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임진
유성(流星)이 천봉성(天棓星) 밑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3월 2일 계사
평안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치계하기를,
"서도의 선비들이 주상께서 친정(親征)하시겠다는 명을 듣고 학유(學諭) 허관(許灌) 등과 상의하여 응모한 군사로 부대를 만들어 효충(效忠)이라 명명하고 홍내범(洪乃範)을 장수로 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비국이 본도로 하여금 군사의 장비를 찾아 주도록 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집의 박황이 아뢰기를,
"팔도가 군사를 일으켜 아침 저녁으로 변란에 대비하고 있으니 이야말로 위급한 때입니다. 그런데도 묘당에 이에 대한 확정된 계책이 있다는 것을 들어 보지 못하였으니 신은 딱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자강할 만한 힘도 없으면서 경솔히 적과 강화를 끊는다는 데 대해서 신은 실로 좋은 계책인가를 모르겠습니다. 애당초 이 일은 성상께서 결정하시고 묘당에 자문한 것이니, 묘당의 대신이 의견에 맞지 않는 것이 있었다면 어전에서 그 일의 득실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드려야 할 것인데, 그저 네네하고 물러 나왔으며, 이미 물러나온 후에도 시비가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김시양(金時讓)의 상소를 보고 나서, 겉으로는 추고를 청하면서 속으로는 그 계책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엄명이 한번 내리자 도리어 ‘그의 목을 베어 뭇사람을 경계해도 불가한 것은 없다.’고 하였는데 하루 사이에 법률 적용의 경중이 이렇게도 큰 차이가 난단 말입니까.
또 김대건(金大乾)의 장계를 보니, 처음에 비국의 관문으로 인해 중도에 유체시켰다고 하였으나, 이미 출발한 사신을 유체시켜 놓고 성상의 계획이 혹시라도 변하시기를 기대하였으니, 화의를 끊고 싶지 않은 뜻이 언외에 나타났고, 성상께서 또 진주(進駐)의 하교를 내리자 극구 찬양하여 심지어는 ‘구준(寇準)이 송 진종(宋眞宗)에게 단주(澶州)·연주(淵州)에 친히 행차할 것을 권하였는데007) 전사(前史)에서 그를 위대하게 여기었다.’고 하는 등 전후의 거조가 하나도 성실하지 못하니, 미리 강론해 놓은 계책이 없음을 알 만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적을 치고 외침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강화를 할 만하면 강화하고 끊을 만하면 끊는다는 이 두 마디 말에 의해 결정짓는 데 불과한데도, 처음부터 정해진 계책이 없어 성상께서 옳다고 하면 대신도 옳다고 하고 성상께서 그르다고 하면 대신도 따라서 그르다고 하였습니다. 설령 성상께서 만에 하나 사리에 어긋난 분부를 하신다면 대신 또한 그대로 따르고 어기지 말아야 합니까.
옛날에 제갈량(諸葛亮)이 촉(蜀)을 다스릴 때 오직 자신의 결점을 지적해 달라고 공경들에게 권면하였으니 대신의 도리는 진실로 남의 말을 받아들여 조그마한 혐의도 개의치 말고 과실이 있으면 고치고 과실이 없으면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근일에는 더러 대신과 관계되는 일이 언급되면 말한 자 또한 스스로 불안해 하고 있으니 크게 잘못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누가 감히 입을 열어 말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대신을 책려하며 묘당의 정책을 굳게 결정하여 위급할 때를 당하여 일을 그르치지 않게 하면 국가에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신이 욕되이 언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시사(時事)를 목격할 때 개탄스러움을 금치 못하다 대신을 침해하는 말을 하고 말았으니 신의 죄가 큽니다. 신을 파직해 주소서."
하였다. 헌부가 출사하게 할 것을 계청하니, 상이 특별히 체차하라 명하였다.
