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8권, 인조 11년 1633년 4월

싸라리리 2025. 12. 30.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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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임술

간원이 아뢰기를,
"대체로 오랑캐를 대하는 방법은 반드시 일정한 규칙이 있어야 합니다. 한번 예를 만들면 끝내는 난처한 일이 있게 마련이므로 처음에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에 가는 춘신사는 별도로 보내는 사신과 비교가 안 되는데 또 부사(副使)를 내보내니, 만약 해마다 부사를 보낸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저들은 필시 지금의 사행(使行)으로 준례를 삼아 의혹을 품을 걱정거리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의 사명(使命)을 더보내는 것이 이익을 없고 폐단만 낳을 뿐 아니라 또한 국가의 체면을 손상하고 저들의 자대하는 마음만 열어 주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러니 부사를 보내지 말아 후일의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요량하여 조처하게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신들의 생각도 처음에는 그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신은 관계된 바가 몹시 중대하여 문답할 즈음에 고루한 걱정이 있지나 않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차출한 것을 계청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간의 의논이 실로 소견이 있으니 부사를 차견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집의 민응형(閔應亨)이 상소하여 폐물을 증가해 주지 말 것을 청하니, 상이 비국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게 하였다. 이에 비국이 다시 고칠 수 없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가 아뢰기를,
"처음 입사했을 때 비록 미관(微官)인 것 같지만 6품에 오르고 나면 낭서(郞署)·수령(守令)이 모두 여기에서 나오니 중하다 하겠습니다. 조종조 이래 음사(蔭仕)의 의망에 반드시 생원·진사를 넣으면서도 오히려 인재가 빠지지 않을까 염려하여 문음(門蔭)을 따져 인재를 취하는 법을 만들었으니 그 의도가 우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말세에 부정이 판을 쳐서 이른바 문음의 인재가 대부분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지조있는 인사들이 진출하기를 탐탁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앞서 선조(宣祖) 초년에 전조(銓曹)가 또 다시 낭천(郞薦)의 규례를 세워 음재(蔭才)가 아니더라도 의망(擬望)하게 하였는데, 유속(流俗)의 논의가 상례와 다른 데 대해 혐의하였기 때문에 드디어 중도에 폐지되고 말자 식자들이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반정(反正) 후 지금의 영부사 오윤겸(吳允謙)이 전장(銓長)이 되었을 때 경외의 학생 중 재주와 행실이 있는 사람을 찾아 그들의 이름을 적어 올려 재가를 받아 유학 초선(幼學初選)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생원·진사·음재(蔭才)와 함께 의망에 넣게 하였으니, 이는 낭천의 규례에 비해 볼 때 더욱 완비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거의 다 등용되어 나머지는 오직 한 사람뿐입니다. 본조의 당상 낭청이 다시 회동 상의하여 그 가합한 사람을 얻어 의차에 대비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능원 대군(綾原大君) 이보(李俌)가 차자를 올려 봉례(奉禮)가 인접(引接)한다는 명을 거두어 주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유래한 구례이니 경솔히 폐할 수 없다. 경은 사양하지 말라."

 

4월 4일 을축

예조 참의 이준(李埈)이 상소하여 인경궁의 재목과 기와를 뜯어다 옮겨 거처할 집을 짓지 말고 수리의 역사를 일으키지 말아 군수(軍需)를 조금이나마 도울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상소의 말이 의견이 없지는 않으나 다만 이미 공사를 시작하였으니 지금에 와서 정지하기 어렵다."

 

4월 5일 병인

평양부 성내에 화재가 나 잇따라 50여 호를 태웠다.

