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8권, 인조 11년 1633년 6월

싸라리리 2025. 12. 30.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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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일 임술

공청도 홍주(洪州) 땅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6월 3일 계해

일본(日本)의 계유년 조(癸酉年條) 세견선(歲遣船) 제4선이 왔다.

 

6월 4일 갑자

채유후(蔡𥙿後)를 응교로, 강학년(姜鶴年)·성여관(成汝寬)을 지평으로, 민응형(閔應亨)을 부응교로, 구봉서(具鳳瑞)를 이조 정랑으로, 신천익(愼天翊)을 헌납으로, 홍서봉(洪瑞鳳)을 예조 판서로, 이명웅(李命雄)을 교리로 삼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근래 나라의 기강이 풀리고 금령이 엄하지 못하여 안동 부사(安東府使) 나만갑(羅萬甲)이 함부로 성혼한 자식을 솔권하였으며, 김제 군수(金堤郡守) 홍무적(洪茂績)도 춘분(春分) 후 솔권하였으며, 충원 현감(忠原縣監) 이소한(李昭漢) 역시 춘분 후 가족을 근지에 데려다 두었으니 이 모두 해괴한 일입니다. 나만갑과 홍무적을 파직하고 이소한을 추고하소서."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조종조에는 관제가 몹시 엄하여 남행(南行)과 무반(武班)으로서 2품 실직과 송관(訟官)의 장이 되는 경우에는 반드시 유명(儒名)이 있고 명망이 현저한 자로 간혹 차임하였으나 또한 몹시 드물었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와서는 공이 사를 이기지 못하여 전연 관직을 위해 사람을 택하는 일이 없습니다. 지금 정목(政目)을 보니, 홍진도(洪振道) 같이 이르는 곳마다 치적이 없으며 한회일(韓會一) 같이 본래 이력이 없는 사람이 경조(京兆)와 예원(隷院)의 의망에 들어, 홍진도는 낙점을 받기까지 하였으므로 여론이 모두 해괴하게 여깁니다. 우윤(右尹) 홍진도에 대하여 즉시 개차(改差)를 명하고 이조의 당상과 낭청을 모두 추고하소서."
하였다. 누차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6월 7일 정묘

헌부가 아뢰기를,
"근래 여러 왕자 중 경평군(慶平君) 이륵(李玏)의 횡포가 날로 심하여 공가(公家)의 물건을 임의로 탈취하고 있습니다. 관상감(觀象監)의 천문학(天文學)·지리학(地理學)·명과학(命課學) 등 90여 책과, 예조의 《대명집례(大明集禮)》·《대명회전(大明會典)》·《오례의(五禮儀)》와, 승문원(承文院)의 《사대문궤(事大文軌)》 50여 책과, 도감(都監)의 의궤(儀軌) 등을 모두 탈취해 갔는데, 관원이 감히 금하지 못하고 하리(下吏) 또한 막지 못하여 공가의 소장이 모두 사가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짓을 그치지 않는다면 장차 어디엔들 그 횡포가 이르지 않겠습니까. 경평군 이늑을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평군 늑은 몸에 질병이 있기 때문에 처사가 이와 같다. 아직 그대로 두라."
하고, 이어 중사(中使)를 경평군의 집으로 보내 그 서책 및 누기(漏器) 등의 물건을 가져다 모두 제사로 되돌려 보냈다.

 

최연(崔葕)을 사간으로, 이안눌(李安訥)을 예문 제학으로 삼았다.

 

6월 8일 무진

유성이 벽성(璧星) 위에서 나와 천진성(天津星) 아래로 들어갔다.

 

6월 10일 경오

상이 번침(燔鍼)을 맞았다.

 

공청도의 남포(藍浦)·공주(公州)·홍산(鴻山)·한산(韓山)·임천(林川)·진천(鎭川)·부여(扶餘)·석성(石城)·진잠(鎭岑)·이산(尼山)·정산(定山) 등지에 지진이 일어났다.

