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6권, 인조 10년 1632년 2월

싸라리리 2025. 12. 29.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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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기사

병조 판서 김시양(金時讓)이 차자를 올려 안주(安州)와 황주(黃州) 지방을 전수(戰守)할 계책을 의논드리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토록 하였다.

 

유성(流星)이 대각성(大角星) 위에서 나와 하고성(河鼓星) 아래로 들어갔다.

 

2월 2일 경오

헌부가 아뢰기를,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 문희성(文希聖), 자산 군수(慈山郡守) 정응정(鄭應井)은 모두 오랑캐에게 항복한 사람들인데 초탁(超擢)되기까지 했습니다. 모두 개차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문희성 등은 재능이 쓸 만하니,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2월 3일 신미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시독관 조위한(趙緯韓)이 아뢰기를,
"강왕(康王)이 사위(嗣位)하여 맨 먼저 적게 거두어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일을 말하였습니다. 근래에 수재와 한재가 해마다 들어 백성들이 곤궁하고 재물이 다 되었는데 사치가 날로 심하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일찍이 듣건대 고려 말기에도 역시 이러했다고 했는데, 우리 태종조(太宗朝)에 이르러 통렬히 이런 폐단을 금지하고자 하니, 황희(黃喜)가 말하기를 ‘이는 어렵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몸소 소박한 베옷을 입으시고 검박함으로써 아랫사람들을 거느리면 한번 변혁시킬 수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대신들의 의복 역시 검속한데 습속은 어찌하여 이러한가?"
하였는데, 조위한이 아뢰기를,
"장복(章服)이 문란하여 서민들이 모두 비단옷을 입으니, 이는 가생(賈生)014)  이 이른바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소씨(蘇氏)가 말하기를, ‘마땅히 상복으로 고명(顧命)을 받아야 한다.’ 하였는데 이 뜻이 어떠한가?"
하니, 조위한이 아뢰기를,
"이는 바로 선왕(先王)의 말명(末命)이니 상복으로 받아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학교란 국가에서 서둘러야 할 급선무인데도 지금 치지도외하고 있으니 참으로 작은 염려가 아닙니다. 신이 이번에 사학(四學)의 윤차 시관(輪次試官)을 차출하여 윤차관(輪次官) 4, 5인에게 시부(詩賦)를 과시(課試)하였습니다. 그 본의는 한 달 안에 사학을 한 차례씩 과시하면 1년에 4학은 각기 10여 차례씩 되고, 적어도 6, 7차례는 됩니다. 연말에 우수한 사람을 뽑아 감시(監試)와 회시(會試)에 응시하게 하면 이는 바로 권장하는 뜻이 됩니다. 지금은 1순(巡)하여 입격하면 문득 초시(初試)를 허락하니 일이 매우 소략합니다. 평소에 윤근수(尹根壽)·신응재(申應材)·구사맹(具思孟)이 오랫동안 대사성(大司成)으로 있으면서 자주 유생(儒生)을 시험하여 여러번 상격(嘗格)을 행하였기 때문에 선비들이 모두 떨쳐 일어났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치평요람(治平要覽)》은 세종조(世宗朝) 때 정인지(鄭麟趾)가 편찬한 것으로 홍문관(弘文館)에 한 질이 있었습니다. 지난번 신이 고상(故相) 이항복(李恒福)에게 말하여 급히 이 책을 출간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항복은 권질(卷帙)이 너무 많아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반정(反正) 후에 예안(禮安)에 한 질이 있어 본관(本館)으로 옮겼으나 또 이괄(李适)의 변으로 인해 산실(散失)된 것이 20여 권이니, 만약 거두어 모아 간행하면 널리 배포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권질이 완전치 못하면 비록 간행하고자 하더라도 쉽지 않을 듯하다. 일찍이 그 미비된 것을 선사(繕寫)하도록 했는데, 아직 착수하지 않았는가?"
하였는데, 조위한이 아뢰기를,
"본책(本冊)이 없기 때문에 전사(傳寫)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2월 6일 갑술

예조 판서 최명길(崔鳴吉)이 아뢰기를,
"태학은 많은 선비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풍화(風化)의 근본이 되므로 옛날 뜻이 있는 임금들은 모두 이 곳을 매우 중하게 여겼습니다. 한 명제(漢明帝)는 벽옹(辟雍)015)  에 친히 임하여 여러 유생들과 경서(經書)를 문난(問難)하였고 당 태종(唐太宗)은 자주 국자감(國子監)에 행행하여 좨주(祭酒) 공영달(孔穎達)에게 명하여 《효경(孝經)》을 강설하게 하였으며, 우리 중종 대왕(中宗大王)께서는 기묘년016)   7월, 성균관에 친행하시어 대사성 김식(金湜), 생원 이약빙(李若氷) 등과 《주역》·《서전》 등의 책을 강론하니, 문을 둘러싸고 구경했던 자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고 하여 지금까지 미담(美談)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유술(儒術)의 성대함이 그 연유가 있는데 의리(義理)가 밝혀지고 풍속이 아름다운 것은 선조조(宣祖朝)에 이르러 지극했습니다. 그때에 이황(李滉)·이이(李珥) 등 여러 현인들이 사람을 가르치면서 반드시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소학(小學)》 등 세 책을 우선하였는데, 대개 선현(聖賢)의 책 가운데 배우는 자에게 친절(親切)한 것으로는 이 세 책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이 죽은 후에 거듭 세상이 변하여 이런 학문을 강하지 않은지 오래되다 보니 《심경》·《소학》 등의 책을 지니고 다니면 사람들이 모여 웃습니다. 여항(閭巷) 사이에 자질이 아름다워 선(善)을 추구하는 사람이 없지 않으나 위에는 성취시켜줄 방도가 없고, 아래에는 사우(師友)의 도움이 부족하므로 해서 뜻을 품고도 이루지 못하다가 급기야는 윤락(淪落)하고 맙니다. 혹 유서(儒書)를 몰래 외는 자가 있지만 겉으로는 짐짓 속태(俗態)를 지어 비방을 피할 계책을 삼고 있습니다. 세도가 이에 이르고 보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성명께서 즉위하신 이래 연달아 변란을 겪어 국가에 일이 많다 보니 시서(詩書)·예약(禮樂)을 가르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한번 진작시키지 않아서 사문(斯文)을 민멸되게까지 하겠습니까? 이번의 알성시(謁聖試)를 보여 인재를 뽑은 일은 역시 문치(文治)하는 아름다운 일이나 거기서 뽑은 자는 문예(文藝)하는 선비에 불과할 것이니, 많은 선비를 격려하는 방법이 아닌 듯싶습니다. 마땅히 한(漢)·당(唐) 시대의 현철한 임금 및 우리 조종조의 고사(故事)를 본받아 헌작(獻酌)한 후에 전하께서 친히 명륜당(明倫堂)에 앉으시어 본관(本館)의 당상(堂上) 및 배종(陪從)하는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심경》과 《근사록》의 중요한 말을 가지고 어전에서 강론하게 하고 친히 옥음(玉音)을 내려 정밀하게 토론하시면서 제생(諸生)들로 하여금 둘러서서 구경하도록 허락하여 성대한 일이 있게 해야 합니다.
강을 마치고는 또 제생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시강(試講)하기를 전강(殿講)의 규례처럼 하되 구두(句讀)가 익숙하고 문의(文義)에 능통한 자를 상으로 삼고, 구두는 비록 익숙하지 못하더라도 경서를 인용해 논설하는 것이 그럴 듯한 자를 그 다음으로 하고, 문의는 비록 통창하지 못하더라도 공부를 오래하여 외고 읽는 것이 익숙한 자를 또 그 다음으로 해 등급을 나누어 시취(試取)하여 혹 곧바로 급제(及第)를 내리기도 하고, 혹은 분수(分數)를 헤아려 주고 환궁(還宮)한 후 수일 뒤 정시(庭試)를 설치해 예에 따라 사람을 뽑는다면 경술(經術)과 문예(文藝)가 치우치거나 폐해지지 않아 역대에 드문 성전(盛典)이 되어 멀고 가까운 곳이 용동(聳動)될 것입니다. 이 일에 이어서 나태하지 않고 배양하는 도리를 다하도록 노력한다면 몸소 모범이 되어 아랫사람을 거느리는 사이에 반드시 보고 느끼어 흥기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세도(世道)에 도움됨이 어찌 적겠습니까.
허다한 선비들을 반일(半日) 안에 다 강할 수 없으니, 먼저 관관(館官)을 명하여 일반적인 규례에 따라 날마다 통독(通讀)하게 해서 미리 경서에 밝은 선비를 뽑아야 합니다. 그 규칙은 사서(四書)는 추생(抽栍)하고, 삼경(三經)은 자원하게 하며 이밖에도 만일 《심경》과 《근사록》 중에 강받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자원에 따라 허락하되 식년시(式年試) 여경(餘經)의 예와 같이하여 여기에서 선출된 자를 어전에서 시강토록 하신다면 일이 두서가 있어서 저절로 시끄러울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비록 모두 입격하지는 못하더라도 공부하여 강을 기다리자면 다른 때보다 배나 열심히 해야 할 것이니 거기에서 얻어지는 유익함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알성시를 보일 기일이 마침 3월경이어서 날씨가 따뜻하고 매우 해가 길 것이니 고전(古典)을 토론하기가 아주 좋은 시기입니다. 신들의 생각은 실로 뜻한 바가 있는데 의논하는 자들은 혹 말하기를 ‘먼저 학교에 대한 정사를 닦지 않고 갑자기 세상에 드문 법을 행하면 끝내 실효(實効)는 없고 도리어 겉치레가 된다.’고 하나 이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쇠미해진 것을 진작시키자면 반드시 비상한 거조가 있어야 합니다. 상께서 먼저 장려하는 뜻을 보여 한 때의 이목(耳目)을 새롭게 하면서 학교의 정사도 점차 닦아나가면 바야흐로 기꺼이 나아가는 효과가 있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래도 일을 점차적으로 아니해서 제생들이 서운하게 여길 것을 염려한다면 이번 알성시를 보일 때 우선은 전례(前例)에 의하여 제술(製述)로 사람을 뽑고, 별도로 길일(吉日)을 가려 뒤따라 설행해도 역시 무방할 듯합니다. 다만 일이 규정 밖이어서 해조에서 감히 경솔히 청할 바가 아니니, 삼가 상께서 재단하기를 기다립니다."
하니, 답하기를,
"먼저 학교의 정사를 닦은 연후에 거행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조가 아뢰기를,
"나라에서 사람을 쓰는 것은 그 방법이 하나가 아니며 향거 이선(鄕擧里選)017)  은 바로 조종조의 전례(典例)인데 폐기한 지 이미 오래여서 일이 아주 미안합니다. 팔도로 하여금 향거 이선의 법을 거듭 명시하게 하여 현인(賢人)을 빠뜨리는 탄식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김광현(金光炫)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2월 7일 을해

