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신묘
전라도 전주(全州)·함열(咸悅) 등 고을에 지진이 일어났다.
7월 2일 임진
이원진(李元鎭)을 수찬으로, 권우(權堣)를 봉교로, 송몽석(宋夢錫)을 검열로 삼았다.
7월 4일 갑오
이조 판서 최명길(崔鳴吉)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헌부의 계사를 보니, 수령으로서 나이 70이 찬 자는 각도로 하여금 조사하여 개차하자고 하였는데, 성상께서는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여 허락하지 않았으나, 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조종조에는 정령에 정해진 법규가 있고 부역에 일정한 규정이 있어서 수령을 비록 다 적임자를 얻지 못하였더라도 전혀 일을 보살필 수 없는 지경에만 이르지 않았다면 그럭저럭 날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대전(大典)》에 64세 이상은 외임(外任)에 서용하지 말라는 조문이 있었으니, 이는 대개 70세가 극쇠의 연령이 되는데 당하 수령(堂下守令) 64세인 자를 기준하여 그 6년의 과만을 계산하면 70세가 차기 때문입니다.
지금 조야에 일이 많고 세속이 투박하여 다스리기 힘든 것이 옛날에 비해 10배나 됩니다. 헌부가 법규를 들어 사태를 청하는 것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다만 치적의 유무를 불문하고 통틀어 사태를 청한다면 그 논리가 미비할 것 같기도 합니다. 헌부의 아룀을 좇아 각도로 하여금 하나하나 조사하여 그 연한이 비록 지났어도 정사를 잘 보아 칭송을 받는 자는 계문하여 그대로 두고 별로 치적이 없는데 전관(銓官)이 사정에 따라 차견한 자는 모두 법률에 의하여 체차함이 마땅하겠습니다. 또 지난번 참판 김수현(金壽賢)이 인사를 독단할 때 김경직(金敬直)을 영해(寧海)의 수망(首望)으로 추천하여 낙점을 받기까지 하였는데 김경직이 지금 66세라 합니다. 헌부가 늙고 병들었다고 체직을 청한 것이 사실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신이 김경직을 본 결과 용모는 비록 수척하나 정신은 건전하며 전부터 외관직으로 백성을 다스림에 이르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습니다. 지금 만약 체직하고 다시 연소자 중에 선치(善治)의 경력을 쌓은 김경직 만한 자를 얻는다면 좋겠지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아마도 그대로 보내는 것이 오히려 편리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이에 대해 이조가 복계하기를,
"차자 중에 진술한 말이 깊은 의미가 있으나 대간이 법에 의거하여 논한 것은 해조가 감히 경솔히 의논할 일이 아닙니다. 김경직에 대해서는 그 재국(才局)은 실로 취할 만하지만 연로하고 병이 있는 것은 과연 대간이 논한 것과 같으니, 신의 부서에서 또한 감히 함부로 의논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김경직은 차자에 따라 체직하지 말라."
하였다.
7월 5일 을미
공청도에 큰 가뭄이 들었다.
헌부가 아뢰기를,
"신 등이 일찍이 64세 이상은 외임으로 서용하지 말 것을 논한 것은 실로 법에 근거한 의논이었습니다. 김경직이 연로하고 병들어 행동이 어려워서 멀리 나가 번다한 일을 다스려 낼 수 없는 상태를 신 등이 모두 목격하였기 때문에 서로 상의하여 논계한 것입니다. 이조 판서 최명길의 차자가 비록 인재를 택하는 데 한계가 없어야 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나, 탄핵한 글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그대로 보낼 것을 청하고, 해조의 회계 또한 극히 과장하여 마치 조정에 늙고 병든 한 사람의 김경직이 아니면 보낼 만한 사람이 없는 것 같이 하니, 사체로 보아 극히 온당치 못합니다. 이조 판서 최명길 및 회계한 당상관을 모두 추고하고, 김경직을 그대로 보내지 말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김경직은 그대로 보내는 것이 온당하다. 이조 당상은 모두 실수한 일이 없으니 번거로이 논박하지 말라."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수릉관(守陵官) 남이웅(南以雄), 시릉관(侍陵官) 김인(金仁)에게는 각각 한 자급씩 더 올려주고, 참봉 남두창(南斗昌)·조창서(曺昌緖)에게도 각각 한 자급씩 올려 주되 자급을 더 이상 올려 줄 수 없을 경우에는 대신 친족에게 가자하라 명하고, 효사전(孝思殿)에 번드는 종실(宗室) 풍해군(豐海君) 이호(李浩)·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회의군(懷義君) 이철남(李哲男)·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진원 부수(珍原副守) 이세완(李世完)·창원정(昌原正) 이준(李寯)에게는 반숙마(半熟馬) 1필씩을 참봉(參奉) 이자(李澬)·강첨경(姜添慶)에게는 아마(兒馬) 1필씩을, 제주관(題主官) 이경헌(李景憲)에게는 숙마(熟馬) 1필을 하사하였다.
7월 6일 병신
도독(都督) 황룡(黃龍)이 도사(都司) 유만복(劉萬福)을 보내 자문을 전해 왔는데, 그 자문은 다음과 같다.
"공(孔)·경(耿) 제적들이 지난해부터 등성(登城)을 점거하고 이어 내군(萊郡)을 포위하여 백성들을 해치자, 성명께서 크게 성을 내어 군사를 정비하여 수십 일 만에 과반을 섬멸하였소. 형세가 궁하자 바다로 도망쳐 군부를 범하며 생존을 도모하다가 다시 우리 군사의 습격을 받아 패하였소. 생각건대 이들 역적의 애초 계책은 섬을 도모하고 조선을 도모하여 크게 자신들의 계획을 펴려고 하였는데 다행하게도 대병(大兵)이 뒤를 쫓고 피도(皮島)가 앞을 막으며 귀국이 또 그 주변을 담당하였소. 그러나 수진(水鎭)·수사(水師)가 서로 어긋나 협력하지 못함으로써 다시 그들이 오랑캐들에게로 투입하여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으니, 경적(耿賊)이 조선을 엿보는 생각이 더욱 부풀어 오를 것이오.
본진(本鎭)이 근래 명지(命旨)를 받들어 수사(水師)를 엄히 독려하고 날카로운 기세로 추격하되 한편으로는 부장(副將) 심세괴(沈世魁)에게 전하여 단속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조선과 함께 적을 끝까지 추격하여 두 적이 멸망하지 않는 한 그만두지 않으려고 하오. 그러니 귀국은 보내준 자문 내의 사리를 잘 살펴 속히 군사를 더 보내 섬멸하는 데 협력하여 훗날의 걱정을 끼치지 않게 하시오. 그러면 종래의 공업이 오늘날에 더욱 빛날 것이오."
헌부가 아뢰기를
"대행 왕비(大行王妃)의 연제(練祭) 날에 대소 신료로부터 선비들에 이르기까지 너나없이 호곡(號哭)의 반열에 나아갔는데, 왕자 중 경평군(慶平君) 이륵(李玏)과 영성군(寧城君) 이계(李㻑)만이 태연히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평소 삭망제(朔望祭)를 모실 때 까닭없이 불참해도 오히려 미안한데, 더구나 연제를 지내고 길복으로 갈아입는 날에 병을 핑계하고 집에 있었으니 또한 어찌 스스로 그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평군 등이 모두 실지로 병이 있어 참예하지 못하였다고 하니, 번거롭게 논박하지 말라."
하였다.
함경 감사 목장흠(睦長欽)이 소를 올려 면직을 청하니, 답하기를,
"소를 보고 사실을 잘 알았다. 비록 물의가 있으나 필시 지나친 논의일 것이니 사양하지 말고 속히 부임하라."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목장흠이 본직임에 불합하다는 논란이 누차 헌부에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장흠의 도리로서는 의당 물러나 공론이 결정되기를 기다려야 할 것인데, 감히 먼저 스스로 소를 올려 마치 대론(臺論)과 맞서려는 듯이 하니 사리에 어찌 이같은 것을 용납하겠습니까. 방백의 책임은 풍헌(風憲)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이미 말썽이 있었다면 그대로 부임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처럼 일이 많은 때를 당하여 오랫동안 부임하지 않으니 또한 몹시 염려됩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목장흠은 쓸 만한 인재이다. 소를 올린 일이 또한 대단한 실수가 아니니 번거롭게 논박하지 말라."
