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임진
호차가 서울로 들어오려고 할 때에 대신을 명하여 의정부에서 접대하게 하였는데, 호차가 사양하고 가지 않자, 이어 평성 부원군(平城府院君) 신경진(申景禛) 등을 보내 그의 관소(館所)로 나아가 보게 하였다. 이어 등주의 적에게 양식을 줄 수 없다는 것과 토산품의 예단 수량을 증가할 수 없다는 뜻을 말하자, 호차가 계속 따졌다. 또 말하기를
"이 두 가지 일 외에 또 개시(開市)의 요청이 있는데 모두 허락을 받지 못하고 보니 마음에 매우 부끄럽다. 어떻게 한(汗)에게 보고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신경진 등이 아뢰기를,
"호차가 맡아 가지고 온 세 가지 일 중에서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뜻을 보니 자못 무료해 하는 것 같으니 지금 특별히 후대하여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어야겠습니다."
하니, 묘당에 말하라고 답하였다.
5월 2일 계사
강원도 금성현(金城縣)에 큰 우박이 내렸는데 그 형상이 사람의 얼굴과 같았다.
5월 3일 갑오
춘신사 박로가 치계하기를,
"금나라의 왕자들도 나오고 있으니 우리 나라 사신이 들어가는 것은 오직 그들의 허락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용골대가 이미 들어 갈 수 없다고 말하였으니 왕자 및 한의 생각 또한 어찌 이에게 벗어나겠습니까. 다시 호역(胡譯) 권인록(權仁祿)을 보내 그들의 의사를 탐지한 후에 강을 건너겠습니다."
하니, 비국이 회계하기를,
"처음 박로의 장계로 인하여 성상이 매우 준엄한 비답을 내렸으니, 박로는 시각을 다투어 길을 떠나야 할 것인데 아직까지 머물러 있으니 몹시 놀랍습니다. 용골대가 출발하기에 앞서 주야를 가리지 말고 전진하게 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돌아온 후 잡아다 추문하여 임금의 명을 하찮게 여긴 죄를 징계하라."
하였다.
금나라 차사 용골대 등이 떠났다.
5월 4일 을미
강석기(姜碩期)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5월 5일 병신
간원이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호조의 문서가 산란하여 열읍에서 바친 물건을 기록하지 않기도 하였고 기록한 것마저도 지우고 추후 보충한 것들이 많았으며, 정간(井間) 1책도 도둑을 맞았다고 합니다. 낭청을 파직하고 당상을 추고하소서. 또 서리들의 농간이 그지없는데, 그 중에서도 산원(算員)이 더욱 심합니다. 십수 인만 남겨두고 모두 내보내어 좀도둑의 피해를 제거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6일 정유
상이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영칙례(迎勅禮)를 거행하였다. 그 칙서에,
"그대는 대대로 동쪽 변방을 지키며 일찍부터 충순(忠順)으로 일컬어졌다. 그런데 그대 아비에 이르러 작위를 이어받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이번에 그의 추봉(追封)을 주청해 오니 효성이 가상하다. 특별히 예부(禮部)의 건의를 허락하여 그대 아비를 조선 국왕(朝鮮國王)으로 추봉하고 그대 어미 구씨(具氏)를 조선 국왕비(朝鮮國王妃)로 추봉하여 고명(誥命)을 내리고 시호(諡號)를 준다. 그대가 이제 이 영화를 입었으니 그 광채가 번방에 빛나리라. 정성과 절의를 더욱 견실히 하여 이전의 아름다움을 없애지 말라. 공경히 할지어다. 그러므로 하유한다."
하였고,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가 제(制)하기를,
"짐이 생각건대, 조회할 때마다 임무를 잘 수행하니 그 충성 변방을 세우는 중요성에 드러났고, 상소를 올려 예묘(禮廟)를 빛내었으니 그 의전 근본에 보답하는 마음에 융숭했다. 그래서 작위를 높이 추숭(追崇)하였고 시호도 동시에 내리니 봉함(鳳啣)은 송농(松隴)에 높았고 연익(燕翼)은 예원(醴源)에 빛났다. 그대 정원군(定遠君)은 조선 국왕의 아비로 명성은 백미(白眉)처럼 전파되었고 재능은 자전(紫電)을 능가했다. 가통을 이어받아 기대를 모았으니 물려주는 유업 받아야 할 것인데, 향년이 길지 못해 부모의 시중을 들지 못한 채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그대를 닮은 어진 아들이 있어 서업을 이어받아 내조(來朝)하였다. 그 선조를 받드는 효심으로 아비의 공렬을 전대보다 빛내 줄 것을 간청하기에, 특별히 그대의 돈독한 생각을 이해하여 포상을 내린다. 이에 그대를 추증하여 조선 국왕으로 삼아 공량(恭良)의 시호를 주고 고명(誥命)을 내린다. 아, 문명(文命)을 널리 펼 때부터 그대의 나라가 맨 먼저 충성을 바쳤고, 번방이 모두 법도를 따르자 그대의 아들이 충성을 다하였다. 실로 일덕(一德)으로 돌아온 것인데 어찌 빛내는 윤음(綸音)을 아끼겠는가. 영혼은 경건히 패복하여 영원히 복을 누리라."
