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8권, 인조 11년 1633년 8월

싸라리리 2025. 12. 30.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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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경신

평안 감사(平安監司) 민성휘(閔聖徽)가 임기가 만료된 후에도 그대로 연임한 지 1년이 되었는데, 마침내 신병이 위독하다는 핑계로 사직장을 잇따라 올렸다. 하루에 2통이 겹쳐 이르자 상이 노하여 그를 파직시킨 다음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8월 2일 신유

양사가 합계(合啓)하기를,
"이공(李珙)017)  의 이름이 반적의 입에 나온 적이 전후 한두 번이 아니어서 그 역적의 정상이 낭자하여 엄폐할 수 없게 된 뒤에야 전하께서는 온 조정의 요청을 어쩔 수 없이 따르셨습니다. 가령 지난번에 역적 공을 영동(嶺東) 지방에 오래 있게 하였더라면 어찌 무진년018)  의 앙화(殃禍)019)  가 있었겠습니까. 명분이야 그를 아낀다고 한 일이지만 실은 해친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전하께서는 결코 자그마한 은혜로 죄 있는 사람을 놓아 주어 도리어 막대한 근심을 끼치게 해서는 안됩니다. 조정의 공론이 준엄하고 유사(有司)가 지키는 법을 바꾸기 어려우니 후환을 걱정하시는 도리를 더욱 삼가야 합니다. 더 깊이 생각하시어 이길(李佶)·이억(李億)·이건(李健)을 석방하라는 분부를 속히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길·억·건 등이 돌아오더라도 필시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니, 그대들은 임금을 받들어 순종하는 도리를 깊이 생각하여 과격하게 논의하지 말라."
하였다. 합계한 지 5개월이 지나서야 상이 대신에게 하문하였는데, 영의정 윤방(尹昉)과 좌의정 오윤겸(吳允謙)이 모두 길·억·건을 석방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니, 상이 비로소 따랐다.

 

8월 3일 임술

도원수(都元帥) 김자점(金自點)이 황주(黃州)의 정방 산성(正方山城)을 쌓을 적에 역사를 시작한 후에야 이를 조정에 아뢰니, 상이 하교하였다.
"성을 쌓는 것은 옳은 일이지마는 변방을 지키는 신하로서 먼저 시행하고 뒤늦게 아뢰는 처사는 잘못이다. 김자점은 일찍이 백마 산성(白馬山城)을 쌓을 때에 조정에 아뢰지 않았었고 이번에 또 제 마음대로 성을 쌓았으니, 매우 외람하다. 무겁게 추고하라."

 

오숙(吳䎘)을 황해도 관찰사로 삼았다. 오숙은 젊었을 때부터 시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다. 광해군 비(光海君妃)의 오라버니인 유희분(柳希奮)의 문하에 팔학사(八學士)라고 칭한 자들이 있었는데, 오숙이 그 중의 한 사람이다. 반정(反正) 이후로 혼조(昏朝)에 몸담았던 사류들을 청현(淸顯)의 관직에 등용하지 않았는데, 오숙은 본디 심기원(沈器遠)과 교분이 있었으므로 기원이 그를 위해 주선하여 마침내 청현의 벼슬길이 트이게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승지를 거쳐 외직으로 나가 해서(海西)를 안찰하게 되었다.

 

8월 4일 계해

태백성이 나타났다.

 

8월 5일 갑자

공유덕(孔有德) 등이 노병(虜兵)을 인도하여 몰래 여순(旅順)을 습격해 도독 황룡(黃龍)을 죽였다. 가도(椵島)의 인민들이 여순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두려워하여 배를 준비해 놓고 짐을 메고 대기하고 있었다. 도독 주문욱(周文郁)은 녹도(鹿島)로 물러가 주둔하였고, 손(孫)·양(楊) 두 도독은 장산(長山)으로 물러가 주둔하였다. 부총(副摠) 심세괴(沈世魁)가 이 섬을 포기하고 서쪽으로 돌아가자고 의논하자, 섬에 있는 군민(軍民)들이 만류하기를,
"노야(老爺)가 평소에는 이 섬에서 대장으로 계시다가 이제 와서는 혼자만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시니 우리들은 장차 어찌하라는 말입니까? 저희들이 먼저 자살하겠습니다."
하니, 부총병이 부득이 떠나기를 포기하였는데, 섬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8월 6일 을축

태백성이 나타났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수리소(修理所)의 당상관 이하에게 가자(加資)하여 벼슬을 올려 주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비록 두서너 달 동안 일을 감독했던 공로는 있지만 직분상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에 불과합니다. 더구나 ‘수리(修理)’라는 명칭은 실로 경영하여 새로이 창설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데, 어떻게 이로 인하여 갑자기 품계(品階)를 올려 주어 의당 베풀지 않아도 될 상을 함부로 줄 수 있겠습니까. 수리소의 당상관 이하에게 가자하여 벼슬을 올려 주라는 것과 차지 내관(次知內官)에게 가자하라는 분부를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번 수리의 역사를 데면데면히 말한다면 너희들이 논한 바가 옳거니와 만일 그 일을 세밀히 논한다면 그들이 민력(民力)을 번거롭히지 않고도 정성껏 처리하고 밤낮없이 노력하여 빠른 시일 내에 성사시켰으니, 그 공이 크다. 그러니 그들에게 가자로 보답해 주는 것이 불가하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였다. 누차 아뢰어 만류하였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8월 10일 기사

금인(金人)이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의 배를 불태우고 철수하였다.

