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6권, 인조 10년 1632년 5월

싸라리리 2025. 12. 29. 13:23
반응형

5월 1일 무술

공조 판서 이서(李曙)가 상차하여 본직과 겸직인 판의금(判義禁)에서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내일 신주(神主)를 고쳐 쓸 때는 당연히 향실(香室)의 축책(祝冊)에 있는 열성(列聖)들의 축문 서식대로 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혹 베껴 쓸 때에 잘못이 있을까 염려되니 종묘의 관원으로 하여금 삭제(朔祭)를 지내기 위하여 신주 상자를 열었을 때 잠시 세종·명종·선종(宣宗) 등 삼위의 신주 서식을 외워 오도록 하였습니다. 봉사(奉事) 이명인(李命寅)이 외워서 써온 것을 보니 향실의 축문 서식과 크게 달랐습니다. 예를 들면 소헌 왕후(昭憲王后)의 신주에는 단지 ‘소헌’ 두 자만 썼으나 향실의 축문에는 ‘인선 제성(仁宣齊聖)’ 네 자가 더 있으며, 의인 왕후(懿仁王后)의 신주에는 ‘휘열 명덕 현숙 장성 정헌(徽烈明德顯淑章聖貞憲)’이라 썼으나 향실 축문에는 ‘장성 휘열 정헌 명덕 현숙(章聖徽烈貞憲明德顯淑)’이라고 썼으니, 글자 수는 같으나 순서가 매우 다릅니다. 열성의 신주에는 ‘유명증시(有明贈諡)’ 네 자를 쓰고 증시(贈諡)가 위에 묘호(廟號)가 아래에 있었는데 선조의 신주에는 ‘유명증시’ 네 자를 쓰지 않고 증시가 아래에 묘호가 위에 있습니다. 이것은 필경 신주를 쓸 때 열성의 신주 서식을 참고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썼기 때문입니다. 향실의 축책을 상고해 보면, 왕후는 세대의 원근을 불문하고 모두 ‘조비(祖妣)’라고 하였는데 이럴 수는 없을 것 같으며, 지금 세 분 왕후의 신주 서식을 보아도 모두 조비라는 말이 없으니, 이 또한 축문 서식이 잘못된 것입니다. 막중한 종묘의 예가 이렇게까지 잘못되었으니,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다만 이명인이 외워온 것만으로 실증을 하기는 곤란하니, 단오 제사 때에 헌관으로 하여금 열성들의 신주 서식을 일일이 베껴오게 한 다음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2일 기해

추존(追尊)하고 책보(冊寶)을 올리는 예를 행하였는데, 대왕의 옥책문(玉冊文)은 다음과 같다.
"덕이 벌써 후손에게서 성대해진 것은 쌓아놓으신 공 때문이고 효는 존친(尊親)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으니 감히 현양(顯揚)하는 의전(儀典)을 아니하겠습니까. 이에 의전을 거행하여 작은 정성을 펴고자 합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대왕 전하께서는 도량이 넓고도 깊으셨으며 자질은 아름답고 순수하셨습니다. 마음은 어질고 화락하여 천지의 생육하는 원기(元氣)를 체득하였고, 충성과 근면에 성의를 다하여 위태로울 때에 군부(君父)를 받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공훈은 종정(鍾鼎)에 새겨지고 법도는 집안에 드리워졌습니다. 당연히 부귀와 영화를 누리셔야 했는데 끝내 천수와 복록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미천한 저에게 교훈을 내리시어 종사의 대통을 잇게 하셨습니다. 면면하게 내려오는 선대의 미덕을 계승하니, 종사에 욕이 될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미처 봉양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니 사모하는 마음이 앉으나 서나 간절합니다. 명실(名實)을 모두 높이지 않는다면 어찌 정(情)과 문(文)을 서로 극진하게 할 수 있겠으며 드러난 인자함과 감춰진 운용의 묘를 무엇으로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덕이 두터워 미덕이 절로 먼 훗날까지 전해질 것입니다. 이에 예물을 갖추고 전례에 따라 삼가 신(臣) 윤방(尹昉) 등을 보내어 옥책과 금보를 바치고 ‘경덕 인헌 정목 장효(敬德仁憲靖穆章孝)’라는 존호를 올립니다.
바라건대 명철하신 신령께서는 밝게 강림하소서. 상제의 곁을 드나들며 길이 아름다운 존칭에 부응하시고 우리 자손을 계도하사 연면한 복으로 크게 도우소서."

 

왕후의 옥책문은 다음과 같다.
"예는 반드시 먼저 명분을 바르게 해야 하는 것이므로 이미 서열을 매기는 예전을 강구하였고, 효는 먼 조상을 추모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으므로 이에 세상에 보기 드문 의전을 거행하니, 어찌 유명(幽明)이 다르겠습니까. 실로 비감과 환희가 간절합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왕후 전하께서는 도산(塗山)047)  같이 아름다운 덕행이시며 왕실의 왕비다운 아름다운 언행이었습니다. 명문가에서 아름다운 교훈을 받으셨으니, 모두 규중의 법도가 바르다고 칭송하였습니다. 꿈속에서 옥새를 보시고 일찍이 천명이 돌아갈 곳을 아셨는데 이제 막혔던 운수가 다시 회복됨을 생각할 때 귀신 같은 꾀를 은밀히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부모님께서 기뻐하실 때는 항상 하루해가 가는 것이 아깝더니, 무덤에 서리가 내리니 문득 끝없는 사모의 정이 맺힙니다. 누군들 부모를 현양(顯揚)하려는 마음이 없으리오마는 쉽게 하지 못하는 것은 거기에 규칙이 있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서열을 문란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옛 기록에 있는 제도를 상고하고 본조(本朝)의 법전을 참고하여, 땅처럼 광대한 미덕을 자세히 밝히고 조상의 성대한 업적을 노래하였습니다. 의례와 문체를 갖추니 날로 좋습니다.
삼가 신 윤방 등을 보내 옥책과 금보를 바치고 ‘경의 정정(敬懿貞靖)’이라는 존호를 올리오니 금과 옥 같은 법도로 천년까지 대덕(大德)을 드리우시고, 사당에서 백대(百代)까지 제사를 받으소서."

 

왕후의 시책문은 다음과 같다.
"아름다운 덕을 빛내어 미덕을 부모께 돌리는 성의를 다하고, 공손히 아름다운 칭호를 올려 이름을 바꾸는 의전을 거행하니, 인정과 문채가 모두 극진하여 비감과 환희가 함께 깊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왕후 전하께서는 성품은 부드럽고 아름다우시며 태도는 정숙하셨습니다. 여러 대에 걸쳐 선덕을 쌓았으므로 드디어 운수가 명문가에서 열리게 되었고, 선조(先朝)048)  의 성은을 입어 착한 며느리라는 명예가 실로 높았습니다. 이 역사가 깊은 나라의 천명이 새로워진 것도 내교(內敎)의 음공(陰功)에 힘입은 것입니다. 하늘 같은 은혜를 갚지 못했는데, 어찌 하루인들 편안하겠습니까. 서리가 내릴 때마다 슬픔이 더욱 간절하면서도 어느덧 6년이 흘렀습니다. 모든 선조들이 행하시던 옛 제도에 어찌 감히 흠집을 내겠습니까. 크게 부모를 현양하니 지극한 정이 거의 펴집니다. 이에 역대의 의전에 따라 두 글자의 다른 이름을 바칩니다.
삼가 신 윤방 등을 보내 옥책과 금보를 바치고, ‘인헌(仁獻)’이라는 존호를 올립니다. 바라건대, 신령스런 보살핌으로 작은 정성을 허락하소서. 옥첩에 금박을 입힌 것처럼 교훈을 내리시고, 천지(天地)가 장구(長久)하듯이 끝없이 복을 주소서."
대왕의 금보에는 ‘경덕 인헌 정목 장효 대왕지보(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之寶)’라 하고, 왕후의 금보에는 ‘경의 정정 인헌 왕후지보(敬懿靖貞仁憲王后之寶)’라 하였다. 대왕의 시호(諡號)는 장차 명(明)나라에 청할 것이므로 시호를 올리는 의식을 거행하지 않았다.

