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병신
일식이 있었다.
예조가 아뢰기를,
"《오례의》에 ‘책보(冊寶)를 받들고 들어갈 때에 공조 판서가 책보를 가지고 대궐로 나아가면 승지가 전달받아 들어간다.’고만 하였고 별도로 길복(吉服)으로 바꾸어 입는다는 말이 없는데, 《경자등록(庚子謄錄)》에는 ‘도감 제조(都監提調) 1원(員)이 담당 낭청과 공조 판서를 거느리고서 일제히 모시고 나아가며, 복색은 흑단령에 오각대를 착용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들은 《경자등록》이 《오례의》의 본뜻을 살피지 못한 것으로 여깁니다. 대개 책보를 받들고 들어가는 것은 어람(御覽)에 대비하는 것뿐이요 예를 거행하는 때와는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례의》에 책보를 받들고 들어갈 때의 복색은 말하지 않고, 시호를 청하는 날에 이르러서야 영의정 이하가 평상복에 흑각대를 띠고서 대궐에 나아가 예를 거행한다고 하였습니다. 예문의 본뜻이 각각 소재가 있으니, 아마도 일시의 의견으로써 용이하게 고치지 않아야 할 성싶습니다. 《오례의》에 공조 판서를 지칭한 것에 있어서는 조종조에서 모든 책보를 다 공조에서 만들고 당초에 별도로 도감을 설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별도로 도감을 설치하여 공조가 조금도 간섭하는 것이 없으니, 지금 도감 제조는 바로 옛날 공조 판서입니다. 이런 것들은 아마도 너무 구애받을 필요가 없을 성싶으니, 내일 책보를 받들고 들어갈 때에는 다만 도감 제조 1원(員)과 낭청 및 제집사로 하여금 입고 있는 최복(衰服) 그대로 받들고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일 정유
대신 및 육경이 아뢰기를,
"지난날 조정 신하들이 예경(禮經)에 근거하여 혈성(血誠)으로 호소하여 다행히 애써 따르겠다는 분부를 받으니, 대소 관원들의 인정이 모두 기쁘고 다행스럽게 생각하여 이미 상식(尙食)으로 하여금 평상시의 수라를 올리도록 하였습니다. 생각에 성상께서 이미 스스로 중후가 위중함을 아시고 신민들의 지극한 심정도 깊이 살피시었으니, 임금의 말씀이 한 번 나온 이상 절대로 의심할 것이 없다고 여기었습니다. 그런데 듣자니 전하의 전일 분부가 진실에서 나오지 않고 안에서 소찬을 올리는 것이 여전하다고 합니다. 대체로 신들이 청한 것이 전례로서는 조종이 이미 실행하셨던 것이며 성인이 일찍이 말씀한 것이니, 의리로 헤아려보아도 조금도 해로울 바가 없거니와, 인정이 같은 바에 있어서 누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습니까. 더구나 임금의 말씀은 뭇사람들이 듣는 바이며 백관들이 정청(庭請)한 것은 사체가 또한 중대한데, 어찌 거짓으로 허락하고 실지로는 실행하지 않아 반드시 닥칠 우환을 스스로 취하셔서야 되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사리(事理)의 경중이 있는 바를 깊이 생각하시어 말을 실천하고 병을 조심하는 데 노력하여 참으로 신민들의 소망에 부응하여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권도를 따르고 있으니 경들은 거짓말을 믿지 말라."
하였다.
9월 3일 무술
이경여(李敬輿)를 부제학으로, 조위한(趙緯韓)을 승지로, 이경증(李景曾)을 부교리로 삼았다.
9월 5일 경자
대행 대비에게 시호(諡號)를 올렸다. 【 3일 전에 도감이 책보를 가지고 대궐로 나아가니 승지가 전달받아 들어갔고, 1일 전에는 영의정 이하가 의복을 바꿔 흑단령을 구비하여 입고 모두 조당(朝堂)에 모여 제자리로 나아가자, 내시가 시책(諡冊)·시보(諡寶)를 받들고 합문을 나와 승지에게 주니, 승지가 꿇어앉아 영의정에게 주어 종묘로 나아가 청시례(請諡禮)를 거행하였다. 그 예가 끝나자 도로 빈전으로 나아가 영의정이 꿇어앉아 책보를 받들어 임시로 악차(幄次)에 안치하고, 물러나 본사로 돌아와 재숙(齋宿)하고서 이날 상시례(上諡禮)를 의식대로 거행하였다.】 시책문(諡冊文)에,
"숭정(崇禎) 5년 임신년068) 9월 5일에 애손(哀孫) 사왕(嗣王) 신(臣) 이종(李棕)은 삼가 머리를 조아려 두 번 절하고 말씀올립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인자하신 대비(大妃)를 여의어 장례 시기가 이미 닥쳤기에, 예전 제도를 상고하여 감히 돌아가신 분을 존숭하는 의식을 거행하니, 명칭이 행실을 인하여 아름답고 인정이 예와 더불어 융숭합니다. 공손히 생각건대, 소성 정의 명렬 대왕 대비(昭聖貞懿明烈大王大妃) 전하께서는 자질이 유순하고 얌전함을 부여받았고 거둥은 맑고 착함을 완비하여, 상서가 사록(沙麓)에 나타나 성녀(聖女)가 탄생할 줄을 일찍이 예견하였고069) 시를 읊음이 하주(河洲)에 울려 퍼져 황조(皇祖)의 정치를 은밀히 도와드렸습니다.070) 그런데 뜻밖의 은혜를 해치는 변고가 시샘을 쌓아 온 끝에 갑자기 발생하여, 서궁(西宮)에 유폐되어071) 세월이 여러번 바뀐 것에 놀라셨고, 외로운 섬에 천극(栫棘)당한 어린아이의 무고함을 비통하게 여기시다가072) 천도(天道)가 환원하는 것을 좋아함에 힘입어 곤위(坤位)가 다시 바르게 되었습니다. 위태로움을 붙잡고 난을 평정한 것을 어찌 소자(小子)가 감히 감당하겠습니까. 험난함을 겪으면서도 곧은 지조를 지키셨기에 참으로 신명(神明)이 도와주신 것입니다. 온 나라의 힘을 다하여 봉양하여도 성심에 충분히 흡족하지 못하였고, 만수 무강을 축원하여 아름다운 가르침을 영원히 받들기를 기대하였는데, 어인 까닭에 하늘이 재앙을 내렸는지 갑자기 선어(仙馭)를 타고 하늘나라로 올라가심을 보게 되었습니다. 음성과 모습이 현당(玄堂)073) 에 닫혔으니, 길이 그리워해도 소용이 없고, 평소의 행실을 동관(彤管)074) 에서 살펴보니 내칙(內則)이 여기에 있습니다. 네 글자로 호칭하는 것이 어찌 훌륭한 덕을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만, 한 가지 선행(善行)으로 절충하여 시호를 올리는 것은 조종(祖宗)의 떳떳한 규칙을 따른 것입니다. 욕의(縟儀)를 장차 거행하려 하니 슬픈 심정이 저절로 배가합니다. 삼가 신 의정부 영의정 윤방(尹昉)을 보내 책보(冊寶)를 받들어, 존호(尊號)는 광숙 장정(光淑莊定)으로, 존시(尊諡)는 인목(仁穆)으로 올리도록 하였습니다. 부디 영검스러운 살핌을 베풀어 하찮은 정성을 굽어 양찰하시어, 옥검(玉檢)에 금승(金繩)은 저승에서도 빛을 밝게 하시고, 대나무와 소나무의 무성한 것처럼 후손들에게 큰 복을 내려주옵소서. 아, 슬픕니다. 삼가 말씀드립니다."