 

찬수청(纂修廳)이 아뢰기를,
"국(局)을 열어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를 수정하다가 국휼(國恤)을 만났고 이어 국경에 사변(事變)이 있어서 그 《일기》를 강도(江都)020)  로 실어 보냈었는데, 지난번 포쇄(曝曬)하러 갔던 길에 이미 그 《일기》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도청(都廳) 두 사람을 전에 최명길(崔鳴吉)과 장유(張維)로 하셨는데, 장유는 신병으로 직임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조 판서 홍서봉(洪瑞鳳)으로 그를 대신케 하소서. 낭청은 이명한(李明漢)·이식(李植)·정백창(鄭百昌)으로 삼으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이에 앞서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이 늘 광해군과 사적으로 서찰을 왕래했는데, 그 초본을 남겨 두었다가 밀실의 벽 사이에 감추어 놓고 밖에서 종이로 발라 벽처럼 해 놓았다. 그 후 그가 패망하자 시민들이 집을 헐어 내다가 그 초본이 나왔기 때문에 사관(史官) 임숙영(任叔英)이 그것을 수집하였으나 미처 기록하지 못하고 마침 딴 관직으로 전임하게 되어 검열(檢閱) 나만갑(羅萬甲)에게 부탁하였다. 그래서 이때에 이르러 그 글을 찬수청에 전송(轉送)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혹(鄭㷤)의 아낙이 김내(金琜)의 아내와 사촌간이라고 하니 이 역시 역적의 무리입니다. 어떻게 국혼(國婚)을 간택하는 일로 궁궐을 드나들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종묘에 부제(祔祭)하는 일에 있어서는 신이 두세 차례나 회계하여 도감 설치에 대한 분부를 속히 내려 주시기를 주청하였습니다.
서인·남인 쪽에서 저희들끼리 하는 말이 있긴 하지만 이런 때에 누가 감히 말하겠습니까. 중자(中子) 【 이른바 ‘중자(中子)’라는 것은 중북(中北)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의 행적이 올바르지는 않지만 반드시 대북(大北)의 의논과 맞서지는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요즈음 신의 동료들이 다행히도 성상의 은혜로운 등용에 힙입어 삼사(三司)에 들어 있는 자가 많으므로 사론(私論)이 빗발치고 있지만 굳이 염려할 것조차도 없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지나치게 염려하여 자주 하문하시니 신은 답답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훈호(勳號)는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의당하다고 여겨집니다. 원훈(元勳)에 관한 일은 한희길(韓希吉) 외에 더 참여했던 사람은 신도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당초 박응서(朴應犀)가 올 때에 그 모의에 동참한 자는 김개(金闓)였다고 하기에 잡아들였는데, 그를 석방할 때에 또 힘써 아뢰어 변호하였던 사람은 바로 병조 판서였습니다. 이는 모두 성상께서 훤히 통촉하여 역력히 셀 수 있는 일입니다. 한희길은 신이 그 사건을 알고 있다고 하여 그가 와서 말해 줄 때 작은 쪽지에 몇 사람만을 적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 살해당한 사람의 친척인 박응호(朴應虎)가 김개를 배신하고 박이서(朴彛叙)에게 붙자, 무단히 형조에서 취초(取招)하여 박응호의 입에서 나온 것처럼 만들어서 뒷날의 증빙 자료를 삼으려고 하였으니, 참으로 해괴한 일로 온 국민이 침뱉고 비열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근래에 들으니 남이공(南以恭)의 무리들이 박응호와 한희길을 맞아들여 그들을 원훈 공신에 참여시키려고 도모한다 하니 더욱 가소로운 일입니다. 소북인(小北人)들은 박응호를 기화로 삼아 이미 노예 하천인에게 관상감(觀象監)의 정직(正職)을 제수하여 은혜에 보답하는 뜻을 보이고 나서 이번에는 또 원훈 공신을 만들려고 도모하고 있습니다. 이에 소북인 한 떼가 모두 박응호의 턱밑을 우러러보며 모록(冒錄)021)  할 꾀를 생각하고 있다 하니 참으로 한심스럽고 간교합니다. 이의숭(李義崇) 무리가 때마침 신의 집에 들렀다가 저들의 하는 짓에 분개하여 큰소리를 지르기에, 신이 ‘그렇지 않다. 기축년 고변(告變)을 했던 조하(趙嘏)나 진(珒)의 역모를 기찰(譏察)했던 김위(金渭)와 같은 사람도 다 원훈 공신이 되지 못했는데, 더구나 박응호는 형을 위해서 원수를 갚고 잃었던 은(銀)을 되찾으려고 했던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그가 고변이나 역모를 알아내는 데 무슨 공로가 있겠는가. 훈신(勳臣)을 기록하는 문서에 성명이 오른 것만도 족하다고 하겠다.’ 하였습니다. 대체로 부귀는 사람마다 누리고 싶은 것이지만 공을 다투는 데 있어서는 도무지 염치마저 잃어 버리고 있으며, 또 요즈음 여기에 분망(奔忙)한 무리들이 근거 없는 말을 많이 지어내어 요행을 꾀하려고 합니다. 이는 성명께서 얼마 만큼 통찰하여 명확하게 분변하시느냐에 달렸을 따름입니다.
상께서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기신 후에 길일(吉日)을 택하여 궁궐을 건립하려는 일에 있어서는 온 국민이 이미 도읍을 옮기는 걱정을 면케 되었고 또 상이 거처를 옮기는 일을 기쁘게 여기고 있으므로, 그들로 하여금 별궁(別宮)을 창건하게 하더라도 필시 원망하거나 괴로워하지 않고 마치 자식처럼 모여들어 일을 도울 것입니다.
동래(東萊)에서 체포한 적도를 서울로 압송하여 국문하고 나서 역적 무리들이 칠성산(七星山) 산중에 깊숙이 숨어 있다는 설을 바야흐로 믿을 수 있었습니다. 토벌하고 포박하는 술책은 오로지 지방 장관에게 달려 있으니 이경전(李慶全)을 체직한 뒤 재략이 있는 자로 차송(差送)한다면 남쪽 지방도 과히 염려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이경전은 백면서생으로서 본디 무사(武事)를 익히지 않았으므로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날 신이 올린 계사 내용 중의 ‘《문선(文選)》과 이백(李白)·두보(杜甫)의 시부를 강하여 인재를 시취해야 한다.’는 일에 대해 아직도 판하(判下)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일반 여염집에서 공부하는 사자(士子)들이 모두 《문선》과 이백·두보의 시부를 주로 배우고 있어서 흥기(興起)하리라는 기대가 다분하기 때문에 아뢴 것이니, 이 공사(公事)를 속히 판하하여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조식(曺植)의 서원에 관한 일은 관학 유생(館學儒生)들도 비답을 빨리 내려 주시기를 몹시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이 큰 경사에는 마땅히 증광시(增廣試)를 보여야 하겠습니다마는 좌의정과 병조 판서가 ‘별시(別試)를 치러서 인재를 많이 뽑는 것이 더 좋겠다.’ 하였기 때문에 당초 증광시를 즉시 주청하지 않았습니다. 여론은 모두 두 경사를 합하여 증광시를 치르되 2월 중에 날짜를 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합니다마는 오직 성상의 재결에 달려 있습니다. 을묘년022)   정월 25일."

