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8권, 인조 11년 1633년 2월

싸라리리 2025. 12. 30.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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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계해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가 저탄진(猪灘津) 가에 성을 쌓아 군량과 병기를 저장하여 서울의 울타리로 삼을 것을 청하니, 상이 일렀다.
"이 일은 목이 마르자 샘을 파는 일과 다름이 없으니, 서서히 의논하여 처리하라."

 

비국이 아뢰기를,
"회답사(回答使)가 내일 떠납니다. 국가의 안위가 이번 사행에서 판가름이 날 것이므로 관계된 바가 몹시 중대합니다. 저 호인(胡人)의 바라는 바는 오로지 예단에 있는데, 국서(國書)에서 엄격한 말로 거절한 데다 사신이 또 모른다고 대답하면 짐승같이 난폭한 그들이 갑자기 성이 나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올 것은 필연적인 사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겐 믿는 것도 없이 경솔히 호랑이나 이리의 노기를 촉발한 격이니 위태하다 하겠습니다. 또 회답사라 칭할 뿐 전혀 사태에 대해 생각해 본 일이 없으니 가진 것이라곤 외교를 끊자는 한 장의 문서뿐입니다. 속으로는 관계를 맺으려고 하면서 오로지 쌀쌀한 기색을 보여 화를 재촉한다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박난영(朴蘭英)이 비록 오랑캐에게 중시되지는 못하였으나 정분과 얼굴이 서로 익어 접촉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니 박난영으로 하여금 이 글을 가지고 가 우리 나라 사세의 어려움과 우호를 맺자는 뜻을 자세히 말하게 하여, 적이 만약 이로 인하여 생각을 고치면 오히려 후일을 기대할 여지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
하니, 답하기를,
"오랑캐의 본심이 이미 드러났는데도 경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그들이 갑자기 성을 내지나 않을까 염려하고 있구나. 어떻게 조처해야만 오랑캐가 성내지 않고 국가가 태평하겠는가? 또 박난영은 나라를 욕되게 하여 벌을 받은 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이번에 그를 다시 들여보낸다는 것은 타당한 일이 아닌 듯하다."
하였다.

 

2월 2일 갑자

회답사        김대건(金大乾)이 떠났다. 그 국서는 다음과 같다.
"우리 두 나라가 형제의 우의를 맺고 봄가을로 빈번히 사신을 왕래시키면서 5, 6년 동안 조그마한 불화도 없었소. 다만 봄가을로 무역 시장을 열 때 귀국의 상인이 공평한 값으로 무역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상인들이 다투어 도피하였을 뿐이었소. 나는 두 나라 사이의 불화가 여기에서 생길까 매우 염려하여 사신이 올 때마다 누누이 설명하였으니, 또한 귀국이 아는 바일 것이오. 지난해 가을 정익(鄭榏)이 돌아오는 편에 귀국의 글을 받은 바, 고아차(庫兒叉)가 결정한 예물을 들어 말하였소. 우리 나라 군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해마다 바치는 예물은 따로 정해진 규례가 있는데, 지금 까닭없이 증가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기에, 내가 이르기를 ‘연전에 보낸 예물은 실로 약소하였던 것 같다. 이는 나라가 가난한 소치이기는 하나 마음에 몹시 미안하다. 재력을 헤아려 예물 수를 더하는 것도 불가하지 않다.’고 하였소. 지난해 가을 박난영이 갈 때에는 마침 큰 환을 당하여 갖추어 보내지는 못하였으나, 나의 마음에는 이만하면 되겠다고 여기었소. 그런데 귀국은 이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갑자기 쌀쌀한 기색을 보여 사신이 면접하지 못하는가 하면 국서에 대한 회답도 없기에 나는 너무도 괴이하게 생각하였소.
지난 겨울에 귀국의 차사가 국서도 없이 여정[一路]에서 예를 요구한 것이 자못 전일과 달랐고, 그가 말한 예물도 고아차(庫兒叉)가 말한 것보다 몇 배나 되었소. 그래서 이는 필시 귀국의 본심이 아닐 것으로 나는 생각하였으나, 이웃 나라의 사신인데다 또 귀국의 대장(大將)이기에 병을 참고 접견하고 더욱 예우해 보냈는가 하면 사신에게 예물을 주어 회답하면서 본토의 소산이 아닌 것 이외에는 대략 고아차가 말한 품목의 수량을 채워서 보냈으니, 우리 나라가 귀국을 대접하는 데 성의를 다했다 할 만하오. 귀국은 이처럼 구구한 뜻을 헤아리지 않고 또 따르기 어려운 요청을 하니 이것이 어찌 처음에 맹약한 본의라고 하겠소이까. 남에게 의리상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강요하고 힘에 닿지 않는 일을 하라고 요구하면서 자기에게 다른 마음이 없다고 하면 그 누가 믿겠소이까. 무역을 열기 어려운 데 대해서는 전에 이미 여러 차례 말하였는데, 더구나 오늘날은 사신의 왕래를 허락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서로 무역하게 하자니 어찌 이런 도리가 있겠소. 귀국의 진의를 알 만하니, 우리 나라 상인이 거기에 가려고 할 자가 있겠소. 귀국이 한 차례 헛된 걸음을 면치 못할까 염려되오. 이에 사신을 보내 거듭 나의 뜻을 알려드리는 것은 선뜻 생각을 바꾸어 주었으면 하는 기대가 있어서이오."

