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7권, 인조 10년 1632년 10월

싸라리리 2025. 12. 29.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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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을축

양사가 합계하기를,
"인산(因山)이 이미 날짜가 정해져 선침(仙寢)이 장차 닫히게 되었으니, 무릇 신민(臣民)들에게 있어서 모두들 부모를 여읨과 같은 슬픔이 절실한데, 더구나 성상의 타고나신 효성으로서 붙들어잡고 울부짖어 망극하심이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하건대, 성상께서 편치 못하신 지가 이미 두어 달이 넘어, 지금은 안팎이 모두 상하여 드디어 위중하심에 이르러 밀실(密室) 안에서도 오히려 화롯불을 놓아두고 있으니, 어찌 풍상(風霜)을 범촉하여 밤을 무릅쓰고 수고롭게 움직이실 것이 있겠습니까. 곡(哭)하며 고별하는 예를 진실로 폐기할 수 없는 것으로서, 여차(廬次)가 빈전(殯殿) 옆 지극히 가까운 곳에 있으니 여기에서 예를 거행하는 것이 바깥뜰과 무슨 경중이 있겠습니까. 인정과 예의로 헤아려봄에 조금도 흠이 없으니,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힘써서 지극한 심정을 억눌러 안뜰에서 예를 거행할 것을 특별히 윤허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전일 병이 지금 나았으니 그대들은 부디 지나치게 염려 말라."
하였다.

 

유성이 삼태성 밑에서 나와 헌원성을 지나 성성(星星) 위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동이 같고 빛깔은 붉다가 흰 기운으로 변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금차(金差)를 접대하는 복색은 마땅히 최복을 그대로 착용해야 할 것 같은데, 연례(宴禮) 한 가지가 진실로 난처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미리 결정하도록 하소서."
하자, 비국이 회계하기를,
"최복으로 연회에서 대접하는 것이 예에 옳지 않으니, 다만 다례(茶禮)만을 거행하고 별도로 잔칫상을 차려 머무르고 있는 처소로 보내주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2일 병인

함경 감사 김기종(金起宗)이 치계하기를,
"사을두(沙乙斗) 및 한인(漢人)들이 나온 것은 혹시라도 일부러 내보내어 탐색 시험해 보려는 염려가 없지 않으니, 저들이 만약 언급하면 마땅히 즉시 잡아주어 화해하여 사이가 좋은 뜻을 보여주고, 만약 저들 내부의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참으로 투신해 온 사람이라면 그대로 도주하도록 하여 혹시라도 살길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오히려 오랑캐에게로 묶어 보내는 것보다 낫습니다."
하자, 비국이 회계하기를,
"사을두는 누차 도망와 여기에 머무르면서 아무 쓸모가 없는데, 그가 도주하도록 맡겨주면 그후에 난처한 일이 없지 않을 터이니, 차호(差胡)가 오는 것을 기다려 먼저 즉시 내주어 저들에게 신의를 보여주어 후일에 대비하는 기반을 삼는 것만 못합니다. 그리고 한인이 이미 사을두와 더불어 함께 와 끝내 숨길 수 없으니, 마땅히 아울러 내주어 힐책을 받는 걱정에 이름을 모면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3일 정묘

조전(朝奠)을 인하여 빈전(殯殿)에서 계빈전(啓殯奠)을 지내고, 찬궁(欑宮)을 연 뒤에 또 별전(別奠)을 지냈으며, 해가 저물 적에 조전(祖奠)을 지냈는데 백관들이 모시고 제사지내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대신이 백관들을 거느리고 삼전(三殿)에 위문드렸다.

 

예조가 아뢰기를,
"발인이 하룻밤밖에 안 남았는데 비오는 기세가 이와 같으니 일이 몹시 민망스럽고 절박합니다. 4문(門)에 영제(禜祭)를 즉시 지내소서."
하니, 상이 따랐는데, 이날 비가 개었다.

 

10월 4일 무진

견전제(遣奠祭)를 지냈는데 백관들이 모시고 제사지내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약방이 바깥뜰에서 예를 거행하는 일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증세가 대단함에 이르지 않았으니 염려하지 말라."
하면서, 세 번이나 아뢰어 청하였으나 상이 끝내 듣지 아니하였다. 상이 건명문(建明門) 밖의 악차(幄次)로 납시어 영여(靈輿)가 장차 이르려 하자, 상이 악차에서 나와 슬프게 곡(哭)하고 4배(拜)하였고, 세자 역시 그와 같이 하였다.

 

평안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치계하였다.
"만월개(滿月介)가 숙천(肅川)으로부터 평양에 이르러 ‘정묘년084)   이후로 예단(禮單)의 감소가 해마다 더욱 심하여 자못 예로 공경하는 뜻이 없으니 도로 보내지 아니할 수 없다.’고 죄다 말하고, 또 말하기를 ‘천조(天朝)에 공물을 바침에 있어서는 봄 가을 두 차례 이외에 또 성절(聖節) 등 방물(方物)도 있는데 우리에게는 다만 봄 가을의 예만 있으며, 중국 사신이 올 적에는 금·은기(金銀器)를 사용하면서 우리에게는 모두 사기 그릇을 쓰니, 우리를 대접함에 있어서는 어찌 유독 엉성하게 하느냐.’고도 하였습니다."

 