윤방(尹昉)이 총재관(摠裁官)을 사직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바로 폐조(廢朝) 사기 수찬청(史記修纂廳) 총재관이다.

 

2월 8일 병자

정언 지덕해(池德海)·민광훈(閔光勳)이 궐계(闕啓)한 것으로써 인피하니, 체직하였다.

 

이조 판서 이귀(李貴)가 차자를 올리기를,
"김시양(金時讓)이 이서(李曙)가 진달한 바를 인해 황주(黃州) 군사를 나눈 일이 있었는데, 신이 쟁집(爭執)한 본의와 크게 같지 않으니, 다시 상의하여 결정할 것을 청합니다."
하자, 상이 따랐다.

 

2월 10일 무인

심연(沈演)·이원진(李元鎭)을 정언으로 삼았다.

 

2월 11일 기묘

헌납 이경인(李景仁)이 궐계(闕啓)한 것으로써 인피하였다. 대사간이 출사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이경인이 소명에 따르지 않고 또 인피하였다. 정언 심연이 체차해 줄 것을 계청하였는데 상이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예조가 이귀의 차자에 대해 회계하기를,
"이번 이 예(禮)를 의논함에는 공공(公共)의 도리가 있어 소견에는 비록 같지 않음이 있더라도 이로써 고집해 따질 생각을 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고 허심 탄회하게 자세히 강구하여 십분 적당하게 되도록 힘써야 할 뿐입니다. 차자 가운데 허다한 억양(抑揚)이 신의 조(曹)에서 의계(議啓)한 잘못을 공척한 것이 아닌 것이 없는데 그 비유한 바가 친절하지 못한 것이 많으며 고수(瞽瞍)와 맹자(孟子)의 설 같은 일은 더욱 의심이 됩니다만 신들이 감히 하나하나 변명하여 소란스러운 단서를 일으키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광무제(光武帝)는 남의 후사(後嗣)가 되었고 전하께서는 조(祖)의 후사가 되어 그 일이 본디 스스로 같지 않습니다. 단지 그 별묘(別廟)의 제도는 취하여 증거할 만하기 때문에 본조(本曹)의 계사 가운데에서 언급한 것이지 충분히 츤착(襯着)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같으면 비록 하호(河鎬)가 다시 살아나더라도 필시 다른 말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예(禮)를 말하는 자는 예(禰) 자를 마음에 두어 경중이 각기 달라 하나로 귀착되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대저 고(考)라 일컬어 사당을 세우면 지자(支子)가 제사를 주관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함이 오늘날 첫째 의리니 나머지는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조(高祖)가 둘이 되는 혐의가 참으로 있게 되어, 전일 정부의 계사 가운데 이미 바로 고치라는 뜻이 보이는데 발락(發落)이 내리기 전에 지금 바야흐로 대신이 수의(收議)하는 일이 있게 되었으니 우선은 전례(典禮)를 완전히 정하기를 기다린 연후에 별도로 의논해 처리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다만 이른바 ‘하나로 귀착시키기가 어렵다.’는 등의 몇 조항은 말씨가 더욱 부당하니, 먼저 추고해야 마땅하나 지금은 우선 그냥 둔다. 이후에는 이처럼 무식한 말을 하지 말라."
하였다.

 

영의정 윤방(尹昉)이 추숭하는 일로 의논드리기를,
"계체(繼體)한 임금과 처음으로 봉(封)해진 임금은 경우가 다릅니다. 추숭하는 전례를 경솔히 의논하기는 어렵습니다마는 광무제(光武帝) 때 일로 말하자면 용릉(舂陵)018)  의 4친(親) 묘에 이미 영장(令長)을 시켜 제사를 모시게 하고, 황제 역시 때때로 친히 제사를 지냈으니, 대개 이는 공가(公家)의 한 묘였습니다. 지금 우리 성상께서 이륜(彝倫)을 다시 밝히시고 종사(宗社)를 거듭 안정시키신 성대한 공렬(功烈)은 참으로 광무제보다 뒤지지 않으십니다. 만약 당시의 사례(事例)를 모방하여 별도로 한 묘를 설치해 신위(神位)를 봉안한다면 모든 향사(享祀)하는 의물(儀物)은 제후(諸侯)의 예(禮)를 참고해 쓰고, 옛날에 시(尸)에는 사복(士服)을 쓰고 제사에는 제후의 제도를 썼던 경우를 따르면 이미 예를 넘는 혐의가 없고 역시 성상께서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을 조금은 펼 수가 있습니다.
시험삼아 현재 실행하고 있는 절목(節目)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사의 축(祝)에 이미 고(考)라 칭하여 승지가 향(香)을 전하였고 영묘(塋墓)에는 또 원(圓)이라 칭하여 참봉이 수직(守直)하고 있으니 이미 사가(私家)에서 제사를 받드는 모양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독 신주만을 오랫동안 여염집에 두고 봉안할 장소를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사체로 헤아려 보아도 실로 근거가 없습니다. 다만 이런 말이 한번 나가면 또 한층 더 가중된 의논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신이 지난 여름 등대(登對)했을 때 정씨(程氏)의 정통(正統) 사은(私恩)의 설을 우러러 읽어드리고, 인하여 사우(祠宇)을 정하지 않음은 참으로 타당치 못하다는 말을 언급하였으나 성상께서는 추숭할 생각만 하시고 성찰하지 않으시기에 신은 감히 그 설을 다 마치지 못하고 물러나왔습니다. 이 예는 반드시 위로는 천리(天理)에 합당하고, 아래로는 인심(人心)에 순응하여 천하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입을 놀리지 못하게 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거행할 수가 있습니다. 추숭하는 한 조항은 의논함을 용납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고, 영돈령부사 오윤겸(吳允謙)은 의논드리기를,
"일찍이 영의정이 되었으나 지식이 없는 관계로 순조롭게 하지 못해서 성상께 근심과 번뇌를 이렇게까지 끼쳤으니 죄가 만번 죽어야 마땅합니다. 삼가 예관(禮官)에게 내린 전교를 받들고 보니 황공하고 떨려서 감히 의논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이정귀(李廷龜)는 의논드리기를,
"이 일은 전대(前代)에 근거할 만한 정례(正禮)가 없지만, 성상께서 지극한 정을 펴고자 하시니 신하로서 누군들 순종하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막중한 예가 혹시라도 중정(中正)함을 잃으면 참으로 후세에 비난을 받을까 염려됩니다. 하찮은 저의 소견은 전에 이미 여러번 전달했으니, 황공하게 죄를 기다립니다."
하니, 답하기를,
"《예기(禮記)》에 ‘예(禮)란 하늘에서 내려온 것도 아니며 땅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단지 인정일 뿐이다.’ 하였으니, 성인(聖人)이 인정을 따라서 예를 제정한 것인데, 말세의 풍속은 천리(天理)를 어기고 명분을 간구한다. 영상의 의논이 약간 일단의 뜻을 얻었다고 할 수 있으나 이끌어 댄 비유가 맞지 않고 예를 정함이 구차하고 간솔하여 백보(百步)에 오십보(五十步)나 다름이 없다. 생각건대 이 예는 천경 지위(天經地緯)로 만대에 우러러 볼 바이며 일은 순조롭고 이치는 정당하여 후세에서 취할 바이니 속히 추숭하는 예를 거행하여 봉선(奉先)하는 도리를 다하게 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금일의 일은 바로 천고의 변례(變禮)여서 후박(厚薄)과 융쇄(隆殺)가 모두 근거가 없습니다. 부자간의 윤리는 천지의 상경(常經)이요 종묘의 예는 고금의 정제(定制)여서 권도(權道)를 써도 도리에 부합되는 경우는 오직 성자(聖者)만이 할 수 있습니다. 신의 조(曹)에서 전후 복계하여 별묘(別廟)로 할 것을 청한 것은 감히 자신(自信)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일을 중히 여겨서입니다. 지금 성상의 비답을 받고 보니 ‘정(情)을 따라 예를 정한 것이다.’라는 전교였습니다. 어리석은 신들이 감히 입을 놀릴 일이 아닙니다만 다만 생각건대 나라에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반드시 대신에게 먼저 물어보아야 하는데 지금 이 막중한 예를 아직도 우상(右相)에게 수의(收議)하지 않았으니 사체에 있어 혹 미안한 듯합니다. 우상의 헌의를 기다린 후에 처치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간원이 아뢰기를,
"곡산 군수(谷山郡守) 민람(閔灠)은 유응형(柳應泂)과 왕래하면서 매우 친하게 지냈습니다. 나문하기에 미쳐서도 오히려 실토하지 않았는데 국청(鞫廳)에서 엄히 국문하기를 청하지 않았으므로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실형(失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뜻밖에 특제(特除)하라는 명이 규정 밖에서 나왔으니 물정이 놀라워하며 분해하고 있습니다. 사판(仕版)에서 삭거하소서."
하고, 헌부 역시 파직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민람은 출전(出戰)하기를 자원하여 공을 세운 사람이다. 그후 다행히 한 고을의 군수가 되었는데 역시 보존하지 못했으나 오히려 나라를 원망하지 않고 분주히 기찰(譏察)했으니, 그 마음이 아주 가상하다. 당초의 소문이 이에 그치니 분명하게 말하기 어려운 형세인데, 그대들이 도리어 실정 이외의 말로 이렇게 논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하였다.

