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정유
대행 대비전(大行大妃殿)에 삭전(朔奠)을 올렸다. 백관들이 거림(擧臨)하기를 의식(儀式)대로 하였고, 대렴(大殮)하고 나서 백관들이 거림하였으며, 광명전(光明殿)에 빈전(殯殿)을 만들고 또 거림하고 이어서 진위례(陳慰禮)를 거행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전하 이하의 복제(服制)에 대해서 지금 바야흐로 강론 결정하였는데, 《오례의》에 ‘대왕상(大王喪)은 참최 삼년(斬衰三年)이고 내상(內喪)은 자최 기년(齊衰期年)인데, 문무 백관들은 내상에는 13개월 만에 연제(練祭)를 지낸 뒤에 길복(吉服)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궁중의 시어(侍御) 및 문무 백관들은 모두 3년복을 입지 아니하고, 그 3년복을 입는 이는 양전(兩殿) 및 친왕자(親王子)뿐이니, 예로 헤아려봄에 온당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왕세자의 복제는 만약 《오례의》의 다만 기년(朞年)만 입는다는 뜻으로 본다면, 당연히 정복(正服)을 따라야 할 것 같은데, 다만 자최 오월(齊衰五月)만 복입는 것 또한 대단히 의문스럽습니다. 대신들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다. 윤방(尹昉)·이정귀(李廷龜)·김상용(金尙容)이 아뢰기를,
"《오례의》는 선왕(先王)이 제정한 제도로써 열성(列聖)들께서 준행하였으니, 지금 갑자기 개정할 수 없습니다. 한결같이 《오례의》를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따랐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오례의》에 증손(曾孫)이 세자가 되었을 경우의 복제가 없습니다. 만약 《가례(家禮)》로써 말한다면 증조모(曾祖母)의 복을 자최 오월(齊衰五月)을 입지만, 제왕가(帝王家)는 군신(君臣)의 분수가 있으므로 또 서민들의 예절로써 제왕가에 시행할 수 없으니, 대신들에게 다시 의논하소서."
하였다. 대신들이 아뢰기를,
"왕세자의 복제는 마땅히 《오례의》의 군신간에 기년복을 입는 제도에 의하여 준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의논대로 하되 상궁(尙宮) 이하 나인(內人) 및 내관(內官)·액정 하인(掖庭下人) 등은 3년복을 따르는 것이 마땅할 것 같으니,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상궁 이하 및 여러 사람들은 3년복을 입으라는 분부가 지극히 마땅하니, 삼가 이로써 마련하겠습니다."
하고, 예조가 또 아뢰기를,
"왕세자의 복제는 이미 정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손자가 조부모 복을 입음에 있어 비록 대수(代數)의 멀고 가까움으로써 그 연월의 차등을 정하였으나, 실지는 모두 3년의 복제입니다. 조손(祖孫)의 복제는 인정에서 나오고 군신의 복제는 의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연월은 군신으로써 단정하고 복제는 서민들의 예절을 준용하며, 서연(書筵)에 나아갈 때에는 정사를 보면서 입는 복색을 따르는 것이 아마도 합당할 성싶으니 대신들에게 다시 의논하소서."
하였다. 대신들이 아뢰기를,
"월수(月數)는 군신의 복제를 따르고 복제는 친손자의 준례를 따르는 것이 과연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오례의》에 ‘전하는 졸곡 뒤 정사를 볼 때에는 백포(白袍)·익선관(翼善冠)·오서대(烏犀帶)·백피화(白皮靴)를 착용하고, 종친과 문무 백관들은 졸곡을 지내고서 백의(白衣)·오모(烏帽)·흑각대(黑角帶)를 착용한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듣건대, 선조(宣祖) 때 인순 왕후(仁順王后)의 상사(喪事)에, 지평 민순(閔純)이, 졸곡 뒤에는 송 효종(宋孝宗)의 고사에 의하여 백의관(白衣冠)으로 정사를 볼 것을 청하니, 정신(廷臣)들을 모아 그것을 의논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자 모두들 《오례의》는 조종께서 제정한 바이므로 갑자기 변경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이(李珥)·박순(朴淳)·노수신(盧守愼)·김계휘(金繼輝) 등은 모두 민순의 말을 옳게 여기었으므로 마침내 백의관의 제도를 정하여, 선조가 정사를 볼 때에는 소관(素冠)·소복(素服)·포과 오서대(布裹烏犀帶)를 착용하고서 3년을 끝마쳤고, 신하들은 졸곡 뒤에 백모(白帽)·백의(白衣)·포과 각대(布裹角帶)로서 기년(朞年) 만에 복을 벗었다고 합니다. 이것도 한때 유신(儒臣)들이 강론 결정한 바이며 조종께서 이미 실행한 바이니, 대신들에게 다시 의논하소서."
하였다. 대신들이 아뢰기를,
"성조(聖祖)께서 이미 실행하였으니 이것도 또한 이루어진 법입니다. 해조의 아뢴 바에 의하여 시행하는 것이 후한 편으로 따라가는 예에 맞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하교하기를,
"세자가 복제가 끝나면 마땅히 백관들과 같아야 하는데, 어찌 강론하여 결정하지 않는가?"