10월 6일 경오

인목 왕후(仁穆王后)를 장사지냈는데 그 지문(誌文)에,
"인목 왕후의 산릉(山陵)에 흙을 덮는 일이 완성되자, 상이 신 유(維)가 사액(詞掖)085)  의 장관(長官)이라 하여 현궁(玄宮)의 지문(誌文)을 지으라고 명하시기에, 신이 명을 받고 황공스러웠으나 스스로 직책의 일을 생각해 보건대 감히 글을 못한다고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왕후의 성은 김씨(金氏)로서 선계는 신라(新羅) 왕족에서 나왔다. 그 뒤에 바른 말로 간하다 죄를 입고 시염성(豉鹽城)으로 귀양간 이가 있어 자손들이 인하여 관향을 삼았는데 뒤에 연안부(延安府)로 고쳤다. 시조(始祖)는 김섬한(金暹漢)인데 고려의 사문 박사(四門博士)이며, 4대를 지나 도(濤)에 이르러서는 문장과 절행이 있어 황조(皇朝)의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동창부(東昌府) 안구현 승(安丘縣丞)에 제수되었고, 동쪽으로 돌아와서는 벼슬이 밀직 제학(密直提學)에 이르렀으며, 또 4대가 지나 충정공(忠貞公) 김전(金詮)에 이르러서는 영의정 벼슬을 하여 청백(淸白)으로써 소문났는데, 왕후에게 고조(高祖)가 된다. 증조의 휘(諱)는 안도(安道)인데 현령(縣令)으로 좌찬성을 증직하였으며, 조부의 휘는 오(祦)인데 사정(司正)으로 영의정을 증직하였으며, 아버지의 휘는 제남(悌男)인데 문과(文科)로 벼슬길에 나아가 대각(臺閣)을 역임하고, 천조랑(天曹郞)으로서 작위가 연흥 부원군(延興府院君)·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올랐는데, 광산 부부인(光山府夫人) 노씨(盧氏) 장사랑(將仕郞) 게(垍)의 딸에게 장가들어, 만력(萬曆)086) 갑신년087)   11월 병술(丙戌)에 왕후를 낳았다.
왕후는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 의인 왕후(懿仁王后)가 승하하고 선묘(宣廟)가 계비(繼妃)를 뽑을 적에, 왕후로 뽑히어 임인년088)   7월 13일에 왕비로 책봉되어 사신을 보내 황조(皇朝)에 고명(誥命)을 청하니,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고명·관복(冠服) 및 채폐(綵幣) 등의 물품을 내려 주었다. 왕후가 이미 중전(中殿) 지위가 정해지자 스스로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항상 장공예(張公藝)의 백 번 참는다는 대답을 흠모하여 백인(百忍)을 써서 창문벽에 걸어 놓고서 스스로 성찰하였다. 겨울철에는 위졸(衛卒)들이 추위에 고생하는 것을 염려하여 때때로 동옷·가죽모자를 만들어서 그들에게 하사하곤 하니, 선묘가 일찍이 칭찬하기를 ‘내전(內殿)의 인자함은 비록 옛날의 어진 왕비일지라도 이보다 나을 수 없다.’고 하였으며, 갑진년089)  에 군신(群臣)들이 휘호(徽號)를 소성(昭聖)이라고 올렸다. 무신년090)  에 선묘(宣廟)가 승하하자 슬퍼하여 야윔이 예에 지나쳐, 3년을 다하도록 포최(布縗)를 벗지 아니하고 채소와 과일을 잡수지 아니하였다. 경술년091)  에 또 휘호를 정의(貞懿)라고 올렸다.
당초에 광해(光海)가 동궁(東宮)에 있을 적에 스스로 덕망을 잃은 줄 알고 있다가, 영창 대군(永昌大君)이 출생하게 되자 더욱 시기심을 품어, 이미 왕위를 물려받고서도 오히려 옛날 감정을 가져 왕후를 대우함에 있어 다시는 자식의 도리가 없었다. 그러자 간신 이이첨(李爾瞻) 등이 그 시기를 틈타 뜻을 펴, 먼저 유언 비어로써 틈을 얽어 남몰래 사형수(死刑囚)를 사주하여 옥중(獄中)에서 고변(告變)하도록 하여, ‘연흥(延興)이 영창(永昌)을 끼고서 장차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하여, 없는 죄를 꾸며서 옥사(獄事)를 만들어 연흥이 세 아들 한 사위와 더불어 모두 살해당하였으며, 영창은 겨우 여덟 살이라서 왕후가 항상 그를 품속에 품고 있었는데 광해가 빼앗아다 죽였고, 노부인(盧夫人)은 제주(濟州)로 귀양보냈다. 이첨(爾瞻)이 그의 무리들을 사주하여 앞장서서 말하기를 ‘모후(母后)의 도리가 이미 끊어졌으니 마땅히 폐위해야 한다.’고 하도록 하여 백관들을 위협하여 정청(庭請)하자, 선조(先朝)의 옛 신하 이항복(李恒福)·이원익(李元翼)·이덕형(李德馨) 등 5, 6인이 유독 바른 의론을 가지고서 ‘춘추(春秋)의 의리에 자식이 어머니를 원수삼지 아니한다.’고 말하니, 광해가 비록 더욱 화를 냈지만 그래도 감히 갑자기 무도한 짓을 하지 못하고, 마침내 서궁(西宮)에 유폐하여 문을 폐색하고 경비하여 겨우 물과 불만을 유통시켜 군색하고 곤욕스러움이 수만 가지였다. 왕후가 원통하고 괴로움이 뼈에 사무쳐 항상 자결하려고 하다가, 모신 사람들의 보호에 힘입어 다행히 보전하게 되었으니, 아, 어찌 차마 형언할 수 있겠는가.
강상(綱常)이 끊어져 인류(人類)가 금수(禽獸) 지경에 빠진 지 장차 1기(紀)가 되려던 차에, 천계(天啓)092) 계해년093)   3월에 이르러 금상(今上)094)  이 대의(大義)를 걸고 일어나 내란을 평정하고 왕후를 받들어 복위시키니, 왕후가 하교하여 광해의 죄악을 낱낱이 들어 책망하고 그를 폐위하여 강화(江華)로 추방하고, 금상에게 명하여 대위(大位)를 바르게 하여 선묘(宣廟)의 왕통을 계승하도록 하였다. 상이 이미 임금 자리에 오르자, 왕후를 높여 대왕 대비(大王大妃)로 삼고 휘호(徽號)를 더 올려 명렬(明烈)이라고 하였으며, 연흥 부원군의 관작을 복직시키고 예를 갖추어 개장(改葬)하였으며, 사신을 보내 해도(海島)에서 노부인(盧夫人)을 맞아오도록 하여 인륜이 다시 바르게 되니, 서울과 지방이 크게 기뻐하였다. 왕후가 항상 시중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몸이 온갖 환난을 만나 모진 목숨이 끊어지지 않고, 성손(聖孫)이 종사(宗社)를 다시 편안하게 하여 나를 물불 속에서 구출하고, 나의 부모와 형제의 원수를 갚아 나로 하여금 만년의 존귀하고 영화스러운 복을 누리게 하였으니, 어찌 천행(天幸)이 아니겠느냐. 나는 죽어도 유감이 없다.’고 하였다.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핍박하므로 상이 공주(公州)로 행행(行幸)하자, 왕후가 글을 내려 8도에 효유하여 위태롭게 여기고 의심하는 마음들을 안정시켰다. 왕자 이공(李珙)이 광해 시대를 당하여 폐묘(廢母)하자는 의논에 부회(傅會)하여 말이 몹시 도리에 어긋났었는데도, 왕후는 오히려 그를 위하여 용서해 주었고, 공의 모역(謀逆) 사실이 발각됨에 이르러서는 조정 신하들이 법에 의하여 처형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차마 죽이지 못하자, 왕후가 하교(下敎)하여 종사의 대계(大計)와 역적을 토벌하는 대의(大義)로써 효유하여 말이 엄절하니, 공이 마침내 법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갑자년095)  과 경오년096)  에 상이 두 번이나 풍정(豊呈)을 올리니, 왕후가 전쟁과 흉년으로 국가가 피폐한 까닭으로 누차 사양하여 즐거이 받아들이지 않다가, 상이 지성으로 굳이 청한 뒤에야 허락하였다. 10년 동안에 양궁(兩宮)이 인자하고 효도하여 간격이 없이 화기 애애하니, 사방에서 감동하여 기뻐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숭정(崇禎)097) 임신년098)   여름에 왕후가 병으로 누운 지 한 달이 지나 더욱 위독하여, 6월 28일 갑오(甲午)에 인경궁(仁慶宮)의 흠명전(欽明殿)에서 승하하니, 춘추(春秋)가 49세였다. 유사(有司)가 시법(諡法)을 의논하되, 인(仁)을 베풀고 의(義)를 행하는 것[施仁服義]을 인(仁)이라 하고, 덕(德)을 펴고 의를 지키는 것[布德執義]을 목(穆)이라 한다고 하여, 드디어 존시(尊諡)를 인목(仁穆)이라고 올리고, 또 휘호(徽號)를 광숙 장정(光淑莊定)이라고 올렸다. 이해 10월 초6일 경오(庚午)에 목릉(穆陵)의 동쪽 산등성이의 갑좌 경향(甲坐庚向) 자리에 장사지냈는데, 그것이 목릉에 가까워 부장(祔葬)과 같기 때문이다. 인하여 목릉으로 칭하였다.
왕후는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계축 화변(癸丑禍變)으로부터 3년 동안 밥을 먹지 아니했고, 복(服)을 벗고서는 다만 미음죽만을 먹었으며, 이미 복위(復位)되고서도 오히려 어육(魚肉)을 먹지 아니하였다. 상이 중궁(中宮)과 더불어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간곡하게 권한 뒤에야 비로소 평상시의 수라를 회복하였으니, 대개 소밥을 먹은 지 전후 통틀어 17년이었다. 검소한 것을 편안히 여겨 평생에 금수(錦繡)와 주취(珠翠)를 사용한 적이 적었고 항상 명주비단만을 입었을 뿐이며, 선묘(宣廟)에게 누님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를 대우함에 있어 은의(恩義)를 곡진히 하였고, 내외 종족(宗族)들에게 돈목하여 친소간에 각각 마땅하게 하였다. 종들을 부림에 있어서도 은혜와 위엄이 겸하여 지극하기 때문에, 비록 유폐되어 곤욕스러움에 오랫동안 있었어도 좌우에 한사람도 감히 두 마음을 품은 자가 없었다. 왕후가 영창 대군(永昌大君) 이의(李㼁)와 정명 공주(貞明公主)를 낳았는데, 영창은 흉화(凶禍)로 일찍 죽고 공주는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에게 하가(下嫁)하여 3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아, 왕후의 성실하고 그윽한 아름다운 덕으로서 불행하게도 인륜의 변을 만나온 집안이 참혹한 화를 당하였는데, 마침내 금용(金墉)099)  의 화를 모면하였던 것은 우리 성상께서 사직을 안정시킨 한번의 거사에 힘입은 것이다. 전에는 울다가 뒤에 웃어 다시 국양(國養)의 융성함을 누린 지 겨우 10년이 되었는데, 강릉(岡陵)과 같은 장수(長壽)를 하늘이 마침내 인색하게 하였으니, 아, 애통하다. 오직 그 아름다운 덕음(德音)이 없어지지 아니한 것들을 정석(貞石)100)  에 새기어 능묘에 세워, 장차 동관(彤管)으로 기록한 것과 더불어 영원히 오래도록 전하게 될 터이니, 아, 훌륭하도다."
하였는데, 이 지문(誌文)은 대제학 장유(張維)가 지은 글이다. 애책문(哀冊文)에,
"숭정(崇禎) 5년 임신년101)   6월 28일 갑오(甲午)에, 소성 정의 명렬 광숙 장정 인목 왕후(昭聖貞懿明烈光淑莊定仁穆王后)가 인경궁(仁慶宮)의 흠명전(欽明殿)에서 승하하시자, 이해 10월 초6일 경오(庚午)에 장차 목릉(穆陵)으로 자리를 옮기려고 하니, 이는 예입니다. 그림 그려진 찬궁(欑宮)이 막 열릴 적에 그 의장이 이미 도열되어, 봉조(鳳旐)102)  가 드리워지고 용순(蘢楯)103)  이 준비되었는데, 귀찮은 안개가 끼어 차가웁고 새벽바람이 처절함을 돋웁니다. 애손(哀孫) 주상 전하가 붙들어잡고 울부짖어도 소용이 없으므로 상심하여 사모함이 더욱 새로워, 기나긴 가을이 영원히 적막할 것을 비통하게 여기고 깊은 밤이 새지 않을 것을 애통스럽게 여기어 동관(彤管)을 가진 이에게 명하여 아름다운 덕행을 찬양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 밝은 조정에서 수신(修身) 제가(齊家)하여 교화가 이루어지니, 참으로 하늘이 배필을 만들어 왕후의 규범이 따라서 정숙하였습니다. 증사(曾沙)104)  가 영기(靈氣)을 기르고 찬란한 무성(務星)이 정기를 쏟아, 훌륭한 왕비를 특별히 탄생시켜 성명(聖明)의 덕을 짝하였습니다. 즐거움은 종고(鍾鼓)에 있고 법도는 금옥(金玉)에 빛나, 예를 실행하여 몸을 삼가고 시(詩)를 나열하여 규칙을 바르게 하였습니다. 갓끈과 면류관 덮개가 결손된 것이 없고 가는 갈포(葛布)나 거친 갈포를 싫어함이 없으니, 이 왕후의 가르침에 힘입어 임금의 덕이 더욱 빛났습니다. 그런데 운이 양구(陽九)105)  에 모이고 몸이 온갖 환난을 당하여, 창오(蒼梧)에서 임금의 수레가 멀리 떠나가니 반죽(班竹)에 눈물이 젖었습니다.106) 강회(康回)107)  가 몹시 성내어 우리 중전을 폐위하니, 금용(金墉)에 한번 갇힌 이상 대수(大隨)108)  를 누가 엿볼 수 있었겠습니까. 머리털을 자르고109)   의뢰할 데가 없었는데,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품속에서 빼앗아가 죽게 하였으니 부모도 몹시 불쌍하고 형제도 몹시 가여워하였습니다. 인륜이 땅에 떨어져 나라의 운명이 아슬아슬하였는데, 1기(紀) 동안 원통한 마음을 품어 씀바귀를 냉이처럼 달게 여기셨습니다. 그러자 천도(天道)가 순환하여 성손(聖孫)이 의리를 들고 일어나 서궁(西宮)이 자물쇠가 열리고 동조(東朝)110)  가 복위되었습니다. 사랑과 효도에 차이가 없고 존귀하고 영화로움이 겸하여 극에 달하였으며, 물건을 갖추어 봉양하니 정사에 관여치 않으면서 스스로 한적하게 생활하였습니다. 큰 교화가 흠뻑 젖고 오복(五福)이 퍼져, 강릉(岡陵) 같은 수명을 수많은 백성들이 함께 축원하였습니다.
그런데 풍상(馮相)111)  이 요기(妖氣)을 보고하고 태사(太史)의 점이 흉하여, 무지개가 계백(桂魄)112)  을 휘감고 화성이 헌성(軒星)으로 들어가자, 열병(熱病)에 갑자기 걸려 유로(兪盧)113)  의 의술(醫術)이 다하고, 표어(飆馭)114)  가 머무르지 않아 성산(星算)115)  이 영원히 끝났습니다. 후한 복이 떨어지고 자운(紫雲)116)  이 걷히니, 온갖 무리가 허둥지둥 놀라고 삼광(三光)117)  이 어두워졌습니다. 아, 슬픕니다. 하늘의 마음을 물어보기 어려운데 신(神)의 이치를 뉘라서 자세히 알겠습니까. 어진 사람이 꼭 오래 사는 것은 아니고 착한 사람이 간혹 상서(祥瑞)를 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세 조정(朝廷)에서 영화를 누린 것은 얼마 안 되는데, 10년 동안 유폐되어 곤욕을 치른 것은 어찌 그리도 길었습니까. 속세의 누적된 잡일을 싫어하여 참다운 생을 아득한 데에 의탁하였나 봅니다. 요수(瑤水)118)  에서 서왕모(西王母)를 심방하고 은하수에서 천손(天孫)119)  을 방문하여, 옥난간의 하늘꽃을 구경하고 취굴(聚掘)120)  의 특이한 향기를 남겼습니다. 아, 슬픕니다.
한 임금이 사모함에 백관들이 피눈물로 울어, 보좌(黼座)121)  가 철거되어 의려(倚廬)122)  가 되고 주류(珠旒)가 마질(麻絰)로 변하였습니다. 남긴 선패(仙珮)123)  는 정지해 있고 엄연한 영의(靈衣)124)  는 그냥 진열해 놓았는데, 합문(閤門)에 달이 비춰 처량하고 바람에 발[簾]이 울어 소슬합니다. 엄숙한 궁궐을 떠나 위험스런 서리 내린 들을 밟고서, 가고 또 가 구름을 타고 가셨으니 슬픔 중에 보다 더 슬픈 것은 영원히 이별하는 것입니다. 아, 슬픕니다. 백호(白虎)125)  에서 정기가 솟아오름에 청오(靑烏)126)  로 능묘자리를 합당하게 잡아 은해(銀海)127)  가 깊디 깊고 주구(珠丘)128)  가 두리둥실합니다. 구의(九疑)129)  에 의로운 무덤이 가련하지만 삼릉(三陵)130)  이 산기슭을 연한 것이 다행스럽습니다. 향불을 침전(寢殿)에서와 마찬가지로 올리고 상설(象設)131)  을 빈 골짜기에 마련하였으니 저승과 이승이 한 이치로 알기에 영령이 막히지 않을 줄로 느낍니다. 아, 슬픕니다. 하늘의 조화는 무궁하고 짧은 생명은 끝이 있어, 한 기운이 굴신(屈伸)함에 따라 온갖 만물들이 함께 죽게 됩니다. 무엇이 오래도록 영원히 남는가 하면 오직 덕음(德音)이라야만 없어지지 아니하고, 비록 좋은 자질을 가진 이의 아름다운 행실일지라도 오히려 서경(書經)과 시경(詩經)에서 증거하여 믿기 때문에 완염(琬琰)132)  에 의탁하여 공덕을 기재하고 한청(汗靑)133)  에까지 아울러 기록하여 분명히 전하였습니다. 아, 슬픕니다.’"
하였는데, 이 애책문은 대제학 장유가 지은 글이다.