 

2월 12일 경진

상이 표류한 중국 사람 손득홍(孫得洪)·유광현(劉光顯) 등을 접견하여 예단(禮單)을 내린 다음 술을 네 순배 행하고 파했다.

 

헌부가 논핵하기를,
"민람 및 사복 첨정 윤선도(尹善道)는 갑자기 4품(品)에 올랐으니 개정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장령 신민일(申敏一)이 인피하기를,
"이번의 이 전례(典禮)는 바로 막중한 거조입니다. 지금 듣건대 물의(物議)가 들끓어 대각(臺閣)에 사람이 없다고 말하니, 결코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체척(遞斥)하소서."
하고, 대사간 김광현(金光炫), 정언 심연(沈演), 지평 윤효영(尹孝永), 대사헌 박동선(朴東善), 집의 김남중(金南重) 등도 역시 이로써 인피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지평 조빈(趙贇)이 아뢰기를,
"어제 추숭을 논계한 일로써 동료 및 간원과 함께 모이고자 하였는데, 혹자는 말하기를 ‘마땅히 상신(相臣)들이 헌의한 것을 보아가면서 논의해도 늦지 않다.’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재상은 가하다고 말해도 간관은 불가하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직분이니, 일이 참으로 논할 만한 것이라면 논하면 되지 어찌 반드시 대신의 의논을 기다리겠는가?’ 하였으나 동료들은 오히려 전의 말을 고집하므로 신이 자신의 소견을 굳게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신민일이 인피하는 말을 보니 물의를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체척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옥당이 처치하기를,
"이번 이 추숭하는 일은 억지로 공의(公議)를 거스르고 경솔히 예경(禮經)을 버려가며 사은(私恩)을 펴고자 한 것으로 종통(宗統)을 간범하였으니 임금의 잘못된 거조가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전폐(殿陛)에 서서 시비를 다투는 자는 마땅히 일을 바로잡기에 급급하여 임금을 합당한 도리로 인도하여야 할텐데 오히려 늑장을 부리며 기다리자고 핑계하였으니, 간관의 직책이 어찌 진실로 그런 것이겠습니까. 모두 구차함을 면치 못하였고, 이미 소견이 있었는데도 굳게 지키지 못하였으니 역시 연약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아울러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양사는 별다른 잘못이 없으니 체직시키지 말라. 그 가운데 신민일은 물의를 가탁(假托)하여 소란스런 단서를 일으킨 죄가 있으니 체차하라."
하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양사는 별다른 잘못이 없는데 부교리 윤계(尹棨) 등은 위엄을 세우고자 하여 사리를 돌보지 않고 아울러 체차하기를 청하였으니, 일이 매우 놀랍다. 아울러 삭탈 관작하여 문외 출송하라."
하였는데, 이날 교리 윤계, 수찬 신계영(辛啓榮)이 직소(直所)에 있으면서 서로 의논하여 아울러 출사하기를 청하는 차자의 초(草)를 이미 완성해 놓았었는데, 수찬 이명웅(李命雄)이 밖으로부터 와 논의가 매우 준엄하여 굳이 체차를 청하였다가 드디어 견책을 입은 것이다.

 

정원이 아뢰기를,
"삼가 윤계 등을 삭출하라는 하교를 보았습니다. 윤계 등이 처치한 일은 실로 예기(銳氣)에서 나왔으니, 과격하다고 할 수는 있겠으나, 만약 위엄을 세우려 했다고 하여 죄를 주어 문외 출송한다면 그 본정이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비단 유신을 대우하는 도리가 너무 박할 뿐만 아니라 지나친 거조가 이보다 클 수 없습니다. 보고 듣는 사람마다 놀라지 않는 자가 없으니, 이것이 어찌 성덕의 일이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너희들은 일마다 틀어막으니 아주 그르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 의논하기를,
"추숭하는 전례(典禮)는 막중한 일인데, 성상께서 즉위한 이후부터 조정 신하들이 각기 소견을 소집하여 10년 동안 쟁집했으나 아직 정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 예는 이미 모방할 만한 고례(古例)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어찌 새로운 예(禮)를 창제(創制)하여 후일의 비난을 취하려 하십니까. 대저 중(中)을 얻어야 귀한 것이므로 지나치면 예가 아닙니다. 인심이 불안하게 여기는 것은 중을 얻는 바른 예가 아니어서인 듯하니 예 아닌 일을 경솔히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이 추숭하는 한 가지 일을 기화(奇貨)로 삼아 권세를 탐내는 자는 이로써 무리를 모으고, 이름을 좋아하는 자는 이로써 명예를 구하며, 누(累)가 있는 자는 이로써 공(功)을 세우고,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는 자는 이로써 녹(祿)을 구하니, 추숭하는 논의는 이익의 소굴이라 하겠다. 우상이 이런 무리들의 논의에 동요되어 인심이 불안한 것으로 청탁하니, 참으로 우습다. 이 무리들이 겉으로는 임금을 사랑한다고 일컬으나 안으로는 그들의 사(私)를 이루려 갖가지 계책으로 억누르면서 스스로 공론이라 말하니, 그 술책이 공교롭다. 그러나 작년의 일로 보건대, 대신을 따라 와서 아뢴 자는 모두 무식한 잡배였고 그 숫자 역시 적었으니 온 나라의 공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였다.

 

2월 13일 신사

정원이 아뢰기를,
"삼가 어제의 수의에 대한 비답을 보건대 참으로 매우 미안합니다. 심지어 ‘작년에 대신을 따라와 아뢴 자는 모두 무식한 잡배였다.’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성명께서는 서물(庶物) 가운데서 뛰어나시니 여러 신하의 혼우함을 살피시어 반드시 사람이 없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숭고한 자리는 겸억(謙抑)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며, 제왕(帝王)의 병통은 스스로 성인이라 여기는 것이 가장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탕(成湯) 같은 성으로도 아랫사람을 접하면서 공손히 함을 생각하였고, 문왕(文王) 같은 덕(德)으로도 조심하기를 더하였는데 이것이 천고의 아름다운 일로 백왕(百王)의 좋은 모범이 되었습니다. 후세의 임금들이 스스로를 넓게 여기고 남을 좁게 여긴 풍도는 경계하고 숭상할 것이 못됩니다. 더군다나 계사(啓辭)에 수참했던 사람이 비록 모두 예문(禮文)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닐지라도 많은 사람은 문무(文武)로 힘을 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친 사람인데 어찌 모두 무식한 잡배로 지목하여 여러 신하와 사람들마다 부끄럽게 하십니까?"
하니, 답하기를,
"그때 정청(庭請)한 일은 아주 구차스러운 듯했기 때문에 말한 것이니, 경들은 허물하지 말라."
하였다.

