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계사
가도(椵島)에 군량 수송선이 단절되어 군민(軍民)이 굶주림에 빠졌다. 이에 도사(都司) 하상진(夏尙進)이 식량 담당인 박추(朴簉)에게 긴급함을 고하여 비단으로 식량을 교환할 것을 애걸하므로, 비국(備局)이 1, 2천 석을 줄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1월 3일 을미
강계 부사(江界府使) 성하종(成夏宗)은 청렴 검소하고 자상한 자로서 임기가 차 갈리게 되었다. 부민(府民)이 2백 석의 쌀을 댓가로 바치고 1년을 더 유임시켜 줄 것을 애원하였는데, 본도에서 이 일을 아뢰니, 상이 유임을 허락하라고 명하였다.
1월 4일 병신
병조 판서 김시양(金時讓)이 체찰사(體察使)로 서변을 순찰하면서 본 병조에 일이 많아 오래 자리를 비워둘 수 없다고 본직의 체차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비국이 적상 산성(赤裳山城)을 수축할 것을 청하였는데 전 부사 이유경(李有慶)의 상소를 따른 것이다.
간원이 아뢰기를,
"침전을 숙위하는 관원은 여느 직책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때로는 음관(蔭官)으로 보임시키기도 하였으나 이름이 현저하게 드러난 자가 아니면 끼이지 못하였는데 근래에 낭관의 선임이 점점 용잡해졌습니다. 전조(銓曹)로 하여금 그 용잡한 자를 도태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5일 정유
태백성이 나타났다.
1월 6일 무술
이성구(李聖求)를 병조 판서로 삼았다. 대신이 처음에 직질이 해당되는 자를 의망에 넣었는데, 상이 특명으로 참판 중에서 더 의망하도록 하여 성구가 이조 참판에서 승급 제수되었다. 김시양을 형조 판서로, 정광성(鄭廣成)을 도승지로, 김수현(金壽賢)을 이조 참판으로, 강학년(姜鶴年)을 지평으로 삼았다.
1월 7일 기해
태백성이 나타났다.
1월 8일 경자
자인현(慈仁縣)의 사인(士人) 등이 상소하여 옛 고을을 복구해 줄 것을 청하니, 본도로 하여금 그 연혁 상황을 조사하여 올리게 하였다.
1월 9일 신축
사간(司諫) 김령(金坽)이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김령은 예안(禮安) 사람인데 그의 성품이 차분하고 지조가 있었으며 여러번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종신토록 영(嶺)을 넘지 않았다. 세칭 영남의 제일인이라 한다. 혹은 금상(今上)이 반정한 후로 벼슬한 적이 없다고도 한다.
체찰사 김시양이 전마(戰馬)와 전죽(箭竹)을 얻어 관서 군병 시재의 시상용으로 쓸 것을 청하니, 상이 태복마(太僕馬) 70 필을 지급하라 명하였다.
승지를 보내 영중추부사 이원익(李元翼)을 문안하였다. 원익이 이 때 금천(衿川) 선영하에 물러가 있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 87세였다. 상이 그를 염려하여 자주 문안하니, 사람들이 모두 영예롭게 여기었다.
부제학 유백증(兪伯曾)이 차자를 올리기를,
"병조 판서 이성구는 궁중의 연척으로 전일 이조 참판을 제수할 때에도 특명에서 나왔고 지금 또 다시 본직에 승진되었기에 물정이 모두 의심하고 있습니다. 김시양은 재지와 풍채가 있는 사람인데, 위급한 이날을 당하여 갑자기 병조의 장관에서 체직시키고 별로 특별하지도 못한 이성구로 대신하였으니, 전하의 이번 일이 사람들의 마음에 불만족이 없겠습니까? 대신의 천망이 8인이나 되는데, 그중에 적합한 사람이 어찌 없어서 더 천망하라는 분부를 하셨단 말입니까. 그리고 제수한 후 양사(兩司)에서 한 마디의 말도 없으니 신들은 몹시 한탄스럽습니다. 이는 예(例)에 따라 의망하여 낙점을 받은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니니 성덕에 누가 될까 염려됩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성명(性命)을 거두시어 대중의 의심을 풀어주고 지극히 공정한 도리를 보이소서."
하였으나, 답이 없었다. 이성구의 처는 바로 한준겸(韓浚謙)의 생질녀이다.