하였고, 봉천 승운 황제가 제하기를,
"강한(江漢)에 풍화가 유행하니 마름이 빛나 어울리고, 하산(河山)에 풍도가 흘러퍼지니 오이넝쿨이 얽혀 번창한다. 그러므로 떳떳한 전장으로 내려 번신(藩臣)의 걱정을 받아들였고 두터운 총은을 주어 현모(賢母)의 자비심을 밝혀 준다. 배권(桮棬)에 사모하는 마음이 생기어 윤음(綸音)이 이에 빛난다. 그대 구씨(具氏)는 정원군의 아내이며 조선 국왕의 어미로 엄숙하고 화락하여 법도가 있으며 침착하고 단정하여 어긋남이 없다. 보무(寶婺)013) 의 정기를 타고나 기특함을 길렀고, 선규(璇閨)014) 에 빈궁으로 들어와 왕자의 짝이 되었다. 경사는 인지(麟趾)와 부합하였고 충성은 오유(鰲維)를 이었다. 아비가 이미 자식을 두어 종사를 이었으니, 지어미는 지아비를 따라 관작을 받아야 할 것이므로 이에 그대를 조선 국왕비로 추봉한다. 산하같은 큰 유업을 빛내어 그 기무의 가르침은 대를 이을 때 빠뜨리지 않고, 오복을 겸비한 아름다운 규범을 천양하여 그 상서로운 부절이 위로 어버이 친애함에 부합되었다. 아득한 영혼은 이를 알거든 삼가 받들어 게을리하지 말라."
하였다.
5월 7일 무술
대사(大赦)의 교서에,
"어버이를 추존하고 싶은 효심이 간절하여 호소에 정성을 쏟았더니, 황제가 효도의 계승을 헤아려 주어 현양하고 싶은 정성을 이루었다. 이에 비로소 유명에 유감이 없게 되었으니, 그 경사를 조야에 펴야 하겠다. 생각건대, 우리 황고(皇考)께서 일찍이 성인의 자질을 타고났으므로 반드시 복록을 누리고 반드시 명예를 얻어야 할 것인데, 대덕(大德)의 성과를 보지 못하고, 무궁한 경사와 무궁한 걱정으로 왕업의 터전을 열었다. 과덕한 이 몸에게 그 책임을 맡겨주어 영광스럽게도 그 대업을 받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통서를 이었으니 비록 신민의 추대에는 부응하였으나 아버지의 신위가 비어 있으니 도리어 하늘처럼 끝없는 은혜를 보답할 수 없게 되었다. 작호(爵號)를 올려드리는 것은 사실 구전(舊典)에 의거하였으니 대개 전에 없던 일이 아닌데, 추봉의 윤허가 지금까지 지연되었으니 나에게 후손이 있다고 하시겠는가. 하루도 잊지 못하고 10년에 이르렀다. 무슨 낯으로 임금의 자리에 앉아 있겠는가. 다만 그분의 아들이기에 존귀하다는 걸 믿으면서 북신(北辰)을 우러러 보며 하늘로부터 소원을 풀어주길 바라고 있었는데 무슨 다행인지 황제의 조칙이 반포되어 시원스럽게 빛난 총광(寵光)을 보게 되었다. 동방에 영광이 펼쳐져 시호의 포전을 받았고, 내전에 광채가 더해져 부덕의 총애가 빛났다. 명도(冥途)가 다시 밝아져 간절한 소원을 겨우 펴게 되었고, 온 해동(海東)이 모두 환호하는데 어찌 큰 혜택을 반포하지 않겠는가.