교하(交河) 사람 임석간(林碩幹)이 대궐에 나아가 고변하니, 추국청을 설치하라 명하였다. 이시열(李時說)·이중국(李重國)·박종윤(朴宗胤)·신승선(申承先)·김중지(金重址)·전제휘(田霽輝)·박기종(朴起宗)·이상검(李尙儉)·신이효(申以孝)·신이제(申以悌)·강해룡(姜海龍)·강위룡(姜渭龍)·이상중(李尙重)·백이호(白以濠) 등을 잡아다 심문하였으나 공초가 대부분 사실과 달랐다. 국청이 아뢰기를,
"신 등이 이 옥사의 전말을 상세히 살펴본 결과 임석간이 사실 이 일을 주모한 사람입니다. 처음에 임석간이 영남에서 용납받지 못한 데다 또 형제 두 사람이 법에 의해 죽임을 당하여 시열(時說)이 국가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음을 알고 서로 역모를 상의하여 수삼 명의 무리와 더불어 국운의 길흉을 점치기까지 하였습니다. 또 평소 원망을 품은 자를 시켜 이시열을 유혹하여 성세를 지으면서 함께 어울려 모의하다가 결국 그 모의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먼저 고변하였는데, 이것이 시종 실상입니다. 또 임석간이 처음 모의할 때 미리서 고변의 공로를 세워야겠다는 계책을 품고 이 흉역의 모의를 만들었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중의가 모두 그의 행위에 분개하여 ‘임석간이 고변한 자이지만 율에 의해 죄를 규정하여 후일 무고하는 길을 막지 않을 수 없다.’고 하니 형신을 가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임석간이 설사 주모자라 하더라도 그가 이미 먼저 고변하였으니 공로가 없다 할 수 없다. 또 경 등이 이시열의 모역을 의심할 데가 없다고 단정하면서 임석간의 신문을 청하니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만약 이 사람을 형벌하면 고변의 길이 반드시 막히게 될 것이며, 공로가 있다 하며 포상을 논하면 후일 고변하는 자 또한 반드시 이것을 본받아 혐의가 있는 사람을 많이 끌어들여 보복하는 기회로 삼을 것이다. 이번에 임석간은 특별히 놓아보내기만 하고 자기와 혐의가 있는 사람을 무고한 죄를 들어 논상(論賞)은 하지 말라."
하였다. 양사(兩司)가 합계하여 반좌율(反坐律)로 논죄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정배하라고만 하였다. 임석간이 대간의 의논이 더욱 격렬해짐을 듣고 죽음을 면치 못할까 두려워서 도주하였다가 얼마 후에 체포되었는데 이에 망명죄로 사형하였다.
3월 3일 갑오
이홍주(李弘胄)를 병조 판서로, 최연(崔葕)을 집의로, 조문수(曺文秀)를 수찬으로, 이상질(李尙質)을 헌납으로 삼았다.
3월 4일 을미
비국이 아뢰기를,
"경성에서 수합한 쌀이 모두 1천 6백 73석인데 내수사(內需司)에서 내놓은 1백 석과 합치면 5, 6척의 배를 사용하여 실어야겠습니다. 경강(京江)에서 배를 세내고 특별히 차관(差官)을 정하여 해주(海州)로 운송한 다음, 이어 관향사(管餉使)로 하여금 옮겨 싣고 안주(安州)로 운송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간원이 아뢰기를,
"엊그제 사관(史官)이 새로 천거되었다는 이유로 논박을 입었으나, 추고하라고만 명하였고, 대간 또한 즉시 정계(停啓)하였고 보면 즉시 나와 직무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외람되게 사직소를 올리고 집에 물러가 있으면서 정원이 추고를 청하여 공무를 보라고까지 하였으나 끝내 출사하지 않고 있으니, 그가 사체를 돌아보지 않고 교만 방자하며 제멋대로 하는 습관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단속하는 책임은 오로지 정원에 있는데 또한 변통 처치하는 일이 없으니 몹시 놀랍습니다. 해당 사관을 파직하고 색승지를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여이징(呂爾徵)를 좌승지로, 심지원(沈之源)을 사간으로 삼았다.
정원이 아뢰기를,
"현존한 사관은 서상리(徐祥履)만 있을 뿐인데 헌부가 이미 타인으로 바꾸어 추천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그가 직무를 볼 수 없습니다. 전 검열 권우(權堣)와 주서 권령(權坽)이 서로 피혐하였는데, 주서는 타인이 할 수도 있고, 전례에도 한림과 주서가 서로 피혐하면 특별히 주서를 체임한 적이 있으니, 권령은 체차하고 권우는 도로 관직을 맡겨 그로 하여금 속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추천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6일 정유
회답사(回答使) 김대건(金大乾)이 금나라로부터 돌아왔는데 금한(金汗)의 답서는 다음과 같다.