 

5월 3일 경자

상이 숭정전(崇政殿)에 거동하여 하례를 받았다. 왕세자가 문무 백관을 인솔하고 진하하였다. 이에 대사면과 교시를 전국에 내렸는데, 교시는 다음과 같다.
"예는 하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본래 인정에 따라 차등지운 것이다. 효는 부모를 존숭하는 것이 큰 일인데, 어찌 미덕을 부모께 돌려 드리며 현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의전을 거행하고 아울러 사면(赦免)의 은택을 펴노라.
공손히 생각하건대 황고(皇考)께서는 어려서부터 성스러운 자질과 대덕(大德)을 몸에 지니시고도 천수와 복록의 보답을 누리지 못하셨도다. 어진 도리를 후손에게 물려주시어 덕을 쌓을 기반을 독돈히 하시었고, 보잘것없는 이 몸을 도와주시어 보배로운 천명을 잇게 하시었도다. 하늘같이 망극한 은혜를 생각하면 밤낮으로 혹시라도 잊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나는 할아버지의 대통을 이었으니 아버지의 후계가 된 것과는 처음부터 다름에 있어서랴. 이미 부자(父子)의 명분을 바로하니 윤서(倫序)가 밝아졌고, 또 침원(寢園)에 존호를 올렸으니 서열에 따른 위의(威儀)가 절로 다르게 되었도다. 다만 존숭하는 의전 중에서 현양하는 칭호를 다하지 못하여 크나큰 소원을 풀지 못하였으니 어찌 잠시라도 편안히 남면(南面)할 수 있겠는가. 높은 은혜를 갚기 어려워 항상 혼자 마음 속으로 송구하면서, 오늘날이 이르기를 10년 동안이나 기다렸도다.
전대(前代)의 옛 제도를 참고하고 본조(本朝)의 규칙대로 이달 2일에 삼가 옥책과 금보를 바치고, 황고를 경덕 인헌 정목 장효 대왕(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 황비(皇妣)를 경의 정정 인헌 왕후(敬懿貞靖仁獻王后)라고 존칭하였다. 현양하는 정성은 진실로 명실(名實)에 부합하고, 어질고 효도하는 도리는 가정과 나라 안에서 더욱 빛나도다. 이에 널리 알리어 함께 경축하고자 하노라.
아, 누구인들 부모에게 애달픈 마음이 없겠는가. 백성들과 더불어 아름다운 태평 성대를 함께 누리기를 바라면서 이에 교시하노니, 마땅히 명심할지어다."

 

이전에 오윤겸(吳允謙)·김류(金瑬) 등이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추존이 불가함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최명길(崔鳴吉)은 별묘(別廟)를 세울 것을 주창하였다. 사람들은, 최명길이 사실은 추존하고 싶으나 남들의 말이 두려워 겉으로만 이런 주장을 한다고 하였다. 윤겸 등이 체직되고 나서 윤방(尹昉)이 영상이 되자, 상의 뜻을 거스를까 두려워하여 비로소 별묘의 주장을 좇아 결국 추존하는 예를 시행하였다. 이정귀(李廷龜)와 김상용은 좌상과 우상으로서 처음에는 오윤겸과 주장을 같이 했으나, 결국 윤방의 뜻에 끌리어 자기 주장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굽히지 않는 대신의 기풍이 없다고 나무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국릉(國陵)이 있는 곳과 왕후의 본관은 당연히 읍(邑)으로 승격시켜야 하며, 능원군(綾原君)은 주상의 친동생이므로 당연히 대군(大君)으로 올려야 하니, 하비(下批)를 고쳐야 합니다. 해조로 하여금 전례를 조사하여 처리케 하소서."
하고, 이조가 아뢰기를,
"국릉이 있는 곳은 당연히 승격시켜야 하겠으나, 고양(高陽)과 풍덕(豊德)은 본래 모두 군수(郡守)가 있던 곳으로 국릉이 있기 때문에 승격시켰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오직 여주(驪州)는 영릉(英陵) 때문에 승격시켰으나, 이는 본주 목사를 헌관으로 삼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대신과 상의하소서."
하였다. 이에 영의정 윤방 등이 아뢰기를,
"고양과 풍덕을 승격시킨 일이 없다면, 오직 해조가 옛 전례를 살펴서 처리하는데 달렸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능성현(綾城縣)을 능주목(綾州牧)으로 승격시켰는데, 이는 정희 왕후(貞熹王后) 때의 예를 따른 것이다. 정희 왕후는 파평(坡平) 윤씨인데, 세조가 즉위하자 파산(坡山)을 왕후의 본관이라 하여 현(縣)에서 주(州)로 승격시켰다. 능성은 곧 인헌 왕후(仁獻王后)의 본관이므로 역시 현에서 주로 승격시켰다.

 

예조 참의 김광현(金光炫)을 보내서 대왕과 왕후의 구(舊) 신주를 장릉(章陵)에 묻도록 하였다.

 

5월 4일 신축

이 당시에 궁궐이 엄격하지 못해서 왕후의 친척 부인들이 아무때나 출입하였다. 여이징(呂爾徵)의 처는 궁궐에 들어와 중전을 뵙고 열흘씩 묵었으나 여이징이 막지 않았다. 정백창(鄭百昌)은 위인이 비록 교만 방자하였으나 그래도 사대부의 정신이 있어, 그 처가 필요없이 궁궐에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정백창을 칭찬하고 이징을 비난하였다.

 

능원군(綾原君) 이보(李俌)를 능원 대군으로, 고(故) 능창군(綾昌君) 이전(李佺)을 증직하여 능창 대군으로 삼았다. 이전은 장릉(章陵)의 셋째 아들로서 거동과 용모가 준수하였다. 신성군(信城君)의 양자로 들어갔다가 신경희(申景禧)의 옥사에 무고를 당해 교동(喬桐)에 안치되어 갖은 곤욕을 받았다. 결국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하니, 온나라 사람들이 원통해 하였다.

 

조빈(趙贇)을 정언으로 삼았다.

 

5월 5일 임인

교리 나만갑(羅萬甲)이 그 어머니를 위하여 지방 수령으로 보내달라고 상소하였다. 이조가 회계하기를,
"나만갑이 부모의 봉양을 간청하는 개인 사정이 비록 절실하기는 하나 경연에 참여하는 유신(儒臣)을 외임으로 보내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왕후의 존호 네 자와 시호 두 자는 모두 본조에서 의논하여 정하고 대왕은 본조에서 여덟 자의 존호를 명(明)나라에 올려 시호를 청하는 것이 조종조로부터의 규칙입니다. 지금 시호를 받기 전에 나라 안에서의 칭호는 과연 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일은 본래 변례(變禮)에서 나온 것이므로 의논하여 정할 즈음에 꼭 맞게 하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대신들이 이미 의논하여 정하였으니, 해조에서 감히 경솔하게 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른 대신들에게 다시 물으소서."
하였다. 영의정 윤방, 영돈녕 오윤겸, 좌의정 이정귀, 우의정 김상용 등이 의논하기를,
"성종조 때의 일을 가지고 보면, 명나라에서 주는 시호가 도착하기 전에는 덕종의 존호인 ‘온문 의경 왕(溫文懿敬王)’으로 불렀습니다. 지금도 이 전례를 따라 ‘장효(章孝)’라고 부르면서 황제의 명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성종조 때 ‘의경(懿敬)’을 묘호로 쓴 것은 필시 당초의 시호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이것을 예로 삼은 것은 자세히 살피지 못한 듯하니, 다시 의논하여 결재를 받으라."
하였다. 대신이 다시 의논하기를,
"지금 장릉에 이미 아름다운 존호를 올린 것은 구례와 사실 다를 것이 없습니다. 임시로 여덟 자 중에서 아래 두 자로 요즈음의 칭호를 삼으면서 시호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삼가 다시 의논하라는 명을 받들고 보니, 혹 존호의 위 두 자인 ‘경덕(敬德)’으로 부르는 것도 안 될 것이 없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미 옛 일과 다르므로 지금 이 칭호는 사실상 근거가 없다. 그러나 우선 의논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5월 6일 계묘