 

8월 11일 경오

공청도(公淸道) 직산(稷山) 등지 고을에 홍수가 났다.

 

8월 12일 신미

태백성이 나타났다. 화성이 여귀성(輿鬼星)의 성좌로 들어갔다.

 

경상도 청도군(淸道郡)의 객사(客舍)에 벼락이 쳤다.

 

8월 13일 임신

조경(趙絅)을 이조 정랑으로, 이명웅(李命雄)을 이조 좌랑으로, 변호길(邊虎吉)을 대군 사부(大君師傅)로 삼았다. 호길은 변인길(邊麟吉)의 형인데, 형제가 다 추숭하는 의논에 찬성했었다.

 

도사(都司) 상가희(尙加喜)의 차인(差人) 위유인(魏有仁)·지유정(池有鼎) 등 13명이 표류하여 태안군(泰安郡)에 닿았는데, 비변사가 그들에게 양식을 주어 돌아갈 수 있도록 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8월 14일 계유

함경도 덕원(德源) 고을 등지에 홍수가 났다.

 

진주(晋州)에 사는 유생 하홍의(河弘毅)가 여러 궁가(宮家)와 각 아문이 둔전(屯田)을 설치한 폐단에 대하여 상소하였는데, 상이 너그럽게 답하였다.

 

8월 15일 갑술

사헌부가 아뢰기를,
"이번에 하늘이 내린 재앙이 매우 음산하고 참혹하였기 때문에 성상의 마음이 놀라 배나 더 경외(敬畏)하셨습니다. 혹 난국(難局)을 회복하여 다스리는 기회가 될 것으로 여기었으나, 별로 수치(修治)의 실적이 없으시니 신들은 은근히 걱정됩니다. 전하께서 몹시 슬퍼하시다 여위어서 미령하신 지 벌써 1년이 되었습니다만 경연(經筵)의 가까운 신하는 거상중(居喪中)의 침통한 용모를 오랫동안 뵙지 못하였고, 희비(喜悲)를 함께 하는 대신은 생각한 바를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평소 무사한 시기라 하더라도 이렇게 하면 매우 걱정스러운 일인데 더구나 지금처럼 재앙과 이변이 잇달아 일어나고 인심이 흩어져서 위급 존망의 화가 조석간에 닥칠 듯한 때이겠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이런 때에 깊은 궁궐에서 일반 서민의 거상처럼 하시는 게 맞지 않습니다. 전하의 주위에 정직한 신하는 날이 갈수록 멀어지고 환관과 내시만 날로 친근해 지고 있으니, 들으신 바가 무슨 말이며, 강론한 바가 어떤 일이겠습니까. 신들의 생각에는 성상께서 조섭 중이라서 비록 날마다 경연을 열지는 못하시더라도 늘 편전(便殿)에 계시면서 예절에 구애받지 말고 대신과 여러 신료들로 하여금 자주 입시(入侍)케 하여, 안팎의 모든 폐해를 지성으로 물으셔서 인심을 수습하고 천재(天災)를 완화하는 근본을 마련하소서."
하니, 마땅히 유념하겠다고 상이 답하였다.