 

영의정 윤방(尹昉), 좌의정 이정귀(李廷龜)가 아뢰기를,
"이번의 전례에 대하여 조정에서 강구해 온 지가 벌써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만 뭇의논이 같지 않다는 것을 성명께서 이미 통찰하여 아셨을 것입니다. 지난날 하교하신 후 해조의 복계로 인하여 수의하라는 명을 내리시기에 신들의 생각에는 성명께서 공의를 널리 채납하시어 지당한 이치를 찾아 따르시려나보다 하고 여겼는데 뜻밖에 오늘 또 다시 빨리 추숭하라는 전교를 내리시니 신들은 머리를 모으고 경악하면서 실망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삼가 성상의 하교를 보건대 ‘성인이 인정을 따라 예를 정했다.’는 것으로 주의(主意)를 삼으셨으니, 이는 성명께서도 역시 추숭하는 전례가 근거할 만한 것이 없음을 아시고 다만 지극한 정에서 발로된 것이므로 스스로 그만 둘 수 없다는 것으로, 이것이 예(禮)에 해롭지 않다고 말한 것입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성인이 예를 제정할 때 비록 인정을 바탕으로 하였으나 융쇄(隆殺)와 후박(厚薄)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의리로 결단하였으니, 의리에 미안함이 있으면 정을 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란 정을 절제(節制)하여 의에 합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추숭하는 예가 옛날에는 없었고 무왕(武王)·주공(周公)이 명을 받아 창업(創業)하고서 왕업을 세우게 된 근본을 추원(推原)하여 의리로 수립한 것입니다. 그후 평왕(平王)의 손자 환왕(桓王)이 적손(嫡孫)으로 조통(祖統)을 계승했으나 감히 주공(周公)의 예를 원용(援用)해 그 소생을 높이지 못했으니, 대개 계체(繼體)하는 의리는 창업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인정으로 하는 것이라면 환왕의 존친(尊親)하는 정이 어찌 무왕·주공과 달라겠습니까.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와 진(晉)나라 원제(元帝)는 모두 종사가 망한 후 명을 받아 중흥(中興)하였으니 실로 창업과 다름이 없었으나 오히려 감히 그 사친(私親)을 높이지 못한 것은 역시 대통(大統)을 이어받은 것이 처음으로 명을 받은 임금으로 위에 압존(壓尊)될 자가 없는 경우와는 의리가 같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직 성상께서는 난리를 평정하여 정상으로 회복시킨 성대한 공렬(功烈)이 한나라 광무제와 진나라 원제보다 못하지 않으시며 손자가 조부를 계승한 뜻도 역시 주공·환왕과 대략 같습니다. 그런데 이에 세 임금이 행하지 않은 예를 오늘날 행하고자 하시면 친(親)을 친히 하기 위하여 존귀한 자를 높이는 경우를 해치는 것이 의(義)를 범하고 예(禮)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생각지 않으시니 신들이 감히 순종하지 않은 것은 대개 이 때문입니다. 정에서 발하여 예의에서 그친다는 것이 성인의 명훈(明訓)이니, 삼가 원하건대 대의를 깊이 생각하시어 빨리 추숭하라는 명을 정지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는 윤리를 어지럽히는 일이거나 예에 어긋난 거조가 아니니, 경들은 경악하지 말라."
하였다.

 

우의정 김상용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전후하여 성상의 하교를 받들고, 또 여러 신하들의 추숭이 예에 합당하다는 논의를 보았으나 생각을 바꾸고 의혹을 시원스레 풀어버리지 못하니, 이는 참으로 성품이 용렬한데다가 혼폐함을 제거하지 못하여 끝내 실제를 얻을 수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어제 수의를 인해 감히 인심이 불안해 한다는 뜻으로써 망령되이 어리석은 말씀을 드린 것은 실로 다른 사람의 논의에 동요된 것이 아닌데, 삼가 성비를 보고 나니 두려움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파직하여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은 사직하지 말고 안심하고 행공(行公)하라."
하였다.

 

대사간 김광현(金光炫), 정언 심연(沈演)이 아뢰기를,
"추숭하는 일이 지나친 예라는 것을 조정에 있는 신하로서 어느 누가 말하지 않았겠습니까만 신들이 즉시 논열하지 않은 것이 비록 기다리자는 의도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일을 당하여 감히 말씀드려야 한다는 규례로 헤아려 보면 실로 지연시킨 잘못을 면할 수 없으니 물의를 받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실정에 따라 체직을 청하는 것도 역시 공론인데 어떤 사람은 그대로 있고 어떤 사람은 체직되니 매우 미안합니다. 그런데 옥당이 이 일 때문에 견책을 입었으니 더욱 보고 듣기에 놀랍습니다. 이는 모두 신들이 당초에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성명으로 하여금 전에 없던 잘못을 저지르게 했으니, 신들은 죄가 이에 이르러 도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공의가 허락하지 않아 이미 아뢰어 체직했으니 결코 그대로 버티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대사헌 박동선(朴東善), 집의 김남중(金南重), 지평 조빈(趙贇)·윤효영(尹孝永) 역시 이 일 때문에 인피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옥당이 모두 출사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헌 박동선, 집의 김남중은 패소(牌召)하였으나 나오지 않았다. 대사간 김광현(金光炫), 지평 조빈(趙贇)·윤효영(尹孝永), 정언 심연이 또 인피하니 체직하였다.

 

정홍명(鄭弘溟)을 부응교로, 나만갑(羅萬甲)을 부교리로, 고부천(高傅川)·강대수(姜大遂)를 장령으로, 신천익(愼天翊)을 헌납으로 삼았다.

 

2월 14일 임오

옥당이 차자를 올리기를,
"우상(右相)의 수의에 대한 비답이 이미 아주 미안하고 세 신하가 죄를 입은 것은 더욱 보고 듣기에 놀라운데 한 절(節)이 한 절보다 더 엄하며 오늘이 어제보다 더 과하여 전전(輾轉)하며 서로 인해 상하가 막히고 인심이 의혹되고 기상이 아름답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의 득실은 본디 논할 겨를이 없고 나라일이 궤열(潰裂)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빨리 윤계(尹棨) 등을 삭출하라는 명을 정지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오직 임금만이 복(福)을 주고 위엄을 갖는 것인데 윤계 등이 다시 이행원(李行遠)의 자취를 따라 감히 한 시대를 위협할 계책을 했으니, 그 죄가 적지 않다."
하였다.

 

영의정 윤방, 좌의정 이정귀, 우의정 김상용이 아뢰기를,
"왕자(王者)는 윤리를 펴고 표준을 세우며 하늘을 본받아 교화(敎化)를 베풀어 위로는 중한 종묘 사직을 받들고 아래로는 많은 백성을 다스립니다. 그 일이 본디 한 단서가 아니어서 그것으로써 귀신을 섬기고 사람을 다스리는 근본을 구하는 것이 예보다 먼저 할 것이 없습니다. 예란 것은 정리와 문식이 서로 필요하고 높이고 낮추는 데 절도가 있어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면 모두 실례(失禮)가 되므로 정밀하게 강구하지 않을 수 없으며 자세히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대통(大統)을 이으신 후 조정에서 바로 예를 의논하는 일이 있게 되었는데 노사(老師)·숙유(宿儒)가 각기 소견을 고집하여 고금(古今)을 인증(引證)하여 논의가 분분하였으나 끝내 적당히 분명하게 인증하여 성상의 뜻에 맞고 인심을 복종시킬 만한 것이 없이 10년이 되었는데도 끝내 귀일된 논의가 없으니 성상께서 이에 개연(慨然)해 하실 것은 당연합니다. 선왕이 예를 제정한 것은 사람의 마음에 근본했는데 때에는 고금의 다름이 있으나 마음은 피차의 구별이 없으니, 바로 사람 마음에 편안하고 천리(天理)가 있는 바를 구하면 비록 꼭맞지는 않더라도 크게 틀리지는 않습니다. 삼가 요즈음의 인심을 보건대 고(考)라 칭한 신주(神主)를 내려 여염집에 있게 한 것은 마음이 편치 못한 점이 많으나 추숭하는 큰 예에 이르러서는 한때의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니, 이는 반드시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대저 전하께서는 직손(直孫)으로서 조통(祖統)을 계승하셨고 또 반정(反正)한 일이 계셨으니 형제의 아들이 나라를 이어받은 경우와 비교해서는 안 되는 것이 확실합니다. 대원군(大院君)께서 왕자(王子)로서 성손(聖孫)을 낳으셨으나 선군(先君)께 명을 받은 일이 없었으니 경솔히 추숭을 의논할 수 없음도 역시 분명합니다. 이미 형제의 아들과 차이가 있어 고(考)의 별묘라 칭하여 제후의 예로 제사하는 것은 정리상 그만 둘 수 없으나 이미 명(命)을 받은 일이 없으니 소목(昭穆)의 위(位)를 바로하고 열성(列聖)과 나란히 하는 것은 예절상 감히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효사(孝思)로 온 나라 여러 사람의 뜻을 채납하시어 지나치거나 부족한 잘못이 없도록 하는 것이 바로 신들이 전하께 바라는 바입니다. 신들이 삼가 전하의 마음을 헤아려 보건대 ‘오늘날의 예가 이미 분명한 인증이 없고, 높이고 낮추고 후하게 하고 박하게 하는 절도가 모두 의기(義起)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일이 전례(前例)가 없다고 핑계하여 나의 성효(誠孝)를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신 것입니다. 이는 진실로 그럴 듯한 일입니다. 그러나 종통(宗統)은 지극히 중하고 종묘(宗廟)는 지극히 엄한데 어떻게 의기한 예를 지극히 엄하고 지극히 중한 자리에 시행하겠습니까. 지금 예를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예문(禮文)을 안다고 할 수 없고 또한 모두 강쇄(降殺)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종묘에 들이는 한 절목에 이르러서는 떼를 지어 일어나 다투고 있습니다. 인심이 이러하니, 억지로 거스르며 행하지 못할 듯싶습니다.
신들이 어제 올린 계사가 말이 분명치 못해 ‘경악하지 말라.’는 전교가 있게 하였으니 매우 황공합니다. 그러나 신들은 임금 사랑하는 구구한 마음을 스스로 그만둘 수가 없어 감히 이렇게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호부 낭중(戶部郞中) 송헌(宋獻)은 중국 사람인데도 오히려 예를 논함이 이와 같은데 경들은 편안함을 구한다는 기롱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사로움을 영위(營爲)한다는 논의를 따르니 나는 절통하게 여긴다. 또 계사 가운데 여러 사람의 의논이 불가한다고 한 것은 과연 그 까닭이 있으니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저 김류(金瑬)·홍서봉(洪瑞鳳)의 무리는 사적인 감정을 갚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 공격하는데 이는 불가한 것이다. 이현(李𥙆)·김기종(金起宗)의 무리는 자신의 허물을 씻고자 하여 공 세우기를 담당하니 이도 불가한 것이며, 조경(趙絅)·장유(張維)의 무리는 허명(虛名)을 얻고자 하여 분주히 배척하니, 이도 불가한 것이다.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무뢰한 무리들이 작록(爵祿)을 기대하며 함부로 헐뜯고 배척하니 이도 불가한 것이다. 불가한 것이 이와 같으니 많다고 할 수 있다. 모두 공심(公心)이 아니니 경들은 다시 잘 생각해보고 시끄럽게 하지 말라."
하였다.