하니, 예조가 아뢰기를,
"왕세자의 복제는 본복(本服)의 월수로써 단정할 수 없는 까닭으로, 대신들의 의논에 의하여 마련하였습니다. 다만 13개월 만에 연제(練祭)를 지낸 뒤에 길복을 입는 한 사항은 마땅히 백관들과 같아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 예조의 복제의 주(服制儀註)는 다음과 같다."전하는 자최 삼년에 졸곡뒤 정사를 보는 복색은 백포·포과 익선관·포과 오서대·백피화이고, 무릇 상사(喪事)에 관계되는 일에 있어서는 최복(衰服)을 입으며, 13개월 만에 연제를 지낼 때는 연관(練冠)을 착용하고 수질(首絰)·부판(負版)·벽령(辟領)·최(衰)를 제거하며, 25개월 만에 상제(祥祭)를 지내고서는 참포(黲袍)·익선관·오서대·백피화를, 담제(禫祭) 뒤에는 곤룡포(袞龍袍)·옥대(玉帶)를 착용한다. 중전(中殿)은 자최 삼년에 졸곡 뒤에는 백포의(白布衣)을, 25개월 만에 대상(大祥)을 지낸 뒤에는 심염 오색의(深染五色衣)를, 27개월 만에 담제를 지낸 뒤에는 길복(吉服)을 입는다. 왕세자는 자최 기년(齊衰朞年)에 졸곡 뒤 서연(書筵)에 나아갈 때의 복색은 전하의 정사를 보는 복색과 같으며, 13개월 만에 연제를 지낸 뒤에는 길복을 입는다. 문무 백관들은 자최 기년에 포과모(布裹帽)·마대(麻帶)·백피화를 작용하다가, 졸곡 뒤에는 포과 각대(布裏角帶)·백포과모(白布裹帽)·백단령(白團領)을 착용하고, 무릇 상사에 관계되는 일에 있어서는 최복을 입으며, 13개월 만에 연제를 지낸 뒤에는 길복을 입는다."】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490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한국고전번역원
예조가 아뢰기를,
"주청사(奏請使)와 동지사(冬至使) 등이 지금 장차 바다로 내려가려고 하는데, 그들의 복색을 마땅히 참작해서 알려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대신들에게 물어보소서."
하자, 대신들이 아뢰기를,
"길을 갈 때에는 백의(白衣)·백관(白冠)·백대(白帶)를 착용하고, 황제를 뵐 때에는 길복(吉服)을 착용하며, 각 아문(衙門)에 가서 볼 때에는 오사모(烏紗帽)·오각대(烏角帶)·무문 흑단령(無紋黑團領)을 착용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3일 기해
대신들이 백관들을 거느리고서 성복(成服) 거림(擧臨)하고, 또 진위례(陳慰禮)도 거행하였다.
7월 4일 경자
상이 소성당(小星堂) 여차(廬次)로 나가 거처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감군(監軍)과 순장(巡將)의 단자(單子)를 지금 마땅히 입계하여야 되는데 날이 이미 저물었기에 감히 여쭙니다."
하니, 답하기를,
"성복한 뒤에 입계하는 것이 전례에 있는가?"
하니, 병조가 회계하기를,
"조종조의 먼 전례는 알 수 없거니와, 무신년060) 선조 대왕(宣祖大王) 상사에 있어서는 그때 구신(舊臣)들 중 생존한 이가 많이 있는데, 모든 정사(政事) 및 각사(各司)의 좌기(坐起)를 모두 성복한 뒤에 집행하였고, 위장(衛將) 분소(分所)에 대한 동·서·남·북(東西南北) 글자는 새겨서 찍어 내려보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들으니 27일 내에는 원상(院相)이 모든 관사를 총괄하여 보살피고, 원상이 폐지된 뒤에는 비록 아래서 총괄하여 보살피는 규칙은 없지마는 긴요하지 않은 공사는 역시 출납하지 않고 대간이 아니면 역시 임명하지 않는다고 하니, 그 뜻이 반드시 소재가 있을 것이다. 폐조에서는 성복도 하기 전에 붓을 잡고 임명하였으니, 그 이외 것은 족히 말할 것도 없다."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양암(諒闇) 제도를 준행하고자 하시니 그 뜻이 지극하십니다. 다만 생각건대, 파직된 수령들이 대단히 많은데, 접때 약시중을 드느라 오래도록 차출하지 못하고 갑자기 국휼을 당하였습니다. 앞으로 군사를 징발하여 나누어 배정할 일이 있는데, 수령이 없으면 피해가 반드시 백성들에게 미칠 것입니다. 서북 변장(邊將)으로서 전최(殿最)의 하등에 해당한 자에 대해서는 더욱 여러 날 동안 벼슬자리를 비워둘 수 없습니다. 죄수가 오랫동안 미결로 수감된 것 역시 왕자(王者)가 여러 옥사(獄事)를 모두 조심스럽게 하는 뜻이 아니며, 허다한 무사들이 오로지 관봉(官俸)만을 쳐다보고 있으니 반드시 제때에 봉록을 지급하여야만 이탈하는 걱정을 모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입직(入直)하는 위장(衛將)은 비록 입직을 교대로 하지 않더라도 진실로 해로울 것이 없거니와, 감군(監軍)이 날마다 패(牌)를 받는 것은 바로 군사 기밀을 신중히 하는 뜻인데, 27일 동안 한 사람이 계속 감군이 되는 것 역시 온당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따위의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 같으니 마땅히 처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대신들의 뜻도 이와 같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신들이 예전의 관례를 고치기가 어렵다고 하고 시대의 다스려지고 어지러움도 또한 동일하지 않으니, 13일 동안 출납을 허락하지 말고, 수령이나 변장 차출 및 봉록을 지급하는 일들을 우선 거행하라."