"내가 누차 글을 보내 바른 말을 하면서도 뜻을 너그럽게 한 것은 대개 왕께서 스스로 깨달아 고쳤으면 해서인데, 도리어 나를 보고 변심하였다고 할 줄 누가 생각이나 하였겠소. 맹약한 이래 왕이 마음을 변하였지, 내 뜻은 변한 적이 없었소이다. 정묘년에 내가 노획한 관민(官民)과 지방(地方)을 귀국에 돌려 준다고 허락한 적이 있었소? 그러나 내가 마음을 관대하게 가졌기 때문에 관원과 정주(定州)·과산(瓜山)을 맹약한 후 모두 돌려 주고 군사만 의주(義州)에다 남겨두어 지키게 하여 도인(島人)들의 상륙을 방지하였소이다. 그런데 계속 귀국이 여러 차례 나에게 ‘도인들이 마치 오리와 같이 헤엄을 잘 쳐서 막아낼 방법이 없으나, 만약 그들이 상륙하면 우리가 용납할 수 없고 그들이 손을 쓰면 우리는 그들과 싸울 것이지만, 싸울 수 없으면 사람을 보내 알리겠으며, 동시에 우리에게 의주의 방비를 맡겨야 한다.’고 하시기에 나는 앞으로 의주를 돌려 주려고 하였소이다.
처음 맹약을 정할 때 귀국이 ‘우리 진영에서 잡은 도망병을 돌려 주겠다.’라고 허락하였고 뒤에 의주를 요구할 때에는 ‘우리 변방은 우리가 지켜야 도망인을 조사하기에 편리하다. 만약 금나라 군사가 지키게 되면 도망한 자가 있더라도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는데, 실로 진심으로 하는 말 같았소. 그런데 그 뒤에 귀국이 식언하고 도망한 사람을 돌려보내지 않으니 나도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도망간 사람을 색출하지 않았다고 두 차례 말하였소. 그런데 귀국은 우리더러 변심하였다고 말하고 있으니, 실로 알 수가 없소이다. 맹약할 때에는 땅이나 사람을 되돌려 주기로 허락한 적이 없었는데 우리가 하루아침에 모두 돌려주자 이것을 가지고 변심하였다고 여기는 것이오? 돌이켜 스스로 생각해 볼 때 내 실로 잘못이 없다고 여겼는데, 도리어 나더러 변심하였다고 허물할 줄 누가 생각이나 하였겠소이까.
왕이 변심한 점을 다시 대략 말하려 하오. 귀국이 일찍이 우리 나라 사신을 남조(南朝)와 동일하게 접대해 준다고 허락하였으나 지금에 와선 이미 달랐고, 일찍이 도망간 우리의 백성을 돌려 보내기로 허락하고서 온갖 방법으로 거절하였으며 일찍이 도인(島人)의 상륙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허락하였는데 지금 이미 그들이 상륙하여 경작하고 있으며, 경작만 용납할 뿐만 아니라 도망인을 도중(島中)으로 은닉시키기까지 하였소. 만일 실례를 들라고 하면, 내 이름없는 백성은 말하지 않겠소이다만 우리의 반장(叛將) 유애탑(劉愛塔)은 귀국의 송치에 달렸었고, 그의 아우 유오(劉五) 또한 귀국의 송치에 달렸었소. 또 일가의 아우를 친 아우로 사칭하여 나를 속였소. 이처럼 누차 변심하였기 때문에 내가 폐물을 증가하자고 말한 것이오. 만약에 귀국이 폐물을 증가하고 싶지 않다면 사리를 들어 말해야지 어떻게 자신의 비행은 엄폐하고 남에게 잘못했다고 둘러씌워 우리의 무역 길을 막으면서 하늘을 부르짖으며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있겠소이까. 그러나 하늘은 밝게 살피고 있으므로 시비가 저절로 가려질 것이오.
