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무진
간원이 아뢰기를,
"좌윤 강인(姜絪)은 늙고 병든 사람으로서 8, 9개월 동안에 집무를 겨우 한 번 보았으며, 또 직무에 충실치 못한다는 비난이 있으니, 파직하소서.
사대부의 행동은 염치는 아는 것이 중요한데, 동부승지 조위한(趙緯韓)은 지난번 교리로 있을 때 올린 사직 상소 중에서 ‘나이가 70이 가까웠는데 지위는 겨우 숙직을 해야 하는 낮은 자리이다.’는 등의 말을 하였습니다. 은택을 구하는 뜻이 있는 듯하니, 파직하소서.
음관(蔭官)으로 대간에 들어오는 사람은 경전을 깊이 연구하고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이 아니면 안 됩니다. 지평 홍무적(洪茂績)은 비록 직간(直諫)하는 강직함과 큰 일을 주간해서 처리할 능력은 있으나, 학문과 수행의 실적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여론이 모두 부족하게 여기고 있으니,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은택 바라는 뜻을 글에 나타내는 것은 비록 시류(時流)를 좇고 좋은 관직을 얻으려는 사람이라도 하지 않는 짓이다. 너희들은 삼가서 이것을 가지고 충직한 사람을 의심하지 말라. 강인이 겨우 한 번만 집무하였고 맡은 일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말 등은 사실과 먼 것 같으니, 다시 거론하지 말라."
하였다. 대사간 유백증(兪伯曾) 등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옛날에 예를 논하는 사람은 송사를 모은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의 일을 가지고 보건대, 옳다고 하는 것도 모두 바라는 데에서 나온다고 할 수는 없으며, 옳지 않다고 하는 것도 모두 시류를 좇는 데에서 나온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조위한의 사직 상소는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므로 언관의 처지로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미안하다는 하교를 들으니 직책에 더이상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체직하라는 명을 내리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4월 4일 신미
철원(鐵原)의 향교가 못된 백성들에 의해 불탔다는 감사의 보고를 받고, 이조가 부사를 파직시키라고 청하니, 파직시키지 말고 악습(惡習)을 바로잡으라고 명하였다.
청운군(靑雲君) 심명세(沈命世)가 죽었다. 심명세는 상의 이종 사촌으로, 반정(反正)할 계책을 은밀히 도와 그 공이 많았으므로 일등 공신에 녹훈(錄勳)되었고, 벼슬은 공조 참판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조금 고지식하나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의리를 좋아하였다. 일을 당하여서는 반드시 자기 견해를 고집하였는데, 사람들이 혹 이를 따르기도 하였다.
강석기(姜碩期)를 부제학으로, 강대수(姜大遂)를 집의로 삼았다.
4월 5일 임신
예조가 아뢰기를,
"추숭 사목(追崇事目)에 대해서는 이미 계하하셨고, 옥책을 올리는 의주(儀註)는 방금 마련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종 때의 의주를 보면 ‘과거의 신주(神主)에 분향하고 옥책을 올린 후에 비로소 새 신주를 만들고 그 새 신주에 삼헌례를 행한다’ 하였으며, 또 광해군 때의 일을 상고해 보니 ‘먼저 새 신주를 만든 다음 분향하고 옥책을 올리는 예는 모두 새 신주에 한다.’ 하였습니다. 지금 당연히 따라야 할 것은 성종 때의 것이지만, 혼조(昏朝)에서 추숭할 때 고(故) 재상 이항복(李恒福)이 실은 도제조였고 현 좌의정 이정귀(李廷龜)가 예조 판서였으므로 절차를 결정할 즈음에 필경 근거한 곳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혼조의 일이라 하여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두 의주 중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으니, 대신에게 물으소서."
하였다. 대신들이 성종 때의 예를 따라야 한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7일 갑술
예조가 아뢰기를,
"왕세자 책봉을 주청하는 일을 지금까지 연기한 것은 매우 미안합니다. 일찍이 추숭을 주청하기 전에 잠시 정지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므로 감히 다시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추숭을 주청하는 일행이 날을 받아 떠나려 하는데 책봉을 주청하는 것도 계속해서 거행해야 하겠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명년에 절사(節使)가 겸해서 주청하여도 괜찮다."
하였다.