하였다.
영중추부사 이원익(李元翼)이 상차하기를,
"신민(臣民)들이 복이 없어 이런 국휼을 당하여 임금께서 난극(欒棘) 중에 계시니, 신하의 분의(分義)에 조정을 떠나 밖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미천한 신은 늙고 혼미하여 깔딱깔딱 죽으려고 하니 부득불 옛 거처로 도로 내려가야 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상차를 살펴보니 내 몹시 서운하다."
하였다.
이조가 아뢰기를,
"산릉(山陵) 및 혼전(魂殿) 참봉(叅奉)을 마땅히 성복(成服) 전에 차출하여야 하겠기에 어제 망단자(望單子)를 올렸었는데 도로 내려보내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지금 비록 성복이 지났지만 빨리 차출하여 오늘이라도 성복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남두창(南斗昌)·조창서(曺昌緖)를 【 모두 수릉관(守陵官)의 추천이다.】 산릉 참봉으로, 이자(李澬)·이광익(李光翼)을 혼전 참봉으로 삼았다.
7월 5일 신축
태묘(太廟)와 숭은전(崇恩殿)에 삭망제(朔望祭)를 정지하고 천신(薦新)에도 어육(魚肉)을 사용하지 아니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고례(古禮)에 상중에는 3년 동안 제사를 지내지 않는데, 《오례의》에는 졸곡 때까지만 제사지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듣건대, 예전의 관례에는 비록 졸곡 전일지라도 천신은 폐지하지 않았다고 하니, 마땅히 이에 의하여 시행하여야 하겠습니다. 다만 옛사람의 제의(祭儀)를 보건대, ‘삼년상을 치루는 동안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은, 비단 길사(吉事)와 흉사(凶事)가 서로 간범되어서는 아니될 뿐만 아니라, 또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심정도 그 슬픔은 한가지이기 때문에, 죽은 사람에게 복(服)이 없으면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으니, 옛사람이 인정을 참작해서 예를 제정하여 저승과 이승으로써 차이를 두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년 동안 제사지내지 않는 예를 지금 시행할 수는 없지마는, 또한 마땅히 그 사이에 참작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태묘(太廟)와 숭은전(崇恩殿)에 천신(薦新)을 하되, 졸곡 전에는 어육(魚肉)을 쓰지 않는 것이 실정과 예에 맞을 것 같으니 대신들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는데, 대신들이 모두 옳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선묘(宣廟) 상사(喪事)의 전례에는 졸곡 전에는 종묘에 삭망제를 정지하고, 다만 오실(五室) 앞에 나아가 분향례(焚香禮)만 거행하였다고 하니, 대개 중도의 의의를 취한 것인가 봅니다. 이 일이 《오례의》에 실려 있지 않고 한때의 의견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니, 신들의 의견으로는 구실(九室)에 모두 분향하여야만 바야흐로 예에 맞을 성싶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6일 임인
박난영(朴蘭英)을 추신사(秋信使)로 삼았다.
7월 7일 계묘
대행 대왕 대비의 시호(諡號)를 의논하였다. 대신 및 정부와 육조의 참판 이상과 관각 당상 등을 명초하여 시호·능호(陵號)·전호(殿號)를 회의하여 시호를 인목(仁穆)이라고 정하였는데, 인을 베풀고 의를 행하는 것[施仁服義]을 ‘인(仁)’이라 하고 덕을 펴고 의를 지키는 것[布德執義]을 ‘목(穆)’이라고 한다. 능호는 혜릉(惠陵)이라고 하고 전호는 효사전(孝思殿)이라고 하였는데, 혼전(魂殿)이다.
이에 앞서 왜역(倭譯)을 대마도에 보내려고 하다가 국휼로 인하여 사행을 정지하였는데, 예조가 아뢰기를,
"대마도 사람이 이미 이 사행이 있을 것으로 알고 있으니, 생각건대 반드시 기다릴 것이고 길을 안내하는 배도 나올 터이므로 형세상 중지하기 어렵습니다. 그대로 떠나보내도록 하소서. 그리고 동래부(東萊府)로 하여금 별도로 한 서간을 구비하여 본국의 부음을 전달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8일 갑진
당초 이조가 대간에 빈자리가 있다고 품정(稟政)하였는데, 궁중에 체류해 둔 지 3일 만에 하교하기를,
"구전(口傳)으로 차출하라."