하였는데, 이는 예문관 제학 최명길(崔鳴吉)이 지은 글이다.
집의 박지계(朴知誡)가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9월 6일 신축
약방이 아뢰기를,
"신들이 전하의 오늘날 병환을 삼가 생각건대 내상(內傷)이 주된 증세입니다. 무릇 내상의 증세는 살갗이 단단하지 않아 잠깐 찬바람을 쐬면 바로 한기가 들고 열이 나는 증세가 있게 됩니다. 더구나 연일 쑥으로 뜸을 뜨고서 갑자기 삭전(朔奠)을 올릴 때에 참석하였으니, 성상의 건강이 더 손상된 것은 참으로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사람의 질병이 되는 것이 내상보다 더 큰 것이 없고 또한 재차 감염된 것보다도 더 큰 것이 없으며, 침구(鍼灸)에 꺼리는 것은 바람을 쐬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고 또한 곡읍(哭泣)하는 것보다도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금기를 범하여 안팎이 모두 손상되어, 재차 감염의 증세로 형성되어 점점 몸져 누움에 이르면서도 오히려 외정(外廷)으로 하여금 그 사실을 못 듣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전하께서 아무리 질병을 숨기고자 하시더라도 신들이 또한 들은 바가 있어 결코 그것이 거짓말이 아닌 줄을 알고 있으니, 의관(醫官)으로 하여금 들어가 진찰하여 제때에 치료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자 대신이 백관들을 거느리고서 아뢰기를,
"신들이 약방에서 아뢴 말씀을 보고, 비로소 성상께서 또 재차 감염된 증세가 있어 거의 몸져 누울 지경에 이르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는 진실로 신들이 이미 예측하고서 걱정하였던 것입니다. 전하께서 국휼을 당한 이래로 조정 신하들의 청이 지금 이미 세 차례에 이르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 스스로 기력을 헤아려보시고 성인의 말씀을 참고하여, 필부의 지절(志節)을 따라 종사의 중대함을 소홀히 하시지 말며, 먼저 정해진 뜻을 고집하여 성신(誠信)한 도리를 잃어버리시지 말고, 전일의 분부를 실천하여 이미 고질병이 된 증세를 치료하시는 것이, 바로 신민(臣民)들의 다행이며 국가의 복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미 애써 허락하였으니 경들은 다시 의심하지 말라."
하였다. 양사 및 옥당도 간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영중추부사 이원익이 상차하기를,
"제왕의 한 몸에는 종사와 국가의 중대함이 매여 있으니, 보호하고 조섭하는 것을 삼가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삼가 듣건대, 성체(聖體)가 편안하지 못한 것은 오로지 비위(脾胃)가 상한 데서 연유한 것인데, 여차(廬次)에 거처하신 이후로 지금 이미 4개월이 되도록 아직까지 권도를 따르시라는 주청에 대하여 윤허하지 않고 계신다고 합니다. 조종 이래로 이와 같은 때가 있지 아니한데, 전하의 효성이 지극한 나머지 전혀 사체의 경중을 헤아려 보시지 아니한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의 몸은 종사가 매인 바며 신인(神人)이 의탁한 바인데, 어찌 아래로 필부와 동일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노신(老臣)은 쇠약함이 너무 심하여 비록 여러 신하들이 합문 앞에 엎드린 반열에는 나아가지 못하였지만, 아랫사람으로서의 심정은 스스로 억제할 수 없어 감히 이렇게 우러러 번거롭게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별로 위중한 증세는 없으니 경은 과히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9월 7일 임인
영의정 윤방(尹昉), 영돈녕 오윤겸(吳允謙), 우의정 김상용(金尙容),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무덕문(武德門) 안으로 나아가 입대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인견(引見)하고 싶지만 청사(廳事)가 협착하니 마땅히 졸곡 후에 인견하겠다."
하였다. 윤방이 이에 청하기를,
"청사가 협착하여 비록 모두 다 입시할 수는 없지만 다만 신 한 사람만이라도 입대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여러 대신들이 왔는데 다만 한 사람만을 보는 것은 사리에 옳지 아니하니 이에 경을 인견할 수 없다."
하였다. 또 청하기를,
"신들이 민망하고 절박함을 견디지 못하여 누차 우러러 아뢰었는데도 끝내 윤허를 받지 못하니 황공하고 민망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맛진 음식을 올리어 잡수시는 것을 상세히 알고서 물러가고자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미 먹고 있다. 경들이 오랫동안 차가운 땅에 앉아 있는 것이 몹시 미안하니 물러들 가라."
9월 9일 갑진
영의정 윤방, 영돈녕 오윤겸, 우의정 김상용, 연평 부원군 이귀가 또 무덕문 안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지난날 정청(庭請)할 때에 성상께서 참으로 따르겠다고 분부하시고서도 아직까지 권도를 따르는 실지가 없으시니, 이는 다만 여염 사람들만 아는 것이 아니라 신들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입대하여 상의 모습을 한 번 바라보고 증세의 경중과 가감을 면전에서 여쭙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니, 감히 자극문(紫極門) 안으로 나아가겠습니다."
하고서, 윤방·김상용·이귀는 이에 자극문 안으로 나아가고 오윤겸은 원임(原任)으로써 사양하여 그대로 자극문 밖에 머물러 있으니, 상이 이르기를,
"참으로 인견할 수 있었다면 지난날 입대를 청할 때에 어찌 인견하지 않았겠는가. 별로 걱정되는 바가 없으니 과히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또 청하기를,
"신들의 성의가 천박하여 아직까지 전하의 뜻을 돌이키지 못하였습니다. 지난날 입대를 청할 때에는 너무 이른 아침이었기 때문에 감히 억지로 청하지 못하였지만, 오늘은 햇볕이 나 따뜻하니 입대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자, 답하기를,
"경들이 오랫동안 차가운 땅에 앉아 있으니 마음에 미안하다. 이 뒤에 마땅히 서로 접견할 터이니 오늘은 잠시 물러들 가라."
하니, 이귀가 청하기를,
"옛날 사람 중에는 대궐문을 밀치고 바로 들어간 이가 있습니다. 신들도 삼가 이것을 본받고 싶지만 황공스러워 감히 그렇게는 하지 못하고 함부로 이렇게 다시 아룁니다."
하였으나, 상이 또 윤허하지 않았다. 이귀가 영상·우상에게 이르기를,
"상의 기력이 위중하니 예제(禮制)에 구애받을 겨를이 있겠습니까."
하자, 윤방과 김상용이 말하기를,
"연평(延平)은 원훈(元勳)이니, 우리와는 처지가 다른 것 같은데, 어찌 대궐문을 밀치고 바로 들어가지 않습니까."
하니, 이귀가 말하기를,
"만약 끝내 윤허를 받지 못하게 되면 밀치고 들어가고자 합니다."
하고, 이에 또 입대를 청하였으나 상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영침(靈寢)을 아침에 배알(拜謁)하는 한 조항이 《오례의》에 실려 있지 아니하고 《등록》에도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목(事目) 중에 당초에 강론하여 정하지 않았는데, 지금 옥당의 차자를 보니 참으로 인정과 예에 합당합니다. 일이 온당치 못한 점이 있으면 어찌 나중에 고치는 것을 꺼릴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이런 전례가 없고 임시 의리로 헤아려 만든 일이므로 대신들에게 의논해 보아야겠습니다."