지평 홍무적(洪茂績)을 체직시켰다. 홍무적이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상이 듣지 않았는데 홍무적이 장단(長湍)에 있으면서 병을 핑계로 올라오지 않으므로 드디어 체직시켰던 것이다.
상이 주강(晝講)에 《서전(書傳)》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고 동지경연사 최명길(崔鳴吉)이 나와서 아뢰기를,
"세자 책봉을 주청하는 일을 또 연기하는 것은 지극히 미안합니다. 지금 겸해서 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안 된다고 답하였다.
김수현(金壽賢)을 겸동지춘추(兼同知春秋)로, 여이징(呂爾徵)을 우부승지로 삼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금년 하향 대제(夏享大祭)를 올릴 때부터 성묘(成廟)의 속칭(屬稱)에 고조(高祖) 두 자를 쓰지 않기로 한 일은 이미 결정되었으므로 당연히 먼저 고하는 예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당이 여러 일을 고치고 바꾸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으며, 잘못된 축문을 바로잡는 것에 불과할 뿐이므로 구태여 번거롭게 고제(告祭)를 올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일본의 관백(關白) 원수충(源秀忠)이 사망하고, 아들 가충(家忠)이 뒤를 이었다. 수충이 가충에게 전위(傳位)한 지 이미 10년이 지나서 나라가 편안하였는데, 금년에 수충이 죽은 것이다. 이는 동래 부사(東萊府使) 홍입(洪雴)이 대마도(對馬島)에 사는 왜인 평지원(平智遠)의 말을 인용하여 보고한 것이다.
4월 10일 정축
종묘에 하향하였다.
김수현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4월 11일 무인
상이 조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고 지경연사 김시양(金時讓)이 아뢰기를,
"요즈음 간청하는 폐단이 더욱 심하니,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상이 왜 그러냐고 물었다. 이에 시양이 아뢰기를,
"이것은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져서 사람들이 염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사유(師儒)의 직책은 많은 선비들의 모범이 되는 자리이므로 학교 운영을 제대로 하고자 할 때는 훌륭한 사유를 얻는 것보다 먼저해야 할 일이 없습니다. 반정(反正) 초에는 유림 중 덕망이 있는 자를 엄선해서 대사성으로 삼고, 특별히 사업(司業) 2인을 두어 반드시 재야에서 초빙한 어진 사람이 겸임하게 하였으므로 당시의 문풍(文風)은 꽤 볼만한 점이 있었습니다. 변고가 잇따르고 원로들이 세상을 떠남에 따라 사회 기강이 무너져서 더욱 구제할 수 없게 되었으니, 참으로 한탄스럽습니다. 어진 것을 좋아하고 착한 것을 즐거워하는 것은 누구나 똑같이 지니고 있는 성품인데 어찌 지금인들 좋은 사람이 없겠습니까. 다만 부지런히 구하지 않고 성의껏 대우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대사성과 사업 2인을 해조로 하여금 특별히 선발 임명케 하여 많은 선비들에게 모범을 보이도록 하는 것이 오늘날의 사회 기강을 위해 제일 급한 일입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고, 사업은 적당한 사람을 얻은 후에 임명하라고 답하였다.
4월 12일 기묘
좌참찬 정경제(鄭經世)가 상소하여 면직을 요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종묘 제조(宗廟提調)는 그 임무가 막중하므로 반드시 품계가 높고 덕망이 있는 자를 시켜야 합니다. 비록 2품관에 제수된 적이 있다 하더라도 삼사(三司)의 장관을 역임하지 않았으면 의망(擬望)할 수 없었던 데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제조 허적(許𥛚)은 이 직책에 적합하지 않으니 체직하소서.
옥당(玉堂) 장관은 책망하여 벌을 주는 경우가 아니면 외직으로 보낼 수 없는 것인데, 이민구(李敏求)는 부제학에서 체직하자 곧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제배(除拜)를 함에 청직(淸職)이나 외직이 아니면 보다 낮은 관직으로 제수할 수 없는 것인데, 조경진(趙景禛)은 군기시 정(軍器寺正)에서 개성 경력(開城經歷)으로 강등되었습니다. 이민구와 조경진을 고쳐 임명하소서. 해조는 규칙을 따르지 않아서 인사 행정의 체통을 크게 잃었으니 해당 당상관과 낭청을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허적은 큰 공이 있고 또 감당하지 못할 리가 없으니 타당하지 않다는 말은 하지 말라."