하였다. 장령 김효건(金孝建), 지평 안시현(安時賢)이 아뢰기를,
"신들이 앞서 지평 성여관(成如寬)의 간통(簡通)을 보니, 이는 곧 함경 감사 목장흠의 체직을 청한 것이었습니다. 목장흠이 과연 반정 초에 심하게 대간의 논박을 받았으나 그간의 사실들이 곡절이 없지 않기 때문에 얼마 안 되어 상신(相臣) 및 연신(筵臣)이 함께 탑전에서 해명하여 성상께서 그의 원통한 정상을 통찰하고 바로 서용하도록 명하였습니다. 또 그의 재국이 본직에 합당하다면 지금의 제수가 실로 불가하지 않기 때문에 신들이 이 뜻으로 답하여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어제 간원의 계사를 보니, 거기에 공론이라 이른 것은 곧 성여관이 간통에서 논한 것을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동료가 발언한 바를 이미 공론이라 한다면 그것을 저지한 책임은 신 등에게 있습니다. 태평하게 그대로 있을 수 없으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집의 이경의(李景義)는 아뢰기를,
"목장흠의 폐조 당시 소행이 만약 사실이라 한다면 사판(仕版)에 그대로 둘 수 없지만, 당초 조정이 그 정상이 용서할 만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주군의 외임을 허락하여 그 세월이 벌써 오래되었고, 또 치적이 있었습니다. 묘당(廟堂)이 발탁하여 지방관으로 임명한 것은 실로 이 때문입니다. 신이 앞서 지평 성여관의 간통에 대하여 자꾸 논계해서는 안 된다고 답해 보낸 것은 또한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간원의 논박이 심하게 일어나니 그대로 언관에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지평 성여관은 아뢰기를,
"목장흠이 일찍이 혼조(昏朝)에 있을 때에 흉적에게 빌붙어 예조 참의가 되었고, 폐모의 절목을 공사로 거행할 때에 당시 판서 임취정(任就正)도 회피하고 하지 않았는데 목장흠이 독자적으로 담당하여 팔도에 통문하고 각사(各司)에 알렸습니다. 비단 윤기(倫紀)의 죄인일 뿐 아니라 실로 임취정의 죄인입니다. 혈기를 가진 자라면 누구인들 통탄하지 않겠습니까.
반정 초에 이르러 성상께서 이를 포용하여 비록 형벌에서 벗어나기는 하였으나 한 가닥의 공론은 없앨 수 없는 것이므로 전일에 또한 누차 심한 논박을 입었습니다. 더구나 본직에 제수되는 것은 더욱 여느 관직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방백(方伯)이 얼마나 중요한 직책인데 윤기에 죄를 얻어 공론에 용납받지 못하는 사람을 구차히 채워 보낸단 말입니까. 신은 이 때문에 지난날 논박하여 체직시키자는 내용으로 동료에게 간통을 보냈다가 동료의 저지를 받아 논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의당 사유를 갖추어 인피해야 할 일이지만 소요를 야기시키고 싶지 않고 또 마침 신병으로 여러 차례 사직 단자를 올렸으나 끝내 정원으로부터 퇴각당한 터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장령 김효건, 지평 안시현(安時賢) 등의 피혐한 사연을 보니 ‘상신 및 연신이 함께 탑전에서 해명하여 성상께서 그 애매한 정상을 통찰하였다.’고 하였으니, 신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당초 대신 가운데 과연 공성첩(空成貼) 등등의 말로 탑전에 해명하고 그때 연신 가운데 또한 그것이 그렇지 않다고 밝힌 자가 있었습니까? 김효건 등이 이른바 폐모의 절목이 어떠한 일인데 감히 공성첩이라고 하면서 하리(下吏)에게 맡기겠습니까. 더구나 각사·팔도에 이문(移文)하는 것은 두어 장의 공첩(空貼)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고 보면 누구를 속이겠습니까. 하늘을 속이겠습니까. 지금 공도가 무너지고 사의가 판을 치며 청의(淸議)가 위축되고 행문(倖門)이 열려, 죄를 진 자들이 조정의 반열에 끼고 자신들의 사당(私黨)을 옹호하는 무리들이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아 군부를 우롱함이 이처럼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실로 한심합니다. 신이 이미 발론하였으나 동료의 저지를 당하여 끝내 논계하지 못하였으니, 신의 나약한 죄상이 드러난 것입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장령 지덕해(池德海)도 이 일로 인피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대사헌 김광현(金光炫)이 당초 성상소(城上所)에서 발언하고 성여관이 여러 동료들에게 간통을 보냈고 보면 일맥의 공론임을 여기에서 볼 수 있는데, 이번 계사에 성여관의 서찰 관계 한 가지만 거론하고 헌장(憲長)의 말은 일체 묻어 버렸으니 이것이 과연 임금에게 정직하게 고하는 도리입니까. 또 대관의 논사가 맞지 않은 것이 있을 경우 거론하면 같이 거론하고 인피하면 같이 인피하는 것은 모두가 동료를 존경하고 공론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장관 및 동료가 이미 이 일로 계속 정고(呈告)하여 가부가 결정되지 않고 있는데, 듣고도 못 들은 체 태연히 공무를 보고 있으니, 대각의 옛 풍속에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었겠습니까. 일에 따라 논열하여 혼탁한 것을 제거하고 맑은 것을 드러내야 언사(言事)의 체통을 깊이 얻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미 발언한 후 결국 동료의 저지를 받고도 즉시 인피하지 않고 뒤에 앉아 정고만 하였으니 자못 의논을 지켜 굽히지 않는 풍도가 없습니다. 또 잘 알았다고 써 보내고 나서 바로 인피하고 들어가 남이 하는 대로 행동하였으니, 전혀 강직한 도리가 없습니다. 이 모두가 그대로 언관의 자리에 있을 수 없으니, 김효건·안시현·이경의·성여관·지덕해를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이 소를 올려 상의 제조(尙衣提調) 및 구관청 당상(句管廳堂上)을 면직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사신은 논한다. 김자점이 상방(尙方)에 있으면서 수레·말·의복 등의 기구와 상이 사용하는 기물에 대해서 공장들을 독려하여 어느 것이나 정밀하게 만들었고, 또 본성이 시기하고 난폭하였으나 상이 몹시 중히 여기었으므로 묘당이 천거하여 구관 당상을 삼았다. 김자점이 강도에 10만 석의 곡식을 유치할 것을 청하고는 백성들과 더불어 영리를 다투므로 시상(市商)과 어민(漁民)들이 모두 생업을 잃었다.
【태백산사고본】 28책 28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526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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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김자점이 상방(尙方)에 있으면서 수레·말·의복 등의 기구와 상이 사용하는 기물에 대해서 공장들을 독려하여 어느 것이나 정밀하게 만들었고, 또 본성이 시기하고 난폭하였으나 상이 몹시 중히 여기었으므로 묘당이 천거하여 구관 당상을 삼았다. 김자점이 강도에 10만 석의 곡식을 유치할 것을 청하고는 백성들과 더불어 영리를 다투므로 시상(市商)과 어민(漁民)들이 모두 생업을 잃었다.