예조가 아뢰기를,
"선조(宣祖) 말년부터 선비들의 기풍이 점차 불미스러워져서 지방의 과거장에서는 거자(擧子)들이 행패를 부리기도 하였습니다. 혼조(昏朝)049)  에 들어와서는 그런 일이 더욱 심해져 과거를 못 치루는 변고가 자주 있었습니다. 반정(反正) 후에도 이런 폐습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였습니다. 자세히 그런 까닭을 살펴보니, 실은 지방의 배우지 못한 무리들이 혹 뇌물을 주고 글을 빌리기 때문입니다. 신역(身役)을 면하기 위해서 친구들을 따라다니면서 오직 노는 것만 일삼은 자나 심지어는 법망을 피한 죄인이나 주인을 배반한 노복들도 그 속에 섞어 있습니다. 이런 무리들이 많이 섞여 있으므로 문득 기세를 얻어 과장을 능멸하고 시험관에게 욕하는 짓을 능사로 삼습니다. 비록 올바른 마음으로 단정하게 과거 공부를 한 자가 있더라도 몽둥이와 돌멩이가 난무하는 속에서는 시험을 볼 수 없으니, 심히 놀라운 일입니다.
앞으로 과거를 볼 때는 해도(該道) 감사로 하여금 각별히 수령을 신칙하여 과거보는 자들을 자세히 조사하도록 하며, 도목(都目)은 여러 가지를 섞지 말고 수령이 명령대로 하지 않은 것만 적발 보고하도록 하여 중죄로 다스림으로써 국가 시험의 권위를 높이고 선비의 기풍을 바로잡은 계기를 삼으소서."
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5월 7일 갑진

금(金)의 사신 중남(仲男)이 입경하였다.

 

호조가 이산(理山)의 전결(田結) 수를 감하여 변방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뜻을 보여 달라고 청하니, 이를 따랐다.
이에 앞서 평안도 순안 어사(巡按御史) 이명웅(李命雄)이 서계하기를
"도내 전결은 모두 근년에 새로 정한 수를 사용하는데 이산군만은 평시의 전안(田案)을 사용함으로써 환수하지 못한 세금도 많고 백성들의 유망(流亡)도 계속되니, 마땅히 변통하여야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본도 감사로 하여금 사유를 보고하게 하였다. 민성휘(閔聖徽)가 민폐를 자세히 보고하면서 해조로 하여금 참작하여 처리케 하여 달라고 청하였으므로, 이런 명이 있은 것이다.

 

민성휘가 청북(淸北) 어민의 금년 해세(海稅)를 감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 호조가 회계하기를,
"청북은 전쟁이 끝난 다음 돌아온 어부들이 많지 않으니, 진실로 은전을 베풀어야 하며 세금을 거두어서는 안 됩니다. 다만 본도의 해세는 호조의 소관 사항이 아니므로 해당 관서로 하여금 아뢰어 처리케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신들이 종묘의 섬돌을 살펴보니, 돌을 쌓은 것이 견고하고 치밀하여 뒷날 무너질 염려가 없겠습니다. 사십여 칸의 개축 공사를 몇 달 안에 완공하였으니 해당 감역관이 성실히 감독한 수고가 없지 않습니다."
하니, 알맞게 시상하라고 답하였다. 이조가 회계하기를,
"수축하는 공사를 감독하는 일은 본래의 직분이므로 특별히 시상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아마(兒馬) 한 필을 주라고 명하였다.

 

사간 한필원(韓必遠)이 탑전(榻前)에서 구관청(句管廳) 뱃사공의 폐해를 극언하니, 상이 구관 당상(句管堂上) 김자점(金自點)을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5월 8일 을사

김포(金浦)를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성종 2년 고양현(高陽縣)에 경릉(敬陵)과 창릉(昌陵)의 두 능이 있기 때문에 군으로 승격시켰었으므로 김포도 이 전례를 따른 것이다.

 

금의 사신 중남이 관(館)에 있다가 그 아비의 부음을 듣고, 무명 40필을 자기 아비의 집에 보내달라고 청하였다. 구관소(句管所)에서, 비국(備局)이 함경도에 이문(移文)하여 그 수에 맞춰 전해주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김상헌(金尙憲)을 대사헌으로, 유영(柳潁)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5월 11일 무신