 

비국이 아뢰기를,
"파직된 무신들을 특별히 서용하여 위급할 때에 조용(調用)할 밑천으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3일 을축

대사간 여이징(呂爾徵)이 상소하기를,
"지난번 유신(儒臣)의 차자에 사리에 가깝지 않는 말을 하여 성상을 의심하게 하였으니 너무나 무지한 짓이었습니다. 신이 이때 언관에 있었는데, 또 형적의 혐의로 양사(兩司)에 이의를 제기하였다면 물의를 배격하고 공의를 무시한 짓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연소배들이 신의 본의는 모르고 갑자기 추한 욕을 하면서 마치 알력이나 벌이는 자처럼 하고 있으니 이상한 일입니다. 모욕을 당한 사람이 어떻게 다시 언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사심 없으신 성덕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면직해 주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여이징이 헌부(憲府)의 상소 중에 자기의 이름이 거론된 것에 분개하여 대관(臺官)을 지적해 연소배라 지목하였는데, 이는 대개 윤명은(尹鳴殷)을 말한 것이다.

 

예조 참의 이준(李埈)이 상소하기를,
"삼가 살피건대, 옥체가 편치 못하심은 상중(喪中)에 피로가 쌓인 나머지 원기를 잃은 데에서 온 것입니다. 비장(脾臟)을 보하는 약을 많이 복용하되 성급한 효과를 기대하지 말고 오랫동안 조섭하면 자연 회복될 것입니다. 또 생각건대, 양생의 방법은 먼저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하고 섭양의 방법은 희로(喜怒)의 감정을 절제하여야 됩니다. 대개 마음 속에 지키는 것이 있으면 외부의 사기가 들어오지 못하고 희로를 절제하면 기운이 화평하여 병이 나지 않습니다. 모든 언어나 동작에서 그 마음을 너그럽게 하고 그 기운을 고르게 하여 번거로운 생각이 병과 서로 싸우거나 희로의 발단이 원기를 해치지 않게 하면 번거로이 약을 복용하지 않아도 병이 날로 감소될 것입니다.
신이 엊그제 본 바로는 성상께서 일을 처리하시는 사이에 더러 한두 차례 조섭을 잃은 적이 있었습니다. 옥당(玉堂)의 차자가 그 말이 지나쳤다 하더라도 성상의 넓은 도량으로 의당 이를 포용하여야 할 것인데, 마음을 공평히 가지거나 사리가 어떤가를 살펴보지 못하고 노기 찬 모습으로 대하여 군부의 지존으로 정사를 말하는 수삼 신하들과 승부나 겨루는 것처럼 하셨으니 허명하신 성심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일용 행사간에 간혹 충격으로 인해 심기가 동요할 때마다 허화(虛火)가 올라 사려가 어지러워지면 경계(驚悸)의 증세가 따릅니다. 이렇게 되면 비록 좋은 약이 있어도 쉽게 효력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주자(朱子)의 말씀에 ‘병중에는 모든 일을 제쳐놓고 오로지 마음을 안정하고 기운을 기르는 데에만 힘써야 한다.’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병을 치료하는 요법은 조리가 으뜸이고 약물은 그 다음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저주란 말세에 와서 나온 것으로 인심이 지극히 사악하여 이러한 일이 있긴 합니다마는 상제(上帝)가 몹시 밝으시어 내려다 보고 계십니다. 옛날의 양의(良醫)가 이러한 의론을 하였기 때문에 그 치료의 방법 또한 의서에 적어 놓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사수(邪祟)란 것은 호매(狐魅)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지 후세에서 말한 바 썩은 뼈가 작용하여 괴변을 부린다는 것은 아닙니다. 마땅히 여러 의원의 말에 따라 한결같이 원기를 보익하는 것을 위주로 하소서.
또 약성이 좋은 것을 신중히 가려서 복용하고, 약성이 강하고 급하여 기빠지는 약을 써서 원기를 손상하지 마소서. 침을 맞을 때에는 심기가 반드시 동요하는데, 심기가 동요하면 화(火)가 상승하고 이어 풍사(風邪)가 덮치게 마련이니, 자주 침을 맞아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신이 감히 선유 및 의원들에게 들은 바로 자세히 말씀드립니다."
하였다. 상이 너그럽게 답하였으나, 그대로 시행하지는 못하였다.

 

김류(金瑬)를 좌의정으로, 정홍명(鄭弘溟)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김류는 추숭론(追崇論)에 힘써 반대하다가 상의 뜻을 거스려 병으로 사면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다시 정승으로 들어갔다.

 

2월 4일 병인

황해 감사 장신(張紳)이 치계하기를,
"정묘년 변란 이후로 세 역(驛)의 괴로움이 다른 도에 비해 배나 됩니다. 일정한 지대(支待) 외에 또 심양 사신(瀋陽使臣)의 행차가 있어 왕래의 역사를 한 번 치르고 나면 말은 모두 병들어 죽어 말을 세내는 숱한 삯까지도 전부 빈한한 역졸들에게 책임지우고 있으니 역로(驛路)가 날로 잔패해지는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조차도 없습니다. 유래한 규례를 갑자기 다 고칠 수는 없겠으나 본도로부터 개성부에 이르러 역참을 교체하면 경성으로 바로 연결되는 것보다 노고가 절반은 감소됩니다. 해조로 하여금 착실히 변통하여 잔폐한 역참의 폐단을 제거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정원이 아뢰기를,
"인구를 따져 쌀을 거두는 일은 실로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므로 지금에 와서 정지할 수 없습니다. 다만 등급을 나누어 수량을 정할 즈음에 경외의 민가는 필시 간활한 자가 조종하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전결을 따져 곡식을 내는 것은 본디 공통된 규례이니, 외방은 면세와 복호를 막론하고 전결에 따라 알맞게 받아들이게 하소서."
하니, 그 일이 비국에 하달되었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삼가 정원의 계사(啓辭)를 보니 전결에 알맞게 쌀을 받아들이자고 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신들의 처음 뜻이었으나, 사세상 불편한 바가 있어서 끝내 시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탁지(度支)의 관리에게 물으니 8도의 전결이 모두 53만여 결인데, 전국의 속오군(束伍軍)은 이미 9만 70여 인에 이르렀으며, 이 밖에도 출신(出身) 및 무학(武學) 잡색 군병의 수 또한 4만, 5만에 밑돌지 않습니다. 결부의 다소가 사람마다 다르지만 요컨대 감소된 것은 절반이 넘습니다. 자고로 군사를 일으킬 때 구전(口錢)을 받아들이는 법이 있었는데, 사람이 있으면 역무가 부여되는 것은 역시 당(唐)나라의 제도입니다. 빈부의 차등이 되와 말 사이에 불과하므로 경외에 세금 받아들이는 책임을 하리(下吏)에게 전임시키지 않는다면 농간을 부리는 폐단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므로 신들은 인구를 따져 받아들이는 것이 편리하다고 여깁니다. 다만 근신의 아뢴 바가 소견이 없지 않으므로 감히 성상의 분부를 기다리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감축해 정한 수가 또한 적지 않고 인구를 따져 쌀을 거두는 일은 불편함이 많으니, 전결에 따라 수봉하라."
하였다.