 

상이 망곡례(望哭禮)를 거행하니, 백관들이 연광문(延光門) 밖에서 망곡하고 삼전(三殿)에 위문을 드렸다. 이날 반우(返虞)하였는데 상이 여차(廬次)로부터 사현각(思賢閣)으로 거처를 옮겼다.

 

10월 7일 신미

상이 곡하며 고별한 뒤로부터 퍽 편치 않자, 약방과 정원이 평상시의 수라를 힘써서 드시라고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졸곡이 멀지 아니하니 경들은 너무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10월 9일 계유

약방(藥房)이 우제(虞祭)를 친히 지내겠다는 명령을 취소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대신 지내는 것이 퍽 미안스럽고 기력도 지행할 것 같으니, 부디 억지로 말리지 마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오례의》에 초상(初喪)으로부터 우제(虞祭)·졸곡(卒哭)에 이르기까지 모두 치재(致齋)하는 절목을 기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대개 졸곡 전에는 백관들이 모두 공제(公除)하지 않으므로 기거(起居)와 언동(言動)의 절차가 자연 평상인에게 비할 수 없으니, 치재하는 한 조목은 원래 말할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대소 신료로서 예를 지켜 마음을 재계하는 사람이 진실로 이미 많이 없거니와, 직책의 일이 있는 이상 비록 심지를 깨끗이하여 치재하고자 한들 형세가 또한 쉽지 않습니다. 우제·졸곡 등 큰 제사 1일 전에 모시고 제사지낼 인원은 모두 형장(刑杖)을 사용하지 말고 흉하고 더러운 일에 참여하지 말며, 또한 정원으로 하여금 형살(刑殺)에 관한 문서를 들여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노사(虜使) 만월개(滿月介)가 들어왔는데 조제(弔祭)하기 위해서이다. 구관소(句管所)가 문답할 말을 미리 강론할 것을 청하자, 비국이 회계하기를,
"진향(進香)의 한 조목이 저들 나라의 성의에서 나왔으니 우리에게 있어서 거절할 만한 방도가 없으나, 상께서 바야흐로 조섭(調攝) 중에 계셔서 형세상 불러 들여 접견하기 어려우니, 이런 뜻으로 말을 만들어 응답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오례의》에, 졸곡 뒤에 전하는 시사복(視事服)이 있고 백관들은 공제복(公除服)134)  이 있으나, 무릇 상사(喪事)에 관계되는 일에 있어서는 최복(衰服)을 입는다고 하였는데, 졸곡의(卒哭儀)에 옷을 바꿔 입는 절차를 기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대개 공제복은 대상(大祥)과 연상(練祥)에 옷을 바꿔 입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비록 공제(公際)하였다고 할지라도 제사로 인하여 출입하게 되면 마땅히 종전대로 최복을 입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이이(李珥)의 《일기(日記)》를 보건대, ‘인순 왕후(仁順王后)의 졸곡 뒤에 전하가 소복(素服)으로 궁궐에 돌아오자 뭇 신하들도 모두 똑같이 하여 천고(千古)의 더러운 풍습을 일제히 씻어버리니 지식인들이 그것을 옳게 여기었다.’고 하였습니다. 예를 강론함의 정밀한 것이 선왕조(先王朝)만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졸곡 뒤에 군신(君臣)의 복색을 이로부터는 모두 모방하여 시행하였습니다. 앞으로 졸곡 제사가 끝나면 백관들로 하여금 소복으로 바꿔 입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왜역(倭譯) 최의길(崔義吉) 등이 대마도로부터 돌아왔다. 당초에 일본관백(關白) 원수충(元秀忠)이 죽자, 조정에서 최의길을 대마도에 보냈었는데, 이에 이르러 비로소 돌아와 말하기를 "관백이란 바로 평수길(平秀吉)이 자칭한 것인데 원수충은 상국(相國)으로 호칭한다."고 하였다.