 

8월 16일 을해

금의 사신 운타시(雲他時)가 한(汗)의 글을 가지고 왔는데, 그 내용에,
"보내신 글에 ‘회령(會寧)에서 사람을 찾는 일에 대해서는, 맹약 이후에 있었던 것은 말씀하지 않더라도 감히 숨길 수 없지만 맹약 이전에 있었던 것은 아무리 누차 말씀하시더라도 명령을 따르기 어렵겠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찾는 이 한 가지 일은, 우리 두 나라 사이가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을 때에 저희 금나라에서 변방 백성을 거두어 이주(移住)시켰는데, 우리 변방 백성이 귀하의 국경과 가까웠기 때문에 친지나 벗을 맺어 서로 사이좋게 오가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사할 때 사람이나 가축 및 세간을 미처 다 운반하지 못한 것들은 매양 서로 친하거나 아는 사람 집에 맡겨 두었다가 다시 가지러 올 때를 기다리기도 하였고 그들이 스스로 귀국에 투속하여 숨은 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주인이나 친지가 각자 찾아가려고 한 것이니 왕은 내주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만일 양국이 전쟁할 때에 귀하의 땅으로 도망갔던 자를 지금 찾으러 갔다면 잘못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리가 다르므로 율로 논하기는 참으로 곤란합니다."
하였고, 또 답서에,
"저희 나라에서 도망간 금인(金人) 1명과 중국인 2명을 왕이 묶어 보내 주셔서 매우 감사합니다. 또 회령 일대에다 맡겨 두었던 사람과 가축도 왕이 간간이 찾아 보내 주신 데 대해서도 아울러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양국이 지난날 천지 신명 앞에 대고 맹약할 때 각자의 국경을 지키고자 말하였었는데 맹세한 후로 우리 나라에서 한번이라도 귀하의 국경을 함부로 침입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어인 일로 귀국의 백성들은 우리 국경을 자주 침입합니까? 한번은 찰노(扎怒)가 포획했다가 놓아 보냈고 한번은 국경을 지키는 병사에게 쫓겨갔습니다. 이번에 복아탑토(伏兒塔兎) 지방에서 또 보병 2명과 기마병 3명을 우리 수비군이 붙잡아 오다가 기마병 3명은 도중에서 달아나고 보병 2명만 남았기에 그들을 귀국으로 보내니, 그 두 사람에게 국경을 넘어 온 까닭을 왕이 직접 물어 보시면 아실 겁니다. 이와 같은 일이 그치지 않고 자주 발생하니 그 저의를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왕은 그것을 엄금시켜야 할 것이니 이에 대해서 익히 생각해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또 한 글에,
"우리 나라에서 원수(元帥)        공유덕(孔有德)과 총병(摠兵)        경중명(耿仲明)의 병선을 차지했고 이어 또 여순구(旅順口)의 병선도 차지했습니다. 그 뒤에 나의 군사를 지휘하는 왕자와 금(金)·한(漢)·몽고(蒙古) 대인(大人)들이 모두 이 배를 이용하여 바다에 있는 섬들을 죄다 졸라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섬의 상황을 보건대, 간악한 유흥치(劉興治)가 난을 일으킬 때 섬사람들이 이미 한 차례 도륙을 당했고 그후 공 원수와 경 총병이 우량한 자들을 가려 뽑아 등주(登州)·내주(萊州) 등지로 이끌고 갔었으며, 지난번에 또 공 원수와 경 총병이 등주를 떠나 북쪽으로 올 때 매우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왔었고 총병(摠兵)        황룡(黃龍)이 또 연도(沿島)에 있는 강하고 날쌘 병사를 뽑아 여순에 주둔시켰으며, 근래에 또 우리 군사들에게 여러 섬들이 모두 도륙을 당했습니다. 또 듣건대 중국의 배가 와서 실어 갔기 때문에 지금 섬에 남아 있는 자들은 노약자로서 버림당한 사람들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이들을 위하여 양항(兩項)의 배를 띄워 깃발을 달고 조류를 거슬러 올라가려고 한다면 필시 귀하의 변방 인민들이 놀라 산으로 피해 달아나게 되어 농업을 그르치게 될 것입니다. 이러고 보면 양국이 화목하게 지낸다 하더라도 태평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배에 관한 일은 덮어두기로 하였으니, 각 섬에 더러 남아 있는 사람들을 귀국에서는 행여 구제하지 말 것이며 만일 우리 나라로 들어오기를 원하는 자가 있더라도 귀국은 역시 저지하지 마십시오. 왕이 일찍이 양식을 주어 구원하지도 않고 해안에 상륙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기로 허락하였으니, 왕은 시종 일관 그대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쓸모없는 섬사람들 때문에 괜히 사건이 생길까 염려됩니다. 왕은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8월 20일 기묘