 

4월 6일 정묘

명의 반장(叛將) 모승록(毛承祿)·공유덕(孔有德)·경중명(耿仲明)·진유시(陳有時)·이구공(李九功) 등이 등주(登州)를 점거하여 그 세력이 몹시 강성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관군에게 패배를 당하여 진유시·이구공은 포탄에 맞아 죽었고, 모승록은 공유덕을 살해하고 귀순하려다가 발각되어 공유덕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공유덕과 경중명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해로를 따라 장자도(獐子島)에 정박하였는데 본도의 감사가 이를 아뢰었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등주의 적이 동쪽으로 오는 것은 실로 우리 나라가 항상 걱정한 바이었습니다. 적이 장자도 서쪽 연안 가까운 곳에 정박한 것은 노적(虜賊)과 서로 내통하려는 계책인 듯하니, 노적과 합류하기 전에 즉시 섬멸하여 본국의 깊은 걱정거리를 제거하고 대의(大義)를 천하에 선양해야 할 것입니다. 관서(關西)의 병력이 충분히 이를 해결할 만하고 원수(元帥) 또한 그곳에 있으니, 부원수 및 본도의 감사와 함께 진격하여 섬멸할 계책을 강구하게 해야겠습니다. 이 뜻으로 도원수 및 평안 감사·병사에게 하유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9일 경오

호기(胡騎) 50여 인이 중강(中江)에 이르러 사냥한다면서 양식을 구걸하고 이어 신사(信使)가 들어올 시기를 물었는데, 그 의도는 대개 공유덕·경중명과 내통하려는 것이었다.

 

채유후(蔡𥙿後)를 이조 정랑으로, 정태화(鄭太和)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4월 11일 임신

경중명(耿仲明) 등이 천가장(千家庄)의 앞 강으로 배를 옮겨 뱃머리를 구연성(九連城)을 향해 놓고 마치 노적과 서로 내통하여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때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이 평양에 가서 의주 부윤(義州府尹) 윤진경(尹進卿), 청북 방어사(淸北防禦使) 임경업(林慶業)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수비하게 하였는데, 이 일을 치계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등주(登州)의 적이 노적과 내통하는 형적이 훤히 보입니다. 의당 제장(諸將)을 독려하고 병력을 선발하여 전진하여야 할 것인데, 윤진경·임경업 등은 수백 명의 잔약한 군사로 강변에 나가 주둔하고 있으며 수신(帥臣)은 아직도 내고(內顧)의 걱정이 있어서 평양에 머물러 있으면서 전진할 의향이 없습니다. 김자점을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적의 형세로 보아 의주로 내려 올 리는 없을 것 같고 농군을 징발하여 양식도 없는 곳에서 분주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닌 것 같으니 원수가 경솔히 움직이지 않는 것은 의견이 없지 않다. 그리고 그들이 노적에게 투탁하러 가는 길을 차단하는 것이 실로 오늘의 선책인데, 우리에게는 전혀 이를 차단할 만한 힘이 없다. 이것으로 원수의 죄책을 삼는다는 것은 좀 억울한 듯하니, 이번의 추고는 지나치다고 여기었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적의 배가 천가장에 정박하였으니 이미 노적과 내통한 자취가 드러났는데 수신(帥臣)은 앉아서 기회를 잃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도원수로 하여금 청북에 나아가 주둔하게 하고 부원수로 하여금 만상(灣上)으로 진군하게 하여 적이 하륙(下陸)하기를 기다렸다가 급히 공격하여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하고, 이 적의 사정을 가도(椵島)에 통지하여 그들로 하여금 해도(該島)를 수비하게 하여 만전을 기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러나 군량이 없는 곳으로 부원수를 진군하게 하는 것은 사세로 보아 편리하지 않고 또 저 적이 우리 나라 변경으로 내려올 리가 없을 것 같다."
하였다.