 

김광현(金光炫)을 대사헌으로, 여이징(呂爾徵)을 도승지로 삼았다.

 

6월 11일 신미

청북 방어사(淸北防禦使) 임경업(林慶業)이 소를 올려 상을 마치기를 청하자, 상이 이를 허락하고 정봉수(鄭鳳壽)로 대신하게 하였다.

 

집의 박지계(朴知誡)를 승지로 삼았으나 나오지 않았다.

 

6월 12일 임신

달이 심성좌의 큰 별을 침범하였다.

 

6월 14일 갑술

이경의(李景義)를 집의로 삼았다.

 

6월 16일 병자

춘신사(春信使) 박로(朴𥶇)가 심양(瀋陽)으로부터 돌아왔다. 노사(虜使) 용골대(龍骨大)·대소내(大所乃) 등이 한(汗)의 서한을 가지고 왔는데 회답한 것이다. 한의 서한에 세 가지 조항이 있었는데, 그 하나는,
"우리 나라가 인구를 더하게 되어 양식이 부족하므로 귀국의 도움을 받으려 하는데, 귀국은 모씨(毛氏)를 적(敵)으로 여겨 양식을 실어다 적을 기를 이치가 없다고 말하니, 이 말은 실로 부당하오. 지금 모씨는 우리 땅에서 모두 다 안주를 끝냈으며, 우리 나라가 지난해 흉년이 들기는 하였으나 기아의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으며, 이미 본국 대신들의 부요한 집에서 취해다가 인구를 헤아려 넉넉히 주었소. 다만, 생각건대 하늘이 준 선척(船隻)을 버려서는 안 될 것 같기에 군사를 풀어 간수하려는데, 우리 군사가 가지고 갈 양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만 거리가 멀어 운반에 어려움이 있고, 선척을 간직해 둔 곳이 귀국과 거리가 가까워 편리하므로 내가 귀국의 도움을 받으려는 것인데 귀국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내 생각에 귀국은 남조(南朝)와는 부자가 되고 우리와는 형제가 되오. 그러나 부모의 나라가 열 번 말하면 열 번 들어주면서 형제 사이에는 열 번 말한 데 대해 한 번도 들어줄 수 없단 말입니까. 왕께선 생각해 보십시오.
귀국은 이미 명나라로 부모를 삼고 우리 나라를 형제로 삼았소. 그런데 우리 나라가 명나라와 십수 년 동안 싸우며 병화를 맺어 왔으나 귀국은 그 사이에 끼여 승패만 지켜보며 화해를 붙이지 않았으니, 부모 형제의 명칭만 있을 뿐, 실은 재앙을 다행으로 여기고 화를 즐기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자못 두 나라의 승패가 나라의 대소와 사람의 지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늘의 뜻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오. 귀국은 명나라로 부모를 삼고 우리를 형제로 삼았으니, 왕은 곧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명나라의 신료들이 조정의 주륙을 입을까 염려하여 감히 함부로 나서서 주장하지 못하는 것과는 다르오. 그러므로 왕은 부모 형제 사이에서 서로의 사정을 알려 화해를 힘써 주장하여도 부당할 것이 없는 것이오. 진실로 이와 같이 한다면 온 천하가 당장 태평하게 되어 두 나라의 전쟁이 종식될 뿐만이 아니라 귀국의 복됨 또한 작지 않을 것이오.
또 생각건대 병(兵)이란 곧 흉기이므로 실로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오. 다만 화해하고 싶어도 이루어지지 않아 끝내 해산하고 싶어도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오. 나의 이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왕이 한번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오. 전에 들으니, 왕이 남조를 도와 함께 모씨(毛氏)를 공격하였다 하는데, 이는 왕이 자국을 위해서 군사를 보내 공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되오. 그런데 지금 모씨는 이미 요양(遼陽)으로 이주하였고 선척을 간수하는 자는 우리 금나라 군사들인데 지금 귀국의 병선(兵船)이 그곳에 그대로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오? 아마도 이끌고 돌아가야 옳을 것 같소이다. 그러지 않으면 이는 왕이 전쟁을 일으킬 마음이 있는 것이오. 지면은 짧고 할 말은 많소. 나머지는 모두 파견된 사신이 말할 것이오."
하였고, 또 하나는,
"보내 온 예물이 수량에 차지 않지만 번번이 받아 주지 않으면 형제의 화의가 무너질까 염려되어 지금 모두 그대로 받아들였소. 금은(金銀)과 각궁(角弓)은 귀국의 소산이 아니라고 말하나 나는 참으로 귀국에서 나지 않은 게 아니라 실은 아끼는 것이라고 생각하오. 왕이 이미 아끼면서 주지 않는데 내가 강요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래서 이미 허락하였소. 그러나 그 나머지 귀국의 산물은 정수대로 하는 것이 어떻겠소?"
하였고, 또 하나는 의주(義州)에다 개시(開市)를 청한 일이었다. 비국이 아뢰기를,
"금한(金汗)의 세 서찰 중 그 한 가지는 중국과 화해를 청한 것으로 우리에게 그 사이에 끼어들어 중간 역할을 해 줄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비록 알 수 없으나 저들이 얼굴을 바꾸고 귀화하여 두 배반자를 묶어 보내어 그 정성을 표한다면 또한 필시 천조가 허락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서를 볼 때 숨길 만한 말이 없는 것 같으니, 그 원문을 도독(都督)에게 보내어 스스로 조처하게 하면 일은 성취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에겐 손해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만약 갑자기 거절하면 재앙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는 의심을 더욱 사게 될까 염려됩니다."
하니, 답하기를,
"노서(虜書)에 이른 바는 금원(金元)이 송(宋)을 우롱하는 계책이지 마음을 고치어 신하로 섬기려는 뜻이 아닌 것 같으니, 사유를 갖추어 통보해도 무방할 것 같다."
하였다. 비국이 또 아뢰기를,
"한서 중 개시(開市)에 관한 한 건은 저들이 비록 평등한 값으로 하자고 말하나 만약 또 단서를 열어놓게 되면 끝내는 필시 불화를 일으킬 것입니다. 구관소(句管所)로 하여금 반복 개유하게 하고, 답서에도 이 뜻으로 써서 보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18일 무인