 

2월 15일 계미

영의정 윤방, 우의정 김상용이 또 아뢰기를,
"신들이 비록 무상하지만 어찌 감히 남의 의논을 따라 이처럼 입이 아프도록 청하겠습니까? 시종 편안한 마음으로 조정 의논을 따르시어 빨리 추숭하는 명을 정지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 뜻은 이미 유시하였다. 굳이 고집하지 말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상께서 빨리 추숭을 거행하라 명하셨으나 대신이 이 때문에 논계하고, 대간이 이 때문에 인피하였으니 거행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간이 인피한 것은 모두 본조(本曹)에서 말미암은 것이니, 아주 부당하다."
하였다.

 

강석기(姜碩期)를 대사헌으로, 여이징(呂爾徵)을 대사간으로, 지덕해(池德海)·안시현(安時賢)을 지평으로, 임간(林堜)을 정언으로, 정홍명(鄭弘溟)을 집의로 삼았다.

 

2월 16일 갑신

비변사가 아뢰기를,
"이귀(李貴)의 차자 내용이 대체적인 뜻은 좋으나 말이 번잡하여 그 요령을 쉽게 파악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이귀와 면대(面對)해서 모두 진술하게 하여 들어보니 전부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들이므로 실로 채택해 쓰기에 합당합니다. 그러나 다만 서변(西邊)의 일은 직접 체신이 있기 때문에 주변 사람이 경솔하게 의논할 바가 아니니, 체신으로 하여금 차자 가운데의 사의(事意)를 참작하여 장점을 취해 품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7일 을유

집의 정홍명(鄭弘溟)이 상소하기를,
"신이 지난번 저보(邸報)를 접해 보니, 전후의 성교가 한결같이 엄준하고 말하는 즈음에 말을 가리지 않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지난해의 계사에 참여한 사람을 무식한 잡배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당을 모아 감정을 푼다.’ 하고 혹은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우려 한다.’ 하기도 하고, 혹은 ‘허명을 얻고자 한다.’ 하기도 하고, 심하게는 ‘부끄러워할 줄을 모른다. 무뢰하다. 작록을 바란다.’라고 지목하시니 조정에 있는 모든 선비는 전부 비인(匪人)과 불충(不忠)이 되고 유독 추숭하는 논의를 주장한 자만 충신(忠臣)과 군자(君子)가 되었습니다. 왕자(王者)의 말 한마디에 흥망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사험삼아 이 말이 분노에 찬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 화평한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 생각해 보소서. 대성인(大聖人)의 마음은 본디 한량없이 넓어서 일에는 시비가 있으나 한결같이 의(義)를 따를 뿐이고 말에도 역순(逆順)이 있지만 도리대로 할 뿐입니다. 진실로 사사로운 편견을 가지고 흡수하는 도량을 매몰시킨다면 취하고 버리는 즈음에 잘못되지 않겠습니까. 무릇 작은 일을 하면서도 반드시 여러 사람의 묘책을 물은 연후에야 이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인데 하물며 이처럼 막중한 예를 가지고 어찌 눈앞에 보이는 쾌함만 취하고 후일 하게 될 후회를 생각지 않으려 하십니까. 대저 이 일은 한(漢)·당(唐) 이전에는 행한 자가 없었고, 한·당 이후의 임금들이 이따금 행한 자가 있었는데, 고금에 이야기하는 자들이 예를 알거나 예를 모르거나 모두 지나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조정 신하들이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성대한 한·당 이상의 성대한 일에 나란하게 하고 후세의 지나친 거조를 뒤따르지 말게 하려는 것은 실로 스스로 임금을 덕(德)으로써 사람하고 요·순의 도리가 아니면 진달하지 않는다는 의의를 갖고자 해서입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 한 장의 글과 한 마디 말로 물리쳐 거절하셔 조금도 너그럽게 하지 않으시니, 평일의 의비(倚毗)하던 성의와 대우하던 권애(眷愛)가 이에 이르러 말끔히 없어졌습니다. 그 밖의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이 어찌 모두 다 부끄러워할 줄을 모른 자이거나 무뢰한 자로 한갓 녹(祿) 구할 마음만 두는 자들이기에 전하께서 하찮게 여기시고 함부로 버리시어 충성하고자 하는 무리들로 하여금 임금을 대하기에 부끄럽게 하고 벼슬아치에게도 부끄럽게 하십니까. 이러한 것은 세상을 다스리는 기상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자세히 알았다."
하였다.

 