예조가 아뢰기를,
"시호와 존호는 본래 그 뜻이 다르기 때문에 후자로써 전자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왕의 초상(初喪) 때에 존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례대로 대행(代行)이라 칭하면서 명 나라에서 주는 시호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니, 이는 당연한 예입니다. 추숭하는 예는 진실로 초상과는 다른 것이지만 시호가 내려오기 전에 칭호가 없기 한가지입니다. 성종조에 ‘의경(懿敬)’이라고 부른 것이 비록 원래 이 시호가 있어서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역시 십분 온당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여덟 자의 존호 중에서 두 자를 떼어 칭호로 삼은 것은 더욱 미안한 것 같아, 신들이 반복해서 생각해봐도 타당한 칭호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고인들을 보건대, 혹 능호로써 그 임금을 부르는 경우가 있으니, 현재 세속의 말과 같습니다. 세종(世宗)을 영묘(英廟)로, 세조(世祖)를 광묘(光廟)로 부르는 것도 이런 경우입니다. 이제 이를 본떠서 장릉 대왕(章陵大王)이라고 부른다면 비록 구차하기는 하지만 혹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이것이 미안하다면 다만 숭은전 대왕(崇恩殿大王)이나 숭은전 왕후라고 부르는 것도 혹 한 가지 방법입니다 신들이 이미 예관의 자리에 있으므로 감히 견해를 아룁니다. 바라건대 이것을 대신에게 다시 물으소서."
하니, 말한 바가 더욱 타당하지 못하니 시행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 즈음에 정두경(鄭斗卿)과 정뇌경(鄭雷卿) 등이 비록 청망(淸望)을 통과하기는 하였으나, 이 논의를 불쾌하게 여기는 자가 많았다. 신풍군(新豊君) 장유(張維), 예조 판서 최명길은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정두경 등은 선대(先代)의 잘못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니 인재가 아깝다." 하였으나, 응답이 없었다. 정두경은 비록 세상 일에는 어두웠으나 문장이 출중하고 뜻이 저속하지 않았으며, 정뇌경은 순박하고 진실하며 도량이 넓고 재주도 뛰어났다. 그러나 청로(淸路)에 나아가거나 못 나아가는 것은 스스로 공론이 있는 것이지, 한두 재상이 사사로이 차자를 올려 구원을 청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예조가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태묘(太廟)에 있는 열성(列聖) 신주의 서식과 향실 축문의 첫머리를 보건대 크게 다릅니다. 예를 들면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의 신주는 모두 1자 시호인데 축문에는 4자 시호입니다. 원경(元敬)·소헌(昭憲)·공혜(恭惠)·장경(章敬) 네 왕후의 신주는 2자 시호인데 축문에는 모두 4자를 더했습니다. 이는 필시 후대에 더 높이는 예가 있었으나 신주는 고치기 어려우므로 차이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일이 비록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경솔하게 의논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신의(神懿)와 원경(元敬) 두 분의 신주는 태후(太后)라고 쓰고 소헌(昭憲) 이하 각 위(位)의 신주는 모두 태(太) 자를 쓰지 않았는데, 축문에는 신의와 원경에도 태(太) 자를 쓰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필시 후대에 미안하게 느껴서 고친 것입니다. 축문에서 이미 태 자를 제거하였다면 신주에 옛 칭호를 그대로 놓아두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만 오래된 일이라서 역시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습니다.
축문 서식 중에 세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태조로부터 명묘(明廟)까지의 신주에 모두 ‘유명증시(有明贈諡)’ 네 자를 쓰고 시호를 위에 놓고 묘호를 아래에 놓은 것은 군신(君臣)을 밝힌 것입니다. 그러나 축문에는 ‘유명증시’ 네 자를 없앴으며 묘호를 위에 두고 시호를 아래에 두었으니 이것이 첫 번째 의문입니다. 각실의 왕후 신주에 존호와 시호만을 쓰고 성씨를 쓰지 않은 것은 귀천을 분별하려는 것인데, 축문에는 성씨도 썼으니, 이것이 두 번째 의문입니다. 4대(代)가 넘은 열성(列聖)에 대해 축문에 속호(屬號)를 쓰지 않은 것은 친소(親疏)를 구별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4조(祖) 세실(世室) 왕후의 축문에서 모두 조비(祖妣)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세 번째 의문입니다.
축문 서식이 언제 정해진 것인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논하건대,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곳에서 신(神)을 구하려는 것이므로 고하는 축문이 한결같이 신주에 쓴 것과 같은 연후에야 비로소 감응하기를 바랄 수 있는 것인데, 지금 도착(倒錯)과 증감이 이러합니다. 조비라고 부르는 것은 고례에 이미 근거가 없으며 세대의 멀고 가까움이 혼동되어 구별할 수 없으니, 조종조가 예의를 만들 때 이와 같이 하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전쟁 이후에 조종조의 전장(典章)이 산실되어 전하지 않고, 향실의 충의배(忠義輩)들이 열성의 신주 서식을 상고하지 않고 망령되게 자기 생각대로 쓰다가 결국 규칙으로 굳어진 것은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바로 잡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미안한 것은 선묘(宣廟)의 신주에 ‘유명사시(有明賜諡)’ 네 자를 쓰지 않고 묘호를 시호 위에 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열성의 규칙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지성으로 사대(事大)한 선묘의 뜻도 아닙니다.
무신년050)   초상 때에 비록 간신들이 점점 난동하기는 하였으나 선조(先朝)의 구신(舊臣)들이 그래도 남아 있었으니 이렇까지 잘못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병진년051)  과 경신년052)   두 차례에 걸쳐 호(號)를 보태고 신주를 고칠 때에 간신들이 개입하여 조종조의 법도를 돌아보지 않고 마음대로 고쳤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혹 처음 신주를 쓸 때에 태묘(太廟)의 신주 서식을 상고하지 않고 다만 잘못된 축문에 근거하여 쓴 것일지도 모릅니다.
근래 조정의 폐습은, 대소사(大小事)를 주간하면서 전혀 살펴보지 않고 잘못된 대로 하면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선묘의 신주에는 ‘이모 수유 광휴 연경(貽謨垂裕廣休延慶)’ 8자를 ‘현문 의무 성예 달효(顯文毅武聖睿達孝)’ 8자 위에 놓았으나, 축문에는 위의 여덟 자를 아래에 놓고 아래의 여덟 자를 위에 놓았습니다. 의인 왕후(懿仁王后)의 신주에는 ‘휘열 명덕 현숙 장성(徽烈明德顯淑章聖)’이라 썼고, 축문에는 ‘장성 휘열 정헌 명덕(章聖徽烈貞憲明德)’이라 썼습니다. 심히 잘못된 것이 한결같이 이런 지경입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앞의 세 가지 의문도 역시 모두 향실에서 잘못 전한 것 같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왕의 예는 종묘보다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만일 털끝만큼이라도 미진한 것이 있으면 싫증내지 말고 충분히 강론하여 처리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서한(西漢)의 종묘 제도와 이당(李唐)의 헌의 제례(獻懿祭禮)와 조송(趙宋)의 시조 위차(始祖位次)는 100년 후에도 의논이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군신들에게 수없이 회의를 명한 것은 어찌 분분하게 고치는 것을 좋아해서 그랬겠습니까. 실은 종묘를 중시하는 뜻에서 한 것입니다.
이제 축문을 바로잡는 일은 처음에는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미 오래되어서 마음대로 고치기 어렵습니다. 선묘 신주의 잘못은 고치지 않을 수 없으나 일이 중대하므로 신들이 감히 경솔하게 의논할 일이 아닙니다. 역대의 전례대로 대신·육경(六卿)·삼사 장관(三司長官)·관각 당상(館閣堂上)들로 하여금 빈청에서 회의하여 헤아려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대신과 육조 2품 이상이 회의하여 모두 "종묘의 예에 잘못이 있다면 바로잡지 않을 수 없으나 막중한 일을 용이하게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예조가 다시 날을 잡아 살펴본 후에 아뢰어서 처리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추숭 때의 모든 집사와 도감의 도제조 이하에게 공에 따라 상을 주라고 명하였다.
우의정 김상용, 제조 이조 판서 이귀(李貴)에게는 각각 안구마(鞍具馬) 1필을 하사하고, 제조 호조 판서 김신국(金藎國), 김자점(金自點), 예조 판서 최명길(崔鳴吉), 도청(都廳) 장령 한형길(韓亨吉), 교리 김남중(金南重)에게는 각각 1등을 가자(加資)하였다. 전(前) 도청 정홍명(鄭弘溟)에게는 반숙마(半熟馬) 1필을 하사하고, 낭청 호조 정랑 황윤후(黃胤後) 등 6명은 모두 승서(陞敍)하였다.
감조관(監造官) 윤우(尹堣) 등 9명은 6품관으로 옮기고, 진책관(進冊官) 영의정 윤방, 진보관(進寶官) 좌의정 이정구에게는 각각 안구마 1필을 하사하였다. 제주관(題主官) 병조 참의 한인급(韓仁及)은 가자하고, 대축(大祝) 부사과(副司果) 민광훈(閔光勳)은 준직(准職)에 제수하였다. 압옥책관(押玉冊官) 우참찬 한여직(韓汝溭), 압옥보관(押玉寶官) 지중추(知中樞) 박정현(朴鼎賢)에게는 각각 반숙마 1필을 하사하고, 독옥책관(讀玉冊官) 군자감 정(軍資監正) 강대수(姜大遂), 집의 이유달(李惟達), 독시책관(讀諡冊官) 전적(典籍) 이경증(李景曾), 독보관(讀寶官) 지평 오달승(吳達升), 군기시 정(軍器寺正) 이행건(李行健), 봉옥책관(捧玉冊官) 병조 정랑 강혹(姜翯) 등 4명, 봉시관(捧諡官) 전적 전대방(田大方) 등 2명, 봉보관(捧寶官) 전적 이열(李說) 등 4명, 대치사관(代致詞官) 지평 송국택(宋國澤)에게는 각각 반숙마 1필을 하사하였다.
옥책 제술관(玉冊製述官) 신풍군(新豐君) 장유(張維), 서사관(書寫官)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보전문 서사관(寶篆文書寫官) 예조 참의 김광현(金光炫), 좌부승지 여이징(呂爾徵), 시책문 제술관(諡冊文製述官) 전 승지 이명한(李明漢), 서사관(書寫官) 도승지 김수현(金壽賢)에게는 각각 숙마 1필을 하사하고, 악장문 제술관(樂章文製述官) 대사성 이민구(李敏求)에게는 반숙마 1필을 하사하였다. 책보를 올릴 때 대신을 보내서 지내는 제사의 종헌관(終獻官) 예조 참판 윤흔(尹昕)에게는 숙마 1필을 하사하고, 천조관(薦俎官) 첨지(僉知) 송준(宋駿), 대축(大祝) 예조 정랑 신열도(申悅道)에게는 각각 반숙마 1필을 하사하였다. 전사관(典祀官) 봉상 주부(奉常主簿) 구현(具炫)에게는 아마(兒馬) 1필을 하사하고, 모든 차비관(差備官)들에게는 아마(兒馬)나 활 등을 하사하였으며, 관여한 여러 공장(工匠)과 하리(下吏)들에게는 각각 공로에 따라 물품을 하사하였다.

