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7권, 인조 10년 1632년 12월

싸라리리 2025. 12. 30.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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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을미

예조가 아뢰기를,
"관원을 보내 치제하는 것은 보통 제사와 달라서 무단히 거행하는 것은 온당치 않으니 그날 새벽에 별도로 고제(告祭)를 지내 먼저 그 사유를 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귀(李貴)가 차자를 올리기를,
"병사(兵使)는 한 도(道)의 주장(主將)이고, 영변(寧邊)은 도내의 주진(主鎭)입니다. 조종조(祖宗朝)에서 영변에다 병영(兵營)을 설치하고 창성(昌城)에다 행영(行營)을 설치하여 겨울철 방어의 계책으로 삼은 것은 의도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만(張晩)이 처음 안주(安州)를 병영으로 삼은 것은 남이흥(南以興)을 위한 계책이지 국가를 위한 계책이 아니었는데 김기종(金起宗)이 또 다시 안주에다 병사를 옮기자고 하니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병사는 바로 한 도의 대장(大將)으로서 적으로 하여금 그의 면목(面目)을 알지 못하게 하여 적을 상대로 계책을 꾸며 먼저 무찌를 수 있는 형세를 만들어 놓고서 적에게 우리를 이길 수 없다는 모습을 보인 다음에야 만전(萬全)을 기할 수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호차(胡差)가 도착하기 전에 신경원(申景瑗)을 안주 방어사(安州防禦使)로 삼고 정충신(鄭忠信)을 영변 부사(寧邊府使)로 삼는 것도 변고에 대응하는 책략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신이 남한 산성을 살펴보고 나서 조목조목 진계(陳啓)하니 묘당(廟堂)이 ‘체찰사(體察使)의 출사(出仕)를 기다린다.’는 내용으로 회계(回啓)하였는데, 출사한 지가 벌써 1년이 넘었는데도 전혀 옳다 그르다 하는 말이 없으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바라건대 상께서 결단하시어 후회가 없도록 하소서.
그리고 이번 호차의 접대는 예전과 매우 다르니 박난영(朴蘭英)을 보내서 먼저 주선케 하고, 다시 파주 목사(坡州牧使) 박로(朴𥶇)를 구관 당상(句管堂上)으로 삼아서 일에 따라 실정을 통지하게 해야 됩니다."
하니, 비국이 회계하기를,
"이귀가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하여 양서(兩西)의 군정(軍政)이 예전같지 않음을 개탄하고 새롭게 변경하고자 하였으나, 적사(敵使)가 입경(入京)하고 겨울철 방어로 변고에 대비하고 있는 지금, 경솔하게 변통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잠시 성상의 건강이 회복되어 신료(臣僚)를 인접(引接)하기를 기다려서 직접 지휘를 여쭈어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호차는 이미 올라왔으니 꼭 난영을 보내 주선케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박로는 차자의 내용대로 시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남한 산성을 방수(防守)하는 일은 먼저 잘 헤아려서 거행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비국이 또 아뢰기를,
"남한 산성은 강도(江都)와 서로 의지하는 형세가 있는데, 이서(李曙)의 빈틈없는 계책에 힘입어 성지(城池)와 군량이 팔도(八道)에서 으뜸이니 이귀가 체찰(體察)의 본영을 삼으려고 하는 것도 좋은 계책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체찰사가 사도(四道)만 관장하고 있는 만큼 타도(他道)의 산성을 병영으로 삼는 것은 곤란한 듯하니 잠시 광주 목사(廣州牧使)를 구임(久任)시켜 성과를 내도록 요구하면서 성을 지키는 중책을 맡기소서, 그리고 수어사(守禦使) 이수일(李守一)과 부사(副使) 심기원(沈器遠)을 체차한 뒤로 아직 그 후임자를 내보내지 않았으니, 어서 차출(差出)하여 그로 하여금 구관(句管)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2일 병신

황 도독(黃都督)의 차관(差官)인 유격(遊擊) 송유창(宋有倉)이 인목 왕후(仁穆王后)의 혼전(魂殿)에 치제(致祭)하였다.

 

상이 명하여 영부사 이원익(李元翼)에게 미두(米豆)와 찬물(饌物)을 내렸다.

 

파주 목사(坡州牧使) 박로(朴𥶇)를 판결사(判決事)로 삼았는데, 장차 호사(胡使)를 접대하기 위함이었다.

 

예조 참의 이준(李埈)이 상소하기를
"귀신(鬼神)의 덕은 총명하고 정직하니 가령 귀신이 아는 바가 있다면 반드시 못된 짓을 한 자에게 앙화가 되돌아 갈 것입니다. 더구나 인간의 화복은 사명(司命)이 관장하니 어찌 말라빠진 해골 따위가 그 사이에서 일을 벌일 수 있겠습니까.
근세에 여염에서 저주하는 변고가 있자 현혹되는 사람들이 많기에 신이 일찍이 마음속으로 개탄하며 율시(律詩) 한 수를 지어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그 한 연(聯)에
바름을 지키면 어두운 데를 엿보는 마귀가 없고
의심이 많으면 깊숙한 안방까지 범이 들어온다.
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신의 견해입니다. 더구나 세운(世運)이 오래 막힌 나머지 하늘이 성명(聖明)을 내어 신과 인간을 주관하게 하셨으니, 이는 비유컨대 기나긴 어두운 밤이 끝나고 밝은 태양이 하늘에 떠올라 온갖 도깨비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이는 실로 천년에나 한 번 돌아오는 기회로서 정기(正氣)가 복돋아 줄 터인데, 어찌 음험하고 사특한 요귀(妖鬼)가 감히 태양(太陽)의 청명함을 범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요즈음 어떤 자는 성후(聖候)가 편치 못한 것이 혹 사술(邪術)에서 비롯된 재앙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데, 그것은 지나친 생각입니다. 전후의 하교에 초상(初喪) 때에 상한 것이라고 하셨는데, 바로 그것이 지당하신 논입니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은 동요되는 바가 있으면 바깥 사기(邪氣)가 끼어들 수도 있는 법입니다. 옛날 사람 중에 술을 마시면서 술잔 속에 뱀 그림자를 보고 마음이 동요151)  된 나머지 그로 인해 병이 든 자가 있었는데 나중에 와서 그때 비쳤던 그림자가 활이었지 뱀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그 병이 즉시 나았다고 합니다. 성인의 마음은 지대(至大)하고 지강(至剛)하여 필시 이런 것에 동요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하로서의 연모의 정을 가누지 못해 감히 하찮은 정성이나마 올리는 바입니다. 이어 생각건대 상후(上候)가 편치 못한 것은 실로 슬픔이 지나친 데에서 기인한 것이니, 더욱 몸을 보양(補養)하는 약제를 드시어 원기를 강장하게 하신다면 바깥 사기 따위는 해를 끼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소를 보고 모두 잘 알았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그대의 정성이 가상하다. 글의 내용이 매우 타당하니 유념하여 시행하겠다."
하였다.

 

행 호조 판서 김신국(金藎國), 형조 참판 이명(李溟), 판결사 박로(朴𥶇)를 금차(金差) 구관소(句管所)의 당상으로 삼고 가까운 아문에서 회좌(會坐)하여 수응(酬應)에 편하게 하였다.

 

당차(唐差) 접대소(接待所)가 아뢰기를,
"호차(胡差)가 입경할 날이 가까워오는데도 송 유격(宋遊擊)152)   등이 아직도 서울에 머무르고 있으니 길에서 서로 만날 우려가 있습니다. 접대소로 하여금 타일러 속히 선처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망궐례(望闕禮)를 정지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일렀다.
"이제는 병이 나았으니 필시 더 이상 악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대흥(大興) 땅에 이형익(李馨益)이란 자가 있어 약간 침법(鍼法)을 알아 사기(邪氣)를 다스린다고 세상 사람을 현혹했는데, 남의 괴질(怪疾)을 치료하여 간혹 효험을 본 경우도 있었다. 이때 와서 내국(內局)이 아뢰기를,
"이형익의 침술이 매우 묘하다고 하기에 본원(本院)이 불러 오려고 했으나, 먼 데에 사는 사람이라서 돈을 마련할 곳이 없으니, 해조로 하여금 급료(給料)토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괴이하고 허탄한 술법을 추장(推奬)할 필요가 없으니, 급료하지 말라."
하였다.

 

11월 6일 경자

우박이 내렸다.

 

심세괴(沈世魁)의 차관(差官) 진희량(陳希亮)이 인목 왕후(仁穆王后)의 혼전(魂殿)에 치제(致祭)하였는데 제의(祭儀)는 모두 송유창(宋有倉)의 예에 따랐다.

 

처음에 호차(胡差) 소도리(所道里) 등이 올 때에 먼저 네 대관(大官)이 【 평안 감사·평안 병사·황해 병사·개성 유수 이다.】 성을 나와 영접할 것을 청하였으나, 조정이 좌이관(佐貳官)으로 하여금 나가 접대하게 하였다. 이때에 와서 소도리 등이 안주(安州)의 경계에 이르러 병사가 나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즉시 화를 내는 한편, 한 곳에서도 연회를 베풀지 않았다는 이유로 성을 내어 마지 않았다.