하였다.
도승지 정광성(鄭廣成)이, 혼조(昏朝) 때에 폐모론(廢母論)에 참여한 잘못이 있었기 때문에 상소하여 굳이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일본 관백(關白) 원수충(源秀忠)이 죽었다고 하니 이웃 나라의 도리로서 의당 위문해야 할 것입니다.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니, 일찍이 정사년041) 에 가강(家康)이 죽고 원수충이 대를 이었을 때 우리 나라에 서계(書挈)를 보내왔기에 우리 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내 그 호의에 답하고 아울러 위문하였습니다. 지금 답서 중에도 위문하는 말을 넣어야 하겠으나, 그 당시의 문서가 난리 때 산실되어 참고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대신들과 의논하소서."
하니, 대신이 해조의 계사를 시행할 것을 청하자, 상이 따랐다.
4월 13일 경진
좌승지 이명한(李明漢)을 파직하였다. 알성시(謁聖試) 때에 명한은 담당 승지로서 감독을 잘못한 죄로 추고당하였는데, 헌부가 공죄 장속(公罪杖贖)으로 조율(照律)하자, 상이 파직을 명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대군(大君)의 집을 지을 때에 한성부는 오부(五部)에 역군을 지정하였는데, 오부는 쌀을 받고 다른 사람을 사서 대체시키기까지 하였습니다. 해당 당상은 추고하고 낭청은 파직시키며, 조성소(造成所)의 중사(中使)와 감역(監役)은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나라에 경사가 있을 경우 과거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는 것은 본 조정의 규례입니다. 지금 추숭하는 예는 세상에 보기 드문 일이고 대단한 경사이니, 대왕이 즉위하는 때처럼 증광 별시(增廣別試)를 치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윤이지(尹履之)를 도승지로 삼았다. 윤이지는 혼조 때에 폐모론에 참여한 잘못이 있었으므로 상소하여 체직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소장(訴狀)을 올려 체직되었다.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 사직서를 일곱 번 올렸는데, 상이 사관을 보내어 사직하지 말라고 회유하였다. 상용이 또 상소하여 체직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김상용은 신숙녀(申淑女) 옥사(獄事)의 위관(委官)을 사임한 일로 엄중한 교지를 받았기 때문에 사임한 것이다.
이조 판서 이귀(李貴)가 삭직(削職)하여 여론을 기쁘게 해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는 허적이 탄핵받은 것에 대해 노해서 한 것이다. 상이 사직하지 말고 일을 보라고 답하였다.
정언 유창문(柳昌文), 사간 한필원(韓必遠), 대사간 김수현(金壽賢)이 함께 인피하여 아뢰기를,
"종묘 제조는 다른 제조에 비할 수 없는 자리인데 허적은 다른 경력이 없으므로 신들이 예에 따라 체직하기를 논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귀의 공격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를 줄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결단코 자리에 머물러 있기 어려우니, 체척시켜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옥당이 아뢰기를,
"김수현 등에게 별다른 잘못이 없으니 모두 출사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5일 임오
김남중(金南重)을 교리로, 조빈(趙贇)을 수찬으로 삼았다.
부수찬 정두경(鄭斗卿)은 순붕(順朋)의 5세손이다. 이 직임에 제수되었으나 헌부에서 서경(署經)을 허락하지 않으니, 정두경은 여론이 호응하지 않음을 알고 끝내 소장을 올려 체직되었다.
계림 부원군(鷄林府院君) 이수일(李守一)이 상차하여 비국 당상과 산성 대장(山城大將)에서 해임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비국이 복계하기를,
"이수일은 금년에 79세이고 오랫동안 중병을 앓았으니, 책임지는 일을 맡기기는 곤란할 것 같습니다. 소원대로 다시 차임하는 것도 훈구 대신을 우대하는 도리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간원이 아뢰기를,
"궐내는 지엄한 곳이니 한시도 궐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찍이 선묘조(宣廟朝)에 심즙(沈諿)은 외조부의 부음을 듣고도 나갈 수 없었으며, 반정 후에 정홍명(鄭弘溟)은 형수의 상을 당했어도 나갈 수 없었습니다. 궐내 숙직이 지엄한 것은 이로써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근자에 수찬 유영(柳穎)은 대신 교체할 만한 사람이 없는데도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뻔뻔스레 상소를 올리고 감히 나가버려 궐직하게 하였으니, 파직하소서. 해당 승지는 어리석게도 상소를 들여 보냈으니, 크게 잘못했습니다. 엄히 추고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되 유영은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간원이 허적의 일을 논한 것은 실로 공론을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조 판서 이귀는 장황하게 아뢰면서 있는 힘껏 여러 관원들을 공격하였습니다. 전후로 언관이 한번이라도 상께 시비를 간쟁하면 이귀에게 배척을 당하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그가 하는 짓을 내버려 두어 나라의 체면을 손상시킬 수 없으니 이귀를 추고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4월 17일 갑신
김덕승(金德承)을 장령으로, 송국택(宋國澤)을 지평으로 삼았다.