 

이행건(李行健)을 장령으로, 구봉서(具鳳瑞)를 이조 좌랑으로, 오전(吳竱)을 수찬으로, 김육(金堉)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5월 12일 기유

상이 숭정전에 거둥하여 금(金)의 사신 중남을 인견하였다. 전각 안에 의자를 놓아 동쪽 모퉁이에 앉히고 차를 하사하였다. 중남은 눈을 두리번거리며 좌우를 둘러보는 등 행동거지가 거만하여 보는 이가 분개하였다.

 

간원이 계속 계를 올려 별좌(別坐) 유엄(柳淹)이 적에 가담한 죄를 말하고 사판에서 삭제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소문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의심하고 체직만 시켰다. 이번에 유엄의 아우 한(澣)이 상소하여 억울함을 호소하자, 평소에 유엄과 사이가 좋지 않던 참봉 권억(權嶷)이 드디어 상소하여 유엄이 역적 이괄(李适)에게 승지의 벼슬을 받았던 사실을, 종실(宗室) 풍래군(豊萊君) 이번(李瀿)을 증인으로 내세우며 논하였는데, 이번도 상소하여 사실이라 하였다. 좌랑(佐郞) 심집(沈潗), 별좌 허국(許國), 병조 참지 조위한(趙緯韓) 등이 유엄이 장차 예측할 수 없는 위험에 빠질 것을 불쌍히 여겨 상소하여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구하지 못하였다.

 

영돈녕부사        오윤겸이 상차하기를,
"신은 여러 해 동안 고질병으로 한가닥 목숨만 보존하고 있으니 시골로 물러났다가 죽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나, 어린애가 어미를 연모하듯 주저하고 조심하면서 차마 결별하지 못하였습니다. 사폐(辭陛)하면서 평소 사우(師友)에게서 들은 것을 가지고 차자 하나를 지어 올려 고인의 유표(遺表)에 비기고 싶었으나, 신의 경솔하고 천박한 말보다는 차라리 준후한 선현의 말씀을 빌어 오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이에 주자(朱子)의 문집 중에서 갑인행궁편전주차(甲寅行宮便殿奏箚)와 우리 나라 이황(李滉)의 문집 중에서 무진봉사(戊辰封事) 돈성조(敦聖條)를 구해서 한 권으로 정서하여, 재계(齋戒)하고 올려 예람(睿覽)에 대비하옵니다. 만일 살펴보시고 받아들여 책상에 놓아두고 매일 펴보시면, 이 두 선현이 아침 저녁으로 전하의 곁에서 교훈을 드릴 것입니다.
아, 삼대(三代) 이후로 바탕이 매우 아름다운 임금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실지로 이 학문에 힘을 써서 능히 백성들 위에 기준을 세운 인군이 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혹은 거짓으로 하고 혹은 박잡하게 하여 순박한 정치를 하지 못하는 것은 정치를 하는 근본정신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사무를 처리하는 것으로 능사를 삼거나 한 세대를 유지하는 것으로 족하게 여기지 마시고, 성인의 심법(心法)을 전하는 것으로 임무를 삼으소서. 그리하여 성인이 말한 이치를 궁구하시고 행한 도(道)를 따르시어 구차한 인습에서 떨쳐 일어나 광명 정대한 곳으로 나아가소서.
옛날에 송 신종(宋神宗)이 정명도(程明道)에게 말하기를 ‘이 요(堯)·순(舜)의 일을 짐이 어떻게 실천할 수 있겠는가.’ 하니, 명도가 슬픈 얼굴을 하면서 대답하기를 ‘폐하의 이 말은 종사(宗社)와 백성에게 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전하께서도 반드시 요·순이 전한 마음으로 학문을 하고, 요·순이 백성을 다스린 것으로 정치를 시행하여 시종 한결같은 마음으로 애쓰고 몸소 실천하시면 종사가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이 지극한 논의를 베껴 올려서 내 마음을 비옥하게 하니, 경의 충성과 정성에 감동하여 기쁨이 그치지 않는다."
하였다. 오윤겸이 드디어 과천(果川)으로 나가서 또 상소하여 고향에서 목숨을 마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은 부드러운 말로 타이르며 허락하지 않았다. 오윤겸이 추숭하는 예에 대해 시종 간쟁하다가 병을 핑계로 체직되었는데 이번에 성묘(省墓)를 위해 떠나가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였다.

 

5월 14일 신해

이조 판서 이귀가 거듭 차자를 올려 종호(宗號)를 빨리 정할 것을 청하였으나, 보류해 두고 내려보내지 않았다. 이번에 또 차자를 올려 재촉하니 그 일을 예조로 내려보냈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묘호(廟號) 한 가지 일을 가지고 중신이 세 번씩이나 차자를 올리고도 그칠 줄을 모르니, 확신하는 일이 아니라면 이렇게까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다만 차자 중에 이른바 당초 시호를 의논할 때에 예조의 관원이 잊어버리고 살피지 않았다고 한 것은 신들의 본의를 알지 못하고 하는 말입니다. 신들은 처음부터 지자 봉사(支子奉祀)는 결단코 불가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초 회계할 때에 누누이 말한 수백 마디의 말이 모두 별묘(別廟)를 세우는 데에 있었으며, 그것은 오로지 부자간의 윤리를 중시한 것입니다. 고위(考位)가 이미 정해졌다면 큰 윤리는 자명한 것이므로 그 사이의 의식 절차의 도수와 융쇄 후박(隆殺厚薄)의 절목 등은 조정에서 한 번 헤아려서 행할 것이지 급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조정이 힘써 추숭을 주장할 때에 신들은 감히 잘못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성상(聖上)께서 반드시 높이고자 하였으나 신들은 감히 이의(異義)를 제기하지 않았으니, 이는 대개 조정에서는 삼대(三代)를 따르고 성상께서는 마땅히 후한 것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존호를 이미 올렸고 부모의 지위가 이미 정해져 의장(儀章)이 갖추어지고 사전(祀典)이 바로되었으니, 그 이상은 감히 신들이 알 바가 아닙니다. 4조(祖)와 공정왕(恭靖王)의 전례에 따라 단지 대왕이라고만 불러도 부족할 것이 없으며, 덕종(德宗)의 고사대로 묘호를 보태도 역시 해로울 것은 없습니다. 다만 고례로 말하면 오직 세실(世室)일 때에만 묘호가 있는 것으로, 아조(我朝) 열성의 칭호는 한 시대의 제도에서 나오는 것이지 원래 고례는 아닙니다. 장릉(章陵)이 비록 4대조(代祖) 안에 있기는 하나 소목(昭穆)에는 들어가지 못하니, 묘호가 보태는 것은 오늘날 의논해야 할 것이 아닌 듯합니다. 그러므로 시호를 의논할 때에 우러러 청하지 않은 것은 실로 뜻이 여기에 있었던 것으로, 잊고 살피지 않았다는 것은 본디 사실이 아니며 고의로 잘못을 저질렀다고 한다면 더욱 억울한 일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감히 잊겠습니까. 또 어찌 변명하여 죄를 면하려 하겠습니까. 다만 중신의 먼저번 차자 중에 있는 ‘황명(皇命)이 내려오기 전에는 무슨 왕이라고 부를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신들의 생각이 실로 여기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덟 자 존호 중에 다만 두 자만 부르는 것은 신들도 편리하지 못한 것 같았으므로 대신들이 수의한 후에 회계하였으나, 중신이 이것을 알지 못해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대저 지난번 대신이 회계할 때에 순서에 따라 거행할 것을 청한 것은 황명이 내려오기를 기다린 것이니, 진실로 뜻한 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중신의 차자에서는 ‘나라 안에서의 사호(私號)를 굳이 황명을 기다릴 것 있느냐’고 하였는데, 이는 현재의 칭호를 중시한 것으로 그 말도 일리가 없지 않습니다. 결론은 하나이지만 늦고 빠른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해조의 직책은 문서를 봉행하는 것이지, 가부나 늦고 빠른 결정에 대한 문제는 위로는 성상이 계시고 아래로는 대신이 있으므로 신들이 감히 마음대로 할 일이 아닙니다."
하니, 차자의 내용대로 시행하여 미진한 점이 없도록 하라고 답하였다.