표류하다가 전라도에 닿은 중국인 장국태(張國泰)가 나주(羅州)에 사는 사람을 찔러 죽이고 도망하여 숨었다가 나주 목사 정효성(鄭孝成)에게 체포되었다. 국태가 자기의 죄를 알고 차고 있던 칼로 자기 배를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이에 형조가 관찰사에게 사건의 진상을 자세히 살펴 보고케 한 뒤에 율에 따라 처단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8월 22일 신사

강원도 양양(襄陽) 등지에 폭풍이 불고 홍수가 났는데, 본도(本道)에서 그 상황을 보고했다.

 

8월 23일 임오

태백성이 나타났다.

 

8월 27일 병술

예조가, 오는 9월 1일부터 정전(正殿)으로 환궁하고 상선(常饍)을 회복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8월 29일 무자

금차(金差) 운타시가 샛길을 따라 심양(瀋陽)으로 돌아가면서 곧바로 백마 산성(白馬山城)을 향해 떠났다. 때마침 중국의 파발 천총(千摠) 김문재(金文才) 등 일행 10여 명이 의주(義州)로 가는 길에 금차 일행과 만나 그들은 겨우 피해 달아났으나, 수행인 2명은 호인(胡人)에게 붙잡혔다. 이에 운타시가 백마 산성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윤진경(尹進卿)이 잘 타이르고 만류한 끝에 성밖에서 잠을 잤다. 붙잡힌 중국인이, 그의 부총이 방어사(防禦使)에게 보내는 글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배를 불사른 곳에서 주운 물건을 돌려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윤진경이 뒷날 호인의 트집거리가 될까 염려하여 사유를 갖추어 계문하였다. 이에 대해 비국이 복계하기를,
"금국 사신이 돌아갈 때 중국의 파발이 그들에게 붙잡혔다고 하니 이번 사건으로 섬에 있는 중국인의 질책이 필시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담당 지방관은 사건을 잘 수습하지 못한 죄를 면치 못할 것이니 윤진경을 잡아다 국문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30일 기축