 

10월 10일 갑술

예조가 아뢰기를,
"금차(金差)의 진향(進香)은 마땅히 홍정전(弘政殿)에 나아가 예를 거행하여야 하니, 미리 수리 청소하고 전문(殿門) 및 정문(正門)에 발을 드리워, 엄중히 보이게 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리고 듣건대 금차가 다만 양(羊) 한 마리와 돼지 한 마리만을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저들이 비록 와서 조제(弔祭)하지만 본국(本國)에서는 마땅히 본국의 제례(祭禮)에 따라야 하니, 봉상시(奉常寺)로 하여금 별도로 예찬(禮饌)을 마련하고 돼지와 양은 다른 소반에 담아 놓았다가 제사가 끝나면 모든 찬물(饌物)을 금차가 머무르고 있는 처소로 보내주도록 하는 것이 역시 타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되, 별도로 예찬을 마련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한 것 같다. 다만 금나라 사람이 싸가지고 온 물건만을 진설하여, 금차로 하여금 홍정문 바깥 섬 돌 위에서 예를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겠으니,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회계하기를,
"지금 호역(胡譯)의 말을 듣건대, 금나라 사람이 가지고 온 은(銀) 90냥 안에서 10냥은 돼지와 양을 사고, 그 나머지 80냥은 한 그릇에 담아 영좌(靈座) 앞에 놓아두고자 한다고 하니, 이에 의하여 시행하는 것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구관소(句管所)가 아뢰기를,
"차비 역관(差備譯官)이 금차가 가지고 온 제의(祭儀) 물목을 베껴 내었습니다. 제문(祭文) 1축(軸), 단향(檀香) 1속(束), 제백(祭帛) 1단(端), 제주(祭酒) 1준(樽), 은호(銀壺) 1파(把), 은작(銀酌) 3집(執), 제저(祭猪) 1구(口), 제양(祭羊) 1강(羫)이었는데, 돼지와 양은 은 10냥으로 사서 제연(祭筵)에 쓰고, 은이 80냥이며 부단(賦段)이 8단(端)이라고 합니다. 대개 이것은 그들의 나라에서 이미 참작하여 물건을 준비해 온 것이니, 돼지와 양은 마땅히 그들의 말을 따라 마련해 주어 그들로 하여금 예를 거행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따랐는데, 이튿날 금차가 말하기를,
"과실 등 여러가지 물품의 진설을 본국(本國)의 하는 바에 일임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상이 장차 오우제(五虞祭)를 친히 지내려고 하자, 대신(大臣) 및 양사(兩司)가 굳이 간하기를,
"성후(聖候)가 편치 못하시니 결코 친히 지낼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에 따랐다.

 

10월 11일 을해

헌부가 아뢰기를,
"우주(虞主)135)  를 혼전(魂殿)으로 봉안할 때에 소여(小輿)가 문지방과 맞지 아니하여 궁위령(宮闈令)이 손으로 받들고 들어갔습니다. 의식을 미리 연습할 때에 어떻게 하였기에 높낮이를 헤아려보지도 않고 이렇게 실수함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그 게으르고 소홀함이 대단합니다. 국장 도감 도청 및 해당 낭청과 승전색을 모두 파직하소서."
하였는데, 연속 아뢰었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인산(因山)이 아직 완료되지 않았고 선침(仙寢)이 장차 닫히게 되었으니, 무릇 신민(臣民)에게 있어서 모두 부모를 여윈 듯한 슬픔이 절실할 것입니다. 그런데 배종(陪從)한 신하들이 술을 실컷 마시고 흠뻑 취하여 혹은 도감(都監)의 임무를 살피지 않기도 하고, 혹은 술주정을 하여 재신(宰臣)을 욕하기도 하며, 혹은 술에 취해서 부축하여 말에 오른 자도 있고, 혹은 술을 마련하여 함께 취한 자도 있어, 예에 어긋나고 위의가 상실되어도 전혀 단속하지 않아 보고 듣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 물의가 비등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부사직(副司直) 이행원(李行遠), 통진 현감(通津縣監) 정백형(鄭百亨), 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 부평 부사(富平府使) 한회일(韓會一)을 모두 파직하여 서용하지 못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모두 우선 추고부터 하라."
하였다.

 

평안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임기가 차 장차 체직하게 되자, 이조가 비국으로 하여금 그 대신자를 의논하여 천거하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그로 하여금 그대로 유임하도록 하고 싶어서 비국에 물어보니, 비국이 타당하다고 대답하므로 마침내 내년 봄까지 그대로 유임하도록 명하였다. 이는 성휘가 오랫동안 본도(本道)에 있으면서 퍽 군사들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구관소(句管所)가 아뢰기를,
"금차(金差)가 싸가지고 온 제문(祭文)이 흰 비단에 쓰여져 있는데, 자획이 너무나 크고 말도 타당하지 못한 것이 많은데,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습니까?"
하자, 비국이 아뢰기를,
"이것은 예의를 모른 소치이니 꼭 이로써 서로 다툴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그 제문은 다음과 같다.
"천운(天運)의 임신년136)   늦가을 병신 삭(丙申朔) 26일 신유(辛酉)에, 금(金)나라가 예관(禮官) 만랄한(蠻剌漢) 등을 특별히 차견(差遣)하여 한지(汗旨)137)  를 받들었는데, 특별히 명하기를 ‘내가 조선 국왕(朝鮮國王)과 더불어 우호가 형제처럼 연결되었으니 경조(慶弔)로 왕래하는 것은 예의이다. 지금 저 나라의 대비(大妃)가 세상을 떠났으니 마땅히 한 사신을 보내 조문하여야 하겠기에, 이에 후하지 못한 의물(儀物)을 가지고서 특별히 너희들을 차견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노니, 너희들은 공경히 하여 내 뜻을 저버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저희들이 이 말씀을 받들고 조심스럽게 조선국태(國太)138)  의 영위(靈位) 앞에 빨리 이르러, 엄숙하게 전의(奠儀)를 드리면서 감히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씀드립니다. ‘공경히 상의 뜻을 받들고 밤낮으로 쉴 겨를도 없이 쓸쓸하게 말을 울리며 조선에 이르러, 공경히 박한 전의를 드리면서 애도하며 방황합니다. 우러러 국태를 생각해 보건대 예전에 연향(蓮鄕)을 하직하고, 진세(塵世)로 강림하여 철왕(哲王)을 사랑으로 길러, 아름다운 덕을 계승하고 복록을 주어 풍족함을 남기고 꽃다운 이름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하느님의 명령이 황급하게 빨리 불러, 갑자기 금궐(金闕)139)  에 조회하기 위하여 초방(椒房)140)  을 버리셨단 말입니까. 멀리서 부음(訃音)을 듣고 박하나마 한 술잔을 올리오니, 밝디밝은 태령(太靈)은 오셔서 흠향하옵소서.’"

 

예조가 아뢰기를,
"무릇 대사(大祀)·중사(中祀)의 기일 전에 취품하는 예가 있습니다만, 3년 동안 제사를 지내지 않는 의리로 미루어 본다면, 옷을 바꿔 입고 행사하는 것이 타당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다만 관원을 보내 대신 지내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겠으니, 친히 제사를 지내는 것에 대한 여부는 취품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하니, 상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체찰사 김시양(金時讓)이, 산릉(山陵)을 모실 때 조묘군(造墓軍)에게 주고 남은 베를 황주(黃州)로 이송하여 성(城)을 쌓는 일의 비용에 보조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홍주(李弘胄)를 대사헌으로, 이경증(李景曾)을 헌납으로, 정뇌경(鄭雷卿)을 수찬으로, 이홍망(李弘望)을 동래 부사로 삼았다.

 

10월 12일 병자

금차(金差)가 혼전(魂殿)에 진향(進香)하였다.

 

금차(金差)가 장차 돌아가려고 하자, 상이 으레 하사하는 이외에 명주·모시·종이·산초 따위의 물건들을 더 주어 우대하는 뜻을 보여주라고 명령하니, 비국이 아뢰기를,
"금차가 진향한 것은 대개 좋은 뜻에서 나온 것이니 특별히 후대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의 기력이 오랫동안 편찮으셔서 형세상 불러 들여 접견하시기 어려우니, 청컨대 대신들로 하여금 의정부에 나아가 서로 접견하도록 하고, 이어서 상의 뜻을 유시하고 예물을 넉넉히 주어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여 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튿날 대신들이 마침내 의정부로 초대하여 접견하였다. 금차 등이 굳이 청한 뒤에 갔었는데 선물을 받고는 퍽 기뻐하는 기색이 있으면서 말하기를,
"오늘 귀국(貴國)이 나아가 곡(哭)하도록 허락하고, 또 대신들로 하여금 서로 접견하도록 하면서 이렇게 별도의 선물까지 주니, 마땅히 이 뜻을 돌아가 한(汗)에게 보고하겠다."
하였다. 구관소가 아뢰기를,
"금차가 선물로 준 물건이 따라온 사람에게는 미치지 아니한 것으로써 서운하게 여기니, 해조로 하여금 헤아려 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고 또 하교하기를,
"회답사(回答使)가 싸가지고 가는 물건이 박한 것 같으니, 적당하게 헤아려 더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강화부 유수 이시백(李時白)이 상소하기를,
"신이 회장관(會葬官)으로서 모시고 산릉(山陵)에 가다가 마침 통진 현감(通津縣監) 정백형(鄭百亨)을 만났는데, 갑자기 여러 사람들이 앉은 좌석 중에서 신을 욕하고 심지어는 어버이의 잘못까지 거론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의 말이 일신상에만 그치면 도리에 거스른 일이 닥치더라도 진실로 마땅히 따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신의 불초함으로 연유하여 욕이 늙은 아버지에게까지 미쳤으니, 어찌 모욕을 참고서 침묵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빨리 명하여 신의 관직을 삭탈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살펴보고 다 알았으니 경은 사직하지 말고 직책을 살피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정백형의 일은 지극히 놀라우니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하라."
하였다.

