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정묘
간원이 아뢰기를,
"승여(乘輿)가 궐문으로 나간 다음, 통례(通禮)가 조금 기다릴 것을 주청하고 중검(中檢)으로 하여금 ‘시신은 말을 타시오.’라고 전하여 부른 뒤에 비로소 출발을 청하는 것은 시신을 우대하는 것입니다. 전일 친제(親祭)할 때에 작문 초관이 시신이 탄 말을 들여보내지 않아서 기다리고 있는 사이에 통례가 지레 출발을 청하여 관원들이 전도되고 예모가 잘못되게 하였는데 환궁할 때에도 이와 같았습니다. 통제하는 것이 그들의 본래 임무이기는 하나 사체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예모관(禮貌官)과 작문 초관을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작문 초관이 법대로 직무를 수행한 것은 지극히 잘한 일이다. 나는 상을 주려고 하니 그대들은 무식한 말을 하지 말라."
하였다. 정언 이만(李曼), 대사간 이명한(李明漢)이 인피하여 물러가니, 옥당이 처치하기를,
"시신이 말을 탔을 때 전도되고 황급했던 것은 여러 사람이 본 바이니 하인을 부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나 백첩으로 구속하는 것은 위법입니다. 그리고 숙위하는 군사가 출입을 통제하는 것은 본디 그 직책일 뿐입니다만 시신을 구박하고 꾸짖으며 능멸하는 데까지 이르렀다면 장관을 파직하라고 계를 올린 것은 일을 논하는 원칙에 꼭 부합합니다. 정언 이만, 대사간 이명한은 출사케 하고, 장령 김휼은 체차하소서."
하이, 상이 이를 따랐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지난번 거동할 때에 작문 초관은 한결같이 규칙대로 하면서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니, 상을 줄 만큼 잘한 일은 있어도 다스려야 할 죄는 없었다. 그런데 젊고 무식한 무리들이 사리를 살피지 않고 한갓 구해낼 것만 생각하여 ‘일을 논하는 원칙에 부합한다.’고 하였으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교리 심연(沈演) 등을 추고하여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키라."
6월 3일 기사
오백령(吳百齡)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6월 4일 경오
자전(慈殿)이 병이 나서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였다.
6월 5일 신미
헌부가 아뢰기를,
"평산 부사(平山府使) 김대건(金大乾)은 일찍이 경원 부사(慶源府使)로 있을 때 많은 담비 가죽과 삼(蔘)을 빼돌리다가 탐오한 정상이 도적의 공초에서 드러나 이 때문에 구속되어 추문을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중죄를 면한 것에 대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원통해 하고 있는데 본직에 제수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니 더욱 놀랍습니다. 하물며 평산은 서로(西路)의 요지이니 이 사람에게 맡길 수 없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체차하라고 답하였다.
6월 6일 임신
김수현(金壽賢)을 대사헌으로, 홍방(洪霶)을 도승지로, 이경석(李景奭)을 대사간으로, 김육(金堉)을 부응교로 삼았다.
6월 7일 계유
헌부가 아뢰기를,
"삼가 자전께서 이어(移御)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인경궁(仁慶宮)이 비록 멀지 않다고는 하나, 이렇게 무더운 때에 이어하시다가는 필경 몸이 상하게 될 것입니다. 약방(藥房)과 정원(政院)이 연이어 타당하지 않다는 말씀을 드렸으나 아직까지도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니, 신들은 매우 민망스럽습니다. 상께서 부드러운 말로 말씀을 드린다면 반드시 자전의 뜻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니, 이어하시지 말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병중에 거처를 옮기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므로 너희들은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6월 8일 갑술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자전께서 대내(大內)에 옮기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있어 오늘밤에 인경궁으로 이어하고자 하니, 이런 뜻을 양사(兩司)에 알리라."
사업(司業) 박지계(朴知誡)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답하였다.
"기왕의 무식하다는 말을 지금 제기할 필요는 없다.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반드시 속히 올라오라."
6월 9일 을해
자전이 인경궁으로 이어하였다.