4월 18일 을유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고 검토관 조빈(趙贇)이 나와 아뢰기를,
"옥당의 죄 없는 신하들이 도리어 파직당하고 쫓겨났습니다. 지금은 이미 대례를 정하였으니, 성상께서 어찌 다시 저들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시겠습니까. 석방시켜 거두어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고, 동지경연사 최명길(崔鳴吉)이 아뢰기를,
"조빈의 말이 매우 좋습니다. 지금 만일 계속 가두어 둔다면 도리어 대례에 누가 될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비국 유사 당상(有司堂上) 이성구(李聖求)가 병이 나서, 동지(同知) 이경직(李景稷)으로 대신케 하였다.
4월 19일 병술
양릉군(陽陵君) 허적(許𥛚)이 상차하여 종묘 제조에서 체직시켜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4월 20일 정해
강도 유수(江都留守) 이시백(李時白)이 치계하기를,
"경력 이성연(李聖淵)은 몸가짐이 청렴하고 일처리가 공정한데 임기가 만료되어 체직하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우박의 피해를 입은 뒤로 반도 거두지 못한 관곡이 매우 많은데, 만일 전말을 알지 못하는 자가 갑자기 그 일을 맡는다면, 거두어 들일 때에 필경 누락되는 것이 많을 것이니, 우선 잠시 유임시키소서."
하니, 상이 금년까지만 유임토록 하라고 명하였다.
김수현(金壽賢)을 도승지로, 이상길(李尙吉)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4월 21일 무자
조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고 집의 이유달(李惟達)이 나와 아뢰기를,
"강도(江都)의 무기고가 불타서 화약과 화기 등의 물건이 모두 재가 되었으니, 신중하게 지키지 못한 잘못이 큽니다. 유수(留守)는 추고하고, 경력(經歷)은 파직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되 경력도 추고하라고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대왕(大王)042) 의 영정을 봉안할 곳을 정하는 일에 대해 대신과 상의하였고, 성묘(成廟) 때의 일을 상고하였습니다. 신숙주(申叔舟)의 《추모록(追慕錄)》에 ‘계사년043) 가을에 사당이 완공되었다. 우의정 성봉조(成奉祖)에게 옛 사당에 가서 어진(御眞)을 모셔다가 새 사당의 후전(後殿)에 옮겨 봉안하라 하고, 신(臣) 신숙주에게 신주(神主)를 모셔다가 새 사당의 정전(正殿)에 봉안하라고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곧 의묘(懿廟)044) 때의 일입니다. 또 《실록》을 상고해 보건대, 을미년045) 10월 12일 회간 대왕(懷簡大王)046) 을 부묘(祔廟)하고 의묘를 봉안한 절목에 ‘위판(位版)을 의묘에 봉안하고 영정과 시고책(諡誥冊)을 의묘 영전(影殿)에 봉안하도록 명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덕종의 신주는 이미 부묘하였으나 연은전(延恩殿)은 이때 아직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의묘에 위판을 봉안하게 하여 문소전(文昭殿)과 같게 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덕종의 영정은 시종 별전에 봉안되었고 제사를 지낸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 문소전의 일을 들으니, 여러 왕들의 어진을 모두 상자에 넣어서 각실의 위판 곁에 봉안하였다고 합니다. 과거 제관(祭官)이었던 영의정 윤방(尹昉)의 기억으로는 대개 이러하나 역시 자세하지는 않습니다. 또 봉상시의 늙은 수복(守僕)에게서 들으니, 문소전 뒤에 선원전(璿源殿)이 있어서 선원록(璿源錄)과 어진을 모두 여기에 봉안하였다고 하나, 그말 역시 분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영숭전(永崇殿) 등의 어진을 모두 벽에 걸어놓고 삭망(朔望)마다 분향하며 육명일(六名日)에 제사를 지내나, 문소전과 의묘의 영정을 상자에 넣어 두는 것은 한 전각 안에서 두 번 제사지내는 것이 부당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왕의 영정을 능원군(綾原君)의 사저에 계속해서 모셔두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숭은전(崇恩殿)에 옮겨 봉안해야 하나 전내에 봉안할 곳이 없으니, 별도로 상자 하나를 만들어 영정을 넣어두고 신주를 옮기는 날까지 기다렸다가 대신(大臣) 한 사람을 보내서 책보(冊寶)를 둔 곳에 봉안하도록 하고, 본전(本殿)의 참봉으로 하여금 삭망마다 살피고 장마 때에 햇빛을 쬐게 하면 보관하는 데 손상될 염려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합당한 방법입니다. 혹 전각의 곁에 별도로 온돌을 놓고 때때로 불을 땐 후에야 장마 걱정이 없다고도 합니다. 선왕을 모시는 일은 지극히 중대한 일이므로 대신도 그 가부를 결정할 수 없어서 감히 이와 같이 아룁니다."