내 스스로 생각해 보건대, 과연 귀국의 처사가 타당하였다면 구제해 준 모문룡(毛文龍)과 호송해 준 유애탑 형제가 반드시 지금까지 부귀를 누리고 살아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얼마 안 가서 모문룡은 남조(南朝)로부터 죽임을 당하고, 유오는 도인에게 피살되고, 유애탑은 천벌을 받아 우리의 형구에 나오게 되었단 말이오. 사사건건 이와 같고 보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소이까. 귀국이 말하면서 하늘이 안다고 하며 내가 말하면서 하늘이 안다고 하고 있으니, 천심(天心)이 우리 두 나라를 어떻게 시비하고 있는지를 누가 알 수 있겠소. 그러니 두 나라의 배신 여부는 맹약한 글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오.
보내온 서신에 ‘말 밖의 뜻을 알 수 있다.’고 하였는데, 귀국의 짐작이 좀 지나친 것이 아니오? 만약 내가 과연 그런 뜻이 있었다면 스스로 밝혀 말씀드렸을 것이지 반드시 알아듣기 어렵게 돌려서 말하지 않았을 것이외다. 내가 앞서 사신을 통래할 필요가 없고 무역만 유지하자고 말한 것은, 대개 귀국의 사귀는 예가 점점 악화되고 또 폐물의 증가를 싫어하면서 이처럼 억지로 왕래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해서였소. 그러나 만약 일체 정지하면 불화의 발단이 있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교역 길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무역의 시기에 대해서만 약속한 것이외다. 그런데 지금 왕은 교역길도 단절하고 있으니 이는 스스로 우호를 무너뜨리는 것이오. 지난해 불화가 생긴 것도 귀국에서 발단되었고, 오늘 교역 길을 끊는 것도 먼저 왕의 입에서 나왔으니, 이와 같은 허물이 모두 왕에게 있지 나에게는 있지 않소. 왕께서 만약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겠다고 말한다면 내 어찌 들어주지 않을 리가 있겠소이까. 앞서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것도 왕의 마음에 있으므로 나 역시 어찌할 수 없소이다."
3월 7일 무술
태백성이 보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방금 금한의 답서를 보니 그 뜻이 폐물을 증가하자는 데에 있고 맹약을 어겼다는 데에는 있지 않은 듯합니다. 말단에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꾼다면 어찌 들어주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라고 한 것은 여지를 두어 본국에게 깊이 바라는 것이 있어서입니다. 저들이 이미 스스로 맹약을 어기지 않고자 한다고 하였는데, 우리가 끝내 한마디의 수답도 하지 않는다면 저들은 반드시 우리가 먼저 끊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다만 예물의 물목을 결정하기 전에는 또한 곧바로 사신을 보낼 수 없습니다. 지금 우선 답서를 보내되 ‘처음 귀국이 보내 온 글에는 우리에게 따르기 어려운 일로 요구하였기 때문에 귀국이 반드시 맹약을 어길 마음이 있어서 이런 말을 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 답서를 보고 나서 비로소 귀국이 본래 이런 마음이 없었음을 알고 우리 의혹이 풀렸으니 신사(信使)를 들여보내야겠다. 그러나 전후 보낸 예물이 모두 퇴각을 당하였기에, 그 예물 수를 결정하기 전에는 사신을 곧바로 보낼 수 없다. 그러므로 이 글을 먼저 보내 귀국이 다시 생각하여 회보해 주기를 기다린다.’는 뜻으로 국서(國書)를 찬술하여 역관(譯官)으로 하여금 첨수참(甛水站)에 전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저들이 패악한 말을 쓰지 않고 뜻을 굽히어 구사하였으니 우리는 도리상 회답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또 답서만 보내는 것은 타당치 않은 것 같으니, 문관을 춘신사(春信使)로 뽑아 정하여 예물을 주어 보내라."
하였다. 이에 박로(朴𥶇)를 춘신사회답사(回答使)로 삼았는데, 비국이 또 무신으로 부사(副使)를 삼을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민응형(閔應亨)을 집의로, 이명웅(李命雄)을 헌납으로, 이상질(李尙質)을 교리로 삼았다.
3월 8일 기해
비국이 아뢰기를,
"개시(開市)를 이미 중지하였으니 예단의 수량을 넉넉하게 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호차(胡差)가 말한 두어 가지 물목 중 황금(黃金) 궁각(弓角)을 제외한 그 나머지 숫자를 채워 보내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금은(金銀) 궁각을 제외하고 주저(紬苧) 이하 잡물은 모두 참작하여 감해야 한다. 또 개시에 관한 한 가지 일에 저들이 큰 욕심을 가지고 있으니 끝내 영원히 그만둘 리가 없다."