간원이 강도(江都)의 구관소(句管所)를 해체할 것을 청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명한(李明漢)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6월 11일 정축
내의원(內醫院)이 윤선도(尹善道)와 이찬(李燦)을 부를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를 따랐다.
6월 12일 무인
이조 판서 이귀가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6월 13일 기묘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현양(顯陽), 공신(拱辰), 연화(延和) 세 문의 현판의 명칭을 고쳐 짓게 하라."
좌의정 이정귀가 병 때문에 면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정언 정뇌경(鄭雷卿)이 사직하고자 상소하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였다. 해조가 체직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하자, 상이 이를 따랐다.
6월 15일 신사
헌부가 아뢰기를,
"영성군(寧城君)의 노복이 전옥(典獄)에 침입하여 죄수들을 조종하여 관원을 욕보였는데, 이것은 전에 없던 변고입니다. 완악한 노복을 받아들여 숨겨주고 그 악행을 방조하여 국법을 무시한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6월 16일 임오
영돈녕부사 오윤겸이 광주(廣州)에 물러가 있으면서 신병(身病) 때문에 문안에 참여하지 못하자 상소하여 죄를 청했으나, 상이 이를 위로하고 타일렀다. 자전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즉시 입궐하였다.
이조 판서 이귀가 상소하기를,
"신이 예를 논하는 일로 시의(時議)에 죄를 지은 지 오래되었으나 오히려 괘념하지 않은 것은 사람에게는 각기 의견이 있으므로 다른 사람이 모두 자기 생각과 구태여 같을 필요는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의 일은 전과는 크게 달라서 국론이 통일되고 대례가 이미 정해졌으며, 팔방으로부터 하례를 받고 주청(奏請)하는 일행도 이미 출발하기까지 하였으니, 무릇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누가 대왕의 신하가 아니겠습니까. 전날의 이론(異論)이 이제 그칠 수 있습니다. 지금 대간이 비록 스스로는 강직한 절조가 있다고 여기고 있으나, 김상헌 이하 누가 하례하고 제사지내는 행렬에 참여하지 않은 자가 있습니까. 지금 이미 정해진 종호(宗號)를 삭제하는 것으로써 자기들의 절조를 세울 빌미를 삼으려 하니, 신은 실로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상소를 모두 살펴보았다. 김상헌의 괴상한 해동에 대해 괘념할 필요가 없으니, 경은 굳이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6월 17일 계미
이에 앞서 이조 판서 이귀가, 합계(合啓)가 그치지 않는 것에 분노하여 장황하게 상소하여 대간을 모욕하였다. 이 때문에 대사헌 김수현(金壽賢), 대사간 이명한(李明漢)이 인피하였다.
6월 18일 갑신
옥당이 차자를 올려 양사의 공통된 의견을 흔쾌히 따를 것을 청하니, 상은 3일 동안 보류하다가 알았다고 답하였다.
정언 정뇌경(鄭雷卿)이 인피하기를,
"신은 사정(私情)이 절박하여 만 번 죽을 것을 무릅쓰고 거듭 천청(天廳)을 어지럽혔으나 죄를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온유한 비답을 내리시니, 황공하기 그지없고 감격의 눈물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위로 조정에서 소중한 것은 명기(名器)이며 사대부가 힘써야 할 것은 염치입니다. 신은 한푼의 장점도 없고 더구나 선조에 잘못이 있음에도055) 불구하고 다만 은총과 영화를 연모하여 뻔뻔스레 얼굴을 들고 벼슬길에 나간다면 위로는 성상께 누가 되고 아래로는 물의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신에게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간원이 처치하기를,
"옛날에 형벌을 논함에 있어서는 후손에게까지 미치지 않았으며, 국가에서 사람을 쓰는 데는 다만 그 재능을 취할 뿐입니다. 정언 정뇌경은 비록 선대의 잘못이 있기는 하나 대수가 이미 멀고 사면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의 증조부 정담(鄭䃫)은 친아들인데도 일찍이 선대 조정에서 예랑(禮郞)·기막(畿幕)과 겸춘추(兼春秋)를 지냈으니, 이는 벼슬이 허락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닙니다. 대수가 먼 자손은 친아들과는 자연 차이가 있는 것인데 오늘날의 법이 어찌 선대 조정에서보다 심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정뇌경은 기국(器局)이 훌륭하고 재능이 쓸 만하여 묘당이 이미 천거하였고, 전부(銓部)에서도 누차 선발되었으니, 공론의 소재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결같이 주저하고 이렇게 인피하니 겸양의 미덕을 더욱 상상할 수 있습니다. 청의(淸議)에 조금도 이론이 없고 성상의 비답도 정녕 그러하니 지금 피해야 할 혐의가 없습니다. 출사를 명하소서."