통영(統營)의 병선(兵船) 4척에 불이 나서 무기가 모두 소실되었다.
박지계(朴知誡)를 집의(執義)로, 박황(朴潢)을 사간(司諫)으로, 목장흠(睦長欽)을 함경 감사로, 이일상(李一相)을 검열(檢閱)로 삼았다.
1월 10일 임인
정언 김수익(金壽翼)이 아뢰기를,
"삼가 옥당의 차자를 보니, 신이 간관이 되어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은 과실이 실로 큽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자, 정언 정치화(鄭致和), 대사헌 이상길(李尙吉), 장령 신민일(申敏一)·오달승(吳達升), 지평 윤명은(尹鳴殷), 대사간 여이징(呂爾徵) 또한 잇따라 스스로를 탄핵하였다. 사간 박황이 아뢰기를,
"신이 어저께 옥당에 있으면서 이성구의 일을 논핵하여 차자를 올렸는데, 그 차자 내용의 시비는 물론하고 밤이 지나도록 답이 없었으니 이는 전에 없던 일입니다. 신같이 하찮은 자는 대각(臺閣)에 무릅쓰고 있을 수 없으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였다. 이에 대해 옥당이 처치하기를,
"양사(兩司)가 모두 피할 만한 혐의가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유백증의 마음은 행인도 아는 바인데, 너희들이 이처럼 비호하니 몹시 괴이한 일이다."
하였다. 사간 박황, 대사헌 이상길을 어명으로 불렀으나 나오지 않자 재차 피혐하니, 체직하였다.
1월 11일 계묘
상이 하교하기를,
"병조 판서 이성구를 체차하고 그 후임은 홍문관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천거하게 하라."
하니, 교리 민응형(閔應亨)이 상소하기를
"신이 외람되이 측근에 있으면서 망녕되게 차자를 올렸는데, 전하께서는 이에 대한 답은 없으시고 도리어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신을 체직시켜 망언한 죄를 다스리소서."
하고, 수찬 조빈(趙贇)은 상소하기를,
"이성구는 평소 사류(士類)로 자처하는 자이니 전하께서 어찌 이성구를 사인(私人)으로 보아 왔겠습니까. 이성구가 전하의 신임을 받은 지 몇 년만에 재상의 지위에 올랐으나 사람들 또한 어찌 이로써 전하를 의심하였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를 특별히 발탁하자 도리어 사람들이 말을 한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 성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처사입니다. 그러나 이미 말썽이 있었으니 만큼 대사마(大司馬)의 제수는 구차히 할 수 없다고 여기어 감히 차자를 올렸던 것인데, 오랫동안 하답하지 않고 계시다가 도리어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신을 삭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너희들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비국(備局)이, 윤조원(尹調元)으로 둔전사(屯田使)를 삼아 서로(西路)에 둔전을 설치하는 데 대한 방안을 의논하여 변방의 양정을 도울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윤조원은 광해조 때 벼슬이 감사에 이르렀으나 반정 후 쫓겨나 호서(湖西)로 물러가 살고 있었다. 그는 수재와 한재, 농사의 흉풍, 토질의 비옥함, 경작의 방법을 알기 때문에 이런 청이 있었다.
1월 12일 갑진
심지원(沈之源)을 응교로, 이경증(李景曾)을 부응교로 삼았다.
옥당이 차자를 올리기를,
"김시양과 이성구는 모두 당대 선비로서의 명망이 있었는데, 이성구는 참다운 문한으로 진출하고 김시양은 뛰어난 재예로 일컬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성구가 이 직을 수행함에 있어 반드시 김시양만 못할 바는 아니나, 생각건대 지금 군무가 번다한 때 일에 숙련된 김시양을 버리고 경험이 없는 이성구를 제수하였으니, 옥당의 제신들은 지나친 염려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나라를 위함이요 개인을 위함이 아니니, 설사 말하는 사이에 혹시 과격한 것이 있더라도 원래 다른 뜻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를 어찌 심하게 책망할 수 있겠습니까. 이성구에 대하여 지난 해에는 옥당을 관장하라는 하교가 있었고 금년에 또 병판(兵判)으로 천망하라는 하명이 있었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시고 전에 하신 말의 잘못을 자책하여 후세에 조롱거리를 남기지 않도록 하소서."
