고는 일어나 왔습니다. 그후 응형의 병든 어미가 이형익(李馨益)에게 침을 맞았기 때문에 가까워 편리함을 취해 신의 외채에 와 지내다가 15일에 돌아갔습니다. 신은 본래 첩이 없는데 기묘생이 신의 첩 명(命)이라 하였으니, 그 여인이 어떻게 내응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신의 처조카에게 첩 딸이 있는데 응형이 결혼시켜주기를 청해 작년 7월에 과연 그 첩자(妾子)와 성혼시켰습니다. 고장(故將) 이일(李鎰)은 바로 신의 삼촌이어서 응형의 아비 유지신(柳止信)과 함께 그 막하에 있었습니다. 응형이 고인(故人)의 어린 아들이어서 서로 친하게 되었는데 만약 유응형을 안다는 것으로 죄를 준다면 죽음도 사양하지 않겠으나 역모에 동참했다는 데 이르러서는 신이 이미 진무 공신(振武功臣)012) 정훈(正勳)에 들었고 두 번씩이나 곤직(閫職)을 지냈으니 무슨 부족한 일이 있어 감히 불측한 계획을 했겠습니까.
응형이 신의 집에 드나들면서 아주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가 있었고 【 유응형이 이신의 아내를 간통했다고 한다.】 또 그 아비가 사간(私奸)한 어린 여종과 함께 한방에서 자서 비로소 그의 형편없음을 알고 절교하고 서로 통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나덕헌이 공초하기를,
"신은 체부 막하에 있으면서 비로소 응형과 서로 알게 되었고, 그후에는 관(官)의 일로 오랫동안 외방(外方)에 있으면서 이미 고향에 돌아와서는 병 때문에 출입하지 못하였고 서울과 시골이 서로 천리나 떨어져 있으니 어찌 응형이 점을 친 곡절을 알겠습니까."
하였다. 금부가 아뢰기를,
"이갱생(李更生)이 상소하여 진달한 ‘민람(閔灠)과 응형이 문답하였다.’라는 말은 일이 아주 의심스러우니, 민람을 잡아다 묻기를 청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민람이 공초하기를,
"신은 응형과 처음으로 체부 막하에서 알게 되었는데, 전년 응형을 찾아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신이 말하기를 ‘요즈음 가을 천둥이 크게 우니 일이 매우 놀랍다.’ 하니 응형이 말하기를 ‘반드시 뜻을 가진 자가 있을 것이다’ 하고는 인하여 묻기를 ‘너의 향리에 사는 최완(崔𤾂)은 어떤 사람인가?’ 하기에, 답하기를 ‘서로 사는 곳이 멀리 떨어져 좋고 나쁜지를 모르겠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임국(林國)은 어떤 사람인가?’ 하기에 답하기를 ‘그 사람은 상인(常人) 가운데 선한 자이다.’ 하니, 유응형이 말하기를 ‘그 사람이 과연 선하다면 비록 팔도의 병사가 되더라도 부족하지 않겠다.’ 하고 또 묻기를 ‘송진(宋震)은 어떤 사람인가?’ 하기에, 답하기를 ‘매우 좋다.’ 하였습니다. 응형이 말하기를 ‘내가 보기에도 역시 어려운 인물이다.’ 하였는데, 그때 옆에 작은 종이를 두고 그 사람의 사주를 적었습니다. 또 신의 명(命)을 묻기에 신이 비로소 의아하여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고 돌아와 즉시 이갱생에게 말했고, 이갱생은 청운군(靑雲君) 심명세(沈命世)에게 말했습니다.
그후 상경했더니, 갱생이 말하기를 ‘네가 다시 탐청(探聽)해야겠다.’ 하기에 즉시 유응형의 집으로 갔습니다. 들어가 앉자마자 초관(哨官) 허정준(許廷準)이 들어와 단지 한담을 나누다 물러나왔습니다.