어영군(御營軍)으로서 서도에 부방한 자를 풀어 보냈다. 반정 초에 공·사천의 장정을 뽑아 등록하여 하나의 부대를 만들어 그것을 어영군이라고 이름지었는데, 조세와 잡역이 면제되므로 사람들이 다투어 투속하였다. 이해 초봄에 변방의 위급한 고변으로 인해 어영군을 파견하여 청북(淸北)의 방어를 돕게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변경이 좀 완화되었으므로 영유(永柔)·순안(順安) 등의 고을로 내보내 나누어 먹이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이에 순안 현령이 관향사(管餉使) 박추(朴簉)에게 고하기를,
"본읍에 주둔한 군사가 9백 60여 명이요 전마(戰馬)를 합치면 1일 간 먹는 쌀과 콩이 수십 석이나 되어 5일 동안의 지출미가 이미 68석이 넘으므로 결코 지탱하기 어려우니 다른 고을로 옮겨주기 바란다."
하였다. 이에 박추가 수부(帥府)에 전보하기를,
"자모 산성(慈母山城)에는 단지 쌀 4천여 석이 있는데 이 성 역시 지켜야 할 곳이므로 이미 들여온 양식을 무사한 때에 다 써서 없앨 수 없다. 만약에 해서(海西)로 내보내 먹게 하면 양식을 운반하는 폐단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지금 변방에 아직 그리 위급한 경보를 알리는 일이 없는데, 많은 군마가 오랫동안 서변에 머물러 있어서 얼마 안 되는 양식이 지금 이미 떨어질 형편에 놓여 있으니 변통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해서로 옮기는 것도 또한 좋은 계책이 아니니 우선 어영군을 해산해 보내야겠습니다. 그러나 1천여 군마가 한꺼번에 나오면 공급의 폐단이 또한 몹시 염려되니, 그들로 하여금 3∼4부대로 나누어서 순차적으로 풀어 돌려보냄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8일 무술
대사헌 김광현(金光炫)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외간의 여론을 들으니, 목장흠(睦長欽)이 앞서 혼조(昏朝)에 있을 때 예조 참의가 되어 서궁(西宮)의 감손 절목(減損節目)을 팔도에 알렸다고 합니다. 이는 막대한 죄악인데도 애초 형벌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여 그대로 사적(仕籍)에 남아 있게 되었으나, 외방의 중임에 이르러는 결코 죄를 입은 자가 담당할 일이 아닙니다. 또 장흠이 물의가 있음을 듣고 부임하지 않고 또 부임 날짜를 뒤로 물렸다고 하기에, 지난번에 장령 김효건(金孝建)이 신의 집에 왔을 때, 신이 이 일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러나 동료들이 사고가 많아 미처 논계하지 못하였고 신의 질병이 갑자기 심해져서 부득이 정고하였습니다. 그후 지평 성여관(成汝寬)이 또한 이 의논으로 간통을 냈으나 동료들의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 본부의 많은 관원들이 계속 사직을 고한다고 하니, 신은 몹시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지금 김효건 등이 나아가 인피하였는데, 그 내용 중에 ‘간원이 이른바 공의라는 것은 곧 성여관의 간통을 지적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실로 처음 이를 발론하였고 또 여관이 발론하여 간원이 그것을 논하였고 보면, 공론이냐 아니냐는 신이 스스로 책임을 져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신은 병석에서 침묵만 지키고 동료들로 하여금 홀로 이 허물을 지게 하였으니 신이 어떻게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대개 장흠의 죄에 대하여 만약 애당초 논의하여 바루지 못하고 이제 와서 추론하는 것은 늦은 것 같으니 지나치게 규명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그래도 괜찮지만, 만약 일에 곡절이 있어 이미 그 애매한 점을 밝혀냈다고 한다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른바 곡절이란 것은 공성첩(空成貼)을 가리켜 말하는 것 같은데, 예조가 혹시 미리 공성첩을 내는 규례가 있다 하더라도 대비의 명호를 삭제하고 진공(進供)의 가짓수를 감손하여 모후를 폐하는 발단으로 삼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거조인데 함부로 공첩으로 알렸겠습니까. 임취정(任就正)을 판서로 삼아놓고도 오히려 감히 봉행하지 못하고 미루며 덮어두었다면 그 일의 중대성을 하리들이 알지 못했을 리가 없습니다. 또 그들에게 무슨 이익이 있고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 당상(堂上)에게 고하지 않고 멋대로 공첩을 사용했겠습니까. 그 말같지 않은 것은 비록 삼척 동자라도 훤히 알 것입니다.
만일 실지로 이 일이 있었다면 그 당시 비록 화를 두려워하여 감히 스스로 밝히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멋대로 시행한 관원이 필시 있을 것입니다. 반정 후 지명, 적발하여 그 실상을 분명히 밝혀 죄를 규명했더라면 그 책임을 질 사람이 있게 되고 목장흠의 애매함도 저절로 드러났을 것입니다. 이처럼 분명히 밝혀 조치하였다는 말은 들리지 않고 사람들의 입만을 빌어 억지로 해명하여 이미 밝혀졌다고 하니 그 누가 믿겠습니까. 이미 목격한 일도 아니고 또 근리한 말도 아니고 보면 그 당시 탑전에서 밝혔다는 것은 실로 증거가 없으니 과연 그 말이 정말 공론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성명께서는 그 말을 반드시 믿을 만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주현(州縣)의 직임도 오히려 또한 공론에 인정받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방백의 직책이야 풍헌을 겸하고 있는데 말할 게 있겠습니까. 물의가 한꺼번에 일어난 것은 실로 당연합니다. 그런데 감히 곧바로 소를 올려 태연히 인피하면서 심지어는 스스로 시의(時議)에 용납되지 않는 바를 안다고 하니, 그가 이른바 시의는 한 때의 당국인의 논의이지 공론이 아닙니다. 목장흠의 죄는 실로 만고의 기강에 용납되지 못할 바요, 온 나라 귀신이나 사람이 함께 분개할 일입니다. 어찌 한 때의 사람들에게만 비난을 받겠습니까.
그의 소행을 보건대 달려가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상대방을 헐뜯는 사람처럼 그 어감에 혁연히 성내는 기색이 있었으니, 너무도 공론을 두려워하지 않고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간원의 논의가 겨우 체차만 청하였으므로 공론과 인심이 오히려 울분해 있는데 그를 옹호하는 논란이 도리어 분분히 다투어 일어나고 있으니 어찌 매우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 폐모의 의논은 소장에만 나타났지만 그 절목을 반포한 것은 실로 행동에 드러났습니다. 그 당시 폐모론에 부회하고 동참한 자들은 귀양가거나 금고된 지 10여 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대사령의 조처로 인하여 비로소 방면의 명이 내려졌지만 물의가 오히려 분개하게 여기어 환수하라는 논란이 양사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폐모의 절목을 행한 자만은 유독 형을 면하고 현요직에까지 제수하면서 실로 불가함이 없다고 여기고 있으니, 이것이 민심이 승복하지 않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니 저 성하연(成夏衍)·오여온(吳汝穩)의 무리가 억울하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개 당초의 법 적용이 사정을 따르는 것을 면치 못하여 농간하는 일이 있음으로써 죄는 동일한데 벌칙이 달라 경중이 그 마땅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일이 안정된 후에 이르러서는 조화시키는 일을 힘쓰고 또 색목과 형적의 혐의에 구애되어 논박할 만한 것도 논하지 않고 처벌할 만한 것도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조정이 엄하지 못하고 기강이 무너져 인심과 국사를 다시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신이 외람되게 대헌(臺憲)의 장이 되어 나아가 말을 바루어 공도를 넓히지 못하고 또 동료들과 함께 인피하지 못하였으니 신의 시위 소찬이 이에 이르러 극심합니다. 면직을 허락하여 주소서."
하니, 계자(啓字)를 찍어서 내려 보냈다.
7월 9일 기해
중국의 장수들이 모두 장자도(獐子島)로 향하였다. 이때 중국에 또 홍미적(紅眉賊)이 산동(山東)에서 일어나 연주(兗州)를 함락하고 군사를 풀어 사방을 노략질하며, 또 수군으로 여러 진영을 위협하였다. 양어번(楊御蕃)은 등주 총병(登州摠兵)인데, 등주 군문이 명령을 내려 소환하고 도독 주문욱(周文郁)으로 하여금 대신 그 군사를 통솔하게 하였다. 세 도독 및 부총 심세괴(沈世魁) 이하 여러 장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출항하여 장자도로 향하였다 한다.