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튿날 양사(兩司)가, 옥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천망하라고 한 명을 취소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정원(政院)이 또 이 일을 아뢰어, 대신으로 하여금 전례에 의해 의논하여 천망하게 할 것을 청하자, 상이 허락하였다.
부제학 유백증(兪伯曾)이 글을 올려 사면을 청하니, 답하였다.
"병조 판서에 적합한 사람을 즉시 천망하지 않고 먼저 사직을 고하니 몹시 부당하다. 도로 내어주라."
1월 15일 정미
강석기(姜碩期)를 대사헌으로, 한인급(韓仁及)을 주청사(奏請使)로, 【 세자 책봉의 주청이다.】 김영조(金榮祖)를 부사(副使)로 삼았다.
무군사(撫軍司)의 모군 시재(募軍試才)에서 으뜸한 김덕룡(金德龍)에게 바로 전시(殿試)를 보도록 허락하였다.
1월 16일 무신
홍명구(洪命耉)를 좌부승지로, 이경여(李敬輿)를 전라 감사로 삼았다.
1월 17일 기유
내의원(內醫院)이 침의(鍼醫) 이형익(李馨益)에게 봉록을 주어 서울에 머물러 있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형익은 대흥(大興) 사람인데, 그 위인이 허탄하고 망녕되어 번침술(燔鍼術)로 병을 고친다고 말하니, 사람들이 많이 현혹되었다.
1월 18일 경술
강석기(姜碩期)를 예조 판서로, 이성구를 대사헌으로, 이홍주(李弘冑)를 병조 판서로 삼았다.
1월 20일 임자
대사헌 이성구가 피혐하기를,
"신이 성명의 시대를 만나 외람되게 발탁의 은혜를 입고서 한갓 왕도의 공평한 것만 믿었을 뿐, 치욕이 뒤따를 줄은 몰랐습니다. 해괴한 일이 한번 벌어지자 중인들의 책망이 일제히 일어나 겉으로는 찬양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억압하여 온갖 모독이 신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이처럼 쇠도 녹일 듯한 여세에는 뼈도 금방 녹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신이 그 무슨 마음과 무슨 면목으로 다시 조정의 반열에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그만둘 줄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또 엊그제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여 추고 중에 있는데, 어떻게 그대로 눌러 있겠습니까. 신을 파직하소서."
하였는데, 헌부가 처치하기를,
"불평스런 언사가 많았으니, 체차하라 명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대사간 여이징(呂爾徵)이 초방(椒房)001) 의 친족으로 혐의를 피하지 않았으니, 미원(薇垣)002) 의 장으로 있을 수 없습니다. 체차하라 명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1월 21일 계축
정광경(鄭光敬)을 대사헌으로 삼고, 특명으로 정백창(鄭百昌)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정백창과 여이징은 모두 초방의 친족이다. 지평 윤명은(尹鳴殷)이 여이징을 탄핵하자 상이 매우 화를 냈었는데, 이에 이르러 이 명이 있었다.
1월 22일 갑인
상이 이형익(李馨益)에게 침을 맞았다. 이때 상이 편찮은 지 오래였는데, 궁중에서는 저주를 입은 탈이라고 의심하였다. 이에 이르러 이형익을 불러 번침(燔鍼)을 맞았다.
1월 23일 을묘
달이 심성좌(心星座)의 큰 별을 범하였다.
춘추관이, 사관을 파견하여 향산(香山)의 《실록(實錄)》을 적상 산성(赤裳山城)으로 옮길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장령 오달승(吳達升), 지평 윤명은(尹鳴殷)이 아뢰기를,
"신들이 여이징을 논박한 것은 실로 조정 안에서 서로 규계하는 일이었습니다. 성상께서 즉시 긍정하는 대답을 내리시기에 신들은 모두 치우침이 없는 성상의 마음을 우러러 감복하였는데 그저께 있었던 정사에 정백창을 대간(大諫)으로 제수하라는 특명이 있었습니다. 정백창이 대간에 제수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만약 상례에 따라 제수하였다면 사람들의 의심이 없었을 듯도 합니다. 그런데 이번 성상의 특명이 여이징이 탄핵을 받은 그 다음날 내렸으니, 반드시 여이징과 동색의 사람으로 대체하여 대신(臺臣)을 꺾으려 한 것입니다. 신들이 편안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을 체직하소서."