 

10월 14일 무인

헌부가 아뢰기를,
"근래에 기강이 풀어져 조정이 존엄스럽지 못하여 사사로운 일로써 상소하는 사람이 계속해서 있는데, 국가 체통으로 헤아려봄에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강화 유수 이시백이 감히 사사로 모인 자리에서 한 자질구레한 말을 가지고서 상에게까지 아뢰었으니, 그 외람된 실수가 큽니다. 청컨대 무겁게 추고하도록 명하소서. 정원이 출납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가부를 가리지 않고 갑자기 감히 받아들였으니, 해당 승지를 추고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되, 승지는 꼭 추고할 것이 없다."
하였다.

 

구관소가 아뢰었다.
"금차가 내일 떠나가려고 하기에 신들이 더 머무르기를 청하였더니, 금차가 답하기를 ‘귀국에서 우대함이 이와 같으니 급히 돌아가 보고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이어서 말하기를, ‘예단(禮單)을 받지 아니하고 국서(國書)를 회답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고 하니, 금차가 말하기를 ‘예단을 받지 아니한 것은, 전일 귀국의 글 중에 타당하지 못한 말이 있었고, 또 귀국이 북도(北道)에 시장을 열려고 하지 않으니, 이것을 유감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국서에 회답하지 않는 것은, 귀국에 상사(喪事)가 있는 것을 듣고서 조제(弔祭)하는 일이 급하였고, 또 박난영(朴蘭英)과 더불어 함께 왔기 때문에 회답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니, 지금 장차 뒤따라 올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민성휘(閔聖徽)가 치계하기를,
"중국 배 2척이 여순구(旅順口)로부터 와서 우리 지경에 정박하고 말하기를, ‘도독(都督)        황룡(黃龍)이 차송한 유격(遊擊) 송유지(宋有智)가 조제(弔祭)할 일로 가정(家丁) 40여 명을 거느리고 서울로 올라간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예조가 아뢰기를,
"송 유격(宋遊擊)이 지금 장차 나오려고 하니 이조로 하여금 접반관(接伴官)을 차송하게 하고 또 접대소도 설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금차가 지금 장차 돌아가려고 하니 길에서 서로 만날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마땅히 빨리 본도 감사(監司)에게 하유하여 당분간 만류하여 그가 돌아감을 기다렸다가 올라오도록 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유격이 가산(嘉山)에 이르자 감사가 이로써 말하여 마침내 샛길을 따라서 왔다.

 

10월 15일 기묘

상이 졸곡제를 친히 지내려고 하자, 정원이 예문(禮文)의 섭사(攝事) 의절을 힘써 따를 것을 계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병이 나아 회복되었으니 마땅히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오랑캐 사신 만월개가 돌아갔는데 회답사 원숙(元䎘)이 함께 갔다.

 

10월 16일 경진

약방 및 대신이 2품 이상을 거느리고서 아뢰기를,
"전하의 병환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난 것이 아니니, 설령 조금 나았더라도 오히려 더욱더 조섭 보호해야 합니다. 더구나 원래 나아가는 기미가 없는데도 도리어 추위를 무릅쓰고 수고롭게 움직이고자 하십니까. 졸곡제를 친히 지내겠다는 명령을 취소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병이 나아 회복되었으니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빈청이 재차 아뢰어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경들은 부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가 합사(合司)가 또 이로써 간하여 하루에 네 차례나 아뢰니, 상이 그제서야 따랐다.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이 상소하기를,
"전 좌랑 심장세(沈長世)가 와서 말하기를 ‘내가 지난달 원주(原州)에 가 충원(忠原) 수령 송흥주(宋興周)를 찾아보니, 편지 한 통을 꺼내어 보여주는데 바로 조공숙(趙公淑)의 아들 조세형(趙世馨)이 홍우정(洪宇定)에게 답한 편지였다. 그 속에 한 가지 말이 있는데 이르기를, 「전일에 이러이러하다는 일은 다시는 들은 바가 없으나, 다만 당초에 회은(懷恩) 역시 그 말을 들었다.」고 했다.’ 하기에, 신이 듣고서 대단히 괴이쩍게 여기었습니다. 신이 조세형과 본시 모르는 사이로서 그의 편지 속에 이름을 게재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이른바 이러이러하다는 일은 무슨 일이며, 이른바 신 역시 그 말을 들었다는 말은 무슨 말인지, 청컨대 조세형과 더불어 사패(司敗)에 함께 넘기어 일일이 규명 조사하여 큰 모함을 씻어 주소서."
하고, 전 좌랑 심장세가 상소하기를,
"신이 과연 송흥주를 찾아보니 송흥주가 한 조그마한 종이를 꺼내어 보여주는데 바로 조세형이 홍우정에게 답한 편지였습니다. 그중 한 대목에 이르기를 ‘전일에 이러이러하다는 일은 다시는 들은 바가 없으나, 다만 당초에 회은 역시 그 말을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평소에 이덕인과 가장 서로 친하기에 마침내 바로 전언하여 상께서 들으시도록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그 상소를 금부에 모두 내려보냈다. 금부가 복계하기를,
"이덕인과 심장세의 상소가 모두 애매모호하게 말한 것이 아니고 상소 중에 이른바 이러이러하다는 일이 진실로 수상하니, 이덕인·심장세·송흥주·홍우정·조세형 등을 모두 마땅히 잡아다가 심문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되, 이덕인은 잡아다가 심문하지 말라."
하였다. 금부가 또 아뢰기를,
"심장세와 조세형을 이미 잡아왔습니다만, 16일은 칠우제(七虞祭)이고 18일은 졸곡제(卒哭祭)로서 연이어 재계(齋戒)가 있습니다. 이는 보통 옥사(獄事)가 아닌데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례에 의하여 일반 규정에 구애받지 말고 본부(本府)에서 추국하라."
하였다. 심장세는 공초하기를,
"상소로 아뢴 이외에는 다시 들은 바가 없습니다."
하고, 조세형은 공초하기를,
"임해군(臨海君)의 종 아내가 신의 외삼촌 홍집(洪)의 첩에게 말하기를 ‘경창군(慶昌君)의 아들 양녕군(陽寧君)이 임해군(臨海君)의 양자(養子)가 되었는데, 경창이 양녕을 위하여 남몰래 역모를 꾸민다.’고 하자, 홍집이 그 말을 듣고서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로써 경솔하게 발설할 수 없기 때문에, 예판(禮判) 최명길(崔鳴吉)에게만 말하고 또 신에게도 말하였습니다. 신이 또 홍우정에게 말해 주었는데 그 뒤에 송흥주가 신에게 묻기에, 신이 한결같이 우정에게 말해 주었던 것으로써 말하였을 뿐입니다. 회은(懷恩)은 이 일에 간여하지 않았습니다만, 회은의 5촌 조카인 유학(幼學) 이유형(李惟馨)이 신에게 말하기를 ‘회은이 사람들에게 미움받아 막대한 말을 듣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신은 이 말만을 들었을 뿐입니다."
하고, 홍집은 공초하기를,
"신의 첩이 신에게 말하기를 ‘동네에 임해군의 종 아내가 때로 출입하는데, 하루는 와서 말하기를, 「나라에 큰일이 있다.」고 하기에, 내가 자세한 것을 묻자, 답하기를 「경창군이 우리 궁(宮)의 양자(養子)를 위하여 계해년 일141)  을 도모하려고 술사(術士)를 조치하여 거사(擧事) 시기를 선택하였는데, 대비(大妃)께서도 이일을 알고 있다고 한다. 임해군의 부인이 항상 지극히 걱정하면서 말하기를 『내 생전에 이 따위 일을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한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 말을 듣고 대단히 놀라 한회일(韓會一) 및 최명길(崔鳴吉)에게 은밀히 말하니, 모두들 말하기를 ‘경솔하게 발설할 수 없다.’고 하기에, 신이 이 때문에 다만 매부(妹夫) 조공숙(趙公淑)에게만 말하였는데, 조공숙이 그의 아들 조세형(趙世馨)에게 말하여 이렇게 전파되게 되었습니다."
하고, 어현(於玄)은 공초하기를,
"본시 황주(黃州) 사람으로서 임해군(臨海君)의 궁노(宮奴) 철이(哲伊)에게로 시집와 행랑(行廊)에서 살고 있는데, 이른바 홍집(洪)의 첩과는 전혀 서로 알지 못합니다. 다만 궁노 득이(得已)·용이(龍伊)는 제 남편의 4촌이며, 하탈(何脫)은 반노(班奴)인데, 그의 아내와 더불어 도살(屠殺)로 직업을 삼았고, 홍집의 계집종은 매매(賣買)하는 일로 왕래하였기 때문에, 서로 알고 있었습니다."
하고, 철이는 공초하기를,
"어현을 아내로 삼은 지가 겨우 2년으로서 경창군(慶昌君)의 집에서 도모한 일 및 술사(術士)를 초치하여 택일하였다는 말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니, 국청이 경창군 및 임해군의 양자(養子)를 잡아다 심문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홍우정(洪宇定)은 공초하기를,
"하루는 조세형이 신에게 말하기를 ‘어느 벼슬아치의 첩이 임해군의 종 아내와 대단히 서로 친한데, 종 아내가 말하기를 「우리 궁(宮)의 양자는 바로 경창군의 둘째 아들인데, 사람들이 그 사주(四柱)가 지극히 좋다고 한다. 요사이 주씨(朱氏) 성을 가진 술사(術士)를 얻어 바야흐로 불궤(不軌)를 도모하면서, 스스로 대비전의 교서를 비밀히 받았다 한다.」고 했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 말을 듣고 매우 놀라 송흥주에게 말하였는데, 마침 며칠 뒤에 조세형이 서울로부터 왔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로써 서울의 일을 물어보니, 답하기를 ‘전일에 이러이러하다는 말에 대해서는 실로 들은 바가 없지만, 회은(懷恩) 역시 그 말을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이튿날 조세형과 이웃집에서 만나 묻기를 ‘그대가 이른바 회은도 역시 그 말을 들었다고 한 것은 벼슬아치가 들은 말을 그가 참여하여 들은 것인가?’고 하니, 조세형이 말하기를 ‘아니다. 회은 역시 역모(逆謀)에 참여하였다.’고 하기에 신이 바로 조세형의 편지 및 그가 말한 것을 모두 송흥주에게 말해 주었을 뿐입니다."
하고, 용이(龍伊)는 공초하기를,
"어현이 그 일가 사람의 편지를 받아가지고 궁중(宮中)에 들여보내, 신이 그 노비(奴婢)와 말을 빼앗았다고 하자, 부인(夫人)이 철이(哲伊)를 불러 힐문하니, 철이가 ‘아내가 한 짓이다.’고 하자, 부인이 성을 내어 바로 그를 내쫓아버렸습니다. 어현이 이 때문에 앙심을 품고 모함한 것이지 경창군의 역모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고, 하탈(何脫)의 아내 향옥(香玉)은 공초하기를,
"연전에 과연 어현과 도살업(屠殺業)을 함께 할 때에 서로 싸운 일이 많이 있었는데, 어현이 필시 이것으로써 모함하였을 것입니다."
하고, 이유형(李惟馨)은 공초하기를,
"안성(安城) 유몽성(柳夢聖)은 바로 신의 4촌인데 일찍이 신에게 말하기를 ‘회은군(懷恩君)이 조정을 엎으려고 사림(士林)들을 모은다고 하는데, 아마도 회은이 종실(宗室)로써 친구들을 따라다니기 때문에 이런 말이 있는 것이 아니냐. 똑같이 족질(族姪)이지만 너는 더욱 친하니 네가 말하여라.’ 하기에 그 뒤에 신이 우연히 처부(妻父) 조공숙(趙公淑)에게 말하였을 뿐이고, 모역하였다는 말에 대해서는 전혀 들어서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이덕인(李德仁)을 잡아다 심문하니, 공초하기를,
"이유형 등이 말한 것은 신하로서는 차마 들을 바가 아니니 다시는 공초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홍집(洪)의 첩 응옥(應玉)은 공초하기를,
"이미 어현에게서 들은 것을 홍집에게 다 말하였으니 지금 숨길 만한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국청이 청하여 임해궁(臨海宮)의 여러 종 및 이른바 술사(術士)란 맹인(盲人) 등을 잡아다 심문하니, 모두들 어현이 앙심으로 인하여 거짓 끌어들였다고 말하자, 바로 면질(面質)하도록 하니 어현이 말과 얼굴빛이 모두 꺾이었다. 드디어 어현을 신문하니 말이 황란(荒亂)하여 마침내 사실이 없자, 요망한 말로 대중들을 현혹시킨 것으로써 그를 참수(斬首)하도록 명하였다. 철이(哲伊)·향옥(香玉)·용이(龍伊)는 형벌을 받아도 자복하지 않자, 모두 심장세(沈長世)·송흥주(宋興周)·홍우정(洪宇定)·홍집(洪)·이덕인(李德仁)·이유형(李惟馨)·응옥(應玉) 등과 더불어 석방하였으며, 조공숙(趙公淑)과 조세형(趙世馨)은 귀양보냈는데 역모를 듣고도 아뢰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10월 18일 임오