하자, 윤방이 아뢰기를,
"상례(喪禮)의 절목을 다 생존한 때를 본뜬 것은 바로 효자가 그 어버이를 돌아가신 것으로 여기지 않는 뜻입니다. 아침에 배알하는 한 가지 예는 참으로 작은 절차라고 해서 폐기할 수 없으니 유신(儒臣)의 말이 참으로 인정과 예에 합당합니다. 다만 당초에 강론하여 정하지 않고 오늘날에 이르렀으니, 시호를 올린 예가 이미 지나갔고 장례를 치를 시기가 이미 가까워졌는데, 초상에 미처 못하였던 예를 소급하여 다시 하는 것 역시 타당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고, 김상용이 아뢰기를,
"유신의 소견이 참으로 인정과 예에 합당합니다. 다만 예전부터 거행하지 않는데는 필시 그 뜻이 있을 터인데, 이미 상고하여 증거할 수 없으니, 지금 경솔하게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0일 을사
집의 박지계가 또 상소하여 사직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살펴보고 다 알았는데 내가 몹시 섭섭하다. 그대가 이토록 굳이 사직하니 본직(本職)은 체직하도록 윤허하거니와, 내려가지 말고 모름지기 사업(司業)의 임무를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1일 병오
약방이 좋은 음식을 올리고자 하여 또 입대를 청하였으나, 상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한필원(韓必遠)을 집의로, 최혜길(崔惠吉)을 교리로, 이경인(李景仁)을 사간으로 삼았다.
9월 12일 정미
연평 부원군 이귀가 무덕문 안으로 나아가 세 번이나 입대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굳이 청함이 이와 같으니 따뜻한 때를 기다려 경만 혼자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3일 무신
연평 부원군 이귀가 상차하기를,
"붕당의 재앙이 마침내는 반드시 나라를 멸망시키는 데에까지 이르고야 마는데 신이 그것을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선조(宣祖)를 만난 것은 천 년 만에 한 번쯤 만나는 기회라고 말할 만한 것으로서 중년에 특별히 대우한 것이 더욱 융숭하였습니다. 그런데 붕당의 조짐이 심의겸(沈義謙)·김효원(金孝元)에게서 시발되어, 두 사람의 친구들이 제각기 사사로운 의견을 주장하여 서로들 옹호하고 억눌러 장차 조용하지 않을 실마리가 있게 될 것을 목격하고, 이이가 상신(相臣) 노수신(盧守愼)과 더불어 상의하여 모두 외직으로 보낼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이가 죽은 뒤로부터 당의(黨議)가 날로 극성하여 도리어 조화 진정시켰던 사람을 당적(黨籍)에다 이름을 써 놓고 업신여기며 있는 힘을 다해 헐뜯었습니다. 이때에 조헌(趙憲)이 이이의 문인으로서 상소를 올려 이이와 성혼(成渾)을 구원하였는데, 충의로 인한 분개가 격하여 중도를 잃은 말이 있음을 모면하지 못하여 죽은 스승 이이의 본뜻에 위배됨이 있었습니다. 신이 한두 동지와 더불어 한 상소문을 지어 먼저 죽은 스승의 공정한 의론을 개진한 다음에 조헌이 한쪽의 말에 치우친 것을 설파하니, 선조께서 이 상소를 보시고서 이이의 말을 만세의 공론으로 삼으셨습니다. 이 상소문이 한 번 나가자 온 세상에서 혹간 이이가 당론에 간섭되었는가 하고 의심하였던 사람들이 속시원하게 그 의혹을 풀어, 지금까지 모두들 이이를 백대(百代)의 유종(儒宗)으로 삼고 있으니, 사람 마음의 속일 수 없는 것을 이에 의하여 알 수 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 성상께서 바야흐로 붕당을 타파하여 화평한 정치를 이루고자 하시니 대단히 훌륭한 생각입니다. 다만 당론의 폐단이 50년을 뻗쳐 할아버지·아들·손자가 보고 들은 것이 피차간에 각각 달라, 일조 일석에 형성되는 일이 아니라서 달래어서도 개도할 수 없고 위협하여서도 해소시킬 수 없으니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선조께서 이이 한 인물을 얻어 당론을 타파하려고 하였는데 뜻이 성취되기도 전에 하늘이 이이를 빼앗아가기를 빨리하였으니, 아마 하늘이 우리 동방을 태평하게 다스리고 싶지 않은가 봅니다. 아, 그 사람은 비록 죽었으나 그 말은 아직까지 남아 있습니다. 만약 그 사람을 쓸 만하지 못하다고 한다면 그만이지만 만약 쓸 만하다면, 그 말을 쓰고 안 쓰는 것이 참으로 국가가 존속하느냐 멸망하느냐에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감히 신이 죽은 스승을 신원(伸冤)하기 위하여 상소문 4부를 인쇄하여 무례하게 올립니다. 혹시라도 을람(乙覽)하시어 그 말을 인하여 그 사람을 상상하고 그 사람을 상상하여 그 도를 시행한다면, 죽은 스승 이이가 비록 저승에 있을지라도 실로 성상의 세상에서 쓰임을 보게 되는 셈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 이 상소문을 서울과 지방에 반포하여, 선현의 무편 무당(無偏無黨)한 마음을 알아 백세 뒤에 본받는 바가 있어 흥기하도록 한다면, 사람들의 다행일 뿐 아니라 또한 국가의 복일 것입니다."
하였다. 예조가 복계하기를,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틈이 심의겸과 김효원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심의겸이 김효원을 배척함에 있어서는 ‘교유(交游)가 근신스럽지 못하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참으로 실상이고, 김효원이 심의겸을 배척함에 있어서는 ‘외척(外戚)이 정치에 간여한다.’고 하였으니 이것 역시 실상입니다. 처음에는 방향을 헤매다가 뒤에 비로소 절행을 힘쓰면 진실로 옛사람이 허여한 바가 되고, 자취는 비록 척리(戚里)이지만 공로가 사류(士類)에게 있으면 역시 군자가 거절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선배들은 심의겸을 편들어 김효원을 가리켜 맘속에 사사로운 감정을 품었다고 하고, 후배들은 김효원을 편들어 심의겸을 가리켜 궁금(宮禁)에 의탁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두 다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이이(李珥)의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다만 그 심의겸은 허여한 이가 적고 김효원은 협조한 이가 많자, 조급하게 벼슬길에 나아가는 무리들이 이따금 그 사실을 구명해 보지도 않고 앞다투어 실정에 지나친 의논들을 하여 시대의 유행에 투합하여, 선배들 중에 맑은 명망이 있는 사람들이 모두 용납받지 못하였습니다. 이이가 힘껏 구제하여 반복해서 논란한 것은 바로 그 편중된 형세를 조절하여 함께 공경하는 처지로 돌아가고자 하였던 것인데, 도리어 후배들의 의심한 바가 되어 갈수록 서로 격동하여, 이에 명예를 탐내고 국가를 그르친다는 따위의 말로써 죄목을 삼아 온 나라가 함께 일어나 그를 공격하였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이이와 더불어 친한 사람들이 재앙의 모태로 간주되어 종적을 거두고 두려워하여 피신하기에도 겨를이 없었는데, 유독 이귀가 선사(先師)의 무함받는 것을 통분하게 여기어, 자기 한 몸의 이해를 잊고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이이의 심사(心事)를 드러내기를 구하다가, 당시의 기휘(忌諱)하는 것에 거듭 저촉되어 훼방하는 말이 떠들썩하니, 비록 평일에 존모하였던 사람일지라도 허튼 의논에 동요하여 이귀를 가리켜 괴이한 귀신으로 여기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선조 대왕께서 사적을 환하게 보시고서 만세의 공론이라고 말씀하심에 힘입어 이이를 배척하는 말이 비로소 들어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난날 이귀의 힘껏 변론한 것과 선조의 분명한 결단이 아니었다면, 이이의 일생 동안 임금을 사랑하고 국가를 걱정한 마음이 마침내 국가를 그릇쳤다는 누명을 벗지 못하고, 조정에서 벼슬을 주고 빼앗는 것의 잘못된 점도 말할 수 없었을 터이니, 이귀의 한 번 상소한 공로가 또한 적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이가 죽은 지 지금 벌써 50여 년이 되어 공론이 저절로 밝아져 사람들이 그를 유림(儒林)의 종장(宗匠)이라고 이르지 아니한 적이 없으니, 오히려 어찌 이귀의 상소에 의뢰할 것이 있겠습니까. 돌아보건대 그때에 왕래한 서찰이 대부분 문집 중에 실려 있지 아니하여, 후생으로서 늦게 나온 사람들은 혹간 보고 듣지 못하였을 터이니, 그것을 인쇄하여 반포할 것을 청한 것은 참으로 뜻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관청에서 사고(私稿)를 반포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한 것 같으니, 호남(湖南)에 있는 판본(板本)으로 인쇄하여 사대부들 사이에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돌려가면서 보도록 하는 것이 일이 대단히 온당하고 편리하며, 세도(世道)에 있어서도 또한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간원이 아뢰기를,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의 아들 전 주부(主簿) 이민백(李敏白)이 나무 방망이로 그 아버지의 사내종 두 사람을 쳐죽이어, 그의 부모가 울부짖었으나 구원하지 못하였습니다. 집안의 법이나 국가의 법에 있어서 어찌 이와 같은 것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하명하여 사판에서 삭제해 버리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범죄한 바가 몹시 무거우니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라."