7월 11일 신축
비국이 아뢰기를,
"함경 감사 목장흠이 논박을 받고 부임하지 못하고 있는데, 전 감사 김기종(金起宗)을 탁지(度支)로 옮겨 제수하였습니다. 변방의 일이 바야흐로 극심하고 탁지가 오래 비었으니, 목장흠을 체차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창경궁(昌慶宮)의 수리가 4개월을 지나 완성되었는데 여러 전각이 전보다 넓고 화려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지금 백관이 비록 모두 길복(吉服)을 입고 있으나 효사전(孝思殿) 진배관(進排官)까지도 길복을 착용한다는 것은 사리로 보아 미안합니다. 예관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결정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대해 예조가 아뢰기를,
"진배관이 무슨 복색으로 출입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예문을 상고해 보았으나 근거가 없습니다. 무신년의 예에 【 선묘(宣廟)의 상을 이름.】 의거함이 마땅하겠으나 또한 분명한 기록이 없습니다. 처음 의논하여 결정할 때에, 각사의 진배관은 가져온 물건을 중문 밖 전사청(典祀廳)에 전해 줄 뿐 원래 내정의 일에 관계가 없으므로 평상시의 복장으로 왕래하여도 그리 의리에 어긋나지 않으리라고 여겼기 때문에 짐짓 평상시의 복장으로 종사하게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대신(臺臣)의 진언이 이와 같으니 천담복(淺淡服)으로 진배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외각사의 진배관은 변복의 예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계사가 이와 같으니 계사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찬수청(纂修廳)을 설치하여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를 수정하였다. 춘추관(春秋館)이 아뢰기를,
"광해군 초년 이후로는 사필(史筆)이 이이첨(李爾瞻)의 문객에게서 나왔으므로 그 더럽고 어지러운 정치를 모두 사실대로 바로 쓰지 않았기 때문에 반정 초기에 사대부들 집에 소장된 일기 및 장소(章疏)·조보에서 주워 모으고 또 듣고 본 것에서 채취하여 찬수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년 변란에 거의 반이나 유실되었고 뒤에 병화로 인하여 강도 사고(江都史庫)에 간직해 두었습니다. 사관을 시켜 가져다가 사국(史局)을 설치해 수정하여 역사를 완성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조익(趙翼)을 부제학으로, 이식(李植)을 대사간으로, 이명(李溟)을 함경 감사(咸鏡監司)로 삼았다.
이명은 명종조에 총애를 받던 이량(李梁)의 손자로서 선묘조(宣廟朝)에 형제가 모두 소인의 자손으로 지목받아 현관(顯官)이 되지 못하였다. 광해가 즉위하고 적신 이이첨이 사당(私黨)을 많이 세우게 되자 이명과 그 형인 이충(李沖)이 모두 청반(淸班)을 역임하였는데, 이이첨이 폐모론을 주장하자 이명이 드디어 반대하였다. 때마침 정온(鄭蘊)이 항거하는 소를 올려 폐모론을 적극 배척하였는데 정온은 이명의 친구이다. 이이첨은 그 소가 이명의 손에서 나왔다 하여 정온을 귀양보내고 이명을 내쫓았다. 반정 때에 이르러 죄를 입었던 사람들을 기용하게 되자 이명도 참여되었다. 훈귀(勳貴)를 삼가 섬겨서 관작의 유지를 도모하였는데, 갑자년 변란에 호남 순찰사(湖南巡察使)로 정예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맨 먼저 노변에서 어가를 맞이하였다. 이로부터 상의 신임을 받아 보살핌과 대우가 몹시 두터웠다. 이에 앞서 함경 감사에 제수되어 치적이 있었는데, 비국이 경험 있는 사람이라는 것으로 천거하여 드디어 재차 부임하게 되었다.
신천익(愼天翊)을 응교로, 홍집(洪)을 평산 현감(平山縣監)으로 삼았다. 홍집은 홍이상(洪履祥)의 아들이며 홍방(洪霶)의 아우이다. 홍집이 일찍이 고 왕자 임해군(臨海君)의 집 곁에 우거하였었는데, 하루는 궁노(宮奴)의 처가 홍집의 첩에게 말하기를,
"양자(養子) 양녕군(陽寧君)이 대비(大妃)의 밀지를 받들어 대사를 모의하니, 이 동네에 사는 것이 좋지 않다."
하니, 그 첩이 홍집에게 고하였다. 결국 이 말이 누설되어 첩과 함께 구속되었는데 홍집의 공초(供招)가 황란하여 그 말이 자전(慈殿)을 범하게 됨으로써 사류로부터 버림을 받다가, 이에 이르러 외직에 보임되었다.
강학(姜翯)을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삼았다. 이때 북관 수령(北關守令)을 모두 무인으로 임용하였는데, 체부(體府)가 문관으로 차임할 것을 계청함으로써 강학을 제수하였다. 강학은 사람됨이 패려하고 성질 또한 술을 즐겨 날로 유석(柳碩)·목성선(睦性善)·황감(黃㦿)의 무리와 어울려 술을 마시면서 시정(時政)을 비평하였다. 어떤 이의 말에 의하면 이 두어 사람이 산사(山寺)에 모여 바위 위에 쓰기를 ‘아무는 처벌하고 아무는 귀양보내며 아무는 내쫓고 아무는 파직하며 아무는 재상감이고 아무는 쓸 만하다.’고 하였는데 그들이 죄주고자 하는 자는 모두 당시의 높은 벼슬아치들이며, 쓸 만하다고 이른 자는 모두 그들의 무리라고 한다. 그러나 조정이 조화의 존의를 힘쓰고 있는데다 또 사람들의 말은 믿을 것이 못 된다고 여기어 불문에 부치고 말았다.
7월 12일 임인
이조 판서 최명길(崔鳴吉)이 차자를 올려 청하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조종조의 문무관은 으레 녹을 붙여주어 까닭없이 한산이 되게 하지 않았으니 이는 문무를 권장하는 일이며, 음관 수령(蔭官守令)으로 만기가 된 자는 으레 경직(京職)에 부쳤으니 이는 유공자를 보답하는 뜻에서였습니다. 그러나 근년 이래 문무관으로서 한산에 있는 자가 적어도 1백여 인에 밑돌지 않습니다. 그중 사람과 직위가 맞지 않거나, 죄과가 있거나, 혹은 나이가 많아 직책을 주기에 불합한 자 외에 두드러지게 쓸 만한데도 자리가 부족함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녹을 받지 못하는 자가 또한 적지 않고 심지어 참상 음관(參上蔭官)으로 현저한 명망이 있는 자와 수령으로 만기가 되어, 아직 보직되지 않은 자가 무려 70, 80명에 이릅니다. 참하(參下)는 8, 9년 동안 실직의 경력을 쌓은 후에 비로소 6품으로 오르게 되는데, 한번 물러나 산관이 되면 앞서의 직함으로 늙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대부분 억울하다 하며 그 허물을 이조로 돌리고 있으나, 자리가 너무 부족하여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또 조종조의 세족 자제가 독서를 부지런히 하는 것은 그 목적이 과거에 오르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과를 공부하여 이루지 못하면 문과를 포기하고 무과를 취하여 반드시 이 문·무과 두 가지를 모두 이루지 못한 후에 비로소 음재(蔭才)로 진출하였습니다. 그 경중의 차이가 이와 같은 것이 있는데 근래에 와서 보면 문과의 경우 등과한 자 중에 독서한 사람이 아닌 경우가 많고 무과에는 서파(庶派)거나 외방인이 많기 때문에 조정에 들어와 직무를 담당하는 문·무관 가운데 그 성적이 음관만 못한 자들이 많습니다. 신이 항상 이 두 가지를 괴이하게 여기면서도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대개 그럴 만한 연유가 있었습니다. 도목(都目) 때마다 6품에 오르는 자가 18, 19명인데 문신 4관(四館)과 무신 3관(三館)과 3청(三廳) 10명 외에 그 나머지는 모두 음관입니다. 1년 중 두 차례의 도목에서 승진하는 수는 무려 40명에까지 이르는데, 음관 초입사의 명 숫자는 경외의 참봉(參奉) 70명, 금부 도사(禁府都事) 10명, 별좌(別坐) 29명, 선공 감역(繕工監役) 6명, 동몽 교관(童蒙敎官) 4명, 내시 교관(內侍敎官) 2명, 수운 판관(水運判官) 2명, 찰방(察訪) 27명이고, 이 밖에 임시 설치한 천문(天文)·지리(地理)·명과(命課)의 교수(敎授), 치종 교수(治腫敎授)·도안청 낭청(都案廳郞廳)을 합하여 모두 1백 65명입니다.