유백증(兪伯曾)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10월 19일 계미

부총(副摠) 심세괴(沈世魁)의 차관인 도사(都司) 진희량(陳希亮)이 나왔는데 조제(弔祭)하기 위해서이다.

 

10월 20일 갑신

예조가 아뢰기를,
"예전부터 졸곡 뒤에는 중외에서 모두 평상시의 음식을 쓰므로 공문을 발송하여 알려주는 일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전례에 따르도록 명하였다.

 

부호군 장현광(張顯光)이 상소하기를,
"이런 큰 국상을 당하여 즉시 포복(匍匐)하면서라도 달려가 곡(哭)하여야 되는데, 몸에 위중한 병이 들어 변변치 못한 마음이나마 펼 수가 없으니 진실로 지극히 황공스럽습니다. 이어서 생각하건대 옛날 임금은 초상을 당해서도 지극한 덕을 확충 양성하고 대본(大本)을 세워 필경에 하늘에게 영명(永命)을 비는 방도를 삼았습니다. 신이 죽음에 임박하여 지극한 간청은 다만 이것뿐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살펴보고 다 알았다. 상소끝에 말한 것은 마땅히 스스로 힘쓰겠다."
하였다.

 

10월 22일 병술

김덕함(金德諴)을 좌승지로 삼았다.

 

동지사(冬至使) 김시국(金蓍國)이 경사(京師)로부터 칙서를 받들고 돌아왔는데, 상이 바야흐로 애통 중에 있어 나가 영접하지 못하고 대신이 백관들을 거느리고 교외에서 영접하였다. 그 칙서는 다음과 같다.
"그대가 대대로 해번(海藩)을 지키면서 오래도록 공순함을 나타냈다. 이에 변방이 편안하지 못한 까닭으로 들어와 노구솥·총·배 따위를 바쳐 공의(公義)를 급히 하여 정의가 간절하기에, 짐(朕)이 몹시 가상하게 여기어 은(銀)과 문기(文綺)를 특별히 하사하여 표창하는 뜻을 보이노니, 도착하는 날 수량대로 공경히 영수하고 마땅히 변방을 견고히 하는 것을 함께 수행하여 더욱 충성을 독실히 하라. 공경할지어다. 효유한다."
당초에 등주(登州)의 군문(軍門)에서 총·노구솥 및 배 따위를 요구하였는데, 우리 나라에서 모두 즉시 준비하여 보내주었기 때문에 이 칙서가 있게 된 것이다.

 