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부제학 유백증(兪伯曾)이 상소하기를,
"신은 일찍이 관각 당상(館閣堂上)으로 시호를 의논하는 자리에 참석하였으므로 본관(本館)이 차자를 올릴 때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신의 처지가 실로 난처하니,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속히 삭직(削職)시켜 공(公)과 사(私)를 편안케 하소서."
하니,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공무를 보라고 답하였다.
6월 19일 을유
동지 겸성절 천추사(冬至兼聖節千秋使) 이선행(李善行)이 북경(北京)에 가는데 상이 친히 배표례(拜表禮)를 행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요즈음 시약(侍藥)하느라 상하가 걱정하며 경황이 없는데, 감찰 이장형(李長馨)은 잔치를 베풀고 풍악소리를 내었으니 심히 무식합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6월 21일 정해
대비의 병이 위독하자, 상이 산천·사직·종묘에 기도할 것과 원옥(冤獄)을 심리할 것을 명하였다.
좌의정 이정귀가 병 때문에 면직을 요청하였다가, 이때에 이르러 자전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곧 출사하였다.
6월 22일 무자
예조 참의 이준(李埈)이 상소하기를,
"신은 병이 나서 궐문 아래에 나가 사례드릴 수 없는데, 보답하는 말 한마디도 없다면 신이 너무 성은을 저버리는 일일 것입니다. 이에 신은 감히 요즈음 본 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재물이 떨어져 창고가 비고, 백성이 유랑하여 논밭이 묵으며, 조정의 기강이 세워지지 못하고 변방에는 많은 위험이 있으며, 그밖에 쌓인 폐단은 어지럽기가 실이 엉켜서 풀리지 않고 지붕이 새는데도 구차스레 지내는 것과 같아서, 가의(賈誼)가 다시 태어난다면 여섯 가지 탄식만 할 뿐이 아닐 것입니다. 신이 걱정하는 것은 이보다 큰 것이 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국가의 화근은 항상 선비의 기풍이 위축된 데에서 유래합니다. 주(周)나라가 쇠퇴한 때에는 모든 사람이 구차하여 격려하는 기풍이 적었으며, 서한(西漢)이 쇠퇴한 때에는 온 세상이 나약해져서 주저하고 두려워하는 기풍이 많았습니다. 역대의 흥망은 모두 이와 같이 당시 임금의 호오(好惡)에 의해 자초된 것입니다. 옛날의 성왕(聖王)은 치란(治亂)의 원인이 모두 사기(士氣)가 쇠약한가 왕성한가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말을 구할 때에는 감간고(敢諫鼓)와 비방목(誹謗木)를 설치하였으며 말을 들으면 돌을 물에 던진 것 같이 항상 직언을 용납하여 예기(銳氣)를 길렀습니다. 비록 소략하고 허황되며 어긋나서 일에 절실하지 않더라도 항상 겸허하게 받아들여 평상시에는 꼿꼿하게 간쟁하고 어지러울 때는 의리를 따르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후세에 본받을 만한 임금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인자하시고 공손하시며 겸양하시고 묻기를 좋아하시며 비근한 것을 살피셨습니다. 일찍이 경연에서 하교하기를 ‘임금이 간언을 받아들이기도 어렵고 신하가 간언을 하기도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성상께서 이미 간언을 받아 들이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 스스로 힘쓰셨으니, 반드시 신하들에게 간언하도록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문할 즈음에는 화락하게 문답하고 옥음(玉音)은 메아리와 같아 군신간의 아름다운 토론을 다시 볼 것으로 기대했는데 어찌 처음의 정치와는 다른 지난번의 일이 일어날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삼사(三司)의 관원이 각각 소견대로 시비를 논쟁하는 것은 모두 임금을 사랑하고 직책을 다하려는 뜻에서 한 것이니 장려할 것이지 죄를 줄 일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한갓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데 편견을 가지고 체직하고 귀양보내라는 명을 내리기까지 하셨으니, 천둥 같은 위엄을 지나치게 쓴 것은 아닙니까. 