영의정 윤방(尹昉), 좌의정 김류, 예조 판서 홍서봉(洪瑞鳳)이 분부를 받들고 빈청(賓廳)에 나아가 종묘 열성(列聖)의 신주에 글자 쓰는 규식에 대하여 회의하고 나서 아뢰기를,
"신들이 지난번에 삼가 봉심한 뒤에 올린 계사 중 종묘의 신주를 쓰는 규식과 축문에 대해서, 구례에 확실한 근거가 있어서 감히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것은 제외하고 그 중에서도 대단히 잘못되어 고치지 않으면 안될 몇 가지 사항을 다음과 같이 조목별로 열거합니다.
하나는, 선조 대왕(宣祖大王)에 대해서 첫머리에다 유명증시(有明贈諡) 네 자를 쓰지 않고 묘호(廟號)는 위에다 쓰고 증시는 밑에다 써 놓아 열성들의 신주에 쓰는 규식과 같지 않았는데, 이는 초상 삼우(三虞)에 신주를 쓸 때 열성들의 신주 규식을 참고해 보지 않고 향실(香室)의 축문만 근거로 하여 썼기 때문에 그뒤 연상(練祥) 때 신주를 쓰면서 다시금 의심하지 않고 옛날처럼 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을 알았으니 열성의 신주 규식에 따라 쓰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선조 대왕에게 두 차례 추상(追上)한 존호(尊號) 16자 중에 여덟 자는 대행(大行) 때 올린 시호의 위에 있고 여덟 자는 그 밑에 있었습니다. 삼가 상고해 보건대 역대 임금의 대행 때 올린 시호는 모두 아래쪽 끝에 있었고 모두 모효대왕(某孝大王)이라 칭하였는데, 이것이 곧 옛날 규식입니다. 이는 필시 계통(啓統) 등 여덟 글자를 첫번 추상한 때에는 옛날 규식을 상고해서 대행 때 올린 시호의 위에다 올려 썼고, 이모(貽謨) 등 여덟 자는 두 번째 추상할 때에 옛날 규식을 다시 상고해 보지 않고 그냥 대행 때 올린 시호의 아래에다 이어 쓴 것이니 너무나 근거 없이 한 일입니다. 이른바 추상한 16자는 선후의 차례대로 쓰고 대행 때 올린 시호는 열성조(列聖朝)의 옛날 규식에 따라 하단에 써서 바로잡으소서. 그러니 의당 ‘유명 증시 소경 선조 정륜 입극 성덕 홍렬 지성 대의 격천 희운 계통 광헌 응도 융조 이모 수유 광휴 연경 현문 의무 성예 달효 대왕(有明贈諡昭敬宣祖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啓統光憲凝道隆祚貽謨垂裕廣休延慶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으로 쓰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나는, 의인 왕후(懿仁王后)께 앞뒤 두 차례에 올렸던 묘호와 대행 때 올린 호에 쓴 차례는 더더욱 뒤바뀌어서 고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올려드린 선후 차례에 따라 옛날 규식대로 바로잡으소서. 그러니 의당 ‘장성 휘열 정헌 명덕 현숙 의인 왕후(章聖徽烈貞憲明德顯淑懿仁王后)’로 써야 옳을 듯합니다.
하나는, 축문(祝文)에 ‘유명증시’란 네 글자가 없이 묘호(廟號)는 위에, 증시는 아래에 쓰이어 있었는데, 이렇게 쓴 데 무슨 까닭이 있는가 하여 삼가 《오례의(五禮儀)》의 신주를 세우는 규식과 축문의 규식을 상고하여 보니, 서로 같거나 다른 점이 없지 않았습니다마는 축문은 대를 이은 왕이 축고(祝告)하는 말이기 때문에 ‘유명증시’란 네 글자를 쓰지 않더라도 흠잡을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미 네 글자를 쓰지 않았으니 만큼 묘호를 위에, 증시는 아래다 쓰는 것은 그 사세로 보아 혹 이렇게도 쓸 수 있다고 여겨지는데, 이것은 예전부터 의논하여 결정한 일이 아닙니까. 예전대로 그냥 쓰더라도 아마 실례가 되지 않으리라 여겨집니다.
하나는, 양위(兩位)의 신주를 만일 바로잡아 고쳐 쓴다면 그 전에 칠하여 지워서 글자 모양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곳에도 자연 미진한 걱정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부제학 이식(李植), 부응교 최연(崔葕), 부교리 이원진(李元鎭), 수찬 정뇌경(鄭雷卿)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선조 대왕께서 그동안 조종조가 당하신 누명을 통쾌하게 씻고 나라의 운명을 거듭 새롭게 바꿔 놓으셨기 때문에 그 당시에 벌써 존호를 두 번 올렸는데 그 아름답고 광대한 실적과 높이 드러난 전범(典範)은 천지에다 내놓아도 어긋나지 않고 귀신에게 물어봐도 의심이 없고 만세토록 보여도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광해조(光海朝)에 와서는 간흉들이 소란을 일으켜 임금을 우롱하고 멋대로 아첨하여 광해군은 전후 여섯 번이나 존호를 받았고 당시의 신료들은 12공신의 논의까지 있었습니다. 이처럼 위아래가 서로 잘못되도록 하고 명실이 어긋났는데, 거기다 다시 기만을 자행하여 위로 조종조에까지 소급하였습니다. 이에 광기어린 잘못된 거조를 선조(宣祖)의 공덕 때문이라고 하여 휘호(徽號)를 두 번이나 올렸는데 모두 근거 없는 것들입니다.
그 이른바 병진년023)  에 올렸다는 존호는 허균(許筠)의 변무(辨誣) 사건으로 인한 것입니다. 허균이 가짜로 만든 야록(野錄)의 초고본을 시장에다 내다 팔게 하고는 그가 처음 보고 사들인 것처럼 꾸몄는데, 그 글의 내용이 흉악하고 도리에 거슬린 말을 써서 임금의 덕을 속이고 있어서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할 것도 있었습니다. 모두 스스로 사실에 없는 일을 거짓으로 꾸며 서책으로 내어서 중국 조정을 현혹시켜 이런 일이 진짜로 있었던 것처럼 꾸며 놓고 나서 이이첨 등과 함께 변명하는 주문을 중국에 올리자고 청하였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 전대 조정에서 국가를 빛낸 커다란 공훈과 비교하였으니, 참으로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되지 못할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것을 전대 조정의 미덕으로 돌리어 자신의 하늘에 가득 찬 악덕을 가림과 동시에 조종조를 높이어 받드는 효심에다 붙이려고 하였으니, 정말 괴이합니다.