10월 23일 정해

예조가 아뢰기를,
"졸곡 뒤에는 종묘와 숭은전(崇恩殿)의 오향 대제(五享大祭)를 모두 마땅히 전례에 의하여 지내야 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숭은전은 3년 안에 음악을 사용하는 것이 역시 미안한 것 같으니, 졸곡 전의 사직 대제(社稷大祭)의 예에 의하여 지내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신 2품 이상이 아뢰기를,
"상께서 편찮으신 지가 이미 오래되니 조정과 외부가 뒤숭숭합니다. 지금 듣건대 궁중에서 저주(詛呪)하는 변고가 있어 흉측한 물건이 낭자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막대한 변고를 내환(內宦) 한두 사람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할 수 없으니, 외정(外庭)으로 내보내 엄하게 국문하여 진상을 파악하도록 명하소서."
하고, 대간(臺諫) 역시 합사(合司)하여 논계하기를 여러 날 동안 하니, 이에 금부에 국청을 설치하여 국문하도록 명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궁인(宮人) 옥기(玉只) 등 3, 4명이 밤중마다 문을 닫고 몰래 궁벽한 곳으로 가 제사를 지내며 기도하였다고, 자전(慈殿)의 초상(初喪)에 이 일로써 말한 사람이 있었다. 때문에 본전(本殿)의 상궁(尙宮)        주숙(朱淑)·백숙(白淑) 등도 감히 전부 숨기지 못하고 본방(本房)을 위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는데, 요사이 흉측한 물건을 묻었다는 말을 들은 뒤에야 비로소 기도한 제사 역시 저주를 위하여 지낸 줄을 알았다. 만약 본방을 위하여 기도하였다면 문을 잠가 놓고 남에게 숨길 리가 없을 것 같으니, 그 밤에 제사지낸 것이 필시 곡절이 있는 성싶다. 자전이 승하하신 지 3일 만에 말질향(末叱香)이 까닭없이 독약을 마시고 죽은 것도 그 이유가 없지 않을 터이니, 모두 구속하여 신문하라."
하였다.          【 본방(本房)은 연흥 부인(延興夫人)을 지칭한 것이다.】 옥기(玉只)가 공초하기를,
"선조 대왕 때부터 궁중에 뽑혀 들어와 계축년142)                   이후로 주 상궁(朱尙宮)과 자전을 함께 모시다가, 계해년143)                  에 이르러 천일(天日)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계축년에 저주한 일로써 나인(內人)들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저주에 대한 말은 사람들이 모두 귀를 가리고서 차마 듣지 못합니다. 더구나 지금 양전(兩殿)께서 화합하시는데 어찌 이와 같은 마음을 품겠습니까. 본방(本房)이 병환이 많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며 기도하였는데, 무릇 기도하는 방법은 으레 조용한 곳에서 하는 것입니다. 만약 저주를 꾀하였다면 주숙·백숙 두 사람들이 이미 함께 거처하였으니, 또한 마땅히 그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나와 말질향(末叱香)·윤귀희(尹歸希) 등 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말질향이 죽은 것은 병으로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함께 도모하였다면 나도 마땅히 함께 죽어야 되는데, 어찌 말질향 혼자만 죽도록 하였겠습니까. 제사를 지낼 때에 침전(寢殿)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는 이가 없었으니 이것은 숨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자전이 노친(老親)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항상 이르기를 ‘내가 살았을 때 효성을 다하고 싶을 뿐이다.’고 하셨는데, 이미 이런 말씀을 듣고 어찌 감히 기도하는 일을 꺼리겠습니까."
하였다. 귀희(歸希)의 계집종 덕개(德介)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나인(內人) 이애단(李愛丹)이 연등(燃燈)하기 위하여 관왕묘(關王廟)에 나가게 되면, 언제나 귀희와 더불어 비밀히 의논하였습니다. 지난해 8월에 애단의 동생 이장풍(李長風)이 흰 고양이 머리를 가져다 주어 주방(廚房)에 놓아두었으며, 애단이 또 길이가 한 자가 채 못 되는 하나의 싸매진 물건을 가지고서, 귀희와 서로 말하였는데, 좌우 사람들을 물리쳤기 때문에 그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또 승건(僧巾) 수십 개를 만들어 혹은 상자에 담기도 하고 혹은 보자기로 싸기도 하여, 나로 하여금 대비전 침실의 높은 난간에다 그것을 놓아두도록 하였으며, 애단이 아이의 머리를 가지고 와 장보문(長保門)에 문안드리러 다니는 길에 묻도록 하였습니다."
하였다. 국청이 아뢰기를,
"덕개(德介)가 이미 승복하였으니, 그로 하여금 묻어놓은 곳을 지적하도록 한 뒤에 사형에 처하소서."
하였는데, 그 뒤에 덕개가 끝내 지적하지 못했다. 옥지(玉只)의 계집종 득화(得花)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경오년144)                   여름 동안에 애단이 번번이 나갈 적마다 반드시 이상한 물건을 가지고 들어오곤 하였는데, 모양이 보릿가루와 같으면서 약간 푸른빛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윤 소원(尹昭媛)           【 바로 귀희(歸希)이다.】        에게 바칠 즈음에 마침 보게 되었는데, 날이 저물자 애단이 이 물건을 가지고 바로 대전(大殿)의 침실로 갔었습니다. 지난해 7월에 무슨 제사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옥지가 밤에 목욕 재계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고서 갔었습니다."
하였다. 국청이 귀희를 국문할 것을 청하고 양사도 계청하니, 비로소 국청에 내보내도록 명하였다. 귀희가 공초하기를,
"나는 귀희가 아니라 바로 윤희(尹希)입니다. 선조(宣祖) 시대에 11세 아이로서 궁중에 뽑혀 들어와 대왕(大王)이 승하하실 때에 자전(慈殿)에게 유언하여 작위(爵位)를 주어 보살피도록 하였습니다. 계축년145)                   변고에 연흥(延興) 및 대군이 일시에 화를 당하였기에, 무릇 무당과 점장이에 관한 일을 일체 모두 거절하였으며, 자전이 승차하실 때에도 점쳐본 일이 없었습니다. 덕개가 승복한 일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며, 이른바 흰 고양이 머리 및 싸매진 물건이라는 것도 모두 근거없는 말입니다. 승건(僧巾)을 만드는 것은 궐내의 풍습인데, 무릇 여러 내인(內人)들 중에 역시 어찌 이것을 만드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장보문 밑에 아이의 머리를 묻어놓았다는 말은 거짓에서 나온 것이며, 밤중에 제사를 지낸 것은 본방(本房)이 병환이 있었기 때문에 가끔 기도드린 적이 있었는데, 애단이 관왕묘에 나간 것 역시 이런 종류일 것입니다."
하고, 애단이 공초하기를
"오랫동안 주방(廚房)에 있으면서 다른 일을 맡지 아니하여 이미 관왕묘에 나가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연등(燃燈)하는 일이 있었겠습니까. 아이의 머리를 묻어 놓았다는 말에 있어서는 더욱 모르는 바입니다."
하고 이장풍(李長風)이 공초하기를,
"애단은 비록 동생이지만 내외가 엄절하여 서로 만나볼 수 없고 1년에 한 번씩 안부만을 통하였으며, 또 줄곧 시골에 있었으므로 절대로 참여하여 아는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국청이 귀희·옥지 두 사람을 신문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선조(宣祖) 때의 궁인(宮人)이라는 이유로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대신들이 아뢰기를,
"조종조에서도 이런 죄인에게 사사(賜死)한 예가 있었으니, 이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귀희와 옥기에게는 사사하고 덕개는 처형당하였으며 득화는 미처 처형당하기 전에 죽었다. 그 이외의 애단·의숙(義淑) 등 여러 내인으로서 관련된 사람들과 귀희·옥지가 거느렸던 계집종 및 이장풍은 모두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당초에 인목 왕후(仁穆王后)의 초상(初喪)에 백서(帛書) 3폭을 궁중에서 발견하였는데, 반고(頒告)나 주문(奏聞)에 임금을 폐하고 세우는 내용처럼 되어 있었다. 상이 꺼내어 척속(戚屬)들에게 보여주고 얼마 후에 그 글을 가져다가 불살라버렸다. 어떤 사람은 왕후가 서궁(西宮)에 유폐당하였을 때 쓴 것이라고 말하지만, 외부 사람으로는 그것이 그러한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약방이 사기(邪氣)를 퇴치하는 약을 복용할 것을 청하고, 대신들이 2품 이상을 거느리고서 이어(移御)할 것을 계청하니, 상이 모두 따라 이튿날 세자 서연청으로 이어하고 중전은 세자궁으로 이어하였다. 약방이 또 침(鍼)을 놓아 사기를 퇴치하는 방법을 시행할 것을 청하여 재차 아뢰니 따랐다.

 

10월 25일 기축

빈청 2품 이상 및 합사가 계청하기를,
"이 궐내로 이어한 것은 옮기지 아니한 것과 같으니, 마땅히 우선 이현궁(梨峴宮)으로 이어하여 창덕궁(昌德宮)의 수리가 완료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니, 상이 여염(閭閻)에 폐가 미친다는 까닭으로 어렵게 여기다가 대신 이하가 하루에 네 번이나 아뢰니, 상이 이에 따랐다.

 

10월 26일 경인

예조가 아뢰기를,
"중국        차관(差官)이 조제(弔祭)할 일로 오는데 마땅히 조문을 받고 제사를 드리게 하는 등의 예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성상의 기력이 이와 같으시니, 조문을 받는 것은 결코 거행할 수 없거니와 내전(內殿)에 제사를 드리는 것도 미편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들의 생각에는 그가 예로써 왔는데 거절하고 받지 않는 것 역시 미안할 성싶습니다. 예를 거행할 때에 그대로 영좌(靈座)에 나아가 거행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전례에 의하여 별전(別殿)에 나아가 영위(靈位)를 설치해 놓고서 거행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전례를 상고하여 여쭈어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복계하기를,
"일찍이 병인년146)                  에 모 도독(毛都督)의 차관(差官)이 들어올 때에 제물(祭物)에 대한 절가은(折價銀)147)                   및 제복(祭服)을 지을 백릉(白綾)을 싸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이로써 본다면 제물은 마땅히 절은(折銀)으로 해야 할 것같고, 또 제문(祭文) 및 헌축(獻軸)한다는 말이 있으니, 아마 친히 들어가 조문하고 이어서 제사를 지내고자 할 리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록 도독(都督)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내상(內喪)에 몸소 전(奠)을 올리는 예가 없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사람을 보내 제사를 드림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그가 비록 예를 거행하고자 하더라도 거절함에 있어 할말이 없음을 걱정할 것이 없으니, 접대소로 하여금 말을 만들어 개유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례에 의거하여 개유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중국 차관을 서로 접견할 때, 졸곡 전에는 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백단령(白團領)을 착용하고, 졸곡 뒤에는 무늬가 없는 흑단령을 착용하고 서로 접견한다는 뜻으로 전에 이미 여쭈어 결정하였습니다. 두 차관(差官)이 지금 오는데 검은 복색을 착용하면 연향(宴享)하는 예를 아마도 폐기할 수 없을 성싶습니다만, 그가 조제(弔祭)로써 나오는데 우리가 연향으로 대접하는 것 역시 타당하니 못한 것 같으니, 대신들에게 의논하소서."
"연향하면서 서로 접견하는 것이 과연 타당하지 못한 것 같으니, 다례(茶禮)만 베푸는 것이 아마도 사리에 맞을 성싶습니다."
하였다. 예조가 다례가 끝난 뒤에 잔칫상을 별도로 갖추어 그들에게 줄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27일 신묘

상이 이현궁(梨峴宮)에 임시로 거처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시어소(時御所) 궁장(宮墻) 밖에 다시금 방어하는 한계가 없으니, 대문을 폐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밤 사시에 혹간 시급한 일이 있게 되면, 승전색(承傳色)과 사알(司謁)이 장차 문틈으로 문서를 출납시켜야 되겠는데, 일이 평상시의 규정과 다르기에 감히 이렇게 우러러 여쭙니다. 그리고 궐내의 각사(各司)들이 여염(閭閻)에 섞여 있는데 마땅히 작문(作門)148)   안에 있어야 하겠으며, 집 주인이 출입하는 것이 타당하지 못한 것 같은데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고, 집 주인은 출입을 금지하지 말라."
하였다.