하였다.
9월 14일 기유
대사헌 김수현(金壽賢)이 병으로 상소를 올려 체직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9월 15일 경술
대행 대비전(大行大妃殿)에 망전(望奠)을 지냈는데 백관들이 모시고 제사지내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정경세(鄭經世)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9월 17일 임자
약방이 따뜻한 방으로 옮겨 거처하기를 재차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약을 복용하면서 오랫동안 조섭 치료하면 완쾌를 보게 될 터이니 경은 지나치게 염려 말라."
하였다.
정원이, 상이 바야흐로 병환이 나 수응(酬應)하는 데 애로가 있는 까닭으로 긴요하지 않은 공사(公事)는 회복되는 동안까지 들여오지 말 것을 청하니, 상이 여러 날을 지체하면 반드시 민폐가 된다고 하여 모두 받아 들여오도록 하였다.
호역(胡譯) 권인록(權仁祿)이 오랑캐 내부로부터 한서(汗書)075) 를 가지고 돌아왔는데, 그 글에 말하기를,
"회령(會寧)에서 도망온 백성들은 원래 화친 맺기 전의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두 나라가 원래 틈이 없고 원래에 전쟁이 없었으니 참으로 화목한 동맹국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귀국(貴國)이 남조(南朝)076) 에 군사를 도와 우리 나라를 침략하였지, 우리가 어찌 일찍이 그 틈을 먼저 열었습니까. 이 일은 바로 귀국이 숨겨야 할 것인데, 어찌 오히려 언급할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고아예(庫兒乂)를 차견하기 이전의 것은 그냥 놔두고 찾지 아니하고 그 뒤로 도망온 사람만 조사하여 돌려보내겠다는 말은 참으로 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난날 귀국이, 모문룡(毛文龍)이 거기에서 우리 변방을 유린하게 하고 우리의 망명객(亡命客)을 불러 들이게 놔두므로 인하여 우리의 분노가 쌓였습니다. 이 때문에 귀국에게까지 병화가 미쳐 인민들을 노략하였는데 뒤에 그냥 놔두고서 찾지 말도록 한 것은 바로 귀국에서 도망온 백성들입니다. 어찌 우리 나라 금인(金人)의 겨레붙이들을 그냥 놔두고 찾지 않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북쪽 변방 지역이 몹시 춥기 때문에 백성들이 생업이 없어 구맥(瞿麥)을 먹고 개가죽을 입어, 더불어 교역하지 않으면 마침내 빈탕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전일에는 올랄한(兀剌汗) 복점태(卜占台)가 귀국 땅을 노략질하다가, 뒤에 강화(講和)하여 해마다 공물(貢物)을 바치고 다달이 시장을 열어 소·베 여러 가지 물건들이 없는 것이 없었으므로 우리 극동(極東) 주민들 역시 항상 서로 교역하였습니다. 어찌 저 명(明)나라와만 시장을 유통하고 우리와 시장을 유통한 적이 없겠습니까. 왕의 생각에는 아마 농우를 팔면 우리 나라가 먹을 것이 풍족해질 수 있고, 정세한 화물(貨物)을 팔면 우리 나라가 재용이 풍족해질 수 있다고 하여, 그것을 질투하여 일부러 교역을 인색하게 하는 것입니까?
내가 하늘의 복을 받아 서쪽 오랑캐가 귀속했는데, 그 나라는 본디 가축이 번성한 구역이므로 소·말 여러 가축들을 이미 넉넉히 사용할 수 있고, 또 우리 나라 소도 잘 번식되고 있는데 어찌 귀국의 소만 낳아서 자라고 우리 나라 소는 낳아서 자라지 않겠습니까. 무역을 하기 전부터 우리 나라가 어찌 일찍이 소로써 밭갈이하지 않았겠습니까. 다만 우리 두 나라가 이미 서로 화친하여 사이가 좋아졌으니, 피차간에 교역하여 그 있고 없는 것을 유통하여 틈을 다 잊어버리고 태평을 누리고자 한 것이지, 어찌 오로지 귀국에 힘입어 옷입고 밥먹으려는 것이겠습니까. 글 중에 뜻이 대부분 억지로 변론하여 잘못을 얼버무려 도의를 따르지 않고 어물어물 버티어 말을 교묘히 하려고 힘쓰니, 내가 왕과 더불어 말을 겨룬다면 어찌 그칠 날이 있겠습니까. 왕은 마땅히 공도(公道)를 따라 스스로 헤아려 보아 도리가 있는 것에 대해서는 굴복하여 겸양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만약에 다만 필설(筆舌)만을 일삼는다면 나도 역시 응답하기가 곤란합니다. 요사이 듣건대 누대(樓臺)와 성을 수축한다고 하는데, 모르겠습니다만, 예로부터 험준함이 믿을 만한 것입니까, 덕이 믿을 만한 것입니까? 생각건대 왕은 스스로 분명히 잘 알 것입니다. 만약 덕을 닦아 이웃 나라와 화목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진시황(秦始皇)의 만리 장성일지라도 결국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다만 뒷날의 다른 사람만 도와 줄 뿐입니다."
하였다.