 

11월 8일 임인

예조가 아뢰기를,
"김시국(金蓍國)이 황칙(皇勑)과 사은(賜銀)을 받아 온 것은 남다른 은전(恩典)에서 나온 것이니, 사은(謝恩)하는 조치가 있어야 합당합니다. 해사(該司)로 하여금 미리 문서와 예물을 준비해 두었다가 내년에 사신이 갈 적에 주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중국 조정이 염초(焰硝) 3천 근(斤)의 무역을 허용한 것은 예전부터의 관례인데, 김시국의 사행(使行)에 갑자기 정지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예부(禮部)와 병부(兵部)의 제청(題請)에 힘입어 특별히 해마다 3천 근을 내주라는 명이 내렸는데, 이것이 비록 황상이 마구 무역하는 폐해를 금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남다른 은전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듣건대 사신이 돌아올 적에 이미 염초를 받았는데도 출발하던 날에 다시 태감(太監)이 거두어 갔다고 하니, 여기에는 필시 다른 곡절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부의 자문(咨文)과 병부의 자문 안에 있는 말을 보건대 ‘오랑캐도 동산(東山)에서 화약(火藥)을 굽고 있으니 해국(該國)이 우리에게서 살 수 없게 되면 오랑캐에게 굽신거리며 사갈까 염려된다.’고 하였으니 우리를 의심하는 정도가 깊습니다. 일단 이런 말을 들은 이상 그냥 있을 수도 없으니 사유를 갖추어 진주(陳奏)해서 거듭 염초를 청하는 동시에 변백(辨白)하는 말도 써서 절사(節使)가 갈 적에 부쳐 보내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9일 계묘

상이 창덕궁(昌德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11월 11일 을사

좌의정 이정귀(李廷龜)가 정사(呈辭)하여 체직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할 것을 명했다.

 

상이 이원익을 인견하려고 했는데, 이원익이 병이 중하여 나오지 못하고 차자를 올려 대죄하니, 답하기를,
"경의 차사(箚辭)를 살펴보니 마음에 몹시 염려된다. 경은 대죄하지 말고 몸을 조리하여 들어오라."
하고, 이어 내의(內醫)를 보내 병을 보살피도록 명했다.

 

상이 봉림 대군(鳳林大君)의 예에 따라 능원대군(綾原大君) 이보(李俌)에게 노비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당차(唐差) 진희량(陳希亮)이 금차(金差)가 입경(入京)하게 되었기 때문에 감히 직로(直路)를 거치지 못하고 양주(楊州)·적성(積城)의 길을 따라 곧장 장단(長湍)으로 향하였다.

 

영돈녕부사 오윤겸(吳允謙)이 차자를 올려 사직을 청하니, 답하였다.
"차자를 살펴보고 모두 잘 알았으나 마음이 매우 섭섭하다. 경은 인정과 의리상 지금 같은 때에 서로 버려서는 안 되니 아무쪼록 지극한 정을 생각하고 물러날 생각을 하지 말라."

 

11월 13일 정미

비국 당상 최명길(崔鳴吉)이 구관소(句管所) 당상과 함께 아뢰었다.
"신들이 금차(金差)를 들어가 보니, 그가 처음에 말하기를 ‘박난영(朴蘭英)이 돌아갈 적에 이미 대관 4인이 성에서 나와 서로 인사를 나누는 일을 말했는데, 이제 와 보니 듣고도 못들은 척하기에 우리들이 즉시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 고하지 않고 그냥 돌아간다는 것이 타당치 못하기에 차라리 한(汗)에게 죄를 얻을망정 양국(兩國)의 우호하는 뜻을 다치지 않으려고 참고 이곳에 왔다.’ 하기에 신들이 ‘감사와 병사가 도내(道內)를 두루 순력하고 영접하는 등의 일은 지방관으로서의 임무이다.’고 대답하자, 그가 말하기를 ‘조정이 만약 경관(京官)을 보내 영접한다면 우리가 어째서 꼭 감사와 병사를 내보내기를 요구하겠는가.’ 하였습니다.
또 그가 천조(天朝)의 경우에는 여덟 군데에서 연향(宴享)한다고 꼬투리를 잡기에, 신들이 부자(父子)의 나라와 형제(兄弟)의 나라는 그 예(禮)가 같지 않다고 대답했으나 그는 조금도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춘신사(春信使)와 추신사(秋信使)의 예단(禮單) 숫자를 말하기에, 신들이 ‘정(情)이야 서로 두텁지만 힘이 미치지 못하는 이상 억지로 할 수는 없다. 하늘에 고하며 맹세할 적에 어찌 오늘날 이런 말이 있을 줄 알았겠는가.’하니, 그가 ‘나는 한(汗)이 말한 것만 전하면 그만이지, 귀국에서 처치하는 것은 내가 알 바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들이 묻기를 ‘이번 예단의 숫자가 국서(國書) 안에 쓰여 있는가.’ 하였더니, 그가 ‘애당초 국서는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사신은 반드시 국서를 가지고 오는 것이 예(禮)인데 지금 국서가 없으니 어찌 깔보는 뜻이 아닌가.’ 하였더니 그가 ‘이는 깔보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귀국의 사신이 국서가 없이 우리 나라에 오더라도 어찌 괴상히 여길 리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삼성 국청이 아뢰기를,
"물의(物議)가 모두들 ‘삼성의 추국은 강상에 관련된 대옥(大獄)입니다. 애생(愛生)153)  의 저주 사건이 일단 김기종(金起宗)의 어미를 간범한 정적(情迹)이 있고 보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김기종은 물러나 앉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며느리를 시켜 정장(呈狀)만 하게 하였으니, 정리로 헤아려 보건대 몹시 부당하고 옥사를 살피는 체통으로 논하면 김기종을 잡아다가 심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양사도 이 일을 논했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죄인을 사사하는 일은 한 시각이 급하니, 삼공(三公)의 차자에 대한 비답이 이미 내렸으면 정원은 즉시 승전(承傳)을 받들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좌부승지 정지우(鄭之羽)는 즉시 거행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판의금 김시양(金時讓)과 한참 동안 쟁변하다가 대신과 양사가 강요한 뒤에야 비로소 승전을 받들었으니 그 일만 해도 이미 형편없기 짝이 없는데 도리어 상소까지 하여 거짓으로 말을 지어내면서 스스로 모면할 꾀를 부렸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예조 참의 이준(李埈)이 상소하기를,
"오랑캐의 사신이 곧 도착할텐데 의도가 몹시 불손하여 관대(館待)를 융숭히 하라고 위협하고 세폐(歲幣)의 수효를 늘리겠다고 겁을 주고 있습니다. 모름지기 융숭하게 대접하자고 말하는 자들은 눈앞의 편안함만 추구하기에 바쁘고 훗날의 걱정이 지금보다 커지는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금과 비단을 보태주어도 그들의 마음에는 차지 않아 다시 명분(名分)을 요구하며 반드시 따르도록 강제로 명령할 것이니, 어찌 일시적으로 조금 안정되기를 기대하여 끝없는 후환을 불러서야 되겠습니까. 신중한 태도로 처리하여 약간 꺾어 누르는 뜻을 보여야 마땅합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당(唐)·송(宋) 무렵에도 변사(邊事)가 있으면 널리 조정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더구나 지금 오랑캐 사신의 수응(酬應)은 매우 중요한 일이니, 저들이 움직이기 전에 미리 일에 앞서 대비책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 나라의 산천은 가장 험준한데 예로부터 요새지를 의거하여 수비하였으므로 한사(漢史)154)  에도 ‘동인(東人)은 수비를 잘한다.’고 일컬었고, 수(隋)나라와 당(唐)나라의 백만 군대도 구석진 한 나라의 군사에게 패배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조정 신하의 의견은 혹 여기에서 나오지 않고 이번에 적(敵)이 요동(遼東) 왼쪽의 평야에서 뜻을 얻은 것을 가지고 곧장 ‘그들의 강함은 상대가 없다.’고들 말하니, 어찌 잘못이 아닙니까.
예로부터 공업(功業)의 성취는 지기(志氣)를 먼저 세운 데서 말미암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이러한 지기가 서 있다면 무엇인들 성사하지 못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도 먼저 뜻을 세우고 한 번 크게 노하시어 사졸들을 격려하고 신하들의 마음이 태만함을 나무라시어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키소서. 그러면 정신이 고무되어 국가의 형세가 저절로 중해질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소를 살펴보고 매우 가상하게 여겼다. 소의 내용은 유념하여 채택해 시행하겠다."
하였다.

 