이경헌(李景憲)을 우부승지로 삼았다.

 

6월 20일 경진

윤구(尹坵)를 수찬으로 삼았다.

 

토성(土星)이 동함성(東咸星)에 들어갔다가 태미 서원으로 나왔다.

 

6월 21일 신사

도원수 김자점이 의주의 옛성을 수축할 것을 청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용만(龍灣)에 성을 쌓는 일은 과연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 그러나 사세로 보아 실로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백마 산성(白馬山城)을 수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지평 겸사업(持平兼司業) 강학년(姜鶴年)이 부름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고 소를 올려 면직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우리 나라 관제(官制)에 사업(司業)의 명칭이 없었다. 반정후 유술(儒術)을 숭상하여 이 관직을 성균관에 설치하였는데, 그 직질은 사예(司藝)의 아래이며 직강(直講)의 위로 유신(儒臣) 김장생(金長生)을 그 자리에 두어 통솔의 책임을 맡겼다. 그후 박지계(朴知誡)가 추숭론(追崇論)을 주장하자, 이귀(李貴)의 도움을 받아 집의로 사업을 겸임하였다. 강학년이 학문에 힘쓰고 글씨를 잘 쓰며 또 의술(醫術)을 알므로 그 문인 채유후(蔡𥙿後)가 전랑(銓郞)이 되어 힘써 추천한 끝에 드디어 이 직을 겸하게 되었는데, 나오지 않자, 체직되었다.