 

5월 17일 갑인

헌부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중남의 아비에게 부의를 보낸 일은 매우 해괴한 일입니다. 구관(句管)의 여러 신하들은 ‘실로 먼 곳에 사는 사람을 후대하는 도리에 합치된다.’고 하지만, 중남은 나라를 배반하고 적에게 투항하여 우리 나라에 해로운 것이면 무엇이든 음으로 사주한 자입니다. 옛날에 한(漢)나라는 이릉(李陵)이 선우(單于)053)  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키게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 일가를 멸족시켰습니다. 중남의 아비도 왕법으로는 당연히 멸족시켜야 하는데도 국가가 지금까지 관대하여 끝내 명대로 살다 죽도록 두었습니다. 그런데 중남은 뉘우칠 줄을 모르고 더욱 오만 방자하니, 혈기 있는 사람치고 그 누가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구관의 여러 신하들은 법에 의거하여 준엄하게 다스리지 않고 오히려 후한 부의를 청하였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지난 일이기는 하나 그 잘못을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관 당상을 모두 엄중히 추고하소서."
하니, 구관 당상은 별로 추고할 만한 잘못이 없으니, 번거롭지 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후로 연계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5월 19일 병진

간원이 아뢰기를,
"강도(江都)에 저축하는 일은 미리 대비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구관소(句管所)를 설치한 이래로 가까이는 도성 안으로부터 멀리는 팔방(八方) 및 바다 밖에 있는 탐라(耽羅)까지 그 해를 입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어부와 염전하는 이는 이익이 없고, 장사꾼들은 물건을 팔지 못합니다. 재물은 하늘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인데, 백성이 어찌 궁핍해 하고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구관소를 해체하여 백성의 원망을 풀어주소서.
또 근래 선비의 풍습이 날로 더욱 불미스러워집니다. 과거장에서 베껴쓰는 폐단이 이루 다 말할 수 없는데, 생원시(生員試)의 경우는 더욱 심합니다. 전에 부(賦)·시(詩)·론(論)으로써 생원과 진사를 나누어 시험치자는 논의가 있었으며, 《대전(大典)》에도 잠(箴)과 명(銘)으로 진사 시험을 보는 법규가 있습니다. 대저 악습을 바로잡지 못하고 말단적인 글짓는 것에만 힘을 쓰는 것이 비록 근본을 다스리는 것은 아니지만, 만일 교화가 행해지고 풍습이 바로잡혀 사람들이 스스로 글짓기를 기다린다면 효과를 보기 어려울 뿐더러 눈앞의 폐단도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삼남(三南)은 훌륭한 선비가 많이 나는 지방이라서 도사(都事)가 복종시키지 못한 일이 많으며 오랫동안 도내에 있었기 때문에 진실이 아닌 말을 하였을 것이니, 과거장에서 난동을 부리는 폐단이 이러한 데에서 연유하는 점도 있을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다시 상의하여 부·시·론·잠·명을 나누어 생원과 진사의 시험 과목으로 하고, 좌우도(左右道)의 시험 감독관은 모두 중앙의 관원 에서 엄선하여 보내소서.
공조 참판 유순익(柳舜翼)은 축첩을 단속하지 못하여 남들의 말이 많으며, 또 근래에는 어둔 밤에 남모르게 한 일을 가지고 이웃 사대부의 자제를 난타하여 듣는 사람마다 경악하고 있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구관소의 당상 및 유순익은 추고하고, 시험 과목을 개정하는 일은 해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케 하라."
하였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간원이 아뢴 ‘의(疑)·의(義)로 하지 말고 시·부·잠·명·론으로 나누어 생원과 진사 시험을 보이자.’고 한 것은 사실 폐습을 혁신하고자 하는 좋은 생각입니다. 삼가 《대전》을 상고하건대 ‘생원은 오경의(五經義)와 사서의(四書疑) 두 편으로 시험하며, 진사는 부(賦) 1편과 시·잠·명 중 1편을 가지고 시험하여 선발한다.’고 하였으나, 오경의는 근대 고관(考官)된 자가 수에 맞춰 출제하기는 하나 다시 이로써 사람을 선발하지 않으니, 선비들도 다시 학습하는 자가 없습니다. 사서의는 몰래 베껴쓰는 폐단이 비록 심하기는 하나, 지방의 선비 에 문장이 미려하지는 못해도 문리에는 뛰어나서 합격하는 일이 자주 있으니, 참으로 폐지할 수 없습니다. 반정 후에는 시험관이 베낀 것을 잘 가려내고 참신한 글을 뽑았기 때문에 과거보는 선비들의 베끼는 폐단이 이미 2, 3할은 줄었습니다. 근래 본조의 회계로 인하여 ‘정원(定員)에 구애받지 말라.’는 교시가 있었는데, 이것도 성상께서 이런 폐습을 매우 싫어하여 파격적으로 악습을 고치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시험관 된 자는 뇌동(雷同)하는 자들을 힘써 살피며 일정한 법식에 구애받지 말고 오직 이치에 맞고 뜻이 통하는 문장을 뽑는다면, 인재를 얻을 수 있고 많은 선비들이 권면될 것입니다.
또 중국의 오경의에 대한 문제를 보면, 모두 단구(單句)로 문제를 내고 응시자는 주해(註解)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 곧바로 자기 생각을 쓰는 것이 본조의 논(論)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문장이 뛰어나고 주장하는 논리가 화통합니다. 본조 오경의의 문제는 반드시 두 귀절로 대구를 이루게 하니 기교가 지나쳐 출제할 때에 이미 어렵다고 느끼는데 한 편 의 상하 문자에도 일정한 규칙을 두어 제약이 너무 지나칩니다. 그러니 비록 글을 잘하는 선비가 있더라도 재주를 발휘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더욱 쉽게 뇌동하고 중도에 포기하게 만드는 까닭입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중국의 선발 방식을 따라 단구로 문제를 내고 이치에 맞는 것을 뽑는다면 베끼는 폐단이 자연히 없어질 것이며, 조종조에 오경(五經)에서 출제하여 시험을 쳐 경술(經術)을 권면한 뜻이 오늘날에 행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진사시에 잠과 명으로 출제하는 것은 바로 법전에 있으므로 고관이 법전을 참고하여 시행하면 되는 일입니다.
삼남의 시관(試官)을 모두 중앙의 관원 에서 선발하여 보내자는 말도 역시 사정(私情)을 막고 국가 시험을 권위있게 하자는 뜻입니다만 신들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보좌하는 관원의 임무는 본래 가벼운 것이 아닌데, 해조가 선발하여 보낼 때에 부적격자가 많아서 혹 스스로 몸가짐을 바로 하지 못하니, 이것은 이조의 책임입니다. 진실로 사람을 선발하지 못한다면 중앙 관원을 보내더라도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적임자를 얻는다면 많은 선비를 감독하는 것은 도사(都事)만으로도 족합니다. 대저 조종조의 규칙은 깊이 생각하여 나온 것이나 혹 폐단이 없을 수 없으니, 이것은 사람의 잘못입니다. 그중에 혹 시대가 변하여 고쳐야 할 것이 정말 있기는 하지만, 만일 그 근본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과거의 규칙을 일일이 고치려고 한다면 화살을 따라가며 과녁을 세우는 것과 같아서 아마도 끝내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신들이 말씀드린 의(疑)·의(義)의 출제 방식을 조금 변경하는 것과 같은 것은 조종조의 규칙의 본의를 살릴 것이며, 변경하고자 하는 것은 말단적인 잘못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감히 신들의 생각을 자신할 수 없으니 대신과 상의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대신이 의논드리기를,
"해조의 계사가 매우 자세하며 법전의 본의를 잃지 않았으니, 이대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대신에게 대왕의 종호(宗號)를 의논하여 정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앞서 이조 판서 이귀가 차자를 올려 종호를 정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상이 예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정하도록 하였으나, 예조가 불가하다고 하니, 상이 차자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예조가 대신과 의논하기를 청하였는데 대신도 불가하다고 하였다. 상이 끝내 듣지 않고 드디어 ‘원(元)’이라고 종호를 정하였다. 시호를 정하는 법에 의리를 주로 하고 덕행을 행했을 때 원이라 한다.