11월 14일 무신

비국이 아뢰기를,
"금차(金差)와 문답한 얘기가 전일과 다른 듯하니, 응접에 관계된 일을 면대해서 정해야 하겠으나 상께서 지금 조섭(調攝)하는 중이므로 신들이 감히 청대(請對)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인견하려고 하였으나 마침 국기(國忌)를 당하여 이루지 못했다. 경들이 의논을 정하여 아뢰어라."
하였다. 비국이 별지(別紙)로 서계(書啓)하니, 상이 읽기를 마치고, 대신과 비국의 유사 당상을 인견하여 하문하였다. 윤방(尹昉)이 대답하기를,
"대체적인 내용은 계사(啓辭)에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들의 행위를 살펴보건대 꼭 맹약을 깨려고 온 것은 아닌 듯합니다. 부득이할 경우 다른 절목(節目)은 들어줄 수도 있겠으나, 예단(禮單)의 수효에 대해서는 우리 나라의 물력(物力)으로 결코 감당해내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의 본의가 만약 맹약을 깨려는 데 있다면 그 수효에서 한 필만 감하더라도 반드시 그것을 꼬투리로 삼을 것이고, 그 의도가 만일 물화(物貨)를 많이 얻어 내는 데에 있다면 요구를 모두 들어주지는 않아도 반드시 맹약을 깨지는 않을 것이다. 국가의 존망이 오직 임기 응변하여 선처하는 데 달려 있으니 신중하게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만 필이니 천 필이니 하는 것은 필시 일부러 겁을 주려고 거짓으로 부풀린 것일텐데, 지금 만약 우리 쪽에서 먼저 수효를 줄여달라는 말을 꺼낸다면 반드시 그들의 술수에 빠질 것이니 그들이 먼저 수효를 줄여주겠다는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가 들어주는 것이 좋겠다."
하니, 모두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지당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생각으로는 지금 응당 그에게 답하기를 ‘이는 반드시 맹약을 깨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어찌 우리 나라의 물력이 절대로 감당하기 어려우리라는 점을 몰라서 이런 말을 하겠는가. 수효를 십분 감해 주더라도 절대 할 수가 없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화를 내고 가버리더라도 그대로 놔두고 가만히 있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지금 예단의 수효를 감한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라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가 이미 토산(土産)을 가지고 말한 이상 이제 응당 대답하기를 ‘마땅히 토산을 당화(唐貨)의 어떤 물건으로 대체하되 그것의 필수(匹數)는 당화의 수효에 따라야 한다.’고 하여 우리의 확고한 의도를 보여야 한다."
하였다. 김시양(金時讓)이 아뢰기를,
"물목(物目)의 수효를 우선 의논하여 결정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각색(各色) 목면(木棉)의 합계가 1천 필이면 될 듯하다."
하였다. 이귀(李貴)가 아뢰기를,
"상께서 호차(胡差)를 접견하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만일 그 청을 모조리 들어줄 경우에는 접견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청도 들어주지 않으면서 접견까지 하지 않는다면 저들이 반드시 감정을 품을 것이니, 후회가 있게 될까 걱정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도 옳다. 예단을 강정(講定)한 뒤라면 접견하는 것이 뭐가 어렵겠는가."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연향(宴享)은 세 군데에 마련하도록 하라. 그러나 경관(京官)을 보내 접견하는 일은 따를 수 없다."
하니, 이귀가 아뢰기를,
"신이 생각하기에는 연향은 폐가 있으나 경관을 보내 접견하는 것은 별로 비용이 들지 않으니, 그들의 청을 모두 들어주지 못할 바에야 경관을 보내는 것이 낫다고 여겨집니다."
하고, 김상용(金尙容)이 아뢰기를,
"왜사(倭使)가 올 적에도 경관을 보내 접견하는 예가 있으니, 지금 경관을 보내도록 허락하더라도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연회는 베풀지 말고 경관을 보내 접견하는 것만 허락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최명길(崔鳴吉)이 아뢰기를,
"저들이 국서(國書)를 지니지 않고 왔으니 우리 쪽에서도 꼭 국서를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예단의 수효만 써서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국서를 어찌 꼭 만들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김신국(金藎國)이 아뢰기를,
"골자(骨者)가 왔을 적에 이미 궁면(弓面)을 얘기했는데 지금 곧장 궁각(弓角)을 얘기하니 허락해야 될지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결코 허락할 수 없다."
하였다. 김상용이 아뢰기를,
"지금 호차(胡差)에게 묻기를 ‘나라끼리 사귀는 예(禮)는 어떠한 예라도 보답하지 않는 경우가 없는데, 우리 나라가 이러한 것으로 예단을 보낼 경우 그대 나라에서는 장차 어떤 물건으로 예단(禮單)을 삼을 것인가.’ 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겠다.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11월 15일 기유

비국이 아뢰기를,
"금차(金差)가 떠난 뒤에 사신(使臣)을 가려 정하여 춘신사(春信使)라고 일컬어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신들이 금차(金差)에게 가 보았더니, 소도리(所道里)가 ‘그저께 한 말을 조정에 품달했는가?’ 하고 묻기에, 신들이 대답하기를 ‘국서(國書)는 애초 우리 나라가 먼저 보낸 것이 아니라 그대 나라의 국서 안에 좋지 못한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답서를 했던 것이다. 설령 말의 표현에 본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점이 있었더라도 시일이 오래 지난 오늘날 하필 다시 제기할 것이 있는가. 그리고 예단(禮單)에 관한 일은 일찍이 헤아리지 못했던 것으로서 나라 안의 사람들이 모두 해괴하게 생각하며 이번의 사행(使行)은 반드시 맹약을 바꿀 의도로 온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힘으로 해낼 수 없는 것을 어찌 이토록까지 요구한단 말인가.’ 하였습니다. 소도리가 말하기를 ‘우리의 한(汗)의 명을 전한 것뿐인데, 어찌 그리 준엄한 말로 거절하는가. 혹시 1년에 한 차례씩 하려는 것인가.’ 하기에, 신들이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의 피폐한 상황은 귀국이 알 것이다. 아무리 힘을 다해 마련하려 해도 산을 옆에 끼고 바다를 건너려는 것과 다름이 없는데, 어느 겨를에 1년이니 2년이니 하는 도수(度數)를 논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소도리가 차하리(車河里)와 한참 동안 저희들끼리 얘기를 나눈 뒤에 말하기를, ‘우리들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귀국의 신하들과 뭐가 다르겠는가. 그러나 어째서 어떤 것은 마련할 수 있고 어떤 것은 마련할 수 없으며 어떤 것은 줄여야 하고 어떤 것은 줄일 수 없다는 뜻을 시험삼아 말하지 않는가.’ 하기에, 신들이 ‘수효를 줄이더라도 우리 나라의 물력(物力)으로는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더 이상 대답할 말이 없으나, 이러한 뜻을 조정에 통보하겠다.’고 대답하였는데, 소도리 등이 화난 기색은 없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물건은 마련하고 어떤 것은 마련하지 못한다거나 어떤 것은 줄여야 되고 어떤 것은 줄일 수 없다는 등의 이야기가 이미 그들의 입에서 나온 이상,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비국이 회계하기를,
"저들이 이미 수효를 줄일 수 있는 단서를 내놓았고, 조정에 품달하겠다고 대답한 이상 오늘 회보(回報)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김신국(金藎國)·최명길(崔鳴吉)로 하여금 구관소의 당상과 함께 들어가 보고 다시 의사를 탐색한 뒤 내일쯤 또 찾아가 의논하여 정한 수효를 말해주고 그들과 더불어 이모저모로 논의하여 확정짓게 하소서."
하였다. 김신국과 최명길이 마침내 구관소의 당상과 함께 호차(胡差)를 가 보고 나서 이르기를,
"신들이, ‘국왕께서 초상(初喪) 중이라서 인사(人事)를 닦을 겨를이 없었는데도 두 나라 간의 화친하는 일을 중히 여겨 사신을 보내 신의를 보였다. 그런데도 귀국에서는 끝내 답서를 보내지도 않았을 뿐더러 예단(禮單)까지 돌려 보냈으니, 어찌 너무나도 미안할 일이 아니겠는가.’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귀국이 전일 보낸 글 가운데에 이미 미안하다는 말이 있었는데, 만약 다시 한 번 확정짓지 않은 상태에서 받는다면 재물을 탐내는 것과 가깝기 때문에 감히 받지 못했을 뿐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예단의 일은 어째서 대답하지 않는가.’ 하기에, 신들이 ‘우리 나라는 국토가 작고 백성이 가난하니 만약 전날 말한 수효를 갖추어 보내게 되면 한 번도 치루지 못하고서 민력(民力)이 이미 바닥이 나 나라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할텐데, 오래도록 우호 관계를 맺고 싶어도 될 수 있겠는가.’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우리는 한(汗)의 뜻만 전할 따름이다. 이러한 내용으로 돌아가 한(汗)에게 고할 것이니, 귀국의 사신이 나름대로 한에게 가서 결정을 보도록 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네 명의 대관이 나와 영접하지 않거든 즉시 돌아오라는 것이 곧 한의 분부였다. 그런데 우리들이 한에게 죄를 얻으면서까지 참고서 들어 온 것은 귀국의 말을 듣고 돌아가 한에게 전하려고 한 것일 뿐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의 글에도 언급이 없는데, 우리 나라에서 사람을 보내 결정짓게 할 수는 결코 없다. 말을 잘 만들어 타일러서 핑계대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문관 부제학 이경여(李敬輿)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불행하게도 흉악하고 사특한 병고가 궁액(宮掖)의 안에서 나왔고 또 불행하게도 못된 짓을 저지른 자들이 대부분 자전(慈殿)의 궁인(宮人)에게서 나왔습니다. 생각건대 그 자들이 혹 자기들의 욕구불만을 원망하기도 하고 혹 청알(請謁)을 하지 못함을 원망하여 자기들끼리 서로 못된 생각을 계속 품고서 감히 흉계를 꾸민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만, 자애스런 자전의 덕과 성상의 변함없는 효심은 여전합니다.
옥안(獄案)에 부표(付標)하신 것을 보면 천심(天心)을 알 수 있고, 사사(賜死)만을 명하신 것에서 성의(聖意)가 더욱 드러났는데, 먼 곳에 사는 사람들만 이에 대해 들은 것이 상세하지 못하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의혹을 갖기가 쉽습니다. 이에 신들은 부모의 말씀을 들은 것처럼 그저 통한스런 마음만 간절한데,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해 보면 그렇게 된 까닭이 또한 없지 않으니,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악인의 두목이 국법에 복죄(伏罪)되긴 하였지만 내응(內應)한 무리가 필시 있었을텐데, 국문을 청하는 계사에 대해 어떤 것은 따르고 어떤 것은 거부했고 보면, 서로 다르게 처리하는 결과를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사실은 전하께서 진상을 환히 살피고 자세히 처리하시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만, 내간(內間)의 일을 저들이야 어찌 알겠습니까. 게다가 써서는 안 된다[不當書]라는 세 글자를 부표(付標)하여 명을 내리셨는데도, 그 뒤에 정원이 제대로 계품하여 선처하지 못한 결과 제적(諸賊)이 승복(承服)한 초사(招辭)가 일체 삭제 되지 않은 상태로 조보(朝報)에 등사되어 사방에 전해짐으로써 성상의 아름다운 뜻이 모두 드러나지 못하게 되었고 보면, 어리석은 백성이 의혹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의심을 해소하여 진정시키는 방법으로는 돌아가신 자전을 살아계셨을 때처럼 섬겨 그 분이 아끼고 공경하던 자들을 예전대로 하면서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까지도 모두 그렇게 하는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면 모든 의심이 얼음 녹듯 풀리고 성효(聖孝)가 더욱 드러나 화기가 충만하고 요얼(妖孽)이 소멸될 것이니, 천하 후세에도 길이 할 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마음속으로 매우 가상히 여겼다. 차자의 내용은 유념하겠다."
하였다.