하였다. 간원이 모두 출사시킬 것을 청하여 달승(達升) 등을 모두 패초(牌招)하였으나, 나오지 않았으므로 체직하였다.
1월 24일 병진
집의 박지계(朴知誡)가 소를 올려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이어 따스한 봄날을 기다려 상경하도록 명하였다. 박지계가 효우(孝友)의 행실은 있으나 학식이 밝지 못하여 추숭론(推崇論)을 힘써 주장하므로 사론(士論)이 그것을 흠으로 여기었다.
1월 25일 정사
심양(瀋陽)으로 회답(回答)하러 간 사신 신득연(申得淵)이 예물(禮物)을 전하지 못하고 호서(胡書)만 받아가지고 돌아와 치계하기를,
"소호(所胡) 등이 날마다 와 힐책하면서 군대를 지원하라, 배를 빌려 달라, 사신을 끊으라는 등 모욕하는 말이 갈수록 극심하였고 또 예물이 그의 마음에 차지 않는다 하여 끝내 받아주지 않기에 삼가 하나도 손상하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답한 국서(國書) 및 무역의 시장을 여는 데 대한 조약 문서와 새로 정한 물품의 건수를 모두 등서하여 보냅니다."
하니, 상이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였다. 【 신득연이 사명을 욕되게 하여 가지고 간 예물도 퇴각을 맞아 돌아와서는 하나도 손상하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왔다면서 도리어 자긍하는 기색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그 답서에 이르기를,
"내가 이번에 물건 수를 많이 정한 것은 탐하는 마음에서가 아니오. 다만 정성과 믿음으로 우호를 돈독히 하려는 것이었는데 정의가 점점 쇠하여 이익을 탐한다고 기만하니 실로 내 마음과는 다르오. 귀국이 명(明)나라에 바치는 것은 몹시 번다하고, 사신이 왕래할 때 기만과 탐색을 한없이 한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이것은 달게 받아들이면서 유독 우리 나라에 주는 사소한 물건에는 원망을 하오. 더구나 귀국이 준 물건은 본래 정으로 준 것이 아니며 또 우리가 요구한 것도 아니오. 이는 귀국이 까닭없이 명나라를 도와 우리 나라를 침범하였기에 하늘이 벌을 내려 준 것이니, 우리가 그 숫자를 정한 것이 실로 이 때문이오. 1년에 두 차례가 불가능하다면 한 차례로 하는 것도 좋겠으나 다만 예단과 교환하는 물건이 점점 적어지고 질이 나빠 심히 간과할 수 없었소. 만약에 우리의 말을 따라주지 않는다면 서로 왕래를 끊고 물건만 무역하는 것이 좋겠소.
또 앞서 소란이 있었던 것은 모두 귀국이 스스로 싸움의 단서를 야기하였기 때문이었소. 우리 나라의 도망한 백성들을 숨겨 두었다가 모문룡(毛文龍)에게 넘겨 주기에 나는 그것을 참을 수 없어서 정벌한 것이오. 귀국이 금은과 비단은 토산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남조와 끊임없이 무역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소. 귀국의 토산이 아니더라도 남조에 어찌 그 물품이 없겠소이까. 그전에는 남조를 도와 우리를 침략하였으니 지금 또한 우리를 도와 남조를 공격해야 할 것이오. 또 앞서 우리의 도망한 백성을 숨겼으니, 내가 지금 섬을 정벌하려 하니 또한 나에게 큰 배 3백여 척을 의주(義州)의 포구로 내다 빌려 주어야 할 것이오. 진실로 이와 같이 한다면 귀국의 마음이 명백히 드러날 것이오. 병선과 예물 이 두 건을 만약 모두 허락하지 않는다면 사신을 다시금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고, 만약 정한 수대로 따라 준다면 서로 왕래하게 하되, 사신으로 하여금 남조의 사신처럼 기만과 강탈을 하지 못하게 하겠소.
또 정묘년에 맹약한 뒤 일가의 아우를 친아우로 거짓 칭하였고, 우리가 송환한 관원을 죽이고도 저절로 죽었다 하였고, 그곳에서 돌려 보내야 할 관원도 다시 들여보내지 않는 등 우리를 기만한 일이 이와 같이 많기 때문에 내가 괴로워 하고 있는 것이오. 왕은 이를 생각하여 모든 일을 속히 정하여 돌려보내 두 나라로 하여금 함께 태평을 누리게 한다면 좋은 일이 아니겠소이까."