이달 초7일 새벽 이전을 기하여 모반 대역(謀反大逆)과 모반(謀叛), 자손으로서 조부모 부모를 모살하거나 구타한 자, 처첩으로서 남편을 모살한 자, 노비로서 주인을 모살한 자, 고의로 살인을 꾀한 자, 독약과 저주로 사람을 해친 자, 국가와 강상에 관계된 자, 장물·강도·절도자를 제외하고, 잡범 사죄자, 도형·유형으로 중도에 부처된자, 안치되었거나 군에 보충된 자, 이미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는 자는 모두 죄를 용서하여 석방하고 감히 유지(有旨)가 있기 이전의 일로 서로 고하는 자는 그 죄로 처벌하라. 관직에 있는 자는 각각 1등급의 자급을 올려 주고 자급을 더 올려 줄 수 없는 자는 대신 그의 친족에게 가자하라. 아, 조종(祖宗)을 공경하고 받드는 것이 진실로 귀신과 사람의 화목에 합해졌으니, 복을 거두어 백성에게 주어서 인수(仁壽)의 경지를 이룩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므로 이에 교서를 내려 보이노니 의당 상세히 알 것으로 생각한다."
하였는데, 홍문관 제학 홍서봉(洪瑞鳳)이 지었다.
5월 8일 기해
성하연(成夏衍)·오여온(吳汝穩)·이원여(李元輿) 등의 위리(圍籬)를 철거할 것을 명하고, 강익문(姜翼文)·박대진(朴大辰)·김승인(金承仁)·황여팽(黃汝彭)·이응택(李應澤)·정충립(鄭忠立)·임헌지(任獻之)·조엄(趙淹)·민결(閔潔)·유건(柳健)·정성(鄭晟)·황중윤(黃中允)·임기지(任器之)·임징지(任徵之)·김홍원(金弘遠)·홍영(洪迎)·김경선(金慶先)·조유도(趙有道)·조유항(趙有恒)·강신립(姜信立) 등을 모두 석방하라 명하고, 김상준(金尙寯)·박동량(朴東亮)은 시골로 돌려보낼 것을 명하였다.
5월 11일 임인
도독(都督) 오안방(吳安邦)이 파면되었는데, 그가 적을 소탕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총병(摠兵) 양어번(楊御蕃)이 등주(登州)로부터 와서 대신 그 군중을 거느렸다.
예조가 아뢰기를,
"지난해 추숭의 경사로 인하여 이미 증광 별시(增廣別試)를 설치하였는데, 이번에 내린 책명(冊命)은 또한 막대한 은전입니다. 육백관시(六百館試)를 설치하여 3경(三經) 중 1경을 자원하고 4서(四書) 중 1서를 추첨하게 하여 선비를 뽑으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책명이 이미 내렸으니 지석(誌石)을 개서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책보(冊寶)를 올리는 예를 이미 명년 담제 후에 하기로 정하였으니, 그때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지문(誌文)과 함께 완성하는 것이 편리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상이 주청사 홍보(洪靌), 부사 이안눌(李安訥), 서장관 홍호(洪鎬) 등을 불렀는데, 이안눌은 병으로 나오지 않았다. 상이 홍보 등에게 묻기를,
"중국의 형세가 전과 비교하여 어떠하던가?"
하니, 홍보가 아뢰기를,
"역관 등이 말하기를 ‘물력을 옛날의 성대하던 때만 못한데 사대부들의 탐욕스런 풍조가 크게 일고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등주(登州)의 적은 패전하여 도망쳤는가, 스스로 물러갔는가?"
하니, 홍보가 아뢰기를,
"조대수(祖大壽)의 아우 대락(大樂)이 격파하였다고 합니다. 또 산서(山西) 지방에 도둑떼가 일어나 주현(州縣)을 노략하고 있으나 조정에서 금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선온(宣醞)이 끝난 다음, 표피(豹皮)·녹비(鹿皮)·호초(胡椒)·단목(丹木) 등의 물건을 하사하였다. 이튿날 홍보에게는 초자(超資)와 아울러 노비 7구와 전 30결을, 이안눌에게는 초자와 아울러 노비 5구와 전 20결을, 홍호(洪鎬)에게는 가자와 아울러 노비 4구와 전 10결을, 역관 장예충(張禮忠)에게는 가자와 아울러 노비 2구와 전 2결을 사급하고, 그 나머지의 군관·역관 등에게는 차등이 있게 시상할 것을 명하였다.