공(工)·사(師)가 서로 권면하는 것은 옛날의 도입니다. 거론할 만한 일이면 훈구 대신이라도 피하지 않는다는 것은 소우(蕭瑀)가 이정(李靖)을 탄핵한 것을056)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하물며 대신에게 모욕하는 말을 하였는데도 언관(言官)이 머뭇거리며 탄핵하지 않는다면 팔다리 같은 신하의 체모가 중후하지 못할 뿐더러 의심과 두려움이 서로 일어나 소신껏 일하지 못할 것이니, 어떻게 동심 협력하여 널리 어려움을 구제하기를 바라겠습니까. 전일 양사가 간쟁한 것에 대해 실로 그 허물은 보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여기에 대하여 사견(私見)으로 억제하셨으니, 어찌하여 사리(事理)에 입각하여 그 시비를 보지 않으십니까.
옛날부터 신하의 진언에는 충후(忠厚)하고 과격한 차이가 있으나 임금이 너그러이 용납해 주지 않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송(宋)나라의 여회(呂誨)는 집정 대신(執政大臣)과 다툴 때에 그 말이 참으로 지나치게 강직하였으나 영종(英宗)은 모두 용서하였고, 또 그 일을 가지고 언관을 축출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거듭 중사(中使)를 그의 집에 보내 불렀으니, 이 어찌 훌륭한 덕행이 아니겠습니까. 당 헌종(唐憲宗)이 이강(李絳)에게 말하기를 ‘간관(諫官)으로 붕당을 지어 비방하는 자가 많은데 그 중에 심한 자를 축출하려고 한다.’ 하니, 강이 아뢰기를 ‘이것은 폐하의 뜻이 아닙니다. 필경 이로써 상의 마음을 흔들어 잘못되게 하려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고 하면서, 이어서 신하가 직간하기 어려운 점을 자세히 말하였습니다. 대개 붕당을 지어 비방하는 일은 군주가 심히 싫어하는 것이므로 이를 기화로 격노케 하려는 자가 있습니다. 만일 이강의 자세한 변설과 헌종의 흔쾌히 받아들인 아름다움이 아니었다면, 황보부(皇甫鎛)와 이봉길(李逢吉)의 무리들이 어찌 반드시 말년이 되어서야 득세했겠습니까?
지금 몇몇 신하의 충성은 고인(古人)보다 못하지 않은데 유독 성상께서 간언을 들어주는 도리는 고인과 다르니, 성인 같은 전하께서 쇠퇴해가는 말세의 일을 하실 줄을 전연 생각지 못했습니다. 군주는 숭고한 지위에 있으면서 두려운 것은 오직 대간뿐입니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경시하는 마음이 있으면 거만하게 스스로 성인인 척하며 홀대하고 배척하기를 기탄없이 합니다. 그리하여 상서로운 봉황은 울지 않고 요사스러운 여우가 재앙을 일으키게 되어 마침내는 사슴 보고 말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됩니다.057) 수십 년 동안 선비의 풍습이 굳세지 못해서 비분 강개하며 분발하는 기운은 적고 입을 다물고 두려워하는 기풍은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직언은 듣지 못하게 되고 아첨하는 사람은 다투어 일어나서 형극의 길을 열고 불치병에 걸리기까지 하였으니, 무너진 기강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바로 오늘날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혼조(昏朝) 때에 충언을 물리친 것을 경계하시고, 명철한 인군이 간언하는 신하에게 상주던 것을 본받으소서. 