 

2월 6일 무진

태백성이 보였다.

 

체찰사 김시양(金時讓)을 4도 도원수(四道都元帥)로 전임하였다. 이때 변방 일이 다급한데도 원수로 삼을 만한 사람을 오랫동안 얻지 못하였다. 상이 비국으로 하여금 빨리 의논을 거쳐 추천하게 하자 이에 비국이 김시양을 원수로 전임시키고 그대로 그 무리를 통솔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최명길(崔鳴吉)이 상소하여 관계를 맺는 데 대한 계책을 진달하였으나 답이 없었다. 이에 앞서 상이 군신들과 국교를 끊는 데 대해 의논할 때 제신들이 감히 어기지 못하고 네네 하면서 물러났는데, 사신이 출발하려고 하자, 사람마다 걱정하면서도 말하는 자가 없었다. 이에 원한을 사 화를 재촉하는 것이 올바른 계책이 아니라는 것을 최명길이 혼자서 상소하여 진술하였으나 살피지 않았다.

 

2월 7일 기사

김광현(金光炫)을 대사간으로, 강학년(姜鶴年)을 사업(司業)으로, 정뇌경(鄭雷卿)을 지평으로, 민응형(閔應亨)을 교리로 삼았다.

 

2월 8일 경오

체찰사 김시양이 북도의 병마를 조발하여 근지에다 집결해 놓고 변란에 대비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신득연(申得淵)이 상소하여 오랑캐의 정세에 대해 진술하니, 상이 하교하였다.
"신득연이 가지고 간 예물을 전달하지 못하고, 오랑캐의 답서 가운데 패만스러운 말도 설득하여 고치지 못하였으니 임금이 부여한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엊그제 그를 파직만 한 것은 그의 노고를 생각하여서지, 그의 죄가 가벼워서가 아니다. 그러니 신득연으로서는 움추리고 두려워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터인데, 감히 태연히 소를 올려 이해를 논하고 또 속히 처리하기를 청하니 몹시 해괴한 일이다. 이를 다스리지 않으면 의리가 어둡고 막히게 되어 나라꼴이 제대로 안 될 것이니 우선 추고하여 그 외람된 죄를 다스리라. 그리고 이 상소를 되돌려 주라."

 

2월 9일 신미

간원이 아뢰기를,
"변방이 위급한 이 때를 당하여 군신 상하가 정성을 다하여 사심을 잊고 다 함께 당면한 어려움을 구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신경유(申景𥙿)는 원수 중군(元帥中軍)으로서 조석간에 서로로 내려가야 할 것인데, 전관(銓官)은 직급도 따지지 않고 남쪽 지방의 편안한 고을로 낮추어 제수하였으니 그 사심을 따른 죄 큽니다. 이조의 당상·낭청을 중죄로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강도(江都)의 목장 말을 다른 섬으로 옮기고 그곳을 피난간 백성들의 정착지로 삼을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상방검(尙方釰)과 내구마(內廐馬)를 도원수 김시양에게 하사하였다.

 

2월 10일 임신

헌부가 원수부(元帥府)의 무사로서 서도로 내려 간 후에 체직된 자에게 해조로 하여금 녹을 주게 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2월 11일 계유

태백성이 보이고 낮에 사방이 어두웠다.

 