이들은 만약 사대부들과 교유하여 명예를 취한 자가 아니면 필시 부형을 빙자한 자로서 세력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한번 벼슬길을 트면 좋은 관직에 저절로 이르게 됩니다. 그 수가 이미 이와 같이 많고 그 형세 또한 스스로 떨칠 수 있으니, 세족으로서 교만과 태만에 빠진 자가 글 읽기와 검술에 근실하지 않고 음사로 진출하기 좋아할 것은 필연적인 사세입니다. 그런데 도목 때마다 각각 승진하는 것이 저절로 정해진 규칙이 있기 때문에 차례로 전보하여 동쪽으로 옮겨 서쪽에 보임하며 6품의 자리만 만들고 다시 사람의 기국의 타당 여부를 묻지 않으니, 경외의 제수가 혹시 그 사람이 아니거나, 전직이 만기되어도 관직이 부여되지 않는 것은 또한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신이 《대전(大典)》의 이전(吏典)을 상고하니, 금부(禁府)의 경력(經歷)이 종4품, 도사(都事)가 종5품이며, 각사(各司)의 별좌(別坐)가 5품, 별제(別提)가 6품인데, 포폄조(褒貶條)에 의하면, 수령으로서 열 번 고과에 두 번 중등을 받으면 무록관(無祿官)에 서용한다 하였으니, 이른바 무록관이란 도사와 별좌를 지칭한 말입니다. 《대전》의 제작이 세조(世祖) 때 시작하여 성묘조(成廟朝)에 완성되었는데, 그 당시 각능의 참봉이 지금에 비하여 절반 밖에 되지 않고 각도 찰방의 절반은 또 서리(書吏)로 차출하여 그를 역승(驛丞)이라 불렀으며, 도사·별좌가 모두 참상직(參上職)이 되니, 초입사원(初入仕員)은 그 숫자가 적고 참상원의 숫자는 몹시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문·무관과 만기가 된 수령을 조치할 자리가 넓고 넓어 여유가 있었으나, 지금은 도사·별좌·역승 이 모두 음관 초사(蔭官初仕)로 돌아가고 기타 선공 감역 및 교수 등 별설 인원의 숫자가 또한 많고 참상은 정(正) 이하 감축된 수가 무려 60여 명에 이르니, 그 형세가 진실로 조종조와 상반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정과(正科)를 권장하여 음사(蔭仕)를 억제하고 벼슬길을 맑게 하여 요행을 막아 조종의 구전을 회복하려고 하나 되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도사와 별좌는 한결같이 《대전》에 의하여 참상 문음(文蔭)의 임기가 찬 수령 및 전직자 중 쓸 만한 자로 대처하고, 외방의 마관(馬官) 및 수운 판관(水運判官)은 문·무 및 참상·참하를 막론하고 모두 능력이 있는 자로 제수하고, 관상감(觀象監)의 3학 교수(三學敎授)·도안 낭청(都案郞廳)·관왕묘 수직(關王廟守直) 등 잡기(雜歧)를 통해 정사(正仕)에 오른 자를 일체 막고 오직 그 중 공로가 있고 사람의 기국이 합당한 자만 특별한 예로 서용하되 일정한 규례로 만들지 않는다면 앞서 열거한 여러 가지 폐단을 10에 7, 8은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난 후에 관원을 감축한 것은 경비를 절약하려는 목적이었는데, 근래 임시 설치한 아문 낭청(衙門郞廳) 및 비국문랑청(備局文郞廳)·문겸선전(文兼宣傳) 등의 관직은 대부분 파직 한산에 있는 자가 하게 되니, 비용을 절감한다는 이름만 있을 뿐, 비용을 절감한 실속은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백관의 감손이 조정의 체모만 손상시켰을 뿐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난후 임시 감축한 관원을 그 수를 헤아려 설치하고 잉국(剩局)의 낭청과 문겸 등의 관은 모두 실직과 무록관으로 하며 이어 약간의 녹아(祿兒)를 감하여 비용을 절감한 실효가 있게 하면 사리에 편리하고 유익할 것 같습니다. 신이 외람되게 정조(政曹)에 있으면서 아침 저녁 생각하고 구구한 소견이 있기에 감히 진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말이 매우 타당하다. 대신에게 의논하라."
하였다. 영의정 윤방은 가하다 하고 좌의정 김류는 불가하다 하니, 상이 윤방의 의논에 따랐다. 이조가 복계하기를,
"법전에는 금부 도사·별좌가 5품이고 별제·찰방 이 6품입니다. 그것을 초입사(初入仕)로 제수하는 규례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임기가 찬 수령을 별좌로 제수하는 일은 연로한 조사(朝士) 중에는 또한 목격하여 아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이로 말한다면 이 제도의 폐지가 또한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의 서열 규정은 도사가 5품 위에 앉고, 별좌가 주부(主簿)의 위에 앉고, 별제가 직장(直長)의 위에 앉고 찰방이 현감의 위에 앉습니다. 사리로 말한다면 처음 입사한 자가 어찌 도리어 6품의 위에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규례가 이와 같은 것은 대개 옛법을 오히려 다 폐지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최명길이 차자에 말한 뜻은 본래 경솔히 제도를 변경하려는 것과는 다릅니다. 또 이 법의 회복을 좋아하는 자가 또한 많습니다. 문·무관 및 종전 직함으로 지내는 음관은 복직하기 쉽기 때문에 좋아하고, 참하로 임기가 찬 자는 6품으로 나가기가 쉽기 때문에 좋아합니다. 그 중 좋아하지 않을 자는 다만 세족의 자제로서 벼슬을 구하는 무리이니, 초사(初仕)의 길이 좁아짐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자가 많고 좋아하지 않는 자가 적다면 이것으로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법전 폐지의 유래가 이미 오래되어 이목에 익어 있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갑자기 고친다면 사람들이 아마 의아하게 여길 것입니다. 대신이 의논드린 가운데 하나는 인정에 불편함이 없지 않다 하였고 또 하나는 다시 신중을 가하여 점차적으로 시행하자고 했던 것은 모두가 신중히 하자는 의도입니다. 신 등 역시 한꺼번에 시임 관원(時任官員)을 도태시켜 일신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빈 자리를 따라 메꾸면서 점차적으로 시행하여 수년이 지나기를 기다린 후에 그 효과를 보자는 것입니다.
이어 생각건대, 개정할 때 불편한 일이 없지 않을 것이므로, 대략 거행의 사목을 만들어 위에 아뢰고 시행하여 미진한 아쉬움이 없게 하였으면 합니다.
1. 법전내에는 금부의 경력이 4품, 도사가 5품인데, 근래의 예는 모두 참하로 차출하니, 자못 법전의 본의가 아닙니다. 지금 일체 법전에 의하여 시행해야겠습니다만, 5품 이상은 대부분 오랫동안 벼슬을 한 자이므로 분주함을 꺼릴 뿐 아니라 인재를 얻기도 어려울까 염려되오니 5, 6품을 구애할 것 없이 오직 참상 중 가합한 자로 하고, 문관은 참하 중 가합한 자를 의차(疑差)하여 20개월이 찬 후에 6품으로 옮길 것.
