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28권, 인조 11년 1633년 9월

싸라리리 2025. 12. 30.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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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경인

예조가 충효와 절의가 뛰어난 사람에게 시행한 상전(賞典)에 관해 올린 계목(啓目)으로 상이 하교하기를,
"상전(賞典) 중에 행실은 같은데 상이 다른 자가 있으니 다시 의논하여 아뢰라."
하니, 예조가 회계하기를,
"신들이 각도(各道)에서 보고한 문서를 모아 상고해 보니 정문(旌門) 상직(賞職) 복호(復戶) 상물(賞物)을 직질별로 나누어서 올릴 것은 올려 주고 내릴 것은 내려 주었습니다. 그 중에서 관속(官屬)과 군역(軍役)인 사람에게는 부역을 면제해 주는 것이 으뜸이고, 복호가 그 다음입니다. 하천배 가운데에 이렇게 뚜렷이 드러난 행실이 있는 자에게는 숭상하고 권장하는 상을 우선 이들에게 주어야 할 것이니, 이러한 유로 복호된 자에게는 특별히 부역을 면제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일 신묘

태백성이 나타났다.

 

찬수청이 아뢰기를,
"《광해군일기》 1백 86개월 동안의 사적을 이괄(李适)의 변란 때에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 후에 찬수청을 설치하여 《일기》를 편찬하면서 일반 여염(閭閻)에서 조보(朝報)나 장주(章奏)를 수집하고 당시에 귀와 눈으로 직접 보고 들었던 사실을 참고하여 겨우 두서를 이루었습니다. 그때에 1백 32개월 분은 이미 중초(中草)를 만들었고 54개월 분은 난초(亂草) 상태로서 미처 베껴 쓰지 못하였는데, 또 호란(胡亂)을 만나 갑작스레 찬수청을 철수했었습니다. 그 뒤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더 《일기》의 자료가 분실될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이미 계청(啓請)하여 찬수청을 설치해 지금 수정하고 있으니, 이것은 머지 않아 끝마치게 될 것입니다. 신의 처음 생각에는 중초를 다 베끼기를 기다려 사국(史局)에 간직해 두었다가 사세를 보아 가면서 인쇄해 내려고 하였습니다. 논의한 자들이 대부분 ‘간신히 모아 놓았는데 초안만 잡아 놓으면 뜻밖에 재앙이 생길 염려가 없지 않으니 찬수청을 설치한 이 기회에 기한을 정하여 인쇄해 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고 하는데, 이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빠른 시일 내에 인쇄하여 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9월 3일 임진

전라도의 나주(羅州) 등 21개 고을에 홍수가 났다.

 

9월 4일 계사

상이 암행 어사 이상질(李尙質)·임광(任絖)·윤효영(尹孝永)을 함경도·평안도·강원도 등지에 파견하였다.

 

이식(李植)을 부제학으로, 정광경(鄭廣敬)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9월 6일 을미

태백성이 나타났다. 달이 심성(心星)의 큰 별과 뒷별 사이로 들어갔다.

 

상이 초서피(貂鼠皮)로 된 이엄(耳掩)을 모든 관원에게 하사하라고 분부하였다. 호조가 경비가 전혀 없으니, 풍년이 든 해를 기다렸다가 그때에 가서 시행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대신이 해조가 청한 대로 들어주기를 청하자, 상이 따랐다.

 

9월 7일 병신

태백성이 나타났다.

 

강원도의 춘천(春川) 등 7개 고을과 경상도의 안동(安東) 등 6개 고을에 일찍 서리가 내렸다.

 

9월 10일 기해

태백성이 나타났다.

 