2월 18일 병술

헌부가 아뢰기를,
"윤계(尹棨) 등에게 설사 과격한 일이 있더라도 직책이 유신이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너그러이 용서하셔야 합니다. 더군다나 그때 양사의 형적이 기다리는 것같아 잘못이 없지 않았으니, 옥당이 체직을 청한 것이 본디 의당합니다. 신하로서 위엄을 부리는 것이 어떠한 죄이기에 갑자기 실정 이외의 견책을 가하십니까? 대성인(大聖人)께서 내실 절도에 맞는 노여움이 아닌 듯합니다. 세 신하가 벌을 받는 것이야 걱정할 것은 없겠지만 기휘(忌諱)하는 문(門)이 이를 따라 열리게 되면 성덕(聖德)에 손상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청컨대 삭출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양사가 합계하기를,
"대저 어버이를 친히 하고 조(祖)를 높이는 것은 사람 도리의 큰 것인데, 어버이를 친함은 인(仁)을 주(主)로 하고, 조를 높임은 의(義)를 주로 하기 때문에 두 가지를 병행해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으므로 번갈아가며 경중을 적용합니다. 인친(仁親)으로부터 등분에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어버이를 친히 하는 일이 실로 조를 높이는 것보다 먼저해야 하고, 종묘(宗廟) 안에서는 위가 아래를 휘(諱)하지 않으니, 조를 높임이 어버이를 친히 하는 것보다 중합니다. 한쪽이 경하면 한쪽이 중하여 각기 베풀 것이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남의 후사가 된 경우와 다릅니다. 사당에 제사를 모시는 예는 단지 조(祖)에게만 미치는 것이므로 어버이를 친히 하는 인(仁)이 부족한 듯하여 전하께서 편히 여기지 못하시는 것입니다마는 종묘 안은 열성(列聖)께서 자리한 곳인데 대원군이 명을 받아 백성을 다스린 일이 없는데도 하루 아침에 소목(昭穆)의 차례에 오르면 역시 조를 높이는 뜻에 혐의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조정 신하들이 성상의 마음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왕자(王者)가 마땅히 본받아야 할 일은 삼대(三代)019)  의 성대한 제도보다 나은 것이 없고, 현재 임금이 따라야 할 일은 실로 온 나라 사람의 마음에 있습니다. 옛날 삼대의 제도에서 구해 보아도 저와 같고, 지금 나라 사람들의 마음에서 구해 보아도 이러한데 전하께서 이처럼 고집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지극한 정을 애써 억제하시고 속히 성명을 거두소서."
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영의정 윤방, 좌의정 이정구, 우의정 김상용이 아뢰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성상의 효성은 타고나셨으므로 추현(追顯)하는 정이 오랠수록 더욱 돈독하십니다. ‘일각도 안심할 수 없다.’라는 하교까지 내리시니 매번 받들어 읽을 때마다 감격의 눈물이 흐릅니다. 신들이 비록 매우 어리석지만 역시 지각이 있는데 어찌 순종하여 성상의 마음을 위로할 줄을 모르겠습니까. 억지로 고집하면 더욱 성상의 노여움을 촉발시키는데도 오히려 그치지 않는 것은 이것이 막중한 전례(典禮)이고 막대한 거조여서 강정할 즈음에 만약 중정(中正)함을 잃어 후세의 비난을 받으면 임금을 섬기는 예(禮)를 다하지 못할까 염려해 이처럼 진달해 성상의 마음을 돌리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삼가 전후에 걸쳐 비답하신 전지를 보건대, 매우 준엄하여 실로 성인의 중화(中和)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사(私)를 영위하고 유감을 갚고자 하여 공격하기에 분주하다.’라는 등의 하교에 이르러서는 거의 신하들로서 차마 들은 바가 아닙니다. 인심이 저상(沮喪)되고 조야(朝野)가 두려워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국가의 복이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유념하시고 반성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억지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옥당이 차자를 올려 청하기를,
"빨리 대신 및 양사의 계사를 따르소서."
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행 도승지 김상헌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삼가 예조의 계사를 보건대, 종묘(宗廟) 제1실(第一室) 계단이 까닭없이 무너져 소리가 신어(神御)를 놀라게 하였는데 무너진 곳의 길이가 4칸 남짓이라고 하니 신은 그 말을 듣고 놀라워 몹시 걱정하였습니다. 태묘(太廟)는 조종(祖宗)의 신령이 모여 있는 곳으로 임금이 잘못한 바가 있으면 반드시 경계하여 알리어 수성(修省)하고 개과(改過)할 단서를 보이는 것입니다. 옛날 꿩이 날아와 솥 위에 오르니 은 고종(殷高宗)이 덕(德)을 쌓았고020)   침랑(寢郞)이 꿈을 아뢰자 한 무제(漢武帝)가 허물을 뉘우친 일021)  이 있습니다. 신(神)과 사람은 이치상 어느 때를 막론하고 통하게 되어 있으니 그 정령한 뜻은 순순(諄諄)하게 명할 뿐만이 아닙니다. 대체로 계단은 등급이며, 등급은 명분(名分)과 같습니다. 명분이 무너졌다고 한다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하고 신하가 임금을 범하는 상(象)인 것입니다. 신도(神道)가 까마득하여 비록 무슨 일에 대한 응험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번 일은 실로 명백합니다. 왜냐하면 태묘(太廟) 9실(室) 가운데 성종(成宗)이 제5실에 계시는데 제1실에서부터 숫자에 따라 4칸을 넘어 제5실에 이르고, 제9실에서는 역수(逆數)로 4칸을 넘어 제5실에 이르는데, 종묘의 계단이 무너진 숫자가 마침 실의 차례와 서로 부합되는 것이 매우 의심스럽고, 매우 두렵습니다.
전하께서 조정의 의논을 물리치시고 추숭하는 일에 마음을 굳혀 기어이 전례를 거행하시고자 하시니,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대원군의 신주를 올려 부(祔)하고 성종 대왕의 구묘(舊廟)를 체천해 철거해야 합니다. 대원군은 전하의 친(親)이며, 성종의 신하이며 자손입니다. 올려서는 부당한 신하와 자손을 올리는 일과 조천(祧遷)해서는 부당한 임금과 할아버지를 철훼하는 일이야말로 등급을 폐기하고 명분을 무너뜨린 것이니, 묘사(廟社)의 변치고 어느 것이 이것보다 더 크겠습니까. 어리석은 신은 조종의 신령이 이에서 반드시 크게 변동하고 크게 경척(警惕)하여 우리 전하의 회오(悔悟)하는 마음을 경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전하께서 만약 변이 없는 것처럼 보고 무상(無常)한 것으로 들으시어 은 고종이 덕 닦은 것과 한 무제가 허물 고친 것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한갓 우연히 그렇게 된 것으로 미루시면 신은 조종의 오르내리시는 영혼이 크게 편치 못하실까 염려됩니다. 대저 귀신의 일을 만약 무지몽매하다고 하신다면 명위(名位)를 반드시 숭봉하기에 힘쓸 것이 없거니와 만약 신명스러워 어긋남이 없다고 하신다면 철거해 체천하는 것을 예(禮)를 넘어 경솔히 의논해서는 안 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만일 인정에 편함을 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신도(神道)에 편안하게 함을 구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조손(祖孫)과 부자(父子)는 본디 한 기운이니 다만 마땅히 어버이를 친히 하는 마음으로써 나의 친(親)이 조(祖)를 높이는 뜻을 본받는다면 마음속에 자연히 깨닫게 되어 사람들이 번거롭게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재변을 만나 두려운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시고 반성하소서. 그리고 빨리 회오(悔悟)하시는 뜻을 내려 지나친 예의 허물이 없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글을 아뢰었으나 답하지 않았다.

 

2월 19일 정해

교리 조위한(趙緯韓)이 상소하여 체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위한은 반정하던 처음에 추숭하는 논의를 내어 여러 차례 시의(時議)에 배척을 받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양사와 옥당에서 교대로 글을 올려 쟁집하자 조위한이 바야흐로 직려(直廬)에 있다가 스스로 편안치 못하여 상소를 올려 체직을 청한 것이다. 답하기를,
"너의 소견이 분명하고 올바르니 가상하다. 10년 동안 지켜오던 것을 오늘에 와서 동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직하지 말고 안심하고 직(直)에 있으라."
하였다.

 

영의정 윤방, 좌의정 이정구, 우의정 김상용이 또 아뢰기를,
"오늘날의 전례(典禮)에 대해 조정 신하들이 논변을 이미 다하였으니, 의리의 합당 여부와 인심이 불안해 하는 것을 명성(明聖)하신 전하께서 잘 살피셨을텐데 구태여 여러 사람의 뜻을 거스르며 빨리 거행하라 하시니 어찌 어버이를 현창(顯彰)하는 지극한 정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고 고례(古禮)와 남들의 말을 모두 고려할 것이 없다고 여기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신들을 보잘것없다고 여기시지 않고 대신(大臣)의 반열에 있게 하셨으니, 나라에 큰일이 있거나 상께 잘못된 거조가 있으면 바로잡아 보필하고 거스르는 것이 바로 그 직분인 것입니다. 이에 한 나라의 공공연한 논의를 가지고 정성을 다하고 죽음을 무릅쓰며 여러 날 동안 진달하였으나 천청(天聽)이 막막하여 한결같이 굳게 거절하십니다. 이는 모두 신들의 성의가 부족하여 말이 미덥지 못한 소치여서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 용납할 바가 없을 듯합니다.
신들이 비록 매우 무상하지만 역시 부모가 있습니다. 어버이를 현창하는 정에 있어서 어찌 존비가 다르다 하여 차이가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이 일은 예(禮)에 분명한 근거가 없고 일이 종통(宗統)에 방해되니 한때의 사정(私情)으로 경솔히 단정해서는 안 될 듯싶습니다. 만약 이 일이 과연 예에 합당하여 조금의 의심도 없다면 신들이 어찌 감히 입이 닳도록 힘껏 다투며 즉시 순순히 따르지 않아 우리 성상의 봉선하는 지극한 뜻을 고립시키겠습니까. 이는 단지 성조(聖朝)의 전례가 한결같이 중정(中正)한 데서 나와 조금의 잘못도 없게 해 우리 임금을 허물이 없는 처지로 들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종묘의 예는 소목이 중한데 단지 존호만 올리고 소목을 정하지 않으면 매우 미안하다. 그러나 내가 경들이 굳게 고집하기 때문에 지금은 우선 종묘로 들이는 예는 행하지 않을 것이니, 경들 역시 내 뜻을 본받아 빨리 정지하여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이 치사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원익이 전후로 10여 차례 상소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상소하여 아뢰기를,
"선조(宣祖) 때 왜적이 팔도에 가득했는데도 선조께서는 늙은 신하를 너그럽게 돌보아 치사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선조(先祖) 때에는 왜적이 비록 바닷가에 있었으나 나라의 형세가 튼튼하여 오늘날과 크게 서로 같지 않았다. 경은 다시 살피고 헤아려 모름지기 고사하지 말라."
하였다.