상이 비국에 하교하여 김시양 등을 엄책하게 하고 이윽고 하옥하였다. 앞서 회답사(回答使) 김대건(金大乾)이 강을 건너려 할 때 도원수 김시양·부원수 정충신(鄭忠信)이 사사로이 사람을 보내 김대건을 의주에 머물러 있게 하고 즉시 연명하여 상소하기를,
"옛사람이 이른바 갑주를 입은 용사라는 것은 싸우자고 말할 뿐이지 강화에 대해서 혀를 놀릴 수 없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노추(奴酋)의 공갈이 비록 흉패하기 그지없으나, 소호(所胡)가 말한 수량에 따라 받고자 함이 그의 본심입니다. 그가 말한 배를 빌려주고 군사를 지원해 주라는 것은 가설적으로 이 말을 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어려운 일을 사양하고 쉬운 일을 하게 하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신득연과 말할 때 무엇 때문에 ‘이 수량에 따르고자 하면 예단을 유치하였다가 추후 갖추어 오라.’고 하였겠습니까. 지금 죄상을 들어 국교를 끊는 것이 성패를 생각하지 않고 차라리 나라와 함께 죽겠다고 하신 것이라면 신 등이 진실로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겠습니다만, 만약에 짐짓 국교를 끊는다는 뜻을 보여 그들로 하여금 두렵게 하여 따르게 하는 것이라면, 이 오랑캐는 너무 교활하므로 반드시 이 말에 동요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라를 꾀하는 방법으로 볼 때 이처럼 위험한 계책을 써야 하겠습니까. 현재 서로의 군량은 2만 명의 병사가 반 년 동안 먹을 것도 안 됩니다. 가사 오랑캐가 맹약을 어기었다고 큰소리치며 올듯 말듯 하다가 우리의 군사가 나태해지고 군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계속 밀고 들어온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대응할 것입니까. 일국에 소요가 일어나 농부가 호미를 버리면 식량이 없어 저절로 무너지는 화가 이르고야 말 것이므로 설사 오랑캐가 들어와 섬멸된다 하더라도 국세는 지탱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전일의 차자는 환란이 오기 전에 대비하자는 뜻이었는데, 오늘날 국서의 내용은 그들을 성내게 하여 화를 재촉하는 일뿐이니 신은 위태롭게 생각합니다. 김대건이 소지한 국서의 말을 약간 고쳐 잘 꾸미되 토산이 아닌 황금 이외의 것은 그들의 뜻을 따라 주어 잠시 그들의 회답을 본 후에 국교를 끊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에 송(宋)의 세력은 크고 요(遼)의 세력은 약하였으나, 오히려 폐백을 증가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한기(韓琦)·부필(富弼)이 사신을 보내 그들의 빙문에 답례하자는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고 국가가 그에 힘입어 편안하여 후세에도 그것을 그르다 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오늘날의 일이야 말할 게 있겠습니까. 우선 이해 관계로 말한다 하더라도 한 해 동안 군사를 부리는 비용이 어찌 수년간 내는 예단만 되겠습니까. 신득연이 나온 이후로 서로의 백성이 앞을 다투어 호구대로 베를 내어 1만 필의 숫자를 채우겠다 원하고 있으니, 민정 또한 가긍합니다. 그래서 신들이 잠시 김대건을 의주에 머물러 있게 하여 다시 조정의 분부를 기다리게 하였습니다만 임의로 사신을 머물러 있게 한 죄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이는 외직을 맡은 신하로서 감히 논의할 바 아니나, 국가의 안위가 경각에 달린 이 때를 당하여 어찌 마음에 소견이 있는데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세상의 일을 마음에 통쾌하게 하면 후회가 따르게 마련인데, 다른 일은 후회할 수 있지만 이 일은 후회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비국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이에 비국이 아뢰기를,
"처음 신 등의 생각은 오랑캐의 계책이 폐물을 올려 달라는 데에 있는 것 같았기 때문에 대략 알맞게 줄여 1년에 보낼 폐물의 값을 계산해 보니 약 3만, 4만 필 정도면 가능할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국서(國書)를 작성하여 보낸 후에 중의가 모두 우리에게 믿을 만한 형세도 없는데 먼저 국교를 끊는다는 뜻을 보여 강한 오랑캐를 건드려서는 안 되며 그들이 갑자기 싸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하기 때문에 신들이 감히 다시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김시양 등은 몸소 행군에 있으면서 방비가 형편없음을 목격하였기 때문에 그 말이 더욱 간절한 것입니다. 김대건이 가지고 가는 국서를 약간 고쳐 여유를 두게 함이 아마 사기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장수의 도리는 의당 사졸을 격려하여 오직 적을 막아내는 데 최선을 다하지 못할까 염려하여야 할 것인데, 제 마음대로 사신을 머물러 있게 하고는 연명 상소하여 감히 관계를 맺으려는 계책을 청하기까지 하니, 장수는 화의를 말하지 않는다는 대의에 어긋납니다. 아울러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크게 노하여 하교하기를,
"오랑캐의 국서 중 협박한 세 가지의 일은 우리를 모욕함이 극심하다. 만약 사리를 들어 개유하지 않고 두려워서 허락한다면, 대의는 중국 사신처럼 접대하는 예에서 훼손되고, 민력은 해마다 폐물을 증가하는 일에 고갈될 것이다. 지금 사리에 맞게 처리하면 훗날의 일 또한 이로 인하여 유익할 것도 같기에 감히 졸렬한 생각으로 상의하여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후 인정이 크게 변하여 무신은 춥지도 않은데 떨고 문관은 천장을 쳐다보고 슬퍼하며 황황히 날을 보내면서 군상에게 허물을 돌리니, 과인은 국사를 어찌 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았다. 대개 이 일은 관계된 바가 매우 중대한 것이어서 내 한 사람이 스스로 결단할 바 아니므로 의논에 따라 시행하겠다. 또 장수로서의 도리는 감히 강화를 말할 수 없는 것인데, 김시양 등이 제 마음대로 사신을 머물러 있게 하고 조정을 지휘하려 드니 이는 전일에 없었던 일이다. 만약 이를 참수하여 대중을 경계하지 않는다면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킬 수 없을 것이니, 김시양 등을 효시해야 할 것인지의 여부를 속히 의논해 아뢰라."
하였다. 이에 삼공(三公)이 대궐에 나와 대죄하였으나, 상의 노여움이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비국이 복계(覆啓)하기를,
"삼가 성지(聖旨)를 받아 보니, 그 사의(辭義)가 엄중하여 오랑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만합니다. 그럼에도 신들이 성모(聖謨)를 찬양하지 못하니 그 죄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회답 행차를 재촉하여 상호(商胡)가 출발하기 전에 도착하게 하는 일 뿐이니, 이 뜻으로 관찰사에게 하유해야겠습니다. 또 김시양 등은 매우 크게 죄를 지었으므로 목을 베어 대중에게 보이며 경계하여도 불가할 것은 없겠으나 다만 싸움터에서 군율을 어긴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니니 우선 잡아다 국문한 다음에 그 죄를 규정하소서. 정충신은 전쟁하는 장수의 신분으로서 목숨을 버려 순국할 의리는 생각하지 않고 감히 이 소를 올렸으니 그 죄가 더욱 중합니다. 잡아온 후 경중을 가려 처단하고 그 두 원수(元帥)의 대임을 바로 차출하여 보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이 오랑캐가 우리 나라를 유린할 계책을 전일에 결정하였다 하더라도 지금 만약 그들이 나온다면 사람마다 우리 스스로 불화를 만들었다고 하면서 군상에게 허물을 돌릴 것이니 이것이 첫째 불행이다. 사람마다 위태롭게 여기면서 조금도 주먹을 불끈 쥐며 분개하는 뜻이 없으니, 막기 어려운 것이 인정이지만 인정이 이와 같으니 이것이 둘째 불행이다. 이 두 가지의 불행을 안고 억지로 행하려 하니 실로 염려된다. 국서를 속히 고쳐 써서 그들이 성을 내는 우환거리를 없게 하라. 또 오랑캐가 쳐들어 오지 않고 있으니 두 원수의 차출은 그리 긴급하지 않을 듯하다. 서서히 의논하여 조처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신 등이 변방의 방어를 맡고 있으면서 이처럼 걱정스러운 사세에 봉착하였는데도 지모는 기미를 살피기에 부족하고 총명은 적을 헤아리기에 부족하여 우매한 소견이 자칫 의혹을 가져 우국의 생각만을 품고 감히 옳지 못한 계책만을 진술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신 등의 망녕된 소견으로 인하여 국서를 고쳐서 보냈다가 끝내 대사(大事)를 그르치면, 신 등의 죽음이야 돌아볼 것조차도 없지만 국사는 어찌 하란 말씀입니까. 자고로 나라를 획책하는 방법은 군신 상하가 동심 협력하여 충분히 가부를 논란하여 결국 지당한 데로 귀착한 연후에 시행하였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불편한 점이 있는데 억지로 시행한다면 가부를 진지하게 상의하는 도리에 있어서 아마도 미진할 듯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리가 어떤가를 살피어 빨리 김대건을 그대로 보내자는 청을 허락하고, 또 두 원수를 차견하여 변방의 불시적인 우환에 대비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계사(啓辭)가 이에 이르니 힘써 따르겠다."
하였다.