9월 11일 경자

사헌부가 아뢰기를,
"고 판서 권반(權盼)이 일을 정미롭고 자상하게 잘 처리하고 나랏일에 마음을 다하였다는 것은 온 조정이 칭찬하는 바입니다. 그가 일찍이 공청도 감사로 있을 때 도내에 부역이 많고 힘겨운 것을 목격하고는 경중을 헤아려서 공안(貢案)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공청도의 백성들이 하루바삐 시행하기만을 학수 고대하고 있는데도 시일을 오래 끌어 지금까지 시행하지 않고 있으니 오늘날의 흠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남(三南) 가운데 본도의 백성은 부역이 너무나 심하여 재물과 민력이 고갈되어 서로 근심과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재앙을 만나 두려워해야 할 때를 당해서 필부(匹夫)가 호소하더라도 오히려 염려하는 마음이 들 것인데 더구나 온 도민이 호소하고 있으니,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비단 백성들이 오래 전부터 갈망할 뿐만 아니라, 각사(各司)의 하인배도 다 시행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대동법(大同法)은 모든 도에 시행하지 못하더라도 한 지방에서는 시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들이 들으니 상정(詳定)하여 만든 책을 본도의 감영(監營)에 간직해 두었다 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이에 비국이 아뢰기를,
"신들이 고 판서 권반이 상정한 공안을 자세히 살펴 보니, 참으로 이것을 시행한다면 우선 백성들에게 유익한 점이 적지 않아서 대동법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동법을 경솔히 의논하지 못할 바에야 우선 이 법을 실시해서 백성의 피해를 더는 것이 실로 편리하고 마땅하겠습니다. 그러나 법규를 처음 제정할 때에 만일 충분히 살피고 신중히 하지 않았다가 실시할 때 구애되어 불편한 점이라도 있게 된다면 역시 매우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본사 당상 중에 김신국(金藎國)과 김기종(金起宗)은 가장 시무(時務)에 익숙하고 단련되었는데, 김신국은 일찍이 호조 판서를 지냈고 김기종은 현임(現任) 호조 판서로서 선혜청 당상관(宣惠廳堂上官)을 겸임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본도 감사와 서로 의논하여 다시 권반이 상정한 법을 가지고 일일이 검토해서 그것을 꼭 시행할 수 있는가를 알아보게 한 다음에 실시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3일 임인

박황(朴潢)을 사간으로, 정태화(鄭太和)를 헌납으로 삼았다.

 

9월 15일 갑진

태백성이 나타났다.

 

경기의 강화부(江華府)와 통진현(通津縣)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이해창(李海昌)을 정언으로 삼았다.

 

9월 19일 무신

상이 영의정과 좌의정에게 복상(卜相)하라고 분부하였다. 원임(原任)인 오윤겸을 의정부 좌의정으로, 좌의정 김류를 낮추어 우의정으로 삼았다.

 

9월 20일 기유

사간원이 아뢰기를,
"역사를 편찬하는 곳은 매우 엄하고도 은밀해야 하므로 외부 사람이 함부로 드나들 데가 아니며 또 외부 사람을 절대 초빙할 곳이 아닌데도 지난번에 수찬관 이명한(李明漢)·이식(李植)·정백창(鄭百昌) 등이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과 함께 여기에서 모여 술을 실컷 마셨습니다. 모두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2일 신해

태백성이 나타났다.

 

9월 23일 임자

태백성이 나타났다.

 

금차(金差) 용골대(龍骨大)·이수(伊愁)·강가태(姜加太)가 수행인 93명과 노새와 말 1백 70여 필을 거느리고 와서는 만포(滿浦)에서 인삼 캐는 사람을 잡아 데리고 돌아가기 위해 왔다면서 돌아갈 때 먹을 양식을 요구하였는데, 의주로 하여금 쌀 5곡(斛)과 소 한 마리를 주라고 하였다.

 

9월 25일 갑인

가도의 천총(千摠) 하국주(夏國柱)가 자기집 장정 80여 명을 거느리고 상원현(祥原縣)에 도착하여 갑작스레 민가로 들어가 재물과 가축을 약탈하면서 주민들을 때려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현감 김적(金迪)이 달려가 이를 금지시키자 하국주가 성이 나 그 졸개들을 풀어 활을 쏘기도 하고 칼을 빼들며 그를 앞으로 나서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타고 있던 말까지 약탈하고 또 민가의 마소를 빼앗아 갔다.

 

9월 27일 병진

태백성이 나타났다.

 

비국이 아뢰기를,
"삼가 외방(外方)의 말을 듣건대, 재해를 더욱 심하게 입은 곳은 곡식 한 포기도 수확하지 못했고 기타 약간 풍작이라고 한 곳도 모두 태반이나 손실되었다 하니, 참으로 매우 걱정이 됩니다. 근래에 전쟁을 치른 후라서 국가에 일이 많습니다. 군사를 훈련시키고 군량을 장만하고 무기를 만들어 내는 등등의 일은 참으로 중지할 수 없습니다마는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는 점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신들의 생각에는 담당자가 아직 걷지 못한 작미(作米)와 경아문(京衙門)에서 군기를 주조하는 일 및 각도의 매월 부과하는 군기를 명년 추수 때까지 기한을 물려주고 우선은 정지하게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러나 경아문에서 군기를 주조하는 일에 있어서는 대단한 민폐(民弊)는 없을 것 같다."
하였다.

 

강석기(姜碩期)를 대사헌으로, 최연(崔葕)을 사간으로 삼았다.

 

황해 감사 오숙(吳䎘)이 흥의참(興義站)을 다시 설치해서 우봉현(牛峯縣)으로 하여금 예전대로 나가서 접대하게 할 것을 청하니, 조정이 따랐다.

 

9월 30일 기미

크게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쳤으며 천지가 어두워졌다.

 

상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금국의 사신 용골대·이수·강가태 등을 불러 접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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