 

2월 20일 무자

태백(太白)이 나타났다.

 

양사가 합계하기를,
"대저 추숭(追崇)은 고례(古禮)가 아닌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송(宋)나라에서 희조(僖祖)를 추존하였는데 주자(朱子)가 성인을 탄생시킨 그의 공덕을 일컬었으니 지금의 일과 거의 같다.’라고 하는데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자의 말은 단지 처음으로 봉(封)한 일을 논의한 것이지 계체(繼體)한 임금을 언급한 것이 아닙니다. 선유(先儒)가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은 뜻을 추측하여 국가의 막대한 예를 정하려면 참으로 학문이 주자만큼 탁월한 자가 아니고서 어떻게 갑자기 이에 대해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비단 신들의 말일 뿐만 아니라 온 조정의 논의이며 실로 삼대의 제도입니다. 빨리 추숭하라는 명을 정지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신들이 이미 정한 일을 이렇게까지 굳이 번거롭게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다시는 시끄럽게 하지 말라."
하였다.

 

삼공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성상의 비답을 받들건대 단지 존호만 올리고 입묘는 하지 않겠다고 하교하셨으니 신들은 성상께서 조정 신하의 청에 굽혀 따르시어 이렇게 번복해 고치심을 흠양합니다. 그러나 신들은 성상의 비답 가운데 더욱 미안한 것이 있다고 여깁니다. 전하께서 이미 입묘를 허락하지 않으셨으나 ‘지금은 우선[今姑]’이란 두 글자에 또 후일을 기다리는 뜻이 있어 이것이 여러 사람들의 뜻에 서운한 것입니다. 성상의 마음에 참으로 후일 입묘할 터전을 갖고 계신다면 일찍이 신들을 물리쳐 나라 사람들에게 사죄(謝罪)하는 것이 옳으며, 그렇지 않고 이미 신들의 청을 윤허하셨다면 ‘우선[姑]’이란 한 글자를 내려 보고 듣기에 의혹을 일으키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의 일은 이미 남의 후사가 된 것과는 차이가 있으니, 별묘에 모시고 융성하게 향사하는 것은 정리상 그만둘 수 없으나, 이미 명을 받아 백성들을 다스린 일이 없는데 열성과 같은 자리에 참여해 같은 묘(廟) 가운데에서 소목의 자리를 하나 차지하는 것은 예절상 할 수가 없습니다. 어찌 인심만 불안해 할 뿐이겠습니까. 또한 성상께서 조(祖)를 높이는 뜻에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더욱 성념(省念)하시어 분명한 뜻을 쾌히 내려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자세히 알았다. 어제의 비답 가운데 ‘지금은 우선[今姑]’이란 두 글자는 말을 만드는 사이에 관계없이 한 말이니, 경들은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무릇 옥당에서 차자를 올려 논핵할 때 만약 이견(異見)이 있으면 ‘병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일컫는 것이 바로 규례입니다마는 진소(陳疏)하여 스스로 자랑하며 이동(異同)을 나타내는 것은 실로 영합하는 것입니다. 교리 조위한(趙緯韓)은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조위한은 불확실한 논의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의 견해를 솔직히 진달했으니, 이는 실로 드문 일이다. 영합했다는 말은 아주 부당하니, 다시는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주강에 《서전(書傳)》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왕(康王) 때에 비로소 동주(東周)를 필공(畢公)에게 봉해 주었으니, 그 전에는 누가 보좌하여 다스리는 직임을 맡고 있었는가?"
하니, 지경연 김시양(金時讓)이 아뢰기를,
"그 전에는 군진(君陳)이 이 직임을 받았습니다."
하고, 시독관(侍讀官) 나만갑(羅萬甲)은 아뢰기를,
"필공이 후덕(厚德)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직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2월 21일 기축

대사헌 강석기(姜碩期)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추숭은 인심을 감복시키는 일이 아닙니다."
하고, 또 체직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즉시 윤허하였다.

 

2월 22일 경인

이조 판서 이귀(李貴)가 아뢰기를,
"조위한은 젊어서부터 책을 널리 보고 글을 잘해 당세에 이름이 알려졌는데, 이번 예를 의논할 때 홀로 자기 견해를 고수하여 시종 변하지 않았습니다. 지난번 옥당에서 차자를 진달하던 날은 바야흐로 직소(直所)에 있으면서 구차스레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직하는 가운데 대략 자기의 뜻을 진달했으나 오히려 시의(時議)를 두려워해 감히 명백하게 예를 논하지 못했으니, 비록 신중한 뜻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소신(小臣)은 흔쾌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지평 안시현(安時賢)은 아첨하고 방색(防塞)하여 유신을 핍박해 논핵하기를 마치 서관(庶官)에게 하듯 하였습니다. 오늘 성상께서 특별히 너그러이 장려하는 하교를 내리신다면 내일 대간이 영합했다는 율(律)로 논할 것이니, 이는 모두 조정의 기강이 서지 않아서이고 불확실한 논의의 영향력이 도리어 임금보다 중하기 때문입니다. 조위한은 경악(經幄)의 유신인데 이미 영합한다는 배척을 받았으니, 신이 감히 그냥 그대로 있을 수 없어서 황공하게 대죄합니다."
하니, 대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지평 안시현이 아뢰기를,
"조위한이 차자를 올려 논핵할 때에 병이라 일컫고 참여하지 않았던 것은 진실로 마땅합니다. 그런데 진소(陳疏)까지 하여 스스로 뽑내고 영합하려 했던 경우는 일의 가부를 논하지 않더라도 그 마음이 나쁘므로 신이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논계했던 것입니다. 어찌 감히 조정의 의논을 위협할 뜻이 있었겠습니까. 이미 중신(重臣)의 배척을 받았으니, 먼저 신의 죄를 바로잡아 불충(不忠)한 신하를 경계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대사간 여이징(呂爾徵)이 처치하여 체차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사론(士論)이 안시현을 체차하는 것을 부당하게 여겼는데 여이징이 추숭하는 뜻에 부회(附會)하여 합계(合啓)를 정지하고자 해 체차를 청했다 하여 자못 승복하지 않았다.

 

오백령(吳百齡)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주강에 《서전(書傳)》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지경연 이귀가 아뢰기를,
"추숭하는 예에 대하여 논의가 분분한데 안시현(安時賢) 같은 무리가 어찌 예를 알겠습니까. 김장생(金長生)이 처음에 문의(文義)를 모르고 잘못 ‘손자로써 조(祖)를 계승한다.’ 하였고, 장유(張維) 역시 이 예를 이해하지 못하고 매양 틀린 예를 인용했으니, 심히 가소롭습니다. 박정(朴炡)은 이 예의 합의점을 알면서도 역시 불확실한 논의가 무서워서 감히 자기의 뜻을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신이 정계했는데도 삼사는 말하기를 ‘이와 같이 큰 의논을 어찌 갑자기 정지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한두 번 더 진계해야 한다.’라고 하니, 이는 임금을 바른 도리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권신이 나라일을 담당하면 신은 오로지 권신에게만 붙고 전하가 계심을 모를까 염려됩니다.
이원익(李元翼)이 처음에 예를 몰라 ‘이 예를 행할 수가 없다.’라고 말하자 사람들이 모두 원로(元老)의 견해도 오히려 이와 같다고 여겨 드디어 온 조정이 따르게 되었으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조위한(趙緯韓)은 처음에 예를 의논하는 차자를 올리려다 불확실한 의논에 겁을 먹고 올리지 못하다가, 지금 소견을 변치 않고 마침내 그 차자를 진달한 것입니다. 안시현이 일을 모르는 아동배(兒童輩)로서 이에 감히 배격하니 매우 놀랍습니다."
하였다. 부제학 박정이 아뢰기를,
"이귀가 신의 이름을 들어 배척하니, 참으로 매우 황공합니다. 지금 의논한 예(禮)는 비례(非禮) 가운데서는 대과(大過)에 이르지는 않을 듯하고, 성상께서 지극한 정성으로 행하고자 하시니, 이는 바로 허물을 보고 인(仁)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하가 임금을 섬기면서는 그 임금을 요·순처럼 만들고자 힘써야지 어찌 허물[過]이란 글자를 임금에게 귀결시키려 하겠습니까."
하니, 이귀가 아뢰기를,
"박정의 말이 매우 명확하지 못합니다. ‘허물을 보고’라는 말은 어디에 근거한 말입니까. 참으로 놀랍습니다. 반정(反正)할 때 김상헌은 바야흐로 상중(喪中)에 있었는데 의거(義擧)의 옳고 그름을 물었더니, 김상헌이 말하기를 ‘이것이 대중의 마음이어서 이렇게 크게 정해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유독 예를 논함에는 의혹을 돌리지 못하니, 신은 매우 애석하게 여깁니다. 또 김상헌이 종묘 계단 돌이 무너진 것을 성종(成宗)을 조천(祧遷)하는 응험이라고 했으니 요괴하다 하겠습니다. 지금은 큰 예가 곧 완료되려 하는데 신은 특히 ‘허물을 보고’라는 말에 분개하여 이렇게 진달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귀가 또 아뢰기를,
"정사(政事)를 할 때 승전책(承傳冊)을 보건대 제직(除職)하라는 전교가 전후로 매우 많아 신이 하나하나 의망하고자 하였으나 모두 우매하여 더 나은 세가(世家)의 자제를 가려 쓰는 것만 못할 듯하여 그만두었습니다. 음관(蔭官)은 부지런하고 민첩하여 쓸 만한 사람이 많이 있기 때문에 수령은 음관이 많고 무변(武弁)은 아주 적습니다. 신은 교대로 차출하여 국가의 은혜를 고루 받도록 했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바로 내 뜻에 맞는다."
하였다. 김신국(金藎國)이 아뢰기를,
"양전(量田)하는 법을 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전라도로 말하면 평시에는 50만 결(結)이던 것이 지금은 10만 결로 되었으니, 어찌 이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균전(均田)은 국용(國用)을 위해서가 아니라 민력(民力)을 고르게 하고자 해서이니, 만약 선처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도리어 해를 받게 될 것이므로 경솔히 의논해서는 안 될 듯싶다."
하였다.