하자, 정원이 아뢰기를,
"대간은 일반 관원들과 동일하지 않아, 구전으로 차출한다면 다만 사체에만 온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음 정사에서나 바야흐로 하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비록 차출하더라도 그가 공무를 집행할 수 없어 차출하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으니, 도리어 13일 뒤를 기다리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렇다면 정사를 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임광(任絖)을 지평으로 삼았다.
당초에 국장 도감(國葬都監)의 계사로 인하여, 제도(諸道)의 감사(監司)·병사(兵使)·수사(水使)에게 무명베를 나누어 배정하여 부조(扶助)라고 명목을 붙었는데, 이에 이르러 삼공이 아뢰기를,
"국장은 매우 중대한 일인데, 감사·병사·수사에게 나누어 배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힘에 따라 부조하도록 하여 마치 청구나 하는 것처럼 하십니까. 여러 사람의 의논들이 모두 온당하지 않다고 하기 때문에 호조에 물어보니, 본조(本曹)의 경비가 다 떨어진 뒤에 이런 망극한 변을 당하여, 빈전(殯殿)의 초상(初喪)에 쓰인 것이 이미 무명베 1백 동(同)쯤에 이르고, 앞으로 국장에 갖가지 의물(儀物)을 만드는 비용이 한이 없는데 본조에서 마련해 낼 계책이 없다 합니다. 듣건대 사복시에는 저장한 것이 무려 6백 동에 이르고, 상평청(常平廳) 및 병조에 있는 장인(匠人)의 가포(價布)도 수백 동에 이른다고 합니다. 마땅히 사복시의 무명베 3백 동과 상평청의 무명베 2백 동과 장인의 가포 1백 동을 해조로 이송하여 국상(國喪)의 모든 비용에 쓰게 하고, 각도에서 부조하는 일은 시행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9일 을사
당차(唐差) 도사(都司) 이양춘(李陽春)이 돌아갔다.
7월 10일 병오
예조가 아뢰기를,
"모자(母子)의 윤리는 하늘에서 나온 것입니다. 광해(光海)가 비록 아들의 도리를 스스로 끊어버렸지만, 바야흐로 지금 성상(聖上)의 교화가 새로워져 오륜(五倫)이 모두 질서가 잡혔는데, 어찌 천지간에 어버이의 상복을 입지 않는 사람이 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부음을 나중에 들었을지라도 소급하여 복을 입는 예도 있으니, 본부로 하여금 부음을 전하면서 상복을 만들어 들여 보내고 소선(素善)으로 진지를 올리게 하여 인륜으로써 옛날 임금을 대접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나라를 다스리는 충후한 도리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당초에 수직(守直)하는 내관(內官)이 교체할 일로 떠나갈 적에 이미 그로 하여금 부음을 전하도록 하였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모자(母子)의 윤리는 하늘에서 나온 것입니다. 광해(光海)가 비록 아들의 도리를 스스로 끊어버렸지만, 바야흐로 지금 성상(聖上)의 교화가 새로워져 오륜(五倫)이 모두 질서가 잡혔는데, 어찌 천지간에 어버이의 상복을 입지 않는 사람이 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부음을 나중에 들었을지라도 소급하여 복을 입는 예도 있으니, 본부로 하여금 부음을 전하면서 상복을 만들어 들여 보내고 소선(素善)으로 진지를 올리게 하여 인륜으로써 옛날 임금을 대접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나라를 다스리는 충후한 도리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당초에 수직(守直)하는 내관(內官)이 교체할 일로 떠나갈 적에 이미 그로 하여금 부음을 전하도록 하였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예문(禮文)을 고찰해 보건대, 초상(初喪)으로부터 졸곡(卒哭)에 이르기까지는 모든 제사를 정지하고, 빈소를 마련한 뒤에는 오직 사직에만 제사지낸다고 하였습니다. 오는 8월의 사직 제사를 예문에 의하여 거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11일 정미
지평 조빈(趙贇)이 들어와 피혐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국휼 첫날에 궐내로 달려가니 일이 지극히 바쁘고 집도 아주 멀었습니다만, 밤 시각 삼고(三鼓)에 배고픔이 너무나 심해서 사제(私第)로 달려갔다가 잠시 후에 돌아왔었습니다. 비록 배가 고파서 그렇게 한 것이지만 한 번 왕래한 것이 종내 온당치 못한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양암(諒闇) 초기라서 감히 번거롭게 말씀드리지 못하고 며칠을 지연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들어와 피혐하니 실수한 바가 큽니다. 명하여 체직 축출하소서."
하고, 집의 민응형(閔應亨)이 또 들어와 피혐하면서 아뢰기를,
"신은 72세의 늙은 어미가 있는데 집안 종이 와서 담(痰)이 막혔다고 전하기에, 신이 놀라고 어리둥절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달려가서 구료해 드리고 즉시 궐내로 돌아왔었습니다. 어머니와 자식간의 정세(情勢)가 민망스럽고 절박하여 사제에 왕래함을 면치 못하였으니, 결코 그대로 염치없이 재직할 수 없습니다. 명하여 파직 축출하소서."
하고, 장령 임련(林堜)이 밖으로부터 들어와 피혐하면서 아뢰기를,
"국휼 초기에 달려와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명하여 체직 축출하소서."