 

2월 12일 갑술

김자점(金自點)을 도원수로, 윤숙(尹璛)을 부원수로 삼았다.

 

황해도의 1년 세금을 견감해 줄 것을 명하였는데, 감사 장신(張紳)의 요청을 따른 것이다.

 

김시양의 종사관 및 부곡(部曲)을 모두 김자점에게 귀속시켰다.

 

호조 판서 김신국(金藎國)으로 강도(江都)를 관리하는 책임까지 겸임하게 하였는데 김자점을 대임한 것이다.

 

김류를 체찰사로 삼았다.

 

2월 13일 을해

심즙(沈諿)을 형조 판서로, 신준(申埈)을 강화 유수로, 박황(朴潢)을 응교로, 심지원(沈之源)을 교리로 삼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지금 서도의 일이 몹시 다급한데, 국가가 기반으로 믿는 곳은 오직 삼남(三南)뿐입니다. 그런데 삼남의 군사를 이미 징발한데다 또 주사(舟師)로 하여금 강도(江都)로 돌아가 정박하게 한다면, 지금 농사철을 당하여 수군이나 육군 모두가 양식을 싸며 전송해야 하는 폐단이 있고, 주사에 있어서는 격군(格軍)이 모두 해변의 농민인데다가 배 1척당 거의 1백 명에 이르며 그 밖에도 격군이 식량과 기계(器械)를 소모하는 일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더구나 강도의 군사 또한 적지 않는데 지금 만약 이처럼 많은 주사를 보태어 오랫동안 변란에 대비하게 한다면 섬 안의 양식으로는 필시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영남의 주사는 왜인만을 방비하고 있는데, 남북의 걱정이 완급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환란을 염려하는 도리에 있어서 주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남은 징발해 보내지 않도록 하고 호남(湖南)은 우선 준비하고 대기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참작하여 조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2월 14일 병자

내수사(內需司)의 쌀 1백 석을 내 서쪽 변방으로 실어 보내 군량을 보태게 하였다.

 

상이 비국에 하교하기를,
"이기고 짐은 병가의 상사이다. 금(金)나라 사람이 강하긴 하지만 싸울 때마다 반드시 이기지는 못할 것이며, 아군이 약하지만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하지도 않을 것이다. 옛말에 ‘의지가 있는 용사는 목이 떨어질 각오를 한다.’고 하였고, 또 ‘군사가 교만하면 패한다.’고 하였다. 오늘날 무사들이 만약 자신을 잊고 순국한다면 이 교만한 오랑캐를 무찌르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 세상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자는 없다. 그러니 치욕을 참고 구차히 사는 것이 정의를 향해 앞장서서 대장부의 뜻을 이룩하는 것만 하겠는가. 저들의 침욕이 비록 한없는 욕심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처럼 따르기 어려운 요청을 한 것은 모두가 과인의 부덕한 소치이다. 말이 이에 이르고 보니 마음이 좋지 않다. 오랑캐가 만약 침략해 오면 과인이 앞 길에 진주하여 장사(將士)를 격려함과 아울러 서로의 군민을 위로할 것이다."
하고, 이어 미리 진주의 의식을 강론하게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2월 15일 정축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졸하였다. 이귀는 강개한 성품에다 큰 뜻을 품어 벼슬에 오르기 전부터 자주 글을 올려 국사를 말하였는데 그 말이 수천 마디나 되었다. 광해(光海)의 정사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드디어 바로 잡아 구제할 뜻이 있어 김류·신경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반정하여 정사훈(靖社勳) 1등에 책록되고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조와 병조의 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이르고 충정(忠定)의 시호가 내려졌다. 이귀가 조정에 있을 때 알고는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간혹 분개하여 공경(公卿)을 꾸짖다 누차 상의 꾸지람을 받았으나 고치지 못하였다. 또 추숭과 화친론을 극력 주장하였으므로 사론이 그를 비난하였다. 급기야 졸하자 상이 비통해 하며 특별히 하교하기를,
"연평 부원군 이귀는 정성을 다하여 나라를 도왔다. 그 충직한 풍도가 세상에 비할 데 없었으므로 내 몹시 애석하게 여긴다. 염습이나 장례를 치르는 의물을 평상시의 수량보다 특별히 더 주라."
하였다. 또 중사(中使)를 보내 호상하게 하고는 어의(御衣) 및 내고의 쌀과 베를 내어 부의하였다. 세자는 이귀가 일찍이 이사(貳師)였었다 하여 궁료(宮僚)를 거느리고 내전(內殿)에서 곡하고 또 그의 집에 친히 가려고 하자, 예관이 사부(師傅)가 아니라 하여 난색을 표명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으니 세자가 친히 가 위문하였다.