하였다.
3월 10일 신축
유영(柳潁)을 지평으로, 홍처후(洪處厚)를 정언으로 삼았다.
"검열 서상리(徐祥履)가 지금 헌부로부터 천망에서 삭제시켜야 한다는 논박을 받았으나 직책을 주지 않은 사람과는 다르므로, 이미 괴원(槐院)008) 으로 되돌아갈 수 없고 또 그대로 본관(本館)에 있어서도 안 됩니다. 이조로 하여금 계품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하니, 이조가 복계하기를,
"상례로 말하면 이른바 천망을 바꾼다는 것은 천망을 받았으나 미처 직책을 주지 않은 자를 말한 것입니다. 서상리는 천망을 받은 후 대신이 취재(取才)하여 관직을 제수하고 양사의 서경(署徑)을 거쳐 그가 붓대를 잡고 공무를 행한 지가 이미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설사 그가 죄과가 있다 하더라도 고신(告身)을 환수하라는 명령이 있지 않으면 이는 직책의 이름이 아직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만 대간의 계사에 범연히 천망을 바꿔야 한다고 하여 이미 윤허를 받았으니 의거할만한 전례는 없다 하더라도 괴원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13일 갑진
가도 부총(椵島副摠) 심세괴(沈世魁)가 표문(票文)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등주(登州)의 반장(叛將) 공유덕(孔有德)·경중명(耿仲明)이 우리의 큰 병력의 공격을 받아 태반이나 사망하고 나머지 적병은 배를 탈취하여 여순(旅順)으로 도망쳤습니다. 혹시라도 귀국 해안으로 숨어들까 염려되니 각별히 방어하시오. 그리고 만약 요선(遼船)이 그곳에 이르면 해안으로 오르지 못하게 하시오."
헌부가 아뢰기를,
"금나라의 서신 내용이 크게 패려한 데는 이르지 않았으나, 그 거만한 태도는 심하였습니다. 그런데 온 조정의 신하들이 이 서신을 받고 다행으로 여기어 사신을 보내 폐물을 더하기에 만족스럽게 못할까 걱정하고 있으니 신들은 부끄럽게 여깁니다. 우리에게 자강(自强)의 방법이 없고 보면 관계를 맺는 계책을 실로 쓰지 않을 수 없겠으나, 사신을 보내 폐물을 증가해 주는 데에는 으레 절차가 따로 있습니다. 우리 나라 신사(信使)는 끊임없이 왕래하고 있으나 그들은 회답하는 일이 없는데 또 사신을 보낸다는 것은 몹시 구차한 일이며, 설사 폐물을 증가해 준다하더라도 반드시 두 나라가 왕래하면서 쟁변하다가 마지못해 증가해 준다면 그래도 괜찮지만 지금 그들의 회보를 기다려 보거나 쟁변을 해보지도 않은 채 성급하게 폐물을 증가해 준다면, 그들이 짐승같지만 교활하기는 그지없는 자들이니 어찌 우리 나라에 사람이 없음을 비웃지 않겠습니까. 금년에 5백 동을 늘려 주고 명년에 또 5백 동을 늘려 주면 우리 나라 재력으로 과연 이를 지탱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빨리 묘당(廟堂)에 명하여 다시 좋은 계책을 강구하게 하는 한편 잠시 박로(朴𥶇)의 사행을 정지시키고 서서히 폐물을 증가해 주는 일에 대해 의논하게 하소서."
하고, 간원 역시 이 일로 논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당초 신들도 이러한 의논이 있어서 먼저 역관(譯官)을 차출하여 국서(國書)를 첨수참(甛水站)에 전하고 오게 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급기야 성상의 하교를 받은 후 다시 생각해 보니, 저들이 우리 사신을 받아 들여 세폐(歲幣)의 물목을 강정하기를 마치 조이용(曹利用)과 거란(契丹)처럼 한다면 물론 몹시 좋은 일이지만 그들이 만약 그렇지 않아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기를 또 김대건(金大乾)의 사행 때처럼 한다면 그 후의 난처함이 도리어 오늘날보다 극심할 것입니다. 또 저들과 강정하는 것이 마치 품의한 후에 행하는 것 같아 사체에 있어 더욱 부당합니다. 전일의 계사에 의하여 예단의 수를 요량해 정하여 사신을 들여 보내면 불가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14일 을사
유성이 관색성(貫索星) 밑에서 나와 기성(箕星) 위로 들어갔다.