유성(流星)이 장성(張星) 밑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9월 18일 계축
영중추부사 이원익이 상차하기를,
"신이 이미 너무나 늙어 죽을 날이 이미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상의 옥체가 편치 못하심을 듣고 부축받으며 수레를 타고 와 한 번 문안을 드리고 돌아가려고 하였는데, 뜻밖에 그대로 머물라는 명령이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원기가 날로 쇠약해져 길에서 죽을까 몹시 두려워 정세가 민망스럽고 절박하니 물러가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신이 앞으로 세상에 살아 있기를 오늘까지 할지 내일까지 할지를 예측할 수 없으니, 혹시라도 성상을 한 번 뵈옵고 선영(先塋)으로 돌아가 죽는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그러나 조섭하는 중에는 일찍이 신하들을 접견하지 않았기에 신이 감히 청하지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모름지기 10여 일을 더 머물러 내가 보고자 하는 뜻에 부응하라."
하고, 이어서 내의(內醫)를 보내 병을 살펴보도록 하였다.
연평 부원군 이귀가 무덕문 안에 나아가 아뢰기를,
"성상의 기력이 편치 못하신 지가 60일이란 오랜 동안에 이르도록 신하된 자가 증후의 경중도 모르고서 밖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창문을 비록 여닫을 수 없지만 신은 창밖에 나아가 옥음(玉音)만이라도 듣고자 합니다."
하자, 답하기를,
"창밖에서 인접(引接)하는 것이 예에 불가하기 때문에 윤허할 수 없다. 만약 조리하면 혹 조금 나을 수 있을 터이니 모레 오면 마땅히 접견하겠다."
하니, 이귀가 아뢰기를,
"상께서 이렇게 전교하시니 신이 마땅히 물러가 기다리겠습니다."
하였다.
유성(流星)이 직녀성 아래에서 나와 실성(室星) 위로 들어갔으며, 또 삼성(參星) 위에서 나와 북하성(北河星) 아래로 들어갔다.
9월 19일 갑인
이민백(李敏白)을 강진(康津)으로 귀양보냈다. 상이 이민백의 공초한 말을 가지고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분부하였다. 금부가 복계하기를,
"당초에 내간에서 아뢴 말의 주의는 오로지 그 아버지의 사내종을 마음대로 죽인 것에 있었고, 이민백의 공초한 말은 그 아버지의 명령을 받들어 죄가 있는 사내종을 다스리면서 다만 태장(笞杖)만을 사용하였는데 그들이 모두 병들어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공초한 말과 같다면 이민백의 죄가 대단한 것이 아닌 것같고, 부모가 울부짖어도 그들을 구제할 수 없었다는 말에 있어서는, 만약 풍문에서 나왔다면 승복을 하기 전에는 또한 죄가 성립되기 어렵습니다."
하자, 답하기를,
"아들이 없는 사람이 부득이한 뒤에 일가 중에서 선택하여 길러서 자기 아들을 삼은 것은, 그 뜻과 소망이 어찌 다만 집안을 지키고 제사를 지내는 것에만 있을 뿐이겠는가. 무릇 사람이 부모가 생존하였을 때에는 비록 공손히 자식의 직분을 하였을지라도, 그 부모가 돌아감에 이르러서는 아버지의 일을 위배하여 고치는 사람들이 퍽 많은데, 만약 생전에 공순하지 못하였다면 돌아간 뒤에는 알만하다. 이민백이 그 두 사내종을 볼기친 것이 비록 아버지의 명령에서 나왔다고 말하지만, 모두 죽음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의심스럽다. 그리고 태장(笞杖)만을 사용하였다는 말도 대단히 진실성이 없으니, 마땅히 무거운 죄에 따라 논단하여 악한 사람의 경계를 삼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만약 처형한다면 반드시 그 양부(養父)의 마음을 크게 상할 것이니, 지금 우선 장형(杖刑)을 집행하고 배소(配所)를 정하여 귀양보내도록 하라."
하니, 이에 장 일백 유 삼천 리에 처하였다. 대사간 정백창(鄭百昌), 사간 이경인(李景仁), 정언 유창문(柳昌文)이 이민백(李敏白)의 공초한 말에 대간(臺諫)이 속였다는 말이 있다는 까닭으로 마침내 모두 인피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간원이 모두 출사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무지개가 간방(艮方)에 나타났다.
지중추부사 정응성(鄭應聖)이 상소하기를,
"강도(江都)는 바로 서울의 피난처입니다. 만약 오랑캐가 곧장 몰아쳐오는 환난이 있을 경우, 배를 준비해 놓지 않으면 무슨 계책으로 건널 수 있겠습니까. 예전 규례에 의하여 다시 경강(京江)의 주사(舟師)를 두어 한 무장(武將)을 정하여 정돈해서 변란에 대비하게 한다면, 반드시 급할 때 허둥지둥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경기 수사(京畿水使)를 통어사(統禦使)로 호칭하여 공청(公淸)·황해(黃海)의 주사들까지 통제하도록 한다면, 서로 의지하여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신이 중국에 갈 적에 으레 배 2, 3척을 사용하는데, 한 번 왕래한 뒤에는 바로 서로(西路)에 방치해 둡니다. 지금 이후로는 그 배를 모두 강도에 예속시킨다면 병선(兵船) 수효가 자연히 해마다 증가할 것입니다."
하자, 비국이 복계하기를,
"연경(燕京)에 갔던 배는 반드시 다 여러번 바다를 건넜던 것이니, 비록 강도에 옮겨 예속시키더라도 사용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경강(京江)에 주사를 둔 것이 선묘조(宣廟朝)에서 비롯되어 지난 기미년077) 에는 그 제도를 증가시켰는데 반정(反正)한 뒤에 이미 다 혁파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다시 둔다면 반드시 백성들의 힘을 크게 이용하여야 하므로 섣불리 의논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경기 수사를 통어사로 호칭하여 양도(兩道)의 주사까지 통제하도록 하자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 같습니다. 화량(花梁)·초지(草芝)·제물(濟物)·영종(永宗) 4포(浦)는 강도로 철수하여 옮길 수는 없지마는, 마땅히 바람이 잔잔할 때는 강도에서 변란에 대비하다가 바람이 세게 불면 파하고 돌아가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연경에 갔던 배도 강도로 옮겨 예속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9월 20일 을묘
이귀가 또 무덕문 안에 나아가 입대를 청하자, 상이 그로 하여금 혼자 들어오도록 하니, 승지 김남중(金南重)이 아뢰기를,
"승지와 사관이 입시할 수 없는 것은 일의 체통으로 헤아려 봄에 지극히 온당하지 않습니다. 전례에 의하여 입시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방이 다만 한 칸뿐이기 때문에 앉을 곳이 없다."
하였다. 승지가 또 아뢰기를,
"이미 입대를 윤허하셨으니 방이 아무리 좁더라도 승지와 사관이 어찌 입시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자, 답하기를,
"창밖에 들어오는 것은 무방하다."
하니, 승지와 사관이 드디어 창밖으로 나아갔다. 이귀가 나아가 아뢰기를,
"상이 기력이 편치 아니하신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조정 신하들이 증세의 경중을 몰라 모두들 매우 민망스럽고 답답하였습니다. 신이 여러번 입대를 청한 것이 미안스러운 줄을 너무나 잘 알지만 인정상 스스로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행스럽게 상의 모습을 뵙게 되니 무엇을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이어서 눈물을 흘리자, 상이 이르기를,
"경이 여러번 입대를 청하면서 반드시 차가운 땅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을 터인데 상한 데는 없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의 지극한 심정은 오직 옥후(玉候)의 경중을 직접 여쭙기를 바랄 뿐이었는데, 신의 몸이 상하게 되는 것이야 어느 겨를에 돌아보겠습니까. 상께서 지난날 계운궁(啓運宮)078) 의 상사(喪事)를 당하였을 적에는 춘추(春秋)가 한창 왕성하셨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상례(喪禮)를 지켜도 보전되어 걱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기력이 전일에 비하여 아주 다른데, 만약 지나치게 슬퍼하다 상하시게 되어 지탱하지 못하신다면 효도로 끝마치는 도리가 아닙니다. 지난날 조정 신하들이 권도를 따르시라고 청하였을 적에, 상께서 너무나 지나치게 예절을 지키면서 말씀의 뜻을 간절하시니 누군들 감탄하지 않았겠습니까. 다만 비장(脾臟)과 위장(胃腸)의 증세는 반드시 권도를 따라야 조섭하여 치료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 병이 대단한 지경에 이르지 아니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들어와서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걱정들이 너무나 지나친 것이다. 경이 지금 들어와서 보니 내가 과연 대단히 아픈 데가 있는가?"