 

조석윤(趙錫胤)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11월 17일 신해

비국이 아뢰기를,
"호중(胡中)에 보낼 예단(禮單) 가운데 목면(木棉)의 수효를 감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골자(骨者)가 정한 것은 어느 정도 상량(商量)한 것으로서 원래 그다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던 만큼 지금 만약 지나치게 깎아 내린다면 저들이 더욱 심하게 노하여 난처한 일이 있게 될까 염려되기에 1천 5백 필로 정수(定數)를 삼았습니다. 그 밖의 물목(物目)도 별단(別單)에 써서 올립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너무 염려하지 말고 부표(付標)한 수효대로 말하라. 그들이 만약 수효가 적다고 말하면, 이외에는 절대로 가감(加減)하기 곤란하다는 뜻을 분명히 말하도록 하라."
하였다. 【 별단 물목은 다음과 같다. 백면사(百綿紗) 50필, 초록주(草綠宙) 50필, 백저포(百苧布) 50필, 녹혈피(彔血皮) 1백장, 표피(豹皮) 10장, 수달피(水獺皮) 5장, 목면(木棉) 1천필, 백목면(白木綿) 2백필, 청목면(靑木綿) 1백필, 홍목면(紅木綿) 1백필, 남목면(籃木綿) 1백필, 상화지(霜花紙) 1백권, 백면지(白綿紙) 5백권, 대왜검(大倭劍) 10파(把), 소왜검(小倭劍) 10파, 채화석(彩花席) 50장, 단목(丹木) 1백근, 호초(胡椒) 10두(斗).】 상이 홍면주는 30필을 감하고 초록주는 30필을 감하고 녹혈피는 절반을 감하고 목면은 절반을 감하고 대왜검은 6파를 감하고 소왜검을 6파를 감하도록 명하여 부표(付漂)해서 내렸다. 윤방(尹昉)과 오윤겸(吳允謙) 등이 차자를 올려 다시 참작하여 수효를 늘려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전일 귀희(歸希) 등을 사사(賜死)할 적에 전지(傳旨) 가운데 미안한 말이 있기 부표(付標)해서 내렸으니, 그 뜻이 범연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때 승지가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결과 아울러 조보(朝報)에 등사해 나오게 하였으니, 일이 부당하기 짝이 없다. 해당 승지를 추고하라."

 

11월 18일 임자

김신국과 최명길이 구관소의 당상과 함께 호차(胡差)를 만났는데, 예단의 일을 언급하자 대답하지 않았다. 중남(仲男)이 일로(一路)에서 연향하는 곳을 묻기에, 예전에 벌써 강정(講定)했다고 대답하였으나, 두 차사(差使)는 들은체 만체 하였다. 또 다른 나라의 사신이 오면 경관(京官)을 보내 맞이하는 것이 예이니 이제부터는 경관을 보내 맞이하겠다고 말을 하니, 두 차사가 그것은 잘된 일인 듯하다고 말하였다.

 

김육(金堉)을 사간으로 삼았다.

 

11월 19일 계축

신득연(申得淵)을 춘신사(春信使)로 삼았다.

 

비국이 아뢰기를,
"김신국 등이 금차(金差)와 문답한 곡절이 계사 안에 상세한데, 예단의 일은 저들이 응답을 하지 않았으니 확정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강한 적을 대하는 도리상 어찌 줄곧 꼿꼿한 태도만 보일 수 있겠습니까. 신들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상께서 그들을 불러 만나실 적에 ‘우리 나라의 물력(物力)이 고갈되어 마련할 수 없는 형편이라서 줄이는 것을 면치 못했으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마련할 수 있는 형편이 되면 나중에 사신이 갈 때 힘이 닿는 대로 더 보내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시어 더 지급할 뜻을 약간 보이고, 춘신사(春信使)가 갈 적에 골자(骨者)가 정했던 수효를 보냈으면 합니다. 그리고 연향(宴享)도 경기 한 군데와 양서(兩西)에 각기 한 군데씩 설치하여 그들로 하여금 쓸쓸한 생각이 들지 않게 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연향의 일은 그렇게까지 강하게 청하니, 계사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 연향하는 곳에서 평안도는 평안 관찰사가 접대하고 황해도는 황주 병사가 접대하고 경기도는 개성부 유수가 접대하도록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507면
【분류】외교-야(野)

ⓒ 한국고전번역원

 

상이 인정전(仁政殿)에 거둥하여 호차(胡差)를 접견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어제 예단(禮單)에 물종(物種)을 써서 보여준 수효는 과연 약소한 듯하니 그들이 필시 실망했을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가지고 한(汗)에게 돌아가 보고하면서 아울러 자기들의 불만족스러운 심사를 쏟아내게 되면, 한의 노여움이 필시 배가 될 것이니, 기미(羈縻)하는 계책이 아닌 듯싶습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전일 서계(書啓)한 단자(單子) 안에 부표(付票)했던 수효도 함께 도로 남겨두게 해서 구관소의 당상으로 하여금 밤을 틈타 그들을 찾아가 ‘어제 정한 예단의 수효는 우리 조정이 벌써 의논하여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목면(木棉)은 수효가 너무 많아 감하지 않을 수 없고 물소뿔[水牛角]은 원래 토산(土産)이 아니라서 진정 갖추어 보내기 어려우나, 그 밖의 잡물(雜物)은 모두 원래의 수효대로 보내겠다.’라는 내용으로 말하게 했으면 합니다. 그러면 그가 뜻밖에 이것을 얻고 기뻐하는 마음이 필시 처음보다 곱절로 불어나 쾌히 허락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 가운데 왜검(倭劍)도 토산(土産)이 아니니, 수효를 늘리지 말라."
하였는데, 구관소가 아뢰기를,
"신들이 금차(金差)를 찾아가 예단을 늘려 정한 수효를 갖추어 말했더니, 그들이 기쁜 안색을 지었습니다. 신들이 또 세 군데에서 연향하여 이웃 나라의 대관을 우대하겠다는 의사를 말했더니, 역시 꽤나 좋아하였는데, 소도리(所道里)는 여전히 겨우 세 군데만 허락하느냐고 불쾌하게 여겼으므로 여러 가지 얘기를 하며 서로 변론하였습니다. 신들이 또 말하기를 ‘이제부터는 예단을 싣게 될 짐의 수효가 꽤 많아질 것인데, 귀국에서 반드시 첨수참(甛水站)에다 차량(車輛)을 조발(調發)하여 우리 나라의 쇄마(刷馬)와 교체시켜야 전복되는 걱정을 면할 수가 있으니, 이 점도 미리 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더니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니 염려하지 말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하였다.

 

11월 20일 갑인

호차(胡差) 소도리(所道里) 등이 돌아갔다.

 

정백창(鄭百昌)을 좌부승지로, 정온(鄭蘊)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11월 22일 병진

국장 도감(國葬都監)의 제조 윤신지(尹新之)와 도청(都廳) 이유달(李惟達)과 제조 겸 전문 서사관(提調兼篆文書寫官) 신익성(申翊聖)과 지문 애책 제술관(誌文哀冊製述官) 장유(張維)와 서사관(書寫官) 이홍주(李弘胄)·이행원(李行遠)·이현(李𥙆)과 도승지 강석기(姜碩期)와 예방 승지 강홍중(姜弘重) 등은 모두 가자(加資)하고, 제주관(題主官) 한인급(韓仁及)은 가자한 지가 오래되지 않았으니 숙마(熟馬) 1필을 내리고, 제조 김신국(金藎國)은 숙마 1필을 내리고, 여재 궁관(舁梓宮官) 송명(宋溟)·이점(李漸)과 배왕 대장(陪往大將) 신경인(申景禋)에게는 각기 반숙마(半熟馬) 1필을 내리고, 전 승지 여이징(呂爾徵)은 아마(兒馬) 1필을 내리고, 주서 이시만(李時萬)과 봉교 이해창(李海昌)은 각기 상현궁(上玄弓) 1장(張)을 내리고, 낭청(郞廳)은 모두 승서(陞敍)하되, 이미 준직(準職)된 자는 반숙마 1필을 내리고, 감조관(監造官)은 모두 승서(陞敍)하고, 명정 차비(銘旌差備)는 가자하되 자궁자(資窮者)는 아마 1필을 내리고, 그 밖에 내외(內外)의 여러 집사(執事) 및 산릉(山陵)에 배설(排設)했던 해사(該司)의 관원과 각처에 배설한 사약(司鑰) 등은 각기 한 자급(資級)씩 올려주되 자궁자는 대가(代加)하고, 빈전 도감(殯殿都監)의 제조 김자점(金自點)·최명길(崔鳴吉)과 명정 서사관(銘旌書寫官) 김광현(金光炫) 등은 모두 가자하고, 낭청(郞廳)·감조관(監造官) 등은 모두 승서하고, 장생전(長生殿)의 도제조 윤방(尹昉)은 1필을 내리고, 제조 이서(李曙)·윤흔(尹昕)은 각기 반숙마 1필을 내리고, 빈전(殯殿)의 차지 내관(次知內官) 오대방(吳大邦)·박륜(朴崙)은 각기 한 자급(資級)을 올리고, 복차비(復差備) 홍대해(洪大海)는 숙마 1필을 내리고, 시호(諡號)와 책보(冊寶)를 올릴 때의 상전(尙傳) 나업(羅嶪)은 아마 1필을 내리고, 현궁감봉관(玄弓監封官) 영의정 윤방과 식재 궁관(拭梓宮官)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은 각기 숙마 1필을 내리고, 총호사(揔護使) 좌의정 이정귀(李廷龜)는 안구마(鞍具馬) 1필을 내리고, 산릉 도감(山陵都監)의 제조 구굉(具宏)·이현영(李顯英)과 도청(都廳) 이경인(李景仁)·김육(金堉)과 현궁 봉폐관(玄宮封閉官) 한필원(韓必遠) 등은 모두 가자하고, 낭청(郞廳)·감조관(監造官)은 모두 승서하고, 경기 감사 김경징(金慶徵)은 반숙마 1필을 내리고, 도차사원(都差使員) 등은 아마 1필을 내리고, 상지관(相地官) 등과 본 아문은 승서하고, 영역 부장(領役部將) 등은 상당한 직(職)을 제수하고, 산릉 도감의 전 제조 이덕형(李德泂)과 돈체사(頓遞使) 이시방(李時昉)은 각각 아마 1필을 내리고, 만장 서사관(挽章書寫官) 등과 돈체사 종사관(頓遞使從事官) 등은 한 자급씩 올리되 자궁자는 대가(代加)할 것을 명하고, 이어 정원에 하교하였다.
"이번의 상격(賞格)을 자세히 살펴 거행하라. 한 사람이 몇 가지 일을 겸했더라도 중복되게 주는 것은 허락하지 말라."