하니, 모두에게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조 판서 이귀(李貴)가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헌 김수현(金壽賢), 대사간 이명한(李明漢)이 아뢰기를,
"접때 이조 판서 이귀의 과실에 대하여 논한 것을 성복(成服) 후에 정계하고자 하였는데, 이귀가 오히려 즉시 정지하지 않는 것을 염려하여 국휼 대렴하던 날 백관들이 일제히 모인 가운데서 바로 신들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높은 언성으로 꾸짖어 못할 말이 없이 하니, 좌우에서 보고 듣는 사람들이 얼굴색이 변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신들이 면전에서 업신여김을 받은 것은 참으로 말할 것이 없거니와, 곡반(哭班)의 슬프고 경황없음이 이 어떤 때인데 방자하게 꾸짖고 모욕함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단 말입니까. 신들이 비록 지극히 용렬하지만 직책이 말할 책임이 있는 자리이니, 마땅히 그날 인피하였어야 되는데, 양암(諒闇) 초기라서 감히 번거롭게 하지 못하고 수치를 안고 참아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명하여 체직 축출하소서."
하고, 사간 한필원(韓必遠), 장령 김덕승(金德承), 헌납 이경증(李景曾), 정언 이시매(李時楳)·정뇌경(鄭雷卿)이 모두들 서로 잇따라 들어와서 피혐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7월 12일 무신
헌부가 아뢰기를,
"국휼로 인한 계령(戒令) 중에 비록 대소 관원들이 대궐 아래 모여서 유숙하라는 말은 없지마는, 신하의 지극한 정성이 스스로 그렇게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첫날 집으로 돌아간 것이 비록 배가 고파서 그렇게 한 것이었지만, 집이 이미 아주 멀어 밤을 지내게 되었으니 경솔한 실수를 면할 수 없습니다. 병환이 있는 것을 듣고서 잠시 갔다가 돌아온 것은 별로 피혐할 바가 없으며, 먼 데서 부름을 받아 병환으로 인하여 지체되어 달려와 곡에 참여하지 못하였던 것은 형세상 그렇게 된 것입니다. 곡읍(哭泣)하여 슬프고 경황없는 중에 백관들이 일제히 모인 곳에서 양사의 장관을 꾸짖고 모욕하여 보고 들은 사람들을 모두 놀라게 하였으니, 실수한 바가 상대에게 있지 일을 함께 한 여러 동료들은 더욱 피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집의 민응형, 장령 임련, 대사헌 김수현, 대사간 이명한, 사간 한필원, 헌납 이경증, 정언 이시매·정뇌경에 대하여 모두 출사하도록 명하시고, 지평 조빈은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평안도의 둑을 쌓던 군사로서 청천강(淸川江)에 빠져 죽은 사람이 27명이었는데, 일을 아뢰자 상이 구휼하는 은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국휼 초기에 사대부 집안에서 혼인하였다는 말들이 전파된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만약 과연 그런 일이 있었다면 지극히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한성부로 하여금 일일이 적발하여 그 가장(家長)을 처벌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민기(閔機)을 우승지로, 권확(權鑊)을 좌부승지로, 구굉(具宏)을 공조 판서로, 김효건(金孝建)을 지평으로 삼았다.
7월 13일 기유
총호사 이정귀가 아뢰기를,
"신릉(新陵)에서 목릉(穆陵)까지의 거리가 겨우 1백 수십 보(步)이니, 목릉의 정자각을 수십 보 정도 뒤로 물려 삼릉(三陵)의 중간 장소에 합쳐 설치하면 일이 대단히 순조롭고 편리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지어진 정자각을 철거하여 옮기는 것도 매우 중대한 일이니, 신들이 감히 마음대로 정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옮겨 세우는 것이 편리한지 아니한지를 대신들에게 의논하라."