그리하여 두루 받아들여 고르게 베푸는 것을 덕으로 삼고 현인을 친히 하고 아첨하는 자를 멀리 하는 것을 법으로 삼으셔서 귀양보낸 모든 신하를 부르시어 뉘우치는 뜻을 보이신다면 전하의 지위는 절로 높아져 풍채는 볼 만한 것입니다. 그리고 상께서 허물을 고치시는데 그 누가 우러러보지 않겠습니까. 또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어진 상신(相臣) 김류(金瑬)는 혼란한 시기에 전하를 잘 보좌한 사람입니다. 훈구 대신을 하루아침에 배척하는 것이 어찌 성상께서 성의와 공경을 다하고 임명하며 의심하지 않는 뜻입니까. 또한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이 점을 두렵게 생각하시어 백발의 옛 신하를 산지(散地)에 오래 두지 않으시면 상하간에 서로 믿음이 생겨 국가의 형세가 반석같이 굳건해질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상소문을 보류하여 두고 내려보내지 않았다. 얼마 있다가 예조가, 일이 많을 때에 오랫동안 올라오지 않고 자리를 비우는 것이 걱정된다고 체직할 것을 청하자, 상이 체직하지 말고 올라오게 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49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489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註 056] 소우(蕭瑀)가 이정(李靖)을 탄핵한 것을 : 돌궐(突厥)의 가한(可汗) 힐리(頡利)가 당(唐)에 쳐들어 왔다가 세가 불리하므로 사신을 보내 항복할 뜻을 보였다. 당 태종(太宗)이 이를 받아들이기고 하고 이정을 보내 영접하도록 하였는데, 이정은 힐리가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공격하여 돌궐을 멸망시켰다. 이에 태종이 크게 기뻐하면서 대사면령을 내리고 5일 동안 큰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어사 대부 소우는 이정이 화친하라는 군령을 어기고 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아왔으며 돌궐에 있던 진기한 보물들을 잃어버렸다고 탄핵하였다. 《당서(唐書)》 권93 이정 열전(李靖列傳).[註 057] 사슴 보고 말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됩니다. : 권세에 눌러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 《사기(史記)》 권6 진 시황 본기(秦始皇本紀)에 "조고(趙高)가 난을 일으키기에 앞서 군신들이 들어주지 않을까 염려하여 이세(二世)에게 사슴을 바치며 말이라고 하자, 이세는 웃으며 ‘승상이 착각한 것이다.’ 하였다. 이어 좌우에게 물으니 어떤 이는 말없이 있고, 어떤 이는 말이라고 하여 조고에게 아첨하고, 어떤 자는 사슴이라고 사실대로 말했는데, 사슴이라 한 자는 음해를 당했으므로 그 후로는 군신들이 모두 조고를 두려워하였다." 하였는데 여기서 연유한 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수십 년 동안 선비의 풍습이 굳세지 못해서 비분 강개하며 분발하는 기운은 적고 입을 다물고 두려워하는 기풍은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직언은 듣지 못하게 되고 아첨하는 사람은 다투어 일어나서 형극의 길을 열고 불치병에 걸리기까지 하였으니, 무너진 기강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바로 오늘날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혼조(昏朝) 때에 충언을 물리친 것을 경계하시고, 명철한 인군이 간언하는 신하에게 상주던 것을 본받으소서. 그리하여 두루 받아들여 고르게 베푸는 것을 덕으로 삼고 현인을 친히 하고 아첨하는 자를 멀리 하는 것을 법으로 삼으셔서 귀양보낸 모든 신하를 부르시어 뉘우치는 뜻을 보이신다면 전하의 지위는 절로 높아져 풍채는 볼 만한 것입니다. 그리고 상께서 허물을 고치시는데 그 누가 우러러보지 않겠습니까.