하고, 무역 시장을 여는 조약의 문서에는,
"금년 봄에 대시(大市)를 열게 되면 3월 1일 의주(義州)에서 무역을 해야 할 것이오. 그때 작년 가을의 대시에서 무역하지 못한 것을 무역해야 할 것이니, 왕은 어기지 마시오."
하였다. 【 새로 정한 수는 금(金) 1백 냥, 은(銀) 1천 냥, 잡색 면주(雜色綿紬) 1천 필, 백저포(白苧布)·세마포(細麻布) 각 1천 필, 잡색 세면포(雜色細綿布) 1만필, 표피(豹皮) 1백 장, 수달피(水獺皮) 4백 장, 궁각(弓角) 1백 부, 단목(丹木) 1백 근, 상화지(霜華紙) 2천 권, 잡색 채화문석(雜色彩花文席) 1백 장, 세룡석(細龍席) 1백 장, 호초(胡椒) 10두, 청서피(靑黍皮) 2백 장, 부도(副刀)·소도(小刀) 각 20병, 송라다(松羅茶) 2백 포였다.】
【태백산사고본】 28책 28권 3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512면
【분류】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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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관청(句管廳) 어선(漁船)이 서산(瑞山) 앞바다에 이르러 해적을 만나 모두 피살되고 한 사람만이 살아 해변으로 나와 관부에 알렸다. 이에 해적 김충열(金忠烈) 등을 뒤쫓아 체포하여 법에 의해 처단하였다.
1월 26일 무오
심지원(沈之源)을 집의로, 윤전(尹烇)·김휼(金霱)을 장령으로, 박지계(朴知誡)를 성균관 사업(成均館司業)으로, 김경여(金慶餘)를 지평으로 삼고, 고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의 시호를 문익(文翼)으로, 고 좌의정 김명원(金命元)의 시호를 충익(忠翼)으로, 고 이조 판서 이산보(李山甫)의 시호를 충간(忠簡)으로, 고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의 시호를 문절(文節)로, 고 판중추(判中樞) 서성(徐渻)의 시호를 충숙(忠肅)으로 내렸다.
1월 28일 경신
대사간 정백창(鄭百昌)이 재차 소를 올려 사직하자 다시 여이징(呂爾徵)으로 대신하고, 정온(鄭蘊)을 대사헌으로, 이민구(李敏求)를 이조 참의로, 윤구(尹坵)를 부교리로, 김수익(金壽翼)을 부수찬으로, 안시현(安時賢)을 정언으로 삼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호인(胡人)의 글에 차마 보지 못할 말이 많은데, 신득연(申得淵)은 일찍이 사리를 들어 물리치지 않았으니 사명을 받들고 나라를 욕되게 한 죄 이에 더 클 수 없습니다. 나국하여 그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비국의 신하들을 불러보고 묻기를,
"오랑캐의 동태가 염려되니 각각 소견을 진술하라."
하니, 김상용(金尙容)은 아뢰기를,
"저자를 열자는 말은 필시 우리의 것을 탈취하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하고, 윤방(尹昉)은 아뢰기를,
"오랑캐 땅에 기근이 자못 심합니다. 지금의 공갈은 필시 물화를 탐하는 뜻에서 나온 것 같으니, 우선 더 주기로 허락하는 것도 무방하겠습니다."
하고, 최명길(崔鳴吉)은 아뢰기를,
"이 오랑캐가 맹약을 어긴 것은 이미 답서에 드러났습니다. 이는 오직 그들의 한없는 욕심을 채우려는 것이니, 지금 만약 그들과 연관을 맺어 놓으면 혹 수년 동안은 무사하겠지만, 나중이 몹시 걱정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의 일은 결코 고식적으로 외교만 끊을 수 없다. 그들이 고집하는 말이 있으니 속히 사명에 능한 자를 택하여서 글을 주어 들여보내라. 그 글의 내용은 ‘앞서 정묘년에 하늘을 두고 맹세하여 두 나라가 함께 태평을 누리리라 바랐는데, 따르기 어려운 요청이 뜻밖에 갑자기 나오니, 너희들이 먼저 끊은 것이지 우리가 끊은 것은 아니다. 또 저자를 개설하는 일에 대해서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답서의 내용을 들은 후부터 모두 분개하여 한번 싸우고자 한다. 누가 너희들과 영리를 다투려고 하겠는가.’라는 뜻으로 꾸미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사신으로 적합한 자가 누구인가?"