하자, 이귀가 아뢰기를,
"원기(元氣)가 이미 상하면 외부의 나쁜 기운이 쉽게 침입하여 찬바람을 잠깐만 쐬어도 바로 크게 상하게 되는데, 상의 모습이 수척하여 검음이 너무나 심하시니 어찌 대단히 염려스럽지 않겠습니까. 졸곡 전에는 비록 권도를 따르지 않으시더라도 반드시 낙죽(酪粥)으로써 차츰차츰 조리 보양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정성이 이에 이르니 낙죽은 마땅히 먹겠다."
하였다. 상이 승지더러 들어오도록 명하자, 김남중이 나아가 아뢰기를,
"긴요치 아니한 공사(公事)는 아마 조섭하시는 데에 해로울 성싶으니, 혹은 승정원에 보류시키거나 혹은 도로 내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그렇게 하면 반드시 적체될 염려가 있다. 문서를 출납하는 것은 진실로 큰 해가 없다."
하였다. 이어서 입대를 마치고 나갔다.
9월 21일 병진
영충추부사 이원익이 상차하여 돌아가겠다고 말씀드리니,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다 알았다만 마음이 대단히 섭섭하다. 경은 안심하고 황공스럽게 여기지 말라."
하였다.
9월 22일 정사
지중추부사 정경세(鄭經世)가 상주(尙州)에 있으면서 국상(國喪)에 달려가지 못한 것으로써 상소를 올려 체직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동래 부사 홍입(洪雴)이 치계하기를,
"객인(客人)의 접대를 지연시킬 수 없는데, 해조의 이문(移文)이 오래도록 내려오지 않기에, 부득이 최복(衰服)으로써 서로 접견하고 연회 물품은 유숙하는 곳으로 보내주었습니다. 지금 해조의 이문을 보건대 한결같이 조정의 지휘에 따라야 하겠습니다만, 신의 생각에는 국상에 의복을 바꿔 입는 일이 참으로 지극히 중대하니, 반드시 중한 것이 저들에게 있어 압굴되는 바가 있는 뒤에야 바야흐로 의복을 바꿔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도주(島主)가 우리 나라에 대해서 스스로 동번(東蕃)이라고 칭하는데, 어찌 의복을 바꿔 입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변방에서는 거애(擧哀)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오례의》의 소주(小註)인데, 그 뜻이 반드시 적과 더불어 서로 대치할 때에 국가에 큰 상사(喪事)가 있으면, 뜻밖의 변고가 있을까 두렵기 때문에 그 상사를 숨기는 것일 겁니다. 그러나 지금이 왜인은 이미 우리 나라에 정성으로 복종하여 잇따라 사신을 보내오니, 아무리 상사를 숨기고자 하여도 될 수 없는 것이며, 앞으로 졸곡이 한 달 밖에 안 남았는데 이때에 의복을 바꿔 입는 것은 더욱 온당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졸곡 뒤에 갑자기 최복을 바꾸어 검은 옷을 입는다면, 왜인은 그들 때문에 의복을 바꿔 입은 줄 모르고서 문득 우리 나라 상제(喪制)는 여기에서 끝날 뿐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다시 결정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예조가 복계하기를,
"홍입의 말이 과연 지극히 일리가 있으니 대신들에게 다시 의논하소서."
하자, 대신들이 그렇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 좌랑 박황(朴潢)이 전일에 영광 현감(靈光縣監)이 되었을 때에 상소하여 연해(沿海)의 여러 고을들의 폐단을 말하자, 상이 비국으로 내려 보내 의논하도록 하였는데, 비국이 복계하기를,
"예로부터 나라를 부유하게 만드는 방도가 어염(魚鹽)에 많이 힘입었는데, 모두 탁지(度支)가 그것을 주관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아문(衙門)이 차츰 많아져 폐단이 날로 증가하여 백성들에게 해만 끼치고 국가에는 이익이 없습니다. 의정부·충훈부·기로소·돈령부에 어선(魚船)을 헤아려 주는 것이 오늘날 타당한 바가 아니며, 훈련 도감은 이미 둔전(屯田)이 있으므로 또 어리(魚利)를 독점할 필요가 없으니, 모두 혁파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성균관은 많은 선비가 있는 곳이므로 으레 바치는 어세(魚稅)를 비록 폐기할 수는 없지만, 역시 차인(差人)을 별도로 파견하지 말고, 해조로 하여금 1년에 꼭 들어가는 수량을 헤아려 격식을 정해 놓고 나누어 지급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여러 도(道)의 관향사(管餉使)는 바로 정묘년079) 이후에 둔 것이니 감축해 버리는 것 역시 타당하겠습니다. 내수사에 소속된 어염(魚鹽)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니 진실로 폐기할 수 없습니다. 다만 차관(差官)이 내려갈 때에 반드시 해조의 공문을 가지고 가는데, 여러 궁가(宮家)의 별차(別差)들이 이로 인하여 폐단을 저지르니 참으로 지극히 가증스럽습니다. 조사하여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의정부 이하 각 아문의 어선(魚船)을 하루아침에 혁파하는 것이 자못 타당하지 않고 성균관에 으레 바치는 어세(魚稅)도 역시 본조(本曹)가 간여하는 것이 부당하니, 이 두어 가지 사항은 시행하지 말라. 훈국(訓局)의 어선은 본국의 물력을 상세하게 살펴 처리하고, 각도의 감사·병사·수사가 고기를 잡아 이득을 챙기는 일에 대해서는 각별히 엄금하여 어부(漁夫)들의 폐단을 제거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비국이 또 아뢰기를,
"어선을 각 아문에 분속시킨 것은 태평할 때의 일이므로 임진년080) 이후에는 선조(宣祖)가 모두 혁파하도록 하였는데, 지난날 혼조(昏朝)에서 모두 다시 두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각 아문의 위차(委差)가 상사(上司)를 칭탁하여 폐해가 닭과 돼지에게까지 미치고 있으니, 지금 혁파할 만한 폐단이 이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습니다. 각 아문의 어선이 비록 분속되었다고 말하지만 선조(先朝)에서 이미 혁파하였으니, 마땅히 해조로 하여금 격식을 정해 놓고 나누어 주도록 하여야 합니다. 훈국(訓局)의 어선 역시 군사들에게 반찬을 지급하는 일이 없고, 판매하여 이득을 취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기에 백성들의 원망이 대단히 많으니, 아울러 일제히 혁파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3일 무오
우박이 왔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현궁(玄宮)081) 에 하관(下棺)할 때에 망곡(望哭)하는 예가 《오례의》에 실려 있지 않고, 선조조(宣祖朝)에 인순 왕후(仁順王后)의 상사(喪事)에 특별히 대신들에게 하문하여 비로소 이런 예가 되었는데, 어떤 곳에서 망곡례를 거행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경오년082) 에 천릉(遷陵)할 때의 가까운 전례로 말한다면, 지금도 마땅히 숭정전 섬돌 위에서 망곡례를 거행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성상의 기력이 편치 아니하신 지가 이미 오래되어 형세상 외출하기가 어려우니, 신들의 생각에는 전하께서는 마땅히 여차(廬次) 앞뜰에서 망곡례를 거행하시고 백관들은 연광문(延光門) 밖에서 망곡례를 거행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밤 5경에 달이 헌원성(軒轅星)의 네째 별을 침범하였다.