5월 12일 계묘
대신을 보내 숭은전(崇恩殿)에 고명(誥命)을 올리고 이어 개제주 분황제(改題主焚黃祭)를 거행하였는데, 고명 봉진관(誥命奉進官) 영의정 윤방(尹昉)과 분황제 초헌관 좌의정 김류(金瑬)에게는 각각 안구마(鞍具馬) 1필씩을, 아헌관·종헌관 신익성(申翊聖)·한여직(韓汝溭)과 천조관(薦俎官) 목대흠(睦大欽), 당상 집례(堂上執禮) 오단(吳端), 예조 판서 홍서봉(洪瑞鳳)에게는 각각 숙마(熟馬) 2필씩을, 이미 준직(準職)된 자에게는 반숙마(半熟馬) 1필을, 승지 오숙(吳䎘), 【 고명(誥命)을 모시고 감.】 봉고명관(奉誥命官) 홍처후(洪處厚)와 김여경(金餘慶), 당하 집례(堂下執禮) 홍서(洪恕)·고명등황관(誥命謄黃官) 유준창(柳俊昌)과 엄정구(嚴鼎耉)에게는 각각 반숙마 1필을, 제주관(題主官) 한인급(韓仁及)과 예방 승지(禮房承旨) 여이징(呂爾徵) 등은 가자(加資)를, 대축(大祝) 심지원(沈之源)·윤구(尹坵)·오당승(吳達升)·신민일(申敏一)은 모두 준직을 제수하고, 그 나머지 집사들에게는 차등이 있게 포상하라 명하였다.
5월 13일 갑진
김육(金堉)을 승지로 삼고, 특명으로 박지계(朴知誡)를 집의로 삼았다. 병조가 아뢰기를,
"역관 장예충에게 가자의 명이 내렸습니다만 장예충은 지금 숭록(崇祿)으로 있으므로 이제 한 자급을 더 올려 주면 보국(輔國)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전부터 미천한 사람은 보국에 오르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렇다면 실직(實職)을 제수하라."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죽은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녹봉을 3년까지 그대로 지급하라."
5월 14일 을사
한성부(漢城府)의 못 물빛이 피와 같았다.
관향사(管餉使) 박추(朴簉)가 치계하기를,
"안주(安州) 및 청북(淸北) 각성에서 지출되는 쌀과 콩의 수량을 조사하니, 1개월 동안의 소용이 8천 2백 34석인데, 일로(一路)에 왕래하는 군병이 소비하는 것, 강음(江陰)에서부터 의주(義州)로 이르는 각처의 파발꾼과 파발마에 지급되는 것, 북경으로 가는 배에 실어 보낼 양식, 이번 해변을 파수하며 변에 대비하는 군졸에게 지급되는 양식 등은 모두 이 수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현재 조사하여 회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수를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1개월에 방출해야 하는 쌀과 콩은 거의 1만 석에 이릅니다. 진실로 이 양식을 잇댈 방책이 없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속히 지휘하게 하소서."
하니, 비국이 회계하기를,
"천장(天將)이 이미 철수하여 돌아갈 의사가 있으니 도원수와 부원수는 오래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부하 장졸은 잠시 각 고을에 나누어 보내 먹게 하고 임경업(林慶業)만 남겨두어 변에 대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5월 16일 정미
헌부가 아뢰기를,
"나라에 막대한 경사가 있어 특별히 전례에 없던 은전을 베푸시니 그 뜻이 몹시 성대합니다만 적신(賊臣)의 잔당은 죄를 사면할 수 없는데 모두 은혜를 입어 사면되었으니, 국가의 징벌하는 법이 어찌 이처럼 관대할 수 있겠습니까. 성하연(成夏衍)은 이위경(李偉卿) 수역(首逆)의 폐모소(廢母疏)에 동참하였고, 오여온(吳汝穩)은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이며 정인홍(鄭仁弘)의 수족으로 서로 왕래하면서 흉모 비계(凶謀秘計)를 꾸몄고, 이원여(李元輿)는 역적 괴수의 일가 사람으로 모든 논의에 참여하여 모르는 것이 없는 자이니 목숨을 보전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입니다. 