하니, 전각 뒤에 별도로 온돌 방을 만들어 봉안소로 삼으라고 답하였다.
4월 22일 기축
황해도 장연(長連)에 우박이 내렸다.
4월 23일 경인
처음 흥경원(興慶園)의 장례 때에는 왕의 예로써 하지 않았다가 이제 장릉(章陵)이라 부르고, 도감을 설치하여 석물(石物)을 다시 마련하였다. 상이 석물을 옮길 때에 백성의 밭에 해를 끼칠까 염려하여 도감에 하교하였다.
"문석(文石)을 끌어들일 때에 보리나 밀을 밟으면 필시 백성들의 원망이 클 것이니, 수확하기를 기다려서 끌어들이라."
이조 판서 이귀가 아뢰기를,
"지금 옥책을 올릴 때에 성종 때의 예를 따라서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려고 하신다는데, 성종 때는 대통(大統)을 중시하여 황백고(皇伯考)라 하였으며 월산 대군(月山大君)이 제사를 지내고 있었으므로 대신을 보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이미 황고(皇考)라 하면서 추존하고 옥책을 올리는 것이니, 이는 막대한 경사이며 예에 구애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친히 책보를 올리지 못한다면 장차 성심(聖心)에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 같을 것입니다. 광해군 때에도 친히 제사를 지내고 옥책을 올렸는데 이번에 관원을 보내 옥책을 올린다면 어찌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도감의 도제조와 당상의 의견도 신의 뜻과 다르지 않으나, 예관이 미처 이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은 우연히 그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 비록 옥책을 이미 다 새겼으나 ‘삼가 신하를 보낸다.[謹遣臣]’ 이하 몇 자를 고치는 일은 반나절이면 될 것입니다. 정련옥(正鍊玉)도 많고 새길 사람도 지금 도감에 있으니, 의당 지금 다시 예관으로 하여금 친히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정하게 하여 뒷날 후회하지 않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칭호가 비록 다르더라도 이미 추존하였으면 의식을 행해야 하는 것은 다를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성종 때에 관원을 보내서 예를 행한 데는 반드시 근거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큰아버지라 불렀거나 효성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또 고례(古例)를 보면 대행 대왕에게 시호를 올릴 때도 관원을 보내 옥책을 올렸으니, 선대의 가법(家法)이 본래 이러한 것입니다. 광해군 때의 《등록》에 처음으로 친히 제사지낸 일이 있으나, 저희들의 생각으로는 성조(聖祖)의 예를 버리고 광해군의 예를 따르는 것이 부당한 것 같아서 당초에 그렇게 아뢰어서 결재를 받은 것이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신의 견해도 역시 지극히 공경하고 예를 다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므로 진실로 행할 만한 일이라면 굳이 광해군 때의 일이라고 하여 혐의할 것은 없습니다. 신들이 어찌 먼저의 견해를 고집하겠습니까. 다만 정한 날짜가 이미 임박했고 옥책문을 이미 단정하였으며, 의식 연습을 두 번이나 한 뒤인데 고치는 것은 여러가지로 어렵습니다. 또 국가의 대례를 재상에게 관유(關由)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의논하여 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4월 24일 신묘
상이 소대를 명하여 《서전》을 강하였다.