또 응형의 말을 돌켜 생각해 보니 ‘모든 일은 부인들과 모의할 수가 없다. 살아 있으면 부인이 없을까 걱정할 것이 무엇이며, 죽어서는 부인이 있은들 무엇하겠는가. 남자가 혹 무슨 일을 하고자 하면 어디 간들 뜻을 얻지 못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대신과 추관을 인견하고 옥정(獄情)을 물으니, 대신이 먼저 응형을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응형은 형을 받고도 끝내 불복하다 죽었으며 허정준 및 김응학(金應鶴)·석몽복(石夢福) 역시 형을 받았으나 불복하였다. 상이 국청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게 하니, 국청이 회계하기를,
"허정준·이신은 유응형과 친밀하게 사귀어 전석(全釋)해서는 안 되니, 유배(流配)하는 율을 시행해야 마땅하며, 나머지는 모두 분간해야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이후성(李後晟)과 민람(閔灠)은 끝내 무고한 율을 면하니, 듣는 자들이 의심하였다.
1월 25일 계해
간원이 아뢰기를,
"무변(武弁)으로 총관(摠管)이 되는 자는 일시의 극선(極選)이어서 일찍이 병사(兵使)·수사(水使)를 지내며 명성이 있지 않으면 경솔히 제수할 수 없습니다. 부총관 신경진(申景珍)은 평소 명성이 부족하니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김해 부사(金海府使) 황이중(黃履中)은 일찍이 전라 수사(全羅水使)가 되어 군포(軍布)를 지나치게 징수해 이미 어사(御史)의 서계에 들어 있으니 다시 중임을 제수할 수 없습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26일 갑자
행 사직(行司直) 이유간(李惟侃)이 상소하기를,
"신의 아들 이경석(李景奭)이 대궐 안에서 황감(黃柑) 열 개를 보내면서 ‘노친(老親)이 있기 때문에 특별히 하사한다.’라는 성지를 전해왔습니다. 신은 자리를 바로 하기 전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신이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이와 같은 성상의 사랑을 받으며 자식 역시 어떤 사람이기에 홍은(洪恩)을 입는단 말입니까. 신은 즉시 천신(薦新)하고 인하여 처자(妻子)와 손자들과 서로 나누어 맛보고 또 절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신의 나이 83으로 조정에서 40년 동안 털끝만큼도 보탬이 없었는데 노인을 우대한 특별한 은혜로써 재상의 반열에 뛰어 올랐으며, 두 아들 역시 모두 재식(才識)이 없는데도 갑자기 금옥(金玉)의 반열에 올랐고, 지금 또 보배로운 과일을 하사하셨습니다. 이는 실로 일찍이 듣지 못하던 특이한 은수(恩數)여서 신의 부자는 죽을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은 이제 연로하고, 두 아들도 다 쓸 만하기 때문에 이에 미친 것이니, 경은 사례하지 말라."
하였다. 이경석이 이때 승지가 되었는데, 상이 정원에 감귤을 하사하면서 이경석에게 10개를 더 내려 그 아버지에게 보내게 한 것이다. 이경석 역시 글을 올려 사례했다.
1월 27일 을축
훈련 도감이 아뢰기를,
"도감의 마병(馬兵)이 많지 않은데 타는 말이 모두 전용(戰用)에 합당치 않습니다. 청컨대 도감에 저장된 면포(綿布) 70동(同)을 한 초관(哨官)에게 주어 제주(濟州)에 가서 말을 사오게 하되 압송해 오는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되니, 또 별무사(別武士) 7인을 보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별무사는 너무 많으니, 줄여 보내게 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태평관(太平館)에 우거하는 표류해 온 중국 관원이 게첩을 보내 10일분의 돌아갈 양식을 원하니, 향신(餉臣)으로 하여금 5석의 쌀을 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명한(李明漢)을 좌승지로, 이경인(李景仁)을 헌납으로 삼았다.
1월 28일 병인
호기(胡騎) 10여 인이 의주(義州)에 도착하여 개시(開市)할 때 값을 다 주지 못한 은자를 돌려달라고 하였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심기원(沈器遠)이 치계하였다.