그리고 신유년024)  에 올린 존호에 있어서는 대개 오랑캐와 통교(通交)했다는 의심을 받았기 때문에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사리를 분명히 밝혀 오해를 풀게 했던 것입니다. 그 사건은 당초에 대장이 먼저 내지(內旨)를 받고서 군사의 기밀을 누설하여 오랑캐에게 잘 보여 서로 친밀한 교분을 맺은 것으로 그 사실의 행적이 애매하여 변명할 수 없는 것인데 의례대로 변명하는 주문을 올리자 역시 의례대로 칙유(勅諭)를 내린 것이니, 무슨 기록할 만한 공덕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광해군이 존호를 받고 나서 다시 이것은 선조 대왕이 지성으로 사대(事大)한 효과라 하여 존호를 거듭 올렸으니 더욱 무리한 짓이었습니다. 더구나 거기에 올린 16자는 모두 광해가 스스로 자기 공덕을 칭찬하기 위하여 선조 대왕이 끼친 경사라고 돌리었지마는, 실은 선조 대왕의 성덕(聖德) 신공(神功)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다가 말의 뜻이 얕고 문자도 중복되어 최고의 칭호와 지존의 전장(典章)이 아니어서 다만 조종을 속이고 신위(神位)을 더럽히기만 하였으니, 빛나는 하늘에 계신 선조의 영혼이 어찌 기쁘게 흠향하여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신들이 삼가 듣건대, 반정했던 초기에 이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논이 있었습니다만, 신주를 고쳐 쓰면 미안하지 않을까 해서 여론이 격렬했지만 감히 이에 대해 논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신주 쓰는 법이 규식에 어긋나 앞으로 고쳐 써야 할 일이 있게 되었으니, 전하께서는 종묘를 삼가 받들어 효도를 숭상하고 예의에 정성을 다하고 계시는 바, 그 칭호가 사실에 벗어난 것은 삭제하여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속히 담당 부서에 알려 대신들에게 수의(收議)하여 선조 대왕의 성덕 신공으로 하여금 맞지 않은 칭호를 오래 받지 않게 하소서."
하니, 이 일을 예조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예조가 이에 대해 아뢰기를,
"광해군의 전후 존호가 번다하고 중복된 것은 실로 뭇 흉측한 무리들이 아첨하기 위한 계략에서 나왔는데, 속이는 일이 위로 선왕(先王)에게까지 미쳤으므로 그 당시에 약간 지식이 있는 사람이면 거의 다 분개하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반정했던 초기에 모두들 바로잡아야 한다고 하였으나 지금 10여 년이 되도록 실천하지 못하고 있으니, 공론에 유감된 일이 아닙니까. 생각건대 선조 대왕께서는 조종보다 더 빛난 공을 이루었고 중흥한 임금보다 더 큰 업적을 이룬 데 대해서는 그 나타내는 호칭이 이미 재차 올린 16자의 존호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습니다. 어떻게 혼조(昏朝)에서 망령되이 덧붙인 칭호가 있고 나서 더 높아졌겠습니까.
신들이 《강목(綱目)》의 당 현종기(唐玄宗紀)를 상고해 보니, 천보(天寶) 8년에 그의 성조(聖祖)와 여러 황후의 시호를 더 붙였는데, 범씨(范氏)가 이르기를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武)의 왕들 시호는 오직 한 글자일 뿐이다. 이미 하늘을 일컬어 시호를 정하였으면 자손이라 하더라도 고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현종에게 이르러 비로소 옛날의 제도는 생각하지 않고 조종조의 당초 시호를 고쳤으므로 천보 이후에는 시호가 불어나고 중복되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게 되었다. 대저 조종이 참으로 세상에 높이 드러난 공적과 덕업이 있다면 문(文)이나 무(武)만 써도 족할 것이다. 대체로 효자 효손이 그의 어버이를 들추어 내고 싶어한다면 명실(名實)이 서로 맞아 지나치지 않게 하여 세상 사람들이 믿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없을 것이니, 시호가 번다하다고 귀하게 여긴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당의 전례(典禮)야말로 매우 불합리하다고 하겠다.’ 하였으니, 선유들이 정해 놓은 논리가 준엄하고도 바릅니다.
요사이 유신(儒臣)들이 차자를 올려 신주를 고쳐 쓰는 기회에 쓸데없는 문자를 지워 바루는 일까지 시행하여 부디 성조로 하여금 예에 맞지 않는 시호를 오래도록 받지 말게 하여야 한다고 청하고 있으니, 이 일을 대신과 의논하시는 것이 옳은 줄 압니다."
하였다. 영의정 윤방이 의논드리기를,