하였다. 대신들이 아뢰기를,
"동일한 산 안에 결코 각각 설치할 수 없습니다. 신들이 일찍이 조종조의 고사를 듣건대, 왕후릉을 먼저 정하고 대왕릉을 뒤에 정한 경우에는 정자각을 대왕릉 앞으로 옮겨 세우거나 혹은 지형을 따라서 두 능의 사이에 합쳐 설치하기도 했으며, 대왕릉을 먼저 정한 경우에는 정자각을 그대로 대왕릉 앞에다 두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다섯 번째 산등성이에서 목릉까지의 거리가 이미 서로 멀지 아니하고 그 중간에 장애가 없으니, 정자각을 마땅히 옛날대로 두어야 할 것 같고, 신릉(新陵)의 신로(神路)을 이설(迤設)하여 옛 정자각을 접속시키되 현릉(顯陵)과 광릉(光陵)의 왕후 신로 제도와 같이하면, 옮겨 건립하는 폐단이 없고 합쳐 설치하는 편리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봉례(奉禮) 이후양(李後陽)이 상소하기를,
"신이 《오례의》를 삼가 살피건대, 무릇 크고 작은 거동을 할 때에 봉례가 왕세자를 인도한다는 문구가 있습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봉례의 직책이 대군(大君)을 인도하기 위하여 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근래 1백여 년 동안 국가에 대군이 없어서 조종조에서 대군을 대접한 예를 직접 보고 듣지 못하였는데, 반드시 봉례로써 대군을 인도하는 임무를 맡기는 것이 무슨 근거로 말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봉례가 과연 대군을 인도하는 관원이라면, 조하(朝賀)에 회동(會同)하는 경우는 참으로 마땅하지만 사제(私第)에 드나드는 즈음에 이르러서도 그 문에서 인도하도록 하는 것은, 신은 그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조종조에서 벼슬을 두고 직책을 나누어 맡긴 뜻은 왕세자에게 있었는데 지금 도리어 대군을 위하여 예를 행한다면, 이는 국가가 예가 아닌 것으로써 대군을 대우하는 것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이 상소를 해조로 내려보내, 그들로 하여금 전례(典禮)를 참고하여 직책을 구분한 본뜻을 상실하지 않도록 하소서. 그러면 국가에서 대군을 대우하는 예가 진실로 그 정당함을 얻어, 명분을 정하고 위아래를 엄격하게 하는 도리가 이에 이르러 극진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소가 아뢰어지자 상이 궁중에다 두고 몇 달 동안이나 내리지 않았는데, 이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낮은 벼슬아치 주제에 괴롭게 여김이 이와 같으니 체직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이귀(李貴)가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7월 14일 경술
총호사 이정귀, 예조 판서 최명길, 산릉 도감 제조 이덕형(李德泂)·구굉(具宏)·이현영(李顯英), 관상감 제조 장유(張維)가 빈청에 모여 여러 술관(術官)들과 더불어 상의하여 택일하였다. 참초(斬草)·파토(破土)는 7월 24일 사시(巳時), 개금정(開金井)은 9월 7일 진시(辰時), 혈심(穴深)은 10척(尺), 하외재궁(下外梓宮)은 9월 15일 사시(巳時), 계빈(啓殯)은 10월 4일 계시(癸時), 하현궁(下玄宮)은 6일 묘시(卯時)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왕자군(王子君) 녹봉(祿俸)을 보통 때의 예에 의하여 나누어 지급하라."
하였다. 왕자군 등이 바야흐로 상중(喪中)에 있기 때문에 이런 하교가 있었다.
7월 15일 신해
빈전(殯殿)에서 망전(望奠)을 지냈는데 백관들이 모시고 의식대로 제사지냈다.
동지사(冬至使) 김시국(金蓍國)이 먼저 역관을 보내 치계하였다.
"지난해 본국(本國)에서 동과(銅鍋)와 조총(朝銃)을 구비하여 등주 군문(登州軍門)으로 보냈었는데, 이 때문에 병부에서 성지(聖旨)를 받들어 칭찬하고 이어서 염초(焰硝)를 하사하였습니다. 그리고 공(孔)·경(耿) 두 적(賊)이 이미 등주 등 여러 성(城)들을 함락시키고 내주(萊州)를 직접 핍박하여, 등주의 배들이 모조리 적의 소유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형세가 궁하면 반드시 바다로 들어가 도적이 될 염려가 있습니다."
7월 18일 갑인
헌부가 아뢰기를,
"해조가 금년에 조금 풍년이 들었다고 하여 6도(道)의 경차관을 파견하자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산(因山)064) 하는 일과 답험(踏驗)065) 하는 일을 일시에 함께 시행하면, 민간의 소요스러운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경차관의 떠나감을 정지시키도록 명하고 각도 도사(都事)로 하여금 예전대로 다시 조사하여 민생의 조그마한 폐단이나마 면제해 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대신들에게 물어보도록 하였다. 대신들이 경기 1도에 있어서는 도사로 하여금 다시 조사하도록 하고, 5도에 있어서는 마땅히 당초에 계하한 대로 시행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간원이 아뢰기를,
"새로 벼슬길에 나온 나이 젊은 무리들이 법을 업신여기면서 몹시 방자합니다. 어제 삼공이 함께 앉아 괴원(槐院)의 포폄을 마감할 때 본원의 관원이 와서 말하기를 ‘병조의 낭관이 괴원의 하인을 잡아 가두었으니, 일이 지극히 놀랍다.’고 하였습니다. 정부가 대신의 분부로 인하여 그 낭관의 배리(陪吏)를 수감하였는데도 스스로 자숙하지 않고 더욱 분노를 터뜨려 도리어 괴원의 하인에게 몽둥이질을 하고, 또 서리 차지(書吏次知)를 무려 다섯 사람이나 잡아 가두었으니, 그 교만하고 망령된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때 주장하였던 낭청을 모두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낭청은 바로 황감(黃㦿)·유석(柳碩)이었다.
7월 19일 을묘
이조 판서 이귀(李貴)가 출사하였다.
고부천(高傅川)을 장령으로, 구봉서(具鳳瑞)를 이조 정랑으로, 박황(朴潢)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7월 21일 정사
장유(張維)를 대사헌으로, 박지계(朴知誡)를 집의로, 김휼(金霱)을 장령으로, 윤효영(尹孝永)·박안효(朴安孝)를 지평으로, 윤구(尹坵)를 홍문관 부교리로 삼았다.