 

김시양(金時讓)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정태화(鄭太和)를 이조 좌랑으로, 김육(金堉)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5월 20일 정사

양사(兩司)가 아뢰기를,
"조정에서 예를 논한 지 10년만에 별묘의 제도를 정하여 의식 절차도 이미 마쳤고 대사도 이미 치렀으니, 전하의 지극한 인정이 이미 펴졌습니다. 전하에게 이 일을 하도록 권한 자의 말이 이미 행해졌는데도 매양 새로운 의견을 내어, 처음에는 나라 안에서 부를 칭호를 가지고 말하더니 계속해서 속히 종호를 정하라고 청하였습니다. 예관이 불가하다는 계를 올렸고 대신도 곤란하다고 하는데, 전하께서는 어찌 모두 듣지 않으시고 한 사람의 아부하는 말을 따라 이런 대례를 행하려고 하십니까. 전하께서 전날 종묘에 들이지 않는다고 하교하시어 우러르지 않는 신하가 없었는데, 얼마 안 지나서 또 이런 하교를 내리시니 하나의 마음이 어찌 이다지도 자주 변하십니까? 자고로 종묘에 들이고도 종호를 부르지 않은 일은 있어도, 종묘에 들이지 아니하고 종호를 부른 예는 아직 없습니다. 저 이귀가 미치광이라는 것은 전하께서도 잘 아시는 바입니다. 미치광이가 어찌 예를 논할 수 있으며, 그의 말을 반드시 써야 하겠습니까. 종호를 추존하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조정의 일은 한집안의 일이 아니며 예를 논하는 자리는 난장판이 아닌데, 이조 판서 이귀는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매번 거친 말을 하며 예를 논한다는 핑계로 대신을 모욕합니다. 단지 상소나 차자에서 번번이 비난할 뿐 아니라, 묘당(廟堂)의 회의에서도 항상 배척하니, 분명히 핍박하고 동요시키는 형상이 있습니다. 모든 보거나 들은 사람치고 누가 통분하고 해괴해 하지 않겠습니까. 일이 국체(國體)와 관련되므로 공훈이 있다 하여 용서할 수 없습니다.
평산 현감(平山縣監) 이일원(李一元)은 오랫동안 오랑캐 땅에 포로로 있으면서 노예처럼 취급받았습니다. 서로(西路)의 관방(關防)을 그에게 맡겨 적에게 경시받을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이귀는 파직하고, 이일원은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합계(合啓) 중에 예관이 불가하다는 계를 올렸다는 것은 어떤 공사(公事)를 가리켜서 말하는 것인가? 일품(一品)의 원훈에 대해 ‘일부(一夫)’ 혹은 ‘말이 거칠다’는 등의 말로 모욕한 전례가 있는가? 이 말이 또한 겸양하는 예의에 맞는가? 살펴 아뢰도록 하라."
하였는데, 승지 여이징(呂爾徵)이 아뢰기를,
"예조가 회계한 말을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대각(臺閣)이 논할 것을 생각해 보건대, 비록 과격한 말은 있으나 하문한 것은 타당치 못한 듯하므로 신은 감히 살펴 아뢸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너도 세속의 작태를 면치 못하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하였다.

 

5월 21일 무오

대사헌 김상헌(金尙憲)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어제 정원에 하교한 것을 듣건대, 지극히 송구스럽습니다. 대간의 계사, 장관의 명령, 이귀를 탄핵하는 글 등은 모두 신이 한 짓입니다. 대저 묘당의 예가 오로지 엄숙하고 정성스러운 것과 대간의 논의가 강직한 것은 곧 당연한 체모입니다. 말을 거칠게 했다는 것은 그 기상을 그대로 쓴 것이며, 바로 잡으려는 행동은 모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주나라도 10명의 어진 백성을 얻었을 뿐이다.’는 말은 글을 쓰는 격식이지, 어찌 깊은 뜻이 있겠습니까. 옛날에 소망지(蕭望之)는 어사 대부로서 승상을 만났을 때 무례하였다고 하여 김안상(金安上) 등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좌천당했습니다. 어사 대부는 지위가 상경(上卿)과 삼공의 다음인데도 한 마디 말이 불손하다 하여 모두 그 허물을 바로잡았으니, 일품이라 하여 옹호받았던 경우가 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성품이 편협하여 무슨 일에나 번번이 낭패를 봅니다. 지금 또 망발하여 엄중한 교지를 받았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집의 이유달(李惟達), 장령 고부천(高傅川)·이행건(李行健), 지평 오달승(吳達升)·송국택(宋國澤)이 모두 이 때문에 인피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대사간 이상길(李尙吉), 사간 한필원(韓必遠), 헌납 심연(沈演), 정언 조빈(趙贇) 등이 아뢰기를,
"무릇 합계한 내용은 반드시 서로 의논한 뒤에 아뢴 것입니다. 어제 계사 중에 ‘일부(一夫)’라는 말은 그저 보통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성상께서는 모욕이라고 물리치기까지 하셨습니다. 헌부가 이미 이 때문에 인피하였으니, 신들이 어찌 감히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모두 물러가서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이 상차하기를,
"대관(臺官)이 일마다 논열하는 것은 곧 그들의 직책이니, 바로 잡는 데에만 뜻이 있고 별다른 곡절이 없다면 그들이 말한 것들은 애당초 모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엄중한 교지가 내리자 혹은 동료의 간통(簡通)을 보았다고 하고 혹은 이 논의에 동참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변명하려는 것으로서 전혀 대간(臺諫)의 체통이 없는 짓입니다. 일이 진실로 거론할 만한 것이라면 발의를 일찍 하고 늦게 하는 것은 말할 것이 못 되니, 이로써 인피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사헌 김상헌, 지평 송국택, 대사간 이상길, 사간 한필원, 헌납 심연, 정언 조빈을 출사케하고, 집의 이유달, 장령 고부천·이행건, 지평 오달승은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저께 종호를 의논할 때에 양사(兩司) 장관이 처음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다가 물러가서 뒷말을 한 것이 첫째 잘못이며, 예조의 회계에 대해 별로 반대한 말이 없었는데 반대하였다고 하는 것이 두 번째 잘못이며, 이귀의 공은 사직을 보존한 것이며 나이나 직위가 모두 높으므로 대관이 매도할 수 없는데 매도한 것이 세 번째 잘못이다. 김상헌 등은 이 세 가지 잘못이 있으므로 그대로 대각(臺閣)에 있게 할 수 없으나, 본관의 처치가 이러하니 아뢴 대로 하라. 이유달 등도 체직하지 말라."
하였다.

 

5월 22일 기미

대사간 이상길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엄중한 교지를 받아 보니 ‘처음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물러가서 뒷말을 한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그날 대신이 양사 장관의 동참 여부를 물었는데, 정원의 아전이 와서 명패(命牌) 중에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과 김상헌은 물러갔던 것입니다.
또 예조의 회계 중에 ‘장릉(章陵)이 비록 4대조(代祖) 안에 있으나 소목(昭穆)에는 있지 않으니 묘호를 정하는 것은 금일 꼭 논해야 할 것은 아닌 듯하다.’고 한 것은 방계(防啓)하는 말이 아닙니까. 언관의 책무는 오로지 강직한 것을 위주로 하므로 일이 과연 논해야 할 것이라면 이귀의 공과 직위가 높은 것은 헤아릴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일부(一夫)’라는 말은 말을 하던 중 그저 나온 것으로 처음부터 모욕하려는 뜻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상의 교지가 이러하므로 신의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하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해조가 꾸며댄 말을 방계라고 하니, 이 또한 이상하구나."
하였다.