3월 16일 정미
간원이 아뢰기를,
"부원수(副元帥) 정충신(鄭忠信)이 곤외(閫外)에 임명된 장수로서 감히 폐물을 증가해 주고 애걸해 보자는 의논을 진술하였으니 서도의 먼 변방에 충군(充軍)하소서."
하였고, 양사가 또 통제사 변흡(邊潝)이 수군을 학대하고 전투 장비를 소실한 죄를 논하였는데, 여러번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3월 17일 무신
상이 하교하였다.
"경외에서 특별히 수합한 군량은 모두 안주(安州) 및 청천강(淸川江) 이북의 산성에 저장하여 훗날 성을 지킬 때 먹을 군량으로 삼되 평시에는 한 말의 쌀이라도 함부로 쓰지 못하게 하라."
비국이 아뢰기를,
"김대건이 들어온 후 신들이 저들의 사정을 자세히 물어보니, 저들의 큰 욕심은 오로지 폐물을 증가하는 데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소도리(所道里)가 말한 새로 정한 품목 중 다수를 감하면 반드시 난처하게 되는 걱정이 있을 것이고 또 1년에 한 차례 보내는 물건이므로 너무 소략하게 해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니 전일 으레 보냈던 과물(果物)과 함께 참작 의정하여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왜도(倭刀)는 우리 나라의 소산이 아니니 전에 정한 숫자대로 보내고 주저(紬苧) 이하는 또한 부표(付標)에 의해 숫자를 감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그 후에 비국이 다시 수량을 더하여 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예단은 다음과 같다.
각색 면주(綿紬) 6백 필, 저포(苧布)와 마포(麻布)가 모두 6백 필, 각색 목면(木綿) 7천 필, 표피(豹皮) 50장, 수달피(水獺皮) 2백 장, 청서피(靑黍皮) 1백 60장, 단목(丹木) 2백 근, 상화지(霜華紙) 5백 권, 백면지(白綿紙) 1천 권, 세룡석(細龍席) 1장, 각색 채화석(綵花席) 1백 장, 호초(胡椒) 10두, 호도(好刀) 8병, 소도(小刀) 8병, 황률(黃栗) 10두, 대조(大棗) 10두, 건시(乾柿) 50접, 전복(全鰒) 10접.
3월 19일 경술
승지 최혜길(崔惠吉)이 아뢰기를,
"내노(內奴)를 대오에 편입시켜 조련하는 것은 실로 위급할 때에 쓰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조석으로 변란에 대비하는 때를 당하여 속오군(束伍軍)의 몸으로 서변의 역사를 홀로 모면한다면 허명 무실할 뿐만 아니라 본도의 군정과 그 역을 같이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평소에는 서변의 역사에 나가지 말도록 한 것이 당초의 사목(事目)이니 이에 의해 시행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유성이 천진성(天津星) 밑에서 나와 방성(房星) 위로 들어갔다.
3월 20일 신해
부제학 이식(李植)이 일찍이 간성(杆城)에 부임하였을 때 목격한 것을 상소하여 그 폐단을 진술하였는데, 그 첫째는 태강 실신(汰講失信), 둘째는 전결 자각(田結自覺), 셋째는 역전 급복(驛田給復), 넷째는 여정 도산(餘丁逃散)이었다. 상이 이에 답하였다.
"상소를 읽고 잘 알았다. 조목별로 아뢴 폐막은 해조로 하여금 헤아려 조처하게 하겠다."
유성이 진성(軫星) 밑에서 나왔다.