7월 22일 무오
형조 판서 신경진(申景禛)이 병이 들었다고 상소를 올려 체직을 청하자, 상이 윤허하였다.
일본의 세견선이 왔다고 동래 부사가 아뢰었다.
7월 23일 기미
당초에 예조가 아뢰기를,
"《무신등록(戊申謄錄)》을 삼가 보니, 본조(本曹)의 사목(事目) 중에 삼명일(三名日)에 올리는 전문(箋文)과 방물을 예전의 관례에 의하여 거행하지 말라는 문구가 있는데, 《오례의》를 가져다 상고해 보니 별로 그런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조종조에서 내려온 문적(文籍)들이 병화(兵火) 중에 모조리 유실되어 버렸는데, 이른바 예전의 관례라는 것이 어디에 근거를 두고서 말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절일(節日)에 정성을 바치는 것은 바로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예절이며, 방물에 있어서는 말·가죽·활·화살·갑옷·투구 등속에 불과하여 별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물건들이 없으니, 그대로 봉진(封進)하게 하여도 불가할 것이 없을 성싶습니다. 다만 하전(賀箋)에 있어서는 경축(慶祝)하는 말을 빼버리고 위전(慰箋)이라고 칭하여, 신료들로 하여금 임금을 대접하는 정성을 다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영상 윤방(尹昉), 좌상 이정귀(李廷龜), 우상 김상용(金尙容)이 아뢰기를,
"해조에서 아뢴 말이 진실로 인정과 예절에 합당하니, 이에 의하여 시행하는 것이 아마도 불가할 것이 없을 성싶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인정과 예절은 비록 이와 같을지라도 그것들을 받는 것이 또한 타당하지 못한 것 같으니, 거행하지 말아 백성들의 폐해를 제거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헌 장유가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접때 국휼 초기에 늙은 어미의 병세가 위중하기에 사사로운 인정에 절박하여 왕래하면서 구료하느라 사제(私第)에서 밤을 지냄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전일에 대관이 이미 이로써 인피하였으니 신의 관직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부가 처치하기를,
"늙은 어머니가 병환이 위중하면 왕래하면서 구료하는 것은 인정과 도리에 당연한 것이니 출사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25일 신유
당초에 가도 유관 도독(椵島留管都督) 황룡(黃龍)이 등주의 난적을 나아가 토벌하겠다고 선언하고서, 병선(兵船)을 영솔하고 여순구(旅順口)로 갔었다. 그런데 이에 이르러 참장(叅將)을 가도로 보내 군사들의 처자 및 심세괴(沈世魁)의 딸을 데리고 돌아가도록 하였는데, 심세괴의 딸은 바로 도독의 첩이다. 변신(邊臣)이 이 일로써 보고하였다.
국장 도감이 아뢰기를,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니, 발인할 때에 고명(誥命)·면복(冕服)·시책(諡冊)·시보(諡寶) 및 평시에 존호(尊號)를 올린 책보(冊寶)를 모두 마땅히 채여(彩輿)에 넣어가지고 앞서서 인도하고 가야 합니다. 그런데 대행 대비(大行大妃)에게 평시에 세 차례나 존호를 올린 옥책(玉冊)·옥보(玉寶)와 고명·면복 등이 병란 뒤에 모두 완전하게 보존되었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모두 다 완전하게 보존되었는데 담아 둔 궤갑(樻匣)은 절반 이상 잃어버렸다."
하였다.
7월 26일 임술
연릉 부원군(延陵府院君) 이호민(李好閔)의 집에 도적이 칩입하였다. 그 집이 도성 남쪽 몇 리 밖에 있는데, 도적이 갑자기 침입하여 칼날이 호민의 왼팔에 닿자, 그의 첩이 몸으로 대신 막아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상이 그 일을 듣고서 내의(內醫)를 보내 그를 살펴보도록 하는 한편, 해조로 하여금 그 첩을 포상하고 이어서 쌀과 베를 주도록 하였으며, 또 포도 대장에게 명하여 기한을 정해 놓고 범인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헌부가 이로써 좌·우 대장(左右大將)의 직책을 파직하고 그 종사관을 잡아다 문초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잠시 그대로 임무를 살피도록 하고 즉시 추적하여 체포하지 못한 다음에 죄를 논하라."
하였다.
동래 부사 홍입(洪雴)이 치계하기를,
"왜선이 나오게 되면 하선연(下船宴) 및 상선연(上船宴)을 모두 마땅히 그 시기에 맞춰 설행하여야 됩니다. 그리고 국가의 졸곡 전을 당하였으나 이미 연향이라고 하면, 비록 음악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최복(衰服)으로써 설행하는 것은 지극히 온당하지 못한 일이니, 해조로 하여금 결정하게 하소서."