 

접대소가 아뢰기를,
"내상(內喪)에는 외국 사람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도록 할 수 없기에 이로써 차관(差官)에게 일깨워주니, 차관이 말하기를 ‘이미 명령을 받들고 왔으니 그냥 돌아갈 수 없다.’고 하면서 끝내 들어주지 않습니다."
하자, 예조가 아뢰기를,
"그가 이미 바다 천 리를 건너 오로지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왔으니, 전례에 의하여 홍정전(弘政殿)에서 예를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아마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니, 따랐다.

 

수리소(修理所)가 창덕궁(昌德宮)의 도총부(都摠府)를 중전(中殿)의 어실(御室)로, 내약방(內藥房)을 대전(大殿)의 어실(御室)로, 춘추관(春秋館)을 정사를 보는 곳으로 삼고, 도총부의 낭청방(郞廳房) 및 비승각(丕承閣) 중에서 선택하여 동궁(東宮)의 침실로 삼고, 홍문관을 서연청(書筵廳)으로 삼을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28일 임진

병조 판서 김시양(金時讓)이 차자를 올려 인경궁(仁慶宮)으로 이어하여 창덕궁을 수리하는 일을 덜어줄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내년 봄에는 마땅히 경덕궁(慶德宮)으로 돌아갈 터이니, 긴요하지 않는 아문은 당분간 창경궁으로 들어가 거처하여 폐단을 덜어주도록 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도독의 차관이 필시 접견하지 않은 것에 대해 섭섭하게 여길 것입니다. 제사를 지낸 뒤에 마땅히 한 사람으로 하여금 객관(客館)으로 나아가 만나 보아, 상께서 편치 못하셔서 서로 접견할 수 없는 이유를 말하고, 간략하게 다례(茶禮)를 베풀고 겸하여 예단(禮單)을 주어 그 마음을 위로해 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접대소가 아뢰기를,
"유격(遊擊)이 은(銀)을 내주면서 제수(祭需)를 마련하도록 요구하는데, 값을 받고 구입하여 주는 것이 일이 타당하지 못할 성싶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제수를 준비하여 주고 그 은을 되돌려 주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유격이 끝내 받지 아니하니 해조에 귀속하도록 명하였다.

 

이홍주(李弘胄)를 겸 지춘추관사로, 김육(金堉)을 부응교로, 박서(朴遾)를 정언으로 삼았다.

 

황 도독(黃都督)이 서간(書簡) 끝머리에 다음과 같이 썼다.
"서쪽으로 정벌 나와 군대를 정돈하여 도병(島兵)이 동쪽을 다그치고 대병(大兵)이 서쪽을 핍박하니, 반역자들이 이미 궁에 몰려 바로 사로잡게 되었습니다. 다만 군대일이 매우 바빠 오랫동안 안부를 살핌에 소홀히 하였는데, 갑자기 대비(大妃)의 부음(訃音)을 들으니 슬픔이 멀리서 더합니다. 현왕(賢王)은 예로써 스스로 지켜 몸이 야위어 상함에 이르지는 아니할 것으로 믿습니다. 이에 사람을 특별히 보내 조문을 드리게 하오니, 한 묶음의 풀과 물가의 나물을 부디 더럽게 여기지 마십시오. 종이에 임하니 마음이 치달립니다. 제물의 품목은 정폭(正幅)에 기록해 두었습니다. 좌충(左冲) 시생(侍生) 황룡(黃龍)은 머리를 조아립니다."

 

10월 29일 계사

예조가 아뢰기를,
"차관이 제사를 드릴 때에 백관들이 참여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이 한 가지 사항은 사체(事體)가 대단히 중요하니 아마도 전례를 터 놓아서는 안 될 성싶습니다."
하였다. 예조가 복계하기를,
"사람이 상사(喪事)가 있어 손님이 와서 조문하면, 주인 이하가 곡하고 절하는 것은 예입니다. 그가 이미 제사를 드리는데 본조(本朝)의 신하들이 한 사람도 들어가 참여하는 이가 없다면, 손님과 주인의 예에 흠이 있어 반드시 중국 사람의 의심을 사게 될 것입니다. 대신들에게 의논하소서."
하자, 대신들이 아뢰기를,
"백관들이 모시고 제사지내는 것은 사체가 너무 중대하니, 마땅히 집사 관원(執事官員)들을 많이 두어 중국 사람이 볼 때에 매몰스럽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국상 3년 내의 망궐례의 절차를 지금 마땅히 강론하여 정해야 하는데, 무신년149)  에 베껴낸 《실록(實錄)》으로 보건대, 태종조에서는 성절(聖節)의 망궐례를 친히 거행할 수 없어 세자에게 명하여 백관들을 거느리고 예를 거행하도록 하였고, 세종조에서는 3년 내에 망궐례를 거행할 때에 음악을 사용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의논하여 정한 일이 있었으니 그때에 그대로 거행하여 폐지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오례의》에 이미 분명한 문자가 없고 또한 근거할 만한 가까운 전례가 없으니, 대신들에게 의논하소서."
하자, 대신들이 모두 아뢰기를,
"사대(事大)는 막대한 예인데 비록 국상을 당하였을지라도 어찌 폐지하여 거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거행할 수 없는 것도 있으니, 초상(初喪)에 장례를 치르지 못하였으면 거행할 수 없으며, 임금이 병환이 있으면 거행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해조가 그때에 임하여 의논하여 정함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30일 갑오

예조가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선묘(宣廟)가 을해년150)  에 경복궁(景福宮)으로 거처를 옮길 때, 별도로 혼전(魂殿)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다고 합니다. 지금 역시 고유를 드리는 예가 없을 수 없는데 창황(蒼黃) 중에 미처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비록 시기가 늦었지만 그래도 그만두는 것보다는 나으니, 오는 11월 삭전(朔奠)을 인하여 마땅히 종묘·혼전·숭은전에 고유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로써 묘·전(廟殿)에 고유하는 것은 번거로울 것 같다."
하였다.

 

김포현(金浦縣) 사람으로 한 번 분만에 2남 1녀를 낳은 이가 있자, 상이 본도(本道)로 하여금 전례에 의하여 쌀을 하사하도록 하였다.

 

당초에 노한(虜汗)이 추신사(秋信使)의 예단(禮單)을 받지 않고 국서(國書)도 회답하지 않더니, 이에 이르러 소도리(所道里)·사흘자(沙屹者)·박중남(朴仲男) 세 장수를 보내 봉황성(鳳凰城)에 도달하여 전언(傳言)하기를,
"이번에 접대하는 예를 한결같이 천사(天使)의 전례와 같이 한다면 가겠거니와, 그렇지 아니한다면 마땅히 여기에서 돌아가야 하겠다."
하니, 민성휘(閔聖徽)가 치계하기를,
"세 장수는 저들 중에서 소중한 사람입니다. 지금 옴에 있어 소망이 반드시 높을 터이니, 만약 모두 힘써서 따라주면 앞으로의 소망이 반드시 한층 더할 것이기 때문에, 이미 강력히 따져 따르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저들이 만약 성을 내어 가게 되면, 마땅히 담략이 있는 한 사신을 특별히 차견하여 심양(瀋陽)으로 들여보내, 그들이 까닭없이 뻣뻣하여 맹호(盟好)의 뜻을 파괴하려는 것을 꾸짖도록 하여야 합니다."
하자, 비국이 회계하기를,
"명나라 사신처럼 대접하여 달라는 말은 큰소리로 우리를 위협하여 그들의 하고 싶은 것을 성취하려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대개 임기 응변하여 격하지도 않고 굴하지도 않은 것은 오로지 변신(邊臣)이 잘 처리함에 달려 있으니, 사신을 보내 엄하게 꾸짖는 한 사항은 마땅히 금차(金差)의 행동을 보아 가장 좋은 방안을 따라 처리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금차를 접대하는 예는 그들의 말을 다 따를 수는 없지마는, 또한 다른 차사와 비할 수 없습니다. 변신(邊臣)의 치계한 뜻이 진실로 소재가 있지마는, 혹시 준엄하게 거절하다가 성을 내게 하는 걱정도 없지 않습니다. 저들이 나쁜 마음이 없는데 자그마한 일을 다투어 그의 성을 잘못 돋우워내면, 또한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한번 사람을 차견하여 오도록 청하는 것이 불가하지 않으니, 부원수(副元帥) 정충신(鄭忠信)으로 하여금 변방을 순찰한다는 명목을 내걸고 검산(劒山)에 진주하여 임기 응변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병사(兵使)로 하여금 사람을 보내 오도록 청하게 하라."
하였다.

 

영중추부사 이원익(李元翼)이 금천(衿川)에 물러가 살았는데, 이에 이르러 내옥(內獄)의 변이 있음을 듣고 조정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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