함경 감사 김기종(金起宗)을 인견하여 상이 이르기를,
"경이 지금 중임을 맡았는데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하니, 김기종이 대답하기를,
"신이 아직 본도의 형세를 보지 않아서 지금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다만 천하의 일이란 항상 뜻밖에 일어나는 것인데 나라에서는 서변에만 전념하고 북방은 염려하지 않으니, 이것이 신이 근심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북방이 근래 날로 황폐해지니 지극히 한심한 일이다. 이것은 수령(守令)을 잘 얻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조정에서 잘 선발하여 보내지 않은데다가 외방(外方)에서도 상벌을 가하지 못해서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니, 오늘날의 급선무는 여기에 있는 것 같다."
하니, 김기종이 아뢰기를,
"북방의 유랑하는 동포를 쇄환(刷還)하는 일은 근래에 착실하게 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실효성 없는 문서로만 대신 점검하는 폐단은 일일이 막기 어렵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지금 이후로는 남방 관원을 해유(解由)할 때에만 데려온 백성의 수를 조사할 것이 아니라, 북방 관원을 해유할 때에도 데려온 백성의 수를 조사해야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 해유뿐이겠는가. 심한 자는 중벌로 다스리는 가벼운 자는 해유할 때에 조사하면 될 것이다."
하였다. 김기종이 아뢰기를,
"육진(六鎭) 중에 하나도 믿을 만한 곳이 없어 쳐들어 오면 결코 지킬 방도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 김종서(金宗瑞)는 아무 것도 없는 땅에 창건하였는데, 지금 지키는 것은 이보다 쉽지 않겠는가. 경은 본디 재주가 많으니 필경 소생시켜 변방을 굳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이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다. 김기종이 아뢰기를,
"금번 상호(商胡)에게 글을 보낸 일은 실수한 것이 많은데, 관시(關市)에서 파는 것을 억제시킨 것에 대한 폐단이 더욱 염려됩니다. 신은 변방의 백성을 보호할 수 없을 까 두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변방의 백성만 견디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파는 것을 억제하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인데, 이번에 한결같이 위축시키기만 한 것은 지극히 잘못된 일이다."
하였다. 김기종이 인하여 주청하기를,
"신의 노모는 76세인데, 동생은 영남으로 나갔으며 신의 아내도 죽어서 달리 봉양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춘분이 이미 지나서 합법적으로는 모시고 갈 수 없습니다. 그간 아뢰어 청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으나 황공하여 감히 가까이 전하에게 갈 수 없었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법이 허락하지 않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으나, 경의 사정이 남다르니 함께 가도 괜찮다"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국가에서 장수를 보내 용골 산성(龍骨山城)을 지키게 하는 것은 대개 다른 진(鎭)과는 달리 적이 쳐들어 오는 첫 번째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진의 장수가 된 자는 당연히 성과 연못을 수축하여 뜻밖의 변란에 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변방 신하의 장계를 보니, 한적(漢賊)들이 사람 없는 빈 성에 들어오듯이 성을 넘어와 무기와 물건을 탈취하였다고 하니, 듣기에 놀라울 뿐만이 아닙니다. 이런 좀도둑도 오히려 막지 못하고 성을 넘어와 침략하게 내버려 두었는데 더구나 날로 강해지는 적을 막기를 바라겠습니까. 미곶 첨사(彌串僉使) 김종민(金宗敏)의 범죄가 극히 경악스러우니 군율에 따라 처단하소서. 성을 지키는 장수들을 평상시에 감독하지 못한 죄가 본관에게도 있으니 용천 부사(龍川府使)도 마땅히 참작하여 죄를 정해야 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되 김종민도 비국으로 하여금 처리케 하라고 답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대신과 의논한 결과, 영의정 윤방(尹昉)은 ‘선대에서 옥책을 올릴 때에 이미 관원을 보낸 사례가 있으므로, 막중한 전례(典禮)를 일시의 억견으로 정하는 것은 어려운 것 같다. 