 

11월 23일 정사

김수현(金壽賢)을 대사헌으로, 최혜길(崔惠吉)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11월 27일 신유

간원이 이엄(李淹)·이익(李益)에 대한 상가(賞加)를 개정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이엄은 마음을 다 기울여 일한 자취가 있고 욕심을 부린 정상이 없으니, 이번의 상가는 지나친 것이 아니다."

 

영돈녕부사 오윤겸(吳允謙)이 상소하여 물러나기를 청하니, 상이 위로하며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1일 갑자

경기 감사 김경징(金慶徵)이 상소하기를,
"불행하게도 사패(賜牌)한 계집종이 남몰래 옛 주인의 사주를 받고서 감히 신의 집을 모조리 없앨 꾀를 내어 부엌·굴뚝·기둥·지붕에다 흉측한 물건을 묻어두었는데, 음험하고 사특한 짓이 빌미가 되어 어미의 병이 위독해졌습니다. 자식된 자의 망극한 정으로는 그의 살점을 저며도 분함을 씻기에 부족합니다만, 신은 일단 법조(法曹)에 고발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그 소를 보고 금부에 명하여 사주한 자를 잡아다 국문해서 공신(功臣)을 모해한 죄를 다스리라고 하였다. 금부가 저주한 죄인 칠향(七香)이 끌어댄 박자흥(朴自興)의 처와 박승황(朴承黃)의 처를 잡아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박자흥의 아내는 이이첨(李爾瞻)의 딸인데 잡아들이라는 명이 있었다는 말을 듣자 즉시 자살하였고, 계집종 칠향은 형문(刑問)을 받고 승복하였다. 말질정(末叱貞)은 바로 박승황의 아내로서 신문(訊問)해도 승복하지 않았는데 위관(委官) 김상용(金尙容)이 ‘말질정의 박가(朴家)의 절친(切親)으로 설혹 그 일을 관여하여 알았더라도 고의로 살인을 도모한 죄를 받아야 옳지, 함께 삼성(三省)에서 국문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아뢰고, 양사도 삼성에서 국문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引避)하여 체직되었으나, 상이 끝내 상용의 의논을 따르지 않아, 말질정이 끝내 장하(杖下)에서 죽었다.
사신은 논한다. 박승황(朴承黃)이 자기의 형인 박승종(朴承宗)과 평생 동안 서로 화목하게 지내지 못했는데, 말질정이 박승종의 부자(父子)에게 무슨 연연한 생각이 있기에 몰래 앙갚음할 꾀를 품어 스스로 헤아리지 못할 처지에 빠졌겠는가. 다만 이 일이 김류(金瑬)의 집안에서 나왔기 때문에 위관 이하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곧장 형추(刑推)를 청하여 삼성에서 국문하다가 결국 장사(杖死)하기에 이르렀으므로 물의가 이를 그르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507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사법-치안(治安) / 신분-천인(賤人) / 역사-편사(編史)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박승황(朴承黃)이 자기의 형인 박승종(朴承宗)과 평생 동안 서로 화목하게 지내지 못했는데, 말질정이 박승종의 부자(父子)에게 무슨 연연한 생각이 있기에 몰래 앙갚음할 꾀를 품어 스스로 헤아리지 못할 처지에 빠졌겠는가. 다만 이 일이 김류(金瑬)의 집안에서 나왔기 때문에 위관 이하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곧장 형추(刑推)를 청하여 삼성에서 국문하다가 결국 장사(杖死)하기에 이르렀으므로 물의가 이를 그르게 여겼다.

 

12월 2일 을축

예조가 아뢰기를,
"삼가 김시국(金蓍國)이 상고한 예부(禮部) 홍려시(鴻臚寺)의 친왕(親王) 곤면(袞冕)의 제도를 살펴보건대, 혁대(革帶)도 있고 대대(大帶)도 있는 것은 홍무(洪武)155)   26년에 정한 것이고, 대대는 있으나 혁대가 없는 것은 영락(永樂)156)   3년에 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는 면복도(冕服圖)는 영락 원년에 흠사(欽賜)한 제도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홍무 연간에 정한 것과 차이가 있는 것은 필시 이 때문일 것입니다.
중국 조정에서 제정한 조종(祖宗)의 의장(儀章)이 일단 이와 같은 이상 다만 그대로 준수해야 할 것이고 다시 논의할 필요는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옛적에 성인이 의장을 제정할 때 귀천과 존비를 구분한 방법은 단지 그 만드는 모양과 각종 색깔로 그 등급의 차이를 나누는 데 있을 뿐이므로 의관(衣冠)이나 화대(靴帶)의 제도에 있어서는 그 사이에 증감(增減)할 수 없습니다. 중국의 후(侯)·백(伯) 이하와 본조(本朝) 백관의 조복(朝服) 모두가 대대 위에 혁대를 두르는데, 유독 제왕(諸王)의 곤면(袞冕)에만 혁대를 빠뜨린다면, 사체상 의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대대의 제도가 자못 소략할 듯하고, 혁대를 없앨 경우 전혀 관대(冠帶)의 짜임새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성인은 예(禮)에 대해 과한 것은 덜고 모자란 것은 보충해서 중도를 취하였는데, 은로(殷輅)와 주면(周冕)157)  은 각기 우수한 것을 취한 하나의 본보기이니, 오로지 한 때의 제도에 구애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홍무 연간에 정해진 제도를 따라 양대(兩帶)를 함께 두어, 상방(尙方)으로 하여금 김시국이 상고한 혁대의 제도대로 따로 만들어 올리도록 함이 무방할 듯도 싶습니다. 그러나 중대한 관계가 있는 일인 만큼 대신에게 의논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영의정 윤방(尹昉) 등이 아뢰기를,
"해조의 계사를 보건대, 국초(國初)에 정한 것을 따라 양대(兩帶)를 모두 남겨 두자고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예는 의당 고제(古制)를 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상방으로 하여금 만들어 올리게 하여 일통(一統)의 제도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봉례(奉禮) 이후양(李後陽)의 소(疏)를 가지고 회계하기를,
"《오례의(五禮儀)》에 ‘봉례는 왕세자를 인도하고 인의(引義)는 종친과 문무 백관을 인도한다.’고 하였으니, 이후양이 아뢴 것은 실로 근거한 데가 있습니다. 그리고 봉례가 대군(大君)을 인접(引接)하는 것이 속전(俗傳)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예문(禮文)에 실리지 않았으니 이를 근거삼아 믿을 수 없고, 또 혐의를 구별하고 존비(尊卑)를 나누는 것이 예의 대절(大節)인 이상 대군을 지금 버젓이 거기에 해당시키는 것은 참람된 일인 듯싶습니다. 실제로 전례가 있다 하더라도 준행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세자를 인도하는 사람을 상례(相禮)라고 이름한 이상 봉례가 대군을 인접한다고 해서 조금도 혐의될 것이 없다. 예로부터 내려운 규정을 한 사람이 망언한 것 때문에 폐지할 수는 없다."
하였다.