 

2월 16일 무인

태백성이 보였다.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이 아뢰기를,
"신이 지금 서도로 내려가는데 수하의 군사가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어영군(御營軍) 절반과 기마병 중 정예한 자를 대동하고 갔으면 합니다. 또 신이 양서에 비축해 둔 화약·조총·궁시·갑주 등의 물건을 충분히 쓰게 해 주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국가가 이미 싸우며 사수할 계책을 결정하였으니, 인재를 등용하는 방법은 정해진 규칙에 구애될 수 없습니다. 장령(將領)의 추천을 받은 사람들은 해유(解由) 여부 및 직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해조로 하여금 그 인재에 따라 의망하게 하여 사람 쓰는 방법을 다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원수가 조정을 하직할 때는 갑주(甲胄)를 입고 행군 및 부서를 개설할 때는 소복을 입고, 진영에 임할 때는 길복(吉服)을 입게 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7일 기묘

체찰사 김류가 아뢰기를,
"서도의 군량 수송은 오로지 해조의 책임이었는데 지난해 성상께서 허술히 할 폐단이 있을까 우려하여 특별히 체부(體府)로 하여금 징수하여 배를 임대하여 싣게 하였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본부 아문의 중지로서 화폐나 양곡의 임무를 대행시키는 것은 성교(聖敎)의 본의가 아니라고 봅니다. 앞으로 군량의 운반은 해조에 전담시키고 본부는 그 대체적인 것만을 통솔하여 매년 징수의 실수와 운반의 여부를 상세히 조사하고 대조하여 만약 지체하거나 부정한 폐단이 있으면 그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하교하였다.
"도원수가 떠나갈 때 안팎에 술을 내리라."

 

2월 19일 신사

특별히 이귀에게 영의정을 추증하고, 상이 일렀다.
"이귀는 재주와 덕행이 모두 고매하였는데, 미처 복상(卜相)하기 전에 죽으니 내 몹시 후회하며 애석히 여긴다. 이에 특별히 추증하여 나의 슬프고 후회스러운 뜻을 표시하라."

 

상이 하교하였다.
"도원수로 하여금 인정전(仁政殿) 문밖에서 숙배하게 하고 도승지가 인정전 월대(月臺) 위에서 상방검(尙方釰)을 전해 주라."

 

2월 20일 임오

도원수 김자점이 하직하였다. 상이 그를 침소에서 불러 보고 이르기를,
"임기 응변은 오직 대장에게 있다. 서흥(瑞興)에다 본영을 설치한다면 진주할 곳은 어느 곳이 편리한가?"
하니, 김자점이 대답하기를,
"넓은 들판에서 마주 보고 진을 치고는 사세상 적의 예봉을 당해내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험준한 곳에 복병을 설치하여 유기(游騎)로 하여금 노략질하러 나오지 못하게 하고, 또 밤을 이용하여 그들의 군사를 놀라게 하면 그 세력이 쉽게 약해질 것입니다. 또 정방 산성(正方山城)이 만약 완성된다면 봉산(鳳山) 근처의 주민으로 하여금 산성으로 들여 보내 지키게 하오리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성의 형세를 보아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김자점이 손가락으로 자리에다 지형을 그리면서 아뢰기를,
"정방 산성이 극성(棘城)의 곁에 있고 그 사이에 토성(土城)이 네댓 군데가 있는데, 저기에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형세가 이와 같고 모처에서 모처에 이르기까지 험조함이 또 이와 같습니다. 황성(黃城)은 형세가 너무나 외롭지만 지금 극성을 쌓고 있으니, 황성과 기각의 형세를 이룰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세를 보아 선처하라."
하고, 이어 어의(御醫)로 하여금 약을 가지고 수행하게 하였다.

 