또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어진 상신(相臣) 김류(金瑬)는 혼란한 시기에 전하를 잘 보좌한 사람입니다. 훈구 대신을 하루아침에 배척하는 것이 어찌 성상께서 성의와 공경을 다하고 임명하며 의심하지 않는 뜻입니까. 또한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이 점을 두렵게 생각하시어 백발의 옛 신하를 산지(散地)에 오래 두지 않으시면 상하간에 서로 믿음이 생겨 국가의 형세가 반석같이 굳건해질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상소문을 보류하여 두고 내려보내지 않았다. 얼마 있다가 예조가, 일이 많을 때에 오랫동안 올라오지 않고 자리를 비우는 것이 걱정된다고 체직할 것을 청하자, 상이 체직하지 말고 올라오게 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6월 23일 기축
전에 윤계(尹棨)·신계영(辛啓榮)·이명웅(李命雄)이 추존하려 할 때에 차자를 올려 그것이 예가 아님을 강력하게 아뢰었다. 그러자 상이 대노하여 성문 밖으로 방출하였는데, 이번에 심리하라는 하교에 따라 금부가 죄를 받은 자를 기록하여 아뢰자, 상이 윤계 등을 용서하라고 명하였다.
6월 24일 경인
전에 등주(登州)의 반란군 모유공(毛有功)·모유화(毛有華)·공유덕(孔有德)·경중명(耿仲明) 등이 도당을 불러모아 수령을 죽이는 등 세력이 점차 커졌다. 그러나 명(明)나라는 그때 오랑캐에 대한 걱정 때문에 토벌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내주(萊州)가 함락되자 명에서는 특별히 면사패(免死牌)를 하사하며 귀순하라고 하였으나 적은 받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조정에서 믿는 것은 내주이다. 지금 이미 내주를 함락시켰는데 무엇 때문에 패를 받고 구차하게 살겠는가. 반드시 북경(北京)까지 진군한 후에야 그만두겠다."
고 하였다.
6월 25일 신묘
박동량(朴東亮)의 유배지를 충원(忠原)으로 옮겼다. 반정(反正) 초에 동량을 전라도 부안(扶安)에 유배시켰는데, 이때에 이르러 상이 하교하기를,
"박동량을 가까운 곳으로 이배하고, 나인[內人] 끝향[末叱香] 등을 석방하는 일은 자전의 하교대로 모두 즉시 거행하라."
하였다.
6월 26일 임진
영중추부사 이원익이 자전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곧 입조하여 대비전에 문안하자, 답하기를,
"조섭을 잘못하여 대신에게 걱정을 끼쳐서 참으로 미안하다."
하였다. 상이 이에 쌀·콩과 반찬거리를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6월 27일 계사
경기 광주(廣州) 등지에 큰 비가 왔다.
함경도에 가뭄이 들고 황충(蝗蟲)이 번졌다.
금주군(錦洲君) 박정(朴炡)이 졸(卒)하였다. 박정은 위인이 강직하고 과단성이 있어 일찍이 혼조(昏朝) 때에 마음을 굳게 먹고 바른 도리를 지키며 영달을 구하지 않았다. 반정(反正) 때에 정사 공신(靖社功臣)에 들었고 벼슬이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가 이번에 졸하니 나이가 37세이다. 다만 도량이 적어 사람들이 혹 경시하였다.
6월 28일 갑오
대왕 대비 김씨가 훙(薨)하였다. 왕후는 어려서 총명하였고 왕비가 되어서는 인자하고 검소하였는데, 선묘(宣廟)가 승하한 뒤로는 끝내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다. 광해군이 패란(悖亂)하여 어머니로서 모시지 않고, 왕후의 부친 김제남(金悌男)을 무고하여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여 변란을 도모한다고 하면서 살육하여 후손이 없었다. 화가 영창 대군에게 미치자, 왕후를 서궁(西宮)에 유폐하고 폐모하려는 자가 많았다. 계해년058) 에 이르러서 금상(今上)이 의를 세워 난을 평정하고 왕후를 모셔다가 복위시켰다. 왕후는 하교하여 광해군의 죄를 일일이 제시하며 폐위시키고 금상이 대통을 잇도록 명하였다. 상은 성의를 다하여 봉양하였는데, 병이 나자 상이 주야로 간호하면서 허리띠를 풀지 않았고, 약을 올릴 때는 반드시 먼저 맛을 보았으며 관원을 보내 종묘·사직·산천에 기도하게 하였다. 이날 왕후가 인경궁(仁慶宮) 흠명전(欽明殿)에서 훙하자, 상이 내신과 예관을 불러 국상을 발표하였다. 모든 신하들이 비로소 오사모(烏紗帽)·오각대(烏角帶)·오색단령(玉色團領)을 착용하고 통곡하였다.