3월 22일 계축
비국이 아뢰기를,
"심 부총(沈副摠)이 가도(椵島)를 임시 지킨 뒤로 절일·문안의 사절을 모두 폐하여 막연히 서로 묻지 않았으니 사리에 미안합니다. 지금 등주 변란의 토벌 평정한 날을 당하여 사신에게 게첩(揭帖)과 예단(禮單)을 주어 보내 치하하고 이어 등주·여순의 소식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서울의 관리가 왕래하면 폐단이 있을 것이니, 평안도의 수령을 보내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5일 병진
신풍군(新豊君) 장유(張維)가 대제학의 면직을 청하면서 다섯 번이나 차자를 올리자, 상이 마침내 허락하였다.
윤지(尹墀)를 대사간으로, 임련(林堜)을 장령으로, 구인후(具仁垕)를 통제사로 삼았다.
비국이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인경궁(仁慶宮)은 수리하지 말고 창덕궁(昌德宮)의 담장을 축조하라는 하명을 하셨다 하는데 이는 필시 성상의 생각에 재물의 소비를 아깝게 여기시어 거처를 옮기는 일을 정지하려고 한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일기가 점점 더워지고 있는 이 때에 협착한 곳에 거처하신다면 어떻게 기온을 조절하고 정신을 수양하여 병을 조리하는 방법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인경궁은 혼조(昏朝) 때 미친 중이 건의하여 건축한 곳이니 풍수의 길흉은 논할 틈도 없거니와 가옥의 제도가 너무나 사치스럽고 화려하여 정말 이른바 목요(木妖)009) 입니다. 그러므로 본래부터 제왕이 거처하기엔 맞지 않으나 다만 사세가 급박한 관계로 일찍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자는 뜻으로 아뢰었는데 이는 대개 부득이해서 한 것입니다만 성상의 뜻이 옮기고 싶지 않으시다면 신 등은 감히 다시 간청하지 않겠습니다.
창덕궁은 본래 조종의 법궁(法宮)010) 으로 선조(宣祖) 말년에 중건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지금 잿더미가 되었으니 또한 몹시 애석합니다. 만약 인경궁 주변의 두어 곳 전각 재목과 기와를 옮겨다 이 대궐을 지을 경우, 인경궁 수리에 비하여 난이의 차이는 있겠으나 또한 그리 큰 차이가 나지는 않을 것이며, 조종의 법궁도 이로 인해 세워질 것이니 사리에 있어서 더없이 편리하고 마땅하겠습니다. 성상께서는 혹시라도 때 아닌 역사를 일으키는 것으로 염려하시겠지만 각 아문에 저축된 쌀이나 베 또한 충분히 그 비용을 댈 만하여 민력을 괴롭히는 데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창경궁은 불에 탄 곳이 많지 않으니 이를 수리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3월 27일 무오
홍서봉(洪瑞鳳)을 예조 판서로, 정태화(鄭太和)를 부교리로 삼았다.
3월 28일 기미
평안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임기가 차서 체직하게 되었는데,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이 그대로 유임시킬 것을 계청하니, 상이 따랐다.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 상차하기를,
"신이 병중에 듣건대 비국의 계사로 인하여 장차 인경궁의 전우(殿宇)를 뜯어다 창경궁의 옛터에 옮겨 짓는다고 하는데 신의 마음에 의혹이 가 불가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대체로 걱정에는 멀고 가까운 것이 있고 폐단에는 경하고 중한 것이 있는데, 지금 말하는 자들은 인경궁의 제작이 너무 화려하여 제왕의 거처에 맞지 않다고도 하고, 또 인경궁을 수리하는 폐단이 뜯어다 옮겨 짓는 것과 그 공역이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이 생각해 볼 때는 모두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자고로 거처의 화려함으로 임금에게 경계하는 것은 오락에 빠져 안일하다가 점점 패망의 화를 부를까 염려함입니다. 만약 시대가 평화로워 일이 없을 때라면 이야말로 미연에 방지하는 원대한 생각이므로 정말 정론(正論)이 될 수 있겠으나, 오늘날에 있어서는 목전의 위급한 걱정거리가 이보다 심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적의 정세를 헤아릴 수 없어 변방의 걱정이 극심하고 민심이 흉흉하여 조석도 유지하지 못할 상황인데다 주청(奏請)·춘신(春信)의 사신 행차가 앞으로 줄줄이 떠날 것입니다. 다섯 차례 보낼 방물(方物) 및 더 보내야 할 세폐(歲幣)에 쓰이는 수량이 얼마인지 모를 정도인데, 해조의 예산은 이미 고갈되고 중외의 재력도 모두 바닥이 나 수송은 시급하고 민원은 날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 때에 궁궐을 수리하고 건축하는 역사를 하려고 하니, 저기에서 철거하여 여기에 구축한다 하지만 원근에서 보고 들을 때 놀라지 않을 자가 있겠습니까.