 

12월 4일 정묘

달이 우림성(羽林星)에 들어갔다.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이 대궐에 나아가 하직 인사를 드리니, 상이 내시에게 명하여 부축해서 앞으로 오도록 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경의 기력이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의 나이가 곧 90이 되어 기식(氣息)이 거의 끊어져 다시는 상을 뵙지 못할까 두려웠는데, 지금 다행히 상의 앞에 오게 되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을 보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경이 이제 돌아가겠다고 하니 필시 하고픈 말이 있을 것인데, 나의 잘못을 듣고 싶다."
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이제 다 죽어가는 몸이라서 일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데 무슨 드릴 말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굳이 하문하였으나 끝까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상이 이르기를,
"날씨가 이처럼 추우니, 따뜻한 봄이 오기를 기다려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하니, 대답하기를,
"신도 임금이 계신 서울에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신의 노병(老病)이 갈수록 심해지니 만약 고향에 돌아가 죽지 못하게 되면 어찌 유한(遺恨)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생각이 이토록 굳으니, 내가 억지로 만류하지는 못하겠으나 마음이 매우 섭섭하다."
하였다. 마침내 초피구(貂皮裘) 1령(領), 호초(胡椒) 1두(斗), 단목(丹木) 30근을 내리고, 이어 정원에 하교하여 관(官)에서 인마(人馬)를 지급하게 하였다. 이에 왕세자도 그를 인견하고 전송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대왕(大王)의 종호(宗號)가 일단 정해진 이상 책문(冊文)을 올리고 신주를 고쳐야 마땅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욕의(縟儀)158)  를 행한 지가 아직 반 년도 못 되었는데 또 책보(冊寶)를 올리면 일이 번거로울 듯하니 잠시 시호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일시에 거행하되, 그 전에는 먼저 호를 정했다는 뜻을 갖추어 알린 다음에 축문(祝文)과 나라 안에서 그대로 이 호를 쓰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황해 병사 이시영(李時英)은 나라 일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백성의 재물을 긁어모으는 데만 힘썼는데, 심지어는 설면(雪綿)으로 의고(衣袴)를 많이 만들어 아첨하였고, 공청 감사 윤휘(尹暉)는 사람됨이 거칠고 비루하여 청의(淸議)에 버림을 받았으니, 성을 지키는 임무와 백성을 다스리는 책임을 맡길 수 없습니다. 이시영을 파직하고 윤휘를 체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휘는 그 재주를 버릴 수 없다. 이시영은 추고하라."
하였다.

 

12월 6일 기사

상이 명하여 유의(襦衣)를 만들어 옷이 엷은 상번(上番) 군사들에게 나눠 주도록 하였다.

 

12월 7일 경오

정충신(鄭忠信)이 치계하였다.
"금차(金差) 소도리(所道里) 등이 팔기(八騎)로 하여금 와서 말하게 하기를 ‘우리들이 서울에 갔더니 상께서 물건을 하사하셨다. 그러나 주선한 일을 모두 허락받지 못했으니, 의리상 은사(恩賜)만 받을 수는 없다. 서울에 있을 때 사양하고 싶었으나 황공하여 감히 그렇게 못하였는데, 끝내 받아가지고 간다면 필시 우리 한(汗)에게 꾸지람을 받을 것이다.’ 하고는 증급(贈給)한 물건과 말 3필을 두어 갔습니다. 신이 사람을 시켜 뒤쫓아 보냈으나 끝내 받지 않았습니다."

 

12월 8일 신미

예조가 아뢰기를,
"인헌 왕후(仁獻王后)159)  의 고비(考妣)에 대해 기신(忌辰)과 절일(節日)에는 관례에 따라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서원 부부인(西原府夫人) 한씨(韓氏)와 평산 부부인(平山府夫人) 신씨(申氏)를 모두 제사지내는 데 대해서는 전례(前例)가 없을 뿐더러 근거할 만한 문서도 없습니다. 다만 봉상시에 소장된 《등록(謄錄)》을 보건대 신의 왕후(神懿王后)160)   이하 각대(各代) 왕후 어머니의 기일(忌日)은 모두 1위만을 하였는데, 그 사이에 전후로 다른 모친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연대가 오래 되어 알 수가 없으니, 대신에게 의논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영의정 윤방(尹昉) 등이 아뢰기를,
"정리(情理)로써 논하건대, 전후의 모친이 있었을 경우에는 그 양위(兩位)를 일체(一體)로 시행하여야 될 듯합니다. 다만 봉상시의 《등록》을 보건대 각대 왕후 어머니의 기일은 모두 일위(一位)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간에 열성 왕후(列聖王后)들에게 어찌 전후에 걸쳐 두 어머니를 모신 분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대대로 제전(祭奠)을 관급(官給)해 줄 때 일위(一位)만 준 것은, 그 뜻이 범연한 것이 아닌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일원(李一元)을 공청 병사로 삼았다.

 

12월 9일 임신

정원이 성절(聖節)과 정조(正朝)의 망궐례(望闕禮)를 친히 행하지 말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건강이 회복된 지가 오래 되었으니 경들은 너무 염려하지 말라."

 

비국이 아뢰기를,
"오랑캐의 마음은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변경의 일이 걱정됩니다. 만약 미리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가 갑자기 사태가 발생하면 후회가 있게 될 듯하니, 각도의 군병 1만 명을 정비하여 변에 대처하게 하는 동시에 통솔할 장수도 미리 정해 놓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10일 계유

좌의정 이정귀(李廷龜)가 12차례나 정사(呈辭)하니, 상이 사관을 보내 출사하라는 뜻으로 타일렀다.

 

이귀(李貴)가 차자를 올려 남한 산성과 강도(江都)에 조치를 취하여 수륙(水陸)으로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게 하고 미리 강도로 옮겨 오랑캐에게 침범할 수 없다는 형세를 보일 것을 청하니, 상이 안에 두고 내리지 않았다.

 

12월 11일 갑술

헌부가 봉례(奉禮)가 대군(大君)을 인접(引接)하지 못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비국이 아뢰기를,
"이시영(李時英)은 본디 평판이 좋지 못했는데 전일에 거두어 임용한 것은 또한 결점을 제쳐 두고 공적을 이루도록 요구하는 뜻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간이 아뢴 것을 보건대, 순면(純綿)의 의고(衣袴)를 뇌물로 주었다고 하니 정말 놀랍기 짝이 없습니다. 서로(西路)에 위급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어떻게 그가 힘을 발휘하기를 기대하겠습니까. 먼저 파출(破黜)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서울의 인가에서 말이 새끼를 낳았는데, 눈이 셋이고 코가 없었다.

 

상이 하교하기를,
"인빈(仁嬪)161)                   사당의 제물(祭物)을 해사에서 갖추어 보내도록 하고, 병조로 하여금 수묘인(守墓人)을 정해 주도록 하라."
하니, 병조가 아뢰기를,
"삼가 《대전(大典)》의 차정조(差定條)를 살펴보건대, 선후(先后)와 왕비(王妃)의 부모에게는 수묘군(守墓軍)을 각기 두 사람씩 두되 친진(親盡)하면 두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인빈을 왕비의 부모와 비교하면 사체가 자별한 만큼 2인을 늘려서 차정(差定)하여야 옳을 듯한데, 신조(臣曹)가 감히 임의로 결정할 수 없으니, 예관으로 하여금 결정하게 하소서."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생각하건대, 원종 대왕(元宗大王)께서 이미 존호(尊號)를 받으신 이상 그를 낳으신 은혜를 미루어 조금 다른 은전을 강정(講定)하는 것이 정리(情理)나 예법(禮法)으로 따져 볼 때 참으로 안 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예경(禮經)에 실린 것은 복제(服制)만 논했을 뿐 제례(祭禮)는 언급하지 않았고, 국조(國朝)의 고사(故事) 또한 근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단지 의견으로 추측하건대 왕후의 고비(考妣)와 비교하면 사체가 자못 중하지만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의 고례(古例)와 비교하면 차이가 있는 듯하니, 이 두 가지를 참작하여 증감하는 것이 적당할 듯도 합니다. 다만 덕흥 대원군의 제물(祭物)에 관한 등록(謄錄)을 살펴보면 찬물(饌物)이 그리 많지 않아 더 이상 줄이기가 어려운 형편이니 이것은 모두 덕흥 대원군의 예를 따르게 하고, 수묘군은 덕흥 대원군에 비하여 반을 줄여 정해서 지급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모두 덕흥 대원군의 예에 따라 시행하라."
하였다.

 

춘추관의 당상들이 아뢰기를,
"사신(史臣)을 둔 것은 시정(時政)을 기록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시비를 포폄해서 후세의 공론을 삼으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동등(冬等)의 포폄을 할 적에 신미년의 《시정기(時政記)》를 살펴보건대, 사신이 논단(論斷)하는 말이 전혀 없으니 수사(修史)하는 체통을 자못 잃었습니다. 해당 사관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회답사(回答使) 원숙(元䎘)이 금국(金國)의 답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대마도(對馬島)의 승려 현방(玄方)이 세견선(歲遣船)이 오는 편에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과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얻기를 원하였는데, 예조가 허락하지 말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금차(金差)가 떠날 때 구관소(句管所)가 호차(胡差)에게 기뻐하는 기색이 있었다고 상에게 보고하고, 조정도 오랑캐가 맹약을 어길 의도가 없었던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김시양(金時讓)만이 염려하면서 차자를 올려 방수(防守)할 계책을 아뢰었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금차가 왕래하였는데 필시 헤아리기 어려운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김시양이 차자를 올려 걱정한 것은 곧 신들의 의견이기도 합니다. 지금 변방이 허술한 때를 당하여 적의 사신이 공갈하는 말을 안 했더라도 환란이 오기 전에 미리 대비하는 일을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는데, 더구나 걱정스러운 기미가 한두 가지뿐이 아닌 지금이겠습니까.
예로부터 해마다 부방(赴防)하는 규례가 있었는데, 이번에 차자를 올려 청한 것은 중도에 폐지되었던 규례를 정비해서 거행하자는 것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대기 중인 병력 중에서 우선 출신(出身) 1천 8백 명을 조발(調發)하여 보내고, 나중에 무학(武學) 1천 2백 명을 들여보내 각처의 성수(城守)하는 곳에 분산 배치하여 위급할 때 쓰임이 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15일 무인

부총(副摠) 심세괴(沈世魁)가 위성공(魏成功) 등을 보내 표문(票文)을 지니고 석도(席島)에 들어가 유격(遊擊) 장괴(張魁)를 잡아갔는데, 이는 본국이 이자(移咨)하여 그가 침략한 상황을 말했기 때문이었다.