상께서 결정할 일이라고 생각된다.’ 하였고 영돈녕(領敦寧) 오윤겸(吳允謙)은 ‘인정과 예의로써 말하면 친히 제사 지내고 의식을 행하는 것이 안 될 것은 없으나, 삼가 해조의 계사를 보건대 선대의 가법이 이미 이와 같고 뒤늦게 고치는 것이 이처럼 어려우니, 병들고 어리석은 신하가 감히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다.’ 하였고, 좌의정 이정귀(李廷龜)는 ‘친히 제사지내고 의식을 행하는 것이 진실로 안 될 것은 없으나, 관원을 보내 옥책을 올리는 것이 실은 성조(聖朝)의 가법이며, 욕례(縟禮)가 이미 완성되었고 정한 날이 이미 임박하여 뒤늦게 고치는 것은 참으로 해조의 계사와 같이 어렵다. 그러니 의식이 끝난 뒤에 별도로 친히 제사지내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하였고,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은 ‘욕례를 거행하였으니, 친히 책보(冊寶)를 올리는 것은 진실로 인정이나 예의상 당연한 일이다. 해조가 당초에 성종조의 사례를 따른 것도 선왕의 법을 준수하려는 뜻에서 한 것이다. 그러나 이귀의 계사도 인정과 예의에 비춰볼 때 실로 합당한 일이다. 진실로 합당한 일이라면 이미 장식한 옥책문과 두 번 의식을 연습한 것에 대해서는 논할 것이 없다. 생각건대 상께서 결정할 일이다.’ 하였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선왕의 법을 준수하는 것이 합당한 듯하니 영상과 좌상의 의논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5일 임진
대사헌 장현광(張顯光), 보덕 김령(金坽)이 함께 병으로 사직하고 오지 않았다.
도감 당상 윤신지(尹新之)가, 장릉(章陵)의 문석을 끌어들일 군사도 이미 모였고 손상되는 곡식도 많지 않으므로 끌어들인 후에 보고하였다.
김상헌(金尙憲)을 형조 판서로, 강석기(姜碩期)를 대사헌으로, 정두경(鄭斗卿)을 정언(正言)으로, 이민구(李敏求)를 대사성으로, 정뇌경(鄭雷卿)을 부수찬으로, 윤집(尹集)을 설서(說書)로 삼았다.
4월 26일 계사
이조 판서 이귀가 상차하기를,
"예조의 회계는 모두 예의를 잃었으며 대신의 건의도 예조의 계사를 따랐습니다. 전하께서 만일 대신의 건의를 어길 수 없어서 친히 제사를 지내지 않으신다면 반드시 바깥 뜰에 별도로 어막(御幕)을 설치하고 공손히 제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환궁하는 것이 인정과 예의에 심히 합당합니다. 예조로 하여금 속히 정탈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예조가 의논하여 아뢰기를,
"옥책을 올리는 예를 대신의 건의대로 하기로 한 것이 정당하므로 신들이 감히 여러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전하께서는 하늘이 낸 효자로서 10년이 지난 뒤에야 대례를 정하고 바야흐로 예식을 거행하게 되었는데, 성심(聖心)이 갑절로 비감하여 스스로 정전에 있기가 불안한 것은 본디 당연한 인정이며 예의인데 어찌 예관의 강정(講定)을 기다려서 거둥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별도로 어막을 설치하고 바깥 뜰에 행차하시는 것은 너무 지나친 듯하고 또 근거할 만한 예문도 없으니, 경솔히 의논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27일 갑오
간원이 아뢰기를,
"감찰 이광필(李光弼)·이영(李泳)·정영문(鄭榮門)·김영후(金榮後)·유신남(柳信男) 등은 모두 본직에 합당하지 못하니 파면하소서. 전설사(典設司) 별좌 유엄(柳淹)은 분명히 적에게 가담한 죄가 있는데 형벌을 면한 것은 요행입니다. 그가 벼슬길에 나오게 되자 놀라고 격분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장흥고(長興庫) 주부 이태운(李泰雲)은 사람됨이 어리석어 하는 일 없이 그 자리에 있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되 유엄 등은 체차하라고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장악원(掌樂院) 주부 정진익(鄭振翼)은 비록 무과에 새로 급제한 자를 선발하는 전례에 따른 것이기는 하나, 위인이 용렬하고 천박하며 관원답지 않아 음률(音律)을 연습하는 임무를 결단코 맡기기 어려우니, 체차하소서. 대신 음률에 밝은 자를 엄정히 가려서 차출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되 정진익은 한관(閑官)으로 바꿔 주라고 하였다.