하니, 예조가 아뢰기를,
"이웃 나라를 대접하는 도리가 중국을 대접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북경에 가는 사행(使行)은 오모(烏帽)·각대(角帶)·흑단령(黑團領)을 사용하기로, 왜역(倭譯)의 사행은 백모(白帽)·포과각대(布裹角帶)·백단령(白團領)을 사용하기로 강론, 결정하여 보냈습니다. 지금 이 왜차(倭差)는 도주가 보낸 것으로서 사체가 또 도주와 차이가 있으니, 비록 최복으로써 서로 대접하더라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미 최복 차림으로 접견한다면 형세상 연향을 베풀기가 어렵고 만약 연향을 베풀지 아니하면 또한 손님을 공경하는 도리에 어긋납니다. 졸곡 전에는 백모·포과각대·백단령으로써 간략하게 다례를 거행하고 연향에는 그 필수품을 주며, 졸곡 뒤에는 오사모(烏紗帽)·오각대(烏角帶)·무문흑단령(無紋黑團領)으로 연향을 베풀되 음악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 아마도 적절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미 고증할 만한 예전의 관례가 없으니 대신들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다. 대신들이 아뢰기를,
"마땅히 해조의 의논에 따라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박정현(朴鼎賢)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7월 27일 계해
처음에 예조가 아뢰기를,
"발인 날짜가 이미 정해져 의주(儀註)를 지금 바야흐로 강론, 결정하면서 《오례의》를 상고해 보건대, 전하께서 모시고 산릉까지 따라가게 되어 있는데, 가까운 전례에는 교외(郊外)에서 곡하며 전송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때가 혹 염려스럽기도 하고 형세가 혹 불편하기도 하여, 고집스럽게 규정만을 지키기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의주를 전례에 의하여 마련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대신들의 뜻도 다 이와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었다. 그런데 이 때에 이르러 아뢰기를,
"신들이 《무신일기(戊申日記)》를 상고해 보니, 그때 의논한 사람들이 모두 ‘조종조로부터 궐문 안에서 곡하며 전송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조종께서 이미 행한 일이 반드시 깊은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태평한 날에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였는데 더구나 후세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정묘년066) 일은 한때의 변례(變禮)에서 나온 것으로서 낮에 거둥하였던 것으로 이 일과 또 다르니, 인용하여 전례를 삼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신들이 당초에 의논, 결정한 것이 경솔함을 면치 못하였으니, 지극히 황공스럽습니다. 임금의 한 몸은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이 의탁한 바이니 진실로 가볍게 할 수 없거니와,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멈추는 것도 자손들의 법이 되니, 더욱 이미 정해졌다고 핑계하여 깊이 생각하고 살펴 처리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대신들에게 다시 의논하소서."
하자, 대신들이 아뢰기를,
"지난날 해조가 와서 묻기에 정묘년에 장릉(章陵)을 옮길 때의 가까운 규례를 가지고 대답하였었는데, 지금 아뢴 말을 보니 과연 의견이 있습니다. 조종조의 오래된 일을 비록 상세히는 할 수 없지만, 삼가 듣건대, 선묘조 에서 세 번 국장을 치를 때 모두 궐문 안에서 곡하며 전송하였다고 하며, 지금 《무신일기》에도 ‘으레 궐문 안에서 곡하며 전송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임금이 밤에 거둥하는 것이 사체가 중대하기 때문입니다. 아뢴 말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호조가 아뢰기를,
"법전(法典) 내에는 재상(災傷)에 있어서 착오난 것이 10부(負) 이상이면, 수령은 파면하고 감관·색리(色吏)·전부(田夫)는 온 가족이 변방으로 이주시킵니다. 그러나 경차관이 만약 사실대로 조사한다면 반드시 한 읍도 착오가 나지 않은 곳이 없을 터인데, 어찌 10부에만 그칠 뿐이겠습니까. 허다한 수령들을 일시에 파면할 수 없기 때문에, 재차 조사할 때에 응당 파직할 한두 관원에 대해서만 10부 이상으로 계문하면서 더욱 심하게 착오났다고 칭하고, 그 이외는 모두 10부가 못되는 것으로 계문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전부터 내려오는 잘못된 관례이지만 그 형세가 또한 그렇게 아니할 수 없습니다.
지금 오랫동안 하지 않았던 경관(京官) 파견하는 일을 갑자기 시행하여, 그로 하여금 자호(字號)를 뽑아내 엄정하고 명확하게 조사하도록 하였는데, 그 착오난 결부(結負) 수를 감축하여 수령이 죄를 모면할 수 있는 처지를 만들어 주어도 안 되며, 또한 한결같이 법전만을 따라 10부 이상인 경우 수령을 파직하고 감관·색리·전부 등은 온 가족을 변방으로 이주시키는 법률을 전부 시행하여 소요를 초래해서도 안 됩니다. 마땅히 경차관 등으로 하여금 그 착오난 수의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사실대로 적발하되, 죄를 논함에 있어서는 도내(道內)에서 더욱 심한 관원 몇 명만을 가려내 법에 의하여 계문하도록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그리고 새로 개간한 전답이 가장 많은 관원은 비록 부수(負數)를 누락시킨 것이 있을지라도 공로와 과오를 상쇄해 주고, 또 더 늘려 보고한 수에 있어서는 읍(邑)의 크고 작을 것을 보아 많고 적음을 참작하여, 혹은 계문하기도 하고 혹은 본조에 이문하기도 하여 처리하는 데 증빙이 되도록 하소서. 대신들의 뜻도 그렇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되 뒤에는 전례를 삼지 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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