1. 법전내에는 별좌가 5품, 별제가 6품이며, 사포서(司圃署)·빙고(氷庫) 별제 외에 또 별검(別檢)이 있어 8품관이 되었는데, 지금은 통틀어 별좌라 이르고 모두 참하로 하니, 실로 미안합니다. 이제부터는 문·무관·음관을 구애할 것이 없이 참상으로 의차하고 5품을 지내면 별좌, 6품을 지내며 별제라 칭할 것.
1. 법전에 의하여 시행하되, 다만 빙고·전설(典設)·금화(禁火) 등의 사(司)는 가장 잔미한 곳이니 처음 입사하면 괴로움을 참고 직무에 이바지하여 6품으로 오르기를 구하지만, 참상은 혹시 회피할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3사는 참하인으로 교대로 차임하여 그대로 별검으로 칭할 것.
1. 대군 사부(大君師傅)·내시 교관(內侍敎官)·동몽 교관(童蒙敎官)은 법전에 원래 정해진 품계가 없으니, 문관·음관·참상·참하, 그리고 초입사를 구애할 것 없이 오직 경학(經學)에 조예가 있는 자로 의차할 것.
1. 수운 판관(水運判官)은 그 소임이 몹시 중하니, 문무관·음관을 구애할 것 없이 반드시 참상으로 제수하고, 문관에 있어서는 또한 참하로 교대로 차임하되 전보의 규정은 상례에 의하여 시행할 것.
1. 각역의 찰방의 문무관·음관, 참상·참하를 구애할 것 없이 모두 교대로 차임할 것.
1. 관상감(觀象監)의 천문·지리·명과의 3학 교수(三學敎授), 치종 교수(治腫敎授), 도안청 낭청(都案廳郞廳), 관왕묘 수직(關王廟守直) 등은 모두 정직(正職)이 아닌데도 도목(都目)에서는 으레 승진하니 이것이 사로(仕路)가 맑지 못한 한 가지 원인입니다. 그러나 전연 서용하지 않으면 또한 원망하게 될 것이니, 임기가 찬 후 군직 6품에 서용하되 그 재주를 헤아려 임용할 것.
1. 신하로서 관직에 제수되었을 때 사은하는 것은 예법에 당연한 것인데, 도사·별좌·사부·교관 등의 직은 사은 숙배하는 예가 있지 않으니 사리에 몹시 미안합니다. 이제부터는 임명하는 것을 한결같이 겸관(兼官)의 예에 의해 시행하여 그 일을 중히 할 것.
1. 찰방 중 양재(良才)·연서(延曙)·대동(大同)·어천(魚川)·금교(金郊)·은계(銀溪)·고산(高山) 등 역은 전례에 모두 문관 참상으로 제수하였기 때문에 겸찰방(兼察訪)이라 칭합니다. 경외의 제수는 원래 구애하는 바가 없으나 기타는 대부분 참하로 제수하기 때문에 겸찰방이라 칭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참하 문관이 적체된 까닭으로 인하여 찰방의 빈 자리가 있으면 모두 문관으로 차출하므로 사람들이 대부분 통쾌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만약 외관에 구애되어 다른 관직을 제수할 수 없다면 또한 인재가 적체되는 걱정이 없지 않을 것이니, 문관 중 청망(淸望)에 가합한 자는 구애하지 말고 겸찰방의 예에 의하여 시행할 것을 제안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금부 도사와 수운 판관은 참하관으로 교대로 차임하지 말고, 관상감 교수 이하의 정직 승진은 그 의도가 범연한 것이 아니니 이것 한 가지는 전례에 의해 시행하라. 또 각역의 찰방을 범연히 교대로 차임하는 것으로 규례를 정하면 끝내는 필시 모두 참하인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니, 또한 별검의 예에 의하여 참하의 조처 숫자를 참작 규정하여 후인이 준수할 소지를 만들고, 참하 문관 찰방은 만약 구애되는 것이 없으면 반드시 자주 바꾸는 폐단이 있을 것이니, 이 한가지 일은 다시 의논하여 조처하라. 무록관(無祿官) 중 참하는 임명되었을 때 숙배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조가 또 아뢰기를,
"각역 찰방 참하에 대해 계하한 분부는 성상께서 생각하신 바가 실로 지당합니다. 대신과 상의하여 참하 찰방 31명에 대해 그 잔(殘)과 성(盛)을 나누어 평구(平丘)·율봉(栗峯)·성환(成歡)·이인(利仁)·유곡(幽谷)·김천(金泉)·안기(安奇)·장수(長水)·소촌(召村)·송라(松羅)·창락(昌樂)·사근(沙斤)·삼례(參禮)·오수(獒樹)·벽사(碧沙)·청단(靑丹)·보안(保安)·상운(祥雲)·평릉(平陵) 등 19역은 참상 인원으로 제수하고, 중림(重林)·경안(慶安)·도원(桃源)·연원(連源)·금정(金井)·자여(自如)·황산(黃山)·성현(省峴)·청암(靑巖)·경양(景陽)·제원(濟原)·기린(麒麟) 등 12역은 참하 인원으로 제수하는데, 이번 변통하는 일은 오로지 초입사자가 너무 많아서 취하는 조치이고 보면 반드시 참하로 국한시킬 필요가 없고 많은 참상 중 가합한 자가 있으면 더러 교대로 차임하는 것도 불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참하 문관 찰방을 자꾸 바꾸는 폐단도 실로 성상의 하교하신 바와 같습니다만 일체 청선(淸選)의 길을 막는다면 인재가 아깝습니다. 신 등의 생각에는, 한림 주서(翰林注書)로서 본관의 추천을 받은 자는 구애할 것 없이 의망(擬望)하고, 그 나머지 옥당(玉堂)·춘방(春坊)의 관은 수령의 예에 의해 계청한 후에 비로소 의망하는 것이 또한 양쪽이 다 편리할 것 같습니다. 또 대신의 생각은 ‘관상감, 삼학 교수, 치종 교수가 정직(正職)으로 승진하는 것은 일시적 하교에서 나온 것이지, 법전에 실린 규정이 아니다. 능 참봉(陵參奉)은 생진(生進)으로 제수되어 7, 8년이 된 후에야 비로소 6품으로 오르게 되는 데 비해, 이들은 잡술로 입사하여 겨우 30개월이 지나면 참상의 정직을 받게 되니 실로 미안하다. 전의 사목에 의하여 서반(西班) 6품을 서용할 때에는 재주에 따라 임용하고 그중 드러난 성과가 있어 쓸 만한 인재는 특별히 승진을 허락해야 온당하겠다.’고 합니다.