4월 28일 을미
호차(胡差) 중남(仲男)이 의주(義州)에 도착하였다. ‘한(汗)이 4월 1일 10만 군사를 이끌고 서쪽 방면을 침범하였다.’는 말을 부원수 정충신(鄭忠信) 등이 보고하였다.
상이 황해 감사 송영망(宋英望)을 인견하였다. 송영망이 아뢰기를,
"황주성(黃州城)은 지킬 수 없으니 고봉 산성(古鳳山城)으로 옮기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묘당이 이미 이곳을 요지(要地)로 삼았으니 참으로 다시 의논하기 어려우나 지리(地利)와 인화(人和)는 하나라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성이 만일 견고하지 못하다면 역시 믿을 수 없다."
하였다. 송영망이 아뢰기를,
"이 일은 먼 데서 헤아리기 어려우니 신이 그곳에 도착하여 보고하겠습니다."
하였다.
4월 29일 병신
정언 정두경이 물의가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세 번이나 정고(呈告)하여 체직되었다.
소대가 있었다.
홍문관이 아뢰기를,
"상께서 《서전》을 이미 다 읽으셨으므로 영사(領事)에게 진강할 책을 물었더니, 《시전(詩傳)》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4월 30일 정유
전교하기를,
"사업(司業) 박지계(朴知誡)가 올라올 때 본도 감사로 하여금 말을 지급케 하라."
하였다. 박지계는 비록 지방에 있었으나 추숭하는 논의를 힘써 주장하였으므로 상이 이를 생각하여 이런 명을 내린 것이다.
황해도 안악군(安岳郡)에 큰 우박이 내려서 밀과 보리가 모두 피해를 입었다.
지경연 최명길(崔鳴吉)이 상차하기를,
"제왕의 학문은 필부와는 다른 것이니 당연히 정치에 절실한 것을 먼저 해야 합니다. 정치에 절실한 것으로는 오직 사서(史書)가 최고인데, 《서전》과 《춘추》는 곧 육경 중의 사서입니다. 《서전》은 성왕의 고명(誥命)을 실었으며, 《춘추》는 열국의 사적을 기록하였으므로 치란·흥망의 연유와 시비·사정(邪正)의 시말이 모두 여기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제왕이 먼저 강론해야 할 것으로서 이 두 책보다 절실한 것은 없으며, 더욱이 《춘추》는 성인이 정밀하게 다듬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춘추》를 알지 못해서는 안 되니, 모르기 때문에 앞에 참소하는 자가 있어도 보지 못하고 뒤에 적이 있어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군부가 되어 《춘추》의 뜻을 알지 못하는 자는 필경 큰 죄인이라는 오명을 입게 될 것이다.’고 하였으니, 고인의 말이 어찌 저를 속이겠습니까. 이제 《서전》을 마쳤으니, 이제 삼왕의 심법(心法)과 주공(周公)·소공(召公)·이윤(伊尹)·부열(傅說)의 격언에 대해 진실로 정밀하게 강론하고 깊이 체득하였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춘추》를 읽어 열국의 일과 성인이 포폄을 행한 것에 대해 두루 알면 성학(聖學)에 보탬이 될 것이니, 이는 공허한 말을 읊고 외우는 것에 비길 바가 아닙니다. 이를 삼공에게 다시 물으셔서 선후와 경중의 차례를 잃지 마소서."
하였는데, 영의정 윤방 등이 의논하기를,
"《시경》은 바른 성정(性情)에서 나와서 감동시켜 분발하게 하고 징계하여 고치게 하니, 가장 본원적인 것에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제왕의 학문은 본래 선후의 차례가 있는 것으로서 당연히 《시경》이 먼저이고 《춘추》가 다음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 판서 이귀(李貴)가 상차하여 대원군의 묘호(廟號)에 대해 의논하기를 청하니, 전교하였다.
"차자 중에 ‘무슨 왕이라고 부를 것인가.’라고 한 말은 과연 중요하다. 나라 안에서 부를 칭호를 속히 예관으로 하여금 강정(講定)하여 아뢰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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