어찌 위리를 철거하여 편안히 방임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강익문(姜翼文)의 수의팔자(收議八字)015) 는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으며, 정성(鄭晟)은 폐모론(廢母論)을 앞장서서 주창하였으며, 황중윤(黃中允)·임기지(任器之)·정충립(鄭忠立)·임헌지(任獻之)·조엄(趙淹)·민결(閔潔)·유건(柳健) 등은 모두 이첨의 부하로 폐모론에 부회하여 인륜과 기강에 죄를 지은 자이므로, 유찬(流竄)의 율(律) 또한 형을 잘못 집행한 것이니 결코 전면 석방할 수 없습니다. 이선술(李善述)은 이이첨에서 빌붙어 무고(誣告)로 옥사를 일으켰으며, 또 역적 이괄(李适)에게 영합한 죄가 있습니다. 이운(李蕓)은 남의 뜻에 따라 대옥(大獄)을 조성하였고, 이현경(李顯慶)의 부자를 무고해 죽였으며, 한유상(韓惟翔)·조존도(趙存道)는 역적의 무리와 절친한 자로서 그 흉악한 음모에 협찬하였으며, 조정립(曺挺立)·정양윤(鄭良胤)·남명우(南溟羽)·곽천호(郭天豪)·윤성임(尹聖任)·홍경정(洪景艇)·곽천성(郭天成)·이담(李憺)은 삼사의 관원이 되어 폐모론에 동참하기도 하고 흉도의 괴수와 결탁하여 오랫동안 근시(近侍)에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귀양보내거나 죽여도 불가할 것이 없는데 심지어 첩지를 주어 서용(敍用)하라는 은명을 받게까지 하니, 분개하고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이미 내리신 은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성하연 등의 범죄가 비록 중하기는 하나 벌을 받은 지 오래되었고 여러 차례의 대사령을 거쳤으니, 경중을 참작하여 차례로 석방하여도 불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5월 18일 기유
태감(太監) 하봉충(河逢沖)이 또 등주(登州)로부터 군중(軍中)에 와서 후태감(侯太監)과 그 직질이 동등하다고 자칭하니, 조정에서 접반사(接伴使) 및 문안사(問安使)를 차임하여 보냈다.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 병으로 사직을 청하였는데, 29번째 이르러 상이 허락하였다.
5월 19일 경술
김상용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이명웅(李命雄)을 헌납으로, 홍처후(洪處厚)를 정언으로 삼았다.
5월 20일 신해
태감(太監) 후용(侯用)이 등주로 돌아갔다.
5월 21일 임자
함경 감사 김기종(金起宗)이 치계하였다.
"회답서(回答書)를 낭호(郞胡)에게 내다 주니, 낭호가 노하여 말하기를 ‘한서(汗書)에서 다룬 문제가 수삼 건인데, 쇄환하지 않은 호종(胡種)이 6분의 5, 교환하지 않은 물화가 10분의 9, 추심하지 않은 채무가 3분의 1로서 일마다 이처럼 책임 막음만 하고 있다. 또 들으니, 호종을 쇄급하는 일로 인하여 병사를 잡아 갔다고 하니, 냉대하는 기색을 이것으로 알수 있다.’ 하고는 드디어 6월 16일 일시에 철수해 갔습니다."
5월 22일 계축
김기종을 호조 판서로, 이안눌(李安訥)를 예조 판서로, 최명길(崔鳴吉)을 대제학으로, 김상헌(金尙憲)을 함경 감사로 삼았다. 김상헌은 정사를 논하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려 시골에 물러가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 제수가 있었으나 병으로 인피하고 나가지 않았다.
5월 24일 을묘
이조 판서 최명길이 차자를 올려 겸임한 대제학을 체차해 주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경의 재주와 학문이 이 직임에 적합하다. 사양하지 말고 속히 직책을 살피라."
5월 25일 병진
김광현(金光炫)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5월 28일 기미
한인급(韓仁及)·김영조(金榮祖) 등을 경사(京師)로 보내 세자 책봉(世子冊封)을 주청하고 아울러 추봉 사은사(追封謝恩使)·동지 사(冬至使)·성절 천추 진하사(聖節千秋進賀使)를 겸하게 하였다.
조익(趙翼)을 대사간으로 삼고, 김신국(金藎國)을 함경 감사(咸鏡監司)로 삼았다. 이는 비국이 파격적으로 추천한 것인데 헌부가 자급이 높아 제수할 수 없다는 것으로 아뢰어 체직되었다.