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사신에 대해서는 물러가서 의논해야겠습니다."
하였다.
비국이, 김자점(金自點)으로 도원수(都元帥)를 삼아 어영군(御營軍)을 거느리고 관서(關西)로 출진할 것을 청하자, 상이 숙위(宿衛)의 허술함을 들어 허락하지 않았다.
1월 29일 신유
자산군(慈山郡) 청사(廳舍)를 자모 산성(慈母山城)으로 옮겼다. 앞서 평안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치계하여 산성의 형세를 자세히 설명하고 본군을 성중으로 옮길 것을 청하였다. 상이 이를 체찰사 김시양(金時讓)에게 문의한 결과 시양 역시 군청을 옮기는 것이 편리하다고 말하니,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국가가 오랑캐와 적당히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백성을 위한 계책입니다. 지금 이리같이 한없는 욕심을 부려 온갖 방법으로 구색하여, 두 차례 보낸 물건이 모두 퇴박을 맞았으며, 우리에게 폐백을 더 내라고 협박하였는데, 그 수량이 10배 정도가 아니어서 전국의 재력을 다하여도 그 욕심을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글을 보내 이를 데 없이 업신여기고 무례하였으니, 그 하나는 중국의 사신처럼 대접해 달라는 것이며 또 하나는 군사를 빌려 주고 전함을 지원해 달라는 것으로 정말 신자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대의와 관계되어 다른 일은 돌아볼 겨를이 없기 때문에 성상께서 드디어 큰 계책을 정하여 사람을 보내 힐책하고 절교를 고하였습니다. 만약 이 오랑캐가 조금이라도 사람의 마음이 있어서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을 알아 자세를 낮추었더라면 오히려 스스로 새롭게 노력함을 인정해 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짐승같은 성질을 가진 저들에게 의리로 책망할 수 없게 되고 보니, 변방의 싸움이 이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수천 리 지역에다 인민도 매우 많고, 조종의 은택이 몸에 배어 있으니, 진실로 각각 충의를 가다듬어 나라와 함께 그 원수에 대항한다면 이 적을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문신으로 하여금 이 뜻을 왕의 말씀으로 대신 엮어서 팔도에 효유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그 교서(敎書)는 다음과 같다.
"국가가 불행하여 강한 오랑캐와 가까운 이웃을 삼았다. 그들은 오로지 속임수와 폭력을 능사로 삼아 천지 순역(天地順逆)의 자연 도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있어서 인도(人道)로 책망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즉위한 이래 일찍이 한 차례 사개(使介)도 왕래시키지 않았다. 그러자 정묘년 봄에 그들 적이 군사를 일으켜 우리 나라 변방에 기습하였다. 뜻밖에 발생한 일이어서 열진(列鎭)이 와해되어 1순 내에 갑자기 문정까지 박도하였다. 이에 나는 종사와 생령의 대계를 생각하고 잠시 관계를 맺기로 허용하여 화를 늦추는 소지로 삼았다. 그런데 지금 노적(虜賊)이 이리처럼 한없는 욕심을 품고 온갖 방법으로 구색하다 우리가 보낸 폐물을 되돌려 보내면서 우리에게 폐물을 더 내라고 협박하였다. 심지어는 글을 보내 업신여기고 방자하여 무례하기 그지없었다. 그 첫째는 중국의 사신처럼 대접해 달라는 것이며, 둘째는 배를 빌려 주고 군사를 지원해 달라는 것이었으니, 이는 신자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대의에 관계되어 다른 일은 돌아볼 겨를이 없는 것이기에 사람을 보내 절교를 고하고 맹약을 어긴 데 대해 힐책하였다. 그러나 짐승같은 마음이라 끝내 의리로 회유할 수 없으니 변방의 싸움이 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불쌍한 우리 백성들은 여러 차례의 변란을 겪고 수재와 한재에 기근까지 겹쳤으니 1년 간이라도 휴식한 적이 있었는가. 말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매우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조종이 백성을 기른 은택이 살과 뼈에 배어서 수족이 머리를 보호하는 듯한 그 정성이 본성에서 우러나고 있다. 진실로 각각 충의를 가다듬어 상하가 함께 원수에 대항한다면 천리의 강토로 남을 두려워할 것이 있겠는가. 이 뜻을 잘 알아 두었다가 후일의 하명을 기다리라."