"혼조 때 올렸던 존호는 사실 스스로 덧붙이고 스스로 자랑하는 거사로서 간신들이 더럽힌 죄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반정했던 초기에 소급하여 시호를 고쳐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기에 일찍이 경연 석상에서 신이 이 논의를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만, 성상의 생각에는 지금에 와서 소급해 고치면 위엄을 삭감하는 것 같아 이 점을 미안케 여긴다고 하셨으므로 신이 굳이 청하지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지난번 신주를 고쳐 쓰는 일에 대해 의계(議啓)할 때, 신이 들은 바로는 당국자 외에도 이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다만 대단히 뒤바뀐 곳에 관해서만 상의했다 합니다. 지금 홍문관에서 올린 차자를 보건대, 말과 의리가 엄정하니, 속히 불합리한 시호를 삭제하여 한 시대의 이목을 새롭게 하소서. 그러나 이 일은 관계된 바가 중대하고 또 처리해야 할 몇 개의 조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개정한 후에는 전에 올렸던 옥책(玉冊)과 옥보(玉寶)를 그대로 보존할 것인가가 첫째이고, 의인·인목 왕후의 휘호도 의당 덜어 고쳐야 할 것인가가 둘째이고, 신주를 고쳐 쓸 때 종묘에 어떠한 말로 고유할 것인가가 셋째입니다. 이러한 몇 가지 사항을 반드시 충분히 강구하여 참으로 의리에 합당한가를 보고 나서 거행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였고, 좌의정 김류가 의논드리기를,
"예전의 시호는 하늘의 도리대로 군부(君父)를 받들 뿐이었습니다. 진실로 사사로운 욕심에서 실상에 맞지 않는 시호를 올렸다면 그 높이는 것이 바로 더럽히는 결과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지난 혼조에 있어서는 뭇 간흉들이 아첨하여 군주가 하고 싶은 것을 이루어 주기 위해서 선왕에게 휘호를 더 올린 것인데, 이는 천지에 드높고 군왕 중에 으뜸 가는 공적으로 하여금 도리어 간신이 거기에 붙어서 속임수를 부리는 발판이 되게 한 것이니, 하늘에까지 달한 죄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반정의 초기부터 이미 바로잡자는 논의가 있었지마는 사체가 중대한 관계로 지금까지 시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야말로 공론이 항상 몹시 한스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신이 삼가 고사를 살펴보건대, 한 헌제(漢獻帝) 때에는 효화(孝和) 이하의 넷의 묘효(廟號)를 덜어서 줄였고, 당 현종(唐玄宗) 때에는 고조(高祖)와 여러 제후(帝后)의 시호를 재차 더 올렸었습니다. 그 후에 이부 상서(吏部尙書) 안진경(顔眞卿)이 진언하기를 ‘상원(上元)025)   무렵에는 정사가 황후의 손에 있었으므로 비로소 조종조에서 정한 시호에다 더 시호를 올렸고 현종 말기에는 간신배가 권력을 잡아 11자까지 더 올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바라건대, 중종(中宗) 이상은 당초의 시호대로 쓰고 예종(睿宗) 이하는 나중에 올린 시호를 모두 지워서 문식(文飾)을 덜고 바탕을 숭상하며 명분을 바루고 근본을 도탑게 하소서.’ 하였는데, 그때 유학자들은 모두 안진경의 의논을 따랐으나 원참(袁傪) 혼자만 ‘능묘(陵廟)의 옥책(玉冊)과 목주(木主)를 죄다 이미 새겨 놓았으므로 경솔히 고칠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 일이 시행되지 않고 말았습니다. 그 후 주자(朱子)가 《강목(綱目)》을 편찬하면서 그 사실을 특필(特筆)하여 칭찬하였고, 선유가 풀이하기를 ‘다행히도 이러한 논의가 있었으나 끝내 덧붙인 시호를 삭제하지 못하고 말았으니 안타깝다.’고 하였습니다. 명신(名臣)의 논의가 이미 이와 같고 선유의 의논도 이미 정해졌으니, 예전에 올렸던 번독스러운 시호를 지금 개정해야지 그만둘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하였고,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이정구(李廷龜)가 의논드리기를,
"이 일은 죄다 간사한 신하가 속이고 더럽힌 잘못에서 발생한 것이기에 실로 공의(公議)가 항상 몹시 한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일찍이 반정의 초기에 경연의 신하가 이를 바로잡자는 의논을 한 적이 있었으나, 이미 올린 시호를 아무 까닭없이 삭제하는 것도 미안한 일이기 때문에 잠잠히 해두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신주를 고쳐 써야 할 때를 당하였으니 기회가 전과는 다릅니다. 경중을 참작하여 이 일을 처리하시는 것이 무방하겠습니다."
하였다. 예조가 의인 왕후와 인목 왕후 두 분의 휘호를 바루는 일과 옥책·옥보를 고쳐 만드는 일로 다시 대신과 상의할 것을 청하였다. 대신이 의논드리기를,
"의인 왕후의 존호에 대해서는 병진년026)  에 소급해 올린 ‘명덕(明德)’ 두 글자와 신유년027)  에 소급해 올린 ‘현숙(賢淑)’ 두 글자는 의당 선조 대왕에게 소급해 올린 병진년, 신유년의 존호와 함께 일체 삭제하여 바로잡아야겠으며, 인목 왕후는 병진년과 신유년에 원래 시호를 추숭한 적이 없었고 지금 쓰고 있는 시호는 모두 예에 따라 올린 존호이므로 삭제하여 바로잡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왕과 왕후의 옥책은 갑자년028)  의 변란 때 조각조각 파손되어 글자를 거의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였는데 겨우 거두어 모아서 궤에다 간직해 놓았으니, 이번에 옥보와 아울러 알맞은 장소에다 묻어 두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신주를 고쳐 쓸 때 종묘에 고유(告由)할 축사에 대해서는 다시 분명하게 지어내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그 뒤에 10월 8일 정묘에 선조 대왕과 의인 왕후의 종묘에 모신 신주를 고쳐 쓰면서 단지 예전의 시호만 남겨 두고 소급해 올렸던 존호는 모두 삭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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