 

이조 판서 장유(張維)가 풍비병(風痺病) 때문에 여러 차례 차자를 올려 체직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16일 기묘

영의정        윤방이 아뢰기를,
"신이 오늘 예조 판서        최명길과 함께 영녕전(永寧殿)과 종묘(宗廟)의 각실(各室) 제식(題式)을 봉심(奉審)하였는데, 전일 해조(該曹)에 계하(啓下)한 단자(單子)와 별로 다른 점이 없었습니다. 다만 전일의 단자에는 ‘영녕전의 사조(四祖)의 신주(神主)는 분자(粉字)로 썼다.’고 했는데, 오늘 봉심하니 모두 금자(金字)로 전각되어 있었고, 전일의 단자에는 공정 왕후(恭靖王后)162)                  를 안정(安定)으로 썼다고 되어 있는데 오늘 봉심해 보니 정안(定安)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는 필시 바삐 서두르다 보니 제대로 자세하게 살피지 못한 소치일 것입니다.
대체로 전일 해조가 의심했던 세 조목 가운데, 5대 이상 왕후(王后)의 축문(祝文)에 모두 조비(祖妣)라고 일컬었다고 한 것은 개원(開元)163)                   때의 전례에서 나온 것이고, 각실(各室) 왕후의 축문에 성씨(姓氏)를 함께 썼다고 한 것은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으니, 이 두 조목이 의심할 만한 일이기는 하나 이미 전례가 있고 보면 경솔히 논의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각실의 신주에는 모두 유명증시(有明贈諡)라는 네 글자가 있고 증시(贈諡)가 위에 묘호(廟號)가 아래에 있었는데, 축문에는 유명증시라는 네 글자를 없앤 채 묘호가 위에 있고 증시가 아래에 있었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의논해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될 듯 합니다.
그리고 선묘(宣廟)의 신주(神主)에 ‘유명증시’라는 네 글자를 쓰지 않은 것은 열성(列聖)의 제식(題式)과 어긋나는데, 광해(光海) 때에 추가로 올린 열 여섯 글자 가운데 여덟 자는 존시의 위에 썼고 여덟 자는 존시의 밑에 썼습니다. 또 의인 왕후(懿仁王后) 신주 안의 ‘장성 정헌(章聖貞憲)’은 바로 선조조(宣祖朝) 때 올렸던 호이고 ‘명덕(明德)’ 두 글자는 광해 때에 추가로 올린 호이니, 신주에 쓸 적에 의당 차례대로 썼어야 하는데 ‘명덕’의 두 글자를 ‘장성 정헌’의 위에 썼습니다. 이 두 가지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점입니다. 그리고 열성의 신주에 추가로 올린 호가 있더라도 모두 고쳐 쓰는 규례(規例)가 없는데 선조와 의인 왕후 두분의 신주는 광해 때를 당하여 누차 고쳐 썼으므로 도말(塗抹)한 흔적이 명백하여 글자 모양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므로 보기에 몹시 미안하였습니다. 이는 막중한 일이므로 자세히 의논해서 처리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의당 여러 대신으로 하여금 빈청(賓廳)에 모여 의논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그 뒤에 영의정        윤방, 좌의정        김류와 예조 판서        홍서봉(洪瑞鳳)이 의계(議啓)하기를,
"신들이 삼가 전일 봉심한 뒤에 올린 계사를 살펴보건대 묘주(廟主)의 제식(題式)과 축문(祝文)은 구례(舊例)에 명백하게 근거할 데가 있으니 감히 가볍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이를 제외하고 그 가운데 대단히 잘못되어 고치지 않을 수 없는 몇 가지를 조목별로 아래에 말씀드릴까 합니다. 그러나 막중한 종묘의 예는 신들이 감히 억측하여 단정하지 못하겠으니, 삼가 상의 재가를 기다리는 바입니다.
1. 선조 대왕 묘주(廟主)의 첫면에 ‘유명증시(有明贈諡)’라는 네 글자를 빠뜨린 채 쓰지 않고 묘호(廟號)를 위에 증시(贈諡)를 밑에 둔 것은 열성의 제식(題式)과 같지 않습니다. 이것은 초상(初喪) 때에 우제(虞祭)의 신주를 만들 당시 열성의 제식을 고찰하지 않고 그저 향실(香室)의 축문만 의거하여 썼기 때문에 나중에 연제(練祭)의 신주를 만들 적에도 다시 의심을 하지 않고 답습하여 써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 이상 모두 열성의 제식을 준수하여 쓰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2. 선조 대왕에게 추가로 올린 두 차례의 존호(尊號) 열 여섯 자 가운데 여덟 자는 대행(大行) 때 존시(尊諡)의 위에 썼고, 여덟 자는 존시의 아래에 썼는데, 삼가 살피건대 열성에게 올린 대행 때의 존시는 모두 하단에 쓰면서 모두 ‘모효대왕(某孝大王)’이라고 일컬었으니, 이것이 바로 구식(舊式)입니다. 이것은 필시 ‘계통(啓統)’ 등 여덟 자를 첫번째 추가로 올릴 적에는 구식을 상고하여 대행 때의 존시 위에 올려 썼는데 반해 ‘이모(貽謨)’ 등 여덟 자는 두 번째 추가로 올릴 적에 다시 구식을 상고하지 않고 대행 때의 존시 아래에다 붙여 쓴 것이니 너무나도 무리합니다. 이른바 추가로 올린 열 여섯 자는 모두 앞뒤의 순서대로 쓰되, 대행 때의 존시를 열성의 구식에 따라 하단에 써서 바로잡아 의당 ‘유명증시 소경 선조 정륜 입극 성덕 홍렬 지성 대의 격천 희운 계통 광헌 응도 융조 이모 수유 광휴 연경 현문 의무 성예 달효 대왕(有明贈諡昭敬宣祖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啓統光憲凝道隆祚貽謨垂裕廣休延慶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이라고 써야 옳을 듯합니다.
3. 의인 왕후의 전후 존호(尊號)와 대행 때의 존시를 쓴 것은 더욱 순서가 바뀌고 잘못되어 매우 근거가 없으니, 모두 올린 선후의 차서를 따르되 구식대로 바로잡아 의당 ‘장성 휘열 정헌 명덕 현숙 의인 왕후(章聖徽烈貞憲明德顯淑懿仁王后)’라고 해야 마땅할 듯합니다.
4. 축문에 ‘유명증시’라는 네 글자가 없고, 묘호(廟號)가 위에 증시(贈諡)가 아래에 있는데 이것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을 법도 합니다. 삼가 《오례의》의 입주식(立主式)과 축문식(祝文式)을 살펴보건대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나 축문은 바로 사왕(嗣王)이 축고(祝告)하는 말이니 ‘유명증시’라는 네 글자를 쓰지 않더라도 흠이 되지는 않을 듯합니다. 일단 네 글자를 쓰지 않았으면 묘호가 위에 있고 증시가 아래에 있는 것은 형세상 당연할 수도 있는데, 어쩌면 전에 의논하여 정해서 그런 것은 아니겠습니까. 예전대로 써도 실례되지는 않을 듯싶습니다.
5. 양위(兩位)164)                  의 신주를 만약 바로잡아 고쳐 쓰면 전에 지워 글자 모양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곳도 자연 미진하게 되는 걱정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12월 17일 경진

비국이 아뢰기를,
"국가에 일이 발생하면 군향(軍餉)을 모아들이는 조치가 있게 마련인데, 예전부터 곡물을 바친 사람들에게 한 번 가설직(加設職)165)  을 제수한 뒤로는 다시 거두어 임용하는 일이 없었으니, 그들이 실망한 것은 물론이고 국가가 사민(士民)에게 너무도 약속을 저버렸다 할 것입니다.
정묘 호란 때에 외방의 사자(士子)로서 미곡을 모아 서울에 실어 나르기도 하고 관창(官倉)에 납부한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그 당시 각사(各司)의 감생관(減省官)으로 제수하여 사은(謝恩)케 한 뒤 공사(供仕)하지 못하게 하면서 후일에 그 품계에 따라 임용하겠다고 허락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 복관(復官)되어 입조(立朝)한 자가 전혀 없었는데, 이것이 아무리 전조(銓曹)가 관(官)을 위해 인재를 가려 뽑으려는 뜻에서 연유된 것이라 하더라도, 곡식을 바친 허다한 사람 중에 어찌 백집사(百執事)에 합당한 자가 없기야 하겠습니까. 해조로 하여금 선발하여 상당한 실직(實職)을 제수토록 하여 권장하는 토대를 마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최명길(崔鳴吉)을 이조 판서로, 이상길(李尙吉)을 대사헌으로, 심지원(沈之源)을 집의로, 임광(任絖)을 장령으로, 이경증(李景曾)을 교리로 삼았다.

 

12월 18일 신사

간원이 아뢰기를,
"조정의 체면은 지극히 존엄하니 구구한 사정(私情) 때문에 천청(天聽)을 번독케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병조 참지 정홍명(鄭弘溟)은 법을 어기고 소를 올려 병든 누이를 만나겠다고 요구하였으니 외람스런 일에 해당합니다. 파직하고 급유(給由)의 명을 도로 거두소서. 그리고 해방 승지는 사체를 돌아보지 않고 격식에 어긋난 소를 봉입(捧入)하였으니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정홍명을 추고하라."
하였다.