도안청 낭청에 대해서는 병조가 누차 참상으로 제수해야 한다는 뜻으로 계품하였으나, 왕왕 사정에 치우쳐 혹은 참하로 차임해 채우니 몹시 불합리한 일입니다. 앞으로 본조로 하여금 전의 계하에 따라 반드시 참상으로 차출하여 그 책임을 중시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관왕묘 수직에 이르러는 광해 때에 훈련원(訓鍊院)의 권지(權知)로 나누어 차임하여 12개월이 지난 후 6품으로 승직시켰으나, 실로 따라 행할 만한 예가 아니었기 때문에 때로는 버려두고 살피지 않았습니다. 반정 후 11년 사이에 6품으로 올라 온 자가 겨우 두어 사람뿐이었으니 폐지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를 폐지하면 본묘(本廟)의 수직이 없게 되므로 또한 허술할 것 같습니다. 병조로 하여금 별도로 규정을 만들어 본원의 권지 참군(權知參軍) 이상으로 나누어 차임하고 30개월이 지난 후 전례에 의하여 서반 6품으로 옮기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기에 감히 이렇게 여쭙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3학 교수는 앞서의 하교에 의하여 권장하는 제도를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7월 13일 계묘
대제학 최명길이 차자를 올리기를,
"감시 의제(監試義題)를 한 문제만 내기로 개정한 후부터 유생들이 매우 편리하게 생각합니다. 금년 봄 증광시(增廣試)에 의제로 입격한 자가 매우 많았으니 폐습을 일신하였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그 사이에 오히려 잘못된 규정을 고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삼가 《대전(大典)》의 과거조를 상고해 보니, 생원시(生員試)에 대해 사서의(四書疑)와 오경의(五經義) 2편으로 말한 것은 대개 사서 오경 중 각각 한 가지 제목만을 내어 시험보이는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의 예로 보면 사서의 한 과장에 하나의 과제만 출제하고, 오경은 한 과장에 각각 다섯 과제를 출제하고 있으니, 이는 자못 《대전》의 본의를 상실한 것으로 과제를 많이 내면 유생들이 각자 취향에 따라 선택하기 때문에 점수를 매길 때 우열을 정하기 어렵습니다. 또 후일에 거듭 출제되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니, 신의 생각에는 한결같이 《대전》의 본문을 따르는 것이 편리하리라 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의 명으로 팔도에 하유하였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견실해야 나라가 편안한 것이다. 근년에 일이 많아 백성에게 부역을 지우지 않을 수 없었으나, 부역이 많고 무거워 백성들이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목화까지 말라 죽어 묵은 솜으로 옷감을 짜 요역에 응하다가 전 가족이 잇따라 도망하는 일까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조정에선 백성들을 안정시킬 계책을 강구하지 않은 지 오래되어 포악한 관리들의 가렴 주구와 폐스러운 정치의 횡행에 백성들이 받는 피해가 실로 한두 가지가 아니므로 만약에 시급히 구제하지 않으면 나라 구실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외방의 민폐를 하나하나 분명히 알기가 어려우니 경들은 백성들의 고충을 두루 찾아 작은 일은 편리에 따라 변통하고 큰 일은 조목조목 들어 아뢰어라. 폐단만 말하고 구제책을 말하지 않으면 또한 빈말에 불과하니, 공·사 양쪽이 다 편리할 방안을 익히 강구하여 진달하라."
7월 16일 병오
이행원(李行遠)을 동부승지로, 이성신(李省身)을 사간으로 삼았다.
7월 18일 무신
인정전(仁政殿) 4면 기둥에 벼락을 쳤다. 상이 시사청(視事廳)에 나와 영의정 윤방(尹昉), 판중추 이정귀(李廷龜), 판돈녕 김상용(金尙容), 공조 판서 구굉(具宏), 예조 판서 홍서봉(洪瑞鳳), 병조 판서 이홍주(李弘胄), 이조 판서 최명길(崔鳴吉), 한성 판윤 심기원(沈器遠), 형조 판서 한여직(韓汝溭), 대사헌 강석기(姜碩期), 부제학 조익(趙翼), 사간 이성신(李省身)을 불러 입대하게 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지난해에는 종묘의 나무에다 벼락을 치더니, 지난밤에 또 정전(正殿)에다 벼락을 쳤다. 하늘이 나에게 이렇게까지 경고하여 꾸짖으니 어떻게 하면 하늘의 견책에 보답하여 재변을 막을 수 있겠는가?"
하니, 윤방이 나아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재변이 오는 것은 반드시 그 원인이 있습니다. 어젯밤 정전의 재변을 듣고 두려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중묘조(中廟朝) 때 경회루(慶會樓)에 벼락이 쳤고, 신종 황제조(神宗皇帝朝) 때 황극전(皇極殿)이 벼락으로 인해 불이 나 개조한 일이 있었는데, 신이 마침 입조하였다가 친히 그 광경을 보아 압니다. 대개 재변을 막는 것은 임금이 자신을 닦고 반성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하고, 이정귀는 아뢰기를,
"정전에 벼락이 친 것은 전에 없었던 변괴입니다. 근래에 비록 백성을 사랑한다 하나 백성을 사랑한 실효가 없기 때문에 백성들이 혜택을 입지 못하고, 정사를 베푸실 때에도 성실이 보족합니다. 성의 정심(誠意正心) 네 글자가 비록 유자(儒者)의 오활한 말이라고 하나 임금된 분은 여기에 주력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일에 실효가 있게 되고 천변도 사라지게 할 수 있습니다."
하고, 김상용은 아뢰기를,
"신이 외방인에게 들었는데, 구관청(句管廳) 각 아문의 작미(作米) 폐단이 크게 백성들의 원한을 샀다고 합니다. 천재가 생긴 것이 필시 백성들의 원한에 기인되었을 것이니, 만약 백성에게 해가 되는 일을 혁파하여 민심을 위로하면 재변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최명길은 아뢰기를,
"각 아문의 폐단 때문에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데 심기원이 지금 호남에서 왔으므로 자세히 그 폐단을 알고 있습니다. 《대학(大學)》의 평천하(平天下) 1장으로 보면, 국가의 우두머리가 되어 민재를 긁어모아 쓰기를 힘쓰는 것은 반드시 소인들로부터 비롯된다고 하였습니다. 조정에서 임금의 덕행을 보좌하고 변방 일을 공고히 하는 것은 경대부의 일이고 사소한 이권을 다투는 것은 시정배의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경대부는 시정의 상인배와 더불어 이권을 다투고 있으니 백성들의 어찌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 뿌리를 뽑고 근원을 막지 않으면 백성들의 원망이 그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구관청에 대해 과연 백성들이 원망하고 있다면 폐지하라."
하였다.
7월 19일 기유
경사(京師)에 큰물이 졌다.
평소 수라상의 반찬을 덜고 정전을 피하며, 억울한 옥사를 풀고 자신을 책하는 교서를 내려 중외의 충언을 구하였다.
간원이 차자를 올리기를,
"대군(大君)의 집 영선 및 대소 공역을 정지시켜 경계하는 의도를 보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계사가 소견이 없지 않다. 다만 대군은 대궐 안에서 늙도록 살 수 없고 여러 관서의 관원도 노숙하게 할 수 없으므로 이 공역은 정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하였다.
7월 20일 경술
권도(權濤) 및 이길(李佶)·이억(李億)·이건(李健) 등의 방면을 명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인성군(仁城君)의 가족이 상경할 때 경유하는 각 고을로 하여금 말과 음식을 제공하게 하라."
하니, 듣는 자가 모두 탄복하였다.
건원릉(健元陵)의 소나무에 벼락이 쳤는데 예관을 보내 살펴보고 위안제를 올렸다.
7월 21일 신해
홍명구(洪命耉)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재변이란 까닭없이 생기지 않고 사람이 부른 것인데 국사를 생각할 때 어떻게 구제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 하늘이 높고 높아 위에 있지만 감동이 있으면 통한다. 우리 중외 관리들은 고식적인 것을 따르지 말고 각각 자신의 직무에 근실하여 하늘의 견책에 보답하라."
7월 23일 계축
이경의(李景義)를 부응교로, 이상질(李尙質)을 교리로, 이명웅(李命雄)을 부교리로 삼았다.
7월 24일 갑인
영의정 윤방이 차자를 올리기를,
"성명께서 재변을 만나던 날 신료들을 불러 재변을 막을 방법을 묻고 이어 자책을 하시며 중외의 충언을 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이어 교지를 내려 관리들을 신칙하신 말씀이 이처럼 지극하였습니다. 아, 이 마음이 족히 천심을 돌이킬 수 있습니다.