"호조가 말하기를 ‘금년 연분(年分)의 숫자가 작년보다 감축된 것이 1만 6천 2백여 결(結)이고 내야 할 미두(米豆) 및 당량(唐糧)과 삼별수미(三別收米)가 감축된 숫자는 9천 9백여 석이다. 앞으로 경비(經費)를 이어갈 계책이 없는데 작년 하중(下中) 이상을 이제 하하(下下)로 내린 것 역시 많으니 작년의 등수를 헤아려 그대로 두어 세입(稅入)이 너무 줄지 않게 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해조에서 더 추가해 세를 받자는 설은 실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나 단지 생각하건대 본도의 연해는 전야(田野)가 참혹하게 황폐되어 민간의 굶주린 기색이 이미 도로에까지 보입니다. 봄이 와 진구(賑救)해야 하는데도 손쓸 바를 모르고 있는데 만약 등수를 올려 추가로 세금을 받으면 반드시 백성들이 반드시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등수의 고하(高下)는 풍년(豐年)에 있어서도 오히려 중(中)을 잃지 않기가 어려운데 더군다나 작년의 한재로 인해 심지어 상중(上中)의 것도 지금은 진재(陳災)에 들었으니 세입을 줄인 것은 진실로 이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백성은 원래의 전세(田稅) 작미(作米) 역시 준비하지 못하고 있어, 조곡(糶穀)을 청하는 보고가 바야흐로 분분합니다. 등수를 올려 추가로 세를 받는 일은 결코 행할 수 없습니다."
1월 29일 정묘
헌부가 아뢰기를,
"홍원 현감(洪原縣監) 정충직(鄭忠直)은 사람됨이 어리석고 지나쳐 도임한 후에 오로지 자기 살찌우기만 일삼았으며, 또 성품이 술을 좋아하여 정사를 하리(下吏)에게 위임하였습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용강 현령(龍岡縣令) 정빈(鄭賓)은 일찍이 함종 현령(咸從縣令)이 되었을 때 관의 곡식을 남용하고 몰래 읍비(邑婢)와 간통했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체차를 명하였다.
평안 감사 민성휘가 치계하기를,
"의주 부윤(義州府尹) 윤진경(尹進卿)이 치보(馳報)하기를 ‘정묘년013) 이후에 관사(官舍)를 수리하는 데 뜻을 두지 않아 지금까지 지연되어 왔는데 만약 금년 여름을 지나고 나면 모조리 헐고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 개수(改修)하고자 하니, 지휘를 내려주어 복고(復古)할 터전을 삼게 해 달라.’ 하였습니다. 남군(南軍)으로 안주(安州)에 들어와 수자리 사는 자를 의주로 나누어 보내 그 역사를 돕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수졸(戌卒) 1, 2초(哨) 정도 적당 수를 의주로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가 아뢰기를,
"순안 어사(巡按御史) 이명웅(李命雄)이 한 도를 안찰해 다니면서 여론을 물어 이처럼 서계(書啓)하였으니, 마땅히 경중을 분간하여 상을 주거나 벌을 내려야 하는데 일찍이 그 장계로 인해 여러 곳의 수령이 이미 포상(褒賞)의 은전을 받기도 하고 또 파출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번 이 서계 가운데 든 허다한 수령을 하나하나 처치할 수 없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 서계는 아주 남잡(濫雜)한 듯하니,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소대(召對)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참찬관 목서흠(睦敍欽)이 나아와 아뢰기를,
"어사(御史)는 사체가 매우 중한데 이명웅(李命雄)의 서계에 든 사람이 몇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모두 시행해 쓰지 않으면 역시 미안합니다."
하니, 상이 아뢰기를,
"추생(抽栍)한 수령은 이미 상벌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였는데, 수찬 이명웅이 아뢰기를,
"당초의 사목(事目)은 가벼운 것은 서계하고, 중한 것은 곧바로 파직하라는 뜻이었으며, 또 도내에 실적이 있으면 서계하라고 명하였기 때문에 들은 대로 진달하였는데 엄한 분부를 받고 보니 매우 황공합니다."
하였다. 상이 아뢰기를,
"서로(西路)의 여러 일은 어떠하던가?"
하니, 이명웅이 아뢰기를,
"관서 사람들이 정묘년 변란에 갑자기 큰 군사를 만나 사람들이 모두 겁을 먹어 곳곳에서 패배하였는데, 지금은 모두 후회하고 분발할 것을 생각하여 만약 맹약을 깨뜨리는 일이 있으면 모두 그 부자 형제의 원수를 갚고자 하니, 이는 다행한 일입니다. 다만, 섬 안에 있는 중국 사람들이 소란을 피우는 피해가 날로 심해져 선천(宣川)·철산(鐵山)·용강(龍岡)·의주(義州) 백성들의 호구가 수백이 차지 못하는데 부마(夫馬)의 역사가 끝이 없어 날로 인호(人戶)가 더 들어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만약 보리가을 전에 맞추어 관에서 진곡(賑穀)을 주면 다시 모이는 자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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