전 병사(兵使) 문희성(文希聖)을 남한 산성 별장(南漢山城別將)으로 삼았는데,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의 말을 따른 것이다.
비국이 아뢰기를,
"서관(西關)이 믿는 것은 오직 안주성(安州城) 하나뿐인데, 현재의 군량으로는 겨우 두어 달이나 지탱할 수 있습니다. 향신(餉臣)으로 하여금 1만 병력이 4개월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식을 마련하여 속히 운반하되, 2월 그믐전까지 수송한 후 계문하게 하고, 청천강 이북의 산성에도 5, 6개월 동안의 양식을 수송하여 군량이 떨어지는 걱정에 대비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였다.
"각처의 군량을 미처 실어들이지 못하면 군량을 담당한 신하는 군율을 면하기 어렵다. 이 뜻을 아울러 회유하라."
비국이 훈련 도감과 군기시의 궁시와 화약을 서로로 수송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신료들 가운데 장수의 직임을 맡을 만한 자는 김자점(金自點)을 능가할 사람이 없습니다. 비록 소관은 있으나 서로는 외침을 받는 곳이라 더욱 긴중하니, 주저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비국이 아뢰기를,
"군사를 일으키는 날에는 군량이 시급합니다. 서울은 사대부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3등급으로 나누어 쌀을 내게 하되, 상호는 5두, 중호는 3두, 하호는 1두로 정하여 한성부가 이를 주관하고, 양서(兩西)는 1결당 쌀 3두씩 거두어 본도의 군량으로 삼되 관향사(管餉使)가 이를 주관하게 하고, 기타 6도는 1결당 쌀 2두씩 거두게 하고, 함경도는 각각 본읍에 유치하였다가 불시의 용도에 대비하게 하소서. 그리고 5도는 각각 편리 여부를 참작하여 수로와의 거리가 2일 길 이상인 곳은 선창에다 유치하여 수송에 편리하게 하고, 산군(山郡)으로 수로와의 거리가 가장 먼 곳은 연로에 나누어 주어 서로로 가는 군사들에게 주는 식량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서울에서 거두는 양이 과다하니 다시 참작하여 조처하라."
하였다.
선전관(宣傳官)을 보내 삼남의 감사 및 수사에게 하유하여 주사(舟師)를 뽑아 보내 강도(江都)로 모이게 하였는데 공청·전라도는 수사가 친히 거느리고, 경상도는 우후(虞候)가 대신 거느렸다. 배 안에는 각각 두어 달의 양식을 싣고 그 후의 양식은 본도로 하여금 계속 공급하게 하였다.
김대건(金大乾)을 오랑캐에게 보낼 회답사(回答使)로 차임하였는데 비국이 천거하였다.
1월 30일 임술
임경업(林慶業)을 청북 방어사(淸北防禦使)로 삼았다. 이때 비국이 아뢰기를,
"병사가 안주(安州)로 들어가 지키게 되면 청북의 여러 성은 통솔할 사람이 없습니다. 임경업이 오랫동안 청북에 있어 명성과 성적이 현저하니, 방어사로 차임하여 항상 산성을 단속하게 하고, 난이 있을 때는 강변의 정예를 거느리고 안주의 후원이 되게 함이 형편에 맞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서울의 백성들을 염려하시어, 쌀을 너무 많이 거둔다고 분부하시니, 그 뜻이 매우 훌륭합니다. 그러나 이는 군량의 막중한 일이니 누가 감히 원망하고 괴로워하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한성부로 하여금 상·중·하로 등급을 나눌 때에 헤아리고 살피어 잘 처리하게 하면 민폐가 없을 것입니다. 또 개성부도 이 예에 따라 거두어 들이되, 현재 변방의 방어에 나가 있는 자에게는 특별히 견감해 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경외의 군병은 변방의 방어에 나가 있든지 안 나가 있든지 간에 모두 거두어 들이지 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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