진실로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자신에 증험하여 일상 생활하는 사이에 마음속에 쾌족하지 못하고 사물을 응접하고 처리할 때 치우치는 사심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신은 그것을 마음에 새겨 살피고 반성하여 극복해 버려야 한다고 봅니다. 성학의 공부가 지극하지 못한 데가 있어 자신을 닦고 덕업에 진취하는 순서에 혹시라도 중단되는 우려가 있다면, 신은 항상 유념하시어 꾸준히 접하여 지속해야 한다고 봅니다. 사치의 해는 천재보다 심한 것인데 지금 안팎이 혼인할 때에 다투어 화려함을 숭상하고 있으니, 신은 절약과 검소를 먼저 행하여 아랫사람을 거느려야 한다고 봅니다. 토목 공사의 남발을 요망한 재앙에 비유하는데 해마다 영선하여 손을 뗄 기약이 없으니, 신은 성상께서 알맞게 조절하여 신하들로 하여금 본받도록 해야 한다고 봅니다.
언로(言路)는 조정의 혈맥인데, 위에서는 즐겨 듣는 성의가 없고 아래에서는 특별히 진언하는 것을 경계하여 오랫동안 막히어 직언이 들리지 않고 있으니, 신은 너그러이 포용하여 가납하고 또 유도하여 말하도록 해야 한다고 봅니다. 인재는 국가의 원기입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비는 실로 말할 것도 없습니다만, 관록을 쌓은 자도 혹은 10년 동안 임용되지 못하여 심지어 후배가 선배보다 벼슬이 앞서간다고 기롱하고 있으니, 신은 적절히 변통하여 벼슬이 트이도록 해야 한다고 봅니다.
옛날 조참(曹參)이 제(齊)를 다스릴 때 옥사를 어지럽히지 않는 것으로 주무를 삼았습니다. 형옥이란 인명이 관계되고 원한이 모인 곳인데, 지금의 죄수 중에는 심지어 10년이 되도록 해결되지 않은 자가 있으며, 귀양가거나 처형된 자도 수백여 인에 이릅니다. 근자에 대사령의 성은으로 인하여 방면된 자가 자못 많기는 하나 그 나머지로 죄가 중하여 용서하기 어려운 자가 또한 어찌 적겠습니까. 신은 정무를 보시는 여가에 항상 애휼한 마음을 가지셔야 한다고 봅니다. 옛날 정이(程頤)가 신종(神宗)에게 고할 때마다 백성들의 고통을 가지고 말하였습니다. 혹독한 추위와 심한 더위에도 오히려 원망하는 것 또한 백성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은 구중 궁궐 안에서도 항상 이를 유념해야 한다고 봅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잘 알았다. 차자에 진술한 말은 실로 격언이다. 감히 마음에 새겨 힘써 행하지 않겠은가."
사신은 논한다. 윤방은 고 상신(相臣) 윤두수(尹斗壽)의 아들이다. 근후하고 청간하며 의표가 근엄하였으나 본래 나라를 경영하는 능력이 부족하였다. 재상의 자리에 있은 지 자못 오래되었으나 건의한 일이 별로 없어 만년의 명예가 젊어서 보다 못하다고 한다.
【태백산사고본】 28책 28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529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과학-천기(天氣) / 역사-편사(編史)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윤방은 고 상신(相臣) 윤두수(尹斗壽)의 아들이다. 근후하고 청간하며 의표가 근엄하였으나 본래 나라를 경영하는 능력이 부족하였다. 재상의 자리에 있은 지 자못 오래되었으나 건의한 일이 별로 없어 만년의 명예가 젊어서 보다 못하다고 한다.
경상도에 큰 가뭄이 들었다.
전라 감사 이경여(李敬輿)가 상소하여 본도의 폐단을 진술하였는데, 첫째는 공안(貢案)이 고르지 못한 폐단이요, 두 번째는 각종 군인(軍人)의 여정(餘丁)에 대해 그들의 이웃이나 일가에서 거두는 폐단이요, 세 번째는 충장위(忠壯衛)와 충익위(忠翊衛)의 군공으로 곡식을 바치는 사람들을 주사(舟師)로 뽑아 보내는 폐단이요, 네 번째는 육군(陸軍)을 주사로 편입시키는 폐단이요, 다섯 번째는 사천(私賤)이 너무 많은 폐단이요, 여섯 번째는 해마다 군병을 보충하는 폐단이요, 일곱 번째는 서울 각사(各司)의 사주인(私主人)이 부정을 하는 폐단이요, 여덟 번째는 상납 포목을 점검하여 물리치는 폐단이요, 아홉 번째는 여러 궁가(宮家)와 각 아문이 둔전(屯田) 및 염분(鹽盆)·어전(漁箭)을 설치하는 폐단이요, 열 번째는 연해의 주사(舟師)와 각 고을 격군(格軍)의 폐단이요, 열한 번째는 각 아문과 구관청의 방납 폐단이요, 열두 번째는 모든 궁가와 각 아문이 채무를 독촉하는 폐단이요, 열세 번째는 어영군(御營軍) 및 각 아문의 군병이 투속하는 폐단이요, 열네 번째는 내수사(內需司)와 성균관(成均館)의 양천(良賤)이 서로 투입하는 폐단이요, 열다섯 번째는 산중 고을에서 수군을 뽑는 폐단이요, 열여섯 번째는 열읍 관속 사패의 폐단이요, 열일곱 번째는 포수 호수(砲手戶首)의 폐단이요, 열여덟 번째는 월과(月課)에 쓰는 군기를 해마다 마련하는 폐단이요, 열아홉 번째는 통제사 영(統制使營)이 곡식을 추징하는 폐단이요, 스무 번째는 본도의 주사(舟師)를 영남 방어에 첨가하는 폐단이요, 스물한 번째는 파선 미곡을 재차 징수하는 폐단이요, 스물두 번째는 속오군(束伍軍)만이 고초를 겪는 폐단이었다. 이에 대해 모두 상의하여 조처할 것을 명하였다.
7월 25일 을묘
평안도에 큰물이 졌다.
섬 중의 한인(漢人)이 백마 산성(白馬山城)에 비축한 군량미 2천여 석을 탈취하여 해상으로 실어갔다.
상이 창경궁(昌慶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정언 심대부(沈大孚)가 인피하기를,
"오늘 거둥하실 때 동료와 함께 모였는데 이길(李佶)·이억(李億)·이건(李健) 등의 석방이 부당하다고 하여 이를 논계하려 하였습니다. 신은, 이는 전하에 있어서 성대한 은덕을 베푸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신이 이미 그 전에 개도(開導)하지도 못하고 또 나중에 순순히 받들지도 못하였으니 신이 전하를 잘 섬기어 보답하려는 본디의 마음이 아닙니다. 동료와 함께 있을 수 없으니 파척하라 명하소서."
하고, 양사(兩司) 역시 논의가 서로 어긋난다고 하여 인피하였는데, 옥당이 차자를 올려 양사는 출사하게 하고 심대부는 체직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7월 26일 병진
태백성이 나타났다.
7월 27일 정사
간원이 아뢰기를,
"영산(榮山)의 연혁은 조정의 큰 명령이었습니다. 운신(運臣)이 하나하나 들어 계문하고 해조(該曹)가 품신하여 결정하였으니, 수령된 자는 의당 받들어 준행하기에 여념이 없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곱 고을의 수령들은 한결같이 사나운 품관들의 말만 듣고 조정의 명령을 무시한 채 외람되이 소를 올렸는데 기만하는 태도가 많았습니다. 심지어 ‘성인을 본받아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였는데 지금 과연 이루었다.’는 등의 말을 하여 현저히 사명(使命)을 협박하는 뜻이 있었고, 또 유향소(留鄕所)의 품관과 서로 배가 맞아 여러 고을에 통문하여 운신을 죄인으로 만들었으니, 이는 실로 전고에 없었던 큰 변고인 것입니다. 본도의 감사는 처음부터 그 상소를 물리치지 못하고 위에 전문하여 분쟁의 단서를 열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감사 이경여를 추고하고 일곱 고을 수령을 모조리 파직하며 통문을 내자고 앞장서서 선동한 품관은 온 가족을 변방으로 옮기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러나 일곱 고을 수령은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7월 29일 기미
김원립(金元立)을 지평으로, 김경여(金慶餘)를 정언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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