9월 24일 기미
부호군 김상헌이 겸직을 체차하였다. 당초에 김상헌이 일을 논하면서 허다히 상의 뜻을 거스르니, 상이 좋아하지 않아 제배(除拜)할 경우와 말씀을 내릴 적에 번번이 불평스런 뜻을 보였다. 김상헌이 드디어 양주(楊州) 땅으로 물러가 벼슬에 뜻을 끊고 병으로 사양하면서 겸직한 세자 우빈객·동지 성균관사를 면직할 것을 청하자, 상이 모두 체차하니 진신(搢紳)들이 탄식하며 애석하게 여기었다.
밤 5경에 유성이 묘성(昴星) 위에서 나와 서쪽으로 들어갔다.
9월 25일 경신
예조가 아뢰기를,
"《오례의》에는 상제(喪祭)의 예를 전하께서 주관하도록 되어 있는데, 끝에 또 섭사의(攝事儀) 한 조목도 있어 초헌관(初獻官)·아헌관(亞獻官)을 1품관으로 삼습니다. 대개 그때를 당하여 전하께서 혹 연고가 있으시면 신료(臣僚)들로 하여금 대신 거행하도록 하는 것 역시 한 방도입니다. 지금 옥후(玉候)가 오랫동안 편찮으셔서 초우(初虞)로부터 졸곡(卒哭)까지 상차(喪次)에 들어가 친히 제사를 지내는 것이 기필할 수 없을 듯하니, 일을 대행하는 의주(儀註)를 전례에 따라 마련하여 들어가 아뢰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일을 대행할 때에 왕세자가 제사에 참석하느냐 안 하느냐를 단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대개 전하께서 병환이 나셔서 제사를 못 지내게 되어 왕세자가 초헌(初獻)을 거행하면 제사를 주관하는 혐의가 없지 않으며, 이로 인하여 참석하지 않으면 역시 인정과 예의에 벗어나니,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을 꼭 따라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대신들에게 의논하소서."
하자, 영의정 윤방, 좌의정 이정귀가 아뢰기를,
"성상의 옥체가 바야흐로 병환 중에 계시므로 우제(虞祭)와 졸곡 제사를 결코 다 친히 지내기가 어려운데, 신료들이 대신 지내는 것이 본시 정해진 전례가 있습니다. 왕세자는 무릇 묘향(廟享) 및 상제(喪祭)를 본래 대신 지내는 예가 없으니, 대개 제사를 주관하는 혐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정에는 비록 서운한 것 같지만 경전(經傳)에 근거 있는 예가 아니라서 아마 경솔하게 의논하기가 어려울 성싶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상께서 결재하소서,"
하고, 우의정 김상용이 아뢰기를,
"우제와 졸곡 때에 상의 기력이 만약 완전히 평상시로 회복되시지 않는다면 세자가 초헌을 대신 거행하는 것이 인정이나 예의로 헤아려 봄에 아마 불가함이 없을 성싶습니다. 만약 제사를 주관하는 혐의를 피하여 세자가 역시 참석할 수 없다면, 그것이 예에 어떠한지는 모르겠으나 인정에 있어서는 미안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이 변례(變禮)에 관계된 데다가 신은 예학(禮學)에 어두우니 감히 경솔하게 의논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영상과 좌상의 의논을 따랐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신들의 마음에는 끝내 의심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오례의》에 대왕상(大王喪)에 대해서는 상세히 되어 있고 내상(內喪)에 대해서는 간략히 되어 있습니다. 그 초상(初喪) 성복(成服) 전에 왕세자라고 칭한 것은 미처 임금 자리를 이어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임금 자리를 이어받은 이후에 전하(殿下) 및 대군(大君) 이하만 칭한 것은, 세자가 겨우 임금 자리를 이어받아 원손(元孫)이 미처 책봉되지 못하였으니 세자를 말하지 않은 것은 형세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의 일에 있어서는 예를 제정한 사람이 예측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으니, 섭사의에 세자를 말하지 않은 것 또한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사향 대제(四享大祭)에 행사를 대행하는 예는 또 3년 내의 우제(虞祭)나 졸곡(卒哭) 제사와 더불어 자못 서로 같지 아니한데, 지금 인용하여 전례를 삼고자 하는 것은 아마 충분히 온당하지 못한 성싶고, 예경(禮經)에 찾아보아도 명백히 근거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다만 사대부의 상례(喪禮)로 말하건대, 우제와 졸곡 제사에 오복(五服)의 친척들이 각각 행당된 복(服)으로 들어가 곡하는 것은 바로 인정과 예의에 그만 둘 수 없는 것입니다. 제후(諸侯)의 예는 비록 구별이 있는 것 같지만 실정과 이치로 따져보면 어찌 서로 멀겠습니까. 더구나 제문(祭文)에 마땅히 ‘세자 아무를 삼가 보낸다.’고 칭하여야 되고 보면, 아마 제사를 주관함을 혐의스럽게 여기는 것을 의심할 필요가 없을 성싶습니다. 신들이 모두 학문에 어두운 사람들로서 이렇게 장례를 치르는 큰 예를 당하여, 이미 경전(經傳)을 널리 상고하지 못한 데다 또 삼가 생각하고 살펴 묻지도 아니하여, 미진(未盡)한 일이 있게 된다면 그 죄가 더욱 큽니다. 그러므로 무릇 의심스러운 바가 있으면 부득불 반복해서 아뢰오니,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다시 널리 상고하여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시 전례가 있으니 다시 의논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9월 26일 신유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긴요하지 않은 공사(公事) 및 무릇 소차(疏箚)에 관련된 것은 전례에 의하여 내일부터는 들여오지 마라."
하였다. 발인이 바싹 다가왔기 때문에 이런 하교가 있었다.