2월 22일 갑신

대사간 김광현(金光炫) 등이 차자를 올려 다섯 가지 일을 진술하기를,
"첫째는 민심을 수습하는 일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 걱정하고 애쓰시며 백성을 보살피는 마음이 지극하지 않으신 것은 아니나, 정사가 그 요체를 잃어 온갖 폐단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화로 근본을 삼지 않고 형벌로 으뜸을 삼았기 때문에 다스려도 더욱 어지러워지고 벌하여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궁가(宮家)와 내수사는 백성들에게 긁어 모아 원성을 사고, 각사(各司)는 장사를 벌려 시정의 이문을 독점하여 세도가의 착취 습관이 날로 극심함으로써 민심이 괴로워 원망하고 정사가 문란해지고 있습니다.
지난 정묘년에는 기계의 비축이 오늘날에 비하여 조금 나은 편이었지만 민심이 흩어져 적과 싸움을 한 곳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지난 일을 징계함은 훗날을 삼가하게 하는 것이며 옛일을 거울삼는 것은 오늘을 도모함이니, 전하께서는 문식적인 것으로 잘하였다 여기지 말고 상규에 구애를 받지 마소서. 이로 인해 분발하여 혁연히 계획을 고치시어 과거의 허물을 깊이 반성하고 빨리 애통의 교서를 내리소서. 그리하여 무릇 백성에게 편리를 줄 수 있는 정치와 폐단을 혁신할 수 있는 일을 차례로 시행하여 성상의 성실하고 자애로운 뜻이 원근 사람을 감동시키게 한 연후에 민심을 수습하고 외적을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언로를 활짝 열어 주는 일입니다. 옛사람의 말씀에 미천한 자의 말도 성인이 택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래 길고 짧은 모든 소차에 대해 채택해 시행하며 깊이 유념하겠다고 분부하셨지만 채용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천지가 가로막히고 상하가 통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시운이 기울어지려고 그런 것이니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날 대간이 매우 시원치 않지만 어떻게 감히 근거없는 의논과 부실한 말을 군부 앞에 함부로 진술하여 나라 일을 그르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널리 구하고 정밀히 살펴 언로를 활짝 여소서.
셋째는 널리 인재를 구하는 일입니다. 옛사람의 말에 ‘비록 사마(絲麻)003)  가 있더라도 관괴(管蒯)004)  를 버리지 말라.’ 하였는데, 작은 인재라도 반드시 취해야 함을 말한 것입니다. 시국을 구제하고 난을 제거하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인재가 급한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을 미루어 초치하고 정성으로 위임하기를 마치 촉(蜀)의 유비가 제갈량(諸葛亮)을 대접하고 후진(後秦)의 부견(符堅)이 왕맹(王猛)을 대접하듯 하면 뭇 인재가 다 모일 것입니다.
네째는 기강을 엄숙히 하는 일입니다. 나라가 유지되는 것은 기율에 있습니다. 기율이 무너지면 국세가 존엄하지 못하여 염치로 군자를 드러낼 수 없고 법제로 소인을 위압할 수 없는데 더구나 지금은 군사를 동원하여 부리고 있는 때이니 말할 게 있겠습니까. 기율이 없이 일을 성사한 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조정의 명령이 곤수(閫帥)에게 행하여지지 못하고 곤수의 지휘가 편비(偏裨)에게 막히며 위기에 임하여 물러나 피하고 적을 보고 도망치는데 한 사람도 처벌을 받는 자가 없으니 이를 장차 어찌 한단 말입니까. 심지어 훈국(訓局)·어영청(御營廳)의 군사까지도 서쪽의 변보를 듣자마자 교만기가 더해져서 대낮에 도심에서 기탄없이 겁탈하고 사대부에게 능욕하기를 외적과 다름없이 하였습니다. 평시에도 이렇게 기율이 없고 보면 난에 임하여 명령에 따르면서 윗사람을 사랑하고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의협심을 어떻게 기대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기율을 밝히어 무너진 기강을 바로잡으소서.
다섯째는 군량에 맞추어 군사를 늘리는 일입니다. 옛말에 ‘먹는 것이 군사보다 앞선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군량을 헤아려 움직인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군사를 동원한 지 오래되어 군량이 거의 고갈되고 경외의 창고에 저장된것도 이틀을 먹일 수 없습니다. 계연(計然)005)  의 암산과 유안(劉晏)006)  의 계산이라 하더라도 이미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니 서울·강도(江都) 및 진주한 곳의 저축이 몇 사람의 몇 달 식량이나 댈 수 있겠습니까. 묘당에서 이루어진 계책으로 반드시 잘 강론하였을 것입니다만 강도 및 여러 곳에 군사를 첨가하면서도 군량에 맞추어서 그 숫자를 정하였습니까? 그렇지 아니하고 저축된 양식을 헤아리지 않은 채 군사 늘리기에만 힘썼다면 하루아침에 군량이 고갈될 것이니, 이 때를 당하여 탁지(度支)와 양식을 관리하는 신하는 군량을 핍절시킨 죄로 만번 죽임을 당하더라도 일을 그르친 잘못을 속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금년의 군사 동원은 바로 봄 농사철에 당해 있어 이미 밭갈이와 파종을 못하였으니 어떻게 가을을 기대하겠습니까. 명년이 필시 금년보다 더 군색할 것입니다. 전하께서도 여기에 생각이 미치신 적이 있었습니까? 전일 내수사의 쌀로 군량을 보충하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전하의 마음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거의 알고 계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군량을 따져 군사를 첨가하고 쓸모없는 자는 버리고 정예한 자만을 뽑아 낭비를 절감하고, 널리 둔전을 설치하여 농사를 권장하고 감축할 만한 공물 및 내탕고의 재물, 그리고 아문에 저축한 것을 모두 군량에 보충하소서.
이 다섯 가지를 시행하는데 요점이 있으니, 오직 전하께서 마음을 굳건히 세워 시종 각별히 힘쓰시어 생각마다 성실히 하고, 일마다 실천하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이번 진주(進駐)하는 일은 실로 쇠퇴함을 흥기시키고 난을 평정할 수 있는 일대 기회입니다. 만약 길고 멀리 생각하지 않아 먼저 성상께서 계획을 세웠다가 중도에 지기가 조금이라도 태만해져 오늘날의 일이 저조 퇴보하는 결과를 면하지 못한다면 한 서찰 안의 성지는 빈 말이 되고 말 것이니, 장차 어떻게 민심을 감복시키고 어려움을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신 등이 종시 성실(終始誠實) 4자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신 등은 또 생각건대, 임금의 마음이 광명 정대하여 마치 해가 중천에 솟아 가려진 구름이 저절로 사라지는 듯하며 청명함을 몸에 지니고 있고 조식(調息)이 절도가 있으면 질병과 사악한 객기가 있다 하더라도 침입할 수 없으리라 봅니다. 근래 옥체가 오랫동안 편치 못하여 침을 너무 많이 맞으셨습니다. 신민의 우려가 한이 있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또 화침(火鍼)을 맞으신다고 하니 이는 범인도 맞을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지존의 옥체이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머리털이 서고 마음이 떨렸습니다. 전년에 약방(藥房)에서 이형익(李馨益)에게 녹을 줄 것을 청하자, 전하께서 그가 괴탄(怪誕)하다고 물리치시므로 조야가 모두 흠앙하였는데, 이 사람의 요괴한 의술이 끝내 전하를 현혹시킬 줄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을 가라앉혀 사리를 살피고 원기를 조화하면서 약성이 화평한 보약으로 치료하고 요괴한 의술에 동요되지 말아 빨리 화침을 중지하고 이 무리를 물리치면 의외에 걸린 병이므로 자연 낫는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읽고 경들의 성의를 몹시 가상히 여긴다. 의당 체념하여 의논해 조처하겠다."
하였다.