【태백산사고본】 28책 28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524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우리 나라 관제(官制)에 사업(司業)의 명칭이 없었다. 반정후 유술(儒術)을 숭상하여 이 관직을 성균관에 설치하였는데, 그 직질은 사예(司藝)의 아래이며 직강(直講)의 위로 유신(儒臣) 김장생(金長生)을 그 자리에 두어 통솔의 책임을 맡겼다. 그후 박지계(朴知誡)가 추숭론(追崇論)을 주장하자, 이귀(李貴)의 도움을 받아 집의로 사업을 겸임하였다. 강학년이 학문에 힘쓰고 글씨를 잘 쓰며 또 의술(醫術)을 알므로 그 문인 채유후(蔡𥙿後)가 전랑(銓郞)이 되어 힘써 추천한 끝에 드디어 이 직을 겸하게 되었는데, 나오지 않자, 체직되었다.

 

6월 22일 임오

정백창(鄭百昌)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금나라 차사 용골대·대소내(大所乃) 등이 서울로 들어왔다.

 

6월 24일 갑신

유성(流星)이 기성(箕星) 아래에서 나와 미성(尾星) 아래로 들어갔다.

 

상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금나라 차사 용골대 등을 불러보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첨지(僉知) 윤지경(尹知敬)은 앞서 공청 감사(公淸監司)가 되었을 때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공공연히 기생을 끼고 다니다가, 체직되어 돌아오는 날 함께 왔으므로 해괴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6월 27일 정해

상이 효사전(孝思殿)으로 나아가려고 하였는데 연제(練祭)를 행하기 위해서였다. 그 길이 구관소(句管所) 앞으로 나 있어 용호(龍胡) 등이 관문에 나와 바라보기를 원하니, 허락하였다.

 

6월 28일 무자

전 이조 판서 정경세(鄭經世)가 졸하였다. 세자가 그를 위해 거애(擧哀)하자, 예조가 의논드리기를
"거애는 사부에게 행하는 것이요 빈객에게 행해서는 안 됩니다."
고 하니, 상이
"이 사람은 일찍이 보양관(輔養官)이 되어 심력을 다해 가르친 은혜가 많으므로 특별히 거애해도 무방하다."
고 하였다. 정경세는 경상도 상주(尙州) 사람으로 자는 경임(景任)이며 스스로 우복(愚伏)이라고 호를 지었다. 사람됨이 근후하고 경술에 널리 통달한데다 문장에도 능하였는데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과 사우(師友)의 의가 있었다. 선조조에 전랑(銓郞)이 되어 당여를 심었다는 비난을 받았고, 광해 때 권간들로부터 축출을 당하여 시골에 쫓겨나 살았다. 반정 후 맨 먼저 발탁되어 화려한 관직을 역임하여 천조(天曹)의 장이 되어 문형(文衡)을 맡았으며 경악(經幄)을 출입하면서 많은 규계의 도움을 주었다. 추숭(追崇)할 때 임금의 뜻에 거슬려 귀향한 후 여러번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졸하니 향년이 70세였다.

 

6월 29일 기축

헌부가 아뢰기를,
"영해 부사(寧海府使) 김경직(金敬直)은 나이가 높고 병이 많아 금방 숨이 끊어질 듯 호흡이 가쁘므로 자목(字牧)의 임무를 결코 감당할 수 없으니 체차하소서. 대개 나이 65세가 넘은 자에게 외직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조종조의 법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그 법이 폐지되어 시행되지 않고 있으니 몹시 미안합니다. 각도로 하여금 나이 70이 찬 수령을 조사해 내어 법에 의해 개차하게 하고, 외직에 서용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해조로 하여금 거듭 밝혀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다만 허다한 수령을 모두 조사하여 개차하자면 또한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니 잠시 그대로 두고 그들의 정사 업적을 살펴 조처하라."
하였다.

 

6월 30일 경인

차호(差胡) 용골대·대소내 등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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