 

가도 부총 심세괴(沈世魁)가 도사 김여수(金汝綬)를 보내 양식 및 전선(戰船)·창수(鎗手)·조총(鳥銃)을 얻자고 청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부총이 요구한 5천 석의 쌀을 다 지급할 수는 없겠으나 또한 무관하게 볼 수는 없습니다. 군량을 맡은 신하로 하여금 선주(宣州)·철성(鐵城)의 저축미 및 해변 각 고을의 군량을 절반씩 운송하게 하고, 병선(兵船)에 있어서는 본래 본도의 소유가 아니라 갑자기 마련하기 어렵습니다. 창수 역시 우리의 방비가 급한 중이어서 분산할 힘이 없으니 조총 1백 자루만 보내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되, 먼저 1천 석만 주도록 하라."
하였다. 비국이 또 아뢰기를,
"신들이 생각건대 도중(島中)의 사정이 여느 때와 크게 다른 것 같습니다. 1천 석을 더 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이번 수리의 공사도 정말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인데, 대군의 가옥 공사를 어찌하여 이때에 또 일으키십니까. 돌과 나무를 실어나르는 배와 수레는 도로에 즐비하고 아침 저녁으로 일하는 어여차 소리가 원근에 들리고 있으니 목요(木妖)의 기롱이 불행히도 비슷합니다. 대군의 연령이 아직 어리므로 궁궐을 짓는 일은 급하지 않습니다. 잠시 변경의 경보가 좀 안정되고 백성이 좀 편해지기를 기다려 짓는다 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 공사를 정지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2일 계유

주청사 홍보(洪靌)·이안눌(李安訥) 등이 북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증산(甑山)에 이르러 치계하기를,
"조공을 바치러 가는 노정을 등주(登州)로 바꾸는 건에 대해서 황제가 답을 쓰기를 ‘주달한 사정을 조정이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만 해안의 방어를 엄중히 하고 있는 중이므로 그대의 나라를 위해 길을 열어 이로 인해 다른 걱정거리를 이르게 하기 곤란하다. 이 뜻을 이해하여 앞서의 유지를 준행하라.’ 하였습니다. 또 추봉(追封) 건은 예부(禮部)로 내려보냈다는데, 예부가 성지(聖旨)를 받들어 아뢰기를 ‘번방이 대대로 충성 순종하였고, 국왕이 왕위를 물려받은 지도 여러 해입니다. 청해 온 고칙(誥勅)과 봉시(封諡)를 이미 심사한 바 예문에 어긋나지 않으니 모두 요청에 의해 급여하십시오…….’ 하였습니다. 내각(內閣)이 예비 시호로 공정(恭靖)·공순(恭純)·공순(恭恂)·공량(恭良)·공무(恭懋) 다섯 가지를 올렸는데, 황상께서 공량에 낙점하였습니다. 시법(諡法)에 웃 사람을 공경히 받들어 섬기는 것을 공(恭)이라 하고, 조심하면서 일을 경건히 하는 것을 양(良)이라 한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주청사의 선래(先來) 군관·역관을 모두 당상으로 직질을 올려 주라."
하였다.

 

4월 13일 갑술

중국의 도독(都督)        오안방(吳安邦)·주문욱(周文郁)이 적의 배를 추격하여 미곶(彌串)에 이르렀다. 오안방이 관장한 배는 1백 척에 군사가 3천 2백 인이고, 주문욱이 관장한 배는 80척에 군사가 2천 5백 인이다. 태감(太監)        후용(侯用)이 감군(監軍)으로 왔는데 그의 배는 12척에 내정(內丁)이 3백 인이었으며, 가도 부총        심세괴(沈世魁)도 병선(兵船)을 거느리고 뒤따랐다. 이에 주·오 두 장수가 우리 나라에 자문을 보내 기어코 서로 협력하여 적을 소탕하자고 하였다. 그후 노병(虜兵)이 적선(賊船)을 맞아 오다가 의주(義州)        중강(中江)에 도착하여 군량이 떨어졌다고 알리자, 수신(帥臣)이 아뢰었다. 이에 대해 비국이 아뢰기를,
"호인(胡人)이 등주의 적과 내통하고 있는데, 우리가 만일 군량을 준다면 이는 등주의 적을 구제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허락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심지원(沈之源)을 집의로, 이성구(李聖求)를 경기 감사로, 최명길(崔鳴吉)을 이조 판서로, 정온(鄭蘊)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비국이 후 태감(侯太監)에게는 접반사(接伴使) 및 문안사(問安使)를, 주·오 양장에게는 문안사만을 보낼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고 이어 하교하였다.
"예단은 태감 천사 때의 의하여 보내라."