 

2월 23일 을유

옥당이 차자를 올리기를,
"대개 질병을 치료할 때엔 여염의 하천배라도 반드시 살피고 신중히 하기 때문에 미숙한 방법으로는 시험해 볼 수 없는데 더구나 지존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근일 성상께서 침을 맞으시면서 이형익(李馨益)의 손에 맡겨 경솔히 괴이한 방법을 쓴다 하니 매우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이형익은 스스로 기이한 방법과 신통한 비결로 여기어 사람들에게 자랑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사대부들 중에 고질에 걸려 오래 끌다 부득이 그의 침술을 쓰는 자가 있으나, 일일이 효험을 보았다는 말은 듣지 못하고 더러 해가 따른 것을 신들 중에도 목격하여 아는 자가 있으니, 그 침술이 괴이하고 허탄하여 믿고 쓸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대개 사람의 육체는 오직 원기로 부지하는 것입니다. 옥체가 미령하신 지 이미 여러 달이 지나 오랫동안 침약(鍼藥)을 쓰시고 계시니 원기가 소삭되었을 것은 알 만한 일인데 빨리 치료하고자 하여 날로 침을 맞고 뜸을 뜨고 계시니 영위(榮衛)를 소모할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만약 이로 인하여 더 손상된다면 형익을 죽인다 하더라도 무익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널리 의원들에게 물어 모든 침과 약을 일체 보통 처방에 의하여 조용히 치료하여 점차 효험을 거두게 하고 오활하고 괴이한 사람을 통렬히 물리쳐 사람을 현혹하지 못하게 하소서. 또 임금이 외신(外臣)을 접할 때에 승지와 사관이 반드시 입시하는 것은 그 의도가 있어서인데, 듣기로는 침을 맞을 때 입시하는 신하는 내시와 이형익의 무리 몇 사람뿐이라 하니, 사리로 헤아려 볼 때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신 등은 모두 무상한 자로 논사의 직책에 있으면서 임금을 사랑하는 구구한 정성이 그지 없기에 조용히 섭양하고 계시는 중이지만 부득불 귀찮게 아룁니다."
하니, 헤아려서 조처하겠다고 답하였다.

 

2월 24일 병술

간원이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구례에 상이 침을 맞게 되면 노숙한 의원들을 많이 모아 맥도(脉道)를 상론하여 침놓을 곳을 정한 다음에 약방 제조(藥房提調)·승지·사관이 모두 입시한다 하였습니다. 이는 사리에 당연할 뿐만 아니라 그 의도 또한 있어서인데, 근일에는 상이 침을 맞을 때 의관(醫官)과 내시만 입시하게 하고 약방과 근시는 모두 참여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전하의 일신이야말로 이 얼마나 무거운 책임을 지고 계십니까. 그런데 일개 요망한 의원의 손에다 맡겨 그가 시술하는 대로 놓아둔 채 아무런 의심이나 염려가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화를 염려하여 미연에 조심하는 도리에 있어서 주밀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약방 및 승지와 사관을 전례에 따라 모두 입시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5일 정해

장유(張維)를 대제학으로, 강석기(姜碩期)를 예조 판서로, 윤계(尹棨)를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2월 26일 무자

태백성이 보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사관(史官)은 그 책임이 극히 중한 것이므로 천망할 때 연소배 한두 사람이 멋대로 할 일이 아닙니다. 이번에 새로 추천한 4인 중에 혹은 의논이 귀일하지 못한 자도 있었고, 혹은 인격과 작위가 맞지 않은 자도 있어서 물의가 들끓고 있습니다. 해당 사관을 파직하고 다시 추천하게 하소서. 전랑(銓郞)의 책임은 중망이 모두 흡족한 연후에 의망하는 것이 전례입니다. 김광혁(金光爀)·이명웅(李命雄)은 실로 당세의 명류이므로 조용히 의망하여도 불가하지 않으나, 하루안에 성급히 두 사람을 추천하여 마치 여느 관리를 제수하듯 하였으니 정체(政體)로 헤아려 볼 때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전조 당상(銓曹堂上)을 추고하고 색낭청(色郞廳)을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사관 및 전조의 당상과 낭청을 모두 추고하라."
하였다. 이는 집의 박황의 논박이었는데, 사관으로 삭직당한 자는 서상리(徐祥履)·장응일(張應一)·이기발(李起浡)·홍전(洪瑑)이었다.

 

2월 27일 기축

비국이 아뢰기를,
"지존께서 친히 행군하여 진중에 납시는 것은 그 사체가 극히 중대합니다. 그때 필요한 군병이 3만여 명에 밑돌지 않을 것이니, 일로(一路) 및 어가를 머무는 곳의 군량과 마초를 미리 비축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지로 필요한 군병 수를 의논하여 정하기를 우선 기다렸다가 제도의 감사에게 하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2만 명을 더 선발하게 하라."
하였다.

 

2월 29일 신묘

헌부가 아뢰기를,
"정충신(鄭忠信)과 김시양(金時讓)이 모두 부처(付處)의 명을 받았는데 국법으로 볼 때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혼란한 때를 당하여 편하고 조용한 곳에 그 몸을 두게 되니 그들로서는 뜻을 이룬 셈이지만 분개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떻게 전일의 공로로 오늘날의 죄를 덮을 수야 있겠습니까. 또 정충신이 무죄하다 하여 아주 석방한다면 모르겠으나, 어떻게 죄를 정하여 유배한 후에 짐짓 집으로 돌아가게 할 수야 있겠습니까. 정충신을 먼 변방으로 보내 군대에 편입시키고 우선 방환하라고 했던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정충신은 큰 공로가 있는데다 중병까지 있으니 우선 방환하여야 무방할 듯하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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