5월 29일 경신
홍문관 부제학 이식(李植)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보건대, 근래 천심이 순편치 못하여 경계가 잦아 비상한 재해가 역사에 끊임없이 쓰입니다. 영두성(營頭星)이 땅에 떨어지고 못 물빛이 붉고 사람의 얼굴 형태를 닮은 우박이 내리는 재변이 수월 내에 거듭 나타나며, 강도가 국경을 압박하여 큰 불화를 열었으니, 이와 같은 이변은 모두 병화의 조짐에 해당됩니다. 하늘이 우리 나라를 경계함이 마치 귀에 대고 가르쳐 주는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근래 절실한 바른 의논은 듣기 싫어하고 거부하는 생각이 싹트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언사가 화평하지 못하고 지휘가 상도에 어긋나 화기를 손상하고 덕의를 잃고 계시니 그 해가 적지 않습니다.
또 남자가 낮에는 밖에 거처하고 밤에는 안에 거처하는 것은 음양의 기운을 따르는 것입니다. 지금 성상의 옥체가 뜻밖에 미령하시어 오랫동안 안정하지 못하고 깊이 내전에만 거처함으로써 정신이 태만해지기 쉽고 혼암한 기운이 상승하기 쉽습니다. 지금 비록 정전에 나아가 경연을 열지는 못하나, 한가히 쉬시는 동안 간편한 옷차림으로 편히 앉아 한두 신료를 인접하여 고금의 마땅한 정치를 의논하거나 혹은 노성한 의관(醫官)을 인접하여 보양의 방책을 문의하면서 답답한 기분을 풀고 양명한 기운을 받아들여, 원기를 왕성하게 하고 나쁜 찌꺼기를 스스로 물러가게 하여, 그것으로 만화(萬化)의 근본과 제복(諸福)의 근본을 삼는다면 아마 도움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조정이나 사대부들 사이의 풍습의 폐단과 정령의 과실을 일일이 들어 세기는 어려우나, 신 등이 그 중에 편중되어 극심한 것만 들어 대략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하나는 사론(士論)을 너무나 미워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너그러운 정치를 너무나 깎는 것입니다. 성상께서 난을 제거하고 올바른 정치를 회복하여 기강을 붙들어 세우시니 이른바 사론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 불행히도 중간에 두어 번의 조처에 대해 조정의 의논이 분열되어 갑론 을박을 면치 못하였으나 이는 일시적 일일 뿐이므로 조정은 이에 대해 사론이 아니라고 자처하면서 자신과 달리하는 자에 대해서는 문득 사론이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후부터 대개 논의가 혹시라도 조정의 계획이나 임용에 장애된 것이 있으면 문득 사론이라 배척하면서 일을 그르치는 부박한 의논이 섞이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까.
돌아보건대, 군자는 사론에 대하여 단점은 버리고 장점만 취하기 때문에 이치에 순조로워 일이 이루어졌고, 소인은 사론에 대하여 단점을 들어 장점까지 공격하기 때문에 사세를 격동하여 화가 조성되었는데, 치란과 안위가 여기에서 나뉩니다. 지금 비록 이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으나 또한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선 사론이 바르게 하고자 하는 것으로 말한다면 혼조(昏朝) 때 범람한 짓을 한 무리나 과제를 차작하여 부당하게 벼슬한 무리로서 당초 조정에서 정의를 들어 물리쳤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각각 안면을 통하여 높은 직위를 도모하고 이름난 고을을 역임하면서 탐욕을 멋대로 부려 옛날의 태도를 죄다 드러내고 있으며, 노정(虜庭)의 미천한 포로와 권문의 빚받이꾼으로 온갖 추태의 책망거리만 있고 조그마한 공로도 기록할 만한 것이 없는 자들이 일시에 갓을 털고 일어나 줄줄이 곤수로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크게 은전을 베풀어 중죄인을 모두 석방하였습니다. 이들은 그전부터 조정에서 부정한 사람 쓰기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으며 동료들이 이미 같이 벼슬길에 올랐으니 어찌 초야에 안정하고 앉아 허물을 반성하며 여생을 마치려 하겠습니까. 점차 벼슬길을 도모하여 관직을 더럽힐 날이 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올바른 인재를 이미 다 등용하였으나 아직도 여러 관직에 빈자리가 많아 이들을 제외하고는 달리 취할 사람이 없다면, 그중에서도 허물을 고치고 새로운 길을 도모하는 자를 취하는 것 또한 한 가지 방법일 듯합니다. 