 

예조가 아뢰기를,
"신들이 《오례의(五禮儀)》의 사시의(賜諡儀)를 상고한 결과 ‘전하가 고명(誥命)을 받아 근시(近侍)에게 주어 영좌(靈座) 앞에 놓는다.’고 하였는데, 이번 절목은 전과 다르므로 전하께서 조명(詔命)을 받아 의식을 행한 후 내전에 받들어 두었다가 별도로 길일을 택하여 관리를 보내 숭은전(崇恩殿)으로 받들고 나아가서 예문에 따라 분황제(焚黃祭)를 행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또 지난 해에 대왕의 종호(宗號)를 이미 정하였으니 책보(冊寶)을 올리고 신주를 고쳐 쓰는 의식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욕례(縟禮)를 거행한 지 반년도 채 못 되어 또 책보를 올리면 매우 번독한 일이기 때문에 중국이 내린 시호가 오기를 기다려 한꺼번에 거행하지만, 지금은 시전(諡典)이 이미 내렸으므로 신주를 고쳐 쓰는 의식을 지연할 수 없으니 분황하는 날 행하소서. 그러나 더없이 중대한 욕례이므로 반드시 길복을 입고 행사해야 할 것이니 대행(大行) 인목 왕후(仁穆王后)의 담제를 지낸 뒤에 이 예를 거행하는 게 마땅하겠습니다. 아울러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는데, 대신이 예조의 계사가 옳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6일 정축

헌부가 내수사(內需司)의 노비를 뽑아 서정(西征)의 군역에 나가게 하고 그 공포(貢布)를 탁지(度支)에 내주어 군수(軍需)에 보태게 할 것을 청하였다. 또 주청사의 선래 군관과 역관에게 가자(加資)하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이번 추봉(追封)의 은전에 대해서 조정 신하들은 무관한 일로 여기겠지만 우리 왕가에 있어서는 이보다 더 큰 경사가 없다. 대개 선래한 자가 상을 받는 것은 전부터 있는 예(例)이므로 자식된 정의로서 차마 전례를 폐기할 수 없다. 또 내수사의 노비도 이 나라의 한 백성인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침학하면 그들이 필시 매우 원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계해년011)   병사를 뽑을 때 서정(西征)으로 평시에는 보내지 않을 것을 허락하여 그들의 마음을 달랬는데 지금에 와서 그 신의를 저버리기 어려울 것 같다. 노비의 신공(身貢)은 모두 내수사에 있으니, 해조로 하여금 그 저축된 것을 조사하게 하여 많으면 가져다 쓰고 그렇지 못하면 불문에 부쳐 두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그후 계속하여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4월 19일 경진

도독(都督) 오안방(吳安邦)이 자문을 보내 군량을 대줄 것을 청해왔다. 이에 대해 비국이 회계하기를,
"도독이 또 다시 군량의 도움을 청해 왔는데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군량을 담당한 신하로 하여금 3천 석을 내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명웅(李命雄)을 헌납으로, 이원진(李元鎭)을 지평으로, 이상질(李尙質)·정뇌경(鄭雷卿)을 수찬으로 삼았다.

 

4월 20일 신사

증광 별시(增廣別試)를 실시하여 이도(李禂) 등 33인과 무과(武科)에 오이룡(吳二龍) 등 28인을 선발하였는데, 추숭의 경사 때문이었다.