 

2월 23일 신묘

부제학 박정이 탑전에서 이귀의 지척을 받은 것 때문에 면직을 빌었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헌        오백령(吳百齡)이 상소하기를,
"성상께서 대신의 헌의(獻議)를 생각하지 않고 온 나라의 공론을 돌보지 않은 채 추숭하는 예를 거행하고자 하시니, 전하를 위해 애석하게 여깁니다. 선유들이 말하기를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이나 해서는 안 되는데 하는 것은 모두 효(孝)가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제 이 존숭하는 예가 어찌 할 수 없는 것에만 그치겠습니까. 전일 대신의 계사에 답하시기를 ‘단지 존호만 올리고 지금은 우선 입묘(入廟)는 하지 않겠다.’라고 하교하셨는데 ‘우선[姑]’이란 말에는 기다리겠다는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전하께서 오늘날 대신과 삼사(三司)의 청을 따르고자 하면 사사로운 정을 막을 수 없고, 따르지 않으면 공론을 거역하기가 어렵게 되자 이에 이렇게 비답하여 우선은 여러 사람의 의논을 늦추어 후일 다시 의논할 터전을 삼고 계시니 대성인(大聖人)의 광명 정대한 거조가 아닌 듯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여러 사람의 의논을 널리 채납하시어 천의를 쾌히 돌려 후세의 비난을 면하소서.
또 윤계(尹棨) 등은 처치한 것이 과격했기 때문에 갑자기 위엄을 세우려 한다는 하교를 내려 마침내 삭출하는 벌을 내리셨으니, 성명께서 유신을 대우함이 너무 박하지 않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예(禮)로 부리는 아름다움을 다하기에 힘쓰시어 여러 신하들이 염치를 아는 풍조를 배양하소서.
인하여 생각건대, 신은 늙고 혼미하여 일을 당하면 심란합니다. 이처럼 예론(禮論)이 완료되지 않은 날에 감히 대헌(臺憲)의 장(長)으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면하여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의 사면이 이에 이르렀으나 본직은 마땅히 힘써 부응하라."
하였다.

 

2월 24일 임진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에 대신과 삼사가 아울러 추숭하는 논의에 대해 정계하였으니, 도감 당상과 낭청을 해조로 하여금 속히 차출하게 하소서. 이는 세상에 드문 전례여서 거행할 절목을 근거할 바가 없으니, 조종조의 《실록(實錄)》을 상고해 내어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영의정 윤방(尹昉)을 추숭 도감 도제조(追崇都監都提調)로, 이귀(李貴)·김신국(金藎國)·최명길(崔鳴吉)·박동선(朴東善)을 제조로, 정홍명(鄭弘溟)·김남중(金南重) 등을 도청(都廳)으로, 이후양(李後陽)·정두경(鄭斗卿)·박이립(朴而立)·이명전(李明傳)·왕보신(王輔臣)·황윤후(黃胤後) 등을 낭청(郞廳)으로, 정광성(鄭廣成)을 도승지로, 최명길(崔鳴吉)을 예문관 제학으로, 여이징(呂爾徵)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여이징이 추숭하는 논의를 조금 늦추었기 때문에 이 제배가 있게 된 것이다.

 

2월 25일 계사

예조 판서 최명길이 예문관 제학을 해면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영의정 윤방이 노병(老病)으로 추숭 도감 도제조를 사직하니,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을 대신으로 삼았다.

 

2월 26일 갑오

지평 지덕해(池德海), 장령 고부천(高傅川)이 아뢰기를,
"정랑 윤선도(尹善道)는 사복 첨정(司僕僉正)으로 갑자기 올랐습니다. 개정하소서. 교리 조위한은 논의가 합치되지 않으면서부터 상소하여 사직했으니 자취가 영합한 데 관계됩니다. 파직하소서."
하였는데, 여러번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자, 고부천이 마침내 정계(停啓)하기를 발론하였다. 집의 권도(權濤)가 인피하기를,
"신이 이미 숙배(肅拜)하였는데, 동료가 서로 모이기를 기다리지 않고 갑자기 전계(前啓)를 정지하였으니 신이 연약한 소치입니다. 체척하소서."
하였다. 고부천과 지덕해가 모두 병이 심하고 혼미하다는 것으로 인피하니, 옥당이 권도는 출사하게 하고 고부천과 지덕해는 아울러 체차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지평 민광훈(閔光勳)이 시사(試射)에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써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상이 하교하기를,
"추숭한 후에는 응당 주청하는 일이 있어야 하는데, 해조에서 아직 계품하지 않으니 매우 태만하다. 예조 당상을 아울러 추고하라."
하였는데, 예조가 아뢰기를,
"추숭하는 일을 의논해 정한 후 조정에 세 종류의 의논이 있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전번 성교(聖敎) 가운데 단지 존호만 올리라는 명이 있었으니 우리 나라에서 호를 올리기만 하면 될 뿐 주청할 필요가 없다.’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중국에 품(稟)하지 않고 사사로이 존호를 더하면 참람한 데 관계되니, 주청사를 빨리 차출해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마땅히 성묘조(成廟朝)의 예에 의하여 먼저 왕호(王號)를 올리고 뒤따라 주청해야 한다.’ 하여, 신들이 그 취사할 것을 결정하지 못해 《실록(實錄)》을 상고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처치하고자 하였는데, 삼가 엄교를 받고 보니 몹시 황공합니다. 주청사는 해조로 하여금 속히 차출하게 하고, 문서는 승문원(承文院)으로 하여금 미리 찬정(撰定)하게 한 다음 한편으로는 존호를 올리고 한편으로는 주청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이제 대례(大禮)가 곧 이루어지려 하므로 도감을 설치할까 합니다. 존호를 올린 후 신주(神主)를 만들고 묘(廟)를 세우는 등의 일을 차례로 거행해야 합당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사람의 도리로는 친(親)을 높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이미 그것이 불가함을 알았다면 하루도 마음이 편안함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책보(冊寶)와 의장(儀仗)을 작성하는 데 반드시 몇 달이 걸릴 것이니 그전에 별도의 처치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우선은 상고(上古) 때 사제(士祭)를 제후(諸侯)의 예로 한 것에 의해 대원군(大院君)의 신주에 황(皇) 자를 가하고, 계운궁(啓運宮)의 신주는 현(顯) 자를 고쳐 능원군(綾原君)이 제사를 받든다는 칭호를 삭제하고 관원에게 명하여 제사를 지내되 먼저 그 사유를 고하며, 공해(公廨) 가운데서 넓은 곳을 가려 임시로 봉안할 장소를 삼고 내달부터 시향(時享)과 절전(節奠)에 모두 왕자(王子)의 예를 써 도감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비로소 욕례(縟禮)를 하면 마땅하게 될 듯합니다. 대신과 의논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이조 판서 이귀(李貴)가 장황하게 진계하여 대간을 논핵하였습니다. 이귀가 말을 가리지 않고 경솔하게 욕을 함부로 하는 것은 바로 그의 병통이니 본디 책망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총재(冢宰)022)  가 되어 크고 작은 주의(注擬)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오는데 또 대각의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제배해놓고 자기가 탄핵하여 언관을 불러 꾸짖는 등 오직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 있으니 해조의 권한이 너무 무거워져서 임금의 이목을 붙일 데가 없게 하는 일이 없겠습니까. 이귀를 되도록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귀가 드디어 이 일 때문에 면직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집의 권도(權濤)가 이귀의 차자 말 때문에 인피하였는데, 간원이 처치하여 출사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7일 을미

박동선(朴東善)을 대사헌으로, 이유달(李惟達)을 장령으로, 심연(沈演)·윤효영(尹孝永)을 지평으로 삼았다.

 

2월 28일 병신

우박이 내렸다.

 

2월 29일 정유

별묘(別廟)를 남별전(南別殿)에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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