9월 27일 임술
추신사(秋信使) 박난영(朴蘭英)이 오랑캐 내부로부터 의주(義州)로 돌아와 치계하기를,
"신이 관소(館所)에 들어가 머무른 지 수일 만에 용골대(龍骨大)에게 말하기를 ‘들어온 지가 벌써 여러 날이 되었는데도 국서(國書)와 예단(禮單)을 아직까지 올리지 못하고, 사신 역시 두어 가지 약정(約定)할 일이 있는데 모두 통할 수 없다.’고 하자, 용골대 등이 말하기를 ‘이른바 약정한다는 것이 무슨 일이냐.’고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지나간 해에 적예(賊隷) 홍대웅(洪大雄)이 스스로 전임 조관(朝官)이라고 청하였을 적에, 당신들은 반드시 그 말을 믿었을 터이니 가소롭고 염려스럽다. 그 뒤에 안주(安州)의 통인(通引) 김사일(金士一)·김사해(金士海) 등이 지난 경오년083) 에 당신 나라로 투입해 들어갔는데도 아직까지 묶어 보내지 아니하니, 두 나라가 서로 믿는 의리가 어디에 있는가. 사체로 볼 때 의당 잡아 보내 두 나라의 의심을 풀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문제이다. 흑운룡(黑雲龍)이 달아나 천조(天朝)로 돌아간 뒤로부터는 중국의 물화(物貨)가 절대로 나오지 아니하니, 우리 나라가 다른 곳에서 얻을 수 있는 길이 없다. 만약 당신 나라가 이와 같은 사정을 모르고서 시장을 열 목적으로 나오면 형세가 장차 그냥 돌아가게 될 것이다. 반드시 천조의 물화가 나오는 것을 기다린 뒤에야 시장을 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문제이다. 두 나라가 서로 좋아하여 일이 한 집안과 같으니 무릇 문자와 언어를 서로 통하지 아니할 수 없다. 때문에 당신 나라에서 널리 쓰고 있는 번역서(飜譯書)를 장차 역관(譯官)에게 학습시키고 싶으니 그 본서(本書)를 얻고자 한다. 이것이 세 번째 문제이다. 천하의 악(惡)은 한가지로서 사람들이 함께 분개하는 것이다. 지난해에 온성(穩城)에 사는 양사복(梁嗣福)이 죄를 짓고 귀양살이하는 사람과 몰래 결탁하여, 그의 아들 양계현(梁繼賢)으로 하여금 흉서(凶書)를 금(金)나라에 전하도록 하다가 모반이 탄로되어 이미 처형되었는데, 양계현은 목숨을 보전하여 아직까지 금나라에 있으니 도리에 마땅히 잡아 보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네 번째 문제이다.’고 하니, 용골대 등이 말하기를, ‘마땅히 한(汗) 앞에 다시 말씀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잠시 후에 와서 한의 뜻을 전하면서 말하기를 ‘요사이에 연고가 있어 나와 앉을 수 없으니, 다만 국서(國書)만 가지고 오라고 한다.’고 하기에, 신이 친히 전하겠다는 뜻으로 두세 번 하소연하였으나 끝내 허락해 주지 않아, 할수없이 국서를 전해 주었는데 예단(禮單)은 보류하고 받지 아니하였습니다.
용골대(龍骨大)·만월개(滿月介)·마부대(馬夫大)·중남(仲男) 등이 잠시 후에 또 와서 말하기를 ‘방금 의논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만월개가 사신과 더불어 함께 가서 전물(奠物)을 가지고 조제(弔祭)하도록 하였고, 소도리(所道里)·골자(骨者) 등으로 하여금 답서(答書)를 싸가지고 뒤따라 보내도록 다시 조약을 정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단(禮單)은 적게 여기지는 않았는데 다만 우리를 가리켜 재물을 탐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것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용골대 등이 또 한의 뜻을 가지고 와 전하면서 말하기를 ‘조선(朝鮮)이 남조(南朝)를 부모로써 대우하기 때문에, 명나라의 사신이 나갈 때에는 조선의 대소 관원들이 모두 말에서 내려 서로 영접하고, 우리 나라는 조선에 대해서 형제의 나라이므로 피차간의 사신이 왕래할 때에 말 위에서 서로 읍하고서 영접함에 불과할 뿐이라, 우리 차사(差使)가 왕래할 때에는 1로(一路)의 4대관(大官)들이 나와 영접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지금 이후로 또 이와 같이 하면 우리 차사가 마땅히 스스로 되돌아올 터이니 이 뜻을 아뢰어라.’고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본래 이같은 예가 없는데 당신 나라에서 들은 것이 참으로 잘못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만월개가 조제(弔祭)할 일로써 신과 더불어 함께 왔습니다."
하고, 평안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치계하기를,
"추신사(秋信使)의 장계(狀啓) 사연을 듣건대, 뒤의 차호(差胡) 등이 나올 때에는 본도(本道)의 감사·병사, 황해 병사(黃海兵使), 개성 유수(開城留守) 등 4대관(大官)들이 모두 성을 나와 영접하도록 하여 중국 사신에게 대하는 예로 접대하라 한다고 하니, 노적(奴賊)의 뜻이 참으로 맹약(盟約)을 저버림에 있습니다. 지금 비록 그 요구를 다르더라도 또 한층 더하여 반드시 틈이 생기고야 말 것입니다. 더구나 평안·황해 두 병사(兵使)는 모두 성을 지키는 장수들이니 그들이 몸을 가볍게 하여 나가 영접할 수 없습니다. 비변사로 하여금 빨리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자, 비국이 복계하기를,
"우리 사신이 저들에게 가면 저들 역시 말 위에서 서로 영접하고 있으니, 4대관(大官)들이 그 좌이관(佐貳官)을 보내 성(城)을 나가 서로 영접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별로 비굴한 일이 없습니다. 지금 이 만월개의 사행을 위시하여 이에 의하여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이번 박난영의 사행에 속환(贖還)하는 값을 저들이 의주(義州)의 절가(折價)를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도로 가지고 가라고 하였으니 박난영이 마땅히 도로 가지고 왔어야 합니다. 그러나 힘껏 하소연하지 않고 오직 그들의 말대로 하여 어기지 아니하였으므로, 후일 의주에서 시장을 열 적에도 반드시 이를 인용하여 을러대면서 감정(減定)하는 일이 있을 것이니 이미 놀랍고, 한(汗)의 답서도 받지 않고 곧바로 먼저 나왔으니, 그가 사신 임무를 봉행함에 있어 적절히 못한 죄가 큽니다. 금나라의 차사가 돌아옴을 기다려 나국하여 죄를 정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장계 중의 두어 가지 말에 있어서도 금나라 차사가 오는 것을 기다려 마땅히 다시 의논하여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비변사가 또 아뢰기를,
"풍속이 다른 나라가 예의(禮義)를 사모하고 본받아 차사를 일부러 보내와 제사를 드린다고 하니 그 뜻이 가상합니다. 구관소(句管所)로 하여금 각별히 우대하도록 하고, 그 제례(祭禮)의 절목에 있어서는 금차가 들어오는 것을 기다려 마땅히 다시 의논하여 정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8일 계해
약방이, 발인(發引)하면서 곡(哭)하고 고별할 때에 여차(廬次) 앞뜰에서 예를 거행하고, 우제(虞祭) 역시 《오례의》의 섭사의(攝事義)에 의하여 시행할 것을 계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증세가 거의 다 나아 회복되었으니 경들은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목대흠(睦大欽)을 공조 참의로 삼았는데, 목대흠이 일찍이 혼조(昏朝)에 있으면서 모후(母后)를 폐위하자는 정청(庭請)에 참여하였기에 이로써 세상에서 흠잡는 바가 되었다. 심연(沈演)을 홍문관 교리로 삼았는데, 심연은 본시 벼슬 욕심이 많아 아첨하는 것으로써 일삼아 일찍이 혼조에서 급제(及第)도 하기 전에 권문(權門)에 나아자 붙자 지식인들이 그를 비루하게 여기었다.
9월 29일 갑자
좌의정 이정귀, 우의정 김상용이 빈청에 모여, 약방의 아뢴 말에 의하여 발인할 때에 여차 앞뜰에서 예를 거행하고, 우제 역시 《오례의》의 섭사의에 의하여 시행할 것을 계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원히 고별하는 예를 결코 안뜰에서 거행할 수 없으니, 경들은 부디 번거롭게 하지 말라. 그리고 우제를 대신 지내도록 하는 일은 발인이 지난 뒤에 마땅히 기력을 보아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정원 역시 이런 뜻으로 계청하니, 답하기를,
"내 뜻을 대신들에게 이미 유시하였다."
하였다.
유성이 헌원성(軒轅星)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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