또 그 역부(役夫)와 공장(工匠)은 백성들 중에서 데려다 쓰지 않으려고 한다면 고용할 사람을 불러모아야 할 형편인데 그들에게 지급해야 할 품삯의 베를 어디에서 마련해 낸단 말입니까. 이른바 각 아문에 저축된 것도 모두 백성들의 힘에서 나온 것으로 모두가 국가를 위해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필요치 않은 공사를 벌려 쓰지 않아도 될 비용을 탕진한다면 패망의 환란이 필시 이로 인해 먼저 이를까 염려됩니다. 더구나 공역의 경중도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는 데이겠습니까. 이미 철거 공사를 하고 나면 또 운반하는 공사가 있고 또 개축하는 공사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비로소 수리할 수 있다고 본다면 이미 지어진 집을 수리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그 공역이 3배나 됩니다. 귀신이 이 일을 해 주지 않는 이상 그 폐단의 경중이 어찌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공사를 시작한 후에는 종종 백성에게 미치는 폐단이 자연 오게 마련이니 이른바 민력을 괴롭히지 않는다는 것도 다 믿을 수 없습니다.
지금 거처하시는 곳이 협착하고 누추하여 형편이 없는 데다 옥체가 편치 않으신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기후가 점점 더워지는 이때를 당하여 거처나 조섭이 한 시각이라도 급합니다. 옮겨 짓는 일이 매우 쉽다 하지만 여름과 가을 안에는 그 사세로 보아 필시 완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완공되기를 기다려 거처를 옮기어 조섭하려고 계획하시니 이 또한 사정에 어두운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아, 선왕의 법궁을 중건하여 후사의 방탕한 욕심을 미리 막는 것 또한 신의 큰 소원입니다. 어찌 남과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다만 일에는 완급이 있고 시기에는 불가함이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철거하여 옮겨다 짓는 일을 잠시 중지하고 기후가 더워지기 전에 빨리 전에 거처하셨던 인경궁 처소로 임시 옮겨 거처하시다가 서서히 일이 좀 안정되고 민력이 좀 펴지기를 기다려서 법궁의 정침을 짓는 데 대해 의논하여 영구히 자손에게 물려줄 계책을 세우신다면 때가 아닌 때에 공사를 일으키는 폐단이 거의 없을 것이며, 옥체를 조섭하는 길에도 순편할 것 같다고 봅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에 진술한 말이 진실로 의견이 있다. 다만 대신과 대간이 모두 인경궁으로 옮기는 것을 불가하다 하였으니, 이번 옮겨 짓는 일은 실로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영선 도감(營繕都監)의 명칭을 수리소(修理所)로 고쳤다.
수리소가 아뢰기를,
"창경궁의 대내 전각이 거의 다 소실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인경궁의 대내 전각을 헤아려 철거하여야 완성할 수 있고 별당 두어 곳의 재목과 기와만 옮겨 가지고는 지을 수 없으며 또 역군(役軍)·가포(價布)·공장(工匠)·요미(料米)·재목(材木)의 출처를 해조에만 전적으로 책임지울 수 없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별도로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호조와 병조는 자체에서 마련할 것이므로 그 숫자를 정하지 말고 쌀과 베가 있는 각 아문으로 예를 들면 상평청(常平廳)의 목면(木綿) 1백 동과 쌀 3백 석, 본사(本司)의 여정목(餘丁木) 1백 동, 사복시(司僕寺)의 목면 1백 동과 쌀 2백 석, 선혜청(宣惠廳)의 쌀 5백 석을 우선 이송하고, 또 경기 감사 김경징(金慶徵)에게 용도를 절약하여 저축한 쌀이 있고 양주(楊州)에 전 목사 신준(申埈)이 비축한 저축미가 있다고 하니, 각각 2백 석씩 가져다가 보태 쓰도록 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30일 신유
태백성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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