 

예조가 아뢰기를,
"전부터 나라에 큰 경사가 있으면 고칙(誥勅)은 맞은 후 하례를 드리고 교서를 반포하는 것이 당연한 절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본조의 문적이 산실되어 만약 특별한 변례(變禮)를 당하면 전혀 고증할 만한 서적이 없습니다. 이번 내린 고칙에 대하여 《오례의(五禮儀)》의 예전만 상고한 결과, 국휼(國恤) 중 경사를 맞아 하례를 드리는 조문은 없었고, 승문원에 소장한 《표전등록(表箋謄錄)》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만력(萬曆)기유년012) 선조(宣祖)의 국휼 때 이원익(李元翼)이 수상이 되어 전문(箋文)을 올려 봉전(封典)을 하례드린 전례가 있었는데, 그때에는 필시 구례를 원용하여 행하였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하례를 베풀 필요가 없으니 수의하지 말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교서를 반포하여 중외에 고유(告諭)하는 일만은 빠뜨려서는 안 됩니다. 《오례의》의 국휼시 교서를 반포하는 의절에 의하여 거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전부터 국가의 경사에 조칙이 내려진 후에는 곧 몸소 황제의 은혜에 감사하는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록 《오례의》에는 실려 있지 않으나 조종조로부터 시행하던 일입니다. 이번에 내린 고명은 실로 일국의 더없는 경사이므로 황제의 은혜에 감사하는 예를 전례에 따라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만 성상의 병환이 아직 쾌차하지 않았는데 하루 안에 번잡한 의식을 거행하면 옥체를 더 손상할까 걱정입니다."
하니, 전례를 상고하여 거행하라고 답하였다.

 

김덕함(金德諴)을 대사간으로, 신천익(愼天翊)을 교리로 삼았다.

 

4월 22일 계미

공유덕(孔有德)·경중명(耿仲明) 두 적이 진지를 옮겨 노병(虜兵)과 서로 연하여 진을 치자 중국 병력이 가도(椵島)로 물러갔다.

 

4월 24일 을유

춘신사(春信使) 박로(朴𥶇)가 정주(定州)에서 치계하기를,
"용골대(龍骨大)가 신으로 하여금 잠시 정주에 머물러 있다가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동행하자고 합니다. 지금 신은 전진하고 싶지만 전혀 가게 할 리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비국이 회계하기를,
"춘신사의 행차를 중지할 수는 없으나 용골대가 동행하자고 한다면 잠시 머물러 기다리는 것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용골대가 신사를 만류하는 것은 너무도 흉측한 간계이다. 그들을 속히 가게 하여 그의 술책을 빠지지 않도록 하라. 금나라 사람이 만약 예단이 약소하다고 힐책하거든 ‘이번에 가지고 온 예단을 오히려 약소하다고 여기면 차후에는 다시금 마련하여 가지고 올 길이 없다.’고 말로 대답하되, 명백히 말하여 그들의 한없는 욕심을 끊게 하라."
하였다.

 

민응형(閔應亨)을 집의로, 이상질(李尙質)을 헌납으로 삼았다.

 