지금 정의를 지키는 개결한 선비로서 한산직에 버려져 있는 자가 얼마나 많으며 맹금과 같은 무예를 지니고 파묻혀 있는 무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공은 없고 죄만 있는 부류에서 구하여 백성을 다스리고 무리를 거느리는 자리에 두고자 하여, 군자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고 소인으로 하여금 기세를 부리게 합니다. 그리하여 대간은 감히 거론하여 탄핵하지 못하고 유사는 청탁을 분명히 못하여 구차하고 소략한 습성에 점점 물들어 함께 변해가고 있으니, 어찌 이론(異論)을 배척하는 데에서 오는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상벌이 날로 문란하고 풍속이 날로 혼탁해져서 앞서 이른바 어진 공경과 이름있는 사대부로서 오히려 풍속에 따라 변절하여 국법을 무시하고 사심을 자행하는 자가 많습니다. 그런데 박승종(朴承宗)의 노예와 이이첨의 심복으로 하여금 마음과 생각을 고치어 조정에 봉사하게 하기란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반정 처음에 너그러움으로 학정을 대신하고 번거롭고 가혹한 정치를 일소하여 사신(使臣)과 수재(守宰)가 모두 청렴과 자혜로서 스스로 힘썼으므로 백성들이 어깨를 쉴 가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유사가 목전의 효과에 급급한 나머지 가혹하게 하였으며, 결국은 백성들에게 선심을 써서 명예를 구한다는 풍설까지 나왔습니다. 그들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청렴 근신한 것을 졸렬하다 하며 관대한 것을 오활하다 하며 자상하고 자애로운 것을 교활하다 하고, 그들 편에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잔혹한 것을 유능하다 하며 사치스럽고 방종한 것을 활달하다 하며 억압하여 잘 처리해 내는 자를 요령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이른바 유능한 신하로서 여러 고을에서 보고 본받을 만하다는 자가 한 도내에도 왕왕 있으나, 그들의 소행을 살펴보면 가혹하게 거두어들여 사복을 채우고 함부로 기록하고는 별도로 대비한 것이라 칭하고 음식을 갖추어 사객(使客)들을 즐겁게 해주고 선물을 후하게 써서 조정 고위와 결탁하여, 안으로는 자신을 살찌우고 밖으로는 남을 즐겁게 해 주는 데 불과합니다. 그들이 마련해 내는 것은 부당한 과세와 포학한 형벌에서 나온 것입니다.
조정이 이론(異論)을 싫어하자 성상 또한 싫어하셨고 조정이 관대한 정치를 싫어하자 성상 또한 싫어하셨으며 조정이 가혹한 관리를 좋아하자 성상 또한 좋아하셨습니다. 추천하고 서용할 때 용사(用捨)의 뜻을 드러내 보이면 관망자가 더욱 많아질 것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대개 방법의 선택을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없고 사세의 살핌을 세밀히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민심과 풍속의 소재를 더욱 삼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일체 공리를 도모하는 설이 판을 쳐 인의 신양(仁義信讓)의 풍도가 사대부들 사이에 유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예교가 무너져 상기(喪紀)가 크게 문란해지며, 도학이 막혀 요술이 멋대로 행해지며, 탐욕의 풍습이 날로 성하여 적민(賊民)이 날로 일어나니, 이는 그 유래한 원인이 있습니다.
아, 국가에는 군사도 없고 재력도 없고 기계도 없고 대체로 아무 것도 없습니다. 믿는 것은 민심뿐인데 민심은 원망에 차 있고, 믿는 것은 선비들의 기풍뿐인데 선비들의 기풍이 오염되었습니다. 오랑캐가 오지 않는다면 다행이거니와 다시 온다면 그 전패가 전일보다 심하지나 않을까 염려됩니다. 주자(周子)016) 의 말에 ‘천하의 일은 형세일 뿐이다.’고 하였으니, 그 중요성을 알고서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타산적이고 고역적인 설을 물리치며 모순되고 사특한 정치를 제거하고 한결같이 정직한 사람을 돕고 올바른 도리를 행하며, 간교함을 막고 탐욕을 처벌하며 도를 높이고 예를 숭상하는 것으로 으뜸을 삼아 위로 천리에 순응하고 아래로 민심을 조화시켜서, 재변을 막고 이산을 안집하여 위기의 국세를 유지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자세히 살펴보고 몹시 가상히 여겼다. 진달한 일은 의당 각별히 생각하며 스스로 반성하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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