 

대사헌 김상헌이 아뢰기를,
"19일 시호(諡號)를 의논할 때에 신은 종묘의례(宗廟疑禮)에 대하여 수의(收議) 할 일로 빈청에 나아갔는데 ‘양사 장관도 동참하는가?’ 하는 대신의 질문에 대해 정원의 아전이 ‘전일 시호를 의논할 때에도 명초(命招)하지 않았다.’고 대답하므로, 신은 즉시 물러나왔습니다. 만약 동참하였다면 어찌 그때 소견을 모두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예조의 회계 중에 ‘장릉(章陵)이 비록 4대조 안에 있으나 소목(昭穆)에 있지 않으므로 묘호를 더하는 것은 금일 꼭 논해야 할 것이 아니다.’고 한 말이 있으므로 판부(判府)에 ‘회계대로 시행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차자대로 시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공사(公事)가 있는데 신이 어찌 감히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문언박(文彦博)은 나이나 벼슬이 높은데도 당개(唐介)가 힐난하였으며, 이숙번(李叔蕃)은 공이 이귀보다 못하지 않은데도 대간이 유배를 청했습니다. 아무리 사직에 공이 있더라도 공을 빙자하여 교만하고 방자하면 결국은 사직에 근심이 됩니다. 국가에서 대관(臺官)을 설립하고 그들로 하여금 시정(時政)을 논하고 모든 관료를 규찰하게 하였으니,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뭇관원에 이르기까지 잘못이 있으면 모두 바로잡도록 논박하는 것이 큰 그 직책일 뿐입니다. 말하지 않으면 잘못인데, 어찌 까닭없이 모욕하려는 뜻을 두겠습니까.
또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지금 장마가 너무 심해 도로가 두절되고 곡식이 물에 잠겨 백성들이 근심을 이기지 못하자 나라에서는 기도를 드리려고 합니다. 대개 예를 의논하기 시작한 이래로 조정의 의론이 거스르는 것이 많아 전하의 진노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여러 사람의 감정이 막혀서 트이지 못하므로 도로가 두절된 것이며, 정직한 선비가 축출당한 까닭에 곡식이 잠긴 것입니다. 하늘의 재앙은 우리 천하를 경고하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전하께서는 척연히 뉘우치시어 구름이 걷히고 태양이 나타난 것같이 언로(言路)를 넓게 여시고 내쫓은 신하를 부르신다면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여 하늘의 뜻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니, 기도를 올리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신이 이제 사직하면 구구하게 품은 생각을 다시 전달할 길이 없겠기에 감히 지리한 말씀을 올려 천위(天威)를 거스릅니다. 한 번 아뢰는 것도 당연히 혼날 일인데 거듭 아뢰었으니, 신의 죄가 여기에 이르러서는 더욱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신이 이미 세 가지 잘못을 했다는 교지를 받았고 또 두 번 아뢰는 죄를 지었으니, 속히 파직을 명하소서."
하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지평 송국택(宋國澤)·오달승(吳達升), 사간 한필원(韓必遠), 헌납 심연(沈演), 정언 조빈(趙贇)이 모두 이로써 인피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김상헌 등이 말한 것은 어떻게 표현했든 간에 그 말은 곧 백성들의 말이며 그 뜻은 공적인 데에서 나왔으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비록 혹 지나친 말이 있더라도 옳은 것을 취해서 쓰는 것이 마땅하지, 한두 마디의 지나친 말 때문에 거절하는 빌미로 삼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옥당이 출사나 체직을 청한 것도 한때의 공론을 따른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대간의 말에 대해서는 세 가지 잘못을 지적하셨고 옥당의 차자에 대해서는 체직과 출사가 상반되게 하셨습니다. 언로가 이로부터 끊길까 심히 두렵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세 가지 잘못을 들어 물리치셨다면 이는 출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또 아뢴 대로 하라는 것은 출사케 하는 것입니다. 이로 볼 때 전하께서 대각을 대하는 것이 과연 성의에서 나온 것입니까.
지금 재앙과 이변이 많고 한래(旱害)와 수해(水害)가 계속되고 있으니 지금은 바로 전하께서 근신하고 반성하며 부지런히 훌륭한 방책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도량을 넓혀 크게 언로를 여시고 신하들을 대우함에 한결같이 성의를 다하소서."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5월 23일 경신

장령 고부천·이행건, 집의 이유달도 이 때문에 인피하였다. 옥당이 대사간 이상길, 대사헌 김상헌, 지평 송국택, 사간 한필원, 헌납 심연, 정언 조빈의 출사와 지평 오달승, 장령 고부천·이행건, 집의 이유달의 체직을 청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5월 24일 신유

대사헌 김상헌, 지평 송국택, 대사간 이상길, 사간 한필원, 헌납 심연, 정언 조빈도 감히 출사하지 못하고 인피하였다. 옥당이 또 모두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김상헌은 또 인피하니, 이상길 등도 모두 이를 따랐다. 옥당이 논의가 엄정하여 쟁신(諍臣)의 체모를 제법 얻었으나 인피가 너무 지나쳐 번거롭게 되었다고 하여 모두 체직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5월 25일 임술

강석기(姜碩期)를 대사헌으로, 이명한(李明漢)을 대사간으로, 민응형(閔應亨)을 집의로, 최혜길(崔惠吉)을 사간으로, 김덕승(金德承)·김휼(金霱)을 장령으로, 김효건(金孝建)·윤효영(尹孝永)을 지평으로, 이경중(李景曾)을 헌납으로, 이만(李曼)을 정언으로, 심연(沈演)을 교리로 삼았다.

 

5월 26일 계해

대왕의 영정(影幀)을 숭은전(崇恩殿)에 봉안하였다.

 

대사헌 강석기가 인피하며 아뢰기를,
"지난번 양사의 논의에 비록 과격한 말은 있었으나, 그 주장을 요약하면 언관의 책무를 다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전하께서는 그 본의를 생각하지 않으시고 문자상에 나타난 것만 가지고 무리하게 세 가지 잘못을 지적하는 하교를 내리기까지 하셨으니, 상하간의 상호 불신이 이토록 심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임이 막중한 풍헌(風憲)의 우두머리에 신같이 용렬하고 나약한 자가 결단코 구차하게 있기가 어려우니, 체직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5월 27일 갑자

상이 승화전(承華殿)에 나아가서 대왕과 왕비의 신주를 옮겨서 숭은전에 봉안하였다. 옮길 때는 동가(動駕)를 고하는 제사를 지내고, 옮겨 봉안한 후에는 중뢰(中牢)054)  로 제사하였다. 제사를 마치고 대왕의 영정을 봉심하였다.

 

양사가 종호(宗號)를 올리라는 명을 취소할 것을 다시 청하였다. 이후로 여러번 계를 올렸으나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5월 28일 을축

좌의정 이정귀(李廷龜)가 처음으로 사직서를 냈는데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사간 최혜길(崔惠吉)이 아뢰기를,
"합계(合啓) 중에 두 마디의 과격한 말이 있는 것 같아서 신은 삭제하자는 뜻으로 통문(通文)에 회답하였으나, 동료들은 다만 몇 자만 고치고 다시 물어보지 않은 채 계를 올렸습니다. 이는 모두 신의 말이 미덥지 못한 소치이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숭은전이 비록 종묘와 차이가 있지만 이미 4대조의 안에 있으니, 조부와 부친의 제사에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추향(秋享)부터는 서계(誓戒)와 의식 연습을 모두 예조에서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5월 29일 병인

장릉 제조(章陵提調) 윤신지(尹新之)를 가자하고, 낭청 이정남(李井男)·안시현(安時賢)을 승서(陞敍)하고, 감조관(監造官) 김진(金璡) 등 3인을 6품으로 천전(遷轉)하였다.

 

장령 김휼(金霱)이 인피하며 아뢰기를,
"대가(大駕)가 이미 궐문을 나가고 ‘시신(侍臣)은 말을 타시오.’ 하는 명을 내린 뒤인데 도감의 작문 초관(作門哨官)이 시신이 탄 말을 들여 보내지 않아 전도되게까지 하였습니다. 신은 일단 도감의 하인을 구속하도록 하였으나, 도감은 백첩(白帖)으로 구속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합니다. 신은 소홀히 한 책임을 면하기 어려우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