양사가 시약 어의(侍藥御醫)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자, 하옥하라고 명하였다가 후에 모두 파직시켰다.
형조 참판 남이웅(南以雄)을 수릉관(守陵官)으로, 내관(內官) 김인(金仁)을 시릉관(侍陵官)으로 삼았다.
대행대비의 빈전(殯殿)을 경덕궁(慶德宮)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이곳에 빈전을 설치할 수 없으니 어둠을 틈타 경덕궁으로 옮겨 모셔야 한다. 초8일 이어(移御)할 때의 전례대로 훈련 도감으로 하여금 도로에 포장을 높게 쳐서 가리게 하고, 내관이 매게 하라."
하였다. 예조가 옮겨 모실 때에 대전·중전·왕세자·세자빈궁은 소여(小輿)를 타고 뒤따르면서 상여를 에워쌀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수레를 타는 것은 심히 미안하니, 걸어서 따라가야 한다."
하였다. 정원과 대신이 아뢰기를,
"제왕의 상례는 사대부의 집안과는 다른 것이며, 두 궁전 사이에는 여염집이 있어 지나야 하고 도로도 매우 평탄치 못해 불편한 점이 많으므로 해조의 계사대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한 것 같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도보로 따르는 것이 실로 예에 합당하니 다시 번거롭게 아뢰지 말라."
하였다.
6월 29일 을미
상이 경덕궁 대왕 대비의 빈전 곁에 있었다. 인시(寅時)에 습전(襲奠)을 행하였다. 백관은 모두 연광문(延廣門) 밖에서 거림(擧臨)하였으며, 빈전 도감(殯殿都監)의 집사관(執事官)과 승지는 현명문(玄明門) 밖에서 거림하였다. 거림 후에 모두 절을 하였는데, 승지는 절하지 않았다.
대신·백관·정원·옥당이 대전·중전·세자궁을 위로하니, 망극하다고 답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각사(各司)가 태만하여 응당 올려야 할 물건을 미처 진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로 태만한 관리는 모두 잡아다가 추고하라."
빈전 도감이 아뢰기를,
"《오례의》에는 다만 아침과 저녁으로만 상식(上食)하게 되어 있는데, 인헌 왕후(仁獻王后) 때는 상의 특명으로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습니다. 이 예는 비록 예문(禮文)에는 있지 않으나 시행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병인년059) 의 전례에 따라 주다례를 시행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신시(申時) 소렴(小斂) 후에 백관이 의주(儀註)대로 거림하였다.
함경도 단천군(端川郡)에서 개가 새끼를 낳았는데, 허리 위로는 몸통은 하나이고 다리는 둘인데 다리 한 짝은 등뒤에 붙었고 발가락은 여섯이며, 허리 아래로는 몸통이 둘이고 다리는 넷이며 꼬리는 둘이었다.
6월 30일 병신
백관이 아침 저녁으로 연광문 밖에서 거림하고, 빈전 도감의 당상 이하 및 승지는 현명문 밖에서 의주대로 거림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오는 칠월 초하루는 마침 성복(成服)하기 전이라서 그때의 의주는 근거할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백관은 거림하는 의주대로 곡하고 사배(四拜)하는 것이 마땅한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예조가 중궁전에 탄신일을 축하하는 옷감을 진상하였는데, 상이 하교하였다.
"이런 때에 옷감을 진상하는 것은 부당하니, 예관이 참작하여 처리하라."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인조실록27권, 인조 10년 1632년 8월 (0) | 2025.12.29 |
|---|---|
| 인조실록27권, 인조 10년 1632년 7월 (0) | 2025.12.29 |
| 인조실록26권, 인조 10년 1632년 5월 (0) | 2025.12.29 |
| 인조실록26권, 인조 10년 1632년 4월 (1) | 2025.12.29 |
| 인조실록26권, 인조 10년 1632년 2월 (0) | 2025.1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