4월 28일 기축

호차(胡差) 용골대와 녹지(彔只)가 서울에 왔다. 구관소(句管所)가 아뢰기를,
"신 등이 금나라의 차사(差使)를 만나 보고 그들에게 나온 이유를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가 하늘의 도움을 받아 아노(阿奴)·차흘라(車訖羅) 두 나라에서 귀순한 자가 매우 많고, 투항한 모문룡(毛文龍) 군사도 수만 명에 달하는데 이들을 구제할 수 없어서 식량을 얻었으면 한다…….’ 하기에, 신 등이 말하기를 ‘이른바 모문룡의 군사란 공(孔)·경(耿) 두 적이 아닌가? 이들은 중국의 반장(叛將)이며 우리 나라의 수적(讐賊)이므로 군사를 엄명하여 대비하고 있는 중인데 어찌 양식을 줄 리가 있겠는가.’ 하였더니, 용골대가 말하기를 ‘이들이 처음 가도의 꾀임에 빠져 섬으로 투입할 적에, 귀국이 땅을 빌려 주면서 맞았고 양식을 주어 가지고 가게 하였으면서도 지금 우리에게 귀순한 후에는 무엇 때문에 유독 역적이라고 하면서 원수같이 보는가.’ 하였습니다.
신 등이 말하기를 ‘이 무슨 말인가? 경중명(耿仲明)은 너희 나라 선한(先汗)이 양육하던 사람이었으나 도리어 요민(遼民)을 거느리고 섬으로 투입하려고 맨 먼저 선동하였으며, 공유덕(孔有德)은 모문룡 집안의 하인으로 처음 유흥치(劉興治)와 함께 은밀히 우리 나라를 도모하다가 실패한 후 즉시 중국을 배반하고 등주(登州)·내주(萊州)의 사람들을 도륙하였으니, 이는 더없이 흉악한 자이다. 너희 나라도 우리와 같이 원수로 보리라고 생각하였는데, 도리어 우리를 책망한단 말인가. 지금 그들이 너희 나라로 돌아간 것도 허물을 뉘우치고 의리를 사모해서가 아니라, 세력이 궁박해져서 잠시 휴식을 취하려는 계책이다. 그런데도 그들을 의심없이 받아들이고는 이어서 우리 나라에서 화를 끼치려 하니 너희 나라를 위해서 잘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또 이른바 귀순자들이 머리를 깎고 너희 나라에 귀순하였는가? 따로 진지를 구축하고 머물러 있으면서 아직도 배반하려는 꾀를 품고 있으니, 우리 나라 변방 고을에서만 조석으로 변란에 대비해야 할 뿐만 아니라, 너희 나라에도 결국 화근(禍根)이 되고 말 것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머리를 깎고 안 깎는 것이야 결국 우리의 조치에 달려 있다. 하필 이것을 가지고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는 한(汗)의 서신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 서신에 ‘새로 투항해 온 산동(山東)의 관군은 내가 요동(遼東)을 취할 때 얻은 자들인데 계속 배반하고 섬으로 들어갔었소. 이때 귀국이 양식을 주어 구제하여 그 세력을 양성하였는데, 오늘에 이르러 하늘이 도와 주어 그들이 갑사(甲士) 2만과 배 1백여 척을 거느리고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으니 그들을 구제할 양식을 다시 귀국에 부탁해야 할 것 같소. 그들이 명나라에 붙어 있을 때에는 귀국이 보살펴 주다가 우리 나라로 붙었다고 하여 사체를 바꾼다면 이는 형제의 나라로서 우애하는 도리가 아닐 것이오. 귀국은 힘써 이웃간의 우호를 돈독하게 도와 주어야 할 것이오. 그 나머지 이야기는 모두 차사로 간 신하가 말할 것이외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지난해 만월개(滿月介)가 왔을 때 다만 대신으로 하여금 접대하게 하였으니, 지금 역시 그 예에 따라 거행하라."
하였다.

 

도독 주문욱(周文郁)이 영패(令牌) 3장을 보냈는데, 그 하나는,
"적의 배가 의주에 바싹 다가왔는데 그곳은 조선의 지역이므로 책임이 있다. 그곳 총병관은 밤중이 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바람세를 타서 불을 놓아 모두 태워 없애어 역적이 조선 땅에서 출몰하는 걱정을 끊으라. 그러면 보상으로 은(銀) 5백 냥을 줄 것이다."
하였고, 또 하나는,
"서로 싸울 때 진중에 임한 장병 가운데 용맹이 있는 자와 공로가 있는 자 및 사망자와 상처를 입은 자들을 상세히 적어서 통보하여 조정에 주문하는 근거가 되게 하라."
하였고, 또 하나는,
"임경업(林慶業)은 하늘을 감동시킬 만한 충의로 적진에 임하여 분발하였으니, 화폐(花幣)로 포상하여 권장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고, 또 당보(搪報)의 추고를 보냈는데, 이는 곧 군문에 제보한 서신으로 대개 그들이 힘껏 싸워 승리를 거둔 일을 과장한 것이었다.

 

한여직(韓汝溭)을 형조 판서로, 채유후(蔡𥙿後)를 부응교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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