 

민성휘(閔聖徽)가 치계하기를,
"금차(金差)가 안주(安州)에 남겨둔 물건은 지금 와서는 처리하기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만약 실어다 주어 규례를 만들면 사체를 손상시킬 뿐만 아니라 운반하는 폐단이 이로부터 시작될 것이니, 춘차(春差)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편의에 따라 전급(轉給)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는데, 묘당도 그렇게 여기니, 상이 따랐다.

 

12월 20일 계미

부제학 이경여(李敬輿)가 상소하여 본직을 체차하여 어미의 병을 간호하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22일 을유

비국이 아뢰기를,
"황해 감사 송영망(宋英望)은 전에 양호(兩湖)의 수사(水使)로 있을 때 사졸들의 마음을 깊이 얻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그를 발탁하여 방백(方伯)의 중임을 제수하여 서로(西路)의 번폐(藩蔽)가 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임한 초기부터 비난하는 말이 꽤 있었고, 또 듣건대 관사를 짓느라고 민력을 수고스럽게 허비하였으므로 도내의 인민이 많이들 원망하고 고달파하고 있으며, 전최(殿最)할 즈음에는 잘 다스린 수령들을 잇따라 폄하(貶下)하여 사람들이 더욱 따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시기에 맞지 않게 관사 건축을 한 일과 사리에 어긋나게 전최한 일 모두가 지극히 잘못되었으니, 그를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완풍 부원군(完豐府院君) 이서(李曙)가 차자를 올려 자강책(自强策)을 아뢰니, 상이 비국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이홍주(李弘冑)를 예조 판서로, 채유후(蔡𥙿後)·정태화(鄭太和)를 이조 좌랑으로, 장신(張紳)을 황해 감사로 삼았다.

 

12월 23일 병술

크게 바람이 불었다.

 

말을 탄 호인(胡人) 10여 인이 구연성(九連城)에서 나왔다고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이 조정에 계문(啓聞)하였는데, 서울이 소요스러워지며 짐을 싸들고 피난 준비를 하는 자도 있었다.

 

호조가 아뢰기를,
"일찍이 병오년부터 양호(兩湖) 각 고을에서 전세(田稅)로 내는 미두(米豆)를 덜어내어 내수사에 바로 납부하게 하였는데, 반정(反正) 초에 양호에 선유(宣諭)하여 바로 납부하는 폐단을 혁파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무진년에 내사(內司)가 선유한 본의를 체득하지 못한 채 본조에 이문(移文)하여 예전대로 납부하기를 독촉하였는데, 본조 역시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 외방에 행회(行會)하여 이 폐단이 혁파되었다가 얼마 안 가 다시 생기게 하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내년부터 호서의 전세만은 본조에 모두 납부하여 내사에 전송(轉送)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24일 정해

정충신(鄭忠信)·신경원(申景瑗)이 치계하기를,
"말탄 호인 10인이 한(汗)의 글을 가지고 강변에 왔습니다. 이는 대체로 소도리(所道里) 등이 돌아가기 이전에 호인 8인을 먼저 보냈으므로 한이 이미 우리 나라가 그의 청을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는 것을 안 데다가 별도로 회답사(回答使)를 보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글을 보내온 것입니다. 신들은 회답사가 이곳에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우선 저들에게 통역하는 사람을 보내어 오랑캐의 속셈을 탐색하려고 하는데 묘당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한의 글을 보건대 그 의도를 헤아릴 수 없으니, 우선 변신(邊臣)으로 하여금 먼저 소역(小譯)을 보내 회답사를 들여 보냈다는 뜻을 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신득연(申得淵)은 이미 명을 받은 이상 저들이 저지하더라도 의당 성심껏 개유(開諭)하여 기필코 명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또 저들이 예물에 대한 말을 하더라도 우리는 ‘강도(江都)에서 맹약할 적에 원래 명나라와 똑같이 하겠다는 말은 없었다.’고 대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뜻으로 부찰사(副察使) 및 부원수·평안 병사에게 하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한의 글은 다음과 같다. "조선국의 변관(邊官)에게 유시하여 알린다. 너희 임금과 우리 나라가 맹약을 체결할 때에 예물은 명나라와 똑같이 하기로 허락했는데 나중에는 점점 줄여 박하게 했다. 그래서 이번에 사람을 보내 예단을 강설(講說)하게 했는데, 과연 간 사람의 말과 같게 하면 진입을 방해하지 않겠으나 만일 혹시라도 전날과 같게 한다면 올 필요가 없다. 오는 건 오더라도 우리 국경에는 들어오지 못할 것임을 특별히 알린다."】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40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510면
【분류】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 한국고전번역원

 

비국이 아뢰기를,
"경상 우병사        정봉수(鄭鳳壽)는 용골 산성(龍骨山城)에서 공을 이루어 서쪽 백성들에게 중히 여김을 받고 있는데, 지금 변방의 일이 염려스러우니, 정봉수를 서쪽 지방에 조용(調用)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일찍이 이준(李埈)의 상소에 따라 장재(將才)를 추천하여 발탁하라는 분부가 계셨는데, 현재 병사와 수사를 의망(擬望)하면서 늘 인재가 부족한 것이 걱정입니다. 한 시대에 꼭 인재가 없지는 않을텐데 단지 실효를 거둘 수 있도록 채용하는 방법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일찍이 2품 이상의 실직(實職)을 거친 사람들로 하여금 각기 아는 자를 천거토록 하되, 직질(職秩)의 고하나 문지(門地)의 귀천을 막론하고 되도록 인재를 얻게 한 뒤, 묘당으로 하여금 공론에 따라 마감(磨勘)하여 조용(調用)에 대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12월 25일 무자

좌의정 이정귀가 19차례나 정사(呈辭)하니, 상이 이에 윤허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듣건대 무사 중에 적개심을 품고 싸우기를 원하는 자가 많다고 하는데, 정예 군사를 선발하는 것은 현재의 첫째 가는 급무입니다. 유직(有職) 무직(無職)을 막론하고 각 아문의 군관이 자원하는 자들을 모집하도록 허락하여 한 부대를 편성하고 장수를 정해 통솔케 한 뒤, 만약 위급한 보고가 있으면 전쟁터에 내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어제 호서(胡書)를 보건대, 가령 그들의 본심이 공갈하여 세폐(歲幣)를 늘리는 데에만 있다면 회답사(回答使)의 행차가 끝내 저지당할 걱정은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저들의 의도가 만약 우호를 단절하는 데 있다면 그들이 요구한 수효를 모조리 들어 주더라도 필시 무익할 것입니다.
다만 회답사가 저곳에 도착하여 논리의 근거로 삼을 것은 용골대(龍骨大)가 써 준 수효 및 정익(鄭榏)이 지니고 온 한(汗)의 글 내용뿐인데, 지금 보낸 물건은 오히려 용골대가 말한 수효보다도 모자랍니다. 평안도로 하여금 목면(木棉) 5백 필을 더 보내 2천 필의 수효를 채우게 하고 국서(國書)의 내용도 그 수효를 고쳐 써서 보내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전창군(全昌君) 유정량(柳廷亮)이 남의 딸을 강탈하여 첩으로 삼았으므로, 간원이 관작을 삭탈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단지 먼저 파직시키고 나중에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간원이 이 일로 연계(連啓)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12월 26일 기축

해조에 명하여 상번(上番) 군사 가운데 옷차림이 허술한 자에게 유의(襦衣)를 나누어 주게 하고, 또 각처에 수직(守直)하는 군사와 옥(獄) 중에 있는 죄인들에게 빈 가마니를 나누어 주도록 하였으며, 이어 경미한 죄수들은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현재 적정(敵情)이 어느 모로 보나 걱정스럽습니다. 저들이 혹시라도 국력을 기울여 준동(蠢動)할 경우, 황 도독(黃都督)이 지금 여순구(旅順口)에 있으니 들은 즉시 출병(出兵)하여 빈틈을 이용해서 적의 소굴을 치게 하면, 저들이 필시 감히 오래 머무르지 못할 것입니다. 승문원으로 하여금 근래 오랑캐의 상황을 갖추어 가도(椵島)에 이자(移咨)하여 도독에게 전송(轉送)하게 하면 도움이 없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다시 사세(事勢)를 관망하며 처리하라."
하였다.

 

12월 27일 경인

이비(吏批)가 아뢰기를,
"태학(太學)은 모범이 되는 곳이며 교화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사장(師長)에 적임자를 얻어 선비들을 가르치고 도학(道學)을 강명(講明)하여 풍속을 크게 변화시키는 발판을 만드는 것이 오늘날의 급무입니다. 그래서 성상께서 즉위하신 이후에 특별히 사업(司業) 2원(員)과 겸사예(兼司藝)·겸직강(兼直講) 각 1원을 설치하신 그 의도가 분명히 있을 것인데 지금 모두 그 관직을 비워두고 쓰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당세에 학문을 좋아하며 선을 추구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구악(舊惡)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을까 염려됩니다. 이번 정사(政事)에서 엄선해 차출하여 대사성과 더불어 한 마음으로 교육하게 해야 옳을 것입니다. 다만 막중한 직임(職任)이라서 형세상 삼망(三望)을 갖추어 주의(注擬)하기가 어려우니, 박지계(朴知誡)의 단망(單望)에 의거하여 계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강학년(姜鶴年)을 성균관 사업으로, 채유후(蔡𥙿後)를 겸 직강으로, 홍서봉(洪瑞鳳)을 겸 홍문관 제학으로, 정홍명(鄭弘溟)을 부제학으로, 이민구(李敏求)를 대사성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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